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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天 運


天 運


1.

「天其運乎? 地其處乎? 日月其爭於所乎? 孰主張是? 孰維綱是? 孰居无事而推行是? 意者其有機緘而不得已邪? 意者其運轉而不能自止邪? 雲者爲雨乎? 雨者爲雲乎? 孰隆施是? 孰居无事淫樂而勸是? 風起北方,一西一東,在上彷徨,孰噓吸是? 孰居无事而披拂是? 敢問何故?」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공고히 정지되어있나? 별들은 저마다 자리를 다투는가? 누가 이런 일들을 맡아 주관하는가? 누가 그런 질서를 짜 놓았는가?누가 아무것도 않는 경지로 이들을 이리되도록 하나? 의지가 있으면 이런 짜임을 가질 수 밖에 없는가? 의지가 그 움직임을 스스로 가고 멈추게 못하나? 구름이 비를 만드나? 비가 구름을 만드나? 누가 비를 내리고 구름을 펼치나? 누가 가만히 앉아 이 모든 일들을 재미삼아 할 권세가 있나? 바람이 북에서 일어나 한번은 동으로 한 번은 서로 하늘에서 휘돌아 흐른다 누구 이를 불어내고 들이 마시는가? 누가 가만히 앉아 이런 모든 것들의 뒤를 대어주나? 감히 그 까닭을 알고 싶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으며 이런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이 진리를 찾는 길이라 본다. 이는 참 어리석은 것이 이미 그런 틀 속에 들어와서 그걸 어찌 본단 말인가? 우물 속에서 보면 하늘도 보인다만...중요한 것은 그 우물 밖으로 나와 전체를 볼 일이지 인과를 따질 일 아니다.

옛 선인의 글을 읽거나 사람들의 저마다의 소리들을 귀 기울여 들어 봄은 그들이 다른 걸 볼 수 있고 그런 모든 것들이 전체를 깨치는데 도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듯한 누구의 뒤를 쫓음은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기도 하고...


巫咸祒曰:「來! 吾語女. 天有六極五常,帝王順之則治,逆之則凶. 九洛之事,治成德備,監照下土,天下戴之,此謂上皇.」


함초라는 무당이 말하길:[오라! 내 네게 말하여 주마. 하늘엔 6극5상이 있는데 왕들이 잘 순종하면 그게 곧 다스림이요 거스리면 흉함이라. 9서와 낙서로 빌면 다스림이란 덕을 갖추고 땅을 살피고 천하가 받드니 이걸 일컬어 상황이라 하지요]


-다시 반복하지만 결국 하늘-이미 내가 들어와 살게 된 틀-에 있는 그것들이 어찌 돌아가는가를 앎이 중요한 것... 그러나 저마다 눈이 있고 說이 있으니 그걸 잘 통합하여 관찰할 안목이 내게 있어야 할 것... 잘 듣고 잘 생각하여야 할 일...그저 우물 속에서 흐린 하늘이 맑은 하늘이 진짜다 싸울 일 아니지요...

정말 중요한 건 나를 지어준 하늘이 내게 심어준 그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것... 남의 말에 혹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 속지말고...


*구락:홍범구주와 낙서


홍범구주洪範九疇는《서경》의 홍범에 기록되어 있는, 우(禹)가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 원칙. 기자箕子가 주무왕周武王에게 설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홍범'은 널리 법이 된다는 뜻이고, '구주'는 그 아홉 가지 범주라는 뜻이다. 서경(書經)의 주서(周書) 홍범편을 보면 주나라 무왕이 은의 마지막 왕인 폭군 주(紂)를 베고 은을 멸한 후 주의 삼촌인 기자(箕子)를 찾아가 정치하는 대법을 물었다. 서로 원수사이지만 기자 또한 백성을 위하고 대도(大道)를 펴기 위하여 격의 없이 홍범구주洪範九疇로써 가르치니, 이는 오행, 오사, 팔정, 오기, 황극, 삼덕, 계의, 서징, 오복으로 아홉 가지이다.


낙서:중국 하나라의 우왕이 홍수를 다스렸을 때, 낙수에서 나온 영묘한 거북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글. 서경의 홍범구주의 원본이 되었다하며, 팔괘의 법도 여기서 나왔다 함



2.

商大宰蕩問仁於莊子. 莊子曰:「虎狼,仁也.」


상나라 대제인 탕이 장자에게 어짊이란 무엇인가 물었다. 장자 답하길 :[호랑이나 이리 같음이 어짊이지요]


曰:「何謂也?」


탕이 묻길:[어째 그렇지요?]


莊子曰:「父子相親,何爲不仁?」


장자 말하길:[아비와 새끼가 서로 친한데 어짊이 아닌가요?]


曰:「請問至仁.」


지극한 어짊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莊子曰:「至仁無親.」


지극한 어짊은 친함이 없지요


大宰曰:「蕩聞之,無親則不愛,不愛則不孝. 謂至仁不孝,可乎?」


대제 왈:[제 듣기론 친함이 없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렇고 사랑이 아니면 효도 아니랍니다. 그럼 지극한 어짊은 불효라 해도됩니까?


莊子曰:「不然. 夫至仁尙矣,孝固不足以言之. 此非過孝之言也,不及孝之言也. 夫南行者至於郢,北面而不見冥山,是何也? 則去之遠也.

故曰:以敬孝易,以愛孝難.,以愛孝易,以忘親難.,忘親易,使親忘我難.,使親忘我易,兼忘天下難.,兼忘天下易,使天下兼忘我難. 夫德遺堯舜而不爲也,利澤施於萬世,天下莫知也,豈直太息而言仁孝乎哉! 夫孝悌仁義,忠信貞廉,此皆自勉以役其德者也,不足多也. 故曰,至貴,國爵竝焉.,至富,國財竝焉.,至顯,名譽竝焉. 是以道不渝.」


장자가 답하길:[아니지요 대저 지극한 어짊이란 상서로운 거라 효란 단어로는 말하기 힘들지요. 이는 효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 아니요 효보다 못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무릇 남쪽 초나라 서울 영에 이르르면 북쪽을 바라봐도 冥山이 뵈질 않죠 왜그럴까요? 그야 멀리 갔으니 그렇지요.

그래서 말하길:공경함으로 효도하는 것은 쉬워도 사랑으로 효도하기는 어렵다하고, 설혹 사랑함으로 효를 행함은 쉬워도 친함을 잊기는 어렵고, 친함을 잊기는 쉬워도 친하나 나를 잊기는 어려우며 친함으로 나를 잊기는 쉬워도 고루 천하를 잊기는 어렵고 천하를 잊는다해도 천하가 고루 나를 잊기는 어렵다. 대저 하늘 덕이 요순에게 준 것은 '아니함'이요. 큰 못의 이로움이 만세를 가도 천하가 알지를 못하는데 어찌 큰 소리로 인효란걸 말하겠읍니까? 무릇 孝悌仁義,忠信貞廉 이 하나하나를 애써 닦으면 그것이 덕의 역할을 하기는 하는 것이나 아직 부족함이 많지요. 그래서 말하길: 지극히 귀하면 나라의 벼슬도 부럽지 않고, 진짜 부자는 한 나라 만큼의 부도 부럽지 않으며 지극히 뚜렷한 사람은 명예도 부럽지 않으니 이를 진리의 불변하는 성질을 말함이다.]


-우리는 뭔가 금방 드러나는 것만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기실 진중한 덕은 천천히 음미할 일이다. 길고 짧은 건 대어봐야 안다.


외편 그들은 흔히 후대의 첨가로 본다 나름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뭔가 일이관지 흐르는 관점이 있다면 무얼까? 노자 장자를 따르는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은 "자기 내지 자의식"에 매이지 말자 정도 아닐까 한다. 내 입장이 있으니 내 입장에 합당한 논지를 따르게 되고 내 감정이 있으니 내 맘에 합한 것을 따르게 되고 그래서 논쟁이 생기고 다른 이해가 생겨난다. 이런 다름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면 自然이요 하늘이요를 말하는 것...





3.

北門成問於皇帝曰:「帝張咸池之樂於洞庭之野,吾始聞之懼,復聞之怠,卒聞之而惑.,蕩蕩黙黙,乃不自得.」


북문성이 황제씨에게 묻길:[황제가 함지의 음악을 동정 뜰에서 베푸셨는데 전 첨에는 들으며 두려웠고, 다시 들으며 좀 지루하더니 종내는 궁금해집디다 웅장하기도하고 고요하기도 한 것이 나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더군요]

帝曰:「汝殆其然哉! 吾奏之以人,徵之以天,行之以禮義,建之以太淸. 四時迭起,萬物循生.,一盛一衰,文武倫經.,一淸一濁,陰陽調和,流光其聲.,蟄蟲始作,吾驚之以雷霆.,其卒无尾,其始无首.,一死一生,一僨一起.,所常无窮,而一不可待. 汝故懼也.

황제씨 답하길:[아마 그랬을겁니다! 난 연주하면서 사람임을 잊지않으나 하늘에 따르고 예의에 맞춰 하지요 크고 맑음을 따라 연주하죠. 사시가 변하고 만물이 따라 생겨나듯 한 번은 장하게 한 번은 약하게 지혜와 힘이 어루러지고 한 번은 맑고 한 번은 흐리듯 음양의 조화에 맞춰 그 소리마다 빛이 흐르듯 하지요. 겨울 잠을 자던 벌레들이 깨어나듯 살그머니 그러나 천둥에 놀라듯 갑자기 그 끝도 시작도 모르게 합니다. 죽은 듯하면서 생기있게 스러진 듯하면 갑자기 기세롭게 일어나듯하지요 그 변화가 무궁하니 기대할 수가 없으니 당신은 두려웠을 겁니다]

-우리는 진리란 절대 불변의 초석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진리란 아니 이 세상의 지어진 이치란 그런 일정함이 아니다. 사시가 물이 흐름은 그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그런 변화와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으려 단단하고 굳건한 불변하는 것을 찾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한다. 이 세상에서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이 이리 지어졌다는 사실 하나이지 다른 무엇이 있는 것 아니다. 

「吾又奏之以陰陽之和,燭之以日月之明.,其聲能短能長,能柔能剛,變化齊一,不主故常.,在谷滿谷,在阬滿阬.,塗却守神,以物爲量. 其聲揮綽,其名高明, 是故鬼神守其幽,日月星辰行其紀. 吾止之於有窮,流之於无止. 子欲慮之而不能知也,望之而不能見也,遂之而不能及也.,儻然立於四虛之道,倚於槁梧而吟. 心窮乎所欲知,目窮乎所欲見,力屈乎所欲逐,吾旣不及已夫! 形充空虛,乃至委蛇. 汝委蛇,故怠.

[또한 저는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지요 일월처럼 빛나게 그 소리의 장단을 고르며 강약을두어 변화를 이루지요 뭐 하나 주된 것이 없으니 常이라지요. 골짜기에 있으면 그 골짜기를 채우고, 구덩이에 있으면 구덩이를 채우며 물러서서 그 본디 정신을 지키니 이로써 만물이 양을 갖추게 되죠. 그 소리가 부드럽게 채우며 그 이름은 높고 밝지요, 그러므로 귀신이 그 유현함을 지키는 것이요, 일월성신이 그 짜임새를 갖추지요. 한계를 알아 멈추고, 막히지 않으면 따라 흐를 뿐입니다. 내가 생각하기 원하여도 그걸 알지 못하며 그를 추구하여도 그에 미치질 못하지요. 만일 곧추서서 모든 것이 허허로움을 알면 거문고 소리나 의지하게됩니다. 마음이 무궁하다라 함은 알고자하는 욕구요, 눈이 무궁하다함은 보고픈 욕심이 있기 때문이며 몸을 움추림은 나아가기 원해서요 난 이미 이르지 못할 일이지요! 모양이 가득하면 비어지거나 종래 땅의 기운에 따르게 됩니다. 당신은 땅을 따르니 게으른게지요.

- 세상이 지어진 이치는 선악, 음양의 두 사이를 추처럼 흔들리는 것이라 할 지 모르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선은 악을 비추는 거울이요 악은 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이지요. 우리는 절대 선 절대 악이니를 말하지만, 그런 불변의 정의란 있을 수 없지요. 그저 진리를 사는 사람은 어디서든 부족한 자리를 메꿔감이 그 본령입니다. 그러지 않고 무슨 일에든 뭔가 도모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땅의 이치(委蛇)에 빠져드는 나태함이지요.

「吾又奏之以无怠之聲,調之以自然之命,故若混逐叢生,林樂而无形.,布揮而不曳,幽昏而无聲. 動於无方居於窈冥.,或謂之死,或謂之生.,或謂之實,或謂之榮.,行流散徙,不主常聲. 世疑之,稽於聖人, 聖也者,達於情而遂於命也. 天機不張而吾官皆備,无言而心說,此之謂天樂. 故有焱氏爲之頌曰:'聽之不聞其聲,視之不見其形,充滿天地,苞裏六極.' 汝欲聽之而無接焉,而故惑也.
「樂也者,始於懼,懼故崇. 吾又次之以怠,怠故遁.,卒之於惑,惑故愚.,愚故道,道可載而與之俱也.」

[또한 나는 게으르지 않게(빠지지않게) 연주를 하므로, 음조가 자연에 맞게 이뤄지고 그래서 마치 뒤섞이어 생명이 짜여짐 같고, 수풀이 그 경계가 없는듯한 것입니다. 부드럽게 퍼지나 잡아끌지는 않고 깊고혼미하나 요란히 소리가 나지않는 법. 움직이되 정한 바 없고 머물되 어스므레하지요. 혹은 죽음이라고 혹자는 삶의 역동성이라 하고 혹자는 그것이 본질이요 혹자는 그것은 그저 드러나는 광채라 합니다. 흐르고 움직이되 흩어지거나 간섭이 없고 딱히 뭐에도 맺히지 않고 있지요. 세상은 그를 의심하고 성인들을 다시 생각하지요, 성인됨이란 감정을 넘어 그 운명을 아는 것이요. 하늘의 기계란 크지 않아서 내가 준비할 수 있지요, 마음을 밝히는데 굳이 입으로 할 것은 아니요 이르러 하늘의 기쁨이라합니다. 그래서 염제씨가 기리며 말하길: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보자해도 그 모습이 뵈질 않고 온 천지에 충만하여 그 안에 6극을 다 안고있네. 

자네는 소리를 들으려하나 감응하지 못하니 그저 혹한다하는 것이요.

[음악이란 처음엔 두려움으로 시작하고 그 두려움은 거룩한 것이지요, 또한 내 연주는 게으름이라 물러서지요. 그 끄트머리가 혹함이요 혹하므로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으니 진리요. 진리란 그런 모든 서을 갖추어 담을 수 있는 겁니다]

-음악함이란 뭔가 확실한 것을 찾으려는 것 아니라 그런 변화를 누려보려는 것이 음악이지요. 화성을 공부하던 딱 맞아 떨어지고 불변함을 찾는 것은 음악하는 자세 아니요 외려 감정이 흐르는 대로 흐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음악하는 겁니다. 
음악이란 그런 하늘의 변화를 나타내는 작업이요 그를 보는 기회지요. 음악이란 단조로운 한 음을 울리는 것 아니요 고저장단이 있는 변화 그 자체이듯 인생이란 그리 고저 장단으로 서로에게 맞춰가는 그런 움직임이 있는 것이요 이것이 인생사는 이치지요.
지나치게 고요한 사람에겐 극성맞은 사람이 배필로 친구로 주어지듯... 서로 서로를 보하는 것 그것이 사람사는 도리지요.


「且子獨不見夫桔橰者乎? 引之則俯,舍之則仰. 彼,人之所引,非引人也,故俯仰而不得罪於人. 故夫三皇五帝之禮義法度,不矜於同而矜於治,故譬三皇五帝之禮義法度,其猶柤 梨橘柚邪! 其味相反而皆可於口.

또 당신은 물긷는 추를 모르나요? 끌어 올리면 내려가고 버리면 올라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끌어당기는 데 쓰이는 도구이지 사람을 끌어당기는 데 쓰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 당기고 놓음이 사람의 죄는 아니지요. 고로 3황5제가 예의 법도에 맞는 것이요, 그들과 같아지려고 하지 않으며 다스렸기에 3황5제의 예의 법도를 비유하자면 그건 테두리라 배나무든 귤나무든 축으로 삼음이 흠입니까! 그 맛이 각각이라도 입에 맞는 법이지요. 

-물 긷기 수월하도록 달아둔 추를 중요하다고 함은 어리석지요 도구를 절대시하는 겁니다. 도구는 도구로 대함이 옳지요. 도구란 처지에 따라 배나무든 귤나무든 쓸 수 있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능이지 그 자체가 아니지요. 

「故禮義法度者,應時而變者也. 今取猨狙而衣以周公之服,彼必齕齧挽裂,盡去而後慊. 觀古今之異,猶猨狙之異乎周公也. 故西施病心而矉其里,其里之醜人見之而美之,歸亦捧心而矉其里. 其里之富人見之,堅閉門而不出,貧人見之,挈妻子而去走. 彼知矉美,而不知矉之所以美. 惜乎,而夫子其窮哉!」



4.

孔子西遊於衛. 顔淵問師金曰:「以夫子之行爲奚如?」

공자가 서쪽 위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안연이 사금에게 묻길:[공자의 이 여행이 어떨까요?]

師金曰:「惜乎,而夫子其窮哉!」

사금이 답하길:[애석하군요 공자가 궁지에 몰릴겁니다]

顔淵曰:「何也?」

안연이 묻길:[어째서죠?]

師金曰:「夫芻狗之未陳也,盛以筴衍,巾以文繡,尸祝齊戒以將之. 及其已陳也,行者踐其首脊,蘇者取而爨之而已. 將復取而盛以筴衍,巾以文繡,遊居寢臥其下,彼不得夢,必且數眯焉. 今而夫子,亦取先王已陳芻狗,聚弟子游居寢臥其下. 故伐樹於宋,削迹於衛,窮於商周,是非其夢邪? 圍於陳蔡之間,七日不火食,死生相與隣,是非其夢邪?


사금이 답하길:[짚으로 만든 개는 진열되기 전에 점대에 꽂혀 장식되죠 이런 저런 문귀와 수로 포장되고, 먼저 제사를 준비하려 꾸며집니다. 이제 진열되어 제사가 끝나면 지나는 사람들이 그를 짓밟고 불쏘시개나 구하는 이들이 주워다 불쏘시개로 쓰지요. 그를 다시 주워다가 꾸미고 그 아래 누워 잠잔다면 좋은 꿈꾸기 힘들고 가위나 눌리지요. 지금 공자는 선왕들이 쓰고 버린 짚개를 주워다가 제자들로 하여금 그 아래 잠자라하는 격이지요. 송나라에서 무너지고 위나라에서 베어진... 상나라 주나라시대의 궁벽함이나 한 가지이니 어찌 꿈자리가 사납지 않으리? 진나라와 채나라에 에워싸여 7일을 음식을 익혀먹지 못하며 산 건지죽은 건지 모를 지경이니 그 꿈자리가 사납지 않나요?

- 이미 한 번 쓰인 것에는 이미 그 용도를 다한 것이라 다시 재활용해도 그 만큼의 효험이 없다. 마치 죽은 이의 물건들을 태움과 같은데 그를 주워다가 재활용 한다해도 이미 귀신에 씌운 것이라 한 번 그 쓰임이 다한 것은 버릴 것이지 되살릴 것은 아니다.


「夫水行莫如用舟,而陸行莫如用車. 以舟之可行於水也而求推之於陸,則沒世不行尋常. 古今非水陸與? 周魯非舟車與? 今蘄行周於魯,是猶推舟於陸也,勞而无功,身必有殃. 彼未知夫无方之傳,應物而不窮者也.

[물길을 건너며 배를 이용함 만이 없고 길을 감에 수레를 이용 함 만치 좋은 것이 없는데 배란 것이 물길 가는데 도움준다고 육지 길 가는데는 소용없으니 즉, 쓰임이 다르지요. 예나 지금이나 물길이나 육지 길에 두루 쓰이는 것 있나요? 주나라 노나라의 차이란 배와 수레 아닌가요? 지금 그 쓸모없는것으로 노나라를 다니니 이야말로 육지에서 배를 끄는 격 아니고 뭐요, 애쓰나 공이 없고 몸에 재앙만 있을 뿐이지요. 그건 어디로 전해져야하는지 모르는 것이니 만물을 맞춰 대하여야 궁지에 이르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 이치란게 묘해서 기능 복잡한 것 치고 제대로 되는 것 없다. 뭐 하나 원 기능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게 좋은 거다.

자고로 예의 법도란 때마다 변하는 것입니다. 지금 원숭이에게 주공의 예복을 입혀주어도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말 것이요 그런 꼴을 당하고 난 후에야 후회할 겁니다. 예나 지금의 차이를 보자한다면 원숭이와 주공의 차이 정도지요. 서시가 마음이 아파 눈을 찌푸리고 저자거리를 다니니 온갖 추녀들이 그게 아름다움인 줄 알고 저 마다 다 찌푸리고 다니니 부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나서지 않고 가난한 이들은 식솔을 이끌고 그 고장을 떠났다 합니다. 그들은 찌푸린 것이 아름다운 줄 만 알았지 아름다움에 찌푸림이 더해 진 줄을 모른 것이지요. 애석한 일이지요 그러니 공자의 궁지란 이런 것과 같지요.]

-아무리 겉껍질을 그럴싸하게 꾸민들 호박이 수박되지 않듯 상황에 맞지않을 것을 굳이 끌어다 댄 들 그건 어리석음입니다. 서시라는 미인이 눈을 찌푸리고 다니니 너도나도 그 찌푸림을 흉내내며 제가 서시라도 된 양 하지만 꼴 사나운 짓이지요. 부자도 가난한 이도 눈꼴 신 그것을 참지 못하는법입니다. 서시라는 미인이 찌푸리니 그것도 아름다움의 일부인 것 처럼 뵈는 것이지 찌푸려서 서시가 아름다운 것 아니지요 본말을 알지 못하고 너도나도 흉내만 낸다고 서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5.

孔子行年五十有一而不問道,乃南之沛見老聃.

공자가 51년을 살면서 도에 대해 들은 바 없다.

老聃曰:「子來乎? 吾聞子,北方之賢者也,子亦得道乎?」

노자왈:[오셨는가? 내 자네에 대해 들었는데 북방의 현자라면서... 도를 깨친겐가?]

孔子曰:「未得也.」

공자 말하길:[아직입니다]

老子曰:「子惡乎求之哉?」

노자왈: [도를 구하러 다니지 않았던가?]

曰:「吾求之於度數,五年而未得也.」

공자 답하길;[난 그저 그를 행하는 법을 구했는데 5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하였읍니다]

老子曰:「子又惡乎求之哉?」

노자 왈: [자네가 그런 식으로 구하려 했구먼?]

曰:「吾求之於陰陽,十有二年而未得.」

공자 왈:[음양의 이치를 구하려 12년을 헤매도 아직이네요]

老子曰:「然. 使道而可獻,則人莫不獻之於其君.,使道而可進,則人莫不進之於其親.,使道而可以告人,則人莫不告其兄弟.,使道而可以與人,則人莫不與其子孫. 然而不可者,无佗也,中无主而不止,外无正而不行. 由中出者,不受於外,聖人不出.,由外入者,無主於中,聖人不隱. 名,公器也,不可多取. 仁義,先王之蘧廬也,止可以一宿而不可久處,覯而多責.

노자왈;[그럴게요. 도란 것이 덥썩 들어다 줄 수있다면 사람들이 왕에게 갖다주겠지요, 도가 발전하는 것이라면 부모에게 드리겠지요. 도란 것이 알려줄 수 있다면 형제들에게 알려주지 않을까. 도란 것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자손에게 알려주지 않을까? 그렇듯 불가한 것은 그럴 수 없음이요 뭐 딱히 이거다 할 것 없으니 결론내기 힘들고 딱히 이거다할 문제 아니니 도를 살기도 힘들지요. 그러니 이거다 하기 힘드니 행함을 위한 규례도 얻기 힘들지요. 그래서 성인은 그저 도가운데 살려하지요. 밖에서 도를 찾아드나 핵심이 뵈지않는 법 그래서 성인은 숨기지도 않지요. 이름하자면 그저 드러나 있는 것(공기:公器)이나 많은 이들이 모두 가질 수는 없지요. 인의란 선대 임금에게 누추한 자리와 같아 하룻밤 묵을 자리는 되나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듯 그저 만나 어우러지나 책임 질 일이 많은 겁니다.

- 진리란 것은 눈에 보이거나 잡을 수 있는 것 아니지요. 눈에 뵈지 않고 잡을 수도 없으니 손쉽게 건네주거나 알려 줄 수 없지요.

진리란 기실 우리 곁에 널려있음에도 정작 붙잡기는 힘들지요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그걸 인의라는 말로 드러내며 잠시 진리를 대신 할 수는 있지만 인의가 진리가 아니기에 더불어 생기는 일들이 많지요...



「古之至人,假道於仁,託宿於義,以遊逍遙之墟,食於苟簡之田,立於不貸之圃. 逍遙,无爲也.,苟簡,易養也.,不貸,无出也. 古者謂是采眞之遊.

[옛적에 깨달은 사람들은 도를 인이라는 이름을 빌어쓰고 의라는 것에 얹어 세상에 내놓고 지났으며, 글 줄이나 썼었고 다만 그를 밥벌이 삼지 않았지요. 그저 노닌다는 말은 무위라는 말이요 글 줄이란 그저 도를 가르치는 수단이요 그에 의존치 않음은 뭔가를 만들어 꾸미지 않는다는 것이요. 옛사람들은 이를 그저 노닒의 진짜 의미를 사는 것이라 일컬었지요.


-그저 仁義란 잠시 빌어쓰는 수단일 뿐이요 逍遙란 무위(무엇도 부러 하지않음)요 글귀요 도를 가르치는 수단 일 뿐이고 의지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음이라. 장자가 말하는 소요란 본 의미는 진리를 이용하지 않음이지요.    


「以富爲是者,不能讓祿.,以顯爲是者,不能讓名.,親權者,不能與人柄. 操之則慄,舍之則悲,而一無所鑑,以闚其所不休者,是天之戮民也. 怨恩取與諫敎生殺,八者,正之器也,唯循大變无所湮者爲能用之. 故曰,正者,正也. 其心以爲不然者,天門弗開矣.」

[부를 옳다하는 사람은 재물을 양보하지못하고 드러나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름 날 자리를 양보못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과 권력을 나누지 못하는 법입니다. 고르게 하자니 두렵고 버리자니 안타까워 그저 바라보질 못하니 이리저리 살피느라 쉬질 못하지요 이를 하늘(진리)이 사람을 죽인다라 하는 겁니다. 
원한을 사거나 은혜를 베풀고, 빼앗거나 내주며, 타이르거나 가르치고, 살리거나 죽이는 여덟 가지 것은 정치의 수단이지, 다만, 위대한 도를 따라 아무 데에도 거칠 데가 없는 자만이 이 여덟 가지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다네. 그래서 이르길 옳음이 옳다는 것이요 그 마음이 그렇지 못한 자는 하늘 문이 열리질 않는 법이라오]

-뭔가 꼼수가 있으면 진리를 살지 못하지요. 진리의 무덤덤함을 살아내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진리를 살도록 돕는 길은 바로 이들 8가지 수단을 통해서이지요. 진리를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오불관하는 것 아니지요... 정치란 바로 진리를 살도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를 전하거나 드러나자면 이런 방법들이 쓰일 수 있지요. 그러나 이를 제대로 써서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진정 진리를 사는 사람 뿐입니다. 하늘과 잇닿지 못한 사람이 이 8가지 수단을 사용하면 그저 재주나 부리고 외려 자기와 남을 해하는 결말을 맺고 마는 법입니다. 


6. 


孔子見老聃而語仁義. 老聃曰:「夫播穅眯目,則天地四方易位矣.,蚊虻噆膚,則通昔不寐矣. 夫仁義憯然乃憤吾心,亂莫大焉. 吾子使天下无失其朴,吾子亦放風而動,總德而立矣,又奚傑傑然揭仁義,若負建鼓而求亡子者邪? 夫鵠不日浴而白,烏不日黔而黑. 黑白之朴,不足以爲辯.,名譽之觀,不足以爲廣. 泉涸,魚相與處於陸,相呴以濕,相濡以沫,不若相忘於江湖!」 

공자가 노자를 만나 인의를 얘기합니다. 노자가 말하길:[눈에 겨를 넣으면 천지사방이 제대로 뵈지않는 법. 모기가 살갗을 물면 밤새 잠들기 어려운 법. 인의란 참람하여 내 마음을 화나게 하니 그 어지럽힘이 크고 크다. 사랑하는 자여 천하로 그 질박함을 잃지 않게 하고, 그저 바람은 불도록 두고 덕이 온전히 서도록 하게나, 또한 그 덕이 든든히 서서 인의를 드높이도록 하게 북을 짊어지고 죽은 이를 구하는 것 아닌가? 대저 학은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란 검게 물들이지 않아도 검은 법. 흑백이 있어도 순전한 흑과 백이란 정의하기 힘든 법. 명예를 보자면 그게 그리 넓게 자랑할 만한 일 아니지요.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이 뭍에 살게되니 서로 물을 끼얹고 거품을 뒤집어 쓰니 강물속에 살면서 서로 상관없이 지냄만 못하지요.] 

- 공자의 인의란 개념은 보이지 않는 공기를 증명한다고 진공실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공기의 존재를 경험하게 하려는 것처럼 무리한 짓=인위임을 설명한다.

孔子見老聃歸,三日不談,弟子問曰:「夫子見老聃,亦將何規哉?」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 3일간 말을 않으니 제자가 물어 가로되;[노자를 만나셨지요 뭔가 큰 법을 배우셨나요?] 

-진리를 그대로 살아냄을 본 공자는 말을 잃지요. 하긴 그저 그대로 두면 될 것을 부러 말로 끌어다 붙힌 어리석음을 알았으니 감히 말로 진리를 형용할 만용이 사라진 게지요. 

孔子曰:「吾乃今於是乎見龍! 龍,合而成體,散而成章,乘雲氣而養乎陰陽. 予口張而不能嗋,予又何規老聃哉!」 

공자 왈:[내 이제서야 견룡(見龍)했노라 할 만하다! 용이란 하나되면 꼴을 가지고 따로보면 문장을 이루니 운기를 타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법. 입이 벌어져 숨쉬기 어려운 지경인데 노담의 가르침이 뭐라 말한다는 것은 어렵다!] 

-여기서 용이란 상상속의 이미지:진리요. 그 실체란 보기 힘든 법. 사람들이 그저 코는 돼지코요 눈은 어쩌네 형용할 따름이지 그 실체를 볼 수없지요. 

 

여기서 견룡이란 말을 함은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천의 모습으로 봄을 의미한다. 

진리 그 자체는 뵈질 않지만 그를 살아내는 삶을 통해 진리를 볼 수 있을 뿐...

그래서 사표가 될 스승이 필요한 법...

子貢曰:「然則人固有尸居而龍見,淵黙而雷聲,發動如天地者乎? 賜亦可得而觀乎?」 遂以孔子聲見老聃. 

자공왈:[그럼 사람이 시체처럼 있어도 용이 나타남같고, 깊이 감추어 있어도 뇌성같은 소리를 내고 천지로 발동하는 사람이라 할 만한가요? 저도 그런 걸 볼 수 있나요?] 공자의 노자 만난 이야기대로 노자를 만났다. 

-사람으로 진리를 살아낼 수 있나요? 진리를 삶으로서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老聃方將倨堂而應,微曰:「予年運而往矣,子將何以戒我乎?」 

노자가 방에 앉았다가 맞으며 작은 소리로 물어:[내 연운이 다 가버렸는데 넌 내게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가?] 

-살만치 살아온 나에게 뭘 가르치려 들 것인가? 

子貢曰:「夫三皇五帝之治天下不同,其係聲名一也. 而先生獨以爲非聖人,如何哉?」 


자공왈:[3황5제의 다스림이 서로 다르나 그 명성이 한가지 다 성인이라 불리는데 선생만이 성인이 아니라시니 어떤 연유인지요?] 

-3황5제가 각자의 방법으로 다스렸어도 모두 성인이라 불리우는데 유독 당신만이 성인이 아니라시는데... 그들의 성인됨은 무엇이요 성인 안됨은 무엇입니까? 

老聃曰:「小子少進! 子何以謂不同?」 

노자 말하길:[통이 작은 사람은 적게 발전하는 법! 넌 어찌하여 서로 다르다 하는가?] 

-사람은 결국 제 깜냥만큼 보고 알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성인으로 불림은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한 연유이지만 그것이 바로 성인이 못되는 이유다. 네가 다르다 함은 그래도 그들 중 누구 하나는 뭔가 다르려니하는 기대가 있어서이지만... 

對曰:「堯授舜,舜授禹,禹用力而湯用兵,文王順紂而不敢逆,武王逆紂而不肯順,故曰不同.」 

자공이 대답하여 말하길:[요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양위했으나 우는 권력을 다스렸고 탕은 군병을 다스렸고 문왕은 주왕에 따름으로 감히 거스르지 못했지만 무왕은 주왕을 거스림으로 따르지 않았으니 고로 다르지 않나요?] 

-우리는 다름을 잘 구분하면 똑똑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구분이란 그저 차이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큰 틀에서 옳으냐 그르냐를 구분하는 그 기준이 있기 마련... 


老聃曰:「小子少進! 余語汝三皇五帝之治天下. 皇帝之治天下,使民心一,民有其親死不哭而民不非也. 堯之治天下,使民心親,民有爲其親殺其殺而民不非也. 舜之治天下,使民心競,孕婦十月而生子,子生五月而能言,不至乎孩而始誰,則人始有夭矣. 禹之治天下,使民心變,人有心而兵有順,殺盜非殺人,自爲種而天下耳,是以天下大駭,儒墨皆起. 其作始有倫,而今乎歸,女何言哉! 余語汝,三皇五帝之治天下,各曰治之,而亂莫甚焉. 三皇之治,上悖日月之明,下睽山川之精,中墮四時之施,其知憯於蠣蠆之尾,鮮規之獸,莫得安其性命之情者,而猶自以爲聖人,不亦可恥乎,其无恥也?」 

子貢蹴蹴然立不安. 

노자 말하길:[통이 작으니 작게 노는 군! 네게 말하노니 3황5제가 서로 천하를 다스렸다.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때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하니 사람들이 친한 이가 죽어 곡을 않해도 그를 틀리다 않았다. 요의 치세에선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친하게 해서 사람들이 가까운 이를 죽여도 그를 허물이라 않았다. 순의 치세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경쟁하게하여 산모가 10달만에 애를 낳고 5개월이면 말문이 트이고 깨닫지 못해도 사람을 분별하니 사람들이 요절하기 시작했다. 우의 치세엔 사람들의 뜻을 변하게 하니 사람들이 뜻이 있어도 군병을 따르니 도둑을 죽여도 살인이 아니라 하게됐으니 자기의 뜻으로 천하를 판단하게 되니 천하가 어지러워졌으며 유묵사상이 일어났다. 그 시작엔 나름의 질서가 있었으나 이제 모든 것이 뒤섞여 버렸는데 넌 할 말이 있는가? 내 네게 말하노니 3황5제 치세엔 각자의 치리하는 법이 있었다만 그 어지러움이 심히 크다. 3황치세엔 위로 일월이 밝히 빛났고 아래로 산천의 뜻이 명백하고 가운데엔 사시가 제대로 펼쳐지니 그 엄밀함이 전갈의 꼬리와 같고 짐승의 법과 같고 그 본성의 정수를 얻기 힘드니 이를 스스로 성인이라 이름은 부끄러운 일 아닌가? 자공이 안절부절하여 제대로 서있질 못했다.]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은 각각의 미세한 차이를 드러냄이 아니라 큰 틀:하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는 가이다. 황제 시절엔 그저 사람들이 하나된 뜻으로 살았으니 옳다 할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며 사람의 뜻이 갈려 친함으로 하나로 묶었던 적도 있고, 순의 치세엔 서로 옳음을 경쟁하고, 우의 치세엔 뜻이 이미 제 각각 달라져서 해석이 제각각이 되었고 오직 군사력으로 기준이 되어 버렸었고 이를 막기 위해 유묵사상이란 것이 나섰다 한다 그러나 3황 시절엔 모든 것이 자명하였던 것이지 인위로 뭘 말하던 것은 아니질 않는가? 

자공이 안절부절함은 마치 코끼리를 남의 말로 만 듣고 판단해오다가 정작 제 눈으로 코끼리를 대면한 당혹감이다.


스승의 말에 옳소 옳소 고개 주억거리는 건 진짜 아는게 아니다.  

7.

孔子謂老聃曰:「丘治詩書禮樂易春秋六經,自以爲久矣,孰知其故矣.,以奸者七十二君,論先王之道而明周召之迹,一君無所鉤用. 甚矣夫! 人之難說也! 道之難明邪?」

 

공자가 노자에게 말하길:[저 공자는 詩,書,禮樂,易,春秋라는 六經을 다루어 스스로 든든히 했고 그 유래를 잘 숙지하였습니다. 그래서 70여명의 왕들에게 선왕지도를 논하고 주공 소공의 치적을 밝히며 간청하였습니다만 왕중 하나도 그를 쓰려고 택하질 않았습니다. 심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설파하기 어렵고 도를 밝히는 것이 어려운가요?]

 

-공자가 6경을 나누고 공부하여 많은 왕들에게 인의 정치를 제안했으나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老子曰:「幸矣子之不遇治世之君也! 夫六經,先王之陳迹也,豈其所以迹哉! 今子之所言,猶迹也. 夫迹,履之所出,而迹豈履哉! 夫白鶂之相視,眸子不運而風化.,蟲,雄鳴於上風,雌應於下風而風化.,類自爲雌雄,故風化. 性不可易,命不可變,時不可止,道不可壅. 苟得於道,无自而不可.,失焉者,无自而可.」

 

노자 말하길:[네게 다행이다 네 설에 따라 다스릴만한 군주를 만나지 못함이! 대저 6경이란 선왕들의 묵은 흔적이요 그 흔적이 근본일까! 오늘 네 말하는 것은 흔적일뿐이라. 대저 흔적이란 신발이 만들어 낸 것이라 흔적이 신발일까! 백역이라는 새가 서로를 바라보매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으며 감화를 일으키고, 벌레란 숫놈은 위에서 울고 암컷이 아래서 응하며 감화되는 법. 종류가 유별하여 자웅이 갈리니 감화가 생기는 법. 본성은 변할 수 없고 운명도 바뀌지 않고, 시간이란 멈출 수 없고 도란 숨길 수 없다. 도란 간신히 얻는 것 自(자기)라 핧 만한 것이 없으니 쉽게 알 수 없게되는 것. 나를 버리라 그럼 自己가 없으니 가능할 것]

 

-당신의 말에 혹하는 왕이 없으니 다행이라. 찌꺼기를 모아 6경이라 만들고 그를 본체 인 양 하려했으니... 만물의 도리란 서로 상대가 있어 구별이 가능한 법... 순수 Idea로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세상이란 그런 상대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 주고 있으니 순수한 선이니 인의니 하는 "개똥 철학"으로 사람들을 혹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란 이렇다 저렇다 할 형태가 없으니 잘 알아듣기 힘들다. 그런 무형이니 반면 외려 쉬울 수 있다. 

 

孔子不出三月,復見曰:「丘得之矣. 烏鵲孺魚傅沫,細要者化,有弟而兄啼. 久矣夫丘不與化爲人! 不與化爲人,安能化人!」

老子曰:可.丘得之也

 

공자가 3개월을 두분불출하다 다시 만나 말하길:[제가 깨달았네요. 까마귀와 까치 어린 물고기는 경망스레 물방울을 일으키길 좋아하고, 자세함이란 스스로 드러나고, 동생이 생기니 형이 우는 법. 저 혼자는 든든하고 장구하되 공자는 사람들과 같이 살지 못하네 사람들과 같이하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 될까요!

 

-모든 건 천성대로 사는 것임을 그르다 옳다라는 눈으로 나눌 것 아니다. 상세한 모습은 스스로 드러나 있다. 어린 아들이 떼쓰고 우는 것은 동생에게 사랑을 뺏긴다 생각하는 까닭이니 이렇듯 뭔 현상이 일어남은 상대되는 일이 있어서라... 내가 혼자 든든히 붙잡고 있다손쳐도 남들과 화합하지 못하니 문제라...

 

노자 이르길: 옳다. 공자가 깨달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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