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쾌>
舞陽侯樊噲者, 沛人也. 以屠狗為事, 與高祖倶隠.
무양후번쾌자 패인야. 이도구위사 여고조구은,
무양후(舞陽候) 번쾌(樊噲)는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는 개 백정질 하면서 유방(劉邦)처럼 은둔하고 있었다.
初従高祖起豊, 攻下沛. 高祖為沛公, 以噲為舎人. 従攻胡陵、方與, 還守豊, 撃泗水監豊下, 破之. 複東定沛, 破泗水守薛西.
초종고조기풍 공하패. 고조위패공 이쾌위사인. 종공호릉 방여 환수풍 격사수삼풍하 파지. 복동정패 파사수수설서.
처음에 그는 유방을 따라 풍읍(豊邑)에서 군사를 일으켜 패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유방은 패공(沛公)이 되자 번쾌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그는 또 호릉(胡陵)과 방여(方輿)를 공격하고 돌아오다가 풍읍을 지키기 위해 사수(泗水)를 풍에 소속시켰다. 다시 동쪽으로 패현을 평정하고는 설현(薛縣) 서쪽에서 사수(泗水) 군수(郡守)의 군대를 격파했다.
與司馬尼戦碭東, 卻敵, 斬首十五級, 賜爵國大夫. 常従, 沛公撃章邯軍濮陽, 攻城先登, 斬首二十三級, 賜爵列大夫.
여사마니전탕동 각적 참수십오급 사작국대부. 상종 패공격장한군복양 공성선등 참수이십삼급 사작열대부.
사마이(司馬尼)와 함께 탕현(碭縣) 동쪽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군 15명의 머리를 베고 국대부(國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상비군으로 패공을 지원해 복양현(濮陽縣)에서 장한(章邯)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성을 먼저 올라가 공략하고 적군 23명의 머리를 베고 대부(大夫) 반열에 올랐다.
複常従, 従攻城陽, 先登. 下戸牖, 破李由軍, 斬首十六級, 賜上閒爵. 従攻囲東郡守尉於成武, 卻敵, 斬首十四級, 捕虜十一人, 賜爵五大夫.
복상종 종공성양 선등. 하로유 파이유군 첨수십육급 사상간작. 종공위동군수위어성무 각적 참수십사급 포로십일인 사작오대부.
다시 패공을 지원해 성양현(城陽縣)을 공략할 때도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호유향(戶牖鄕)을 함락시키고, 이유(李由)의 군사를 격파해 적군 16명의 머리를 베고 상간작(上間爵)의 벼슬을 받았다. 패공을 따라 성무현(成武縣)에서 동군(東郡)의 수위(守尉)를 공격하고 포위해 적을 물리쳤으며, 적군 14명을 참수하고, 포로 11명을 잡아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従撃秦軍, 出亳南. 河閒守軍於杠里, 破之. 撃破趙賁軍開封北, 以卻敵先登, 斬候一人, 首六十八級, 捕虜二十七人, 賜爵卿. 従攻破楊熊軍於曲遇.
종격진군 출박남. 하간수군어강리 파지. 격하조분군개봉북 이각적선등 첨후일인 수육깁팔급 포로 이십칠인 사작경. 종공하양웅군어곡우.
패공을 따라 진(秦)의 군사를 공격하고, 박(亳)땅 남쪽으로 나아가, 강리(杠里)에 주둔하고 있던 하간군(河間郡) 군수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한 개봉(開封)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조분(趙賁)의 군대를 격파해, 적을 물리치고 제후 한 명과 적군 68명의 머리를 베고, 27명의 포로를 잡아 경(卿)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곡우(曲遇)에 주둔하고 있던 양웅(楊熊)의 군대를 격파했다.
攻宛陵, 先登, 斬首八級, 捕虜四十四人, 賜爵封號賢成君. 従攻長社、轘轅, 絶河津, 東攻秦軍於屍, 南攻秦軍於犨. 破南陽守齮於陽城. 東攻宛城, 先登.
공원릉 선등 참수팔급 포로사십사인 사작봉호현성군. 종공장사 환원 절하진 동공진군어시 남공진군어주. 파남양수의어양성.동공완성 선등.
원릉(宛陵)을 공략하고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적군 8명을 참수하고, 44명의 포로를 잡아 현성군(賢成君)의 봉호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장사(長社)와 환원(轘轅)을 공략하고 하진(河津)을 봉쇄했으며, 동쪽으로 시향(尸)에 주둔하고 있던 진(秦)의 군대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주(犨)에 주둔하고 있던 진의 군대를 공략했다. 남쪽으로 양성현(陽城縣)에 있던 남양군(南陽郡)군수 여의(呂齮)를 격파했다. 동쪽으로 완현(宛縣)의 성을 공격했는데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西至酈, 以卻敵, 斬首二十四級, 捕虜四十人, 賜重封. 攻武関, 至霸上, 斬都尉一人, 首十級, 捕虜百四十六人, 降卒二千九百人.
서지역 이각적 참수이십사급 포로사십인 사중봉. 공무관 지패상 참도위일인 수십급 초로백사십육인 항졸이천구백인.
서쪽으로 역현(酈縣)에 이르러 적을 물리치고, 적군 24명의 목을 베고 포로 40명을 잡아 추가로 녹봉을 받았다. 무관(武關)을 공격하고, 패상(覇上)에 이르러 도위(都尉) 한 명과 적군 10명의 목을 베었으며 포로 46명을 잡고, 병졸 2천 9백 명을 항복시켰다.
項羽在戯下, 欲攻沛公. 沛公従百餘騎因項伯面見項羽, 謝無有閉関事.
항우재희하 욕공패공. 패공종백여기인항백면견항우 사무유폐관사.
항우(項羽)가 희하(戱下)에서 주둔하고 있으면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패공은 1백여 명의 기마병을 대동하고 항백(項伯)을 통해서 항우를 만나 함곡관(函谷關)을 봉쇄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사죄했다.
項羽既饗軍士, 中酒, 亜父謀欲殺沛公, 令項荘抜剣舞坐中, 欲撃沛公, 項伯常(肩)[屏]蔽之. 時獨沛公與張良得入坐, 樊噲在営外, 聞事急, 乃持鉄盾入到営. 営衛止噲, 噲直撞入, 立帳下.
항우기향군사 중주 아보모욕살패공 영항장발검무좌중 욕격패공 항백상비페지. 시독패공여장양득입좌 번쾌재영외 문사급 내지철순입도영. 영위지쾌 쾌직당입 입장하.
항우가 병사들에게 주연을 베풀었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아보(亞父)는 패공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 항장(項莊)에게 좌중에서 칼춤을 추다가 패공을 치라고 명령했지만, 항백이 항상 패공을 엄호하고 있었다. 당시에 패공과 장량(張良)만이 연회에 참석해 있었고, 번쾌는 병영 밖에 있다가 사태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철 방패를 들고 병영 안으로 뛰어들었다. 병영의 보초가 번쾌를 저지하자, 번쾌가 곧장 돌진해 장막 아래에 섰다.
項羽目之, 問為誰. 張良曰:「沛公參乗樊噲.」項羽曰:「壯士.」賜之卮酒彘肩. 噲既飲酒, 抜剣切肉食, 盡之. 項羽曰:「能複飲乎?」噲曰:「臣死且不辭, 豈特卮酒乎! 且沛公先入定鹹陽, 暴師霸上, 以待大王. 大王今日至, 聴小人之言, 與沛公有隙, 臣恐天下解, 心疑大王也.」
항우목지 문위수. 장양왈 ‘패공참승번쾌’ 항우왈 ‘장사’ 사지치주체견. 쾌기음주 발검절육식 진지. 항우왈 ‘능복음호?’ 쾌왈 ‘신사차불사 이특치주호! 차패공선입정함양 폭사패상 이시대왕. 대왕음일지 청소인지언 여패공유극 신공천하해 심의대왕야’
항우가 그를 목격하고 누구냐고 물으니, 장량이 ‘패공의 경호원 번쾌라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항우는 장사로다.‘라고 말하고, 술 한 잔에 돼지 다리를 하사했다. 번쾌는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서 다 먹어치웠다. 항우가 ’더 마실 수 있는가?‘라고 물으니, 번쾌가 말했다.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거늘, 어찌 술을 사양하오리까? 그런데 패공께서 먼저 국경을 넘어 함양(咸陽)을 평정했지만, 패상에 주둔하면서 대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헌데 대왕께서는 오늘 도착해 소인배들의 말은 듣고 패공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고 계십니다. 신은 천하가 분열되어 사람들이 대왕의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 되옵니다.‘
項羽黙然. 沛公如廁, 麾樊噲去. 既出, 沛公留車騎, 獨騎一馬, 與樊噲等四人歩従, 従閒道山下帰走霸上軍, 而使張良謝項羽. 項羽亦因遂已, 無誅沛公之心矣. 是日微樊噲奔入営譙譲項羽, 沛公事幾殆.
항우묵연. 패공여측 휘번쾌거. 기출 해공유거기 독기일마 여번쾌등사인보종 종간도산하귀주패상군 이사장양사항우. 항우역인수이 무주패공지심의. 시일미번쾌분입영초양항우 패공사기시.
항우가 조용히 수긍했다. 패공이 변소로 가면서 손짓해 번쾌를 불러내었다. 병영을 벗어나자, 패공은 수레를 남겨둔 채 혼자 말을 탔고, 번쾌 등 네 사람은 걸어서 뒤를 따랐으며, 산 아래 샛길을 따라 패상의 군영으로 도망쳐 돌아온 뒤 장량을 시켜 항우에게 사과하게 했다. 항우 역시 마음이 흡족해 패공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날 번쾌가 병영에 달려들어 항우를 나무라지 않았다면, 패공의 과업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明日, 項羽入屠鹹陽, 立沛公為漢王. 漢王賜噲爵為列侯, 號臨武侯. 遷為郎中, 従入漢中.
명일 항우입도함양 립패공위한왕. 한왕사쾌작위열후 호임무후, 천위낭중 종입한중.
다음날, 항우는 함양성을 도륙하고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세웠다. 한왕은 번쾌에게 열후(列候)의 작위를 내리고 임무후(臨武侯)로 불렀다. 번쾌는 낭중(郎中)으로 승진했고,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진입했다.
還定三秦, 別撃西丞白水北, 雍軽車騎於雍南, 破之. 従攻雍、斄城, 先登撃章平軍好畤, 攻城, 先登陥陣, 斬県令丞各一人, 首十一級, 虜二十人, 遷郎中騎將.
환정삼진 별격서긍백수북 옹경거기어옹남 파지. 종공옹 태성 선등격장평군호치 공성 선등함진 참현령승각일인 수십일급 노이십인 천낭중기장,
한왕은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했고, 번쾌는 단독으로 백수(白水) 북쪽에서 서현(西縣) 현승(縣丞)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옹현(雍縣) 남쪽에서 옹왕(雍王)의 날쌘 기마병을 격파했다. 한왕을 따라 옹현과 태성(斄城)을 공격했을 때 가장 먼저 성에 올랐고 호치현(好畤縣)에서 장평(章平)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성을 공격하고 가장 먼저 올라가 진지를 함락시켰고, 현령과 현승 각각 한 사람씩의 목을 잘랐으며, 적군 11명을 참수했고, 포로 20명을 잡아서 낭중기장(郎中騎將)으로 승진했다.
従撃秦車騎壌東, 卻敵, 遷為將軍. 攻趙賁, 下郿、槐里、柳中、鹹陽;潅廃丘, 最. 至櫟陽, 賜食邑杜之樊郷. 従攻項籍, 屠煮棗. 撃破王武、程処軍於外黃. 攻鄒、魯、瑕丘、薛. 項羽敗漢王於彭城, 盡複取魯、梁地.
종격진거기양동 각적 천위장군. 공조분 하미 괴리 유중 함양; 관폐구 최. 지역양 사식읍주지번행. 종공항적 도자조. 격파왕무 정처군어외황. 공추 노 하구 설. 항우패한왕어팽성 진복취노 양지.
번쾌는 한왕을 따라 양향(壤鄕) 동쪽에서 진(秦)의 기마병을 공격해 적을 물리치고 장군으로 승진했다. 조분(趙賁)을 공격해 미(郿)·괴리(槐里)·유중(柳中)·함양(咸陽)을 함락시켰다. 폐구(廢丘)를 수몰시킨 것은 번쾌의 최고의 공적이었다. 역양현(櫟陽縣)에 이르러 식읍으로 두현(杜縣)의 번향(樊鄕)을 받았고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자조(煮棗) 땅을 몰살시켰다. 외황현(外黃縣)에서 왕무(王武)와 정처(程処)의 군대를 격파했다. 추(鄒)·노(魯)·하구(瑕丘)·설(薛)을 공략했다. 항우는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무찌르고 노(魯)와 양(梁) 땅을 수복했다.
噲還至滎陽, 益食平陰二千戸, 以將軍守広武. 一歳, 項羽引而東. 従高祖撃項籍, 下陽夏, 虜楚周將軍卒四千人. 囲項籍於陳, 大破之. 屠胡陵.
쾌환지형양 익식평음이천호 이장군수광무. 일세 항우인이동. 종고조격항적 하양하 노초주장군졸사천인. 위항적어진 대파지. 도호릉.
번쾌는 형양(滎陽)으로 돌아와 평음(平陰)의 2천 호(戶)를 식읍으로 더 받았고, 장군으로서 광무산(廣武山)을 수비했다. 1년 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양하현(陽夏縣)을 함락시키고 초(楚) 주장군(周將軍)의 병졸 4천 명을 사로잡았다. 진현(陳縣)에서 항우를 포위해 크게 격파했고, 호릉(胡陵)에서 항우를 죽였다.
項籍既死, 漢王為帝, 以噲堅守戦有功, 益食八百戸. 従高帝攻反燕王臧荼, 虜荼, 定燕地.
항적기사 한왕위제 이쾌견수전유공 익식팔백호. 종고제공반연왕장도 노도 정연지.
항우가 죽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으며, 번쾌는 견고한 수비와 전공(戰功) 때문에 8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燕王) 장도(藏荼)를 공격해 사로잡고 연 땅을 평정했다.
楚王韓信反, 噲従至陳, 取信, 定楚. 更賜爵列侯, 與諸侯剖符, 世世勿絶, 食舞陽, 號為舞陽侯, 除前所食. 以將軍従高祖攻反韓王信於代.
초왕한신반 쾌종지진 취신 정초. 경사작열후 여제후부부 세세물절 식무양 호위무양후 제전소식. 이장군종고조공반한왕신어대.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반란이 일으키자, 번쾌는 고조를 따라 진(陳)땅에 도착해 한신을 체포하고 초를 평정했다. 다시 열후의 작위를 하사받고, 제후의 부절(符節)을 받아 대대로 세습하게 했으며, 무양현(舞陽縣)을 식읍으로 주고 무양후(舞陽侯)라고 불렀으며, 이미 책봉했던 식읍을 해제했다. 번쾌는 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대(代)땅에서 모반을 일으킨 한왕(韓王) 신(信)을 공격했다.
自霍人以往至雲中, 與絳侯等共定之, 益食千五百戸. 因撃陳豨與曼丘臣軍, 戦襄國, 破柏人, 先登, 降定清河、常山凡二十七県, 殘東垣, 遷為左丞相.
자곽인이왕지운중 여강후등공정지 익식오천백호. 인격진희여만구신군 전양국 파백인 선등 항정청하 상산범이이칠현 잔동원 천위좌승상.
곽인(霍人)에서 운중(雲中)으로 가면서 강후(絳侯)등과 함께 대(代) 땅을 평정해, 식읍 5백 호를 더 받았다. 진회(陳豨)와 만구신(曼丘臣)의 군대를 공격한 것 때문에 양국현(蘘國縣)에서 전쟁했고, 백인현(柏人縣)을 격파할 때에는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청하(淸河)와 상산(常山)등 모두 27개의 현을 함락시켜 평정했고, 동원현(東垣縣)을 파괴해 좌승상(左丞相)으로 승진했다.
破得綦毋卬、尹潘軍於無終、広昌. 破豨別將胡人王黃軍於代南, 因撃韓信軍於參合. 軍所將卒斬韓信, 破豨胡騎橫谷, 斬將軍趙既, 虜代丞相馮梁、守孫奮、大將王黃、將軍、(太蔔)太僕解福等十人.
파득기무앙 윤반군어무종 광창. 파희별장오인왕황군어대남 인격한신군어삼합. 군소장졸참한신 파희호기횡곡 참장군조기 노대승상풍량 수손분 대장왕황 장군 태복해복등십인.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의 군대를 격파했다. 대(代) 땅의 남쪽에서 진희의 부대장으로 흉노족(匈奴族)인 왕황(王黃)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기세로 삼합(參合)에서 한신의 군대를 공격했다. 번쾌 휘하의 장졸이 한신을 베고, 횡곡(橫谷)에서 진희의 오랑캐 기마병을 공격해 장군 조기(趙旣)를 참수했으며, 대(代)의 승상 풍량(馮梁)·군수 손분(孫奮)·대장 왕황(王黃)·태복(太僕) 해복(解福) 등 10명을 생포했다.
與諸將共定代郷邑七十三. 其後燕王盧綰反, 噲以相國撃盧綰, 破其丞相抵薊南, 定燕地, 凡県十八, 郷邑五十一. 益食邑千三百戸, 定食舞陽五千四百戸.
여제장공정대향읍칠십삼. 기후연왕노관반 쾌이상국격노관 파기승상저계남 정연지 범현십팔 향읍오십일. 익식읍천삼백호 정식무양오천사백호.
번쾌는 여러 장군들과 함께 대(代) 땅의 73개 향읍(향邑)을 평정했다. 그 후 연(燕)의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키자, 번쾌는 재상으로서 노관을 공격해 계(薊)의 남쪽에서 승상인 저(抵)를 격파하고, 연의 18현과 51개 향읍을 평정했다. 1천 3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아 무향현 5천 4백 호의 식읍을 확정했다.
従, 斬首百七十六級, 虜二百八十八人. 別, 破軍七, 下城五, 定郡六, 県五十二, 得丞相一人, 將軍十二人, 二千石已下至三百石十一人.
종 참수백칠십육급 노이백팔십팔인. 별 파군칠 하성오 정군육 현오십이 득승상일인 장군십이인 이천석이하지삼백석십일인.
번쾌는 고조를 따라 적군 176명을 참수하고 288명을 생포했다. 단독으로 군 7개 대대를 격파하고, 5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6개 군과 52현을 평정해 승상 1명, 장군 12명, 2천석(石)에서 3백석까지 관리를 모두 11명을 체포했다.
噲以呂後女弟呂須為婦, 生子伉, 故其比諸將最親.
쾌이여후여제여수위부 생자항 고기비제장최친.
번쾌는 여후(呂后)의 여동생 여수(呂嬃)를 아내로 맞이해 아들 항(伉)을 낳았기 때문에 다른 여러 장군들에 비해 고조와 가장 가까웠다.
先黥布反時, 高祖嘗病甚, 悪見人, 臥禁中, 詔戸者無得入群臣. 群臣絳、潅等莫敢入.
선경포반시 고조상병심 오견인 와금중 조호자무득입군신. 군신강 돤등막감입.
앞서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병이 깊어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궁중에서 누워있었다. 호위병을 불러 군신들을 들지 못하게 명령하자, 강후(絳侯)와 관영(灌嬰) 등의 군신들이 들어가지 못했다.
十餘日, 噲乃排闥直入, 大臣隨之. 上獨枕一宦者臥. 噲等見上流涕曰:「始陛下與臣等起豊沛, 定天下, 何其壯也! 今天下已定, 又何憊也! 且陛下病甚, 大臣震恐, 不見臣等計事, 顧獨與一宦者絶乎? 且陛下獨不見趙高之事乎?」高帝笑而起.
십여일 쾌내배달직입 대신수지. 상독침일환자와. 쾌등견상유체왈: ‘시폐하여신등기풍패 정천하 하기장야! 금천하이정 우하비야! 차폐하병심 대신진공 불견신등계사 고독여일환자절호? 차폐하독불견조고기사호?’ 고제소이기.
10여 일이 지나자, 번쾌가 궁중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곧바로 들어갔고 대신들이 뒤를 따랐다. 고조는 홀로 환관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 등이 고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처음 폐하께서 신등과 함께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그 얼마나 씩씩하셨습니까? 이제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는데 어찌 그리 지쳐 보이시는지요? 폐하의 병이 깊어져 대신들이 놀라 두려워하고 있는데 신 등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시지 않으시고, 환관 한 사람과 세상을 회피하고 계십니까? 폐하께서는 홀로 조고(趙高)의 일을 보지 않았사옵니까?’ 고제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其後盧綰反, 高帝使噲以相國撃燕. 是時高帝病甚, 人有悪噲黨於呂氏, 即上一日宮車晏駕, 則噲欲以兵盡誅滅戚氏、趙王如意之屬.
기후노관반 고제사쾌이상국격연. 시시고제병심 인유오쾌당어여씨 즉상일일궁거안가 즉쾌욕이병진주멸척씨 조왕여의지속.
그 후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번쾌에게 상국으로서 연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고조의 병이 심했는데 어떤 사람이 번쾌가 여씨(呂氏)와 작당한다고 비방했다. 즉 황제가 어느 날 서거하면(晏駕) 번쾌가 군대를 이끌고 척씨(戚氏)와 조왕(趙王) 여의(如意)의 일족을 멸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高帝聞之大怒, 乃使陳平載絳侯代將, 而即軍中斬噲. 陳平畏呂後, 執噲詣長安. 至則高祖已崩, 呂後釈噲, 使複爵邑.
고제문지대노 내사진평제강후대장 이즉군중참쾌. 진평외여후 집쾌지장안. 지즉고조이붕 여후석쾌 사복작읍.
고조가 이 소리를 듣고 크게 진노하고 곧바로 진평(陳平)을 시켜 강후를 싣고 번쾌를 대신해 군대를 통솔하고 번쾌를 즉각 참수하라 했다. 진평은 여후가 두려워 번쾌를 장안(長安)으로 압송했다. 고조가 서거하자, 여후는 번쾌를 석방하고 작위와 식읍을 되돌려주었다.
孝恵六年, 樊噲卒, 謚為武侯. 子伉代侯. 而伉母呂須亦為臨光侯, 高后時用事専権, 大臣盡畏之. 伉代侯九歳, 高后崩.
효혜육년 번쾌졸 시위무후. 자항대후. 이항모여수역위임광후 고후시용사전권 대신진외지. 항대후구세 고후붕.
효혜제(孝惠帝) 6년, 번쾌가 죽자 무후(武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번항(樊伉)이 대신해 후작(侯爵)이 되었고, 번항의 어머니 여수 역시 임광후(臨光侯)가 되었다. 고후(高后)가 때때로 전권을 휘둘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번항이 후작을 대신한 지 9년 만에 고후가 세상을 떠났다.
大臣誅諸呂、呂須婘屬, 因誅伉. 舞陽侯中絶數月. 孝文帝既立, 乃複封噲他庶子市人為舞陽侯, 複故爵邑. 市人立二十九歳卒, 謚為荒侯. 子他広代侯. 六歳, 侯家舎人得罪他広, 怨之, 乃上書曰:
대신주제여 여수권속 인주항. 무양후중절수월. 효문제기립 내복봉쾌야서자불인위무양후 복고작읍. 불인립이십구세졸 시위황후. 자타광대후. 육세 후가사인득죄타광 원지 내상서왈:
대신들이 여씨 자제들과 여수의 가솔들을 주살하고, 이때 번항도 주살했다. 이로써 무양후의 가통은 몇 개월 동안 끊어졌다. 그러나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곧바로 번쾌의 또 다른 서자 번불인(樊巿人)을 무양후로 책봉했고, 옛 작위와 식읍을 되돌려주었다. 번불인은 후작이 된 지 29년 만에 죽었고, 시호는 황후(荒侯)였다. 그의 아들 번타광(樊他廣)이 대를 이어 후작이 되었다. 6년 뒤, 후작 집안의 가신이 타광에게 죄를 짓고, 원한을 품고 곧바로 상서를 올리길
「荒侯市人病不能為人, 令其夫人與其弟亂而生他広, 他広実非荒侯子, 不當代後.」詔下吏. 孝景中六年, 他広奪侯為庶人, 國除.
황후불인병불능위인 영기부인여기제란이생타광 타광실비황후자 부당대후‘ 조하리. 효경중육년 타광탈후위선인 국제.
‘황후 번불인은 병이 있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부인과 동생에게 음란한 행위를 시켜 타광을 낳았습니다. 타광은 실제로 황후의 아들이 아니므로 후작을 잇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조칙을 내려 조사하게 했다. 효경제(孝景帝) 6년, 타광은 후작을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었으며, 봉지도 해제되었다.
<역상>
曲周侯酈商者, 高陽人. 陳勝起時, 商聚少年東西略人, 得數千. 沛公略地至陳留, 六月餘, 商以將卒四千人屬沛公於岐.
곡주후역상자 고양인. 진승기시 상취소년동서약인 득수천. 패공약지지진유 유월제 상이장졸사천인속패공어기.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은 고양현(高陽縣) 사람이다. 진승(陳勝)이 봉기했을 때, 역상은 젊은 사람을 모아 동서로 노략질을 해 수천 명을 모았다. 패공이 토지를 공략하며 진류현(陳留縣)에 이른 지 6개월여 뒤, 역상은 병졸 4천 명을 끌고 기(岐)땅에서 패공에게 귀순했다.
従攻長社, 先登, 賜爵封信成君. 従沛公攻緱氏, 絶河津, 破秦軍洛陽東. 従攻下宛、穣, 定十七県. 別將攻旬関, 定漢中.
종공장사 선등 사작봉신성군. 종채공공구씨 절하진 파진군낙양동. 종공하완 양 정칠십현. 별장공순관 정한중.
역상은 패공을 따라 장사(長社)를 공격할 때, 성에 가장 먼저 올라갔으므로 신성군(信成君)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역상은 패공을 따라 구지현(緱氏縣)을 공격하고, 황하의 나루터를 봉쇄했으며, 낙양(洛陽) 동쪽에서 진(秦)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공을 따라 완(宛)과 양(穰)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17현을 평정했다. 역상은 단독으로 군대를 동원해 순관(旬關)을 공격하고 한중(漢中)을 평정했다.
項羽滅秦, 立沛公為漢王. 漢王賜商爵信成君, 以將軍為隴西都尉. 別將定北地、上郡. 破雍將軍焉氏, 周類軍栒邑, 蘇駔軍於泥陽. 賜食邑武成六千戸. 以隴西都尉従撃項籍軍五月, 出钜野, 與鍾離眛戦, 疾鬥, 受梁相國印, 益食邑四千戸. 以梁相國將従撃項羽二歳三月, 攻胡陵.
항우멸진 입패공위한왕. 한왕사상작신성군 이장군위롱서도위. 별장적북지 상군 차옹장군언씨 주류군순읍 소장군어니양. 사식읍무성육천호, 이롱서도위종격항적군오월 출거야 여동리매전 질투 수양상국인 익식읍사천호. 이양상국장종격항우이세삼월 공호릉.
항우가 진을 멸망시키자 패공이 한왕이 되었다. 한왕은 역상에게 신성군의 작위를 하사하고, 장군으로서 농서(隴西)의 도위(都尉)로 삼았다. 역상은 단독으로 군대를 동원해 북지(北地)와 상군(上郡)을 평정했다. 언씨(焉氏)에서 옹(雍)장군을, 순읍(栒邑)에서 주류(周類)의 군대를, 이양(泥陽)에서 소장(蘇駔)의 군대를 각각 격파하자, 식읍으로 무성현(武成縣)의 6천 호를 하사했다. 역상은 농서 도위로서 한왕을 따라 항우를 5개월 공격했고, 거야(鉅野)로 나가 종리매(鍾離眛)와 싸워서 이기자 양(梁) 상국의 인수를 주고, 식읍을 4천호 더 하사했다. 양의 상국으로서 한왕을 따라 항우를 2년 3개월 공격했고 호릉(胡陵)에서 격파시켰다.
項羽既已死, 漢王為帝. 其秋, 燕王臧荼反, 商以將軍従撃荼, 戦竜脫, 先登陥陣, 破荼軍易下, 卻敵, 遷為右丞相, 賜爵列侯, 與諸侯剖符, 世世勿絶, 食邑涿五千戸, 號曰涿侯.
항우기이사 한왕위제. 기추 연왕장도반 상이장군종격격도 전용탈 선등함진 파도군이하 천위우승상 사작열후 여제후부부 세세물절 식읍탁읍오천호 호왈탁후.
항우가 죽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다. 그해 가을, 연왕(燕王) 반란을 일으키자, 역상은 장군으로서 한왕을 따라 장도를 공격했고, 용탈현(龍脫縣)에서 전투를 했는데, 성에 먼저 올라가 진지를 함락시켰고, 장도의 군대를 역현(易縣) 아래에서 격파했다. 적을 물리친 공로로 우승상(右丞相)으로 승진했고, 열후의 작위를 받고, 제후의 부절을 받아 대대로 이어졌으며, 식읍으로 탁현(涿縣)의 5천 호를 받았고, 봉호는 탁후(涿侯)였다.
以右丞相別定上谷, 因攻代, 受趙相國印. 以右丞相趙相國別與絳侯等定代、鴈門, 得代丞相程縦、守相郭同、將軍已下至六百石十九人. 還, 以將軍為太上皇衛一歳七月.
이우승상별정상곡 인공재 수조상국인. 이우승상조상국별여강후등정대 안문 득대승상정종 수상곽동 장군이하지육백석십구인. 환 이장군위태상황위일세칠월.
역상은 우승상 신분으로서 단독으로 상곡(上谷)을 평정했고, 그 기세로 대(代) 땅을 공격해 조의 재상의 인장을 인수했다. 역상은 우승상과 조 재상의 자격을 가지고 단독으로 강후 등과 함께 대(代)와 안문(雁門)을 정벌해 대의 승상 정종(程縱)· 임시 재상 곽동(곽同)·장군 이하 6백석을 받는 관원 19명을 생포했다. 역상은 귀국해 장군으로서 태상황(太上皇)을 1년 7개월 동안 호위했다.
以右丞相撃陳豨, 殘東垣. 又以右丞相従高帝撃黥布, 攻其前拒, 陥両陳, 得以破布軍, 更食曲周五千一百戸, 除前所食, 凡別破軍三, 降定郡六, 県七十三, 得丞相、守相、大將各一人, 小將二人, 二千石已下至六百石十九人.
이우승상격진희 잔동원. 우이우승상종고제격경포 공기전거 함양진 득이파포군 경식곡주오천일백호 제전소식 범별파군삼 항적군육 현칠십삼 득승상 수상 대강군각일인 소장이인 이천석이하지육백석십구인.
역상은 우승상으로 진희(陳豨)를 공격했고, 동원현(東垣縣)을 몰살시켰다. 역상은 또 우승상 자격으로서 고조를 따라 경포를 치고, 그의 선두 진지를 공략하고 6개 군, 73현을 항복시켰으며, 승상·임시 재상·대장 각 한사람·소장(小將) 두 사람·2천석 이하 6백석까지의 관원 19명을 생포했다.
商事孝恵、高后時, 商病, 不治. 其子寄, 字況, 與呂祿善. 及高后崩, 大臣欲誅諸呂, 呂祿為將軍, 軍於北軍, 太尉勃不得入北軍, 於是乃使人劫酈商, 令其子況紿呂祿, 呂祿信之, 故與出遊, 而太尉勃乃得入拠北軍, 遂誅諸呂.
상사효혜 고후시 상병 불치. 기자기 자황 여여록선. 급고후붕 대신욕주제여 여록위장군 군어북군 태위발부득입북군 어시내사인겁역상 영기자황태여록 여록신지 고여출유 이태위발내득입거북군 수주제여.
역상은 효혜제와 여후를 섬길 때, 병이 났는데 치료가 되지 않았다. 그 아들 역기(酈寄)는 자(字)가 황(況)으로 여록(呂祿)과 친하게 지냈다. 여후가 서거하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주살하려고 했다. 여록은 장군이 되어 북군(北軍)에 주둔하고 있었다. 태위(太尉) 주발(周勃)은 북군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해 그의 아들 역황(酈況)에게 여록을 유인하게 했다. 여록은 믿고 그와 함께 외출했고, 태위 주발은 곧바로 북군에 들어가 장악하고 마침내 여씨 일족을 주살했다.
是歳商卒, 謚為景侯. 子寄代侯. 天下稱酈況売交也.
시세상졸 시위경후. 자기대후. 천하칭역왕매교야.
이해에 역상이 죽었고, 경후(景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아들 역기가 후작의 대를 이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역황이 친구를 팔았다고 수군대었다.
孝景前三年, 呉、楚、斉、趙反, 上以寄為將軍, 囲趙城, 十月不能下. 得兪侯欒布自平斉來, 乃下趙城, 滅趙, 王自殺, 除國.
효경전삼년 오 초 제 조반 성이기위장군 위조성 시월불능하 득유후난포자평제래 내하조성 멸조 왕자살 제국,
효경제(孝景帝) 3년, 오(吳)·초(楚)·제(齊)·조(趙)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역기를 장군으로 삼아 조의 성을 포위하게 했지만, 10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후(兪侯) 난포(欒布)가 제를 평정하고 돌아와서 조의 성을 함락하고, 조를 멸망시켜 왕은 자살하고 봉국이 해제되었다.
孝景中二年, 寄欲取平原君為夫人, 景帝怒, 下寄吏, 有罪, 奪侯. 景帝乃以商他子堅封為繆侯, 続酈氏後. 繆靖侯卒, 子康侯遂成立. 遂成卒, 子懐侯世宗立. 世宗卒, 子侯終根立, 為太常, 坐法, 國除.
효걍중이년 기욕취평원군위부인 경제노 하기리 유죄 탈후. 경제냐이상타자견봉위목후 속역씨후. 목정후졸 자강후수성립. 수성졸 자최후세종립. 세종졸 자후종근립 위태상 좌법 국제.
효경제 2년, 역기가 평원군(平原君)을 부인으로 삼으려고 하자, 경제(景帝)가 진노하며 역기를 재판하게 했고, 죄가 드러나자 후작을 박탈했다. 경제는 곧바로 역상의 다른 아들 역견(酈堅)을 목후(繆侯)로 책봉해 역씨(酈氏)를 계승하도록 했다. 목정후(繆靖侯)가 죽자, 그의 아들 강후(康侯) 수성(遂成)이 계승했다. 수성이 죽자, 그의 아들 회후(懷侯) 세종(世宗)이 계승했다. 세종이 죽고, 아들 종근(終根)이 후작을 계승해 태상(太常)이 되었으나, 죄를 지어 봉국이 해제되었다.
<하후영>
汝陰侯夏侯嬰, 沛人也. 為沛廄司禦. 毎送使客還, 過沛泗上亭, 與高祖語, 未嘗不移日也.
여음후하후영 패인야. 위패구사어. 매송사객환 과패사상정 여고조어 미상불이일야.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패현의 마구간 사어(司御)를 지냈다. 매번 사신과 빈객을 전송하고 돌아올 때는 패현의 사상정(泗上亭)을 지나면서 유방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하루를 넘기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嬰已而試補県吏, 與高祖相愛. 高祖戯而傷嬰, 人有告高祖. 高祖時為亭長, 重坐傷人, 告故不傷嬰, 嬰証之. 後獄覆, 嬰坐高祖繋歳餘, 掠笞數百, 終以是脫高祖.
영이이시보현리 여고조상애. 고조희이상영 인유고고조. 고조시위정장 중좌상인 고고불상영 영증지. 후옥리 영좌고조계세여 약태수백 종이시탈고조,
얼마 있다가 하후영이 현의 아전 보조가 되어 유방과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유방이 하후영을 희롱하다가 상처를 입히니, 어떤 사람이 유방을 고발했다. 유방은 당시에 정장(亭長)이었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가중처벌을 받게 되었다. 유방은 결코 하후영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하후영은 이를 증언했다. 나중에 이 사건은 번복되었고 하후영은 유방의 죄에 연루되어 1년여 동안 수감되었고, 수백 대의 매질을 당했다. 결국 유방은 이 때문에 사건에서 벗어났다.
高祖之初與徒屬欲攻沛也, 嬰時以県令史為高祖使. 上降沛一日, 高祖為沛公, 賜嬰爵七大夫, 以為太僕. 従攻胡陵, 嬰與蕭何降泗水監平, 平以胡陵降, 賜嬰爵五大夫. 従撃秦軍碭東, 攻済陽, 下戸破李由軍雍丘下, 以兵車趣攻戦疾, 賜爵執帛. 常以太僕奉車従撃章邯軍東阿、濮陽下, 以兵車趣攻戦疾, 破之, 賜爵執珪.
고조지초여도속욕공패야 영시이현령위고조사. 상항패일야 고조위패공 사영작칠대부 이위태복. 졸공호릉 영여소하항사수삼평 평이호릉항 사영작오대부. 종격진군탕동 공제양 하호파이유군옹구하 이병거취공번질 사작집백. 상이태복거종격장한군동아 복양하 이병거취공전질 파지 사작집규.
유방이 처음 노역자들과 함께 패현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 하후영은 현령의 부관으로서 유방의 사신 역할을 했다. 유방은 패현을 하루 만에 항복시키고 패공이 되자 하후영을 칠대부(七大夫) 반열에 올리고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하후영이 패공을 따라 호릉(胡陵)을 공격했을 때, 하후영이 소하(蕭何)와 함께 사수군(泗水)의 군감(郡監) 평(平)을 항복시키자, 평은 호릉을 가지고 투항했다. 이 공로로 하후영에게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 탕현(碭縣)에서 진(秦) 군대를 공격했고, 제양현(濟陽縣)을 공략했으며, 호향(戶鄕)을 항복시켰고, 옹구(雍丘) 아래에서 이유(李由)의 군대를 격파했다. 전차로 질주하면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집규(執珪)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複常奉車従撃趙賁軍開封, 楊熊軍曲遇. 嬰従捕虜六十八人, 降卒八百五十人, 得印一匱. 因複常奉車従撃秦軍雒陽東, 以兵車趣攻戦疾, 賜爵封転為滕公. 因複奉車従攻南陽, 戦於藍田、芷陽, 以兵車趣攻戦疾, 至霸上.
복상봉거종격조분군개봉 양웅군곡우. 영종포로육십팔인 항졸팔백오십인 득인일궤. 인복상봉거종격진군낙양동 이병거취공전질 사작봉전위등공. 인복봉거종공남양 전어람전 지양 이병거취전질 지패상.
또한 일찍이 패공을 수레에 모시고 개봉(開封)에서 조분(趙賁)의 군대를, 곡우(曲遇)에서 양웅(楊熊)의 군대를 공격했다. 하후영은 포로 68명을 잡고, 군졸 850명을 항복시켰으면, 인장 한 상자를 노획했다. 그 뒤에 패공을 수레에 모시고 낙양동쪽에서 진(秦) 군대를 공격했을 때, 전차로 질주하면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등공(藤公)의 작위를 받았다. 그 뒤에 수레에 패공을 모시고 남양(南陽)을 공격했고, 남전현(藍田縣)과 지양현(芷陽縣)에서 전투를 할 때, 전차로 질주하면서 치열하게 전무를 벌이면서 패상에 이르렀다.
項羽至, 滅秦, 立沛公為漢王. 漢王賜嬰爵列侯, 號昭平侯, 複為太僕, 従入蜀、漢.
항우지 멸진 입패공위한왕. 한왕사영작열후 호소퍙후 복위태복 종입촉 한.
항우가 도착해 진(秦)을 멸망시키고, 패공을 한왕에 봉했다. 한왕은 하후영에게 열후의 작위를 내리고, 봉호를 소평후(昭平侯)라고 했다. 그는 다시 태복이 되어 한왕을 따라 촉(蜀)·한(漢) 정벌에 참여했다.
還定三秦, 従撃項籍. 至彭城, 項羽大破漢軍. 漢王敗, 不利, 馳去. 見孝恵、魯元, 載之. 漢王急, 馬罷, 虜在後, 常蹶両児欲棄之, 嬰常収, 竟載之, 徐行面雍樹乃馳.
환정삼진 종격항우. 지팽성 항우대파한군. 한왕패 불리 치거. 견효혜 재지. 한왕급 마파 노재후 상궐양아욕기지 영상수 경재지 서행면옹수내치.
하후영은 귀국해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했다. 한왕은 패하여 불리하자 급히 달아나다가 효혜(孝惠)와 노원(魯元)을 발견하고 수레에 실었다. 한왕은 사태가 다급하고, 말이 지쳐있고, 적이 뒤에서 추격해오자 두 아이를 발로 차서 버리려고 했다. 하후영이 수레 아래에서 이들을 가까스로 받아 느릿느릿 달리다가 둘이 꼭 끌어 안자 곧바로 치달렸다.
漢王怒, 行欲斬嬰者十餘, 卒得脫, 而致孝恵、魯元於豊.
한왕노 행욕참영자십여 졸득탈 이치효혜 노원어풍.
한왕은 진노하여, 하후영을 10여 차례 참수하려 시도했다. 마침내 탈출해 효혜와 노원을 풍(豐)으로 보냈다.
漢王既至滎陽, 収散兵, 複振, 賜嬰食祈陽. 複常奉車従撃項籍, 追至陳, 卒定楚, 至魯, 益食茲氏.
한왕기지형양 수산병 복진 사영식기양. 복상봉거종격항적 추지진 졸정초 지노 익식자지.
한왕은 형양(滎陽)에 도착해,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고 다시 세력을 회복하자, 하후영에게 기양(祈陽)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그는 다시 한왕을 수레에 모시고 항우를 공격했는데, 진현(陳縣)까지 추격했고, 마침내 초(楚) 지방을 평정했다. 하후영은 노(魯) 땅으로 돌아갔고, 자지현(玆氏縣)의 식읍을 더 받았다.
漢王立為帝. 其秋, 燕王臧荼反, 嬰以太僕従撃荼. 明年, 従至陳, 取楚王信. 更食汝陰, 剖符世世勿絶.
한왕입위제 기추 연왕장도반 영이태복종격도. 명년 종지진 취초왕신. 경식여음 부부세세물절.
한왕이 황제에 즉위했다. 그해 가을, 연왕(燕王)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고조를 따라 장도를 공격했다. 다음해에 고조를 따라 진(陣) 땅에 도착해 초왕(楚王) 신(信)을 체포했다. 고조는 하후영에게 다시 여음현(汝陰縣)을 식읍으로 하사했고, 부절을 내려 대대로 계승하게 했다.
以太僕従撃代, 至武泉、雲中, 益食千戸. 因従撃韓信軍胡騎晉陽旁, 大破之. 追北至平城, 為胡所囲, 七日不得通. 高帝使使厚遺閼氏, 冒頓開囲一角. 高帝出欲馳, 嬰固徐行, 弩皆持満外向, 卒得脫. 益食嬰細陽千戸.
이태복종격대 지무천 운중 익식천호. 인종격한신군호기진양방 대파지. 추북지평성 위호소위 칠일부득통. 고제사사후유연지 모돈개위일각. 고제출욕치 영고서행 노개지만외향 졸득탈 익식영세양천호.
하후영은 태복의 자격으로 고조를 따라 대(代) 땅을 공격하면서, 무천(武泉)과 운중(雲中)에 까지 이른 공로로 식읍 1천 호를 더 받았다. 고조를 따라 진양현(晉陽縣) 부근에 있던 한신(韓信)의 군대의 흉노 기마병을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계속 패잔병을 추격해 평성현(平城縣)에 이르렀다가 흉노에게 포위되어 7일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 고조가 사신을 시켜 연지(閼氏)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자, 묵돌(冒頓)이 한쪽 포위망을 해제 했다. 고조는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려고 했지만, 하후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으면서 쇠뇌를 마음껏 당겨 밖으로 향하게 해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세양현(細陽縣)의 1천 호를 식읍으로 더 받았다. 다시 태복으로서의 고조를 따라 구주산(句注山) 북쪽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공격해 대파했다.
複以太僕従撃胡騎句注北, 大破之. 以太僕撃胡騎平城南, 三陥陳, 功為多, 賜所奪邑五百戸. 以太僕撃陳豨、黥布軍, 陥陳卻敵, 益食千戸, 定食汝陰六千九百戸, 除前所食.
복이태복종격호기구주북 대파지. 이태복격호기평성남 삼함진 공위다 사소탈읍오백호. 이태복격진희 경포군 함동각적 익식천호 정식여음육천구백호 제전소식.
태복의 자격으로 평성현 남쪽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공격해 진지를 세 차례 함락시켰는데, 공로가 많아 빼앗은 읍의 5백 호를 받았다. 태복으로서 진회와 경포의 군대를 공격해 진지를 함락시키고 적을 물리쳐 1천 호의 식읍을 더 받았으며, 여음현(汝陰縣)의 6천 9백 호의 식읍을 확정하고 이전의 식읍은 반납했다.
嬰自上初起沛, 常為太僕, 竟高祖崩. 以太僕事孝恵.
영자상초기패 상위태복 경고조붕. 이태복사효혜.
하후영은 유방이 처음 패현에서 봉기할 때부터 서거할 때까지 항상 태복의 자리에 있었고, 태복으로서 효혜제까지 섬겼다.
孝恵帝及高后徳嬰之脫孝恵、魯元於下邑之閒也, 乃賜嬰県北第第一, 曰「近我」, 以尊異之.
효혜제급고후덕영지탈효혜 노원어하읍지간야. 내사영현북제제일 왈 ‘근아’ 이존이지.
효혜제와 고후는 하후영이 하읍현(下邑縣)에서 효혜제와 노원공주까지 탈출시킨 것에 감사해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면서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했다.
孝恵帝崩, 以太僕事高后. 高后崩, 代王之來, 嬰以太僕與東牟侯入清宮, 廃少帝, 以天子法駕迎代王代邸, 與大臣共立為孝文皇帝, 複為太僕. 八歳卒, 謚為文侯.
효혜제붕 이태복사고후. 고후붕 대왕지해 영이태복여동모후입청궁 폐소제 이천자법하영대왕대저 여대신공립위효문황제 복위태복. 팔세졸 시위문후,
효혜제가 서거하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고후를 섬겼다. 고후가 서거하고, 대왕(代王)이 들어오게 되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동모후(東牟侯)와 함께 궁중으로 들어가 잔당을 말끔히 정리하고 소제(少帝)를 폐위시켰으며, 천자의 어가를 가지고 대왕(代王)을 대저(代邸, 관저의 이름)에서 영접했고, 대신들과 함께 효문황제(孝文皇帝)을 세웠으며, 다시 태복이 8년 뒤에 하후영이 죽었다. 그의 시호는 문후(文侯)였다.
子夷侯灶立, 七年卒. 子共侯賜立, 三十一年卒. 子侯頗尚平陽公主. 立十九歳, 元鼎二年, 坐與父禦婢姦罪, 自殺, 國除.
자이후조립 칠년졸. 자공후사립 삼십일년. 자후파상평양공주, 입십구세 원정이년 좌여부어비간죄 자살 국제.
그의 아들 이후(夷侯) 조(竈)가 계승했는데, 7년 뒤에 죽었다. 조의 아들 공후(共侯) 사(賜)가 작위를 계승했고, 31년 뒤에 죽었다. 사의 아들 파(頗)는 평양공주(平陽公主)와 결혼했다. 작위를 계승한 지 19년 뒤인 원정(元鼎) 2년, 그는 부친의 하녀와 간통죄에 연루되어 자살했고, 봉국도 없어졌다.
<관영>
潁陰侯潅嬰者, 睢陽販繒者也. 高祖之為沛公, 略地至雍丘下, 章邯敗殺項梁, 而沛公還軍於碭.
영음후관영자 수양판증자야. 고조지위패공 약지지옹구하 장한패살항양 이패공환군어탕,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은 수양현(睢陽縣)에서 비단장수였다. 고조가 패공이 되어 각지를 공략하며 옹구(擁丘) 일대에 이르렀을 때, 장한이 항양(項梁)을 격파하고 죽이자, 패공은 탕현(碭縣)으로 회군했다.
嬰初以中涓従撃破東郡尉於成武及秦軍於扛里, 疾鬥, 賜爵七大夫. 従攻秦軍亳南、開封、曲遇, 戦疾力, 賜爵執帛, 號宣陵君.
영초이중연종격파동군위어성무급진군어강리 질투 사작칠대부. 종공진군박남 개봉 곡우 전질력 사작집백 호선릉군.
관영은 당포 중연(中涓)로서 패공을 따라 성무(成武)에서 동군(東郡)의 군위(郡尉)를, 강리(杠里)에서 진(秦)의 군대를 각각 격파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관영은 패공을 따라 박(亳)의 남쪽·개봉(開封)·곡우(曲遇)에서 진의 군대를 공격했는데,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공로로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았고, 선릉군(宣陵君)이라고 불렀다.
従攻陽武以西至雒陽, 破秦軍屍北, 北絶河津, 南破南陽守齮陽城東, 遂定南陽郡. 西入武関, 戦於藍田, 疾力, 至霸上, 賜爵執珪, 號昌文君.
종공양무이서지락양 파진군시북 북절하진 남파남양수의양성동 수정남양군. 서입무관 전어람전 질력 지패상 사작집규 호창문군.
패공을 따라 양무(陽武) 서쪽에서 낙양에 이르기까지 공략해, 진의 군대를 시(尸) 북쪽에서 격파하고 북쪽으로 황하의 나루를 봉쇄했으며, 남쪽으로는 남양(南陽) 군수인 여의(呂齮)를 양성(陽城) 동쪽에서 격파해 마침내 남양군을 평정했다. 또한 서쪽 무관(武關)으로 진입해 남전(藍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패상(霸上)에 이른 공로로 집규(執珪)의 작위의 받았으며, 창문군(昌文君)이라고 불렀다.
沛公立為漢王, 拝嬰為郎中, 従入漢中, 十月, 拝為中謁者. 従還定三秦, 下櫟陽, 降塞王. 還囲章邯於廃丘, 未抜.
패공입위한왕 배영위랑중 종입한중 시월 배위중알자., 종환정삼진 하역양 항새왕. 환위장한어폐구 미발.
패공이 한왕으로 즉위해 관영을 낭중(郎中)에 제수하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진입했으며, 10개월 사이에 다시 중알자(中謁者)에 제수되었다. 한왕을 따라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역양(櫟陽)을 함락시켰으며, 새왕(塞王)을 항복시켰다. 관영은 돌아와 폐구(廢丘)에서 장한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従東出臨晉関, 撃降殷王, 定其地. 撃項羽將竜且、魏相項他軍定陶南, 疾戦, 破之. 賜嬰爵列侯, 號昌文侯, 食杜平郷.
종동출임진관 격항은왕 정기지. 격항우장용저 위상항타군정도남 질전 파지. 사영작열후 호창문군 식두평향.
다시 한왕을 따라 동쪽으로 임진관(臨晉關)을 경유해 은왕(殷王)을 공격해 항복시키고 그 땅을 평정했다. 정도(定陶) 남쪽에서 항우의 장군 용저(龍且)와 위(魏) 재상 항타(項他)의 군대를 공격했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들을 격파했다. 그 공로로 열후의 작위를 받았고, 창문후(昌文侯)라고 불렀으며, 두현(杜縣)의 평향(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複以中謁者従降下碭, 以至彭城. 項羽撃, 大破漢王.
복이중알자종항사탕 이지팽성. 항우격 대파한왕.
관영은 다시 중알자로서 한왕을 따라 탕현을 항복시키고, 팽성에 도착했다. 항우가 한왕을 공격해 대파했다.
漢王遁而西, 嬰従還, 軍於雍丘. 王武、魏公申徒反, 従撃破之. 攻下黃, 西収兵, 軍於滎陽. 楚騎來衆, 漢王乃択軍中可為(車)騎將者, 皆推故秦騎士重泉人李必、駱甲習騎兵, 今為校尉, 可為騎將.
한왕둔이서 영종환 군어옹구. 왕무 위공신도반 종격파지. 공하황 서수병 군어형양. 초기래중 한왕내택군중가위거기장자 개추고진기사중천인이필 낙갑습기병 금위교뤼 가위기장.
한왕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회군해 옹구에 주둔했다. 왕무(王武)와 위공(魏公) 신도(信徒)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그들을 격파했으며, 하황현(下黃縣)을 공격했고, 서쪽으로 병사들을 수습해 형양(滎陽)에 주둔했다. 초의 기병대가 많이 밀려와 한왕이 군중(軍中)에서 기병대 장군을 뽑으려고 하자 모두가 옛 진의 기사로서 중천(重泉) 사람인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이 기마에 익숙하고 현재 교위(校尉)로 있기 때문에 기마 대장으로 삼을 만하다고 추천했다.
漢王欲拝之, 必、甲曰:「臣故秦民, 恐軍不信臣, 臣願得大王左右善騎者傅之.」潅嬰雖少, 然數力戦, 乃拝潅嬰為中大夫, 令李必、駱甲為左右校尉,
한왕욕배지 필 갑왈 ‘신고진민 공군불신신 신원득대왕좌우선기자부지’ 관영수소 연수역전 내배관영위중대부 영이필 낙갑위좌우교위.
한왕이 그들을 임명하려고 하니, 이필과 낙갑이 ‘신들은 옛 진의 백성들이니, 아마도 군사들이 신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의 측근에서 기마에 능한 사람이 선발되면 신들이 그분을 보좌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한왕은 관영이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그가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 경험이 있으므로 곧바로 관영을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했고, 이필과 노갑은 좌우 교위(左右校尉)를 맡도록 했다.
將郎中騎兵撃楚騎於滎陽東, 大破之. 受詔別撃楚軍後, 絶其餉道, 起陽武至襄邑.
장랑중기병격초기어형양동 대파지. 수조별격초군후 절기향도 기양무지양읍.
관영은 낭중의 군대를 거느리고 형양 동쪽에서 초의 기병대를 공격해 대파했다. 관영은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초의 군대 후방을 공격해, 그들의 군량 보급선을 차단하고, 양무에서 출발해 양읍(蘘邑)에 이르렀다.
撃項羽之將項冠於魯下, 破之, 所將卒斬右司馬、騎將各一人. 撃破柘公王武, 軍於燕西, 所將卒斬樓煩將五人, 連尹一人.
격항우지장항관어노하 파지 소장졸참우사마 기장각일인. 격파자공왕무 군어연서 소장졸참누번장오인 연윤일인.
관영은 노현(魯縣) 일대에서 항우의 장군 항관(項冠)을 공격해 무찔렀고, 그 휘하의 사병이 우사마(右司馬)와 기병대장 각각 한사람씩의 머리를 베었다. 관영은 자공(柘公) 왕무(王武)를 공격하고 연(燕)땅 서쪽에 주둔했는데, 그 휘하의 장졸들이 누번(樓煩)의 장군 5명과 연윤(連尹) 한 명을 참수했다.
撃王武別將桓嬰白馬下, 破之, 所將卒斬都尉一人. 以騎渡河南, 送漢王到雒陽, 使北迎相國韓信軍於邯鄲. 還至敖倉, 嬰遷為禦史大夫.
격왕무별장환영백마하 파지 소장졸참위일인. 이기도하남 송한왕도락양 사북영상국한신군어한단. 환지오창 영천위어사대부.
관영은 백마현(白馬縣) 일대에서 왕무의 별동대장 환영(桓嬰)을 공격해 무찔렀는데, 그 휘하의 장졸이 도위(都尉) 한 사람을 참수했다. 관영은 기마병을 이끌고 황하 남쪽을 건너 한왕을 낙양으로 전송했고, 사신으로 북쪽 한단(邯鄲)에 도착해 재상 한신의 군대를 영접했다. 관영은 오창(敖倉)으로 돌아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했다.
三年, 以列侯食邑杜平郷. 以禦史大夫受詔將郎中騎兵東屬相國韓信, 撃破斉軍於歴下, 所將卒虜車騎將軍華毋傷及將吏四十六人.
삼년 이별후식읍두평향. 이어사대부수도장랑중기병동속상국한신 격차제군어역하 소장졸노거기장군화무상급장리사십육인.
3년 뒤, 관영은 열후로서 두현(杜縣)의 평향(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관영은 어사대부로서 조서를 받고 낭중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재상 한신에 예속되어 역성(歷城) 일대에서 제(齊) 군대를 격파했으며, 그 휘하의 장졸이 거기장군(車騎將軍) 화무상(華毋傷)과 장리(將吏) 46명을 포로로 잡았다.
降下臨菑, 得斉守相田光. 追斉相田橫至嬴、博, 破其騎, 所將卒斬騎將一人, 生得騎將四人.
항아임치 득제수상전광. 추제상전횡지영 박 파기기 소장졸참기장일인 생득기장사인.
전영은 임치(臨菑)를 함락시키고 제 임시 재상 전광(田光)을 생포했고, 제 재상 전횡(田橫)을 추격해 영(嬴)과 박(博)에 이르러 그의 기마부대를 격파했으며, 휘하의 병사가 기마대장 중 1명을 참수하고 4명을 생포했다.
攻下嬴、博, 破斉將軍田吸於千乗, 所將卒斬吸. 東従韓信攻竜且、留公旋於高密, 卒斬竜且, 生得右司馬、連尹各一人, 樓煩將十人, 身生得亜將周蘭.
공하영 박 파제장군전흡어천승 소장졸참흡. 동종한신공용저 유공선어고밀 졸참용저 생득우사마 연윤각일인 누번장십인 신생득아장주란.
관영은 영과 박을 공격해 천승현(千乘縣)에서 제 장군 전흡(田吸)을 격파했고, 그의 휘하 병사가 전흡을 참수했다. 관영은 동쪽으로 한신을 따라 고밀현(高密縣)에서 용저와 유공(留公) 선(旋)을 공격했는데, 휘하의 병사가 용저를 참수하고 우사마와 연윤 각각 한 사람씩과 누번의 장군 10명을 생포하고, 그 자신은 부대장 주란(周蘭)을 생포했다.
斉地已定, 韓信自立為斉王, 使嬰別將撃楚將公杲於魯北, 破之. 転南, 破薛郡長, 身虜騎將一人. 攻(博)[傅]陽, 前至下相以東南僮、取慮、徐. 度淮, 盡降其城邑, 至広陵.
제지이정 한신자립위제왕 사영별장격초장공고어노북 파지. 전남 파설군장 신노기장일인. 공부양 전지하상이동남동 취려 서. 도회 진항기성읍 지광릉.
제 땅이 이미 평정되자, 한신은 스스로 제나라 왕(薺王)이 되어 관영을 별동대장으로 삼아 노(魯) 북쪽에서 초 장군 공고(公杲)를 공격해 무찌르도록 했다. 관영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설군(薛郡)의 군장(郡長)을 격파했으며, 자신은 기병대장 한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관영은 부양(傅陽)을 공격하고, 더 전진해 하상(下相)과 그 동남쪽으로 동(僮)·취려(取慮)·서(徐)에 이르렀다. 관영은 회수(淮水)를 건너 그 성읍(城邑)을 모두 항복시키고 광릉(廣陵)에 이르렀다.
項羽使項聲、薛公、郯公複定淮北. 嬰度淮北, 撃破項聲、郯公下邳, 斬薛公, 下下邳, 撃破楚騎於平陽, 遂降彭城, 虜柱國項佗, 降留、薛、沛、酇、蕭、相.
항우사항성 설공 담공복정회북. 영도회북 격파항성 담공하비 참설공 하하비 격파초기어평양 수항팽성 노주국항타 항류 설 패 찬 소 상.
항우는 항성(項聲)·설공(薛公)·담공(郯公)을 시켜 다시 회수 북쪽을 평정하게 했다. 관영은 회수 북쪽을 하비(下邳)에서 항성과 담공을 격파했고, 설공을 참수했으며, 하비를 항복시켰으며, 평양(平陽)에서 초의 기마병을 격파하고 마침내 팽성을 함락시켰고, 주국(柱國)인 항타를 포로로 잡고 유(留)·설(薛)·패(沛)·찬(酇)·소(蕭)·상(相)을 항복시켰다.
攻苦、譙, 複得亜將周蘭. 與漢王會頤郷. 従撃項籍軍於陳下, 破之, 所將卒斬樓煩將二人, 虜騎將八人. 賜益食邑二千五百戸.
공고 초 복득아장주란. 여한왕회이향. 종격항적군어진하 파지 소장졸참누번장이인 노기장팔인. 사익식읍이천오백호.
관영은 고(苦)와 초(譙)를 공격해 다시 부대장 주란을 체포했다. 관영은 한왕과 함께 이향(頤鄕)에서 회동해, 한왕을 따라 진성(陳城) 아래에서 항우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했는데, 휘하의 장졸이 누번의 장군 2명을 참수했고, 기병대장 8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공로로 2천 5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項籍敗垓下去也, 嬰以禦史大夫受詔將車騎別追項籍至東城, 破之. 所將卒五人共斬項籍, 皆賜爵列侯. 降左右司馬各一人, 卒萬二千人, 盡得其軍將吏. 下東城、歴陽. 渡江, 破呉郡長呉下, 得呉守, 遂定呉、予章、會稽郡. 還定淮北, 凡五十二県.
항적패해라거야 영이어사대부애조장거기별추항적지동성 파지. 소장졸오인공참항적 개사작열후. 항좌우사마각일인 졸만이천인 진득기군장리. 하동성 역양. 도강 파오군장오라 득오수 수정오 예장 회계군. 환정회북 범오십이현.
항우가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하고 달아나자, 관영은 어사대부로서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기마병을 동원해 항우를 동성(東城)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휘하의 병사 5명이 함께 항우를 참수해 모두에게 열후의 작위가 내려졌다. 관영은 좌우 사마 각각 한 사람씩과 병졸만 2천 명을 항복시켰고, 그 장리(裝吏)를 모두 체포했다. 관영은 동성(東城)과 역양(歷陽)을 함락시켰다. 관영은 양자장을 건너 오군(吳郡)의 군장(郡長)을 격파했고, 오군(吳郡)의 성 아래에서 오군의 군수를 생포했고, 마침내 오군· 예장군(豫章郡)·회계군(會稽郡)을 평정했다. 관영은 귀국해 회북(淮北) 지역의 52현을 평정했다.
漢王立為皇帝, 賜益嬰邑三千戸. 其秋, 以車騎將軍従撃破燕王臧荼.
한왕립위황제 사익영읍삼천호. 기추 이거기장군종격파연왕장도.
한왕은 황제에 즉위하자,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 하사했다. 그해 가을,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연왕 장도(藏荼)를 공격했다.
明年, 従至陳, 取楚王信. 還, 剖符, 世世勿絶, 食潁陰二千五百戸, 號曰潁陰侯.
명년 종지진 취초왕신. 환 부부 세세물절 식영음이천오백호 호왈영음후.
그 다음해, 고조를 따라 진(陳) 땅에 이르러 초왕(楚王) 신(信)을 체포했다. 귀국하자, 고조는 부절을 하사해 대대로 계승하게 했으며, 영음(潁陰) 땅 2천 5백 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영음후(潁陰侯)라고 불렀다.
以車騎將軍従撃反韓王信於代, 至馬邑, 受詔別降樓煩以北六県, 斬代左相, 破胡騎於武泉北. 複従撃韓信胡騎晉陽下, 所將卒斬胡白題將一人. 受詔並將燕、趙、斉、梁、楚車騎, 撃破胡騎於硰石. 至平城, 為胡所囲, 従還軍東垣.
이거기장군종격반한왕신어대 지마읍 수조별강누번이북육현 참대좌상 파호기어무천북. 복종격한신호기진양하 소장졸참호백제장일인. 수조병장연 조 제 양 초거기 격파호기어사석. 지평성 위호소위 종환군동원.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 땅에서 공격했고 마읍(馬邑)에 도착해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누번(樓煩)에서부터 북쪽의 6개현을 함락시켰고, 대(代)의 좌상(左相)을 참수했으며, 무천(武泉) 북쪽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격파했다. 다시 고조를 따라 진양(晉陽) 일대에서 한신의 흉노 기마병을 공격했을 때, 휘하의 장졸들이 흉노족의 백제(白題) 장군 한 사람을 참수했다. 관영은 조서를 받고 연(燕)·조(趙)·제(齊)·양(梁)·초(楚)의 기마 전차부대를 병합해 이끌고 사석(硰石)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격파했다. 평성(平城)에 이르렀을 때 흉노에게 포위되었다가 고조를 따라 동원(東垣)으로 회군했다.
従撃陳豨, 受詔別攻豨丞相侯敞軍曲逆下, 破之, 卒斬敞及特將五人. 降曲逆、盧奴、上曲陽、安國、安平. 攻下東垣.
종격진희 수조별공희승상후창군곡역하 파지 졸참창급특장오인. 항곡역 노노 상곡양 안국 안평, 공하동원.
고조를 따라 진희(陳豨)를 공격했고,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곡역(曲逆) 아래에서 진희의 승상인 후창(侯敞)의 군대를 공격해 물리쳤는데, 휘하의 사병이 후창과 특장(特將) 5명을 참수했고, 곡역(曲逆)·노노(盧奴)·상곡양(上曲陽)·안국(安國)·안평(安平)을 항복시켰다. 동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黥布反, 以車騎將軍先出, 攻布別將於相, 破之, 斬亜將樓煩將三人.
경포반 이거기장군선출 공포별정어상 파지 참아장누번장삼인.
경포가 반락을 일으키자,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먼저 나아가 상(相)에서 경포의 별동대장을 공격해 무찔렀고, 부대장과 누번의 장수 3명을 참수했다.
又進撃破布上柱國軍及大司馬軍. 又進破布別將肥誅. 嬰身生得左司馬一人, 所將卒斬其小將十人, 追北至淮上. 益食二千五百戸. 布已破, 高帝帰, 定令嬰食穎陰五千戸, 除前所食邑.
우진격파포상주국군급대사마군. 우진파포별장비주. 영신생득좌사마일인 소장졸참기소장십인 추북지회상. 익식이천오백호. 포이파 고재귀 정영영식영음오천호 제전소식읍.
또한 진격하여 경포의 상주국(上柱國)과 대사마(大司馬)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 진격해 경포의 별동대장 비주(肥誅)를 격파했다. 관영은 좌사마 한 사람을 생포했고, 휘하의 장졸들이 10명의 소대장을 참수하면서 북쪽으로 회수까지 추격했다. 그 공로로 2천 5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경포를 격파하고 나서, 고조는 귀국해 관영의 영음 땅 5천 호의 식읍을 확정하고 이전의 식읍을 해제했다.
凡従得二千石二人, 別破軍十六, 降城四十六, 定國一, 郡二, 県五十二, 得將軍二人, 柱國、相國各一人, 二千石十人.
범종득이천석이인 별파군십육 항성사십육 정국일 군이 현오십이 득장군이인 주국 상국각일인 이첨석십인.
고조를 따라 2천 석을 받는 관원 2명을 체포하과, 따로 16개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46성을 함락시켰고, 1개 국(國), 2개 군(郡), 52현을 평정했으며, 장군 2명, 주국과 재상 각 1명, 2천 석을 받는 관원 10명을 체포했다.
嬰自破布帰, 高帝崩, 嬰以列侯事孝恵帝及呂太後. 太後崩, 呂祿等以趙王自置為將軍, 軍長安, 為亂.
영자파포귀 고조붕 영이열후사효혜제금여태후. 태후붕 여록등이조왕자치위장군 군장안 위란.
관영이 경포를 격파하고 귀국했을 때, 고조가 붕어했다. 관영은 열후의 신분으로 효혜제와 여태후를 섬겼다. 태후가 붕어하자, 여록(呂祿) 등이 조왕(趙王)의 신분으로 스스로 장군이 되어 장안에 주둔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斉哀王聞之, 挙兵西, 且入誅不當為王者. 上將軍呂祿等聞之, 乃遣嬰為大將, 將軍往撃之. 嬰行至滎陽, 乃與絳侯等謀, 因屯兵滎陽, 風斉王以誅呂氏事, 斉兵止不前. 絳侯等既誅諸呂, 斉王罷兵帰, 嬰亦罷兵自滎陽帰, 與絳侯、陳平共立代王為孝文皇帝. 孝文皇帝於是益封嬰三千戸, 賜黃金千斤, 拝為太尉.
제애왕문지 거병서 차입주부당위왕자. 상장군여록등문지 내견영위대장 장군왕격지. 영행지형양 내여강후등모 인둔병형양 풍제왕이주여씨사 제병지불전. 강후등기주제여 제왕파병귀 영역파병자형양귀 여강후 진평공립대왕위효문황제. 효문황제어시익봉영삼천호 사황금천근 배위태위.
제나라 애왕(哀王)이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동원해 서쪽으로 진격해 장차 왕이 될 수 없는 자를 죽이려고 했다. 상장군(上將軍) 여록 등이 이 소문을 듣고, 곧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치도록 했다. 관영은 출정해 형양에 이르자, 강후(絳侯) 등과 모의해 형양에서 병사를 주둔시켰다. 또 제나라 왕에게 여씨를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제의 군대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강후 등이 여씨 일족을 죽이자, 제나라 왕은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고, 관영 역시 철수해 형양에서 귀국한 뒤 강후·진평과 함께 대나라 왕으로 효문 황제로 세웠다. 효문 황제는 이에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 책봉하고, 황금 1천 근을 하사했으며, 태위(太慰)에 제수했다.
三歳, 絳侯勃免相就國, 嬰為丞相, 罷太尉官.
삼세. 강후발면상취국 영위승상 파태위관.
3년 후, 강후 주발(周勃)이 승상을 그만하고 봉국으로 돌아가자, 관영이 승상이 되어, 태위 벼슬을 그만두었다.
是歳, 匈奴大入北地、上郡, 令丞相嬰將騎八萬五千往撃匈奴. 匈奴去, 済北王反, 詔乃罷嬰之兵. 後歳餘, 嬰以丞相卒, 謚曰懿侯. 子平侯阿代侯. 二十八年卒, 子彊代侯.
시세 흉노대입북지 상군 영승상영장기팔만오천왕격흉노. 흉노거 제북왕반 조내파영지병. 후세여 영이승장졸 시왈의후. 자평후아대후. 이십팔년졸 자강대후.
이해, 흉노들이 대대적으로 북지(北地)와 상군(上郡)으로 침입하자, 황제는 승상 관영에게 기마병 8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흉노를 공격라고 명령했다. 흉노가 퇴각하고, 제북왕(濟北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관영의 흉노 정벌을 멈추게 했다. 1년여가 지난 뒤에 관영이 승상 벼슬에 있다가 죽자 의후(懿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평후(平侯) 관아(灌阿)가 후작을 계승했다. 그가 28년 뒤에 죽자, 아들 관강(灌强)이 제후직을 계승했다.
十三年, 彊有罪, 絶二歳. 元光三年, 天子封潅嬰孫賢為臨汝侯, 続潅氏後, 八歳, 坐行賕有罪, 國除.
십삼년 강유죄 절이세. 원광삼년 천자봉관영손현위임여후 속관씨후 팔세 좌행구유죄 국제.
13년 뒤에 관강이 죄를 지어 2년 동안 후작 계승이 단절되었다. 원광(元光) 3년, 천자가 관영의 손자 관현(灌賢)을 임여후(臨汝候)로 삼고, 관씨(灌氏) 후대를 계승하게 했다. 8년 뒤에 관현이 수뢰죄에 연루되어 처벌되자 봉국은 없어졌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吾適豊沛, 問其遺老, 観故蕭、曹、樊噲、滕公之家, 及其素, 異哉所聞!
태사공왈: 오적풍패 문기유노 관고소 조 번쾌 등공지가 급기소 이제소문!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패현(沛縣)의 풍읍(豊邑)에 가서 그곳 노인들에게 묻고, 옛날 소하(蕭何)·조참(曹參)·번쾌(樊噲)·등공(滕公)의 집과 그들의 평소 사람됨을 살펴보니, 들은 바와 달랐다.
方其鼓刀屠狗売繒之時, 豈自知附驥之尾, 垂名漢廷, 徳流子孫哉? 餘與他広通, 為言高祖功臣之興時若此云.
방기고도도구매증지시 이자지부기지미 수명한정 덕유자손재? 여여타광통 위언고조공신지흥시약차운.
그들이 칼을 휘두르며 개를 잡고 비단을 팔고 있었을 때, 어찌 준마의 꼬리에 붙어 한의 조정에 이름을 드날리고 날리고 은덕이 자손까지 내려 갈 것을 알았겠는가? 나는 번타광(樊他廣)과 교류했는데, 그는 나에게 고조의 공신들이 일어났을 때 이와 같았다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