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聖王
眞聖王立 諱曼 憲康王之女弟也(崔致遠文集第二卷 謝追贈表云 臣坦言 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太傅 又納旌節表云 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生未周晬 臣仲兄晃權統藩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 以此言之 景文王諱凝 本紀則云膺廉 眞聖王諱坦 本紀則云曼 又定康王晃以光啓三年薨 本紀謂二年薨 皆不知孰是)
진성왕립 휘만 헌강왕지여제야(최치원문집제이권 사추증표운 신탄언 복봉제지 추증망부신응위태사 망형신정위태부 우납정절표운 신장형국왕정 이거광계삼년칠월오일 엄어성대 신질남효생이주수 신중형황권통번탄 우미경기월 원사명시 이차언지 경문왕휘응 본기즉운응렴 진성왕탄 본기즉운만 우정강왕황이광계삼년훙 본기위이년훙 개부지숙시)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만(曼)이며, 헌강왕(憲康王)의 여동생이다.[『최치원 문집(崔致遠文集)』 제2권 「사추증표(謝追贈表)」에는 “신하 탄(坦)은 말합니다. 엎드려 삼가 하명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버지 응(凝)을 태사(太師)로 삼아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晸)을 태부(太傅)로 삼아 추증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또 「납정절표(納旌節表)」에는 “저의 큰형인 국왕 정이 지난 광계(光啓)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嶢)는 태어나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晃)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경문왕(景文王)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膺廉)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 정강왕(定康王) 황은 광계 3년에 돌아가셨는데, 본기에는 2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大赦 復諸州郡一年租稅 設百高座皇龍寺 親幸聽法 冬無雪.
대사 복제주군일년조세 설백고좌황룡사 친행청법 동무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이년 춘이월 소양리석자행 왕소여각간위홍통 지시 상입내용사 잉명여대구화상 수집향가 위지삼대목야.
2년(서기 888) 봄 2월, 소양리(少梁里)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임금이 평소에 각간 위홍(魏弘)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고 정리하게 하였다.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한다.
及魏弘卒 追諡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淫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 侫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壞弛.
급위홍졸 추시위혜성대왕. 차후 잠인소년미장부양삼인음한 잉수기인이요직 위이국정 유시양행사지 화뢰공행 상벌불공 기강괴이.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임금은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 때문에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時有無名子 欺謗時政 構辭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隱者巨仁耶.“
시유무명자 사방시정구사방어조로 왕명인수색 불능득 혹고왕왈 “차필문인부득지자소위 시시대야주은자거인야”
이때 이름 없는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말을 지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大耶州)에 숨어 사는 거인(巨仁)이란 자가 아닌가 합니다.”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왕명구신인경록 장형지.
임금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를 벌주려 하였다.
巨仁憤怨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거인분원 서어옥벽왈 “우공동곡삼년한 추련함비오월상 금아유수환사고 황천무어단창창.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돌이켜 그 옛 일과 같지만 하늘은 말없이 푸르기만 하네.”
其夕 忽雲霧震雷雨雹 王懼 出巨仁放歸. 三月戊戌朔 日有食之 王不豫 錄囚徒 赦殊死已下 許度僧六十人 王疾乃瘳. 夏五月 旱.
기석 홀운무진뢰우박 왕구 출거인방귀. 삼월무술삭 일유식지 왕불에 록수도 사수사이하 허도승육십인 왕질내추. 하오월 한.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졌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거인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임금이 병들어 편안하지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스님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임금의 병이 곧 나았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三年 國內諸州郡 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 所在盜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據沙伐州叛 王命奈麻令奇捕捉 令奇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 力戰死之 王下勑斬令奇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삼년 국내제주군 불수공부 부고허갈 국용궁핍 왕발사감촉 유시 소재도적봉기 어시 원종애노등거사벌주반 왕명나나영기포착 영기망적루 외불능진 촌주우연 역전사지 왕하래참영기 우연자년십여세 사위촌주,
3년(서기 889)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日暈五重. 十五日 幸皇龍寺 看燈.
사년 춘정월 일훈오중. 십오일 행황룡사 간등,
4년(서기 890)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15일, 임금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았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 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오년 동시월 북원적수양길 견기좌궁예 영백여기 습북원동부락급명주관내주천등십여군현.
5년(서기 891) 겨울 10월, 북원(北原)의 도적 두목 양길(梁吉)이 그의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기병 백여 명으로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였다.
六年 完山賊甄萱據州 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
육년 완산적견훤거주 자칭후백제 무림동남군현항속.
6년(서기 892),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주에 자리 잡고 후백제(後百濟)라고 스스로 일컬었다.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七年 遣兵部侍郞金處誨 如唐納旌節 沒於海.
칠년 견병부시랑김처회 여강남정절 몰어해.
7년(서기 893), 병부 시랑 김처회(金處誨)에게 정절(旌節)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바다에 빠져 죽었다.
八年 春二月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 王嘉納之 拜致遠爲阿飡 冬十月 弓裔自北原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 自稱將軍.
팔년 춘이월 최치원진시무일십여조 왕가납지 배치원위아찬. 동시월 궁예자북원입하슬라 중지육백여인 자칭장군,
8년(서기 894) 봄 2월, 최치원(崔致遠)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時務一十餘條)을 작성하여 바쳤다.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궁예가 북쪽 벌판에서 하슬라(何瑟羅)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九年 秋八月 弓裔擊取猪足狌川二郡 又破漢州管內夫若鐵圓等十餘郡縣.
구년 추구월 궁예격취저족성천이군 우파한주관내부약철뤈등십여군현.
9년(서기 895) 가을 8월, 궁예가 저족(猪足)ㆍ성천(狌川) 두 군을 빼앗고, 또한 한주(漢州) 관내의 부약(夫若)ㆍ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였다.
冬十月 立憲康王庶子嶢爲太子 初 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 姿質佳麗 王心愛之 命後車載 到帷宮野合 卽有娠而生子.
동시월 입헌강왕서자효위태자. 초헌강왕관렵 행도방견일여자 자질가려 왕심애지 명후거재 도유궁야합 즉유신이생자.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삼아 세웠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을 관람하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라 명하고 유궁(帷宮, 장막을 쳐서 임금이 임시 거처하도록 만든 곳)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곧 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及長 體貌魁傑 名曰嶢 眞聖聞之 喚入內 以手撫其背曰 孤之兄弟姊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仍命有司 備禮封崇.
급장체모괴걸 명왈요 진성문지 환입내 이수무기배왈 고지형제자매 골법이인 차아배상향골융기 진헌강왕지자야 내명유사 비례봉숭.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여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십년 적기국서남 적기고이자이 인위지적고적 시해주현 지경서부모량리 겁략인가이거.
10년(서기 896),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스스로 남들과 다르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고적(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十一年 夏六月 王謂左右曰 “近年以來 百姓困窮 盜賊蜂起 此 孤之不德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십일년 하유월 왕위좌우왈 “근년이래 백성곤궁 도적봉기 아 고지부덕야 히현양위 오결의”
11년(서기 897) 여름 6월, 임금이 측근들에게 말하길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禪位於太子嶢 於是 遣使入唐表奏曰 臣某言 居羲仲之官 非臣素分 守延陵之節 是臣良圖. 以臣姪男嶢 是臣亡兄晸息 年將志學 器可興宗 不假外求 爰從內擧 近已俾權藩寄 用靖國災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선위어태자효 어시 견사입당표주왈 신모언거희중지관 비신소분 수연릉지절 시신양도 이신질남효 시신망형정식 년장지학 기가여종 불가외구 원종내겨 근기비권번기 용정국제. 동십이월을사 왕훙어북궁 시왈지성 장우황산.
그리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물려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하 아무개는 아룁니다. 희중(羲仲: 상서 요전(堯典)에서 유래, 동방을 관장하였다는 일관(日官))의 관직에 있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延陵; 연릉은 강소성 무진현의 소재지로, 춘추시대 오의 계찰이 아버지의 지위를 받지않고 연릉에 봉해진 것에서 유래한다.)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저의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입니다. 나이가 열다섯 살 정도 되었고 종실을 흥하게 할 자질이 있기에,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나라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겨울 12월 을사에, 임금이 북궁(北宮)에서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 羲仲과 延陵의 의미는 명확지 않으나 짐작해 본다면...
희중은 요임금이 동쪽 지방을 다스릴 책임을 준 사람이요 연릉은 역시 동방 오나라의 왕족으로 왕위를 물려받지 않고 일개 봉국 지도자로 산 것을 비유하는 말.... 비왕통 신하로 낮추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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