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明王
景明王立 諱昇英 神德王之太子 母義成王后.
경명왕립 휘승영 신덕왕지태자 모의성왕후.
경명왕(景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영(昇英)이며,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元年 八月 拜王弟伊飡魏膺爲上大等 大阿飡裕廉爲侍中.
원년팔월 배왕제이찬위응위상대등 대아찬유렴위시중.
원년(서기 917) 8월, 임금의 동생 이찬 위응(魏膺)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유렴(裕廉)을 시중으로 삼았다.
二年 春二月 一吉飡玄昇叛 伏誅 夏六月 弓裔麾下人心忽變 推戴太祖 弓裔出奔 爲下所殺 太祖卽位稱元. 秋七月 尙州賊帥阿玆盖 遣使降於太祖.
이년 춘이월 일길찬현승반 복주. 하유월 궁예휘하인심혹변 추대태조 궁예출분 위하소살 태조즉위칭원. 추칠월 상주적수아자개 견사항어태조.
2년(서기 918) 봄 2월, 일길찬 현승(玄昇)이 반역하여 처형당하였다.
여름 6월, 궁예 부하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太祖, 왕건)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망가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고려 태조가 왕위에 올라 원년이라 일컬었다.
가을 7월, 상주(尙州)의 도적 두목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三年 四天王寺塑像所執弓弦自絶 壁畵狗子有聲 若吠者. 以上大等金成爲角飡 侍中彦邕爲沙飡 我太祖移都松岳郡.
삼년 사천왕시소상소집궁현자절 벽화구자유성 약폐자. 이상대등김성위각찬 시중언옹위사찬 아태조이도송악군.
3년(서기 919),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소상(塑像)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에서 소리가 났는데, 개가 짖는 것과 같았다.
상대등 김성(金成)을 각찬으로 삼고,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 태조가 송악군(松岳郡)으로 도읍을 옮겼다.
四年 春正月 王與太祖交聘修好 二月 康州將軍閏雄 降於太祖 冬十月 後百濟主甄萱 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進軍於進禮 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命將出師救之 萱聞乃去.
사년 춘정월 왕여태조교빙수호. 이월 강주장군윤웅 항어태조. 동시월 후백제즈견훤 솔보기일만 공함대야성 진군어진례. 왕견아찬김율 구원어태조 태조명장출사구지 훤문내거.
4년(서기 920) 봄 정월, 임금이 고려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를 맺었다.
2월,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진례(進禮)로 진군하였다. 임금이 아찬 김율(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바로 물러갔다.
五年 春正月 金律告王曰 “臣往年奉使高麗 麗王問臣曰 ‘聞新羅有王三寶 所謂丈六尊像九層塔幷聖帶也 像塔猶存 不知聖帶今猶在耶’ 臣不能答”
오년 춘정월 김율고왕왈 “신왕년봉사고려 려왕문신왈 ‘문신라유왕삼보 소위장육존상구층탑병성대야. 상탑유존 부지성대금유재야. 신불능답.
5년(서기 921) 봄 정월, 김율이 임금에게 말하길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다. 이른바 장육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과 성대(聖帶)인데, 불상과 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는데 그러한가?’라고 물었는데, 제가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王聞之 問群臣曰 聖帶是何寶物耶 無能知者. 時 有皇龍寺僧年過九十者 曰 “予嘗聞之 寶帶是眞平大王所服也 歷代傳之 藏在南庫”
왕문지 문군신왈 성대시하보물야 무능지자 시 유황룡사승연과구십자왈 여상문지 보대시진평대왕소복야 역대전지 장재남고.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길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하나 아는 자가 없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에 나이 90세가 넘은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보대(寶帶)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차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王遂令開庫 不能得見 乃以擇日齋祭 然後見之 其帶粧以金玉甚長 非常人所可束也.
왕수영개고 불능득견 내이택일제제 연후견지. 기대장이금옥심장 비상인소가속야.
임금이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따로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커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論曰 古者坐明堂 執傳國璽 列九鼎 其若帝王之盛事者也. 而韓公論之曰 歸天人之心 興太平之基 決非三器之所能也 竪三器而爲重者 其誇者之詞耶 况此新羅所謂三寶 亦出於人爲之侈而已 爲國家 何須此耶 孟子曰 諸侯之寶三 土地人民政事 楚書曰 楚國無以爲寶 惟善以爲寶 若此者 行之於內 足以善一國 推之於外 足以澤四海 又何外物之足云哉 太祖聞羅人之說而問之耳 非以爲可尙者也.
논왈 고자좌명당 집전국새 열구정 기약재왕지성사자야. 이한공론지왈 귀천인지심 흥태평지기결비삼기지소능야 수삼기위중자 기과자지사야. 황차신라소위삼보 역출어인위지치이이 위국가 하수차야. 맹자왈 재후지보삼 토지인민정사. 초서왈 초국무이위보 유선이위보 약차자행지어내 족이선일국 추지어외 족이택사해 우하외물지족운재. 태조문라인지설이문지이 비이위가상자야.
사관이 논평한다. 옛날 명당에 앉아서 나라를 이어받을 옥새를 잡고 아홉 개의 솥을 진열하는 것이 마치 제왕들의 성대한 일인 것과 같지만, 한유(韓愈)가 논하기를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태평성대의 기초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세 가지 기물을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과장된 자의 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신라의 소위 세 가지 보물은 역시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위하여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 맹자(孟子)에는 “제후의 보배가 세 가지이니, 곧 토지ㆍ백성ㆍ정치”라고 하였고, 초서(楚書)에는 “초나라에는 보물로 삼을 것이 없고, 오직 선을 보배로 삼는다.”고 하였다. 만약 이것을 국내에서 실천하면 족히 한 나라를 선하게 할 것이며, 나라 밖에서 추진한다면 족히 천하가 은혜를 입을 것이다. 이 밖에 또 무엇을 보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전설을 듣고 물었을 따름이며, 숭상할 것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二月 靺鞨別部達姑衆 來寇北邊. 時 太祖將堅權鎭朔州 率騎擊大破之 匹馬不還 王喜 遣使移書 謝於太祖. 夏四月 京都大風拔樹. 秋八月 蝗 旱.
이월 말갈별부잘고중 래구북변. 시 태조장수견권진삭주 솔기격대파지 필마불환 왕희 견사이서사어태조. 하사월 경도대풍발수, 추팔월 황 한.
2월, 말갈(靺鞨)의 일부인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때 태조의 장수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기뻐서 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태조에게 사례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 메뚜기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六年 春正月 下枝城將軍元逢溟州將軍順式 降於太祖. 太祖念其歸順 以元逢本城爲順州 賜順式姓曰王. 是月 眞寶城將軍洪述 降於太祖.
육년 춘정월 하지성장군원봉명주장군순식 항어태조. 태조념기귀순 이원달본성위순주 사순식성왈왕 시월 진보성장군홍술 항어태조.
6년(서기 922) 봄 정월, 하지성(下枝城) 장군 원봉(元逢)과 명주(溟州) 장군 순식(順式)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성을 순주(順州)로 삼고,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었다. 이달에 진보성(眞寶城)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七年 秋七月 命旨城將軍城達京山府將軍良文等 降於太祖. 王遣倉部侍郞金樂錄事叅軍金幼卿 朝後唐 貢方物 莊宗賜物有差.
칠년 추칠월 명지성장군성달경산부장군양문등 항어태조. 왕견창부시랑김악록사참군김유경 조후당 공방물 장종사물유차.
7년(서기 923) 가을 7월,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장군 양문(良文) 등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임금이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낙(金樂)과 녹사참군(錄事叅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莊宗)이 물건에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八年 春正月 遣使入後唐朝貢 泉州節度使王逢規 亦遣使 貢方物. 夏六月 遣朝散大夫倉部侍郞金岳 入後唐朝貢 莊宗授朝議大夫試衛尉卿 秋八月 王薨 諡曰景明 葬于黃福寺北 太祖遣使弔祭.
팔년 춘정월 견사입당조공 천주절도사왕봉규 역견사 공방물, 하유월 견조산대부창부시랑김악 입후당조공 장종수조의새부시위위경. 추팔월 왕훙 시왈경명 장우황복사북. 태조견사조제.
8년(서기 924)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6월, 임금이 조산대부(朝散大夫) 창부시랑 김악(金岳)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朝議大夫試衛尉卿)의 관직을 주었다.
가을 8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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