蓋鹵王
蓋鹵王(或云近蓋婁) 諱慶司 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 薨 嗣.
개로왕(혹운근개루) 휘경사. 비유왕지장자 비유재위이십구년 훙 사.
개로왕(蓋鹵王 혹은 근개루 近蓋婁)의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십사년 동시월계유삭 일유식지.
14년(서기 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 戍之.
십오년 추팔월 견장침고구려남비. 동시월 집쌍현성 설대책어청목령 분북한산성사졸 수지.
15년(서기 469)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장수와 병졸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協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십팔년 견사조위 상표왈 “신립국동극 시랑격로 수세승령화 막유봉번. 첨망운궐 치정망극 략풍미응 복유황제폐하 협화천휴 불승계앙지정. 근견사서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여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장수등 투주파조 수경현진 탁명자연지운 견진만일지성. 익신기수감 황령홍복 극달천정 선창신지 수단문석몰 영무여한.”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임금이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의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냅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전할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우운 신여고구려 원출부여 선세지시 독숭구관 기조쇠 경폐린호 친솔사중 릉천신경. 신조수정여전매응기치격 시석잠교 효참쇠수. 자이이래 막감남고 자풍씨수종 여신분찬 추류점성 수견릉핍. 구원연화 삼십여재 재탄역갈 전자잔적. 약천자곡긍 원급무외 속견일장 래구신국 당봉송비녀 집소후궁 병견자제 목위외구 척양필부 불감자유.
표문에서 또 말하였다. “신과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게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 근구수왕)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연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그의 잔당들이 도망쳐온 이후로 고구려가 차츰 번성해, 드디어 백제가 업신여김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마음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지아비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効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詈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우운 금연유죄 국자어육 대신강족 참살무이 죄영악적 민서붕리 시멸망지기 가수지추야. 차풍족사마 유조축지연 낙랑제군 회수구지심 천위일거 유정무전. 신수불민 지효필력 당솔소통승풍향응. 차고구려불의 역사지일 외모외효번비지사 내회흉화시돌지행 혹남통유씨 혹북약연연 공상순치 모릉왕약. 석당요지성 치벌잔수 맹상칭인 불사도리. 연류지수 의조옹색 금약불취장이후회.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끊임이 없습니다. 죄악은 넘쳐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병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싸움이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힘을 다하여 우리 병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간계를 꾸미는 일이 하나가 아니니, 겉으로는 외효(隗囂: 중국 후한 초기 군웅의 한 사람)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하고 무모한 행동을 품고, 혹은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송나라)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 4-6세기 몽고 한 부족)과 맹약을 맺어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여 폐하의 정책에 배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堯)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묘를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일컬었지만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의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법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빼앗지 아니한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並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 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况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 跨塞天逵 今上所得鞍一以實驗.”
거경진년후 신서계소석산북국해중 견시십여 병득의기안륵 시지 비고구려지물. 후문 내시왕인래강신국 장사격로 이침우해. 수미위당 심회분에. 석송륙신주 초장주선 요촬방구 신릉불식. 극적입명 미융무이. 부이구구편비 유모만대지신 황폐하합기천지 세경산해 이령소수 궤새천규 금상소득안일이실험.”
지난 경진(庚辰)년(서기 440) 후에 우리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小石山)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ㆍ기물ㆍ안장ㆍ굴레를 얻어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분한 마음을 깊게 품었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 장왕(莊王)이 맨발로 걸었고,6)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변방의 소국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운을 모으고, 형세가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하십니까? 지금, 얻었던 말 안장 하나를 바쳐 실제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甚善.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 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讎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현조이기피원모험조헌 예우우후 견사자소안 여기사구환. 조왈 “득표문지 무양심선. 경재동우처오복지외 불원산해 귀성위궐 흔가지의 용즙우화. 짐승만세지업 군임사해 통어군생 금우내청일 팔표귀의 강부이지자 불가칭수. 풍속지화 사마지성 개여예등 친소문견. 경여고구려불목루치능범 구능순의 수지이인 역하우어구수야? 전소견사 부해이무황외지국 종해적년 왕이불반 존망달부 미능심실 경소송안. 비교구승 비중국지물. 불가이의사지사 이생필연지솨 경략권요 이구별지.”
현조(顯祖, 위나라 효문제)가 백제의 사신이 멀고 외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예우를 후하게 하고, 사신 소안(邵安)으로 하여금 그들을 함께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칙을 내려 말하였다. “표를 받고 근심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5복(五服)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다 하지 않고 위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둔다.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이어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나라는 태평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 헤아릴 수 없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병사는 그대 사신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진실로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도둑과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는데,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말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았는데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이 되는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 침범 계획의 요지는 별지에 갖추어져 있다.”
又詔曰 “知 高句麗阻疆 侵軼卿土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우조왈지 고구려조강 침일경사 수선순지구원 기식민지대덕 병교누재 난결황변 사겸신서지성 국유초월지금.
또한 조서에서 말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 고국원왕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져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신은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 월과 같은 위급한 사정이 되었다.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 雖有自昔之釁 於國 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내응전의브미 승기전거. 단이고구려칭번선조 공직일구. 어피 수유자석지흔 어국 미유범령지건. 경사명시통 변구치벌 심토사회 리적미주 고왕년견례등지평양 역험기유상. 연고구려진청빈번 사리구지 행인불능억지청 사법무이성기책 고청시소계 조예등환.
이에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선대로부터 속국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대와 고구려에 비록 예전부터 틈이 있으나, 위나라의 명령을 어긴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사신을 보내와 처음으로 그들을 토벌하기를 요청하나, 사리를 검토해보니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과 이치가 모두 온당하니 사신이 그들의 청을 막을 수 없었고 사법에서도 그들에게 죄를 줄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주고 예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若今復違旨 則過咎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戢則保境. 故覊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况乖衷.
약금복위지 즉과계익로 후수자진 무소도죄. 연후흥사토지 어의위득 구이지국 세거해외 도창즉봉번 혜즙즉보경. 고기미조오전존 고동광어세시. 경비진강약지형 구열왕대지역 속수사이 의황괴충.
만약 고구려가 지금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지난 잘못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 연후에는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그치면 자기의 영토를 보전하여 왔다. 그러므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나타나 있으며, 호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치는 일은 한 절기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행적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속 마음에 맞지 않는다.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 高句麗卽叙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홍규대략 기치유쟈 금중하평일 우내무우. 매욕능위동극 현정역표 증황려어편방 서황풍어원복 양유 고구려즉서 미급복정. 금약부종조지 즉경지래모 재협짐의 원융계행 장불운원.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 중국은 통일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늘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떨치려고 하나, 진실로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정벌을 꾀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만일 고구려가 나의 조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대병의 출동이 멀다고는 할 수 없다.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幅.
변가예솔동흥 구이대사 시견보사 속구피정 사거지일 경위향도지수 대첩지후 우수원공지상 불역선로 소헌금포해물 수불실달 명경지심 슴사잡물여별폭.”
아무쪼록 그대는 미리 준비하여 함께 병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대기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저쪽의 정세를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병사를 일으키는 날 그대가 길잡이의 선두가 될 것이고, 크게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정성은 드러났다. 지금 여러 가지 물품을 별지와 같이 하사한다.”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讎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우조연호송안등 안등지고구려 연친석여여경유수 불령동과 안등어시개환. 내하조절책지 후사안등 종동래부해 사여경새서 포기성절 안등지해빈 우풍표탕 결불잘이환 왕이여인누범변비 상표걸사어위 불종 왕원지 수절조공.
또한 고구려왕 연(璉, 장수왕)에게 조서를 보내 안(安, 위나라 관리) 등을 보호하여 백제로 보내도록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餘慶, 개로왕)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가니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임금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이십일년 추구월 여왕신연수병삼만 래위왕도한성 왕폐성문불능출전 여인분병위사도 협공 우승풍종화 분소성문 인심위구 혹유욕출항자 왕군부지소도 영수십기 출문서주 여인추이해지.
21년(서기 475)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병사를 네 방면의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임금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병사가 추격하여 임금을 살해하였다.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선시 고구려장수왕 음모백제 구가이간첩어피자. 시 부도도림응모왈 “우승기불능지도 사유이보국은 원대왕불이신불초 지사지 기불욕명.”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은밀히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간첩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 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好博弈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 爲上客 甚親昵之 恨相見之晩.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
왕열 필사휼백제 어시 도림양도죄 분입백제. 시 백제왕근갸루호박혁. 도림지왕문 고왈 “신소이학기 파입묘 원유문어좌우 왕소입대기 과국수야. 수존지 위상객 심친닐지 한상견지만 도림일일시좌 종용왈 신이국인야
장수왕이 기뻐하여 몰래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것처럼 하고 백제로 들어갔다.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궁궐 문에 이르러 말하였다. “제가 젊어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를 알고 있으니 왕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임금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임금은 마침내 그를 상객(上客, 상좌에 모실 만큼 중요하고 지위가 높은 손님을 이름)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지내며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임금을 모시고 앉아서 조용히 말하였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도 왕께서 저를 멀리 하지 않으시고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는데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 四鄰之國 莫敢有覦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竦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攢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
왕왈 “제언지 약유리어국 차소망어사야.” 도림왈 “대왕지국 사방개산구하해 시천설지럼 비인위지형야. 시이 사린지국 막감유심 단원봉사지불가 즉왕당이숭조지세 국유지업 송인지시청이성곽불집 궁실불수 선왕자해골 권찬어노지 백성지옥려 누괴어하류 신절위대왕불취야.”
임금이 말하였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구릉과 강과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만든 형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받들어 섬기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업적으로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을 수축하지 않고 궁궐을 수리하지 않습니다.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가옥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지니, 저는 대왕을 위해 이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王曰 “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 作宮樓閣臺榭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 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陧杌 甚於累卵.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왕왈 “락 오장위지.” 어시 진발국인 승토축성 즉어기내 작궁누각대사 무불장려 우취대석어욱리하 작곽이장부골 연하수언 자사성지동 지숭산지북. 시이 창유허갈 인민궁곤 방지일울 심어누란. 어시 도림도환이고지 장수왕희 장벌지 내수병어수신.
임금이 말하였다. “알겠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겠다.” 이에 임금은 백성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과 누각과 대사(臺榭:정자)를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 백제시대 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 지내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병사를 나누어 주었다.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盍避難以續國系焉.”
근개루문지 위자문주왈 “여우이불명 신용간인지언 이지어차 민잔이병약 수유위사 수긍위아력전 오당사어사직 여재차구사 무익야 합피난이속국계언.”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겠지만 네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木劦祖彌 皆複姓 隋書 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문주내여목협만치조이걸취-목협조이 개복성 수서 이목협위이성 미지숙시- 남행언.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 조미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과 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尒萬年-再曾古尒 皆複姓- 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 已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지시 고구려댜로재유재증걸루고이만년-재증고이 개복성- 등수병 래공북성 칠일이발지. 이공남성 성중위공 왕출도 여장걸루능견왕하마배 이향왕면삼타지 내수지죄 박송어아차성하장지걸루만년 본국인야 획죄도찬고구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 고이는 모두 두 자 성이다.-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병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졌다. 임금은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論曰 楚昭王之亡也 鄖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辛曰 “君討臣 誰敢讎之 君命 天也 若死天命 將誰讎.”
논왈 초소왕지망야 운송신지제회 장시왕왈 “평왕살오부 아살기지 불역가호?” 신왈 “군토신 수감수지 군명 천야. 약사천명 장수수.”
사관이 논평한다. 초나라 소왕(昭王)이 운(鄖) 땅으로 도망갔을 때, 운공 신(辛)의 아우 회(懷)가 소왕을 죽이려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초나라 소왕의 아버지)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형 신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죽이는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니, 만약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삼겠는가?”
桀婁等 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 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郢鞭尸 何也?” 曰 楊子法言 評此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矣 則子胥之狠 不如鄖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걸루등 자이죄불현용어국 이도적병 박전군이해지 기불의야 심야. 왈 연즉오사저지입영편시하야? 왈 양자법언 평차이위불유덕. 소위덕자 인여의이이의 즉사서지랑 불여운공지인 이차논지 걸루등지위불의야 명의.
걸루 등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나라에서 용서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적병을 인도하여 예전의 임금을 포박하여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정도가 심했다. 혹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오자서(伍子胥)가 초나라 서울 영(郢) 땅에 들어가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것은 어떠한가?”라고 말할 것이다. 양자(楊子)의 『법언(法言)』에 이를 평하기를 ‘오자서의 행위는 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니, 오자서의 잔인함이 운공의 어진 행위만 못하다. 이로써 논평한다면 걸루 등이 옳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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