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九 -宣德王


 

宣德王

 

宣德王立 姓金氏 諱良相 奈勿王十世孫也 父 海飡孝芳 母 金氏四炤夫人 聖德王之女也 妃 具足夫人 角干良品之女也(一云義恭阿飡之女) 大赦 追封父爲開聖大王 尊母金氏爲貞懿太后 妻爲王妃 拜伊飡敬信爲上大等 阿飡義恭爲侍中 改御龍省奉御爲卿 又改卿爲監.

선덕왕립 성김씨 휘양상 내물왕십세손야. 부 해찬효방 모 김씨사조부인 성덕왕지여야. 비 구족부인 각간양품지녀야(일운의공아찬지녀). 대사 추봉부위개성대왕 존모김씨위정의태후 처위왕비 배이찬경신위상대등 아찬의공위시중 개어용성봉어위경 우개경위감.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良相)이다. 내물왕(奈勿王)10대손이다. 아버지는 해찬 효방(孝芳)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조부인(四炤夫人)으로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 양품(良品)의 딸이다.(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한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아버지를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경신(敬信)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의공(義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어룡성(御龍省)의 봉어(奉御)를 경()으로 고쳤다가 경을 다시 감()으로 고쳤다.

 

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秋七月 發使安撫浿江南州郡.

이년 춘이월 친사신궁. 추칠월 발사안무채강남주군.

 

2(서기 781) 2, 임금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7, 임금이 사신을 보내 패강(浿江) 남쪽의 주와 군을 위로하였다.

 

三年 春閏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幸漢山州 移民戶於浿江鎭. 秋七月 大閱於始林之原

삼년 춘윤정월 견사입당조공. 이월 왕순행한간주 이민호어패강진. 추칠월 대열어시림지원.

 

3(서기 782) 봄 윤 정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 임금이 한산주(漢山州)를 순행하고 백성들을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겼다.

가을 7, 시림(始林)의 들판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阿飡體信爲大谷鎭軍主. 二月 京都雪三尺.

사년 춘정월 이아찬체신위대곡진군주. 이월 경도설삼척.

 

4(서기 783)봄 정월, 아찬 체신(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로 삼았다.

2,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五年 夏四月 王欲遜位 群臣三上表諫 乃止.

오년 하사월 왕욕손위 군신삼상표간 내지.

 

5(서기 784) 여름 4, 임금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했다. 신하들이 세 번이나 간언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六年 春正月 唐德宗遣戶部郞中蓋塤 持節冊命王 爲檢校大尉雞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 是月 王寢疾彌留 乃下詔曰 寡人本惟菲薄 無心大寶 難逃推戴 作其卽位 居位以來 年不順成 民用窮困 此皆德不符民望 政未合天心 常欲禪讓 退居于外 群官百辟 每以誠止 未果如意 因循至今 忽遘疾疹 不寤不興 死生有命 顧復何恨 死後 依佛制燒火 散骨東海至十三日薨 諡曰宣德.

육년 춘정월 당덕종견호부낭중개훈 지절책명왕 위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 시월 왕침질미류 내하조왈 과인본유비박 무심대보 난도추재 작기즉위 거위이래 년불순성 민용궁곤 차개덕불부민망 정미합천심 상용선양 퇴거우외 군관백벽 매이성지 미과여의 인순지금 홀구질진 불매불흥 사생유명 고복하한 사후 의불제소화 산골동해지십삼일훙 시왈선덕.

 

6(서기 785) 봄 정월, 당 덕종(德宗)이 호부낭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을 지절사(持節使)로 보내 임금을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雞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달에 임금이 병으로 누웠다.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과인은 본래 재능이 없고 덕이 적어 왕위에 오를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를 피할 수 없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는 동안 해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백성의 일상생활이 곤궁하여졌으니, 이는 모두 덕이 백성들의 소망에 부합되지 않고 정치가 하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항상 왕위를 물러나 궁궐 밖에 살고자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이 그때마다 지성으로 말렸기 때문에 매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었다. 이제 갑자기 병이 나서 다시 회복이 어렵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죽은 후에는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할 것이며 유골은 동해에 뿌리도록 하라.”

13일후에 돌아가셨다. 시호를 선덕(宣德)이라 하였다.


'三國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羅本紀 第十 -昭聖王  (0) 2019.12.24
新羅本紀 第十 -元聖王  (0) 2019.12.23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0) 2019.12.22
新羅本紀 第九-景德王  (0) 2019.12.20
新羅本紀 第九 -孝成王  (0) 2019.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