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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雜志 第一-樂


 

新羅樂 三竹三絃拍板大鼓歌舞 舞 二人 放角幞頭紫大袖公襴紅鞓鍍金銙腰帶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笒 二中笒 三小笒.

신라악 삼죽삼현박판대고가무 무 이인 방각복두자대수공란홍정도금과요대오피화 삼현 일현금 이가야금 삼비파 삼죽 일대금 이중금 삼소금.

 

신라의 음악은 세 가지 관악기와 세 가지 현악기와 박판(拍板, 박자를 맞추는 나무쪽)과 대고(大鼓, 큰북)와 가무(歌舞)가 있다. 춤은 두 사람이 추는데, 방각복두(放角幞頭)를 쓰며 자대수공란(紫大袖公襴紅鞓: 자새구 소매 넓은 저고리에 수놓은 붉은 가죽 띠)에 도금과요대(鍍金銙腰帶: 도금된 걸쇠를 가진 허리띠)를 매고 오피화(烏皮靴: 검정 가죽신)를 신는다. 세 가지 현악기는 첫째 현금(玄琴), 둘째 가야금(加耶琴), 셋째는 비파(琵琶)이다. 세 가지 관악기는 첫째 대금(大笒), 둘째 중금(中笒), 셋째 소금(小笒)이다.

 

玄琴 象中國樂部琴 而爲之. 按琴操曰 伏犧作琴 以修身理性 反其天眞也又曰 琴長三尺六寸六分 象三百六十六日 廣六寸 象六合 文上曰池[池者水也 言其平] 下曰濱[濱者服也] 前廣後狹 象尊卑也 上圓下方 法天地也 五絃 象五行 大絃爲君 十絃爲臣 文王武王加二絃 又風俗通曰 琴長四尺五寸者 法四時五行 七絃 法七星.

현금 상중국악부금 이위지 안금조왈 복희작금 이수신이성 반기천진야우왈 금장삼척육촌육분 상삼백육십육일 광육촌 상육합 문상왈지[지자수야 안기평] 하왈빈[빈자복야] 전광후협 상존비야 상원하방 법천지야 오현 상오행 대현위군 십현위신 문왕무왕가이현우풍속통왈 금장사척오촌자 법사시오행 칠현 법칠성.”

 

현금은 중국 악부(樂部)의 금()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금조(琴操)복희(伏犧)가 금을 만들어 수신 수양하여 하늘이 내려준 천성을 회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의 길이는 석자 여섯 치 여섯 푼이니 366일을 상징하였고, 넓이는 여섯 치이니 육합을 상징하였으며, 판 위를 지()[지는 연못이니 공평함을 의미한다.]라 하고, 판 밑을 빈()[빈은 복종을 의미한다.]이라 하였으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사람의 존귀와 비천을 표시함이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모방한 것이며, 다섯줄은 오행(五行)을 상징한 것이며 큰 줄은 임금, 10줄은 신하를 나타내는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두 줄을 더 첨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풍속통(風俗通)금의 길이는 넉자 다섯 치이니, 이는 사계절과 오행(五行)을 모방한 것이오, 일곱 줄은 칠성(七星)을 모방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 晋人以七絃琴 送高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器 而不知其聲音及鼓之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 厚賞. 時 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曲 以奏之. 於時 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後但云玄琴.”

현금지작야 신라고기운 초 진인이칠현금 송고구려. 려인수지기위악지 이부지기성음급고지지법 구국인능식기음이고지자 후상. 시 제이상왕산악 존기본양 파개역기법제이조지. 겸제일백여곡 이주지. 어시현학래무 수명현학금 후단운현금.

 

현금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고기(新羅古記)처음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둘째 재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칠현금의 원형을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고쳐서 이를 다시 만들었다.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훗날 현금이라고만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羅人沙飡菾永子玉寶高 入地理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 傳之續命得 得傳之貴金先生 先生亦入地理山 不出 羅王恐琴道斷絶 謂伊飡允興 方便傳得其音 遂委南原公事.

라인사찬공영자옥보고 입지리산운산원 학금오십년 자제신조삼십곡 전지속명득 득전지귀금선생 선생역입지리산 불출 하왕공금도단절 위이찬윤흥 방편전득시음 수위남원공사.

 

신라 사람 사찬(沙飡) 공영(菾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금()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스로 30곡을 새로 지어 이것을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고, 속명득은 이것을 귀금(貴金)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도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신라왕이 금의 연주법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명령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법을 배워 오게 하고, 마침내 그에게 남원(南原)의 공적 업무를 맡겼다.

 

允興到官 簡聰明少年二人 曰安長淸長 使詣山中傳學. 先生敎之 而其隱微不以傳. 允興與婦偕進曰 吾王遣我南原者 無他 欲傳先生之技 于今三年矣 先生有所秘而不傳 吾無以復命.”

윤흥고관간총면소년이인 왈안장청장 사지산중전학 선생교지 이기은미불이전 윤흥여귀개진왈 오왕견아남원자 무타 욕전선생지기 우금삼년의 선생유소비이부전 오무이복명.”

 

윤흥이 부임하여 총명한 소년 두 명, 즉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선발하여 지리산에 가서 금의 연주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귀금 선생이 그들에게 금의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미묘한 부분은 알려주지 않았다. 윤흥이 자기 처와 함께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으로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술을 전해 받으려는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이 숨기면서 알려주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왕명을 따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允興捧酒 其婦執盞膝行 致禮盡誠 然後 傳其所秘飄風等三曲. 安長傳其子克相克宗 克宗制七曲 克宗之後 以琴自業者 非一二. 所製音曲有二調 一平調 二羽調 共一百八十七曲. 其餘聲遺曲流傳 可記者無幾 餘悉散逸 不得具載.

윤흥봉주 기부집간슬행 치예진성 연후 전기소비표풍등삼곡 안장전기자극상완종 극종제칠곡 극종지후 이금자업자 비일이 소제음곡유이조 일평조 이우조 공일백팔십칠곡. 기여성유곡유전가기자무기 여실산일 부득구재.

 

윤흥이 술을 따르고 그의 처는 잔을 잡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예의와 정성을 다한 뒤에야 그가 숨겼던 표풍(飄風) 등의 3곡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여 극종이 7곡을 지었으며, 극종 이후로는 금으로써 자기의 업을 삼은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은 음률에는 두 가지 조(調)가 있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 둘째는 우조(羽調)이며 모두 187곡이었다. 그 나머지의 곡도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기록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며, 나머지 것도 모두 흩어지거나 없어졌으므로 전체를 기록할 수 없다.

 

玉寶高所制三十曲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嵒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一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一 降天聲曲一 克宗所製七曲 今亡.

옥보고소재삼십곡 상원곡일, 중원곡일, 하원곡일, 남해곡이, 의암곡일, 노인곡칠, 죽암곡이, 현합곡일, 춘조곡일, 추석곡일, 오사식곡일, 원앙곡일, 원호곡육, 비목곡일, 입실상곡일, 유곡청성곡일, 강천성곡일 극종소제칠곡 금망.

 

옥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2, 의암곡(倚嵒曲)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庵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朝曲) 1, 추석곡(秋夕曲) 1, 오사식곡(吾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호곡(遠岵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 이었으며 극종이 지은 7곡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 風俗通曰 箏 秦聲也.”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 箏形如瑟.” 傅玄曰 上圓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柱高三寸 象三才.” 加耶琴 雖與箏制度小異 而大槪似之.

가야금 역법중국악부쟁이위지. 풍속통왈 쟁진성야 석명왈 쟁시현고 쟁쟁연 병양이주 쟁형여금.” 부현왈 상원상천 하평상지 중공회육합 현주의십이월 사내인지지기 완우왈 쟁장육척 이응율수 현유십이 상사시 주고삼촌 상삼재 가여금수여쟁제도소이 이대개사지.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풍속통에서 쟁은 진()나라 악기다.”라 하였고, 석명(釋名)에서는 쟁은 줄을 높이 걸었기 때문에 소리가 쟁쟁하며 병(), () 두 주()의 쟁은 모양이 비파와 같다.”고 하였다. 부현(傅玄)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六合)을 모방한 것이고, 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이니 이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라 하였다. 완우(阮瑀)쟁의 길이는 6자이니 이는 율의 수에 맞춘 것이고, 현은 12줄이니 이는 사계절을 상징한 것이며, 괘의 높이는 3치이니 이는 삼재(三才, 천지인)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금이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 造十二曲. 後 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 傳其業 三人旣傳十一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나고기운 가여국가실왕 견당지악기 이조지. 왕이위제국방언각이성음 이가일재 내명악사성열현인우륵 조십이곡. 후 우륵이기국장란 휴악기 투신라진흥왕. 왕수지 안치국원 내견대제마주지해고대사만덕. 전기업 삼인기전십일곡 사위왈 차번차음 불가이위아정.”

나고기(羅古記)에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만든 것으로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聲音)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악사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순하였다. 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에 정착시키고 곧 대나마(大奈麻) 주지(注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 만덕(萬德) 등을 보내 그에게서 수업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였다.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

 

遂約爲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 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撙節 國之理亂 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樂. 加耶琴有二調 一河臨調 二嫩竹調 共一百八十五曲.

수약위오곡 우륵시문언이노 급청기오종지음 유루탄왈 악이불유 애이불비 가위정야. 이기진지전왕.” 왕문지대열 간신헌의 가야망국지음 부족취지.” 왕왈 가야왕 음란자멸 악하죄호? 개성인제악 연인정이위준절 국지이란 불유음조.” 수행지 이위대악. 가야금유이조 일하림조 이눈죽조 공일백팔십오곡.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 진흥왕이 그 곡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신하들이 건의하기를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취할 것이 없다고 하니 왕이 말하였다.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이를 연주하도록 하고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가야금에는 두 음조(音調)가 있는데 첫째는 하림조(河臨調),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이니 모두 185곡이었다.

 

于勒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寶伎 四曰達己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奇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奇物. 泥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鶉[赦字未詳]

우륵소재시ㅂ이곡 이왈하가라도 이왈 상가라도 삼왈보기 사왈달기 오왈사물 육왈물혜 칠왈하기물 팔왈사자지 구왈거열 십왈사팔혜 십일왕이사 십이왕상기물. 니문소재삼곡 일왈오 이왈서 삼왈순[사자미상]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는 보기(寶伎), 넷째는 달기(達己), 다섯째는 사물(思勿), 여섯째는 물혜(勿慧), 일곱째는 하기물(下奇物), 여덟째는 사자기(師子伎), 아홉째는 거열(居烈), 열째는 사팔혜(沙八兮), 열 한째는 이사(爾赦), 열 두째는 상기물(上奇物)이다. 니문(泥文)이 지은 3곡은 첫째는 오(, 까마귀), 둘째는 서(, ), 셋째는 순(, 메추라기)이다.[()자의 뜻은 분명치 않다.]

 

琵琶 風俗通曰 近代樂家所作 不知所起 長三尺五寸 法天地人與五行 四絃 象四時也 釋名曰 琵琶 本胡中馬上所鼓 推手前曰琵 引手却曰琶 因以爲名.”

비파 풍속통왈 근대악가소작 부지소기 장삼척오촌 법천지인여오행 사현 상사시야 석명왈 비파 본호중마상소고 추수전왈비 인수각왈파 인이위명.”

 

비파는 풍속통에 이르길 근대 음악가들이 만든 것으로 그 시초는 알 수 없다. 비파 길이의 석 자 다섯 치는 하늘ㆍ땅ㆍ사람과 오행(五行)을 모방한 것이오, 네 줄은 사계절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명에는 비파는 원래 호족들이 말 위에서 연주하던 것인데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을 비()라 하고 손을 끌어당기는 것을 파()라고 하기 때문에 이를 악기의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鄕琵琶 與唐制度 大同而少異 亦始於新羅 但不知何人所造 其音有三調 一宮調 二七賢調 三鳳皇調 共二百一十二曲.

향비파 여당제도 대동이소이 역시어신라 단부지하인소조 기음유삼조 일궁도 이칠현조 삼봉황조 공이백일십이곡.

 

향비파(鄕琵琶)는 당나라의 비파와 대체로 같으나 약간 다르며, 그것도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다만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음악에는 세 가지 음조가 있는데 첫째는 궁조(宮調), 둘째는 칠현조(七賢調), 셋째는 봉황조(鳳皇調)로 모두 212곡이다.

 

三竹 亦模倣唐笛 而爲之者也. 風俗通曰 笛 漢武帝時 丘仲所作也.” 又按 宋玉有笛賦 玉在漢前 恐此說非也. 馬融云 近代雙笛 從羌起 又笛 滌也 所以滌邪穢 而納之於雅正也 長一尺 四十七孔.” 鄕三竹 此亦起於新羅 不知何人所作.

삼죽 역모방당적 이위지자야. 풍속통왈 적 한무제시 구중소작야.” 우안 송옥유적부 왕재한전공차설비야. 마융운 근대쌍적 종강지 우적 척야 소이척사얘 아넙지어아정야. 장일철 사십칠공삼죽 차역기어신라 부지하인소작.

 

삼죽(三竹)은 역시 당나라의 피리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풍속통에서 피리는 한무제(漢武帝) 때 구중(丘仲)이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고찰하여 보면 송옥(宋玉)의 글에 적부(笛賦)가 있는데 송옥은 한()나라 이전 사람이니 이 설은 옳지 않은 듯하다. 마융(馬融)근대의 쌍적(雙笛)은 강()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적()은 척()의 뜻이니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고 맑고 바른 데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길이는 한 자이며 4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였다. 향삼죽(鄕三竹)은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古記云 神女王時 東海中忽有一小山 形如龜頭 其上有一竿竹 晝分爲二 夜合爲一 王使斫之作笛 名萬波息.” 雖有此說 怪不可信 三竹笛有七調 一平調 二黃鐘調 三二雅調 四越調 五般涉調 六出調 七俊調 大笒三百二十四曲 中笒二百四十五曲 小笒二百九十八曲.

고기운 신여왕시 동해중홀유일소산 형여귀두 기상유일간죽 주분위이 야합위일 왕사작지작적 명만파식적 수유차설 괴불가신 삼죽적유칠조 일평조 이황종조 삼이아조 사월조 오반섭조 육출조 칠준조 대금삼백이십사곡 중금이백사십오곡 소금이백구십팔곡.

 

고기(古記)신여왕(神女王) 때 동해 가운데에 갑자기 작은 산이 생겼는데,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 한 포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두 개가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대나무를 쪼개어 적()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고 써있으나 이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는 없다. 삼죽적(三竹笛)에는 일곱 조가 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 둘째는 황종조(黃鐘調), 셋째는 이아조(二雅調), 넷째는 월조(越調), 다섯째는 반섭조(般涉調), 여섯째는 출조(出調), 일곱째는 준조(俊調). 대함(大笒)324곡이오, 중함(中笒)245곡이오, 소함(小笒)298곡이다.


會樂及辛熱樂 儒理王時作也 突阿樂 脫解王時作也 枝兒樂 婆娑王時作也 思內[一作詩惱]樂 奈解王時作也 笳舞 奈密王時作也 憂息樂 訥祗王時作也 碓樂 慈悲王時人百結先生作也 竿引 智大路王時人川上郁皆子作也 美知樂 法興王時作也 徒領歌 眞興王時作也 捺絃引 眞平王時人淡水作也 思內奇物樂 原郞徒作也 內知 日上郡樂也 白實 坤梁郡樂也 德思內 河西郡樂也 石南思內道 同伐郡樂也 祀中 北隈郡樂也 此皆鄕人喜樂之所由作也 而聲器之數 歌舞之容 不傳於後世.

회악급신열악 유리왕시작야 돌아악 탈해왕시작야 지아약 파사왕시작야 사내[일작시뇌]악 내해왕시작야 가무 내밀왕시작야 우식악 눌지왕시작야 대악 자지왕시인백결선생작야 간인 지대로왕시인천상욱개자작야 미지악 법흥왕시작야 도령가 진흥왕시작야 날현인 진평왕시인잠수작야 사내기물악 원랑도작야 내지 일상군악야 백실 곤양군악야 덕사내 하서군악야 석남사내도 동벌군악야 사중 북외군악야 차개향인희락지유작야 이성기지수 가무지용 부전어후세.

 

회악(會樂)과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儒理王) 때 만들었으며,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脫解王), 지아악(枝兒樂)은 파사왕(婆娑王), 사내[시뇌(詩惱)라고도 한다.](思內樂)은 내해왕(奈解王), 가무(笳舞)는 내밀왕(奈密王),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訥祗王) 때 만든 것이다. 대악(碓樂)은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백결(百結) 선생이 만들었으며, 간인(竿引)은 지대로왕(智大路王) 때 사람인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든 것이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法興王) 때 만든 것이며 도령가(徒領歌)는 진흥왕(眞興王) 때 만든 것이다.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眞平王) 때 사람인 담수(淡水)가 만들었으며,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만든 것이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의 음악이오, 백실(白實)은 압량군(押梁郡)의 음악이오,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의 음악이오, 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는 동벌군(同伐郡)의 음악이오, 사중(祀中)은 북외군(北隈郡)의 음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지만 곡조와 악기의 수 및 가무(歌舞)의 형태는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但古記云 政明王九年 幸新村 設酺奏樂 笳舞 監六人 笳尺二人 舞尺一人, 下辛熱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三人 思內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韓岐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上辛熱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小京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一人 歌尺三人 美知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단고기운 정명왕구년 행신촌 설포진악 가무 감육인 가척이인 무척이인 하행열무 감사인 금척일인 무척이인 가척삼인, 사내무 감삼인 금척일인 무척이인 가척이인. 한기무 감삼인 금척일인 무척이인, 상행열무 감삼인 금척일인 무척이인 가척이인, 소경무 감삼인 금척일인 무척일인 가척삼인, 미지무 감사인 금척일인 무척이인.

 

다만 고기(古記)에 정명왕(政明王, 신문왕) 9(서기 689)에 왕이 신촌(新村)에 행차하여 큰 술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가무(笳舞)에는 감(, 감독하는 사람)6, 가척(笳尺, 피리부는 악사)2, 무척(舞尺, 춤을 담당한 악사)1, 하신열무(下辛熱舞)에는 감이 4, 금척(琴尺, 가야금을 타는 악사)1, 무척이 2, 가척이 3, 사내무(思內舞)에는 감이 3, 금척이 1, 무척이 2, 가척이 2, 한기무(韓岐舞)에는 감이 3, 금척이 1, 무척이 2, 상신열무(上辛熱舞)에는 감이 3, 금척이 1, 무척이 2, 가척이 2, 소경무(小京舞)에는 감이 3, 금척이 1, 무척이 1, 가척이 3, 미지무(美知舞)에는 감이 4, 금척이 1, 무척이 2명이었다.

 

哀莊王八年 奏樂 始奏思內琴. 舞尺四人靑衣 琴尺一人赤衣 歌尺五人彩衣繡扇並金鏤帶. 次奏碓琴舞 舞尺赤衣 琴尺靑衣 如此而已 則不可言其詳也 羅時樂工皆謂之尺.

애장왕팔년 진악 시진사내금 무척사인청의 금척일인적의 가척오인채의수선병금루대 차진대금무 무척적의 금척청의 여차이이 즉불가언기상야. 라시악공개위지척.

 

애장왕(哀莊王) 8(서기 807)에 음악을 연주하는데 처음으로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하였다. 무척 4명은 푸른 옷을 입었으며, 금척 1명은 붉은 옷을 입었고, 가척 5명은 채색 옷을 입고 수놓은 부채를 들고 금을 새겨 넣은 띠를 띠었다. 다음으로 대금무(碓琴舞)를 연주하는데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므로 자세히는 말할 수가 없겠다. 신라 시대에 악공(樂工)은 모두 척()이라고 불렀다.

 

崔致遠詩 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최치원시 유향악잡영오수 금록우차.

 

최치원(崔致遠)의 시에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가 있으므로 이제 여기에 기록한다.

 

金丸 금환

廻身掉臂弄金丸 회신도비롱금환

月轉星浮滿眼看 월전성부만안간

縱有宜僚那勝此 종유선료나승차

定知鯨海息波瀾 정지경해식파란

 

금환(金丸)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구슬을 희롱하니

달과 뭇별들이 눈에 가득 떠도누나

의좋은 친구 있다한들 어찌 이보다 더 나으랴?

넓은 바다 파도조차 잠잠해짐을 바로 알겠구나

 

 

月顚 월전

肩高項縮髮崔嵬 견고항축발최외

攘臂群儒鬪酒盃 양비군유투주배

聽得歌聲人盡笑 청득가성인진소

夜頭旗幟曉頭催 야두기치효두최

 

월전(月顚)

 

숙어진 어깨 흩어진 머리카락 다듬으며

팔을 걷어부치고 뭇 선비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 모두 웃는데

밤 기운이 새벽을 여누나

 

大面 대면

黃金面色是其人 황금면색시기인

手抱珠鞭役鬼神 수포주편역귀신

疾步徐趍呈雅舞 질보서추정아무

宛如丹鳳舞堯春 완여단봉무요춘

 

대면(大面)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손에 구슬 달린 채찍 들고 귀신을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맵시나게 춤을 추니

붉은 봉새가 요()시대 봄철의 태평성대에 춤추는 것 같구나

 

束毒 속독

蓬頭藍面異人間 봉두남면이인간

押隊來庭學舞鸞 압대래정락무난

打鼓冬冬風瑟瑟 타고동동풍슬슬

南奔北躍也無端 남분북약야무단

 

속독(束毒)

 

엉킨 머리 쪽빛 얼굴이라 사람 같지 않은데

떼를 지어 뜰에 나와 난새 춤을 배우네

북은 둥둥 울리고 바람 솔솔 부는데

이리 저리 뛰고 내달아 끝이 없구나

 

狻猊 산예

遠涉流沙萬里來 원섭류사만리래

毛衣破盡着塵埃 모의차진착진애

搖頭掉尾馴仁德 요두도미순인덕

椎氣寧同百獸才 추기영동백수재

 

산예(狻猊)

 

머나먼 길 걷고 걸어 사막을 지나오니

털가죽은 헤어지고 먼지가 쌓였는데

흔드는 머리 살랑거리는 꼬리에 어진 모습 배었는데

웅장한 기상은 정녕코 온 짐승의 재주를 아우른 것 같구나

 

高句麗樂 通典云 樂工人紫羅帽 飾以鳥羽 黃大袖 紫羅帶 大口袴 赤皮鞾 五色緇繩 舞者四人 椎髻於後 以絳抹額 飾以金璫 二人黃裙襦赤黃袴 二人赤黃裙襦袴 極長其袖 烏皮鞾 雙雙倂立而舞. 樂用 彈箏一 掬箏一 臥箜篌一 竪箜篌一 琵琶一 五絃一 義觜笛一 笙一 橫笛一 簫一 小篳篥一 大篳篥一 桃皮篳篥一 腰鼓一 齋鼓一 檐鼓一 唄一 大唐武太后時 尙二十五曲 今唯能習一曲 衣服亦寑衰敗 失其本風 冊府元龜云 樂有 五絃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고구려악 통전운 악공인자라모 식이조우 황대수 자라대 대구고 적피화 오색치승 무자사인 추계어후 이강말액 식이금당 이인황군유적황고 이인적황군유고 극장기수 오피화 쌍쌍병립이무. 악용 탄쟁일 국쟁일 와공후일 수공후일 비파일 오현일 의취저일 생일 횡적일 소일 소필률일 대필률일 도피필률 요고일 재고일 첨고일 패일 대당무태후시 상이십오곡 금유능습일골 의복역침쇠패 실기본풍. 책부원귀운 악유 오현금쟁필횡적소고지속 취로이화곡.

 

고구려(高句麗) 음악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황색의 큰 소매 옷에 자색 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두 명은 황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기로는 탄쟁(彈箏) 하나, 국쟁(掬箏) 하나, 와공후(臥箜篌) 하나, 수공후(竪箜篌) 하나, 비파 하나, 오현(五絃) 하나, 의취저(義觜笛) 하나, () 하나, 횡저(橫笛) 하나, 퉁소() 하나, 소필률(小篳篥) 하나, 대필률(大篳篥) 하나, 도피필률(桃皮篳篥) 하나, 요고(腰鼓) 하나, 재고(齋鼓) 하나, 첨고(檐鼓) 하나, () 하나를 사용하였다. 당 무태후(武太后)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복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써있다. 책부원귀에는 악기에 오현금, , 피리, 횡저, 퉁소, 북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조화시켰다.”고 써있다.

 

百濟樂 通典云 百濟樂 中宗之代 工人死散 開元中 岐王範爲大常卿 復奏置之 是以音伎多闕 舞者二人 紫大袖裙襦 章甫冠 皮履. 樂之存者 箏笛桃皮篳篥箜篌 樂器之屬 多同於內地. 北史云 有鼓角箜篌箏竽箎笛之樂.

백제악 통전운 백제악 중종지대 공인사산 개원중 기왕범위대상경 복진치지 시이음기다궐 무자이인 자대수군유 장보관 피리. 악지존자 쟁적도피필률공후 악기지속 다동어내지. 북사운 유고각공후쟁간호적지악.

 

백제(百濟)의 음악에 대하여 통전(通典)에 백제 음악은 당나라 중종(中宗) 시대에 악공들이 죽고 흩어졌는데, 개원(開元) 연간에 기왕범(岐王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서야 다시 백제 음악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음곡이 많다. 무용수 두 명은 자색빛의 큰 소매에 치마와 저고리의 옷을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남아 있는 악기는 쟁(), (), 도피필률(桃皮篳篥, 관악기, 피리), 공후(箜篌, 현악기)인데, 악기류는 대부분 중국과 같다고 써있다. 북사에는 고(), (), 공후, , (), (), 적과 같은 악기가 있었다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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