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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萬波息笛

萬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排. 金堂砌下 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 旋繞之備.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제삼십일신문대왕 휘정명 김씨. 개요원년신사칠월칠일즉위 위성고문무대왕 창감은사어 동해변[사중기운 문무왕욕진왜병 고시창차사 미필이붕 위해룡. 기자신문립 개요이년필배. 금당체하 동향개일혈 내용지지입사 선요지비. 개유조지장골처 명대왕암 사명감은사 후견용현형처 명이견대.]

 

31대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김씨이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서기 681) 77일에 왕위에 오르자, 거룩하신 선대부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절에 있는 기록은 이러하다. “문무왕께서 왜군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하셨지만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어 바다의 용이 되셨다. 그 아드님이신 신문왕께서 왕위에 오른 해인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불렀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飡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 占之.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 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명년임오오월삭[일본운 천수원년 오의] 해관파진찬박숙청주왈 "동해중유소산 부래향감은사 수파왕래." 왕이지 명일관김춘질[일작춘일] 점지. "성고금위해룡 진호삼한앙우김공유신 내삼십삼천지일자 금강위대신 이성동덕 욕출수성지보 약폐하행행해변필득무가대보."

 

다음해 임오년(서기 682) 5월 초하루에[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서기 690)이라 하나 잘못된 것이다.] 해관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서 물결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어 천문을 담당한 관리인 김춘질(金春質)[춘일(春日)이라고도 한다.]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거룩하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분으로 이제 이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畫爲二 夜合一[一云 山亦畫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震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 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 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如何?"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왕희 이기월칠일 가행이견대 망기산 견사심지. 산세여귀두 상유일간죽 주위이 야합일[일운 산역주여개합여죽]. 사래주지 왕어감은사숙. 명일오시 죽합위일 천지진동 풍우회암칠일 지기월십육일 풍제파평. 왕범해입기산 유룡봉흑옥대래헌. 영접공좌 문왈 차산여죽 혹반혹합여하? 용왈 차여일수박지무성 이수박즉유성 차죽지위물 합지연후유성 성왈이성이천하지서야 왕취차죽 작적취지 천하화평. 금왕고위해중대룡 유신복위천신. 이성동심 출차무가대보 영아헌지."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에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는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일설에는 산도 또한 대나무처럼 낮에는 갈라지고 밤에는 합해진다고 하였다.] 사신이 와서 이러한 사실을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서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깜깜하였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는데, 용이 검은 옥띠를 받들고 와서 바쳤다. 왕이 용을 맞이하여 함께 앉아서 물었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용이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셔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王驚喜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 出海時 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祗林寺西溪邊 留駕畫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 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以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왕경희 이오색금채금옥수새지. 칙사작죽 출해시 산여용홀은불현. 왕숙감은사 십칠일 도지림사서계변 유가주선 태자이골[즉효소대왕] 수궐 문차사 주마래하 서찰주왈 "차옥재제과 개진룡야." 왕왈 "여하이지지?" 태자왈 "적일과침수시지 내적좌변제이과침계 즉성룡상천 기지성연 인호용연."

 

왕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서 오색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하였다. 그리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바다에서 나올 때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는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축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옥대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다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하나를 따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쪽 두 번째 것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부른다.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吹此笛 則兵退病愈 早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가환 이기죽작적 장어월성천존고. 취차적 즉병퇴병유 한우우청 풍정파평. 호만파식적 칭위국보.

 

왕이 대궐로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至孝昭大王代 天授四年癸巳 因夫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지효소대왕대 천수사년계사 인부례랑생환지이 경봉호왈만만파파식적 상견피전.

 

효성왕 때인 천수 4년 계사(서기 693)에 부례랑(夫禮郞: 효소왕 때 國仙)이 살아서 돌아오는 이상한 일이 있어서, 다시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하였다. 부례랑 전기에 상세히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