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順王
敬順王立 諱傅 文聖大王之裔孫 孝宗伊飡之子也. 母桂娥太后 爲甄萱所擧卽位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경순왕립 휘부 문성대와지예손 효종이찬지자야. 모계아태후. 위견훤소거즉위 거전왕시 빈어서당, 여군하통곡 상시왈경애 장남산해목령 태조견사조제.
경순왕(敬順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桂娥太后)로 견훤의 거사로 왕위에 올랐다. 전 임금님의 시신을 옮겨 서쪽 대청에 빈소를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元年 十一月 追尊考爲神興大王 母爲王太后. 十二月 甄萱侵大木郡 燒盡田野積聚
원년 십일월 추존고위신흥대왕 모위왕태후. 십이월 견훤침대목군 소진전야적취.
원년(서기 927) 11월, 임금의 아버지를 신흥대왕(神興大王),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大木郡)에 침입하여 밭과 들에 쌓아 놓은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二年 春正月 高麗將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 六月 地震. 秋八月 甄萱命將軍官昕 築城於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率兵擊走之 甄萱進屯於大耶城下 分遣軍士 芟取大木郡禾稼. 冬十月 甄萱攻陷武谷城.
이년 춘정월 고려장김상여초팔성적흥종전 불극사지. 하오월 강주장군유문 항어견훤. 우월 지진. 추팔월 견훤명장군관흔 축성어양성 태조명명지성장군왕충 솔병격주지 견훤진둔어대야성하 분견군사 삼취대목군화가. 동시월 견훤공함무곡성.
2년(서기 928) 봄 정월, 고려 장수 김상(金相)이 초팔성(草八城)의 도적 흥종(興宗)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름 5월, 강주(康州) 장군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니, 고려 태조가 명지성(命旨城)의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나누어 보내 대목군의 벼와 곡식을 베어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三年 夏六月 天竺國三藏摩睺羅抵高麗. 秋七月 甄萱攻義城府城 高麗將洪述出戰 不克死之.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功 宥之 但改順州爲縣. 冬十月 甄萱圍加恩縣 不克而歸.
삼년 항월 천축국삼장마후라저고려. 추칠월 견훤공의성부성 고려장홍술출전 불극사지. 순주장군원봉 항어견훤 태조문지노 연이원봉전공 유지 단개순주위현. 동시월 견훤위가은현 불극이귀.
3년(서기 929) 여름 6월, 천축국(天竺國)의 삼장(三藏) 마후라(摩睺羅)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義城府城)을 공격하자, 고려 장수 홍술(洪述)이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순주(順州) 장군 원봉(元逢)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었으나 원봉의 지난 공적으로 용서하고, 단지 순주를 현(縣)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加恩縣, 경북 문경)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尙父. 初 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導之 至是降也 念其有功且老 故寵褒之. 太祖與甄萱戰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 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二月 太祖遣使告捷 王報聘兼請相會. 秋九月 國東沿海州郡部落 盡降於太祖.
사년 춘정월 재암성장군선필항고려 태조후례대지 칭위상보. 초 태조장통호신라 선필인도지, 지시항야 염기유공차노 고총포지 태조여견훤전고창군병산지하 대첩 살노심중 기영안하곡지 명송생등삼십여군현 상차항어태조. 이월 태조견사고첩 왕보빙겸청상회. 추구월 국동연해주군부락 진항어태조.
4년(서기 930) 봄 정월, 재암성(載巖城)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하게 예로 대우하고 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항복하자,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생각하여 은총을 베풀고 칭찬한 것이다.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 병산(甁山)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임금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쪽 바다 연안의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通謁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寖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無不嗚咽 太祖亦流涕慰藉 "
오년 춘이월 태조솔오십여기 지경기통알 왕여백관교영 입궁상대 곡진정례 치연어임해전 추감 왕언왈 "오이불천 침치화란 견훤자행불의 상아국가 하통여지 인현연체읍 좌우무불명연 태조역류체위자."
5년(서기 931) 봄 2월, 고려 태조가 5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서울 근방에 와서 임금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와서 마주 대하였다. 정성으로 예우를 극진히 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의롭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으리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因留數旬廻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 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秋八月 太祖遣使 遺王以錦彩鞍馬 幷賜群僚將士布帛 有差.
인유수순회가 왕송지혈성 이당제유렴위질 수가언. 태조휘하군사숙정 불범추호 도인사여상경왈 “석견씨지래야 여봉시호 금왕공지지야 여견부모” 추팔월 태조견사 유왕이급채안마 병사군료장사포백 유차.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을 머물다가 돌아가자 임금이 혈성(穴城)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사촌동생 유렴(裕廉)을 볼모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엄숙하고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규율을 범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호랑이나 이리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었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베와 비단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六年 春正月 地震. 夏四月 遣使執事侍郞金昢 副使司賓卿李儒 入唐朝貢
육년 춘정월 지진. 하사월 견사집사시랑김불 부사사빈경이유 입당조공.
6년(서기 932)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시랑(執事侍郞) 김불(金昢), 부사로 사빈경(司賓卿) 이유(李儒)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唐明宗遣使高麗 錫命.
칠년 당명종견사고려 사명.
7년(서기 933), 당 명종(明宗)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八年 秋九月 老人星見 運州界三十餘郡縣降於太祖.
팔년 추구월 노인성견 운주계삼십여군현항어태조.
8년(서기 934) 가을 9월,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운주(運州)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구년 동시월 왕이사방토지 진위타유 국약세고 불능자안 내여준하모 거토항태조 군신지의 혹이위가 혹이위불가.
9년(서기 935) 겨울 10월, 임금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고립되어서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없겠다고 여겼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하들은 그러자는 측과 그러지 말자는 측도 있었다.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왕자왈 국지존망 필유천명 지합여충신의사 수합민심 자고역진이후이 기의이일천년사직 일단경이여인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왕왈 고위약차 세불능전 기불능강 우불능약 지사무고지민 간뇌도지 오소불는인야.
임금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않아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땅에 뿌려지는 것은 내 차마 견딜수 없다.”
乃使侍郞金封休 齎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내사시랑깁봉휴 재서청항어태조 왕자곡읍사왕 경귀개골산 의암위옥 마의초식 이종기신.
곧 시랑 김봉휴(金封休)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임금에게 허락을 구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十一月 太祖受王書 送大相王鐵等迎之.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丞公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십일월 태조수왕서 송대상왕철등영지 왕솔백료 발자왕도 귀우태조 향거보마 연긍삼깁여리 도로전연 관자여도. 태조출교영노 사궁동갑제일구 이장녀낙랑공주처지. 십이월 봉위정승공 위재태자지상 급록일천석 시종원장 개녹용지 개신라위경주 이위공지식읍.
11월, 고려 태조가 임금의 편지를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임금을 영접하게 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처럼 들러섰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임금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을 주고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임금을 정승공(正丞公)으로 삼아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섬을 주고, 따르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고쳐서 경주(慶州)라 하고, 이를 정승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初 新羅之降也 太祖甚喜 旣待之以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昏於宗室 以永甥舅之好.”
초 신라지항야 태조심희 기대지이후례 사고왈 금왕이국여과인 기위사대의 원결혼어종실 이영생구지호.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고려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그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원컨대 종실과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좋은 관계를 영원히 하고자 합니다.”
答曰 “我伯父億廉匝干 知大耶郡事 其女子德容雙美 非是 無以備內政.”
답왈 아백부억렴잡간 지대야군사 기여자덕용쌍미 비시 무이비내정.
임금이 대답하였다. “나의 큰 아버지 잡간 억렴(億廉)이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이 있고 용모도 아름다우니, 이 사람 외에는 집안일을 책임질만한 자가 없습니다.”
太祖遂取之生子 是顯宗之考 追封爲安宗 至景宗獻和大王 聘正承公女 納爲王妃 仍封正承公爲尙父令 公至大宋興國四年戊寅 薨 諡曰敬順(一云孝哀).
태조수취생자 시현종지고 추봉위안종 지경종헌화대왕 빙정승공녀 납위왕비 잉봉정승공위상보령 공지대송흥국사년무인 훙 시왈경순(일운효애).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현종(顯宗)의 아버지로서, 안종(安宗)으로 추봉된 사람이다. 경종헌화대왕(景宗獻和大王)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尙父令)으로 삼아 봉하였다. 정승공이 송나라 흥국(興國) 4년(서기 978) 무인에 이르러 돌아가시니, 시호를 경순(敬順=孝哀)라고도 한다.
國人自始祖至此 分爲三代 自初至眞德二十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국인자시조지차 분위삼대 자초지진덕이십팔왕 위지상대 자무열지혜공팔왕 위지중대 자선덕지경순이십왕위지하대운.
나라 사람들이 시조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3대로 나누니, 처음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中代)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下代)라고 하였다.
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 輔行.
논왈 신라박씨석씨자란생 김씨종천입금궤이강 혹운승금거 차우궤괴불가신 연세속상전 위지실사 정화중 아조견상서이자량 입송조공 신부식이문한지임 보행.
사관이 논평하길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氏)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金氏)는 금궤 안에 든 채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政和)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臣) 김부식(金富軾)은 글 쓰는 임무로 보좌하여 가게 되었다.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지우신관 견일당설여선상 관반학사왕보왈 “차귀국지신 공등여지호 수언왈 고유제실지녀 불부이잉 위인소의 내핍해저진한생자 위해동시주 제녀위지선 장재선도산 차기상야.”
우신관(佑神館)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舘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 사람을 아는가?”라 하고, 또 이어서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 없이 임신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신우견대송국신사왕양제동신성모문 “유신현조방지구 내지동신득선도산신성자야 연이부지기자 왕어하시 금단원궐초 재상자 기위기야검 기위인야관 기설관야략 기생사지간 이지성사중국 제항조빙지사 상속부절 상견자제 조조이숙위 입학이강습 우이습성현지풍화 혁홍황지속 위예의지방.”
나는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지은 「동신성모문(東神聖母文)」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단지 그 시초를 고찰해 본다면,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검소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하게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宿衛)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습득하여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也 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衎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우빙왕사지위영 평백제고구려 취기지군현지 가위성의. 이봉부도지법 부비기폐 지사여리 차기탑묘 제민도어치갈 병농침소 이국가일쇠 즉기하기불난차망야재 어시시야 경애가지이황악 여궁인좌우 출유포석정 치주연간 부지견훤지지 여부문외한금호루두장여화 무이이의.
또한 왕의 가르치는 신령한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어, 군사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락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방탕하게 되어, 궁인과 가까운 신하를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을 마시며 놀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금호(韓擒虎: 수나라의 용맹한 장군)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려화(張麗華: 陳의 미인)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약경순지귀명태조 수비획이 역가가의. 향약역전수사 이항왕사 지어역굴세궁 즉필복기종족 해급우무고지민 이내불대고명 봉부고적군현 이귀지 기우공어조정 유덕어생민 심대.
경순왕(敬順王)이 태조에게 귀의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만약 죽기를 다하여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우리 조정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昔 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之報者歟.
석 전씨이오월입송 소자첨위지충신 금신라공덕 과어피원의. 아태조 비빈중다 기자손역번연이현종자신라외손 즉보위 차루계통자 개기자손 이비음덕지보자여.
옛날 전씨(錢氏, 오월의 마지막 왕인 전숙)가 오월(吳越) 땅을 송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자첨(蘇子瞻, 소식)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왕비와 첩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顯宗)이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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