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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張丞相列傳

<장창>

 

張丞相蒼者, 陽武人也. 好書律暦. 秦時為禦史, 主柱下方書. 有罪, 亡帰.

장승상창자 양무인야. 호서율력. 진시위어사 주주하방서. 유죄 망귀.

 

승상 장창(張蒼)은 양무(陽武) 사람이다. 그는 도서(圖書법률(法律역법(曆法)을 좋아했다. () 때에 어사(御史)가 되어 궁전에서 문서를 수록하는 일을 맡아보다가, 죄를 짓고 고향으로 달아났다.

 

及沛公略地過陽武, 蒼以客従攻南陽. 蒼坐法當斬, 解衣伏質, 身長大, 肥白如瓠, 時王陵見而怪其美士, 乃言沛公, 赦勿斬. 遂従西入武関, 至鹹陽.

급패공약지과양무 창이객종공남양. 창좌법당참 해의복질 신장대 비백여호 시왕릉견이괴기미사 내언패공 사물참. 수종서입무관 지함양.

 

패공(沛公)이 여러 지역을 공략하면서 양무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창은 빈객(賓客)으로서 따라가 남양군(南陽郡)을 공격했다. 창이 죄를 범해 참형을 받게 되었다. 옷을 벗기고 사형대에 엎어놓았는데, 그 몸집이 크고 살이 찌고 피부가 하얀 박속같았다. 이때 왕릉(王陵)이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곧 패공에게 용서하고 참수하지 말라고 주청했다. 이리하여 패공을 따라 서쪽으로 무관(武關)을 지나 함양(咸陽)에 이르렀다.

 

沛公立為漢王, 入漢中, 還定三秦. 陳餘撃走常山王張耳, 耳帰漢, 漢乃以張蒼為常山守. 従淮陰侯撃趙, 蒼得陳餘. 趙地已平, 漢王以蒼為代相, 備邊冦.

패공입위한왕. 입한중 환정삼진. 진여격주상산왕장이 이취한 한내이장창위상산수. 종회음후격조 창득진여. 조지이평 한왕이창위대상 비변구.

 

패공이 한왕(漢王)에 오르자 한중(漢中)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삼진(三秦: 수도지역)을 평정했다. 진여(陳餘)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치자 장이는 달아나 한으로 귀순해왔다. 한왕은 곧 장창을 상산(常山) 태수(太守)로 삼았다. 그는 회음후(淮陰侯)가 조()를 치는 데 따라가 진여를 사로잡았다. 조의 땅이 이미 평정되니 한왕은 장창을 대()의 정승으로 삼아 변방의 오랑캐에 대비하게 했다.

 

已而徙為趙相, 相趙王耳. 耳卒, 相趙王敖. 複徙相代王. 燕王臧荼反, 高祖往撃之. 蒼以代相従攻臧荼有功, 以六年中封為北平侯, 食邑千二百戸.

이이사위조상 상조왕이. 이졸 상조왕오. 복사상대왕. 연왕장도반 고조왕격지. 창이대상종공장도유공 이육년중봉위북평후 식읍천이백호.

 

얼마 뒤에 그는 자리를 옮겨 조의 상국이 되어 조왕(趙王) 장이를 보좌했다. 장이가 죽은 뒤에는 조왕 오()를 보좌했으며, 다시 벼슬을 옮겨서 대왕(代王)을 보좌했다.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배반하자 고조(高祖)가 몸소 가서 그를 공격했는데, 장창은 대의 상국으로서 한왕을 따라가 장도를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한 고조 68월에 북평후(北平侯)에 봉해졌고 12백 호의 식읍(食邑)을 하사받았다.

 

遷為計相, 一月, 更以列侯為主計四歳. 是時蕭何為相國, 而張蒼乃自秦時為柱下史, 明習天下図書計籍. 蒼又善用算律暦, 故令蒼以列侯居相府, 領主郡國上計者.

천위계상 일월 경이열후위주계사세. 시시소하위상국 이장창내자진시위주하사 명습천하도서계적. 창우선용산율력 고영창이열후거상부 영주군국상계자.

 

계상(計相: 재무상)이 된 지 한 달 만에 다시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4년 동안 주계(主計)로 있었다. 이때 소하(蕭何)가 상국(相國)이었는데, 그는 장창이 진 때부터 주하사(柱下史)가 되어 천하의 도서·호적·재정에 밝고, 또 산학·음률·역법을 잘 사용했기에, 장창에게 열후의 신분으로 상부(相府)에 있으면서 군국(郡國)의 상계자(上計者)로 관리하고 감독하게 했다.

 

黥布反亡, 漢立皇子長為淮南王, 而張蒼相之. 十四年, 遷為禦史大夫.

경포반망 한립황자장위회남왕 이장창상지. 십사년 천위어사대부.

 

경포(黥布)가 모반했다가 망했다. 한에서는 황자(皇子) ()을 회남왕(淮南王)으로 세우고 장창을 그의 상국으로 삼았다. 14년 후에 벼슬을 옮겨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주창>

 

周昌者, 沛人也. 其従兄曰周苛, 秦時皆為泗水卒史. 及高祖起沛, 撃破泗水守監, 於是周昌周苛自卒史従沛公, 沛公以周昌為職志, 周苛為客.

주창자 패인야. 기종형왈주가 진시개위사수졸사. 급고조기패 격퍼서수수삼 어시주창 주가자종사종패공 패공이주자창위직지 주가위객.

주창(周昌)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의 종형(從兄)이 주가(周苛)였는데, 진 때 둘 다 사수(泗水)의 졸사(卒史)였다. 유방이 패현에서 일어나 사수의 군수(郡守)와 군감(郡監)을 공격해 깨트릴 때, 주창과 주가는 졸사로서 패공을 따라갔다. 패공은 주창을 직지(職志, 휘장이나 깃발을 관리하는 사람)로 삼고 주가를 빈객으로 삼았다.

 

従入関, 破秦. 沛公立為漢王, 以周苛為禦史大夫, 周昌為中尉.

종입관 파진. 패공립위한왕 이주가위어사대부 주창위중위.

 

패공을 따라 관중(關中)에 들어가 진을 깨트렸다. 패공은 한왕이 된 뒤에 주가를 어사대부로 삼고 주창을 중위(中尉)로 삼았다.

 

漢王四年, 楚囲漢王滎陽急, 漢王遁出去, 而使周苛守滎陽城. 楚破滎陽城, 欲令周苛將. 苛罵曰:「若趣降漢王! 不然, 今為虜矣!項羽怒, 亨周苛. 於是乃拝周昌為禦史大夫. 常従撃破項籍. 以六年中與蕭曹等倶封封周昌為汾陰侯周苛子周成以父死事, 封為高景侯.

한왕사년 초위한왕형양급 한왕둔출거 이사주가수형양성,. 초파형양성 욕영주가장. 가매왈 약취항한왕! 불연 금위노의!’ 항우노 형주가. 어시내배주창위어사대부. 상족격파항적. 이육년중여소 조등구봉: 봉주창위분음후; 주가자주성이부사사 봉위고경후.

 

한왕 4년에 초()가 한왕을 형양(滎陽)에서 포위해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한왕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면서 주가에게 형양성을 지키게 했다. 초가 형양성을 점령하고 주가를 초의 장수로 삼으려고 하자 주가가 꾸짖어 말했다. “너는 빨리 한왕에게 항복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제 곧 포로가 될 것이다!” 항우(項羽)는 성이 나서 주가를 삶아 죽였다. 이리하여 한왕은 주창을 어사대부에 제수했고, 항상 한왕을 보좌해 항우를 격파했다. 한왕 68월에 소하(蕭何조참(曹參) 등과 함께 후에 봉해졌는데, 주창은 분음후(汾陰侯)에 봉해지고 주가의 아들 주성(周成)이 아버지가 죽은 일로 고경후(高景侯)에 봉해졌다.

 

昌為人彊力, 敢直言, 自蕭曹等皆卑下之. 昌嘗燕時入奏事, 高帝方擁戚姫,

창위인강력 감직언 자소 조등개비하지. 창상연시입진사 소제방옹척희.

 

주창은 사람됨이 강직해 과감하게 직언했다. 소하와 조참 등도 그처럼 강력하게 직언하지는 못했다. 주창 일찍이 고제(高帝)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들어가 일을 아뢰고자 했는데, 고제가 마침 척희(戚姬)를 포옹하고 있었다.

 

昌還走, 高帝逐得, 騎周昌項, 問曰:「我何如主也?」昌仰曰:「陛下即桀紂之主也.

창환주 고제축득 기주창항 문왈 아하여주야?’ 창앙왈 폐하즉걸주지주야

 

창이 돌아서 달아나니 고제가 뒤쫓아 와서 붙잡고 주창의 뒷덜리에 걸터앉아 물었다. ‘나는 어떤 군주냐?’ 창이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폐하는 바로 걸()과 주() 같은 군주입니다.’

 

於是上笑之, 然尤憚周昌. 及帝欲廃太子, 而立戚姫子如意為太子, 大臣固爭之, 莫能得上以留侯策即止. 而周昌廷爭之彊, 上問其説.

어시상소지 연우탄주창. 급제욕폐태자 이립척희자여의위태자 대신고쟁지 막능득; 상이유후책즉지. 이주창정쟁지강 상문기설.

 

이에 황제는 웃었지만 주창을 더욱 꺼려하게 되었다. 고제가 태자를 폐하고 척희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 대신들은 강력히 반대했으나 그 누구도 고제의 뜻을 꺾지 못했다. 황제는 유후(留侯, 장량)의 계책으로 인해서 중지했다. 주창이 이 문제에 대해 조정에서 강경하게 간하자 황제가 그의 의견을 물었다.

 

昌為人吃, 又盛怒, :「臣口不能言, 然臣期期知其不可.6) 陛下雖欲廃太子, 臣期期不奉詔.上欣然而笑.

창위인흘 우성노 왈 신구불능언 연신기기지기불가. 폐하수욕폐태자 신기기불봉조상흔연이소.

 

주창은 본래 말을 더듬는 데다 몹시 성이 나 있었기 때문에 신은 입으로 잘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분명 그것이 불가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려고 하십니다만 신은 결코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더듬으며 대답했다. 황제는 흔연히 웃고 말았다.

 

既罷, 呂後側耳於東箱聴, 見周昌, 為跪謝曰:「微君, 太子幾廃.

기파 여후측이어동상청 주주창 위위사왈 미군 태자기폐

 

조회가 끝나자 여후(呂后)가 동상(東廂)에서 귀를 기울여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주창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의 앞에 꿇어앉아 감사해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태자는 거의 폐위되었을 것이오.’

 

是後戚姫子如意為趙王, 年十歳, 高祖憂即萬歳之後不全也.

시후척희자여의위조왕 년십세 고조우즉만세지후부전야.

 

그 후에 척희의 아들 여의가 조왕(趙王)이 되니, 나이가 겨우 10세였다. 고조는 자기가 죽은 뒤 대가 끊길 것을 근심했다.

 

趙尭年少, 為符璽禦史. 趙人方與公謂禦史大夫周昌曰:「君之史趙尭, 年雖少, 然奇才也, 君必異之, 是且代君之位.

조요연소 위부새어사. 조인방여공위어사대부주창왈 ; ‘군지사조요 년수소 연기제야 군필이지 시차대군지위

 

조요(趙堯)는 어린 나이로 부새어사(符璽御史: 옥새지기)가 되었다. () 사람 방여공(方與公)이 어사대부 주창에게 말했다. ‘당신의 어사 조요는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뛰어난 재능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반드시 그를 달리 대해야 합니다. 그는 장차 당신의 직위를 대신할 것입니다.’

 

周昌笑曰;「尭年少, 刀筆吏耳, 何能至是乎!居頃之, 趙尭侍高祖. 高祖獨心不樂, 悲歌, 群臣不知上之所以然. 趙尭進請問曰:「陛下所為不樂, 非為趙王年少而戚夫人與呂後有卻邪備萬歳之後而趙王不能自全乎?」

주창소왈 요연소 도필리이 하능지시호!’ 거경지 조요시고조. 고조독심불락 비가 군신부지상지소이연. 조요진청문왈 : ‘폐하소위불락 비위조왕연소이척부인여여후여각야? 비만세지후이조왕불능자전호?’

주창이 웃으면서 말했다. ‘조요는 나이 어린 도필리(刀筆吏)일 뿐이오. 어찌 이렇게 될 수 있겠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요가 고조를 모시게 되었다. 어느 날 고조가 홀로 마음이 즐겁지 않아 슬픈 노래를 불렀으나 여러 신하들은 황제가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조요가 나아가 여쭙기를 폐하께서 즐거워하시지 않는 이유는 조왕(趙王)이 나이가 어리고 척희와 여후의 사이가 좋지 않아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조왕이 스스로 몸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高祖曰:「. 吾私憂之, 不知所出.尭曰:「陛下獨宜為趙王置貴彊相, 及呂後太子群臣素所敬憚乃可.高祖曰:「. 吾念之欲如是, 而群臣誰可者?」

고조왈 연 오사우지 부지소출요왈 폐하독의위조왕치귀강상 급여후 태자 군신소소경탄내가고조왈 연 오념지욕여시 이군신수가자?’

 

고조가 말했다. ‘그렇다. 짐은 그 일이 염려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조요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조왕을 위해 지위가 높고 강직한 신하이자 여후와 태자와 군신들이 평소에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조왕의 상국으로 임명하시면 될 것입니다.’ 고조가 말하기를 그렇다. 짐도 그렇게 생각해 그와 같이 하고자 한다. 그런데 군신들 가운데 누가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尭曰:「禦史大夫周昌, 其人堅忍質直, 且自呂後太子及大臣皆素敬憚之. 獨昌可.高祖曰:「.

요왈 어사대부주창 기인견인질직 차자여후 태자급대신개소경탄지. 독창가고조왈

 

조요가 말했다. ‘어사대부 주창은 그 사람됨이 강직하고 정직합니다. 또 여후와 태자와 대신들이 평소부터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합니다. 오직 주창만이 적임자일 뿐입니다.’ 고조가 말하기를 좋다.’라고 했다.

 

於是乃召周昌, 謂曰:「吾欲固煩公, 公彊為我相趙王.周昌泣曰:「臣初起従陛下, 陛下獨柰何中道而棄之於諸侯乎?」 高祖曰:「吾極知其左遷, 然吾私憂趙王, 念非公無可者. 公不得已彊行!於是徙禦史大夫周昌為趙相.

어시내소주창 위왈 오욕고번공 공강위아상조왕주창읍왈 신초기종폐하 페하독내하중도이기지어제후호?’ 고조왈 오극지기좌천 연호사우조왕 념비공무가자. 공부득이강행어시사어사대부주창위조상.

 

이에 주창을 불러 말했다. ‘짐이 그대를 괴롭히고자하오. 그대는 힘을 다해서 나를 위해 조왕의 상국이 되어주기를 바라오.’ 주창이 울며 말했다. ‘신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폐하를 모셔왔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중도에 저를 제후에게 버리려고 하십니까?’ 고조가 말하기를 짐도 그것이 좌천인 것을 아오. 그러나 가만히 조왕의 장래를 생각해보니 공이 아니고는 다른 적임자가 없소. 어쩔 수 없으니 공이 억지로라도 가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어사대부 주창은 조의 상국이 되었다.

 

既行久之, 高祖持禦史大夫印弄之, :「誰可以為御史大夫者?孰視趙尭, :「無以易尭.遂拝趙尭為禦史大夫. 尭亦前有軍功食邑, 及以禦史大夫従撃陳豨有功, 封為江邑侯.

기행구지 고조지어사대부인롱지 왈 수가이위어사대부자?’ 숙시조요 왈 무이역요수배조요위어사대부. 요역전유군공식읍 급이어사대부종격진희유공 봉위강읍후.

 

주창이 간 지 한참 뒤, 고조가 어사대부의 관인을 손에 쥐고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어사대부로 앉힐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라고 했다. 그러고는 조요를 자세히 보다가 말했다. ‘조요와 바꿀 만한 사람이 없어.’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조요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조요는 이전에 군공(軍功)으로 받은 식읍이 있었고, 또 어사대부가 된 뒤에 황제를 시종하고 진희(陳豨)를 치는 데 공을 세워 강읍후(江邑侯)에 봉해졌다.

 

高祖崩, 呂太後使使召趙王, 其相周昌令王稱疾不行. 使者三反, 周昌固為不遣趙王.

고제붕 여태후사사소조왕 기상주창영왕칭질불행. 사자삼반 주창고위불견조왕.

 

고제가 세상을 떠나니 여태후가 사자를 보내어 조왕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그의 상국 주창은 조왕에게 병을 핑계로 가지 못하게 했다. 사자가 세 번이나 거듭 다녀갔으나 주창은 끝까지 조왕을 보내지 않았다.

 

於是高后患之, 乃使使召周昌. 周昌至, 謁高后, 高后怒而罵周昌曰:「爾不知我之怨戚氏乎而不遣趙王, ?」昌既徴, 高后使使召趙王, 趙王果來. 至長安月餘, 飲薬而死. 周昌因謝病不朝見, 三歳而死.

어시고후환지 내사사조주창. 주창지 알고후 고후노이매주창왈: ‘미부지아지원척씨호? 이불견조왕 하?’ 창기징 고루사사소조왕 조왕과래. 지장안월여 음약이사. 주창인사병불조견 삼세이사.

 

이때 고후(高后)가 이를 근심하고 사자를 보내 주창을 불렀다. 주창이 장안(長安)에 와서 고후를 뵈니 고후가 성을 내며 주창을 몹시 꾸짖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내가 척씨(戚氏)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런데도 끝까지 조왕을 보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요?’ 주창이 불려온 뒤에 고후는 사자를 보내 조왕을 불러오게 했다. 조왕이 과연 왔다. 조왕은 장안에 도착한 지 1개월여 만에 독약에 죽었다. 주창은 그 일로 인해 병을 핑계 삼고 조정에 나오지 않다가 3년 만에 죽었다.

 

後五歳, 高后聞禦史大夫江邑侯趙尭高祖時定趙王如意之畫, 乃抵尭罪, 以広阿侯任敖為禦史大夫.

후오세 고루문어사대부강읍후조요고조시정조왕여의지획 내저요죄 이광아후임오위어사대부.

 

주창이 죽은 지 5년 후에, 고후는 어사대부인 강읍후 조요가 고조 때에 조왕 여의를 보호하기 위해 계획을 도모했다는 것을 듣고 조요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광아후(廣阿侯) 임오(任敖)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임오>

 

任敖者, 故沛獄吏. 高祖嘗辟吏, 吏繋呂後, 遇之不謹. 任敖素善高祖, , 撃傷主呂後吏.

임오자 고패현옥리. 고조상피리 리계여후 우지불근. 임오소선고조 노 격상주여후리.

 

임오는 본래 패현의 옥리(獄吏)였다. 일찍이 고조가 죄를 범하고 아전을 피해 다닐 때, 아전이 여후를 감옥에 가두고 대우함이 공경하지 못했다. 임오는 평소에 고조와 사이가 좋았던 터라 이를 보고 화가 나서 여후를 담당하는 옥리를 때려 상처를 입혔다.

 

及高祖初起, 敖以客従為禦史, 守豊二歳, 高祖立為漢王, 東撃項籍, 敖遷為上黨守. 陳豨反時, 敖堅守, 封為広阿侯, 食千八百戸.

급고조초기 오이객종위어사 수풍이세 고조입위한왕 동격항적 오천위상당수. 진희반시 오견수 봉위광아후 식천팔백호.

 

고조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임오는 빈객으로서 고조를 따라 어사가 되어 2년 동안 풍읍(豐邑)을 지켰다. 고조가 한왕이 되고 나서 동쪽으로 항우를 칠 때, 임오는 상당(上黨)의 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진희가 배반했을 때 임오는 상당을 굳게 지켰으므로 광아후에 봉해지고 18백 호의 식읍을 하사받았다.

 

高后時為禦史大夫. 三歳免, 以平陽侯曹窋為禦史大夫. 高后崩, ()與大臣共誅呂祿等. , 以淮南相張蒼為禦史大夫.

고후시위어사대부. 삼세면 이평양후조줄어사대부,. 고후붕 불여대신공주여록등. 면 이회남상장창위어사대부,

 

고후 때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3년 만에 면직되었고, 평양후(平陽侯) 조줄(曹窋)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고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줄은 대신들과 함께 여록(呂祿) 등을 없애는 일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면되었고, 회남(淮南)의 상국 장창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장창의 治積>

 

蒼與絳侯等尊立代王為孝文皇帝. 四年, 丞相潅嬰卒, 張蒼為丞相.

창여강후등존립대왕위효문황제. 사년 승상관영졸 장창위승상.

 

장창은 강후(絳侯) 등과 함께 대왕(代王)을 세워 효문황제(孝文皇帝)가 되게 했다. 문제 4년에 승상 관영(灌嬰)이 죽으니 장창이 승상이 되었다.

 

自漢興至孝文二十餘年, 會天下初定, 將相公卿皆軍吏. 張蒼為計相時, 緒正律暦. 以高祖十月始至霸上, 因故秦時本以十月為歳首, 弗革.

자한흥지효문이십여년 회천하초정 장상공격개군리. 장창위계상시 서정율력.

 

한이 건립된 때로부터 효문황제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사이에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다. 장수·재상·공경(公卿)이 모두 다 군리(軍吏) 출신이었다. 장창은 계상으로 있을 때 음률과 역법을 정리하고 바로잡았다. 고조가 10월에 처음 패상(霸上)에 이르렀다고 해 원래 진()나라 때 10월을 일 년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을 고치지 않았다.

 

推五徳之運, 以為漢當水徳之時, 尚黒如故. 吹律調樂, 入之音聲, 及以比定律令. 若百工, 天下作程品.

추오덕지운 이위한당수덕지시 상흑여고. 취율조악 입지읍성 급이비정율령. 약백공 천하작정품.

오덕(五德)의 운행에 근거하면 한나라는 수()의 시대에 해당하니 예전처럼 흑색을 숭상했다. 12(十二律)로 음악을 바로잡고 5(五音)에 맞게 했다. 그 비율에 따라 법령을 정했으며, 모든 장인들은 일정한 규격을 정해 물품을 만들게 했다.

 

至於為丞相, 卒就之, 故漢家言律暦者, 本之張蒼. 蒼本好書, 無所不観, 無所不通, 而尤善律暦.

지어위승상 졸취지 고한가언율역자 본지장창. 창본호서 무소불관 무소불통 이우선율력.

 

장창이 승상이 되어 이것이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에 한대에 율력을 말하는 자는 장창의 설을 근거로 했다. 창은 본래 책을 좋아해 보지 않은 책이 없고 능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음률과 역법을 더욱 잘했다.

 

張蒼徳王陵. 王陵者, 安國侯也. 及蒼貴, 常父事王陵. 陵死後, 蒼為丞相, 洗沐, 常先朝陵夫人上食, 然後敢帰家.

장창덕왕릉. 왕릉자 안국후야. 급창귀 상부자왕릉. 릉사후 창위승상 세목 상선조릉부인상식 연후감귀가.

 

장창은 왕릉(王陵)에게 은덕을 입었다. 왕릉은 곧 안국후(安國侯)이다. 장창은 귀하게 된 후에도 항상 왕릉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왕릉이 죽은 뒤에 장창이 승상이 되자 (휴가 때는) 목욕을 하고 제일 먼저 왕릉의 부인을 뵙고 음식을 올리고 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蒼為丞相十餘年, 魯人公孫臣上書言漢土徳時, 其符有黃竜當見. 詔下其議張蒼, 張蒼以為非是, 罷之.

창위승상십여녀 노인공손신상서언한토덕시 이부유황룡당견. 조하기의장창 장창이위비시 파지.

 

장창이 승상이 된 지 10여 년 되는 해에, () 사람 공손신(公孫臣)이 글을 올려 말했다. ‘한은 곧 토덕(土德)의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조짐으로는 황룡(黃龍)이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장창에게 조서를 내려 그의 의론을 감정케 하니 장창은 옳지 않다고 해 그 의론을 폐지했다.

 

其後黃竜見成紀, 於是文帝召公孫臣以為博士, 草土徳之暦制度, 更元年.

기후황룡견성기 어시문제소공손신이위박사 초토덕지역제도 경원년,.

 

그런데 그 뒤에 황룡이 성기(成紀)에 나타나자 문제는 공손신을 불러 박사(博士)로 삼고, 토덕의 역법에 기초하게 하고 원년(元年)을 바꾸었다.

 

張丞相由此自絀, 謝病稱老. 蒼任人為中候, 大為姦利, 上以譲蒼, 蒼遂病免. 蒼為丞相十五歳而免.

장승상유차자출 사병칭노. 창임인위중후 대위간리 상이양창 창수병면. 창위승상십오세이면.

 

장승상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병과 노년을 핑계 삼았고 일찍이 장창이 추천해 중후(中候)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매우 부정한 이득을 취했다. 황제가 그 일로 장창을 문책하자 장창은 드디어 병을 핑계 삼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장창은 승상이 된 지 15년 만에 물러났다.

 

孝景前五年, 蒼卒, 謚為文侯. 子康侯代, 八年卒. 子類代為侯, 八年, 坐臨諸侯喪後就位不敬, 國除.

효경전오년 창졸 시위문후. 자강후대 팔년졸 자류대위후 팔년 좌임제후상후취위불경 국제.

 

효경제 5년에 장창이 죽으니 시호를 문후(文侯)라 했다. 아들 강후(康侯)가 이어서 후가 되었다가 8년 만에 죽었다. 그 아들 류()가 이어서 후가 되었으며, 후가 된 지 8년째 되는 해에 제후의 상사(喪事)에 참석한 뒤에 어전에 나간 것이 불경하다고 하여 봉국을 해제시켰다.

 

, 張蒼父長不満五尺, 及生蒼, 蒼長八尺餘, 為侯丞相. 蒼子複長. 及孫類, 長六尺餘, 坐法失侯.

초장창부장불만오척 급생창 창장팔척여 위후 승상. 창자복장. 급손류 장육척여 좌법실후.

 

본래 장창의 아버지는 신장이 5(五尺)도 못 되었다. 장창을 낳으니 창은 신장이 8척이 넘었으며 후가 되고 승상이 되었다. 장창의 아들 또한 키가 컸다. 손자 장류에 이르러서는 키가 6척 남짓했고, 법을 어겨 후의 작위를 상실했다.

 

蒼之免相後, , 口中無歯, 食乳, 女子為乳母. 妻妾以百數, 嘗孕者不複幸. 蒼年百有餘歳而卒.

창지면상후 노 구중무치 식유 여자위유모, 처첩이백수 상잉자불복행. 창년백유여세이졸.

 

장창은 승상을 그만둔 뒤 늙어서 입에 치아가 없어서 젖을 먹고 살았는데, 나이가 젊은 여인을 유모로 삼았다. 처첩이 모두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임신한 적이 있는 사람은 다시 총애하지 않았다. 장창은 나이 100세가 넘어서 죽었다.

 


<신도가>

 

申屠丞相嘉者, 梁人, 以材官蹶張従高帝撃項籍, 遷為隊率. 従撃黥布軍, 為都尉. 孝恵時, 為淮陽守. 孝文帝元年, 挙故吏士二千石従高皇帝者, 悉以為関內侯, 食邑二十四人, 而申屠嘉食邑五百戸.

신도승상가자 양인 이재관궐장종고제격항적 천위대수. 종격경포군 위도위. 효혜시 위회양수. 효문제원면 거고리사이천석종고황제자 실리위관내후 식읍이십사인 이신도가식읍오백호.

 

승상 신도가(申屠嘉)는 양() 사람이다. 힘이 세고 용감한 강궁(强弓)의 사수로서 고제를 따라가 항우를 공격했고, 대수(隊率)에 올랐다. 고제를 따라 경포의 군대를 치고 도위(都尉)가 되었다. 효혜제(孝惠帝) 때 회양(淮陽) 군수가 되었다. 효문제 원년에 옛날 고황제를 수행해 2천석의 녹봉을 받았던 관리들은 모두 다 관내후(關內侯)가 되었고, 식읍을 받은 사람들은 24명이었는데, 신도가는 식읍 5백 호를 하사받았다.

 

張蒼已為丞相, 嘉遷為禦史大夫. 張蒼免相, 孝文帝欲用皇後弟竇広國為丞相, :「恐天下以吾私広國.広國賢有行, 故欲相之, 念久之不可, 而高帝時大臣又皆多死, 餘見無可者.

장창이위승상 가천위어사대부. 장창면상 효문제욕용황우제두광국위승상 왈 공천하이오사광국광국현유행 고욕상지 염구지불가 이고제시대신우개다사 여견무가자.

 

장창이 승상이 된 뒤에 신도가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장창이 승상에서 파면되었을 때, 효문제는 황후의 아우 두광국(竇廣國)을 승상으로 삼을 생각을 하고 말하기를 두광국을 승상으로 삼는다면 아마 천하 사람들이 내가 광국에게 사사로운 정을 베푼다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광국은 어질고 덕행이 있기 때문에 그를 승상으로 삼고자 한 것인데, 오랫동안 이 일을 생각해보았으나 역시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고제 때의 대신들은 거의 죽고 현재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감당할만한 자가 없었다.

 

乃以禦史大夫嘉為丞相, 因故邑封為故安侯.

내이어사대부가위승상 인고읍봉위고안후.

 

이에 어사대부 신도가를 승상으로 삼고 본래의 식읍을 그대로 해 고안후(故安侯)에 봉했다.

 

嘉為人廉直, 門不受私謁. 是時太中大夫鄧通方隆愛幸, 賞賜累巨萬. 文帝嘗燕飲通家, 其寵如是. 是時丞相入朝, 而通居上傍, 有怠慢之禮. 丞相奏事畢, 因言曰

가위인렴직 문불수사알. 시시태중대부등통방융애행 상사누거만. 문제상연음통가 기총여시. 시시승상입조 이통거상방 유태만지예. 승상진사필 인언왈:

 

신도가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해 집에서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다. 이때 태중대부(太中大夫)인 등통(鄧通)이 한창 총애를 받아 하사받은 재물이 수 만이었다. 문제는 자주 등통의 집에서 연회를 즐길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하루는 승상이 입조했는데 황제의 곁에 있던 등통이 승상을 대하는 예절을 태만하게 했다. 승상은 보고를 마치고 이어 말했다:

 

陛下愛幸臣, 則富貴之至於朝廷之禮, 不可以不粛!上曰:「君勿言, 吾私之.

폐하애행신 즉부귀지; 지어조정지례 불가이숙!’ 상왈 군물언 오사지

 

폐하께서 신하를 총애하시어 그를 부귀하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조정의 예절이 엄격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황제는 말했다. ‘그대는 말하지 마시오. 내 따로 그를 훈계하겠소.’

 

罷朝坐府中, 嘉為檄召鄧通詣丞相府, 不來, 且斬通. 通恐, 入言文帝. 文帝曰

파조좌부중 가위격소등총지승상부 불래 차참통. 통공 입언문제. 문제왈:

 

신도가는 조회를 마치고 나와서 승상부에 정좌해서는 격서(檄書)를 써서 등통을 불러 승상부에 오게 했는데, 만약 오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등통이 두려워서 궁궐로 들어가 문제에게 이 사실을 아뢰자 문제가 말했다.

 

汝第往, 吾今使人召若.通至丞相府, 免冠, 徒跣, 頓首謝. 嘉坐自如, 故不為禮, 責曰:「夫朝廷者, 高皇帝之朝廷也. 通小臣, 戯殿上, 大不敬, 當斬. 吏今行斬之!

여제왕 오금사인소약통지승상부 면관 도선 돈수사. 가좌자여 고불위례 책왈 부조정자 고황제지조정야. 통소신 희전상 대불경 당참 이영행참지!’

 

너는 우선 가거라. 짐이 사람을 보내 너를 불러 올 것이다.’ 등통은 승상부에 이르자 갓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다. 신도가가 태연하게 앉은 채 고의로 예의를 갖추지 않고 꾸짖어 말했다. ‘조정은 고황제의 조정이다. 등통은 보잘것없는 신하로서 어전을 시끄럽게 며했다. 이것은 크게 불경하니 참형을 받아 마땅하다. 형리는 지금 당장 그를 참수하라.’

 

通頓首, 首盡出血, 不解. 文帝度丞相已困通, 使使者持節召通, 而謝丞相曰

통돈수 수진출혈 불해. 문제도승상이곤통 사사자지절소통 이사승상왈:

 

등통이 머리를 조아려 머리에서 온통 피가 났지만 풀어주지 않았다. 문제는 승상이 이미 충분히 등통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자에게 부절(符節)을 주고 등통을 부르게 했다. 그리고 승상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此吾弄臣, 君釈之.鄧通既至, 為文帝泣曰:「丞相幾殺臣.

차오롱신 군석지등통기지 위문제읍왈 승상기살신

 

그는 짐이 총애하는 신하이니 그대가 그를 놓아주시오.’ 등통이 풀려나 궁정에 도착해 문제 앞에 이르자 울면서 말했다. ‘승상은 신을 죽이려고 했사옵니다.’

 

嘉為丞相五歳, 孝文帝崩, 孝景帝即位. 二年, 晁錯為內史, 貴幸用事, 諸法令多所請変更, 議以謫罰侵削諸侯. 而丞相嘉自絀所言不用, 疾錯.

가위승상오세 효문제붕 효경제즉위. 이년 조착위내사 귀행용사 제법영다소청변경 의이적벌침삭제후. 이승상가자출소언불용 질착.

 

신도가가 승상이 된 지 5년째 되는 해에,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고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했다. 효경제 2년에 조조(晁錯)가 내사(內史)가 되어 총애를 받게 되자 정권을 잡고 여러 법령제도를 대폭 고칠 것을 주청하고, 잘못을 찾아 처벌하는 방법으로 제후의 권력과 봉지를 삭감할 것을 건의했다. 그래서 승상 신도가는 의견이 채용되지 않은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조착을 미워했다.

 

錯為內史, 門東出, 不便, 更穿一門南出. 南出者, 太上皇廟堧垣. 嘉聞之, 欲因此以法錯擅穿宗廟垣為門, 奏請誅錯.

착위내사 문동출 불경 경착일문남출. 남출자 태상황묘연원. 가문지 욕인차이법착천천종묘원위문 진청주착.

 

조착은 내사가 되자 문이 동쪽에 있어 출입에 불편하다고 다시 남쪽 담을 뚫어 문 을 만들었다. 남쪽으로 나오면 태상황(太上皇) 사당의 바깥 담장에 이르게 된다. 신도가 그것을 듣고 함부로 종묘의 담을 뚫어 문을 낸 죄를 법으로 다스리고 싶어 조착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錯客有語錯, 錯恐, 夜入宮上謁, 自帰景帝. 至朝, 丞相奏請誅內史錯. 景帝曰:「錯所穿非真廟垣, 乃外堧垣, 故他官居其中, 且又我使為之, 錯無罪.

착객유어착 착공 야입궁상알 자귀경제. 지조 승상진청주내사착. 경제왈 착소천비진묘원 내외연원 고차관거기중 차우아사위지 착무죄

 

조착의 문객 중에 그 이야기를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조착이 두려워서 밤에 궁궐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아침이 되자 승상이 내사 조착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 경제가 말했다. ‘조착이 뚫은 곳은 진짜 종묘의 담이 아니고 바깥의 낮은 담이다. 그리고 다른 관리가 그 안에서 살았다. 또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니 조착에게는 죄가 없다.’

 

罷朝, 嘉謂長史曰:「吾悔不先斬錯, 乃先請之, 為錯所売.

파조 가위장사왈 오회불선참착 내선청지 위착고매

 

조회를 마치고 신도가는 장사(長史)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먼저 번 조착을 죽이지 않아 그가 먼저 주청하여 매도당한 것이 후회스럽소.’

 

至舎, 因歐血而死. 謚為節侯. 子共侯蔑代, 三年卒. 子侯去病代, 三十一年卒. 子侯臾代, 六歳, 坐為九江太守受故官送有罪, 國除.

지사 인구혈이사. 시위절후. 자공후멸대 삼년졸. 자후거병대 삼십일년졸. 자후유대 육세 좌위구강태수수고관송유죄 국제.

 

집에 이르러 이 때문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의 시호를 절후(節侯)라 했다. 아들 공후(共侯) ()이 후를 대신했으나 3년 만에 죽었다. 멸의 아들 거병(去病)이 작위를 이어받고 31년 만에 죽었다. 거병의 아들 유()가 후의 작위를 이어받고 6년 만에 구강(九江) 태수를 할 때 전임 태수의 예물을 받은 것에 연좌되어 봉국도 없어지게 되었다.




自申屠嘉死之後, 景帝時開封侯陶青桃侯劉舎為丞相. 及今上時, 柏至侯許昌平棘侯薛沢武彊侯荘青翟高陵侯趙周等為丞相.

자신도가사지후 경제시개봉후청 도후유사위승상. 급금상시 백지후허창 평극후설택 무강후장청적 고릉후조주등위승상.

 

신도가가 죽은 뒤 경제(景帝) 때 개봉후(開封侯) 도청(陶靑)과 도후(桃侯) 유사(劉舍)가 승상이 되었으며, 지금의 황제에 이르러서는 백지후(柏至侯) 허창(許昌평극후(平棘侯) 설택(薛澤무강후(武疆侯) 장청적(莊靑翟고릉후(高陵侯) 조주(趙周) 등이 승상에 올랐다.

 

皆以列侯継嗣, 娖娖廉謹, 為丞相備員而已, 無所能発明功名有著於當世者.

개이열후계사 착착염근 위승상비원이이 무소능발명공명유저어당세자.

 

이들은 모두 열후(列侯)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은 사람들로 청렴하고 근신하며 너무 관대해 승상이 되기는 했으나 열후의 이름에나 올랐을 뿐 공적과 이름이 그 시대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張蒼文學律暦, 為漢名相, 而絀賈生公孫臣等言正朔服色事而不遵, 明用秦之顓頊暦, 何哉周昌, 木彊人也. 任敖以舊徳用. 申屠嘉可謂剛毅守節矣, 然無術學, 殆與蕭陳平異矣.

태사공왈: 장창문학율역 위한명상 이출가생 공손신등언정삭복색이부준 명용진지전욱령 하재? 주창 목강인야. 임오이구덕용. 신도가가위강의수절의 연무술학 시여소 조 진평이의.

 

태사공은 말한다. ‘장창(張蒼)은 문학·음률·역법에 뛰어난 한()의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가생(賈生)과 공손신(公孫臣) 등이 건의한 역법·거마(車馬복색(服色)의 개혁을 채택하지 않고, ()의 전욱력(顓頊曆) 사용을 고집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주창(周昌)은 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임오(任敖)는 옛날의 은덕으로 인해 등용되었다. 신도가(申屠嘉)는 강직해 절조를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술학(術學)이 없어 거의 소하(蕭何조참(曹參진평(陳平)과는 다르다.’

 

孝武時丞相多甚, 不記, 莫錄其行起居狀略, 且紀征和以來.

효무시승상다심 불기 모록기행기거상약 차기정화이래.

 

효무제 때 승상이 매우 많았으나 기록하지 않았고, 또 그 행동과 활동의 상황이 대략만이라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는 정화(征和) 이후의 것을 기록하기로 한다.

 

有車丞相, 長陵人也. 卒而有韋丞相代.

유차승상 장릉인야. 졸이유위승상대.

차승상(車丞相)이 있었는데, 그는 장릉(長陵) 사람이다. 그가 죽으니 위승상(韋丞相)이 이어서 승상이 되었다.

 

韋丞相賢者, 魯人也. 以読書術為吏, 至大鴻臚. 有相工相之, 當至丞相. 有男四人, 使相工相之, 至第二子, 其名玄成. 相工曰:「此子貴, 當封.

위승상현자 노인야. 이독서술위리 지대홍려. 유상공상지 당지승상. 유남사인 사상공상지 지제이자 기명현성. 상공왈 차자귀 당봉

 

위승상 현()은 노() 사람이다. 독서술(讀書術)로써 아전이 되어 대홍려(大鴻臚)에 이르렀다. 관상을 보는 사람이 마땅히 승상에 이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아들이 4명 있었는데 관상가에게 관상을 보게 했다. 둘째 아들 현성(玄成)에 이르러 관상가는 말했다. ‘이 아들은 귀상(貴象)입니다. 열후에 봉해질 것입니다.’

 

韋丞相言曰:「我即為丞相, 有長子, 是安従得之?」 後竟為丞相, 病死, 而長子有罪論, 不得嗣, 而立玄成. 玄成時佯狂, 不肯立, 竟立之, 有譲國之名. 後坐騎至廟, 不敬, 有詔奪爵一級, 為関內侯, 失列侯, 得食其故國邑. 韋丞相卒, 有魏丞相代.

위승상언왈 아즉위승상 유장자 시안종득지?’ 후경위승상 병사 이장자유죄론 부득사 이립현성. 현성시양광 불긍립 경립지 유양국지명. 후좌기지묘 불경 유조탈작일급 위관내후 실열후 득식시고국읍. 위승상졸 유위승상대.

 

위승상이 말했다. ‘내가 만일 승상이 된다면, 맏아들이 어떻게 작위를 얻을 수 있겠소?’ 뒤에 마침내 승상이 되었는데 병들어 죽었다. 그런데 맏아들이 죄가 있어 작위를 이을 수 없다고 의론하여 현성이 승상에 올랐다. 현성은 그때 미친 척 하며 후가 되지 않으려고 했으나 마침내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나라를 사양했다.’는 미담을 듣게 되었다. 뒤에 그가 말을 타고 종묘에 간 것이 불경하다고 하여 천자의 명령으로 작위가 일등급 떨어지고 관내후가 되었다. 열후의 직위는 잃었으나 본래의 국읍(國邑)을 식읍으로 이어받았다. 위승상(韋丞相)이 죽고 위승상(魏丞相)이 직위를 이었다.

 

魏丞相相者, 済陰人也. 以文吏至丞相. 其人好武, 皆令諸吏帯剣, 帯剣前奏事. 或有不帯剣者, 當入奏事, 至乃借剣而敢入奏事.

위승상상자 제음인야 이문리지승상. 기인호무 개영제리대검 대검전진사. 혹유불대검자 당입진사 지내차검이감입진사.

 

위승상(魏丞相)은 상()은 제음(濟陰) 사람이다. 그는 문서 관리하는 벼슬아치에서 승상에 올랐다. 그는 무술을 좋아해 여러 관원들에게 모두 칼을 차게 하고, 칼을 차고 앞에 나와 일을 아뢰게 했다. 혹 칼을 차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 일을 아뢰고자 할 때는 남의 칼을 빌려 찬 다음에야 감히 들어가 일을 아뢸 수 있을 정도였다.

 

其時京兆尹趙君, 丞相奏以免罪, 使人執魏丞相, 欲求脫罪而不聴. 複使人脅恐魏丞相, 以夫人賊殺待婢事而私獨奏請験之, 発吏卒至丞相舎, 捕奴婢笞撃問之, 実不以兵刃殺也. 而丞相司直繁君奏京兆尹趙君迫脅丞相, 誣以夫人賊殺婢, 発吏卒囲捕丞相舎, 不道又得擅屏騎士事, 趙京兆坐要斬.

기시경조이조군 승상진이면죄 사인집위승상 욕구탈죄이불청. 복사인협공위승상 이부인적살대비사이사독진청험지 발리졸지승상사 포노비태격문지 실불이병인살야. 이승상사직파군진경조윤조군박협승상 무이부인적살비 발리졸위포승상사 부도; 우득천병기사사 조경조좌요참.

 

그때 경조윤(京兆尹) 조군(趙君)이 죄를 짓자 승상이 직위를 파면해야 한다고 아뢰자, 조군은 사람을 시켜 위승상을 붙잡고 자기의 죄를 벗게 해주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다시 사람을 시켜 승상의 부인이 질투해 시비(侍婢)를 찔러 죽였다.’는 일을 가지고 위승상을 협박하게 하고 몰래 단독으로 조사해 나라에 보고하고, 이졸(吏卒)을 승상의 집에 보내 노비를 잡아다가 매를 치면서 심문하게 했다. 그러나 사실은 칼로 찔러 죽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승상의 사직(司直) 파군(繁君)이 황제께 아뢰기를 경조윤 조군은 승상을 협박하고, 무고해 승상의 부인이 노비를 적살(賊殺)했다고 하고 이졸을 풀어 승상부를 포위였으니, 도리에 어긋납니다.’라고 했다. 또 그가 제 마음대로 기사(騎士)를 파면한 일이 알려져서 경조윤 조군은 허리를 베는 형벌에 처해졌다.

 

又有使掾陳平等劾中尚書, 疑以獨擅劫事而坐之, 大不敬, 長史以下皆坐死, 或下蠶室. 而魏丞相竟以丞相病死. 子嗣. 後坐騎至廟, 不敬, 有詔奪爵一級, 為関內侯, 失列侯, 得食其故國邑. 魏丞相卒, 以禦史大夫邴吉代.

우유사연진평등핵중상서 의이독천겁사이좌지 대불경 장사이불개좌사 혹하잠실 이위승상경이승상병사. 자사. 후좌기지묘 불경 유조탈작일급 위관내후 실열후 득식기고국읍 위승상졸 이어사대부병길대.

 

위승상은 또 사연(使掾) 진평(陳平) 등을 시켜서 중상서(中尙書)를 탄핵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승상이 자기 마음대로 협박을 행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매우 불경하다고 해 장사(長史) 이하 관련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혹은 잠실(蠶室)에 갇혀 궁형(宮刑)을 받았다. 그런데 위승상만은 끝내 승상으로 있다가 병사했다. 아들이 그 작위를 계승했으나 뒤에 말을 타고 종묘에 갔던 것이 불경하다고 하여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작위가 1등급이 떨어지고 관내후가 되었다. 열후의 지위는 잃었으나 본래의 국읍을 식읍으로 받았다. 위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병길(邴吉)이 승상에 올랐다.

 

邴丞相吉者, 魯國人也. 以読書好法令至禦史大夫. 孝宣帝時, 以有舊故, 封為列侯, 而因為丞相. 明於事, 有大智, 後世稱之.

병승상길자 노국인야. 이독서호법령지어사대부. 효선제시 이유구고 봉위열후 이인위승상. 명어사 유대지 후세칭지.

 

병승상 길(邴吉)은 노나라 사람이다. 그는 글 읽기와 법령을 좋아하여 어사대부에 올랐다. 효선제(孝宣帝) 때 선제를 구한 옛 일이 인정되어 열후에 봉해지고 곧 이어서 승상이 되었다. 일에 밝으며 큰 지혜가 있었다고 후세 사람들이 칭찬했다.

 

以丞相病死. 子顕嗣. 後坐騎至廟, 不敬, 有詔奪爵一級, 失列侯, 得食故國邑. 顕為吏至太僕, 坐官秏亂, 身及子男有姦贓, 免為庶人.

이승상병사. 자현사. 후좌기지묘 불경 유조탈작일급 실열후 득식고국읍 현위리지태복 좌관모란 신급자남유간


승상으로 병사하자 아들 현()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뒤에 말을 타고 종묘에 갔던 것이 불경하다고 황제의 명에 의해 작위가 1등급 떨어졌다. 열후의 지위는 상실했으나 본래의 국읍을 식읍으로 이어받았다. 병현(邴顯)은 벼슬이 태복(太僕)에 이르렀으나 관직에서 직권을 남용하고 그 자신과 아들이 뇌물을 받아 파면되고 평민이 되었다.



邴丞相卒, 黃丞相代. 長安中有善相工田文者, 與韋丞相魏丞相邴丞相微賎時會於客家.

병승상졸 황승상대. 장안중유선상공전문자 여위승상 위승상 병승상미천시회어객가.

병승상이 죽고 황승상(黃丞相)이 뒤를 이었다. 장안(長安)에 관상을 잘 보는 전문(田文)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승상·()승상·()승상이 아직 미천했을 때, 그들은 어떤 빈객의 집에서 서로 만났다.

 

田文言曰:「今此三君者, 皆丞相也.其後三人竟更相代為丞相, 何見之明也.

전문언왈 금차삼군자 개승상야기후삼인경경상대위승상 하견지명야.

 

전문이 말했다. ‘지금 이 세 사람은 모두 승상이 될 것입니다.’ 그 뒤 세 사람은 마침내 각각 차례로 승상이 되었다. 얼마나 보는 것이 명확한가!

 

黃丞相霸者, 淮陽人也. 以読書為吏, 至潁川太守. 治潁川, 以禮義條教喩告化之. 犯法者, 風暁令自殺. 化大行, 名聲聞.

황승상패자 회양인야. 이독서위리 지영천태수. 치영천 이예의조교유고화지. 범법자 풍효영자살. 화대행 명성문.

 

황승상 패()는 회양(淮陽) 사람이다. 글을 읽어 관리가 되어 영천(穎川) 태수에 이르렀다. 영천을 다스리는 데 예의와 법령으로써 가르치고 타일러서 백성을 교화시켰다. 중죄를 범한 자에게 잘 타일러(風曉) 자살하게 했다. 이로 인해 교화가 크게 이루어지고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孝宣帝下制曰:「潁川太守霸, 以宣布詔令治民, 道不拾遺, 男女異路, 獄中無重囚. 賜爵関內侯, 黃金百斤.

효선제하제왈 영천태수패 이선초조영치민 도불습유 남녀이로 옥중무중수. 사패관내후 황금백근

 

효선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영천 태수 패는 조정의 법령대로 백성을 다스려 길에서는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길로 다니며, 옥 안에는 중죄를 지은 죄수가 없으므로 관내후의 작위와 황금 1백 근을 하사하노라.’라고 했다.

 

徴為京兆尹而至丞相, 複以禮義為治. 以丞相病死. 子嗣, 後為列侯. 黃丞相卒, 以禦史大夫於定國代. 於丞相已有廷尉傳, 在張廷尉語中. 於丞相去, 禦史大夫韋玄成代.

징위경조윤이지승상 복이예의위치. 이승상병사. 자사 후위열후. 황승상졸 이어사대부어정국대. 어승상기유정위전 재장정위어중. 어승상거 어사대부휘현성대.

 

그를 불러 경조윤으로 삼았다가 뒤에 승상으로 삼았다. 이때도 예의로써 다스렸다. 승상이 병으로 죽자 아들이 뒤를 이어서 열후에 올랐다. 황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우정국(于定國)이 대신 승상이 되었다. 우승상은 이미 정위전(廷尉傳)에 나오고, 장정위전(張廷尉傳)의 내용에도 있다. 우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위현성(韋玄成)이 대신 승상이 되었다.

 

韋丞相玄成者, 即前韋丞相子也. 代父, 後失列侯.

위승상현성자 즉전위승자자야. 대부후실열후.

 

위승상 현성은 전 위승상(韋丞相) 아들이다. 아버지를 이었으나 후에 열후의 작위를 잃었다.

 

其人少時好読書, 明於詩論語. 為吏至衛尉, 徙為太子太傅. 禦史大夫薛君免, 為禦史大夫. 於丞相乞骸骨免, 而為丞相, 因封故邑為扶陽侯.

기인소시호독서 명어시 논어. 위리지위위 사위태자태박. 어사대부설군면 위어사대부. 어승상걸해골면 이위승상 인봉고급위부양후.

 

그는 젊었을 때 책 읽기를 좋아해 시와 논어(論語) 에 밝았다. 아전으로 시작해 위위(衛尉)에 오르고 또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어사대부인 설군(薛君)이 파면되자 어사대부가 되었다. 우승상이 스스로 사직을 주청해 해직되니 위현성이 승상이 되었다. 이어 고읍(故邑 고향)에 부양후(扶陽侯)로 봉해졌다.

 

數年, 病死. 孝元帝親臨喪, 賜賞甚厚. 子嗣後. 其治容容隨世俗浮沈, 而見謂諂巧. 而相工本謂之當為侯代父, 而後失之

수년 병사. 효원제친임상 사상심후. 자사후. 기치용용수세속부침 이견위첨교. 이상공본위지당위후대부 이후실지;

 

그가 몇 년 뒤에 병으로 죽자 효원제(孝元帝)가 친히 문상하고 상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뒤에 그의 다스림이 지나치게 너그러워 세상의 변화에 따라 흔들거려 아첨하고 간교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관상을 보는 사람이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후가 되지만 뒤에 잃게 될 것이다.‘

 

複自遊宦而起, 至丞相. 父子倶為丞相, 世閒美之, 豈不命哉!

복자유환이기 지승상, 부자구위승상 세간미지 이불명재!

 

뒤에 떠도는 벼슬아치로부터 시작해 승상이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승상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아름답게 여겼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相工其先知之. 韋丞相卒, 禦史大夫匡衡代.

상공기선지지. 위승상졸 어사재부광형대.

 

관상을 보는 사람이 그것을 먼저 알았던 것이다. 위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광형(匡衡)이 대신 승상이 되었다.

 

丞相匡衡者, 東海人也. 好読書, 従博士受詩. 家貧, 衡傭作以給食飲. 才下, 數射策不中,

승상광형자 동해인야. 호독서 종박사수시. 가빈 형용작이급음식 재하 수사책불중.

 

 

승상 광형은 동해(東海) 사람이다. 그는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박사에게서 시경을 배웠다. 집이 가난해 품팔이를 해서 먹고 살았다. 재주가 뛰어나지 못해 여러 차례 시험에 응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其至九, 乃中丙科. 経以不中科故明習. 補平原文學卒史. 數年, 郡不尊敬. 禦史徴之, 以補百石屬薦為郎, 而補博士, 拝為太子少傅, 而事孝元帝. 孝元好詩, 而遷為光祿勳, 居殿中為師, 授教左右, 而県官坐其旁聴, 甚善之, 日以尊貴. 禦史大夫鄭弘坐事免, 而匡君為禦史大夫. 歳餘, 韋丞相死, 匡君代為丞相, 封樂安侯. 以十年之閒, 不出長安城門而至丞相, 豈非遇時而命也哉!

기지구 내중병과. 경이불중과고명습. 보평원군문학졸사. 수년 군불존경. 어사지이 이보백석속천위랑 이보박사 배위태자소부 이사효원제. 효원호시 이천위광록훈 거전중위사 수교좌우 이현관좌기방청 심선지 일이존귀. 어사대부정홍좌사면 이광군위어사대부. 세여 위승상사 광순대위승상 봉악안후. 이십년지간 불출장안성문이지승상 이비우시이명야재!

 

아홉 번째에 만에 겨우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경서 실력 때문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자 분명해질 때까지 익혔다. 평원군(平原郡)의 문학졸사(文學卒史)로 보직을 받았으나 여러 해 동안 군()에서 존경을 받지 못했다. 어사가 그를 불러들여 녹봉1백석의 관리로 삼았고 뒤에 추천하여 낭중(郎中)이 되게 했다. 박사에 보직되고 태자 소부(太子少傅)에 제수되어 효원제를 섬겼다. 효원제는 시경을 좋아했다. 광형을 광록훈(光祿勳)으로 삼아 궁궐에 거주하면서 스승이 되어 황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황제가 그 곁에 앉아 듣는 것을 매우 좋아해 날로 존귀하게 되었다. 어사대부 정홍(鄭弘)이 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되자 광형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1년여 만에 위승상이 죽자 광형이 대신하여 승상이 되고 낙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10년 동안 장안의 성문을 나가지 않고 승상에 올랐는데, 어찌 때를 만난 운명이라 아니겠는가!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深惟士之遊宦所以至封侯者, 微甚. 然多至禦史大夫即去者. 諸為大夫而丞相次也, 其心冀幸丞相物故也. 或乃陰私相毀害, 欲代之. 然守之日久不得, 或為之日少而得之, 至於封侯, 真命也夫!

태사공왈: 심유사지유환소이지봉후자 미심. 연다지어사대부즉거자. 제위대부이승상차야 기심기행승상물고야. 혹내음사상훼해 욕대지. 연수지일구부득 혹위지일소이득지 지어봉후 진명야부!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깊이 생각해보니 선비로 일반 관리에서부터 열후에 오른 사람은 매우 적다. 대부분 어사대부에 이르러서 그만둔다. 모두 어사대부가 되면 다음은 승상이 될 차례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승상의 신분으로 생을 마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몰래 승상을 헐뜯고 해쳐서 대신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있어도 승상이 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승상의 지위를 얻고 후에 봉해지기도 하니, 참으로 운명이 아니겠는가!

 

禦史大夫鄭君守之數年不得, 匡君居之未満歳, 而韋丞相死, 即代之矣, 豈可以智巧得哉! 多有賢聖之才, 困厄不得者衆甚也.

어사대부정군수지수년부득 광군거지미만세 이위승상사 즉대지의 이가이지교득재! 다유현성지재 인액부득자중심야.

 

어사대부 정군(鄭君)은 몇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으나 승상의 직위를 얻지 못했고, 광형(匡衡)은 어사대부에 있은 지 1년도 못 되어서 위승상(韋丞相)이 죽자 곧 그를 대신했다. 그것이 어찌 지모와 기교로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성현의 재주를 지니고도 곤궁하게 지내며 뜻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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