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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近肖古王


近肖古王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契王薨 繼位.

근초고왕 비류왕제이자야 체모기위 유원식 계왕훙 계위.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계왕이 돌아가시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祭天地神祇.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狠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이년 춘정월 제천지신기. 배진정위보정좌평. 정왕후친척 성랑려불인 임사가세 시세자용 국인질지.

 

2(서기 347) 봄 정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까다롭고,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聘新羅.

이십일년 춘삼월 견사빙신라.

 

21(서기 366) 3,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二十三年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이십삼년 춘삼월정사삭 일유식지 견사신라 송양마이필.

 

23(서기 368) 3,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이십사년 추구월 고구려왕사유수보기이만 래둔치양 분병침탈민호. 왕견태자 이병경지치양 급격파지 획오천여급 기여획분사장사. 동십일월 대열어한수남 기치개용황.

 

24(서기 369) 가을 9, 고구려왕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병사를 풀어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태자에게 병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移都漢山.

이십육년 고구려거병래 왕문지 복병어패하상 준기지 급격지 고구려병패배. 동 왕여태자수정병삼만 침고구려 공평양성. 고려왕사유 역전거지 중류시사. 왕인군랑이도한산.

 

26(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二十七年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地震.

이십칠년 춘정월 견사입진조공. 추칠월 지진.

 

27(서기 372) 봄 정월,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 지진이 났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 奔新羅.

이십팔년 춘이월 견사입진조공. 추칠월 축성어청목령 독산성주솔삼백인 분신라.

 

28(서기 373) 2,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冬十一月 王薨.

삼십년 추칠월 고구려래공북비수곡성 함지. 왕견장거지 불극. 왕우장대거병보지 이년황불과. 동십일년 왕훙.

 

30(서기 375) 가을 7,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겨울 11, 임금이 돌아가셨다.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 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고기운 백제개국이래 미유이문자기사 지시 득박사고흥 시유 서기 연고흥미상현어타서 부지기하허인야.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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