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古受命帝王, 曷嘗不封禪? 蓋有無其應而用事者矣, 未有睹符瑞見而不臻乎泰山者也. 雖受命而功不至, 至梁父矣而德不洽, 洽矣而日有不暇給, 是以卽事用希. 傳曰:「三年不爲禮, 禮必廢;三年不爲樂, 樂必壞.」每世之隆, 則封禪答焉, 及衰而息. 厥曠遠者千有餘載, 近者數百載, 故其儀闕然堙滅, 其詳不可得而記聞云.
자고수명제왕 갈상불봉선 개유무기응이용사자의 미유도부단견이불진호태산자야 수수명이공부지 지양보의이덕불치 흡의이일유불가합 시이즉사용희 전왈 '삼년불위체 예필폐 삼년불위악 악필괴' 매세지륭 즉봉선답언 급쇠이식 궐광원자천유여재 근자수백재 소기의궐인멸 기상불가득이기문운
예로부터 천명(天命)을 받고 제왕된 자가 어찌 봉선(封禪)을 행하지 않겠는가? 대체로 하늘의 상서로운 감응과 길조가 없다면 서둘러 봉선의 의식을 거행했고, 이미 상서로운 감응과 길조가 나타나면 태산에 가서 봉선의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 제왕은 없었다. 비록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되었어도 치세의 성취를 얻지 못했다면 이미 양보(梁父)에 올라갔어도 덕이 흡족하지 못하고, 비록 덕이 흡족해도 봉선의 의식을 행할 틈이 없었기에 봉선제를 딀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봉선 의식을 행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전(傳, 논어, 양화)』에서 말하길 “삼 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지고, 삼 년 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매번 태평성세를 만날 때에는 봉선의식을 거행하여 하늘의 공덕에 보답하고, 쇠락한 세상에서는 봉선의식을 거행하지 못했다. 멀리는 천여 년, 가까이는 수백 년이 되었지만 봉선의 의식은 훼손되고 잊혀져 그 상세한 정황은 얻을 수 없으나 기록으로는 후세에 전해진다.
尙書曰, 舜在璇璣玉衡, 以齊七政. 遂類于上帝, 禋于六宗, 望山川, 遍群神. 輯五瑞, 擇吉月日, 見四嶽諸牧, 還瑞. 歲二月, 東巡狩, 至于岱宗. 岱宗, 泰山也. 柴, 望秩于山川. 遂覲東后. 東后者, 諸侯也. 合時月正日, 同律度量衡, 修五禮, 五玉三帛二生一死贄. 五月, 巡狩至南嶽. 南嶽, 衡山也. 八月, 巡狩至西嶽. 西嶽, 華山也. 十一月, 巡狩至北嶽. 北嶽, 恆山也. 皆如岱宗之禮. 中嶽, 嵩高也. 五載一巡狩.
상서왈 순재선기옥형 이제칠정 수류우상제 인우육종 망산천 편군신 집오서 택길월일 견사옥제목 환서 세이월 동순수 지우대종 대종 태산야 자 망질우산천 수근동후 동후자 제후야 합시월정일 동율도량형 수오례 오옥삼백이생일사지 오월 순수지남악 남악 형산야 팔월 순수지서악 화산야 십일월 순수지북악 북악 항산야 개여재동지례 중악 숭고야 오재일순수
상서(尙書) 에서 말하길 순임금은 선기옥형(=관측기구)으로 칠정(七政, 해와 달, 다섯 별)의 운행을 따른 역법(曆法)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상제(上帝)와 6종에게 제사를 지내시며,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시는 등 여러 신(神)에게 두루 제사하였다. 오서를 거두었다가 좋은 달과 좋은 날을 골라 사악(四岳, 사방의 제후) 제후들에게 돌려주었다. 이해 2월에 동쪽을 순행하여 대종(=태산)에 이르러 나무를 태워 제사하는 시(柴) 제사를 지냈고, 산천을 바라보며 차례대로 제사한 뒤 마침내 동쪽 제후들을 만나 풍속을 하나로 합쳤다. (사시(四時)와 달의 운행에 맞추어 날짜를 바로잡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시켰으며 오례(五禮,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 등 오등(五等) 제후의 조빙의 예)와 오옥(五玉, 다섯 가지 서옥(瑞玉)), 세 가지 비단(삼공(三公)이 예를 행할 때 지니는 삼종의 비단), 두 가지 산 짐승(경과 대부들이 예를 행할 때 쓰는 양과 기러기나 뀡), 한 가지 죽은 짐승(선비 예를 행할 때 쓰는 야생 닭) 등의 예물들을 정리했다.)
5월에는 남쪽으로 순행하여 남악(南岳, 형산(衡山))에 이르렀고, 8월에는 서쪽으로 순행하여 서악(西岳, 화산(華山))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북쪽으로 순행하여 북악(北岳, 항산(恒山))에 이르렀으며, 이때 모두 대종(=태산)에서와 같은 예식을 거행했다. 중악은 숭고(崇山)을 말한다. 순임금은 5년마다 한 번씩 순행하였다.
*6종: 六宗, 고대에 존중히 여겨 제사하는 여섯 신 혹은 자연현상. 즉 천지(天地), 사시(四時), 한서(寒暑), 혹은 일월성신(日月星辰) 및 수한(水旱) 등등 여러 설이 있음
*5서: 五瑞, 천자가 제후에게 신표로 나누어 준 서옥(瑞玉). 공(公)에게는 환규(桓圭), 후(侯)에게는 신규(信圭), 백(伯)에게는 궁규(躬圭), 자(子)에게는 곡벽(糓璧), 남(男)에게는 포벽(蒲璧)을 하사함
禹遵之. 後十四世, 至帝孔甲, 淫德好神, 神瀆, 二龍去之. 其後三世, 湯伐桀, 欲遷夏社, 不可, 作夏社. 後八世, 至帝太戊, 有桑谷生於廷, 一暮大拱, 懼. 伊陟曰:「妖不勝德.」太戊修德, 桑谷死. 伊陟贊巫咸, 巫咸之興自此始. 後十四世, 帝武丁得傅說爲相, 殷復興焉, 稱高宗. 有雉登鼎耳雊, 武丁懼. 祖己曰:「修德.」武丁從之, 位以永寧. 後五世, 帝武乙慢神而震死. 後三世, 帝紂淫亂, 武王伐之. 由此觀之, 始未嘗不肅祗, 後稍怠慢也.
우준지 후십사세 지제공갑 음덕호신 신독 이용거지 기후삼세 탕벌걸 욕천하사 불가 작하사 후팔세 지제태무 유상곡생어정 일막대공 구 이척왈 '요불승덕' 태무수덕 상곡사 이척찬무함 무함지흥자차시 후십사세 제무정득부열위상 은부흥언 칭고종 유치등정이구 무정구 조기왈 '수덕' 무정종지 위이영녕 후오세 제무을만신이진사 후삼세제주음란 무왕벌지 곡차관지 시미상불숙지 후초태만야
우(禹)는 이러한 순행제도를 따랐다. 그 후에 14 대가 지나 제왕인 공갑(孔甲)에 이르러 덕이 음란해지고 귀신을 섬기기를 좋아하며 신을 모독하자 이에 신은 두 용을 데리고 떠나갔다. 3 대가 지난 후 탕(湯)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하나라의 사직을 옮기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기에 <하사(夏社, 하나라의 사궁(社宮)을 지칭함)>라는 글을 지었다. 그 후에 8세대가 지나 제왕 태무(太戊) 시절에 이르러 뽕나무와 닥나무가 궁정에서 자라나 하룻밤 사이에 한 아름이나 커져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태무가 매우 두려워했다. 이에 이척(伊陟, 이윤의 아들)이 “요망스런 귀신의 장난은 덕(德)을 이기지 못합니다. 왕의 정사에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은 덕을 닦으소서.”라고 간언을 올리고, 무함(巫咸, 고대에 신령한 무당. 북을 만들어서 점치는 법을 창시했다고 전해짐)에게 말하여 태무로 하여금 덕을 닦고 선정을 베풀게 하였다. 그 후에 뽕나무와 닥나무는 말라 죽었다. 그래서 이척은 무함을 칭찬했다. 무함의 일어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4 대 후 제왕 무정(武丁)은 부열(傅說)을 승상으로 삼으니, 은나라는 다시 흥성하기 시작했고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일컬었다. 한번은 제사를 지내는데 꿩이 솥귀에 올라앉아 울자 무정이 두려워하자 조기(祖己)가 “왕은 근심하지 말고 먼저 덕을 닦으십시오.”라고 간언을 올렸다. 무정은 그의 말을 따라 덕을 닦으니 재위 내내 평안 무사했다. 그 후 5 대가 지나고 제왕 무을(武乙)이 신령에게 오만하게 굴었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그 후 3 대가 지나고 제왕 주(紂)가 음란하자 무왕(武王)에게 토벌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본다면 처음에는 엄숙하고 신령을 공경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뒤에 와서 점점 게으르고 오만해졌다.
周官曰, 冬日至, 祀天於南郊, 迎長日之至;夏日至, 祭地祗. 皆用樂舞, 而神乃可得而禮也. 天子祭天下名山大川, 五嶽視三公, 四瀆視諸侯, 諸侯祭其疆內名山大川. 四瀆者, 江、河、淮、濟也. 天子曰明堂、辟雍, 諸侯曰泮宮.
주관왈 동일지 사천어남교 영장일지지 하일지 제지지 개용악무 이신내가득이예야 천자제천하명산대천 오악시삼공 사독시제후 제후제기강내명산대천 사독자 강 하 회 제야 천자왈명당 벽옹 제후왈반궁
주관(주나라 관리)가 말하길 동지(冬至)가 되면,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긴 햇살이 떠오는 것을 맞이하고, 하지(夏至)가 되면 땅의 신에게 제사 지냈다. 제사에 음악과 무용이 쓰였는데 신명이 이를 예절바름으로 받아들인다 본 것이다. 천자는 천하의 명산대천에서 제사 지냈는데, 5악은 3공(三公)의 예우로써 제사 지내고, 4독(四瀆)엔 제후의 예우로써 제사 지냈으며, 제후들은 각자 영토의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 4독이란 강수(江水), 하수(河水),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말한다. 천자가 제사 지내는 곳을 명당(明堂) 또는 벽옹(辟雍)이라고 말하며, 제후가 제사 지내는 곳을 반궁(泮宮)이라고 말한다.
* 五嶽, 중국의 다섯 명산으로,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을 지칭함
周公旣相成王, 郊祀后稷以配天, 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 自禹興而修社祀, 后稷稼穡, 故有稷祠, 郊社所從來尙矣.
주공기상성왕 교사후직이배천 종사문왕어명당이배상제 자우흥이수사사 후직가색 고유직사 교사소종래상의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의 재상이 되고 교제 때에는 후직(后稷)과 하늘에 배향하였으며, 종묘제사 때에는 명당에서 문왕(文王)을 상제(上帝)와 배향하였다. 하우씨를 기려 토지신 급으로 제사를 지냈고, 후직(后稷)이 농사를 일으킨 이후부터 후직의 사당이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교외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와 천지에서 토신에 대한 제사는 모두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일이다.
自周克殷後十四世, 世益衰, 禮樂廢, 諸侯恣行, 而幽王爲犬戎所敗, 周東徙雒邑. 秦襄公攻戎救周, 始列爲諸侯. 秦襄公旣侯, 居西垂, 自以爲主少皞之神, 作西畤, 祠白帝, 其牲用騮駒黃牛羝羊各一云. 其後十六年, 秦文公東獵汧渭之閒, 卜居之而吉. 文公夢黃蛇自天下屬地, 其口止於鄜衍. 文公問史敦, 敦曰:「此上帝之徵, 君其祠之.」於是作鄜畤, 用三牲郊祭白帝焉.
자주극은후십사세 세익쇠 애악폐 제후자행 이유왕위견융소패 주동사낙읍 진양공공융구주 시역위제후 진양공기후 거서수 자이위주소호지신 작서치 사백제 기목용유구황우저양각일운 기후십육년 진문공동렵견위지한 복거지이길 문공몽황사자천하속지 기구지어부연 문공문사돈 돈왈 '차상제지징 군기사지' 어시작부치 용삼생교재백제언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부터 14세(世)가 지나자 세상의 도는 더욱 쇠락해져 예악이 폐기되고 제후가 멋대로 행동하여 주나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도읍을 낙읍(雒邑)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견융을 공격하고 주나라를 구원하니 그 공으로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진나라 양공은 제후가 되어서 서쪽 변경에 거주하고, 스스로 소호신(少皞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여 서치(西畤, 치(畤)는 천지와 오제(五帝)에게 제사하는 땅을 의미함)를 만들어 백제(白帝)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희생으로 얼룩말과 누른 소와 숫염소를 각기 한 마리씩을 바쳤다. 16년이 지나자 진(秦)나라 문공(文公)이 동쪽으로 사냥 나갔다가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에 도달하여 머무를 생각으로 점을 보았는데, 길했다. 문공은 꿈속에서 한 마리의 누런 뱀을 보았는데, 그 몸이 하늘로부터 땅까지 드리워져 있었고, 주둥이는 부성(鄜城)의 광활한 들판 가운데까지 뻗어 있었다. 문공이 꿈속의 일을 사돈(史敦)에게 물으니, 사돈이 이렇게 회답했다. “이것은 상제의 상징으로 군주는 그것을 제사지내길 바랍니다.” 그래서 부치(鄜畤, 지금의 섬서성 부현)를 건립하고, 소, 양, 돼지 등 세 가지 희생을 가지고 교외에서 백제(白帝)에게 제사를 드렸다.
自未作鄜畤也, 而雍旁故有吳陽武畤, 雍東有好畤, 皆廢無祠. 或曰:「自古以雍州積高, 神明之隩, 故立畤郊上帝, 諸神祠皆聚云. 蓋黃帝時嘗用事, 雖晩周亦郊焉.」其語不經見, 縉紳者不道.
자미작부치야 이옹방고유오양무치 옹동유호치 개폐무사 혹왈 '자고이옹중적고 신명지오 고립치교상제 제신사개취운 개왕제시상용사 수만주역교언' 기어불경현 진신자부도.
부치를 건립하기 이전에 옹성(雍城) 곁에 원래 오양(吳陽)의 무치(武畤)가 있었고 옹성(雍城) 동쪽에는 호치(好畤)가 있었지만 모두 폐기되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혹자가 말하길 “자고로 옹주(雍州)의 지세가 높아서 신명(神明)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치(畤)를 세워 교외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냈으니, 기타 여러 신의 사당도 모두 이곳 운집하게 되었다. 대략 황제(黄帝) 때에 일찍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여 주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제사를 거행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경전에도 보이지 않고, 대신들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다.
作鄜畤後九年, 文公獲若石云, 于陳倉北阪城祠之. 其神或歲不至, 或歲數來, 來也常以夜, 光輝若流星, 從東南來集于祠城, 則若雄雞, 其聲殷云, 野雞夜雊. 以一牢祠, 命曰陳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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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를 건립한지 9년 후에 진문공은 기이한 돌을 얻었는데, 진창산(陳倉山) 북쪽의 산비탈에 성읍을 만들고 그 돌에게 제사를 지냈다. 돌의 신령은 어떤 해에는 오지 않다가 어떤 해에는 여러 차례 강림했다. 강림할 때는 항상 늦은 밤이었고, 어떤 때에는 유성처럼 찬란한 빛을 냈다. 동남쪽에서 사성(祠城)으로 모여들었고, 그 형상은 수탉과 같았으며 그 소리가 크고, 들 닭들도 야밤에 울었다. 매번 제사를 지낼 때에 (소, 돼지, 양) 한 마리씩 희생으로 바쳤으며, 그 이름을 진보(陳寶)라고 했다.
作鄜畤後七十八年, 秦德公旣立, 卜居雍, 「後子孫飮馬於河」, 遂都雍. 雍之諸祠自此興. 用三百牢於鄜畤. 作伏祠. 磔狗邑四門, 以禦蠱菑.
작부치후칠십팍년 진덕공기입 복거옹 '후자손음마어하' 수도웅 옹지제사자차흥 용삼백뢰어부치 작복사 책구읍사문 이어고치
부치가 건립된 지 78년 후, 진나라 덕공(德公)이 제왕으로 즉위하여 옹성(雍城)으로 도읍을 정하는 점을 쳤는데, 점괘가 '후대의 자손들이 말에게 황하의 물을 마시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옹성을 도읍으로 정했고, 옹성에 허다한 사당은 모두 이 시기부터 흥기했다. 매 번 부치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소, 돼지, 양 삼백 마리를 받쳤다. 또 복사(伏祠)를 건립했으며, 사방의 성문에 개의 사지를 찢어 걸어놓고 독충의 재앙을 방지했다.
德公立二年卒. 其後(六)[四]年, 秦宣公作密畤於渭南, 祭靑帝.
덕공입이년졸 기후육사년 진선송작밀치어위남 제청제
덕공(德公)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또 4년이 지난 뒤에 진(秦)나라 선왕(宣王)이 위수 남쪽에서 밀치(密畤)를 건립하고 청제(靑帝, 동제(東帝), 청황(靑皇) 등으로 불리기도 하면 봄을 주관하는 천제(天帝)임)에게 제사를 지냈다.
其後十四年, 秦公立, 病臥五日不寤;寤, 乃言夢見上帝, 上帝命繆公平晉亂. 史書而記藏之府. 而後世皆曰秦繆公上天.
기후십사년 진공립 병와오일불오 오 내언몽견상제 상제명무공평진란 사서이기장지부 이후세개왈진무공상천
14년이 지난 뒤에 진나라 목공(繆公)이 즉위했으나 병이 들어 5일 동안 인사 불성되었다. 깨어난 후에 스스로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는데, 상제는 목공에게 진(晉)나라의 내란을 평정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사관이 이 말을 기록하여 부(府)에다 소장했다. 후세에 모두 진목공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秦繆公卽位九年, 齊桓公旣霸, 會諸侯於葵丘, 而欲封禪. 管仲曰:「古者封泰山禪梁父者七十二家, 而夷吾所記者十有二焉. 昔無懷氏封泰山, 禪云云;虙羲封泰山, 禪云云;神農封泰山, 禪云云;炎帝封泰山, 禪云云;黃帝封泰山, 禪亭亭;顓頊封泰山, 禪云云;帝嚳封泰山, 禪云云;堯封泰山, 禪云云;舜封泰山, 禪云云;禹封泰山, 禪會稽;湯封泰山, 禪云云;周成王封泰山, 禪社首:皆受命然後得封禪.」桓公曰:「寡人北伐山戎, 過孤竹;西伐大夏, 涉流沙, 束馬懸車, 上卑耳之山;南伐至召陵, 登熊耳山以望江漢. 兵車之會三, 而乘車之會六, 九合諸侯, 一匡天下, 諸侯莫違我. 昔三代受命, 亦何以異乎?」於是管仲睹桓公不可窮以辭, 因設之以事, 曰:「古之封禪, 鄗上之黍, 北里之禾, 所以爲盛;江淮之閒, 一茅三脊, 所以爲藉也. 東海致比目之魚, 西海致比翼之鳥, 然后物有不召而自至者十有五焉. 今鳳皇麒麟不來, 嘉谷不生, 而蓬蒿藜莠茂, 鴟梟數至, 而欲封禪, 毋乃不可乎?」於是桓公乃止. 是歲, 秦繆公內晉君夷吾. 其後三置晉國之君, 平其亂. 繆公立三十九年而卒.
진목공즉위구년 제환공기패 회제후어채구 이욕봉선 관중왈 '고자봉태산선양보자칠십이가 이이오소기자십유이언 석무회씨봉태산 선운운 복희봉태산 선운운 신농봉태산 선운운 염제봉태산 선운운 황제종태산 선정정 전욱봉태산 선운 운 주성왕봉태산 선사수 개수명연후긋봉선' 환공왈 '과인북벌산성 과고죽 서벌대하 섭휴사 속마현거 상비이지산 남벌지소릉 등웅이산이망강한 병거지회삼 이승거지회육 구합제후 일광천하 제후막위아 석삼대수명 역하이이호' 어시관중도환공불가궁이사 인성지이거 왈 '고지봉선 호상지서 북리지화 소이위성 강회지한 일모삼척 소이위자야 동해지차목지어 서해치차익지조 연후물유불소이자지자십유오언 금봉황기힌불래 가곡불생 이봉호여수 치효수지 이욕봉선 무내불가호' 어시환공내지 시세 진목공내진군이오 기후삼치진국지군 평기란 목공입삼십구년이졸.
진목공이 즉위 9년에 당대엔 제나라 환공이 천하의 패권을 갖고 있어 제후들을 규구로 불러 회맹을 행하고 봉선제를 드리려는데 관중이 말하길 ‘고대에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양보(梁父)에서 땅에 제사를 지낼 때에 제후 72명이 되었다고 하나, 제가 기억하기는 12명이었습니다. 옛날 무회씨(無懷氏)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云云山)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복희씨(伏羲氏)는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신농씨(神農氏)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염제(炎帝)는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정정산(亭亭山)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황제(黃帝)는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정정산에서 봉선했으며, 전욱(顓頊)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곡(帝嚳)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요(堯)도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우(虞)의 순(舜)도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하(夏)나라의 우(禹)는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상(商)나라의 탕(湯)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운운산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주(周)나라의 성왕(成王)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두수산(杜首山)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으며, 이들은 모두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후에서야 봉선(封禪)할 수 있었습니다.’하니
제환공이 말하길 “과인은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孤竹)을 지났으며, 서쪽으로 대하(大夏)를 정벌하고 멀리 유사(流沙)를 건넜으며, 말의 고삐를 당기고 수레를 멈추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비이산(卑耳山)에 올랐다. 남쪽으로는 소릉(召陵)을 정벌하고 웅이산(熊耳山)에 올라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조망했다. 반란 평정을 위해 군사적 회맹을 세 차례 하였고, 정치나 외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화적 회맹을 여섯 차례 하여 모두 9차례 제후들을 소집하여 천하를 바로잡았다. 이때에 제후들은 한 사람도 나를 거역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옛날에 3대가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관중은 말로써 제환공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로 인하여 제단을 설치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렇게 그를 저지하면서 말했다. “고대에 봉선을 거행할 때에는 호상(鄗上)에서 나는 기장과 북리(北里)의 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곡물로 삼았으며, 장강와 회수 사이에서 자라는 삼척모(三脊茅, 세모난 띠. 띠는 본래 모가 둘 뿐인데 모가 셋이 있으면 매우 희귀한 식물임)로 신령의 자리를 엮었습니다.
동해에서 조공으로 바친 비목어(比目魚)와 서해에서 조공으로 바친 비익조(比翼鳥)가 있었고, 또한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바친 상서로운 물건이 15종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상서로운 물건도 없고 봉황과 기린도 내려오지 않았으며 좋은 곡식도 생산되지 않고, 들판에는 쑥과 잡초만 무성하며 올빼미 등 흉조만 조당(祖堂)에 출현할 뿐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봉선을 거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공은 봉선의식을 포기했다. 이 해에 진목공은 이오(夷吾)를 귀국시켜 진(晋)나라 군주로 삼았다. 이후 세 차례 진나라 군주를 세워서 내란을 평정했다. 목공은 재위 39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 봉封이란 옥으로 만든 판에 원문願文을 적어, 돌로 만든 상자에 봉하여 천신天神에게 비는 일이었고, 선禪이란 토단土壇을 만들어 지신地神에게 비는 일이었다.
其後百有餘年, 而孔子論述六蓺, 傳略言易姓而王, 封泰山禪乎梁父者七十餘王矣, 其俎豆之禮不章, 蓋難言之. 或問禘之說, 孔子曰:「不知. 知禘之說, 其於天下也視其掌.」詩云紂在位, 文王受命, 政不及泰山. 武王克殷二年, 天下未寧而崩. 爰周德之洽維成王, 成王之封禪則近之矣. 及後陪臣執政, 季氏旅於泰山, 仲尼譏之.
기후뱍유여년 이공자논술육예 전략언역성이왕 봉태산선호양부자칠십여왕의 기조두지례불장 개난언지 혹문체지설 공자왈 '부지 지체지설 기어천하야시기장' 시운주재위 문왕수명 정불급태산 무왕극은이년 천하미령이붕 원주것지흡유성왕 성왕지봉선즉근지의 급후배신집정 계씨여어태산 중니기지
이후 1백여 년이 지난 후에 공자(孔子)가 육예(六藝, 육경)를 논술하였다. 그 경전 중에는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자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술되었는데,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양보에서 땅에게 제사를 지낸 70여 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봉선의식에 쓰였던 제기와 제수 음식 등에 대한 기술은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기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체제(諦祭, 천자가 그 시조(始祖)의 묘에 올리는 제사)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씀하길 '그 뜻을 잘 모르겠소. 만약 체제에 대해서 잘 아는 자가 있다면 그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자기의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쉬울 것이오.'라고 했다.
시경(詩經)에 이르길 '주왕(紂王)이 재위에 있을 때에 문왕(文王)이 천명을 받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중에는 태산에 가지 않았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 2년 만에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주왕조는 오직 성왕 때에 이르러 덕정(德政)을 펼칠 수가 있었는데, 바로 성왕의 봉선의식이 그 도리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제후 각국의 대부들이 멋대로 집권하였고, 노(魯)나라의 계씨(季氏, 계손씨(季孫氏))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공자가 이를 비난했다.'고 하였다.
是時萇弘以方事周靈王, 諸侯莫朝周, 周力少, 萇弘乃明鬼神事, 設射貍首. 貍首者, 諸侯之不來者. 依物怪欲以致諸侯. 諸侯不從, 而晉人執殺萇弘. 周人之言方怪者自萇弘.
시시장홍이방사주영왕 제후막조주 주력소 장홍내명귀신사 설사리수 리수자 제후지불래자 의물괴욕이치제후 제후불종 이진인집살장홍 주인지언방괴자자장홍
이 시기에 장홍(萇弘)은 방사로써 주나라 영왕(靈王)을 섬겼는데, 이 때문에 제후들은 영왕에게 조회하러 오지 않았고, 주나라는 점차 미약해져서 장홍의 죄를 다스릴 힘이 없었다. 그래서 장홍은 공개적으로 귀신부리는 활동을 하였고, 이수(狸首: 삵의 머리)로 과녁 표적을 만들었는데, 이수는 조회하지 않는 제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귀신과 괴이한 힘에 의지하여 제후들을 오게 해 보려고 하였으나 제후들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마침내 장홍은 진(晉)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주 나라 사람들이 괴이한 방술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장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其後百餘年, 秦靈公作吳陽上畤, 祭黃帝;作下畤, 祭炎帝.
기후백여년 진영공작오양상치 제황제 작하치 제염제
백여 년 후에 진(秦)나라 영공(靈公)은 오양(吳陽)에 상치(上畤)을 설치하여 황제(黃帝)에게 제사를 지냈고, 하치(下畤)를 설치하여 염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後四十八年, 周太史儋見秦獻公曰:「秦始與周合, 合而離, 五百歲當復合, 合十七年而霸王出焉.」櫟陽雨金, 秦獻公自以爲得金瑞, 故作畦畤櫟陽而祀白帝.
후사십팔년 주태사담견헌공왈 '진시여주합 합이리 오백세당부합 합십칠년이패왕출언' 력영우금 진헌공자이위득금서 고작휴치역양이사백제.
이로부터 48년 후에 주나라 태사 담(儋)은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알현하면서 말하길 “처음에 진(秦)나라와 주(周)나라가 연합했다가 또 분리되고 5백년 후에 다시 연합하여 17년이 지나면 패왕(覇王)이 출현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역양(櫟陽,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염양구 무둔진관장(武屯鎭關莊)과 어보촌(御寶村) 사이)에서 비가 내렸는데, 그 속에서 황금이 떨어지니, 진나라 헌공은 스스로 오행(五行) 중에 금(金)의 상서로운 조짐을 얻었다고 여겨 역양에 휴치(畦畤)를 만들어 백제(白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其後百二十歲而秦滅周, 周之九鼎入于秦. 或曰宋太丘社亡, 而鼎沒于泗水彭城下.
기후백이시세이진멸주 주지구정입우진 혹왈송태구사망 이정몰우사수팽성하
그 후에 1백 20년이 지나자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하고 주나라의 구정(九鼎, 하나라 우 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들여 주조한 솥으로 중국통일을 상징함)이 진나라로 들어갔다. 혹자가 말하길 송(宋)나라의 태구(太丘, 지금의 하남(河南) 영성(永城) 서북쪽과 하읍(夏邑)의 경계)의 사직단(社壇)이 무너질 때에 구정도 팽성(彭城) 아래의 사수(泗水) 속으로 침몰되었다고 한다.
其後百一十五年而秦幷天下.
기후백일십오년이진병천하
그 후 115년이 지나고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하였다.
秦始皇旣幷天下而帝, 或曰:「黃帝得土德, 黃龍地螾見. 夏得木德, 靑龍止於郊, 草木暢茂. 殷得金德, 銀自山溢. 周得火德, 有赤烏之符. 今秦變周, 水德之時. 昔秦文公出獵, 獲黑龍, 此其水德之瑞.」於是秦更命河曰「德水」, 以冬十月爲年首, 色上黑, 度以六爲名, 音上大呂, 事統上法.
진시황기병천하이제 혹왈 '황제득토덕 황룡지인현 하득목덕 청룡지어교 초목창무 은득금덕 은자산일 주득화득 유적조지부 금진변주 수덕지시 석진문공출렵 획흑룡 차기수덕지서' 어시진경명하왈 '덕수' 이동시월위년수 수덕지시 도이육위명 음상대여 사통상법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제왕의 위에 오르자 혹자가 말하길 “황제(黃帝)씨는 오행 중에 토덕(土德)을 얻어 황룡과 큰 지렁이가 출현했다. 하(夏)나라는 목덕(木德)을 얻어 청룡(靑龍)이 교외에 머물렀고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은(殷)나라는 금덕(金德)을 얻어 산 속에서 은이 흘러나왔다. 주(周)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어 적색 까마귀의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다. 지금 진나라가 주나라의 천하를 개변시켜 수덕(水德)을 얻은 시기이다. 이전에 진문공(秦文公)이 사냥을 나갔다가 일찍이 한 마리의 흑룡(黑龍)을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수덕의 상서로움이다. 그래서 진나라는 황하(黄河)의 이름을 덕수(德水)라고 고쳤다. 겨울 10월을 한해의 처음으로 삼았고, 흑색을 숭상하고 척도의 표준을 6척으로 삼았으며 음성은 대려(大呂)을 숭상했고, 정사(政事)는 법령을 숭상했다.
卽帝位三年, 東巡郡縣, 祠騶嶧山, 頌秦功業. 於是徵從齊魯之儒生博士七十人, 至乎泰山下. 諸儒生或議曰:「古者封禪爲蒲車, 惡傷山之土石草木;埽地而祭, 席用葅秸, 言其易遵也.」始皇聞此議各乖異, 難施用, 由此絀儒生. 而遂除車道, 上自泰山陽至巓, 立石頌秦始皇帝德, 明其得封也. 從陰道下, 禪於梁父. 其禮頗采太祝之祀雍上帝所用, 而封藏皆袐之, 世不得而記也.
즉제위삼년 동순군현 사추역산 송진공업 어시징종제노지유생박사칠십인 지호태산하 제유생혹의왈 '고자봉선위포거 오상산지토석초목 소지이제 석용저갈 언기역준지' 시황문차의갃각승이 난시용 유차출유생 이수제차도 상자태산양지전 입석송진시황제덕 명기득봉야 종음도하 선어양보 기례파체태축지사옹상제소용 이봉장개비지 세부득이기야
재위 3년 되던 해에 동방의 군현으로 순찰 나가서 추역산(騶嶧山)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진나라의 공덕을 칭송했다. 그리고 제(齊), 노(魯) 지역의 유생(儒生), 박사 70여 명을 뽑아 그들을 거느리고 태산 아래에 도착했다. 여러 유생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길 '옛날에 봉선(封禪)은 부들로 짠 수레를 이용했는데, 이는 산에 흙과 돌, 초목이 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또 깨끗이 땅을 쓸어서 제사를 지내는 마당으로 삼고 자리를 마른 풀과 볏짚으로 짰는데 이는 용이하게 처리하고 쫓아서 행하기 쉽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라고 건의했다. 진시황은 그들의 의론이 각기 서로 다르고 이치에 부합하지 않아서 실행하기 어렵다고 여겨서 유생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수레가 다니는 도로를 말끔하게 수리하도록 하고, 태산의 남쪽부터 정상에까지 등반했으며, 돌비석을 세워서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고 봉선하는 도리를 천명하였다. 그런 뒤에 북쪽 길로 하산하여 양보산(梁父山)에서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 의례는 태축(太祝, 제사를 주관하는 관리)이 옹성(雍城)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낼 때 썼던 의식을 많이 채용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봉선의식은 비밀로 붙였고, 세상 사람들은 그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始皇之上泰山, 中阪遇暴風雨, 休於大樹下. 諸儒生旣絀, 不得與用於封事之禮, 聞始皇遇風雨, 則譏之.
시황지상태산 중판우폭풍우 휴어수하 제유생지출 부득여용어봉사지례 문시황우풍우 즉기지
진시황이 태산에 올라가다가 산 중턱에서 폭풍우를 만나 큰 나무 밑에서 멈추기를 기다리는데, 여러 유생들이 이미 진시황에게 쫓겨나 봉선의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가 진시황이 폭우를 만나 피했다는 말을 듣고 조롱했다.
於是始皇遂東遊海上, 行禮祠名山大川及八神, 求僊人羨門之屬. 八神將自古而有之, 或曰太公以來作之. 齊所以爲齊, 以天齊也. 其祀絶莫知起時. 八神:一曰天主, 祠天齊. 天齊淵水, 居臨菑南郊山下者. 二曰地主, 祠泰山梁父. 蓋天好陰, 祠之必於高山之下, 小山之上, 命曰「畤」;地貴陽, 祭之必於澤中圜丘云. 三曰兵主, 祠蚩尤. 蚩尤在東平陸監鄕, 齊之西境也. 四曰陰主, 祠三山. 五曰陽主, 祠之罘. 六曰月主, 祠之萊山. 皆在齊北, 並勃海. 七曰日主, 祠成山. 成山斗入海, 最居齊東北隅, 以迎日出云. 八曰四時主, 祠琅邪. 琅邪在齊東方, 蓋歲之所始. 皆各用一牢具祠, 而巫祝所損益, 珪幣雜異焉.
어시황수동유해상 행예사명산대천급팔신 구선인선문지속 팔신장자고이유지 혹왈태공이래작지 제소이위제 이천제야 기사절막지기시 팔신 일왈천주 사천제 전제연수 거임치남교산하자. 이왈지주 사태산양보 개천호음 사지필어고산지하 소산지상 명왈 '치' 지귀양 제지필어택중환구운 삼왈병주 사치우. 치우재동평육염향 제지서경야. 사왈음주 사삼산 오왈양주 제지부. 육왈월주 사지래산 개재제북 병발해 칠왈일주 사성산 성산주입해 최거제동북우 이영일출운 팔왈사시주 사랑야 랑야재제동방 개세지소시 새각용일뢰구사 이무축소손익 규폐잡이언
봉선의식을 마치자 진시황은 계속 동쪽으로 가 바닷가에 도착하여 유람하면서 한편으로 명산대천 및 팔신(八神)에게 제사지내고, 신선과 선문(羡門, 고대 선인이었던 선문자고(羨門子高)를 지칭) 같은 무리를 향하여 복을 빌었다. 팔신은 예부터 있었는데, 혹자가 말하길 제 나라 태공(太公)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나라의 이름이 제가 된 것은 바로 팔신의 하나인 천제신(天齊神)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제신의 제사가 끊어져 언제 시작된 때를 알지 못했다. 8신이란 첫째는 천주(天主)로 천제(天齊)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천제는 천제연 강가로 임치(臨菑) 남쪽 교외 산 아래에 위치한다. 둘째는 지주(地主)로 태산 아래의 양보산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천성이 음기를 좋아하여 반드시 높은 산 아래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야하며 이를 치(畤)라고 일컫는다. 지신은 양기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낮은 웅덩이 안의 언덕 위에서 제사를 지낸다. 셋째는 병주(兵主, 전쟁의 신)로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낸다. 치우의 사당은 동평육(東平陸)의 감향(監鄕)에 있는데, 제나라 서쪽 변경이다. 넷째는 음주(陰主)로 삼산(三山)에서 제사를 지낸다. 다섯째는 양주(陽主)로 지부산(之罘山)에서 제사지낸다. 여섯째는 월주(月主)로 내산(萊山)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상 모두 제나라의 북쪽에 있고 발해에 인접해 있다. 일곱째는 일주(日主)로 성산(成山)에서 제사지낸다. 성산은 가파른 절벽을 굽이굽이 돌아 바다로 들어가고, 제나라 동북쪽의 모퉁이에 위치한다. 이곳은 일출을 맞이할 수 있는 지역이다. 여덟째는 사시주(四時主)로 낭야산(琅邪山)에서 제사를 지낸다. 낭야산은 제나라 동부에 있으며 한 해가 시작되는 곳이다. 팔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모두 한 마리의 희생을 받치고,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은 제수용품으로 쓰는 옥과 비단 등의 수량을 조절할 수 있다.
二世元年, 東巡碣石, 並海南, 歷泰山, 至會稽, 皆禮祠之, 而刻勒始皇所立石書旁, 以章始皇之功德. 其秋, 諸侯畔秦. 三年而二世弑死.
이세원년 동순갈석 병해남 역태산 지회계 개예사지 이각륵시왕소입석서방 이장시황지공덕 기추 제후반진 삼년이이세시사
2세황제는 즉위 원년에 동쪽으로 갈석(碣石)을 순유하고, 남쪽으로 바닷가로 내려와, 태산을 지나고 회계산을 지나면서 모두 제를 올리고 또한 진시황이 세운 비석 옆에 진시황의 공덕비를 세웠는데 가을,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해, 3년에 2세가 시해되었다.
始皇封禪之後十二歲, 秦亡. 諸儒生疾秦焚詩書, 誅僇文學, 百姓怨其法, 天下畔之, 皆訛曰:「始皇上泰山, 爲暴風雨所擊, 不得封禪.」此豈所謂無其德而用事者邪?
시황봉선지후십이세 진망 제유생질진분시서 주륙문학 백성원기법 천하반지 개와왈 '시황상진산 위촉풍우소격 부득봉선' 차이소위무기덕이용사자아?
진시황이 봉선을 행한 지 12년 후 진나라는 멸망했다. 당시 유생들은 진시황이 『시(詩)』와 『서(書)』를 불태우고, 문학사인(文學士人)들을 주살한 것에 대해 염증을 느꼈고, 백성들도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을 원망하여,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같이 '진시황이 태산에 올랐으나, 폭풍우의 저지를 받아 봉선의 예를 행할 수 없었다.'라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바로 소위 그 덕이 없는 이가 봉선을 행할 수 없다는 의미다.
昔三代之(君)[居]皆在河洛之閒, 故嵩高爲中嶽, 而四嶽各如其方, 四瀆咸在山東. 至秦稱帝, 都咸陽, 則五嶽、四瀆皆幷在東方. 自五帝以至秦, 軼興軼衰, 名山大川或在諸侯, 或在天子, 其禮損益世殊, 不可勝記. 及秦幷天下, 令祠官所常奉天地名山大川鬼神可得而序也.
석삼대지군거개재하락지한 고숭고위중악 이서악각여기방 사독함재산동 지진칭제 도함양 즉오악 사독새병재동방 자오제이지진 일흥일쇠 명산대천혹재제후 혹재천자 기예손익세수 불가승기 급진병천하 영사관소상봉천지명산대천귀신가득이서야
옛날의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수도가 모두 황하와 낙하(洛河)의 사이에 있었으므로, 숭고(嵩高=숭산)를 중악(中嶽)으로 정하고 기타 4악(四嶽)이 각자의 방향에 의거해 명명되었으며, 4독(四瀆)은 모두 산동(山東) 지역에 있었다. 진나라가 황제라고 지칭한 후, 함양(咸陽)에 읍도하자, 5악과 4독은 모두 수도의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5제(五帝)부터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흥망이 상호 교체되면서도, 명산대천이 제후의 경내에 있기도 했으며, 혹은 천자의 영토 안에 있기도 해, 그 제사의례 규모의 손익이 때때로 달라 일일이 모두 헤아릴 수 없었는데 진나라의 천하통일후에서야 사관(祠官)에게 명해 일상적으로 제사 지내던 천지와 명산대천들의 귀신들을 차례와 제사 규모를 기술할 수 있었다.
於是自殽以東, 名山五, 大川祠二. 曰太室. 太室, 嵩高也. 恆山, 泰山, 會稽, 湘山. 水曰濟, 曰淮. 春以脯酒爲歲祠, 因泮凍, 秋涸凍, 冬塞禱祠. 其牲用牛犢各一, 牢具珪幣各異.
어시자효이동 명산오 대천사이 왈태실 숭고야 항산 태산 회계 상산. 수왈제 왈회 춘이포주위세시 인반동 추학동 동한도사 기생용우독각일 뢰구규폐각이
당시 효산(殽山) 동쪽으로 부터 명산은 5개, 대천은 2개가 있었다. 태실(太室)이라고 칭하는 산이 있었는데, 태실은 바로 숭산(嵩山)을 말한다. 또한 항산(恒山), 태산(泰山), 회계산(會稽山), 상산(湘山)이 있다. 2개의 대천에는 제수(濟水)와 회수(淮水)가 있다. 봄에는 고기와 술로써 그해의 제사를 거행했으며, 또한 날이 따뜻해 강물이 녹을 때, 가을에 일찍 강물이 얼 때, 겨울에 빙설로 인해 길이 막힐 때 제사를 거행했다. 제사의 제물로는 각기 송아지 한 마리를 사용했으며, 옥과 비단 등의 제물은 각기 달랐다.
自華以西, 名山七, 名川四. 曰華山, 薄山. 薄山者, 衰山也. 岳山, 岐山, 吳岳, 鴻冢, 瀆山. 瀆山, 蜀之汶山. 水曰河, 祠臨晉;沔, 祠漢中;湫淵, 祠朝那;江水, 祠蜀. 亦春秋泮涸禱塞, 如東方名山川;而牲牛犢牢具珪幣各異. 而四大冢鴻、岐、吳、岳, 皆有嘗禾.
자화이서 명산칠 명천사 왈화산 박산 박산자 쇠산야 악산 기산 오악 홍총 독산 독산 촉지문산. 수왈하 사임진 면 사한중 추연 사조나 강수 사촉. 역춘춘반학도새 여동방명산천 이새우뢰구규폐각이 이사대총옹 시 오 악 개유상화
화현(華縣)을 서쪽으로 해 제사 지내는 곳은 명산은 7개, 대천은 4개가 있었다. 화산(華山), 박산(薄山)이라는 산이 있다. 박산은 쇠산(衰山)을 말한다. 또한 악산(嶽山), 기산(岐山), 오악(吳嶽), 홍총(鴻冢), 독산(瀆山)이 있다. 독산은 촉(蜀)의 문산(汶山)을 말한다. 4대 강물 중, 황하(黃河)는 임진(臨晉)에서 제사지내며, 면수(沔水)는 한중(漢中)에서 제사지내며, 추연(湫淵)은 조나(朝那)에서 제사지내며, 강수(江水)는 촉군(蜀郡)에서 제사지냈다. 또한 봄에 얼음이 녹을 때와 가을에 강물이 얼 때 제사를 지냈는데, 동방의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으나, 제사에 사용한 송아지, 옥, 비단 등 제품은 달랐다. 4대 명산의 산봉우리 홍(鴻), 기(岐), 오(吳), 악(嶽)에 모두 상화(嘗禾=햇곡식으로 제사함)가 있었다.
陳寶節來祠. 其河加有嘗醪. 此皆在雍州之域, 近天子之都, 故加車一乘, 騮駒四.
진보절래사 기하가유상료 차개재옹주지역 근천자지도 고가거일승 유구사
진보제 기간에 제를 드리러 오는데 황하의 제사에서는 탁주를 추가했다. 이 제사처들은 모두 옹주(雍州) 지역 내에 있고 또한 천자의 도성에서 가까웠으므로, 제사에는 수레 한 대와 월따말[騮駒] 네 필이 끄는 수레를 더했다.
霸、産、長水、灃、澇、涇、渭皆非大川, 以近咸陽, 盡得比山川祠, 而無諸加.
패 산 장수 풍 노 경 위개비대천 이근함양 진득차산천사 이무제가
패수(覇水), 산수(産水), 장수(長水), 풍수(澧水), 노수(澇水), 경수(涇水), 위수(渭水)는 모두 대천은 아니었다. 허나 함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명산대천의 제사로 취급되나 더 해진 제사용품은 없었다.
汧、洛二淵, 鳴澤、蒲山、嶽壻山之屬, 爲小山川, 亦皆歲禱塞泮涸祠, 禮不必同.
견 낙이연 명택 포산 옥서산지속 위소산천 역개세도샤반헉사 예불필동
견수(汧水), 낙수(洛水), 명택(鳴澤), 포산(蒲山), 악서산(嶽壻山)의 지류들은 모두 작은 개울 정도로, 매년 빙설로 길이 막힐 때, 해빙될 때, 하천이 고갈될 때 축복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의례가 여타 산천제와 같지는 않았다.
而雍有日、月、參、辰、南北斗、熒惑、太白、歲星、塡星、[辰星]、二十八宿、風伯、雨師、四海、九臣、十四臣、諸布、諸嚴、諸逑之屬, 百有餘廟. 西亦有數十祠. 於湖有周天子祠. 於下邽有天神. 灃、滈有昭明、天子辟池. 於(社)[杜]、亳有三社主之祠、壽星祠;而雍菅廟亦有杜主. 杜主, 故周之右將軍, 其在秦中, 最小鬼之神者. 各以歲時奉祠.
이옹유일 월 삼 진 남북두 형혹 태백 세성 전성 진성 이십팔수 풍백 우사 사해 구신 십사신 제포 제엄 제구지속 백유여묘 서역유수십사 어호유주천자사 어하규유천신 풍 호유소명 천자벽지 어사 호유삼사주지사 수성사 이옹관묘역유두주 고주지우장군 기재진중 최소귀지신자 각이세시봉사
옹현에는 일신(日神), 월신(月神), 삼(參), 진(辰), 남북두(南北斗), 형혹(熒惑), 태백(太白), 세성(歲星), 전성(塡星), 진성(辰星), 28수(二十八宿), 풍백(風伯), 우사(雨師), 사해(四海), 9신(九臣), 14신(十四臣), 제포(諸布), 제엄(諸嚴), 제구(諸逑) 등의 백여 개의 사당이 있었다. 서쪽엔 몇 십 개의 사당이 있고, 호(湖)에는 주 천자의 사당이 있으며, 하규(下邽)에는 천신이 있다. 풍수(澧水), 호수(滈水)에는 소명(昭明) 사당과 천자벽지(天子辟池) 사당이 있고, 두(杜)의 박(毫)에는 3개의 두주(杜主) 사당과 수성(壽星) 사당이 있으며, 옹현의 간묘(菅廟) 중에도 두주 사당이 있었다. 두주는 원래 주나라의 우장군(右將軍)으로, 진중(秦中)의 소묘(小廟) 중 가장 영험이 있는 사당이다. 이들 여러 성수(星宿)와 신령에 대해 매년 계절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唯雍四畤上帝爲尊, 其光景動人民唯陳寶. 故雍四畤, 春以爲歲禱, 因泮凍, 秋涸凍, 冬塞祠, 五月嘗駒, 及四仲之月(祠若)月祠, [若]陳寶節來一祠. 春夏用騂, 秋冬用騮. 畤駒四匹, 木禺龍欒車一駟, 木禺車馬一駟, 各如其帝色. 黃犢羔各四, 珪幣各有數, 皆生瘞埋, 無俎豆之具. 三年一郊. 秦以冬十月爲歲首, 故常以十月上宿郊見, 通權火, 拜於咸陽之旁, 而衣上白, 其用如經祠云. 西畤、畦畤, 祠如其故, 上不親往.
유옹사치상제위존 기솽경동인민유진보 고옹사지 춘이위세도 인반동 추학동 동색사 오월상구 금사충지월사약월사 약진보절래일사 춘하용성 추동용류 치구사필 목우용란거일사 목우거마일필 각여기제색 황독고각사 규폐각유수 개생예매 무조두지구 삼년일교 진이동시월위세수 고상이시월상수교현 통권화 배거함양지방 이의상백 이용여경사우 서치 휴치 사여기고 상불친왕
옹현에 있는 4개 제단의 상제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며, 제사장면이 가장 감동적인 제사는 진보제이다. 옹현의 4개 제단에서는 봄에 그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거행하며, 그 외에 얼음이 풀리거나 가을에 물이 마르고 일찍 추워져서 얼음이 얼거나 겨울에 폭설로 길이 막힐 때 제사 지내며, 5월의 상구(嘗駒) 제사와 4계절 중간에 거행하는 월사(月祀)가 있다. 진보절에 한 번 지낸다. 봄과 여름에는 적색 말을 사용하며, 가을과 겨울에는 유(騮)를 사용한다. 치 제사에서는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하며, 4 바퀴 축에 용무늬를 한 수레나 나무로 만든 마차를 쓰곤 한다. 그 색깔은 각기 그 황제의 기본색에 따른다. 제물은 어린 황색 소와 어린 양은 각기 네 마리이고, 옥과 비단은 나름 일정한 수량이 있으며, 소와 양은 산 채로 매장하며, 祭器는 사용하지 않는다. 교외 제사는 3년에 한 번 있는데 진나라는 겨울 10월을 그해의 시작으로 여기므로, 천자는 매년 10월에 교제를 지낸 후, 봉화를 궁전까지 이르게 하고 함양궁 부근에서 절을 올리는데,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기타 용구는 일반의 제사와 같다. 서치(西畤), 휴치(畦畤)는 진나라의 통일 이전과 같으며, 천자가 친히 가지 않는다.
諸此祠皆太祝常主, 以歲時奉祠之. 至如他名山川諸鬼及八神之屬, 上過則祠, 去則已. 郡縣遠方神祠者, 民各自奉祠, 不領於天子之祝官. 祝官有袐祝, 卽有菑祥, 輒祝祠移過於下.
제차사개태축상주 이세시봉사지 지여타명산천제귀급팔신지속 상과즉사 거즉이 군현원방신사자 민각자봉사 불령어천자지축관 축관유비축 즉유치상 첩축사치과어하
이 모든 제사들은 태축(太祝)이 주관해, 매년 기일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그 외 명산대천, 모든 귀신, 8신 부류에 대해서는, 천자가 그것들의 제단을 지날 때 제사 지내며 떠나면 그만둔다. 군현 및 멀리 떨어진 곳의 사당에 대해서는 천자가 명한 제사 주관 관원의 관리대상에서 제외되어, 그곳의 백성 스스로가 제사 지낸다. 주관 관원 중 비축(袐祝)이 있는데, 만약 재앙을 당하게 되면 그는 제사를 거행해 축복을 기원하며, 그 재앙을 관원과 백성에게 전가한다.
漢興, 高祖之微時, 嘗殺大蛇. 有物曰:「蛇, 白帝子也, 而殺者赤帝子.」高祖初起, 禱豐枌楡社. 徇沛, 爲沛公, 則祠蚩尤, 釁鼓旗. 遂以十月至灞上, 與諸侯平咸陽, 立爲漢王. 因以十月爲年首, 而色上赤.
한흥 고조지미시 상살대사 유물왈 '사 백제자야 이살자적제자' 고조초기 도풍분유사 순패 위패공 즉사치우 흔고기 수이시월지파상 여제후평함양 입위한양 인이시월위연수 이색상적
한(漢)나라가 막 일어날 때 한 고조(高祖=유방)가 미미할 때 큰 뱀을 죽인 적이 있다. 어떤 귀신이 “이 뱀은 백제(白帝)의 아들로, 그 뱀을 죽인 자는 적제(赤帝)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고조가 처음 병사를 일으켰을 때, 풍현(豐縣)의 분유(枌楡)사당에서 제사 지냈다. 패(沛)를 점령한 후 패공(沛公)이라고 칭하고서, 곧바로 치우(蚩尤)에게 제사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 마침내 10월 파상(灞上: 파수 근처)에 도달해 제후들과 함께 함양을 평정하고, 스스로 한왕(漢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10월을 1년의 처음으로 여겼으며, 붉은 색을 숭상했다.
二年, 東擊項籍而還入關, 問:「故秦時上帝祠何帝也?」對曰:「四帝, 有白、靑、黃、赤帝之祠.」高祖曰:「吾聞天有五帝, 而有四, 何也?」莫知其說. 於是高祖曰:「吾知之矣, 乃待我而具五也.」乃立黑帝祠, 命曰北畤. 有司進祠, 上不親往. 悉召故秦祝官, 復置太祝、太宰, 如其故儀禮. 因令縣爲公社. 下詔曰:「吾甚重祠而敬祭. 今上帝之祭及山川諸神當祠者, 各以其時禮祠之如故.」
이년 동격항적이환입관 무 '고진시상제사하제야' 대왈 '사제 유백 청 황 적제지사' 고조왈 '오문천유오제 이유사 하야?' 막지기설. 어시고조왈 '오지지의 냐내아이구오야' 내입흑제사 명왈북치 유사진사 상불친왕 슬소고진축관 복피태축 태제 여기고의례. 인영현위공사. 하조왈 '오심중사이경제 금상제지제급산천제신당사자 각이기시예사지여고'
2년째 되던 해에 동쪽의 항우를 치고 돌아와 (關中)에 들면서 묻기를 '옛날 진나라 때 제사 지냈던 상제들은 누구들인가?'라고 묻자, 답하길 '모두 4명의 상제들로서, 백제(白帝), 청제(靑帝), 황제(黃帝), 적제(赤帝)의 사당이 있습니다.'라 했다. 고조가 묻길 '내 듣기론 하늘에 5제(五帝)가 있다고 들었는데, 4제(四帝)만 있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하니,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고조가 '나는 안다. 이는 5제의 수를 채우려고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또한 흑제(黑帝)의 사당을 건립해, 이를 북치(北畤)라고 칭했다. 주관 관원이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천자는 친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진나라의 옛 축관(祝官)들을 불러 태축(太祝), 태재(太宰)를 다시 두었으며, 의례도 전과 같이 했다. 또한 각 현에 관부(官府)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을 설치하게 명했다. 조서로써 '나는 사당을 중시하며 제사를 공경하고 중히 여긴다(敬重). 지금 상제 및 산천의 신령에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각자가 때 맞춰 제를 올리되 옛날 방식으로 드려라' 명했다.
後四歲, 天下已定, 詔御史, 令豐謹治枌楡社, 常以四時春以羊彘祠之. 令祝官立蚩尤之祠於長安. 長安置祠祝官、女巫. 其梁巫, 祠天、地、天社、天水、房中、堂上之屬;晉巫, 祠五帝、東君、雲中[君]、司命、巫社、巫祠、族人、先炊之屬;秦巫, 祠社主、巫保、族纍之屬;荊巫, 祠堂下、巫先、司命、施糜之屬;九天巫, 祠九天:皆以歲時祠宮中. 其河巫祠河於臨晉, 而南山巫祠南山秦中. 秦中者, 二世皇帝. 各有時(月)[日].
후사세 천하이정 조어사 금풍근치분유사 상이사시춘이양체사지. 영축관입치우지사어장안. 장안치사축관 여무. 기양무 사천 지 천사 천수 방중 당상지속 진무 사오제 동군 영중군 사명 무사 무사 족인 선취지속 구천무 사구천 개이세시사궁중. 기하무사하어임진 이남산무사남산진중 진중자 이세황제 각유시월일.
4년 후,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조서로써 어사에게 ‘지금의 풍현에 있는 분유 사당을 잘 운영하도록 하여 시절에 맞춰 제사를 거행하며, 봄에는 양과 돼지로써 제사 지낼 것’을 명했다.
축관에게는 장안(長安)에 치우의 사당을 건립하라고 명했다. 장안에 사축관(祠祝官), 여무(女巫)의 제도를 설치했다. 그중 양무(梁巫)는 천, 지, 천사(天社), 천수(天水), 방중(房中), 당상(堂上)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진무(晉巫)는 오제(五帝), 동군(東君), 운중군(雲中君), 사명(司命), 무사(巫社), 무사(巫祠), 족인(族人), 선취(先炊)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진무(秦巫)는 사주(社主), 무보(巫保:卽上文三社主也), 족루(族累)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형무(荊巫)는 당하(堂下), 무선(巫先), 사명(司命), 시미(施糜)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구천무(九天巫)는 구천(九天) 신령의 제사를 담당하게 했는데, 모두 매년 시기에 맞추어 궁중에서 제사지냈다. 그중 하무(河巫)는 임진에 내려가서 황하의 신령에게 제사지내며, 남산무(南山巫)는 남산에서 진중(秦中)의 악귀에게 제사 지냈다. 진중의 악귀는 진(秦) 2세를 가리킨다. 이상의 모든 제사들은 모두 각기 규정된 시일이 있다.
* 族人: 친척
* 先炊: 炊母의 神인 先炊를 別稱한 것인 듯하다. 衣服·柴·糧이라 하여 燃料炊事가 衣糧과 한가지 人生生活에 필요한 要素임을 생각하면 이 역시 蠶神에 다음가는 神으로 위할 수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169쪽).
其後二歲, 或曰周興而邑邰, 立后稷之祠, 至今血食天下. 於是高祖制詔御史:「其令郡國縣立靈星祠, 常以歲時祠以牛.」
기후이세 혹왈주흥이읍태 입후직지사 지금혈식천하 어시고조제조어사 '시영군국현립영성사 상이세시사이우'
2년 후, 어떤 사람이 ‘주나라가 개국하자 태(邰)를 도읍으로 후직(后稷)의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국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조는 어사에게 조서로써 “각 군과 제후국, 그리고 현에 영성(靈星) 사당을 세우고, 항시 시기에 맞추어 소를 제물로써 제사를 거행하라.”라고 명했다.
高祖十年春, 有司請令縣常以春(三)[二]月及(時)臘祠社稷以羊豕, 民里社各自財以祠. 制曰:「可.」
고조십냔춘 유사청영현상이춘삼월급시렵사직이양돈 민리사각자제이사 제왈 '가'
고조 10년 봄, 주관 관원들이 천자에게 ‘각 현은 매년 봄 2월과 12월에 양과 돼지로써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지내며, 민간의 토지신에게는 각자 제물을 징수해 제사 지낼 수 있도록 명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허락한다.”고 말했다.
其後十八年, 孝文帝卽位. 卽位十三年, 下詔曰:「今袐祝移過于下, 朕甚不取. 自今除之.」
기후십팔년 효문제즉위 즉위십삼년 하조왈 '금비축이과우하 짐심불취 자금제지'
18년 후,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했다. 즉위한 지 13년 되던 해에 조서로써 “현재의 비축관(袐祝官)이 재앙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전가하는데, 짐이 받아들일수 없으니, 지금부터 이 제도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始名山大川在諸侯, 諸侯祝各自奉祠, 天子官不領. 及齊、淮南國廢, 令太祝盡以歲時致禮如故.
시명산대천재제후 제후축각자봉사 천자관불령 급제 회남국폐 영태축진이세시치예여고.
제후 영토 내 명산대천은 제후들이 나름 제를 올리게 했고 천자의 제관은 간여치 않았지만, 제(齊)나라와 회남국(淮南國)이 아예 제사를 없애자, 임명한 태축에게 옛 전통 대로 시기에 맞춰 최선을 다하라 명했다.
是歲, 制曰:「朕卽位十三年于今, 賴宗廟之靈, 社稷之福, 方內艾安, 民人靡疾. 閒者比年登, 朕之不德, 何以饗此? 皆上帝諸神之賜也. 蓋聞古者饗其德必報其功, 欲有增諸神祠. 有司議增雍五畤路車各一乘, 駕被具;西畤畦畤禺車各一乘, 禺馬四匹, 駕被具;其河、湫、漢水加玉各二;及諸祠, 各增廣壇場, 珪幣俎豆以差加之. 而祝釐者歸福於朕, 百姓不與焉. 自今祝致敬, 毋有所祈.」시세 제왈 '진즉위십삼년우금 뢰종묘지령 사직지복 방내애안 민인미질 한자차년등 집지부덕 하이향차 개상제제신지사야 개문고자향기덕필보기공 욕유증제신사 유사의증옹오치로거각일승 가피구 서치휴치우거각일승 우마사필 가피구 기하 푸 한수가옥각이 급제사 각증광단장 규폐조두이차가지 이축리자귀복어짐 백성불여언 자긍축치경
그 해, 효문제가 제서(制書)를 반포해 '짐이 황제에 즉위한 지 금년으로 13년째 되었다. 그동안 종묘의 신령과 사직의 축복에 의지해, 국가는 안정이 지속되었고 백성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았으며, 또한 매년 풍년을 맞이했다. 짐이 부덕함에도, 어찌 이러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모두 상제와 여러 신들이 내린 은덕 탓이도다. 짐은 고대로부터 신령의 은덕을 입으면, 반드시 그 공로에 보답해야 한다고 들은 바 있어, 여러 신들에게 제사의례를 확대하고 싶다. 주관 관원들은 옹현의 5치(雍 五畤)에는 각기 수레 한 대 및 수레의 장식품을 추가하고, 서치(西畤), 휴치(畦畤)에는 우차 한 대, 우마 네 필 및 수레의 장식품을 추가하고, 황하(黃河), 추수(湫水), 한수(漢水)에는 각기 옥 2개씩을 증가하라. 또한 여러 사당들의 제사장소를 넓히고, 옥, 비단, 제기 등을 차등해 지급하게 하라. 지금까지 축관들이 모두 짐의 축복만 빌어 백성들은 축복을 받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는 축관들이 신령에게 제사를 거행할 때, 짐을 위해 기원하지 말라.'고 명했다.
魯人公孫臣上書曰:「始秦得水德, 今漢受之, 推終始傳, 則漢當土德, 土德之應黃龍見. 宜改正朔, 易服色, 色上黃.」
노인공손신상서왈 '시진득수덕 금한수지 추동시전 즉한당토덕 토덕지응황룡현 의개정삭 역복색 색상황'
노(魯)나라의 방사 공손신(公孫臣)은 “원래 진나라는 수덕(水德)을 받았고, 지금의 한나라는 이를 계승했는데, 5덕(五德)의 순환에 의거해 추산해보면, 한나라는 마땅히 토덕(土德)을 받았으니, 토덕을 밝히는 증거가 황룡이 출현할 것이니 마땅히 역법을 개정하고, 복식의 색깔을 바꾸며, 황색을 숭상해야 할 줄로 아룁니다.”라고 상소했다.
是時丞相張蒼好律曆, 以爲漢乃水德之始, 故河決金隄, 其符也. 年始冬十月, 色外黑內赤, 與德相應. 如公孫臣言, 非也. 罷之. 後三歲, 黃龍見成紀. 文帝乃召公孫臣, 拜爲博士, 與諸生草改曆服色事.
시시승상장창호율력 이위한내수덕지시 소하결금제 기부야 연시종시월 색외흑내적 여덕상응 여공손신언 비야 태지 후삼세 황룡현성기 문제내소공손신 배위박사 여제생초개력복색사
이때 승상 장창(張蒼)이 율력에 빠져 한나라가 시작은 수덕이라 봤고 황하의 제방이 터진 것이 그 징조라고 여겼다. 10월을 그해의 시작으로 하고, 색깔은 밖은 검은색, 안은 붉은 색을 숭상해야 수덕과 부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장창의 의견은 공손신이 말한 바와는 달라서 그의 견해는 묵살되었다. 그 3년 후, 황룡이 나타나 새로운 紀元을 만드니 문제가 공손신을 불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여러 유생들과 함께 역법을 개정하고 복식의 색깔을 개정하는 일의 초안을 세우라고 명했다.
其夏, 下詔曰:「異物之神見于成紀, 無害於民, 歲以有年. 朕祈郊上帝諸神, 禮官議, 無諱以勞朕.」有司皆曰「古者天子夏親郊, 祀上帝於郊, 故曰郊」.
기하 하조왈 '이물지신현우성기 무해어민 세이유년 짐사교상제제신 예관의 무위이노짐' 유사개왈 ' 고자천자하친교 사상제어교 고왈교'
그해 여름, 조서를 내려 '기이한 신물=황룡이 나타나 紀元이 되었으니, 백성들에게는 피해가 없으며, 매년 수확이 좋아지도록 짐은 교외에서 상제와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니, 예관(禮官)들은 방안을 상의해, 허심탄회하게 짐에게 말하게 해라.'라고 말하니, 주관 관원들은 '옛날의 천자는 여름에 친히 교제사를 거행했는데,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 지냈기 때문에, 이를 교사(郊祠)라고 칭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於是夏四月, 文帝始郊見雍五畤祠, 衣皆上赤.
어시하사월 문제시교현옹오치사 의갸상적
그리하여 이해 여름 4월중에 문제가 수차례 친히 옹성의 5치 사당에서 제사를 거행했으며, 예복은 적색을 숭상했다.
其明年, 趙人新垣平以望氣見上, 言「長安東北有神氣, 成五采, 若人冠絻焉. 或曰東北神明之舍, 西方神明之墓也. 天瑞下, 宜立祠上帝, 以合符應」.
기명년 조인신원평이망기현상 언 '장안동북유신기 성오채 약인관면언 혹왈동북신명지사 서방신면지묘 천서하 의입사상제 이합부응'
그 다음해, 조(趙)나라 사람 신원평(新垣平)은 구름의 기운을 보고서, 황제에게 '장안의 동북쪽에 신기(神氣)가 나타났는데, 5색으로 마치 관면(冠冕)을 쓴 관리의 형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북쪽은 신명(神明)이 거주하는 곳이며, 서쪽은 신명의 묘지라고 말합니다. 지금 북쪽에서 신기가 나타났음은 하늘이 내린 길조이니, 마땅히 사당을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거행해야만 하늘에서 내린 그 길조에 부응하게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於是作渭陽五帝廟, 同宇, 帝一殿, 面各五門, 各如其帝色. 祠所用及儀亦如雍五畤.
어시작위양오제묘 동자 제일전 면각오문 각여기제색 사소용급의역여옹오치
그리하여 위양(渭陽)에 5제의 사당을 건립했는데, 5제가 한 건물에 있으며, 5제는 각각의 전에 거하게 했다. 마주 보고 각기 5개의 문이 있는데, 그 색깔들은 전내(殿內)의 상제와 일치하게 했다. 제사에 사용하는 것 및 모든 의례는 옹성의 5치와 같았다.
夏四月, 文帝親拜霸渭之會, 以郊見渭陽五帝. 五帝廟南臨渭, 北穿蒲池溝水, 權火擧而祠, 若光煇然屬天焉. 於是貴平上大夫, 賜累千金. 而使博士諸生刺六經中作王制, 謀議巡狩封禪事.
하사월 문제친배패위지회 이교현위양오제 오제묘남입위 북천포지구수 권화거이사 약광휘연속천언 어시귀평상대부 사루천금 이사박사제생자육경중작왕제 모의순수봉선사
여름 4월, 문제는 친히 패수(覇水)와 위수(渭水)가 만나는 곳에 가서 제를 드리고, 위양의 5제를 찾아가 제사를 거행했다. 5제 사당의 남쪽은 위수에 접해 있고, 북쪽은 포지(蒲池)를 가로지르는 도랑이 있다. 봉화에 점화하고서 제사를 시작하는데, 그 불빛이 휘황찬란해 하늘에 비치었다. 그리하여 신원평을 상대부(上大夫)에 봉하고, 상으로 천금(千金)을 하사했다. 그리고 박사와 많은 유생들로 하여금 육경(六經) 중에서 채취해 「왕제(王制)」를 편찬하고, 순수와 봉선의 일을 상의하라고 명했다.
文帝出長門, 若見五人於道北, 遂因其直北立五帝壇, 祠以五牢具.
문제출장문 약현오인어도북 수인기직북입오제단 사이오뢰구
문제가 장문(長門)에 나갔다가, 마치 다섯 사람이 도로 북쪽에 서있는 듯해, 그 자리에 5제의 단을 세우고, 다섯 마리의 송아지로 제사 지냈다.
其明年, 新垣平使人持玉杯, 上書闕下獻之. 平言上曰:「闕下有寶玉氣來者.」已視之, 果有獻玉杯者, 刻曰「人主延壽」. 平又言「臣候日再中」. 居頃之, 日卻復中. 於是始更以十七年爲元年, 令天下大酺.
기명년 신원평사인지옥배 상서궐하헌지 평언상왈 '궐하유보옥기래자' 이시지 과유헌옥배자 각왈 '인주연수' 평우언 '신후일재중' 거경지 일각복중 어시시경이십칠위원년 영천하대포.
그 다음해, 신원평은 사람에게 옥잔을 휴대하고 천자의 궁전에 가서 글을 올리고 진헌하라고 시켰다. 신원평은 그자가 진헌하기 전에 천자에게 '보옥의 기운이 천자의 궁궐 안에 퍼져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각처에서 천자에게 보내온 진헌품들을 살펴보니, 과연 옥잔을 바친 자가 있었으며, 그 상면에 ‘인주연수(人主延壽)’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원평은 또 '신이 추측하기로, 태양이 하루에 두 번 나타나 두 번의 정오를 맞이할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서 태양이 정오를 지나다가 동쪽으로 역행해, 다시 한 번의 정오가 출현했다. 그리하여 문제 17년을 원년으로 바꾸고, 천하에 성대한 축하연회를 행하게 명했다.
平言曰:「周鼎亡在泗水中, 今河溢通泗, 臣望東北汾陰直有金寶氣, 意周鼎其出乎? 兆見不迎則不至.」於是上使使治廟汾陰南, 臨河, 欲祠出周鼎.
평언왈 '주정망제사수중 금하익통사 신망동북분음직유금보기 의주정기출호 조견불영즉불지' 어시상사사치묘분음남 욕사출주정.
신원평이 천자에게 '주나라의 정(鼎)이 사수(泗水)에 빠진 후, 오늘에 이르러 사수의 강물이 넘치고 있는데, 신이 동북쪽의 분음(汾陰)을 바라보니 금보(金寶)의 기운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그 주나라의 정이 나오려는 징조입니다. 징조가 보이는데도 이를 찾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스스로 세상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천자는 분음의 남쪽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제사를 통해 주나라 정의 출현을 기원했다.
人有上書告新垣平所言氣神事皆詐也. 下平吏治, 誅夷新垣平. 自是之後, 文帝怠於改正朔服色神明之事, 而渭陽、長門五帝使祠官領, 以時致禮, 不往焉.
인유상서고신원평소언기신사개사야 하평이치 주이신원평 자시지후 문제태어개정삭복색신명지사 위위양 장문오세사사관영 이시치례 불왕언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신원평이 말한 여러 가지 운기(雲氣)와 신령의 일은 모두 사기’라고 아뢰었다. 이에 신원평을 사법 관원에게 심사하게 해, 그를 죽이고 그 종족을 모두 멸했다. 이후, 문제는 역법, 복색, 신령의 일을 개정하는 데에 태만했으며, 위양과 장문의 5제 제사는 사관에게 기일에 맞추어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는, 다시는 친히 가지 않았다.
明年, 匈奴數入邊, 興兵守禦. 後歲少不登.
명년 흉노수입변 흥병수어 우세소부등
다음해, 흉노(匈奴)가 수차례 변경을 침입해, 병사를 일으켜 방어하게 되자, 그 후 몇 년 간 약간은 흉작이었다.
효무제 시기의 제사
數年而孝景卽位. 十六年, 祠官各以歲時祠如故, 無有所興, 至今天子.
수년이효경즉위 십육년 사관각이세시사여고 무유소흥 지금천자
몇 년후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했다. 16년, 사관들은 각기 시절에 맞춰 옛 전통으로 제를 올렸으며 새로 생기는 사당 없이 지금의 천자에 이르렀다.
今天子初卽位, 尤敬鬼神之祀.
금천자초즉위 우경귀신지사
효경제의 즉위 초반엔 여러 귀신의 제사가 성했다.
元年, 漢興已六十餘歲矣, 天下艾安, 搢紳之屬皆望天子封禪改正度也, 而上鄕儒術, 招賢良, 趙綰、王臧等以文學爲公卿, 欲議古立明堂城南, 以朝諸侯. 草巡狩封禪改曆服色事未就. 會竇太后治黃老言, 不好儒術, 使人微伺得趙綰等姦利事, 召案綰、臧, 綰、臧自殺, 諸所興爲皆廢.
원년 한흥이육십여세의 천하애민 진신지속개망전자봉선개정도야 이상향유술 초현량 조관 왕장등이문학위공경 욕의고립명장성남 이조제후 초순수봉선개역복색미취 회두태후치황노언 불호유술 사인미사득조관등산리사 소안관 장, 관 장 자살 제후흥위개폐
원년, 한나라가 선 지 60여 년이 되었고 천하가 평안하니 관리 권속들이 천자가 봉선에 참여하고 법도를 손보길 바라고 있었다. 효경제는 유가(儒家)의 학설을 숭상해, 현량(賢良)을 뽑았는데 조관(趙綰), 왕장(王藏)등의 학자들을 公卿 대신으로 뽑았다. 유가는 옛날을 회상하면 성의 남족에 명당(당시 대학교)를 세워 거기서 제후들의 조회(문누백관의 모임)을 갖자하며 천자의 순수(교제를 위한 성지 순례) 봉선제의 집행 법도를 손 보자 했으나 아직 미완이었다. 그때 마침 황로(黃老=도교)의 학설만 받아들이고 유가의 학설을 싫어하는 두태후(竇太后)가 등장하게 되었다. 두태후는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조관 등이 실행해왔던 위법사실을 조사, 수집하게 하고, 관원을 소집해 조관과 왕장의 범죄사실을 심사하자, 이들은 자살했으며, 그들이 일으켰던 사업들도 자연히 폐기되었다.
後六年, 竇太后崩. 其明年, 徵文學之士公孫弘等.
후육년 두태후붕 기명년 징문학지사공손홍등
6년 후, 두태후가 죽고 그 다음해 학자요 유생인 공손홍(公孫弘) 등이 임용되었다.
明年, 今上初至雍, 郊見五畤. 後常三歲一郊. 是時上求神君, 舍之上林中蹏氏觀. 神君者, 長陵女子, 以子死, 見神於先後宛若. 宛若祠之其室, 民多往祠. 平原君往祠, 其後子孫以尊顯. 及今上卽位, 則厚禮置祠之內中. 聞其言, 不見其人云.
명년 금상초지옹 교현오치 후상삼세일교 시시상구신군 사지상림중제씨관 신군자 장릉여자 이자가 현신어선후완약 완약사지기실 민다왕사 평원군왕사 기후자손이존현 급금상즉위 즉후예치사지내중 문기언 불견기인운.
다음해, 효무제는 처음으로 옹성 5치로 가 알현하고 제를올렸다. 그 후 매 3년마다 제를 드렸다. 이때 황제가 신군(神君)을 얻었는데, 상림원(上林園)의 제씨관(蹏氏觀)에 머물도록하였는데 그녀는 원래 장릉현(長陵縣)의 여자로, 아들을 구하고 죽었는데, 동서인 원약(宛若)의 몸에 신령이 보여, 원약은 그녀를 자기의 집에서 공양했으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제사를 지냈다. 평원군(平原君)도 제사 지내러 간 적이 있는데, 이후 그녀의 후손들은 이 때문에 존귀해지고 명성이 혁혁했다. 지금의 천자가 등위하자, 융숭한 제례를 준비해 궁중에서 공양했으며, 이때 그녀의 말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是時李少君亦以祠綰、谷道、卻老方見上, 上尊之. 少君者, 故深澤侯舍人, 主方. 匿其年及其生長, 常自謂七十, 能使物, 卻老. 其游以方遍諸侯. 無妻子. 人聞其能使物及不死, 更饋遺之, 常餘金錢衣食. 人皆以爲不治生業而饒給, 又不知其何所人, 愈信, 爭事之. 少君資好方, 善爲巧發奇中. 嘗從武安侯飮, 坐中有九十餘老人, 少君乃言與其大父游射處, 老人爲兒時從其大父, 識其處, 一坐盡驚. 少君見上, 上有故銅器, 問少君. 少君曰:「此器齊桓公十年陳於柏寢.」已而案其刻, 果齊桓公器. 一宮盡駭, 以爲少君神, 數百歲人也.
시시이소군이사관 곡도 각노방현상 상존지 소군자 도심택사인 주방. 닉기년급기생장 상자위칠십 능사물 각노. 기유이방편제후. 무처자. 인간기능사물급불사 경궤유지 상여금전의식 인개이위불치생업이요급 우부지기하소인 유언 쟁사지. 소군자호방 선위교발기중 상종무안후음 좌중유구십여노인 소군내언여기대부유사처 노인위아시종기대부 식기천 일좌진경 소군견상 상유고동디 문소군. 소군왈 '차지제환공십년지언백침' 이이안기각 과제환공기 일궁진해 이위소군신 수백세인야.
이때, 이소군(李少君) 역시 부엌신[灶神]에 대한 제사, 벽곡불식(辟穀不食), 장생불사 등의 도교 술로써 천자를 알현했는데, 천자는 그를 매우 정중히 접대했다. 이소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심택후(深澤侯)의 가신으로, 천자의 방술과 의약에 대한 일을 주관했다. 그는 자신의 나이와 생애를 숨기고, 항상 스스로 70세이며, 귀신을 부릴 수 있으며, 불로장생의 방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방술에 의존해 제후국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에게는 처자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신을 부릴 수 있고, 불로장생의 방술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계속해서 재물을 보내주어, 항시 금전과 생활이 풍족했다. 사람들은 그가 일정한 직업이 없는데도 생활이 풍족하며, 또한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갈수록 그를 믿게 되었으며, 다투어 그를 섬기었다. 이소군은 천부적으로 방술을 잘하고, 교묘하게 말해 신기하게 맞히기를 잘했다. 그는 일찌기 무안후(武安侯)의 연회에 빈객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90여 세의 노인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소군은 그의 조부가 사냥했던 장소를 말했다. 그 노인은 어렸을 적 그의 조부와 항상 함께 다녀서 그 장소를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손님들은 크게 놀랐다. 한편 이소군이 천자를 배알했을 때, 천자에게는 옛 동기(銅器)가 하나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그 동기에 대해서 아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소군은 ' 동기는 제 환공(齊桓公) 10년 백침(柏寢)에 있던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가 곧 사람을 시켜 동기에 새겨진 글귀를 검사하자, 과연 그것은 제 환공 때의 그릇이었다. 그러자 온 궁중은 모두 놀라워했고, 이소군은 신선이며, 그의 나이는 수백 살이나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少君言上曰:「祠灶則致物, 致物而丹沙可化爲黃金, 黃金成以爲飮食器則益壽, 益壽而海中蓬萊僊者乃可見, 見之以封禪則不死, 黃帝是也. 臣嘗游海上, 見安期生, 安期生食巨棗, 大如瓜. 安期生僊者, 通蓬萊中, 合則見人, 不合則隱.」於是天子始親祠灶, 遣方士入海求蓬萊安期生之屬, 而事化丹沙諸藥齊爲黃金矣.
소군언상왈 '사조즉치물 치물이단사가화위황금 황금성이위음식기즉익수 익수해중봉애선자내가견 견지이봉선즉불사 황제시야. 신상유해상 견안기생 안기생식조 대여과 안기생선자 통봉래중 합즉견인 부합즉은' 어시천자시친사조 유방사입해봉래안기생지속 이사화단사제약제위황금의.
이소군이 천자에게 '조왕신에게 제사 지내면, 사물 치기의 극한을 알수 있고, 그 이치를 가지고 단사(丹沙)를 이용해 황금을 만들수 있으며 그 황금으로 음식 담는 용기를 만들어 사용하면 장수하게 됩니다. 장수하게 되면 바다에 떠 있는 봉래도(蓬萊島) 선인을 볼 수 있으며, 이를 본 이후에 천지에 제사 지내면, 불로장생할 수 있습니다. 황제(黃帝)께서도 바로 이와 같이 하셨습니다. 이전에 신은 바다에서 노닐다가, 안기생(安期生)을 만났는데, 안기생은 호박처럼 큰 거대한 대추를 먹고 있었습니다. 안기생은 선인이어서, 봉래(蓬萊)의 선경을 왕래할 수 있었는데, 만약 천자께서 그와 마음이 통하면 그가 나타날 것이지만, 통하지 않으면 숨어버릴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천자께서는 친히 조왕신에게 제사 지내고, 방사를 바다로 파견해 봉래의 안기생과 같은 선인을 찾게 하는 동시에, 단사 등 각종 약물을 사용해 황금을 제조하는 일에 착수했다.
居久之, 李少君病死. 天子以爲化去不死, 而使黃錘史寬舒受其方. 求蓬萊安期生莫能得, 而海上燕齊怪迂之方士多更來言神事矣.
거구지 이소군병사 천자위화거불사 이사황추관서수기방. 구봉래안기생막능득 이해상연제괴우방사다경래언신사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소군이 병사하자, 천자는 그가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이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자는 황현(黃縣)과 추현(錘縣)의 문서관리인 관서(寬舒)로 하여금 이소군의 방술을 계승하게 했다. 봉래의 선인 안기생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이때부터 연(燕)과 제(齊) 등 연해지방 일대의 괴이한 사들이 연이어 신선의 일을 강술하러 왔다.
亳人謬忌奏祠太一方, 曰:「天神貴者太一, 太一佐曰五帝. 古者天子以春秋祭太一東南郊, 用太牢, 七日, 爲壇開八通之鬼道.」於是天子令太祝立其祠長安東南郊, 常奉祠如忌方. 其後人有上書, 言「古者天子三年壹用太牢祠神三一:天一、地一、太一」. 天子許之, 令太祝領祠之於忌太一壇上, 如其方. 後人復有上書, 言「古者天子常以春解祠, 祠黃帝用一梟破鏡;冥羊用羊祠;馬行用一靑牡馬;太一、澤山君地長用牛;武夷君用乾魚;12)陰陽使者以一牛」. 令祠官領之如其方, 而祠於忌太一壇旁.
박인유기진사태일방 왈 '천신귀자태일 태일좌왈오제 고자천자이춘추제태일동남교 용태뢰 칠일 위단개팔통지귀도' 어시천자영태축립사장안동남교 상봉사여기방 기후인 유상서 언 '고자천자삼년일용태뢰사신삼일 천일 태일' 천자허지 영태축영사지어
박현(亳縣) 사람 박유기(薄謬忌) 태일신(太一神)에게 제사 지내는 예의에 대해 천자에게 '천신 중 가장 존귀한 분은 태일신이며, 태일을 보좌하는 것은 5제(五帝)입니다. 옛날에 천자는 매년 봄, 가을 두 계절에 수도 동남쪽 교외에서 태일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물로는 소, 양, 돼지를 사용했고, 제사는 7일 동안 거행했으며, 또한 신단(神壇)을 건축하고 팔방으로 통하는 귀도(鬼道)를 만들어 귀신의 통로로 삼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태축에게 장안의 동남쪽 교외에 태일신의 사당을 세우고, 항상 박유기가 말한 방식에 의거해 제사를 거행하라고 명했다. 그 후 또 어떤 사람이 “옛날의 천자는 삼 년에 한 번 씩 소, 양, 돼지를 희생으로 천일신, 지일신, 태일신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라고 상주했다. 천자는 이 상소문을 윤허하고, 태일신의 제단에서 천신, 지신을 함께 제사 지내고, 이 사람이 상소한 방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라고 태축에게 명했다. 그 후 또 어떤 사람이 “옛날의 천자는 항상 봄에 재앙을 쫓는 제사를 지냈는데, 황제(黃帝)에게 제사 지낼 때마다 효조(梟鳥), 파경(破鏡)을 사용하고, 명양신(冥羊神)에게는 양을, 마행신(馬行神)에게는 청목마(靑牡馬) 한 필을, 태일신 택산군지장신(澤山君地長神)에게는 소를, 무이군(武夷君)에게는 마른 어물(魚物)을, 음양사자신(陰陽使者神)에게는 소 한 마리를 사용했습니다.”라고 상주했다. 그리하여 천자가 사관에게 ‘그의 방식에 따라 제사지내되, 박유기가 건의한 태일단 옆에서 제사를 거행하라.’고 명했다.
其後, 天子苑有白鹿, 以其皮爲幣, 以發瑞應, 造白金焉.
기후 천자원유백록 이기피위폐 이발서응 조백금언
그 후 천자의 상림원(上林院)에 흰 사슴이 있었는데, 그 가죽으로 화폐를 만들었으며, 길한 조짐에 응하는 의미로 백금(白金)의 화폐를 만들었다.
其明年, 郊雍, 獲一角獸, 若麃然. 有司曰:「陛下肅祗郊祀, 上帝報享, 錫一角獸, 蓋麟云.」於是以薦五畤, 畤加一牛以燎. 諸侯白金, 風符應合于天也.
기명년 교옹 획일각수 약표연 유사왈 '폐하숙지교사 상제보향 사일각수 개린운' 어시이천오치 치가일우이료 사제후백금 풍부응합우천지
그 이듬해, 옹현 교외에서 뿔 하나 달린 짐승을 포획했는데, 마치 고라니 같았다. 주관 관원이 '장엄하고 공경스럽게 제사를 지내시니, 상제께서 보답의 표시로 뿔 하나 달린 이 짐승을 내려주셨는데, 아마도 기린(麒麟)인 듯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일각수를 5치에 바치고, 각 치(畤)마다 소 한 마리씩을 추가해 제를 올리고 제후들에게는 백금을 하사하니, 천지의 상서로움에 합일하려함이다.
於是濟北王以爲天子且封禪, 乃上書獻太山及其旁邑, 天子以他縣償之. 常山王有罪, 遷, 天子封其弟於眞定, 以續先王祀, 而以常山爲郡, 然后五岳皆在天子之(邦)[郡].
어시제북왕이위천자차봉선 내상서헌태산급기방읍 천자이타현상지 상산왕유죄 천 천자봉기제어진정 이속선왕사 이이상산위순 연후오악개재천자지방군
그리하여 제북왕(濟北王)이 천자가 장차 봉선을 거행할 것임을 알고, 글을 올려 태산 및 그 주변의 읍을 헌납하자, 천자는 다른 현으로 그에게 보상했다. 한편 상산왕(常山王)은 죄를 짓자 추방시키고, 그의 동생을 진정(眞定)의 왕으로 봉해 선왕의 제사를 계속 유지하게 했고, 상산국(常山國)을 군(郡)으로 강등시켰다. 이때부터 5악이 모두 천자의 군에 속하게 되었다.
其明年, 齊人少翁以鬼神方見上. 上有所幸王夫人, 夫人卒, 少翁以方蓋夜致王夫人及灶鬼之貌云, 天子自帷中望見焉. 於是乃拜少翁爲文成將軍, 賞賜甚多, 以客禮禮之. 文成言曰:「上卽欲與神通, 宮室被服非象神, 神物不至.」 乃作畫雲氣車, 及各以勝日駕車辟惡鬼. 又作甘泉宮, 中爲臺室, 畫天、地、太一諸鬼神, 而置祭具以致天神. 居歲餘, 其方益衰, 神不至. 乃爲帛書以飯牛, 詳不知, 言曰此牛腹中有奇. 殺視得書, 書言甚怪. 天子識其手書, 問其人, 果是僞書, 於是誅文成將軍, 隱之.
기명년 제인소옹이귀신방현상 상유소해왕부인 부이졸 소옹이방개야치왕부인 급조귀지모운 천자자유중망견언 어시내배소옹위무성장군 상사심다 이객예예지 문성왈 ;상즉욕여신통 궁실피복비상신 신물부지‘ 내작화운기거 급각이승일가거벽악귀 우작감천궁 중위대실 화천 지 태일제귀신 이치제구치천신 거세여 기방익쇠 신부지 내위백서이반우 상부지 언왈차우복중유기 살시득서 서언심괴 천자식기수서 문기인 과시위서 어시주문성장군 은지.
그 다음해, 제나라 사람 소옹(少翁)은 귀신을 불러내는 방술로 천자를 만났는데 천자에게는 총애하는 왕부인(王夫人)이 있었고, 그녀가 죽자 소옹이 밤에 방술로써 왕부인을 부엌신의 형상으로 불러내니 천자는 휘장을 통해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옹을 문성장군(文成將軍)에 봉하고, 많은 재물을 상으로 하사했으며, 귀빈으로서 예우했다. 문성장군이 ‘천자께서 신선을 만나고 싶어 하여도 궁실의 의복이 신선계의 것과 같지 않아서 신선이 오지 않습니다.’라 하니 천자는 구름무늬의 그림이 있는 수레를 제작하고, 악귀를 제거하기 위해 수레의 색상은 반드시 간지오행상극(干支五行相克)의 날짜에 부합하게 했다. 또한 감천궁(甘泉宮)을 지어 안에 대실(臺室)을 설치하고, 그 안에 천신, 지신, 태일신 등의 귀신 형상을 그려놓고, 제기를 진열해 천신을 불러들이고자 했다. 1년여 기간이 지나자, 그의 방술은 갈수록 영험이 떨어져서 신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단에 글을 쓴 다음 그것을 소에게 먹인 뒤, 모른 체하고서 그 소의 뱃속에 기이한 것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에 천자가 그 소의 배를 가르게 하니 과연 비단 책이 들어 있었는데, 그 글들은 괴기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천자는 그 필적을 알아보고, 그 자에게 물으니 과연 가짜였다. 그리하여 문성장군을 죽이고 그 일은 비밀에 부쳤다.
其後則又作柏梁、銅柱、承露仙人掌之屬矣.
기후즉우작백량 동주 승로선인장지속의
그 후 천자는 또 백량(柏梁), 동주(銅柱), 승로선인장(承露仙人掌)등을 만들었다.
文成死明年, 天子病鼎湖19)甚, 巫醫無所不致, 不愈. 游水發根言上郡有巫, 病而鬼神下之. 上召置祠之甘泉. 及病, 使人問神君. 神君言曰:「天子無憂病. 病少愈, 彊與我會甘泉.」於是病愈, 遂起, 幸甘泉, 病良已. 大赦, 置壽宮神君. 壽宮神君最貴者太一, 其佐曰大禁、司命之屬, 皆從之. 非可得見, 聞其言, 言與人音等. 時去時來, 來則風肅然. 居室帷中. 時晝言, 然常以夜. 天子祓, 然后入. 因巫爲主人, 關飮食. 所以言, 行下. 又置壽宮、北宮, 張羽旗, 設供具, 以禮神君. 神君所言, 上使人受書其言, 命之曰「畫法」. 其所語, 世俗之所知也, 無絶殊者, 而天子心獨喜. 其事袐, 世莫知也.
문성사명년 천자병정호심 무의무소불치 불유 유수발근언상군유무 병이귀신하지 상소치사지감천 급병 사인문신군 신군언왈 ‘천자무우병 병소유 강여아회감천’ 어시병유 추기 행감천 병량이 대사 치수궁신군 수궁신군최귀자태일 기좌왈대금 사명지속 개종지. 비가득견 문기언 언여인음등 시거시래 래즉풍숙연 거실유중 시서언 연상이야 천자불 연후입 인무위주인 궐음식 소이언 행하 우치수궁 북궁 장익지 설공구 이예신군 신군소언 상사인수서기언 명지왈‘화법’ 기소언 세속지소지야 무절수자 이천자심독희 시사비 세막지야
문성장군이 죽은 그 다음해, 천자는 정호궁(鼎湖宮)에서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무의(巫醫)들이 온갖 방술들을 다 써보았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유수발근(游水發根)이라는 사람이 ‘상군(上郡)에 무당이 살고 있는데, 그는 병을 앓으면 귀신이 자신의 몸으로 강림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뢰자, 천자는 그를 불러 와 감천궁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윽고 그가 병이 낫자, 천자는 사람을 보내어 무당을 통해서 신령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러자 그 귀신은 ’천자의 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소이다. 황제의 병세가 조금 좋아지거든 감천궁으로 와서 나를 만나면 되오.‘라고 말했다. 그 후 천자의 병세가 호전되어 마침내 일어나서 감천궁으로 행차하자 정말로 병이 낫게 되었다. 이에 천자는 천하에 대사면을 베풀고 수궁(壽宮)에 신군(神君)을 모시었다. 수궁의 신군 중에서 가장 존귀한 신이 태일신이며, 그를 보좌하는 대금(大禁), 사명(司命)과 같은 무리들이 있는데, 모두 태일신을 뒤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단지 그들이 말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때로 그들은 왔다 갔다 했는데, 올 때는 바람소리가 숙연했다. 그들은 실내의 장막 속에 살았고, 어떤 때는 낮에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보통 밤에 이야기했다. 천자는 재앙을 쫓고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야 비로소 수궁에 들어가곤 했다. 무당을 담당자로 해 음식을 수령했으며, 여러 신들이 하고자 하는 말 역시 그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또한 수궁과 북궁(北宮)을 증수하고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세우며, 성대한 제품의 여러 기구를 진열해 신군에게 예의를 표했다. 천자는 사람을 보내 신군이 하는 말을 받아 적게 했는데, 이것을 ‘화법(畵法)’이라 했다. 그들이 한 말은 일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특별히 심오한 내용은 없었지만 천자는 이를 보며 혼자 즐거워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져 세간에서는 알 수 없었다.
其後三年, 有司言元宜以天瑞命, 不宜以一二數. 一元曰「建」, 二元以長星曰「光」, 三元以郊得一角獸曰「狩」云.
기후삼년 유사언원의이천서명 불의이일이수 일원왈‘건’ 이원이장성왈‘광' 삼원이교득일각수왈’수‘운.
3년 뒤, 제사관들이 기원(紀元)은 응당 상제가 내려준 길조를 근거로 이름을 지어야지, 단지 1, 2 하는 숫자로써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따라서 첫 번째 연호는 ‘건원(建元)’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연호는 혜성이 나타났으므로 ‘원광(元光)’, 세 번째의 연호는 교외에서 제사 지낼 때 뿔이 하나 있는 짐승을 잡았으므로 ‘원수(元狩)’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其明年冬, 天子郊雍, 議曰:「今上帝朕親郊, 而后土無祀, 則禮不答也.」 有司與太史公、祠官寬舒議:「天地牲角繭栗. 今陛下親祠后土, 后土宜於澤中圜丘爲五壇, 壇一黃犢太牢具, 已祠盡瘞, 而從祠衣上黃.」於是天子遂東, 始立后土祠汾陰脽丘, 如寬舒等議. 上親望拜, 如上帝禮. 禮畢, 天子遂至滎陽而還. 過雒陽, 下詔曰:「三代邈絶, 遠矣難存. 其以三十里地封周後爲周子南君, 以奉其先祀焉.」是歲, 天子始巡郡縣, 侵尋於泰山矣.
기명년동 천자교옹 의왈 ‘금상제짐친교 이후토무사 즉예부답야’ 수사여태사공 사관관서의 ‘천지생각견속 금폐하친사후토 후토의어택중환구위오단 단일황독태뢰구 이사진예 이종사의상황’ 어시천자수동 시립후토사분음수구 여관서등의 상친망배 여상제예 에필 천자수지형양이환 과락양 하조왈 ‘삼대막절 원의난존 기이삼십리지봉주후위주자남군 이봉기선사언’ 시세 천자시순군현 침심어태산의
그 이듬해 겨울, 천자는 옹현에서 천지에 제사 지내면서 대신들과 상의해 ‘오늘 짐이 직접 상제에게 제사를 드렸으나, 후토(后土)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절은 완전한 것이 아니오.’라고 말하자, 제사관과 태사공(太史公), 사관인 관서(寬舒) 등이 논의해 ‘천지신께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가축은 뿔이 누에고치나 밤처럼 작은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천자께서 친히 후토에게 제사 지내시려면 호수에 떠 있는 원형 구릉에 5층 제단을 만들고, 각 제단마다 새끼소를 한 마리씩 희생으로 바쳐야 합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제사 때의 희생을 전부 땅에 묻어야 하며, 제사 지내는 사람들은 황색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곧 동쪽으로 가서, 관서 등의 의견에 따라 분음현(汾陰縣)의 구릉에 후토의 사당을 건립했다. 천자는 상제에게 제사 지내던 예의대로 친히 토지신(土地神=후토)에게 두루 제사 지냈다. 제사가 끝나자 천자는 형양(滎陽)을 거쳐서 돌아오다가, 낙양(雒陽)을 지나면서, 조서를 내리기를, ‘삼대(三代:하, 은, 주)가 끊어진 지 오래되어, 그들의 제례의식이 보존되기 어렵구나! 30리의 땅을 주 왕조의 후예인 주자남군(周子南君)에게 봉해, 그곳에서 그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 해로부터 천자가 각 군현을 순수하기 시작해 태산 가까이에까지 이르렀다.
其春, 樂成侯上書言欒大. 欒大, 膠東宮人, 故嘗與文成將軍同師, 已而爲膠東王尙方. 而樂成侯姊爲康王后, 無子. 康王死, 他姬子立爲王. 而康后有淫行, 與王不相中, 相危以法. 康后聞文成已死, 而欲自媚於上, 乃遣欒大因樂成侯求見言方. 天子旣誅文成, 後悔其蚤死, 惜其方不盡, 及見欒大, 大說. 大爲人長美, 言多方略, 而敢爲大言處之不疑. 大言曰:「臣常往來海中, 見安期、羨門之屬. 顧以臣爲賤, 不信臣. 又以爲康王諸侯耳, 不足與方. 臣數言康王, 康王又不用臣. 臣之師曰:『黃金可成, 而河決可塞, 不死之藥可得, 僊人可致也.』然臣恐效文成, 則方士皆奄口, 惡敢言方哉!」上曰:「文成食馬肝死耳. 子誠能脩其方, 我何愛乎!」大曰:「臣師非有求人, 人者求之. 陛下必欲致之, 則貴其使者, 令有親屬, 以客禮待之, 勿卑, 使各佩其信印, 乃可使通言於神人. 神人尙肯邪不邪. 致尊其使, 然后可致也.」於是上使驗小方, 鬥棋, 棋自相觸擊.
기춘 악성후상서언난대 난대 교동궁인 고상여문성장군동사 이이위교동왕상방 이악성후자위강왕후 무자, 강왕사 타희자입위왕. 이강후유음행 여왕불상중 상위이밥 강후문성이사 이욕자미어상 내유난대인악성후구현언방. 천자기주문성 우회기조사 석기방부진 급현난대 대열 대위인장미 언다방략 이감위대언처지불의. 대언왈 '신상왕래해중 견안기 선문지속 고이신위천 불신신 우이위강왕제후이 부족여방 신수언강왕 강왕우불사개엄구 악감언방재' 상왈 '문성식마간사이 자성은유기방 아하애호' 대왈 '신사비유구인 인자구지 폐하필욕치지 즉귀기사자 영유친속 이객예대지 물비 사각패기신인 내가사통언어신인 신인상아불아 치존기사 연후사치야' 어시상사험소방 투기 기자상촉격.
그해 봄, 악성후(樂成侯)가 글을 올려 난대(欒大)를 소개했다. 난대는 교동왕(膠東王)의 궁인(宮人)으로, 옛날에 문성장군과 동문수학 한 사이로, 후에 교동왕의 의복이나 재물을 관리하였다. 악성후의 누이는 교동 강왕(康王)의 왕후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강왕이 죽자 다른 궁녀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강왕의 왕후가 음행하여 새 왕과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의 선을 지키지 않았다. 강왕의 왕후는 문성장군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곧 악성후를 통해서 난대를 파견해 천자를 알현해 방술을 담론하게 했다. 천자는 안 그래도 문성장군을 주살한 후, 너무 빨리 죽였다고 후회하고 있었고, 그의 방술을 완전히 전수하지 못했음을 애석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난대를 보자 무척 기뻐했다. 난대는 용모가 뛰어나고, 말에 지략이 있고, 감히 허언을 함에도 의심을 받지 않았다.
난대가 천자에게 허언으로 '신은 늘 바다를 왕래하면서, 안기생(安期生), 선문고(羨門高) 등읍니다. 또한 강왕은 제후에 지나지 않아서 방술을 가지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봅니다. 강왕 역시 절 믿지않는 것 아닙니까. 신의 스승이 말하길 ‘황금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강물도 막을수 있고 불사약도 만들수 있고 신선도 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문성장군처럼 될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방사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면, 어찌 감히 방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천자가 답하길 '문성장군은 말의 간을 먹고 죽은 것일 뿐이오. 그대가 방술을 열심히 연구한다면 내 사랑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난대가 '신의 스승은 사람을 청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찾읍니다. 폐하가 그리되고 싶다면 그 사자를 귀히 쳐주셔야 하니 가까운 이들에게 귀한 손님으로 접대하도록 해주시면 합니다 깔보지 말고 각자 패와 인을 차도록 해주시면 그 사자들이 신인의 말을 전해줄 것입니다. 신인이 그럴지 말지 아니겠읍까. 그러니 먼저 사자들을 대접해주어야 바랄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효험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에게 작은 방술이라도 시범하기를 요구하자, 그는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놓고 저절로 서로 부딪치도록 했다.
是時上方憂河決, 而黃金不就, 乃拜大爲五利將軍. 居月餘, 得四印, 佩天士將軍、地士將軍、大通將軍印. 制詔御史:「昔禹疏九江, 決四瀆. 閒者河溢皐陸, 隄繇不息. 朕臨天下二十有八年, 天若遺朕士而大通焉. 乾稱『蜚龍』, 『鴻漸于般』, 朕意庶幾與焉. 其以二千戶封地士將軍大爲樂通侯.」賜列侯甲第, 僮千人. 乘轝斥車馬帷幄器物以充其家. 又以衛長公主妻之, 齎金萬斤, 更命其邑曰當利公主. 天子親如五利之第. 使者存問供給, 相屬於道. 自大主將相以下, 皆置酒其家, 獻遺之. 於是天子又刻玉印曰「天道將軍」, 使使衣羽衣, 夜立白茅上, 五利將軍亦衣羽衣, 夜立白茅上受印, 以示不臣也. 而佩「天道」者, 且爲天子道天神也. 於是五利常夜祠其家, 欲以下神. 神未至而百鬼集矣, 然頗能使之. 其後裝治行, 東入海, 求其師云. 大見數月, 佩六印, 貴震天下, 而海上燕齊之閒, 莫不搤捥而自言有禁方, 能神僊矣.
시시상방우하결 이황금불취 내배대위오리장군 거월여 득사인 패천상장군 지사장군 대통장군인 제조어사 '석우소구강 결사독 한자하일고육 제요불식 집임천하이십유팔년 천약유짐사이대통언 건칭'비룡' '홍점우선' 짐의서기여언 기이이천호봉지사장군대위악통후' 사열후갑제 동천인 승여척거마유악기물이충기가 우이위장공주처지 재금만근 셩명기읍왈당리공주 천자친여오리지제 사자존문공급 상속어도 자대주장상이하 개치주기가 헌유지 어시천자우각옥인왈 '천도장군' 사사의우의 야립백모상 오리장군역의우의 야립백모상수인 이시불신야 이패'천도'자 타위천자도천신야 어시오리상야사기가 욕이하신 신미지이백귀집의 연차능사지 기후장치행 동입해 구기사운 대련수월 패육인 귀진천하 이해상쳔제지한 막불액완이자언유금방 능신선의
당시 천자는 황하의 범람을 걱정하고, 황금을 제조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난대를 곧 오리장군(五利將軍)에 봉했다. 한 달 남짓 지나서, 난대는 4개의 관인(官印)을 취득해 오리장군인(五利將軍印), 천사장군인(天士將軍印), 지사장군인(地士將軍印), 대통장군인(大通將軍印)을 패용했다. 천자는 조서로써 어사에게 전하게 했다. '옛날 하우(夏禹)는 9강(九江)을 소통시켰고, 4독(四瀆: 운하)을 개통시켜 흐르게 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황하에 홍수가 나서 인근의 육지까지 물에 잠겼으니 제방축조의 노역을 계속하라. 짐이 천하를 다스린 지 28년이 되었는데, 하늘이 만약 짐을 보좌하게 방사를 보내주셨다면, 난대는 하늘의 뜻에 통할 수 있으리라. 『역경(易經)』의 「건괘(乾卦)」에서는 ‘비룡이 하늘에 튀어올랐다.’라고 했고, 「점괘(漸卦)」에서는 ‘큰 기러기가 애안(涯岸)에 다다랐다.’라고 했는데, 내 뜻도 어느정도 비슷하다. 지사장군 난대에게 2천 호의 땅을 봉토로 하사해 악통후(樂通侯) 봉하라하니 그리하여 그에게 최상급의 제후에게 주는 부제(府第:관저)와 천 명의 노복을 하사하고, 천자가 사용하는 거마, 의복, 밀실, 기물을 그의 저택에 채워주었다. 또한 위황후(衛皇后)가 낳은 장공주(長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황금 만근을 주었으며 아울러 그녀의 봉호(封號)를 당리공주(當利公主)로 개명했고 천자가 친히 오리장군의 부제=관제를 방문했다. 그를 위문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는 사자들의 행렬이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천자의 고모인 대주(大主)로부터 조정의 장상(將相) 이하의 벼슬아치들은 좋은 술과 안주를 그의 집으로 보내는 등 정성을 다 바쳤다. 그리고 천자가 ‘천도장군(天道將軍)’이라는 글자를 새긴 옥인(玉印)을 가지고, 깃털 옷(羽衣)를 입은 사자로 하여금 밤에 백모(白茅:돗자리) 위에 서도록 하고, 오리장군 역시 우의를 입고 백모 위에서 옥인을 받도록 했는데, 이는 오리장군이 천자의 신하가 아님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천도장군’의 옥인을 패용한 자만이 천자를 대신해서 천신의 왕림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오리장군은 밤마다 자기 집에서 신선의 강림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신선은 오지 않고 온갖 귀신(百鬼)만 다 모였지만, 그는 또 그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 후 로 난대는 곧 행장을 준비하고서 나와, 동해로 가서 그의 선사(仙師)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난대는 천자를 만난 지 몇 달 만에 몸에는 6개의 관인을 달고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그리하여 연(燕)과 제(齊)의 연해 일대 방사들은 자기들도 신선을 불러 올 수 있는 방술을 가지고 있다며 억울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其夏六月中, 汾陰巫錦爲民祠魏脽后土營旁, 見地如鉤狀, 掊視得鼎. 鼎大異於衆鼎, 文鏤無款識, 怪之, 言吏. 吏告河東太守勝, 勝以聞. 天子使使驗問巫得鼎無姦詐, 乃以禮祠, 迎鼎至甘泉, 從行, 上薦之. 至中山, 曣晛, 有黃雲蓋焉. 有麃過, 上自射之, 因以祭云. 至長安, 公卿大夫皆議請尊寶鼎. 天子曰:「閒者河溢, 歲數不登, 故巡祭后土, 祈爲百姓育谷. 今歲豐廡未報, 鼎曷爲出哉?」有司皆曰:「聞昔泰帝興神鼎一, 一者壹統, 天地萬物所繫終也. 黃帝作寶鼎三, 象天地人. 禹收九牧之金, 鑄九鼎. 皆嘗亨鬺上帝鬼神. 遭聖則興, 鼎遷于夏商. 周德衰, 宋之社亡, 鼎乃淪沒, 伏而不見. 頌云『自堂徂基, 自羊徂牛;鼐鼎及鼒, 不吳不驁, 胡考之休』. 今鼎至甘泉, 光潤龍變, 承休無疆. 合茲中山, 有黃白雲降蓋, 若獸爲符, 路弓乘矢, 集獲壇下, 報祠大享. 唯受命而帝者心知其意而合德焉. 鼎宜見於祖禰, 藏於帝廷, 以合明應.」制曰:「可.」
기하유월중 분음무금위민사위수후토영방 견지여구상 부시득정. 정대이어중정 문루무관식 괴지 언리. 리고하동태수승 승이문. 천자사사험문무득정무간사 내이예사 영정지감천 종행 상천지. 지중산 연현 유황운개언. 유표과 상자사지 인이제운. 지장안 공경대부개의청존보정. 천자왈'문자하일 세수부등 고순제후토 사위백성육곡 금세풍무미보 정강위출재' 유사개왈 '문석태재신정일 일자일통 천지만물소계종야 황제작보정삼 상천지인 우수구목지금 주구정. 개상향상상제귀신 조성즉흥 정천우하상 주덕쇠 송지사망 정내윤몰 복이불현 송운 "자당조기 자양조우 내정급자 불로불오 호고지휴' 금정지감천 광윤용변 승휴무강. 합자중산 유황백운강개 약수위부 로궁승시 집획단하 보사대향. 유수명이제자심지기의이합덕언 정의견어조녜 장아제정 이합명응 제왈 '가'.
이 해 여름 6월에 분음(汾陰)의 무당 금(錦)이 위수(魏脽)의 후토(后土)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낼 때, 땅 위에 갈고리 같은 돌출물을 보고 흙을 파보았다가 정(鼎)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정엔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무당 금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지방 관아리에 보고하자, 그 관리는 하동(河東)의 태수 승(勝)에게 알렸고, 승은 또 상부에 보고했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무사 금을 심문해 정을 얻은 일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알고는, 예의를 갖추어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정을 감천궁으로 맞아들였다. 백관이 수행하고 천자는 제를 지냈다. 중산(中山)에 이르렀을 때 하늘이 맑은데도 황색 구름이 내려덮히고 지나가던 고라니가 있어, 천자가 몸소 사냥하여 제물 쓰라했다. 장안에 이르자, 공경대부(公卿大夫)들 모두 보정(寶鼎)을 높이 받들자 하니, 천자가 '요즘 황하가 범람하고, 수확이 오르지 않아 백성들의 풍년을 기원하는 중인데 금년 수확이 좋다는 보고도 없는데 어찌 이 솥이 출현한 것이요?'하니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들이 '옛날 태제(泰帝: 하나님)께서 신정(神鼎)을 하나 만드셨는데, 하나[一]란 통일이란 뜻으로, 천지만물의 통일을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황제(黃帝)께서는 보정 세 개를 만들어 천, 지, 인을 각각 상징하셨습니다. 하우(夏禹)는 구주(九州)의 금속을 징수해 9개의 정을 만들어, 추수 후에 송아지를 삶아 하늘의 신명에 제사 지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성인들이 정(鼎)을 만들고 하나라와 상나라에 전해졌고 주나라의 덕이 쇠퇴하고 송(宋)나라의 사직이 황폐해지자, 정은 물에 가라앉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집에서 묘까지 양에서 소까지 내정=큰 솥에서 작은 솥(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도에 넘치지 않으니 선조들도 곱게 여기신다 .’ 했습니다. 지금 보정이 감천궁에 도착했는데, 보정이 마치 용이 노닐듯 빛이 나니 그런 평안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중산에서 황백색의 구름이 내려왔으며, 짐승이 나타나 천자께서 사냥하여 단위에 올려 제를 올리셨는데, 오직 하늘의 명을 이어받은 천자만이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하늘의 덕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정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보여야하고, 궁정에 두어 신명(神明)에 응해야 합니다.' 아뢰니, 천자는 조서를 내려 '그리 하라' 했다.
入海求蓬萊者, 言蓬萊不遠, 而不能至者, 殆不見其氣. 上乃遣望氣佐候其氣云.
입해구봉래자 언봉래자불원 이불능지자 태불현기기 상내유망기좌후기기운
바다의 봉래를 찾아갔던 이들이 말하길 봉래가 거리론 멀지 않으나 갈 수 없음은 아마도 그 상서로운 기운을 볼 수 없어서라 했다. 천자는 기운을 읽는 사람들을 보태어 기운을 살피도록 했다.
其秋, 上幸雍, 且郊. 或曰「五帝, 太一之佐也, 宜立太一而上親郊之」.
기추 상행옹 차교 혹왈 '오제 태일지좌야 의립태일이상친교지'
그 해 가을 효무제가 옹으로 행차하여 교제를 올리니 혹 말하길 '5제는 태일신의 보좌라 태일신 제단을 세워 친히 교제를 올려야 한다'하더라
上疑未定. 齊人公孫卿曰:「今年得寶鼎, 其冬辛巳朔旦冬至, 與黃帝時等.」卿有札書曰:「黃帝得寶鼎宛朐, 問於鬼臾區. 鬼臾區對曰:『(黃)帝得寶鼎神策, 是歲己酉朔旦冬至, 得天之紀, 終而復始.』於是黃帝迎日推策, 後率二十歲復朔旦冬至, 凡二十推, 三百八十年, 黃帝僊登于天.」
성의미정 제인공손경왈 '금년득보정 기동신사삭단동지 여황제시등' 경유찰서왈 '황제득보정완구 문어귀유구 귀유구대왈 "황제득보정신책 시세기유삭단동지 득천지지 종이복시" 어시황제영일추책 후솔이십세복삭단동지 범이십퇴 삼백팔십년 황제선등우천'
효무제가 긴가민가하니 제 나라의 공손경(公孫卿)이 '올해 보정을 얻었는데, 올해 중동(仲冬) 신사(辛巳) 초하룻날 아침은 동지(冬至)가 되는 날이며, 이는 황제(黃帝)께서 보정을 제조하신 절기와 같습니다.' 아뢰었다. 그런데 공손경이 가지고 있던 목간(木簡)에 “황제(黃帝)께서 완구(宛朐)에서 보정을 얻으신 후에 귀유구(鬼臾區)에게 이 일을 물었더니, 귀유구가 ‘황제(黃帝)께서 보정과 신책(神策)을 얻으셨을 때가 그해 기유(己酉) 초하룻날 아침이 동지에 해당되는 때로, 동지의 의미는 끝이며 동시에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 아뢰었다. 그래서 황제(黃帝)씨가 새해의 의미를 매 20년 간격으로 초하룻날 아침에 동지가 순환된다는 것을 추정하셨으며, 20여 차례를 합산하니 380년 만에 황제(黃帝)께서는 신선이 되어 등천하셨다.”라고 쓰여 있었다.
卿因所忠欲奏之. 所忠視其書不經, 疑其妄書, 謝曰:「寶鼎事已決矣, 尙何以爲!」卿因嬖人奏之. 上大說, 乃召問卿. 對曰:「受此書申公, 申公已死.」上曰:「申公何人也?」卿曰:「申公, 齊人. 與安期生通, 受黃帝言, 無書, 獨有此鼎書. 曰『漢興復當黃帝之時』. 曰『漢之聖者在高祖之孫且曾孫也. 寶鼎出而與神通, 封禪. 封禪七十二王, 唯黃帝得上泰山封』.
경인소충욕주지 소충시기서불경 의기망서 사왈 '보정사이결의 상하이위' 경인폐인주지 상대열 내소문경 대왈 '수차서신공 신공이사' 상왈 '신공하인야' 경왈 '신공 제인 여안기생통 수황제언 무서 독유차정서 왈 "한흥복당황제지시" 왈 "한지성자재고조지손차증손야 보정출이여신통 봉선 봉선칠십이왕 유황제득상태산봉"
공손경은 소충(所忠)을 통해서 서간을 천자에게 상주하고 싶었으나, 소충은 목간에 씌어진 말이 불합리하며 경거망동한 글이라고 여겨, 즉시 사양하며 “보정의 일은 이미 끝난 일인데, 그 일을 아뢰어 무엇을 하겠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공손경은 다시 천자가 총애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보고했다. 그러자 천자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공손경을 불러 이 일에 대해서 물었다. 공손경은 “신은 신공(申功)에게 이 목간을 받았는데, 신공은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천자가 “신공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묻자, 공손경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공은 제나라 사람으로, 신선 안기생과 왕래했고, 황제(黃帝)의 말을 이어받았는데, 다른 글은 남기지 않고 단지 다음과 같은 정서(鼎書)만 남겨놓았습니다. 한나라의 흥성은 황제(黃帝)가 정을 얻은 연명(年名)이 다시 나타날 때 있게 될 것이다. 또, 한나라의 성주(聖主)는 고조의 손자 혹은 증손자에서 나타날 것이며 보정이 출현한다는 것은 신의 바람과 상통한다는 뜻이니, 반드시 봉선대제를 거행해야 한다. 자고로 봉선을 행했던 제왕은 72명이나 되지만, 황제(黃帝)만이 태산에 올라 천신에게 제사 지냈다.
申公曰:『漢主亦當上封, 上封能僊登天矣. 黃帝時萬諸侯, 而神靈之封居七千. 天下名山八, 而三在蠻夷, 五在中國. 中國華山、首山、太室、泰山、東萊, 此五山黃帝之所常游, 與神會. 黃帝且戰且學僊. 患百姓非其道者, 乃斷斬非鬼神者. 百餘歲然後得與神通. 黃帝郊雍上帝, 宿三月.
신공왈 "한주역당상봉 상봉능선등천의 황제시만제후 이신령지봉거칠천 천하명산팔 이삼재만이 오재중국 궁국화산 수산 태실 태산 동래 차오산황제지소상류 여신회 황제차전자학선 충백성비기도자 내단참비귀신자 백여세 연후득여신통 황제교옹상제 숙삼월
신공이 말하길 “한나라의 군주도 응당 태산에 올라 봉선해야 하며, 태산에 올라 봉선할 수 있어야 곧 신선이 되어 승천할 수 있다. 황제(黃帝) 때는 제후국이 만 개나 있었으며, 명산대천에서 제사를 거행하던 제후국이 7천개나 되었다. 천하에 명산은 8개가 있는데, 3개는 오랑캐 땅(蠻夷)에 있으며, 5개가 중국에 있다. 중원 지구에는 화산(華山), 수산(首山), 태실산(太室山), 태산(泰山), 동래산(東萊山)이 있는데, 이 5개의 산은 황제(黃帝)가 항시 유람하며 신선과 만났던 곳이다. 황제(黃帝)는 한편으로 전쟁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선의 도를 배웠는데, 백성들이 그의 선도(仙道)를 반대할까 두려워, 귀신을 비방하는 자는 즉시 참살했으며, 이렇게 1백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신선과 상통할 수 있었다. 황제(黃帝)는 옹현 교외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느라 3개월간 머물렀다.
鬼臾區號大鴻, 死葬雍, 故鴻冢是也. 其後黃帝接萬靈明廷. 明廷者, 甘泉也. 所謂寒門者, 谷口也. 黃帝采首山銅, 鑄鼎於荊山下. 鼎旣成, 有龍垂胡髥下迎黃帝. 黃帝上騎, 群臣後宮從上者七十餘人, 龍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龍髥, 龍髥拔, 墮, 墮黃帝之弓. 百姓仰望黃帝旣上天, 乃抱其弓與胡髥號, 故後世因名其處曰鼎湖, 其弓曰烏號.』」於是天子曰:「嗟乎! 吾誠得如黃帝, 吾視去妻子如脫躧耳.」 乃拜卿爲郎, 東使候神於太室.
귀유구호대홍 사장옹 고홍총시야 기후황제접만영명정 명정자 감천야 소위한문자 곡구야 황제채수산동 주정어형산하 정기성 유용수호 염하영황제 황제상기 군신후궁종상자칠십여인 용내상거 여소신부득상 내실지용염 용염발 타 타황제지궁 백성앙황제기상천 내포기여호염호 고후세인명지처왈정호 기궁왈오호" ' 어시천자왈 '오호 오성득여황제 오시거처자여탈사이' 내배경위랑 동사후신어태실
귀유구(鬼臾區)는 별호가 대홍(大鴻)이며, 그가 죽후 옹현에 장사지냈는데, 이 때문에 홍총(鴻冢)이라 불리는 것이요. 이후 황제(黃帝)는 명정(明廷)에서 많은 신령들을 영접했는데, 명정은 바로 지금의 감천궁을 말하며, 황제가 등천한 장소 한문(寒門) 지금의 곡구(谷口)를 말한다. 황제(黃帝)는 수산(首山)에서 동(銅)을 채취해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을 주조했다. 정이 완성되자 하늘에서는 긴 턱수염을 드리운 용이 황제(黃帝)를 영접했으며, 황제가 용의 등에 올라타자 군신, 후궁 등 70여명도 따라서 용의 등에 올라탔고, 그러자 용은 상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머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은 올라탈 수 없게 되자 모두 용의 수염을 잡았다가, 수염이 뽑히어 땅으로 떨어졌으며 황제(黃帝)의 활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모두 황제(黃帝)가 상천(上天)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의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서 대성통곡했다. 이 때문에 후세에 그곳을 정호(鼎湖)라고 불렀으며, 그 활을 오호(烏號)라고 불렀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천자는 “아! 내가 만약 황제(黃帝)처럼 될 수 있다면, 해진 짚신을 버리듯이 처자와 헤어지리라!”라고 말하고는, 곧 공손경을 낭관(郎官)에 임명하고, 그를 동쪽의 태실산에 보내어 신기를 살피게 했다.
上遂郊雍, 至隴西, 西登崆峒, 幸甘泉. 令祠官寬舒等具太一祠壇, 祠壇放薄忌太一壇, 壇三垓. 五帝壇環居其下, 各如其方, 黃帝西南, 除八通鬼道. 太一, 其所用如雍一畤物, 而加醴棗脯之屬, 殺一貍牛以爲俎豆牢具. 而五帝獨有俎豆醴進. 其下四方地, 爲醊食群神從者及北斗云. 已祠, 胙餘皆燎之. 其牛色白, 鹿居其中, 彘在鹿中, 水而洎之. 祭日以牛, 祭月以羊彘特. 太一祝宰則衣紫及繡. 五帝各如其色, 日赤, 月白.
상수교옹 지롱서 서등공동 행감천 영사관관서등구태알사단 사단방박기태일단 단삼해. 오제단환거기하 각여기방 황제서남 제팔통귀도 태일 기소용여옹일치물 이가예조포지속 살일리우이위조두뢰구. 이오제독유조구예진 기하사방지 위철식군신종자급북두운. 이사작여개료지. 기우색백 록거기중 체재록중 수이계지. 제일이우 제월이양체특 태일축재즉의자급수. 오제각여기색 일적 월백
천자는 이어서 옹현에서 제사를 거행하고서, 롱서군(隴西郡)에 이르자, 서쪽의 공동산(空桐山)에 오른 뒤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사관 관서(寬舒) 등에게 태일신의 사단을 건립하되, 사단은 박유기(薄謬忌)가 말한 바의 태일단 형식에 의거해 3층으로 구분하라고 명했다. 5제의 제단은 그 아래에 빙 둘러 각기 5제에 해당하는 방위에 두었고, 황제(黃帝)의 제단은 서남쪽에 위치하게 하고 귀신과 왕래할 수 있는 길을 여덟 갈래 만들었다. 태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물은 옹현의 치(畤)에 올렸던 것과 같게 하되, 감주, 대추, 말린 고기 등을 첨가하고, 검정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러나 5제를 제사 지낼 때는 감주와 제육만을 바치게 했다. 제단 아래 사방의 땅은 수행하는 여러 신들과 북두칠성에 제사하기 위한 곳이었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 지냈던 육류는 모두 끓였다. 소는 흰색이었으며, 사슴은 소의 뱃속에, 돼지는 사슴의 뱃속에 넣은 후, 물에 부어 삶았다. 일신(日神)에게 제사 지낼 때는 소를 사용하고, 월신(月神)에게 제사 지낼 때는 양 혹은 돼지 한 마리를 사용했다. 태일신의 사제 관원은 자색의 옷을 입었으며, 오제의 관원은 각기 해당하는 색에 따랐으며, 태양신의 제관은 붉은 색 의복을 입었으며, 달신의 제관은 흰색 의복을 입었다.
十一月辛巳朔旦冬至, 昧爽, 天子始郊拜太一. 朝朝日, 夕夕月, 則揖;而見太一如雍郊禮. 其贊饗曰:「天始以寶鼎神策授皇帝, 朔而又朔, 終而復始, 皇帝敬拜見焉.」而衣上黃. 其祠列火滿壇, 壇旁亨炊具. 有司云「祠上有光焉」. 公卿言「皇帝始郊見太一云陽, 有司奉瑄玉嘉牲薦饗. 是夜有美光, 及晝, 黃氣上屬天」. 太史公、祠官寬舒等曰:「神靈之休, 祐福兆祥, 宜因此地光域立太畤壇以明應. 令太祝領, 秋及臘閒祠. 三歲天子一郊見.」
십일월신사삭단동지 매상 천자시교배태일. 조조알 석석월 즉읍 이견태일여옹교예. 기찬향왈 '천시이보정신책수황제 삭이우삭 종이복시 황제경배견언' 이의상황. 기사열화만만 단방형취구. 유사운 '사상유광언'. 공경언 '황제시교현태일운양 유사봉선옥가생천향. 시여유미광 급서 황기상속천. 태사공 사관관서등왈 '신령지휴 우복조상 의인차지광역립태치단이명응. 영태축령 추급엽한사. 삼세천자일교현'
한편 11월 신사(辛巳) 초하루 아침이 동지였는데, 새벽에 천자는 교외로 가서 태일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에는 태양을 향해, 저녁에는 달을 향해 문후했는데, 읍례(揖禮)만 행했다. 그러나 태일신을 조현할 때는 옹치 교제에 의거했다. 축사로써 '천신(天神)께서 처음으로 옥정과 신책을 천자에게 내리시고, 왕조가 끝나면 또 시작하시어 영원무궁하게 반복 순환하게 하시니, 천자는 공경스럽게 천신에게 제사 드리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제복은 황색을 입도록 했다. 제단에는 횃불을 가득히 켜놓고, 제단 옆에는 조리기구들을 늘어놓았다. 이때 한 관리가 '단 위에서 광채가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공경대신은 '천자께서 처음 운양궁(雲陽宮)에서 태일신에게 제사 지내실 때, 사제가 큰 옥과 크고 잘생긴 제물을 공손하게 바치자, 그날 밤 하늘에는 아름다운 광채가 나타나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황색의 구름은 상공으로 치솟아 하늘과 이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태사공과 축관 관서 등이 '신령이 드러내는 이 아름다운 기상은 백성들을 가호하는 길조이니, 응당 이 광채가 나타난 곳에 태일신단을 건립해 신명에 보답해야 합니다. 천자께서는 태축에게 매년 가을 수렵철 사이에 제사를 거행하게 명하시고, 3년에 한 차례 천자께서 직접 교제를 거행하셔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其秋, 爲伐南越, 告禱太一. 以牡荊畫幡日月北斗登龍, 以象太一三星, 爲太一鋒, 命曰「靈旗」. 爲兵禱, 則太史奉以指所伐國. 而五利將軍使不敢入海, 之泰山祠. 上使人隨驗, 實毋所見. 五利妄言見其師, 其方盡, 多不讎. 上乃誅五利.
기추 위벌남월 고도태일. 이모형화번일월북두등룡 이상태일삶성 위태일봉 명왈 '영기'. 위병도 득태사봉이지소벌국. 이오리장군사불감입해 지태산사. 상사인수험 실무소견. 오리망언견기사 기방진 다불수. 산내주오리
이해 가을, 남월(南越)을 정벌하기 위해, 태일신에게 기원했다. 모형(牡荊)나무로 깃대를 만들고 깃발에는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과 비룡을 그려 넣어 태일(太一)과 삼성(三星)을 상징했고, 이 태일 깃발을 선봉깃발로 사용하기에 ‘영기(靈旗)’라고 불렀다. 군사문제를 위해 기원할 때, 태사관(太史官)은 이 영기를 잡고 정벌하려는 국가의 방향을 가리켰다. 오리장군은 선도를 구하는 사자로 파견되었으나, 감히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고 태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다. 천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서 검증하게 했는데, 그는 어떠한 실현도 볼 수 없었다. 오리장군은 그의 스승을 보았다고 망언까지 했다. 그의 방술은 이미 다해 거의 영험이 없게 되자 천자는 그를 죽였다.
*五利將軍: 무당 鸞大를 가리킨다.
중악 숭산(태실산)
上遂東巡海上, 行禮祠八神. 齊人之上疏言神怪奇方者以萬數, 然無驗者. 乃益發船, 令言海中神山者數千人求蓬萊神人. 公孫卿持節常先行候名山, 至東萊, 言夜見大人, 長數丈, 就之則不見, 見其跡甚大, 類禽獸云. 群臣有言見一老父牽狗, 言「吾欲見巨公」, 已忽不見. 上卽見大跡, 未信, 及群臣有言老父, 則大以爲僊人也. 宿留海上, 予方士傳車及閒使求僊人以千數.
상수동순해상 행례사팔신. 제인지상소언신괴기방자이만수 연무험자 내익발선 영언해중신산자수천인구봉래신인. 공손경지절상선행후명산 지동래 언야견대인 장수장 위지즉불견 견기적심대 유금수운. 군신유언견일노부견구 언 '오욕견거공' 이물불현. 상즉견대적 미신 급군신유언노부 즉대이위선인야. 숙류해상 여방사전거급한사구선인이천수
이어서 천자는 동쪽으로 순행해 바닷가에 이르자 8신(八神)에게 제사를 거행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기괴한 방술을 담론하는 자가 만 명에 이르지만 영험한 자는 한 명도 없다고 상소했다. 그러자 천자는 배를 더욱 많이 내보내어 바다에 신선이 있다고 말하는 수천 명에게 봉래 선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공손경은 부절(=신표)을 지니고서 먼저 가서 명산을 살피는데 동래(東萊)에 이르렀을 때, 밤에 거인을 목격했는데, 그는 키가 몇 십 척이나 되고, 가까이 접근하자 곧 사라졌으며, 그가 남긴 발자국을 보니 마치 짐승의 것처럼 매우 컸다고 말했다. 신하 중에 어떤 이는 개를 끌고 있던 한 노인이 '천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는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천자가 큰 발자국을 보고도 긴가민가 하는데, 신하 중에 어떤 자가 또 그 노인의 일을 말하자, 그자가 바로 선인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닷가에 머물면서 방사들에게 전거(傳車=연락용 마차)를 발급해 왕래하며 소식을 보고하게 했고, 수천 명의 사자로 하여금 신선을 찾으라고 파견했다.
四月, 還至奉高. 上念諸儒及方士言封禪人人殊, 不經, 難施行. 天子至梁父, 禮祠地主. 乙卯, 令侍中儒者皮弁薦紳, 射牛行事. 封泰山下東方, 如郊祠太一之禮. 封廣丈二尺, 高九尺, 其下則有玉牒書, 書袐. 禮畢, 天子獨與侍中奉車子侯上泰山, 亦有封. 其事皆禁. 明日, 下陰道. 丙辰, 禪泰山下阯東北肅然山, 如祭后土禮. 天子皆親拜見, 衣上黃而盡用樂焉. 江淮閒一茅三脊爲神藉. 五色土益雜封. 縱遠方奇獸蜚禽及白雉諸物, 頗以加禮. 兕牛犀象之屬不用. 皆至泰山祭后土. 封禪祠;其夜若有光, 晝有白雲起封中.
사월 환지봉고. 상념제유급방사언봉선인인수 불경 난시행. 천자지양보 예사지주. 을묘 영시중유자피변천신 사우행사. 봉태산하동방 여교사태일지례. 봉광장이척 고수척 기하즉유옥첩서 서비. 예필 천자독여시중봉거자후상태산 역유봉. 기사개금. 명일 하음도. 병진 선태산하지동북숙연산 여제후토례. 천자개친배견 의상황이진용악언. 강회한일모삼척위신자. 오색사익잡봉. 종원방기수비금급자치제물 파이가례. 시우서상지속불용. 개지태산제후토. 봉선사 기야약유광 주유백운기봉중.
4월에 해변에서 봉고현(奉高縣)으로 돌아왔다. 천자는 유생들과 방사들이 봉선인에 대한 의견이 다르고 경전이 서로 달라 시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천자는 양보산(梁父山)에 돌아와서 지신에게 제사드렸다. 을묘일에 시중과 유생들에게 피변(皮弁)과 관복을 착용하고, 사우=왕이 직접 소를 잡는 의식을 행하라고 명했다. 천자는 또 태산의 동쪽 산기슭에 제단을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 지냈는데, 교제와 똑같이 했다. 제단의 넓이가 1장 2척이며, 높이는 9척이 되게 했으며, 그 아래에 옥첩서(玉牒書)를 놓았는데, 문서의 내용은 비밀로 했다. 제례가 끝나자, 천자는 혼자서 시중봉거(侍中奉車;가까운 시종) 자후(子侯)와 태산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이 일에 대해선 언급을 일절 금하게 했다. 다음날 산의 북쪽 길로 하산했다. 병진일에 태산 기슭 동북쪽의 숙연산(肅然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냈는데, 그 제례의식은 후토신과 같았다. 천자는 모두 친히 제사 지냈는데, 황색 의복을 입었고 음악을 연주했다. 또한 강(江), 회(淮) 일대에서 생산되는 띠풀[茅]을 엮어서 신의 깔개로 사용했다. 오색의 진흙을 사용해 제단을 단단하게 메웠다. 또 아주 먼 지방에서 바쳐온 진귀한 들짐승, 날짐승과 흰색 꿩 등을 풀어, 제례의 엄숙한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거행했다. 그러나 시우(兕牛), 모우(牦牛),서우(犀牛), 대상(大象) 등의 동물들은 제물로 쓰지 않았다. 그날 밤 하늘에 광채 같은 것이 번쩍거렸고, 낮에는 흰 구름이 제단 위에서 솟아올랐다.
天子從禪還, 坐明堂, 群臣更上壽. 於是制詔御史:「朕以眇眇之身承至尊, 兢兢焉懼不任. 維德菲薄, 不明于禮樂. 脩祠太一, 若有象景光, 屑如有望, 震於怪物, 欲止不敢, 遂登封太山, 至于梁父, 而後禪肅然. 自新, 嘉與士大夫更始, 賜民百戶牛一酒十石, 加年八十孤寡布帛二匹. 復博、奉高、蛇丘、歷城, 無出今年租稅. 其大赦天下, 如乙卯赦令. 行所過毋有復作. 事在二年前, 皆勿聽治.」又下詔曰:「古者天子五載一巡狩, 用事泰山, 諸侯有朝宿地. 其令諸侯各治邸泰山下.」
천자종선환 돠명당 군신경상수. 어시제조어사 '짐이묘묘지신승지존 긍긍언구불임. 유덕비박 불명예악. 유사태일 약유상경광 성여유망 진어괴물 욕지불감 수등봉태산 지우양보 이후선숙연. 자신 가여사대부갱시 사민백호우일주십석 가년팔십과부포백이필. 복박 봉고 사구 약성 무출금년조세 기대사천하 여을묘사령. 행소과무유복작. 사재이년전 개물청치' 우하조왈 '고자천자오재일순수 용사태산 제후유조숙지. 기영제후각치저태산하'
천자가 봉선을 지내고 돌아와서 명당(明堂)에 앉자, 여러 신하들이 천자께 일일이 알현하면서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어사에게 조서를 내려 명했다. '짐이 미천한 몸으로 제왕의 지위에 올라,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다. 짐은 덕이 부족하고 예악제도에 밝지 못하다. 태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 하늘에 길조의 광채가 오랫동안 비치었는데 짐은 그 기이한 광경에 몹시 놀라 중도에 멈추고 싶어도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태산에 올라 봉선을 거행하고, 양보산에 오른 후에 숙연산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새사람이 되어 모든 관리들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하니, 백성들에게는 백 가구당 소 한 마리와 술 10석을 내리고, 나이 80세 이상인 노인과 고아와 과부에게는 천 두 필씩을 지급하라. 박(博), 봉고(奉高), 사구(蛇丘), 역성(歷城) 등 4현의 금년 조세를 면제하고 을묘년에 행했던 사면처럼 천하에 대사면을 실시하라. 짐이 순수했던 지방은 복작(復作=세금을 물리는 일)을 집행하지 말며, 범법한 시일이 2년 이전인 자에 대해서도 형을 판결하지 말라. 또한 옛날의 천자는 5년에 한 번씩 순수를 실시하고, 태산에 올라 천지에 제사 지냈는데, 이때 제후들은 조현하면서 머물 숙소가 있었다. 제후들은 각기 태산 아래에 저택을 짓도록 하라.' 명 했다.
天子旣已封泰山, 無風雨災, 而方士更言蓬萊諸神若將可得, 於是上欣然庶幾遇之, 乃復東至海上望, 冀遇蓬萊焉. 奉車子侯暴病, 一日死. 上乃遂去, 並海上, 北至碣石, 巡自遼西, 歷北邊至九原. 五月, 反至甘泉. 有司言寶鼎出爲元鼎, 以今年爲元封元年.
천자기이봉태산 무풍우제 이방사갱언봉래제신장가득 어시상흔연서기우지 내복동지해상망 기우봉래언. 봉거자후폭병 일일사. 상급수거 병해상 북지갈석 순자요서 역북변지구원. 오월 반지감천. 유사언보정출위원정 이금년위원봉원년.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의 제사를 마칠 때까지 비와 바람의 재앙이 없었다. 방사들이 봉래산 등의 신선들을 머지않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아뢰자, 천자는 기뻐해 어쩌면 신선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다시 동쪽으로 가서 해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며 봉래산의 신선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봉거도위 곽자후(霍子侯)가 갑자기 급사병에 걸려 이날 죽었으므로, 천자는 그곳을 떠나 해변을 따라 북상해 갈석산(碣石山)에 도착해, 요서(遼西)에서 순수를 시작해 북부의 변새 지방을 거쳐 구원(九原)에까지 도착했다. 5월에는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관원들은 보정이 출토되었던 그해 연호를 원정(元鼎)이라고 고쳤으니, 봉선을 거행한 올해는 당연히 원봉(元封) 원년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其秋, 有星茀于東井. 後十餘日, 有星茀于三能. 望氣王朔言:「候獨見塡星出如瓜, 食頃復入焉.」有司皆曰:「陛下建漢家封禪, 天其報德星云.」
기추 유성불우동정 우십여링 유성불우삼능 망기왕삭언 '후독견전성출여과 식경복입언' 유사개왈 '폐하건한가봉선 천기보덕성운'
그해 가을, 혜성이 동정(東井)자리에 많이 나타나고, 10일 후에는 다시 삼태(三能) 자리에 나타나니 왕삭(王朔)이 그 기상을 관측하고 '신이 토성이 과의 자리에 나타남을 보았는데 잠시후 사라졌읍니다.'하니 그러자 담당관원들이 '천자께서 한 왕조에서는 처음으로 봉선의 의식을 시작하시니, 하늘이 덕성(德星)을 나타내시어 천자께 보답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其來年冬, 郊雍五帝. 還, 拜祝祠太一. 贊饗曰:「德星昭衍, 厥維休祥. 壽星仍出, 淵耀光明. 信星昭見, 皇帝敬拜太祝之享.」
기래년동 교옹오치 환배축사태일 찬향왈 '덕성소연 궐유휴상 수성잉출 연요광명 신상소견 황제경배태축지향'
그 해 겨울이 오자, 천자는 옹에서 5제에게 교제를 올리고 돌아와서는 태일신에게 제사 지냈다. 축사로써 '덕성이 찬란하게 빛난 것은 길조이옵니다. 수성(壽星)도 함께 나타나서 빛을 널리 비추고 신성도 보이니 천자로서 큰 제를 올립니다.'라고 아뢰었다.
其春, 公孫卿言見神人東萊山, 若云「欲見天子」. 天子於是幸緱氏城, 拜卿爲中大夫. 遂至東萊, 宿留之數日, 無所見, 見大人跡云. 復遣方士求神怪采芝藥以千數. 是歲旱. 於是天子旣出無名, 乃禱萬里沙, 過祠泰山. 還至瓠子, 自臨塞決河, 留二日, 沈祠而去. 使二卿將卒塞決河, 徙二渠, 復禹之故跡焉.
기춘 공손경언견신인동래산 약운 '욕견천자'. 천자어시행구씨성. 배경위중대부. 수지동래 숙류지수일 무소견 견대인적운. 복견방사구신괴패지약이천수. 시세조 어시천자기출무명 내도만리사 과사태산. 환지호자 자임색결하 유이일 침사이거. 사이경장졸색결하 사이거 복우지고적운.
그해 봄, 공손경이 동래산에서 신선을 보았는데 '천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것 같았다 했다. 이에 천자는 구씨성으로 행차해 공손경을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했다. 이어 동래산에 가서 며칠 머물렀는데,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단지 거인의 발자국만 보았다. 그러자 천자는 다시 방사 천여 명을 파견해 신기한 물건을 찾고 영지선약을 캐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 해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이번에는 순행을 떠날 만한 명분이 없어, 만리사(萬里沙)에 가서 비가 오도록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러 가는 차에 태산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 되돌아올 때 호자(瓠子)에 도착해 황하의 터진 곳을 틀어막는 부서에 친히 들러, 이틀을 머물면서 백마(白馬)와 옥벽(玉璧)의 제물을 강물에 빠뜨려서 하신(河神)에게 제사 지낸 후 그 곳을 떠났다. 두 명의 상경(上卿)에게 병사를 통솔해 황하의 터진 곳을 막게 했고, 황하의 두 개의 운하가 바다로 유입되도록 물줄기를 변경해, 하우 시대의 옛 수로를 회복했다.
是時旣滅兩越, 越人勇之乃言「越人俗鬼, 而其祠皆見鬼, 數有效. 昔東甌王敬鬼, 壽百六十歲. 後世怠慢, 故衰秏」. 乃令越巫立越祝祠, 安臺無壇, 亦祠天神上帝百鬼, 而以雞卜. 上信之, 越祠雞卜始用.
시시기멸양월 월인용지내언 '월인속귀 이기삭견귀 수우효 석동구왕경귀 수백육십세. 후세태만 고쇠모'. 내영월무입월축사 안일무단 역사천신상제백귀 이이잡복. 상언지 월사계복시용.
당시 이미 남월(南越)과 동월(東越)을 정벌했는데, 월인(越人) 용지(勇之)는 '월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믿는 풍속이 있어 그 제단에서는 언제나 귀신을 볼 수 있으며, 자주 효험을 봅니다. 옛날 동구왕(東甌王)은 귀신을 숭배해, 16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귀신을 경시했기 때문에 쇠퇴해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천자는 월나라 무당에게 월축사(越祝祠)를 건립하되 제대(祭臺)는 세우나 제단은 쌓지 말며, 천신, 상제, 백귀에게 제사 지내돠 계복(鷄卜=닭뼈 점)을 사용하라고 명했다. 이로 월나라 제사엔 계복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公孫卿曰:「仙人可見, 而上往常遽, 以故不見. 今陛下可爲觀, 如緱城, 置脯棗, 神人宜可致也. 且僊人好樓居.」於是上令長安則作蜚廉桂觀, 甘泉則作益延壽觀, 使卿持節設具而候神人. 乃作通天莖臺, 置祠具其下, 將招來僊神人之屬. 於是甘泉更置前殿, 始廣諸宮室. 夏, 有芝生殿房內中. 天子爲塞河, 興通天臺, 若見有光云, 乃下詔:「甘泉房中生芝九莖, 赦天下, 毋有復作.」
공손경왈 '선인가현 이상왕상거 이고불견 금폐하가위관 여구성 치포조 신인의가치야. 차선인호루거' 어시상영장안즉작비렴계관 감천즉작익연수관 사경지잘설구이후신인. 내작통천경대 치사구기하 장초래선신인지속. 어시간천갱치전전 시광제궁실. 하 유지생전방내중. 천자위색하 흥동천대 약견유광운 내하조 '감천방중생지구경 사천하 무유복작'.
공손경은 '천자께서는 선인을 보실 수 있었으나, 항시 어수선해 아직 보지 못하신 것입니다. 지금 천자에서 누대를 건립하시고, 구씨성처럼 말린 고기와 대추를 차려놓으시면, 신선이 응당 나타날 것이며, 또한 그들은 누대에 거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명령을 내리어 장안에 비렴관(蜚廉觀)과 계관(桂觀)을 건립하고, 감천에는 익수관(益壽觀)과 연수관(延壽觀)을 지어, 공손경에게 부절(=신표)을 지니고 제구를 설치하고서 전심으로 신선을 기다리게 했으며, 또한 통천대(通天臺)를 건립해 대 아래에는 제물을 차려놓고 신선을 기다렸다. 이때 감천궁에 또다시 전전(前殿)을 짓고, 각 궁실들을 증축했다. 여름에 궁전의 방 안에서 영지가 자라났다. 또한 천자가 황하의 터진 곳을 막고 통천대를 짓자 하늘에는 번쩍거리는 듯한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다. 이에 곧 조서를 내려 '감천궁의 방 안에 아홉 포기의 영지가 자라났으니, 특별히 천하에 대사면을 실행하고 죄수들의 감옥 밖 노역을 면제토록 하라.'고 명했다.
其明年, 伐朝鮮. 夏, 旱. 公孫卿曰:「黃帝時封則天旱, 乾封三年.」上乃下詔曰:「天旱, 意乾封乎? 其令天下尊祠靈星焉.」
기명년 벌조선 하 조. 공손경왈 '황제시봉즉천조 건봉삼년' 상내하조왈 '천조 의건봉호 기영천하존사영성언'
그 이듬해, 조선(朝鮮)을 정벌했는데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공손경이 '황제(黃帝)씨가 봉선제를 올릴 때마다 가뭄이 들었는데, 이와 같이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봉토를 건조하게 했사옵니다.'라고 아뢰니, 천자는 즉시 조서를 내려 '하늘의 가뭄은 봉토를 마르게 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특별히 명하노니 천하 백성들은 영성(靈星)에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其明年, 上郊雍, 通回中道, 巡之. 春, 至鳴澤, 從西河歸.
기명년 상교옹 통회중도 순지 춘 지명택 종서하귀
그 이듬해, 천자는 옹현에서 교제를 지내고, 회중(回中)길을 거쳐 순수했다. 봄에 명택(嗚澤)에 이르러 서하(西河)를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其明年冬, 上巡南郡, 至江陵而東. 登禮灊之天柱山, 號曰南岳. 浮江, 自尋陽出樅陽, 過彭蠡, 禮其名山川. 北至琅邪, 並海上. 四月中, 至奉高脩封焉.
기명년동 상순남군 지강릉이동 등예잠지천주산 호왈남악 부강 자심양충종양 과팽려 예기명산천 북지낭아 병해상 사월중 지봉고수봉언
다음해 겨울, 천자는 남군(南郡)으로 순행했는데, 강릉(江陵)에 이른 후 동쪽으로 행차했다. 잠현(潛縣)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제사를 거행하고 그 산을 남악(南嶽)이라고 칭했다. 배를 타고 장강(長江)을 따라 심양(尋陽)에서 종양(樅陽)으로 가는 도중에 팽려(彭蠡)를 거쳐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 다시 북쪽으로 낭야(琅邪)에 이르자 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4월에는 봉고현(奉高縣)에 이르러 봉선을 거행했다.
初, 天子封泰山, 泰山東北阯古時有明堂處, 處險不敞. 上欲治明堂奉高旁, 未曉其制度. 濟南人公玊帶上黃帝時明堂圖. 明堂圖中有一殿, 四面無壁, 以茅蓋, 通水, 圜宮垣爲複道, 上有樓, 從西南入, 命曰昆侖, 天子從之入, 以拜祠上帝焉. 於是上令奉高作明堂汶上, 如帶圖. 及五年脩封, 則祠太一、五帝於明堂上坐, 令高皇帝祠坐對之. 祠后土於下房, 以二十太牢. 天子從昆侖道入, 始拜明堂如郊禮. 禮畢, 燎堂下. 而上又上泰山, 自有袐祠其巓. 而泰山下祠五帝, 各如其方, 黃帝幷赤帝, 而有司侍祠焉. 山上擧火, 下悉應之.
초 천자봉태산 태산동북지고시우명당처 처험불창. 상욕치명당봉고방 미효기제도 제남인공옥대상황제시명당도. 명당도중유일전 사면무벽 이모개 통수 환궁원위복도 상유루 종서남입 명왈곤륜 천자종지입 이배사상제언. 어시상영봉고작명당문상 여대도 급오년수봉 즉사태일 오제어명당상좌 영고황제사좌대지. 사후토어하방 이이십태뢰 천자종곤륜도입 시배명당여교례. 예필 료당하. 이상우상태산 자유비사기전. 이태산하사오제 각여기방 황제병적제 이유사시사언. 산상거화 하실응지
처음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할 때, 태산의 동북쪽에는 옛날에 지은 명당이 있었는데, 지세가 험준하며 좁으므로, 천자는 봉고(奉高) 부근에 명당을 또 하나 짓고 싶었으나, 그 형식과 규모를 알지 못했다. 그러자 제남(濟南) 사람 공옥대(公玉帶)가 황제(黃帝) 때의 명당 설계도를 헌납했다. 명당의 설계도에는 사방이 트였고 지붕은 띠로 덮여 있는 전당(殿堂)이 한 채 있는데, 사방은 물이 통하게 되어 있었다. 그 둘레에는 궁원(宮垣)이 둘러져 있고, 복도(複道=겹 복도)를 만들었는데 그 위에 남쪽으로 문이 난 누각이 있어 곤륜도(昆侖道)라고 불렀다. 천자는 이 길을 따라 전당으로 들어가서 상제에게 제사 지내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공옥대가 바친 설계도에 따라 봉고현 문수(汶水)부근에 명당을 짓도록 명했다. 그 5년 후 봉선을 거행할 때, 명당의 상좌(上坐 =윗 자리)에는 태일신과 5제 단이 있어 제사 지냈는데, 황제(皇帝)의 자리를 그 맞은 편에 높이 두도록 했다. 하방(下房)에서는 20마리의 소를 제물로 후토신에게 제사 지내도록 했다. 천자는 곤륜도를 통해 들어가서 교사를 지내는 예의에 따라 명당에서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은 모두 태워버리도록 했다. 천자는 또 태산에 올라 산꼭대기에서 비밀리에 제사지내고 태산 아래에서는 5제에게 각자에 해당하는 방위에 의거해 동시에 제사 지냈는데, 황제(黃帝)씨는 적제(赤帝)와 나란히 두었고 담당 관원이 제사 지냈으며 천자는 참석지 않았다.
其後二歲, 十一月甲子朔旦冬至, 推曆者以本統. 天子親至泰山, 以十一月甲子朔旦冬至日祠上帝明堂, 毋脩封禪. 其贊饗曰:「天增授皇帝太元神策, 周而復始. 皇帝敬拜太一.」東至海上, 考入海及方士求神者, 莫驗, 然益遣, 冀遇之.
기후이세 십일월갑자삭단동지 추역자이본통 천자친지태산 이십일월갑자삭단동지일사상제명당 무수봉선. 기찬향왈 '천증수황제태원신책 주이복시 황제경배태일' 동지해상 고입해급방사구신자 막험 연익견 기우지
그 2년 후, 11월 갑자(甲子) 초하룻날 아침이 동지였는데, 역법을 계산하는 자가 이 날을 역법주기의 기점으로 정하니, 천자가 친히 태산으로 행차해 명당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는데, 봉선의 예의는 갖추지 않았다. 축사로써 '하늘이 천자에게 태초의 역법을 주시어 계속 순환되게 하시었으니, 천자는 태일신에게 경배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어 천자는 동쪽 바다로 가서 신선을 찾는 방사들을 조사해보았는데, 아무도 신선을 보지 못했으나 여전히 신선을 찾으러 사람을 계속 증파했고, 신선을 만찾기 바랬다.
十一月乙酉, 柏梁災. 十二月甲午朔, 上親禪高里, 祠后土. 臨勃海, 將以望祀蓬萊之屬, 冀至殊廷焉.
십일월을유 박량제. 십이월갑자삭 상친선고리 사후토 임발해 장이망사봉래지속 기지수연언
11월 을유일, 백량대(柏梁臺)에 화재가 발생했다. 12월 갑오(甲午) 초하룻날 천자는 친히 고리산(高里山)에서 후토신에게 제사 지냈다. 이어 발해에 도착해 봉래산의 여러 신에게 망사(望祠)를 지내고, 신선이 사는 곳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上還, 以柏梁災故, 朝受計甘泉. 公孫卿曰:「黃帝就靑靈臺, 十二日燒, 黃帝乃治明廷. 明廷, 甘泉也.」方士多言古帝王有都甘泉者. 其後天子又朝諸侯甘泉, 甘泉作諸侯邸. 勇之乃曰:「越俗有火災, 復起屋必以大, 用勝服之.」於是作建章宮, 度爲千門萬戶. 前殿度高未央. 其東則鳳闕, 高二十餘丈. 其西則唐中, 數十里虎圈. 其北治大池, 漸臺高二十餘丈, 命曰太液池, 中有蓬萊、方丈、瀛洲、壺梁, 象海中神山龜魚之屬. 其南有玉堂、璧門、大鳥之屬. 乃立神明臺、井幹樓, 度五十丈, 輦道相屬焉.
상환 이백량재고 조수계감천. 공손경왈 '황제취청령대 십이일소 황제치명정 명정 감천야' 방사가언고제왕유도감천자 기후천자우조제후감천 감천작제후저 용지내왈 '월속유화재 복기옥필이대 용승복지' 어시작건장궁 도위천문만호 전전도고미앙 기동즉봉궐 고이십여장 기서즉당중 수십리호권. 기북치대지 점대고이십여장 명왈태액지 중유봉래 방장 영주 호량 상해중신산귀어지속. 기남유옥당 벽문 대조지속. 내립신명대 정간루 도오십장 련도상속언.
천자는 장안으로 돌아와 백량대에서 화재가 났기 때문에, 감천궁에서 각 군현의 총결산 보고서를 받았다. 공손경이 '황제(黃帝)씨가 청령대(靑靈臺)를 지으신 지 12일 만에 화재를 당해서 즉시 명정(明庭)을 지으셨는데, 명정이란 바로 감천궁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방사들도 고대의 제왕 가운데 감천에 도읍을 정한 사람이 있었다고 아첨했다. 그 후 천자는 감천궁에서 제후들의 조현을 받고, 감천산에 제후들의 부제(府第)를 지었다. 용지(勇之)는 '월(越)나라의 풍속에 따르면 화재가 발생한 후에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원래의 것보다 크게 지어, 집의 크기로 재앙의 기운을 제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규모가 천문(千門) 만호(萬戶)인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다. 전전(前殿)의 규모는 미앙궁(未央宮)보다 높고 웅대했다. 그 동쪽에는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는 봉궐(鳳闕)이 있었으며, 그 서쪽에는 주위 수십 리의 호권(虎圈=호랑이 우리) 있는 당중지(唐中池)가 있었다. 당중지 북쪽에는 태액지(太液地)라고 불리는 큰 연못을 팠는데, 연못 안의 누대, 즉 점대(漸臺)의 높이는 20여 장이나 될 정도로 높았으며, 그 속에는 바다의 신선, 바다거북, 어류를 본떠 만든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이라고 불리는 가짜 선산(仙山)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대조(大鳥) 등을 만들어놓았다. 또한 높이가 50장이나 되는 신명대(神明臺), 정간루(井幹樓)를 세웠는데, 연도(輦道)를 서로 연결해놓았다.
夏, 漢改曆, 以正月爲歲首, 而色上黃, 官名更印章以五字, 爲太初元年. 是歲, 西伐大宛. 蝗大起. 丁夫人、雒陽虞初等以方祠詛匈奴、大宛焉.
하 한개역 이정월위세수 이색상황 관명갱인장이오자 위태초원년. 시세 서벌대완 황대기 정부인 낙양우초등이방사조흉노 대완언.
여름에 한나라는 역법을 바꾸었는데, 정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며, 다섯 가지 색 중 황색을 숭상하고 관명의 인장은 다섯 글자로 바꾸고, 이 해의 연호를 태초(太初) 원년으로 바꾸었다. 이해에 서쪽으로 대원(大宛)을 정벌했으며, 메뚜기[蝗]가 극성을 부렸다. 정부인(丁夫人)과 낙양 사람 우초(虞初) 등이 방술을 사용해 흉노와 대원을 저주하는 제사를 지냈다.
其明年, 有司上言雍五畤無牢熟具, 芬芳不備. 乃令祠官進畤犢牢具, 色食所勝, 而以木禺馬代駒焉. 獨五月嘗駒, 行親郊用駒. 及諸名山川用駒者, 悉以木禺馬代. 行過, 乃用駒. 他禮如故.
시명년 유사상언옹오치무뢰숙구 분방불비. 내명사관진치독뢰구 색식소승 이이목우마대구언 독오월상구 행친교용구 급제명산대천용구자 실이목우마대 행과 내용구. 타례여고.
이듬해, 제관들은 옹현의 5치(五畤)에서 지내는 제사에는 익힌 제물과 향기 나는 제물을 올리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는 사관에게 명해 송아지는 각 치에 바치도록 하고, 제물의 색깔은 각 방위의 천제가 제압해 먹을 수 있는 색의 것을 배치하게 명했다. 또한 제사에 사용하는 장마(壯馬=살아있는 말)는 나무로 만든 목마(木偶馬)로 대체하게 했다. 그러나 5월의 제사 때나 천자가 친히 행차한 제사에서는 살아있는 말을 사용하게 했으나, 모든 명산대천의 제사에는 모두 목우마로 대치했다. 또한 천자가 친히 순행했던 곳의 제사에는 새끼말을 사용했고, 그 외의 의례는 옛 체제에 따라 거행했다.
其明年, 東巡海上, 考神僊之屬, 未有驗者. 方士有言「黃帝時爲五城十二樓, 以候神人於執期, 命曰迎年」. 上許作之如方, 命曰明年. 上親禮祠上帝焉.
기명년 동순해상 고신선지속 미유험자. 방사유언 '황제시위오성십이루 이후신인어집기 명왈영년'. 상허작지여방 명왈명년. 상친예사상제언.
다음 해, 천자는 동해안을 순행하며, 신선을 찾아 바다로 나갔던 방사들을 탐문했으나 시선을 만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방사가 '황제(黃帝)씨 때에 5개의 성과 12개의 누대를 건축하고, 집기(執期)에서 신선을 기다렸는데, 이를 ‘영년(迎年)’이라고 부릅니다.'라 하니, 천자는 그가 말한 대로 누대를 짓고, 이를 ‘명년(明年)’이라 이름 짓고는, 친히 그곳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거행했다.
公玊帶曰:「黃帝時雖封泰山, 然風后、封巨、岐伯令黃帝封東泰山, 禪凡山, 合符, 然后不死焉.」天子旣令設祠具, 至東泰山, [東]泰山卑小, 不稱其聲, 乃令祠官禮之, 而不封禪焉. 其後令帶奉祠候神物. 夏, 遂還泰山, 脩五年之禮如前, 而加以禪祠石閭. 石閭者, 在泰山下阯南方, 方士多言此僊人之閭也, 故上親禪焉.
공옥재왈 '황제시수봉태산 연풍후 봉거 기백영황제봉태산 선범산 합부 연후불사언' 천자기영설사구 지동태산 동태산비고 불칭기성 내영사관예지 이불봉선언 기후영대봉사후신물. 하 수환태산 수ㅗ년지례여전 이가이선사석려 석려자 재태산하지남방방사다언차선인지여지 고상친선언.
공옥대는 '황제(黃帝) 때는 태산에만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냈습니다. 그러나 풍후(風后), 봉거(封鉅), 기백(岐伯)등이 동태산(東泰山)에서 제사를 지내고 범산(凡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낼 것을 건의했는데, 이에 신령이 감응해 길조를 내려, 불로장생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는 제물을 준비하라고 명해, 동태산에 갔으나 동태산은 너무 작아서 그 명성에 걸맞지 않으므로 사관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고, 봉선은 거행하지 않았다. 그 후 공옥대로 하여금 이곳에서 제사 지내며 신선을 기다리게 했다. 여름에 천자는 태산으로 돌아와 관례대로 5년에 한 번 봉선대전을 거행했고, 다시 석려산(石閭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석려산은 태산 기슭의 남쪽에 있었는데, 방사들은 그곳이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천자는 그곳에 가서 친히 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其後五年, 復至泰山脩封. 還過祭恆山.
기후오년 복지태산수봉 환과제항산
5년 후, 다시 태산에 와서 봉선제를 거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항산(恒山)에서 제사 지냈다.
今天子所興祠, 太一、后土, 三年親郊祠, 建漢家封禪, 五年一脩封. 薄忌太一及三一、冥羊、馬行、赤星, 五, 寬舒之祠官以歲時致禮. 凡六祠, 皆太祝領之. 至如八神諸神, 明年、凡山他名祠, 行過則祠, 行去則已. 方士所興祠, 各自主, 其人終則已, 祠官不主. 他祠皆如其故. 今上封禪, 其後十二歲而還, 遍於五岳、四瀆矣. 而方士之候祠神人, 入海求蓬萊, 終無有驗. 而公孫卿之候神者, 猶以大人之跡爲解, 無有效. 天子益怠厭方士之怪迂語矣, 然羈縻不絶, 冀遇其眞. 自此之後, 方士言神祠者彌衆, 然其效可睹矣.
금천자소흥사 태일 후토 삼년친교사 건한가봉선 오년일수봉 박기채일급삼일 명양 마행 적성 오 관서지사솬이세시치례. 범육사 개태축영지. 지여팔신제신 명년 범산타명사 기후십이세환 편어오악 사독의. 이방사지후사신인 입해구봉래 종무유험. 이공손경지후신자 유이대인지적위해 무유효. 천자익태염방사지괴우어의 연기미불색 기우기진. 자차지후 방사언신사자미중 연기효가도의.
지금 천자가 새로 제정한 제례에는 태일사(泰一祠)와 후토사(后土祠)가 있으며, 3년마다 한 번씩 천자가 직접 교사를 지내고, 한 왕조에서 시작한 봉선은 5년에 한 번 거행한다. 박유기의 건의에 의해서 건립된 태일(泰一) 및 삼일(三一), 명양(冥羊), 마행(馬行), 적성(赤星) 등의 다섯 사당은 사관인 관서 등이 주관해 매년 기일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여섯 사당은 모두 태축이 주관한다. 그밖에 8신 가운데 여러 신들과 명년(明年), 범산(凡山) 등의 사당은 천자가 행차할 때 그 길을 지나게 되면 제사 지내고 그냥 지나쳐버리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 방사들이 건립한 사당은 각 건립자가 주관하며, 그 관리자가 죽으면 폐기하며 사당은 관리하지 않는다. 기타는 모두 이전의 관습에 따른다. 지금의 천자는 봉선을 시작한 후 12년 동안 5악(五嶽), 4독(四瀆)을 일주하며 제사 지냈다. 신선에게 제사 지내며 그를 기다리던 방사들과 봉래산을 찾으러 바다에 들어갔던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공손경과 같이 신선을 기다린 자는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신선을 만날 것이라고 기다렸으나, 결국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자는 갈수록 방사들의 괴이한 말에 염증을 느꼈으나, 그들의 농락이 끊이지 않아 신선을 만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후 방사들의 신선에 대한 담론은 갈수록 많아졌으나, 그 결과가 어떠했을 지는 눈에 보이는 듯하다.
太史公曰:余從巡祭天地諸神名山川而封禪焉. 入壽宮侍祠神語, 究觀方士祠官之意, 於是退而論次自古以來用事於鬼神者, 具見其表裏. 後有君子, 得以覽焉. 若至俎豆珪幣之詳, 獻酬之禮, 則有司存.
태사공왈 여종순제천지신제신명산천이봉선언. 입수궁시사신어 구관방사사관지의 어시퇴이논차자고이래용사어귀신자 구견기표리. 후유군자 득이람언 약지조두폐지상 헌수지예 즉유사존.
태사공이 말하길 나는 천자가 천지의 여러 신과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고 봉선을 거행하는데 따라다녔다. 수궁에 들어가서 제사에 참여해 신께 올리는 축문도 들었다. 그때 나는 방사와 사관의 의도를 세밀히 관찰한 연후에, 물러나서 자고로 귀신에게 제사 지낸 사실(史實)을 순서대로 논술해, 제사에 관한 형식과 내부 정황을 전부 여기에 기록한다. 후세의 군자들은 내 글을 통해서 그러한 정경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제사 지낼 때 제기, 옥, 비단 등의 상세한 내용과 헌수의 제례의식에 대해서는 담당 관리들이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