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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淮南衡山列傳

列傳-淮南衡山列傳


<회남왕 유장>

 

淮南厲王長者, 高祖少子也, 其母故趙王張敖美人.

회남왕장자 고조소자야 기모고조왕장오미인.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은 한 고조(漢高祖)의 막내아들이다. 그의 모친은 본래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미인(美人)이었다.

 

高祖八年, 従東垣過趙, 趙王獻之美人. 厲王母得幸焉, 有身. 趙王敖弗敢內宮, 為築外宮而舎之. 及貫高等謀反柏人事発覚, 並逮治王, 盡収捕王母兄弟美人, 繋之河內.

고조팔년 종동원과조 조왕헌지미인. 여왕모득행언 유신. 조왕오불감내궁 위축외궁이사지. 급관고등모반박인사발각 병체치왕 진수포왕모형제미인 계지하내.

 

() 고조 8(서기전 199)에 고조가 동원(東垣)에서부터 돌아오면서 조()나라를 지날 때 조왕이 그 미인을 바친 적이 있었다. 여왕의 모친은 고조의 총애를 받아 임신을 했다. 조왕 장오는 감히 그녀를 궁궐로 들이지 못하고, 별도로 밖에 궁을 지어 그곳에 기거토록 했다. 관고(貫高) 등이 모반해 박인(柏人)에서 고조를 살해할 사건이 발각되자 조왕도 체포되어 더불어 처벌을 받게 되었고, 조왕의 모친과 그 형제들 그리고 첩들도 다 체포되어 하내(河內)로 구금되었다.

 

厲王母亦繋, 告吏曰:「得幸上, 有身.吏以聞上, 上方怒趙王, 未理厲王母.

여왕모역계 고리왈 득행상 유신 리이문상 상방노조왕 미리여왕모.

 

厲王의 모친 역시 구금되었는데, 옥리(獄吏)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아기를 가졌다 옥리가 그녀의 말을 듣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니, 황제는 바야흐로 조왕의 모반사건으로 인해 화가 나 있어서 厲王의 모친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厲王母弟趙兼因辟陽侯言呂後, 呂後妒, 弗肯白, 辟陽侯不彊爭. 及厲王母已生厲王, , 即自殺. 吏奉厲王詣上, 上悔, 令呂後母之, 而葬厲王母真定. 真定, 厲王母之家在焉, 父世県也.

여왕모제조겸인벽양후언여후 여후시 불긍자 벽양후불강쟁. 급여왕모이생여왕 에 즉자살. 리봉여왕지상 상회 영여후모지 이장여왕모진정. 진정 여왕모지가재언 부세현야.

 

여왕 모친의 동생인 조겸(趙兼)이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통해 여후(呂后)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여후는 질투해 고조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고 벽양후도 애써 변론하지 않았다. 이윽고 여왕의 모친이 이미 厲王을 낳았으나, 누구도 거두는 사람이 없어 원통해 곧 자살하고 말았다. 옥리가 厲王을 안고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는 후회하며 여후로 하여금 그를 양육하게 했다. 厲王의 모친은 진정(眞定)에 매장했다. 진정은 원래 여왕 모친의 생가가 있고, 그녀가 조상 대대로 살던 지역이다.

 

高祖十一年七月, 淮南王黥布反, 立子長為淮南王, 王黥布故地, 凡四郡.

고조십일년칠월 회남왕경포반 입자장위회남왕 왕경포고지 범사군.

 

고조 11(서기전 196) 7월에 회남왕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 고조는 자신의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삼아, 경포가 관할했던 4()을 다스리게 했다.

 

上自將兵撃滅布, 厲王遂即位. 厲王蚤失母, 常附呂後, 孝恵呂後時以故得幸無患害, 而常心怨辟陽侯, 弗敢発.

상자장병격멸포 여왕수즉위. 여왕조실모 상부여후 효혜 여후시이고득행무환래 이상심원벽양후 불감발.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경포를 공격해 무찔렀고, 마침내 厲王이 즉위했다. 厲王은 일찍이 모친을 잃어 항상 여후에게 의지했다. 효혜제(孝惠帝)와 여후 시절에 그는 여후의 총애를 얻었던 까닭에 근심과 해가 없었지만 늘 마음속으로 벽양후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단지 함부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及孝文帝初即位, 淮南王自以為最親, 驕蹇, 數不奉法. 上以親故, 常寛赦之.

급효문제초즉위 회남왕자이위최친 교건 수불봉법. 상이친고 상관사지.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회남왕은 자신이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여기고 더욱 교만 방자해져서 자주 나라의 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황제는 그가 안스러워 항상 관대하게 용서해주었다.

 

三年, 入朝. 甚橫. 従上入苑囿猟, 與上同車, 常謂上大兄. 厲王有材力, 力能扛鼎, 乃往請辟陽侯.

삼년 입도. 심횡. 종상입원유렵 여상동거 상위상 대형’. 여왕유재력 역능강정 내왕청벽양후.

 

효문제 3(서기전 177)에 여왕이 입조했는데 더욱 오만방자해졌다. 그는 황제를 따라 원유(苑囿)에 들어가 사냥을 했는데, 황제와 함께 수레를 탔고, 늘 황제에게 '큰형'이라고 불렀다. 여왕은 재주와 힘이 있었다. 그의 힘은 능히 정()을 들어 올릴 정도였다. 그가 벽양후를 찾아가 만나기를 청했다.

 

辟陽侯出見之, 即自袖鉄椎椎辟陽侯, 令従者魏敬剄之. 厲王乃馳走闕下, 肉袒謝曰

벽양후출현지 즉자추철추추벽양후 영종자위경경지. 여왕내치주궐하 육단사왈:

 

벽양후가 나오자 그는 바로 소매 속에서 철추를 꺼내 벽양후를 치고, 수행했던 위경(魏敬)으로 하여금 그의 목을 자르게 했다. 그리고 여왕은 바로 대궐 앞으로 달려가 상의를 벗고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臣母不當坐趙事, 其時辟陽侯力能得之呂後, 弗爭, 罪一也. 趙王如意子母無罪, 呂後殺之, 辟陽侯弗爭, 罪二也. 呂後王諸呂, 欲以危劉氏, 辟陽侯弗爭, 罪三也. 臣謹為天下誅賊臣辟陽侯, 報母之仇, 謹伏闕下請罪.

신모부당좌조사 기시벽양루역능득지여후 부쟁 죄일야. 조왕여의자모무죄 여후살지 벽양후부쟁 죄이야 여후왕제여 욕이위유씨 벽양후부쟁 죄삼야. 신근위천하주적신벽양후 보무지구 근복궐하청죄

 

신의 모친은 조왕의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벽양후가 여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도 힘써 변론하지 않은 것이 그의 첫 번째 죄입니다. 또한 조왕 여의(如意) 모자는 죄가 없는데 여후가 그들을 죽였습니다. 이때 벽양후가 힘써 변론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여후가 여러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봉해 유씨(劉氏) 왕실을 위태롭게 했지만 벽양후가 힘써 변론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신은 진실로 천하를 위해 간신 벽양후를 주살해 모친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삼가 대궐 앞에 엎드려 죄를 청합니다.’

 

孝文傷其志, 為親故, 弗治, 赦厲王. 當是時, 薄太後及太子諸大臣皆憚厲王, 厲王以此帰國益驕恣, 不用漢法, 出入稱警蹕, 稱制, 自為法令, 擬於天子.

효문상기지 위친고 불치 사여왕. 당시시 박태후급태자제대신개탄여왕 여왕이차귀국익교자 불용한법 출입칭경필 칭제 자위법령 의어태자.

 

효문제는 그의 뜻을 가엾게 여기고 또한 형제간이라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여왕을 용서했다. 당시 박태후(薄太后)와 태자(太子) 그리고 모든 대신들이 모두 여왕을 싫어하고 기피했다. 여왕은 귀국해 더욱 교만 방자해져 한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고 출입할 때에는 황제처럼 일반인의 통행을 제한시키고 자신의 명령을 황제처럼 제(:법을 제정)하고 매사 황제처럼 행동했다.

 

六年, 令男子但等七十人與棘蒲侯柴武太子奇謀, 以輂車四十乗反谷口, 令人使閩越匈奴. 事覚, 治之, 使使召淮南王. 淮南王至長安.

육년 영남자단등칠십인여극포후시무태자기모 이국거사십승반곡구 영인사민월 흉노. 사각 치지 사사소회남왕. 회남왕지장안.

 

효문제 6(서기전 174)에 남자(男子) ()  70명과 극포후(棘蒲侯) 시무(柴武)의 태자 기()와 모의해 큰 수레 40()을 가지고 곡구(谷口)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민월(閩越), 흉노(匈奴)에 사자를 보냈다. 이 일이 발각되자 황제는 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사자를 보내 회남왕을 소환했다. 회남왕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자 조정대신들이 상주문을 올렸다.

 

丞相臣張倉典客臣馮敬行禦史大夫事宗正臣逸廷尉臣賀備盜賊中尉臣福昧死言

승상신장창 곡객신풍경 행어사대부사종정신일 정위신하 비도적중위신복매사언:

 

신 승상(丞相) 장창(張倉), 전객(典客) 풍경(馮敬), 행어사대부사(行御史大夫事) 종정(宗正) (), 정위(廷尉) 공손하(公孫賀), 비도적중위(備盜賊中尉) 복매(福昧)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淮南王長廃先帝法, 不聴天子詔, 居処無度, 為黃屋蓋乗輿, 出入擬於天子, 擅為法令, 不用漢法. 及所置吏, 以其郎中春為丞相, 聚収漢諸侯人及有罪亡者, 匿與居, 為治家室, 賜其財物爵祿田宅, 爵或至関內侯, 奉以二千石, 所不當得, 欲以有為.

회남왕장폐선제법 불청천자조 거처무도 위황옥개승여 출입의어천자 천위법령 불용한법. 금소치리 이기랑중춘위승상 취수한제후인급유죄망자 닉여거 위치가실 사기재물작록전택 작혹지관내후 봉이이천석 소부당득 욕이유위.

회남왕 유장은 선제(先帝)께서 세운 법을 폐하고, 황제의 조칙을 받들지 않으며, 거처하는 궁궐에도 법도를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황제만 사용하는 황옥으로 치장한 수레로 출입하면서 황제처럼 행세하고 있으며, 법령을 제멋대로 제정하고 한나라의 법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관리를 두는 일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낭중(郎中) ()을 승상으로 삼고, 한나라와 제후국의 사람들 중에 죄가 있어 도망한 자들을 모아 거두어 숨겨주고 살게 했으며, 그들을 위해 재물, 작위, 봉록, 전지(田地), 저택을 하사했습니다. 그중에는 어떤 이는 작위가 관내후(關內侯)에까지 이르고 2천석(二千石)의 봉록을 주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의당 회남왕이 하사할 수 있는 작록이 아닌데, 하사한 것은 그가 반란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大夫但士五開章等七十人與棘蒲侯太子奇謀反, 欲以危宗廟社稷. 使開章陰告長, 與謀使閩越及匈奴発其兵.

대부단 사오개장등칠십인여극포후태자기모반 욕이위종묘사직. 사개장음고장 여모사민월급흉노발기병.

 

대부(大夫) (), 사오(士伍) 개장(開章)  70명과 극포후의 태자 시기(柴奇)가 모반하여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그들은 개장을 시켜 은밀히 유장에게 알려 민월과 흉노로 하여금 더불어 군사를 동원하려는 모반을 꾀했습니다.

 

開章之淮南見長, 長數與坐語飲食, 為家室娶婦, 以二千石俸奉之.

개장지회남견장 장수여좌어음식 위가실취부 이이천석봉봉지.

 

개장은 회남에서 유장을 만났고, 유장도 여러 차례 합석하여 식사하고, 그를 위해서 집과 아내를 마련해주었으며 2천석의 봉록으로 그를 대우했습니다.

 

開章使人告但, 已言之王. 春使使報但等.

개장사이고단 이언지왕. 춘사사보단등.

 

개장은 사람을 시켜 단에게 자신들의 책략을 회남왕의 말인 양 말했습니다. 춘은 사자를 시켜 단 등에게 보고했습니다.

 

吏覚知, 使長安尉奇等往捕開章. 長匿不予, 與故中尉蕑忌謀, 殺以閉口.

리각지 사장안위기등왕포개장. 장닉불여 여고중위간기모 살이폐구.

 

관리가 이를 알고 장안 현위(縣尉) () 등으로 하여금 가서 개장을 체포하게 했으나 유장은 그를 숨겨놓고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중위(中尉) 간기(蕑忌)와 모의해 그를 죽여서 입막음을 했습니다.

 



 

為棺槨衣衾, 葬之肥陵邑, 謾吏曰不知安在. 又詳聚土, 樹表其上, 開章死, 埋此下.

위관곽의금 장지비릉읍 만리왈 부지안재”. 우상취토 수표기상 왈 개장사 매차하”.


그런 뒤에 관과 곽을 마련하여 의관을 갖추고 비릉읍(肥陵邑)에 매장하고 나서 거짓으로 관리에게 어디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또 거짓으로 분묘를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개장이 죽어 이곳에 묻히다.’라는 팻말을 세웠습니다.

 

及長身自賊殺無罪者一人令吏論殺無罪者六人為亡命棄市罪詐捕命者以除罪擅罪人, 罪人無告劾, 繋治城旦舂以上十四人赦免罪人, 死罪十八人, 城旦舂以下五十八人賜人爵関內侯以下九十四人.

급장신자적살무죄자일인 영리논살무죄자육십 위망명기시죄사포명자이제죄 천죄인 죄인무고핵 계치성단용이상십사인 사면죄인 사죄십팔인 성단용이하오십팔인 사인작관내후이하구십사인.

 

유장은 스스로 죄 없는 자를 죽이고 관리로 하여금 죄 없는 여섯 사람을 논죄해 죽이게 했습니다. 기시(棄市)해야 할 죄인을 숨겨주기 위해 죄도 짓지 않은 자를 거짓으로 사로잡아 그의 죄를 면해주었습니다. 제멋대로 사람에게 죄를 주고, 사람에게 죄를 주면서도 한나라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가둔 죄인들 가운데 성단용(城旦舂) 이상이 14명이었고, 멋대로 죄인을 사면한 자 중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18, 성단용 이하가 58명이었습니다. 또 마음대로 작위를 하사해준 사람들 가운데 관내후 이하가 94명이나 되었습니다.

 

前日長病, 陛下憂苦之, 使使者賜書棗脯. 長不欲受賜, 不肯見拝使者. 南海民処廬江界中者反, 淮南吏卒撃之.

전일장병 폐하우고지 사사자사서 조포. 장불욕수사 불긍견배사자. 남해민처여강계중자반 회남리졸격지.

 

일찍이 유장이 병으로 앓았을 때, 폐하께서는 그로 인해서 걱정하여 사자를 보내 친서와 대추 및 육포를 하사했습니다. 그럼에도 유장은 하사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사자를 회피하려 했습니다. 또한 남해(南海)에 백성들로 여강(廬江) 경내에 있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회남의 관리와 군사들이 그를 물리쳤습니다.

 

陛下以淮南民貧苦, 遣使者賜長帛五千匹, 以賜吏卒勞苦者.

폐하이회남민빈고 견사자사장백오천필 이사사졸노고자.

 

이 때도 폐하께서는 회남의 백성들이 빈곤하여 고통을 당한다고 여기시고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비단 5천 필을 하사하시어 관리와 군사 중 노고가 많은 자에게 하사토록 하셨습니다.

 

長不欲受賜, 謾言曰無勞苦者.

장불욕수사 만언왈 무노고자

 

그런데 유장은 하사품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수고한 관리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南海民王織上書獻璧皇帝, 忌擅燔其書, 不以聞. 吏請召治忌, 長不遣, 謾言曰忌病. 春又請長, 願入見, 長怒曰女欲離我自附漢. 長當棄市, 臣請論如法.

남해민왕직상서벽황제 기천번기서 불이문. 이청소치기 장불견 만언왈 기병”. 춘우청장 원입견 장노왈 여욕이아자부한”. 장당지시 신청논여법

 

남해 백성의 왕직(王織)이 글을 올려 황제에게 벽옥을 바치려고 하니 간기가 제멋대로 그 글을 불태워 없애고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리가 간기를 다스리려고 그를 소환할 것을 청했으나, 유장은 그를 보내지 않고 거짓으로 간기는 와병 중이다.’라고 둘러댔습니다. 또 승상 춘()이 입조하기를 유장에게 청했으나, 유장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내 곁을 떠나 한나라에 붙기를 원하는구나.” 유장은 마땅히 기시형에 처해야 합니다. 신들은 법대로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制曰:「朕不忍致法於王, 其與列侯二千石議.

제왈 짐불인치법어왕 기여열후이천석의

 

황제가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짐은 회남왕을 차마 법대로 다스릴 수 없으니, 그대들이 열후(列侯) 그리고 2천석 이상의 관리들과 의논하도록 하라!.’

 

臣倉臣敬臣逸臣福臣賀昧死言臣謹與列侯吏二千石臣嬰等四十三人議, 皆曰長不奉法度, 不聴天子詔, 乃陰聚徒黨及謀反者, 厚養亡命, 欲以有為. 臣等議論如法.

신창 신경 신일 신복 신하매사언 신근여열후리이천석신영등사십삼인의 개왈 장불봉법도 불청천자조 내음취도당급모반자 후양망명 욕이유위”. 신등의론여법

 

() (), (), (), (), ()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들은 삼가 열후와 2천석의 관리 그리고 영()  43명과 논의했습니다. 모두 말하길 유장이 한나라 법도를 준수하지 않고 황제의 조칙을 따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은밀히 도당(徒黨)과 도망자를 모으고, 망명한 자를 후하게 양성하는 것은 그가 반역을 도모하려고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신 등이 논의하기로는 회남왕을 법대로 처결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制曰:「朕不忍致法於王, 其赦長死罪, 廃勿王.

제왈 짐붕인치법어왕 기사장사죄 폐물왕

 

황제가 다시 명을 내렸다. ‘짐은 회남왕을 차마 법대로 처리할 수 없다. 유장의 죽을죄를 면하게 하고 왕위에서 폐하도록 하라!’

 

臣倉等昧死言長有大死罪, 陛下不忍致法, 幸赦, 廃勿王. 臣請処蜀郡厳道邛郵, 遣其子母従居, 県為築蓋家室, 皆廩食給薪菜塩豉炊食器席蓐. 臣等昧死請, 請布告天下.

신창등매사언 장유대사죄 폐하불인치법 행사 폐물왕. 신청처촉군업도공우 견기자모종거 현위축개가실 개름식급신채염고취식기좌욕. 신등매사청 청포고천하

 

신 창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유장은 큰 죽을 죄를 졌는데도 폐하께서는 차마 법대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다행히 용서하셨습니다. 단지 왕의 호칭만 폐해 왕으로 일컫지 않게 하셨습니다. 신들은 그를 촉군(蜀郡) 엄도(嚴道)의 공우(邛郵)로 유배 보내고, 그의 아들과 희첩을 함께 보내어 기거하도록 해주십시오. 엄도현에는 그들을 위한 집을 새로 장만하고, 그들 모두에게 양식을 주게 하며, 땔나무, 채소, 소금, 된장 그리고 취사도구와 잠자는 자리들을 주게 하십시오. 신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건대 이 일을 천하에 선포해 널리 알리시기를 바랍니다.’

 

制曰:「計食長給肉日五斤, 酒二鬥. 令故美人才人得幸者十人従居. 他可.

제왈 계식장급육일오근 주이두. 영고미인재인득행자십인종거. 타가

 

이에 황제가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유장에게 하루에 고기는 다섯 근, 술은 두 말을 주도록 하라! 예전의 미인, 첩 등 중에 그가 총애 하는 10명으로 하여금 함께 따라가 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의론한 대로 처리하라.’

 

盡誅所與謀者. 於是乃遣淮南王, 載以輜車, 令県以次傳.

개주소여모자. 어시내견회남왕 재이치거 영현이차전.

 

그리고 회남왕과 함께 모반을 도모한 자는 다 잡아서 사형에 처했다. 그런 후에 곧바로 곧 회남왕을 유배 보냈는데, 그를 치거(輜車)에 태우고 각 현으로 하여금 차례로 전송하게 했다.

 

是時袁盎諫上曰:「上素驕淮南王, 弗為置厳傅相, 以故至此. 且淮南王為人剛, 今暴摧折之. 臣恐卒逢霧露病死. 陛下為有殺弟之名, 柰何!

시시원앙간상왈 상소교회남왕 불위치엄부상 이고지차. 차회남왕위인강 금폭최절지. 신공졸봉무로병사. 폐하위유살제지명 내하

 

원앙(袁盎)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황제께서는 평소에 회남왕을 교만방자하게 만드셨는데, 그것은 그 곁에 엄한 태부와 승상을 보내지 않아서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또한 회남왕의 사람됨이 강직한데 이제 갑자기 그를 꺾어 오지로 보내시니, 신은 졸지에 열악한 기후로 인해 풍토병으로 죽기라도 하면 폐하께서 장차 아우를 죽였다는 오명을 들으실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하시려고 합니까?’

 

上曰:「吾特苦之耳, 今複之.

상왈 오특고지이 금복지

 

이에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짐도 그를 고생만 시키려고 할뿐이고, 조만간 그를 불러 왕위를 회복시킬 것이오.’

 

県傳淮南王者皆不敢発車封. 淮南王乃謂侍者曰:「誰謂乃公勇者 吾安能勇! 吾以驕故不聞吾過至此. 人生一世閒, 安能邑邑如此!乃不食死.

현전회남왕자개불감발거봉. 회남왕내위시자왈 수위내공용자 오안능용 오이교고불문오과지차. 인생일세간 안능읍읍여차 내불식사.

 

각 현마다 회남왕을 전송하는 자들이 모두 감히 수레에 봉한 문을 열지 않았다. 회남왕이 이에 시종하는 자에게 말하길 누가 나를 용맹했다고 하더냐? 내가 어찌 용맹하다고 하겠는가! 나는 교만했던 까닭에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한평생 동안을 살면서 어찌 이와 같이 구차하게 살겠는가?’라고 하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至雍,26) 雍令発封, 以死聞. 上哭甚悲, 謂袁盎曰:「吾不聴公言, 卒亡淮南王.

지옹 옹령발봉 이사문. 상곡심비 위원앙왈 오불청공언 졸망회남왕

 

회남왕을 태운 수레가 옹()에 당도했을 때, 옹현의 현령이 수레에 봉한 문을 열으니 회남왕이 죽은 사실을 확인하고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가 통곡하며 매우 애통해면서 원앙에게 말하길 짐이 공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에 회남왕을 잃었도다.”라고 했다.

 

盎曰:「不可柰何, 願陛下自寛.

앙왈 블기내하 원폐하자관

 

원앙이 이렇게 위로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 스스로 마음을 너그러이 가지십시오.’

 

上曰:「為之柰何?」盎曰:「獨斬丞相禦史以謝天下乃可.

상왈 위지내하 앙왈 독참승상 어사이사천하내가

 

황제는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란 말인가?’ 원앙이 대답했다. ‘오로지 승상과 어사대부와 상의하여 관련자들을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하시면 됩니다.’

 

上即令丞相禦史逮考諸県傳送淮南王不発封餽侍者, 皆棄市.

상즉령승상 어사체고제현전송회남왕불발봉궤시자 개기시.

 

황제는 즉시 승상과 어사대부에게 명을 내려 각 현에서 회남왕을 호송하면서 수레의 봉인한 문을 열지 않은 자와 음식을 보내지 않은 자 그리고 시중을 들지 않은 자를 모두 잡아들여 기시(시신을 길바닥에 던져두는)의 형벌에 처했다.

 

乃以列侯葬淮南王於雍, 守塚三十戸.

내이열후장회남왕어옹 수총삼십호.

 

그리고 회남왕을 열후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고 옹()에 묻고 민가 30()를 정해 무덤을 지키게 했다.

 

孝文八年, 上憐淮南王, 淮南王有子四人, 皆七八歳, 乃封子安為阜陵侯, 子勃為安陽侯, 子賜為陽周侯, 子良為東成侯.

효문팔년 상린회남왕 회남왕유자사인 개칠팔세 내봉자안위부릉후 자발위안양후 자사위양주후 자량위동성후.

 

효문제 8(서기전 172), 황제는 회남왕을 불쌍하게 여겨 모두 일곱 또는 여덟 살에 불과한 회남왕의 아들 4명을 모두 후()로 봉했다. 유안(劉安)을 부릉후(阜陵侯), 유발(劉勃)을 안양후(安陽侯), 유사(劉賜)를 양주후(陽周侯), 유양(劉良)을 동성후(東城侯)로 각각 봉했다.

 

孝文十二年, 民有作歌歌淮南厲王曰

효문십이년 민유작가가회남여왕왈:

 

효문제 12(서기전 168)에 민간에서 어떤 사람이 회남려왕을 위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一尺布, 尚可縫一鬥粟, 尚可舂. 兄弟二人不能相容.

일척포 상가봉 일두속 상가용 형제이인불능상용

 

한 자의 베로도 꿰매 입을 수 있고, 한 말의 곡식도 찧어 나누어 먹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했나.’

 

上聞之, 乃歎曰

상문지 내탄왈:

 

황제가 그 노래를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尭舜放逐骨肉, 周公殺管蔡, 天下稱聖. 何者 不以私害公. 天下豈以我為貪淮南王地邪?」

요순방축골육 주공살관채 천하칭성. 하자 불이사해공. 천하기이아위탐회남왕지야?’

 

(), ()이 형제를 내쫒았고, 주공(周公)은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를 죽였지만, 천하의 사람들은 그들을 성인(聖人)이라고 숭상하는데 도대체 어찌 된 까닭인가? 사적인 일로써 공적인 의리를 손상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하의 사람은 어찌하여 짐이 회남왕의 땅을 탐냈다고 하는가?’

 

乃徙城陽王王淮南故地, 而追尊謚淮南王為厲王, 置園複如諸侯儀.

내사성양왕왕회남고지 이추존시회남왕위려왕 치원복여제후의.

 

그래서 성양왕(城陽王) 유희(劉喜)을 회남의 원래 땅으로 옮겨 왕으로 삼았고, 회남왕을 추존 려왕으로 삼고, 묘지를 만들어 제후왕으로써의 의례를를 갖추도록 하였다.

 

孝文十六年, 徙淮南王喜複故城陽. 上憐淮南厲王廃法不軌, 自使失國蚤死, 乃立其三子

효문십육년 사회남왕희복고성양. 상린회남려왕폐법불궤 자사실국조사 내립기삼자:

 

효문제 16(서기전 164)에 회남왕 유희를 다시 성양왕으로 삼아 옮기도록 했다. 황제는 회남려왕이 한나라 법을 폐하고 정도를 따르지 않다가 나라를 잃고 일찍 죽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 마침내 그의 세 아들들을 즉위시켰다.

 

阜陵侯安為淮南王, 安陽侯勃為衡山王, 陽周侯賜為廬江王, 皆複得厲王時地, 參分之. 東城侯良前薨, 無後也.

부릉후안위회남왕 안양후발위형산왕 양주후사위려강왕 개복득려왕시지 삼분지. 동성후양전훙 무후야.

 

부릉후 유안을 회남왕, 안양후 유발을 형산왕(衡山王), 양주후 유사를 여강왕(廬江王)으로 봉하고, 회남려왕의 옛 땅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동양후(東陽侯) 유양은 그 전에 죽었기 때문에 분봉할 수 없었다.

 

孝景三年, 呉楚七國反, 呉使者至淮南, 淮南王欲発兵應之.

효경삼년 오초칠국반 오사자지회남 회남왕욕발병응지.

 

효경제(孝景帝) 3(서기전 154)에 오(), () 등 칠국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오왕(吳王)의 사자가 회남에 와서 반란의 참가를 권했고 회남왕도 군사를 일으켜 그들과 호응하려고 했다.

 

其相曰:「大王必欲発兵應呉, 臣願為將.王乃屬相兵.

기상왈 대왕필욕발병응오 신원위장 왕내속상병.

 

이때 회남의 승상이 말했다.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와 호응하려고 하신다면, 신을 장수로 임명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왕은 군사를 승상에게 맡겼다.

 

淮南相已將兵, 因城守, 不聴王而為漢

회남상이장병 인성수 불청왕이위한:

 

그러자 승상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굳게 지키며 한나라를 위해서 회남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漢亦使曲城侯將兵救淮南淮南以故得完. 呉使者至廬江, 廬江王弗應, 而往來使越. 呉使者至衡山, 衡山王堅守無二心.

한역사곡성후장병구회남 회남이고득완. 오사자지려강 여강왕불응 이왕래사월. 오사자지형산 형산왕견수무이심.

 

한나라 역시 곡성후(曲城侯) 충첩(蟲捷)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회남을 구하도록 하였다. 회남국은 이런 까닭에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가 있었다. 오나라의 여강왕에게도 사자를 보냈으나, 여강왕은 반란에 호응하려고 않고 도리어 사자를 월()나라에 파견해 왕래하게 했다. 또 오나라의 형산왕(荊山王)에게도 사자를 보냈으나 형산왕 역시 성을 굳게 지키며 한나라에 대해서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孝景四年, 呉楚已破, 衡山王朝, 上以為貞信, 乃勞苦之曰:「南方卑溼.徙衡山王王済北, 所以褒之.

효경사년 오초이파 형산왕조 상이위정신 내노고지왈 남방비습 사형산왕왕제북 소이포지.

 

효경제 4(서기전 153)에 오, 초의 이미 멸망하고 반란이 평정되자 형산왕이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는 그가 절개와 믿음이 있다고 여겨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말했다.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하다지.’ 그리고는 형산왕을 남방에서 북방으로 옮겨 제북왕(濟北王)으로 삼고 그의 충성심에 표창했다.

 

及薨, 遂賜謚為貞王. 廬江王邊越, 數使使相交, 故徙為衡山王, 王江北. 淮南王如故.

급훙 수사시위정왕, 여강왕변월 수사사상교 고사위형산왕 왕강북. 회남왕여고.

 

형산왕이 죽자 황제는 정왕(貞王)이란 시호를 하사했다. 황제는 여강왕의 관할 국경부근에 월()나라이 있어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서로 왕래한 것을 염려하여 그를 형산왕으로 삼아 강북(江北)을 다스리게 했다. 회남왕은 예전처럼 그대로 두었다.





<회남왕 유안>

 

淮南王安為人好読書鼓琴, 不喜弋猟狗馬馳騁, 亦欲以行陰徳拊循百姓, 流譽天下. 時時怨望厲王死, 時欲畔逆, 未有因也.

회남왕안위인호독서고금 불희익렵구마치빙 역욕이행음덕부순백성 유예천하. 시시원망려왕사 시욕반역 미유인야.

 

회남왕 안()은 사람됨이 독서나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고, 활을 쏘며 사냥하거나 말 달리는 것을 싫어했다. 또 백성들에게 음덕(陰德)을 베풀어 어루만지고 위로해 자신의 명성을 천하에 알리려고 했다. 그는 때때로 회남 려왕(厲王)이 죽은 것을 원망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마땅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及建元二年, 淮南王入朝. 素善武安侯, 武安侯時為太尉, 乃逆王霸上, 與王語曰:「方今上無太子, 大王親高皇帝孫, 行仁義, 天下莫不聞. 即宮車一日晏駕, 非大王當誰立者!

급건원이년 회남왕입조, 소선무안후 무안후시위대위 내역왕패상 여왕어왈 방금상무태자 대왕친고환제손 행인의 천하막불문. 즉 궁거일일안가 비대왕당수립자

 

건원(建元) 2(서기전 139)에 회남왕이 입조했다. 회남왕은 평소 무안후(武安侯)와 친한 사이였다. 당시 무안후는 태위(太尉)였는데, 회남왕을 패상(覇上)에서 마중 나갔다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야흐로 지금 황제께는 태자가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고황제의 친손(親孫)으로 인의(仁義)를 행하시어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황제께서 어느 날 갑자기 붕어하시면(晏駕) 대왕이 아니면 마땅히 누가 대신 즉위할 수 있겠습니까?”

 

淮南王大喜, 厚遺武安侯金財物. 陰結賓客, 拊循百姓, 為畔逆事.

회남왕대희 후유무안후금재물. 음결빈객 부순백성 위반역사.

이 같은 무안후의 말을 들은 회남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돈과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이에 회남왕은 은밀히 빈객들과 교류하며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면서 반역의 일을 도모했다.

 

建元六年, 彗星見, 淮南王心怪之. 或説王曰:「先呉軍起時, 彗星出長數尺, 然尚流血千里. 今彗星長竟天, 天下兵當大起.

건원육냔 혜성현 회남왕심괴지. 혹설왕왈 선오군기시 혜성출장수척 연상류혈천리. 슴혜성장경천 천하병당대기

 

건원 6(서기전 135)에 혜성이 나타나자 회남왕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런데 혹자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번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혜성이 나타났는데, 그 길이가 몇 자밖에 불과했지만 전쟁으로 희생된 자의 피가 천리나 흘렸습니다. 이제 혜성의 길이가 하늘을 가로지르니 마땅히 천하에 병란이 크게 일어날 징조입니다.’

 

王心以為上無太子, 天下有変, 諸侯並爭, 愈益治器械攻戦具, 積金銭賂遺郡國諸侯遊士奇材. 諸辨士為方略者, 妄作妖言, 諂諛王, 王喜, 多賜金銭, 而謀反滋甚.

왕심이위상무태자 천하유변 제후병쟁 유익치기계공전군 적금전뢰유군국제후유사기재. 제뱐사위방략자 망작요언 첨유왕 왕희 다사금전 이모반자심.

 

회남왕은 내심 황제에게 태자가 없으니, 천하에 변란이 발생하면 제후들이 서로 다툴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더욱 무기와 공격용 기구를 수리했고, (), ()의 제후와 유사(游士) 그리고 기이한 재주를 가진 인재들에게 금전을 모아 뇌물로 보냈다. 모략을 일삼는 여러 변사(辯士)들은 함부로 요사스러운 말을 지어 왕에게 아첨하니 왕은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많은 금전을 하사했다. 이로써 반역의 음모는 점차 그 정도가 심해졌다.

 

淮南王有女陵, , 有口辯. 王愛陵, 常多予金銭, 為中詗長安, 約結上左右.

회남왕유여릉 혜 유구변. 왕애릉 상다여금전 위중형장안 약결상좌우.

 

회남왕에게는 총명하고 말재간이 좋은 유릉(劉陵)이라고 하는 딸이 있었다. 회남왕은 그녀를 아껴서 항상 많은 금전을 주어 장안에 기거하면서 황실의 주변을 정탐하게 하고 황제의 측근들과 친교를 맺도록 하였다.

 

元朔三年, 上賜淮南王幾杖, 不朝. 淮南王王後荼, 王愛幸之. 王後生太子遷, 遷取王皇太後外孫修成君女為妃. 王謀為反具, 畏太子妃知而內泄事, 乃與太子謀, 令詐弗愛, 三月不同席.

원삭삼년 상사회남왕기장 불조. 회남왕후도 왕애행지. 왕후생태자천 천취왕황태후외손수성군여위비. 왕모위반구 외태자비지이내설사 내여태자모 영사불애 삼월부동석.

 

원삭(元朔) 3(서기전 126), 황제가 회남왕에게 안석(安席)과 지팡이를 하사하고,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칙을 내렸다. 회남왕의 왕후는 도()인데 왕이 그녀를 총애했다. 왕후는 태자 유천(劉遷)을 낳았고, 유천은 왕황태후(王皇太后)의 외손인 수성군(修成君)의 여식을 비()로 삼았다. 왕은 그동안 준비해온 반역의 도구들을 태자비가 알아 안에서 반란을 도모한 것이 발설될까 두려워해, 태자와 모의해 거짓으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척하며 석 달 동안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게 했다.

 

王乃詳為怒太子, 閉太子使與妃同內三月, 太子終不近妃. 妃求去, 王乃上書謝帰去之. 王後荼太子遷及女陵得愛幸王, 擅國権, 侵奪民田宅, 妄致繋人.

왕내상위노태자 폐태자사여비동내삼월 태자종불근비. 비구거 왕내상서사귀거지. 왕후도 태자천급여릉득애행왕 천국권 침탈민전택 망치계인.

 

이에 왕은 거짓으로 태자에게 노한 척 해 그를 유폐시키고, 그로 하여금 태자비와 함께 같은 방에서 석 달을 지내게 했다. 그러나 태자는 끝끝내 태자비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마침내 태자비가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왕은 이에 글을 올려 사죄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왕후 도는 태자 유천과 딸 유릉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나라의 권력을 제멋대로 남용했고, 백성들의 밭과 집을 침범해 강탈하였으며 사람들을 함부로 소환해 묶어 감옥에 가두었다.

 

 

元朔五年, 太子學用剣, 自以為人莫及, 聞郎中雷被巧, 乃召與戯. 被一再辭譲, 誤中太子. 太子怒, 被恐.

원삭오년 태자학용검 자이위인막급 문랑중뢰피교 급소여희. 피일재사양 오중태자. 태자노 피공.

 

원삭 5(서기전 124)에 태자 유천(劉遷)는 검을 쓰는 것을 배웠는데, 스스로 자신을 따를 자가 없다고 여겼다. 한 번은 낭중(郎中) 뇌피가 검술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이에 그를 불러 겨루었다. 뇌피는 한두 차례 사양하다가 잘못해 태자를 찔렀다. 태자가 노하자 뇌피는 매우 두려워했다.

 

此時有欲従軍者輒詣京師, 被即願奮撃匈奴. 太子遷數悪被於王, 王使郎中令斥免, 欲以禁後, 被遂亡至長安, 上書自明.

차시유욕종군자첩예경사 피즉원분격흉노. 태자천수악피어왕 왕사랑중령척면 욕이금후 피수망지장안 상서자명.

 

이때에는 흉노에 종군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경사로 가게 했는데, 뇌피는 곧바로 종군해 흉노를 힘써 물리치기를 원했다. 태자 천은 여러 차례 왕에게 뇌피를 헐뜯어 이야기하니, 회남왕은 낭중령에게 뇌피를 파면시키게 하고, 이후에도 이러한 일을 금지시키려고 했다. 뇌피는 마침내 도망해 장안에 도망쳐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詔下其事廷尉河南. 河南治, 逮淮南太子, 王後計欲無遣太子, 遂発兵反, 計猶予, 十餘日未定.

조하기사정위 하남. 하남치 체회남태자 왕 왕후계욕무견태자 수발병반 계유여 십여일미정.

 

황제는 그 일로 정위(廷尉)와 하남군(河南郡)의 도위(都尉)에게 사건을 조사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하남의 도위가 그 사건을 조사하려고 회남 태자를 체포하려고 하자, 왕과 왕후는 계략을 써서 태자를 보내려 하지 않았고 마침내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계획이 예정보다 늦어져 10여 일 동안 지체되었다.

 

會有詔, 即訊太子. 當是時, 淮南相怒壽春丞留太子逮不遣, 劾不敬. 王以請相, 相弗聴. 王使人上書告相, 事下廷尉治.

회유조 즉심태자. 당시시 회남상노수춘승유태자체불견 핵불경. 왕이청상 왕사인상서고상 사하정위치.

 

때마침 조서가 당도해 하남의 도위가 태자를 심문했다. 이때 회남의 승상은, 수춘(壽春)의 승()이 태자를 체포하고 보내지 않은 것에 노하여 그를 불경죄로 탄핵했다. 회남왕은 이에 승상에게 선처를 부탁했으나 승상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회남왕은 사람을 시켜 글을 올려 승상을 고발하니, 황제는 그 일을 정위에게 다스리게 했다.

 

蹤跡連王, 王使人候伺漢公卿, 公卿請逮捕治王. 王恐事発, 太子遷謀曰:「漢使即逮王, 王令人衣衛士衣, 持戟居庭中, 王旁有非是, 則刺殺之, 臣亦使人刺殺淮南中尉, 乃挙兵, 未晩.

종적연왕 왕사인후사한공경 공경청체포치왕. 왕공사발 태자천모왈 한사즉체왕 왕령인의위사의 지극거정중 왕방유비시 즉자살지 신역사인자살회남중위 내거병 미만

 

사건의 실마리가 회남왕에게까지 연루되자, 회남왕은 사람을 시켜 한나라 조정의 공경(公卿)들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니, 공경들은 회남왕을 체포해 죄를 다스리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왕이 이 사건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자, 태자 유천이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에서 사자를 보내 부왕을 체포하려고 하면, 부왕께서는 사람을 시켜 위사(衛士)의 옷을 입혀 창을 가지고 어전에 머무르게 하다가, 부왕의 곁에서 시비가 생기면 즉시 그를 찔러 죽이십시오. 신도 역시 사람을 시켜 회남국 중위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그리고서 군사를 일으켜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是時上不許公卿請, 而遣漢中尉宏即訊験王. 王聞漢使來, 即如太子謀計. 漢中尉至, 王視其顔色和, 訊王以斥雷被事耳, 王自度無何, 不発. 中尉還, 以聞. 公卿治者曰:「淮南王安擁閼奮撃匈奴者雷被等, 廃格明詔, 當棄市.

시시상불허공경청 이견한중위굉즉심험왕. 왕문한사래 즉여태자모계. 한중위지 왕시기안색화 심왕이척뇌피사이 왕자도무하 불발. 중위환 이문. 공경치자왈 회남왕안옹알분격흉노자뇌피등 폐격명조 당기시

 

이때 황제는 공경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한나라의 중위 굉()을 파견해 바로 회남왕을 심문해 조사하게 했다. 회남왕은 한나라의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태자의 계책대로 따르려 했다. 한나라의 중위가 도착했는데, 그의 안색이 온화하고 회남왕을 심문하는 것도 뇌피를 파면한 일만 물었다. 회남왕은 스스로 죄상이 폭로되지 않을 것으로 추측하고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중위는 돌아가서 이 사실을 보고했다. 회남왕을 다스리려고 했던 공경대신들이 말했다. ‘회남왕 유안은 흉노를 힘써 물리치기 위해 종군하려는 뇌피를 막아 명문(明文)으로 선포한 조령(詔令)을 폐지해 실시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기시의 형벌에 처해야 합니다.’

 

詔弗許. 公卿請廃勿王, 詔弗許. 公卿請削五県, 詔削二県. 使中尉宏赦淮南王罪, 罰以削地.

조불허. 공경청폐물왕 조불허. 공경청삭오현 조삭이현. 사중위굉사회남왕죄 벌이삭지.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경대신들은 회남왕을 폐위시켜야한다고 청했다. 황제가 역시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공경대신들이 회남국의 5개 현에 해당하는 땅을 삭탈하기를 청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2개 현의 땅만을 삭감하도록 하고, 중위 굉()을 시켜 회남왕의 죄를 사면하게 하고, 그 대신 영지를 삭감할 것을 명했다.

 

中尉入淮南界, 宣言赦王. 王初聞漢公卿請誅之, 未知得削地, 聞漢使來, 恐其捕之, 乃與太子謀刺之如前計. 及中尉至, 即賀王, 王以故不発. 其後自傷曰:「吾行仁義見削, 甚恥之.

중위입회남계 선언사왕. 왕초문한공경청주지 미지득삭지 문한사래 공기포지 내여태자모자지여전계. 급중위지 즉하왕 왕이고불발. 기후자상왈 오행인의견삭 심치지

 

중위가 회남의 경계 지역 안에 들어가 회남왕의 죄를 사면한다고 선포했다. 회남왕은 처음에 한나라의 공경대신들이 자신을 주살하게 청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봉지를 삭탈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한나라의 사자가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전에 태자와 모의해던 계획대로 사자를 찔러 죽이려고 했다. 중위가 도착해 바로 회남왕에게 치하의 말을 전하자 회남왕은 이로 인해 군사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중지했다. 그 후 스스로 애통해하며 말했다. ‘과인이 인의를 행했다가 봉지를 삭탈당하니 심히 부끄럽도다!’.

 

然淮南王削地之後, 其為反謀益甚. 諸使道従長安來, 為妄妖言, 言上無男, 漢不治, 即喜即言漢廷治, 有男, 王怒, 以為妄言, 非也.

연회남왕삭지지후 기위반모익심. 제사도종장안래 위망요언 언상무남 한불치 즉희 즉언 한정치 유남 왕노 이위망언 비야.

 

그러나 회남왕은 봉지를 삭탈당한 뒤에도 반란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더욱 심해졌다. 많은 사자들이 장안으로부터 회남국에 왕래하면서 망령되고 요사스러운 말을 일삼았다. 게다가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고 한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면 회남왕은 곧바로 기뻐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조정이 잘 다스려지고 아들이 있다고 하면, 회남왕은 노하여 이를 망령된 말로서 옳지 않다고 여겼다.

 

王日夜與伍被左呉等案輿地図, 部署兵所従入. 王曰:「上無太子, 宮車即晏駕, 廷臣必徴膠東王, 不即常山王, 諸侯並爭, 吾可以無備乎! 且吾高祖孫, 親行仁義, 陛下遇我厚, 吾能忍之萬世之後, 吾寧能北面臣事豎子乎!

왕일야여오피 좌오등안여지도 부서장소종입. 왕왈 상무태자 궁거즉안가 정신필징교동왕 불즉상산왕 제후병쟁 오가이무비호 차오고조손 친행인의 폐하우아후 오능인지 만세지후 오령능북면신사수자호

 

회남왕은 매일 밤낮으로 오피(伍被), 좌오(左吳) 등과 더불어 여지도(輿地圖)를 살펴보면서 각 부서의 군사들이 어디로부터 장안으로 진입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회남왕이 말했다. ‘황제께는 태자가 없으시니 만약 하루아침에 갑자기 붕어하신다면 조정의 신하들은 반드시 교동왕(膠東王)이나 상산왕(常山王)을 부를 것이고, 제후들도 서로 다툴 것이다. 과인이 어찌 준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과인은 고조의 손자로 친히 인의를 행했고, 폐하께서 나를 후하게 대우해 과인이 참을 수 있었지만, 만세(萬世)의 뒤에는 내가 어찌 북면(北面)하는 신하가 되어 떠거머리 어린 것들을 섬길 수 있겠는가!’



王坐東宮, 召伍被與謀, :「將軍上.

왕좌동궁 소오피여모 왈 장군상

 

회남왕은 동궁(東宮)에 머물면서 오피를 불러 함께 모의하면서 말했다. ‘장군(將軍)이 되시오

 

被悵然曰:「上寛赦大王, 王複安得此亡國之語乎! 臣聞子胥諫呉王, 呉王不用, 乃曰臣今見麋鹿遊姑蘇之台也. 今臣亦見宮中生荊棘, 露霑衣也.

피장연왈 상관사대왕 왕복안득차망국지어호 신문자조간오왕 오왕불용 내왈 신금견미록유고소지대야”. 금신역견궁중생형극 노점의야.’

 

오피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말했다. ‘황제께서 관대한 마음으로 대왕을 용서하셨는데, 어찌 다시 이러한 망국의 말씀을 하십니까! 신이 듣기로는 옛날에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에게 간언했지만 오왕이 듣지 않자 신은 이제 미록(麋鹿:고라니 사슴)이 고소대(姑蘇臺)에서 노니는 것을 볼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신도 이제 마찬가지로 회남국의 궁중 뜰에서 가시나무가 자라고 이슬에 옷이 젖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王怒, 繋伍被父母, 囚之三月. 複召曰:「將軍許寡人乎?」被曰

왕노 계오피부모 수지삼월. 복소왈 장군허과인호 피왈:

 

왕이 노하여 오피의 부모를 잡아 석 달 동안을 가두었다. 뒤에 다시 오피를 불러 말했다. ‘장군은 과인의 청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러자 오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直來為大王畫耳. 臣聞聡者聴於無聲, 明者見於未形, 故聖人萬挙萬全.

불 직래위대왕획이. 신문총자청어무성 명자견어미형 고성인만거만전.

 

안 됩니다. 신이 달려온 까닭은 대왕을 위해 장구한 계획을 세우기 위함일 뿐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귀가 밝은 자는 소리가 없는 곳에서도 들으며, 눈이 밝은 자는 형태가 없는 데서 본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만 번을 일어나면, 만 번 다 성공하는 것입니다.

 

昔文王一動而功顕於千世, 列為三代, 此所謂因天心以動作者也, 故海內不期而隨. 此千歳之可見者.

석문왕일동이공현어천세 열위삼대 차소위인천심이동작자야 고해내불기이수. 차천세지가견자.

 

옛날 주나라 문왕(文王)은 한 번 움직임으로써 공이 천세(千世)에 드러났고, 그 자신은 삼왕(三王)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는 천심을 따라 움직인 것으로 해내(海內;나라)가 기약도 하지 않았지만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천 년 전의 실례로 가히 살펴볼 만합니다.

 

夫百年之秦, 近世之呉楚, 亦足以喩國家之存亡矣. 臣不敢避子胥之誅, 願大王毋為呉王之聴.

부백년지진 근세지오초 역족이유국가지존망의. 신불감피자서지주 원대왕무위오왕지청.

 

무릇 백 년 전의 진()나라에서 근래의 오, 초나라의 실례에서 족히 국가의 존망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도 감히 오자서와 같은 죽음을 피하지 않거니와 대왕께서도 오왕 부차처럼 충성스런 간언을 물리치는 일이 없으시기를 원합니다.

 

昔秦絶聖人之道, 殺術士, 燔詩書, 棄禮義, 尚詐力, 任刑罰, 転負海之粟致之西河. 當是之時, 男子疾耕不足於糟糠, 女子紡績不足於蓋形. 遣蒙恬築長城, 東西數千里, 暴兵露師常數十萬, 死者不可勝數, 僵屍千里, 流血頃畝, 百姓力竭, 欲為亂者十家而五.

석진절성인지도 살술사 번시서 기예의 상사력 임형벌 전부해지속치지서하. 당시지시만자질경부족어조강 여자방적부족어개형. 견몽염축장성 동서수천리 폭병로사상수십만 사자불가승주 강시천리 유혈경묘 백성역갈 욕위란자십가이오.

 

옛날 진()나라는 성현의 도리를 끊고, 유생과 방사(方士)들을 죽이며,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불태우고, 예의를 버렸습니다. 또한 사술과 폭력을 숭상하고, 형벌에 의지하여 나라를 통치했고, 동쪽 해변에서 나는 곡식을 운송해 서하(西河)로 보냈습니다. 이때 남자들은 힘써 경작해도 술지게미와 겨조차 얻어먹기에 부족했으며, 여자들은 밤낮으로 베를 짰지만 자기 몸을 덮기에 부족했습니다. 몽염(蒙恬)을 파견해 장성(長城)을 쌓아 동서로 수천 리, 비바람과 눈서리에 몸을 맡긴 병사와 장수는 항상 수십만에 달했고, 그 와중에 죽은 자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시체가 천리이며 피는 흘러 논밭을 적셨습니다. 백성들은 힘이 다해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열 집 가운데 다섯 집이었습니다.

 

又使徐福入海求神異物, 還為偽辭曰:『臣見海中大神, 言曰:「汝西皇之使邪?」臣答曰:「.」「汝何求?」:「願請延年益壽薬.

우사서복입해구신이물 환위위사왈 신견해중대신 언왈 여서황지사야 신답왈 ’ ‘여하구  원청연년익약.’

 

진시황은 서복을 시켜 바다로 들어가 신선의 불로장생약을 얻기 하였습니다. 서복이 바다로 갔다가 돌아온 후에 거짓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바다 속의 대신(大神)을 만났는데 네가 서황(西皇)의 사자이냐라고 묻기에 신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묻기에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神曰:「汝秦王之禮薄, 得観而不得取.即従臣東南至蓬萊山, 見芝成宮闕, 有使者銅色而竜形, 光上照天. 於是臣再拝問曰:「宜何資以獻?」海神曰:「以令名男子若振女53)與百工之事, 即得之矣.」』

신왈 여진왕지예박 득관이부득취 즉종신동남지봉래산 견지성궁궐 유사자동색이용형 광상조천. 어시신재배문왈 의하자이헌 해신왈 이령명남자약진여여백공지사 즉득지의’”

 

그러자 그 신은 너희 진왕(秦王)의 예의가 박절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로 신()을 데리고 동남쪽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영지초(靈芝草)로 이루어진 궁궐이 보이고 사자가 있었는데, 구릿빛에 용의 형상이었으며, 그 광채가 하늘까지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재배(再拜)하고 마땅히 어떤 예물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묻자 해신(海神) 양가집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기술자)들의 물건을 제물로 바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秦皇帝大説, 遣振男女三千人, 資之五谷種種百工而行. 徐福得平原広沢, 止王不來. 於是百姓悲痛相思, 欲為亂者十家而六.

진황제대열 견진남여삼천인 자지오곡종종백공이행. 서복득평원광택 지왕불래. 어시백성비통상사 욕이란자십가이육.

 

진시황(秦始皇)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 명을 보내고 오곡의 각종 씨앗과 백공들의 만든 물품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서복은 비옥하고 평평한 들판과 넓은 못을 얻자 거기에 머물러 왕이 되고,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비통하게 생각한 나머지 난을 일으키려고 한 사람들이 열 집 가운데 여섯 집이었습니다.

 

又使尉佗踰五嶺攻百越. 尉佗知中國勞極, 止王不來, 使人上書, 求女無夫家者三萬人, 以為士卒衣補. 秦皇帝可其萬五千人. 於是百姓離心瓦解, 欲為亂者十家而七.

우사위타유오령공백월. 위타지중국노극 지왕불래 사인상서 구녀무부가자삼만인 이위사족의보. 진황제가시만오천인. 어시백성이심와해 욕이난자십가이칠.

 

또다시 위타(尉佗)로 하여금 오령(五嶺)을 넘어 백월(百越)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위타는 중국(中國)이 극도로 피폐되었음을 알고,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진시황에게 글을 올려 군사들의 옷을 꿰매기 위해서 남편이 없는 여자 3만 명을 구했고, 진시황은 그중 1 5천 명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인심이 흩어지고 무너져 난을 일으키려고 한 사람들이 열 집 가운데 일곱 집이었습니다.

 

客謂高皇帝曰:『時可矣.高皇帝曰:『待之, 聖人當起東南閒.不一年, 陳勝呉広発矣. 高皇始於豊沛, 一倡天下不期而響應者不可勝數也. 此所謂蹈瑕候閒, 因秦之亡而動者也.

객위고황제왈 시가의’. 고황제왈 시지 성인당기동남간 불일년 진승오광발의. 고황시어풍패 일창펀하불기이향응자불가승수야. 차소위도하후간 인진지망이동자야.

 

어떤 빈객이 고황제에게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고제(유방)께서는 기다려라. 성인이 장차 동남쪽에서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도 되지 않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고제께서 비로소 풍읍(豐邑)과 패현(沛縣)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향해 외치니 천하가 기약도 하지 않았는데 호응하는 자가 가히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약점을 노려서 틈을 기다리는 것으로서, 진나라가 망하는 것을 틈타 비로소 일어난 것입니다.

 

百姓願之, 若旱之望雨, 故起於行陳之中而立為天子, 功高三王, 徳傳無窮. 今大王見高皇帝得天下之易也, 獨不観近世之呉楚乎

백성원지 약조지망우 고기어행진지중이립위천자 공고삼왕 덕전무궁. 금대왈견고환제득천하지이야 독불관근세지오초호?

 

그것은 백성들도 원했던 바라서 마치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것 같았고, 그런 까닭에 행군 중의 군진(軍陣) 가운데서 일어나 즉위해 황제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 공업(功業)은 삼왕(三王)보다 높고, 베푼 은덕은 끝없이 전해졌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고황제께서 천하를 쉽게 얻으신 것만 보시고, 어째서 근래의 오, 초나라의 사례는 살펴보지 않으십니까?

 

夫呉王賜號為劉氏祭酒, 複不朝, 王四郡之衆, 地方數千里, 內鋳消銅以為銭, 東煮海水以為塩, 上取江陵木以為船, 一船之載當中國數十両車, 國富民衆. 行珠玉金帛賂諸侯宗室大臣, 獨竇氏不與.

부오왕사호위유씨좨주 복불조 왕사군지중 지방수천리 내주소동이위전 동자해수이위염 상취강릉목이위선 일선지재당중국수십량거 국부민중. 행주옥금백뢰제후종실대신 독두씨불여.

 

무릇 오왕은 호()를 하사받아 유씨(劉氏)의 좨주(祭酒: 웃어른)가 되었고, 입조하지 않아도 되었고, 네 군()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영토가 사방 수천 리나 되었고, 안으로는 구리를 주조해 돈을 만들고, 동쪽에서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위로는 강릉(江陵)의 나무를 취해 배를 만들었는데, 배 한 척의 무게는 중국의 수레 수십량()에 해당하며,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많았습니다. 주옥(珠玉)과 황금 그리고 비단을 사용해 제후나 종실의 대신들에게 뇌물로 나누어 주었으나 오로지 두씨(竇氏)에게만 주지 않았습니다.

 

計定謀成, 挙兵而西. 破於大梁, 敗於狐父, 奔走而東, 至於丹徒, 越人禽之, 身死絶祀, 為天下笑. 夫以呉越之衆不能成功者何 誠逆天道而不知時也.

계정모성 거병이서. 피어대량 패어호보 분주이동 지어단도 월인금지 신사절사 위천하소. 부이오월지중불능성공자하? 성역천도이부지시야.

 

이윽고 계책이 정해지고 모의가 이루어지자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갔습니다. 대량(大梁)에서 깨지고 호보(狐父)에서 패해 달아났습니다. 결국 동쪽으로 가 단도(丹徒)에 이르자 월()나라 사람이 그를 사로잡아 몸은 죽고 제사는 끊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무릇 오, 월나라의 무리로도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노력도 하늘의 도를 역행하면 그 시기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方今大王之兵衆不能十分呉楚之一, 天下安寧有萬倍於秦之時, 願大王従臣之計.

방금대왕지병중불능십분오초지일 천하안녕유만배어진지시 원대왕종신지계.

 

바야흐로 지금 대왕의 군사와 무리는 예전의 오, 초나라에 10분의 1도 되지 못하며, 천하는 진나라 때보다도 만 배나 더 안정되었으니, 대왕께서 신()의 계책을 따르시기를 원합니다.

 

大王不従臣之計, 今見大王事必不成而語先泄也. 臣聞微子過故國而悲, 於是作麥秀之歌, 是痛紂之不用王子比幹也.

대왕불종신지계 금견대왕사필불성이어선설야. 신문미자과고국이비 어시작맥수지가 시통주불용왕자비간야.

 

대왕께서 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결국 대왕께서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고, 말이 먼저 새나가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미자(微子)가 옛 나라를 지나다가 슬퍼 맥수지가(麥秀之歌)’를 지었는데, 이는 주왕(紂王)이 왕자 비간(比干)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슬퍼한 것입니다.

 

故孟子曰紂貴為天子, 死曾不若匹夫. 是紂先自絶於天下久矣, 非死之日而天下去之. 今臣亦竊悲大王棄千乗之君, 必且賜絶命之書, 為群臣先, 死於東宮也.

고맹자왈 주귀위천자 사증불약필부”. 시주선자절어천하구위 비사지일이천하거지. 금신역절비대왕기천승지군 필차사절명지서 위군신선 사어동궁야

 

그래서 맹자(孟子)에는 ()는 천자일 때는 존귀했으나, 죽어서는 일찍이 필부(匹夫)만도 못했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주왕이 먼저 스스로 천하와 연을 끊었기 때문이지, 그가 죽은 날 천하가 그를 버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 신도 역시 대왕께서 천승(千乘)의 군주를 버리려고 하심을 남몰래 슬퍼하오니, 장차 목숨을 끊는 글을 내리신다면 군신들 눈앞에서 동궁(東宮)에서 죽겠습니다.’

 

於是()気怨結而不揚, 涕満匡而橫流, 即起, 歴階而去.

어시왕기원결이불양 체만광이횡류 즉기력계이거.

 

그러자 회남왕은 노기와 원망이 교차하며 못내 울적했고, 눈물이 눈 주위에 가득해 만면에 흘러내렸다. 오피는 바로 일어나 한 걸음씩 계단을 밟으며 물러났다.

 


 

王有孽子不害, 最長, 王弗愛, 王後太子皆不以為子兄數. 不害有子建, 材高有気, 常怨望太子不省其父又怨時諸侯皆得分子弟為侯, 而淮南獨二子, 一為太子, 建父獨不得為侯.

왕유얼자불해 최장 왕불애 왕 왕루 태자개불이위자형수. 불해유자건 재고유기 상원망태자불겅기부 우원시제후개득분자제위후 이회남독이자 일위태자 전부독부득위후.

 

회남왕의 장남은 유불해(劉不害)로 서자였기 때문에 가족들의 사랑받지 못했다. 왕과 왕후 그리고 태자가 모두 그를 자식이나 형제로 간주하지 않았다. 유불해에게는 아들 유건(劉建)이 있어 재능이 뛰어나고 기개가 있었는데, 항상 태자가 자신의 아비를 보살피지 않는 것을 원망하곤 했다. 또 당시 제후들은 추은령(推恩令)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제들을 봉지를 나누어 주고 제후로 삼았는데, 회남왕은 오직 아들이 둘밖에 없으면서도 한 명만을 태자로 삼고, 유건의 아비만 홀로 제후로 봉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建陰結交, 欲告敗太子, 以其父代之. 太子知之, 數捕繋而榜笞建.

건음결교 욕고패태자 이기부대지. 태자지지 수포계이방태건.

 

그래서 유건은 암암리에 다른 사람과 결탁해 태자를 물리치려고 했다. 태자가 그 사실을 알고 여러 차례 잡아 묶고 유건에게 매질을 가했다.

 

建具知太子之謀欲殺漢中尉, 即使所善壽春荘芷以元朔六年上書於天子曰

건구지태자지모욕살한중위 즉사소선수춘장지이원삭육년상서어천자왈:

 

유건은 태자가 한나라의 중위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던 수춘현(壽春縣)의 장지(莊芷)를 시켜 원삭 6(서기전 123)에 황제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毒薬苦於口利於病, 忠言逆於耳利於行. 今淮南王孫建, 材能高, 淮南王王後荼荼子太子遷常疾害建. 建父不害無罪, 擅數捕繋, 欲殺之. 今建在, 可徴問, 具知淮南陰事.

독약고어구리어병 충언역독이리어행. 금회남왕손건 재능고 회남왕왕후도 도자태자천상질해건. 건부불해무죄 천수포계 욕살지. 금건재 가징문 구지회남음사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의를 행하는데 이롭습니다. 지금 회남왕의 손자인 유건은 재능이 뛰어나지만, 회남왕의 왕후 도()와 그녀의 아들인 태자 유천(劉遷)이 항상 유건을 시기해 해치려고 합니다. 유건의 아비 유불해는 죄가 없는데도, 제멋대로 여러 차례 잡아 가두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금 유건이 있으니 불러 심문하시면 회남왕의 은밀한 일을 다 아실 수 있습니다.’

 

 

 

 

 

書聞, 上以其事下廷尉, 廷尉下河南治. 是時故辟陽侯孫審卿善丞相公孫弘, 怨淮南厲王殺其大父, 乃深購淮南事於弘, 弘乃疑淮南有畔逆計謀, 深窮治其獄. 河南治建, 辭引淮南太子及黨與. 淮南王患之, 欲発, 問伍被曰:「漢廷治亂?」伍被曰:「天下治.王意不説, 謂伍被曰:「公何以言天下治也?」被曰

서문 상이기사불정위 정위하하남치. 시시고벽양후손심경선승상공손홍 원회남여왕살기대부 내심구회남사어홍 홍내의회남유반역계모 심궁치기옥. 하남치건 사인회남태자금당여. 회남왕환지 욕발 문오피왈 한정치란 오피왈 천하치 왕의불설 위오피왈 공하이언천하치야 피왈:

 

이 상주문을 읽은 황제는 그 일을 정위에게 맡겼고, 정위는 하남의 도위에게 조사를 맡겼다. 이때 옛 벽양후의 손자인 심경(審卿)은 승상 공손홍(公孫弘)과 친했는데, 회남여왕이 그의 조부를 죽인 것을 원망했다. 이에 공손홍에게 회남왕의 일을 매우 과장해 이야기하니, 공손홍은 이에 회남에서 반란의 음모가 있었다고 의심하고 그 송사(訟事)를 깊고 철저하게 조사했다. 하남의 도위가 유건을 심문 조사하니 회남 태자와 그 무리를 함께 끌어들였다. 회남왕이 이를 근심해 군사를 일으키려고 오피를 불러 물었다. ‘한나라의 조정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가?’ 이에 오피가 대답했다.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회남왕은 내심 짜증이 나서 오피에게 다시 물었다. ‘공은 무슨 연고로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말하는가?’ 오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被竊観朝廷之政, 君臣之義, 父子之親, 夫婦之別, 長幼之序, 皆得其理, 上之挙錯遵古之道, 風俗紀綱未有所欠也. 重裝富賈, 周流天下, 道無不通, 故交易之道行. 南越賓服, 羌僰入獻, 東甌入降, 広長楡, 開朔方, 匈奴折翅傷翼, 失援不振. 雖未及古太平之時, 然猶為治也.

피절관조정지정 군신지의 부자지친 부부지별 장유지서 개득기리 상지거착준고지도 풍속기강미유소흠야. 중장부가 주유천하 도무불통 고교역지도행. 남월빈보 강북입런 동구입항 광장유 개삭방 훙노절시상익 실원부진. 수미급고태평지지 연유위치야

 

제가 가만히 조정의 정치를 살펴보니, 군신간의 예의, 부자간의 친애, 부부간의 구별, 장유(長幼)의 순서가 모두 도리에 맞습니다. 황제의 거동 또한 옛날의 도리를 준수하고 있으며 풍속과 기강이 아직 결여된 것이 없습니다. 재물을 가득 실은 부유한 상인들이 천하를 두루 다니며, 길이 통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교역의 길도 트여 있습니다. 남월이 귀순해 복종하고, ()과 북()이 입조해 조공을 바치고, 동구(東甌)가 들어와 항복을 하고, 장유(長楡)를 넓히고, 삭방(朔方)을 열어놓으니 흉노가 날개가 끊기고 깃이 상해 원조를 잃고 그 힘을 떨치지 못합니다. 비록 옛날의 태평스러운 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나 역시 잘 다스려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王怒, 被謝死罪. 王又謂被曰:「山東即有兵, 漢必使大將軍將而制山東, 公以為大將軍何如人也?」被曰:「被所善者黃義, 従大將軍撃匈奴, , 告被曰

왕노 피사사죄. 왕우위피왈 산동즉유병 한필사대장군장이제산동 공이위대장군하여인야 피왈 피소선자황의 종대장군격흉노 환 고피왈:

 

왕이 노하자 오피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 왕은 또 오피에게 말했다. ‘만약 산동(山東)에 전쟁이 일어나면 한나라는 반드시 대장군 위청(衛靑)을 장수로 삼아 산동을 제압할 것인데, 공은 대장군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오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과 잘 아는 황의(黃義)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친 일이 있는데, 돌아와 저에게 말하기를

 

大將軍遇士大夫有禮, 於士卒有恩, 衆皆樂為之用. 騎上下山若蜚, 材幹絶人.

재장군우사대부유례 어사졸유은 중개악이지용. 기상하산약비 재간절인

 

대장군은 사대부를 예로 대우하고, 사졸들에게는 은혜가 베풀며, 사람들은 모두 그에 의해서 쓰이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말을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나는 것 같고, 재주는 남보다 뛰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被以為材能如此, 數將習兵, 未易當也. 及謁者曹梁使長安來, 言大將軍號令明, 當敵勇敢, 常為士卒先. 休舎, 穿井未通, 須士卒盡得水, 乃敢飲. 軍罷, 卒盡已度河, 乃度. 皇太後所賜金帛, 盡以賜軍吏. 雖古名將弗過也.

피이위재능여차 수장습병 미이당야. 급알지조량사장안래 언대장군호령명 당적용감 상위사졸선, 휴사 천정미총 수사졸진득수 급감음. 군파 졸진이도하 내도. 황태후소사금백 진이사군리. 수고명장불과야

 

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재능이 그와 같고, 또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는 것을 익혔다고 하니 쉽게 당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 알자(謁者)인 조량(曹梁)이 장안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말하기를 대장군은 호령이 분명하고 적을 대적할 때에는 용감해 항상 사졸 앞에 선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휴식을 취할 때에는 우물을 파고, 물이 충분히 나오지 않으면 반드시 사졸이 물을 다 마신 뒤 마십니다. 군대가 돌아올 때면 사졸들이 이미 황하를 다 건너야 그제야 건넜습니다. 황태후가 하사한 금전과 비단은 다 군대의 관리들에게 내리니 비록 옛날의 이름난 명장이라고 할지라도 그보다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王黙然.

왕묵연.

 

왕은 묵묵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淮南王見建已徴治, 恐國陰事且覚, 欲発, 被又以為難, 乃複問被曰:「公以為呉興兵是邪非也?」被曰:「以為非也. 呉王至富貴也, 挙事不當, 身死丹徒, 頭足異処, 子孫無遺類. 臣聞呉王悔之甚. 願王孰慮之, 無為呉王之所悔.

회남왕견건이징치 공국음사차각 욕발 피우이위란 내복문피왈 공이위오흥병시사비야 피왈 이위비야. 오왕지부귀야 거사부당 신사단도 두족이처 자손무유류. 신문오왕회기심. 원왕숙려지 무위오왕지소회

 

회남왕은 유건이 이미 불려가 심문을 받고 있어서 나라의 은밀한 일이 발각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오피는 또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회남왕은 다시 오피에게 물었다. ‘공은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오피가 대답했다. ‘옳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오왕은 지극히 부유하고 존귀했으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몸은 단도(丹徒)에서 죽고, 머리와 발은 둘로 나뉘고, 자손은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오나라 왕이 몹시 후회했다고 들었습니다. 왕께서는 그것을 자세히 고려해 오나라 왕처럼 후회하는 바가 없으시기를 원합니다.’

 

王曰:「男子之所死者一言耳. 且呉何知反, 漢將一日過成皐者四十餘人. 今我令樓緩先要成皐之口, 周被下潁川兵塞轘轅伊闕之道, 陳定発南陽兵守武関. 河南太守獨有雒陽耳, 何足憂. 然此北尚有臨晉関河東上黨與河內趙國. 人言曰絶成皐之口, 天下不通. 拠三川之険, 招山東之兵, 挙事如此, 公以為何如?」

왕왈 남자지소사자일언이. 차오하지반 한 장일일과성고자사십여인. 금아령우원선생요성고지구 주치하영천병새환원 이궐지도 진정발남양병수무관. 하남태수독유락양이 하족우. 연차북상유임진관 하동 상당여하내 조국. 인언왈 절성고지구 천하불통”. 거삼천지험 초산동지병 거사여차 공이위하여

 

회남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장부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면 족하오. 하물며 오나라 왕이 어찌 반역의 방략을 알았겠는가? 한나라의 장수 가운데 성고(成皐)를 지나는 자가 하루에 40여 명이 되었소. 이제 내가 누원(樓緩)으로 하여금 먼저 성고의 입구를 차단하게 하고, 주피(周被)로 하여금 영천(穎川)을 공격하게 해, 이로써 병사를 시켜 환원(轘轅)과 이궐(伊闕)의 길을 막게 하고 진정(陳定)으로 하여금 남양(南陽)의 군사를 일으켜 무관(武關)을 지키게 하겠소. 그러면 하남 태수가 홀로 낙양(雒陽)을 지킬 따름이니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남 북쪽에는 오히려 임진관(臨晉關), 하동(河東), 상당(上黨), 하내(河內) 그리고 조나라가 있소.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고의 입구를 끊으면 천하가 통하지 않는다.”라고 했소. 이곳 삼천(三川)의 험난함에 의지해 산동의 군사를 부르는 것이니 거사가 이와 같다면 그대는 어떻다고 여기는가?”

 

被曰:「臣見其禍, 未見其福也.王曰:「左呉趙賢朱驕如皆以為有福, 什事九成, 公獨以為有禍無福, 何也?」被曰:「大王之群臣近幸素能使衆者, 皆前繋詔獄, 餘無可用者.

피왈 신견기화 미견기복야 왕왈 좌오 조현 주교여개이위유복 십사구성 공독이위유화무복 하야 피왈 대왕지군신근행소능사중자 개전계조옥 여무가용자

 

오피는 대답했다. ‘신에게는 그 화()는 보이지만 그 복()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회남왕이 물었다. ‘좌오(左吳), 조현(趙賢), 주교여(朱驕如)는 모두 복이 있어 열 가운데 아홉은 성공한다고 여기는데, 공만이 홀로 화만 있고 복이 없다고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피가 이렇게 대답했다. ‘대왕의 신하 가운데 가까이 총애하던 자들 가운데 평소 무리를 잘 부리던 자는 모두 이미 조옥(詔獄:양반용 감옥)에 갇혀 있으며, 그 나머지는 가히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王曰:「陳勝呉広無立錐之地, 千人之聚, 起於大沢, 奮臂大呼而天下響應, 西至於戯而兵百二十萬. 今吾國雖小, 然而勝兵者可得十餘萬, 非直適戍之衆, 鐖鑿棘矜也, 公何以言有禍無福?」被曰

왕왈 진승 오광무립추지지 천인지취 기어대택 분비대호이천하향응 서지어희이병백이십만 금오국구고 연이승병자가득십여만 비직적수지중 기착극긍야 공하이언유화무복

 

회남왕이 다시 물었다. ‘진승, 오광은 송곳을 꽂을 땅이 없이도 천 명의 무리를 모을 수 있었고, 대택(大澤)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부쳐 크게 호령하자 천하가 호응했으며, 서쪽으로 희수(戱水)에 이르자 군사가 120만 명이나 되었소.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군사로 삼을 수 있는 자가 10만 명에 이르며, 이들은 죄를 지어 변방에 간 무리나 또 낫, , 창 자루를 쥔 농민의 상황은 아니오. 공은 무엇으로 화만 있고 복은 없다고 말하는가?’ 오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往者秦為無道, 殘賊天下. 興萬乗之駕, 作阿房之宮, 収太半之賦, 発閭左之戍, 父不寧子, 兄不便弟, 政苛刑峻, 天下熬然若焦, 民皆引領而望, 傾耳而聴, 悲號仰天, 叩心而怨上, 故陳勝大呼, 天下響應.

왕자진위무도 잔적천하. 흥만승지가 작아방지궁 수태반지적 발여좌지수 부자영자 형불편제 정가형준 천하오연약초 민개인령이망 경이이청 비호아천 고심이원상 고진승대호 천하향응

 

예전에 진()나라는 무도해 천하를 잔인하게 해쳤습니다. 만승의 수레를 일으키고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백성들의 수입의 대부분을 부세(賦稅)로 거두고, 여좌(閭左)의 농민을 징발해 수자리를 서게 하고 아비는 자식을 편안하게 하지 못했으며, 형은 동생을 안심하게 하지 못했고, 정치는 가혹하고 형벌은 준엄해 천하는 마치 불에 탄 것 같았으며, 백성들은 다 목을 빼들고 바라보며 갈망하고 있었고,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으며, 비통해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가슴을 두드리며 황제를 원망했기 때문에 진승이 크게 호령하자 천하가 호응한 것입니다.

 

當今陛下臨制天下, 一斉海內, 汎愛蒸庶, 布徳施恵. 口雖未言, 聲疾雷霆, 令雖未出, 化馳如神, 心有所懐, 威動萬里, 下之應上, 猶影響也. 而大將軍材能不特章邯楊熊也. 大王以陳勝呉広諭之, 被以為過矣.

당금폐하임제천하 일제해내 범애증서 포덕시혜. 구수미언 성질뇌정 영수미출 화치여신 심유소회 위동만리 하지응상 유영향야. 이대장군재능불특장한 양웅. 대왕이진승 오광유지 피이위과의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에 군림해 다스리시고 해내를 하나로 가지런히 하시고 널리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덕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비록 입에서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그 말은 격렬한 천둥처럼 빠르며 비록 조령(詔令)이 나오지 않았지만 변화해 달리는 것이 신()과도 같아 마음속에 품는 바가 있으면 그 위엄이 만리를 움직이며 아래로부터 위에 호응하는 것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빠릅니다. 또한 대장군 위청의 재능은 장한(章邯), 양웅(楊熊)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진승, 오광으로 비유하시지만, 저는 그것이 잘못 비유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王曰:「苟如公言, 不可徼幸邪?」被曰:「被有愚計.王曰:「柰何?」被曰

왕왈 구여공언 불가요행야 피왈 피유우계 왕왈 내하 피왈:

 

회남왕이 물었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요행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인가?’ 이에 오피가 대답했다. ‘저에게 작은 계책이 있습니다.’ 왕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오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當今諸侯無異心, 百姓無怨気. 朔方之郡田地広, 水草美, 民徙者不足以実其地. 臣之愚計, 可偽為丞相禦史請書, 徙郡國豪桀任俠及有耐罪以上, 赦令除其罪, 産五十萬以上者, 皆徙其家屬朔方之郡, 益発甲卒, 急其會日.

당금제후무이심 백성우원기. 삭방지군전지광 수초미 민사자부독이실기지. 신지우계 가위위승상어사청서 사준국호걸임협급유내죄이상 사령제기죄 산오십만이상자 개사기가속삭방지군 익발갑졸 급기회일.

 

지금 제후들에게는 딴마음이 없고 백성들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삭방군의 밭과 땅은 넓고, 강물과 초목은 아름다우나, 이주하는 백성이 적어 그 땅을 채우기에는 부족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이란 거짓으로 승상과 어사대부의 주청하는 문서를 만들어 군(), ()의 호걸과 임협(任俠) 그리고 내죄(耐罪) 이상의 죄인을 옮기고 명을 내려 그 죄를 사면시키며, 재산이 50만 이상인 자를 모두 그 가속을 삭방군으로 옮기게 하고, 더 군사를 징발하고 그 모이는 날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又偽為左右都司空上林中都官詔獄(), []諸侯太子幸臣.

우위위좌우도사공상림중도관조옥체서 체제후태자행신.

 

또 거짓으로 좌, , 도 사공(左右都司空), 상림(上林), 중도관(中都官) 등의 조옥(詔獄) 문서를 만들어 제후들의 태자와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들을 체포하는 것입니다.

 

如此則民怨, 諸侯懼, 即使辯武隨而説之, 儻可徼幸什得一乎?」

여차즉민원 제후구 즉사변무수이설지 당가요행십득일호

 

그와 같이 하면 백성들은 원망하게 되고, 제후들은 두려워할 것이니 즉시 변사를 시켜 때를 맞추어 도리를 이야기하면 혹은 요행으로 열 가운데 하나는 얻을 수 있겠습니다.”





 

<형산왕>

 

衡山王賜, 王後乗舒生子三人, 長男爽為太子, 次男孝, 次女無采. 又姫徐來生子男女四人, 美人厥姫生子二人. 衡山王淮南王兄弟相責望禮節, 閒不相能.

형산왕사 왕후승서생자삼인 장남삼위태자 차남효 자녀무채. 우희서래생자남여사인 미인궐희생자이인. 형산왕 회남왕형제상책망예절 간불상능.

 

형산왕 유사(劉賜)는 왕후 승서(乘舒)에게서 자식 셋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태자로 삼은 유상(劉爽)이고, 둘째 아들은 유효(劉孝), 셋째는 딸 유무채(劉無采)였다. 또 첩인 서래(徐來)에게서는 자식으로 아들딸 넷을 낳았고, 미인(美人) 궐희(闕姬)에게서는 자식 둘을 낳았다. 형산왕과 회남왕 형제사이였으나 서로 책망하며 예절을 잃어 서로 화목하지 못했다.

 

衡山王聞淮南王作為畔逆反具, 亦心結賓客以應之, 恐為所並.

형산왕문회남왕작위반역반구 역심결빈객이응지 공위소병.

 

형산왕은 회남왕이 모반에 사용할 반역의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마음속으로 빈객들과 결탁해 그와 호응하려고 했는데, 이는 그에게 병합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元光六年, 衡山王入朝, 其謁者衛慶有方術, 欲上書事天子, 王怒, 故劾慶死罪, 彊榜服之. 衡山內史以為非是, 卻其獄. 王使人上書告內史,

원광육년 형산왕입조 기알자위경유방술 욕상서사천자 왕노 고핵경사죄 강방복지. 형산내사이위비시 각기옥. 왕사인상서고내사.

 

원광(元光) 6(서기전 129)에 형산왕이 입조할 때에 수행했던 그의 알자인 위경(衛慶)이 방술을 잘 알고 있어 상서 올려 황제를 섬기려고 청했다. 형산왕은 화가 나서 고의로 위경에게 죽을죄가 있음을 탄핵하고 억지로 매질해 그의 죄를 인정하게 했다. 형산의 내사(內史)는 그 일이 옳지 않다고 여기고 위경의 송사를 접수하지 않았다. 형산왕은 사람을 시켜 내사를 고발하는 상서를 올렸다.

 

內史治, 言王不直. 王又數侵奪人田, 壊人塚以為田. 有司請逮治衡山王.

내사치 언왕불직. 왕우수침탈인전 괴인총이위전. 유사청체형산왕.

 

내사는 조사를 받으면서 형산왕의 처사가 정직하지 못했다고 고했다. 형산왕은 또 여러 차례 사람들의 밭을 침범해 약탈하고 남의 무덤을 파헤쳐 전답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담당 관리가 형산왕을 체포하여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황제에게 청했다.

 

天子不許, 為置吏二百石以上.

천자불허 위치리이백석이상.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다만 관리 2백석 이상의 관리는 조정에서 직접 임명하도록 하였다.

 

衡山王以此恚, 與奚慈張広昌謀, 求能為兵法候星気者, 日夜従容王密謀反事.

형산왕이차게 여해자 장광창모 구능위병법후성기자 일야종용왕밀모반사.

 

이 때문에 형산왕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해자(奚慈)와 장광창(張廣昌)과 함께 모의해 능히 병법을 이해하고 천문 기상을 관측하는 자를 구했다. 그들은 형산왕에게 모반할 것을 종용하고 밤낮으로 은밀히 모의했다.

 

王後乗舒死, 立徐來為王後. 厥姫倶幸. 両人相妒, 厥姫乃悪王後徐來於太子曰:「徐來使婢蠱道殺太子母.

왕후승서사 립서래위왕후. 궐희구행. 양인상투 궐희냐오왕후서래어태자왈 서래사비고도살태자모

 

왕후 승서가 죽자 서래를 왕후로 삼았다. 그 때 궐희도 함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두 사람이 서로 질투가 심했다. 궐희가 마침내 태자에게 왕후 서래를 이렇게 욕했다. ‘서래가 계집종을 시켜 무당이 저주하는 술책으로 태자의 모친을 죽였습니다.’

 

太子心怨徐來. 徐來兄至衡山, 太子與飲, 以刃刺傷王後兄. 王後怨怒, 數毀悪太子於王.

태자심원서래. 서래형지형산 태자여음 이인자상왕후형. 왕후원노 수훼오태자어왕.

 

그래서 태자는 마음속으로 서래를 원망했다. 태자가 형산을 방문한 서래의 오빠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칼로 그를 찔러 다치게 했다. 왕후가 노하고 태자를 원망해 여러 차례 왕에게 태자를 헐뜯었다.

 

太子女弟無采, 嫁棄帰, 與奴姦, 又與客姦. 太子數譲無采, 無采怒, 不與太子通. 王後聞之, 即善遇無采. 無采及中兄孝少失母, 附王後, 王後以計愛之, 與共毀太子, 王以故數撃笞太子.

태자여제무채 가기귀 여노간 우여객간. 태자수양무채 무채노 불여태자통. 왕후문지 즉선우무채. 무채급중형요소실모 부왕후 왕후이계애지 여공훼태자 왕이고수격태태자.

 

태자의 여동생인 유무채는 시집을 갔으나 버림받고 친정으로 돌아와서는 종과 간통했고, 또 빈객과도 간통했다. 태자는 여러 차례 유무채를 책망했고 유무채는 화가 나서 태자와 왕래하지 않았다. 왕후가 곧 그 소식을 듣고 곧 유무채를 잘 대해주었다. 유무채와 둘째 오빠 유효는 어려서 어미를 잃었기 때문에 왕후를 따랐다. 왕후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아끼는 척하면서 함께 태자를 비방했다. 이 때문에 형산왕은 여러 차례 태자를 매질했다.

 

元朔四年中, 人有賊傷王後仮母者, 王疑太子使人傷之, 笞太子. 後王病, 太子時稱病不侍. 王後無采悪太子

원삭사년중 인유적상왕후가모자 왕의태자사인상지 태태자. 후왕병 태자시칭병불시. 효 왕후 무채오태자:

 

원삭 4(서기전 125)에 어떤 사람이 왕후의 계모를 찔러 다치게 하자, 형산왕은 태자가 사람을 시켜 그를 다치게 한 것으로 의심하고 태자를 매질했다. 뒤에 형산왕이 병이 나자 태자도 병을 핑계로 시중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유효와 왕후, 유무채 모두가 태자를 이렇게 헐뜯었다.

 

太子実不病, 自言病, 有喜色.

태자실불병 자언병 유희색

 

태자는 실제로 병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병이 있다고 말했지만 희색이 만면합니다.’

 

王大怒, 欲廃太子, 立其弟孝. 王後知王決廃太子, 又欲並廃孝. 王後有侍者, 善舞, 王幸之, 王後欲令侍者與孝亂以汚之, 欲並廃兄弟而立其子広代太子.

왕대노 욕폐태자 립기제효. 왕후지왕결폐태자 우욕병폐효. 왕후유시자 선무 왕행지 왕후욕령시자여효안이오지 욕병폐형제이립기자광대태자.

 

형산왕은 크게 노하여 태자를 폐하고 그의 동생 유효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왕후는 왕이 태자를 폐하기로 결심한 것을 알고, 유효도 함께 폐하려고 했다. 왕후에게는 춤 잘 추는 시녀가 있었는데, 형산왕이 그녀를 총애했다. 왕후는 그 시녀를 시켜 유효와 함께 음란하게 행위를 하여 그의 명예를 더럽혀 두 형제를 함께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광()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太子爽知之, 念後數悪己無已時, 欲與亂以止其口. 王後飲, 太子前為壽, 因拠王後股, 求與王後臥. 王後怒, 以告王. 王乃召, 欲縛而笞之. 太子知王常欲廃己立其弟孝, 乃謂王曰

태자상지지 념후수오기무이시 욕여란이지기구. 왕후음 태자건위수 인거왕후고 구여왕후와. 왕후노 이고왕. 왕내소 욕박이태지. 탸자지왕상욕폐기립기제효 내위왕왈:

 

태자 유상은 이를 알고 왕후가 여러 차례 자신을 헐뜯어 멈추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녀와 함께 음란한 일을 벌려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왕후가 참석한 주연에서 왕후의 축수를 위한다고 다가가 왕후의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면서 왕후와 함께 동침하기를 청했다. 왕후는 노하여 이를 왕에게 고했다. 이에 왕은 그를 불러 결박하고 매질하려고 했다. 태자는 왕이 자신을 폐하고 동생인 유효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孝與王禦者姦, 無采與奴姦, 王彊食, 請上書.即倍王去.

효여왕어자간 무채여노간 왕강식 청상서 즉배왕거.

 

유효는 왕의 시녀와 간통을 하고, 유무채는 종과 간통을 했으니, 왕께서는 부디 몸조리에 힘써 주십시오. 저는 황제에게 글을 올리려고 하오니 허락하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바로 왕을 등지고 밖으로 나갔다.

 

王使人止之, 莫能禁, 乃自駕追捕太子. 太子妄悪言, 王械繋太子宮中.

왕사인지지 막능금 내자가추포태자. 태자망오언 왕계계태자궁중.

 

왕이 사람을 시켜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어 마침내 직접 수레를 몰고 뒤쫓아가 태자를 붙잡았다. 태자가 제멋대로 욕을 하자, 왕은 족쇄와 수갑을 사용해서 태자를 묶고 궁중에 가두었다.

 

孝日益親幸. 王奇孝材能, 乃佩之王印, 號曰將軍, 令居外宅, 多給金銭, 招致賓客. 賓客來者, 微知淮南衡山有逆計, 日夜従容勧之. 王乃使孝客江都人救赫陳喜作輣車鏃矢, 刻天子璽, 將相軍吏印.

효일익친행. 왕기효재능 내패지왕인 호왈장군 영거외택 다급금전 초치빈객. 빈객래자 미지회남 형산유역계 일야종용권지. 왕내사자객강도인구혁 진희작팽거촉시 각천자새 장상군리인.

 

한편 유효는 날로 더욱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은 유효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왕의 인()을 차게 하고 장군이라고 호칭했으며, 궁궐 밖의 저택에 살게 하고 많은 금전을 주어 빈객을 불러 모으게 했다. 빈객으로 오는 자들은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의 계획이 짐작하고 있어 밤낮으로 반역에 참여하길 종용하고 권했다. 형산왕은 결국 유효의 빈객인 강도(江都) 사람 구혁(救赫)과 진희(陳喜)를 시켜 전차와 화살촉 그리고 화살을 만들게 하고, 황제의 옥새와 장상(將相)과 군리(軍吏)의 인장을 새기게 했다.

 

王日夜求壯士如周丘等, 數稱引呉楚反時計畫, 以約束. 衡山王非敢效淮南王求即天子位, 畏淮南起並其國, 以為淮南已西, 発兵定江淮之閒而有之, 望如是.

왕일야구장사여주구등 수칭인오초반시계획 이약속. 형산왕비감효회남왕구즉천자위 외회남기병기국 이위회남이서 발병정강회지간이유지 망여시.

 

왕은 평소에 주구(周丘) 등과 같은 장사를 구했고, 때때로 오, 초가 반란을 일으킬 때의 계획을 칭찬하거나 인용함으로써 후일을 도모했다. 형산왕은 감히 회남왕 같이 황제의 지위를 구한 것은 아니며, 다만 회남이 일어나면 자신의 나라가 병합될 것을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회남왕이 서쪽으로 진군하면 자신도 군사를 일으켜 강수(江水)와 회수(淮水)의 사이를 평정하고 그 땅을 점령할 계획이었으니, 그가 원했던 것은 이 정도였다.

 

元朔五年秋, 衡山王當朝, (六年)過淮南, 淮南王乃昆弟語, 除前卻, 約束反具. 衡山王即上書謝病, 上賜書不朝.

원삭오년추 형산왕당조 육년과회남 회남왕내곤제어 제전각 약속반구. 형산왕즉상서사병 상사서불조.

 

원삭 5(서기전 124) 가을에 형산왕이 입조할 때 회남을 지나게 되었는데, 회남왕이 마중나와 형제간의 우애를 말하면서 예전의 악감정을 버리고 반역의 준비를 같이 하자고 약조했다. 이에 형산왕은 바로 황제에게 글을 올려 병을 핑계로 입조할 수 없다고 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가했다.

 

 

元朔六年中, 衡山王使人上書請廃太子爽, 立孝為太子. 爽聞, 即使所善白嬴之長安上書, 言孝作輣車鏃矢, 與王禦者姦, 欲以敗孝. 白嬴至長安, 未及上書, 吏捕嬴, 以淮南事繋.

원삭육년중 형산왕사인상서청폐태자상 입효위태자. 상문 즉사소선백영지장안상서 언효작팽거촉시 여왕어자간 욕이패효. 백영지장안 미급상서 사포영 이회남사계.

 

원삭 6(서기전 123)에 형산왕이 사람을 시켜 태자 유상(劉爽)을 폐하고 유효(劉孝)를 태자를 삼도록 청하도록 했다. 태자 유상이 이 소식을 듣고 곧 자신과 친한 백영(白嬴)을 시켜 장안에 가서 글을 올려 유효가 전차와 화살촉 그리고 화살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 부왕의 시녀와 간통했다고 고발하여 유효를 망치게 하려고 했다. 백영이 장안에 도착해 미처 상서를 올리기도 전에 관리가 백영을 체포하고 회남의 일을 가지고 그를 연좌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王聞爽使白嬴上書, 恐言國陰事, 即上書反告太子爽所為不道棄市罪事. 事下沛郡治.

왕문삼사백영상서 공언국음사 즉상서반고태자상소위부도기시죄사. 사하패군치.

 

형산왕은 유상이 백영을 시켜 상서를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꾸민 음모가 누설될 것을 두려워 자신도 곧 상서를 올려 도리어 태자 유상이 부도덕질한 일을 저질러서 그 죄가 기시에 해당한다고 고발하였다. 황제는 이 사건을 패군(沛郡)의 도위에 조사하게 했다.

 

(朔七)[狩元]年冬, 有司公卿下沛郡求捕所與淮南謀反者未得, 得陳喜於衡山王子孝家. 吏劾孝首匿喜. 孝以為陳喜雅數與王計謀反, 恐其発之, 聞律先自告除其罪, 又疑太子使白嬴上書発其事, 即先自告, 告所與謀反者救赫陳喜等.

원삭칠(원수_년동 유사공경하패군구포소여회남모반자미득 득진희어형산왕자효가. 사핵효수닉희. 효이위진희아수여왕계모반 공기발지 문율선자고제기죄 우의태자사백영상서발기사 즉선자고 고소여모반자구혁 진희등.

 

원수(元狩) 원년(서기전 122) 겨울에 해당 관리와 공경대신들이 패군에 명을 내려 회남왕과 함께 모반에 참여한 자를 잡아 가두게 했으나, 체포하지 못했던 진희를 형산왕의 아들 유효의 집에서 체포했다. 관리는 유효가 진희를 숨긴 우두머리임을 탄핵했다. 유효는 진희가 평소 여러 차례 형산왕과 함께 모반을 계획했던 것을 알고 그가 그 일을 폭로할 것 두려워했다. 또 법에 먼저 스스로 고백하면 그 죄를 용서받는다고 했고, 또 태자가 백영을 시켜 상서를 그 일이 발각될 것으로 의심하여 자진 출두하여 모반에 참여한 구혁, 진희 등을 고발했다.

 

廷尉治験, 公卿請逮捕衡山王治之. 天子曰:「勿捕.遣中尉安大行息即問王, 王具以情実対. 吏皆囲王宮而守之. 中尉大行還, 以聞, 公卿請遣宗正大行與沛郡雑治王.

정위치험 공경청페포형산왕치지. 천자왈 물포 견중위안 대행식즉문왕 왕구이정실대. 리개위왕궁이수지. 중위대행환 이문 공경청견종정 대행여패군잡치왕.

 

정위는 이를 증거로 삼고, 공경대신은 형산왕을 당장 체포해 가두고 그를 모반죄로 다스릴 것을 황제에게 청했다. 황제가 바로 그를 체포하지 말라고 하고 중위 사마안(司馬安)과 대행령(大行令) 이식(李息)을 보내 곧 형산왕을 심문하도록 했다. 형산왕은 사건의 정황을 사실대로 전부 대답했다. 이에 관리는 왕궁을 포위해 엄중하게 지켰다. 공경대신들은 중위와 대행령을 파견해 패군의 관리들과 함께 형산왕의 죄을 다스릴 것을 주청했다.

 

王聞, 即自剄殺. 孝先自告反, 除其罪坐與王禦婢姦, 棄市. 王後徐來亦坐蠱殺前王後乗舒, 及太子爽坐王告不孝, 皆棄市. 諸與衡山王謀反者皆族. 國除為衡山郡.

왕문 즉가경살. 효선자고반 제기죄 좌여왕어비간 기시. 왕후서래역좌고살전왕후승서 급태자상좌왕고불효 개기시. 제여형산왕모반자개족. 국제위형산군.

 

형산왕이 그 소식을 듣고 곧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유효는 먼저 스스로 모반을 고백했기에 그 죄를 용서해 주었으나, 부왕의 시녀와 함께 간통한 일에 연루되어 역시 기시의 처벌을 받았다. 왕후 서래 역시 전 왕후였던 승서를 저주하는 술책으로 죽였다는 것에 연루되었고, 태자 유상은 부왕을 고발한 불효에 연루되어 모두 기시의 처벌을 받았다. 이로써 형산왕과 모반 사건에 연루된 자는 모두 멸족 당했다. 형산국은 없어지고 형산군(衡山郡)이 되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詩之所謂戎狄是膺, 荊舒是懲, 信哉是言也. 淮南衡山親為骨肉, 疆土千里, 列為諸侯, 不務遵蕃臣職以承輔天子, 而専挾邪僻之計, 謀為畔逆, 仍父子再亡國, 各不終其身, 為天下笑.

태사공왈 시지소위 융적시응 형서시징 신재시언야. 회남 형산친위골육 강토천리 열위제후 불무준번신식이승보천자 이전협사피지계 보위반역 잉부자재망국 각부종기신 위천하소.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시경(詩經)에서 융적(戎狄)은 정벌하고 형서(荊舒)는 응징한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옳은 말이다.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燕山王)은 골육지친으로 그 강토가 사방 천리이며 제후의 반열에 당당하게 올랐다. 그러나 번신(藩臣)의 직무를 준수해 황제를 보좌하는 데 힘쓰지 않고, 오히려 사악하고 부정한 계획을 품어 반역의 일을 도모해 마침내 부자(父子)가 두 차례나 나라를 망하게 해 각기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此非獨王過也, 亦其俗薄, 臣下漸靡使然也. 夫荊楚僄勇軽悍, 好作亂, 乃自古記之矣.

차비독왕과야 역기속박 신하참미사연야. 부형초표용경한 호작란 내자고기지의.

 

이것은 사실 왕 혼자만의 잘못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형서(荊舒)의 풍속이 두텁지 않아 신하들에게 점차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다. 무릇 형초(荊楚)의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럽고 가벼우며 사나워 난()을 만들기 좋아했다. 이는 예로부터 기록으로 전해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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