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斤王
三斤王[或云壬乞] 文周王之長子. 王薨 繼位 年十三歲 軍國政事 一切委於佐平解仇.
삼근왕(혹운임을) 문주왕지장자. 왕훙 계위 년십삼세 군국정사 일체위어좌평해구.
삼근왕(三斤王 혹은 임걸壬乞)은 문주왕(文周王)의 맏아들이다.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13세여서 병사 임무와 정치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津市.
이년 춘 좌평해구여은솔연신취중 거대두성반. 왕명좌평진남이병이천토지 불극. 경명덕솔진노수정병오백 격살해구 연신분고구려 수지처자 점어웅진시.
2년(서기 478)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大豆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병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여 해구를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잡아 웅진(熊津)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論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 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立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 漸矣 唐憲宗之弑 三世而後 僅能殺其賊 况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 又烏足道哉.
논왈 춘추지법 군시이적불토 즉심책지 이위무신자야. 해구적해문주 기자삼근계립 비도불능주지 우위지이국정 지어거일성이반 연후재흥대병이극지 소위복상불계 순치견빙 형형불멸 지우염염 기소유래 점의. 당헌종지시 삼세이후 근능살기적 황해우지오황벽 삼슨지동몽 우오족도재.
사관이 논평한다. 『춘추(春秋)』의 논법에서는 임금이 살해당했는데도 그 역적을 치지 않으면 이를 엄하게 꾸짖어 이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하였는데 그의 아들 삼근이 왕위를 잇고서 해구를 죽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를 그에게 맡겼다. 해구가 한 성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 후에야 두 번이나 대병을 일으켜 그를 이겼으니, 이는 이른바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으면 굳은 얼음이 이르고, 조그만 불씨를 끄지 않으면 타오르는 불에 이른다.’는 격이니, 그 말미암은 바가 점차로 크게 변하는 것이다. 당 헌종(憲宗)이 살해되었을 때도 3대 이후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였으니, 하물며 바다 모퉁이에 있는 궁벽한 땅의 삼근과 같은 어린 아이에 있어서 또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三月己酉朔 日有食之.
삼월을유삭 일유식지.
3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夏大旱.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冬十一月 王薨.
삼년 춘하대한. 추구월 이대두성어두곡. 동십일월 왕훙.
3년(서기 479),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斗谷)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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