薛氏
薛氏女 栗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修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眞平王時 其父年老 番當防秋於正谷. 女以父衰病 不忍遠別 又恨女身不得待行 徒自愁悶.
설씨녀 율리민가여자야 수한문단족 이안색단정 지행수정 견자무불흠염 이불감범. 진평왕시기부연로 번당방추어정곡. 여이부쇠병 불인원별 우한여신부득대행 도자수민.
설씨녀(薛氏女)는 율리(栗里) 민가의 딸이다. 비록 미천한 가문에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과 행실을 잘 닦아,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 아름다움을 흠모하면서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진평왕(眞平王) 때 그의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에 편입되어 정곡(正谷) 땅으로 변경을 지키러 가게 되었다. 딸은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어 차마 멀리 떠나게 할 수 없었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대신 갈 수도 없음을 한스러워하여, 헛되이 홀로 근심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沙梁部少年嘉實 雖貧且窶 而其養志貞男子也. 嘗悅美薛氏 而不敢言 聞薛氏憂父老而從軍 遂請薛氏曰 “僕雖一懦夫 而嘗以志氣自許 願以不肖之身 代嚴君之役.”
사량부소년가실 수빈차구 이기양지정남자야. 상열미설씨 이불감언 문설씨우부노이종군 수청설씨왈 “복수일유부 이상이지기자허 원이불초지신 대엄군지역.”
사량부(沙梁部)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나 의지를 곧게 기른 남자였다. 일찍부터 설씨녀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다가, 설씨녀의 아버지가 늙어서 군대에 가게 되었음을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설씨녀에게 말했다. “내 비록 일개 나약한 사내지만 일찍부터 의지와 기개를 자부하던 터이니,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대 아비의 군역을 대신하기를 원하오.”
薛氏甚喜 入告於父. 父引見曰 “聞公欲代老人之行 不勝喜懼 思所以報之 若公不以愚陋見棄 願薦幼女子 以奉箕箒.” 嘉實再拜曰 “非敢望也 是所願焉.”
설씨심희 입고어부. 부인견왈 “문공욕대노인지행 불승희구 사소이보지 약공불이우누견기 원천유여자 이봉기비.” 가실재배왈 “비감망야 시소원언.”
설씨가 매우 기뻐하며 들어가 아버지에게 이를 알렸다. 아버지가 그를 불러 보고 말했다. “그대가 이 늙은이를 대신해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네.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만약 그대가 어리석고 비루하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아이를 주어 그대를 받들게 하고 싶네.” 기실이 두 번 절하고 말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으나 이야말로 원하는 바입니다.”
箕箒: 빗자루와 쓰레받기 비유적으로 섬김을 의미.
於是 嘉實退而請期 薛氏曰 “婚姻 人之大倫 不可以倉猝 妾旣以心許 有死無易 願君赴防 交代而歸 然後卜日成禮 未晩也.” 乃取鏡分半 “各執一片云 此所以爲信 後日當合之.”
어시 가실퇴이청기 설씨왈 “혼인 인지대륜 불가이창졸 첩기이심러 유사무역 원군부방 교대이귀 연후복일성례 미혼야 내취경분반 각집일편운 차소이위신 후일당합지.
이에 가실이 물러나와 혼인할 기일을 청하니 설씨가 말했다. “혼인은 인간의 대사이니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군역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받아 혼례를 치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곧이어 거울을 절반으로 쪼개서 각각 한 쪽씩 지니며 이르기를 “이것을 믿음의 징표로 삼아 뒷날 맞추어 봅시다.”라고 하였다.
嘉實有一馬 謂薛氏曰 “此 天下良馬 後必有用 今我徒行 無人爲養 請留之 以爲用耳.” 遂辭而行.
가실유일마 취설씨왈 차 천하양마 후필유용 금아도행 무인위양 청유지 이위용이 수사이행.
가실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설씨에게 일러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훗날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가고 나면 돌볼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 두었다가 쓰기 바라오.” 드디어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會 國有故 不使人交代 淹六年未還 父謂女曰 “始以三年爲期 今旣踰矣 可歸于他族矣.”
회 국유고 불사인교대 엄육년미환 부위여왈 “시이삼년위기 금기유의 가귀우타족의”
때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교대를 시켜주지 않는 바람에 가실은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했다. “처음에 3년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지금 이미 그 기간이 지났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 하겠다.”
薛氏曰 向以安親 故强與嘉實約 嘉實信之 故從軍累年 飢寒辛苦 況迫賊境 手不釋兵 如近虎口 恒恐見咥 而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父之命 請無復言.
설씨왈 “형이안친 고강여가실약 가실신지 고종군누년 기한신고 황박적경 수불석병 여근호구 항공견희 이기신식언 이인정호? 종불감종부지명 청무복언.”
설씨가 말했다. “지난날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가실과 약속을 하였고, 가실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종군(從軍)하여 배고픔과 추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과의 국경에 가까이 있어 손에 병장기를 놓지 않고 있으니, 마치 호랑이 아가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은지라 물릴까 항상 염려됩니다. 그런데도 신의를 버리고 말을 어긴다면 어찌 사람의 정리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을 따를 수가 없으니 다시는 말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其父老且耄 以其女壯而無伉儷 欲强嫁之 潛約婚於里人. 旣定日引其人 薛氏固拒 密圖遁去而未果. 至廐 見嘉實所留馬 太息流淚. 於是嘉實代來. 形骸枯槁 衣裳藍縷 室人不知 謂爲別人. 嘉實直前 以破鏡投之 薛氏得之呼泣 父及室人失喜. 遂約異日相會 與之偕老.
기부노차모 이기여장이무항려 욕강가지 잠약혼어리인. 기정일인기인 설씨고거 밀도둔거이미과. 지구 견가실소유마 태식유루. 어시가실대래. 형해고고 의상남루 실인부지 위위별인. 가실직전 이파경투지 설씨득지호읍 부급실인실희. 수약이일상회 여지해로.
그 아버지는 늙고 정신이 맑지 않아 딸이 장성하고서도 배필이 없다하여 억지로 시집 보내려고 몰래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윽고 날을 정해 그 사람을 맞아들이니, 설씨가 완강히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마침 가실이 교대되어 돌아왔다. 형상이 비쩍 말라 초췌하고 의복이 남루하여 집안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앞으로 나아가 깨진 거울 한쪽을 던지니 설씨가 이것을 받아들고 소리내어 울고 아버지와 집안사람들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내 다른 날을 잡아 혼례를 치르고 가실과 함께 해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