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史記

列傳-呂不韋列傳

85-106




<呂不韋列傳>

 

呂不韋者, 陽翟大賈人也. 往來販賎売貴, 家累千金.

여불위자 양책대가인야. 왕래판천매귀 가루천금.

 

여불위(呂不韋)는 양책(陽翟)의 큰 상인이었다. 여러 곳을 오가며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집에 거금을 모았다.

 

秦昭王四十年, 太子死.

진소왕사십년 태자사.

 

() 소왕(昭王) 40년에 태자가 죽었다.

 

其四十二年, 以其次子安國君為太子. 安國君有子二十餘人. 安國君有所甚愛姫, 立以為正夫人, 號曰華陽夫人.

기사십이년 이기차자안국군위태자. 안국군유자이십여인. 안국군유소심애희 입이위정부인 호왈화양부인.

 

42년에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삼았다.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안국군은 매우 총애하는 희첩(姬妾)을 정부인으로 세우고 화양부인(華陽夫人)이라고 불렀다.

 

華陽夫人無子. 安國君中男名子楚, 子楚母曰夏姫, 毋愛. 子楚為秦質子於趙. 秦數攻趙, 趙不甚禮子楚.

화양부인무자. 안국군중남명자초 자초모왈하희 무애. 자초위진질자어조. 진수공조 조불심례자초.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안국군의 아들들 중 이름이 자초(子楚)인 아들이 있었다. 자초의 어머니는 하희(夏姬)였는데 사랑을 받지 못했다. 자초는 진나라의 인질로 조나라에 있었다. 진나라가 수차례 조나라를 공격한 탓에 조나라는 자초를 그다지 예우하지 않았다.

 

子楚, 秦諸庶孽孫, 質於諸侯, 車乗進用不饒, 居処困, 不得意.

자초 진제서얼손 질어제후 거승진용불요 거처곤 부득의.

자초는 진나라의 여러 서자들 중 하나로 제후국에 인질로 있었는데 수레며 용품이 넉넉하지 못해 생활이 궁색하고 의기소침했다.

 

呂不韋賈邯鄲, 見而憐之, 此奇貨可居.

여불위가한단 견이련지 왈 차기화가거

 

여불위가 한단(邯鄲)에 장사하러 왔다가 자초를 보고는 가엾게 여기며 기이한 물건이니 챙길만하다라고 했다.

 

乃往見子楚, 説曰:「吾能大子之門.子楚笑曰:「且自大君之門, 而乃大吾門!呂不韋曰:「子不知也, 吾門待子門而大.子楚心知所謂, 乃引與坐, 深語. 呂不韋曰

내왕견자초 설왈 오능대자지문자초소왈 차자대군지문 이내대오문!’ 여불위왈 부주지야 오문대자문이대자초심지소위 내인여좌 심어 여불위왈:

 

이에 가서 자초를 만나 내가 그대의 문을 크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자초는 웃으면 당신의 문이 커져야 내 문도 커지는 것 아니겠소.’라고 했다. 여불위는 그대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나의 문은 그대의 문이 커져야 커집니다.’라고 했다. 자초는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채고는 이끌어 자리를 권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불위가 이렇게 말했다.

 

秦王老矣, 安國君得為太子. 竊聞安國君愛幸華陽夫人, 華陽夫人無子, 能立適嗣者獨華陽夫人耳. 今子兄弟二十餘人, 子又居中, 不甚見幸, 久質諸侯. 即大王薨, 安國君立為王, 則子毋幾得與長子及諸子旦暮在前者爭為太子矣.

진왕노의 안국군득위태자. 절문안국군애행화양부인 화양부인무자 능입적사자독화양부인이. 금자형제이십여인 자우거중 불심견행 구질제후. 즉대왕훙 안국군입위왕 즉가무기득여장자급제자단모재전자쟁위태자의

 

진왕은 늙었고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총애하는데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계자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화양부인 뿐입니다. 지금 그대의 형제는 20여 명이고 그대는 그들 중 중간쯤에 있는데다 총애도 그다지 못 받고 제후국에 인질로 오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이 죽고 안국군이 왕으로 즉위하면 그대는 맏아들 및 여러 아들들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왕 앞에서 태자 자리를 다툴 기회조차 가지지 못합니다.’

 

子楚曰:「. 為之柰何?」

자초왈 . 위지내하?’

 

자초가 그렇겠죠. 그럼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呂不韋曰:「子貧, 客於此, 非有以奉獻於親及結賓客也. 不韋雖貧, 請以千金為子西遊, 事安國君及華陽夫人, 立子為適嗣.

여불위왈 자빈 객어차 비유이봉헌어친급결빈객야. 불위수빈 청이천금위자서유 사안국군급화양부인 입자위적사

 

여불위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가난하고 이곳의 손님 처지라서 부모를 봉양할 수도 없고 빈객들과 사귈 수도 없습니다. 이 여불위가 가진 것은 없지만 천금으로 서쪽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모셔 그대를 적자로 삼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子楚乃頓首曰:「必如君策, 請得分秦國與君共之.

자초급돈수왈 필여군책 청득분진국여군공지

 

자초가 이에 머리를 조아리며 그대의 계책대로만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나누길 청합니다.’라고 했다.

 

呂不韋乃以五百金與子楚, 為進用, 結賓客而複以五百金買奇物玩好, 自奉而西遊秦, 求見華陽夫人姊, 而皆以其物獻華陽夫人. 因言子楚賢智, 結諸侯賓客遍天下, 常曰楚也以夫人為天, 日夜泣思太子及夫人.

여불위내이오백금여자초 위진용 결빈객; 이복이오백금매기물완호 자봉이서유진 구견화양부인자 이개이기물헌화양부인. 인언자초현지 결제후빈객편천하 상왈 초야이부인위천 일야읍사태자급부인

 

여불위는 바로 500금을 자초에게 주어 사용하게 하고 빈객들도 사귀게 했다. 그리고 다시 500금으로 진기한 패물 따위를 사서 자신이 이를 들고 서쪽 진나라로 가서는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 이 물건들을 모두 화양부인에게 바쳤다. 이를 기회로 자초가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천하 제후의 빈객들과 두루 사귀고 있음을 전하는 한편 자초는 부인을 하늘처럼 여기며 낮밤으로 태자와 부인 생각에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말하도록 했다.

 

夫人大喜. 不韋因使其姊説夫人曰

부인대희. 불위인사기자설부인왈:

 

화양부인은 크게 기뻐했다. 여불위는 그 참에 그 언니로 하여금 부인에게 이런 말로 설득하게 했다.

 

吾聞之, 以色事人者, 色衰而愛弛. 今夫人事太子, 甚愛而無子, 不以此時蚤自結於諸子中賢孝者, 挙立以為適而子之, 夫在則重尊, 夫百歳之後, 所子者為王, 終不失勢, 此所謂一言而萬世之利也. 不以繁華時樹本, 即色衰愛弛後, 雖欲開一語, 尚可得乎今子楚賢, 而自知中男也, 次不得為適, 其母又不得幸, 自附夫人, 夫人誠以此時抜以為適, 夫人則竟世有寵於秦矣.

오문지 이색사인자 색쇠이애이 금부인사태자 심애이무자 불이차시조자결어제자중현효자 거립위적이자지 부재즉중존 부백세지후 소자자위왕 종부실세 차소위일언이만세지리야. 불이번화시수본 즉색쇠애이후 수욕개일어 상가득호? 금자초현 이자지중남야 차부득위적 기모우불득행 자부부인 부인성이차시발이위적 부인즉경세우총어진의

 

제가 듣기에 색욕으로 사람을 고르는 사람은 색욕이 식으면 사랑도 식는다고 합니다. 지금 부인께서는 태자를 섬기며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시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어째서 일찌감치 여러 아들 중 어질고 효성스러운 자를 골라 아들로 삼아 후계자가 되게 하지 않으십니까? 이러면 부군께서 살아 계실 때는 존중을 받고, 부군이 세상을 떠나면 아들이 왕이 되어 끝까지 권세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말 한 마디로 만세의 이로움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 뿌리를 내려야지 사랑이 식은 다음에는 말 한 마디하고 싶어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자초는 어질긴 합니다만 스스로 여러 아들 중 하나라서 서열상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생모도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스스로 부인께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부인께서 정말 이참에 그를 후계자로 발탁한다면 부인께서는 평생 진나라에서 총애를 누릴 것입니다.’

 

華陽夫人以為然, 承太子閒, 従容言子楚質於趙者絶賢, 來往者皆稱譽之. 乃因涕泣曰:「妾幸得充後宮, 不幸無子, 願得子楚立以為適嗣, 以託妾身.

화양부인이위연 승태자간 종용언자초질어조자절현 내왕자개칭예지. 내인체읍왈 행득충후궁 불행무자 원득자초립이위적사 이탁첩신

 

화양부인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서 태자가 한가한 틈에 조용히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자초가 아주 현명하고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칭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첩이 다행히 후궁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아들이 없으니 자초를 후사로 삼아 첩의 몸을 맡기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安國君許之, 乃與夫人刻玉符, 約以為適嗣. 安國君及夫人因厚餽遺子楚, 而請呂不韋傅之, 子楚以此名譽益盛於諸侯.

안국군허지 내여부인각옥부 약이위적사. 안국군급부인인후궤유자초 이청여불위전지 자초이차명예익성어제후.

 

안국군은 이를 허락하고 부인에게 옥부(玉符)를 새겨주며 자초를 후사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안국군과 부인은 이어 자초에게 많은 물품을 보내는 한편 여불위에게 그를 잘 이끌도록 하니 자초는 이로써 제후 사이에 그 명성이 더욱 커졌다.

 

呂不韋取邯鄲諸姫絶好善舞者與居, 知有身.

여불위취한단제희절호선무자여거 지유신.

여불위는 한단의 많은 여자들중에서 미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여자와 함께 살았는데 얼마 뒤 임신을 하게 되었다.



子楚従不韋飲, 見而説之, 因起為壽, 請之. 呂不韋怒, 念業已破家為子楚, 欲以釣奇, 乃遂獻其姫. 姫自匿有身, 至大期時, 生子政. 子楚遂立姫為夫人.

자초종불위음 견이열지 인기위수 청지. 여불위노 염업이파가위자초 욕이조기 내수헌기희. 희자닉유신 지대기시 생자정. 자초수입희위부인.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했다. 자초는 일어나 (여불위에게) 축수를 올리면서 그녀를 (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자초 때문에 파산한 데다 기이한 물건을 낚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녀는 바쳤다.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숨겼고, 12달 뒤 아들 정()을 낳았다. 자초는 이에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秦昭王五十年, 使王齮囲邯鄲, , 趙欲殺子楚. 子楚與呂不韋謀, 行金六百斤予守者吏, 得脫, 亡赴秦軍, 遂以得帰. 趙欲殺子楚妻子, 子楚夫人趙豪家女也, 得匿, 以故母子竟得活.

진소왕오십년 사왕의위한단 급 조욕살자초. 자초여여불위모 행금육백근여수자리 득탈 망부진군 수이득귀. 조욕살자초처자 자초부인조호가여야 이고모자경득활.

 

진 소왕 50년에 왕의(王齮)를 시켜 한단을 포위하게 하자 위급함을 느낀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모의하여 금 600근을 내어 자초를 감시하는 자에게 주고 탈출한 다음 진나라의 군대로 도망쳐서 마침내 귀국했다. 조나라는 자초의 아들과 부인을 죽이려 했으나 자초의 부인이 조나라의 부잣집 딸인지라 숨을 수 있었고, 이로써 모자는 결국 살아날 수 있었다.

 

秦昭王五十六年, , 太子安國君立為王, 華陽夫人為王後, 子楚為太子. 趙亦奉子楚夫人及子政帰秦.

진소왕오십육년 훙 태자안국군립위왕 화양부인위왕후 자초위태자. 조역벙지초부인급자정귀진.

 

진 소왕 56년에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으로 즉위했다. 화양부인은 왕후가 되었고,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조나라도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진나라로 잘 돌려보냈다.

 

秦王立一年, , 謚為孝文王. 太子子楚代立, 是為荘襄王. 荘襄王所母華陽後為華陽太後, 真母夏姫尊以為夏太後.

진왕립일년 훙 시위효문왕. 태자자초대립 시위장양왕. 장양왕소모화양후위화양태후 진모하희존이위하태후.

 

진왕이 즉위 1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효문왕(孝文王)이라 했다. 태자 자초가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莊襄王)이다. 장양왕이 어머니로 모셨던 화양부인은 화양태후가 되었고, 생모 하희(夏姬)는 하태후로 높아졌다.

 

荘襄王元年, 以呂不韋為丞相, 封為文信侯, 食河南雒陽十萬戸.

장양왕원년 이여불위위승상 봉위문신후 식하남락양십만호,

 

장양왕 원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하남(河南)의 낙양(雒陽) 10만 호를 식읍으로 내렸다.

 

荘襄王即位三年, , 太子政立為王, 尊呂不韋為相國, 號稱仲父.

장양왕즉위삼년 훙 태자정립위왕 존여불위위상국 호창 중부

 

장양왕이 즉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왕위로 즉위하여 여불위를 상국(相國)으로 높이고 중부(仲父: 굳이 말하면 대부)’로 불렀다.

 

秦王年少, 太後時時竊私通呂不韋. 不韋家僮萬人.

진왕연소 태후시시절사통여불위. 불뤼가동만인.

 

진왕이 어렸고, 태후는 수시로 몰래 여불위와 간통했다. 여불위의 집에는 노복만 만 명에 이르렀다.

 

當是時, 魏有信陵君, 楚有春申君, 趙有平原君, 斉有孟嘗君, 皆下士喜賓客以相傾. 呂不韋以秦之彊, 羞不如, 亦招致士, 厚遇之, 至食客三千人.

당시시 위유신릉후 초유춘신군 조유평원군 제유맹상군 개하사희빈객이상경. 여불위이진지강 차불여 역초치사 후우지 지식객삼천인.

 

이 무렵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어 모두 경쟁적으로 몸을 낮추어 빈객 모시기를 좋아했다. 여불위는 강한 진나라가 그들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인재들을 초빙하여 후하게 대접하니 식객이 3천에 이르렀다.

 

是時諸侯多辯士, 如荀卿之徒, 著書布天下.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為八覧六論十二紀, 二十餘萬言. 以為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布鹹陽市門, 懸千金其上, 延諸侯遊士賓客有能増損一字者予千金.

시시제후다변사 여순경지도 저서포천하. 여불위내사기객인인저소문 집론이위팔람 육론 십이기 이십여만언. 이위비천지만물고금지사 호왈여씨춘추. 포함양시문 현천금기상 정제후유사빈객유능증손일자여천금.

 

이 무렵 제후국에는 변사들이 많았는데 순경(荀卿; 순자)의 문도들은 책을 써서 천하에 알렸다. 이에 여불위는 그의 식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들이 듣고 아는 바를 쓰게 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모으니 20만 자가 넘었다. 이로써 천지만물과 고금의 일들을 두루 갖추니 이름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라 했다. 그는 이것을 함양(咸陽) 시장 대문에다 공표하고 그 위에 천금을 걸어 놓고는 제후 유세객이나 빈객들 중 한 글자라도 보태거나 뺄 수 있으면 한 글자에 천금을 주겠다고 했다.

 

 

 

始皇帝益壯, 太後淫不止. 呂不韋恐覚禍及己, 乃私求大陰人嫪毐以為舎人, 時縦倡樂, 使毐以其陰関桐輪而行, 令太後聞之, 以啗太後.

시황제익장 태후음부지. 여불위공각화급기 내사구대음인노애이위사인 시종창악 사애이기음관동륜이행 영태후문지 이담태후.

 

시황제가 장년에 접어들도록 태후의 음란함을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일이 들통 나서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은밀히 음경이 큰 노애(嫪毐)라는 자를 구해서 사인으로 삼고는 수시로 노애에게 오동나무로 만든 바퀴를 그 음경으로 들어 올리게 하는 공연을 벌여서 그것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게 하여 태후를 유혹했다.

 

太後聞, 果欲私得之. 呂不韋乃進嫪毐, 詐令人以腐罪告之. 不韋又陰謂太後曰:「可事詐腐, 則得給事中.

태후문 과욕사득지. 여불위내진노애 사영인이부죄고지. 불위우음위태후왈 가사사부 즉득급사중

 

태후가 그 소문을 듣고는 아니나 다를까 은밀히 노애를 갖고자 했다 여불위가 바로 노애를 들여보냈는데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부형(腐刑; 궁형) 당할 죄를 지었다고 말하게 했다. 여불위는 또 은밀히 태후에게 거짓으로 부형을 지어내면 궁중에서 일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太後乃陰厚賜主腐者吏, 詐論之, 抜其鬚眉為宦者, 遂得侍太後. 太後私與通, 絶愛之. 有身, 太後恐人知之, 詐蔔當避時, 徙宮居雍. 嫪毐常従, 賞賜甚厚, 事皆決於嫪毐. 嫪毐家僮數千人, 諸客求宦為嫪毐舎人千餘人.

태후내음후사주부사리 사론지 발기수미위환자 수득대태후. 태후사여통 절애지. 유신 캐후공인지지 사포당피시 사궁거옹. 노애상종 상사심후 사개결어노애, 노애가동수천인 제객구환위노야사인천여인.

 

태후는 부형을 주관하는 관리에게 은밀히 넉넉하게 뇌물을 주고 거짓으로 형을 집행한 것처럼 한 다음 수염과 눈썹을 밀고 내시가 되게 하니, 마침내 태후를 모시게 되었다. 태후는 몰래 간통하며 노애를 끔찍하게 아꼈다. 임신이 되자 태후는 사람들이 알까봐 겁이 나서 속임수로 점을 쳐서 잠깐 궁을 피해야 한다면서 거처를 옹()으로 옮겼다. 노애가 늘 따랐고, 아주 많은 상이 내려졌다. 모든 일이 노애에 의해 결정되었다. 노애의 집에는 노복이 수 천 명이었고, 벼슬을 얻으려고 노애의 식객이 된 자들도 천 여 명에 이르렀다.

 

始皇七年, 荘襄王母夏太後薨. 孝文王後曰華陽太後, 與孝文王會葬壽陵. 夏太後子荘襄王葬芷陽, 故夏太後獨別葬杜東, 東望吾子, 西望吾夫. 後百年, 旁當有萬家邑.

시황칠년 장양왕모하태후훙. 효문왕후왈화양태후 여효문왕회장수릉. 하태후자장양왕장지양 고하태후독별장두동 왈동망오자 서망로부. 후백년 방당유만가읍

 

진시황 7년에 장양왕의 어머니 하태후가 죽었다. 효문왕의 왕후 화양태후는 효문왕과 함께 수릉(壽陵)에 합장되었다. 하태후의 아들 장양왕은 지양(芷陽)에 묻혔으므로, 하태후는 혼자 별도로 두원(杜原)에 묻혔는데 동쪽으로 내 아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내 남편을 바라보련다. 백년 뒤에는 주변으로 만 호의 집들이 들어설 것이다.’라고 했다.

 

始皇九年, 有告嫪毐実非宦者, 常與太後私亂, 生子二人, 皆匿之. 與太後謀曰王即薨, 以子為後.

시황구년 유고노애실비환자 상여태후사란 생자이인 개닉지. 여태후모왈 왕즉훙 이자위후

 

진시황 9년에 누군가 노애가 사실은 환관이 아니고 늘 태후와 간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아 숨겨 놓았으며, 태후와 모의하길 왕이 죽으면 아들을 후계자로 삼자고 했다는 것을 고발해왔다.

 

於是秦王下吏治, 具得情実, 事連相國呂不韋.

어시진왕하리치 구득정실 사연상국여불위.

 

이에 진시황은 관리에게 심문케 하여 실정을 알아내고 보니 사건에 상국 여불위가 연루되어 있었다.

 

九月, 夷嫪毐三族, 殺太後所生両子, 而遂遷太後於雍. 諸嫪毐舎人皆沒其家而遷之蜀. 王欲誅相國, 為其奉先王功大, 及賓客辯士為遊説者衆, 王不忍致法.

구월 이노애삼족 살태후소생양지 이수천태후어옹. 제노애사인개몰기사이천지촉. 왕욕주상국 위기봉선왕공대 급빈객변사위유세자중 왕불인치법.

 

9월에 노애의 3족을 멸했고, 태후가 낳은 두 아들을 죽였으며 태후는 옹으로 옮겼다. 노애의 가신들은 전부 가산을 몰수당하고 촉()나라로 추방당했다. 왕은 상국도 죽이려 했으나 선왕을 모신 공이 크고 빈객과 변사들로 유세하는 자들이 많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秦王十年十月, 免相國呂不韋. 及斉人茅焦説秦王, 秦王乃迎太後於雍, 帰複鹹陽, 而出文信侯就國河南.

진왕십년시월 면상국여불위. 급제인모초세진왕 진왕내영태후어옹 귀복함양 이출문신후취국하남.

 

진시황 1010월에 상국 여불위를 파면했다. ()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시황을 설득하자 시황은 태후를 옹에서 맞아들여 다시 함양으로 돌아오게 했고, 문신후 여불위는 자신의 봉국인 하남으로 내쫓았다.

 

歳餘, 諸侯賓客使者相望於道, 請文信侯. 秦王恐其為変, 乃賜文信侯書曰

세여 제후빈객사자상망어도 청문신후. 진왕공기위변 내사문신후거왈:

 

1년 남짓 동안 제후의 빈객과 사신들이 끊임없이 문신후에게 인사를 왔다. 진왕은 그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문신후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君何功於秦秦封君河南, 食十萬戸. 君何親於秦號稱仲父. 其與家屬徙処蜀!

군하공어진? 진봉군하남 식십만호. 군하친어진? 호칭중부. 기여가속사처촉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내렸는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척 관계이길래 중부라 부르는가? 가족과 촉으로 옮겨가 살도록 하라!’

 

呂不韋自度稍侵, 恐誅, 乃飲酖而死. 秦王所加怒呂不韋嫪毐皆已死, 乃皆複帰嫪毐舎人遷蜀者.

여불위자도소침 공주 내음탐이사. 진왕소노여불위 노애개이사 내개복귀노야사인천촉자.

 

여불위는 자신에게 서서히 밀려오는 압박감과 문초에 대한 고민으로 폭음하여 죽었다. 진왕은 미웠던 여불위와 노애가 모두 죽자, 촉나라로 내쫓은 노애의 사인들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했다.

 

始皇十九年, 太後薨, 謚為帝太後, 與荘襄王會葬茝陽.

시황십구년 태후훙 시위제태후 여장양왕회장채야.

 

진시황 19년에 태후가 죽자, 시호를 제태후(帝太后)라고 했으며, 장양왕과 함께 채양(茝陽)에 묻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不韋及嫪毐貴, 封號文信侯. 人之告嫪毐, 毐聞之. 秦王験左右, 未発. 上之雍郊, 毐恐禍起, 乃與黨謀, 矯太後璽発卒以反蘄年宮. 発吏攻毐, 毐敗亡走, 追斬之好畤, 遂滅其宗. 而呂不韋由此絀矣. 孔子之所謂, 其呂子乎

태사공왈 : 불뤼급노애귀 봉호문신후. 인지고노애 애문지. 진왕험좌우 미발. 상지옹교 애공화기 내여당모 교태후새발졸이반기년궁. 발리공애 애패망주 추참지호치 수멸기종. 이여불위유차출의. 공지지소위 자 기여자호?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여불위는 노애와 함께 귀히 대접받아 문신후라는 봉호까지 얻었다. 누군가 노애를 고발했을 때 노애도 그것을 들었다. 진왕은 이것저것 다 알고도 손을 쓰지 않았다. 왕이 옹으로 가서 교() 제사를 지내자 화가 닥칠까 겁을 먹고 있던 노애는 자기 패거리들과 모의하여 태후의 옥새로 속여 군사를 뽑아서 기년궁(蘄年宮)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를 내어 노애를 공격했고, 노애가 패하여 도망치자 추격하여 호치(好畤)에서 목을 베고 마침 그 일족을 없앴다. 그리고 여불위도 이에 연루되어 세를 잃었다. 공자가 말한 말만 무성한자가 바로 여불위 아니었겠는가?


'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列傳-李斯列傳  (0) 2019.06.10
列傳-刺客列傳  (0) 2019.05.09
列傳-屈原賈生列傳  (0) 2019.04.08
列傳- 魯仲連鄒陽列傳  (0) 2019.03.17
列傳-田単列傳  (0) 2019.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