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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高句麗國本紀

 

高句麗之先 出自解慕漱 解慕漱之母鄕 亦其地也

고구려지선 출자해모수 해모수지모향 역기지야.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시작되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고구려 : 지명)이다.

 

朝代記曰解慕漱從天而降 嘗居于熊心山. 起兵於夫餘古都 爲衆所推 遂立國稱王 是謂夫餘始祖也 着烏羽冠 佩龍光劒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朝則聽事 暮則登天 無所令而管境自化 山無盜賊 禾穀滿野 國無事而民亦無事.

조대기왈 해모수종천이강 상거우웅심산. 기병어부여고도 위중소추 수립국칭왕 시위부여사조야. 착오우관 패용광검 승오룡거 종자백여인 조즉청사 모즉등천 무소영이관경자화 산무도적 화곡만야 국무사이민역무사.

 

조대기에 이르길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분을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검을 차고 오룡이 끄는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돌보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라 안이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檀君解慕漱之初降 在於壬戌四月初八日 乃秦王政八年也.

단군해모수지초강 재어임술사월초파일 내진왕정팔년야.

 

단군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임술(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 239) 48일로 곧 진나라 왕 정 8년이다.”

 

槀離郡王高辰 解慕漱之二子也 沃沮侯弗離支 高辰之孫也 皆以討賊滿功 得封也. 弗離支 嘗過西鴨綠 遇河伯女柳花 悅而娶之 生高朱蒙 時則壬寅五月五日也 乃漢主弗陵元鳳二年也.

고리군왕고진 해모수지이자야 옥저후불리지 고진지손야. 개이토적만공 득봉야. 불리지 상괴사압록 우하백녀유화 열이취지 생고주몽 시즉임인오월오일야. 내한주불릉원봉이년야.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는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곧 임인(단기 2255, BC 79) 55일이요, 곧 한나라 왕 불릉(弗陵 : 소제) 원봉 2년이었다.

 

弗離支薨 柳花 率子朱蒙 歸于熊心山 今舒蘭也. 旣長 周遊四方 擇迦葉原而居之 選於官家 爲牧馬. 未幾 爲官家所忌 與烏伊摩離陜父 逃至卒本.

불리지훙 유화 솔자주몽 귀우웅심산 금서란야. 기장 주유사방 택가섭원이거지 선어관가 위목마. 미기 위관가소기 여오이마리협부 도지졸본.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며 관가에서 말 기르는 일을 맡았다.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도망했다.

 

適 夫餘王無嗣 朱蒙 遂以王壻 入承大統 是謂高句麗始祖也.

적 부여왕무사 주몽 수이왕서 입승대통 시위고구려시조야.

 

때마침 부여왕(북부여 고무서단군)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단기 2276, BC 58) 이 분이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平樂十一年甲午十月 伐北沃沮滅之 明年乙未 自卒本移都訥見. 訥見 今常春朱家城子也.

평락십일년갑오시월 벌북옥저멸지. 명년을미 자졸본이도눌견. 눌견 금상춘주몽성자야.

 

(고주몽 성제)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 BC 27)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다음해 을미년에 졸본에서 눌견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눌견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이다.

 

琉璃明帝二十一年 又自訥見 移都于國內城 亦曰皇城 內有丸都山 山上築城 有事則居之.

유리명제이십일년 우자눌견 이도우국내성 역왈황성 내유환도산 산상축성 유사즉거지.

 

유리명제 21(단기2335, AD 2) 또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 여기에 머물렀다.

 

大武神烈帝二十年 帝襲樂浪國滅之. 東鴨綠以南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 未下.

대무신열제이십년 제습낙랑국멸지. 동압록이남속아 독해성이남근해제성 미하.

 

대무신열제 20(단기 2370, AD 37)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다만 해성 남쪽의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山上帝元年 遣弟杞須 攻破公孫度 伐玄菟樂浪滅之 遼東悉平.

산상제원년 션제셰수 공파공손도 벌현토낙랑멸지 요동실평.

 

산상제 원년(단기 2530, AD 197)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킴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

 

11

 

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母河伯女 郞剖卵降世 生而有聖德. □□□□□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 천제지자모하백녀 랑부난강세 생이성덕. ***** 명가순행남하 로유부여엄리대수.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화백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었다. □□□□□ 수레로 순행하며 남으로 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12-3

 

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 爲我連 浮龜應聲卽爲連 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왕임진언왈아시황천지자모하뱍녀랑추모왕. 위아연 *부귀응성즉위연 *부귀연후조도어불유곡 홀본서성산상이건도.

 

왕이 나룻가에 임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자라들을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하였다. 자라들이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추모왕은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13-4

 

焉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黃龍負昇天.

언불낙세위인견황룡래하영왕. 왕어홀본동강황룡부승천.

 

그러나 추모왕이 인간세상의 왕위를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졸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開物敎化經

개물교화경

 

大辯經曰 高朱蒙聖帝詔曰 天神造萬人一像 均賦三眞 於是 人其代天而能立於世也 況我國之先 出自北夫餘 爲天帝之子乎? 哲人 虛靜戒律 永絶邪氣 其心安泰 自與衆人 事事得宜 用兵 所以緩侵伐 行刑 所以期無罪惡. 故 虛極靜生 靜極知滿 知極德隆也. 故 虛以聽敎 靜以筐矩 知以理物 德以濟人. 此乃神市之開物敎化 爲天神通性 爲衆生立法 爲先王完功 爲天下萬世 成智生雙修之化也.”

대변경왈 고주몽성제조왈 천신조만인일상 균부삼진. 어시 인기대천이능립어세야. 황아국지선출자북부여 위천제지자호. 철린 허정계율 영절사기 기심안태 자여중인 사사득의 용병 소이완침벌 향형 소이기무죄악. 고 허극정생 정극지만 지극덕융야. 고 허이청교 정이광구 지이리물 덕이제인. 차내신시지개물교화 위천신통성 위중생입법 위선왕완공 위천하만세 성지생쌍수지화야.”

 

대변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성제께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셨다. “천신께서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의 아들이 아니더냐. 깨달은 이는 마음을 비어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 배달 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 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 교화를 이루느니라.”

 

 

乙巴素

 

乙巴素爲國相 選年少英俊 爲仙人徒郞 掌敎化者曰 參佺 衆選守戒 爲神顧托 掌武藝者曰 皂衣 兼操成律 爲公挺身也.

을파소위국상 선년오영준 위선안도렁 장교화자왈 참전 중선수계 위신고탁 장무예자왈 조의겸조성율 위공정신야.

 

을파소(고구려 산상왕 때의 재상)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嘗言於衆曰 神市理化之世 由民開智 日赴至治 則有所以亘萬世 不可易之標準也. 故 參佺有戒 聽神以化衆 寒盟有律 代天行功也. 皆自立心作力 以備後功也.”

상언어중왈 신시이화지세 유민개지 일부지치 즉유소이긍만세 불가역지표준야. 고 참전유계 청신이화중 한먕유율 대천행공야. 개자립심작력 이비후공야.”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 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동맹 : 제천의식]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고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乙支文德

 

乙支文德曰 道以事天神 德以庇民邦 吾知其有辭天下也. 受三神一體氣 分得性命精 自在光明 昻然不動 有時以感 發而道 乃通. 是乃所以體行三物德慧力 化成三家心氣身 悅滿三途感息觸. 要在日求念標 在世理化 靜修境途 弘益人間也

을지문덕왈 도이사천신 덕이비민방 오지기유사천하야. 수삼신일체기 분득성명정 자재광명앙연부동 유시이혹 발이도 내통. 시내소이체행삼물덕혜력 화성삼사심기신 열만삼도감식촉. 요재일구염표 재세이화 정수경도 홍익인간야.

 

을지문덕은 이렇게 말하였다. “()로써 천신(天神)을 섬기고, ()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감싸 보호하라. 나는 천하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을 때, 성품[]과 목숨[]과 정기[]를 나누어 받나니, 우리 몸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感應)하고, 이 조화의 대광명이 발현되면 도()를 통한다. ()를 통하는 것은 삼물(三物)인 덕()과 지혜[]와 조화력[]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여 실천하고, 삼가(三家)인 마음[]과 기운[]과 몸[]의 조화를 성취하며, 삼도(三途)인 느낌[]과 호흡[]과 촉감[]이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는 요체는 날마다 염표문(念標文)을 생각하여 실천하기에 힘쓰고, 세상을 신교(神敎)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 재세이화(在世理化), 삼도(三途) 십팔경(十八境)을 고요히 잘 닦아[靜修境途] 천지광명의 뜻과 대 이상을 지상에 성취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되는 데 있느니라.

 

桓國曰五訓 神市曰五事 朝鮮曰五行六政 夫餘曰九誓 三韓通俗 亦有五戒 曰 孝忠信勇仁 皆敎民以正平 而織群之意 存焉.

환국왈오훈 신시왈오사 조선왈오행육정 부여왈구서 삼한통속 역유오계 왈 효충신용인 개교민이정평 이직군지의 존의.

 

환국 시대에 5훈이 있었거, 신시 시대에 5, 고조선 시대에 56, 부여에 구서가 있었다. 또한 삼한의 공통된 풍속에 5계가 있었으니, 곧 효····인이다. 모두 백성을 공명정대하고 평등하게 가르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 뜻이 있었다.

 

念標文

 

(天地人經)

 

11檀君 道奚

 

天 以玄默爲大 其道也. 普圓 其事也 眞一.

천 이현묵위대 기도야. 보원 기사야 진일.

 

하늘은 까마득하며 침묵함의 최고를 그 도리로 삼는다. 널리 원만함이 그 일이니 참됨의 근본이다.

 

地 以蓄藏爲大 其道也. 效圓 其事也 勤一.

지 이축장위대 기도야 효원 기사야 근일.

 

땅은 쌓고 저장함을 그 도리로 삼는다. 두루두루 효과적으로 하는 것이 그 일이니 근면함의 근본이다.

 

人 以知能爲大 其道也 擇圓 其事也 協一.

인 이지능위대 기도야 택원 기사야 협일.

 

사람이란 지능을 활용함을 도리로 삼는다. 선택함이 그 일이니 협조의 근본이다.

 

故 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

고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

 

고로 한 분 신명이 내려와 채우시면 본성은 깨달음과 통하고 사는 동안 새상을 이치로 바꿔가며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

 

 

乙支文德 高句麗國石多山人也. 嘗入山修道 得夢天神而大悟. 每當三月十六日 則馳往摩利山 供物敬拜而歸 十月三日則登白頭山祭天. 祭天 乃神市古俗也.

을지문덕 고구려국석다산인야. 상입산수도 득몽천신이대오. 먀당삼월십육일 즉치왕마리산 공물경배이귀 시월삼일즉등백두산제천. 제천 내신시고속야.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매년 3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왔고, 10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柵城有太祖武烈帝紀功碑 東鴨綠之皇城 有廣開土境大勳蹟碑. 安州淸川江岸上 有乙支文德石像. 烏蘇里江外 有淵蓋蘇文頌德碑. 平壤牡丹峯中麓 有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 有乙巴素墓 雲山之九峯山 有淵蓋蘇文墓.

책성유태조무열제기공비 동압록지황성 유광개토경대훈적비 안주청천강안상 유을지문덕석상. 오소리강외 유연갸소문송덕비. 평양목단봉중록 유동천제 조천석. 삭주거문산서록 유을파소묘. 영산지구봉산 유연갸소문묘.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 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朝代記曰 東川帝 亦稱檀君 每當寒盟 祭迎三神于平壤. 今箕林窟 卽其祭所也.”

조대기왈 동천제 역칭단군 매당한맹 제영삼신우평양. 금기림굴 즉기제소야.

 

조대기에 이르길 동천제를 또한 단군이라 하였다. 해마다 한맹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아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은 천제를 지내던 곳이다

 

大迎祭典 始行隧穴 有九梯宮朝天石 行路之人 皆可指點也. 又有三輪九德之歌以獎之.

대영제전 시행수혈 유구제궁조천석 행로지인 대다지점야. 우유삼륜구덕지가이장지.

 

삼신상제님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졌다. 거기에 구제궁 조천석이 있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皂衣仙人 皆其選也 國人所矜式者也. 不然 何以加榮 與之爲等於王使者乎?

조의선인 개기선야. 국인소긍식야. 불연 하이가영 여지위등어왕사자호?

 

조의선인은 모두 선발된 사람인데, 사람들이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에게 영광을 더하여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廣開土境好太皇 隆功聖德 卓越百王 四海之內 咸稱烈帝. 年十八 登極于光明殿 禮陳天樂 每於臨陣 使士卒歌此於阿之歌 以助士氣. 巡騎至摩利山 登塹城壇 親祭三神 亦用天樂.

광개토경호태왕 융공성덕 탁월백왕 사해지냐 함칭열제. 년십팔 등극우광명전 예진천악 매어임진 사사졸가어어아지가 이조사기. 순기지마리산 등참성단 친제삼신 역용천악.

 

광개토경호태왕(廣開土境好太皇)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 사해(온세상) 안에서 모두 열제(烈帝 : 위대한 황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을 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다.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 百濟之介也. 百濟 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 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而還. 時則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 平凉 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 海東之盛 於斯爲最矣.

일자도해 소지격파왜인 왜인 백제지개야. 백제 선여왜밀통 사지연침신라지경. 제 궁솔수군 공취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먀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등성. 로차속리산 기조조제천이환. 시즉백제 신라가락제국 개입공부절. 거란 평량 개평복 임나이왜지속 막불칭신 해동지성 어사위최의.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와 밀접하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임천,와산,괴구,복사매,우슬산,진을례,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도중에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곧 백제,신라,가락 모든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다. 거란과 평량이 모두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이국,왜의 무리가 모두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번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 여기서 임나와 이국, 왜는 구분되어있다. 임나 일본부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先是 陜父奔南韓 居馬韓山中 從而出居者 數百餘家 未幾 歲連大裙 流離遍路. 陜父 乃知將革 誘衆塗糧 舟從浿水而下. 由海浦而潛航 直到狗邪韓國 乃加羅海北岸也. 居數月 轉徙于阿蘇山而居之 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 後 倂于任那 聯政以治 三國在海 七國在陸.

선시 협보분남한 거마한산중 종이출거자 수백여가. 미기 세연대군 유리편로. 협보내지장혁유중도량 주종패수이하. 유해초이잠항 직도구사한국 내가라해북안야. 거수월 전사우아소산이거지 시위다파라국지시조야. 후 병우임나 연정이치 삼국재해 칠국재륙.

 

이보다 앞서 협보가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산 속에 자리 잡으니 그를 따라와서 사는 자도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유리방황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는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곡을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 무리의 땅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었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지내다가 아소산에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무리의 시조이다. 뒤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워 다스렸다. 이때 세 무리는 바다에 있고, 일곱 무리는 육지에 있었다.

 

初 弁辰狗邪國人 先在團聚 是爲狗邪韓國 多婆羅 一稱多羅韓國 自忽本而來 與高句麗 早已定親 故常爲烈帝所制 多羅國 與安羅國 同隣而同姓 舊有熊襲城 今九州熊本城 是也.

초 진변구사국인 선재단취 시위구사한국 다파라 일칭다라한국 자홀본이래 여고구려 조이정친 고상위열제소제 다라국 여안라국 동린이동성 구유웅습성 금구주웅본성 시야.

 

처음에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먼저 들어와서 모여 살았는데, 이를 구야한 무리라 하였다. 다파라를 일명 다라한 무리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에서 아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늘 열제[고구려]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 무리는 안라 무리와 서로 이웃하여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웅습성을 있었는데, 지금의 구주의 웅본(구마모또)성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加羅海北岸...

 

倭在會稽郡東 東冶縣之東. 舟渡九千里 至那覇 而又渡一千里 至根島. 根島 亦曰柢島. 時 狗奴人 與女王相爭 索路甚嚴. 其欲往狗邪韓者 蓋由津島 加羅山 志加島 始得到末盧戶資之境 其東界則乃狗邪韓國地也.

왜재화계군동 동야현지동. 주도구천리 지나패 이우도일천리 지근도. 근도 역왈저도. 시구노인 여여왕상쟁 색로심엄. 기욕왕구사한자 개유진도 가라산 지가도 시득도말로호자지경 기동계즉내구사한국지야. .

 

왜는 회계군의 동쪽에 있는 동야현의 동쪽에 있었다. 배로 9000리를 가면 나패[나하]에 이르고, 또 다시 1000리를 가면 근도[根島 : 네시마]에 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柢島]라고도 한다. 당시에 구노사람이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구사한의 무리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쯔시마[津島], 가라산, 지가도(加羅山, 志加島)를 거쳐야 비로소 말로호자[말로국 : 읍루인이 모여 살던 곳]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동쪽 경계가 구사한 무리의 땅이다.

 

* 읍루(挹婁)는 숙신(肅愼)의 후예이자 말갈(靺鞨)의 전신으로,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후대의 여진족, 만주족의 조상으로 추측된다. 후한(後漢)에서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와 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

 

會稽山 本神市中經所藏處 而司空禹 齋戒三月而得 乃有功於治水故 禹伐石刻扶婁功於山之高處云.

회계산 본신시중경소장처 이사공우 제계삼월이득 내유공어치수고 우벌석각부루공어산지고처운.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황제중경이 간직되어 있던 곳이다. 사공(치수를 맡은 관리) 가 석달 동안 재계하고 이 책을 얻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우가 돌을 채취하여 부루태자의 은공을 새겨 산 높은 곳에 세웠다고 한다.

 

則吳越 本九黎舊邑 山越左越 皆其遺裔分遷之地也. 常與倭往來貿販 得利者漸多. 秦時 徐市 自東冶海上 直至那覇 經種島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 舊有徐福墓祠 或曰亶洲 徐福所居云.

즉 오월 본구려구읍 산월자월 개기유예분천지지야. 상여왜왕래무판 득리자점다. 진시 서불자동야해상 직지나해 경종도이연뢰호내해 시도기이. 이세 구유서복묘사 혹왈단주 서복소거운.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고, 산월,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옮겨 살던 땅이다. 항상 왜와 더불어 왕래하며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진나라 때 서불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고,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 내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에는 옛날 서복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어떤 이는 단주를 서복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장수왕

 

長壽弘濟好太烈帝 改元建興 仁義治國 恢拓疆宇 熊津江以北 屬我 北燕室韋諸國 皆入敍族焉. 又與新羅寐錦 百濟於瑕羅 會于南平壤 約定納貢戍兵之數.

장수홍제호태열왕 개원건흥 인의치국 회척강우 웅진강이북 속아 북연실위제국 개입서족언. 우여신라매금 벡제어하라 회우남평양 약정납공수병지수.

 

장수홍제호태열제는 건흥이라고 연호를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귀속 되었다. 북연, 실위 등 여러 나라들이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敍族]이 되었다. 또 신라의 매금과 백제의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에서 만나, 공물을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다.

 

文咨好太烈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 至是 國疆漸大.

문자호태열제 갸원명치 십일년 제노오월지지 속아 지시 국강점대.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연호를 고치셨다. 11년 제···월의 땅이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平岡上好太烈帝 有膽力 善騎射 乃有朱蒙之風 改元大德 治敎休明 大德十八年丙申 帝率大將溫達 往討碣石山 拜察山 追至楡林關 大破北周 楡林鎭以東悉平 楡林 今山西境.

평강상호태열제 유담력 선기사 내유주몽지풍 개원대덕 치교휴명 대덕십팔년병신 제솔대장온달 왕토갈석산 배찰산 추지유림관 대파북주 유림진이동실평 유림 금산서경.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시어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대덕으로 연호를 고치셨고 정치와 교화가 매우 밝아졌다. 대덕 18년 병신 열제께서 대장 온달을 거느리시고 갈석산과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셨다. 이로써 유림진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嬰陽武元好太烈帝時 天下大理 國富民殷.

영양무원호태열제시 천하대리 국부민은.

 

영양무원호태열제때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번성하였다.

 

隋主楊廣 本鮮卑遺種 統合南北之域 以其餘勢 侮我高句麗 以爲小虜侮慢上國 頻加大兵. 我旣有備 而未嘗一敗也.

수주양광 본선비유종 통합남북지역 이기여세 먀아고구려 이위소노매만상국 번가대병. 아기유비 이미상일패야.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남북의 땅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대비하고 있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弘武二十五年 廣又復東侵 先遣將兵 重圍卑奢城. 官兵戰不利 將襲平壤 帝聞之 欲圖緩兵 執遣斛斯政 適有瑋衣一仁者 自願請從而偕到 獻表於楊廣.

홍무이십오년 광우복동침 선견장병 중위비사성. 관경전불리 장습평양 제문지 욕도원병 집견곡사정 적유위의일인자 자원청종이해도 헌표어양광.

 

홍무 25(嬰陽武元好太烈帝 25, 단기 2947, A.D 614)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공격하려 하므로, 열제께서 이를 듣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斛斯政)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一仁)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여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를 올렸다.

 

廣於舡中 手表而讀未半 遽發袖中小弩 中其胸 廣驚倒失神. 右相羊皿 使負之 急移於小船而退 命懷遠鎭撤兵. 廣謂左右曰 予爲天下主 親伐小國而不利 是非萬世之所嗤乎?” 羊皿等 面黑無答.

광어강중 수표이독미반 거발유중소뇌 중기흉 광경도실신. 우상양명 사부지 금이어소선이퇴 명회원진철병. 광위좌우왈 여위천하주 친벌소국이불리 시비만세지소치호?” 양명등 면흑무답.

 

양광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내를 꺼내 쏘아 그의 가슴을 맞히니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이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러나서, 회원진으로 철수하도록 명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後人歌之曰 嗟汝蠢蠢漢家兒! 莫向遼東浪死歌. 文武我先號桓雄 綿亘血胤英傑多 朱蒙太祖廣開土 威振四海功莫加 紐由一仁楊萬春 爲他變色自靡繃. 世界文明吾最古 攘斥外寇保平和 劉徹楊廣李世民 望風潰走作駒過 永樂紀功碑千尺 萬旗一色太白峨.”

후인가지왈 차여준준한가아! 막향요동랑사가 문무아선호환웅 면긍혈윤영걸다 주몽태조광개토위진사해공막가 유유일인양만춘 위야변색자미붕 세계문명오최고 양척와구보평화 츄펄양광이세민 망풍궤주작구과 영락기공비천척 만기일색태백아.

 

후대사람들이 이 일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너희 한나라 아이들아! 요동을 향하여 헛된 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말라.

 

문무에 뛰어나신 우리 선조 한웅이 계셨고, 면면히 혈통 이은 자손, 영걸도 많아서 주몽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열제께서 사해에 위엄 떨치시어 공이 더할 나위 없어 유유, 일인, 양만춘은 저들의 얼굴빛 변하며 스스로 쓰러지게 하였네,

 

세계에서 우리 문명이 가장 오래고 바깥 도적 쫓아 물리치며 평화를 지켜 왔으니, 저 유철 양광 이세민은 풍채만 보고도 무너져 망아지처럼 달아났고 광개토열제 공덕 새긴 비석 천자나 되고 온갖 깃발 한 색으로 태백산처럼 높이 나부끼누나.“

 

乙支文德

 

乙支文德 高句麗國石多山人也 嘗入山修道 得夢天神而大悟. 每當三月十六日 則馳往摩利山 供物敬拜而歸 十月三日則登白頭山祭天. 祭天 乃神市古俗也.

을지문덕 고구려국석다산인야. 상입산수도 득몽천신이대오 매당삼월십육일 즉치왕마리산 공물경배이귀 시월삼일즉등백두산제천. 천제 내신시고속야.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의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16일이 되면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고, 10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신시의 옛 풍속이다.

 

弘武二十三年 隋軍一百三十餘萬 幷水陸而來攻 文德 能以奇計 出兵梢擊之 追至薩水 遂大破之. 隋軍 水陸俱潰 生歸遼東城今昌黎者 僅二千七百人. 廣遣使乞和 文德不聽 帝亦嚴命追之.

홍무이십삼년 수군일백삼십여만 병수륙이래공. 문덕 능이기계 출병초격지 추지살수 수대파지. 수군 수륙구궤 생귀요동성금창려자 근이천칠백인. 광견사걸화 문덕불청 제역엄명추지.

 

홍무 23(嬰陽武元好太烈帝 23, 단기 2945, A.D 612), 수나라 군사 130여만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책으로 그들을 공경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하여, 살아서 요동성(오늘의 창려성)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을지문덕은 듣지 않았고, 영양제도 또한 추격하도록 엄명을 내리셨다.

 

文德與諸將 乘勝直驅 一自玄菟道 至太原 一自樂浪道 至幽州 入其州縣而治之 招其流民而安之.

문덕여재장 승승직구 일자현토도 지태원 일자낙랑도 지유주 입기주현이치지 초기유민이안지.

 

문덕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며 곧바로 밀어붙여, 한쪽은 현토를 통과해 태원에 이르고, 한쪽은 낙랑 길로 유주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들을 불러모아 이들을 안심하게 하였다.

 

於是 建安建昌白岩昌黎諸鎭 屬於安市 昌平涵城新昌桶道諸鎭 屬於如祈 孤奴平谷造陽樓城沙溝乙 屬於上谷 和龍汾州桓州豊城鴨綠 屬於臨潢. 皆仍舊而置吏. 至是 强兵百萬 境土益大.

어시 건안건창백암창려제진 속어안시 창명함성신창송도제진 속어여기 고노퍙곡조양루성사구을 속어상곡 화룡분주환주풍성압록 속어임황. 개잉구이치리. 지시 강병백만 경토익대.

 

이렇게 하여 건안,건창,백암,창려등 여러 진은 안시성에 속하고, 창평,탁성,신창,용도등 여러 진은 여기군에 속하고, 고노,평곡,조양,누성,사구을은 상곡군에 속하고, 화룡,분주,환주,풍성,압록은 임황군에 속하게 되었다. 모두 옛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때에 이르러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더 커졌다.

 

楊廣壬申之寇也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以我瑋衣二十萬 滅其軍幾盡 此非乙支文德將軍一人之力乎? 若乙支公者 乃萬古造時勢之一聖傑也哉.

양광임신지구애 출사지성 전고미지유야. 이아위의이십만 멸기군기진 차비을지문덕장군일인지력호? 약을지공자 내만고조시세지일성걸야재.

 

양광이 임신(612)녀에 쳐들어올 때, 전에 없이 많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우리는 조의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한 시대의 흐름을 지어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시다.

 

文忠公趙浚 與明使祝孟 共登百祥樓 賦詩曰 薩水湯湯棠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哂餘.

문충공조준 여명사축맹 공등백상루 부시왈 살수탕탕당벽허 수병백만화위어 지금유득어초어 불만정부일신여.“

 

뒤에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 축맹과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물고기 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뭇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참고

 

을지문덕 시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신묘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 다하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교묘한 작전은 땅의 지혜 다했소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言止 지족원언지

 

만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다.

 

 

舊史曰 嬰陽武元好太烈帝 弘武九年 帝遣西部大人淵太祚 往討登州 擒殺摠管韋沖.”

구사왈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구년 제견서부대인연태조 왕토등주 슴살총관위충.”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수원호태열제의 홍무 9(598)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이셨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戍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 衰頹不振 權益執行 盡歸聖朝 劃定城邑 文武置吏.

선시 백제이병평정제노오월지지 설관서 색적민호 분봉왕작 둔수험새 군정부조 실준내지. 명치년간 벡제군정 쇠퇴부진 권익집행 진귀성조 획정성읍 문무치리.

 

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 납부를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명치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권익의 집행이 모두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을 구획 짓고 문무 관리를 두었다.

 

及隋作兵 有事南北 騷擾四起 害及生民. 帝威赫怒 恭行天討 四海之內 莫不聽命也.

내수작병 유사남북 소요사기 해급생민. 제위력노 공행천토 사해지내 막불청명야.

 

그 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삼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들을 토벌하시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然 隋主楊堅 陰藏禍心 敢出讐兵 密遣韋沖 摠管爲名 潰破官家 焚掠邑落. 乃遣將兵 擒殺賊魁 山東平服 海城謐然.

연 수주양견 음장화심 감출수병 밀견위충 총관위명 궤파관가 분략읍락. 내견장병 금살적괴 산동평복 해성밀연.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은 속으로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원수를 갚겠다고 군대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총관이란 이름으로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장수와 병사를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 지방이 다시 평정되고 해역이 평온해졌다.

 

是歲 堅又遣楊諒王世績等三十萬 來與戰 葯發定州 未至遼澤 値水亂而饋轉杜絶 馭疫幷熾.

시세 견우견양량왕세적등삼십만 래여전 약발정주 미지요택 치수난이궤전두절 어역병치.

 

이 해(598)에 양견은 또 양량, 왕세적등 30만 명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할 때,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서 군량 수송이 식량이 끊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周羅緱以兵據登州 徵集戰艦數百 自東萊泛船 趣平壤 爲我所覺. 殿而拒之以進 忽遭大風 而全軍漂沒.

주라구이병거등주 징집전함수백 자동래범선 취평양 위아소각. 전이거지이진 홀조대풍 이전군묠표.

 

주라구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時 百濟 請隋爲軍導 受我密諭而未果.

시 백제 청수위군도 수아밀유이미과.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안내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左將高成 密有親隋之心 陰壞莫離支北伐之計. 至是 屢請遣師 攻破百濟 有功.

좌장고성 밀유친수지심 음괴막리지북벌지계. 지시 누청견사 공파백제 유공.

 

좌장군 고성(후일 영류제)은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을지문덕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獨莫離支 力排衆議 强執以南守北伐之策 屢陳利害以從.

독막리지 역배중의 강집이남수북벌지책 누진이해이종.

 

그러나 막리지가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말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對唐 戰爭과 연개소문

 

 

及高成卽位 盡棄前帝之遺法 遣唐求老子像 使國人聽講道德經. 又動衆數十萬 築長城 自扶餘縣 至南海府 千有餘里.

급고성즉위 진기전제지유법 견당구노자상 사국인청강도덕경. 우동중수십만 축장성 자부여현지남해부 천유여리.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의 열제들의 모든 정책은 폐기하고,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의 상을 구해 와서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듣게 하였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 리였다.

 

時 西部大人淵蓋蘇文 請罷講道敎 又以停長城之役 極陳利害 帝甚不悅 奪蘇文之兵 命監築長城之役. 密與諸大人 議誅滅之.

시 서부대인연개소문 청파강도교 우이정장성지역 극진이해 제심불열 탈소문지병 먕감축장성지.역 밀여제대인 의주멸지.

 

이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으나 열제는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은밀하게 여러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하려고 의논하였다.

 

蘇文 先得聞知 乃嘆曰 豈有身死而國全之理乎? 事急矣 時不可失也.“ 悉集部兵 若將閱武者 盛陳酒饌 召諸大臣 共臨視之皆至.

소문 선득문지 내탄왈 이유신사이국전지리호? 사급의 시불가실의.“ 실집부병 약장열무자 성진주찬 소제대신 공임시지개지.

 

소문은 이 말을 먼저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하고, 휘하의 군사를 모두 모아 마치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성대하게 술과 음식을 차리고 여러 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열병식을 보자고 하니 모두가 참석하였다.

 

蘇文勵聲曰 門近虎狼而不救 反欲殺我乎?” 遂除之. 帝聞變而微服潛逃 至松壤而下詔 招募國人 無一人至者. 自不勝愧汗 遂自殞碎而崩.

소문려성왈 문근호랑이불구 반욕살아호?” 수제지. 제문변이미복잠도 지송양이하조 초모국인 무일인지자 자불승괴한 수자운쇄이붕.

 

이때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호랑이와 여우가 문 가까이 왔거늘,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열제는 변고를 전해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들이 한 명도 오는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셨다.

 

朝代記曰 淵蓋蘇文 一云蓋金 姓淵氏 其先 鳳城人也 父曰太祚 祖曰子遊 曾祖曰廣 幷爲莫離支.“

조대기왈 연개소문 일운개금 성연씨 기선 봉성인애 부왈태조 조왈자유 증조왈광 병위막리지.“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이다. 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고,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弘武十四年五月十日生 年九歲 選爲瑋衣仙人 儀表雄偉 意氣豪逸. 每與軍伍 列薪而臥 手瓠而飮. 群焉而盡己 混焉而辨微.

홍무십사년오월십일생 년구세 선위위의선인 의표웅위 의기호일. 매여군오 열신이와 수호이음. 군언이진기 혼언이변미.

 

홍무 14(영양제 14, 603) 510일으로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몸가짐이 웅위하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하였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賞賜必分給 誠信周護 有推心置腹之雅量. 至有緯地經天之才 人皆感服 無一人異懷者也.

상사필분급 성신조획 유추심치복지아량. 지유위지경천지재 인개감복 무일인이회자야.

 

하사 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상대방의 진심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다 감복하고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然 用法嚴明 貴賤一律 若有犯者 一無假借. 雖當大難 少不驚心 與唐使酬言 亦不屈志. 常以自族陰害爲小人 能敵唐人爲英雄.

연 용법엄명 귀천일율 약유범자 일무가차. 수당대난 소불경심 여당사수언 역불굴지. 상이자족 음해위소인 능적당인위영웅.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고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여겼다.

 

喜焉而下賤可近 怒焉而權貴俱震 眞一世之快傑也 自言生於水中 能潛泳竟日 尤健不疲 衆咸驚伏地 羅拜曰 滄海龍神 復爲化身矣.”

희언이하천가근 노언이권귀구진 진일세지쾌걸야. 자언생어수중 능잠영경일 우건불피 중함경복지. 나배왈 창해용신 복위화신의.”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두려워하니 참말로 일세의 호걸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온종일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하니, 무리들 모두가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창해의 용신이 다시 화신하였다라고 말하였다.

 

蘇文 旣放高成帝 與衆共迎高臧 是爲寶臧帝. 蘇文 旣得志 行萬法爲公之道. 成己自由 開物平等. 三忽爲佺 瑋衣有律.

소문 기방고성제 여중공영고장 시위보장제. 소문 기득지 행만법위공지도. 성기자유 개물평등. 삼홀위전 위의유율.

 

연개소문은 마침내 고성제(27세 영류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함께 고장을 맞이하니 이분이 보장제이시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본디 자신을 이루어 자유한 마음으로[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開物平等]되었다. 또한 세 마을에 전(: 신선)을 두고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注力國防 備唐甚盛 先與百濟上佐平 俱存立義 又請新羅使金春秋 館於私邸 曰

주력국방 비당심성 선여백제상좌평 구존입의 우청신라사김춘추 관어사저 왈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唐人 多悖逆 近於禽獸 請吾子須忘私仇 自今三國 敍族合力 直屠長安 唐醜其可擒也 戰勝之後 仍舊地而聯政 仁義共治 而約相勿侵 爲永久遵守之計 何如.” 勸再三 春秋終不聽.

당인 다패역 근어금수 청오자수망사구 자금삼국 서족함볅 직도장안 당추기가금야. 전승지후 잉구지이연정 인의공치 이약상물침 위영구준수지계 하여.“ 권제삼 춘추종불청.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인의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렇게 두 번, 세 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다.

 

 

惜哉!

석재!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開化四年 唐主李世民 謂群臣 曰 “遼東 本諸夏之地. 隋氏 四出師而不能得 予今出兵 欲爲報諸夏子弟之讐.” 世民 親佩弓矢 率李世勣程名振等數十萬 到遼澤. 泥榧二百餘里 人馬不可通. 都尉馬文擧 策馬奔擊 旣合戰 行軍摠管張君叉 大敗 李道宗 收散軍.

개화사년 당주이세민 위군신왈 “요동 본제하지지. 수씨 사출사이불능득 여금출병 욕위보재하자제지수.” 세민 친페궁시 솔이세적정명진등수십만 도요택. 니비이백여리 인마불가통. 도위마문거 책마분격 기합전 행군총관장군차 대패 이도종 수산군.

 

개화 4년(28세 보장제, 645)에,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 정명진 등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렀다. 진흙이 200여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하니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世民 自將數百騎 與世勣會 攻白岩城西南. 城主孫代音 詐遣請降 而實欲乘隙反擊 世民 至安市城 先自唐山 進兵攻之.

세민 자장수백기 여세적회 공백암성서남. 성주손대음 사견청항 이실욕승극반격. 세민 지안시성 선자당산 진병공지.

 

세민은 몸소 수백 기병을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인 손대음은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北部褥薩高延壽 南部褥薩高惠眞 率官兵及靺鞨兵十五萬 引至直前 連安市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兵掠其軍馬. 唐奴不敢犯 欲歸則泥榧爲阻 坐困必敗.

북부욕살고연수 남부욕살고혜진 솔관병급말갈병십오만 인지직전 연안시위루 거고산지험. 식상중지속 종병략기군마. 당노불감범 욕귀득니비위저 좌곤필패.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주저없이 앞으로 나아가 안시성에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의 곡식을 먹으면서, 병력을 종횡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군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패할 수밖에 없었다.

 

延壽 引軍直前以進 料去安市四十里 遣人問於對盧高正義. 以其年老習事也.

연수 인군직전이진 요거안시사십리 견인문어대노고정의. 이기년노습사야.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다. 그는 연륜이 깊어 모든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正義曰 “世民 內芟群雄 化家爲國 亦不凡常 今據全唐之兵而來 其銳 不可輕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道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

정의왈 “세민 내삼군웅 화가위국 역불범상 금거전당지병이래 기예 불가경야. 위오계자 막약돈병부전 광일지구 분견기병 단기양도 양도기진 구전부득 욕귀무로 내가승야.”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을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의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 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식량이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延壽從其計 賊來則拒 賊去則止. 又遣奇兵 焚奪糧路. 世民 百計誘之以賄 面從而內違 數遣陰襲陷裂 賊之死傷 酷多. 延壽等 與靺鞨 合兵爲陣 持久作戰 一夜豹變 急襲電擊 世民 幾被圍迫 始有懼色.

연수종기계 적래즉거 적거즉지. 우견기병 분탈양로. 세민 백계유지이회 면종이내위 수견음습함렬 적지사상 혹다. 연수등 여말갈 합병위진 지구작전 일야표변 금습전격 세민 기피위박 시유구색.

 

고연수는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날랜 병사들을 보내 군량을 불태우거나 빼앗았다.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부하여, 수시로 공격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고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진을 치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世民 又復遣使 懷財寶謂延壽曰 “我以貴國强臣 弑其君上故 來問罪 至於交戰 入貴境 寢粟不給故 間有焚掠幾處而已 俟貴國修禮納交則必復矣.”

세민 우복견사 회재보위연수왈 “아이귀국강신 시기군상고 래문죄 지어교전 입귀경 침속불급고 간유분략기처이이 사귀국수예납교즉필복의.”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귀국의 힘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 온 것이다. 이제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는데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延壽曰 “諾 退貴兵三十里 則吾將見帝矣. 然 莫離支 爲國柱石 軍法自在 不須多言. 汝君世民 廢父弑兄 淫納弟騙 此可問罪也 以此傳之.” 於是 四遣督察 益加守備 依山自固 乘虛奇襲 世民 百計無術 痛恨遼東出兵之不利 而已悔無及焉.

연수왈 “락 퇴귀병삼십리 즉오장견제의. 연 막리지 위국주석 군법자재 불수다언. 여군세민 폐부시형 음납제편 차가문죄야 이차전지.” 어시 사견감찰 익가수비 의산자고 승허기습 세민 백계무술 통한요동출병지불리 이이회무급언.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 리를 후퇴하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기둥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그대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죄를 물을 만하다. 이대로 전하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에 힘쓰게 하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를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 수가 없어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柳公權小說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 告英公之麾黑旗被圍 世民大恐.” 雖終自脫而危懼如彼 新舊唐書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恥乎.

유공권소설왈 “육군위고구려소승 재장부진 후자 고영공지휘흑시피위 세민대공”. 수종자탈이위구여피 신구당서급사마공텅감 불언자 이비위국휘치호.

 

유공권의 소설에, “당나라의 육군(六軍)은 고구려가 세를 타게 되자 장수들이 전공을 떨치지 못하였고, 척후병이 와서 영공(이세적)의 군기가 흑기(黑旗 : 고구려의 군기)에 포위당했다고 보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세민이 비록 끝내 탈출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구당서』와 사마공의『통감』에 이러한 사실을 적지 않은 것은,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한 것[爲國諱恥]이 아니겠는가?

 

李世勣 言於世民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 早已失輸遼東今昌黎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高句麗 斷其輸送 勢必窮矣 不若先攻安市 安市下則鼓行而取建安耳.”

이세적 언어세민왈 "건안재민 안시재북 오군량 조이실수요동금창려 금유안시이공건안 약고구려 단기수송 세필궁의 불약선공안시 안시하즉고행이취건안이."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이미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성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가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끊으면 대세는 반드시 궁하게 될 것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여유 있게 가서 건안을 빼앗으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安市城人 望見世民旗蓋 輒乘城鼓油 唾罵世民 數其罪目 以告于衆 世民 怒氣極甚 以爲陷城之日 男女盡坑之. 安市城人 聞之 益堅守 攻之不下.

안시성인 망견세민기개 첩승성고유 타매세민 수기죄목 이고우중 세민 노기극심 이위함성지일 남녀진갱지. 안시성인 문지 익견수 공지불하.

 

안시성의 사람들이 멀리서 세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성위에 올라 북치고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으며 세민을 욕하고 그의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군중에게 고하니 세민은 노기가 극에 달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 하겠다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時 張亮兵 在沙卑城 而欲召之 未果 低回失機 張亮 將移兵襲烏骨城 反爲官兵所敗 李道宗 亦在遭險不振 於是 唐奴諸將 議自相謗 世勣 獨以爲高句麗 傾國救安市 不若捨安市而直瘙平壤.

시장량병 재사비성 이욕소지 미과 조회실시 장량 장이병습오골성 반위관병소패 이도종 역재조험부진 오시 당노제장 의자상방 세적 독이위고구려 경국구안시 불약사안시이직소평양.

 

이때에 수군 제독 장량의 군사는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들을 부르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우리 군사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 역시 험준한 길을 만나 군세를 떨치지 못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당나라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서로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고구려는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장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長孫無忌 以爲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泯幸. 今建安新城之敵衆 數十萬 高延壽所率靺鞨 亦數十萬. 國內城兵 若又回烏骨城 而遮樂浪諸路之險 如是則彼勢日盛 急於迫圍. 而我翫敵 悔無及焉. 不如先攻安市 次取建安然後. 長驅而進 此萬全之計也.

장손무기 이위천자친정 이어제장 불가승위민행. 금건안신성지적중 수십만 고연수소솔말갈 역수십만. 국내성병 약우회오골성 이차낙랑제로지험 여시즉피세일성 급어박위. 이아완적 회무급언. 불여선공안시 차취건안연후. 장구이진 차만전지계야.

 

장손무기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천자의 친정(친히 정벌)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지금 건안, 신성에 있는 적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 군사도 역시 수십만이다. 만약 국내성의 군사가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의 험한 곳을 차단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서 우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런 후에 멀리 적을 몰아 쫓으며 진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未之決 安市城主楊萬春 聞之 乘夜深 以數百精銳 飭城 而下賊陣 自相踐踏 殺傷甚多. 世民 使李道宗 築土山於城東南隅 官兵 從城缺出擊 遂奪土山. 塹而守之 軍勢益振. 唐奴諸陣 殆失戰意.

미지결 안시성주양만춘 문지 승야심 이수백정예 칙성. 이하적진 자상천답 살상심다. 세민사이도종 축터산어성동남우 병관 종성결출전 추탈토산. 참이수지 군세익진. 당너제진 태실전의.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안시성주 양만춘이 그 사정을 듣고 야음을 틈타 수백 명의 정예 군사로 성을 단단히 지키며 적진을 무너트리니 서로 짓밟혀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을 시켜 토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성 한 귀퉁이가 무너진 곳으로 나와 쳐서 토산을 빼앗았다. 거기에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 떨쳤다. 이리하여 당나라의 모든 진영은 거의 싸울 힘을 잃었다.

 

傅伏愛 以戰敗斬 道宗以下 皆徒跣請罪.

부복에 이전패참 도종이하 개도선청죄.

 

부복애는 패전 책임으로 참수 당하고, 도종과 그 부하들은 모두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莫離支 率數百騎 巡駐灤坡 詳問情形 遣命摠攻四擊. 延壽等 與靺鞨夾攻 楊萬春 登城督戰 士氣益奮 無不一當百矣.

막리지 솔수백기 순주난파 상문정형 견명총공사격. 연수등 여말갈협공 양만춘 등성감전 사기익분 무불일당백의.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는 더욱 높아져서 모두 일당백의 기세를 보였다.

 

世民 憤不自勝 敢出決戰. 楊萬春 乃呼聲張弓. 世民出陣 矢浮半空 遂爲所中 左目沒焉. 世民 窮無所措 從間道遁 命世勣道宗 將步騎數萬爲殿. 遼澤泥榧 軍馬難行 命無忌 將萬人 剪草塡道 水深處以車爲梁. 世民自繫薪於馬焦以助役.

세민 분불자승 감출결전. 양만춘 급호성장궁. 세민출진 시부반공 수위소중 좌목물언, 세민궁무소조 종간도순 명세적도종 장보기수만위전, 요택니비 군마난행 명무기 장만인 전초진도수심처이거위량. 세민자계신어마초이조역.

 

세민은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고 날아온 화살이 왼쪽 눈에 적중하여 눈이 없어졌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습지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고 길을 메우며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세민도 몸소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는 일을 독려하였다.

 

冬十月 至蒲吾渠 駐馬督塡道. 諸軍渡渤錯水 暴風雪 占濕士卒 多死者. 使燃火於道以待之.

동시월 지포오거 주마독진도. 제군도발착수 폭풍설 점습사졸 다사자. 시연화어도이대지.

 

겨울 10월에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널 때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고 기다렸다.

 

時 莫離支淵蓋蘇文 乘勝長驅 追之甚急. 鄒定國 自赤峰至河間縣 楊萬春 直向新城 軍勢大振. 唐奴 多棄甲兵而走.

시 막리지연개소문 승승장구 추지심급. 주정국 자적봉지하간현 양만춘 직향신성 군세대진. 당노 다기갑병이주.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은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 하간현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方渡易水時 莫離支 命延壽 改築桶道城 今高麗鎭也. 又分遣諸軍 一軍 守遼東城 今昌黎也. 一軍 悶隨世民 一軍 守上谷 今大同府也.

방도역수시 막리지 명연수 개축용도성 금고려진야. 유뷴굔재군 일군 수요동성 금창려야. 일군 민수세민 일군 수상곡 금대동부야.

 

드디어 역수를 건널 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어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고, 한 쪽 군대는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다른 군대로는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於是 世民 窮無所措 乃遣人乞降. 莫離支 率定國萬春等數萬騎 盛陳儀仗 鼓吹前導 入城長安. 與世民約 山西河北山東江左 悉屬於我.

어시 세민 궁무소조 내견안걸항. 막리지 솔정국만춘등수만기 성진의장 고취전도 입성장안. 여세민약 산서하불산동강좌 실속어아.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 하였다.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북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약정하여,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양자강 하류 북쪽 지역]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 여기서 장안=서안??? 도대체 고구려 강역이 만주 요동일대????

 

先是 高句麗 與百濟 外競俱存. 遼西地 有百濟所領 曰遼西晉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 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署郡縣 曰松江會稽吳城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 百濟郡廢.

선시 고구려 여백제 외경구존 요사지 우백제소령 왈요서진평 강남유월주 기속현 일왈산음 이왈산월 삼왈좌월. 지문자제 명치십일년십일월 공취월주 대서군현 왈송화회계오성좌월산월천주. 십이년 이신라민어천주이실지. 시세 이백제불공 견병공취요서지평등군 백제군폐.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와 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 문자제(21세) 명치 11년(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회계,오월,좌월,산월,천주라 했다. 명치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진평 등의 군을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 여기보면 백제의 위치는 요서... 월주는 수나라 당시 지금의 항주 일대....

 

王介甫曰 “淵蓋蘇文 非常人也 果然 莫離支 在則高句麗與百濟俱在 莫離支 去則百濟與高句麗俱亡 莫離支 亦人傑也哉.”

왕개보왈 “연개소문 비상인야. 과연 막리지 재즉고구려여백제구재 막리지 거즉백제여고구려구망. 막리지 역인걸야재.”

 

왕개보가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莫離支 臨終 顧謂男生男建曰 “爾兄弟 愛之如水 束箭則强 分箭則折 須無忘 此將死之言 貽笑於天下隣國之人.” 時則開化十六年十月七日也 墓在雲山之九峰山也.

막리지 임종 고위남생남건왈 “이형제 애지여수 속전즉강 분전즉절 수무망 차장사지언 이소어천하인국지인.” 시즉개화십육년시월칠일여. 묘재운산지구봉산야.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꺾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그 날이 개화 16년 10월 7일이다. 묘는 구봉산 구름낀 산에 있다.

 

高麗鎭 在北京安定門外六十里許 安市城 在開平府東北七十里 今湯池堡 高麗城 在河間縣西北十二里 皆太祖武烈帝所築也.

고려진 재북경안정문외육십리허 안시성 재개평부동북칠십히 금탕지보 고려성 재하간현서북십이리 개탸조무열제소축야.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쯤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이 지명들의 위치는 북경 근처...

 

唐樊漢 有高麗城懷古詩一首 傳於世 其詩曰

당번한 유고려성회고시일수 전어세 기시왈

 

당나라 시인 번한이「고려성 회고시」한 수를 지어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僻地城門闢 雲林雉堞長 벽지성문벽 운림치첩장

 

벽지로 나가는 관문이 열리고 구름 속에 치첩(낮은 방어성)이 길게 늘어서있다.

 

水明留晩照 沙暗燭星光 수명유만조 사암촉성광

 

강물은 석양을 밝게 비추고 모래알은 촛불과 별 빛처럼 빛나고

 

疊鼓連雲起 新花拂地粧 루고연운기 신화불지장

 

각 성루의 북소리와 봉화연기가 연달아 오르니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들 처럼 온 땅을 단장하네

 

居然朝市變 無復管絃額 거연조시변 무복관현액

 

변해버린 조정거리에 머물지만 음악소리나 현판들을 볼 수 없네

 

荊棘黃塵裡 蒿蓬古道傍 형극황진리 고봉고도방

 

가시덤불이 먼지에 가리웠고 옛 길에는 잡초만 가득하네

 

輕塵埋翡翠 荒豌上牛羊 경진매비취 황완상우양

 

비취는 날리는 먼지에 가려졌고 황완(?)은 소나 양위에 걸쳤고

 

無奈當年事 秋聲肅雁行 무내당년사 추성숙안행

 

올 해 벌어진 일이야 어쩔수 없고 을씨년한 가을 바람 소리에 기러기만 나르네

 

 

予雖不文 追其韻而次之 曰 여수불문 추기운이차지 왈

 

내 비록 문장가는 아니지만 운율애 맞춰 덧붙인다.

 

遼西尙存古城墟 想必名邦運祚長 요서상존고성허 상필명방운조장

 

요서땅엔 여러 성터들이 남아있으니 추측컨대 이름난 나라들의 좋은 운은 길게 남는가 보다

 

燕峀層巇多戰色 遼河湯棠共天光 연수층희다전색 요하탕당공천광

 

제비굴들은 전운이 감돌고 요하는 힘차게 흘러 하늘 빛을 반사하니

 

風林空谷演舞態 仙禽高樹欲啼粧 풍림공곡연무태 선금고수욕제장

 

바람만 가득한 골짜를 노닐던 선금(학)은 높은 가지위에서 울며 단장하는데

 

干滴關防一夕變 呼賣振鈴聞凄額 간적관방일석변 호가진영문처액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국경수비군들이 하룻밤 사이 변하고 가격을 부르는 방울 소리는 처량하구나

 

燕凉元來盡我有 官兵久鎭飮馬傍 연략원래진아유 관병구진음마방

 

연나라가 탈취한 우리 것들은 군사들이 진치고 말 먹이던 곳

 

英雄不作時事去 無復驅敵如驅羊 영웅불작시사거 무복구적여구양

 

영웅은 잠깐의 일들을 만들지 않으니 다시는 적과 양을 좆을 일 없다

 

今我弔古無限意 爲櫃核郞萬里行 금아조고무한의 위궤핵랑만리행.

 

지금 우리는 어린 아이들의 관을 먼 곳으로 보내며 그들을 애도하네...

 

 

朝代記曰 太祖隆武三年 築遼西十城以備漢十城

조대기왈 태조융무삼년 축요서십성이비한십성

 

조대기에 이르길 태조융무왕 3년 한나라 10성에 대비하려 10개 성을 세우니

 

一曰安市 在開平府東北七十里 일왈안사 재개평부동북칠십리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二曰石城 在建安西五十里 이왈석성 재건안서오십리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三曰建安 在安市南七十里 삼왈건안 재안시남칠십리

 

셋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四曰建興 在幄河西 사왈건흥 재악하서

 

넷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이 있고,

 

五曰遼東 在昌黎西南境 오왈요동 대창려서남경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창려의 서쪽 경계에 있고,

 

六曰豊城 在安市西北一百里 육왈풍성 재안시서북일백리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七曰韓城 在豊城南二百里 칠왈한성 재풍성남이백리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八曰玉田堡 舊遼東國 在韓城西南六十里 팔왈옥전보 구요동국 재한성서남육십리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九曰澤城 在遼澤西南五十里 구왈 택성 재요택서남오십리.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十曰遼澤 在黃河北流左岸 십왈요택 재황하북류좌안

 

열째는 요택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에 있다.

 

五年春正月 又築白岩城 桶道城 오월춘정월 우축백암성 용도성

 

융무 5년(57) 봄 정월에,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으셨다.

 

三韓秘記曰 舊志云 遼西有昌遼縣 唐時 改遼州. 南有碣石山而其下則白岩城. 亦唐時所謂岩州 卽此也. 建安城 在唐山境內 其西南爲開平 一云蓋平 唐時亦稱蓋州 是也.

삼한비기왈 구지운 요서유창료현 당시 개요주. 남유갈석산이기하즉백암성. 역당시소위암주즉차야. 건안성 제당산경내 기서남위개평 일운개평 당시역칭개주 시야.

 

삼한비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지에 말하기를, 요서의 창료현이 있는데, 당나라 때에 요주로 고쳤다. 그 곳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아래가 백암성이다. 당나라 때에 암주라 부르던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 경계 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開平)인데 일명 개평(蓋平)이라 하였으니, 당나라 때 개주는 이곳이다.

 

資治通鑑曰 玄菟郡 在柳城盧龍之間. 漢書 馬首山 在柳城西南 唐時築土城.

자치통감왈 현토군 재유성노룡지간. 한서 마수산 재유성서남 당시축토성.

 

 

자치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마수산의 유성 서남에 있는데 당나라 때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太祖大王 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以備漢兵.

태조대왕 삼년춘이월 축요서십성이비한병.

 

요서에 성을 쌓아 후한의 침략에 대비하다[552()]

 

 

三國史記 卷第十四 高句麗本紀 第二

 

慕本王 二年春遣將襲漢 北平 漁陽 上谷 大原而遼東大守蔡彤以恩信待之乃復和親.

모본왕 이년춘견장습한 북평 어양 상곡 대원이요동대수채동이은신대지내복화친.

 

 

2(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北平)1)·어양(漁陽)2)·상곡(上谷)3)·태원(太原)4)을 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蔡彤)5)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냈다.

 

1

 

후한서85 고구려전 에는 右北平이라고 하였다. 본문은 후한서에서 끌어 온 것이므로 후한서에 따라 右北平이 옳다고 하겠다. 右北平은 현재의 중국 하북성 豊潤縣이다.

 

2

 

현재의 중국 북경시 密雲縣이다.

 

3

 

현재의 중국 하북성 懷來縣 남쪽이다.

 

4

 

현재의 중국 山西省 太原市이다.

 

5

 

중종 임신간본에서는 으로 되어 있으나 후한서20 祭傳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후한 광무제 건무 17(41)에 요동태수로 임명된 이래 30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요동 방면에서 명성을 떨쳤다. 후한서20 祭傳 참조.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王莽初發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強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 田譚追擊戰死莽令其將嚴尤擊之誘句驪侯尤騶入塞斬之傳首長安莽大說更名高句驪王為下句驪侯於是貊人寇邊愈甚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

왕망초 발고려병이벌흉노 기인불욕행 강박견지 개망출새위구도. 요서대윤 전담추격 전사. 망령기장엄우격지 유구려후추입새 참지 전수장안. 망대열 경명고구려왕위하구려후 어시맥인구변유심. 건무팔년 고구려견사조공 광무복기왕호.

 

왕망(전한시대 신하요 신나라 왕) 초반 고구려 병력으로 흉노를 치려는데 고구려가 따르지 않아 강제로 파견하려 했으나 모두 요새를 떠나 도적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이 도적 무리를 추격하여 싸워 죽였다. 왕망이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고구려 제후 우추를 요새로 유인해 참수하여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바꾸었는데 당시 맥족이 변경을 심하게 도적질하였다. 건무 8(후한 광무제의 연호)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가 그 호칭을 다시 왕으로 바꾸었다.

 

 

 

 

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懷之及長勇壯數犯邊境和帝元興元年春復入遼東寇略六縣太守耿夔擊破之斬其渠帥安帝永初五年宮遣使貢獻求屬玄菟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

이십삼년동 구려잠지낙대가대승등만여구지낙랑내속. 이십오년춘 구려구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이요동태수제동이은신초지 개복관곡. 후구려왕궁생이개목안시 국인회지 내장용장 수범변경. 화제원흥원년춘 복입요동 구략육현 태수경기격파지 참기거수. 란제영초오년 궁견사공헌 구속현토. 원초오년 복여예맥구현토 공화려성.

 

23년 겨울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부족장) 대승이하 10000여가구가 낙랑으로 귀속했다. 25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침입하니 요동태수 제동이 감사의 마음으로 초대하나 모두 요새로 돌아갔다. 훗날 고구려왕이 문재를 깨달아볼 능력이 되니 무리들이 결심하여 강성해져 여러번 국경을 침범하였다. 和帝(후한 4대황제) 원흥 원년 봄 다시 요동으로 침입하여 6개현을 노략질하고 태수 경기가 격파하여 그 우두머리를 참수하였다. 安帝(동진 10대왕) 5년 사자를 보내 공물을 보내고 현토군으로 귀속하였다. 5(?) 예맥 유랑민들이 현토를 노략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 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阸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건광원년춘 유주자사빙환 현토태수도광 요동태수채풍등장병출새 격지포참예맥거수 획병마재물. 궁내견사자수성장이천여인역광등 견사사항: 광등신지 수성인거험 이차대군애이잠견삼천인공현토 요동 분성곽 살상이천여인. 어시발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속국삼천여기동구지 이맥인이거. 하 복여요동선비팔천여인공요대.

 

[1] 건광(후한 안제의 연호) 원년 봄 유자자사빙환 현토태수도광 요동태수체풍등이 요새에사 병력을 일으켜 예맥을 쳐 우두머리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에서 아들 수성을 장수로 2000여명을 보내 도광 무리에 맞서게 하였고 사신을 통해 거짓 항복문서를 보내니 도광등이 믿었다. 수성이 험로를 차지하고 대군의 이동을 막고 몰래 3000명을 보내 현토 요동의 성고가을 불 태우고 2000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했다. 당시 광영 어양 우북평 탁군에 속한 고구려 3000기병을 구했는데 이는 가 있던 예맥인들이다. 여름 요동 선비족 8000명과 한나라 요동부대를 공격하였다.

 

[]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余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并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

[]살약리인. 채풍등추격어신창 전몰 공조경모 병조연용단 병마연공손포이신한풍 구몰어진 사자백여인. 추 궁수솔마한 예먁수천기위현토. 부여왕견자위구대장이만여인 여주군 역토파지 참수오백여급.

 

한나라 관리들을 죽이고 노략하였다. 체풍등을 신창까지 추격하여 공조(한나라 군대의 문관) 경모, 병조(병무를 보는 관리) 연용단, 병마연(군속) 공손포를 잡아 풍과 무리를 전몰시켰는데 모두 진지에서 몰살하였는데 모두 100명이 죽었다. 가을 고구려왕이 마한과 예맥군 수천기와 현토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장수로 20000명을 보내 주()의 군사와 합쳐 토벌하고 500명을 참수하였다.

 

延豹渤 卒本人 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 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 後 率衆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 納穀五千石. 移都訥見 而先自願納 招撫流亡 以勤王事. 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歿 時平樂十三年丙申 春三月也.

연타발 졸본인 래왕어남북갈사 이리재치부 지누거만. 음조주몽 기창기입도지공 거다. 후 솔중전서구려하이매염지리. 급고주몽성제 벌북옥저 납고오천석. 이도눌현 이선자원납 초무유망이근왕사. 이공득봉어좌원 이년팔십목몰 시평락십삼년병신 춘삼월야.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어 많은 돈을 모았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 장사를 하여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눌현으로 도읍을 옮길 때는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어루만져 위로하고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에 봉토를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때는 평락 13(25) 병신년 봄 3월이다.

 

高朱蒙 在位時 嘗言曰 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 慮將不利於二子 歲庚寅三月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而居之.

고주몽 재위시 상언 왈 약적자유리래 당봉위태자.” 소서노 려장불리어이자 새경인삼월 인인득문패대지지비물중 남분지진번지간 근해벽지이거지.

 

고주몽께서 재위하실 때 일찍이 말씀하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다가, 경인년 3월에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 가까운 외진 땅에 살았다.

 

* 반도 사관으로 보면 진한 번한 사이 바닷가가 어디쯤일까????

 

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南至帶水 東濱大海 半千里之土境 皆其有也. 遣人致書于朱蒙帝 願以內附 帝甚悅而獎之 冊號召西弩 爲於瑕羅. 及至十三年壬寅而薨 太子沸流立 四境不附.

십년 매전치장 치부누만 원근문풍 래부자중. 남지대수 동빈대해 반천리지토경 개기유야. 견인치서우주몽재 원이내부 제심열이장지 책호소서노 위어하라. 급지십삼년임인이붕 태자비류입사경불부.

 

그곳에 산지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쪽은 큰 바다에 닿는, 오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리고 주몽제께 사람을 보내 글을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께서는 몹시 기뻐 칭찬하시며 소서노(召西弩)를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어하라 재위) 13년 임인년(19)에 소서노가 돌아가시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 여기 보면 남으로 대수 동으로 바다라면??? 중국 동해안 어디 아닌가?

 

於是 馬黎等謂溫祚曰 臣聞馬韓 衰敗立至 乃可往立都之時也.” 溫祚曰 乃編舟渡海 而始抵馬韓彌鄒忽 行至四野 空無居人.

어시 마려등위온조왈 신문마한 쇠패입지 내가왕립도지시야. 온조왈 내편주도해 이시저마한미추홀 행지사여 공무거인.

 

이때 마려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 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라 생각하옵니다.”라고 하니, 온조가 좋다고 하였다. 이에 船團을 만들어 물을 건너[編舟渡海]먼저 마한의 미추홀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 미추홀이 인천이라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요충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근원적 함정이 =바다라는 편견....

 

久而得到漢山 登負兒岳而望可居之地 馬黎烏干等十臣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開沃澤 西阻大海. 此天險地利 難得之勢 宜可都於此 更不可他求也.”

구이득도한산 등부아악이망가거지지 마려오간등십신왈 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개옥택 서저대해 차천험지리 난득지세 의가도어차 경불가복구야.

 

한참 만에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곳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크고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시옵소서.”

 

* 부아악이 북한산이라면.... 하남땅(강남)도 아니요 북으로 강이 띠처럼 막고 있지도 않다. 또한 서쪽 대해???? 북한산에선 바다가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한강이 있을 뿐이다.

 

溫祚 從十臣議 遂定都于河南慰支城 仍稱百濟 以百濟來 故得號也 後 沸流薨 其臣民 以其地歸附.

온조 종십신의 수정도우하남위지성 잉칭백제 이백제랴 고득호야. 후 비류훙 기신민 이기지귀부.

 

온조가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백제가 옮겨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 땅을 바치고 귀순해 왔다.

 

斯盧始王 仙桃山聖母之子也. 昔 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

사로시왕 선도산성모지자야. 석 유부요재실여파소 불부이잉 위인소의. 자눈수도지동옥저 우범주이남라 저지진한내을촌.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에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 동옥저의 위치도 모르는데....

 

時 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年十三 岐嶷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 爲居西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시 유소벌도리가문지 왕수양어가. 이급년십삼 기의숙성 유성덕. 어시 진한육부공존 위거서간 입도서라벌 칭국진한 역왈사로.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되자 지혜가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거서간이 되었다.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 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任那 乃對馬全稱也.

임나자 본재대마도서북계 북저해. 유치왈국미성. 동서각유허락 혹공혹반. 후 대마이도 수위임나소지고 자시임나 내대마전칭야.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은 바다로 막혀 있다.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동서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의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自古 仇州對馬 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任那 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 首邑之稱也. 自是 三汗相爭 歲久不解 佐護加羅 屬新羅 仁位加羅 屬高句麗 鷄知加羅 屬百濟 是也.

자고 구주대마 내삼한분치지지야. 본비왜인세거지. 임나 우분위삼가라 소위가라자 수읍지칭야. 자시삼한상쟁 세구불해 좌호가라 속신라 인위가라 속고구려 계지가라 속백제 시야.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대대로 살던 땅이 아니다. 임나는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 : 삼가라의 왕)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倭 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然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

영락십년 삼가라진귀아. 자시 해륙재왜 실통어임나 분치십국 호위연정. 연 직할어고구려 비열제소명 부득자전야.

 

영락 10(광개토열제, 400)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10 나라가 나뉘어 연정(聯政)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이 없으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阿踰佗 三國遺事 以爲西域云 而今考諸古記則 阿踰豹 今暹羅云. 然則阿踰豹人 或爲大寔所侵逐 到此而居歟?

아유터 감국유사 이위서역운 이금고제고기즉 아유타 금섬라운. 연즉아유타인 혹위대식소침축도차이거여?

 

아유타는삼국유사에서 서역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暹羅 : 태국)이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이 혹시 대식국의 침입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일까?

 

李茗留記云 古有百濟商 海往阿踰豹 多得財寶而歸 其人 從我而來往 日尤交密也. 然 其俗 懦不慣兵 多爲人所制.”

이명유기운 고유백제상 해왕아유타 다득재보이귀 기인 종아이래왕 일우교밀야. 연 기속유불관병 자위인소제.”

 

이명의(진역)유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 백제의 상인들이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싣고 돌아올 때 그 곳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을 따라와 내왕하여 날로 교류가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지 않아 남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又曰 平壤 有乙密臺 世傳乙密仙人所建也.”

우왈 평양 유을밀대 새전을밀선인소건야.”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乙密 安臧帝時 選爲皂衣 有功於國 本乙素之後也. 居家讀書習射 歌詠三神. 納徒修鍊 義勇奉公. 一世瑋衣 其徒三千. 所到雲集 齊唱多勿興邦之歌 因此 可鼓其捨身全義之風者耳.

을밀 안장제시 선위조의 유공어국 본을소지후야. 거가독서습사 가영삼신. 납도수련 의용봉공. 일세위의 기도삼천, 소도운집 제창다물흥방지가. 인차 가고기사신정의지풍자이.

 

을밀은 안장제 때 조의선인으로 뽑혀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을밀은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며 삼신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모아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의 이름난 조의가 되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3,000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함께 다물흥방의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의를 다하는 기풍을 고취하였다.

 

其歌 曰

그 노래는 이러하다.

 

先去者爲法兮 後來爲上 爲法故 不生不滅 爲上故 無貴無賤.

선거자위법혜 후래위상 위법고 불생불멸 위상고 무귀무천.

 

먼저 가신 분들은 우리가 따를 길이니 후배는 높여야 하고 법으로 삼으니 없어지거나 생겨나지 않고 높이니 귀함과 천함이 따로 없다.

 

人中天地爲一兮 心與身卽本. 爲一故 其虛其粗是同 卽本故 惟神惟物不二.

인중천지위일혜 심여신즉본. 위일고 기러기조시동 즉본고 유신유물불이.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심과 신으로 하나로 합쳐있음이 본이다. 그리 하나되었으니 그 비어있음이나 조악함이 같은 것이며, 기본적이 구성이므로 신명과 물질이 둘로 나뉘어 있는게 아니다.

 

眞爲萬善之極致兮 神主於一中 極致故 三眞歸一 一中故 一神卽三.

진위만선지극치혜 신주어일중 극치고 삼진귀일 일중고 일신즉삼.

 

참됨은 모든 선의 극치이니 신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라. 극치인 고로 3 본질이 하나가 되고 하나됨인 고로 한 신명은 3 신명이다.

 

天上天下 唯我自存兮 多勿其興邦 自存故 處無爲之事 興邦故 行不言之敎.

천상천하 유아자존혜 다물기흥방 자존고 처무위지사 흥방고 행불언지교.

 

천지에 오직 내가 존재하니 다물하면 나라가 흥하는 것 스스로 존재하니 무위의 경지에 머물고 나라를 흥하게 하니 행하지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

 

眞命之大生 性通光明兮 入則孝 出則忠 光明故 衆善 無不奉行 孝忠故 諸惡 一切莫作.

진명지대생 성통광명혜 입즉효 출즉충 광명고 중선 무불봉행 효충고 재악 일절막작.

 

진실된 소명의 삶을 지혜와 본성이 통함이라 집에선 효요 나가선 충이라는 것이요 광명 지혜인 고로 사람들이 선하여 부러 행하지 않고 효성되고 충성되니 모든 악이 지어지지 않는 것이다.

 

惟民之所義 乃國爲重兮 無國我何生 國重故 民有物而爲福 我生故 國有魂而爲德.

유민지소의 내국위중혜 무국아하생 국중고 민유물이위복 아생고 국유혼이위덕.

 

모든 백성이 올바르니 무리가 중한 것이다 무리없이 홀로사는 사람있나? 무리가 중요하니 백성들이 물질을 누림이 축복이고 우리가 존재하니 무리의 혼이 덕이다.

 

魂之有生有覺有靈兮 一神攸居之爲天宮 三魂故 智生可以雙修 一神故 形魂亦得俱衍.

혼지유생유각유영혜 일신유거지위천궁 삼혼고 지생가이쌍수 일신고 형혼역득구연.

 

혼이란 생명 깨침 영을 말함이니 한 신명이 머무는 곳이니 천궁이라 한다. 3혼이므로 지혜로운 삶이 가능하고 닦을수 있고 한 신명인고로 형과 혼이 고루 갖춰지는 것이다.

 

俾我子孫 善爲邦兮 太白敎訓 吾所師 我子孫故 統無不均 吾所師故 敎無不新.

비아자손 선위방혜 탸뱍교훈 오소사 아자손고 통무불균 오소사고 교무불신.

 

우리 자손들의 선하여 나라를 이루니 큰 지혜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이며 우리 자손인 고로 공평하지 않음이 없이 통솔되고 우리의 스승이시니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다.

 

 

 

乙密仙人 嘗居臺 專以祭天修鍊爲務. 蓋仙人修鍊之法 參佺爲戒 健名相榮 空我存物 捨身全義 爲國人式 風仰千秋 足以起感 亦爲人尊之象徵也. 後人 稱其臺曰乙密 乃錦繡江山之一勝也.

을밀선인 상거대 전이제천수련위무. 개선인수련지법 참전위계 건명상영 공아존물 사신전의 위국인식 풍앙천추 족이기감 역위인존지상징야. 후인 칭대왈을밀 내금수강산지일승야.

 

을밀선인이 일찍이 을밀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수련함을 의무로 삼았다. 을밀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을 수행의 계율로 삼아 그 명분을 세워 서로 영광되게 하고, 욕심을 비워 세상을 높이고, 내 몸을 희생하여 의로움을 온전하게 함을 백성들의 따를 도리로 삼아 오랜 세월에 비추어 만족하며 또한 사람들이 존중할 상징으로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을밀대라 불렀으니,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쉽게 말하면....

참전(신선)의 삶을 목표로 수행하며 그 수행함에 자부심을 가지고 서로 발전하게 하고 물룍을 없이하고 의로움에 진력하는 삶이요 그걸 모든 백성이 따를 도리로 보여줬고 선인들의 발자욱을 우러르며 스스로 만족함을 사람들이 따를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