沾解尼師今
沾解尼師今立 助賁王之同母弟也
첨해이사금립 조비왕지동모제야.
첨해이사금은 조비왕의 한 배 형제다.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원년 추칠월 알시조묘 봉부골정위세신갈문왕
즉위한 가을 7월 시조묘를 찾아가 왕이 됨을 알리고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에 봉했다.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秦 爲人後者 爲之子也. 故降其父母 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 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此諸侯王. 比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 宋英宗法而行之 新羅自王親 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己 封其外舅者亦有之 此非禮 固不可以爲法也
논왈 한선제즉위 유사진 위인후자 위지자야. 고항기부모 불득찰 존조지의야. 시이 제소생부칭친 시왈도 모왈도후 차제후왕. 비합경의 위만세법 고후 한돵무제 송영종이행지 신라자왕친 입계대통지군 무불봉숭기부칭왕 비특여차이기 봉기외구자역유지 차비례 고불가이위법야.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남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부와 생모를 낮추어야 하고 제사지낼 수 없고 이는 조종(祖宗)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낳은 아버지를 친(親)이라 하고 시호를 도(悼)라 하며, 어머니를 도후(悼后)라 하여 제후왕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이는 경전에 맞기에 만세(萬世)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를 본받아 그대로 행하였으나 신라는 스스로 왕의 친척으로 자임하며 왕통을 이은 임금이 그 아버지를 제후왕에 봉하지 않고 왕이라 칭하니 특별하지 않고 그 장인도 똑같이 왕이라 칭하니 이는 예의에 어긋난 일로서, 진실로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다.
二年 春正月 以伊湌長萱爲舒弗邯 以參國政 二月 遣使高句麗結和
이년 춘정월 이이찬장훤위서불한 이참국정 이월 견사고구려결화
2년 봄 1월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고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 여기서 舒弗邯은 서울+칸으로 봄도 타당하다 보인다. 즉 서울시장격???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秋七月 作南堂於宮南(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湌
삼년 하사월 왜인살서불한우노 추칠월 작남당어궁남(남당혹운도당) 이량부위이찬.
3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노를 죽이고 가을 7월 남당(도당: 수도 서울청사)를 궁 남쪽에 지어 영부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五年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漢祇部人夫道者 家貧無諂 工書算著名於時 王徵之爲阿湌 委以物藏庫事務
오년 춘정월 시청정어남당 한기부인부도자 가빈무첨 공서산저명어시 왕징지위아찬 위이물장고사무.
5년 봄 1월 남당에서 정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한기부사라 부도가 집안이 가난해도 아첨할 줄 모르고 글과 셈법 그리고 시에 능하니 왕지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고 재무를 담당 시켰다.
七年 夏四月 龍見宮東池 金城南臥柳自起 自五月至七月 不雨 禱祀祖廟及名山 乃雨 年饑 多盜賊
칠년 하사월 용견궁동지 금성남와유자기 자오월지칠월 고사조묘급명산 내우 년기 다도적.
7년 여름 4월 용이 궁 동쪽 연못에 나타나고 금성 남쪽 버드나무가 곤두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으니 시조와 산신에 제를 올려 비가 왔고 흉년으로 도적들이 들끓었다.
九年 秋九月 百濟來侵 一伐湌翊宗逆戰於槐谷西 爲賊所殺 冬十月 百濟攻烽山城 不下
구년 추구월 백제내침 일벌찬익종역전어괴곡서 위적소살 동시월 백제공봉산성 불하
9년 가을 9월 백제가 침략해오니 일벌잔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맞 싸워 적을 섬멸하고 겨울 10월 백제가 봉산성을 침략했으니 점령하지 못햇다.
十年 春三月 國東海出大漁三 長三丈 高丈有二尺 冬十月晦 日有食之
십년 춘삼월 국동래출대어삼 장삼장 고장유이척 동시월회 일유식지
10년 봄 3월 동해바다에 큰 고기가 세마리 나타났는데 길이는 3장 키가 1장 2척이었다. 겨울 10월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秋七月 旱蝗 年荒 多盜
십삼년 추칠월 한황 년황 다도
13년 가을 7월 가물고 메뚜기가 들끓어 흉년이 들고 도둑이 많았다.
十四年 夏 大雨 山崩四十餘所 秋七月 星孛于東方 二十五日而滅
십사년 하 대우 산붕사십여소 추칠월 성패우동방 이십오일이멸
14년 여름 비가 많이와 산 40여곳이 무너지고 가을 7월엔 동방에 혜성이 나타나 25일간 만에 사라졋다.
十五年 春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三月 百濟遣使請和 不許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십오년 춘이월 축달벌성 이나마극종위성주 삼월 백제견사청화 불허 동십이월 이십팔일 왕폭질훙
15년 봄 2월 달벌성을 축조하고 나마 극종을 성주로 명하고 3월 백제가 화친을 청해왔으나 허락지 않고 겨울 12월 28일 왕이 급병으로 붕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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