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汲鄭列傳
(汲黯)
汲黯字長孺, 濮陽人也. 其先有寵於古之衛君. 至黯七世, 世為卿大夫.
급암자장유 복양인야. 기선유총어고지위군. 지암칠세 세위경대부.
급암(汲黯)의 자(字)는 장유(長孺)이고 복양(濮陽)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위(衛)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로부터 급암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대대로 조정에서 경(卿)과 대부(大夫)를 지냈다.
黯以父任, 孝景時為太子洗馬, 以荘見憚. 孝景帝崩, 太子即位, 黯為謁者.
암이부임 효경시위태자세마 이장견탄. 효경제붕 태자즉위 암위알자.
급암은 부친의 천거로 경제(景帝) 때 태자의 세마(洗馬)가 되었는데, 그의 사람됨이 엄정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외심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경제가 죽은 후에 태자가 즉위하자 급암을 알자(謁者:왕과 알현을 중개하는)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東越相攻, 上使黯往視之. 不至, 至呉而還, 報曰:「越人相攻, 固其俗然, 不足以辱天子之使.」
동월상공 상사암왕시지. 부지 지오이환 환보 ‘월인상공 고기속연 부족이욕천자지사’
그 무렵 동월(東越) 사람과 구월(瓯越)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황제(무제)가 급암을 파견해 그 실정을 살펴보도록 했다. 급암은 동월까지 가지도 않고, 단지 오(吳)나라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월(越)나라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본디 그들의 풍속이 그래서입니다. 하니 천자의 사신을 수고롭게 할 가치가 없습니다.’
河內失火, 延焼千餘家, 上使黯往視之. 還報曰:「家人失火, 屋比延焼, 不足憂也. 臣過河南, 河南貧人傷水旱萬餘家, 或父子相食, 臣謹以便宜, 持節発河南倉粟以振貧民. 臣請帰節, 伏矯制之罪.」
하내실화 정소천여가 상사암왕시지. 환보왈 ‘가인실화 옥비연소 부족우야. 신과하남 하남빈인상수한만여가 혹부자상식 신근이편이 지절발하남창속이진빈민. 신청귀절 복교제지죄’
하내(河內)에 화재가 발생해 끊임이 없이 1천여 채의 민가가 불에 타자, 무제는 또 급암을 파견시켜 살펴오도록 하였다. 급암이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백성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했고, 집들이 밀접하여 불이 퍼진 것이므로 크게 걱정하실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하남(河南)을 지나오다가, 현지 빈민들 가운데 만여 가구가 수해와 한해를 당하여 경우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는 참상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비상대책을 강구하여 지니고 있던 부절(符節)로써 하남군의 곡식 창고를 열어서 현지의 빈민들을 긴급하게 구제했습니다. 지금 신은 부절을 반환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위조한 죄를 받고자 합니다.’
上賢而釈之, 遷為滎陽令. 黯恥為令, 病帰田里. 上聞, 乃召拝為中大夫. 以數切諫, 不得久留內, 遷為東海太守.
상현이석지 천위형양령. 암치위령 병귀전리. 상문 내소배위중대부. 이수절간 부득구유내 천위동해태수.
무제는 이 같은 급암의 처사를 어질게 여기고 그의 죄를 용서하고, 형양(滎陽)의 현령으로 발령하였다. 그러나 급암은 현령으로 발령을 난 것을 치욕스럽게 여기고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 곧 다시 그를 조정으로 불러서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했다. 급암은 여러 차례 간절한 직언을 올려서 조정 내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동해(東海)의 태수로 전출되었다.
黯學黃老之言, 治官理民, 好清靜, 択丞史而任之. 其治, 責大指而已, 不苛小.
암학황노지언 치관리민 호청정 택승사이임지. 기치 책대지이이 불가소.
급암은 황로(黃老)의 학설을 배워서, 관리를 다스리고 민사를 처리했는데, 청정한 것을 좋아하여 자신을 조력하는 군승(丞)과 서사(書史)를 선출하여 모든 행사를 그들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했다. 급암은 그들을 감독할 때에 큰 원칙을 지키는 것을 요구할 뿐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黯多病, 臥閨閤內不出. 歳餘, 東海大治. 稱之.
암다병 와규합내불출. 세여 동해대치. 칭지.
급암은 자주 병에 걸려 항상 방 안에 누워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자 동해는 잘 다스려졌고, 백성들도 그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上聞, 召以為主爵都尉, 列於九卿. 治務在無為而已, 弘大體, 不拘文法.
상문 소이위주작도위 열어구경. 치무재무위이이 홍대체 불구문법.
무제가 이 소문을 들고 그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주작도위(主爵都尉)로 임명하니, 마침내 구경(九卿)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는 정무를 볼 때에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실천했는데, 큰 골자를 중시할 뿐 자질구레한 법규나 법령조문에 구애받지 않았다.
黯為人性倨, 少禮, 面折, 不能容人之過. 合己者善待之, 不合己者不能忍見.
암위인성거 소례 면절 불능용인지과. 합기자선시지 불합기자불능인견.
급암의 인성은 거만하고 예의 격식을 잘 차리지 않았고, 남의 면전에서 그대로 반박하기도 했는데,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 자기와 의기투합되는 자에게는 잘 대우했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아예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다.
士亦以此不附焉. 然好學, 遊俠, 任気節, 內行脩絜, 好直諫, 數犯主之顔色, 常慕傅柏、袁盎之為人也. 善潅夫、鄭當時及宗正劉棄. 亦以數直諫, 不得久居位.
사역이차불부언. 연호학 유협 임기절 내행수결 호직간 수범주지안색 상모부백 원앙지위인야. 선관부 정당시급종정유기. 역이수직간 부득구거위.
선비들 또한 이 때문에 그에게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은 학문을 좋아하고 의협심과 절조를 중히 여기며 일상생활에서 품행도 고결했다. 입조하여 직언하기를 좋아했는데, 여러 차례 무제와 대신들의 체면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늘 부백(傅柏)과 원앙(袁盎)의 위인 됨을 흠모했다. 그는 관부(灌夫), 정당시(鄭當時)와 종정(宗正)인 유기(劉棄)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들 또한 자주 직언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當是時, 太後弟武安侯蚡為丞相, 中二千石來拝謁, 蚡不為禮. 然黯見蚡未嘗拝, 常揖之.
당시시 태후제무안후분위승상 중이천석해배알 분불위례. 연암견분미상배 상읍지.
이 당시에 두태후(窦太后)의 남동생인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그는 녹봉 중이천석(中二千石)을 받는 고관이 배알해도 제대도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은 전분을 보고도 절을 올리지도 않았고, 늘 그에게 간단하게 읍례(揖禮)만 하였다.
天子方招文學儒者, 上曰吾欲云云, 黯対曰:「陛下內多欲而外施仁義, 柰何欲效唐虞之治乎!」上黙然, 怒, 変色而罷朝. 公卿皆為黯懼.
천자방초문학유자 상왈오욕운운 암대왈 ‘폐하내다욕이외시인의 내하욕효당우지치호’ 상묵연 노 변색이파조. 공경개위암구.
하루는 무제가 때마침 문학하는 선비와 유학자들을 사상가들을 불러 모아 놓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 등을 말했다. 이 때에 급암이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내심으로 욕망이 많으시면서 단지 겉치레로 인의를 표방하고 계신데, 어찌 상고시대의 성군이었던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의 다스림을 본받으실 수 있겠사옵니까!’ 무제는 그의 말을 듣고 겉으론 침묵하였으나 마음속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빛이 변한 채 조회를 마쳤다. 이로 인해 공경(公卿)들은 모두 급암을 걱정했다.
上退, 謂左右曰:「甚矣, 汲黯之戇也!」群臣或數黯, 黯曰:「天子置公卿輔弼之臣, 寧令従諛承意, 陥主於不義乎? 且已在其位, 縦愛身, 柰辱朝廷何!」
상퇴 위좌우왈 ‘심의 급암지당야’ 군신혹구암 암왈 ‘천자치공경보필지신 영령종유승의 함주어불의호? 차이재기위 종야신 내욕조정하!’
무제가 조회에서 돌아와서 주변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심하구나, 급암의 어리석음이!’ 군신들 중에는 혹자는 급암의 행동을 책망하니, 급암은 이렇게 말했다. ‘천자께서는 공경(公卿) 등 보필하는 신하를 신변에 배치하셨는데, 설마 그들이 한결같이 비위만 맞추고 황제의 뜻을 떠받들면서 옳지 못한 곳으로 빠뜨려야 속이 시원하는가? 또 이미 자신 몸은 구경(九卿)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자기 한 몸만을 아끼고, 어찌 조정대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가!’
黯多病, 病且満三月, 上常賜告者數, 終不愈. 最後病, 荘助為請告.
암다병 병차만삼월 상상사고자수 종불유. 최후병 장조위청고.
급암은 자주 병치레를 했고, 병이 또 석 달을 지속되자 무제는 여러 차례 그가 요양할 수 있는 휴가를 주었으나 끝내 완쾌되지 않았다. 최후에 병을 얻었을 때, 장조(莊助)가 급암을 대신하여 휴가를 청하러 왔다.
上曰:「汲黯何如人哉?」助曰:「使黯任職居官, 無以踰人. 然至其輔少主, 守城深堅, 招之不來, 麾之不去, 雖自謂賁育亦不能奪之矣.」
상왈 ‘급암하여인재’ 조왈 ‘사암임직거궁 무이유인. 연지기보소주 수성심견 초지불래 미지불거 수자위분육역불능탈지의’
무제가 장조에게 물었다. ‘급암은 어떤 인물인가?’ 장조가 대답했다. ‘급암으로 하여금 어떤 관직을 맡겨도, 남보다 특출 난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소한 군주를 보필하는 때에는 기존의 성취한 업적을 굳건히 지키며, 그를 이권으로 유혹해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며, 위협을 가하여 내쫓아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과 같이 용맹스런 자들도, 그의 지조와 절개를 빼앗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上曰:「然. 古有社稷之臣, 至如黯, 近之矣.」
상왈 ‘연 고유사직지신 지여암 근지의’
이에 무제가 말했다. ‘옳은 말이오. 고대에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지금 급암과 비슷할 것이오.’
大將軍青侍中, 上踞廁而視之. 丞相弘燕見, 上或時不冠. 至如黯見, 上不冠不見也.
대장군청시중 상거측이시지. 승상홍연견 상혹시불관. 지여암견 상불관불현야.
대장군 위청(衛靑)이 궁중에 들어와 무제를 알현할 때에도 무제는 침상 가에 걸터앉아 그를 접견했다. 승상 공손홍(公孫弘)이 평상시에 배알할 때에도 무제는 이따금 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이 배알할 때에는 무제가 관을 쓰지 않고 접견하는 일이 없었다.
上嘗坐武帳中, 黯前奏事, 上不冠, 望見黯, 避帳中, 使人可其奏. 其見敬禮如此.
상상좌무장중 암전주사 상불관 망견암 피장중 사인가기주. 기견경례여차.
한 번은 무제가 궁전 내에 무기를 배치해 놓은 장막 안에 앉아 있는데, 급암이 일을 아뢰러 오는 것을 보고, 관을 쓰고 있지 않는 것을 책망할 것이 두려워 장막 뒤로 피하고 측근을 시켜 그 일을 재가하게 했다. 급암이 황제에게도 예의를 갖추게 만들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張湯方以更定律令為廷尉, 黯數質責湯於上前, 曰:「公為正卿, 上不能褒先帝之功業, 下不能抑天下之邪心, 安國富民, 使囹圄空虛, 二者無一焉. 非苦就行, 放析就功, 何乃取高皇帝約束紛更之為? 公以此無種矣.」
장탕방이경정률영위정위 암수질책탕어상전 왈 ‘공위정경 상불능포선제지공업 하불능억천하지사심 란국부민 사영어공허 이자무일언. 비고취행 방석취공 하내취고황제약속분경지위 공이차무종의’
장탕(張湯)이 때마침 형법을 개정하는 공로를 인정받아 정위(廷尉)가 되었다. 급암은 일찍이 여러 차례 황제의 면전에서 장탕을 질책하고 이렇게 말했다. ‘공은 정경(正卿)이 되어서 위로는 선제(先帝)가 쌓아 놓은 업적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아래로는 천하의 사악한 마음을 제지시키지 못했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풍족하게 하는 것과 범죄를 없애 감옥을 텅 비게 만드는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성취한 것이 없소. 반대로 남들에게 벌을 주어 괴롭히고, 제멋대로 법조문을 파괴하여 재해석하여 자기의 공으로 삼았다. 어찌하여 고황제의 약법 삼장(約法三章)을 뜯어 고쳐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가? 공께서는 이 일로 말미암아 멸족당할 것이다.’
黯時與湯論議, 湯辯常在文深小苛, 黯伉厲守高不能屈, 忿発罵曰:「天下謂刀筆吏不可以為公卿, 果然. 必湯也, 令天下重足而立, 側目而視矣!」
암시여탕논의 탕변상재문심소가 암항여수소불능굴 분발매왈 ‘천하위도필리불가이위공경 과연. 필탕야 영천하중족이립 측목이시의’
급암이 장탕과 논쟁을 벌일 때에 장탕은 항상 고의로 심오한 법조문을 상세하게 거론했고, 급암은 의기당당하고 격앙된 어조로 항변했지만 굴복시킬 수가 없게 되자, 화가 나서 이렇게 욕설을 퍼부었다. ‘천하에 하찮은 도필리(刀筆吏: 문서 작성이나 하는 하급관리)가 공경의 지위에 오르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구나. 만약 장탕이 득세하면 천하 사람들은 두려워서 제대로 활보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로 서고, 두려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곁눈질하는 처지가 되겠구나.’
是時, 漢方征匈奴, 招懐四夷. 黯務少事, 乗上閒, 常言與胡和親, 無起兵. 上方向儒術, 尊公孫弘. 及事益多, 吏民巧弄. 上分別文法, 湯等數奏決讞以幸.
시시 한방정흉노 초회사이. 암무소사 상언여호화친 무기병. 상방향유술 존공손홍/ 급사익다 사민교롱. 상분별문법 탕등수진결언결이행.
이 시기에 한나라는 바야흐로 흉노(匈奴)을 정벌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회유하고 있었다. 급암은 나라의 번거로운 일을 적게 하려고 힘썼는데, 기회가 되면 항상 무제에게 오랑캐와 화친하고 군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권했다. 무제는 마침 유가학설에 경도되어 유생출신의 재상인 공손홍을 존중했다. 나라 일이 더욱 늘어나자 아전과 백성들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무제는 법조문을 더욱더 세분하여 엄격하고 공정하게 법 기강을 세우려고 했고, 장탕 등은 계속하여 새로운 사건의 판결문을 만들어 무제의 총애를 얻었다.
而黯常毀儒, 面觸弘等徒懐詐飾智以阿人主取容, 而刀筆吏専深文巧詆, 陥人於罪, 使不得反其真, 以勝為功.
이암상훼유 면촉홍등돟회사식지이아이주취용 이도필리전심문교저 함인어죄 사부득반기진 이승위공.
급암은 항상 유학을 헐뜯었는데, 공개적으로 공손홍 등의 무리들은 단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억지로 아는 척 꾸미면서 황제에게 아부하여 환심을 사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 같은 도필리들은 전문적으로 심오한 법조문을 끌어다가 교묘하게 꾸며 사람들을 죄의 함정 속에 빠뜨려 진상을 회복할 수 없게 만들고, 더불어 법으로 처벌하는 것만을 공로라 여긴다고 질책했다.
上愈益貴弘、湯, 弘、湯深心疾黯, 唯天子亦不説也, 欲誅之以事. 弘為丞相, 乃言上曰:「右內史界部中多貴人宗室, 難治, 非素重臣不能任, 請徙黯為右內史.」為右內史數歳, 官事不廃.
상유익귀홍 탕 홍 탕심질암 유천자역불열야 욕주지이사. 홍위승상 내언상왈 ‘우내사계부중다귀인종실 난치 비소중신불능임 청사암위우내사’ 위우내사수세 관사불폐.
그러나 무제는 더욱 공손홍과 장탕을 귀하게 여겼고, 공손홍과 장탕은 내심으로 더욱 급암을 원망했으며, 무제 역시 급암을 기꺼워하지 않았으므로, 틈만 나면 계기를 만들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공손홍이 승상에 오르자, 이에 무제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우내사(右內史) 경내에는 귀족과 황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관리하기가 어렵습니다. 평소 덕망이 높은 중신(重臣)이 아니면 그 소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급암의 보직을 우내사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급암이 우내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으나, 공무는 폐하지 않았다.
大將軍青既益尊, 姊為皇後, 然黯與亢禮. 人或説黯曰:「自天子欲群臣下大將軍, 大將軍尊重益貴, 君不可以不拝.」
대장군청기익존 자위황후 연암여항례. 인혹설암왈 ‘자천자욕군신하대장군 대장군존중익귀 군불가이불배’
대장군 위청은 그의 누님인 위자부(衛子夫)가 황후가 되면서 더욱 존귀해졌다. 그러나 급암은 여전히 대등한 입장으로 위청을 대했다. 어떤 사람이 급암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전부터 천자께서는 모든 신하들이 대장군에게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길 바라셨고, 지금 대장군은 황제에게까지 존중을 받고 더욱 귀해졌습니다. 공께서도 대장군에게 깍듯이 절을 않으면 안 됩니다.’
黯曰:「夫以大將軍有揖客, 反不重邪?」大將軍聞, 愈賢黯, 數請問國家朝廷所疑, 遇黯過於平生.
암왈 ‘부이대장군유읍객 반불중야’ 대장군문 유현암 수청문국가조정소의 우암과어평생.
급암이 대답했다. ‘대장군에게 읍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리어 그를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닌가?’ 대장군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더욱 급암을 어질게 여기고, 자주 국가와 조정에 난제가 생기면 자문하였으며 급암을 평소보다 잘 대우했다.
淮南王謀反, 憚黯, 曰:「好直諫, 守節死義, 難惑以非. 至如説丞相弘, 如発蒙振落耳.」
회남왕모반 탄암 왈 ‘호직간 수절사의 난혹이비. 지여설승상홍 여발몽진락이’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반란을 도모할 때, 급암을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급암은 직언하기를 좋아하고 절개를 굳게 지켜며 의리를 위해 죽는 인물로 부당한 일로써 그를 유혹시키기 어렵다. 차라리 승상 공손홍을 설득하는 것은 마치 베 이불을 걷어내고, 낙엽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이 쉬울 따름이다.’
天子既數征匈奴有功, 黯之言益不用.
천자기수정흉노유공 암지언익불용.
무제는 이미 여러 차례 흉노를 정벌하여 큰 전공을 얻었기 때문에 오랑캐와 화친을 맺자는 급암의 주장은 더욱 쓸모없게 되었다.
始黯列為九卿, 而公孫弘、張湯為小吏. 及弘、湯稍益貴, 與黯同位, 黯又非毀弘、湯等. 已而弘至丞相, 封為侯;湯至禦史大夫;故黯時丞相史皆與黯同列, 或尊用過之.
시암열위구경 이공손홍 장탕위소사. 급홍 탕초익귀 여암동위 암우비훼홍 탕등. 이이홍지승상 봉위후 탕지어사대부 고암시승상사개여암동렬 혹존용과지.
처음에 급암이 구경의 반열에 올랐을 때에 공손홍과 장탕은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손홍과 장탕은 점차 더 귀해져서 급암과 동등한 지위가 되었는데도 급암은 여전히 그들을 비난하고 헐뜯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손홍은 승상으로 진급하고 제후(평진후)로 봉해졌다. 장탕은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고, 과거에 급암의 부하였던 군승(郡丞)과 서사(書史) 등도 모두 급암과 같은 반열에 서거나 혹자는 중용되어 급암보다 높게 되었다.
黯褊心, 不能無少望, 見上, 前言曰:「陛下用群臣如積薪耳, 後來者居上.」上黙然. 有閒黯罷, 上曰:「人果不可以無學, 観黯之言也日益甚.」
암편심 불능무소망 견상 전언왈 ‘폐하용군신여적신이 후래자거상’ 상묵연. 유간암파 상왈 ‘인과불가이무학 관암지언야일익심’
급암은 편협한 마음에서 다소간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으므로 황제를 뵙고 나아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여러 신하를 등용하는 것이 마치 장작을 쌓듯이 하시어, 뒤에 들어온 자가 윗자리에 오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무제는 묵묵부답했다. 잠시 후 급암이 물러가자, 무제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급암의 말을 보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居無何, 匈奴渾邪王率衆來降, 漢発車二萬乗. 県官無銭, 従民貰馬. 民或匿馬, 馬不具.
무거하 흉노혼야왕솔중래항 한발거이만승. 현관무전 종민세마. 민혹닉마 마불구.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흉노족의 혼야왕(渾邪王)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한나라로 투항해 왔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2만 대의 수레를 징발하여 그들을 옮기려고 했다. 현관(縣官)이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여 민간에서 말을 빌리려고 했다. 백성들 중에 자신들의 말을 숨기는 자가 있어서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했다.
上怒, 欲斬長安令. 黯曰:「長安令無罪, 獨斬黯, 民乃肯出馬. 且匈奴畔其主而降漢, 漢徐以県次傳之, 何至令天下騒動, 罷獘中國而以事夷狄之人乎!」
상노 욕참장안령. 암왈 ‘장안령무죄 독참암 민내긍출마. 차흉노반기주이항한 한제이현차전지 하지령천하소동 파폐중국이이사이적지인호’
무제는 크게 노하여 장안현령(長安縣令)을 참수하려고 했다. 이에 급암은 이렇게 말렸다. ‘장안현령은 죄가 없으니, 저 급암 한 사람만 참수하면 백성들은 바로 말들을 헌납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 흉노들은 자기 군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했는데, 조정에선 그들을 서서히 현에서 현으로 이송시키면 되는데, 어찌하여 천하에 소동을 일으키고 우리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면서까지 오랑캐 사람들은 맞이하십니까!’
上黙然. 及渾邪至, 賈人與市者, 坐當死者五百餘人. 黯請閒, 見高門, 曰:
상묵연. 급혼야지 가인여시자 좌당사자오백여인. 암청간 견고문 왈:
이에 무제는 묵묵부답했다. 혼야왕의 무리가 도착하자 상인들은 그들과 불법거래를 했는데,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는 자들이 5백여 명이나 되었다. 급암은 무제를 접견할 기회를 만들어 미앙궁(未央宮)의 고문전(高門殿)에서 알현하고 이렇게 말했다.
「夫匈奴攻當路塞, 絶和親, 中國興兵誅之, 死傷者不可勝計, 而費以巨萬百數. 臣愚以為陛下得胡人, 皆以為奴婢以賜従軍死事者家;所鹵獲, 因予之, 以謝天下之苦, 塞百姓之心. 今縦不能, 渾邪率數萬之衆來降, 虛府庫賞賜, 発良民侍養, 譬若奉驕子.
‘부흉노공당로새 절화친 중국흥병주지 사상자불가승계 이비이신만백수. 신우이위폐하득호인 개이위노비이사종군사사자가 소로획 인여지 이사천하지고 새백성지심. 금종불능 혼야솔수만지중래항 허부고상사 발량민시양 비약봉교자.
“대저 흉노가 먼저 중국의 북방 요새지를 공격하며 화친을 끊었고, 중국도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게 되었습니다. 사상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소모된 군비 또한 몇 백억의 자금에 달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폐하께서 흉노 오랑캐를 붙잡았을 경우에 그들 모두를 전사자 가족의 노비로 삼고, 노획한 재물도 전사자 가족들에게 하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천하 만민이 치룬 고통에 보상하고 백성들의 염원을 만족시킬 줄 알았습니다. 지금 그렇게 할 수 없어도, 혼야왕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자 국고의 재물을 다 쏟아 부어 그들에게 상을 하사하고, 선량한 백성들의 물자까지 징발해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것은 예컨대 철모르는 교만한 자식을 봉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愚民安知市買長安中物而文吏縄以為闌出財物於邊関乎? 陛下縦不能得匈奴之資以謝天下, 又以微文殺無知者五百餘人, 是所謂『庇其葉而傷其枝』者也, 臣竊為陛下不取也.」
우민안지시매장안중물어문리승이위란불재물어변관호? 폐하종불능득흉노지자이사천하 우이미문살무지자오백여인 시소위 “차기엽이상기지”자야 신절위폐하불취야‘
어리석은 백성이 어찌 장안의 시중에서 산 흉노 사람의 물건이 간교한 관리들의 주장처럼 변경에서 불법으로 밀수하는 것과 같은 죄인 줄 알겠습니까? 폐하께서 설사 노획한 흉노의 물자를 가지고 천하 백성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가혹한 법령으로써 무지한 5백 명의 백성을 죽이라고 한 것은, 이른바 “나뭇잎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뭇가지를 상하게 한 꼴”입니다. 신은 개인적으로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上黙然, 不許, 曰:「吾久不聞汲黯之言, 今又複妄発矣.」後數月, 黯坐小法, 會赦免官. 於是黯隠於田園.
상묵연 불허 왈 ‘오구불문급암지언 금우복망발의’ 후수월 암좌소법 회사면관. 어시암은어전원.
황제는 침묵하고 있다가 급암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했다. ‘짐이 오랫동안 급암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지금 또 망발을 보네.’ 몇 달이 지난 뒤에 급암은 사소한 법률에 연루되어 사면과 더불어 파면되었다. 이에 급암은 하향하여 은거했다.
居數年, 會更五銖銭, 民多盜鋳銭, 楚地尤甚. 上以為淮陽, 楚地之郊, 乃召拝黯為淮陽太守. 黯伏謝不受印, 詔數彊予, 然後奉詔.
거수년 회경오수전 민다도주전 초지우심. 상이위회양 초지지교 내소배암위회양태수. 암복사불수인 조수강여 연후봉조.
몇 해가 지나 나라에서 기존의 삼수전(三銖錢)이 가벼웠기 때문에 새로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했는데, 백성들 중에 몰래 위폐를 만들어 내는 일이 많았다. 특히 초(楚) 지방이 더욱 엄중했다. 황제는 회양군(淮陽郡)이 초 지방으로 통하는 요지라고 여기고 급암을 불러들여 회양군의 태수로 삼으려고 했다. 급암은 엎드려 사양하며 태수의 인장(印章)을 받지 않았으나, 황제의 조서가 여러 차례 강압적으로 내려지자 할 수 없이 명에 따랐다.
詔召見黯, 黯為上泣曰:
조소견암 암위상읍왈:
무제는 조서를 내려 급암을 불러 알현하게 했는데, 이 때에 급암은 무제에게 흐느끼면서 이렇게 아뢰었다.
「臣自以為填溝壑, 不複見陛下, 不意陛下複収用之. 臣常有狗馬病, 力不能任郡事, 臣願為中郎, 出入禁闥, 補過拾遺, 臣之願也.」
‘신자이위전구학 불복견폐하 불의폐하복수용지. 신상유구마병 력불능임군사 신원위중랑 불입금달 보과습유 신지원야’
‘신은 죽은 후에 시체가 산골짜기에 묻힐 때까지 다시는 폐하를 못 뵈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폐하께서 다시 신을 등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에게는 천한 지병을 앓고 있어서 체력적으로 한 군(郡)의 일을 책임질 능력이 못됩니다. 단지 신을 중랑(中郎)으로 임용하여 궁궐을 출입하며 폐하의 과오를 규정하고 결함을 보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上曰:「君薄淮陽邪? 吾今召君矣. 顧淮陽吏民不相得, 吾徒得君之重, 臥而治之.」
상왈 ‘군박회양야? 오금소군의. 원회양리민불상득 오도득군지중 왕이치지’
이에 무제가 말했다. ‘공은 회양 태수의 직위를 얕잡아 보는가? 짐이 지금 공을 다시 부른건 지금 회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짐은 단지 공의 위엄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니, 누워서라도 그곳을 다스려주길 바라오.’
黯既辭行, 過大行李息, 曰:
암기사행 과대행이식 왈:
급암은 무제에게 하직인사한 후에 임지로 가던 중에 대행(大行) 이식(李息)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黯棄居郡, 不得與朝廷議也. 然禦史大夫張湯智足以拒諫, 詐足以飾非, 務巧佞之語, 辯數之辭, 非肯正為天下言, 専阿主意. 主意所不欲, 因而毀之;主意所欲, 因而譽之. 好興事, 舞文法, 內懐詐以禦主心, 外挾賊吏以為威重. 公列九卿, 不早言之, 公與之倶受其僇矣.」
‘암기거군 부득여조정의야. 연어사대부장탕지족이거간 사족이식비 무교녕지어 변수지사 비긍정위천하언 전아주의. 주의소불욕 인이훼지 주의소욕 인이예지. 호흥사 무문법 내회사이어주심 외협적리이위위중. 공열구경 불조언지 공여지구수기참의’
‘급암은 황제에게 버림을 받아 군(郡)으로 내팽겨져 조정의 국정에는 참여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소. 그런데 어사대부 장탕은 잔꾀로 충언을 가로막고, 속임수로 잘못을 꾸며 될 수 있소. 그는 교묘한 말로 아부하고 변명하며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데 힘쓰며, 천하의 정당한 언론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폐하의 뜻에만 영합하데 골몰하고 있소. 폐하께서 하고 싶지 않는 바이면 그를 계기로 헐뜯고 폐하께서 바라시는 바이면 그를 계기로 칭송만 합니다. 장탕은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기 좋아하고, 법령조문을 만지작거리며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조정안에서는 삿된 마음을 품고 폐하의 의도에 영합하는 체하고, 조정 밖에서는 부정한 관리를 끼고 다니며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공께서 지금 구경의 반열에 있으면서 만약이 조속히 이 일을 황제에게 일깨워주지 못하면 공은 장탕과 더불어 죽임을 당할 것이오.’
息畏湯, 終不敢言. 黯居郡如故治, 淮陽政清. 後張湯果敗, 上聞黯與息言, 抵息罪. 令黯以諸侯相秩居淮陽. 七歳而卒.
식외탕 종불감언. 암거군여고치 회양정청. 후장탕과감 상문암여식언 저식죄. 령암이제후상질거회양. 칠세이졸.
그러나 이식은 장탕을 두려워해 끝내 급암의 말을 황제에게 감히 아뢰지 못했다. 급암은 군의 정무를 보면서 옛날의 방법으로 다스리자, 회양의 정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뒤에 장탕은 과연 철저하게 실패하여 지위도 명예도 모두 잃게 되었다. 무제는 급암이 이식에게 당부한 말을 들은 후에 이식을 징벌했다. 그리고 급암에게 제후 출신의 재상과 상응하는 봉록을 주어 회양군을 다스리도록 했다. 7년 후에 급암은 세상을 떠났다.
卒後, 上以黯故, 官其弟汲仁至九卿, 子汲偃至諸侯相.
졸후 상이암고 관기제급인지구경 자급언지제후상.
급암이 죽은 후에, 무제는 급암의 지난 공로를 참작하여 그의 아우 급인(汲仁)에게 관직을 주어 구경의 반열에 오르게 했고, 아들 급언(汲偃)도 제후국의 재상으로 삼았다.
<사마안과 단굉>
黯姑姊子司馬安亦少與黯為太子洗馬. 安文深巧善宦, 官四至九卿, 以河南太守卒. 昆弟以安故, 同時至二千石者十人. 암고자자사마안역소여암위태자세마. 안문심교선환 관사지구경 이하남태수졸. 곤제이안고 공시지이천석자십인.
급암의 고모 아들인 사마안(司馬安) 또한 급암처럼 젊어서 태자의 세마(洗馬)가 되었다. 사마안은 법률 조문에 능통했고, 교묘하게 관직생활에 잘 적응하여, 네 차례나 구경의 반열에 올랐고, 하남의 태수로 재직 중에 죽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마안의 연고로 같은 시기에 2천석의 봉록을 받는 자가 열 명이나 되었다.
濮陽段宏始事蓋侯信, 信任宏, 宏亦再至九卿. 然衛人仕者皆厳憚汲黯, 出其下.
복양단굉시사개후신 신임굉 굉역재지구경. 연위인사자개엄탄급암 출기하.
복양(濮陽) 출신의 단굉(段宏)은 처음에 개후(蓋侯) 왕신(王信)을 섬겼고, 왕신은 단굉을 천거하여 그 또한 두 차례 구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위(衛) 지방 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급암을 경외했고 그의 아래에서 배출된 것에 만족했다.
(鄭當時)
鄭當時者, 字荘, 陳人也. 其先鄭君嘗為項籍將;籍死, 已而屬漢. 高祖令諸故項籍臣名籍, 鄭君獨不奉詔. 詔盡拝名籍者為大夫, 而逐鄭君. 鄭君死孝文時.
정당시자 자장 진인야. 기선정군상위항적장 적사 이이속한. 고조령제고항적신명적 정군독불봉조. 조진배명적자위대부 이축정군. 정군사효문시.
정당시(鄭當時)의 자(字)는 장(莊)이고, 진현(陳縣) 사람이다. 그의 조상인 정군(鄭君)은 일찍이 항적(項籍: 항우) 수하의 장수가 되었는데, 항적이 죽은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나라로 귀순하였다. 고조는 이전에 항적의 부하였던 자들에게 항적의 이름을 부르게 했는데, 정군은 홀로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고조는 항적의 이름을 직접 부른 자들을 모두 대부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내렸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던 정군을 축출했다. 정군은 문제(文帝) 때에 죽었다.
鄭荘以任俠自喜, 脫張羽於厄, 聲聞梁楚之閒. 孝景時, 為太子舎人. 毎五日洗沐, 常置駅馬安諸郊, 存諸故人, 請謝賓客, 夜以継日, 至其明旦, 常恐不遍.
정장이임협자희 탈장우어액 성문양초지간. 효경시 위태자사인. 매오일세목 상치역마안제교 존제고인 청사빈객 여이계일 지기명단 상공불편.
정장(鄭莊)은 협객으로 처신하길 기뻐했는데, 장우(張羽)를 재난에서 구해 주어서 그 명성이 초(楚)와 양(梁) 지방에 알려졌다. 경제 때에 태자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는 닷새마다 돌아오는 쉬는 날에 항상 장안 사방의 교외에다 역마(驛馬)를 세우고, 옛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손님을 초대하여 밤을 샐 정도로 극진히 대접했는데, 언제나 소홀한 점이 없는지를 걱정했다.
荘好黃老之言, 其慕長者如恐不見. 年少官薄, 然其遊知交皆其大父行, 天下有名之士也.
장호황로지언 기모장자여공불견. 연소관박 연기유지교개기대부행 천하유명지사야.
정장은 황로(黃老)의 학설을 좋아했고, 덕이 높은 장자(長者)를 흠모했으며 행여나 그들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그는 나이가 젊고 관직도 비천했지만 교유하며 사귀는 사람들은 모두 조부 연배였고, 천하에 유명한 선비들이었다.
武帝立, 荘稍遷為魯中尉、済南太守、江都相, 至九卿為右內史. 以武安侯魏其時議, 貶秩為詹事, 遷為大農令.
무제립 장초천위노중위 제남태수 강도상 지구경위우내사. 이무안후위기시의 폄절위첨사 천위대농령.
무제가 즉위한 후에 정장은 노(魯) 나라의 중위(中尉), 제남(濟南)의 태수, 강도(江都)의 재상 등을 거쳐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라 우내사(右內史)가 되었다.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와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논쟁 때에 처신을 잘못하여 첨사(詹事)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대농령(大農令)으로 승진하였다.
荘為太史, 誡門下:「客至, 無貴賎無留門者.」執賓主之禮, 以其貴下人. 荘廉, 又不治其産業, 仰奉賜以給諸公. 然其餽遺人, 不過算器食.
장위태사 계문하 ‘객지 무귀천무유문자’ 집빈주지례 이기귀하인. 장렴 우불치기산업 앙봉사이급제공. 연기귀유인 불과산기식.
정장은 우내사(右內史)가 되었을 때 부하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손님이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말고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 그는 주인이 공경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고, 자신의 귀한 신분을 내세우지 않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정장은 청렴결백하고 사적으로 재산을 불리는데 신경 쓰지 않았으며, 봉록이나 하사품을 받으면 여러 연장자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남에게 선물하는 것은 단지 대나무 그릇에 담은 음식물 정도에 불과했다.
毎朝, 候上之閒, 説未嘗不言天下之長者. 其推轂士及官屬丞史, 誠有味其言之也, 常引以為賢於己.
매조 후상지간 설미상불언천하지장자. 기추곡사급관속승사 계유미기언지야. 상인이위현어기.
매번 조회 때마다 정장은 황제에게 직접 아뢸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천하에 덕성과 명망이 높은 인재를 열거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선비나 승(丞), 사(史) 등의 부하 관리들을 천거할 때에는 참으로 흥미진지하게 소개하고, 언제나 그들이 자기보다 뛰어난 점을 들었다.
未嘗名吏, 與官屬言, 若恐傷之. 聞人之善言, 進之上, 唯恐後. 山東士諸公以此翕然稱鄭荘.
미상명리 야관속언 약공상지. 문인지선언 진지상 유공후. 산동사제공이차흡연칭정장.
정장은 관원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고, 부하 관원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혹시 상대방의 마음이 상할까 조심했다. 남들의 좋은 의견을 들으면 곧바로 무제에게 고하고도 늦어서 일이 잘못될까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산동(山東) 지방의 선비들과 덕망 있는 인사들이 한결같이 정장의 인간됨을 칭찬했다.
鄭荘使視決河, 自請治行五日. 上曰:「吾聞『鄭荘行, 千里不齎糧』, 請治行者何也?」然鄭荘在朝, 常趨和承意, 不敢甚引當否.
정장사시결하 자청치행오일. 상왈 ‘오문 “정장행 천리부재량” 청치행자가야’ 연정장제조 상촉화승의 불감심인당부.
정장은 황하 범람실태를 시찰하라는 파견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닷새 동안의 여장을 준비하는 기간을 달라고 청했다. 이에 무제가 말했다. “짐이 듣기로 ‘정장은 출장 갈 때에 천리 길이라도 식량을 지니지 않는다.’라고 하던데, 왜 여장을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한가?” 정장은 대인관계가 좋았지만 조정에 있을 때에는 항상 무제의 뜻에 복종했고, 과분하게 일의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及晩節, 漢征匈奴, 招四夷, 天下費多, 財用益匱. 荘任人賓客為大農僦人, 多逋負. 司馬安為淮陽太守, 発其事, 荘以此陥罪, 贖為庶人. 頃之, 守長史. 上以為老, 以荘為汝南太守. 數歳, 以官卒.
급만절 한정흉노 초사이 천하비다 재용익궤. 장임인빈객위대농추인 다포부. 사마안위회양태수 발기사 장이차함죄 속위서인 경지 수장사 상이위노 이장위여남태수. 수세 이관졸.
정장의 만년 때에 한나라는 흉노를 정벌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복종시키기 위한 비용이 증대하여 국가 재정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정장은 어떤 빈객을 대농령(大農令)을 대신하여 운송할 수 있게 보증을 섰는데, 부채가 너무 많았다. 사마안은 회양의 태수로 있으면서 이 사건을 고발했다. 정장은 이 일로 문책을 받게 되었고, 결국에 삭탈관직 되고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얼마 후에 정장은 승상부로 들어가 잠시 장사(長史)를 맡았다. 무제는 그가 연로하다고 여겨서 여남(汝南)의 태수로 발령냈다. 몇 년 뒤에 정장은 임지에서 죽었다.
鄭荘、汲黯始列為九卿, 廉, 內行脩絜. 此両人中廃, 家貧, 賓客益落. 及居郡, 卒後家無餘貲財. 荘兄弟子孫以荘故, 至二千石六七人焉.
정장 급암시열후구경, 렴 내행수결. 차양인중폐 가빈 빈객익락 급거군 졸후가무여자재. 장형제자손이장고 지이천석육칠인언.
정장과 급암이 처음으로 구경의 반열에 올랐을 때에 청렴하고 집안에서의 행실이 결백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중도에 파직되었을 때, 그들의 집이 청빈했기에 빈객들은 점차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모두 한 군(郡)을 다스렸으나, 죽은 뒤에 집안에 남긴 재산이라곤 없었다. 정장의 형제와 자손들 중 정장으로 인해서 2천 석의 봉록을 받는 관리가 된 자는 예닐곱 명이 있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夫以汲、鄭之賢, 有勢則賓客十倍, 無勢則否, 況衆人乎! 下邽翟公有言.
태사공왈 부이급 정지현 유세즉빈객십배 무세즉부 황중인호 하규책공유언.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와 같이 어진 덕행을 지닌 자에게 권세가 있으면 빈객들이 열 배로 늘어나고, 권세가 없으면 상반되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면 오직하겠는가! 하규(下邽)의 책공(翟公)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始翟公為廷尉, 賓客闐門;及廃, 門外可設雀羅. 翟公複為廷尉, 賓客欲往, 翟公乃人署其門曰:
시책공위정위 빈객전문 급폐 문외가설작라 책공복위정위 빈객욕왕 책공내인서지문왈:
처음에 책공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에는 왕래하고자 하는 빈객들로 대문 밖이 가득 메워질 정도였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자 대문 밖에서 참새 그물을 쳐도 될 정도로 한가했었다. 책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다시 왕래하려고 했는데, 이에 책공은 대문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크게 써 붙였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賎, 交情乃見.」汲、鄭亦雲, 悲夫!
‘일사일생 내지교정 일빈일부 내지교태 일귀일천 교정내견’ 급 정역운 비부!
‘한 번 죽고 한 번 살아나니, 비로소 사귀는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해지니 비로소 사귀는 태도를 알게 되었으며,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지니 비로소 사귀는 정이 드러났네.’ 급암과 정당시 역시 이와 같이 불행했으니,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