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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靺鞨 渤海

靺鞨 渤海

[一作勿吉]

[일작물길]

 

[말갈은 물길(勿吉)이라고도 한다.]

 

通典云 渤海 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통전운 발해 본속말말갈 지기추조영입국 자호진단 선천중[현종임자] 시가말갈호 전친발해개원칠년[기미] 조영사 시위고왕.

 

통전(通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당나라 현종 임자년(서기 712)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개원(開元) 7[기미, 서기 719]에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世子襲立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孼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세자습위 명황사전책습왕. 사개연호 수위해동성국 지유오경심오부육심이주 후당천성포 거란공파지 기후위단소제[삼국사운 의봉삼년 고종무인 고려잔얼유취 북의대백산 국호발해 개원이십년간 명황견장토지.” 성덕왕삼십이년 현종갑술 발해말갈 월해침당지등주 현종토지.” “우신라고기운 고려구장도영성대씨 취잔병 입국어태백산남 국호발해.” 안상제문 발해내말갈지별종 단개합부동이이 안지장도 발해재장성동북각외.”]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자, 당나라 왕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새 왕은 마음대로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5() 15() 62()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서기 926~930) 초에 거란이 공격하여 깨뜨리자, 그 후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서기 678)에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 20년경에 당나라 황제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고,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서기 734)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는,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잔병들을 모아서 나라를 태백산 남쪽에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곧 말갈의 다른 종족으로, 다만 분리되고 통합됨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指掌圖)를 살펴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가탐군국지운 발해국지압록남해부영추성사부 병시고려구지야. 자신라천정군[지리지 삭주영현유천정군 금용주] 지축성부 삼십구역.”

 

가탐(賈耽)군국지(郡國志)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발해국의 압록(鴨淥)ㆍ남해(南海)ㆍ부여(扶餘)ㆍ추성(橻城) 4()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으로, 신라 천정군(泉井郡)[지리지(地理志)에 삭주(朔州)에 소속된 현으로 청정군이 있는데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橻城府)에 이르기까지 39개의 역이 있다.”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 分百濟地[據此 則渤海 又分爲二國也].

우삼국사운 백제말년 발해말갈신라 분백제지[거차 즉발해 우분위이국야.]

 

삼국사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백제 말년에 발해ㆍ말갈ㆍ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다.”[이에 의하면 발해가 또 나누어져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라인운 북유말갈 남유왜인 서유백제 시국지해야 우말갈지접아슬라주.”

 

신라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는데, 이들은 나라의 해가 된다.” “말갈의 땅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해 있다.”

 

* 다른 글에 보면 왜인과 일본은 다르게 표현된다.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우동명기운 졸본성지연말갈[혹운 금동진] 라진육지마왕십사년[을축] 말갈병대입북경 습대령책 과니하.”

 

동명기(東明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다.]과 이어져 있는데 신라 제6대 지마왕 14[을축, 서기 125]에 말갈의 군사가 대거 북쪽 국경으로 침입하여 대령(大嶺)의 성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로 지나갔다.”

 

* 泥河: 말 그대로 진흙강이라면 반도안에서 저런 강은 지질학상 있을수 없다.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후위서 말갈작물길 지장도운 읍루여물길 개숙신야 흑수옥저 안동파지장도 진한지북 유남북흑수.

 

후위서(後魏書)에서는 말갈을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지장도(指掌圖)에서는 읍루(挹屢)와 물길을 모두 숙신(肅愼)이라고 하였다.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 소식(蘇軾)의 지장도를 살펴보면, 진한(辰韓)의 북쪽이요 남북으로 흐르는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 흑수: 말 그대로 검은 강물이 반도 안에????

 

* 진한???? 신라????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百濟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안동명제립십년 멸북옥저 온조왕사십이년 남옥저이십여가 래투백제 우혁거세오십이년 동옥자래헌양마 즉우유동옥저의 지장조 흑수재장성북 옥저재장성남.

 

살펴보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에 오른 지 10(기원전 28)만에 북옥저를 멸망시켰고, 온조왕 42(서기 23)에 남옥저의 20여 집이 와서 백제에 투항하였다. 또 혁거세 52(기원전 5)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동옥저가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는 흑수가 만리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 여기서 지리적 위치가 아닌 형세적 위치로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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