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國本紀
太祖神聖大王天授二年 定都于松岳之陽. 二十六年 御製訓要 其略曰 “惟我東方 舊慕唐風 文物禮樂 悉遵其制 殊方異土 人性各異 苟必不同.”
태조신성대왕천수이년 정도우송악지양. 이십육년 어제훈요 기략왈 “유아동방 구모당풍 문물예악 실준기제 수방이토 인성각이 구필부동.”
태조 신성대왕 천수 2년(919)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26년 훈요를 지으셨는데, 대략 이러하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예로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을 따랐다. 그러나 방위가 다르고 풍토가 달라 사람의 성품이 또한 각각 다르니 동화될 필요 없다.”
泰封國王弓裔 其先平壤人 本報德王安勝之遠裔也. 其父剛 從術家言 從母姓爲弓氏.
태봉국왕궁예 기선평양인 본보덕왕안승지원예야. 기부강 종술가언 종모성위궁씨.
태봉국의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으로,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이 술법가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하여 궁씨가 되었다.
先是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奉安勝爲後高句麗王 請援於新羅 新羅王 處之國西金馬渚 後改爲報德王.
선시 고구려수입성인모잠대형 수합잔민 봉안승위후고구령왕 청원어신라 신라왕 처지국서금마저 후개위보덕왕.
이보다 앞서 고구려 수임성 사람 대형(직분 이름) 모잠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 안승을 후고구려왕으로 받들고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가 뒤에 고쳐서 보덕왕이라 하였다.
神文王立 徵報德王爲蘇判. 其族子大文 留金馬渚 謀叛稱王 被誅. 餘衆殺官吏 據報德城又叛 爲新羅所平. 徙其人於國南州郡.
신문왕립 징보덕왕위소판. 기족자대문 유금마저 모반칭왕 피주. 여중살관리 거보덕성우반 위신라소평. 사기인어국남부군.
신문왕이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불러들여 소판을 삼았다. 그의 친척인 대문이 금마저에 남아 모반을 꾀하고 왕이라 일컫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나머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웅거하여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나 신라에게 평정을 당했다. 그곳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 주와 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大震國明宗景皇帝天福九年五月五日 弓裔 生於外家. 其屋上有素光 若長虹上屬天. 新羅日官 望之 以爲將不利於國家 以聞王 嫌之 使人抵其家 殺之. 其母 賂珍寶 請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祝髮爲僧 號善宗. 及壯 放逸如故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대진국명종경황제천복구년오월오일 궁례 생어외가. 기옥상유소광 약장홍상속천. 신라일관 망지 이위장불리어국가 이문왕 혐지 사인저기가 살지. 기모 뢰진보 청포이도찬. 구로양육. 년십여세 축발위승 호선종. 급장 방일여고 불구검승률. 헌지유담기.
대진국 명종 경황제 천복 9년(878)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때 지붕 위에 흰 빛이 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쳐 있었다. 신라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꺼려서 사람을 그 집에 보내 아기를 죽이려 하였다. 그 어미가 진귀한 보물을 주며, 아기를 안고 도망가게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후 온갖 고생을 하며 자식을 길렀다. 궁예 나이 10여 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선종이라 하였다. 장성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고,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다. 모든 일에 담력이 있었다.
嘗持鉢赴齋 有烏啣牙籤落鉢中. 視之有王字 秘不言 頗自負.
상지발부제 유오함아첨락발중. 시지유왕자 비불언 파자부.
일찍이 궁예가 바루를 들고 재를 드리러 가는데 까치가 입에 물고 있던 상아 점대(牙籤: 일본어)를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살펴보니 왕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先自安勝 有勞王事 而新羅不報 反收其土地人民而盡奪. 只以王妹妻之而已. 高句麗遺民 以故累世積怨 怏怏起變而屢敗.
선자안승 유노왕사 이신라불보 반수기토지인민이진탈. 지이왕매처지이이. 고구려유민 이고누세적원 앙앙기변이루패.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공로가 있었으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그 땅과 백성들을 빼았고 왕의 누이동생을 아내를 삼게 하였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여러 대를 걸쳐 원망이 쌓여 앙심을 품고 여러 번 변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至弓裔 見國家衰亂 乘欲聚衆 復祖宗之舊土 洗積世之仇. 乃投竹州賊箕萱 萱侮慢不禮.
지궁예 견국가쇠란 승욕취중 복조종지구토 세적세지구. 내투죽주적기훤 훤모만불례.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곧 궁예는 죽주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그러나 기훤은 아랫사람으로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弓裔 鬱黍不自安 潛結萱麾下元會申烜等爲友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之以事 分兵百騎 使東略州郡 皆降之.
궁예 울서부자안 참결훤휘하원회신훤등위우 투북원적양길. 길선우지 위지이사 분병백기 사동약주군 개항지.
궁예는 답답하고 마음이 편치 못하여, 기훤의 부하인 원회, 신훤등과 몰래 친구가 되어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주어 군사 100기를 나누어 주고 동쪽지방의 주와 군을 치게 하니 모든 고을이 항복하였다.
又攻阿瑟那 衆至六百 自稱將軍. 與士卒同甘苦 予奪不以私 衆心皆畏之.
우공아슬라 중지육백 자칭장군. 여사졸동감고 여탈불이사 중심개외지.
궁예는 또 아슬라를 공격하는 무리가 600명에 이르자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군사와 고락을 함께하고 주는 일과 빼앗는 일을 사사로이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天福二十七年 太守王隆 以松岳郡歸弓裔 說之曰 “大王 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占松岳 以吾長子建爲其主.” 從之.
천복이십칠년 태수왕항 이송악군귀궁예 설지왈 "대왕 약욕왕조선숙신변한지지 막여선점송악 이오장자건위기주." 종지.
천복 27년에 태수 왕륭이 궁예에게 송악군을 바치고 귀순하며 이렇게 설득하였다.“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 땅에서 왕 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저의 장자 건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하니 궁예가 그 말에 따랐다.
時 李萱 起兵武珍州 乃聲言於衆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赫居世後興 弁韓從之 百濟開國 傳世六百 新羅與唐 合攻滅之. 今予雖不德 欲雪義慈之憤.” 遂都完山稱王 國號曰後百濟.
시 이훤 기병무진주 내성언어중왈 “우원삼국지시 마한선기 혁거세후흥 변한종지 백제개국 전세육백 신라여당 합공멸지. 금여수부덕 욕설의자지분.” 수도완산칭왕 국호왈후백제.
이때 이훤이 무진주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즉 마한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이제 내 비록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어드려 한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900년)
弓裔 亦以明年稱王 謂曰 “新羅請兵於唐 滅高句麗 是可恥也 吾必爲高句麗報讐.” 立國號曰後高句麗 建元曰武泰.
궁예 역이명년칭왕 위왈 “신라청병어당 멸고구려 시하치야 오필위고구려보수.” 입국호왈후고구여 건원왈무태.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901)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이다.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으리라.”라고 했다. 이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嘗南行 至興州寺 見壁掛新羅前王畵像 拔劒擊之. 弓裔 意欲幷呑新羅 呼爲滅都 自新羅歸附者 幷皆殺之.
상남행 지흥주사 견벽괘신라전왕화상 발검격지. 궁예 의욕병탄신라 호위멸도 자신라귀부자 병개살지.
일찍이 남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초상화가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내리쳤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 도읍을 없애겠다고 말하고 신라에서 귀순해 오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自是弓裔 自稱彌勒佛 頭戴金幘. 又自述經二十卷 或正坐講說. 僧釋聰 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弓裔怒 以鐵椎打殺之.
자시궁예 자칭미륵불 두대금책. 우자술경이십권 혹정좌강설. 승석총 위왈 ‘개사설괴담 불가이훈.’ 궁예노 이철추타살지.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스스로 경전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기도 하였다. 이에 승려 석총이 '모두 사설괴담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된다.' 하니, 궁예가 듣고는 노하여 철퇴로 때려 죽였다.
天授元年戊寅夏六月 王建 爲洪儒裵玄慶申崇謙卜智謙等 諸將軍之所推戴 黎明 坐於積穀之上 行君臣之禮 令人馳且呼曰 “王公已擧義旗矣.” 奔走來赴者衆. 先至宮門 鼓譟以待者 亦萬餘人. 遂卽位於布政殿 建元天授.
천수원년무인하유월 왕건 위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등 제장군지소추대 여명 좌어적곡지상 행국신지례 영인치차호왈 “왕공이거의기의.” 분주래부자중. 선지궁문 고조이대자 역만여인. 수즉위어포정전 건원천수.
천수 원년(918) 무인 여름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여러 장군에게 추대되어 새벽 무렵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왕건이 마침내 의기를 들었다”하고 외치게 하였다. 이에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궁문에 이르니 먼저 와서 북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만여 명이었다.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於是 泰封王弓裔聞變 以微服出門亡去 尋爲斧壤民所害.
어시 태봉왕궁예문변 이미복출문망거 심위부양민소해.
이때 태봉 왕 궁예는 변란 소식을 듣고 평복으로 갈아 입고 궁문을 빠져 나가 도망치다가, 얼마 못 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契丹聖宗 遣將蕭遜寧 侵破蓬山 獲我先鋒. 成宗文懿大王 會群臣議 或言乞降 或言割地與之. 中軍徐熙獨曰 “今見其勢大盛 遽割西京以北與之 非計也. 且三角山以北 亦高句麗舊址也 彼以谿壑之慾 責之無厭 可盡與乎 況今割地 則誠萬古之恥也 願駕還都城 使臣等一與之戰然後 議之未晩也.”
거란성종 견장소손녕 침파봉산 획아선봉. 성종문의대왕 회군신의 혹언걸항 혹언할지여지. 중군서희독왈 “금견기세대성 거할서결이북여지 비계야. 차삼각산이북 역고구려구지야. 피이계학지욕 책지무염 가진여호? 황금할지 즉성만고지치야. 원가환도성 사신등일여지전연후 의지미만야.”
거란의 성종이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여 봉산을 함락시키고 우리의 선봉을 물리쳤다. 성종 문의대왕이 군신을 모아 의논할 때, 어떤 이는 항복을, 어떤 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였는데, 중군 서희만이 홀로 아뢰었다. “지금 적군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즉시 서경 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다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만고의 치욕이 될 것이옵니다.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싸우게 한 뒤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熙奉國書 赴契丹營 問相見之禮 遜寧曰 “我大朝貴人 宜拜於庭.” 熙曰 “兩國大臣 何得如是?” 遜寧謂熙曰 “汝國 興新羅地, 高句麗之地 我所有也 而汝侵蝕之 又與我連壤 而越海事宋 故有今日之師 若割地以獻而修朝聘 可無事矣.”
희봉국서 부거란영 문상견지예 손녕왈 “아대조귀인 의배어정.” 희왈 “양국대신 하득여시?” 손녕위왈 “여국 흥신라지 고구려지지 아소유야 이여침식지 우여아연괴 이월해송사 고유금일지사 약할지이헌이수저빙 가무사의.”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들어가 성숙한 예로 대하니 소손녕이 “나는 대조의 귀인이니 그대는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여야 한다.”하였다. 서희는“양국의 대인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하니, 소손녕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의 소유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침식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전쟁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熙曰 非也 我國 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則貴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若逐女眞 還我舊地 則敢不修聘?“ 辭氣慷慨 遜寧 知不可强 遂決罷兵 宴慰以送.
희왈 “비야 아국즉고구려지구야 고호고려 도평양 약론지계 즉귀국지동경 개재아경 하득위지침식호? 약축여진 환아구지 즉감불수빙?” 사기강개 손녕 지불가강 수결파병 연위이송.
이에 서희 말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 땅이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땅이거늘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 옛 땅을 돌려준다면 어찌 감히 수빙하지 않겠는가?” 말과 얼굴빛이 강개하므로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병력을 거두기로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전송하였다.
都元帥尹瓘 攻罷女眞 立碑于先春嶺以爲界 遣子彦灑 奉表賀 平章事崔弘嗣金景庸 參知政事任懿 樞密院事李瑋等 入對宣政殿 極論 “尹瓘吳延寵林彦等 妄興無名之兵 敗軍害國 罪不可赦.”
도원수윤관 공파여진 입비우선춘형이위계 견자언이 봉표하 평정서최홍사김경용 참지정사임늬 추밀원사이위등 입대선정전 극론 “윤관오연총임언등 망흥무명지병 패군해국 죄불가사.”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임금에게 보내 표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그런데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과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이 선정전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윤관과 오연총,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諫官金緣李載等 亦相繼劾之曰 “人主之取土地 本欲育民也 今爭城而殺人 莫如還其地而息民. 今不與 必與契丹生釁.”
간관김연이재등 역상단핵지왈 “인주지취토지 본욕육민야 금재성이살인 막여환기지이식민. 금불여 필여거란생흔.”
간관 김연과 이재 등도 역시 계속하여 탄핵하기를,“임금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함인데, 이제 성을 다투며 싸워 사람을 죽였으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 하느니만 못하옵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생길 것이옵니다.”라고 했다.
上曰 “何也?” 緣曰 “國家初築九城 使告契丹 表稱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亦我編氓 近來 寇邊不已 故收復而築其城. 表辭如是 而弓漢里酋長 多受契丹官職者 契丹以我爲妄言 以加責讓 . 我若東備女眞 北備契丹 臣恐九城 非三韓之福也.” 諫議大夫金仁存 亦請還舊地.
상왈 “하야?” 연왈 “국가초축구성 사고거란 표칭여진궁한리 내아구지. 기거민역아편맹 근래 구변불이 고수복이축기성. 표사여시 이궁한리추장 다수거란관직자 거란이아위망언. 이가책양. 아고동비여진 북비거란 신공구성 비삼한지복야.” 간의대부김인존 역청환구지.
임금이 물었다.“무엇 때문인가?”하시니, 김연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에 고하는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는 우리의 옛 땅이다. 그 거주민도 역시 우리의 백성인데, 근래 도적들이 변방을 끊임없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다시 수복하여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문의 내용이 이러하나 궁한리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이니 거란은 우리 주장을 망언이라 책망할 것입니다. 이제 동쪽으로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으로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우리 삼한에 복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옵니다.”라고 했다. 간의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上宣諭曰 “兩元帥之伐女眞 受先帝之遺志 體朕躬之述事. 身冒鋒鏑 深入賊壘 斬馘俘虜 不可勝計 而闢千里之地 築九州之城 以雪國家之恥 則其功可謂多矣. 然 女眞 人面獸心 反復無常. 厥有餘醜 無所依處 故酋長 納降請和 群臣皆以爲便 朕亦不忍. 有司守法 頗有論劾 遽奪其職 朕終不以此爲咎 庶幾有孟明之復濟也.
상선유왈 양원수지벌여진 수선제지유지 체짐궁지술사. 신모봉적 심입적루 참괵부노 불가승계 이벽천리지지 축구주지성 이설국가지치 즉기공가위다의. 연 여진 인면수심 반복무상. 궐유여추 무소의처 고추장 납항청화 군신개이위편 짐역불인. 유사수법 파유논핵 거탈기직 짐종불이차위구 서기유맹명지복제야.
임금께서 유시하셨다.“두 원수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제의 유지를 받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행한 것이다. 몸소 적의 칼끝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1000리 땅을 개척하고, 9주에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씻었으니 그 공은 가히 크다 하리로다.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그 변덕이 몹시 심하다. 그 남은 무리들이 의지할 곳은 없으므로 추장이 항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해오니, 신하들이 모두 좋다고 하지만 짐은 차마 참지 못하겠다. 유사(담당관)가 법을 따져서 자못 탄핵하는 말이 많으므로 급히 그들의 직책을 박탈하려 하나, 짐은 끝까지 이를 허물로 삼지 않을 것이다. 맹명이 다시 황하를 건너 공을 세운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바라노라.”
* 孟明之復濟: 춘추(春秋) 시대에 진(秦)나라 장수 백리 맹명(孟明)이 처음에는 효함(殽函)에서 진(晋)나라의 습격을 당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본국에 돌아가서 3년 만에 하수(河水)를 건너 진나라를 쳐서 보복하였다는 고사를 이르는 말.
睿宗文孝大王四年秋 撤九城 還女眞舊地. 先是 女眞使褭弗史顯等 入朝奏曰 “昔 我太師盈歌 嘗言我祖宗 出自大邦 至于子孫 義當歸附可也. 今太師烏雅束 亦以大邦 爲父母之國. 至甲午年間 弓漢村人 自作不靖 本非太師之指揮. 國朝 鳴罪討之 復許修故 我信之 不絶朝貢. 去年大擧 殺我 耄伢 築置九城 使孑遺之民 靡所止歸. 太師遣我來 請還地云云.”
예종문효대왕사년추 철구성 환여진구지. 선시 여진사요불사현등 입조주왈 “아태사영가상언아조종 출자대방 지우자손 의당귀부가야. 금태사오아속 역이대방 위부모지국. 지갑오년간 궁한촌인 자작불정 본비태사지지휘. 국조 명죄토지 복러수고 아신지 부절조공. 거년대건 살아모예 축치구성 사혈유지민 미소지귀. 태사견아래 청환지운운.”
예종 문효대왕 4년(1109)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보다 앞서 여진이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 저희 태사 영가는 일찍이 말하기를,‘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함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이르러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이는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조(고려)에서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에 태사가 저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주실 것을 청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又會宰樞 臺省 知製誥 侍臣 都兵馬判官及文武三品以上 更議還九城可否 皆曰可.
우회재추 대성 지제고 시신 도병마판관급무사삼품이상 경의환구성가부 개왈가
또 재추, 어사대 판사와 중서문하성 성재, 지제고, 시신, 도병마 판관과 문무 3품 이상을 소집하여 다시 9성을 돌려주는 일에 대하여 가부를 물으니 모두 돌려주는 것이 좋다 하였다.
舊史云 兩將軍 立碑於先春嶺曰 至此爲高麗之境 先春嶺 在豆滿江七百里外 松花江近地云.
구사운 양장군 입비어선춘령왈 지차위고려지경. 선춘령 재두만강칠백리외 송화강근지운.
옛 사서에는“두 장군이 선춘령에 비를 세우고‘이곳이 고려의 경계이다.’ 라고 했다. 선춘령은 두만강에서 700리 밖, 송화강 가까운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廣州牧使尹彦灑 自解表云 “及睹中軍所奏曰 ‘彦灑與鄭知常 結爲死黨 大小之事 實同商議.’ ‘在壬子年西幸時 請立元稱號.’ 又‘諷誘國學生 奏前件事 蓋欲激大金 生事乘間 恣意處置 朋黨外人 謀爲不軌 非人臣意.’ 臣讀過再三然後 心乃安繄.
광주목사윤언이 자해표운 “급도중군소진왈 ‘언이여정지상 결위사당 대소지사 실동상의 재임자년서행시 청원입칭호 우풍유국학생 진전사건 개욕격대금 생사승잔 자의처치 붕당외인 모위불궤 비인신의 신독과재삼연후 심급안예.
광주목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글[自解表]을 올려서 이렇게 주장했다. “중군(김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였다.’하고‘임자년에 임금께서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칭제건원할 것을 청하였다.’하며, 또‘국학생들을 넌지시 꾀어 앞의 일(칭제건원)을 상주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그 의도는 금나라를 격노시켜 일을 일으키고 틈을 타서 제 멋대로 (반대자들을) 제거한 후 외인과 붕당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글을 두세 번 거듭하여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是立元之請 本乎尊主之誠 在我本朝. 有太祖光宗之故事 稽其往牒 雖新羅渤海 以得爲之 大國 未嘗加兵 小國 無敢議其失. 奈何聖世 反爲僭行? 臣嘗議之 罪則然矣. 若夫結爲死黨 激怒大金 語言雖甚大焉 本末不相坐.
시립원지청 본호존주지성 재아본조. 유태조광종지고사 계기왕첩 수신라발해 이득위지 대국미상가병 소국 무감의기실. 내하성세 반위참행? 신상의지 죄즉연의. 약부결위사당 격노대금 오언수심대언 본말불상좌.
신이 칭제건원을 청한 것은 임금을 받드는 충정에 근본을 둔 것이옵니다. 본조(고려)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고,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연호를 만들어 썼으나 주변 대국이 일찍이 이를 문제 삼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나라들은 감히 그 과실을 따져 의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지금의 성세에 이것이 도리어 참람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이 일찍이 이 문제를 의논한 바 있으니, 죄라면 이것이 죄일 것입니다. 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금나라)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은 비록 엄청나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사옵니다.
何則 假使强敵 來侵我疆 夫惟禦之未遑 安得乘間而用事? 其指朋黨者 誰氏 其欲處置者 何人? 衆若不和 戰之則敗 且容身之無地 何恣意以爲謀? 有賴聖知 重念臣以至弱之質 從西征之役 忘身以衛其國. 乃義分之當然. 成事 皆因於人 何勤勞之足道?
하즉 가사강적 내침아강 부유어지미황 안득승간이용사 지지붕당자 수씨 기욕처치자 하인 중약불화 전지즉패 차용신지무지 하자의이위모 유뢰성지 중념신이지약지질 종서정지역 항신이위기국 내의분지당연 성사 개인어인 하근노지족도?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 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그 틈을 일을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그 붕당이라 지목한 자는 누구이며, 제거하고자 한 자는 어떤 인물이옵니까?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 둘 곳조차 없을 터인데, 어찌 방자한 뜻을 품어 그런 일을 꾀하겠습니까? 임금님의 명철하심을 믿고 거듭 생각하건대 신은 지극히 나약한 자질로써 서경 정벌의 전역에 종사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사옵니다. 이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서경 정벌의 성사는 모두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니, 이제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족히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金史曰 ”世宗大定十五年九月 高麗西京留守趙位寵 遣徐彦等進表 欲以慈悲嶺以西 鴨綠江以東內附 不許.“
금사왈 세종대정십오년구월 고려서경유수조위총 견서언등진표 욕기자비령이서 압록강이동내부 불허.
『금사』에 이렇게 기록되길. “세종은 대정 15년(1175) 9월에,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 등을 보내 표문을 올려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 땅을 가지고 귀속하려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라 되어있고
高麗史曰 “睿宗十一年三月乙未朔 上聞遼來遠抱州二城 爲女眞所攻 城中食盡 遣都兵馬錄事邵億 送米一千石 來遠統軍 辭不受.”
고려사왈 “예종십일년삼월을미삭 상문요래원초주이성 위여진소공 성중식진 견도병사록사소억송미일천석 래원통군 사불수.”
『고려사』에 기록되길 “예종 11년(1116) 3월 을미 초하루에, 임금께서 요나라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시켜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성의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라 되어있다.
八月庚辰 金將撤喝 攻遼來遠抱州二城幾陷 其統軍耶律寧 欲帥衆而逃.
팔월경진 금장철갈 공요래원포주이성기함 기통군야율녕 욕수중이도.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 두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자, 그곳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하였다.
上遣樞密院知奏事韓曒如招諭 寧以無王旨辭. 曒如馳奏 上欲令樞密院 具箚子送之 宰臣諫官 奏曰 彼求王旨 其意難測 請止之 上乃遣使如金 請曰 “抱州 本吾舊地 願以見遼.” 金主謂使者曰 “爾其自取之.”
상견추밀원지진사한교여초유 녕이무왕지사. 교여치주 상욕영추밀원 구차자송지 재신간관 주왈 “피구왕지 기의난측 청지지” 상내견사여금 청왈 “포주 본오구지 원이견요” 금주위사자왈 “이기자취지.”
임금께서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야율령을 불러 효유하게 하셨는데, 야율령은 임금의 전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교여가 급히 보고하자 임금께서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를 갖추어 보내려 하셨다. 재신과 간관이 아뢰기를, “저들이 임금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을 알기 어려우니 그만두게 하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포주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니 돌려주기를 원하노라.”라고 청하셨다. 금나라 임금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직접 빼았으라.”라고 하였다.
廣州牧使尹彦灑 自解表云 “及睹中軍所奏曰 ‘彦灑與鄭知常 結爲死黨 大小之事 實同商議.’ ‘在壬子年西幸時 請立元稱號.’ 又‘諷誘國學生 奏前件事 蓋欲激大金 生事乘間 恣意處置 朋黨外人 謀爲不軌 非人臣意.’ 臣讀過再三然後 心乃安繄.
광주목사윤언이 자해표운 “급도중군소진왈 ‘언이여정지상 결위사당 대소지사 실동상의 재임자년서행시 청원입칭호 우풍유국학생 진전사건 개욕격대금 생사승잔 자의처치 붕당외인 모위불궤 비인신의 신독과재삼연후 심급안예.
광주목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글[自解表]을 올려서 이렇게 주장했다. “중군(김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였다.’하고‘임자년에 임금께서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칭제건원할 것을 청하였다.’하며, 또‘국학생들을 넌지시 꾀어 앞의 일(칭제건원)을 상주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그 의도는 금나라를 격노시켜 일을 일으키고 틈을 타서 제 멋대로 (반대자들을) 제거한 후 외인과 붕당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글을 두세 번 거듭하여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是立元之請 本乎尊主之誠 在我本朝. 有太祖光宗之故事 稽其往牒 雖新羅渤海 以得爲之 大國 未嘗加兵 小國 無敢議其失. 奈何聖世 反爲僭行? 臣嘗議之 罪則然矣. 若夫結爲死黨 激怒大金 語言雖甚大焉 本末不相坐.
시립원지청 본호존주지성 재아본조. 유태조광종지고사 계기왕첩 수신라발해 이득위지 대국미상가병 소국 무감의기실. 내하성세 반위참행? 신상의지 죄즉연의. 약부결위사당 격노대금 오언수심대언 본말불상좌.
신이 칭제건원을 청한 것은 임금을 받드는 충정에 근본을 둔 것이옵니다. 본조(고려)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고,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연호를 만들어 썼으나 주변 대국이 일찍이 이를 문제 삼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나라들은 감히 그 과실을 따져 의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지금의 성세에 이것이 도리어 참람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이 일찍이 이 문제를 의논한 바 있으니, 죄라면 이것이 죄일 것입니다. 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금나라)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은 비록 엄청나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사옵니다.
何則 假使强敵 來侵我疆 夫惟禦之未遑 安得乘間而用事? 其指朋黨者 誰氏 其欲處置者 何人? 衆若不和 戰之則敗 且容身之無地 何恣意以爲謀? 有賴聖知 重念臣以至弱之質 從西征之役 忘身以衛其國. 乃義分之當然. 成事 皆因於人 何勤勞之足道?
하즉 가사강적 내침아강 부유어지미황 안득승간이용사 지지붕당자 수씨 기욕처치자 하인 중약불화 전지즉패 차용신지무지 하자의이위모 유뢰성지 중념신이지약지질 종서정지역 항신이위기국 내의분지당연 성사 개인어인 하근노지족도?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 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그 틈을 일을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그 붕당이라 지목한 자는 누구이며, 제거하고자 한 자는 어떤 인물이옵니까?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 둘 곳조차 없을 터인데, 어찌 방자한 뜻을 품어 그런 일을 꾀하겠습니까? 임금님의 명철하심을 믿고 거듭 생각하건대 신은 지극히 나약한 자질로써 서경 정벌의 전역에 종사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사옵니다. 이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서경 정벌의 성사는 모두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니, 이제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족히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金史曰 ”世宗大定十五年九月 高麗西京留守趙位寵 遣徐彦等進表 欲以慈悲嶺以西 鴨綠江以東內附 不許.“
금사왈 세종대정십오년구월 고려서경유수조위총 견서언등진표 욕기자비령이서 압록강이동내부 불허.
『금사』에 이렇게 기록되길. “세종은 대정 15년(1175) 9월에,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 등을 보내 표문을 올려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 땅을 가지고 귀속하려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라 되어있고
高麗史曰 “睿宗十一年三月乙未朔 上聞遼來遠抱州二城 爲女眞所攻 城中食盡 遣都兵馬錄事邵億 送米一千石 來遠統軍 辭不受.”
고려사왈 “예종십일년삼월을미삭 상문요래원초주이성 위여진소공 성중식진 견도병사록사소억송미일천석 래원통군 사불수.”
『고려사』에 기록되길 “예종 11년(1116) 3월 을미 초하루에, 임금께서 요나라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시켜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성의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라 되어있다.
八月庚辰 金將撤喝 攻遼來遠抱州二城幾陷 其統軍耶律寧 欲帥衆而逃.
팔월경진 금장철갈 공요래원포주이성기함 기통군야율녕 욕수중이도.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 두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자, 그곳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하였다.
上遣樞密院知奏事韓曒如招諭 寧以無王旨辭. 曒如馳奏 上欲令樞密院 具箚子送之 宰臣諫官 奏曰 彼求王旨 其意難測 請止之 上乃遣使如金 請曰 “抱州 本吾舊地 願以見遼.” 金主謂使者曰 “爾其自取之.”
상견추밀원지진사한교여초유 녕이무왕지사. 교여치주 상욕영추밀원 구차자송지 재신간관 주왈 “피구왕지 기의난측 청지지” 상내견사여금 청왈 “포주 본오구지 원이견요” 금주위사자왈 “이기자취지.”
임금께서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야율령을 불러 회유하게 하셨는데, 야율령은 임금의 전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교여가 급히 보고하자 임금께서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교지)를 갖추어 보내려 하셨다. 재신과 간관이 아뢰기를, “저들이 임금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을 알기 어려우니 그만두게 하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포주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니 돌려주기를 원하노라.”라고 청하셨다. 금나라 임금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직접 빼았아라.”라고 하였다.
厚庵李尊庇 高麗景孝王時人也. 嘗在書筵 論自主富强之策 仍奏曰 “本國 自桓檀朝鮮北夫餘 高句麗以來 皆富强自主. 且建元稱帝之事 至我太祖初 亦嘗行之 而今則事大之論 定爲國是 君臣上下 甘受屈辱 不圖所以自新 其畏天保國則誠美矣 奈天下後世之笑何?
후암이존비 고려경효왕시인야. 상제서연 논자주부강지책 잉주왈 ”본국 자환단조선 북부여고구려이래 개부강자주. 차건원칭제지사 지아태조초 역상행지 이금즉사대지론 정위국시 군신상하 감수굴욕 부도소이자신 기외천보국즉성미의. 내천하후세지소하?
후암 이존비(1233~1287)는 고려 경효왕(25세 충렬왕) 때의 인물이다. 일찌기 글의 경연에서 자주와 부강의 정책을 논하고 또 이렇게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환단, 조선, 북부여, 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처음 실행하였으나, 그런데 지금은 사대의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있어 군신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 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옵니까?
且與倭綠怨 萬一元室有變 將焉所恃而爲國? 稱帝之事 爲時忌諱 則固難卒復 而自强之策 不可不講也.” 奏雖寢 聞者 莫不韙之.
차여왜연원 만일원실유변 장언소이이위국? 칭제지사 위시기휘 즉고난졸복 이자강지책 불가불강야.“ 주수침 문자 막불위지.
또한 왜와 원한을 쌓고 있으니 만약 원나라 왕실에 변고가 생긴다면 장차 무었을 믿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황제라 칭하는 일을 이 시대에 꺼리고 기피하다가 갑자기 회복하기는 진실로 곤란하나 자강의 계책을 다루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상주를 멈추지 않으니 듣는 자마다 옳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後又陳備倭五事
후우진비왜오사
뒤에 왜를 대비하는 5가지 방안을 설파했는데
一曰詳備戶口 悉民爲兵 일왈상비호구 실민위병
첫째, 호구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 백성을 병사로 만들 일,
二曰兵農一作 水陸共守 이왈병농일자 수륙공수
둘째, 병농(兵農) 일치의 제도를 만들고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킬 일,
三曰積置兵糧 修造戰艦 삼왈 적치병량 수조전함
셋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리하고 건조하는 일,
四曰擴張水軍 兼習陸操 사왈 확장수군 겸승육조
넷째, 수군을 확장하며 陸上戰도 함께 익히는 일,
五曰詳悉地理 確保人和 오왈 상실지리 확보인화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이라 하였다.
嘗有寄晦堂上人詩曰
상유기회당상인시왈
일찍이 회당상인(친구)에게 준 시 한 수가 전하니 이와 같다.
物無美惡終歸用 苦李誰嫌着子多 물무미악종귀용 고리수혐착자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다 쓰임이 있는데 누가 오얏나무에 쓴 열매가 많다고 싫어하리오.
長息久朝天子所 次兒新付法王家 장식구조천자소 차아신부법왕가
맏아들은 오랫동안 조정에서 천자를 모시고 둘째는 새로이 절로 출가하였네.
移忠固是爲臣分 割愛其如出世何 이충고시위신분 할애기여출세하
충성의 정도는 신하의 신분에 따르고 출가한 자식에의 사랑을 덜어내니.
還笑老翁猶滯念 有時魂夢杳天涯 환소노옹유체념 유시혼몽묘천애
노옹은 오히려 체념하고 웃지만 혼은 꿈같은 천길 벼랑에서 아득할 뿐이네.
上在燕京 惑於蓮女. 臨別 手贈蓮花一朶曰 “上歸路 視此花若凋 此命將盡.” 數日後視花 花欲憔悴 上恐蓮女死 復欲如燕. 尊庇 請往探而回.
상재연경 감어연녀 임별 수증연화일타왈 상귀로 시차화약조 차명장잔 수일후시화 화욕초췌 상공연여사 복욕여연 존비 청왕탐이회.
임금(충렬왕)께서 일찍이 연경에 계실 때에 연녀와 마음을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 연녀가 손수 연꽃을 한 송이를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만약 이 꽃이 시든 것을 보시면, 이 목숨이 장차 다할 것이옵니다.” 며칠 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해 지고 있었다. 임금께서 연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으로 가려하셨다. 이존비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자청하여 연녀를 찾아갔다.
蓮女 泣而獻詩曰
연녀 읍이헌시왈
연녀가 울며 시를 바치니 이러하였다.
相贈蓮花香 初來綽約紅 상증연화향 초래작약홍
연꽃 향기를 서로 주고받으니, 처음에는 한창인 듯 향기로웠다.
移叢問幾日 憔悴與君同 이총문기일 초췌여군동.
꽃을 드린 지 며칠 지나니, 시든 모습이 님과 같사옵니다.
尊庇 恐上見詩增懷 代蓮女而製進曰
존비 공상견시증회 대연여이제진왈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시면 연녀를 더욱 그리워할 것을 염려하여 연녀 대신 시를 지어 바쳤다.
這癡漢這癡漢 勿留輦勿留輦
저치한저치한 물유련물유련
이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추지 마오, 수레를 멈추지 마오.
此身便如蓮葉珠 彼邊轉處此邊圓
차신뱐여엽엽주 피변전처차변원
이 몸은 연잎에 맺힌 이슬 같으니 저쪽 이쪽 둥굴게 굴러다닌다오.
上見詩大怒 遂還國
상견시대노 수환국
임금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하였다.
後 上恨蓮女不已 尊庇乃奏曰 “臣於伊時 急於奉還 不得已權辭 請伏欺罔之誅.” 上怒削官 謫文義.
후 상한연녀불이 존비내주왈 “신어이시 금어봉환 부득이권사 청복기망지주.” 상노삭관 적문의.
뒤에도 임금이 연녀에 대한 원망을 그치지 않으시므로 존비가 아뢰었다. “신이 그때 모시고 돌아오기를 급히 서두르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시를 지어 올렸으니 바라옵건대 임금을 속인 죄에 벌을 내려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임금이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문의에 유배시켰다.
太子及朝臣 反復啓解之 上亦悔悟 復官召還 使者未至 尊庇卒. 訃聞 上震悼輟朝.
태자급조신 반복계해지 상역회오 복관소환 사자미지 존비졸. 부문 상진도철조.
태자(충선왕)와 조정 대신들이 풀어주기를 여러 번 주청하였다. 임금 역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복직시켜 소환하셨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존비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 임금은 부음을 전해 듣고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太子臨喪曰 “李尊庇正直 邦家司直 何夭如是乎?”
태자임상왈 이존비정직 방가사직 하요여시호?
태자가 장례에 임하여 말하였다. “이존비는 정직하여 나라의 올곧은 공무원인데 어찌 이같이 요절한단 말인가?”
仍命葬用王禮 遂以荊江之上 環其山四里封之 至今洞曰王墓里曰山四.
잉명장용왕례 수이형강지상 환기산사리봉지 지금동왈왕묘리왈산사.
이에 임금께서 왕례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마침내 형강 가에 있는 산 4리를 둘러서 봉하니, 지금까지 동을 왕묘동이라 부르고, 마을을 산사리라 부른다.
杏村李侍中嵓 嘗疏沮權臣輩 欲廢國號而請立行省之議. 其疏略曰 “天下之人 各以其國爲國 各以其俗爲俗 國界不可破也 民俗亦不可混也.
행촌이시중암 상고저권신배 욕폐국호이청입행성지의. 기소약왈 ”천하지인 각이기국위국 각이기속위속 국계불가파야 민속역불가혼야.
시중 행촌 이암(1297-1364)은 일찍이 상소하여 권신의 무리가 국호를 폐하고 행성을 세우고자 하는 의논을 저지하였다. 그 상소문은 대략 이러하다.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섞이게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況我國 自桓檀以來 皆稱天帝之子 行祭天之事. 自與分封諸侯 元不相同. 今雖一時爲人轅下 旣有魂精血肉 而得一源之祖. 是乃神市開天 三韓管境之爲大名 邦於天下萬世者也.
황아국 자환단이래 개칭전제지자 행제천지사. 자여분봉제후 원불살동. 금수일시위인원하 기유혼정혈육 이득일원지조. 시내신시개천 삼한관경지위대명 방어천하만세자야.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 시대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그 원래 조상의 혼과 정신 육체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신시개천과 삼한관경이 천하 만세에 대국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것입니다.
我天授太祖 以創業之資 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平定宇內 國聲大振也. 間有强隣 乘以作暴 幽營以東 尙未歸我. 則此君臣 日夜奮振 謀所以自主富强之策. 敢有潛淸輩之大姦慝 逞能陰謀.
아천수태조 이창업지자 승고구려다물입국지여풍 평정우내 국성대진야. 간유강린 승이작포유영이동 상미귀아, 즉차군신 일야분진 모소이자주부강지책. 감유잠청배지대간닉 영능음모.
우리 천수 태조께서는 창업의 자질을 갖추시고, 고구려의 건국 이념인 다물 정신을 계승하여 세상을 평정하시어 국가의 명성을 크게 떨치셨습니다. 강한 이웃이 끼어들어 승세를 타고 횡포를 부려서 유주와 영주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금과 신하가 낮밤으로 분발하여 자주와 부강의 계책을 도모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깨끗한 신하들 사이에 간사한 무리가 숨어들어 음모가 통하게 된 것입니다.
我國雖小 國號不可廢也 主勢雖弱 位號何其降也? 今此之擧 皆奸小之輩之出於逋逃 而非國人之公言也. 宜請都堂 嚴治其罪.
아국수소 국호불가폐야 주세수약 위호하기강야? 금차지거 개단소지배지출어포도 이비국인지공언야. 의청도장 엄치기죄.
우리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할 수 있으며, 임금의 힘이 비록 약하나 위호를 어찌 낮출 수 있겠사옵니까? 이제 이러한 거론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가 죄를 감추고 도망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나라 사람들의 공식적인 발언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마땅히 도당(관서)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옵니다.
杏村侍中 有著書三種 其著檀君世紀 以明原始國家之體統, 又著太白眞訓 紹述桓檀相傳之道學心法. 農桑輯要 乃經世實務之學也.
행촌시중 유저서삼종 기저단군세기 이명원시국가지예통 우저태백진훈 소술환단상전지도학심법. 농상집요 내경세실무지학야.
행촌 시중의 저서가 세 개가 있다.『단군세기』는 시원 국가의 체통을 밝혔고,『태백진훈』은 환단 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과 심법을 이어 받아 밝혔다.『농상집요』는 경제 실무에 관한 학문을 담은 것이다.
文靖公李牧隱穡 序之曰 ”凡衣食之所由足 諡財之所由豊 種蒔突息之所由周備者 莫不分門類聚 縷析燭照 實理生之良書也.“
문정공이목은색 서지왈 ”범의식지소유족 시재지소유풍 종시돌식지소유조비자 막불분문유취루석촉조 실리생지양서야.“
문정공 목은 이색이 서문을 붙였다. “무릇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고, 재물을 풍족하게 하며, 씨 뿌리고 모종하고 싹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분야별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묶어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이 비추는 것처럼 명료하게 기록하였다. 진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좋은 책이 되리라.”
杏村先生 嘗遊於天寶山 夜宿太素庵 有一居士曰 “素佺 多藏奇古之書.”
행촌선생 상유어천보산 야숙태소암 유일거사왈 “소전 다장기고지서. ”
행촌선생이 일찍이 천보산에서 유람을 하다가 밤에 태소암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 거사가 소전(도를 닦는 사람)이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줬다.
乃與李茗范樟 同得神書 皆古桓檀傳授之眞訣也.
내여이명범장 동득신서 개고환단전수지진결야.
이에 이명, 범장과 함께 신서를 얻었는데 모두 옛 한단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비결이었다.
其通脫博古之學 卓然有所可稱. 而其參佺修戒之法 蓋凝性作慧 凝命作德 凝精作力. 其在宇宙而三神長存 其在人物而三眞不滅者 當與天下萬世之大精神 混然同其體 而生化無窮也.
이통탈박고지학 탁연유소가칭. 이모찬전수계지법 개응성작혜 응명작덕 응정작력. 기재우주이삼신장존 기재인물이삼진불멸자 당연천하만세지대정신 혼연동기체 이생화무궁야.
세속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고사에 박식한 행촌의 학문은 그 뛰어남이 칭송받을 만하였다. 그 참전의 계율을 닦는 법도는 3신으로부터 받은 성품을 모아 지혜를 이루고, 3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모아 덕을 이루고, 3신으로부터 받은 정신을 모으면 힘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 할 때 우주에 3신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요, 사람과 사물에 삼진이 불멸하는 것이다. 당연히 천하에 영원한 대정신이 우리와 혼연일체가 되어 생성과 변화가 무궁하게 한다.
先生曰 “道在天也 是爲三神, 道在人也 是爲三眞, 言其本則 爲一而已惟一之爲道 不二之爲法也. 大哉 桓雄首出庶物 得道天源 立敎太白 神市開天之義 始大明於世矣. 今吾輩 因文求道 參佺受戒 尊吾敎而未發. 又聞百途而難會 老將及矣 可恨哉!”
선생왈 “도재천야 시위삼신 도재인야 시위삼진. 언기본즉 위일이이유일지위도 불이지위법야. 대재! 환웅수출서물 득도천원 입교태백 신시개천지의 시대명어세의. 금오배 인문구도 참전수계 존오교이미발. 우문백도이난회 노장급의 가한재!”
선생이 말하길 “도가 하늘에 있으면 3신이 되고, 도가 사람에 있으면 3진이 된다. 그 본을 말한다면 하나로서 오직 하나일 때가 도요, 둘로 나뉘지 않을때 법이다. 위대하시도다 환웅이시어! 환웅 천황이 모든 것보다 먼저 하늘 이치의 근원을 체득하시고 대광명의 가르침을 세우시니, 신시개천의 의미가 비로소 세상에 크게 밝혀졌도다. 지금 우리는 글을 통해 도를 구하고, 계(修身)를 통해 가르침을 존중하지만 채득하여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온갖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여전히 하나로 이해하지 못하니, 늙어감이 한스럽도다!”
先生 以侍中致仕 退居江都之紅杏村 自號爲紅杏村叟 遂著杏村三書 藏于家.
선생 이시중치사 퇴거강도지홍행촌 자로위홍행촌수 수저행촌삼서 장우가.
선생은 시중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의 홍행촌에 들어가, 스스로 홍행촌의 늙은이[紅杏村叟]라 하고, 마침내 행촌 3서를 쓰시어 집에 간직해 두셨다.
敬孝王後五年三月 杏村李嵓以命 祭天于塹城壇 謂白文寶曰 “賴德護神 一存信念 養英衛國 功在發願 乃神依人 人亦依神 而民而國 永得安康. 祭天之誠 竟歸報本 其求人世 敢可忽諸?”
경효왕후오년삼월 행촌이암이명 제천우참성단 위백문보왈 “뇌덕호신 일존신념 양영위국 공재발원 내신의인 인역의신 이민이국 영득안강. 제천지성 경귀보본 기구인세 감하홀제?”
경효왕(28세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행촌 이암은 어명을 받들어 참성단에서 천제를 드릴 때 백문보에게 이르길 “덕으로 신을 수호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있고, 영재를 길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 공이 서원을 세우는데 있느니라.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 역시 신에게 의지하여야 백성과 국가가 길이 편안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 드리는 정성은 결국 근본에 보은하는 정신으로 돌아감이니, 그게 인간과 세상을 구하는 길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鄭之祥 河東人也 因其妹 往來于元 値敬孝王入侍 隨從有勞 及王卽位 驟選至監察持平 不言. 昔事理 嘗爲全羅道按廉使入境 遇勢家所使 輒姪掠徇示諸郡 一道寒心.
정지상 하동인야 인기매 왕래우원 치경효왕입시 수종유노 금왕즉위 취전지감찰지평 불언. 석사리 상위전라도안렴사입경 우새가소사 첩질략순시제군 일도한심.
정지상은 하동사람이다. 일찍이 그의 누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공민왕)을 만나 대궐에 들어가 수종 들며 공로가 있었다. 왕이 즉위하자 바로 뽑혀서 감찰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렴사가 되어 임지에 가서,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문초하고 모든 고을에 이를 알리니, 온 도의 사람의 마음이 섬뜩하였다.
埜思不花 本國人也 在元有寵於順帝 其兄徐臣桂爲六宰 弟應呂爲上護軍 依勢作威福 國人畏之. 不花 降香至本國 所至縱暴. 存撫按廉 多被辱罵 莫不違臨.
야사불화 본국인애. 제원유총어순제 기형서신계위육재 제응려이상호군 의세작위복 국인외지. 불화 강향지본국 소지종폭. 존무안렴 다피욕독 막불위임.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고려국)사람인데 원에 들어가 순제(1332-1370)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어 세력을 믿고 위세가 당당하게 복을 누리던 터라 나라 사람이 두려워하였다. 불화가 강향사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존무사와 안림사가 많은 치욕을 당하고 욕을 먹었지만 감히 거슬러서 어길 수 없었다.
至全州 之祥 迎候恭謹 不花 待遇甚倨. 伴接使洪元哲 有求於之祥 之祥不聽. 元哲 激怒不花曰 之祥慢天使 不花縶縛之. 之祥 忿恚大叫 夾州吏 曰
지전주 지상영후공근 불화 대우심거 반접사홍원철 유구어지상 지상불청. 원철 격노불화왈 “지상만천사 불화집박지. 지상 눈에대규 협주리 왈
전주에 이르자 정지상이 기다렸다가 공손하게 맞이하였으나,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 홍원철이 지상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여 불화에게 “지상이 천자의 사신을 업신여긴다.”고 하자,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였다. 지상이 분노하여 협주의 관리에게 큰 소리로 말하길
國家 已誅諸奇 不復事元 命宰相金敬直爲元帥 守鴨綠江 此使易制耳 若等 何畏而不我救? 將見爾州 降爲小縣也. 邑吏 呼油而入 解縛扶出. 之祥 遂率衆 執不花元哲等囚之. 奪不花所佩之金牌 馳還京 過公州 執應呂以鐵椎垈之 數日而死.
국가 이주제기 불복사원 명재상김경직위원수 수압록강 차사역제이 약등 하외이불아구? 장견이주 강위소현야. 읍리 호유이입 해박부출. 지상 수솔중 집불화원철등수지. 탈불화소패지금패 치환경 과공주 집응려이철무대지 수일이사.
“국가에서는 이미 기씨를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정도의 사신을 제압하기 쉽거늘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않는가? 장차 너희 州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게 되리라. 이에 읍리들이 소리치며 달려 들어와 결박을 풀고 부축하여 나갔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와 원철 등을 사로잡아 가두고,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빼앗아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올 때, 공주를 지나다 응여를 따라잡아 철퇴로 치니 며칠 만에 죽었다.
之祥 來白于王 王驚愕 下巡軍 命行省員外鄭暉 捕全州牧使崔英起及邑吏等. 又遣車蒲溫 齎內覓慰不花 還其牌.
지상 내백우왕 왕경악 하순군 명행성원외정휘 포전주목사최영기급읍사등 우견차포온 재내멱위불화 환기패.
지상이 와서 왕께 이 사실을 고백하니 임금은 경악하여 순군부에 내려 하옥시키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와 읍리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또 차포온을 보내 어주를 하사하여 불화를 위로하게 하시고 금패를 돌려주셨다.
元遣斷事官買住 來鞠之祥. 王誅諸奇 釋之祥 爲巡軍提控 再轉戶部侍郞 御史中丞 官至判事卒 性嚴 凡戮死罪 必遣之. 之祥妻 寡居潭陽 爲倭所害 子從隨朴糞 擊對馬島.
원수단사관매주 래국지상. 왕주제기 석지상 위순군제공 재전호부시랑 어사중승 관지판사졸성엄 범륙사죄 필유지. 지상처 과거담양 위왜소해 자공수박분 격댜마도.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케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기씨를 모두 죽이고, 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으셨다. 이후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이 되었고,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모든 육사죄에는 반드시 지상을 보내었다. 지상의 아내는 홀로 담양에 살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어 죽었고, 아들 종은 박위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참여 하였다.
文大 高宗安孝大王十八年 以郞將在瑞昌縣 爲蒙古兵所虜. 蒙古兵 至鐵山城下 令文大 呼喩州人 曰 “眞蒙古兵來矣 可速出降.” 文大 乃呼曰 “假蒙古兵也 且勿降.”
문대 도종안효대왕팔십년 이낭장재서창현 위몽고병소노. 몽고병 지철산성하 영문대 로유주인왈 “진몽고병래의 가속출항.” 문대 내호왈 ”가몽고병야 차물항.“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소리치라 시켰다.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蒙古人 欲斬之 使更呼 復如前 遂斬之 蒙古 攻城甚急 城中糧盡 不克守. 將陷 判官李希績 聚城中婦女小兒 納倉中火之 率丁壯 自刎而死.
몽고인 욕참지 사경호 복여전 수참지. 몽고공성심급 성중양진 불극수. 장함 판관이희적 취성중부녀소아 납창중화지 솔정장 자겨이사.
이에 몽고 사람이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몹시 급하게 공격하니, 성에 양곡이 떨어져 마침내 지킬 수가 없었다. 곧 함락되려 하므로 판관 이희적은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모두 자결하였다.
敬孝王十二年癸卯三月 密直使李岡 以命祭塹城壇 仍刻板題詩 其詩曰
경효왕이십년계묘삼월 밀직사이강 이명제참성단 잉각판제시 기시왈
경효왕(공민왕) 12년(1363) 신묘 3월에, 밀직사 이강이 어명을 받들고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렸다. 이어서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는데, 시는 이러하다.
春風景物富年華 承命來遊道路賖 .
봄바람 속에 만물의 정취 짙어가는데 왕명 받고 떠나온 길은 멀기도 하여라.
鞭馹朝辭丹鳳闕 棹舟暮癲白鷗波
이른 새벽 말을 달려 구중궁궐 떠났는데 노 젓는 저녁 무렵, 흰 갈매기는 파도 위를 날아오르네
半空蒼翠山浮色 滿壑蕩孟草自花
하늘 복판에 솟은 산은 푸른 빛깔 뽐내고 골짜기엔 봄기운 완연해 풀이 절로 꽃을 피우네
借問蓬萊何處是 人言此地卽仙家
묻노니, 신선이 사는 봉래산 그 어드메뇨 사람들은 이곳이 바로 선가라 하네.
心靜身閒骨欲仙 遙思人事正茫然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로워 체골조차 신선이 되어 멀리 인간사 생각하며 멍하니 거닐고 싶다.
薦汗秘席中興後 累石靈壇太古前 천란비석중흥후 누석영단태고전
汗(지도자)를 천거하여 자리에 앉히는 전승이 다시 이뤄지는데 제를 지내는 단은 태고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已得眼看千里地 況疑身在九重天 이득안착천리지 황의신재구중천
천리 밖을 내다보는 눈을 얻었는데 몸이 9중천에 있음을 왜 의심하나?
此行無凡如相托 須値還都第一年 차행무범여상탁 수치환도제일년
이번 여행에 서로 부탁함이 없는데 모름지기 환도후 일년 됨에 의미를 두자.
江陵王禑五年三月辛未 命遣使致祭于塹城壇. 大提學權近 製誓告文以進 其文曰
강릉왕우오년삼월신미 명견사치제천참성단. 대제학권근 제서고문이진 기문왈
강능왕 우 5년(1379) 3월 신미에,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천제를 올리도록 명하셨다. 대제학 권근이 서고문을 지어 바치니 그 글은 이러하다.
初獻 海上山高 逈隔人豈之煩擾. 壇中天近 可邀仙馭之降臨. 薄奠斯陳 明神如在.
초헌 해상산고 향격인기지번요. 단중천근 가요선어지강림. 박전사진 명신여재.
초헌, 바다 가운데에 산이 높으니 인간 세상의 번뇌와 시끄러움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제단 중앙은 하늘에 닿을 듯하니 신선의 수레를 타고 강림하시는 삼신님을 맞이하옵니다. 조촐한 음식을 올리오니 밝으신 삼신께서 계시는 듯하옵니다.
二獻 神聽不惑 庇撚斯人. 天覆無私 照臨下土. 事之以禮 感而遂通. 竊念 摩利山 檀君攸祀. 自聖祖 爲民立極 彭纘舊而垂休芳.
이헌 신청불혹 비연사인. 천복무사 조림하사. 사지이예 감이수통. 절념 마리산 단군유사. 자성조 위민입극 팽찬구이수휴방.
이헌, 삼신께서 미혹됨이 없이 들어 주시나니 이 사람을 감싸안고 베풀어 주십니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덮으시고 인간 세상을 굽어보십니다. 예를 극진히 하여 섬기나니 삼신께서 감응하시어 성신이 통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잠시 헤아려 보건대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옵니다. 성조 이래로 백성을 위해 법도를 세우고, 옛 법통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드리우셨습니다.
後王 避狄遷都 亦賴玆而保本故. 我家守之不墜 而朕小子 承之益虔. 天何外寇之狗偸 而以致我民之魚爛? 雖遠疆之受侮 尙許表聞 況厥邑之被侵 胡然忍視其明威之不驗 寔否德之無良 實難求他 惟在自責.
후왕 피적천도 역뢰현이보본고. 아가수지불추 이짐소자 승지익건. 천하외구지구유 이이치아민지어란? 수원강지수모 상허표문 황궐읍지피침 호연인시기명위지불험 식부청지무량 실난구타 유재자책.
고종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해 도읍을 옮기고 또한 이곳에 의지하여 국본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국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소자(우왕)가 이를 계승하여 더욱 공경하옵나이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구가 개같이 좀도둑질하여 우리 백성을 어란의 지경에 이르게 하시옵니까? 비록 변방이 침략을 받았으나 오히려 표문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밝은 위엄의 징험이 없으시겠습니까만 실로 저의 부덕한 소치이니 진실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오직 자책할 뿐이옵니다.
然 人若不安其業 則神將無所於歸. 玆因舊典之遵 敢告當時之患 卑泡款款 寶鑑明明. 致令海不揚波 丕享梯航之幅湊. 天其申命 光膺社稷之安磐.
연 인약불안기업 즉신장무소어귀. 현인구전지준 감고당시지환 비포관관 보감명명. 치명해불양파 비형제항지폭주. 천기신명 광응사직안반.
그러나 사람이 만약 그 하는 일을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면, 삼신께서도 장차 돌아가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옛 법을 좇아 감히 지금의 환란을 고하오니, 조촐한 저의 정성이지만 기꺼이 받으시고 밝게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지 않게 하시어 배를 타고 멀리서도 몰려들게 하소서. 하늘이시여! 천명을 내려 주시어 사직을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 敬孝王五年. 是歲夏四月丁酉 奇轍權謙盧頙等 謀叛伏誅. 釋鄭之祥 爲巡軍提控 罷征東行省理問所. 時 元室 極爲衰弊 吳王張士誠 起於江蘇 事多騷亂矣.
천수기원사백삼십구년 경효왕오년. 시세하사월정유 기철권겸노책등 모반복주. 석정지상 위순군제공 파정동행성이문소. 시 원실 극위쇠폐 오왕장사성 기어강소 사다요란의.
천수 기원 439년은 경효왕(공민왕) 5년(1356)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에 기철, 권겸, 노책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임명하고, 정동행성이문소를 철폐하였다. 이때에 원나라는 극도로 쇠약해져 오왕 장사성이 강소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일이 많았다.
崔瑩等 及自高郵歸 上始從瑩等議 遂定西北恢收之計 先罷征東行省 繼遣印琁崔瑩等諸將 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 又遣柳仁雨貢天甫金元鳳等 收復雙城等地.
최영등 급자고우귀 상시종영등의 수정서북회수지계 선차정동행성 계견인당최영등제장 공압옥강이서팔첨파지 우견유인우공천보김원봉등 수복쌍성등지.
최영 등이 고우에서 돌아오자 임금이 비로소 최영 등의 견해를 좇아 드디어 서북 땅을 회복할 계책을 정하셨다. 먼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이어서 인당, 최영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시어 압록강 서쪽 8참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성 등 옛 땅을 수복하도록 하셨다.
十年冬十月 紅頭賊潘誠沙劉朱元璋等 十萬餘衆 渡鴨綠江寇朔州.
십년동시월 홍두적번성사유주원장등 십만여중 도압록강구삭주.
10년(1361) 겨울 10월, 홍두적 반성, 사류, 주원장 등 10만여 명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범해왔다.
十一年 賊襲安州 上將軍李蔭趙天柱死之.
십일년 적습안주 상장군이음조천주사지.
11년 도적이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十二月 上至福州 以鄭世雲爲總兵官. 世雲 性忠淸 自播遷以來 日夜憂憤. 以掃俔紅賊 恢復京城爲己任 上亦倚信. 世雲屢請 吻下哀痛之詔 以慰民心 遣使諸道 以督徵兵 上遂下詔 守門下侍中李嵓 傳曰 “天下安 注意相 天下亂 注意將 余文臣 懦不能軍 子其勉之.”
십이월 상지복주 이정세운위총병관. 세운 성충청 자파천이래 일야우분. 이소현홍적 회복경성위기임 상역의신. 세운누청 문하애통지조 이위민심 견사제도 이독징병 상수하조 수문하시중이암 전왈 “천하안 주의상 천하란 주의장. 여문신 유불능군 자기면지.”
12월 임금이 복주(안동)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으로 삼으셨다.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임금이 파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임금께서도 또한 믿고 의지하셨다. 세운은 애통하게 여기는 조서를 속히 내려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신을 모든 도에 보내 징병을 독려하시도록 임금에게 여러 번 청원하였다. 임금께서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이 세운에게 전하여 말하였다.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에게 기울이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장수에게 기울이는 법이다. 나는 문신이라 나약하여 능히 군사를 부리지 못하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世雲 詣都堂 憤言揚聲 謂柳淑以簽軍後期爲責 將行 嵓謂世雲曰 “今强寇猝至 皇城失守 乘輿播遷 爲天下之笑 三韓之恥 而公 首唱大義 仗鉞行師 社稷之再安 王業之中興 在此一擧 吾君臣 日夜望公之凱旋也.” 獎諭遣之 每日督勵諸將倡義 出謀授計. 安祐李珣(改名希泌) 李嵓從侄韓方信等諸將 皆從之有功.
세운 지도당 분언양성 위유숙이첨군후기위책 장행 암위세운왈 “금강졸지 황성실수 승여파천 위천하지소 삼한지치 이공 수창대의 장월행사 사직지재안 왕업지중흥 재차일거 오군신. 일야망공지개선야.” 장유견지 매일독려제장창의 출모수계. 안우이순(개명희비) 이암종질한방신등제장 개종지유공.
세운이 도당에 나아가 분연히 소리 높여 유숙에게 군사를 징집하면서 기한이 늦은 일을 책망하였다.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이암이 세운에게 말했다. “지금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의 치욕이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니,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한 판 싸움에 달려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바랄 뿐이로다.”이렇게 격려하여 전송한 뒤에 매일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독려하고 묘략을 내어 전해 주었다. 안우, 이순(희비로 개명한 이암의 종질), 한방신 등의 여러 장수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二十年辛亥二月甲戌 女眞千戶李豆蘭帖木兒 遣百戶甫介 以一百戶來投. 閏三月己未 北元遼陽省平章事劉益 王右丞等 以遼陽本高麗地 欲歸附我國 遣人來請. 時廷議不一 國事多難. 然 上遣鄭夢周如明 賀平蜀.
이십년신해이월갑술 여진천호이두란첩목아 견백호보개 이일백호래투. 윤삼월기미 북원요야성평장사유익 왕우승들 이요양본고려지 욕귀부아국 견인래청. 시정의불일 국사다난. 연상견정목주여명 하평촉.
20년(1371) 신해 2월 갑술에 여진 천호 이두란 첩목아가 백호 보개를 보내 투항해 왔다. 윤3월 기미일에,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이 요양이 본래 고구려의 땅이라 하여 우리나라에 귀순하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화를 청해왔다. 이때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러나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도록 하였다.
金義 殺明使蔡斌 朝野騷然 其欲言事者 幾希. 以故 未卽回報 劉益等 遂以金州復州蓋平海城遼陽等地 歸附于明.
김의 살명사채빈 조야소연 기욕언사자 기희. 이고 미즉회복 유익들 수이금주복주개평해성요양등지 귀부우명.
김의가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하자 조야가 시끄러워 이 일을 말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회신을 하지 않자,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嗚呼 當時淸論徒 因循是務 自失好機 竟不恢收舊疆 志士之恨 於斯爲深矣.
명호 당시청론도 인순시무 자실호기 경불회수구강 지사지한 어사위심의.
오호라! 당시 청론을 떠드는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평안함을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 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
江陵王 以先帝命卽位 時 遼東都司 遣承差李思敬等 到鴨綠江 張榜曰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元 所管軍人 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云云. 朝議紛紛不一 竟以督戰決定 大發中外兵馬 以崔瑩爲八道都統使.
강릉왕 이선제명즉위 시 요동도사 션승차이사경등 도압록강 장방왈 “철령이북이동이서 원속개원 소관군인 한인여진달달고려 잉속요동운운.” 조의분분불일 경이독전결정 대발중외병마이최영위팔도도통사.
강릉왕(우왕)이 선제의 명으로 즉위하셨다. 이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등 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이고 말하기를,“철령의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본래 개원에 속하는 땅이니 거기서 관할하던 군인, 한인, 여진, 달달, 고려는 여전히 요동에 속한다.”운운하였다. 조정의 중론이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다가 마침내 싸울 것을 결정하고, 나라 안의 병마를 크게 일으키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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