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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

春秋 世系圖

소위 춘추시대 각 나라들의 족보를 살피게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은 나라 紂王을 벌한 周나라 武王은 따지면 黃帝씨 후손이라는.....

周나라

 

은나라 紂왕은 달기의 청을 받아들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수많은 알몸의 남녀들을 데리고 질탕하게 놀아제끼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제후들 중에 이반하는 자가 생겼다. 그러자 紂왕은 무거운 형벌로 대응하는데, 포락의 형炮烙之刑이다.

왕의 음란함과 포악함은 날로 심해졌고, 충신들의 간언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충신들은 상나라를 떠났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간언한 비간比干은 심장이 꺼내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백성의 원망은 높아져가고 제후들도 주왕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던 서백창西伯昌(훗날 주나라 문왕)이 제후들의 지지를 얻으며 강성해졌습니다. 결국 그의 아들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상나라를 정벌하여 주 왕조를 세운다.

 

 

魯나라

 

흔히 노나라는 동이족이라는 주장을 편다만....

 

무왕의 동생 주공 단(周公 旦)을 시조로 한다. 주의 무왕이 은(殷)왕조를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한 뒤, 은의 주민과 동이족(東夷族)을 통치하기 위하여 친족(親族)· 공신(功臣)을 각지에 분봉(分封)하였는데, 이때 주공(周公)은 취푸에 분봉되었다. 그러나 주공은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국도(國都)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무왕과 다음 대의 성왕(成王)을 보필하였고, 장남인 백금(伯禽)을 임지로 보내 통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보면 주왕실의 후예라 규정되어있다.

 

이에 반하는 주장이 소위 하은주는 동이계라는 주장을 편다만....

 

민족주의 관점으로 보지말고....

 

夷란 선진문물 집단으로 보는게 옳다.

 

물론 그 기원을 일부 고조선에서 찾지만....

 

역사 기록으로는 빈약하다.  

蔡나라는 주 무왕의 아우 채숙(蔡叔) 탁(度)을 시조로 봉한 나라였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은 은나라 유민들을 모아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안심하고 맡기기는 어려웠던지 무왕의 두 아우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보내 보좌 겸 감독을 하게 하였다. 무왕이 다스리는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무왕이 죽고 나이 어린 성왕이 즉위하면서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게 되자 관숙과 채숙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공이 어린 성왕에게 안 좋은 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을 내어 주공의 입장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무경과 더불어 소위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켰다. 주공은 직접 진압에 나서 난을 평정한 다음 무경과 관숙은 처형을 하고 채숙은 추방하였다. 그 때 채숙의 추방지가 바로 채(蔡)였다. 수레 일곱 대와 70인의 종자만이 뒤따랐던 채숙은 결국 추방지 채(蔡)에서 죽고 말았다.

채숙에게는 아들 호(胡)가 있었는데 비교적 품행이 선량하였다. 주공은 소문을 듣고 그를 노나라의 경사(卿士)로 임명하였는데 직을 잘 수행했다. 그래서 성왕에게 건의하여 다시 그를 채(蔡)지역의 제후로 봉했다. 그가 바로 채중(蔡仲)이다. 채중이 죽은 이후 군주는 채백(蔡伯) - 궁후(宮侯) - 여후(厲侯) - 무후(武侯) - 이후(夷侯) - 희후(釐侯) - 공후(共侯) - 대후(戴侯) - 선후(宣侯)로 계승되었으나 약 300년 정도에 걸친 이 세월에 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노나라의 역사 『춘추(春秋)』가 기록되기 시작한 기원전 722년은 채나라 선후(宣侯) 28년이었고 이 때부터 채나라의 역사도 적게나마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짧지만 중요한 기록 하나는 채환공(蔡桓公) 5년(B.C.710년)의 다음 기록이다.

 

曹나라는 문왕의 6째 아들 振鐸이 봉해진 나라.... 당연 姬씨성을 쓰는 주왕실의 한 갈래...

衛나라

 

주나라 문왕의 동생 위강숙이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던 지역....

晉나라

 

주나라 왕실과 동성인 희(姫)성 제후로, 서주시대 상당히 초기에 생긴 나라로 천자인 주나라 成王이 동생인 당숙 우와 소꿉놀이를 하다가 동생 우에게 풀과 흙으로 작위를 내렸고 그런데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천자가 희언을 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결국 당숙 우는 나라를 하나 받게되고 후일 만장일치로 춘추오패에 들어가는 진 문공이 나온 나라...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에 유력 귀족들의 할거로 조, 위, 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버린다. (삼가분진)

 

吳나라

 

본시 주(周)나라 시조 고공단부(古公亶父) 태왕(太王)에게는 첫째 태백(太伯)과 둘째 중옹(仲雍), 그리고 셋째인 막내아들 계력(季曆)이 있었는데, 계력이 현명한데다가 훌륭한 아들 창(昌)을 두었다는 이유 때문에 태왕이 아들 계력과 손자 창에게 위를 잇게 하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태백과 중옹 두 형제는 집을 떠나 머나먼 양자강 하류 야만인들이 사는 형만(荊蠻)땅 오랑캐들 속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면서 문신(文身)을 새기고 머리칼을 짧게 자르는 등 쓸모없는 인간인 것처럼 보이며 계력의 직접적인 칼끝을 피했다. 그리고 맏형 태백은 밀림 속에다 오(吳)나라를 세운다. 형만땅의 1천호에 이르는 오랑캐들이 순응하면서 태백을 우두머리로 모셨다.

 

鄭나라

 

 제후국 중에서 봉건 시기가 매우 늦은 나라이다. 그 이유는 은나라를 멸망시키자마자 성왕이 분봉을 한 게 아니라 서주 말기였던 선왕(宣王) 이 자신의 동생 우(友)=환공을 책봉했기 때문에 당연히 희(姬)씨성 제후국이다. 환공은 왕실 사도로 조카였던 유왕(幽王)을 보필했으나, 견융의 침입으로 유왕을 보호하려다가 전사했다. 원래 환공이 처음 받은 땅은 섬서성 지역의 정(鄭)이라는 곳이었으나, 하남성 지역으로 봉지를 옮겼다. 수도 이름이 新鄭인 것도 새로운 정이란 의미다. 기원전 375년에 韓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齊나라

 

중국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으로, 강태공의 책봉받은 땅으로 지금의 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춘추5패 국가 중 하나다. 크게 춘추 시대의 강제(姜齊)와 전국 시대의 전제(田齊)로 나뉜다. 작위는 후작이었다. 수도는 임치이다.

전반기인 강제 시대는 묘하게 저질스러운 왕이 많았던 것이 특징으로 특히 근친상간의 에피소드가 많다. 관중과 제 환공 시기에는 기강이 잡혔지만 관중 역시 900명의 기생을 모아 공창제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태공망의 제나라는 주나라의 전통을 이어 도덕과 예교주의가 발달한 노나라와는 달리 태공망의 기풍을 이어 실리주의적 성향이 강한 실질강건한 국가였으나, 도덕적으로는 부족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秦나라

 

BC 900년 즈음에 주나라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목축에 공적을 올렸으므로의 영(嬴)이라는 성을 받고 대부가 되어, 진(秦)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BC 77년 경 주나라가 견융(犬戎)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襄公)은 주나라 평왕(平王)을 호위한 공으로 주나라의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楚나라

주나라 성왕 때 웅역이 자작의 지위로서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시작은 남방의 이민족 국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장강(양쯔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도 초기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묘족의 나라였음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애초에 楚라는 글자에 숲을 뜻하는 林이 들어가 있는 것도 당대의 이 지역의 환경을 짐작케 한다.

중원에 위치한 국가들로부터 남방의 오랑캐로 불려 무시를 당하여 형만(荊蠻, 형주의 야만인들)이라 하였으며 각종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형(荊)나라, 형초(荊楚) 등으로 쓰였다. 사실 초나라의 경우 지리적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부터 중원 국가가 아니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화 문명이 전파됨에 따라 중화 문명권에 편입된 국가이다.

따라서 제후직을 하사받았다는 말도 중원에서의 권위와 명분을 얻기 위해 후대에서 끼워맞췄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주나라 소왕 때는 초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배가 침몰해서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宋나라

商나라 왕족이자 주왕의 이복형 송미자계(宋微子啓)가 분봉 받은 나라다. 왕족이 쓰는 국성(國姓)은 商나라(=殷나라) 왕실의 子, 씨(氏)는 宋이다.

주나라 武王이 나라를 세운 후 제후들이 분봉 받은 땅이 매우 드물었고 대부분이 주왕실의 종친이었는데 송나라의 송미자계가 받은 작위는 모든 제후국 중에서도 으뜸가는 公爵이었다.

개국공신 태공망이 제나라를 분봉받을때의 작위가 侯爵인 걸 감안하면 송나라의 공작은 엄청난 지위인데 그 이유는 송나라의 시조가 상나라의 왕족이기 때문으로 송을 제외한 공작은 주나라 왕족들이었다.
송나라가 무엇보다도 이렇게 우대를 받은 이유는 비록 주가 지배층이라고 해도 지배 국가였던 만큼 상나라의 문명 수준이 주나라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杞나라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 때부터 후작의 작위로 분봉을 받은 국가로 하 왕조의 시조인 우의 후예가 다스리며 자작의 작위로 분봉을 받은 국가였다. 상왕조 말기에 망했다가 주나라 무왕이 우의 후손 동루공을 얻어 봉했다. 국성은 사(姒)성이며 우의 후예라고 칭했다.

 

 

陳나라

 5제 중 한명인 순임금의 후손이 주나라의 무왕으로부터 분봉받은 제후국으로 황하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도는 완구였다가 나중에 진으로 옮겼다. 국성은 규(嬀)성이고 작위는 후작이다.

시조는 호공 규만으로 역사서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순(舜) 임금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왕 때 무왕의 맏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규만은 요임금 이후의 조상 대대로 도공으로 일했는데 그의 가문이 만든 도기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기에 이를 치하하는 의미로 무왕이 자신의 큰 딸을 규만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왕의 맏사위가 된 규만에게는 완구 일대가 봉읍되었으며 후작에 봉작받아 왕가 척족의 제후국을 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의 건국배경이라고 전한다.

 

 

薛,邾, 莒나라

허나라...

 

우리가 잘아는 伯夷가 봉해진 나라....

 

월나라

 

사마천은 사서에서 월나라 국성은 사(姒)씨로서 하왕조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군소 諸侯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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