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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第一奇異 第一 - 太宗 春秋公

太宗 春秋公

 

第二十九 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 追封文興大王之子也 妣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제이십구 태종대왕 명춘추 성김씨. 용수[일작용춘]각간 추봉문흥대왕지자야 비진평대왕지녀 천명부인. 비문명황후문희 즉유신공지계매야.

 

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龍樹)[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 곧 김유신(金庾信)공의 막내 동생이다.

 

初 文姬之姉寶姬 夢登西岳捨溺瀰 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 我買此夢姊曰 與何物乎?” 鬻錦裙可乎?” 姊曰 妹開襟受之 姊曰 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초 문희지매보희 몽등서악사익미 만경성. 단여매설몽 문희문지위왈 아매치몽.” 자왈 여하물호?” 죽금군가호?” 자왈 매개금수지 자왈 주석지몽 전부어여.” 매이금군수지.

 

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수도인 경주에 가득 찼다. 다음날 동생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문희가 말하였다.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 언니가 말하였다. “무엇을 주겠니?” “비단치마를 주면 어때요?” “그러자!” 언니가 허락하여 동생 문희가 옷섶을 벌리고 꿈을 받으려고 하자, 언니가 말하였다. “어젯밤 꿈을 너에게 주노라!” 동생은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後旬日 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戲]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 曰 請入吾家縫之.”

후순일 유신여춘추공 정월오기일[견상사금갑서 내최치원지설] 축국우유신댁전[라인위축국위농주지희] 고답춘추지군 열기금뉴 왈 청입오가봉지.”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오기일(午忌日)[앞의 사금갑(射琴匣)에도 보이는데, 곧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들은 공을 차는 것을 구슬을 가지고 노는 놀이라고 하였다.] 김유신은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였다.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輕近貴公子乎?” 固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공종지. 유신명아해봉침 해왈 이이세사경근귀공자호?” 고사[고본운 인병불진] 내명아지 공지유신지의 수행지. 자후수수내왕.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바느질을 하라고 하자 아해가 말하였다.“어떻게 이런 사소한 일로 함부로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어요?” 그러면서 아해는 한사코 못하겠다고 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아지(阿之)에게 시켰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문희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주 유신의 집을 왕래하였다.

 

庾信知其有娠 乃嘖之曰 爾不告父母 而有娠何也?”

유신지기유신 내책지왈 이불고부모 이유신하야?”

 

유신공은 누이동생이 임신을 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부모님께 아뢰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으니 어찌된 일이냐?”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呢侍左在前 顔色大變.

내선언어국중 욕분기먀 일일사선덕왕유행남산 적산어정중 분화연기. 왕망지문하연 좌우주왈 태유신지분매야왕문기고 왈 위기매무부유신 왕왈 시수소위 시공이시좌재전 안색대변.

 

그리고는 곧 서울 안에 소문을 내기를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에 행차할 때를 기다려서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붙여 연기가 일어나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묻자,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었다. “아마도 유신이 그 누이동생을 불 태우려나 봅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이것은 누구의 소행이냐?”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하였다.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왕왈 시여소위야 속왕구지.” 공수명치마 전선저지 자후현행혼례.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이것은 너의 소행이구나. 속히 가서 구하도록 하여라.” 춘추공은 명을 받고 말을 달려가 왕명을 전하고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에 세상에 드러내놓고 혼례를 올렸다.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진덕왕훙 이영휘오년갑인즉위. 어국팔년 용삭원년신유붕 수오십구세. 장어애공사동 유비. 왕여유신신모륙역 일통삼한 유대공어사직 고묘호태종.

 

진덕왕(眞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서기 654)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용삭(龍朔) 원년 신유(서기 661)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지략과 온 힘을 다하여서 삼한을 통일하고 사직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太子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且 角干智鏡 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庶子 曰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

태자법민 각간인문 각간문왕 각간노저 각간지경 각간이원등 개문희지소출야 당시먀몽지징현어차의. 서자 왈개지문급간 거득영공 마득아간 병여오인.

 

태자 법민(法敏),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저(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로, 그 당시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 차득(車得) 영공(令公), 마득(馬得) 아간(阿干)과 딸까지 합해 다섯 명이다.

 

王膳一日 飯美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 或五十碩 民謂之聖代.

왕선일일 반미삼두 웅치구수 자경신년멸백제후 제주선 단조모이이. 연계일일미육두 주육두 치십수. 성중시가 포일필조삼십석 혹오십석 민위지성대.

 

왕은 하루에 쌀 세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는데, 경신년(서기 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먹지 않고 아침과 저녁만 먹었다. 그러나 계산해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 여섯 말, 그리고 꿩 열 마리였다. 성안의 물가는 베 한 필에 벼가 30섬 혹은 50섬이었으니, 백성들은 태평성대라고 하였다.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재동궁시 욕정고려 인청병입당 당제상기풍채 위위신성지인 고유시위 역청내환.

 

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당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러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는 춘추공의 풍채를 아름답게 여기고는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굳이 머물러서 자신을 모시게 하려고 하였지만, 극구 사양하고 돌아왔다.

 

時百濟末王義慈 乃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婬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 極諫不聽 囚於獄中 瘦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시백제말왕의자 내무왕지원자야 웅맹유담기 사친이료 우우형제. 시호해동증자. 이정관십오년신축즉위 탐음주색 정황국위. 좌평[백제작명]성충 극간불청 수어옥중 수곤빈사 서왈 충신사불망군 원일언이사 신상관시변 필유병혁지사. 범용병 심택기지 처상류이영적 가이보전. 약이국병래 육로불사과탄현[일운침현 백제요해지지] 수군불사입기벌포[즉장암 우손량 일작지화보 우백강] 거기험애이어지 연후가야.” 왕불성,

 

그 당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이었다. 영웅스럽고 용맹하며 담력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해동의 증자(曾子)라고 불렀다. 정관 15년 신축(서기 641)에 왕위에 오르자,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직이다.] 성충(成忠)이 강력하게 충언을 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몸이 약해져 죽을 지경이 되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한 말씀 드리고 죽고자 하옵니다. 신이 일찍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펴보니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군대를 부릴 때는 그 지세를 잘 살펴야 하오니, 상류에 진을 치고 적을 맞이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침현(沈峴)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요충지이다.]을 넘지 못하게 하시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곧 장암(長岩)인데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顯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遶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四月 太子宮雌雞與小雀交婚. 五月 泗沘[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현경사년가마 백제오회사[역운오합사] 유대적마 주야육시 요시행도 이월 중호입의자궁중 일백호좌좌평서안상. 사월 태자궁자계여소작교혼. 오월 사비[부여강명]안대어출사 장삼장 인식지자개사. 구월 궁중괴수명여인곡 야귀곡궁남로상.

 

 

현경(顯慶) 4년 기미(서기 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간 동안 절을 돌면서 공덕을 닦았다. 2월에는 여러 마리의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5월에는 사비수(泗沘水)[부여(扶餘)의 강 이름이다.] 언덕 위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 그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것처럼 울었고, 밤에는 귀신이 궁의 남쪽 길에서 울었다.

 

五年庚申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邊小魚出死 百姓食之不盡. 泗沘水血色. 四月 蝦蟆數萬集於樹上 王都市人無故驚走 如有捕捉 驚仆死者百餘 亡失財物者無數 .六月 王興寺僧皆見如船楫隨大水入寺門. 有大犬如野鹿 自西至泗沘岸 向王宮吠之 俄不知所之 城中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而散.

오년경신춘이월 왕동정수혈색 서해변소어출사 백성식지불진. 사비수혈색. 사월 하마수만집어수상 왕도시인무고경주 여유포착 경복사자백여 망실재물자무수. 유월 왕흥사승개견여선집수대수입사문. 유대견여야록 자서지사비안 향왕궁폐지 아부지소지 성중군뎐집어노상 호계혹곡이시이산.

 

5년 경신(서기 660) 2월에는 수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 바닷가에 작은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 사비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었고, 수도의 백성들은 아무 이유 없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마치 누가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놀라서 엎어져 죽는 자들이 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재물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 중들 모두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다. 들사슴처럼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향해 짖었는데 얼마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성 안의 개들이 길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흩어졌다.

 

有一鬼入宮中 大呼曰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入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 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 問之巫者 云 圓月輪者 滿也 滿則虧 如新月者 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圓月輪盛也 如新月者 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寢微乎 王喜.

유일귀입궁중 대호왈 백제망 백제망 즉입지 왕괴지 사입굴지 심삼척허 유일귀 기배유문 백제원월륜 신라여신월.” 문지무자 운 원월륜자 만야 만즉휴 여신월자 미만야 미만즉점영.” 왕노살지 혹왈 원월륜성야 여신월자 미야 의자국가성 이신라침미호.”

 

어떤 한 귀신이 궁에 들어와서 외쳤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그리고 곧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파보게 하였다. 석 자 정도 파 들어가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이요,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무당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말하였다.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달입니다. 차면 이지러지는 법입니다.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둥근 달은 강성하다는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고 하는 것은 미미하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는 강성해지고 신라는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기뻐하였다.

 

太宗聞百濟國中多怪變 五年庚申 遣使仁問請兵唐. 高宗詔左武衛大將軍荊國公蘇定方 爲神丘道行軍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字仁遠 左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等 統十三萬兵來征.[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人 船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以新羅王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定方引兵 自城山濟海 至國西德勿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태종문백제국중다괴변 오년경신 견사인문청병당. 고종조좌무위대장군형국공소정방 위신구도행군총관 솔좌위장군유백영자인원 좌무위장군풍사귀 좌효위장군방효공등 통십삼만병래정[향기운 군사이만칠천칠백십일인 선일천구백척 이당사불상언지] 이신라왕춘추 위우이도행군총관 장기국병 여지합세. 정방인병 자성산제해 지국서덕물도 신라왕견장군김유신 영정병오만이부지.

 

태종은 백제에 괴변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5년 경신(서기 660)에 인문(仁問)을 사신으로 보내 당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神丘道) 행책총관(行策摠管)으로 삼아, ()가 인원(仁遠)인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였다.[우리나라 기록에는 군사가 122,711명이고 배가 1,900척이라 하였지만 당사(唐史)에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도록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의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왕은 김유신에게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義慈王聞之 會群臣問戰守之計.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 羅人恃大國之援 有輕敵之心. 若見唐人失利 必疑懼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의자왕문지 회군신문전수지계. 좌평의직진왈 당병원보명해 불습수 라인시대국지원 유경적지심 약견당인실리 필의구이불감예진 고지선여당인결전가야.”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좌평 의직(義直)이 나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지만 물에서 싸우는 것은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 군사는 대국의 지원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군사들이 불리한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빨리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아옵니다.”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師老 先使偏師擊羅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全軍而保國矣.” 王猶預不知所從 時佐平興首 得罪流竄于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 首曰 大槪如佐平成忠之說.”

달솔상영등왈 불연 당병원래 의역속전 기봉불가당야. 라인누견패어아군 금망아병세 부득불공. 금일지계 의색당인지로 이대사노 선사편사격라 절기예기 연후사기편이합전 즉가득전군이보국의.” 왕유예부지소종 시좌평흥수 득죄유찬우고마미지지현 견인문지왈 사급의 여지하?” 수왈 대개여좌평성충지설.”

 

달솔 상영(常永) 등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빨리 싸우려고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라 군사는 우리 군사에게 여러 번 패한 적이 있으므로,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일부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기회를 엿보아 싸운다면 군사를 보전할 수 있고 나라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머뭇거리며 누구의 대책을 따라야 할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전라 장흥)에 귀양을 가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았다. “사태가 급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가 말하였다. “대체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사옵니다.”

 

大臣等不信曰 興首在縲絏之中 怨君而不愛國矣.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卽伎伐浦]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並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如在籠之雞 罹網之魚也.” 王曰 .”

대신등불신왈 흥수재누설지중 원군이불애국의. 기언불가용야. 막약사당병백강[즉기벌포] 연류적부득방주 라군승탄현 유경이부득병마. 당차지시 종병격지 여재롱지계 리망지어야.” 왕왈

 

그러나 대신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귀양을 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자의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대가 백강(白江)[곧 기벌포(伎伐浦)이다.]에 들어오게 하여 물결을 따라오면 강의 폭이 좁아 배가 한 줄로 올 것이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와 작은 길을 따라오면 말을 한 줄로 타고 올 것입니다. 바로 이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닭장에 든 닭이요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이 될 것입니다.”

그제야 왕이 말하였다. “그렇구나!”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階伯 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然兵寡力盡 竟敗而階伯死之.

우문당라병이과백강탄현 견장군계백 수사사오천출황산 여라병전. 사합개승지 연병과역진 경패이계백사지,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階伯)에게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지만, 병력이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였고 계백도 죽었다.

 

進軍合兵 薄津口 瀕江屯兵. 忽有鳥廻翔於定方營上. 使人卜之 曰 必傷元帥.”.

진군합병 박진구 빈강둔병. 홀유조화상어정방영상. 사인복지 왈 필상원수.”

 

신라군과 당나라군은 진군하여 군사를 합해 나루 어귀에 다다라 강가에 주둔하였다. 이때 갑자기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군대 위를 빙빙 돌며 날아다녔다. 그래서 점을 쳐보니 이러한 점괘가 나왔다.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이다.”

 

定方懼 欲引兵而止 庾信謂定方曰 豈可以飛鳥之怪 違天時也 應天順人 伐至不仁 何不祥之有?” 乃拔神劍擬其鳥 割裂而墜於座前 於是定方出左涯 垂山而陣 與之戰 百濟軍大敗.

정방구 욕인병이지 유신위정방왈 이가이비조지괴 위천시야 응천순인 벌지불인 하불상지유?” 내발신검의기조 할렬이추어좌전 어시정방출좌애 수산이진 여지전 백제군대패.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말하였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민심에 순종하여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떻게 불길한 일이 있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신검을 뽑아서 새를 겨누었더니, 그 새가 찢어져 자리 앞에 떨어졌다. 그제야 소정방은 백강의 왼쪽 기슭으로 나와 산 밑에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王師乘潮 舳艫含尾 鼓譟而進. 定方將步騎 直趨都城一舍止 城中悉軍拒之 又敗死者萬餘. 唐人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隆[或作孝 誤也] 走北鄙.

왕사승조 축로함미 고조이진. 정방장보기 직추도성일사지 성중실군거지 우패사자만여. 당인승승박성. 왕지불면 탄왈 회불용성충지언 이지어차.” 수여태자융[혹작효 오야] 도북비.

 

당나라 군사가 밀물을 타고 전선들이 꼬리를 물고 전진하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쳐들어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달려가 30리 밖에서 머물렀다. 성 안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지만 또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나라 군사들이 승세를 몰아 성으로 들이닥쳤다. 왕은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구나!” 마침내 태자 융()[()라고도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之子文思 謂王泰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정방위기성 왕차자태 자립위왕 솔중고수 태자지자문사 위왕태왈 왕여태자출 이숙찬위왕 약당병해거 아등안득전?”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통솔하여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인 태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태자와 함께 탈출하셨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다 해도 우리들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率左右縋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乃開門請命.

솔좌우추이출 민개종지 태불능지. 정방영사초첩 입당기치 태군박 내개문청명,

 

이렇게 말하고는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탈출하였다. 백성들도 모두 뒤를 따라갔지만 태는 이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들에게 성을 넘어가 당나라 깃발을 꽂게 하자, 태는 궁지에 몰려서 곧 성문을 열고 목숨을 빌었다.

 

於是 王及太子隆王子泰大臣貞福 與諸城皆降. 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王子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 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어시왕급태자융왕자태대신정복 여제성개항. 정방이왕의자급태자융왕자태왕자연급대신장사팔십팔인 백성일만팔천팔백칠인 송경사.

 

이렇게 되어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貞福)이 여러 성과 함께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및 대신과 장사 88,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其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連德安等 五都督府 擢渠長爲都督刺史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俘見 上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 孫皓陳叔寶墓側 竝爲竪碑.

기국본유오부 삼십칠군 이백성 칠십육만호. 지시석치웅진마한동명금연덕안등 오도독부 탁거장위도독자사이리지. 명낭장유인원수도성 우좌위낭장왕문도위웅진도독 무기여중. 정방이소부견 상책이유지. 왕병사 증금자광록대부위위경 허구신부림 조장. 손호진숙보묘측 병위수비.

 

백제는 원래 53720076만호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당나라는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ㆍ금련(金連)ㆍ덕안(德安) 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낭장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서웅진 도독으로 삼아 백제의 백성을 아우르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당나라 황제에게 나아가니. 황제는 포로들을 꾸짖기만 하고 그 죄를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의 작위를 주고 옛 신하들이 조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비석도 세워 주었다.

 

七年壬戌 命定方爲遼東道行軍大摠官 俄改平壤道. 破高麗之衆於浿江 奪馬邑山爲營. 遂圍平壤城 會大雪 解圍還. 拜凉州安集大使 以定吐蕃. 乾封二年卒 唐帝悼之 贈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 諡曰莊[已上唐史文].

칠년임술 명정방위요동도행군대총관 아개평양도. 파고려지중어패강 탈마읍산위영. 수위평양성 회대설 해위환. 배양주안집대사 이정토번. 건봉이년졸 당제도지 증좌효기대장군유주도독 시왈장[이기상당사문]

 

당 고종 7년 임술(서기 662)에 소정방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官)으로 삼았다가 곧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 소정방은 고구려 군사를 패강(浿江)에서 격파하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군영으로 만들었다.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렸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소정방은 양주(凉州) 안집대사(安集大使)가 되어 토번(吐蕃)을 평정하였다. 건봉(乾封) 2년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매우 슬퍼하며 좌효기대장군(左驍騎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장()이라 하였다.[이상은 당사(唐史)에 쓰여진 글이다.]

 

新羅別記云 文武王卽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 作壇 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歃血爲文而盟曰.

신발별기운 문무왕즉위오년을축추팔월경자 왕친통대병 행웅진성. 회가왕부여융 작단 형백마이맹 선사천신급산천지영 연후삽혈위문이맹왈.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이르기를 문무왕(文武王) 즉위 5년 을축(서기 665) 가을 8월 경자일에, 왕이 친히 대병을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행차하였다. 임시 왕인 부여(扶餘) ()과 만나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 맹약할 때, 먼저 하늘의 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연후에 피를 바르고 글을 지어 맹세하여 말하였다.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被毒 頻命行人 諭其和好 負險恃遠 悔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吊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왕자백제선왕 미어역순 불돈린호 불목친인 결탁구려 교통왜국 공위잔폭. 침삭신라 파읍도성 략무영세. 천자민일물지실소 인백성지피독 빈명행인 유기화호 수험시원 회만천경. 황혁사노공행조벌 정기소지 일융대정.

 

지난 날 백제의 전 왕이 거역하고 순종하는 도리에 어두워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사돈인 신라와 화목하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였다.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파괴하고 성을 도륙하여 거의 편안할 해가 없었다. 천자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잃어버림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지만 백제는 험한 지세와 먼 거리를 믿고 천도를 업신여겼다. 이에 황제가 크게 화가 나 삼가 정벌을 행하였으니, 그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하였다.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懷柔伐叛 先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王 司稼正卿 扶餘隆 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고가저궁오택 작계래예 색원발본 수훈후곤. 회유벌반 선왕지영전 흥망계절 왕철지통규. 사필사고 전제낭책. 고립전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 위웅진도독 수기제사 보기상재. 의의신라 장위여국 각제숙감 결호화친. 공승조명 영위번복.

 

마땅히 궁궐과 저택을 무너뜨려 연못으로 만들어 후손들을 경계시키고 폐단의 근원을 아예 뽑아버려 자손들에게 교훈을 보여야 하리라. 그러나 귀순한 자는 회유하고 반역한 자는 징벌하는 것이 선왕들의 훌륭한 전범이며, 망한 자를 일으키고 끊어진 자를 이어주는 것이 성인들의 공통된 규범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전의 서적에 전해온다. 그러므로 전 백제왕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옛 땅(桑梓)을 보전하게 하노라. 신라에 의지해 길이 우방이 될 것이며, 각자 묵은 원한을 없애고 우호를 맺어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느니라. 공손히 천자의 명을 받들어서 영원히 제후의 나라가 되어야 하느니라.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兄弟. 祗奉綸言 不敢墜失.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乖背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神明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宗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享是福.”

잉견사인우위위장군노성현공유인원 친임권유 구선성지. 약지혼인 신지이멩서 형생삽혈 공돈종시. 분재휼환 은약형제. 지봉윤언 불감추실. 기맹지후 공보세한 약유괴배 이삼기덕 흥병동중 침범변수 신명감지 백앙시항 자손불육 사직무종 인사마멸 강유유여. 고작금서철계 장지종묘자손만대 무혹감범 신지청지 시향시복,”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권유하고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하노라. 혼인을 약속하고 거듭 맹세하여 짐승을 잡아 피를 바르고, 처음과 끝을 함께 돈독히 하라. 재앙을 함께 나누고 환란을 구할 것이며 형제처럼 은혜를 베풀라. 삼가 천자의 말을 받들어 감히 저버리지 말지어다. 맹세를 한 다음에는 함께 절의를 지켜라. 만약 이를 어겨 그 덕이 한결같지 않고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리를 움직여 변방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이를 살피어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도 보전하지 못하며 제사도 끊어져 남은 혈육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철판에 글자를 새기고 금으로 칠을 하여 종묘에 간직해두고 자손만대에 감히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하라. 신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시어 복을 내려주옵소서.”

 

歃訖 埋幣帛於壇之壬地 藏盟文於大廟. 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 今云會扶餘王隆. 則知唐帝宥隆而遣之 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 以此爲驗].

삽흘 매폐백어단지임지 장맹문어대묘. 맹문내대방도독유인궤작[안상당사지문 정방이의자왕급태자융등송경사. 금운회부여융. 즉지당제유융이견지 입위웅진도독야. 고맹문명언 이차위험.]

 

피를 바른 뒤 폐백을 신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대묘(大廟)에 보관하였다. 맹세한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당사의 글을 살펴보면,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부여 융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러한즉 당나라 황제가 융을 용서해주고 돌려보내 웅진 도독으로 삼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맹세한 글에서 분명하게 말하였으니 이것이 증거가 될 것이다.]

 

又古記云 總章元年戊辰[若總章戊辰 則李勣之事 而下文蘇定方 誤矣. 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 來圍平壤之時也] 國人之所請唐兵 屯于平壤郊 而通書曰 急輪軍資. 王會群臣問曰 入於敵國 至唐兵屯所 其勢危矣 所請王師粮匱 而不輸其料 亦不宜也 如何?” 庾信奏曰 臣等能輸其軍資 請大王無慮 於是庾信仁問等 率數萬人 入句麗境 輸料二萬斛 乃還. 王大喜.

우고기운 총장원년무진[약총장무진 즉이적지사 이하문소정방 오의. 약정방즉연호당용삭이년임술 래위평양지시야] 국인지소청당병 준우형양교 이통서왈 급윤군자. 왕회군신문왈 입어적국지당병둔소 기세위의. 소청왕사양궤 이불수기요 역불의야 여하?” 유신주왈 신등능수기군자 청대왕무여.” 어시유신인문등 솔수만인 입구려경 수료이만두 내환. 왕대희.

 

 

신라고기(新羅古記)에 기록되길 총장(總章) 원년 무진(서기 668)[총장 원년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다. 아래 글에 소정방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소정방의 일이라면 연호도 당연히 용삭(龍朔) 2년 임술(서기 662)이어야 하니,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하였을 때의 일이 된다.]에 우리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고, 편지를 보내 급히 군량미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이에 대해 물었다. “적국에 들어가 당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까지 가자면 그 형세가 위태로울 것이오. 그러나 우리가 요청한 군대가 군량이 떨어졌다는데도 이를 보내지 않는다면 또한 부당한 일이요. 어떻게 해야 하겠소?” 그러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량미를 수송할 수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유신과 인문(仁問) 등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가 군량 2만 섬을 보내주고 돌아오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又欲興師會唐兵 庾信先遣然起兵川等二人 問其會期 唐帥蘇定方 紙畵鸞犢二物廻之 國人未解其意 使問於元曉法師 解之曰 速還其兵 謂畫犢畫鸞二切也.

우욕흥사회당병 유신선견연기병천등이인 문기회기 당수소정방 지화난독이물회지 국인미해기의 사문어원효법사 해지왈 속환기병 위화독화난이절야.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만나려고 하였는데,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와 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 만날 날짜를 물었다. 그러자 소정방이 송아지와 난새를 그려서 보냈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으니, 이렇게 풀이해 주었다. “속히 군대를 돌아오게 하시오. 송아지를 그리고 난새를 그린 것은, 화독(畫犢, 송아지를 그리다.)과 화란(畫鸞, 난새를 그리다.)의 이두로 혹한’, 즉 빨리 돌아가라는 속환(速還)’의 뜻이 되는 것이오.”

 

於是庾信廻軍 欲渡浿江 令曰 後渡者斬之!” 軍士爭先半渡. 句麗兵來掠 殺其未渡者. 翌日庾信返追句麗兵 捕殺數萬級.

어시유신회군 욕도패강 영왈 후도자참지!” 군사쟁선반도. 구려병래략 살기미도자. 익일유신반추구려병 포살수만급.

 

그래서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강을 건너며 군령을 내려 말하였다. “뒤에 건너는 자들은 목을 베리라!” 군사들이 앞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였다.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와 미처 건너지 못한 자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들을 도로 추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 죽였다.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백제고기운 부여성북각유대암 하임강수 상전운 의자왕여제후궁 지기미만 상위왈 녕자진 불사어타인수.’ 상솔지차 투강이사 고속운타사암.

 

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로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의자왕이 여러 후궁들과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 떨어져 죽은 바위, 곧 낙화암을 말한다.)이라고 한다.”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사내리언지와야. 단궁인지추사 의자졸어당 당사유명문.

 

그러나 이것은 잘못 와전된 것이고 궁녀들만 떨어져서 죽었을 뿐이고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 당사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 坑之.”

우신라고전운 정방기토려제이국 우모벌신라이유연. 어시유신지기모 향당병짐지 개사 갱지.”

 

신라고전(新羅古傳)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이미 토벌하고 나서도 신라를 공격하려고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김유신이 그 음모를 알고 당나라 군사에게 독약을 먹여 모두 죽여 묻어버렸다.”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 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금상주계유당교 시기갱지[안당사 불언기소이사 단서운 졸 하야? 위복휘지야? 향언지무거야? 약임술년고려지역? 라인살정방지수 즉후총장무진 하유청병멸고려지사? 이차지향전무거? 단무진멸려지후 유불신지사 천유기지이이 비지살소정방이공야.]

 

지금도 상주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당나라 군사를 묻은 땅이다.[唐史에 보면 그들이 죽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하였으니 어째서일까? 언급을 꺼려서인가? 아니면 속설(鄕諺)이 근거가 없는 것일까? 만약 임술년 고구려 싸움에서 신라군이 정방의 군대를 죽였다면 훗날 총장 무진년에 어떻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속설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멸한 뒤에 당나라에 신하로서가 아니라 땅을 점유하였을 뿐,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王師定百濟 旣還之後 羅王命諸將 追捕百濟殘賊 屯次于漢山城. 高麗靺鞨二國兵來圍之 相擊未解. 自五月十一日 至六月二十二日 我兵危甚 王聞之 議群臣曰 計將何出?” 猶豫未決 庾信馳奏曰 事急矣 人力不可及 唯神術 可救.”

왕사정백제 기환지후 라왕명제장 추포백제잔적 둔차우한산성. 고려말갈이국병래위지 상격미해. 자오월십일일 지유월이십이일 아병위심 왕문지 의군신왈 계장하출 유예미결 유신치주왈 사급의 인력불가급 유신술 가구.”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이미 돌아간 후에, 신라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백제의 잔당을 추격하여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였다. 그때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의 군사들이 와서 포위하여 서로 공격하였지만 풀리지 않았다. 511일에서 622일 사이에 우리 신라 군사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말하였다.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이렇게 망설이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뢰었다. “사태가 위급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신의 술법으로만 구원할 수 있습니다.”

 

乃於星浮山 設壇修神術. 忽有光耀如大甕 從壇上而出 乃星飛而北去[因此名星浮山. 山名或有別說云 山在都林之南 秀出一峯是也 京城有一人謀求官 命其子作高炬 夜登此山擧之 其夜京師人望人火 人皆謂怪星現於其地 王聞之憂懼 募人禳之 其父將應之 日官奏曰 此非大怪也 但一家子死父泣之兆耳.’ 遂不行禳法 是夜其子下山 虎傷而死”].

내어성부산 설단수신술. 홀유광요여대옹 종단상기출 내성비이북거[인차명성부산 산명혹유별설운 산재임지남 수출일봉시야 경성유일인모구관 명기자작고거 야등차산거지 기야걍사인망인화 인개위괴성현어기지 왕문지우구 모인양지 기부장응지 일관주왈 차비대괴야 단일가자사부읍지조이.’ 수불행양법 시야기자하산 호상이사.”]

 

그리하여 성부산(星浮山)에 단을 쌓고 신술을 닦았다. 그러자 갑자기 큰 항아리만한 불빛이 단 위에서부터 나타나더니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인해 산 이름을 성부산(星浮山, 별이 떠오른 산)이라고 한다. 산 이름에 대해 다른 설도 있으니 이러하다. “이 산은 도림(都林)의 남쪽에 있는데, 빼어난 봉우리 하나가 이것이다. 서울 경주에 살던 어떤 사람이 벼슬을 얻으려고 자기 아들에게 횃불을 만들어서 밤에 이 산에 올라가 들고 있도록 하였다. 그날 밤 서울 사람들이 불빛을 바라보고 모두들 괴이한 별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모아 기도하라고 하였다. 횃불을 들게 했던 그 아비가 가려고 했는데,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아뢰기를 이는 큰 괴변이 아닙니다. 다만 한 집안의 아들이 죽고 그 아비가 울 징조일 뿐입니다.’라고 하여, 결국 기도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漢山城中士卒 怨救兵不至 相視哭泣而已. 賊欲攻急 忽有光耀 從南天際來 成霹靂 擊碎砲石三十餘所. 賊軍弓箭矛戟籌碎皆仆地. 良久乃蘇 奔潰而歸 我軍乃還.

한산성중사종 원구병부지 상시곡읍이이. 적욕공급 홀유광요 종남천제래 성벽력 격쇄초석삼십여소. 적군궁전모극주쇄개복지. 양구내소 분궤이귀 아군내환.

 

한산성 안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울고 있을 뿐이었다. 적군이 급히 공격하려고 할 때 갑자기 어떤 빛이 남쪽 하늘로부터 날아와서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포 30여 곳을 부숴버렸다. 적군은 화살과 창이 박살이 났고 모두들 땅에 엎어져 쓰러졌다. 한참 뒤에 깨어난 적군은 흩어져서 황급히 돌아갔고, 우리 군사들도 곧 돌아올 수 있었다.

 

太宗初卽位 有獻猪一頭二身八足者 議者曰 是必幷呑六合瑞也.” 是王代 始腹中國衣冠牙笏 乃法師 請唐帝而來傳也.

태종초즉위 유헌저일두이신팔족자 의사왈 시필병탄육합서야.” 시왕대 시복중국의관아홀 내법사 청당제이래전야.

 

태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인 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이를 풀이하는 자가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그런데 이 왕 시대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 벼슬이 높은 관리가 지니던 상아로 만든 홀)을 사용하였으니, 곧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져와 전한 것이다.

 

神文王時 唐高宗遣使新羅曰 朕之聖考 得賢臣魏徵李淳風等 協心同德 一統天下. 故爲太宗皇帝 汝新羅海外小國 有太宗之號 以僭天子之名 義在不忠 速改其號.”

신문왕시 당고종견사신라왈 짐지성고 득현신위징이순풍등 협심동덕 일통천하. 고위태종황제 여신라해와소국 유태종지호 이참천자지명 의재불충 속개기호.”

 

신문왕(神文王) 때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어진 신하인 위징(魏徵)과 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황제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신라는 해외의 작은 나라이면서도 태종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니 천자의 호칭을 함부로 사용한 것이다. 그 뜻이 불충하니 속히 그 이름을 고치도록 하라.”

 

新羅王上表曰 新羅雖小國 得聖臣金庾信 一統三國 故封爲太宗.”

신라왕상표왈 신라수소국 득성신김유신 일통삼국 고봉위태종.”

 

그러자 신라왕이 글을 올려 말하였다.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거룩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 한 것입니다.”

 

帝見表 乃思儲貳時 有天唱空云 三十三天之一人 降於新羅爲庾信.’ 紀在於書. 出撿視之 驚懼不已. 更遣使許無改太宗之號.

제견표 내사저이사 유천창공운 삼십삼천지인 강어신라위유신.’ 기재어서. 출검시지 경구불이. 경견사어무개탸종지호.

 

당나라 황제는 이 글을 보고, 자신이 아직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삼십삼천(三十三天) 중의 한 분이 신라에서 태어나 김유신이 되셨다.’라고 외친 일이 있어 이를 책에 기록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때의 기록을 찾아보았더니, 너무나 놀랍고 두려웠다. 그래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말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