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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考

渤海考1-저자소개, 王系와 臣下

 

柳 得 恭著

 

저자의 소개

 

 

柳得恭/1749~1807)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北學派), 4검서(檢書: 오늘날 책을 검수하는 직책)의 한 사람.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도 4()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본관 문화(文化). 자 혜풍(惠風)혜보(惠甫). 호 영재(泠齋)영암(泠菴)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79(정조 3)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사(司寺)주부가평군수(加平郡守)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순조 7)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첫째, 시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泠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둘째,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이 있으니, 나중에 병세집(竝世集)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金邁淳)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넷째,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가 있다.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에 따라 중국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고, 한국역사에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몽골,회회(回回),안남(安南:베트남),남장(南掌:라오스),면전(緬甸:미얀마),타이완,일본,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대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서문:성해응:成海應(1760~1839)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본관 창녕(昌寧). 자 용여(龍汝). 호 연경재(硏經齋). 1783(정조 7) 진사가 된 후, 88년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었다. 벼슬은 부사(府使)에 그쳤으나 영조정조 시대의 대표적 실학자로서 경학(經學)에 정통했다.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주한잡사고(周漢雜事攷)》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가 있다. 본집외집별집으로 구성된 연경재전집을 남겼다.

 

서문: 박제가朴齊家(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78(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98북학의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㽔亭集)이 있다.

 

 

 

 

*成海應 序文

 

성해응 서문

 

泠齊柳公惠甫嘗撿中秘書 得渤海事 比唐書渤海傳 益加詳 編其世系傳記地理等爲一卷.

영제유공혜보상검중비서 득발해사 비당서발해전 익가상 편기세손전기지리등위일권.

 

영재(泠齊) 유해보(柳惠甫: 유득공)가 일찍이 궁중 서적들을 살피다가 발해에 관한 사실을 얻게 되어, 왕의 계보와 인물, 전기 및 지리 등을 新唐書』『渤海傳보다 더 상세하게 엮어 한 권으로 만들었다.

 

渤海太氏 起於粟末水 粟末卽今混同江也 太氏以區區之衆 雄張於東北 能交聘鄰國 文辭燦然 而職官品服與夫州府建置 頗倣效唐制. 五京十五州 其南京南海府 今南關也 其東京柵城府 今北關也 其西京鴨綠府 今關西之北境也 其餘二京十五府 亦皆 在鴨綠豆滿二江之外 與我境不遠.

발해태씨 기어속말수 속말즉금혼동강야. 태씨이구구지중 웅장어동북 능교빙린국 문사찬연 이직관품복여부주부건치 파방효당제 오경십오주 기남경남해부 금남관야. 기동경책성부 금북관애 기서경압록부 금관서지북경야 기여이경십오부 역개 재압록두만이강지외 여아경불원.

 

발해태씨(渤海太氏)는 속말수(粟末水)에서 일어났으니, 속말수는 지금의 혼동강(混同江)이다. 태씨(太氏)가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여 동북지방에서 세력을 크게 떨치면서 이웃 나라들과 사신을 교환하였고, 문장도 찬연히 빛을 발하였으며 또한 관직제도, 관품 및 복장제도, 그리고 주() ()와 같은 지방제도를 마련하면서 당()나라 제도를 많이 본받았다. 515주 가운데,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지금의 관남(關南)지방에 있었고, 동경책성부(東京柵城府)는 지금의 북관(北關)지방에 있었고,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관서(關西) 지방의 북쪽 경계에 있었으며, 나머지 215부는 모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밖으로 우리 땅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是時高麗新滅 唐雖建安東都護以鎭之 然荒遠不治 其民多徙江淮而地空. 所以渤海漸侵年自大者 數百年 爲契丹所滅. 夫自肅愼以後 或稱 勿吉 或稱靺鞨 惑稱渤海 其部帳之盛衰與滅 固不足道方.

시시고려신멸 당수건안동도호이진지 연황원불치 기민다사강회이지공 소이발해점침년자대자수백년 위거란소멸. 부자숙신이루 혹칭물길 혹칭말갈 혹칭발해 기부장지성쇠여멸 고부족도방.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하자 당()나라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이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서 다스리기가 어려워 많은 고구려인들을 양자강과 회수(淮水)로 이주 시킨 결과, 그곳은 빈 땅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발해(渤海)가 점차 세력을 키워 수백 년을 유지하다가 거란(契丹)에게 멸망당하였다. 무릇 숙신(肅愼) 이후로 물길(勿吉)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말갈(靺鞨)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발해(渤海)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그 부락의 흥망성쇠를 논할만한 방법이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其忿鷙魁傑 負力怙氣屯 結山林 互相傾奪 跳踉自恣 有足以考 其得失之跡 而疆事進退 山川險阻 皆可爲籌國 者所當究解

기분지괴걸 부력호기둔 결산림 호상경탈 도령자자 유족이고 기득실지적 이강사진퇴 산천험저 개가위주국 자소당구해.

 

그 다루기 힘든 인걸들이 힘과 호기를 믿고 산림 속에 집결하여 서로 다투어 빼았으며 방자히 뛰어 돌아다닌 사실은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으므로, 그들이 얻거나 잃은 자취와 영토의 변천 및 산천의 지세에 대해서는 국가 경영을 꾀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헤아려 밝혀야 할 것이다.

 

但賈耽郡國志 簡而不備 脫脫遼史 又多繆誤 金史雖詳 其山名水名 多茫 然無徵. 惠甫素明於地理之學 其所援据辨核 皆秩然有序 如南海府定爲咸興 柵城府定 爲鏡城. 獨爲鴨綠府謂在江界東北二百里鴨綠江北 余以其所領神桓諸州觀之 在江南而 不在江北也.

단가탐군국지 간이불비 탈탈요사 우다류오 금사수상 기산명수명 다망 연무징. 혜보소명어지리지학 기소원거변핵 개질연유서 여남해부정위함흥 책성부정 위경성. 독위압록부위재강계동북이백리압록강북 여이기소영신환제주관지 재강남이 부재강북이.

 

그런데, 가탐이 지은 郡國志는 간략하여 제대로 갖추어지지않았고, 탈탈이 지은 遼史도 오류가 많고, 金史는 상세하지만 산 이름과 물 이름이 애매하여 근거로 삼기 어렵다. 혜보가 본디 지리학에 밝아서 그가 인용하고 고증한 것이 모두 정연하고 사리에 맞으니, 남해부(南海府)를 함흥(咸興)에 비정하고, 책성부(柵城府)를 경성(鏡城)에 비정한 것이 그런 예이다. 다만, 압록부가 강계에서 동북쪽으로 2백 리 떨어진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내가 압록부 관할에 있던 신주(神州) 환주(桓州) 등을 살펴보니, 압록강 남쪽에 있었지 강 북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公之費精罷力 考校尋繹 爲此書者 固出於好奇 非欲人知之. 然人苟能詳閱 得其開創設置之意 則有裨於經濟之策者不細 而知者鮮少 顧漫棄之 可勝惜哉.

공지비정파력 고교심역 위차서자 고출어호가 비욕인지지. 연인구능상열 득기개창설피지의 즉유비어경제지책자불세 이지자선소 고만기지 가승석재.

 

공께서 정력을 쏟아 고증하고 연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디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세히 검토하여 국가를 세워 운영해갔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어 자세히 보지도 않고 함부로 버려지게 되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朴齊家 序文

 

 

余嘗西踰鴨綠道靉陽 至遼陽 其間五六百里 大抵皆大山深谷. 出狼子山 始見平原無際 混混茫茫 日月飛鳥升沈于野氣之中. 而回視東北 諸山環天塞地 若若畵一 向所稱大山深谷 皆遼東千里之外障也. 乃喟然而歎曰 此天限也.”

여상서유압록도애양 지요양 기간오육백리 대저개대산심곡. 출랑자산 시견평원무제 혼혼망망 일월비조스침우야기지중. 이회시동북 제산환천새지 약약화일 향소칭대산심곡 개요동천리지외장야. 내위연이탄왈 차천한야,”

 

내가 일찍이 서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애양(靉陽)을 지나 요양(遼陽)에 이른 적이 있는데, 그 사이 오륙백 리 길이 대개 큰 산과 깊은 골짜기였다. 낭자산을 나오면서 비로소 끝없는 평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해와 달과 나는 새가 들판의 안개 속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동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뭇 산들이 뭇 산들이 하늘을 두르고 땅을 막아서면서 마치 일()자를 그은 것처럼 가지런히 뻗어 있었으니, 앞서 큰 산과 깊은 골짜기라 한 곳이 바로 요동 1천리의 바깥 울타리였던 셈이다. 이에 한 숨을 지으면서 여기가 하늘의 끝이로구나하고 탄식하였다.

 

夫遼東天下之一隅也 然而英雄帝王之興 莫盛於此 盖其地接燕齊 易覘中國之勢. 故渤海大氏 以區區散亡之餘 劃山外而棄之 猶足以雄視一方 抗衝天下. 高麗王氏統合三韓 終其世不敢出鴨綠一步 則山川割據得失之跡 槪可以見矣.

부요동천하제일우야 연이영웅제왕지흥 막성어차 개기지접연제 이점중국지세. 고발해대씨 이구구산망지여 획산외이기지 유족이웅시일방 항충천하. 고려왕씨통합삼한 종기세불감출압록일보 즉산천할거득실지적 개가이견의

 

무릇 요동은 천하의 한 귀퉁이이지만, 영웅과 제왕이 이보다 더 많이 일어났던 곳이 없으니, 대개 그 땅이 여과 제 지방에 인접해 있어서 쉽게 중국의 형세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발해대씨(渤海大氏)가 이미 흩어져 미약해진 유민을 이끌고, 더구나 산넘어 외딴 버려진 땅 한 귀퉁이에 웅거하고 천하와 겨룰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高麗) 왕씨(王氏)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고 하지만, 압록강을 한 발자국도 끝내 넘어서지 못하였으니, 산천의 할거와 득실에 관한 자취를 대체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夫婦人之見 不逾屋脊 孩提之遊 僅及門閾 則固不足語垣墻之外矣 士生新羅九州之內 錮其目而廢其耳 且不知漢唐宋明興亡戰亡之事 而况於渤海之故哉.

부부인지견 불유옥척 해제지유 근급문역 즉고부족어원장지외의. 사생신라구주지내 고기목이쳬기이 차부지한당송명흥망전망지사 이황어발해지고재!

 

무릇 부녀자가 보고 듣는 것은 용마루를 넘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노는 곳은 겨우 문지방에 미칠 뿐이니, 담장 밖의 일을 말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우리 나라 선비들이 신라 영토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 ()나라와 당()나라, ()나라, ()나라의 흥망과 전쟁에 관한 일도 알지 못하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吾友柳君惠風 博學工詩 嫺於掌故 旣撰二十一都詩註 以詳域內之觀 又推之爲渤海考一卷 人物郡縣世次沿革 組縷纖悉錯綜 可喜. 而其言也 歎王氏之不能復句驪舊疆也 王氏之不復舊疆 而鷄林樂浪之墟 遂貿貿焉 自絶於天下矣. 吾於是有以知前見之相符 而歎柳君之才能 審天下之勢闚王覇之略. 又豈特備一國之文獻 與胡恢馬令之書 契其長短而已哉 故序而論之如此.

오우유군혜풍 박학공시 한어장고 기찬이십일도시주 이상역내지관 우추지위발해고일권 인물군현세차연력 조루직실착종 가희. 이기언야. 탄왕씨지불능복구려구강애. 왕씨지불복구강 이계림낙랑지거 수무무언 자절어천하의. 오어시유이지전견지상부 이탄유군지재능 심천하지세규왕패지략. 우기특비일국지문헌 여호외마영지서 계기장당이기재 고서이논지여차.

 

上之九年秋

상지구년추

 

내 친구 유혜풍(柳惠風)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전례에 대해서도 상세히 배웠으므로 이미 이십일도사주를 지어 우리 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渤海考한 권을 지어서 인물(人物), 군현(郡縣), 왕계보(王系譜), 연혁(沿革)을 아주 미세한 것까지 세세히 엮어서 종합해 놓았으니, 가히 기쁜 일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高麗) 왕씨(王氏)가 고구려(高句麗)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에 내가 전에 검토한 바와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왕도와 패도의 지략을 엿보 수 있는 유혜풍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또한 이 책이 어찌 일개 국가의 문헌으로만 가치를 논하겠는가, 중국의 마령이 지은 책과 그 장단점을 함께 비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서문을 지어 논한다.

 

정조(正祖) 9(1785) 가을

 

渤海考序(著者:柳得恭)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 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 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 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是矣. 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고려불수발해사 지고려지부진야. 석자고씨거우북왈 고구려 부여씨거우서남왈 백제 박석김씨거우동남 왈신라. 시위삼국 의기유삼국사 이고려수지시의. 급부여씨망 고씨망 김씨유기남 대씨유기북왈 발해. 시위남북국 의기유남북국사 이고려불수지비의.

 

고려(高麗)는 발해사(渤海史)를 짓지 않음을 보니 고려(高麗)가 부진(不振)했음을 알겠다.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에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 부여씨(扶餘氏)가 서남쪽에 있었으니 백제(百濟), () () 김씨(金氏)가 동남쪽에 있었으니 신라(新羅). 이것이 삼국(三國)이니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高麗)가 이것을 지었으니 옳다. 부여씨(扶餘氏)가 망()하고 고씨(高氏)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金氏)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발해(渤海). 이것을 남북국(南北國)이라 하는데 당연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高麗)가 이를 짓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부대씨자하인야 내고구려지인야. 기소유지지하지야 내고구려지지야. 이척기동척기서척시북이대지이. 급부김씨망대씨망 왕씨통이유지 왈고려. 기남유김씨지지즉전 이기북유대씨지지즉부전. 혹입어여진 혹입어거란.

 

무릇 대씨(大氏)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무슨 땅인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땅이다. 그런데 동쪽 서쪽 그리고 북쪽을 물리쳐서 크게 했을 뿐이다. 무릇 김씨(金氏)가 망()하고 대씨(大氏)가 망()함에 이르러서 왕씨(王氏)가 이를 통합하여 차지했으니 고려(高麗). 그 남쪽의 김씨의 땅은 모두 소유했으나 그 북쪽 대씨(大氏)의 땅은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다. 어떤 것은 여진(女眞)으로 들어갔고 어떤 것은 거란(契丹)에게 들어갔다.

 

當是時爲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執而責諸女眞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 執而責諸契丹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使一將軍往收之.

당시시위고려계자 의급수발해사 집이책제여진왈 하불귀아발해지지 발해지지내고구려지지야.”사일장군왕수지. 토문이북가유 집이책제거란왈 하불귀아발해지지 발해지지내고구려지지야.” 사일장군왕수지.

 

당시 고려를 세우려던 사람은 반드시 발해사를 썼어야했다. 여진족들에게 왜 발해로 귀속하지 않는냐 발해는 고구려 땅인데라며 장군 하나를 보내 모아 왔다. 토문강 북쪽의 거란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장군을 보내 모아왔다.

 

鴨綠以西可有也 竟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 鴨綠以西 不知爲誰氏之地. 欲責女眞 而無其辭 欲責契丹 而無其辭 高麗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압록이서가유야 경불수발해사 사토문이북압록이서 부지위수씨지지. 욕책여진 이무기사 욕책거란 이무기사 고려수위약국자 미득발해지지고야 가승탄재.

 

압록 서쪽에 있으면서 발해사를 쓰지않으니 토문강 북쪽에 있는 무리에게 물으니 압록강 서쪽이 누구 땅인지도 모르더라. 여진족에게 물어도 답이 없고, 거란에 물어도 답이 없으니 고려는 아마도 약소국이라 발해땅을 차지하지 못한게다. 탄식할 일이다.

 

或曰 渤海爲遼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此有不然者.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而問於世子 則其世可知也. 問於隱繼宗 則其禮可知也. 問於十餘萬人 則無不可知也.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혹왈 발해위요소멸 고려하종이수기사호?” 차유불연자. 발해헌상중국 필입사관. 기홀한성지파야 세자이하분고려자십여만인. 무기관즉필유기서의. 무기관무기서 이문어세자 즉기세사지야. 문어은계종 즉기예가지야. 문어십여만인 즉무불가지야 장건장당인애 상저발해국기 이고려지인 이독불가수발해지사호?

 

어떤 사람은 발해(渤海)가 요()나라한테 멸망(滅亡)되었는데 고려(高麗)가 무엇으로 그 역사를 쓸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발해(渤海)는 중국(中國)을 본받았으므로 반드시 사관(士官)을 두었을 것이다. 그 홀한성(忽汗城)이 함락(陷落)될 때에 세자(世子) 이하 고려(高麗)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십여만 명이었다. 그중에 사관(士官)이 없었으면 사서(史書)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사관(士官)도 사서(史書)도 없었다면 세자(世子)에게 물으면 세계(世系)를 알 수 있었다. 숨겨진 왕위세습을 물으면 그 예()를 알 수 있고 십여만 명의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를리 없었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임에도 <渤海國史>를 지었다. 그런데 고려(高麗) 사람이 발해사(渤海史)를 쓰지 못할 이유가 뭔가?

 

鳴呼文獻散亡 幾百年之後 雖欲修之 不可得矣. 余以內閣屬官 頗讀秘書 撰次渤海事 爲君臣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不曰世家傳志 而曰考者.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

오호문헌산망 기백년지루 수욕수지 불가득의. 여이내각속관 파독비서 찬차발해사 위군신지리직관의장물산국어국서속국구고 불왈세가전지 이왈고자 미성사야 역불감이사자거운.

 

오호라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지 몇 백년이 지난 지금 누가 발해서를 쓰겠나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내각에 속한 관료로 비밀문서들을 자주 읽었으니 발해의 일들을 편찬하는데 군신, 지리, 직관, 의장, 물산, 국어, 국서 그리고 9 속국 를 쓰니 이를 왕족 계승 기록이니 말하지 말고 그저 라 하라. 사서로선 부족하니 사서라 하지도 말고....

 

甲辰閏三月二十五日

갑진윤삼월이십오일

 

正祖八年(甲辰:1784) 閏三月 二五日 柳得恭

정조 8(갑진:1784) 윤삼월 이오일 유득공

 

目 錄

 

君考, 臣考, 地理考, 職官考, 儀章考, 物産考, 國書考, 國語考, 屬國考

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의장고 물산고 국서고 국어고 속국고

 

引 用 書 目

 

舊唐書 劉煦 (구당서 유후) 新唐書 宋祁(신당서 송기)

五代史 歐陽修(오대사 구양수) 宋史 脫脫(송사 탈탈)

遼史 脫脫(요사 탈탈) 資治通鑑 司馬光(자치통감 사마광)

三國史金富軾(삼국사기 김부식) 高麗史 鄭麟趾(고려사 정인지)

東國通鑑 徐居正(동국통감 서거정) 續日本紀 管野朝臣眞道(속일본기 관야조신 진도)

日本逸史(일본일사) 通典 杜佑(통전 두우)

通志 鄭樵 (통지 정초) 文獻通考 馬端臨(문헌통고 마단림)

文獻備考(문헌비고)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

淸一統志 (청일통지) 盛京通志(성경통지)

萬姓統譜 凌迪知(만성통보 능적지) 永順太氏族譜(영순태씨족보)

輿地勝覽 (여지승람) 全唐詩(전당시)

 

 

 

君 考(군 고)

 

震國公(진국공)

 

震國公姓大氏 名乞乞仲像 粟末靺鞨人也. 粟末靺鞨者 臣於高句麗者也. 或言大氏 出自大庭氏 東夷之有大氏自大連始也.

진국공성대씨 명걸걸중상 속말말갈인야. 속말말갈자 신어고구려자야. 혹언대씨 출자대정씨동이지유대씨자대연시야.

 

진국공은 성은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으로 속말말갈사람이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의 신하국이었다. 혹 말하길 대씨는 대정씨에서 나왔다는데, 동이족의 대씨는 대련을 시조로 한다고 했다.

 

唐高宗總章元年 高句麗滅 仲象與子祚榮 率家屬徙居營州. 稱舍利 舍利者 契丹語帳官也. 武后萬歲通天二年 契丹松漠都督李盡忠 歸誠州刺史孫萬榮叛唐 陷營州殺都督趙文翽. 仲象懼 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句麗破部 東走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 武后封仲象爲震國公 比羽爲許國公 比羽不受命 武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 中郞將索仇 擊斬比羽 是時仲象已卒.

당고종총장원년 고구려멸 중상여자조영 솔가속사거영주. 칭사리 사리자 거란어장관야. 무후만세통천이년 거란송막도독이진충 귀성주자사손만영반당 함영주살도독조문홰. 중상구 여말갈추걸사비우급고구려파부 동주도요수 보태백산지동북 저오루하 수벽자고. 무후봉중상위진국공 비우위허국공 비우불수명 무후조옥금위대장군이해고 중앙장색구 격참비우. 시시중상이졸.

 

당고종 총장 원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중상과 아들 조영이 함께, 가솔을 이끌고 영주에 거처를 옮기었다. 사리라 칭하였는데, 사리라는 것은 거란말로 장관이라는 것이다. 무후만세통천2년에 거란송막도독 이진충이 성주자사 손만영에게 귀의해 당에 반란하여 영주를 함락하고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중상이 두려워하여,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몰락한 부락민과 함께 동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에서 보존하였다. 오루하가 험하고, 울창한 수림이 벽이 되어 견고했다. 무후가 중상을 진국공에 봉하고 비우를 허국공에 봉하였으나 비우가 명을 받들지 않자, 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를 시켜 비우를 베었다. 중상은 이미 죽은 뒤였다.

 

高 王(고 왕)

 

高王諱祚榮 震國公子也. 嘗爲高句麗將 驍勇善騎射 及震國公卒 乞四比羽敗死 祚榮遁. 李楷固窮躡度天門嶺 祚榮引高句麗靺鞨兵大破之 楷固僅以身免 祚榮卽幷比羽之衆 據挹婁之東牟山 靺鞨及高句麗舊人悉歸之 遂遣使交突厥 略有扶餘沃沮朝鮮弁韓海北十餘國 東窮海西契丹 南接新羅 以泥河爲界.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學習書契 俗與高句麗契丹略同 聖歷中國號震 新唐書作振. 文獻備考曰震朝. 自立爲震國王 築忽汗城以居 直營州東二千里 時奚契丹皆叛唐 道路阻絶 武后不能致討焉

고왕휘조영 진국공자야. 상위고구려장 효용선기사 급진국공졸 걸사비우패사 조영둔. 이해고궁섭도천문령 조영인고구려말갈병대파지 해고근이신면. 조영즉병비우지중 거읍루지동모산 말갈급고구려구인실귀지, 수견사교돌궐 약유부여옥저조선변한해북십여국 동궁해서거란 남접신라 이니하위계. 지방오천리 호십여만 승병수만 학습서결 속여고구려거란약동 성역중국호진 신당서작진. 문헌비고왈진조. 자립위진국왕 축홀한성이거 직영주동이천리 시해거란개반당 도오조절 무후불능치토언.

 

고왕의 이름은 조영이다. 진국공의 아들로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로 날래고, 용감하며 말타고, 궁술에 능하였다. 진국공이 죽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조영이 달아났다. 이해고가 끝까지 쫓아와 천문령을 넘자,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사를 이끌고 이를 크게 깨트리니 해고는 겨우 몸만 살았다. 조영이 곧 비우의 무리를 아우르고 읍루의 동모산에 의거하여 일어나자 말갈과 고구려의 옛 백성들이 모두 돌아왔다. 사신을 돌궐로 파견하여 사귀었다. 부여, 옥저, 조선, 변한등 바다 북쪽 십여국을 다스렸는데, 동으로 바다에 닿고, 서로는 거란, 남으로는 신라에 접하여 니하를 경계로 삼았다. 사방 오천리이고 호수는 십여만호이고 병사는 수만으로, 책을보고 익히고 공부하였다.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한가지이다. 중국에서 진()이라 하는데, 신당서에는 진()이고 하였다. 문헌을 갖추어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하고 홀한성을 쌓고 거하였는데,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천리이다. 이때에 거란이 모두 당을 배반하여 도로가 끊어지고, 험하여 무후가 능히 정벌하지 못하였다.

 

中宗卽位 遣侍御史張行岌 慰撫之 王亦遣子入侍 玄宗先天二年 遣郎將崔訢 冊王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 以所統爲忽汗州 領忽汗州都督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自是以後 世朝獻唐 餘幽州節度府相聘問 屯勁兵於扶餘府 以備契丹. 玄宗開元七年王薨 三月丙辰赴唐.

중종즉위 견시어사장행급 위무지. 왕역견자입시 현종선천이년 견낭장최흔 책왕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 이소통위홀한주 영홀한주도독 시거말갈호 전칭발해. 자족이후 세조헌당 여유주절도부상빙문 군경병어부여부 이비거란. 현종개원칠년왕훙 삼월병진부당.

 

중종이 즉위하자, 시어사 장행급을 파견하여 이에 위로 하였다. 왕 역시 아들 입시를 파견하였다. 현종 선천 이년 낭장 최흔을 파견하여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홀한주의 홀한주도독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말갈이름 홀한주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 칭하였다. 그 후로 당에 조헌하고 거란에 대비하여 유주 절도부와 화친()하고, 부여부에 날랜 병사들을 주둔하였다. ()현종이 개원 칠년 죽자, 3월 병진년에 당나라에 부고하였다.

武 王(무 왕)

 

武王諱武藝 高王子也. 初封桂婁郡王. 開元七年六月丁卯 唐以左監門率吳思謙攝鴻臚卿 充使吊祭 冊王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王遂改元仁安 開斥土宇. 因其俗不立館驛 處處置村落 以靺鞨爲民. 大村置都督 次曰制史 其下曰首領. 東北諸夷皆畏而臣之.

무왕휘무예 고왕자야. 오봉계루군왕. 개원칠년유월정묘 당이좌감문솔오사겸섭홍려경 충사조제 책왕좌효위대장군홀한서도독발해군왕. 왕수개원인안 개척토우. 인기속불립관역 처처치촌락이 이말갈위민. 대촌치도독 자왈제사 기하왈수령. 동북제이개외이신지.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이다. 처음 계루군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개원 칠년 유월 정유에 당이 좌감문(동궁 시위) 오사겸과 섭홍려경을 이끌고 제사에 참여하고 왕을 좌효위대장군홀한서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인안을 원년이라 하고, 세상을 개척하였다. 풍속에 관역(역참)을 세우지 않고 촌락에 거하게 했으며 말갈을 백성으로 삼았다. 큰 촌에는 도독을 두고, 다음은 제사, 그 아래에 수령을 두었다.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었다.

 

開元十年 黑水靺鞨使者入朝 唐玄宗以其地建黑水州 置長史. 臨總王召群臣謀曰 黑水始假道於我 與唐通 異時請吐屯於突厥 皆先告我 與我使偕行. 今請唐官不吾告 是必與唐謀 腹背攻我也 乃遣弟門藝及舅雅雅相 發兵擊黑水. 門藝諫不從 奔唐. 由是貳於唐. 開元二十年 遣大將張文休 率海賊越海攻登州 殺刺史韋俊 謂之雪先王之耻 其實恨門藝事也.

개원십년 흑수말갈사자입조 당현종이기지건흑수주 치장사 임총왕소군신모왈 흑수시가도어아여당통 이시청토둔어돌궐 개선고아 여아사해행. 금청당관불오고 시필여당모 복배공아야 내견재문예급구아아상 발병격흑수 문예간불종 분당 유시이어당 개원이십년 견대장장문휴 솔해적월해공등주 살자가위준 위지설선왕지치 기실한문예사야.

 

개원 10, 흑수말갈의 사신이 입조하였다. 당 현종이 그 땅에 흑수주를 세우고 장사(幕府)를 두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의논하여 말하길, 흑수가 처음 길을 빌려 당과 통하고, 이 때에 돌궐이 군사를 내니 모두 먼저 나에게 고하고 나와 함께 했다. 이제는 당에게 청하고 나에게는 알지지 않으니 이것은 필시 당과 모의하여 배반하려는 속셈이다. 이에 동생 문예와 구아아상을 보내어 병사로 흑수를 공격하였다. 문예가 간하며 따르지 않고 당으로 달아났다. 이는 당나라에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개원 이십년에 대장 장문휴를 파견하여,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산동성)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니 이를 先王의 치욕을 씻음이라 하지만 기실은 동생 문예의 일을 말한다.

 

玄宗大怒 命右領軍將軍葛福順 發兵討之. 二十一年又遣門藝 發幽州兵擊之 又遣內史高品何行成 太僕員外郞金思蘭. 使新羅 授新羅王金興光開府儀同三司持節充寧海軍使鷄林州大都督 諭曰 渤海外稱藩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擊其南鄙. 又勅新羅名將金庾信孫允中爲將 賜金帛 新羅王遣允中等四將.

현종대노 명우영군장군갈복순 발병토지. 이십일년우견문얘 발유주병격지 우견내사고춤하행성 탸복원외랑김사란. 사신라 수신라왕김흥광개부의동삼사지정충녕해군사계림주대도독 유왈 발해외칭번한 내회교활 금욕출병문죄 경역발병격남비. 우칙신라명장김유신손윤중위장 사금백 신라왕견윤중등사장.

 

그 문예의 일로 후회가 가득하니 현종이 크게 노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명하여 병사로 이를 쳤다. 이십일년 또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를 공격하자, 내사고품 하해성과 태업원외랑 김사란을 파견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 김흥광을 개부의동삼사지절윤령해군사계립주대도독을 수여하고, 밝혀 말하길, 발해의 바깥을 번한이라고 칭하는데 마음에 교활함을 품고있어 이제 병사를 내어 죄를 묻고자 하니 경도 역시 병사를 내어 남쪽 교외를 공격하라. 또한 조칙을 내려 신라의 이름있는 장군인 김유신의 손자 윤중을 장군으로 삼고 금과 비단을 하사하니 신라왕이 윤중등 네명의 장군을 파견하였다.

 

率兵會唐師來伐 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凍死過半 皆罷歸. 明年新羅人金忠信 上書於唐 請奉旨歸國討渤海 玄宗許之 竟無功. 而黑水之地皆服於渤海矣 王遣使聘日本 日本使朝臣蟲麻呂來. 開元二十六年 舊唐書二十五年 王薨 八月辛巳赴唐.

솔병회강사래벌 회강설장여 산로조애 사졸동사과반 개태귀. 명년신라인김충신 상서어당 청봉지귀국토발해 현종허지 경무공. 이흑수지지개복어발해의. 왕견사빙일본 일본사조신충마여래. 개원이십육년 구당서이십오년 왕훙 팔월신사부당,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침범해왔는데 큰 눈이 일장이나 오고 산길이 좁고 험해 병사들이 얼어죽은 자가 반을 넘어, 모두 그만두고 돌아갔다. 다음해 신라인 김충신이 당나라에 글을 보내 발해 토벌에 참예하고자 청하자 현종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끝내 공이 없었다. 흑수의 땅이 모두 발해에 복속하고,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자, 일본도 신하 충마여가 왔다. 개원 26, 구당서에는 25년 왕이 붕어하니, 8월 신사일에 당에 알렸다.

 

文 王(문 왕)

文王諱欽茂 武王子也. 改元大興 開元二十六年. 唐遣內侍段守簡 冊王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王承詔赦境內. 遣使隨守簡入朝 玄宗授王左金吾大將軍 天寶中累加特進太子詹事賓客 天寶末 徙上京 訖玄宗之世 凡二十九朝唐.

문왕휘흠무 무왕자야. 개원대흥 개원이십육년. 당견내시은수간 책왕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 왕승조사경내. 견사수수간입조 현종수왕좌금오대장군 천보중누가특진태자첨사빈객. 천보말 사상경 흘현종지세 범이십구조당.

 

문왕의 이름은 흠무이고, 무왕의 아들이다.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니 개원 26년이다. 당이 내시 단수간을 파견하여, 왕을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자, 왕이 받아들이고 대사면하였다. 사신 수수간을 파견하여 알현하자, 현종이 왕을 좌금오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천보(당 현종의 연호)중에 태자첨사(태자를 호위하는)빈객으로 특진하였다. 천보(현종 연호)말에 상경으로 천도하고 현종의 29년 치세가 끝났다. 거의 29번 당나라와 교류하였다.

 

肅宗至德元載 平盧留後徐歸道 遣果毅都尉行柳城縣四府經略判官張元澗來聘曰 今載十月當擊安祿山 王須發兵四萬來援平賊 王疑其有異留之 十二月丙午 歸道果鴆劉正臣于北平. 潛與祿山幽州節度使史思明 通謀擊唐 安東都護王志玄知其謀 率精兵六千餘人 攻破柳城斬歸道. 自稱平盧節度 進屯北平. 四載四月 志玄遣將軍王進義來聘曰 天子已歸西京 迎太上皇于蜀居別宮 勦滅賊徒. 故遣下臣來告 王爲其事難信 留進義 別遣使詳問 肅宗賜王勅書一卷 寶應元年詔以渤海爲國 進封渤海國王 授檢校太尉

숙종지덕원제 평로유후서귀도 견과의도위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장원간래빙왈 금재시월당격안록산 왕수발병사만래원평적 왕의기유이유지 십이월병오 귀도과짐유정신우북평. 잠여록산유주절도사사사명 통모격당 안동서호왕지현지지모 솔정병육천인 공파유성참귀도. 자칭평로절도진둔북평 사재사월 지현견장군왕진의래빙왈 천자이귀서경 영태상황우촉거별관 초멸적도. 고도하신래고 왕위기사난신 유진의 별견사상문 숙종사왕칙서일권 보응원년조이발해위국 진봉발해국왕 수섬교대위

 

숙종 지덕 원년에 평로에 머무르다 나중에 천천히 돌아갔다. 과의도위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을 파견하여 말하길, 올 시월에 안록산의 공격을 당하여 왕이 마땅히 병사 사만을 보내어 적을 평정하라고 보냈는데, 왕이 여기에 머물러 있음을 의심하여, 십이월 병오에 과짐(?) 유정신과 북평으로 돌아갔다. 녹산과, 유주절도사 사사명이 모의하여 당을 공격하려고 숨었는데, 안동도호왕 지현이 그 모반을 알고 정예병 6000명을 이끌고 유성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돌아가는 길을 없앴다. 스스로 평로절도라 칭하고 북평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44월에 지현이 장군 왕진의를 파견하여 말하길 천자는 이미 서경으로 돌아 왔다. 임금을 맞이하여 촉의 별궁에 머므르니, 적들은 모두 패주하였다. 고로 신하를 보내어 알리는 것이다 왕이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 결정을 미루고 따로 사신을 보내 자세히 조사하니 숙종이 칙서 한 권을 하사하니, 보응 원년 조서로 발해를 나라로 삼으니 발해국왕에 봉하고, 검교태위를 수여하였다.

 

代宗大曆二年至十年 或間歲或歲內 二三遣使朝唐. 十二年正月 王獻日本舞女十一人 及方物于唐 四月十二月又遣使朝唐 累加司空太尉. 德宗建中三年五月 貞元七年正月,八月 十年正月 皆遣使朝唐. 貞元中復徙東京 王十遣使聘日本 日本使朝臣殿繼來 忌村全成來 陽侯史玲璆來 連益麻呂來 武生鳥守來 朝臣殿繼來 大興五十七年三月四日王薨 卽貞元十年.

대종대력이년지십년 혹간세혹세냐 이삼견사조당. 십이년정월 왕헌이본무녀십일인 급방물우당. 사월십이월우견사조당 누가사공태위. 덕종건중삼년오월 정원칠년정월,팔월 십년정월 개견사조당 정원중복사동경 왕십견사빙일본 일본사조신전계랴 기촌전성래 영후사영구래 연익마여래 무생조수래 조신전계래 대흥오십칠년삼월사일왕훙 즉정원십년.

 

 

대종대력 2년에서 10년까지 혹은 그 사이거나 그 안쪽에 당나라 조회에 2-3번 참여했다. 12년 정월 왕이 일본무녀 10명과 방물을 당에 보냈고 4월과 12월에 또 당의 조례에 참여하여 사공태위의 직함을 얻게되었다. 덕종 건중 35, 정원 75810년 정월, 사신을 보내어 당에 사절을 보냈다. 정원 연간 다시 동경으로 천도하고 왕이 10번이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니 일본도 조신전계, 기촌전성, 양후사령구, 연익마려, 무생오수, 조신전계가 조례에 입조하였고 태흥5734일 왕이 죽었다. 즉 정원 10년이다.

 

廢 王(폐 왕)

 

廢王諱元義 文王族弟也 文王子宏臨早卒 元義立 一歲猜虐 國人弑之.

폐왕휘원의 문왕족제야 문왕자굉림조졸 원의입 일세시학 국인시지.

 

폐왕의 이름은 원의로 문왕의 동생이다.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자, 원의가 섰는데, 그 해에 의심많고 사나워 나라사람들이 죽였다.

 

成 王(성 왕)

 

成王諱華璵 宏臨子也. 國人弑元義推立王 改元中興 還上京.

성왕휘화여 굉림자야. 국인시원의추입왕 개원중흥 환상경.

 

성왕의 이름은 화여로 굉림의 아들이다. 나라사람들이 원의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니 연호를 중흥이라 하고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康 王(강 왕)

 

康王諱嵩璘 文王少子也. 改元正曆 貞元十一年二月乙巳. 唐遣內常侍殷志贍 冊王右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十四年 王遣使以父王故事叙理 唐加王銀靑光祿大夫檢校司空 進封國王. 二十一年 遣使朝唐 貞元中凡四朝唐 順宗加王金紫光祿大夫 憲宗元和元年十月 加王檢校太尉 十二月 遣使朝唐 王二遣使聘日本 日本使眞人廣岳來 宿彌賀茂來 宿彌船白來 元和四年王薨 正月赴唐.

강왕휘숭린 문왕소자야. 개원정역 정원십일년이월을사 당견내상시은지삼 책왕우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 십사년 왕견사이부왕고사서리 당가왕은청광록대부검교사공 진봉국왕. 이십일년 견사조당. 정원중범사조당 순종사왕금자광록대부 헌종원화원년시월 가왕검교대위 십이월 견사조당 왕이견사빙일본 일본사진인광악래 숙미하무래 숙미선백래. 원화사년왕훙 정월부당.

 

강왕의 이름은 숭린으로 문왕의 작은 아들이다. 연호를 정력이라 하니 정원 112월 을사일이다. 당이 내상시 은지삼을 파견하여 왕을 우호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에 책봉하였다. 14년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부왕에 관한 일들을 밝히니 당이 왕에게 은청광록대부검교사공을 더하고 국왕에 책봉하였다. 21년 당에 알현하고 정원중에 네 번 당의 조례에 참여하였다. 순종이 금자광록대부를 더하고, 혜종 원화 원년 10월에 검교태위 직함을 더하였다. 12월 당에 다녀오고 두 번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에서 진인광악, 숙미하무, 숙미선백, 이 왔다. 원화 사년 왕이 죽자 정울에 당에 알렸다.

 

定 王(정 왕)

 

定王諱元瑜 康王子也 改元永德 元和四年 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五年二遣使朝唐 七年.

정왕휘원유 강왕자야 개원영덕 원화사년 당책왕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 오년이견사조당 칠년.

 

정왕의 이름은 원유로 강왕의 아들이다. 연호를 영덕이라 하니 원화 4년이다. 당이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에 책봉하였다. 5, 7년 두번 당 조정회의에 참석하였다.

 

僖 王(희 왕)

 

僖王諱言義 定王弟也 改元朱雀. 定王卒 王權知國務 元和八年正月庚子 唐遣內侍李重旻 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희왕휘언의 정왕제야. 개원주작. 정왕졸 왕권지국무 원화팔년정월경자 당견새니이중민 책왕은청광록댜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

 

희왕의 이름은 언의로 정왕의 동생이다. 연호를 주작이라 하였다. 정왕이 죽고 왕권을 받아 나랏 일을 배웠다. 원화 8년 정월 경자일에 당이 내시 이중민을 파견하여 왕을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簡 王(간 왕)

 

簡王諱明忠 僖王弟也. 改元太始 立一歲薨.

간왕휘명충 희왕제야. 갸원태시 입일세훙.

 

간왕의 이름은 명충으로 희왕의 동생이다. 연호를 태시라 하였는데, 위에 올라 일년만에 죽었다.

 

宣 王(선 왕)

 

宣王諱仁秀 簡王從父 高王弟野勃四世孫也. 改元建興 簡王薨 王權知國務. 元和十三年正月乙巳 遣使告喪于唐 五月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王南征新羅 北略諸部 開大境宇. 十五年閏正月 遣使朝唐 唐加王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 十二月又遣使朝唐 元和中凡十六朝唐 穆宗長慶二年正月 四年二月皆遣使朝唐 長慶中凡四朝唐 敬宗寶曆中二朝唐 文宗太和元年遣使朝唐 四年又遣使朝唐. 是年 舊唐書五年 王薨.

선왕휘인수 산왕종부 고왕재여발사세손야. 갸원건흥 간왕훙 왕권지국무 원화십삼년정월을사견사고상우당, 우월당책왕은청광록대뷰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 왕남정신라 북략제부개댜 경우. 십오년윤정월 견사조당 당가왕슴자광록대부검교사공. 십이월우견사조당 원화중범십육조당. 목종장경이년정월 사년이월개견사조당. 장경중범사조당 경종보력중이조당 문종태화원년 견사우견조당. 시년 구당서오년 왕훙.

 

선왕의 이름은 인수로 간왕이 아버지와 형제요 고왕의 아들 야발의 4세손이다. 연호를 건흥이라 하고 간왕이 죽자, 왕권을 쥐고 국무를 돌아봤다. 원화 13년 정월 을사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을 알렸다. 5월 당이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남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북으로 여러 부를 다스려 크게 지경을 넓히였다. 15년 윤정월에 당나라 조례이 참예하자 금자광록대부검교사공을 더하였다. 12월 또 당나라 조례에 참예하였다. 원화중에 16, 목종 장경 2년 정월, 42월에 당나라 조례에 참예하였다. 장경중에 무른 네 번이다. 경종 보력중에 두 번 참예하고 문종 태화 원년에, 4년에 한 번, 이해에, 구당서에는 5년에 왕이 죽었다.

 

王彛震(이진왕)

 

宣孫王也 父新德卒 王立改元咸和 大和五年 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六年遣使朝唐 七年正月二月皆遣使朝唐. 訖文宗之世 凡十二朝唐 武宗會昌中四朝唐 宣宗太中十二年王薨 二月赴唐.

선손왕야 부신덕종 왕립개원함화 대화오년 당책왕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벌해국왕. 육년견사조당 칠년정월,이월개견사조당 흘문종지세 범십이조당 무종회창중사조당 선종태중십이년왕훙 이월부당.

 

선왕의 손자로 아버지 신덕이 죽자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함화라 하였다. 대화 5년 당이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 직함을 주었다. 6, 7년 정월, 2월에 알현하고, 문종에 이르기 까지 열두번 참예하였다. 무종 회창중에 4번 알현하고 선종 태중 12년에 왕이 죽자 2월에 당에 부고를 알렸다.

 

王虔晃(왕건황)

 

彛震弟也 太中十二年二月癸未 唐詔襲王.

이진제야 태중십이년이월계미 당조습왕.

이진의 동생으로 태중 122월 계미일에 당이 왕위계승을 허가하였다.

 

王玄錫(현석왕)

 

虔晃子也 懿宗咸通中 三遣使朝唐.

건황자야 의종함통중 삼견사조당.

 

견황의 아들로 의종 함통 연호 중에 세 번 당에 알현하였다.

 

王諲譔(인선왕)

 

史失系 梁太祖朱全忠開平元年 王遣王子朝梁 獻方物. 二年三年及乾和二年 又遣使朝梁 後唐莊宗同光二年 遣王子朝唐 又遣王侄. 明宗天成元年 遣使朝唐 進兒口女口 渤海自唐世數 遣諸生詣京師太學 習識古今制度 稱爲海東盛國. 及至朱梁後唐三十年間 貢士登科者十數人 學士彬彬焉

사실계 양태조주전충개평원년 왕견왕자조양 헌방물. 이년삼년급건화이년 우견사조양 후당장종동광이년 견왕자조당 우견왕질. 명종천성원년 견사조당. 진아구여구 발해자당세수 견제생지경사태학 습식고금제도 칭위해동성국. 급지주양후당삽십년간 공사등과자십수인 학사삼삼언.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양나라 태조 조전충 개평 원년에 왕이 왕자를 보내어 양에 알현을 하고 방물을 받쳤다. 이년 삼년에서 건화 이년에 또 양에 입조하고 후당 장종 동광 이년에 왕자를 보내어 당에 입조하고 또 왕질을 보내었다. 명종 천성 원년 당에 가면사 남녀 아이들을 보냈다. 발해가 당의 세수()를 이어받고, 학문이 뛰어난 여러 스승들을 보내어 고금의 여러 제도를 익히니, 칭하여 해동성국이라 하였다. 주양(주전충의 양나라)에서 후당이 교차하는 30년 사이에 등과에 오른 선비들이 십수명이고, 학사들이 많았다.

遼太祖耶律阿保機神冊二年 王遣使聘遼 四年 遼修遼陽故城 掠渤海戶實之. 天贊三年 王遣兵攻遼 殺遼州刺史張秀實 掠其民而歸. 四年十二月乙亥 遼主詔其國中曰 所謂二事 一事已畢 惟渤海世讎未雪 豈宜安住.” 遂擧兵來寇 皇后及太子培大元帥堯骨從. 閏十二月壬辰 遼主祠木葉山 壬寅以靑牛白馬祭天地. 己酉次撤葛山射鬼箭 丁巳次高嶺 是夜遼兵圍扶餘府.

요태조야율아보기신책이년 왕견사빙요 사년 요수요양고성 략발해호실지. 천찬삼년 왕견병공요 살요주자사장수실 약기민이귀. 사년십이월을해 요주조기국중왈 소위이사 일사이필 유발해세수미설 기의안주.” 수거병래구 황후급태자배대원수요골종. 윤십이월임진 요주사목엽산 임인이청우백마제천지. 기유차철갈산사귀전 정사차고령 시야요병위부여부.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신책 2년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요에 화친을 청하고, 4년 요나라가 요양의 옛성을 수리하고 발해 주민을 노략질하여 차지하였다. 천찬 3년에 왕이 병사를 일으켜 요를 공격하여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 백성을 노략질 하고 돌아왔다. 412월 을해일에 요나라 주인이 그 나라 가운데에서 고하길, “두 가지 일이 있으니, 하나는 이미 이룩했으나 발해와의 오랜 원수를 씻어야 편히 쉬리라.”며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황후와 태자 배가 대원수 요골을 따랐다. 12월 임진일에 요주(요나라 왕)가 목엽산에 제사 지내고 임인일에 푸른 소와 흰 말로 天地에 제사 지냈다. 기유일에는 철갈산에서 귀전(鬼箭)을 쏘고 정사일에는 고령에서 그리하니 그 밤에 요나라 병사가 부여부를 포위하였다.

 

天顯元年正月己未 白氣貫日 庚申扶餘城陷 守將死之 遼又別攻東平府破之. 丙寅 老相兵敗 是夜遼太子培 大元帥堯骨 南部宰相蘇 北院夷离菫斜涅赤 南院夷离菫迭里等 圍忽汗城. 己巳 王請降 庚午 遼主駐軍忽汗城南, 辛未 王素服藁索牽羊 率臣僚三百餘人出降. 遼主禮以遣之. 丙子 遼主使其近侍康末怛等十三人 入請罪馬前. 遼主以兵衛王及王族以出 二月丙午遼改渤海國爲東丹 忽汗城爲天福 封其太子倍爲人皇王以主之 乙酉 遼主以王及王族歸 築城于臨潢之西 使王居之. 賜王名曰烏魯古 王后名曰阿里只. 烏魯古阿里只者 遼主及皇后受王降時 所乘二馬名也 因以其馬賜王及后.

천현원년정월기미 백기관일 경신부여성함 수장사지. 요우별공동평부파지 병인노상병패 시야요태자배 대원수요골 남부재상소 북원이금리근사열적 남원이리근실리등 위홀한성 기사왕청항. 경오 요주주군홀한성남. 신미 왕소복근색견양 솔신료삼백여인출항 요주예이견지. 병자 요주사기근시강말달등십삼인 입청죄마전. 요주이병위왕급왕족이출. 이월병오 요개발해국위동간 홀한성위천복 봉기태자배위인황왕이주지. 을유 요주이왕급왕족귀 축성우임황지서 사왕거지. 사왕명왈오노고 왕후명아리지. 오노고아리지자 요주급황후수왕시 소승이마명야. 인이기마사왕급후.

 

천현 원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해를 꽤 뚫었다. 경신 부여성이 함락되고, 지키던 장수가 죽었다. 요는 또 따로 동평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병인일에 노상(늙은 재상의) 병사들이 패하니 그 밤에 요태자 배와 대원수 요골, 남부재상 소, 북원 이리근(夷离菫:군마(軍馬)를 관할하는 대관(大官)) 사열적, 남원 이리근 질리 등과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기사일에 왕이 항복하길 청하였다. 경오일에 요주(요나라 왕)의 군사가 홀한성 남쪽에 이르렀고, 신미일에 왕이 흰옷을 입고 짚으로 새끼를 꼬아 양을 끌고, 신하와 벼슬아치 300여명을 이끌고 항복하니 요주가 예로 이를 맞아주었다. 병자일에 요주가 근시 강말달 등 13명을 시켜 말 앞에서 죄를 청하게 하였다. 요주가 병사에 둘러싸인 왕과 왕족을 추려냈다. 2월 병오일 요가 발해국 이름을 동단으로 고치고 홀한성을 천복이라 개명하였다. 요나라 태자 배를 인황왕에 봉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을유일 요주가 왕과 왕족이 돌려보내고 임황의 서쪽에 성을 쌓고 발해왕이 거하게 하고 왕이름을 하사하니 오노고라 하고, 왕후의 이름을 아리지라 하였다. 오노고와 아리지라는 것은 요주와 황후가 발해왕에게 항복받을 때 타고있던 두 마리의 말이름으로 그리하여 말로 왕과 후의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興遼王(흥요왕)

 

名延琳 高王七代孫也 仕遼爲東京舍利軍詳穩 初東遼之地 自神丹中附. 遼末有榷沽鹽麴之法 關市之征亦寬弛. 及馮延休韓紹勳等 相繼爲戶部使 以燕山平地之法繩之 民不堪命. 燕又仍歲大饑 副使王嘉獻計造船 使其民諳海事者 漕粟以賑燕. 水路艱險多覆沒 雖言不信鞭楚榜掠 民怨思亂.

명연림 고왕칠대손야. 사요위동경사리군상온 초동요지지 자신단중부. 요말각고염국지법 관시지정역완이. 급풍연휴한고룬등 상계위호부사 이연산쳥지지법승지 민불감명. 연우잉세대기 부사왕가헌계조선 사기민암해사자. 조속이진연. 수로간험다복몰 수언불신편초방략 민원사란.

 

이름은 연림으로 고왕의 칠대손이다. 요에서 동경사리군상온 벼슬을 하였는데, 본디 요나라의 동쪽 땅이다. 스스로 신단중부 하였다. 요말에 각고염국(소금과 누룩을 국가에서 전매하는)의 법이 있었는데, 관시(關市: 관문과 시장의 상거래장소)를 차지하거나 풀어주는 것이었다. 풍연휴와 한소훈등을 호부사로 삼아, 연산 평지를 다스리게 하니, 백성들이 그 명을 견디지 못하였다. 연나라가 그 해에 크게 굶주리니 부사들이 왕에게 그럴듯한 계책을 내어 배를 만들어 그 백성들이 해운업을 배워 쌀을 실어 날아 연나라에 공급하게 하였다. 뱃길이 험하여 배들이 많이 가라앉았는데,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심히 매질하니 백성들이 원망이 많고, 어지러왔다.

 

遼聖宗大平九年八月丁丑 延琳殺紹勳及嘉 以快其衆. 復殺四捷軍都指揮使蕭頗得 囚留守駙馬都尉蕭孝先 國號興遼擧位號 改元天慶. 高麗史曰天興 選智勇之士置左右 於是諸部響應 南北女眞皆附 而高麗與遼絶.

요성종대평구년팔월정축 연립살소훈급가 이쾌기중. 복살사첩군도지휘사소파득 수유사부마도위소효선 국호흥요거위호 개원천경. 고려사왈천흥 선지용지사치좌우 어시제부향응 남북여진개부 이고려여요절.

 

요 성종 태평 98월 정축일 연림이 호부사였던 소훈과 가를 죽이니 그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또 사첩군도지휘사 소파득을 죽이고, 유수부마도위 소효선을 잡아넣고 나라 이름을 흥여라 하고 제위에 올라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고려사에는 천흥이라고 하였다. 지혜롭고 용맹한 선비를 골라 좌우에 두니 여러 에서 기뻐하였으며 남북 여진이 귀속되니 고려와 요나라와 관계를 끊었다.

 

* 거란족이나 고구려인들이 백성이 아닌 여진족을 백성으로 삼았다는 말....

 

先是延琳與副留守王道平謀擧事 又召黃翩於黃龍府 道平夜踰城 走與黃翩俱上變 遼主徵諸道兵攻之. 渤海太保夏行美渤海人也 時主兵戌保州 延琳馳書 使圖統帥耶律蒲古 行美以實告蒲古 殺渤海兵八百人 而斷其東路. 黃龍保州旣皆不附 國舅詳穩蕭匹敵 又率兵斷西路. 延琳遂分兵攻瀋州 節度副使張傑聲言欲降 故不急攻 知其詐而已有備 攻之不克而還.

선시연립여부유수왕도평보거사 우소황편어황룡부 도평야유성 주여황편구상변. 요주징제도병공지 발해태보하행미발해인야 시주병수보주 연립치서 사도총수야율보고 행미이실고포고 살발해인병팔백인 이단기동로. 황용보주기개불부 국근상온소필적 우솔병단서로. 연림수분병공심주 절도부사장걸성언욕항. 고불급공 지기사이이유비 공지지불극이환.

 

전에 연림이 부유수 왕도평과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또한 황룡부 소황편과 도평이 밤에 성을 넘어, 황편과 함께 변을 일으키니 요주가 여러 의 병사들로 공격해 왔다. 발해태보 하행미는 발해 사람으로 이때에 병사로 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연림이 급하게 전갈하여 도통수 야율포고를 도통수로 세우고 행미로 보고하도록 하여 발해병사 팔백명을 죽이고 그 동쪽길을 끊었다. 황룡보주의 모두 따르지 않아, 국구상온 소필적이 또한 평사로 서쪽길을 끊었다. 연림이 병사를 나누어 심주를 공격하는데, 심주의 절도부사 장걸성언이 항복하고자 하니 급히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을때는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어 돌아 왔다.

 

遼兵大集 十月遼以南京留守燕王蕭孝穆爲都統 蕭匹敵爲副 部署六部大王蕭蒲奴爲都監 與戰蒲水中 遼兵卻匹敵蒲奴張左右翼擊之 延琳兵潰. 又戰于手山敗走 入城固守 孝穆築重城起樓櫓 內外不相通 城中撤屋以爨. 蒲奴先據高麗女眞要衝 故無救兵. 十年八月丙午 延琳將楊詳世 密送款於遼 夜開門納遼師 延琳被執 是時諸部豪傑吼山等兵蜂起 尋皆敗滅 獨南海城守堅守經年始降.

요병대집 시월요이남경유수연왕소효목위도통 소필적위부 부서육부대왕소포노위도감 여전포수중. 요병각필적포노장좌우익격지 연림병궤 우전우수산패주 입성고수 효먹축중성기누노 내외불상통 성중철옥이찬 포노선거고려여진요충 고무구병 십년팔월병오 연림장양상세 밀송관어요 야개문납요사 연림피집 시시제부호걸후산등봉기 심개퍄멸 독남해성수견수경년시항.

 

요의 병사들이 크게 모아 10월 요나라가 남경유수연왕 소효문을 도통으로 삼고 소필적을 부로 삼고, 부서육부대왕 소포노를 도감으로 삼아, 포수에서 필적과 포노가 좌우의 날개로써 벌려서 공격하니 연림의 병사는 무너졌다. 또 우수산에서 전투하여 패하니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었다. 효목이 성을 쌓고, 망루를 세워, 안팎에 서로 통하게 하지 못하게 하니 성안에서는 집을 부수어 불을 땠다. 포노가 먼저 고려와 여진의 요충을 쳤는데도 구원병이 없었다. 108월 병오 연림의 장수 양상세가 비밀히 요에게 밀사를 보내어 밤에 문을 열어 놓으니 연림을 잡았다. 이때 여러 부의 호걸 후산등이 병사를 일으켰지만 모두 패하여 멸하고 홀로 남해성이 단단히 수비하다 이 해 초에 항복하였다.

 

烏舍城浮渝府 琰府王(오사성부유부 염부왕)

 

史失名 宋太宗太平興國六年 賜王詔曰 朕簒紹丕基 奄有四海 普天之下罔有率俾 矧太原封域 國之保障 頃因竊據 遂相承襲 倚遼爲援 歷世逋誅 朕前歲親提銳旅 盡護諸將 拔並門之孤壘 斷凶奴之右臂 眷言吊伐 以蘇黔黎.

사실명 송태종태평흥국육년 사왕조왈 짐찬소비기 엄유사해 보천지하망유솔비 신태원봉역 국지보장 경인절거 수상승습 의요위원 역세포주 짐전세친제예려 진호재장 발병문지고루 단흉노지석비 권언조벌 이소검려

 

사서엔 이름이 없지만(염부왕) 송태종 태평흥국 6년 송태종이 조문을 내려 말하길 짐이 사해를 덮는 왕들의 대업을 찬탈하였지만 천하엔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하물며 태원의 봉토무리의 땅도 몰래 점거하여 대대로 징벌을 피하니 짐이 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을 보호하고자, 병문의 고루를 빼앗고, 흉노의 오른 팔을 베어내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통치자를 벌(吊伐)하여 黔黎(백성들)을 자유케 하였다.

 

蠢玆北戎 非理搆怨 輒肆荐食 犯我封界. 日昨出師逆擊 斬獲甚衆. 今欲鼓行深入席卷 長驅焚其龍庭 大殲醜類. 素聞爾國密邇寇讎 迫於呑幷. 力不能制 因而服屬 困於率割 當靈旗破賊之際. 是隣邦雪憤之日 所宜盡出族帳 佐予兵鋒 俟其剪滅 沛然封賞幽薊土宇 復歸中朝 朔漠之外 悉以相與 勗乃協乃 朕不食言.” 是時宋欲大擧伐遼 故有是詔.

준자북융 비리구원 첩사천식 범아봉계 일작출사역격 참획심중 금욕고행심입석권 장구분기용정 대섬추류 소문이국밀이구수 박어탄병 역불능제 인이복속 곤어솔할 당령기파적지제 시인방설분지일 소의진출족장 좌여병봉 사기전멸 패연봉상유계토우 복귀중조 삭막지외 실이상여 욱내협내 짐불식언.” 시시송욕재거벌요 고유시조.

 

북융이 점점 일어나니, 그 원망함을 다스릴 방법이 없고 방자함이 갑자기 참식하여 우리 봉토를 침범하였다. 며칠전 병력을 일으켜 반격하고 많은 무리를 죽이고, 사로 잡았다. 이제 북을 울리며 깊이 진격하고 말을 달려 제왕의 자리를 불태우고 추한 무리들을 섬멸하였다. 듣자니 당신의 나라가 도둑들과 매우 가깝다는 소릴 듣고, 급박하게 병탄한 것이다. 궁색하여, 함께 어울리니, 힘으로 능히 제도할 수가 없어 합치게 된 것이다. 통제할 능력이 안되니 복속한 것이며 나누어 통솔하기 힘드니 깃발을 앞세워 격파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주변국의 울분을 씻는 날이요 족장을 솎아내는데 그대들의 정예병의 도움으로 쓸어버리려 하니 성공하면 幽薊(幽州)의 영역과 주민을 봉토로 줄 것이며 朝禮에도 복귀시킬 것이다. 삭막(고비사막)의 바깥은 모두 서로 한 무리이고 나는 식언하는 사람이 아니다.“하였다. 당시 송나라가 병력을 일으켜 요나라를 치려하여 이런 를 보낸 것이다.

 

按忽汗城之破 在遼太祖天顯元年 後唐明宗天成元年 人謂是時渤海已亡 然而遼史稱太祖有君人之德 以其不滅渤海族帳也.

안홀한성지파 재요태조천현원년 후당명종천성원년 인위시시발애이망 연이요사칭태조유군인지덕 이기불멸발해족장야.

 

홀한성이 깨어지니, 요태조 천현 원년이요, 후당 명종천성원년이다. 사람들이 이 때에 발해가 멸망했다고 하니, 요사에서 칭하길 태도가 왕으로의 덕이 있으나, 발해의 족장마저 멸망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聖宗統和十四年 蕭韓家奴奏曰 渤海高麗女眞 合從連衡.” 二十一年 渤海來貢. 開泰中 南部宰相大康乂言 蒲蘆毛朶界多渤海人.” 乞取之詔 從之 領兵至大石河馳準城 掠數百戶而歸. 又親征渤海黃皮室軍.

성종통화십사년 소한가노주왈 발해고려여진 합종연횡.” 이십일년 발해내공. 개태중 남부재상대강예언 포로모내계 다발해인.” 걸취지조 종지. 영병지대석하치준성 략수백호이귀 우친정발해황치실군.

 

성종 통화 14년 소한가노가 아뢰길, 발해,고려,여진이 합하여 계속 이어져 있다. 이십일년 합래가 공물을 받쳤다. 개태 (요나라 성종(聖宗) 때의 연호)때에 남부재상 대강예가 말하길 포로모내의 경계에 발해인이 많다.”하여 그들을 포섭하라는 조에 따라 병력을 대석하의 추준성에 보내 수백호를 빼앗아 돌아왔고 친히 발해의 황피실 군을 정벌하였다.

 

五代史云 訖周世宗顯德 渤海使常來.

오대사운 흘주세종현덕 발해사상래.

 

오대사에는 후주 세종 현덕(954~959) 말년까지 발해 사신이 항상 방문하였다고 하였다

 

 

宋史宋琪傳 琪論邊事曰 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

송사송기전 기번변사왈 발해병마토지 성어해장 수면사거란 구회살주파국지원.

 

송사에 실린 송기의 전기에는 변방의 일을 논하면서,“발해의 군사와 군마 및 땅이 부족보다도 번성한데, 비록 지금 거란을 섬기고 있다 해도 군주를 죽이고 나라를 격파시킨 원한을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말하였다.

 

文獻通考云 阿保機 攻扶餘城下之 爲東丹府 阿保機死 諲譔命其弟 率兵攻扶餘城 不克而還.

문헌통고운 아보기 공부여성하지 위동단부 아보기사 인선명지제 솔병공부여성 불극이환.

 

문헌통고에는야율아보기가 부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동단부로 삼았는데, 아보기가 죽자 대인선이 그 동생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부여성을 공격하도록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天成四年 長興二年三年四年 淸泰二年三年 俱遣使貢方物.

천성사년 장흥이년삼년사년 청태이년삼년 구견사공방물.

 

또 천성 사년(929), 장흥 이년(931), 삼년, 사년(933), 청태 이년(935), 삼년에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쳤다고 하였다.

 

 

宋太宗淳化二年冬 以渤海不通朝貢 詔女眞攻之.

송태종순화이년동 이발해불통조공 조여진공지.

 

송 태종 순화 이년(991) 겨울에는 발해가 조공을 하지 않자 여진족에게 조서를 내려 공격하도록 시켰다.

 

胡三省云 渤海更五代至於宋 耶律數數加兵不能服也.

호삼성운 발해경오댜지어송 야율수수사병불능복야.

 

호삼성은 발해가 오대(5)에서 송나라에 이르렀는데, 야율씨가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굴복시킬 수 없었다.”하였다.

 

以此觀之 渤海未嘗亡也. 其浮渝府琰府王 雖不言姓名 見太宗詔 可知其爲大氏之裔也 然渤海之亡在何時未可考.

이차관지 발해미상망야. 기부유부염부왕 수불언성명 견태종조 가지기위대씨지예야. 연발해지망재하시미가고.

 

이로 보건대, 발해는 일찍이 멸망하였던 것이 아니다. 부유부 염부왕에 대해서 비록 성과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나, 태종의 조서를 보니 그가 대씨의 후손임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발해가 언제 멸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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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 考(신 고)

 

大門藝(대문예) 大壹夏(대일하) 馬文軌(마문궤) 蔥勿雅(총물아)

 

門藝武王弟也. 武王使門藝擊黑水靺鞨 門藝嘗質於唐智利害 謂王曰 黑水請吏而我擊之 是背唐也. 唐大國 兵萬倍我 與之産怨我且亡. 昔高句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可謂雄强. 唐兵一臨 掃地盡矣. 今我衆比高句麗三之一 王將違之不可.”

문예무왕제야. 무왕사문예격흑수말갈 문예상질어당지이해 위왕왈 흑수청리이아격지 시배당야. 당대국 병만배아 여지산원아차망. 석고구려성시 사삼십만 항당위적 가위웅강. 당병일임 소지진의, 금아중비고구려삼지일 왕장위지불가.”

 

문예는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문예에게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문예는 일찌감치 당나라에 인질로 가본 경험으로 당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아, 왕에게 고하여 말하길, “흑수가 관리를 청하는데 내가 공격하는 것은 당에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대국으로 병사가 우리의 만배이고, 이것이 원망을 사 우리가 망할까 두렵습니다. 옛날 고구려가 성할 때, 삼십만으로 당을 적으로 항거하였는데, 당나라 병사가 들어오면 땅위에 남아날 것이 없습니다 정말 강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무리는 고구려의 3분의 1이니 왕께서 장차 당나라를 거스르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했다.

 

王不從强遣之 兵至黑水境 又以固謙 王怒遣從兄壹夏代將. 召門藝將殺之 門藝懼 棄其衆儳路奔唐. 玄宗拜爲右驍衛將軍. 王遣馬文軌蔥勿雅 上書極言門藝罪狀 請殺之 唐處門藝安西. 好報曰 門藝窮來歸我 誼不可殺 已投之嶺南矣.” 幷留文軌物雅 別遣鴻臚少卿李道邃源復諭旨.

왕불종강견지 병지흑수경 우이고겸 왕노견종형일하대장 소문예장살지. 문예구 기기중참로분당. 현종배위우효위장군. 왕견마문궤총물아 상서극언문예죄상 청살지 당처문예안서. 호보왈 문예궁래귀아 의불가살 이투지영남의.” 병유문궤물아 별견홍려소경이도수원복유지.

 

왕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강권하여 파견하니 병사가 흑수의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꿈쩍않고 있었다. 왕이 노하여 사촌 형 일하를 보내어 대신 병력을 이끌게 하였다. 문예를 불러들여 죽일려고 하니, 문예가 두려워하여 무리를 버리고, 당으로 도망하였다. 당나라 현종이 맞아들여 우효위장군으로 삼자, 왕이 마문궤와 총물아를 보내어, 문예의 죄상을 말하여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당은 문예를 안서에 거하게 하였다. 호보가 말하길, “문예가 궁하여 우리에게 돌아왔으니 죽이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이고, 이미 영남으로 떠났습니다.”하니 문궤와 물아가 머뭇거리자, 홍려소경 이도수와 본디 내렸던 글을 다시 보냈다.

 

王知之 上書言 大國示人以信 豈有欺誑之理. 今聞門藝不向嶺南 伏請依前殺却.” 玄宗怒道邃復不能督察官屬 致有漏泄 左除道邃曹州刺史 復同州刺史 暫遣門藝詣嶺南以報之. 王望門藝不已 密遣使入東都募客 刺門藝於天津橋南 門藝格之得不死. 玄宗勅河南 捕刺客悉殺之.

왕지지 상서언 대국시인이신 이유기광지리 금문문예불향영남 복청의전살각.” 현종노도수복불능독찰관속 치유누설 좌재도수도두자사 복동주자사 잠견문예지영남이보지. 왕망문예불기 밀견사입동도모객 자문예어천진교남 문예격지득불사. 현종칙하남 포자객실살지.

 

왕이 이를 알고 대국에 상서하여 대국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이미 다스림에 속임이 있습니다. 지금 문예가 영남으로 가지도 않았다하니 다시 엎드려 청하노니 전에 말한대로 죽여없애기 바랍니다.” 현종이 화가나서 현종이 이도수와 원복이 관리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여 기밀이 누설된 것에 화가 나서 이도수를 조주자사로, 원복은 택주자사로 좌천시켰다. 또 문예를 잠시 영남으로 보낸 뒤에 그 사실을 발해에 알렸다. 왕이 문예가 그러지 않음을 보고 몰래 동도에서 저객을 모집하여 천진교 남쪽에서 문예를 찌르게 하였으나 문예가 대적하여 죽지 않았다. 현종이 하남지역에 칙령을 내려 자객을 모조리 죽이라 하였다.

 

大野勃(대야발) 大宏臨(대굉림) 大新德(대신덕)

 

野勃高王弟也 宏臨文王世子也 新德宣王世子也.

야발고왕제야 굉림문왕세자야 신덕선왕세자야.

 

야발은 고왕의 아우이고 굉림은 문왕의 세자이고 신덕은 선왕의 세자이다.

 

 

任雅相(임아상) 張文休(장문휴)

 

雅相武王舅也 文休武王大將也.

아상무왕고야 문휴무왕대장야.

 

아상은 무왕의 처남이고 문휴는 무왕의 대장군이다.

 

 

大常淸(대상청) 大貞翰(대정한) 大淸允(대청윤)

 

貞元七年正月 文王使常淸朝 唐授衛尉卿同正 還國. 貞翰淸允 皆文王時王子也 貞翰貞元七年八月朝唐 請備宿衛. 淸允貞元十年正月朝唐 唐授右衛將軍同正 其下三十餘人拜官有差.

정원칠년정월 문왕사상청조 당수위위경동정. 환국 정한청윤 개문왕시왕자야, 정한정원칠년팔월조당 청비숙위. 청윤정원 10년정월조당 상수우위장군동정 기하삼십여인배관유차.

 

정원 7년정월 문왕이 상청을 조례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당이 이를 받아들여 위위서경동정직을 하사받고 환국하였다. 정한과 청윤은 모두 문왕 때의 왕자로 정한은 정원 78월 당나라 조례에 참여 비숙위를 청하였고, 청윤은 정원 10년 정월 당나라 조례에 참석하니 당이 우위장군동정을 수여하고, 그 아래 30여명도 차등을 두어 보직을 주었다.

 

大能信(대능신) 茹富仇(여부구)

 

能信康王姪也 富仇官虞侯婁番長都督 貞元十四年 康王遣使朝唐 是年十一月 唐授能信左驍衛中郞將 授富仇右武衛將軍 放還國.

능신강왕질야 부구관우후누번장도독 정원십사년 강왕견사조강 시년 십일월 당수능신좌효위중낭장 수부구우무위장군. 방환국.

 

능신은 경왕의 조카이다. 부구는 관우후누번장도독으로 정원 14년 강왕이 사신으로 당나라 조례에 파견하였다. 이해 11월 당이 능신에게 좌효위중랑장을 수여하고 부구에게 우무위장군을 수여하였다. 환국하였다.

 

大叡(대예)

 

長慶四年二月 宣王遣叡等五人朝唐 請備宿衛.

장경사십이년 선왕견예등오인조당 청비숙위.

 

장경 42월 선왕이 대예와 5명을 당에 파견하고, 비숙위를 청하였다.

 

大明俊(대명준) 高寶英(고보영) 大先晟(대선성)

 

明俊彛震時王子也 大和六年 王遣明俊等朝唐. 寶英官同中書右平章事 大和七年正月 王遣朝唐 謝冊命 因遣學生三人 請赴上都學問 先遣學生三人. 事業稍成請歸本國 唐許之. 先晟亦彛震時王子也 是年二月 王遣先晟等六人朝唐. 唐詩人溫庭筠送渤海王子歸本國詩曰 疆理雖重海 車書本一家 盛勳歸舊國 佳句在中華 定界分秋漲 開帆到曙霞 九門風月好 回首是天涯.

명준이진시왕자야 대화육년 왕견명준등조당 보영관동중서우형장사 대화칠년정월 왕견조당사책명 인견학생감인 청부상도학문 선견학생삼인 사업초성청귀본국 당허지. 선성역이진시왕자야 시년이월 왕견선성등육인조당. 당시인온정균송발해왕자귀본국시왈 강리수중해 거서본일가 성훈귀구국 가구재중화 정계분추창 개범도서하 구문풍월호 회수시천애.

 

명준은 이진(발해 11대 왕)때의 왕자이다. 대화(당나라 문종 연호) 6년 왕이 명준등을 당나라 조례에 파견하였다. 보영은 관동중서우평장사이다. 대화 7년정월 왕이 당에 파견하여, 학생 세명을 보내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도록 배울수 있게 하는 책명을 받기 위해 보냈다. 일이 점점 이루어지자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당이 이를 허락하였다. 선성은 역시 이진때의 왕자이고 이해 2월 왕이 선성등 6명을 당에 파견하니 당나라 시인 온정균이 발해왕자가 본국으로 돌아갈때 시를 보내니 말하길, ”경계를 가르는 이치가 바다만큼 멀고 수레 가득 책이 일가를 이루는 공을 이루고고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니... 좋은 글들은 중화에 있으니 물에도 水界가 있는 법, 이른 아침을 맞아 돛을 올려라 구문에 풍월이 좋을 것이니 머리를 돌리면 벼랑끝이라.

 

-이제 격이 맞는 경지를 이뤘는데 돌아간다니 서운하지만 가면 왕으로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니 다시 돌아보지 마시오.... 정도로 해석된다.

 

* 구문(九門): 옛날 천자(天子)는 구문(九門)이 있었으니, 1은 노문(路門), 2는 응문(應門), 3은 치문(雉門), 4는 고문(庫門), 5는 얼문(臬門), 6은 성문(城門), 7은 근교문(近郊門), 8은 원교문(遠郊門), 9는 관문(關門)이다. -예기(禮記)』 「월령(月令).

 

高元固(고원고)

 

元固訪唐進士徐寅於閩中 爲道本國人. 以金書寅斬蛇劒御溝水人生幾何三賦 列爲屛障. 寅喜而贈詩 稱爲渤海賓貢高元固先輩 其詩曰 折桂何年下月中 閩山來問我雕蟲 宜銷金翠書屛上. 誰把蒭蕘過日東 剡子昔時遭孔聖 由余往代諷秦宮. 嗟嗟 大國金門土 幾箇人能振素風?”

원고방당진사서인어민중 위도본국인 이금서인참사검어구수인생기하삼부 열위병장 인희이증시 칭위발해빈공고원고선배 기시왈 절계하년하월중 민산래문아조충 의소금취서병상. 수파추요과일동 담자석시조공성 유어왕대풍진궁. 차차 대국금문토 기개인능진소풍.

 

고원고는 민중 지방에 있던 당나라 진사 서인을 방문하였는데, 본디 발해 사람이다. 서인에게 그가 지은 참사검, 어구수, 인생기하의 3개 부를 금으로 써서 병풍으로 만들어 전하였다. 서인이 기뻐하며 시를 지어 주었는데, 여기서 그를 발해사람으로 급제한 고원고 선배라 칭하며 그 시에서 노래하길 언제 계수나무 가지를 꺾어 달속으로 내려왔나, 민산으로 나를 찾아와 초라한 글재주를 묻네 마땅히 금을 녹여 아름다운 글씨를 병풍에 썼으니 누가 보잘 것 없는 내 시를 해 뜨는 동쪽으로 가져가려나 담자는 옛날 공자를 만났고, 유여는 전에 진나라 궁궐을 풍자했었지, 아아, 큰 나라 대궐문의 흙 먼지같은 사람으로 능히 가을바람처럼 될 수 있을까?”

 

其曰先輩曰折桂 已成進士之稱也 徐寅中乾寧進士 時依王審知 元固當諲譔詩人.

기왈선배왈절계 이성진사지칭야 서인중건녕진사 시의왕심지 원고당인선시인.

 

그가 말하는 이른바 선배니 절계니 하는 것은 이미 진사가 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서인은 건녕 연간(894~898)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당시에 왕심지(민의 태조 왕심지)에 의탁하고 있었으므로, 고원고는 대인선(마지막 발해왕) 때의 사람에 해당한다.

 

 

大元兼(대원겸)

 

諲譔侄也 官學堂親衛. 後唐同光二年 王遣朝唐 試國子監丞.

인선질야 관학당친위. 후당동삼이년 왕견조당 시국자감승.

 

인선왕의 조카로 학당친위였다. 후당 동광 2(924)에 왕이 그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당나라에서 시국자감승의 벼슬을 주었다.

 

高仁義 德周 舍那婁 高齋德(고인의, 덕주, 사나루, 고재덕)

 

仁義官寧遠將軍郎將 德周游將軍果毅都尉 舍那婁別將 齋德首領.

인의관영원장군낭장 덕주유정군과의도위 사나루별장 재덕수령

 

고인의는 관직이 영원장군낭장이었고, 덕주는 유장군과의도위이고, 사나루는 별장이었고, 고재덕은 수령이었다.

 

武王時同使日本 着蝦夷境 仁義以下十六人被殺害 齋德與八人走出羽國僅免. 致國書 與其使朝臣 蟲麻呂俱來. 獻綵帛一十疋 綾一十疋 絁二十疋 絲一百鉤綿一百屯.

무왕시동사일본 착하이경 인의이하십육인피살해 제덕여팔인주출우국근면. 치국서 여기사조신 충마여구래. 헌채백일십필 능일십필 시이십필 사일백구 면일백둔.

 

무왕때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하이 지역에 도착하여 고인의 이하 열 여섯 명이 살해 되고, 고재덕과 여덟 명은 출우국으로 도망하여 겨우 살았다. 국서를 바치고 일본 사신인 조신 충마려와 함께 돌아왔다. 이때 일본은 채백 열 필과 능(무늬가 있는 비단) 열 필, (거친 명주) 이십 필, 명주실 일백 구, 면 일백 둔을 바쳤다.

 

胥婁德 已珍蒙 已閼棄蒙( 서루덕 이진몽 이알기몽)

 

婁德官若忽州都督忠武大將軍 珍蒙雲麾將軍 棄蒙首領 文王時同使日本 婁德船覆 與棄蒙等四十人俱死 倭皇御太極殿 觀珍蒙射 又御中宮 使珍蒙奏本國樂聽之 附獻美濃絁三十疋絹十疋絲一百五十鉤 調綿二百屯. 初日本人朝臣廣成等朝唐回 從蘇州入海 漂着崐崙國 多被殺執. 廣成與八人 僅免復歸唐 從登州入海 到渤海界 王令隨婁德等歸國.

누덕관약홀주도독충무대장군 진몽운휘장군 기몽수령. 문왕시동사일본 누덕선복 여기몽등사십인구사. 왜황어태극전 관진몽사 우어중궁 사진몽주본국악청지 부헌미농시삼십필견십필사일백오십구 조면이백둔. 초일본인조신광상등조당회 종소주입해 표착곤륜국 다피살집. 광성여팔인근면복귀당 종등주입헤 도발해계 왕영수누덕등귀국.

 

누덕은 홀주도독충무대장군 격이었고 진몽은 운휘장군이고 기몽은 수령이다. 문왕때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다. 누덕은 배가 뒤집히어 기몽등 사십여명이 함께 죽었다. 왜황이 태극전에서 진몽의 궁술을 보았고, 또 중궁에서 진몽이 본국의 음악을 연주했다. 미농의 거친 명주 30, 명주 열필, 실 백오십구, 조면(손질된 솜) 이백둔을 받쳤다. 처음 일본인 신하 광성등이 당에 입조하고 돌아오다 소주에서 뱃길로 들어갔는데 떠돌다 곤륜국에 들어가 많이 죽고 잡히었다. 광성과 8명이 겨우 살아 당으로 돌아갔다. 등주에서 뱃길로 발해의 지역에 이르니, 왕이 누덕등과 함께 돌아가게 했다.

 

* 누덕은 이미 죽었으니.... 그 일행으로 봄이...

 

慕施蒙(모시몽)

 

官輔國大將軍 文王時 率七十五人使日本 以王旨問十餘年無使之故 倭皇答書援高句麗舊記 責國書違例.

관보국대장군 문왕시 솔칠십오인사일본 이왕지문십여뇬무사지고 왜황답서수고구려구기 책국서위예.

 

관직은 보국대장군로 문왕때에 75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서 왕이 10여년간 사신을 보내지 않음을 물으니, 왜황이 답서에 고구려 옛기록을 인용하여 국서에 이런 예가 없다 책하였다.

 

楊承慶 楊泰師 馮方禮(양승경 양태사 풍방례)

 

承慶官輔國將軍 泰師歸德將軍 方禮判官 文王時同使日本. 初日本使朝臣田受等 來問大唐消息 歸言於倭皇曰 天寶十四載歲次乙未十一月九日 御史大夫兼范陽節度使安祿山 擧兵作亂 自稱大燕聖武皇帝 改范陽爲靈武郡 其宅爲潛龍宮 年號聖武 留其子安卿緖 知范陽郡事 自將精騎二十餘萬南下 直入洛陽 署置百官. 天子遣安西節度使哥舒翰 將三十萬衆 守潼津關 使大將封常淸 將十五萬衆 別圍洛陽.

승경관보국장군 태사귀덕장군 방례판관 문왕시동사일본. 초일본사조신전수등 래문대당소식 귀언어왜황왈 천보십사재세차을미십일월구일 어사대부범양절도사안록산 거병작란 자칭대연성무황제 개범영위영무군 기택로잠룡궁 연로성무. 유기자안경서 지범영군사 자장정기이십여만남라 직입낙양 서치백관. 천자견안서절도사가서한 장삼십만중 수동진관 사대장봉상청 장십오만중 별위낙양.

 

승경은 보국장군이고 태사는 귀덕장군 방례는 판관이다. 문왕때에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처음 일본사신 전수등이 와서 당이 쇠하고 있음을 물었고 돌아가 왜왕에 말하길, 천보 14년에서 다음 을미 119일까지 어사대부범양절도사인 안록산이 병사로 난을 일으켜서 스스로 대연성무황제라 칭하고 범양을 영무군으로 고치고, 집을 잠용궁으로 삼고 년호를 성무라 하니, 그 아들 안경서가 범양군을 다스리며 기병 20여만으로 남하하여 직접 낙양에 들어와 관청과 신하를 두니 천자가 안서절도사 가서한에게 30만을 주어 파견하여 동진관을 지키게 하고 대장을 상청에 봉하고 15만으로 낙양을 따로 지키게 하였다.

 

天寶十五載 祿山遣將軍孫孝哲等 率二萬騎攻潼津關 哥舒翰壞潼津岸墜黃河. 絶其通路而歸 孝哲鑿山開路引兵入至新豐. 六月六日天子游于劒南. 七月甲子 皇太子璵 卽皇帝位于靈武都督府 改元至德矣.

천보십오재 녹산견장군손효철등 솔이만기공당진관 가서한괴동진안추황하 정기통로이귀 효철착산개로인병입지신풍. 유월육일천자여우검남 칠월갑자 황태자여 즉황제위우영무도독부 개원지덕의.

 

천보 15년에 녹산이 장군 손효철등으로 20000 기병으로 동진관을 공격하니 가서한이 동진 관문이 무너져 황하에 떨어졌다. 돌아갈 길이 끊기니 효철이 산을 뚫어 길을 내어 병사가 신풍에 이르니 66일 천자가 검남으로 달아났다. 7월 갑자일 황태자 가 영무도독부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지덕이라 하였다.

 

並言安東都護王志玄 聘渤海 天子賜渤海勅勅書事. 倭皇下令于太宰府曰 安祿山者是狂胡狡竪也 違天起逆 事必不利 疑其不能西 必還掠海東. 大貳吉備朝臣眞備 俱是碩學 委以重.任 宜知此狀 預設奇謀 縱使不來 儲備無悔. 其所謀上策及應備襍事 一一俱錄報來. 至是承慶等至日本 倭皇授承慶正三位 泰師從三位 方禮從五位 下賜錄事以下十九人 .

병언안동도호왕지현 빙발해 천자사발해칙서사 왜황하영우태재부왈 안록산자시광호교수야. 위천기역 사필불리 의시불능서 필환약해동. 대이길비조신진비 구시석학 위이중임. 의지차상 예설기모 상사불래 저비무해 기소모상책급응비잡사 일일구록보래. 지시승경등지일본 왜황수승경정삼위 채사족삼위 방례종오위 하사록사이하십구인.

 

안동도호왕 지현이 발해에 화친하니 천자가 발해에 칙서를 보내었다. 왜왕이 태재부(구슈의 관청)에 이르길 안녹산이 지금 미치고 교활하다.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일어나니 일은 반드시 불리하다. 의심하건데 능히 서쪽 정벌이 불가능하면 반드시 해동을 노략질 할 것이다. 대이길비와 사신 진비 둘다 석학이니 중임을 맡긴다. 마땅히 이 상태를 알아 미리 기이한 계략을 만들어 사신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 상책과 잡다한 일들을 준비하여 일일이 기록하여 보고하라. 마침 이에 승경등이 일본에 이르니 왜왕이 승경에게 정 3위를 주고 태사에게 종 3위 방례에게 종 5, 그리고 아래 십구명에게 녹사(하위직)를 하사하였다.

 

仍使忌村全成 隨承慶來 欲自渤海迎其入唐 大使朝臣河淸 獻絹三十疋美濃絁三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錦四疋兩面二疋 纈羅四疋白羅十疋綵百三十疋白錦一百帖.

잉사기촌전성 수승경래 욕자발해영기입당 대사조신하청 헌견삼십필미농시삼십필사이백구면삼백둔면사필양면이필 힐라사필백라십필채백삼십필백면일백첩.

 

이에 사신 기촌전성이 승겸을 따라 발해를 거쳐 당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대 사신 하청이 명주 30필과 미농사 30필 사 200, 300, 비단 4, 양면 2, 힐라 4, 백라 10, 130, 백금(하얀 비단) 100점을 받쳤다.

 

高南甲 高興福 李能本 安貴寶(고남갑 고흥복 이능본 안귀보)

 

南甲官輔國大將軍兼將軍玄菟州刺史兼押衛官開國公. 興福副使 能本判官 貴寶解臂. 文王時同使日本 以中臺牒報曰 迎藤原河淸使總九十九人 大唐祿山思明 前後作亂 內外騷荒 恐被害殘 只遣頭首高元度等十一人. 往迎河淸 卽差此使同爲發遣南甲等與其使陽侯史玲璆俱來. 獻絁三十疋美濃絁三十疋絲一百鉤 綿三百屯 能本後爲王新福副 再使日本.

남갑관보국대장군겸장군혀노주자사겸압위관개국공. 흥복부사 능본판관 귀보해비. 문왕시동사일본 이중대첩보왈 영등원하청사총구십구인 대당녹산가명 전후작란 내외소황 공피해잔 지견두수고원조등십일인. 왕영하청 즉차차사동위발견.” 남갑등여기사양후사영구구래. 헌시삼십필미농시삼십필사일백구 면삼백필 능본후위왕신복부 재사일본.

 

고남갑의 관직은 보국대장군 겸 장군, 현토주자사 겸 압위관, 개국공이었고, 고흥복은 부사, 이능본은 판관, 안귀보는 해비였다. 문왕 때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는데, 가지고 간 중대보고서에서 등원하청을 맞이하러 보내는 사신이 모두 99명인데, 당나라에서는 안녹산이 난을 일으키고 이어서 사사명이 역시 난을 일으켜 안팎이 소란하고 황폐하니 혹시 사신들이 피해를 당할까 염려된다. 그래서 고원도를 필두로 11명만 당나라에 보내서 등원하청을 맞이하도록 하는 동시에 이 사신단을 구성하여 일본으로 파견시킨다.”고 보고하였다. 고남갑 등이 일본 사신 양후사영구와 함께 발해로 돌아왔다. 발해왕에게 시30, 미농시 30, 명주실 200, 300둔을 바쳤다. 이능본은 나중에 왕신복의 부사가 되어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楊方慶(양방경)

 

文王時 以賀正使朝唐 日本迎河淸使高元度隨往.

문왕시 이하정사조당 일본영하청사고원도수왕.

 

문왕때 신년 하례하기 위해 당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에 영하청사로 간 고원도를 수행했다.

 

王新福 楊懷珍 達能信(왕신복 양회진 달능신)

 

新福官紫綬大夫行政堂左允開國男. 懷珍判官 能信品官著緋. 文王時率二十三人 同使日本 新福爲倭皇言唐事曰 李家太上少帝幷崩 廣平王攝政 年穀不登 人民相食. 史家朝議稱聖武皇帝 性有仁恕 人物多附 兵鋒甚强 無敢當者. 鄧州襄陽已屬史家 李家獨有蘇州 朝參之路固未易通.” 是行也 李能本爲副.

신복관자수대부정당우윤개국남. 회진판관 능신품관저비. 문왕시솔이십삼인 동사일본. 신복위왜황언당사왕 이가태상소제병붕 광평왕섭정 년과부등 인민상식 사가조의칭성무황제 성유인서 인물다부 병봉심강 무감당자. 등주양양이속사가 이가독유소지 도참지로고이역통.” 시행야 이능본위부.

 

왕신복은 자수대부로 신정당좌윤개국남이다. 양회진은 판관이고 달능신은 품관저비이다. 문왕때 23명을 거느리고 일본에 함께 갔다. 신복이 왜황에게 당의 일을 말하길 이씨집안(당나라 왕조)의 태상()과 소제(세자)가 함께 죽어 광평왕(후일 代宗)이 섭정을 하고 있다. 이 해 곡식이 익지않아 백성이 서로 잡아먹는다. 사사명 일파가 의논하여 자칭 성무황제라 칭하니 성품이 인자하고 용서하는 성품이라 인물들이 몰려들고 병사들은 강하니 당할 자가 없다. 등주, 양양이 이미 사씨(사사명: 안사의 난을 일으킨)에게 귀속되었고 이가는 홀로 소주에 있어 조례에 참여하러 가는 길이 쉽지않다.”고 말하며 이능본을 부사로 왔다.

 

壹萬福 慕昌拜(일만복 모창배)

 

萬福官靑綬大夫 昌拜副使 文王時率三百二十五人 駕船七十隻 同史日本 着出羽國 倭皇以國書違例 幷信物不受. 萬福再拜據地而泣曰 君者彼此一也 臣等貴國 必當有罪 遂改修國書 代王申謝.” 倭皇授萬福從三位 與王書曰 今者來書頓改文道 日下不註官品姓名 書尾虛陳天孫僭號 且高氏之世 兵亂無休 爲假朝威 彼稱兄弟 今王曾無事故而稱甥 於禮失矣 後歲之使不可更然. 獻美濃絁三十疋絹三十疋絲一百鉤調綿二百屯.” 昌拜卒於日本 萬福與其使武生鳥守俱來 遭風漂着能登國 客主僅免. 日本遣渤海船名能登 以禱于船神有驗 授其船從五位下賜錦冠 其冠錦表絁裏 紫組纓.

만복관청수대부 창배부사 문왕시솔삼백이십오인 가선칭십척 동사일본 착출우국. 왜황이국서위례 병신물불수. 만복재배거지읍왈 군자피차일야 신등귀국 필당유죄 수개수국서 대왕신사.” 왜황수만복종삼위. 여왕서왈 금자래서돈개문도 일하불주관품성명 서미허진천손참호 차고씨지세 병난무류 위가조위 피칭형제 금왕증무사고이칭생 어예실의. 후세지사불가경연 헌미농시삼십필견삼십필사일백구조면이백둔. 창배졸어일본 만복여기사무생조수구래 조충효착능등국 주객근면. 일본견발해선명능동. 이도우선신유험 수기선종오위하사면관 기관면표시리 자조영.

 

만복은 청수대부고 창배는 부사이다. 문왕때 325명을 거느리고 70척의 배를 타고 함께 일본으로 갔다. 출우국에 도착하였는데, 왜황의 국서가 예에 벗어났다고 하여 신물도 받지 않았다. 만복이 다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울며 말하길 임금이라는 것은 피차 한가지입니다. 신등은 귀국에 반드시 죄가 있으니, 국서를 고치겠습니다. 왕을 대신하여 사죄합니다.” 왜황이 만복에게 종삼위를 내리고 왕의 서에 말하길 이자가 서를 가지고 와서 글을 고쳤다. 이제부터는 관품성명을 주하지 말라. 서의 끝에 천손임을 참람되게 늘어 놓지 말라. 또 고씨의 세상에는 병란이 끝이지 않았는데 거짓으로 알현하여 협박하였는데, 이를 형제라 칭하니 이제 왕이 옛일로 생질이라 칭하지 말아라. 이는 예에 어긋나는 것이다. 후세의 사신부터는 가히 고치지 말아라.” 미농시 삼십필과 명주 삼십필 사 일백구 조면 이백둔을 바친다. 창배가 일본에서 죽었다. 만복이 일본의 사신 무생조수오 함께 왔는데, 바람을 만나 떠돌다 능등국에 도착하여 겨우 손님으로 주인에게 의탁하였다. 일본이 보낸 발해의 배 이름이 능등이었다. 배의 신에게 효험이 있어 빌었는데 배에 5위의 벼슬을 하사하고 면관을 주었다. 그 관은 겉은 면이고 속은 시(비단)이고 자주색 끈으로 되어 있다.

 

烏須弗(오수불)

 

文王時使日本 着能登國 國司問故 受拂以書報曰 渤海日本久未好隣 往來朝聘如兄如弟 近年日本內雄等住渤海國 學問音聲 却返本國. 今經十年 未報安否 由是差大使壹萬福等 遣向日本國 擬於朝參 稍經四年未返本國. 更差大使烏須弗等四十人 面奉詔旨 更無餘事 所附進物及來書 並在船內 大政官以表函違例不受.” 又曰 渤海使取此道而來 前有禁斷 自今以後 宜依舊例 從筑紫道來.”

문왕시사일본 착능동국 국사문고 수불이서보왈 발해일본구미호린 왕래조빙여형여제 근년일본내웅등왕발해국 학문음성 각반본국. 금경십년 미보안부 유시차대사일만복등 견향일본국 의어조참 초경사년미반본국. 경차대서오수불등사십인 면봉조지 경무여사. 소부진물급래서 병재선내 대정관이표함위례불수.” 우왈 발해사취차도이래 전유금단 자금이후 의의그례 종축자도래.”

 

문왕때의 일본 사신이다. 능등국(노토국)에 도착하니 관리들이 이유를 물었고 수불이 글로써 대답하여 말하길, “발해와 일본은 오래 되었지만 좋은 이웃국가는 아니다. 오고가고 알현하고 찾아감이 형과 같고, 아우와 같아 근년에는 일본 내웅등이 발해국에 거주하면서 음악을 배우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십년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하여 이로 말이암아 차대사 일만복등을 일본국에 파견하여, 알현하라고 했는데, 4년동안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아, 다시 차대사 오수불등 40명으로 왕의 글을 받들어 왔어도 별다른 일 없고 보낸 물건이나 책들이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는 이유가 대정관의 상자에 예가 없다 표시하여 받지 않음이다.” 또한 말하길 발해의 사신이 이길을 취하여 오니 전에는 끊어짐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옛 법에 의지함이 마땅하니, 축자도(?)를 통해 오라.” 면서 저지하였다.

 

史都蒙 高祿思 高鬱琳 高淑源 史道仙 高珪宣(사도몽 고록사 고울림 고숙원 사도선 고규선)

 

都蒙官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 祿思大判官 鬱琳少判官 淑源判官 導線大錄事 珪宣少錄事. 文王時率一百八十七人 同使日本 赴王妃喪 兼賀倭皇卽位. 遭風漂沒 僅存四十六人 淑源及少錄事一人亦死.

도몽관헌가부대부사빈소령개국남 녹사대판관 울림소판관 숙원판관 도선대녹사 규선소녹사. 문왕시솔일백팔십칠인 동사일본 부왕비상 겸하왜황즉위. 조충표몰 근존사십육인 숙원급소녹사일인역사.

 

도몽은 대부사빈소령개국남의 벼슬이고, 록사는 대판관이고, 울림은 소판관, 숙원은 판관, 도선은 대록사, 규선은 소록사이다. 문왕때에 187명을 거느리고 함께 일본의 사신으로 가서 왕비의 죽음을 알리고, 겸하여 왜황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풍랑을 만나 침몰하여 겨우 46명만 살아남았는데, 소녹사 고숙원도 역시 죽었다.

 

日本人問烏須弗歸時 大政官處分 渤海使宜依舊例向太宰府 不得取此路而來 今違約束 其事如何? 都蒙等對曰 實承此旨 故都蒙等發自獘邑南府吐號浦 西指對馬島竹實之律 疑卽津 而海中遭風 着此禁境 失約之罪更無所避.” 日本又欲以十六人別留海岸 都蒙曰 此猶割一身而分背 失四體而蒲伏.” 日本乃聽同入 倭皇御重閣 觀騎射 都蒙與焉. 與其使朝臣殿繼俱來 獻絹五十疋, 絲二百鉤, 綿三百屯. 都蒙請加附 又獻黃金小一百兩, 水銀大一百兩 金漆一缶, 漆一缶, 海石榴油一缶, 水精念珠四貫 檳櫛扇十枚. 賻王后絹二十疋, 絁二百疋, 綿二百屯.

일본인문오수불귀시 대정관처분 발해사의의그례향태재부 부득취차로이래 금위약속 기사여하? 도몽등대왈 실승차지 고도몽등발자폐읍남부토호포 서지대마도죽실지율 의즉진 이해중조풍 착차금경 실약지죄경무소피.” 일본우욕이십육인별유해안 도몽왈 차유할일신이분배 실사체이포복.” 일본내청동입 왜황어중각 관기사 도몽여언. 여기사조신전계수래 헌견오십필 사이백구 면삼백둔. 도몽청가부 우헌황금소일백량, 수은대일백량, 금칠일부, 칠일부, 해석류유일부,수정염주사관 빈즐선십매. 부왕후견이십필 시일백필 면이백둔.

 

일본사람이 묻기를 오수불이 돌아갈 때 대정관에 나누어어 발해의 사신이 옛법대로 태제부를 향하여 이길로 오지 않으니 이제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일을 어찌된 것입니까? 도몽등이 대답하여 말하길, “그러려고 했으나 도몽등이 폐읍 남부 토호포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대마도 죽실율(율이 진일까 의심한다.)로 가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나, 이 금지된 지역에 오게 된 것이니, 약속을 어긴 죄는 불가피한 것입니다.”하였다. 일본이 또한 열여섯 사람을 나누어 해안에 머물게 하고자 하니, 도몽이 말하길, “이것은 마치 몸을 나누고, 등을 쪼개고 사지를 잘라 몸뚱이만 남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일본이 이 말에 동의하고 함께 들어와 왜황과 전각에 올라 기대어 기마궁수의 사격을 보았다. 도몽은 조례에 참가하는 사신 전계와 함께 돌아오니 명주 오십필, 실 이백구, 면 삼백둔을 공물로 가져온다기에 도몽이 모자란다고 하자 황금작은거 일백량, 수은 큰 것 일백량, 금칠() 일부(항아리), 칠 일부, 해석류(동백기름)유 일부, 수정염주 네관, 빈즐선 십매, 왕후의 부의에 명주 이십필, 시 이백필, 면 이백둔을 바쳐왔다.

 

張仙壽(장선수)

 

官獻可大夫司賓少令 文王時使日本 以王旨言 朝臣殿繼等失路 漂着遠夷之境 船破 爲造船二艘領歸.” 倭皇內射 先壽與焉.

관헌가대부사빈소령 문왕시사일본. 이왕지언조신전계등실로 표착원이지경 선차 위조선이수영귀 왜왕내사 선수여언.

 

관직은 대부사빈소령이고, 문왕때의 일본 사신이다. 왕의 교지에 따라 조신 전계 일행이 길을 잃고 먼 오랑캐의 지경으로 갔고 배가 부서져 배 두척을 만들어 돌아왔다.”고 전하니 왜황이 자기 탓(內射)이라 하고 선수에 동감했다.

 

高伴粥 高說昌(고반죽 고설창)

 

伴粥押領 說昌通使 文王時同使日本 以國書違例不受 又責不由筑紫道 銕利官人爭坐說昌之上 大政官爲異其班位 伴粥船破 日本給船九隻以歸.

반죽압령 설창통사 문왕시동사일본 이국서위례불수 우책불유축자도 철리관인쟁좌설창지상 대정관위이기반위 반죽선차 일본급선구척이귀.

 

반죽은 압령이고, 설창은 통사이다. 문왕 때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국서가 전례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축자도를 경유하지 않음을 탓하니 철리관 관리가 설창과 자리를 다투자 대정관이 자리를 떨어져 앉혔다. 반죽의 배가 부서지니 일본이 배 9척을 주어 돌아왔다.

 

呂定琳(여정림)

 

官庭諫大夫工部郎中 康王時率六十人使日本. 漂着夷地志理波村被掠 人多散亡. 出羽國言狀 倭皇置越後國供給 定琳置在堂學問日本僧永忠書於倭皇 倭皇附答書.

관정간대부공부낭붕 강왕시솔육십인사일본. 표착이지지리파촌피략 인다산망. 출우국언상 왜황치월후국공급 정림치재당학문일본승영충서어왜황 왜황부답서.

 

벼슬은 광간(匡諫)대부·공부랑중이다. 강왕 때에 60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하여 오랑캐 땅인 지리파촌에 도착하였으나, 오량캐의 습격을 받아 사람들 다수가 흩어지고 죽었다. 출우국에서 상황을 보고하니, 왜황이 이들을 월후국에 안주시키고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도록 조치하였다. 여정림은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일본 승려 영충의 편지를 왜황에게 바쳤고, 왜황이 답서를 건네주었다.

 

大昌泰(대창태)

 

官慰 疑卽衛 軍大將軍左熊衛都將上柱國開國子 康王時使日本 倭皇御太極殿引見 爲减四拜爲二拜不拍手 又構綵殿以享之 渤海使舶 多着能登國 倭修飾其停宿之處.

괸위 의즉위 군대장군돠웅위도장상주국개국자 강왕시사일본 왜황어태극전인견 위감사배위이배불박수 우구채전이형지 발해사박 다착능등국 왜수식기정숙지처.

 

관직은 위군(는 곧 로 의심된다.)으로 대장군좌웅위도장상주국개국자이다. 강왕 때 일본 사신으로 왜황이 태극전에서 만나는데 네 번 절하던 것을 두 번 절하고 박수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구채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발해의 사신들이 능등국으로 많이 오니 왜국에서 그 머무는 숙소를 꾸미었다.

 

高南容 高多佛 此下七人不知何王時(고남창, 고다불, 이하 일곱명은 어느 왕때인가를 알지 못한다.)

 

南容再使日本 其國或宴於鴻臚館 或宴於朝集院 與其使宿彌東人俱.來 東人以國書不據 棄之而去. 多不以酋領隨 南容脫留越前國 倭置之越中國給食 使習語生等學渤海語.

남용재사일본 기국역과어폴려관 혹연어조집원 여기사숙미동인구래. 동인이국서불거 기지이거. 다불이추영수 남용탈유월전국 왜치지월중국급식 사습어생등학발해어.

 

남용은 두 번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그 나라는 홍려관에서 연회를 하거나, 혹은 조집원에서 연회를 하였다. 그 사신 숙미동인과 함께 돌아왔다. 동인이 국서를 가지지 않고 이를 버리고 갔다. 고다불이 우두머리로 동행했는데 남용이 무리를 이탈해 월중국에 머물렀다. 왜국에서 월중국에 머물도록 지원하며 언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발해어를 배우게 했다.

 

王孝廉 高景秀 高莫善 王昇基(왕효렴 고경수 고막선 왕승기)

 

孝廉大使 景秀副使 莫善昇基判官 同使日本 倭皇授孝廉從三位 景秀正四位下 莫善昇基正五位下 又賜錄事以下祿 唐越州人周光翰言升則等 自日本隨使者來.

효렴대사 경수부사 막선승지판군 동사일본 왜황수효렴종삼위 경수정사위하 막선승기정오위하 우사녹사이하녹 당월주인주광한언승즉등 자일본수사자래.

 

효렴은 대사이고 경수는 부사, 막선과 승기는 판관으로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왜황이 효렴에게 종삼위를 하사하고, 경수는 정사위, 막선과 승기에게 정오위를 하사하였다. 또한 녹사에게는 녹봉을 하사하였다. 당나라 월주 사람 주광한과 언승칙등이 일본의 사신을 따라 왔다.

 

王文矩(왕문구)

 

使日本 倭皇於豐樂殿 宴五位以上 文矩爲擊毬 倭皇賜綿二百屯.

사일본 왜황어풍악전 연오위이상 문구위격구 왜황사금이백둔.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왜황이 풍락전에 행차하여 5위 이상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문구가 격구 경기를 해 보였고 왜황이 면 이백 둔을 하사하였다.

 

衛鈞(위균)

 

官銕州刺史 遼天顯元年正月 忽汗城破 七月鈞城守 遼大元帥堯骨帥師來攻 乙丑城陷.

관철주자사 요천현원년정월 홀한성파 칠월균성수 요대원수요골수사래공 을축성함.

 

관직은 철주자사였다. 요나라 천현 원년(926) 정월, 홀한성이 함락되었는데, 칠월에 위균이 철주성을 지키자, 요나라 대원수 요골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와서 을축일에 성이 함락되었다.

 

大素賢(대소현)

 

官司徒 忽汗城破 素賢降遼 遼拜爲東丹國次相 太宗會同三年 東京宰相耶律羽之言其貪 墨見黜.

관사도 홀한성파 소현항요 요배위동단국차상 태종회동삼년 동경재상야율우지언기탐 묵견출.

 

관직이 사도였다. 홀한성이 함락되자 대소현이 요나라에 항복하였다. 요나라가 그들 동단국 좌차상에 임명하였다. 태종 회동 삼년(940) 동경의 재상 야율우지가 그가 탐욕스럽다고 하여 쫓아냈다.

 

高模翰(고모한)

 

一名松 有膂力善騎射 好讀兵 忽汗城破 避地高麗. 高麗王妻以女 因罪亡歸遼 屢立戰功 官至中臺省左相 封悊郡開國公 遼史自有傳.

일명송 유여력선기사 호독병 홀한성파 피지고려 고려왕처이녀 인죄망귀요 누립전공 관지중대성좌상 봉철군개국공 요사자유전.

 

일명 고송이라고도 하였다. 힘이 셌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고, 병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홀한성이 함락되자 고려로 피신하였다. 고려왕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지만, 죄를 지어 다시 요나라로 도망하였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관직이 중대성 좌상에까지 올랐고, 철군개국공에 봉해졌다. 요사에 그의 전기가 있다.

 

諲譔諸臣史失名者(인선의 여러 신하로 역사에서 이름을 잃어버린자,)

 

遼天顯元年正月庚申 扶餘城陷 守將死之.

요천현원년정월경신 부여성함 수장사지.

 

요나라 천현 원년(926) 정월 경신일에 부여성이 함락되자 이곳을 지키던 장수가 전사 하였다.

 

遼天顯元年正月丙寅 王使老相統兵三萬禦遼. 遼先鋒惕隱安端 北部宰相蕭阿古只將萬騎至. 老相戰敗降于遼 遼拜爲東丹國右大相.

요천현원년정월병인 왕사노상통병삼만어요 요선봉척은안단 북부재상소아고지장만기지 노상전패항우요 요배위동간국우대상.

 

요나라 천현 원년 정월 병인일에 왕이 늙은 재상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요나라에 맞서게 하였다. 요나라의 선봉군이었던 척은 안단과, 북부재상 소아고지가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왔다. 늙은 재상은 그들과 싸워 패하여 요나라에 항복하였고, 요나라는 그를 동단국 우대상에 임명하였다.

 

遼天顯元年二月庚寅 安邊鄚頡南海定理四府節度使 皆降于遼.

요천현원년이월경인 안변막힐남해정리사부정도사 개항우요.

 

요나라 천현 원년 이월 경인일에 안변부, 막힐부, 남해부, 정리부의 네 절도사가 모두 요나라에 항복하였다.

 

遼天顯元年三月 安邊鄚頡定理三府復城守 遼惕穩安端帥師來攻. 丁丑三府皆敗 壬午安邊將二人死之.

요천현원년삼월 안변막힐정리삼부복성수 요척은안단수사래공. 정축삼부개패 임오안변장이인사지.

 

요나라 천현 원년 3월에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가 다시 성을 고수하자, 요나라의 척은, 안단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공격하였다. 정축일에 삼부가 모두 패하였고, 임오일에 안변부 장수 두명을 처형하였다.

 

遼天顯元年五月 南海定理二府復城守 遼大元帥堯骨帥師來攻 六月丁酉 二府皆敗.

요천현원년오월 남해정지이부복성수 요대원수요골수사래공 유월정유 이부개패.

 

요천현원년 오월 남해, 정리 이부가 성을 지키자 요의 대원수 요골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유월 정유일에 두 가 모두 패하였다.

 

長嶺府 自忽汗城始破時 城守不下 遼天顯元年三月戊午 遼夷离畢康黙記左僕射韓延徽 帥師來攻 至七月辛巳遼主殂 述律后決軍國事 八月辛卯城陷.

장령부 자홀한성시파시 성수불하 요천현원년삼월무오 요이금필강묵기좌복사한연뤼 수사래공 지칠월신사요주조 술율후결군국사 팔월신묘성함.

 

장령부는 홀한성이 처음 무너졌을 때 성을 지키어, 함락되지 않았는데 요천현원년 3월 술오일에 요나라의 이리필 강묵기, 좌복사 한연휘등이 부대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7월 신사일에 이르러, 요나라 임금이 죽자 황후 술율이 군사와 국사를 처리했다. 8월 신묘일에 성이 함락되었다.

 

 

忽汗城破後 已降郡縣復城守 諸部蜂起 遼阿古只與康黙記討之. 有遊騎七千自鴨綠府來 勢張甚 阿古只一戰克之 斬二千餘級 進軍破回跋城.

홀한성파후 이항군현복성수 제부봉기 요아고지여강묵시토지. 유여기칠천자압록부해 세장심아고지일전극지 창이천여급 진군파회발성.

 

홀한성이 무너진 후에 이미 항복한 군현들이 다시 성을 지키자 여러 들이 일어났다. 요나라의 아고지가 강목기와 함께 이를 토벌하였다. 압록부의 유격 기병 7000명이 기세등등하였는데, 아고지가 한 번의 전투로 이를 이기고 2000여급을 베니, 진군하던 군사들이 싸움에서 지고 발성으로 되돌아 갔다.

 

申德(신덕)

 

官將軍 高麗太祖八年九月丙申 與其屬五百人 奔高麗 是歲遼攻渤海 明年忽汗城破.

관장군 고려태조팔년구월병신 여기속오백인 분고려 사새요공발해 명년홀한성파.

 

관직은 장군으로 고려 태조 89월 병신일에 500명과 고려에 도망왔다. 이 해에 요나라가 발해를 공격하였고, 다음 해에 홀한성이 점령되었다.

 

大和鈞 大均老 大元鈞 大福謨 大審理(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대심리)

 

和鈞 均老 官禮部卿 元均官司政 福謨官工部卿 審理官左右衛將軍 高麗太祖八年九月庚子 率民一百戶奔麗.

화균 균노 관예부경 원균관사정 복모관공부걍 심리관좌우위장군 고려태조팔년구월경자 솔민일백호분려.

 

화균, 균노의 관직은 예부경이고, 원균은 사정, 복모는 공부경 심리는 좌우위장군으로 고려대조 89월 경자일에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고려로 도망왔다.

 

冒豆干 朴漁(모두간 박어)

 

冒豆干官左首衛小將 漁官檢校開國男 高麗太祖八年十二月戊子 率民百戶奔高麗.

모두간관좌수위소장 어관검교개국남 고려태조팔년십이월무자 솔민백호분고려.

 

모두간은 좌수위소장이고 어는 검교개국남이다. 고려 태조 812월 무자일에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도망왔다.

 

吳興 僧載雄(오흥 승재웅)

 

興官工部卿 高麗太祖十年三月甲寅 與其屬五千人奔高麗 載雄亦與其徒六十人 隨興奔高麗.

흥관공부경 고려태조십년삼월갑인 야기속오천인분고려 재웅역여기도육십인 수흥분고려.

 

오흥은 공부경이고 고려태조 103월 갑인일에 그 무리 5000명과 함께 고려에 도망왔고, 재웅도 역시 무리 60명과 함께 오흥을 따라 고려에 도망왔다.

 

金神(금신)

 

高麗太祖十一年三月戊申 率六千戶奔高麗.

고랴태조십일년삼월무신 솔육천호분고려.

 

고려태조 113월 무신일에 6000호를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大儒範(대유범)

 

高麗太祖十一年七月辛亥 率民奔高麗.

고려태조십일년칠월신해 솔민분골려.

 

고려태조 117월 신해일에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隱繼宗(은계종)

 

高麗太祖十一年九月丁酉 與其屬奔高麗. 太祖引見於天德殿 繼宗等三拜 人謂失禮 太相含弘曰 失土人三拜 古之禮也.

고려태조십일년구월정유 여기속분고려. 태조인견어천덕전 계종등삼배 인위실례 태상참홍왈 실토인삼배 고지례야.

 

고려 태조 119월 정유일 그 무리와 함께 고려에 도망왔다. 태조가 천덕전에서 만나는데, 계종등이 3배를 하자 어떤 사람은 실례라 하자, 태상 함홍이 말하길,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이 삼배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예입니다.” 하였다.

 

洪見(홍견)

 

高麗太祖十二年六月庚申 以船二十艘載人物奔高麗.

고려태조십이년유월경신 이선이십수재인물분고려.

 

고려 태조 126월 경신일 배 20척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에 도망왔다.

 

大光顯(대광현)

 

光顯子道秀 顯宗時爲大將 後孫金就 高宗時爲大將 伐蒙古有功 封永順君 遂爲永順太氏. 其以大爲太 未知在何時.

광현자도수 현종시위대장 후손금취 고종시위대장 벌몽고유공 봉영순군 수위영순태씨. 기이대위태 미지재하시.

 

광현의 아들은 도수이다. 현종 때의 대장이고 후손은 금취로, 고종 때의 대장으로 몽고를 친 공이 있어 영순군에 봉함을 받아 영순태씨를 이루었다. 대씨를 태씨로 한 때는 알수 없다.

 

諲譔世子也 高麗太祖十七年七月 率衆數萬奔高麗. 太祖賜姓名王繼 附之宗籍 特授元甫守白州 以奉其祀. 賜僚佐爵軍士田宅有差. 其後遼遣使 遣高麗太祖駱駝五十匹. 太祖以契丹與渤海嘗連和 忽生疑貳 不顧舊盟 一朝殄滅 此爲無道之甚 不足遠結爲隣. 絶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繁駱駝萬夫橋下 皆餓死.

인선세자야 고려태조십칠년칠월 솔중수만분고려 채조사성명왕계 부지종적 특수원보수백주이봉기사 사료좌작군사전택유차 기후요견사 견고려태조낙차오십필 태조이거란여발해상연화 홀생의이 불고구맹 일조진멸 차위무도지심 부족원결위린. 절기교빙 유기사삼십인우해도 계낙타만부교하 개아사.

 

인선의 세자로 고려 태조 십칠년 칠월 무리 수만을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태조가 성명을 주어 왕계라 하니, 종적에 붙이었다. 특별히 원보수백주를 하사하니 이에 받들어 제사지냈다. 요좌작군사와 밭과 집을 차이를 두어 하사하였다. 그 후에 요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낙타오십필을 보냈다. 태조가 거란고 발해는 일찍이 연결되어 화합하였는데, 갑자기 두마음으로 의심하여 옛 맹세를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멸망시기니 무도함이 성한 것이니, 먼 이웃나라로 족하지 않으니, 그 외교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도 만부교 아래 매어두어 모두 굶어 죽였다.

 

 

陳林(진림)

 

高麗太祖十七年十二月 與其其屬一百六十人奔高麗.

고려태조십칠년십이월 여기기속일백육십인분고려.

 

고려 태조 1712월 무리 160명과 고려에 도망왔다.

 

朴昇(박승)

 

高麗太祖二十一年 率三千餘戶奔高麗

고려태조이십일년 솔삼천여호분고려.

 

고려 태조 213000여호를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崔烏斯 文獻通考曰 烏斯羅(최오사 문헌통고에는 오사라라고 한다.)

 

周世宗顯德初 烏斯與其屬三十人歸周 蓋其酋豪也.

주세종현덕초 오사여기속삼십인귀주 개이추호야.

 

주나라 세종 현덕 초기에 오사가 무리 30명과 주나라 귀순하였는데 모두 우두머리의 집안이었다. 에 돌아왔는데,

 

大鸞河 李勛(대난하 이훈)

 

宋太祖太平興國四年 平晉陽 移兵幽州 鸞河 率小校李勛等十六人 部族三百騎投降 太宗以爲渤海都指揮使 九年春 太宗宴大明殿 召鸞河慰撫久之. 謂殿前都校劉延翰曰 鸞河渤海豪帥 束身歸我 嘉其忠順 夫夷落之俗 以馳聘爲樂 俟高秋戒侯 當與駿馬數十疋 令出郊遊獵 以遂其性.” 因以緡錢十萬並酒賜之.

송태조태평흥국사년 평진양 이병유주 난하 솔소교이훈등십육인 부족삼백기투항. 태종이위발해도지휘사. 구년춘 태종하대명전 소난하위무구지. 위전전도교유연한왈 난하발해오수 속신귀아가기충순 부이락지속 이치빙위요 사고추계후 당여준마수십필 영출교렵 이수기성.” 인이민전십만병주사지.

 

송태조 태평흥국 4(979) 진양을 평정하고 병사를 유주 이동할 때 난하가 소교 이훈등 16명과 부족 300기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태종이 발해도지휘사로 삼았다. 9년 봄 태종이 대명전에서 잔치를 베풀며 난하를 불러 오랫동안 위로 하였다. 대전 앞에서 도교 유연한이 말하길, “난하는 발해의 호걸 장수로 몸을 스스로 결박하여 우리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충성스런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오랑캐의 풍속에 말을 달리며 즐기니, 고추계후를 내리어, 마땅히 준마 십여필을 내리고, 성밖에서 사냥하여 그 성품을 이어가도록 해야 합니다.”하니 엽전 10만 꾸러미와 술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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