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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文武王 法敏

卷第二 紀異 第二

文武王 法敏

 

王初卽位 龍朔辛酉 泗沘南海中 有死女尸 身長七十三尺 足長六尺 陰長三尺. 或云身長十八尺 在乾封二年丁卯.

왕초즉위 용삭신유 사비남해중 유사여시 신장칠십삼척 족장육척 음장삼착. 혹운신장팔십척 재건봉이년정묘.

 

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던 용삭(龍朔) 신유년(서기 661)에 남쪽 바다에 여자 시체가 있었는데, 키가 73자였고 발의 길이가 6자였으며 음문의 길이가 3자였다. 혹은 키가 18자로 건봉 2년 정묘(서기 667)에 있었던 일이라고도 한다.

總章戊辰 王統兵 與仁問欽純等 至平壤 會唐兵滅麗. 唐帥李勣 獲高臧王還國[王之姓高 故云高臧 按唐書高宗記 顯慶五年庚申 蘇定方等 征百濟 後十二月 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總管 蘇定方爲遼東道大總管 劉伯英爲平壤道大總管 以伐高麗 又明年辛酉正月 蕭嗣業爲扶餘道總管 任雅相爲浿江道總管 率三十五萬軍 以伐高麗 八月甲戌 蘇定方等及高麗 戰于浿江敗亡. 乾封元年丙寅六月 以龐同善高臨薛仁貴李謹行等爲後援. 九月 龐同善及高麗戰敗之 十二月己酉 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率六總管兵 以伐高麗. 總章元年戊辰九月癸巳 李勣獲高臧王. 十二月丁巳獻俘于帝 上元年甲戌二月 劉仁軌爲雞林道總管 以伐新羅. 而鄕古記云 唐遣陸路將軍孔恭 水路將軍有相與新羅金庾信等滅之. 而此云仁問欽純等 無庾信 未詳]

총장무진 왕통병 여인문흠순등 지평양 회당병멸려. 당수이적 고장왕환국[왕지성고운고장 안당서고종기 현경오년경신 소정방등 정백제 후십이월 대장군설피하력위패강도행군대총관 소정방위요동도대총관 유백영위평양도대총관 이벌고려. 우명년신유정월 소사업위부여도총관 임아상위패강도총관 솔삼십오만군 이벌고려. 팔월갑술 소정방등급고려 전우패강패망. 건봉원년병인유월 이방동선*고림설인귀이근행등위원. 구월 방동선급고려전패지 십이월을유 이적위요동도행군대총관 솔육총관별 이벌고려. 총장원년무진구월계사 이적획고장왕. 십이월정사헌부우제 상원년갑이월 유인궤위계림도총관 이벌신라. 이향고기운 당견육로장군공공 수로장군유상여라김유신등지. 이차운인문흠순등 무유신 미상.]

 

총장(總章) 무진년(서기 668)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ㆍ흠순(欽純) 등과 평양에 가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臧王, 보장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갔다.[왕의 성이 고씨여서 고장이라 한다. 당서(唐書)』 「고종기(高宗記)에 보면, 현경(顯慶) 5년 경신(서기 660)에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를 정벌하였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 설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소정방을 요동도(遼東道) 대총관(大總管)으로,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平壤道) 대총관(大總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그리고 다음 해 신유년(서기 661) 정월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扶餘道) 총관(總管)으로,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총관으로 삼아 3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8월 갑술일에는 소정방 등이 패강에서 고구려와 싸우다 패하여 달아났다. 건봉(乾封) 원년 병인(서기 666) 6월에는 방동선(龐同善), 고림(高臨), 설인귀(薛仁貴), 이근행(李謹行) 등이 후원군이 되었다. 9월에 동선이 고구려와 싸워 패하였고, 12월 기유일에는 이적이 요동도 행군대총관이 되어 여섯 총관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총장 원년 무진(서기 668) 9월 계사일에 이적이 고장왕을 사로잡았고 12월 정사일에 황제에게 바쳤다. 상원(上元) 원년 갑술(서기 674)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雞林道) 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쳤다. 그러나 우리나라 옛 기록에는 당나라에서 육로장군 공공(孔恭)과 수로장군 유상(有相)을 보내어 신라 김유신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인문ㆍ흠순 등이라고만 했지 유신이 없으니 자세한 일은 알 수 없다.]

時唐之游兵 諸將兵 有留鎭而將謀襲我者. 王覺之 發兵之 明年 高宗使召仁問等 讓之曰 "爾請我兵以滅麗 害之何耶?" 乃下圓扉 鍊兵五十萬 以薛邦爲帥 欲伐新羅.

시당디유병 제장병 유류진이장모습아자. 왕각지 발병지 명년 고종사소인문등 양지왈 "이청아병이멸려 해지하야?" 내하원비 연병오십만 이설방위수 욕벌신라.

 

이때 당나라 유격병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 신라를 격하려고 꾀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음 해 고종이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우리를 해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렇게 말하고는 인문 등을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時義相師西學入唐 來見仁問. 仁問以事諭之 相乃東還上聞. 王甚憚之 會群臣問防禦策. 角干金天尊奏曰 "近有明朗法師 入龍宮 傳秘法而來 請詔問之."

시의상사서학입당 래견인문. 인문이사유지 상내동환상문. 왕심탄지 회군신문장어책. 각간김천존주왈 "근유명랑법사 입용궁 전비법이래 청조문지."


이 당시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서쪽으로 당나라에 들어가서 인문 등을 만났다. 인문이 이 사실을 알려주자, 의상대사는 곧 동쪽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크게 걱정하며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방어할 대책을 물었다. 각간 천존(金天尊)이 아뢰었다. “근래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아 왔으니, 청하옵건대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朗奏曰 "狼山之南 有神遊林 創四天王寺於其地 開設道場則可矣."

랑주왈 "랑산지남 유신유림 창사천왕사어기지 개설도장즉가의."

명랑대사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낭산(狼山)의 남쪽에 신이 노니는 숲(神遊林)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도량을 개설하면 될 것입니다.”

 

時有貞州使走報曰 唐兵無數至我境 廻塹海上 王召明朗曰 "事已逼至 如何 朗曰 "以彩帛假搆宜矣."

시유정주사주보왈 "당병무수지아경 회참해상." 왕소명랑왈 사이핍지 여하?" 랑왈 "이채백가구의의."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서 보고하였다. “무수히 많은 당나라 병사들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서 바다 위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하였다. “사태가 벌써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지으시면 됩니다.”

 

乃以彩帛營寺 草搆五方神像. 以瑜珈明僧十二員 明朗爲上首 作文豆婁秘密之法. 時唐羅兵未交接 風濤怒起 唐船皆沒於水. 後改刱寺 名四天王寺 至今不墜壇席[國史云改刱 在調露元年己卯].

내이채백영사 초구오방신상. 이유가명승십이월 명랑위상수 작문두루비밀지법. 시당라병미교접 풍도노기 당선개몰어수. 후개창사 각사천왕사 지금불추단석[국사운개창 재조로원년을묘.]


그래서 채색 비단으로 절을 꾸미고 풀로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은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珈)에 밝은 스님 12명에게 명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아직 싸움을 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파도가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들이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 절을 고쳐서 다시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 하였다. 지금도 단석(壇席, 불교의 도량(道場)을 말함)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에서는 조로(調露) 원년 기묘(서기 679)에 이 절을 고쳐지었다고 하였다.]


後年辛未 唐更遣趙憲爲帥 亦以五萬兵來征. 又作其法 船沒如前.

후년신미 당경견조헌위수 역이오만병래정. 우작문법 선몰여전.


그 뒤 신미년(서기 671)에 당나라에서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또 다시 5만의 군사가 쳐들어왔다. 그래서 또 그 비법을 사용하자 예전처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是時翰林郞朴文俊 隨仁問在獄中. 高宗召文俊曰 "汝國有何密法 再發大兵 無生還者?"

시시한림랑박문준 수인문재옥중. 고종소문준왈 "여국유하밀법 재발대병 무생환자?"

 

그 당시 한림랑 박문준(朴文俊)이 김인문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고종이 문준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 나라에서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는가?”

 

文俊奏曰 "陪臣等來於上國一十餘年 不知本國之事 但遙聞一事爾 厚荷上國之恩 一統三國 欲報之德 新刱天王寺於狼山之南 祝皇壽萬年 長開法席而已."

문준주왈 "배신등래어상국일십여년 부지본국지사 단요문일사이 후가상국지은일통삼국 욕보지덕 신창천왕사어랑산지남 축황수만년 장개법석이이."


문준이 아뢰었다. “저희 신하들은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본국의 사정을 모릅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창건하여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래도록 법석(法席, 설법이나 독경 등을 하는 자리)을 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高宗聞之大悅 乃遣禮部郞樂鵬龜 使於羅 審其寺. 王先聞唐使將至 不宜見玆寺 乃別刱新寺於其南 待之. 使至曰 "必先行香於皇帝祝壽之所天王寺."

고종문지대열 내견얘부랑악붕귀 사어라 심기사. 왕선문당사장지 불의견자사 내별창신사어기남 대지. 사지왈 "필선행향아황제축더지소천왕사."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먼저 듣고 이 절을 보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서, 별도로 그 남쪽에 새 절을 창건하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이 이르러서 말하였다. “반드시 황제의 장수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향불을 올리고자 합니다.”

 

乃引見新寺 其使立於門前曰 "不是四天王寺 乃望德遙山之寺." 終不入. 國人以金一千兩贈之 其使乃還奏曰 "新羅刱天王寺 祝皇壽於新寺而已." 因唐使之言 因名望德寺[或系孝昭王代 誤矣] 王聞文俊善奏 帝有寬赦之意 乃命强首先生 作請放仁問表 以舍人遠禹奏於唐. 帝見表流涕 赦仁問慰送之.

내인견신사 기사입어문전왈 "불시사천왕사 내망덕요산지사." 종불입. 국인이김일천냥증지 기사내환주왈 "신라창천왕사 축황수어신사이이 인당사지언 인명망덕사[혹계효소왕대 오의] 왕문문준선주 제유관사지의 내명강수선생 작청방인문표 이사인원우주어당. 제견표유체 사인문위송지.

그래서 곧 인도하여 새 절을 보여주었다. 그 사신은 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곧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금 일천 냥을 주었더니, 그 사신은 곧 돌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신라에서 천왕사를 지어서 새 절에서 황제의 장수를 빌 뿐입니다.” 그래서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이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불렀다.[혹은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 하나 잘못된 것이다.] 왕은 문준이 잘 말해서 황제가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글을 써서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서 보내주었다.


仁問在獄時 國人爲刱寺 名仁容寺 開設觀音道場. 乃仁問來還 死於海上 改爲彌陁道場 至今猶存.

인문재옥시 국인위창사 명인용사 개설관음도장. 내인문래환 사어해상 개위미타도장 지금유존.


인문이 옥에 있을 때, 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절을 지어서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다. 이후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자 미타도량(彌陁道場)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大王御國二十一年 以永隆二年辛巳崩 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 王平時常謂智義法師曰 "朕身後願爲護國大龍 崇奉佛法 守護邦家." 法師曰 "龍爲畜報何?" 王曰 "我厭世間榮華久矣 若麤報爲畜 則雅合朕懷矣."

대왕어국이십일년 이영융이년신사중. 유조장어동해중대암상 왕평시상위지의법사왈 "짐신후원위호국대룡 숭봉불법 수호방가." 법사왈 "용위축보하?" 왕왈 "아염세간영화구의 약추위축 즉아합짐회의."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째인 영륭(永隆) 2년 신사(서기 681)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 바다 가운데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 왕은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서 불법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수호하겠소.” 그러자 법사가 말하였다.
용은 짐승의 응보인데 어째서 그러하십니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만약 추한 응보로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짐이 바라던 바와 맞는다오.”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 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別本云 建福八年辛亥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步. 則乃眞德平王代始築 而至此乃重修爾. 又始築富山城 三年乃畢. 安北河邊築鐵城. 又欲築京師城郭 旣令眞吏 時義相法師聞之 致書報云 "王之政敎明 則雖草丘盡畫地而爲城 民不敢踰 可以禊災進福 政敎苟不明 則雖有長城 災害未消." 王於是乃罷其役.

왕초즉위 치남산장창 장오십보 광십오보 저미곡병기 시위우창 천은사서북산상 시위좌창. 별본운 건복팔년신해 축남산성 주이천팔백오십보. 즉내진덕평왕시축 이지차내중수이. 우시축부산성 삼년내필. 안북하변축철성. 우욕축경사성곽 기령진리 시의상법사문지 치서보운 "왕지겅교명 즉수초구진화지이위성 민불감유 가이계재진복 정교수불명 즉수유장성 재해미소." 왕어시내파기역.

 

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남산에 큰 창고를 지었는데, 길이가 50보이고 넓이가 15보였다. 여기에 쌀과 무기를 저장했는데 이것이 우창(右倉)이고,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이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 8년 신해(서기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진평왕(眞平王) 때 처음으로 쌓았던 것이니, 그렇다면 문무왕 때에 다시 수리한 것이다. 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아서 3년 만에 끝마쳤다. 그리고 안북하(安北河) 가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수도의 성곽을 쌓으려고 이미 진리(眞吏)에게 명을 내렸는데, 의상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로 덮인 언덕에 금을 긋고 성으로 삼아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않을 것이니,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왕은 곧 성 쌓는 일을 그만두었다.

 

麟德三年丙寅三月十日 有人家婢名吉伊 一乳生三子. 總章三年庚午正月七日 漢岐部一山級干[一作成山阿干] 婢一乳生四子 一女三子. 國給穀二百石以賞之. 又伐高麗 以其國王孫還國 置之眞骨位.

인덕삼년병인삼월십일 유인가비명길이 일유생삼자. 총장삼년경오정월칠일 한기부일산급간[일작성산아간] 비일우생사자 일녀삼자. 국급곡이백석이상지. 우벌고혀 이기국왕손환국 치지신골위.

 

인덕(麟德) 병인년(서기 666) 310일에 민가의 여종인 길이(吉伊)가 세 쌍둥이를 낳았다. 총장 3년 경오(서기 670) 정월 7일에 한기부(漢岐部)의 일산(一山) 급간[성산(成山) 아간이라고도 한다.]의 여종이 네 쌍둥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이 셋이었다. 나라에서 곡식 200섬을 상으로 주었다. 또 고구려를 쳐서 그 왕손을 데려와서 진골의 지위를 주었다.

王一日召庶弟車得公曰 "汝爲冢宰 均理百官 平章四海." 公曰 "陛下若以小臣爲宰 則臣願潛行國內 視民間徭役之勞逸 租賦之輕重 官吏之淸濁 然後就職."

왕일일소서제차득공왈 "여위총재 균리백관 평장사해." 공왈 " 폐하약이소신위재 즉신원잠행국내 시민간요역지로일 조부지경중 관이지청탁 연후취직."

 

왕이 하루는 배다른 동생인 차득공(車得公)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총재가 되어 모든 관리를 두루 다스려서 온 나라를 태평하게 하라.” 차득공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을 재상으로 삼으신다면,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의 부역의 과중함과 세금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관리의 청렴과 부패 등을 보고 난 후에, 그 관직을 맡았으면 합니다.”

王聽之 公著緇衣 把琵琶 爲居士形 出京師. 經由 阿瑟羅州[今溟州] 牛首州[今春州] 北原京[今忠州] 至於武珍州[今海陽] 巡行里閈.

왕청지 공저치의 파비파 위거사형 출경사 경유 아슬라주[금명주] 우수주[금춘주]북원경[금충주]지어무진주[금해양] 순행리한.


그래서 왕이 이를 승낙하였다. 공은 중의 옷으로 갈아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차림새를 하고서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이다.], 우수주(牛首州)[지금의 춘주(春州)이다.], 북원경(北原京)[지금의 충주(忠州)이다.] 등을 지나서 무진주(武珍州)[지금의 해양(海陽)이다.]에 이르러 두루 마을을 돌아다녔다.

州吏安吉見是異人 邀致其家 盡情供億. 至夜 安吉喚妻妾三人曰 "今玆侍宿客居士者 終身偕老." 二妻曰 "寧不幷居 何以於人同宿?" 其一妻曰 "公若許終身並居 則承命矣." 從之.

주리안길견시이인 요치기자 진정공억. 지야 안길환처첩삼인왈 "금자시숙객거사자 종신해로 이처왈 영불병거 하이어인동숙 차일첩왈 "공약허종신병거 즉승명의." 종지.


마을의 관리인 안길(安吉)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정성을 다해 대접하였다. 밤이 되자, 안길이 처첩 세 사람을 불러서 말하였다. “오늘밤 우리 집에 묵고 있는 거사를 모시는 사람과는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소.” 두 처는 이렇게 말하였다.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한 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께서 만일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를 허락하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남편의 말을 따랐다.

 

詰旦 居士欲辭行時 曰 "僕京師人也 吾家在皇龍皇聖二寺之間 吾名端午也[俗謂端午爲車衣] 主人若到京師 尋訪吾家幸矣." 遂行到京師 居冢宰.

힐단 거사욕사행시 왈 "복경사인야 오가재황룡황성이사지간 오명단오야[속위단오위차의] 주인약도경사 심방오가행의." 수행도경사 거총재.

다음날 아침 거사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날 때 말하였다.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제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사이에 있고, 제 이름은 단오(端午)라 합니다.[세간에서는 단오를 차의(車衣)라고 한다.: 동시에 極陽의 의미로 왕족을 말한다 볼 수 있다.] 주인께서 만일 서울에 오거든 제 집을 찾아주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드디어 길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여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國之制 每以外州之吏一人 上守京中諸曹[今之其人也] 安吉當次上守至京師. 問兩寺之間端午居士之家 人莫知者. 安吉久立道左 有一老翁經過 聞其言 良久佇思曰 "二寺間一家 殆大內也. 端午者 乃車得令公也. 潛行外郡時 殆汝有緣契乎." 安吉陳其實 老人曰 "汝去宮城之西歸正門 待宮女出入者告之."

국지제 먀이외주지사일인 상수경중제조[금지기인야] 안길당차상수지경사. 문양사지간단오거사지가 인막지자. 안길구입도좌 유일노옹경과 문기언 양구저사왈 "이사간일가 태대내야 단오자 내차득영공야 잠행외군시 채여유연계호." 안길진기실 노인왈 "여거궁성지서귀정문 대궁녀출입자고지."


나라의 제도에 매년 각 주의 관리 한 사람을 불러서 서울의 여러 부서를 지키도록 하였는데[지금의 기인(其人) 제도이다.] 안길의 차례가 되었다. 안길은 서울에 이르러서 두 절 사이에 있는 단오거사의 집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안길이 한참 동안 길가에 서 있는데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다가 두 절 사이의 한 집이면 아마도 대궐일 것이오. 단오라면 차득공일 것이오. 몰래 지방을 살피며 다닐 때 아마도 그대와 인연이 있었나보오.” 안길이 그간의 사실을 말해주자 노인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궁성의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를 기다렸다가 말해보시오.”

 

安吉從之 告武珍州安吉進於門矣 公聞而走出 携手入宮. 喚出公之妃 與安吉共宴 具饌至五十味. 聞於上 以星浮山[一作星損乎山]下 爲武珍州上守燒木田 禁人樵採. 人不敢近 內外欽羨之 山下有田三十畝 下種三石. 此田稔歲 武珍州亦稔 否則亦否云.

안길종지 고무진주안길진어문의 공문이주출 유수입궁. 환출공지비 여안길공연 구찬지오십미. 문어상 이성부산[일작성손호산]하 위무진주상수소목전 금입초채. 인불감근 내외흠선지 산하유전삼십묘 하종삼석. 차전임세 무진주역임 부즉역부운.


안길이 노인의 말대로 궁녀에게 무진주 안길이 문에 와 있다.’라고 말하였다. 차득공은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그의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공의 부인을 불러 나오게 하여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임금님께 아뢰어 성부산[성손호산(星損乎山)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있는 땅을 소목전(燒木田)으로 하사하고 사람들이 벌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였고 단지 이를 부러워하기만 하였다. 산 아래에 밭 30묘가 있는데 종자를 3섬이나 뿌렸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에도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무진주에도 흉년이 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