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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十一 - 憲安王


憲安王

 

 

憲安王立 諱誼靖(一云祐靖) 神武王之異母弟也. 母照明夫人 宣康王之女 以文聖顧命卽位 大赦 拜伊飡金安爲上大等.

헌안왕립 휘의정(일운우정) 신무왕지이모제야. 모조명부인 선강왕지녀 이문성고명즉위 대사배이찬김안위상대등.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우정祐靖)이요 신무왕(神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으로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文聖王)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 김안(金安)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夏四月 降霜.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唐城郡南河岸 有大魚出 長四十步 高六丈.

이년 춘정월 친사신궁. 하사월 강상. 자오월지추칠월 불우. 당성군남하안 유대어출 장사십보고육장.

 

2(서기 858)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여름 4,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唐城郡) 남쪽 강변에서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 넓이가 6장이었다.

 

三年 春 穀貴人饑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隄防勸農.

삼년 춘 곡귀인기 왕션사진구. 하사월 교수완제방권농.

 

3(서기 859) ,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구제하였다.

여름 4, 임금이 교서를 내려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四年 秋九月 王會群臣於臨海殿 王族膺廉年十五歲 預坐焉. 王欲觀其志 忽問曰 汝游學有日矣 得無見善人者乎? 答曰 臣嘗見三人 竊以爲有善行也王曰 何如一高門子弟 其與人也 不自先而處於下 一家富於財 可以侈衣服 而常以麻紵自喜 一有勢榮 而未嘗以其勢加人 臣所見如此王聞之黙然 與王后耳語曰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意以女妻之顧謂膺廉曰 願郞自愛 朕有息女使之薦枕 更置酒同飮 從容言曰 吾有二女 兄今年二十歲 弟十九歲 惟郞所娶”. 膺廉辭不獲 起拜謝 便歸家告父母 父母言 聞王二女容色 兄不如弟 若不得已 宜娶其弟”. 然尙疑未決 乃問興輪寺僧 僧曰 娶兄則有三益 弟則反是 有三損”. 膺廉乃奏 臣不敢自決 惟王命是從}. 於是 王長女出降焉.

사년 추구월 왕회군신어임해전 왕족응렴년십오세 얘좌언. 왕욕관기지 홀문왈 여유학유일의 득무견선이자호? 답왈 신상견삼인 절이위유선행야왕왈 하여일고문자제 기여인야 불자선이처어하 일가부어재 가이치의복 이상이마저자희 일유세영 이미상이기세가인 신소견여차왕문지묵연 여왕후이어왈 짐열인다의 무여응렵자 의이여처지고위응렴왈 고랑자애짐지유식녀 사지천침 경치주동음 종용언왈 오유이녀 형금년이십 제십구세 유랑소귀 응렴사불획 기배사 경귀가고부모. 부모언 문왕이녀용색 형불여재 역부득이 의취기제 연상의미결 내문흥륜사승. 승왈 취형즉유삼익 제즉반시 유삼손”. 응렴내주 신불감자경 유왕명시종”. 어시 왕장녀출강언.

 

4(서기 860) 가을 9, 임금이 임해전(臨海殿)에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왕족 응렴(膺廉)이 열다섯 살의 나이로 참석하였다. 임금이 그의 뜻을 알아보려고 갑작스레 물었다. “너는 한동안 유람하며 배웠는데 착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이 착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임금이 물었다. 어떤 행동인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한 사람은 높은 집안의 자제인데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은 부자로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고도 기뻐하였으며,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 그리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스스로 삼가고 사랑해라. 나에게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임금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큰 아이는 금년에 스무 살이요, 작은 아이는 열아홉 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부모가 말하였다. “듣건대 임금의 두 딸의 얼굴은 언니가 동생보다 못생겼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응렴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흥륜사(興輪寺)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이 말하였다. “언니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 가지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응렴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제가 감히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겠사오니 그저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하였고, 임금이 맏딸을 시집보냈다.

 

五年 春正月 王寢疾彌留 謂左右曰 寡人不幸 無男子有女 吾邦故事 雖有善德眞德二女主 然近於牝雞之晨 不可法也. 甥膺廉 年雖幼少 有老成之德 卿等 立而事之 必不墜祖宗之令緖 則寡人死 且不朽矣”.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오년 춘정월 왕침질미류 위좌우왈 과인불행 무남자유녀 오방고사 수유선덕진덕이여주 연군어빈계지신 불가법야. 생응렴 년수유소 유노성지덕 경등 입이사지 필불추조종지영제 즉과인사 차불후의. 시월이십구일 훙 시왈헌안 장우공작지.

 

 

5(서기 861) 봄 정월, 임금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나라 옛 일에 선덕(善德)과 진덕(眞德)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가까운 일이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달 29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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