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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十一 - 神武王


神武王

 

 

神武王立 諱祐徵 元聖大王孫均貞上大等之子 僖康王之從弟也 禮徵等旣淸宮禁 備禮迎之 卽位 追尊祖伊飡禮英(一云孝眞)爲惠康大王 考爲成德大王 母朴氏眞矯夫人爲憲穆太后 立子慶膺爲太子 封淸海鎭大使弓福爲感義軍使 食實封二千戶.

신무왕립 휘우징 원성대왕손균정상대등지자 희강왕지종제야. 예징등기청궁금 비례영지. 즉위추존조이찬예영(일운효진)위혜강대왕 고위성덕대왕 모박씨진교부인위헌목태후 입자경응위태자 봉청해진대사궁복위감의군사 식실봉이천호.


신무왕(神武王)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름은 우징(祐徵)이요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 동생이다. 예징(禮徵) 등이 궁중을 깨끗이 숙청하고, 예절을 갖추어 그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의 조부인 이찬 예영(禮英)(혹은 효진)을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삼아 추존하고,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삼고,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삼고, 아들 경응(慶膺)을 태자로 삼았으며,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 2천 호를 주어 봉하였다.

 

利弘懼 棄妻子 遁山林 王遣騎士 追捕殺之 秋七月 遣使如唐 遺淄靑節度使奴婢 帝聞之矜遠人 詔令歸國.

이홍구 기처자 둔산림 왕견기사 추포살지. 추칠월 견사여당 유치청절도사노비 제문지긍원인조영귀국,

 

이홍(利弘)은 두려워 처자식을 버리고 산림으로 도망하였으나, 임금이 기병을 보내 쫓아가서 잡아 죽였다.

가을 7,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에게 노비를 주었다. 황제가 이를 듣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이라고 불쌍히 여겨 조칙을 내려 노비들을 귀국하게 하였다.

 

王寢疾 夢利弘射中背 旣寤 瘡發背 至是月二十三日 薨. 諡曰神武 葬于弟兄山西北.

왕침질 몽이홍사중배 기오 창발배 지시월이십삼일 훙. 시왕신무 장우제형산서북.

 

임금이 병으로 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활을 쏘아 임금의 등을 맞혔다. 임금이 잠에서 깨어보니 등에 종기가 나 있었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

 

論曰 歐陽子之論曰 魯桓公 弑隱公而自立者 宣公 弑子赤而自立者 鄭厲公 逐世子忽而自立者 衛公孫剽 逐其君衎而自立者 聖人於春秋 皆不絶其爲君 各傳其實 而使後世信之 則四君之罪 不可得而掩耳 則人之爲惡 庶乎其息矣羅之彦昇 弑哀莊而卽位 金明 弑僖康而卽位 祐徵 弑閔哀而卽位 今皆書其實 亦春秋之志也.

논왈 구양자지론왈 노환공 시은공이자립자 선공 시자적이자립자 정여공 축세자홀이자립자자 위공손표 축기군간이자립자 성인어춘추 개부절기위군 각전기실 이사후세신지 즉사군지죄 불가득이엄이 즉인지위악 서호기식의.” 라지언승 시애장이즉위 김명 시희강왕즉위 우징 시민애이즉위 금개서기실 역춘추지지야.

 

사관이 논평하길 구양자(歐陽子)가 말하기를, ()나라 환공(桓公)은 은공(隱公)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자요, 선공(宣公)은 자적(子赤)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자이며, ()나라 여공(厲公)은 세자 홀()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자요, ()나라 공손표(公孫剽)는 자기 임금 간()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자이다. 공자가 춘추(春秋)에 모두 그들이 임금이 된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각각 사실대로 전한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네 왕의 죄는 사람들의 귀를 가릴 수 없는 사실이므로, 이제 사람들이 악한 행동이 거의 없어지기를 바란 것이다.”고 하였다. 신라의 언승(彦昇)은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김명(金明)은 희강왕(僖康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우징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지금 이러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는 것도 또한 춘추의 뜻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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