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寧王
武寧王 諱斯摩(或云隆) 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畵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무령왕 휘사마(혹운융) 모대왕지제이자야. 신장팔척 미목여화 인자관후 민심귀부 모대왕재위이십삼년훙 즉위.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은 사마(斯摩 혹 융 隆)이니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린 듯 했고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시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春正月 佐平苩加 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춘정월 좌평백가 거가림성반 왕수병마 지우두성 명한솔해명토지. 백가출항 왕참지 투어백강.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 해명(解明)을 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임금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 금강)에 던졌다.
論曰 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苩加之元惡大憝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
논왈 춘추왈 인신무장 장이필주 약백가지원악대대 즉천지소불용 불즉죄지 지시자지난면 모반이후주지 만야.
사관이 논평한다. 『춘추(春秋)』에는 ‘신하된 자는 군주를 넘보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君親無將 將而必誅)고 기록되어 있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악인은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자인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이때에 와서 자기가 스스로 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처단하였으니, 때는 늦은 것이다.
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동십일월 견달솔우영 수병오천 습고구려수곡성.
겨울 11월,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二年 春 民饑且疫.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境.
이년 춘 민기차역. 동십일월 견병침고구려변경.
2년(서기 502) 봄, 백성들이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 병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삼년 추구월 말갈소마수책 진공고목성 왕견병오천 격퇴지 동무빙.
3년(서기 503) 가을 9월, 말갈이 마수(馬首) 목책을 불사르고 고목성(高木城)으로 공격하여 오자 임금이 병사 5천 명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겨울, 물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大疫 三月至五月 不雨 川澤竭 民饑 發倉賑救. 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육년 춘대역 삼월지오일 불우 천택갈 민기 발창진구. 추칠월 말갈래침 파고목성 살노육백여인.
6년(서기 506) 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내와 연못이 말랐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가을 7월, 말갈이 침범하여 고목성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칠년 하오월 입이책어고목성남 우출장령성 이비말갈. 동시월 고구려장고노여말갈모 욕공한성진둔어횡악하 왕출사 전퇴지.
7년(서기 507)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횡악 아래에 와서 주둔하니 임금이 군대를 내어 싸워서 그들을 물리쳤다.
十年 春正月 下令 完固隄防 驅內外游食者 歸農.
십년 춘정월 하령 완고제방 우내외우식자 귀농.
10년(서기 510) 봄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중앙과 지방의 놀고 먹는 자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
十二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秋九月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 殺掠甚衆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少 易之 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십이년 하사월 견사입양조공. 추구월 고구려습취가불성 이병파원산성 살략심중 왕수용기삼천전어위천지북. 여인견왕군소 이지 불설진 왕출기급격 대파지.
12년(서기 512) 여름 4월,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병사를 이동하여 원산성(圓山城)을 깨뜨렸으며, 죽이거나 노략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 북쪽에 나가 싸웠다. 고구려 병사들이 임금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만만하게 여겨 진을 치지 않았다. 임금이 기묘한 작전을 내어 기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十六年 春三月戊辰朔 日有食之.
십육년 춘삼월무진삭 일유식지.
16년(서기 516) 봄 3월, 초하루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穀 民饑 亡入新羅者 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 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 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迺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이십이년 하오월 대수. 추팔월 황해곡 민기 망입신라자 구백호. 동십일월 견사입양조공 선시위고구려소파 쇠약누년 지시상표 칭 누파고구려 시여통호 이경위강국. 십이월 고조조책왕 왈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여륭 수번해외 원수공직 내성관도 짐유가언. 의솔구장 수자영명 가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
21년(서기 521) 여름 5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9백 호였다.
겨울 11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나라가 쇠약해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표문을 올려서 일컫기를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12월, 양 고조(高祖)가 조서를 보내 임금을 책봉하여 말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여륭(餘隆)은 바다 밖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고, 그 정성이 지극함에 이르니 짐은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예로운 책명을 수여하여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으로 삼는다.”
二十二年 秋九月 王獵于狐山之原. 冬十月 地震.
이십이년 추구월 왕엽우호산지원. 동시월 지진.
22년(서기 522) 가을 9월, 임금이 호산(狐山)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 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月 王薨 諡曰武寧.
이십삼년 춘이월 왕행한성 명좌평인우 달솔사오등 징한북주군민연십오세이상 축쌍현성. 삼월 지자한성. 하오월 왕훙 시왈무령.
23년(서기 523) 봄 2월, 임금이 한성(漢城)으로 행차하여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을 시켜 한수 이북 주와 군에서 15세 이상 된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도록 하였다.
3월, 임금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령(武寧)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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