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耳와 陳餘]
張耳者, 大梁人也. 其少時, 及魏公子毋忌為客. 張耳嘗亡命遊外黃.
장이자 대량인야. 기소시 급위공자무기위객. 장이상망명유외황.
장이(張耳)는 대량(大梁)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위 공자(魏公子) 무기(毋忌)에게 가서 빈객이 된 적이 있었다. 장이는 일찍이 망명하여 외황(外黃)에서 유랑했다.
外黃富人女甚美, 嫁庸奴, 亡其夫, 去抵父客. 父客素知張耳, 乃謂女曰:「必欲求賢夫, 従張耳.」
외황부인여심미 가용노 망기부 법저부객. 부객소지장이 내위여왈 ‘필욕구현부 종장이.’
외황의 한 부잣집 딸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용렬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망쳐서 아버지의 빈객에게 갔다. 아버지의 빈객은 평소에 장이를 알고 있었기에 딸에게 ‘어진 남편을 구하고 싶다면 반드시 장이를 따르거라’라고 했다.
女聴, 乃卒為請決, 嫁之張耳. 張耳是時脫身遊, 女家厚奉給張耳, 張耳以故致千里客. 乃宦魏為外黃令. 名由此益賢.
여창 내졸위청결 가지장이. 장이시시탈신유 여가후봉급장이 장이이고치천리객. 내환위위외황령. 명곡차익현.
그 여자는 이 말을 따라 마침내 그 남편과의 이혼을 도와달라고 청한 뒤 장이에게 시집을 갔다. 장이는 이때 도망을 나와 유랑을 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집에서 장이를 후하게 받들었기 때문에 장이는 천리의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도 부를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위(魏)에서 벼슬에 올라 외황의 현령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陳餘者, 亦大梁人也, 好儒術, 數遊趙苦陘. 富人公乗氏以其女妻之, 亦知陳餘非庸人也. 餘年少, 父事張耳, 両人相與為刎頚交.
진여자 역대량인야 호유술 수유조고형. 부인송승씨이기녀처지 역지진여비용인야. 여년소 부사장이 양인상여위문경교.
진여(陳餘) 또한 대량 사람이다. 유가(儒家)의 학술을 좋아해 조(趙)의 고형(苦陘)이라는 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부자 공승씨(公乘氏)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또한 진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진여가 어렸으므로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그 두 사람은 서로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秦之滅大梁也, 張耳家外黃. 高祖為布衣時, 嘗數従張耳遊, 客數月.
진지멸대량야 장이가외황. 고조위포의시 상수종장이유 객수월.
진(秦)이 대량을 멸망시킬 때에 장이는 외황에 살고 있었다. 일찍이 고조(高祖, 유방)가 평민이었을 때에 여러 차례 장이를 따르며 교유하기도 했고, 몇 달 동안 객이 되기도 했다.
秦滅魏數歳, 已聞此両人魏之名士也, 購求有得張耳千金, 陳餘五百金.
진멸위수세 이문차양인위지명사야 구구유득장이천금 진여오백금.
진은 위(魏)를 멸망시킨 몇 해 만에 이 두 사람이 위나라의 명사(名士)라는 소문을 듣고 현상금을 걸고 이들을 찾았는데 장이는 1천 금, 진여는 5백 금이었다.
張耳、陳餘乃変名姓, 倶之陳, 為里監門以自食. 両人相対. 里吏嘗有過笞陳餘, 陳餘欲起, 張耳躡之, 使受笞. 吏去, 張耳乃引陳餘之桑下而數之曰:「始吾與公言何如? 今見小辱而欲死一吏乎?」陳餘然之. 秦詔書購求両人, 両人亦反用門者以令里中.
장이 진여내변명성 구지진 위리감문이자식. 양인상대. 리리상유과태진여 진여욕기 장이섭지 사수태. 리거 장이내인진여지상하이수지왈 ‘시오여공언하여? 금견소욕이욕사일리호?’ 진여연지. 진조서구구양인 양인역반용문자이영리중.
이에 장이와 진여는 이름을 바꾸고 함께 진(陳)으로 가서 어떤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생활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문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의 관리가 일찍이 잘못이 있다고 진여를 매질했다. 진여가 반항하려고 하자, 장이가 진여의 발을 밟아 매를 맞도록 했다. 관리가 가자 장이가 진여를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서 꾸짖으며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이야기했소? 지금 작은 모욕을 당했다고 일개 관리를 죽이려고 하오?’라고 하자, 진여도 그렇다고 여겼다. 진은 조서(詔書)를 내려 현상금을 걸고 이 두 사람을 찾았는데, 이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로서 마을 안에 조서를 전했다.
陳渉起蘄, 至入陳, 兵數萬. 張耳、陳餘上謁陳渉. 渉及左右生平數聞張耳、陳餘賢, 未嘗見, 見即大喜.
진섭기기 지입진 병수만. 장이 진여상알진섭. 섭급좌우생평수문장이 진여현 미상견 견즉대희.
진섭(陳涉)은 기(蘄)에서 일어나 진(陳)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 군사가 수만 명에 달했다. 장이와 진여가 진섭에게 뵙기를 청했다. 진섭과 좌우의 측근들은 평소에 장이와 진여의 현명함에 대해 자주 들었으나, 아직 만난 적이 없었기에 만나자마자 매우 기뻐했다.
陳中豪傑父老乃説陳渉曰:
진중호걸부노내세진섭왈:
진(陳)의 호걸과 원로들이 진섭을 설득해 말했다.
「將軍身被堅執鋭, 率士卒以誅暴秦, 複立楚社稷, 存亡継絶, 功徳宜為王. 且夫監臨天下諸將, 不為王不可, 願將軍立為楚王也.」
‘장군신피견집예 솔사졸이주폭진 복립초사직 존망단절 공덕의위왕. 차부감임천하제장 불위왕불가 원장군립위초와야’
‘장군은 몸소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은 채, 사졸을 거느리고 저 포악한 진(秦)을 멸해 초(楚)의 사직(社稷)을 다시 세워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후대를 이으셨으니, 그 공과 덕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천하의 여러 장수를 살피고 감독하기 위해서라도 왕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초왕(楚王)이 되어주십시오.’
陳渉問此両人, 両人対曰:
진섭문차양인 양인대왈:
진섭이 두 사람에게 물으니, 두 사람이 대답했다.
「夫秦為無道, 破人國家, 滅人社稷, 絶人後世, 罷百姓之力, 盡百姓之財. 將軍瞋目張膽, 出萬死不顧一生之計, 為天下除殘也.
‘부진위무도 파인국가 멸인사직 절인후세 파백성지력 진백성지재. 장군진목장담 출만사불고일생지계 위천하제잔야.
’저 진(秦)은 무도(無道)해 남의 나라를 파괴하고 사직을 없앴으며, 남의 후세를 끊어놓았고, 백성의 힘을 약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고갈시켰습니다. 장군께서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어 만 번 죽을지언정 한 번 살기를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서 천하를 위해 잔악한 무리를 제거하려고 하십니다.
今始至陳而王之, 示天下私. 願將軍毋王, 急引兵而西, 遣人立六國後, 自為樹黨, 為秦益敵也. 敵多則力分, 與衆則兵彊. 如此野無交兵, 県無守城, 誅暴秦.
금시지진이왕지 시천하사. 원장군무왕 급인병이서 견인입육국후 자위수당 위진익적야. 적다즉역분 여중즉병강. 여차야무교병 현무수성 주폭진.
이제 막 진(陳)에 와서 왕이 되신다면 이는 천하에 사욕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장군께서는 왕위에 오르지 마시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시고, 사람을 파견해 여섯 나라들의 후계자를 세우십시오. 이는 장군에게는 같은 편을 만드는 것이고, 진에게는 적을 보태는 것입니다. 적이 많으면 힘이 분산되고, 무리와 함께하면 병력은 강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들에서는 싸우는 병사가 없게 되고, 현(縣)에서는 성을 지키는 자가 없게 되어, 포악한 진을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拠鹹陽以令諸侯. 諸侯亡而得立, 以徳服之, 如此則帝業成矣. 今獨王陳, 恐天下解也.」
거함양이령제후. 제후망이득립 이덕복지 여차즉제업성의. 금독왕진 공천하해야.’
그리고 난 다음 함양(咸陽)에 웅거해 제후들을 호령하십시오. 그 제후들은 망했다가 다시 일어서게 되었으니, 덕으로써 복종시키십시오. 이와 같다면 제왕의 대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다만 진의 왕이 되신다면 천하가 분열될까 두렵습니다.’
陳渉不聴, 遂立為王. 陳餘乃複説陳王曰:
진섭불청 수립위왕. 진여내복세진왕왈:
그러나 진섭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진여는 이에 다시 진왕(陳王)을 설득해 말했다.
「大王挙梁、楚而西, 務在入関, 未及収河北也. 臣嘗遊趙, 知其豪桀及地形, 願請奇兵北略趙地.」
‘대왕거양 초이서 무재입관 미급수하북야. 더상유조 지기호걸급지형 원청기병북략조지.’
‘대왕께서는 양(梁)과 초(楚)의 병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는 데에 힘을 쓰시느라, 아직 하북(河北)의 땅을 거두어들이지는 못하셨습니다. 신은 일찍이 조(趙)를 유람한 적이 있어서 그곳의 호걸들과 지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기병(奇兵)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조를 공략하기를 바라옵니다.’
於是陳王以故所善陳人武臣為將軍, 邵騒為護軍, 以張耳、陳餘為左右校尉, 予卒三千人, 北略趙地.
어시진왕이고소선진인무신위장군 소소위호군 이장이 진여위좌우교위 여삼천인 북략조지.
이에 진왕(陳王)은 예로부터 친하게 지내던 진(陳) 사람인 무신(武臣)을 장군으로 삼고, 소소(邵騷)를 호군(護軍)으로 삼았으며, 장이와 진여로써 좌우 교위(校尉)를 삼아 3천 명의 병사를 주어 북쪽으로 조를 공략하게 했다.
武臣等従白馬渡河, 至諸県, 説其豪桀曰:
무신등종백마도하 지제현 세기호걸왈
무신 등은 백마(白馬)에서 황하를 건너 여러 현에 이르러 그곳의 호걸들을 설득해 말했다.
「秦為亂政虐刑以殘賊天下, 數十年矣. 北有長城之役, 南有五嶺之戍, 外內騒動, 百姓罷敝, 頭會箕斂, 以供軍費, 財匱力盡, 民不聊生. 重之以苛法峻刑, 使天下父子不相安.
‘진위란정학형이잔적천하 수십년의. 북유장성지역 남유오령지수 외내소동 백성태폐 두외기렴 이공군비 재궤역진 민불료생. 중지이가법준형 사천하부자불상안.
’진(秦)이 혼란한 정치와 가혹한 형벌로써 천하를 잔혹하게 다스리고 해를 끼쳐온 지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奴役)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오령(五嶺)을 수비하는 병역(兵役)이 있었기 때문에 안팎으로 소동이 잦아 백성들은 피폐한 실정인데도 엄중하게 인두세를 거두어들여서 군비로 공급했습니다. 그리하여 재물은 고갈되고, 힘은 다했기에 백성들은 삶을 영위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가혹한 법과 준엄한 형벌로써 백성들을 무겁게 억누르는 까닭에 천하의 사람들이 서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陳王奮臂為天下倡始, 王楚之地, 方二千里, 莫不響應, 家自為怒, 人自為鬥, 各報其怨而攻其讎, 県殺其令丞, 郡殺其守尉. 今已張大楚, 王陳, 使呉広、周文將卒百萬西撃秦.
진왕분비위천하창시 왕초지지 방이천리 막불향응 가자위노 인자위투 명복기원이공기수 현살기영승 군살기수위. 금이장대초 왕진 사오광 주문장졸백만서격진.
이러한 때에 진왕(陳王)께서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천하를 위해 앞장을 서서 초 땅에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방 2천 리의 땅에서 이에 호응하지 않는 곳이 없어 집집마다 스스로 분노하고, 사람마다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제각기 자신들의 원한을 갚고 원수를 공격했기에, 현(縣)에서는 그 영승(令丞)을 죽이고, 군(郡)에서는 그 수위(守尉)를 죽였습니다. 이제 초의 세력을 확장시키시고 진(陳)에서 왕위에 오르시고는 오광(吳廣)과 주문(周文)으로 하여금 1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해 진을 공격하게 하셨습니다.
於此時而不成封侯之業者, 非人豪也. 諸君試相與計之! 夫天下同心而苦秦久矣. 因天下之力而攻無道之君, 報父兄之怨而成割地有土之業, 此士之一時也.」
어차시이불성봉후지업자 비인호야. 제군시상여계지! 부천하부동심이고진구의. 인천하지역이공무도지군 보부형지원이성할지유토지업 차사지일시야.’
이러한 때에 제후에 봉해질 공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호걸이 아닙니다. 모두 한번 서로 잘 생각해보십시오. 무릇 천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진(秦)의 고통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느낍니다. 천하의 힘에 의거해 무도한 군주를 공격해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고, 땅을 나누어 봉토를 받아 일을 이루기 위해 이번은 사내대장부에게 있어서 좋은 기회입니다.’
豪桀皆然其言. 乃行収兵, 得數萬人, 號武臣為武信君. 下趙十城, 餘皆城守, 莫肯下.
호걸개연기언. 내행수병 득수만인 호무신위무신군. 하조십성 여개성수 막긍하.
호걸들은 모두 이 말에 수긍했다. 이리하여 일을 착수해 군대를 거두어들여 수만 명을 얻었으며, 무신(武臣)을 무신군(武信君)이라고 칭했다. 이윽고 조(趙)의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그 나머지는 성을 지키며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乃引兵東北撃範陽. 範陽人蒯通説範陽令曰:「竊聞公之將死, 故弔. 雖然, 賀公得通而生.」範陽令曰:「何以弔之?」対曰:
내인병동북격범양. 범양인괴통세범양령왈 ‘절문공지장사 고조. 수연 하공득통이생.’ 범양령왈 ‘하이조지?’ 대왈: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서 범양(范陽)을 공격했다. 그때 범양 사람인 괴통(蒯通)이 범양령(范陽令)을 설득해 말하기를 ‘공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을 은밀히 듣고 조문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공께서 이 괴통을 얻어 살 수 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다. 범양령이 ‘무엇 때문에 조문한단 말이오?’라고 하자, 괴통이 말했다.
「秦法重, 足下為範陽令十年矣, 殺人之父, 孤人之子, 斷人之足, 黥人之首, 不可勝數.
‘진법중ㄴ 족하위범양령십년의 살인지부 고인지자 단인지족 경인지수 불가승수.
’진(秦)의 법이 준엄해 공께서 범양령이 된 지가 10년 동안 남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아들을 고아로 만들고, 백성의 발을 자르고, 백성의 머리에 경형(黥刑)을 가하는 짓을 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然而慈父孝子莫敢倳刃公之腹中者, 畏秦法耳.
연이자부효자막감사인공지복중자 외진법이.
그렇지만 자애로운 아버지나 효성스러운 아들이 공의 뱃가죽에 비수를 꽂지 못한 것은 진의 법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을 뿐입니다.
今天下大亂, 秦法不施, 然則慈父孝子且倳刃公之腹中以成其名, 此臣之所以弔公也. 今諸侯畔秦矣, 武信君兵且至, 而君堅守範陽, 少年皆爭殺君, 下武信君. 君急遣臣見武信君, 可転禍為福, 在今矣.」
금천하대란 진법불시 연즉자부효자차사인공지복중이성기명 차신지소이조공야. 금제후반진의 무신군병차지 이군견수범양 소년개쟁살군 하무신군. 군급견신견무신군 가전화위복 재령의’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해 진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애로운 아버지나 효성스러운 아들이 공의 뱃가죽에 비수를 꽂아 이름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공을 조문하려는 까닭입니다. 이제 제후들이 진을 배반했고, 무신군의 군사도 곧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공께서 범양을 굳게 지키려 하신다면 젊은이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공을 죽이고 무신군에 항복할 것입니다. 공께서 급히 신을 파견해 무신군을 만나보게 한다면 화를 복으로 돌릴 수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範陽令乃使蒯通見武信君曰:
범양영내사괴통견무신군왈:
범양령은 이에 괴통에게 무신군을 만나게 했는데, 괴통은 이렇게 말했다.
「足下必將戦勝然後略地, 攻得然後下城, 臣竊以為過矣. 誠聴臣之計, 可不攻而降城, 不戦而略地, 傳檄而千里定, 可乎?」
‘족하필장전승연후략지 공득연후하성 신절이위과의. 성청신지계 가불공이항성 부전이략지 전격이천리정 가호?’
‘공께서는 반드시 싸워 이겨 땅을 얻고,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려고 하시는데, 신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신의 계책을 들으신다면 공격하지 않고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며, 싸우지 않고도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격문(檄文)만 전하고도 천 리를 평정할 수가 있을 것인데, 어떻습니까?’
武信君曰:「何謂也?」蒯通曰:
무신군왈 ‘하위야?’ 괴통왈:
무신군이 ‘그것이 무슨 말인가?’라고 묻자, 괴통이 말했다.
「今範陽令宜整頓其士卒以守戦者也, 怯而畏死, 貪而重富貴, 故欲先天下降, 畏君以為秦所置吏, 誅殺如前十城也.
‘금범양령의정돈기사졸이수전자야 겁이외사 탐이중부귀 고욕선천하항 외군이위진소치리 주살여전십성야.
’지금 범양령은 마땅히 그 사졸들을 정돈하여 전투를 준비해야 할 터인데, 겁을 먹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탐욕스러워 부귀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천하의 누구보다도 먼저 항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공께서 이전의 10개의 성에서와 같이 진(秦)이 임명한 관리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然今範陽少年亦方殺其令, 自以城距君. 君何不齎臣侯印, 拝範陽令, 範陽令則以城下君, 少年亦不敢殺其令.
연금범양소년역방살기령 자이성거군. 군하불제신후인 배범양령 범양령즉이성하군 소년역불감살기령.
그리고 지금 범양의 젊은이들 역시 그 현령을 죽이고 자신들이 성을 차지하고 공에게 항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저에게 제후의 인(印)을 주시어 그를 범양령에 제수하신다면 범양령은 성(城)을 들어서 공께 항복할 것이고, 젊은이들도 감히 그 현령을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令範陽令乗朱輪華轂, 使駆馳燕、趙郊. 燕、趙郊見之, 皆曰此範陽令, 先下者也, 即喜矣, 燕、趙城可毋戦而降也. 此臣之所謂傳檄而千里定者也.」
영범양령승주륜화곡 사구치연 조교. 연 조교견지 개왈차범양령 선하자야 즉희의 연 조성가무전이항야. 차신지소위전격이천리정자야.‘
그러고는 범양령으로 하여금 화려한 장식을 한 붉은 수레를 타고 연(燕)과 조(趙)의 교외를 달리게 하십시오. 연과 조 사람들이 교외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고서 모두 “이 사람은 범양령인데, 가장 먼저 항복을 했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연과 조의 성(城)은 싸우지 않고서도 항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격문을 전함으로써 천리를 평정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武信君従其計, 因使蒯通賜範陽令侯印. 趙地聞之, 不戦以城下者三十餘城.
무신군종기계 인사괴통사범양령후인. 조지문지 부전이성하자삼십여성.
무신군은 그의 계책을 좇아 괴통을 사자로 보내어 범양령에게 제후의 인을 하사했다. 조(趙) 땅에서 이러한 소문을 듣고, 싸움하지 않고 항복해온 성이 30여 개나 되었다.
至邯鄲, 張耳、陳餘聞周章軍入関, 至戯卻;又聞諸將為陳王徇地, 多以讒毀得罪誅, 怨陳王不用其筴不以為將而以為校尉. 乃説武臣曰:
지한단 장이 진여문주장군입관 지희각; 우문제장위진왕순지 다이참훼득죄주 원진왕불용기책불이위장이이위교위. 내세무신왈:
한단(邯鄲)에 이르러 장이와 진여는 주장(周章)의 군대가 함곡관에 들어가 희(戱)까지 이르렀다가 퇴각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또한 여러 장수들이 진왕(陳王)을 위해서 땅을 빼앗았으나 참소와 비방으로 죽임을 당한 것을 들었다. 진왕이 자신들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고, 또 자신들을 장수로 삼지 않고 교위로 삼은 것을 원망했다. 이에 무신을 설득해 말했다.
「陳王起蘄, 至陳而王, 非必立六國後. 將軍今以三千人下趙數十城, 獨介居河北, 不王無以填之.
‘진왕기기 지진이왕 비필립육국후. 장군금이삼천인하조수십성 독개거하북 불왕무이전지.
’진왕은 기(蘄) 땅에서 봉기한 뒤 진(陳) 땅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는데, 반드시 육국(六國)의 후대(後代)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장군께서는 현재 3천 명의 군대로써 조의 수십 성을 항복받아서 홀로 하북(河北)에 웅거하고 계시지만 장군께서 왕이 되지 않고서는 이곳을 진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且陳王聴讒, 還報, 恐不脫於禍. 又不如立其兄弟;不, 即立趙後. 將軍毋失時, 時閒不容息.」
차진왕청참 환보 공불탈어화. 우불여립기형제; 불 즉립조후. 장군무실시 시간불용식’
게다가 진왕은 모함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돌아가서 보고를 하더라도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 형제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조의 후손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장군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이 급박하옵니다.”
武臣乃聴之, 遂立為趙王. 以陳餘為大將軍, 張耳為右丞相, 邵騒為左丞相.
무신내청지 수립위조왕. 이진여위대장군 장이위우승상 소소위좌승상.
무신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조왕(趙王)에 즉위했다. 그는 진여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장이를 우승상, 소소(邵騷)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使人報陳王, 陳王大怒, 欲盡族武臣等家, 而発兵撃趙. 陳王相國房君諫曰:「秦未亡而誅武臣等家, 此又生一秦也. 不如因而賀之, 使急引兵西撃秦.」
사인보진왕 진왕대노 욕진족무신등가 이발병격조. 진왕상국방군간왈 ‘진미망이주무신등가 차우생일진야. 불여인이하지 사급인병서격진’
그리고 사람을 시켜 진왕(陳王)에게 알렸다. 진왕은 크게 노하여 무신 등의 집안을 모두 멸하고 군대를 보내 조를 공격하려 했다. 그때 진왕의 상국(相國)인 방군(房君)이 간언하기를 ‘진(秦)이 아직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무신 등의 집안을 모두 죽인다면, 이는 또 다른 하나의 진이 생기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을 축하해주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진을 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陳王然之, 従其計, 徙繋武臣等家宮中, 封張耳子敖為成都君.
진왕연지 종기계 사계무신등가궁중 봉장이자오위성도군.
진왕은 옳다고 여기고, 그의 계책에 따라 무신 집안사람을 궁궐 안에 옮겨 연금하고, 장이의 아들 오(敖)를 성도군(成都君)에 봉했다.
陳王使使者賀趙, 令趣発兵西入関. 張耳、陳餘説武臣曰:
진왕사사자하조 영취발병서입관. 장이 진여세무신왈:
진왕은 사자를 보내어 조왕(趙王)이 된 것을 축하하고,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해 함곡관에 들어갈 것을 재촉했다. 그러자 장이와 진여는 무신을 설득해 말했다.
「王王趙, 非楚意, 特以計賀王. 楚已滅秦, 必加兵於趙. 願王毋西兵, 北徇燕、代, 南収河內以自広. 趙南拠大河, 北有燕、代, 楚雖勝秦, 必不敢制趙.」
‘왕왕조 비초의 특이계하왕. 초이멸진 필가병어조. 원왕무서병 북순연 대 남수하내이자광. 조안거대하 북유연 대 초수승진 필불감제조.’
‘왕께서 조왕이 되신 것은 초나라의 뜻이 아니며, 단지 계획적으로 대왕에게 축하했을 뿐입니다. 초는 진(秦)이 멸망되고 나면 반드시 군사를 더하여 조를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군대를 서쪽으로 움직이지 마시고 북쪽의 연(燕)과 대(代)를 취하시고, 남쪽으로는 하내(河內)를 거두어 스스로 영토를 넓히시기 바랍니다. 조가 남쪽으로는 대하(大河)를 근거로 하고, 북쪽으로는 연과 대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 초가 비록 진을 이긴다고 하더라도 감히 조를 제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趙王以為然, 因不西兵, 而使韓広略燕, 李良略常山, 張黶略上黨.
조왕이위연 인불서병 이사한광략연 이량략상산 장염략상당.
조왕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지 않고, 한광(韓廣)에게는 연을, 이량(李良)에게는 상산(常山)을, 장염(張黶)에게는 상당(上黨)을 각각 공략하게 했다.
韓広至燕, 燕人因立広為燕王. 趙王乃與張耳、陳餘北略地燕界. 趙王閒出, 為燕軍所得.
한광지연 연인인립광위연왕. 조왕내위장이 진여북략지연계. 조왕한출 위연군소득.
한광이 연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연왕(燕王)으로 세웠다. 그러자 조왕은 장이, 진여와 더불어 북쪽으로 진격해 연의 변경을 공격했다. 조왕은 한가한 때에 외출했다가 연나라 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燕將囚之, 欲與分趙地半, 乃帰王. 使者往, 燕輒殺之以求地. 張耳、陳餘患之. 有廝養卒謝其舎中曰:「吾為公説燕, 與趙王載帰.」舎中皆笑曰:「使者往十餘輩, 輒死, 若何以能得王?」
연장수지 욕여분조지반 내귀왕. 사자왕 연첩살지이구지. 장이 진여환지. 유측양졸사기사중왈 ‘오위공세연 여조왕재귀’ 사중개소왈 ‘사자왕십여배 첩사 약하이능득왕?’
연의 장군은 조왕을 가두어두고 조의 땅 절반을 나누어주면 왕을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조의 사자가 가면 조는 그때마다 죽이고 땅을 요구했다. 장이와 진여는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잡일을 하는 병사가 같은 막사의 동료들과 헤어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공(公)을 위해 연을 설득해 조왕과 함께 돌아오겠다.’라고 하자, 동료들이 모두 그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사신으로 10여 차례 갔지만 번번이 죽었는데, 네가 어찌 왕을 구해올 수 있단 말이냐?’라고 했다.
乃走燕壁. 燕將見之, 問燕將曰:「知臣何欲?」燕將曰:「若欲得趙王耳.」
내주연벽. 연장견지 문연장왈 ‘지신하욕?’ 연장왈 ‘약욕득조왕이’
그러나 그는 연의 성벽 아래로 달려갔다. 연 장군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연 장군에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그 연 장군은 ‘너는 조왕을 구하고 싶을 것이다.’라고 했다.
曰:「君知張耳、陳餘何如人也?」燕將曰:「賢人也.」曰:「知其志何欲?」曰:「欲得其王耳.」趙養卒乃笑曰:
왈 ‘군지장이 진여하여인야?’ 연장왈 ‘현인야’ 왈 ‘지기지하욕?’ 왈 ‘욕득기왕이.’ 조양졸내소왈:
이에 그 병사는 ‘공께서는 장이와 진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연 장군은 ‘현인이다.’라고 답했다. 그 병사가 다시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연 장군은 ‘그들의 왕을 구하고 싶겠지.’라고 했다. 조의 잡일을 하는 병사는 이에 웃으며 말했다.
「君未知此両人所欲也. 夫武臣、張耳、陳餘杖馬箠下趙數十城, 此亦各欲南面而王, 豈欲為卿相終己邪? 夫臣與主豈可同日而道哉,
‘군미지차양인소욕야. 부무신 장이 진여장마추하조수십성 차역각욕남면이왕 이욕위경상종기야? 부신여주이가동일이도재.
’공께서는 이 두 사람이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저 무신·장이·진여는 말채찍을 흔드는 것만으로 조의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들도 제각기 남면(南面)하고서 왕이 되고자 하는데, 어찌 경상(卿相)이 되어 몸을 마치려고 하겠습니까? 무릇 신하와 왕의 지위를 어찌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顧其勢初定, 未敢參分而王, 且以少長先立武臣為王, 以持趙心. 今趙地已服, 此両人亦欲分趙而王, 時未可耳. 今君乃囚趙王. 此両人名為求趙王, 実欲燕殺之, 此両人分趙自立. 夫以一趙尚易燕, 況以両賢王左提右挈, 而責殺王之罪, 滅燕易矣.」
고기세초정 미감삼분이왕 차이소장선입무신위왕 이지조심. 금조지이복 차양인역욕분조이왕 시미가이. 금군내수조왕. 차양인명위구조왕 실욕연살지 차양인분조자립. 부이일조상역연 황이양현왕좌제우설 이책살왕지죄 멸연이의.’
조의 세력이 처음 정해질 때를 돌이켜보면 감히 땅을 셋으로 나누어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져 먼저 무신을 왕위에 즉위시켜 조의 인심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조 땅이 모두 안정되니 이 두 사람 역시 조를 나누어 왕이 되려고 합니다. 다만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 조왕을 감금하고 계십니다. 이 두 사람이 명분상 조왕을 구한다고 하지만, 실은 연이 그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두 사람은 조를 반으로 나누어 각기 왕이 될 것입니다. 대체로 하나의 조로도 연을 가볍게 여기는데 하물며 두 명의 현명한 왕이 서로 지지하며 왕을 죽인 죄를 질책한다면, 연을 멸망시키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燕將以為然, 乃帰趙王, 養卒為禦而帰.
연장이위연 내귀조왕 양졸위어이귀.
연 장군은 그의 말이 맞다고 여겨 조왕을 돌려보내었고, 그 잡일을 하는 병사는 마차를 몰아 돌아왔다.
李良已定常山, 還報, 趙王複使良略太原. 至石邑, 秦兵塞井陘, 未能前.
이량이정상산 환보 조왕복사양략태원. 지석읍 진병새정경 미능전.
이량(李良)이 이미 상산을 평정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니, 조왕은 다시 이량에게 태원(太原)을 공략하게 했다. 석읍(石邑)에 이르자 진(秦) 군대가 정형(井陘)을 요새로 삼아 전진할 수 없었다.
秦將詐稱二世使人遺李良書, 不封, 曰:「良嘗事我得顕幸. 良誠能反趙為秦, 赦良罪, 貴良.」良得書, 疑不信. 乃還之邯鄲, 益請兵.
진장사칭이세사인우이량서 불봉 왈 ‘양상사아득현행. 양성능반조위진 사량죄 귀량’ 량득서 의불신. 내환지한단 익청병.
그때 진 장군이 2세 황제의 사자라고 속여 이량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은 겉봉이 봉해져 있지 않았으며 ‘그대는 일찍이 나를 섬기어 귀함과 총애를 누렸다. 그대가 만일 조를 배반하고 진을 위한다면, 그대의 죄를 용서하고 귀하게 대하겠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량은 이 글을 받고 의심하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단으로 돌아가서 증원군을 청하려 했다.
未至, 道逢趙王姊出飲, 従百餘騎. 李良望見, 以為王, 伏謁道旁. 王姊酔, 不知其將, 使騎謝李良. 미지 도봉조자출음 종백여지. 이량망견 이위왕 복알도방. 왕자취 부ㅡ지기장 사기사이량.
그러나 그들이 한단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조왕의 손윗 누이가 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행렬과 만나게 되었는데, 기병 1백여 명이 따르고 있었다. 이량은 멀리서 바라보고 왕이라 여기고 길옆으로 비켜서 엎드려 절했다. 왕의 손윗누이는 술에 취해 그가 장군인 줄도 모르고 기병(騎兵)을 시켜서 이량에게 답례하게 했다.
李良素貴, 起, 慚其従官. 従官有一人曰:「天下畔秦, 能者先立. 且趙王素出將軍下, 今女児乃不為將軍下車, 請追殺之.」이량소귀 기 참기종관. 종관유일인왈 ‘천하반진 능자선립 차조왕소출장군하 금녀아내불위장군하거 청추살지.’
이량은 본래 귀한 신분이었으므로 길에서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부하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부관 한 사람이 말하기를 ‘천하가 진에 반기를 들고 있으니, 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왕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조왕은 본래 장군의 휘하에서 나온 자인데, 지금 그의 누이조차 장군을 위해 수레에서 내리지도 않으니, 제가 쫓아가서 죽이겠습니다.’라고 했다.
李良已得秦書, 固欲反趙, 未決, 因此怒, 遣人追殺王姊道中, 乃遂將其兵襲邯鄲. 邯鄲不知, 竟殺武臣、邵騒. 趙人多為張耳、陳餘耳目者, 以故得脫出. 収其兵, 得數萬人. 客有説張耳曰:「両君羈旅, 而欲附趙, 難;獨立趙後, 扶以義, 可就功.」
이량이득진서 고욕반조 미결 인차노 견인추살왕자도중 내수장기병습한단. 한단부지 경살무신 소소. 조인다위장이 진여이목자 이고득탈출. 수기병 득수만인. 객유세장이왈: ‘양군기여 이욕부조 난; 독립조후 부이의 가취공.’
이량은 이미 진의 서신을 받고 조를 배반하려 하면서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일로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길에서 왕의 누이를 죽이고, 마침내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한단을 습격했다. 한단에서는 이러한 일을 모르고 있었기에, 결국 무신과 소소는 죽임을 당했다. 조 사람들 중에는 장이와 진여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사히 도망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들이니 수만 명이 되었다. 그들의 빈객 중에 어떤 사람이 장이를 설득해 말하기를 ‘두 공께서는 나그네의 몸이기 때문에 조에 귀속하려 해도 어렵습니다. 오직 조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고 의(義)로써 돕는다면 공(功)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乃求得趙歇, 立為趙王, 居信都. 李良進兵撃陳餘, 陳餘敗李良, 李良走帰章邯.
내구득조헐 립위조왕 거신도. 이량진병격진여 진여패이량 이량주귀장한.
이에 그들은 조헐(趙歇)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조왕(趙王)으로 세우고, 신도(信都)에 거주했다. 그때 이량이 진격해 진여를 공격했으나, 진여가 이량을 깨뜨리니 이량은 도망해 장한(章邯)에게 귀의했다.
章邯引兵至邯鄲, 皆徙其民河內, 夷其城郭.
장한인병지한단 개사기민하내 이기성곽.
장한은 군대를 이끌고 한단에 이르러 그곳의 백성을 모두 하내(河內)로 옮기고, 그 성곽(城郭)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張耳與趙王歇走入钜鹿城, 王離囲之. 陳餘北収常山兵, 得數萬人, 軍钜鹿北. 章邯軍钜鹿南棘原, 築甬道屬河, 餉王離. 王離兵食多, 急攻钜鹿. 钜鹿城中食盡兵少, 張耳數使人召前陳餘, 陳餘自度兵少, 不敵秦, 不敢前.
장이여조왕헐주입거록성 왕이위지. 진여북수상산병 득수만인 군거록북. 장한군거록남극원 축용도속하 향왕리. 왕리병식다 금공거록, 거록성중식진병소 장이수사인소전진여 진여자도병소 불적진 불감전.
장이는 조왕 헐과 함께 도망해 거록성(巨鹿城)에 들어갔는데, 왕리(王離)가 이들을 포위했다. 진여는 북쪽으로 가서 상산의 병력을 거두어 수만 명을 얻어 거록성의 북쪽에 주둔시켰다. 장한은 거록성의 남쪽 극원(棘原)에 주둔하고 흙담을 양쪽에서 쌓아올린 제방 길을 만들어 하수(河水)에까지 연결해 왕리에게 군량을 공급했다. 왕리의 군대는 군량이 풍부하자 맹렬하게 거록성을 공격했다. 거록성 안에서는 군량이 거의 바닥나고 병력이 적었다. 장이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진여에게 전진하라고 했으나, 진여는 병력이 적어서 진의 군대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
數月, 張耳大怒, 怨陳餘, 使張黶、陳沢往譲陳餘曰:
수월 장이대노 원진여 사장염 진택왕양진여왈:
이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장이는 크게 노하여 진여를 원망했으며,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을 진여에게 보내 책망했다.
「始吾與公為刎頚交, 今王與耳旦暮且死, 而公擁兵數萬, 不肯相救, 安在其相為死! 苟必信, 胡不赴秦軍倶死? 且有十一二相全.」
‘시오여공위문경교 금왕여이단모차사 이공옹병수만 불긍수구 안재기상위사! 구필신 호불부진군구사? 차유십일이상전.’
‘처음에 나는 공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습니다. 지금 왕과 내가 아침저녁으로 죽을 지경에 빠져 있는데도, 공은 수만 명의 병사를 끼고 앉아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디에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자는 의리가 있단 말이오? 만일 그대에게 신의가 있다면 어찌 진의 군대에 달려들어 함께 죽고자 하지 않는 것이오? 그리하면 열에 한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오.’
陳餘曰:「吾度前終不能救趙, 徒盡亡軍. 且餘所以不倶死, 欲為趙王、張君報秦. 今必倶死, 如以肉委餓虎, 何益?」
진여왈 ‘오도전종불능구조 도진망군. 차여소이불구사 욕이조왕 장군보진. 금필구사 여이육위아호 하익?’
그러자 진여가 말했다. ‘나는 전진해보았자 결코 조나라를 구원할 수 없고, 군대를 모두 잃기만 할 뿐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공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는 것은 조왕과 장공을 위해 진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만일 함께 죽고자 한다면, 이는 굶주린 범에게 고기를 던지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이로움이 있겠소?’
張黶、陳沢曰:「事已急, 要以倶死立信, 安知後慮!」陳餘曰:「吾死顧以為無益. 必如公言.」乃使五千人令張黶、陳沢先嘗秦軍, 至皆沒.
장욤 진택왈 ‘사이급 요이구사입신 안지후려’ 진여왈 ‘오사고이위무익 필여공언.’ 내사오천인영장염 진택선상진군 지개몰.
이에 장염과 진택은 ‘사태가 이미 급박하니 함께 죽음으로써 신의를 세우지, 어찌 이후의 일을 생각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이에 진여는 ‘나는 죽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공들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말하고, 5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장염과 진택을 따르게 해 먼저 시험 삼아 진의 군대에 맞서보았으나, 붙자마자 모두 몰살당했다.
當是時, 燕、斉、楚聞趙急, 皆來救. 張敖亦北収代兵, 得萬餘人, 來, 皆壁餘旁, 未敢撃秦.
당기기 연 제 초문조급 개래구. 장오역북수대병 득만여인 래 개벽여방 미감격진.
이때 연·제·초는 조의 위급함을 듣고 모두 달려와 원조했다. 장오도 북쪽으로 대(代)의 군대를 거두어 만여 명을 얻었는데 이들을 이끌고 와서 모두 진여의 옆에 성벽을 쌓고 주둔했으나, 감히 진을 공격하지 못했다.
項羽兵數絶章邯甬道, 王離軍乏食, 項羽悉引兵渡河, 遂破章邯. 章邯引兵解, 諸侯軍乃敢撃囲钜鹿秦軍, 遂虜王離. 渉閒自殺. 卒存钜鹿者, 楚力也.
항우병수절장한용도 왕리군핍식 항우실인병도하 수차장한. 장한인병해 제후군내감격위거록진군 수노왕리. 섭간자살. 졸존거록자 초력야.
항우(項羽)의 군대는 장한의 군대가 양쪽에서 쌓아올린 길을 여러 번 차단하니, 왕리의 군대는 군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항우가 군대를 모두 이끌고 하수를 건너 마침내 장한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한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서자 제후의 군대는 그제에서야 거록성을 포위하고 있는 진의 군대를 공격해 드디어 왕리를 사로잡았다. 섭간(涉間)은 자살했다. 결국 거록성을 보존하게 한 것은 초의 힘이었다.
於是趙王歇、張耳乃得出钜鹿, 謝諸侯. 張耳與陳餘相見, 責譲陳餘以不肯救趙, 及問張黶、陳沢所在.
어시조왕헐 장이내득출거록 사제후. 장이여진여상견 책양진여이불긍구조 급문장염 진택소재.
이리하여 조왕 헐과 장이는 거록성에서 나와 제후들에게 사례했다. 장이는 진여를 만나자, 진여가 조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꾸짖고 장염과 진택의 소재를 캐물었다.
陳餘怒曰:「張黶、陳沢以必死責臣, 臣使將五千人先嘗秦軍, 皆沒不出.」
진여노왈 ‘장염 진택이필사책신 신사장오천인선상진군 개목불출’
그러자 진여가 노하여 말하기를 ‘장염과 진택은 반드시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고 나를 책망했기에, 제가 그들에게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시험 삼아 진 군에 맞서보도록 했는데, 그들은 모두 몰살당해 빠져나오지 못했소.’라고 했다.
張耳不信, 以為殺之, 數問陳餘. 陳餘怒曰:「不意君之望臣深也! 豈以臣為重去將哉?」乃脫解印綬, 推予張耳.
장이불신 이위살지 수문진여. 진여노왈 ‘불의군지망신심야! 이이신위중거장재?’ 내탈해인수 추여장이.
그러나 장이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진여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해 자주 진여에게 물었다. 그러자 진여가 노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저를 이리도 심히 책망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소! 어찌 제가 장군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아쉽게 여기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장군의 인수(印綬)를 풀어서 장이에게 밀어주었다.
張耳亦愕不受. 陳餘起如廁. 客有説張耳曰:「臣聞『天與不取, 反受其咎』. 今陳將軍與君印, 君不受, 反天不祥. 急取之!」張耳乃佩其印, 収其麾下. 而陳餘還, 亦望張耳不譲, 遂趨出. 張耳遂収其兵.
장이역악불수 진여기여측. 객유세장이왈 ‘신문“천여불취 반구기구”. 금진장군여군인 군불수 반천불상. 급취지!’ 장이내패기인 수기휘하. 이진여환 역망장이불양 수추출. 장이수수기병.
장이도 놀라서 받지 않았다. 진여가 일어나 측간으로 갔다. 그때 객 가운데 한 사람이 장이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장군께서 장군의 인수를 주셨는데 공께서 받지 아니하시니, 이는 하늘을 거역하는 것으로 상서롭지 못합니다. 빨리 그것을 받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장이는 마침내 그 인수를 차고 그 휘하의 사람을 거두었다. 진여는 돌아와서 장이가 그 인수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마침내 급히 그곳을 나와 버렸다. 장이는 마침내 진여의 군대를 거두었다.
陳餘獨與麾下所善數百人之河上沢中漁猟. 由此陳餘、張耳遂有卻.
진여독여휘하소선수백인지하상택중어렵. 유차진여 장이수유각.
진여는 홀로 휘하 중에서 친하게 지내던 수백 명과 함께 하수의 물가에서 낚시와 사냥을 하며 지냈다. 이로 인해 진여와 장이는 결국 틈이 생기게 되었다.
趙王歇複居信都. 張耳従項羽諸侯入関. 漢元年二月, 項羽立諸侯王, 張耳雅遊, 人多為之言, 項羽亦素數聞張耳賢, 乃分趙立張耳為常山王, 治信都. 信都更名襄國.
조왕헐복거신도. 장이종항우제후입관. 한원년이월 항우립제후왕 장이아유 인가위지언 항우역소수문장이현 내분조립장이위상산왕 치신도. 신도경명양국.
조왕 헐은 다시 신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장이는 항우와 제후들을 따라서 함곡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漢) 원년 2월에 항우는 제후들을 왕에 봉했다. 장이는 평소에 널리 교유했기에 그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항우도 평소부터 장이의 현명함에 대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조를 나누어서 장이를 상산왕(常山王)이라 하고, 신도를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신도의 이름을 양국(襄國)으로 바꾸었다.
陳餘客多説項羽曰:「陳餘、張耳一體有功於趙.」項羽以陳餘不従入関, 聞其在南皮, 即以南皮旁三県以封之, 而徙趙王歇王代.
진여객다세항우왈 ‘진여 장이일체유공지조’ 항우이진여불종입관 문기재남피 즉이남피방삼현이봉지 이사조왕헐왕대.
진여의 빈객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항우에게 “진여와 장이는 똑같이 조에 공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항우는 진여가 함곡관으로 들어오는 데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와 또 그가 남피(南皮)에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남피 부근의 세 현을 봉해주었다. 그리고 조왕 헐은 대(代)의 왕으로 옮겼다.
張耳之國, 陳餘愈益怒, 曰:「張耳與餘功等也, 今張耳王, 餘獨侯, 此項羽不平.」
장이지국 진여유익노 왈 ‘장이여여공등야 금장이왕 여독후 차항우불평’
장이가 양국으로 가자, 진여는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장이와 진여는 공이 같은데 지금 장이는 왕이 되고, 이 진여는 제후(侯)일 뿐이니, 이는 항우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及斉王田栄畔楚, 陳餘乃使夏説説田栄曰:
급제왕전영반초 진여내사하열세전영왈: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초에 반기를 들자, 진여는 이에 하열(夏說)을 보내 전영을 설득하게 했다.
「項羽為天下宰不平, 盡王諸將善地, 徙故王王悪地, 今趙王乃居代! 願王仮臣兵, 請以南皮為扞蔽.」
‘항우위천하재불평 진왕제장선지 사고왕왕악지 금조왕내거대! 원왕반신병 청이남피위한폐’
‘항우는 천하를 다스림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여러 장수들을 모두 좋은 땅에 왕으로 봉해주고, 이전의 왕은 나쁜 땅으로 옮겨버렸기에 현재 조왕은 대 땅에 거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신에게 군대를 빌려주십시오. 제가 가진 남피의 땅으로써 엄폐물을 만들겠습니다.’
田栄欲樹黨於趙以反楚, 乃遣兵従陳餘. 陳餘因悉三県兵襲常山王張耳. 張耳敗走, 念諸侯無可帰者, 曰:「漢王與我有舊故, 而項羽又彊, 立我, 我欲之楚.」
전영욕수당어조이반초 내견병종진여. 진여인실삼현병습상산왕장이. 장이패주 념제후무가귀자 왈 ‘한왕여아유구고 이항우우강 입아 아욕지초’
전영은 조에 친교 세력을 심어서 초를 배반하고자 했기에 병사를 파견해 진여를 따르게 했다. 진여는 이리하여 세 현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상산왕 장이를 습격했다. 장이는 패해 도주하게 되었는데 가서 의탁할 만한 제후가 없다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한왕(漢王)과 나는 옛날의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항우가 강한 데다가 나를 왕으로 세워주었으니, 나는 초로 가려 한다.’라고 했다.
甘公曰:「漢王之入関, 五星聚東井. 東井者, 秦分也. 先至必霸. 楚雖彊, 後必屬漢.」
감공왈 ‘한왕지입관 오성위동정. 동정자 진분야. 선지필패 초수강 후필속한’
그때 감공(甘公)이 말했다. ‘한왕이 함곡관에 들어가자 다섯 개의 별이 동정(東井)에 모여들었습니다. 동정은 진(秦)의 분야(分野)입니다. 그곳에 먼저 이르는 사람이 반드시 천하를 제패하게 될 것입니다. 초가 비록 강하지만 뒤에는 반드시 한에 귀속될 것입니다.’
故耳走漢. 漢王亦還定三秦, 方囲章邯廃丘. 張耳謁漢王, 漢王厚遇之.
고이주한. 한왕역환정삼진 방위장한폐구. 장이알한왕 한왕후우지.
이리하여 장이는 한으로 도주했다. 한왕도 그 무렵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나서 막 장한을 폐구(廢口)에서 포위했다. 장이가 한왕을 알현하자 한왕은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陳餘已敗張耳, 皆複収趙地, 迎趙王於代, 複為趙王. 趙王徳陳餘, 立以為代王. 陳餘為趙王弱, 國初定, 不之國, 留傅趙王, 而使夏説以相國守代.
진여이패장이 개복구조지 영조왕어대 복위조왕. 조왕덕진여 입이위대왕. 진여위조왕약 국초정 불지국 유전조왕 이사하열이상국수대.
진여는 이미 장이를 패배시킨 뒤 조의 땅을 모두 회복하고 대(代)에서 조왕을 맞이해 다시 조왕으로 삼았다. 조왕은 진여를 고맙게 생각해 그를 대왕(代王)에 세워주었다. 진여는 조왕이 약하고, 나라가 겨우 안정되었을 뿐이라고 여기고, 자기 나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며 조왕을 보좌했으며, 하열을 상국으로 삼아 대를 지키게 했다.
漢二年, 東撃楚, 使使告趙, 欲與倶. 陳餘曰:「漢殺張耳乃従.」於是漢王求人類張耳者斬之, 持其頭遺陳餘. 陳餘乃遣兵助漢.
한이년 동격초 사사고조 욕여구. 진여왈 ‘한살장이내종’ 어시한왕구인류장이자참지 지기두유진여. 진여내견병조한.
한 2년, 한은 동쪽으로 초를 공격했는데, 사신을 조에 보내어 함께 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진여가 ‘한이 장이를 죽인다면 따르겠소.’라고 하니, 한왕은 장이를 닮은 사람을 찾아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져다 진여에게 주었다. 진여는 이에 군대를 파견해 한을 도왔다.
漢之敗於彭城西, 陳餘亦複覚張耳不死, 即背漢.
한지패어팽성서 진여역복각장이불가 즉배한.
그러나 한이 팽성(彭城)의 서쪽에서 패하고, 진여도 장이가 죽지 않은 사실을 알고는 곧 한을 배반했다.
漢三年, 韓信已定魏地, 遣張耳與韓信撃破趙井陘, 斬陳餘泜水上, 追殺趙王歇襄國. 漢立張耳為趙王.
한삼년 한신이정위지 견장이여한신격파조정형 참진여저수상 추살조왈헐양국. 한립장이위조왕.
한 3년, 한신(韓信)이 이미 위(魏) 땅을 평정하고, 한은 장이를 파견해 한신과 함께 조를 정형(井陘)에서 격파하고, 지수(泜水)의 물가에서 진여를 베고 조왕 헐을 추격해 양국 땅에서 죽였다. 한은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漢五年, 張耳薨, 謚為景王. 子敖嗣立為趙王. 高祖長女魯元公主為趙王敖後.
한오년 장이훙 시위경왕. 자오사립위조왕. 고조장녀노원공주위조왕오후.
한 5년, 장이가 죽자 경왕(景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장이의 아들인 장오(張敖)가 그 뒤를 이어 조왕의 자리에 올랐다. 고조(高祖)의 맏딸인 노원공주(魯元公主)는 조왕 장오의 왕후가 되었다.
[張敖]
漢七年, 高祖従平城過趙, 趙王朝夕袒韝蔽, 自上食, 禮甚卑, 有子婿禮.
한칠년 고조종평성과조 조왕조석단구폐 자상식 예심비 유자서례.
한 7년, 고조는 평성(平城)으로부터 조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조왕은 아침저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두르고 몸소 음식을 올리고 예를 몹시 공손하게 행함으로써 사위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高祖箕踞詈, 甚慢易之. 趙相貫高、趙午等年六十餘, 故張耳客也, 生平為気.
고조기거이 신만이지. 조상관고 조오등년육십여 고장이객야 생평위기.
그런데 고조는 두 발을 내벌리고 앉아 꾸짖는 등 그를 몹시 가볍게 대했다. 조의 재상인 관고(貫高)와 조오(趙午) 등은 나이가 예순이 넘었지만 오래 전부터 장이의 객으로서 평소에 기개가 있었다.
乃怒曰:「吾王孱王也!」説王曰:「夫天下豪桀並起, 能者先立. 今王事高祖甚恭, 而高祖無禮, 請為王殺之!」張敖齧其指出血, 曰:「君何言之誤! 且先人亡國, 頼高祖得複國, 徳流子孫, 秋豪皆高祖力也. 願君無複出口.」貫高、趙午等十餘人皆相謂曰:
내노왈 ‘오왕잔왕야!’ 세왕왈 ‘부천하호걸병기 능자선립. 금왕사고조심공 이고조무례 청위왕살지!’ 장오설기지출혈 왈 ‘군하언지오! 차선인망국 뢰고조득복국 닥유자손 추호개고조역야. 원군무복출구’ 관고 조오등십여인개상위왈:
그들이 이에 노하여 ‘우리의 왕은 나약한 왕이로구나!’라고 말하고는 왕을 설득해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호걸들이 함께 봉기하는 상황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왕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고조를 몹시 공손하게 섬기고 계신데도 고조는 무례하니, 대왕을 위해 그를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장오는 자기의 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공들은 무슨 말을 그렇게 그릇되게 하시오? 선인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때 고조의 힘을 입어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그 덕이 후손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털끝만 한 것도 모두 고조의 힘에 의한 것이오. 공들께서는 다시는 이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기 바라오.’라고 했다. 관고와 조오 등 10여 명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乃吾等非也. 吾王長者, 不倍徳. 且吾等義不辱, 今怨高祖辱我王, 故欲殺之, 何乃汚王為乎? 令事成帰王, 事敗獨身坐耳.」
‘내오등비야. 오왕장자 불배덕. 차오등의불욕 금원고조욕아왕 고욕살지 하내오왕위평? 금사상귀왕 사패독신좌이’
‘이는 우리들이 잘못한 것이오. 우리 왕은 덕행이 있는 분으로 남의 은덕을 배반하지 아니하셨소. 게다가 우리들의 뜻은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에, 고조께서 우리의 왕을 모욕한 것을 원망해 고조를 죽이려 한 것이지 어찌 우리의 왕을 더럽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겠소? 이 일이 성사가 되면 그 공을 왕께 돌리고, 일이 실패하면 우리들이 그 책임을 지도록 합시다.’
漢八年, 上従東垣還, 過趙, 貫高等乃壁人柏人, 要之置廁. 上過欲宿, 心動, 問曰:「県名為何?」曰:「柏人.」「柏人者, 迫於人也!」不宿而去.
한팔년 상종동원환 과조 관고등내벽인박인 요지치측. 상과욕숙 심동 문왈 ‘현명위하?’ 왈 ‘박인’ ‘박인자 박어인야!’ 불숙이거.
한 8년, 고조가 동원(東垣)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에 들렀는데, 관고 등은 박인(柏人)이라는 곳의 숙소의 이중벽에 사람을 숨겨놓고 고조를 죽이려고 했다. 고조가 그곳을 지나다가 머물려고 하는데 가슴이 떨려 와서 ‘이 현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박인이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박인이란 곧 남에게 핍박당한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고 묵지 아니하고 떠났다.
漢九年, 貫高怨家知其謀, 乃上変告之. 於是上皆並逮捕趙王、貫高等, 十餘人皆爭自剄.
한구년 관고원가지기모 내상변고지. 어시상개병체포조왕 관고등 십여인개쟁자경.
한 9년, 관고와 원수지간인 사람이 그들의 음모를 알게 되어 글을 올려 고발했다. 이에 고조는 조왕과 관고 등을 모두 체포했다. 그러자 10여 명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자살했다.
貫高獨怒罵曰:「誰令公為之? 今王実無謀, 而並捕王;公等皆死, 誰白王不反者!」乃轞車膠致, 與王詣長安. 治張敖之罪. 上乃詔趙群臣賓客有敢従王皆族. 貫高與客孟舒等十餘人, 皆自髡鉗, 為王家奴, 従來. 貫高至, 対獄, 曰:「獨吾屬為之, 王実不知.」
관도독노매왈 ‘수영공위지? 금왕실무모 이병포왕; 공등개사 수백왕불반자!’ 내함거교치 여왕지장안. 치장오지죄. 상내조조군신빈객유감종왕개족. 관고여객맹서등십여인 개자곤경 위왕가노 종래. 관고지 대옥 왈 ‘독오속위지 왕실부지’
관고는 홀로 노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누가 공들에게 이러한 일을 시켰는가? 지금 왕께서는 참으로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으셨는데도 왕까지 함께 체포되셨다. 공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누가 왕께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밝히겠는가?’라 고 했다. 그러고는 죄수를 태우는 수레에 꼼짝 못하게 실려 왕과 함께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다. 고조는 장오의 죄를 다스렸는데, 조의 여러 신하와 빈객으로서 감히 왕을 쫓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족속을 멸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관고와 그의 빈객 맹서(孟舒) 등 10여 명들은 모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칼을 쓴 채 왕가의 종이 되어 왕을 따라왔다. 관고는 도착하자 옥관에게 ‘단지 우리들이 한 일이며, 왕께서는 진실로 모르시는 일이오.’라고 했다.
吏治榜笞數千, 刺剟, 身無可撃者, 終不複言. 呂後數言張王以魯元公主故, 不宜有此.
리치방태수천 자철 신무가격자 종불복언. 여후수언장왕이노원공주고 불의유차.
옥리가 수천 대의 곤장을 치고, 쇠로 살을 찔러 그의 몸이 더 이상 때릴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어도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후(呂后)는 조왕이 노원공주 때문에라도 이러한 일을 했을 리 없다고 여러 번 고조에게 말했다.
上怒曰:「使張敖拠天下, 豈少而女乎!」不聴. 廷尉以貫高事辭聞, 上曰:「壯士! 誰知者, 以私問之.」中大夫泄公曰:「臣之邑子, 素知之. 此固趙國立名義不侵為然諾者也.」
상노왈 ‘사장오거천하 이소이여호!’ 불청 정위이관고사사문 상왈 ‘장사! 수지자 이사문지’ 중대부설공왈 ‘신지읍자 소지지. 차고조국립국명의불침위연락자야’
그러자 고조는 화를 내며 ‘만일 장오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당신 딸과 같은 여자가 줄어들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여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위(廷尉)가 관고를 문초한 일을 보고하니, 고조는 ‘장사로구나! 누가 그를 아는 사람이 없는가? 사사로이 물어 보아라.’라고 했다. 그러자 중대부(中大夫)인 설공(泄公)이 말하기를 ‘관고는 신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신은 평소부터 그를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조의 명예와 도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입니다.’라고 했다.
上使泄公持節問之箯輿前. 仰視曰:「泄公邪?」泄公勞苦如生平驩, 與語, 問張王果有計謀不. 高曰: 상사설공지정문지편여전, 앙시왈 ‘설공야?’ 설공노고여생평환 여어 문장왕과유계모불. 고왈: 고조가 설공으로 하여금 황제의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대[竹]로 만든 가마에 앉아 있는 관고를 만나도록 했다. 관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설공인가?’라고 했다. 설공은 평소와 다름없이 친근하게 그의 고통을 위로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오가 과연 역모의 계획을 했는지 안 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관고가 대답했다. 「人情寧不各愛其父母妻子乎? 今吾三族皆以論死, 豈以王易吾親哉! 顧為王実不反, 獨吾等為之.」 ‘인정녕하각애기부모처자호? 금오삼족개이론사 이이왕역오친재! 고위완실불반 독오등위지’ ‘사람의 정으로써 어찌 자기의 부모와 처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지금 나는 삼족(三族)이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어찌 왕과 나의 육친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진실로 대왕께서는 모반하지 않으셨으며, 단지 우리들이 한 것이라네.’ 具道本指所以為者王不知狀. 於是泄公入, 具以報, 上乃赦趙王. 구도본지소이위자왕부지상. 어시설공입 구이보 상내사조왕. 그리고 사건의 진상과 함께 왕은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상황을 자세히 말했다. 이에 설공은 황궁에 들어가 고조에게 모두 보고했고, 고조는 조왕을 풀어주었다. 上賢貫高為人能立然諾, 使泄公具告之, 曰:「張王已出.」因赦貫高. 貫高喜曰:「吾王審出乎?」泄公曰:「然.」泄公曰:「上多足下, 故赦足下.」貫高曰: 상현관고위인능립연락 사설공구고지 왈 ‘장왕이출’ 인사관고. 관고희왈 ‘오왕심출호?’ 설공왈 ‘연’ 설공왈 ‘상다족하 고사족하’ 관고왈: 고조는 신의를 잘 지키는 관고의 사람됨을 훌륭하게 여겨 설공으로 하여금 그동안의 일을 모두 알려주게 했다. 그래서 관고에게 ‘조왕은 벌써 석방되었소.’라고 하고 그를 석방했다. 그러자 관고는 기뻐하면서 ‘우리 대왕께서 정말로 석방되셨는가?’라고 묻자 설공은 ‘그렇소.’라고 대답하고는, 또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그대를 훌륭하다고 여기시어 그대를 사면하셨네.’라고 하니 이 말을 듣고 관고는 말했다. 「所以不死一身無餘者, 白張王不反也. 今王已出, 吾責已塞, 死不恨矣. 且人臣有簒殺之名, 何面目複事上哉! 縦上不殺我, 我不愧於心乎?」 ‘소이불사일신무여자 백장왕불반야. 금왕이출 오책이새 사불한의 차인신유찬살지명 하면목북사상재! 종상불살아 아불괴어심호?’ ‘내가 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으면서도 죽지 아니한 것은 조왕께서 모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네. 그런데 지금 왕께서 이미 석방되셨으니 나의 책임은 다한 것이므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네. 하물며 신하로서 그 임금을 시해하려 했다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주를 섬기겠는가? 설령 임금께서 나를 죽이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乃仰絶肮, 遂死. 當此之時, 名聞天下. 내앙절항 수사. 당차지시 명문천하.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목의 혈관을 끊고 죽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張敖已出, 以尚魯元公主故, 封為宣平侯. 於是上賢張王諸客, 以鉗奴従張王入関, 無不為諸侯相、郡守者. 及孝恵、高后、文帝、孝景時, 張王客子孫皆得為二千石. 장오이출 이상노원공주고 봉위선평후. 어시상현장왕제객 이겸노종장왕입관 무불위제후상 군수자, 급효혜 고후 문제 효경시 장왕객자손개득위이천석. 장오는 석방되어 나온 뒤, 노원공주의 배우자라는 것으로 인해 선평후(宣平侯)에 봉해졌다. 고조가 조왕의 여러 빈객들을 훌륭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칼을 차고 노비가 되어 조왕을 따라 함곡관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들로서 제후의 재상이나 군수 등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혜(孝惠)·고후(高后)·문제(文帝)·효경(孝景) 때에 이르러 조왕의 빈객들의 자손은 모두 2천 석의 녹을 받았다. 張敖, 高后六年薨. 子偃為魯元王. 以母呂後女故, 呂後封為魯元王. 元王弱, 兄弟少, 乃封張敖他姫子二人:壽為樂昌侯, 侈為信都侯. 高后崩, 諸呂無道, 大臣誅之, 而廃魯元王及樂昌侯、信諸侯. 장오 고후육년훙. 자언위노원왕. 이모여후여고 여후봉위노원왕. 원왕약 형제소 내봉장오타희자이인: 수위악창후 이위신도후, 고후붕 제여무도 대신주지 이폐노원왕급악창후 신도후. 장오는 고후 6년에 죽었다. 그리고 아들인 언(偃)은 노원왕(魯元王)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여후의 딸이었기 때문에 여후는 그를 노원왕에 봉했다. 노원왕은 나약하고 형제가 적었다. 그리하여 장오의 다른 여자에게서 얻은 두 아들도 봉했는데, 그중 수(壽)는 낙창후(樂唱侯)가 되었고, 치(侈)는 신도후(信都侯)가 되었다. 고후가 죽자 여씨(呂氏) 일족이 무도(無道)했기 때문에 대신들이 그들을 죽이고, 노원왕과 낙창후, 신도후도 폐위시켰다. 孝文帝即位, 複封故魯元王偃為南宮侯, 続張氏. 효문제즉위 복봉고노원왕언위남궁후 속장씨. 효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노원왕 언을 남궁후(南宮侯)에 봉해 장씨의 뒤를 잇게 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張耳、陳餘, 世傳所稱賢者;其賓客廝役, 莫非天下俊桀, 所居國無不取卿相者. 태사공왈 : 장이 진여 세전소칭현자; 이빈객시역 막비천하준걸 소거국무불취경상자.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세상에 현자(賢者)라고 전해진다. 그들의 빈객들과 종들까지도 천하의 준걸이 아닌 사람이 없어서 그들이 사는 나라에서 경상(卿相)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然張耳、陳餘始居約時, 相然信以死, 豈顧問哉. 及拠國爭権, 卒相滅亡. 연장이 진여시거약시 상연신이사 이고문재, 급거국쟁권 졸상멸망. 그러나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천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망설임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何郷者相慕用之誠, 後相倍之戻也! 豈非以勢利交哉? 名譽雖高, 賓客雖盛, 所由殆與大伯、延陵季子異矣. 하향자상모용지성 후상배지루야! 이비이세리교재? 명예수고 빈객수성 소유태여대백 연증계자이의. 어찌해 예전에는 서로 사모하고 신뢰함이 진실하더니, 뒤에는 서로 배반하게 되었구나! 어찌 권세와 이익으로써 사귄 것이 아니겠는가? 명예가 비록 높고, 설령 빈객이 많다고 해도 그들이 걸어온 길은 아마도 태백(太伯)이나 연릉(延陵)의 계자(季子)와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