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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世家-晉世家


<진의 건국과 분열>

 

晉唐叔虞者, 周武王子而成王弟. , 武王與叔虞母会時, 夢天謂武王曰:「余命女生子, 名虞, 余與之唐.及生子, 文在其手曰, 故遂因命之曰虞.

진당숙우자 주무왕자이성왕제. 초 무왕여숙우모회시 몽천위무왕왈 여명여생자 명우 여여지당급생자 문재기수왈 고수인명지왈우

 

()나라 당숙우(唐叔虞)는 주()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요, 성왕(成王)의 동생이다. 일찍이 무왕이 숙우의 어머니와 동침할 때 꿈에 천신이 무왕에게 내가 너에게 아들 하나를 낳게 할 터이니 이름을 우()라 하라. 내가 당()을 그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무왕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손에 ()’라는 무늬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을 우라 했다.

 

武王崩, 成王立, 唐有亂, 周公誅滅唐. 成王與叔虞戯, 削桐葉為珪以與叔虞, :「以此封若.史佚因請択日立叔虞. 成王曰:「吾與之戯耳.史佚曰:「天子無戯言. 言則史書之, 礼成之, 樂歌之.於是遂封叔虞於唐.

무왕붕 성왕립 당유란 주공주멸당. 성왕여숙우희 삭동엽위규이여숙우 왈 이차봉약사일인청택일립숙우. 성왕왈 오여지희이사일왈 천자무희언 언즉사서지 예성지 악가지어시수봉숙우어당

 

무왕이 죽고, 성왕이 위에 오르고 당에 난이 일어나 주공(周公)이 당을 멸망시켰다. 성왕이 숙우와 놀다가 오동나무 잎으로 규()를 만들어 숙우에게 주면서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라고 했다. 사일(史佚)이 날을 잡아 숙우를 제후로 세우라고 청했다. 성왕은 내가 그와 장난을 쳤을 뿐이다.’라 했다. 사일은 천자에게는 농담이 없습니다. 천자의 말은 역사에 기록되고 법이되고 후세에 교훈되는 악()이 되는 겁니다했다. 이에 결국 숙우를 당에 봉했다.

 

唐在河汾之東, 方百里, 故曰唐叔虞. 姓姫氏, 字子于.

당재하 분지동 방백리 고왈당숙우. 성희씨 자자우.

 

당은 황하와 분하(汾河) 동쪽의 사방 100리의 땅이다. 그래서 당숙우라 불렀는데, 성은 희()요 자는 자우(子于)이다.

 

唐叔子燮, 是為晉侯. 晉侯子寧族, 是為武侯. 武侯之子服人, 是為成侯. 成侯子福, 是為厲侯. 厲侯之子宜臼, 是為靖侯. 靖侯已來, 年紀可推. 自唐叔至靖侯五世, 無其年數.

당숙자섭 시위진후. 진후자영족 시위무후. 무후지자복인 시위성후. 성후자복 시위여후. 여후지자의그 시위정후. 정후이래 년기가추. 자당숙지정후오세 무기연수.

 

당숙의 아들 섭()이 진후(晉侯)이다. 진후의 아들 영족(寧族)이 무후(武侯)이다. 무후의 아들 복인(服人)이 성후(成侯)이다. 성후의 아들 복()이 여후(厲侯)이다. 여후의 아들 의구(宜臼)가 정후(靖侯)이다. 정후부터는 연대를 추산할 수 있으나, 당숙부터 정후에 이르는 5대는 연대가 없다.

 

靖侯十七年, 周厲王迷惑暴虐, 国人作亂, 厲王出奔于彘, 大臣行政, 故曰共和.

정후십칠년 주여왕미혹포학 국인작란 여왈출분우체 대신행정 고왈 공화

 

정후 17(기원전 842)에 주()나라 여왕(厲王)이 어리석고 포학하여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니 여왕은 체()나라로 달아났다. 대신들이 정치를 대행했으므로 공화(共和)’라 했다.

 

十八年, 靖侯卒, 子釐侯司徒立. 釐侯十四年, 周宣王初立.

십팔년 정후졸 자리후사도립. 리후십사년 주선왕초립.

 

18년에 여후가 죽고, 아들 리후(釐侯) 사도(司徒)가 위에 오르고 리후 14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十八年, 釐侯卒, 子献侯籍立. 献侯十一年卒, 子穆侯費王立.

십팔년 리후졸 자헌후적립. 헌후십일년졸 자목후비왕립.

 

18년에 리후가 죽고, 아들 헌후(獻侯) ()이 섰다. 헌후 11년에 죽고, 아들 목후(穆侯) 비왕(費王)이 이었다.

 

穆侯四年, 取斉女姜氏為夫人. 七年, 伐条. 生太子仇. 十年, 伐千畝, 有功. 生少子, 名曰成師. 晉人師服曰:「異哉, 君之命子也! 太子曰仇, 仇者讎也. 少子曰成師, 成師大号, 成之者也. , 自命也, 自定也. 今適庶名反逆, 此後晉其能毋亂乎?」

목후사년 취제녀강씨위부인. 칠년 벌조. 생태자구. 십년 벌천무 유공. 생소자 명왈성사. 진인사복왈 이재 군지명자야 태자왈구 구자수야 소자왈성사 성사대호 성지자야. 명 자명야 물 자정야. 금적서명반역 차후진기능무란호

 

목후 4년에 제나라의 여자 강씨(姜氏)를 부인으로 삼았다. 7년에 조()나라를 정벌했다. 태자 구()가 태어났다. 10년에 천무(千畝)의 땅을 정벌하는 공을 세웠다. 작은 아들을 얻어 성사(成師)라 이름을 지었다. ()나라 사람 사복(師服)이상하구나, 주군의 아들 이름 짓는 법이! 태자를 구()라 했는데 구란 원수 아닌가. 그리고 작은아들은 성사라 했는데, 성사란 큰 이름인데다 무엇을 이룬다는 뜻이요. 이름은 나름의 운명이 있고, 사물은 나름 정해진 질서가 있거늘 지금 적자와 서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니 이것이 훗날 진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二十七年, 穆侯卒, 弟殤叔自立, 太子仇出奔. 殤叔三年, 周宣王崩. 四年, 穆侯太子仇率其徒襲殤叔而立, 是為文侯.

이십칠년 목후졸 제상숙자립 태자구출분. 상숙삼년 주선왕붕. 사년 목후태자구솔기도습상숙이립 시위문후.

 

27년에 목후가 죽자, 아우 상숙(殤叔)이 위에 오르니 태자 구는 도망쳤다. 상숙 3년에 주나라 선왕이 세상을 떠났다. 4년에 목후의 태자 구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삼촌 상숙을 습격하여 자리에 오르니 이가 문후(文侯)이다.

 

文侯十年, 周幽王無道, 犬戎殺幽王, 周東徙. 而秦襄公始列為諸侯.

문후십년 주유왕무도 견융살유왕 주동사. 이진양공시열위제후.

 

문후 10(기원전 771)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무도(無道)하여 견융(犬戎)이 유왕을 죽이자, 주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진()나라 양공(襄公)이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三十五年, 文侯仇卒, 子昭侯伯立.

삼십오년 문후구졸 자소후백립.

 

35년에 문후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 ()이 즉위했다.


 

昭侯元年, 封文侯弟成師于曲沃. 曲沃邑大於翼. , 晉君都邑也. 成師封曲沃, 号為桓叔. 靖侯庶孫欒賓相桓叔. 桓叔是時年五十八矣, 好徳, 晉国之衆皆附焉. 君子曰:「晉之亂其在曲沃矣. 末大於本而得民心, 不亂何待!

소후원년 봉문후제성사우곡옥. 곡옥읍대어익. 익 진군도읍야. 성사봉곡옥 호위환숙. 정후서계난빈상환숙. 환숙시년오십팔의 호덕 진국지중개부언. 군자왈 진지란기재곡옥의 말대어본이득민심 불란하대

 

소후 원년에 문후의 동생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곡옥의 성읍(城邑)이 익성(翼城)보다 커졌다. 익성은 진나라 주군의 도읍(=수도)이다. 성사는 곡옥에 봉해져 환숙(桓叔)으로 불렸다. 정후의 서손(庶孫) 난빈(欒賓)이 환숙의 재상이 되었다. 환숙이 이때 쉰여덟 살이었는데 덕을 즐겨 베푸니,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군자가 ()의 난은 곡옥에 있다. 가지가 줄기보다 크고 민심까지 얻었으니 어찌 난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七年, 晉大臣潘父弑其君昭侯而迎曲沃桓叔. 桓叔欲入晉, 晉人発兵攻桓叔. 桓叔敗, 還帰曲沃. 晉人共立昭侯子平為君, 是為孝侯. 誅潘父.

칠년 진대신반보시기군소후이영곡옥환숙. 환숙욕입진 진인발병공환숙. 환숙패 환귀곡옥. 진인공립소후자평위군 시위효후 주반보.

 

7년에 진나라의 대신 반보(潘父)가 그 국군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 환숙을 맞아들였다. 환숙이 진나라로 들어가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환숙을 공격했다. 환숙이 실패하고 곡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진나라 사람들은 함께 소후의 아들 평()을 주군으로 세우니 이가 효후(孝侯)이다. 반보를 주벌하였다.

 

孝侯八年, 曲沃桓叔卒, 子鮮代桓叔, 是為曲沃荘伯.

효후팔년 곡옥환숙졸 자선대환숙 시위곡옥장백.

 

효후 8년에 곡옥 환숙이 죽고, 아들 선()이 환숙을 대신하니 이가 곡옥 장백(莊伯)이다.

 

孝侯十五年, 曲沃荘伯弑其君晉孝侯于翼. 晉人攻曲沃荘伯, 荘伯复入曲沃. 晉人复立孝侯子郄為君, 是為鄂侯.

효후십오년 곡옥장백시기군진효후우익. 진인공곡옥장백 장백복입곡옥. 진인복립효후자극위군 시위악후.

 

효후 15년에 곡옥 장백이 진()의 군주 효후를 익성에서 시해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곡옥 장백을 공격하자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들어갔다. 진나라 사람들이 다시 효후의 아들 극()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악후(鄂侯)이다.

 

鄂侯二年, 魯隠公初立.

악후이년 노은공초립.

 

악후 2년에 노나라의 은공(隱公)이 새로 즉위했다.

 

鄂侯六年卒. 曲沃荘伯聞晉鄂侯卒, 乃興兵伐晉. 周平王使虢公将兵伐曲沃荘伯, 荘伯走保曲沃. 晉人共立鄂侯子光, 是為哀侯.

악후육년졸. 곡옥장백문진악후졸 내흥병벌진. 주평왕사괵동장병벌곡옥장백. 장백주보곡옥. 진인공립악후자광 시위애후.

 

악후는 즉위 6년에 죽었다. 곡옥 장백은 진나라 악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했다. 주나라 평왕이 괵공(虢公)에게 군사를 이끌고 곡옥 장백을 토벌하게 하니, 장백은 달아나 곡옥을 지켰다. 진나라 사람들이 함께 악후의 아들 광()을 세우니 이가 애후(哀侯)이다.

 

哀侯二年曲沃荘伯卒, 子称代荘伯立, 是為曲沃武公. 哀侯六年, 魯弑其君隠公.

애후이년곡옥장백졸 자칭대장백립. 시위곡옥무공. 애후육년 노시기순은공.

 

애후 2년에 곡옥의 장백이 죽고, 그 아들 칭()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곡옥 무공(武公)이다. 애후 6년에 노()나라가 그 주군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哀侯八年, 晉侵陘廷. 陘廷與曲沃武公謀, 九年, 伐晉于汾旁, 虜哀侯. 晉人乃立哀侯子小子為君, 是為小子侯.

애후팔년 진침형정. 형정여곡옥무공모 구년 벌진우분방 노애후. 진인내립애후자소자위군 시위소자후.

 

애후 8년에 진()나라가 형정(陘廷)을 침공했다. 형정은 곡옥 무공과 모의하여 9년 분하 근처에서 진나라를 공격하여 애후를 사로잡았다. 진나라 사람들이 바로 애후의 아들 소자(小子)를 군주로 옹립하니 이가 소자후(小子侯)이다.

 

小子元年, 曲沃武公使韓萬殺所虜晉哀侯. 曲沃益彊, 晉無如之何.

소자원년 곡옥무공사한만살소노진애후. 곡옥익강 진무여지하.

 

소자 원년에 곡옥 무공이 한만(韓萬)을 시켜 포로로 잡힌 애후를 죽였다. 곡옥이 더 세졌고, 진나라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晉小子之四年, 曲沃武公誘召晉小子殺之. 周桓王使虢仲伐曲沃武公, 武公入于曲沃, 乃立晉哀侯弟緡為晉侯.

진소자지사년 곡옥무공유소진소자살지. 주환공사괵중벌곡옥무공 무공입우곡옥 내립진애후제민위진후.

 

소자 4년에 곡옥 무공이 소자를 유인하여 죽였다. 주나라 환왕(桓王)이 괵중(虢仲)을 보내어 곡옥 무공을 토벌하자, 무공은 곡옥으로 들어갔고 (괵중은) 진나라 애후의 동생 민()을 진후(晉侯)로 세웠다.

 

晉侯緡四年, 宋執鄭祭仲而立突為鄭君.

진후민사년 송집정제중이립돌위정군.

 

진후 민 4년에 송()나라가 정()나라의 대부 제중(祭仲)을 후원하여 돌()을 정나라의 군주로 옹립했다.

 

晉侯十九年, 斉人管至父弑其君襄公.

진후십구년 제인관지보시기군양공

 

진후 19년에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가 그 군주 양공(襄公)을 시해했다.

 

晉侯二十八年, 斉桓公始霸. 曲沃武公伐晉侯緡, 滅之, 尽以其宝器賂献于周釐王. 釐王命曲沃武公為晉君, 列為諸侯, 於是尽併晉地而有之.

진후이십팔년 제환공시패. 곡옥무공벌진후민 멸지 진이기보기뢰헌우주리왕. 리왕명곡옥무공위진군 열위제후 어시진병진지이유지.

 

진후 28(기원전 681)에 제나라 환공이 처음으로 패자(覇者)가 되었다. 곡옥 무공이 진후 민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보물을 모조리 주나라 리왕(釐王)에게 뇌물로 바쳤다. 리왕은 곡옥 무공을 진나라의 주군으로 삼아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무공은) ()나라의 땅 전부를 아울러 차지했다.

 

曲沃武公已即位三十七年矣, 更号曰晉武公. 晉武公始都晉国, 前即位曲沃, 通年三十八年.

곡옥무공이즉위삼십칠년의 경호왈진무공. 진무공시도진국 전즉위곡옥 통년삼십팔년.

 

곡옥 무공은 즉위 37년째 진()나라 무공(武公)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진나라 무공이 비로소 진에 도읍을 정했다. 이전 곡옥의 재위 기간까지 모두 38년이다.

 

武公称者, 先晉穆侯曾孫也, 曲沃桓叔孫也. 桓叔者, 始封曲沃. 武公, 荘伯子也. 自桓叔初封曲沃以至武公滅晉也, 凡六十七歳, 而卒代晉為諸侯.

무공칭자 선진목후증손야 곡옥환숙손야. 환숙자 시봉곡옥. 무공 장백자애. 자환숙초봉곡옥이지무공멸진야 범육십칠세 이졸대진위제후.

 

무공 칭은 이전 진나라 목후(穆侯)의 증손이며, 곡옥 환숙의 손자이다. 환숙이 처음으로 곡옥에 봉해졌고 무공은 장백의 아들이다. 환숙이 처음 곡옥에 봉해진 이후 무공이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67년이 걸려 마침내 진나라를 대신하여 제후가 된 것이다.

 

武公代晉二歳, . 與曲沃通年, 即位凡三十九年而卒. 子献公詭諸立.

무공대진이세 졸. 여곡옥통년 즉위범삼십구년이졸 자헌공위제립.

 

무공이 진나라를 대신한 지 2년 만에 죽었다. 곡옥에서의 햇수를 합쳐 즉위 총 39년 만에 죽은 것이다. 아들 헌공(獻公) 궤제(詭諸)가 들어섰다.

 

献公元年, 周恵王弟穨攻恵王, 恵王出奔, 居鄭之櫟邑.

헌공원년 주혜왕제퇴공혜왕 혜왕출분 거정지역읍.

 

헌공 원년에 주나라 혜왕의 동생 퇴()가 혜왕을 공격했다. 혜왕은 도망쳐 나와 정나라의 역읍(櫟邑)에 머물렀다.

 

五年, 伐驪戎, 得驪姫驪姫弟, 倶愛幸之.

오년 벌여융 득여희 여희제 구애생지.

 

5년에 (헌공이) 여융(驪戎)을 정벌하여 여희(驪姬)와 여희의 동생을 얻었는데, 둘 모두를 아꼈다.

 

八年, 士蔿説公曰:「故晉之群公子多, 不誅, 亂且起.乃使尽殺諸公子, 而城聚都之, 命曰絳, 始都絳.

팔년 사위설공왈 고진지군공자다 불주 난차기내사진살제공자 이성취도지 명왈강 시도강.

 

8년에 대부 사위(士蔿)가 헌공에게 예로부터 진나라는 공자들이 많아서 주벌하지 않으면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공자들을 다 죽이게 하고는 취()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고 강()이라 하니 도읍으로서의 강이 시작되었다.

 

九年, 晉群公子既亡奔虢, 虢以其故再伐晉, 弗克.

구년 진군공자기망분괵 괵이기고재벌진 불극.

 

9년에 진나라의 공자들이 이미 괵나라로 망명하니 괵나라는 이를 구실로 진나라를 다시 정벌하러 나섰으나 이기지 못했다.

 

十年, 晉欲伐虢, 士蔿曰:「且待其亂.

십년 진욕벌괵 사위왈 차대기란

 

10년에 진나라가 괵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사위가 그들이 난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했다.

 

 

十二年, 驪姫生奚斉. 献公有意廃太子, 乃曰:「曲沃吾先祖宗廟所在, 而蒲邊秦, 屈邊翟, 不使諸子居之, 我懼焉.於是使太子申生居曲沃, 公子重耳居蒲, 公子夷吾居屈. 献公與驪姫子奚斉居絳. 晉国以此知太子不立也.

십이년 여희생해제. 헌공유의폐태자 내왈 곡옥오선조종묘소재 이포변진 굴변적 불사제자거지 아구언어시사태자신생거곡옥 공자중이거포 공자이오거굴. 헌공여여희자해제거강. 진국이차지태자불립야.

 

12년에 여희가 해제(奚齊)를 낳았다. 헌공은 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으로 곡옥은 우리 선조의 사당이 있는 곳이고, 포읍(蒲邑)은 진()나라와 가까우며, 굴읍(屈邑)은 적()나라와 가까워 아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면 내가 두렵다.’라 했다. 이에 태자 신생(申生)은 곡옥에, 공자 중이(重耳)는 포읍에, 공자 이오(夷吾)는 굴읍에 머물게 했다. 헌공과 여희의 아들 해제는 강()에 머물렀다. 진나라 사람들은 태자가 즉위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太子申生, 其母斉桓公女也, 曰斉姜, 早死. 申生同母女弟為秦穆公夫人. 重耳母, 翟之狐氏女也. 夷吾母, 重耳母女弟也. 献公子八人, 而太子申生重耳夷吾皆有賢行. 及得驪姫, 乃遠此三子.

태자신생 기모제환공녀야 왈제강 조사. 신생동모여제위진목공부인. 중이모 적지호씨녀야. 이오모 중이모여재야. 헌공자팔인 이태자신생 중이 이오개유현행 급득여희 내원차삼자.

 

태자 신생의 어머니는 제나라 환공의 딸인 제강(齊姜)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신생과 어머니가 같은 여동생은 진()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이 되었다. 중이의 어머니는 적()나라 호씨(狐氏)의 딸이었다. 이오의 어머니는 중이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헌공의 여덟 아들들 중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 이오가 유능했으나 여희를 얻고 난 뒤로 이 세 아들과 멀어졌다.

 

 

十六年, 晉献公作二軍. 公将上軍, 太子申生将下軍, 趙夙御戎, 畢萬為右, 伐滅霍, 滅魏, 滅耿. , 為太子城曲沃, 賜趙夙耿, 賜畢萬魏, 以為大夫.

십육년 진헌공작이군. 공장상군 태자신생장하군 조숙어융 필만위우 벌멸경 멸위 멸경. 환 위태자성곡옥 사조숙경 사필만위 이위대부.

 

16년에 진나라 헌공이 2군을 만들어 헌공은 상군을, 태자 신생은 하군을 각각 거느렸다. 조숙(趙夙)은 무기를, 필만(畢萬)은 호위를 담당하여 괵()나라, ()나라, ()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돌아와 태자에게는 곡옥에 성을 쌓게 하고, 조숙과 필만에게는 각각 경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주고 대부로 삼았다.

 

士蔿曰:「太子不得立矣. 分之都城, 而位以卿, 先為之極, 又安得立! 不如逃之, 無使罪至. 為呉太伯, 不亦可乎, 猶有令名.太子不従.

사위왈 태자부득립의 분지도성 이위이경 선위지극 우안득립 불여도지 무사죄지 위오태백 불역가호 유유영명태자불종.

 

사위가 태자께서는 (국군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을 나누어 받고 경의 자리에 올라 갈 데까지 갔으니 어찌 오를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서 죄를 피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나라 태백(太伯)처럼 해서 좋은 명성을 남기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태자는 따르지 않았다.  

 

卜偃曰:「畢萬之後必大. , 盈數也, 大名也. 以是始賞, 天開之矣. 天子曰兆民, 諸侯曰萬民, 今命之大, 以従盈數, 其必有衆.

복언왈 필만지후필대 만 잉수야 위 대명야 이시시상 천개지의 천자왈조민 제후왈만민 금명지대 이종잉수 기필유중

 

복언(卜偃)필만의 후손들이 틀림없이 커질 것이다. ()은 꽉 찬 숫자이고, ()는 크고 높다는 뜻이다. 이런 위나라 땅을 상으로 주었으니 하늘이 복을 열어 준 것이다. 천자에게는 많은 백성이 있고, 제후에게는 만민이 있다. 지금 이처럼 큰 뜻으로 상을 내려 수를 가득 채우게 했으니 틀림없이 무리들이 따를 것 아닌가?’라고 했다.

 

, 畢萬卜仕於晉国, 遇屯之比. 辛廖占之曰:「. 屯固比入, 吉孰大焉. 其後必蕃昌.

초 필만복사어진국 우둔지비. 신료점지왈 길 둔고비입 길집대언 기후필번창

 

당초 필만이 진나라에서의 벼슬에 대해 점을 쳤더니 ()’ 괘에서 ()’ 괘로 변하는 점괘가 나왔다. 신료(辛廖)의 점은 길하다. 둔은 단단하고 비는 들어간다는 뜻이니 이보다 더 길한 괘가 어디 있을까!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했다.

 

十七年, 晉侯使太子申生伐東山.

십칠년 진후사태자신생벌동산

 

17년에 헌공이 태자 신생에게 동산(東山)을 정벌하게 했다.

 

里克諫献公曰:「太子奉冢祀社稷之粢盛, 以朝夕視君膳者也, 故曰冢子. 君行則守, 有守則従, 従曰撫軍, 守曰監国, 古之制也. 夫率師, 専行謀也誓軍旅, 君與国政之所図也非太子之事也. 師在制命而已, 稟命則不威, 専命則不孝, 故君之嗣適不可以帥師. 君失其官, 率師不威, 将安用之?」

이극간헌공왈 태자봉총사사직지자성 이조석시군선자야 고왈총자. 군행즉수 유수즉종 종왈무군 수왈감국 고지제야. 부솔사 전행모야 서군여 군여국정지소도야 비태자지사야. 사재제명이이 품명즉불위 전명즉불고 고군지사적불가이수사. 군실기관 솔사불위 장안용지

 

이극(里克)이 헌공에게 이렇게 간했다. ‘태자는 종묘의 제사와 사직의 제물을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군주의 식사를 시중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총자(冢子, 적자 맏아들)’라 합니다. 군주가 행차하면 안에서 지키고, 군주가 안에서 지키면 따릅니다. 따르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하고,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하는데 오래된 제도입니다. 군대를 이끌며 전략을 전담하는 일과 군대를 호령하는 일은 군주와 정경대부들이 꾀하는 것이지 태자의 일이 아닙니다. 군의 통솔은 명령의 통제에 있는데 일마다 지시를 받아야 한다면 위엄을 잃게 되고, 함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불효입니다. 그래서 군주의 적자는 군대를 통솔하지 않는 것입니다. 군주가 직무 임명의 원칙을 잃어 태자의 군대 통솔도 위엄을 잃는다면 장차 태자를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公曰:「寡人有子, 未知其太子誰立.里克不対而退, 見太子. 太子曰:「吾其廃乎?」里克曰:「太子勉之! 教以軍旅, 不共是懼, 何故廃乎且子懼不孝, 毋懼不得立. 修己而不責人, 則免於難.

헌공은 과인에게 아들이 몇 있지만 누구를 태자로 세울지 모르는 일이오.”라고 했다. 이극이 대꾸하지 않고 물러나와 태자를 만났다. 태자가 내가 폐위되겠지요?”라고 묻자 이극은 태자께서는 애를 쓰십시오. 군에 명령을 내리되 일을 완수하지 못할까 걱정한다면 폐위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으로서 불효가 아닐까 걱정하실 일이지 자리를 잇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면 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太子帥師, 公衣之偏衣, 佩之金玦. 里克謝病, 不従太子. 太子遂伐東山.

태자가 군대를 이끌자 헌공은 태자에게 좌우 색이 다른 옷을 입고 청동제 패옥을 차게 했다. 이극이 병을 핑계로 태자를 따르지 않았다. 태자가 마침내 동산을 정벌했다.

 

十九年, 献公曰:「始吾先君荘伯武公之誅晉亂, 而虢常助晉伐我, 又匿晉亡公子, 果為亂. 弗誅, 後遺子孫憂.乃使荀息以屈産之乗仮道於虞. 虞仮道, 遂伐虢, 取其下陽以帰.

십구년 헌공왈 시오선군장백 무공지주진란 이괵상조진벌아 우익진망공자 과위란. 불주 후유자손우내사순식이굴산지승가도어우. 우가도 수벌괵 취기하양이귀.

 

19년에 헌공은 예전 우리 선대 군주이신 장백과 무공께서 진()나라의 난을 평정하셨을 때 괵()나라는 늘 진()나라를 도와 우리를 공격했고, 또 진()나라에서 망명한 공자를 숨겨주더니 결국 난을 일으켰다. 토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자손들에게 근심을 남길 것이다.’라 했다. 이에 순식(荀息)에게 굴읍(屈邑)에서 나는 말을 타고 우()나라의 길을 빌리게 했다. 우나라가 길을 빌려주자 마침내 괵나라를 토벌하여 하양(下陽)을 취하고 돌아왔다.

 

献公私謂驪姫曰:「吾欲廃太子, 以奚斉代之.驪姫泣曰:「太子之立, 諸侯皆已知之, 而數将兵, 百姓附之, 柰何以賎妾之故廃適立庶君必行之, 妾自殺也.驪姫詳誉太子, 而陰令人譖悪太子, 而欲立其子.

헌공사위여희왈 오욕폐태자 이해제대지여희읍왈 태자지립 제후개이지지 이수장병 백성부지 내하이천첩지고폐적립서 군필행지 첩자살야여희상예태자 이음령인참오태자 이욕립기자.

 

헌공이 사사로이 여희에게 내가 태자를 폐하고 해제로 그를 대신하고 싶다.’고 했다. 여희가 울면서 태자의 계승은 제후들이 다 알고 있고, 여러 차례 군대를 통솔하여 백성들이 태자를 따르는데 천첩 때문에 어떻게 태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운단 말씀입니까? 국군이 꼭 그렇게 하시겠다면 첩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라 했다. 여희는 태자를 치켜세우는 것 같았지만 몰래 사람을 시켜 태자에 대해 나쁜 말을 하게 하면서 자기 아들을 세우고자 했다.

 

二十一年, 驪姫謂太子曰:「君夢見斉姜, 太子速祭曲沃, 帰釐於君.太子於是祭其母斉姜於曲沃, 上其薦胙於献公. 献公時出猟, 置胙於宮中. 驪姫使人置毒薬胙中.

이십일년 여희위태자왈 군몽견제강 태자속제곡옥 귀리어군태자어시제기모제강어곡옥 상기천조어헌공. 헌공시출렵 치조어궁중. 여희사인치독약조중.

 

21년에 여희가 태자에게 군주께서 꿈에서 제강을 보셨다 하니 태자께서는 서둘러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돌아와 제수용 고기를 군주께 드리도록 하세요.’라 했다. 이에 태자는 곡옥에서 그 어머니 제강에게 제를 올리고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드렸다. 헌공이 마침 사냥 나가고 없어서 고기를 궁중에 두었다. 여희가 사람을 시켜 고기에 독약을 넣었다.

 

居二日, 献公従猟來還, 宰人上胙献公, 献公欲饗之. 驪姫従旁止之, :「胙所従來遠, 宜試之.祭地, 地墳與犬, 犬死與小臣, 小臣死.

거이일 헌공종렵래환 재인상조헌공 헌공욕향지. 여희종방지지 왈 조소종래원 의시지제지지분 여견 견사 여소신 소신사.

 

이틀 뒤 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주방장이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올렸다. 헌공이 그것을 먹으려 하자 옆에 있던 여희가 헌공을 제지하여 제사 고기가 먼 곳에서 왔으니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 하고는 (술을) 땅에 부으니 땅이 부풀어 올랐다. (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가 죽었고, 어린 환관에게 주니 어린 환관도 죽었다.

 

驪姫泣曰:「太子何忍也! 其父而欲弑代之, 況他人乎且君老矣, 旦暮之人, 曾不能待而欲弑之!謂献公曰:「太子所以然者, 不過以妾及奚斉之故. 妾願子母辟之他国, 若早自殺, 毋徒使母子為太子所魚肉也. 始君欲廃之, 妾猶恨之至於今, 妾殊自失於此.

여희읍왈 태자하인야 기부이욕시대지 황타인호 차군노의 단모지인 증불능대이욕시지위헌공왈 태자소이연자 불과이첩급해제지고 첩원자모피지타국 약조자살 무도사모자위태자소어육야. 신군욕폐지 첩유한지 지어금 첩수자실어차.’

 

여희가 울면서 태자가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가! 그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하려 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군주께서 연로하여 아침일지 저녁일지 모르는데 그걸 못 기다리고 시해하려 하다니!’라 하고는 헌공에게 태자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신첩과 해제 때문입니다. 신첩은 아들과 다른 나라로 피하길 원합니다. 일찌감치 자살하더라도 우리 모자가 태자의 발 아래 짖밟히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초 국군께서 태자를 폐위시키려고 하셨을 때 첩이 오히려 그것을 좋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보니 첩이 크게 실수했습니다.’라고 했다.

 

太子聞之, 奔新城. 献公怒, 乃誅其傅杜原款. 或謂太子曰:「為此薬者乃驪姫也, 太子何不自辞明之?」太子曰:「吾君老矣, 非驪姫, 寝不安, 食不甘. 即辞之, 君且怒之. 不可.或謂太子曰:「可奔他国.太子曰:「被此悪名以出, 人誰内我我自殺耳.

태자문지 분신성. 헌공노 내주기부두원관. 혹위태자 위차약자내여희야 태자하불자사명지태자왈 오군노의 비여희 침불안 식불감. 즉사지 군차노지 불가혹위태자왈 가분타국태자왈 피차오명이출 인수내아 아자살이

 

태자가 이 소식을 듣고 곡옥에 지은 새로운 성(新城)으로 달아났다. 헌공은 노하여 태자의 사부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누군가 태자에게 독약을 넣은 사람은 여희인데 태자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태자는 우리 주군께서 연로하여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히 못 주무시고 먹어도 맛을 모르시오. 해명을 한다면 주군께서 여희에게 화를 낼 것이니 안 됩니다.’라고 했다. 또 어떤 자가 태자에게 다른 나라로 도망해도 되는데.’라 하자 태자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나가봤자 누가 날 받아주겠소? 내가 자살하면 그만이오.’라고 했다.

 

十二月戊申, 申生自殺於新城.

십이월무신 신생자살어신성

 

12월 무신일에 신생이 신성에서 자살했다.

 

此時重耳夷吾來朝. 人或告驪姫曰:「二公子怨驪姫譖殺太子.驪姫恐, 因譖二公子:「申生之薬胙, 二公子知之.二子聞之, , 重耳走蒲, 夷吾走屈, 保其城, 自備守.

차시중이 이오래조. 인혹고여희왈 이공자원여희참살태자여희공 인참이공자 신생지약조 이공자지지이자문지 공 중이주포 이오주굴 보기성 자비수.

 

이때 중이와 이오가 헌공을 알현했다. 누군가 여희에게 두 공자는 여희께서 태자를 중상하여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희는 겁이 나서 두 공자에 대해 신생이 제사 고기에 약을 넣는 것을 두 공자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중상했다. 두 공자가 이를 듣고는 두려워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는 굴읍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며 스스로를 수비했다.

 

, 献公使士蔿為二公子築蒲屈城, 弗就. 夷吾以告公, 公怒士蔿. 士蔿謝曰:「邊城少冦, 安用之?」退而歌曰:「狐裘蒙茸, 一国三公, 吾誰適従!卒就城. 及申生死, 二子亦帰保其城.

초 헌공사사위이이공자축포 굴성 불취. 이로이고공 공노사위. 사위사왈 변성소구 안용지퇴위가왈 호구몽이 일국삼공 오수적종졸취성. 내신생사 이자역귀보기성.

 

당초 헌공은 사위(士蔿)에게 두 공자를 위해 포읍과 굴읍의 성을 쌓게 했으나 일을 끝내지 않고 있었다. 이오가 이를 헌공에게 보고하자 헌공은 사위에게 화를 냈다. 사위는 변방의 성읍에 도적도 적은데 어디다 쓰려 하십니까?’라며 사죄하고 물러나와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 털이 어수선하구나. 한 나라에 공자가 셋, 내가 누구를 따라야 할꼬!’라는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성은 완공되었고, 신생이 죽자 두 공자가 그들의 성으로 돌아가 지킨 것이다.

 

二十二年, 献公怒二子不辞而去, 果有謀矣, 乃使兵伐蒲. 蒲人之宦者勃鞮命重耳促自殺. 重耳踰垣, 宦者追斬其衣袪. 重耳遂奔翟.

이십이년 헌공노이자불사이거 과유모의. 내사병벌포. 포인지환자발제먕중이촉자살. 중이유담 환자추참기의거. 중이수분적.

 

22년에 헌공은 두 아들이 말도 없이 돌아간 것에 화를 내며 정말 모반할 것으로 생각하여 군대를 보내 포읍을 치게 했다. 포읍 사람 환관 발제(勃鞮)가 중이에게 자살할 것을 재촉했다. 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났고, 환관이 뒤를 쫓아 옷소매를 베었다. 중이는 마침내 적()나라로 도망갔다.

 

使人伐屈, 屈城守, 不可下.

사인벌굴 굴성수 불가하

 

(헌공은) 굴읍도 토벌하게 했으나 굴읍은 성을 굳게 지켜 함락시킬 수 없었다.

 

 

驪姫弟生悼子.

여희제생도자

 

여희의 동생이 도자(悼子)를 낳았다.

 

二十六年夏, 斉桓公大会諸侯於葵丘. 晉献公病, 行後, 未至, 逢周之宰孔. 宰孔曰:「斉桓公益驕, 不務徳而務遠略, 諸侯弗平. 君弟毋会, 毋如晉何.献公亦病, 复還帰. 病甚, 乃謂荀息曰:「吾以奚斉為後, 年少, 諸大臣不服, 恐亂起, 子能立之乎?」荀息曰:「.献公曰:「何以為験?」対曰:「使死者复生, 生者不慚, 為之験.於是遂属奚斉於荀息. 荀息為相, 主国政.

이십육년하 제환공대회제후어규구. 진헌공병 행후 지미 봉주디재공. 재공왈 제환공익교 불무덕이무원략 제후불평. 군제무회 무여진하언공역병 복환귀. 병심 내위순식왈 오이해제위후 년소 제대신불복 공란기 자능립지호순식왈 헌공왈 가이위험대활 사사자복생 생자불참 위지험어시수속해제어순식. 순식위상 주국정.

 

26(기원전 651) 여름에 제나라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큰 회맹을 가졌다. ()나라 헌공(獻公)은 병이 나서 늦게 출발하여 도착하지 못했는데 마침 주나라 왕실의 재공(宰孔)을 만났다. 재공이 제나라 환공이 갈수록 교만해져 덕을 닦지 않고 변방을 공략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니, 제후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군주께서 회맹에 가지 않는다 해서 진나라를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공이) 병이 심해져 순식에게 내 후사로 해제를 생각하는데 나이가 어려 여러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킬까 두렵소. 그대가 해제를 세울 수 있겠소?’라 했다. 순식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헌공은 무엇으로 증거를 삼겠소?’라고 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다 해도 산 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할 것임을 보증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해제를 순식에게 맡기고, 순식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주도하게 했다.

 

秋九月, 献公卒. 里克邳鄭欲内重耳, 以三公子之徒作亂, 謂荀息曰:「三怨将起, 晉輔之, 子将何如?」荀息曰:「吾不可負先君言.

추구월 헌공졸. 이극 비정욕내중이 이삼공자지도작란 위순식왈 삼원장기 진 진보지 자장하혀순식왈 오불가부선군언

 

가을 9월에 헌공이 죽었다. 이극과 비정(邳鄭)은 중이를 맞아들이고자 세 공자의 무리로 난을 일으키고는 순식에게 우리 세 사람의 원한에다가 진()나라, ()나라가 이를 돕고 있으니 그대는 어찌 하려는가?’라 하자 순식은 내가 선군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라고 했다.

 

十月, 里克殺奚斉于喪次, 献公未葬也. 荀息将死之, 或曰不如立奚斉弟悼子而傅之, 荀息立悼子而葬献公. 十一月, 里克弑悼子于朝, 荀息死之. 君子曰:「詩所謂白珪之玷, 猶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為也, 其荀息之謂乎! 不負其言., 献公将伐驪戎, 卜曰歯牙為禍. 及破驪戎, 獲驪姫, 愛之, 竟以亂晉.

시월 이극살해제우상차 헌공미장야. 순식장사지 혹왈불여립해제도자이부기 순식립도다이장헌공. 십일월 이극살도가우조 순식사지. 군자왈 시소위자규지점 유가마야 사언지점불기위야기순식지위호 불부기언초 헌공장벌여융 복왈 ;이위화급파여융 호여희 애지 경이난진.

 

10월에 이극이 장례식에서 해제를 살해했다. 헌공을 미처 묻지 못했다. 순식이 따라 죽으려 하자 누군가가 해제의 동생 도자를 옹립하여 그를 돕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자 순식이 도자를 세우고 헌공을 안장했다. 11월에 이극이 조정에서 도자를 시해하자 순식은 따라서 죽었다. 군자들이 시경백옥의 이지러진 부분은 갈아 없앨 수 있으나 말이 잘못되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니 순식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라 했다. 당초 헌공이 여융을 정벌하면서 점을 쳤는데 치아가 화근이다라 했다. 여융을 격파하고 여희를 얻어 예뻐했으나 결국은 그 때문에 진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이다.

 

里克等已殺奚斉悼子, 使人迎公子重耳於翟, 欲立之. 重耳謝曰:「負父之命出奔, 父死不得脩人子之礼侍喪, 重耳何敢入! 大夫其更立他子.還報里克, 里克使迎夷吾於梁. 夷吾欲往, 呂省郤芮曰:「内猶有公子可立者而外求, 難信. 計非之秦, 輔彊国之威以入, 恐危.乃使郤芮厚賂秦, 約曰:「即得入, 請以晉河西之地與秦.及遺里克書曰:「誠得立, 請遂封子於汾陽之邑.

이극등이살해제 도자 사인영공자중이어적 욕립지. 중이사왈 부부지면출분 부사부득수인자지예시상 중이가감입 대부기경립타자환보이극 이극사영이오어양. 이오욕왕 여성 극예왈 내유공자가립자이외구 수신. 계비지진 보강국지위이입 공위내사극케후뢰진 약왈 즉득입 청이진하서지지여진내견리극서왈 사득립 청수봉자어분양지읍

 

이극 등이 해제와 도자를 죽이고 적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 중이를 맞아들여 옹립하고자 했다. 중이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나라 밖으로 도망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의 예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이 중이가 어찌 감히 들어간단 말이오? 대부께서는 다른 아들을 세우시오.’라며 사양했다. 돌아와 이극에게 보고하자 이극은 양나라에 가 있는 이오에게 사람을 보내 맞이하려 했다. 이오가 가려하자 여성(呂省)과 극예(郤芮)안에 세울 만한 공자가 있는데 밖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나라와 같은 강한 나라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 들어갔다간 위험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극예에게 후한 뇌물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게 해서는 돌어갈 수만 있다면 진()나라의 하서 땅을 진()나라에게 줄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이극에게도 편지를 보내 정말 자리에 오른다면 분양(汾陽) 성읍을 그대에게 봉해주겠다.’라 했다.

 

秦繆公乃発兵送夷吾於晉. 斉桓公聞晉内亂, 亦率諸侯如晉. 秦兵與夷吾亦至晉, 斉乃使隰朋会秦倶入夷吾, 立為晉君, 是為恵公. 斉桓公至晉之高梁而還帰.

진목공내발병송이로어진. 제환공문진내란 역솔제후여진. 진병여이오역지진 제내사습붕회진구입이오 립어진군 시위혜공. 제환공지진지고양이환귀.

 

()나라 목공(穆公)은 바로 군대를 내어 이오를 진나라로 호송했다. 제나라 환공은 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후를 이끌고 진으로 갔다. ()나라의 군대와 이오가 진에 이르자 제나라는 바로 습붕(隰朋)을 시켜 진()나라와 합류하여 함께 이오를 입국시켜 진나라의 국군으로 옹립하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제나라 환공은 진()나라의 고량(高梁)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恵公夷吾元年, 使邳鄭謝秦曰:「始夷吾以河西地許君, 今幸得入立. 大臣曰:『地者先君之地, 君亡在外, 何以得擅許秦者?』寡人争之弗能得, 故謝秦.亦不與里克汾陽邑, 而奪之権.

혜공이오원년 사비정사진왈 시이오이하서지허군 금행득입립. 대신왈 지자선군지지 군망재외 하이득천허진자과인쟁지불능득 고사진역불여이극붕양읍 이탈지권.

 

혜공 이오 원년에 비정을 진()나라에 보내 처음 이오가 하서를 국군께 드리기로 하고 지금 다행히 귀국하여 자리에 올랐습니다. 대신들이 "영토란 先君의 땅인데 나라 밖에 망명하셨던 주군이 어찌 마음대로 진()나라에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기에 과인이 이들과 다투기까지 했으나 어쩔 수 없어 이렇게 진에 사죄하는 것입니다.’라고 사과하게 했다. 또 이극에게는 분양의 땅을 주지 않고 그 권력을 빼앗았다.

 

四月, 周襄王使周公忌父会斉秦大夫共礼晉恵公. 恵公以重耳在外, 畏里克為変, 賜里克死. 謂曰:「微里子寡人不得立. 雖然, 子亦殺二君一大夫, 為子君者不亦難乎?」里克対曰:「不有所廃, 君何以興欲誅之, 其無辞乎乃言為此! 臣聞命矣.遂伏剣而死. 於是邳鄭使謝秦未還, 故不及難.

사월 주양왕사주공기부회제 진대부공예진혜공. 혜공이중이재외 외리극위변 사리극사. 위왈 미리자과인불득립. 수연 자역살이군일대부 위자군자불역난호이극대왈 불유소폐 군하이흥 욕주지 기무사호 내언위차 신문명의수복검이사. 어시비정사사진미환 고불급란

 

4월에 주나라 양왕(襄王)이 주공(周公) 기보(忌父)를 보내 제나라와 진()나라의 대부와 만나 함께 晉나라 혜공에게 인사를 가기로 했다. 혜공은 중이가 국외에 있고 이극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이극에게 죽음을 내리며 '그대가 없었더라면 과인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대 역시 두 국군과 한 대부를 죽였으니 그대의 주군으로 어찌 난처하지 않겠소?'라고 했다. 이극은 '폐위시키지 않고서 주군께서 어찌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저를 죽이고 싶은데 어찌 구실이 없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은 명을 따를 뿐입니다.'라 하고는 마침내 검에 엎어져 죽었다, 이 때 비정은 진()나라에 사죄의 사죄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난이 미치지 않았다.

 

晉君改葬恭太子申生.

진군개장공태자신생

진나라의 군주가 태자 신생의 무덤을 개장했다.

 

, 狐突之下国, 遇申生, 申生與載而告曰:「夷吾無礼, 余得請於帝, 将以晉與秦, 秦将祀余.狐突対曰:「臣聞神不食非其宗, 君其祀毋乃絶乎君其図之.申生曰:「, 吾将复請帝. 後十日, 新城西偏将有巫者見我焉.許之, 遂不見. 及期而往, 复見, 申生告之曰:「帝許罰有罪矣, 獘於韓.児乃謠曰:「恭太子更葬矣, 後十四年, 晉亦不昌, 昌乃在兄.

추 호돌지하국 우신생 신생여대이고왈 이오무례 여득청어제 장이진여진 진장사여호돌대왈 신문신불식비기종 군기사무내절호 군기도기신생왈 허 오장복청제 후십일 신성서편장유무자견아언허지 수불현. 급기이왕 복견 신생고지왈 제허벌유죄의 폐어한아급요왈 공태자경장의 후십사년 진역불창 창내재형

 

가을에 호돌(狐突)이 곡옥으로 갔다가 (꿈에서) 신생을 만났다. 신생이 (수레를) 함께 타자면서 '이오가 무례하다. 내가 天帝께 청하여 진()나라를 진()나라에 주게 하면 진()나라가 내 제사를 지내 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호돌이 '신이 듣기에 신령은 그 종친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는데, 그렇다면 주군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 아닙니까? 주군께서는 이 점을 살피십시오.'라고 대응했다. 신생이 '그렇군. 내가 다시 천제께 청하겠다. 열흘 뒤 신성(新城) 서쪽 편의 무당이 내 혼령을 보게 할 것이다.'라 했다. 그러겠노라 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날이 되어 갔더니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신생은 호돌에게 '천제께서 죄 있는 자를 벌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한원(韓原)에서 패하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아이들은 '() 태자의 무덤을 개장했다네. 14년이 지나면 晉나라는 번창하지 못한다네. 번창은 형에게 있겠지.'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邳鄭使秦, 聞里克誅, 乃説秦繆公曰:「呂省郤称冀芮実為不従. 若重賂與謀, 出晉君, 入重耳, 事必就.秦繆公許之, 使人與帰報晉, 厚賂三子.

비정사진 문리극주 내설짐목공왈 여성 극칭 기예실위불종 약중뢰여모 출진군 입중이 사필취진목공허지 사인여귀보진 후뢰삼자.

 

()나라에 사신으로 간 비정은 이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나라 목공을 설득하길 '여성, 극칭(郤稱), 기예는 확실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후한 뇌물로 그들과 공모하면 진의 국군을 내쫓고 중이를 입국시키는 일은 분명 성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나라 목공은 이를 허락하고 사람을 시켜 함께 진()나라를 답방하게 하는 한편 세 사람에게 뇌물을 후하게 보냈다.

 

三子曰:「幣厚言甘, 此必邳鄭売我於秦.遂殺邳鄭及里克邳鄭之党七輿大夫. 邳鄭子豹奔秦, 言伐晉, 繆公弗聴.

삼자왈 폐후감언 차필비정매아어진수살비정급리극 비정지당칠여대부. 비정자표분진 언벌진 목공불청.

 

세 사람은 '선물은 후하고, 말은 달콤한 것이 비정이 우리를 秦나라에 팔려는 것이 분명하다.'라 하고는 마침내 비정, 이극, 비정의 무리 일곱 대부를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邳豹)는 진()나라로 달아나서 晉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목공은 듣지 않았다.

恵公之立, 倍秦地及里克, 誅七輿大夫, 国人不附.

혜공지립 배긴지급이극 주칠여대부 국인불부

 

혜공이 들어서고 진()나라와 이극에게 한 약속을 어긴데다 일곱 대부를 죽이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二年, 周使召公過礼晉恵公, 恵公礼倨, 召公譏之.

이년 주사소공과례진혜공 혜공예거 소공기지

 

2년에 주나라가 소공(召公) ()를 진나라 혜공에게 보내 인사를 드리게 했는데 혜공이 거만하게 굴자 소공이 그를 조롱했다.

 

四年, 晉饑, 乞糴於秦. 繆公問百里奚, 百里奚曰:「天菑流行, 国家代有, 救菑恤鄰, 国之道也. 與之.邳鄭子豹曰:「伐之.繆公曰:「其君是悪, 其民何罪!卒與粟, 自雍属絳.

사년 진기 걸적어진. 목공문백리해 백리해왈 천묘유행 국가대유 구묘휼린 국지도야 여지비정자표왈 벌지목공왈 기군시오 기민하죄졸여속 자옹속강.

 

4년에 진()나라에 기근이 들자 진()나라에 식량을 사겠다고 청했다. 목공이 백리해(百里奚)에게 묻자 백리해는 천재지변은 돌고 도는 것이라 나라마다 번갈아가며 생깁니다. 재난에 빠진 이웃을 구하고 돕는 것은 무리의 도리이니 주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비정의 아들 비표는 저들을 정벌합시다.’라고 했다. 목공은 그 주군이 나쁘지 인민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라며 마침내 식량을 보내니 (그 선박의 행렬이) ()에서 강읍(絳邑)에까지 이어졌다.

 

五年, 秦饑, 請糴於晉. 晉君謀之, 慶鄭曰:「以秦得立, 已而倍其地約. 晉饑而秦貸我, 今秦饑請糴, 與之何疑而謀之!虢射曰:「往年天以晉賜秦, 秦弗知取而貸我. 今天以秦賜晉, 晉其可以逆天乎遂伐之.恵公用虢射謀, 不與秦粟, 而発兵且伐秦. 秦大怒, 亦発兵伐晉.

오년 진기 청적어진. 진군모지 경정왈 이진득립 이이배기지약. 진기이진대아 금진기청적 여기하의 이모지괵사왈 왕년천이진사진 진부지취이대아. 금천이진사진 진기가이역천호 수벌지혜공용괵사모 불여진속 이발명차벌진. 진대노 역발병벌진.

 

5년에 진()나라에 기근이 들어 진()나라에게 식량을 사겠다고 청했다. ()나라의 주군이 이를 상의하자 경정(慶鄭)진나라의 도움으로 자리에 오르셨고 땅을 주기로 한 약속도 어긴 바 있습니다. 진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진()나라는 우리에게 양식을 팔았습니다. 지금 진()나라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사겠다고 청하니 주는 것이 마땅하거늘 무슨 의심이 들어 상의를 한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괵석(虢射)지난 해 하늘이 진()나라를 진()나라에게 주고자 하셨을 때 진()나라는 그 기회를 취하지 않고 우리에게 식량을 팔았습니다. 지금 하늘이 진()나라를 우리 진()나라에게 주시고자 하는데 진나라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나라를 정벌합시다.’라고 했다. 혜공은 괵석의 계획을 채용하여 진()나라에 식량을 팔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했다. ()나라는 크게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토벌했다

 

六年春, 秦繆公将兵伐晉. 晉恵公謂慶鄭曰:「秦師深矣, 柰何?」鄭曰:「秦内君, 君倍其賂晉饑秦輸粟, 秦饑而晉倍之, 乃欲因其饑伐之其深不亦宜乎!晉卜御右, 慶鄭皆吉. 公曰:「鄭不孫.乃更令歩陽御戎, 家僕徒為右, 進兵.

육년춘 진목공장병벌진. 진혜공위경정왈 진사심의 내하정왈진내군 군배기뢰 진기진수속 진기이진배지 내욕인기기벌지 기심불역의호진보거우 경정개길. 공왈 정불손내경영보양어융 가복도위우 진병.

 

6년 봄에 진()나라 목공이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토벌했다. ()나라 혜공은 경정에게 진나라의 군대가 깊이 들어왔는데 어찌 해야 하오?”라고 말했다. 경정은 ()나라가 주군을 환국시켰는데 주군께서는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우리 진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진나라는 식량을 보냈습니다. 지금 저들 진에 기근이 들었는데 우리 진나라는 이를 저버리고 기근을 틈타 저들 진을 정벌하러 나섰으니 깊이 쳐들어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수레와 호위 담당을 점을 쳤는데 모두 경정이 좋다고 나왔으나 혜공은 경정은 불손하다.’라 하고는 보양(步陽)에게 수레와 전차를 맡게 하고 가복도(家僕徒)에게 호위를 맡겨 진군시켰다.

 

九月壬戌, 秦繆公晉恵公合戦韓原. 恵公馬驇不行, 秦兵至, 公窘, 召慶鄭為御. 鄭曰:「不用卜, 敗不亦當乎!遂去. 更令梁繇靡御, 虢射為右, 輅秦繆公. 繆公壮士冒敗晉軍, 晉軍敗, 遂失秦繆公, 反獲晉公以帰.

구월임술 진목공 진혜공합전한원. 혜공마치불행 진병지 공군 소경정위어. 정왈 불용복 패불역당호수거. 경령양요미어 괵사이우 로진목공. 목공장사모패진군 진군패 수실진목공 반획진공이귀.

 

9월 임술일에 진나라 목공과 진나라 혜공이 한원에서 맞붙었다. 혜공의 말이 무거워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진()나라의 병사가 접근하니 다급해진 혜공이 경정을 불러 전차를 몰게 했다. 경정이 점괘를 믿지 않으셨으니 패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라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다시 양요미(梁繇靡)에게 전차를 몰게 하고 괵석에게 호위를 맡겨 목공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목공의 장사들이 앞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패하고 목공을 놓쳤다. 뿐만 아니라 (목공은) 오히려 혜공까지 사로잡아 돌아갔다.

 

秦将以祀上帝. 晉君姊為繆公夫人, 衰絰涕泣. 公曰:「得晉侯将以為樂, 今乃如此.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 其後必當大矣, 晉庸可滅乎!乃與晉侯盟王城而許之帰.

진장이사상제. 진군매위목공부인 최질체읍. 공왈 득진후장이위악 영냐여차. 차오문기자견당숙지초봉 왈 기후필당대의진영가멸호내여진후맹왕성이허지귀.

 

()나라가 (혜공을 죽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자 했다. 혜공의 누이인 목공의 부인이 삼베 옷을 입고 소리죽여 울뿐이었다. 목공이 ()나라의 주군을 잡아 기쁘거늘 지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내가 듣기에 당숙이 처음 제후에 봉해지는 것을 본 기자가 그 후손이 분명 창성할 것이다라 하셨으니 진()나라를 어찌 멸망시킬 수 있겠소?”라 하고는 혜공과 왕성에서 맹서한 다음 귀국을 허용했다.

 

晉侯亦使呂省等報国人曰:「孤雖得帰, 毋面目見社稷, 卜日立子圉.

진후역사여성등보국인왈 고수득귀 무면목현사짓 복일입자어

 

혜공도 여성 등을 보내 백성들에게 내가 혼자 돌아간들 사직을 뵐 면목이 없다. 날을 잡아 자어(子圉)를 군주로 세우도록 하라.’고 했다.

 

晉人聞之, 皆哭. 秦繆公問呂省:「晉国和乎?」対曰:「不和. 小人懼失君亡親, 不憚立子圉, 必報讎, 寧事戎. 其君子則愛君而知罪, 以待秦命, 必報徳. 有此二故, 不和.於是秦繆公更舎晉恵公, 餽之七牢.

진인문지 개곡. 진목공문여성 진국화호대왈 불화 소인구실군망친 불탄립자어 왈 필보수 영사융 적기군자즉애군이지죄 이대진명 왈 필보덕유차이고 불화어시진목공경사진혜공 궤지칠뢰.

 

()나라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통곡했다. 진나라 목공이 여성에게 ()나라는 화목한가?’라고 묻자 여성은 화목하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주군과 부모를 잃을까 겁을 낼 뿐 자어를 세우는 일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 융이나 적을 섬길 지언정이라고 말합니다. 군자들은 주군을 사랑하나 (주군이 지은) 죄를 아는 지라 진()나라의 명령만 기다리면서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의견이 이렇듯 둘로 나뉘었으니 화목할 수 없지요.‘라고 했다. 이에 목공은 혜공의 숙소를 바꾸고 7()의 가축을 보내 제후로 대접했다.

 

十一月, 帰晉侯. 晉侯至国, 誅慶鄭, 修政教. 謀曰:「重耳在外, 諸侯多利内之.欲使人殺重耳於狄. 重耳聞之, 如斉.

십일월 귀진루. 진후지국 구경정 수정교. 모왈 중이재외 제후다리내지욕사인살중이어적. 중이문제 여제.

 

11월에 혜공을 돌려보냈다. 혜공은 귀국하자 경정을 죽이고 정치와 교화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중이가 밖에 있으니 제후들은(중이와 연합할 지 모르니) 대부분 그를 귀국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모의한 다음 사람을 보내 적에서 중이를 죽이려 했다. 중이가 이를 듣고 제나라로 갔다.

 

八年, 使太子圉質秦. , 恵公亡在梁, 梁伯以其女妻之, 生一男一女. 梁伯卜之, 男為人臣, 女為人妾, 故名男為圉, 女為妾.

팔년 사태자어질진. 초 혜공망재양 양백이기녀첩지 생일남일녀. 양백복지 남위인신 여위인첩 고명남위어 여위첩.

 

8년에 태자 어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당초 혜공이 양에 망명했을 때 양의 국군 양백(梁伯)이 딸을 혜공에게 시집보내 11녀를 낳았다. 양백이 점을 쳐보니 사내아이는 신하가 되고 여자아이는 첩이 된다고 나왔다. 그래서 사내아이는 어(), 여자아이는 첩()이라 이름을 지었다.

 

十年, 秦滅梁. 梁伯好土功, 治城溝, 民力罷怨, 其衆數相驚, 秦冦至, 民恐惑, 秦竟滅之.

십년 진멸양. 양백호토공 지성구 민력파원 기중수상경 왈 진구지민공혹 진경멸지.

 

10년에 진()나라가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양백이 토목건축을 좋아하여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는 등 백성의 힘을 피곤하게 하니 원성이 많았다. 그 무리들이 여러 차례 진나라 도적놈들이 쳐들어온다!”며 서로 소란을 떨었다. 인민들은 두려움과 당혹함에 떨었는데 결국 진나라가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十三年, 晉恵公病, 内有數子. 太子圉曰:「吾母家在梁, 梁今秦滅之, 我外軽於秦而内無援於国. 君即不起, 病大夫軽, 更立他公子.乃謀與其妻倶亡帰.

십삼년 짆케공별 내우수자. 태자어왈 오모가재양 양금진멸지 아외경어진이내무원어국. 군즉불기 병대부경 경립타공자급모여기처구망귀.

 

13년에 진나라 혜공이 병이 났다. 그에게는 국내에 자식이 여럿 있었다. 태자 어는 내 어머니의 집은 양인데 양이 지금 진에게 망했다. 내가 밖으로는 진에 무시당하고 국내에서도 도움을 바랄 수 없다. 주군께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대부들이 쉽게 다른 공자로 바꾸어 군주로 옹립하지 않을까 걱정이다.’라 하고는 그 아내와 함께 도망치는 일을 상의했다.

 

秦女曰:「子一国太子, 辱在此. 秦使婢子侍, 以固子之心. 子亡矣, 我不従子, 亦不敢言.

진녀왈 자일국태자 욕재차. 진사비자시 이고자지심. 자망의 아불종자 역불감언

 

()나라 출신의 아내는 당신은 한 나라의 태자로서 이곳에서 욕을 보고 있습니다. ()나라가 보잘 것 없는 저더러 당신을 모시며 당신의 마음을 다잡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도망친다면 저는 그대를 따를 수도 없고 이 일을 발설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자어가 기어코 도망쳐 진()나라로 돌아갔다.

 

子圉遂亡帰晉. 十四年九月, 恵公卒, 太子圉立, 是為懐公.

자어수망귀진. 십사년구월 혜공졸 태자어립 시위회공.

 

149월에 혜공이 죽고, 태자 어가 뒤를 이으니 이가 회공(懷公)이다.


 

子圉之亡, 秦怨之, 乃求公子重耳, 欲内之. 子圉之立, 畏秦之伐也. 乃令国中諸従重耳亡者與期, 期尽不到者尽滅其家. 狐突之子毛及偃従重耳在秦, 弗肯召. 懐公怒, 囚狐突. 突曰:「臣子事重耳有年數矣, 今召之, 是教之反君也. 何以教之?」

자어지망 진원지. 내구공자중이 욕내지. 자어지립 외진지벌야. 내영국중제종중이망자여지 기진부도자진멸기가. 호돌지자모급언종중이재진 불긍소. 회공노 인호돌. 돌왈 신자사중이유년수의. 영소지 시교지반군야 하이교지

 

자어가 도망가자 진()나라는 그를 밉게보아 바로 공자 중이를 찾아 그를 돌려보내고자 했다. 자리에 오른 자어는 진나라가 정벌에 나설까 두려웠다. 이에 나라 안에 중이를 따라 망명한 사람들에게 (돌아올) 기간을 정해주는 한편, 기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집안을 몰살시키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호돌은 아들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이 중이를 따라 진()나라에 있었지만 부르려 하지 않았다. 회공이 노하여 호돌을 가두었다. 호돌은 신의 아들이 중이를 모신지 벌써 몇 년인데 지금 그들을 부르는 것은 주군을 배반하라고 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들을 설득합니까?’라고 했다.

 

懐公卒殺狐突. 秦繆公乃発兵送内重耳, 使人告欒郤之党137)為内應, 殺懐公於高梁, 入重耳. 重耳立, 是為文公.

회공졸살호돌. 진목공내발병송내중이 사인고난 극지당위내응 살회공어고량 입중이. 중이립 시위문공.

 

회공은 끝내 호돌을 죽였다. 목공이 군사를 뽑아 중이를 호송하여 돌려보내는 한편 사람을 보내 난지(欒枝)와 극곡(郤穀)의 무리에게 내응케 하여 고량에서 회공을 죽이고 중이를 맞아들였다. 중이가 자리에 오르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의 칭패>

 

晉文公重耳, 晉献公之子也. 自少好士, 年十七, 有賢士五人曰趙衰狐偃咎犯, 文公舅也賈佗先軫魏武子. 自献公為太子時, 重耳固已成人矣. 献公即位, 重耳年二十一.

진문공중이 진헌공지자야. 자소호사 년십칠 유현사오인 왈조최 호언구범 문공구야 가타 선진 위무자. 자헌공위태자시 중이고이성인의. 헌공즉위 중이년이십일.

 

()나라 문공(文公) 중이(重耳)는 진나라 헌공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비를 좋아하여 17세에 유능한 선비 다섯을 얻으니 조최(趙衰), 외삼촌 호언구범(狐偃咎犯),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무자(魏武子)가 그들이었다. 헌공이 태자 때 중이는 이미 성인었고,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献公十三年, 以驪姫故, 重耳備蒲城守秦.

헌공십삼년 이혀희고 중이비포성수진.

 

헌공 13년에 여희로 인해 중이는 포성(蒲城)에서 진()나라를 방어했다.

 

献公二十一年, 献公殺太子申生, 驪姫讒之, , 不辞献公而守蒲城.

헌공이십일년 헌공살태자신생 여희참지 공 불사헌공이수포성.

 

헌공 21년에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여희가 중이를 모함하자 두려워 헌공에게 인사도 드리지 않고 포성을 지켰다.

 

献公二十二年, 献公使宦者履鞮趣殺重耳. 重耳踰垣, 宦者逐斬其衣袪. 重耳遂奔狄. , 其母国也. 是時重耳年四十三. 従此五士, 其余不名者數十人, 至狄.

헌공이십이년 헌공사환자이제취살중이. 중이유담 환자수참기의거. 중이수분적. 적 기모국야. 시시중이년사십삼. 종차오사 기여불명자수십인 지적.

 

헌공 22년에 헌공이 환관 이제(履鞮)에게 서둘러 중이를 죽이라고 했다. 중이가 담을 넘어 도망가자 환관이 뒤쫓아 그 옷소매를 베어갔다. 중이는 마침내 적()나라로 달아났다. 적나라는 중이 어머니의 나라이다. 이 때 중이의 나이 마흔 셋이었다. 수행한 다섯 사람과 그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십 명이 적 땅에 이르렀다.

 

狄伐咎如, 得二女以長女妻重耳, 生伯鯈叔劉以少女妻趙衰, 生盾. 居狄五歳而晉献公卒, 里克已殺奚斉悼子, 乃使人迎, 欲立重耳. 重耳畏殺, 因固謝, 不敢入. 已而晉更迎其弟夷吾立之, 是為恵公.

적벌구여 득이녀 이장년처중이 생백조 숙유 이소녀첩조쇠 생둔. 거적오세이진헌공졸 이극이살해제 도자 내사인영 욕립중이. 중이외살 인고사 불감입. 이이진경영기제이오립지 시위혜공

 

적나라는 구여(咎如)땅을 정벌하여 두 여자를 얻어 장녀는 중이에게 시집보내 백조(伯鯈)와 숙유(叔劉)를 낳았고, 동생은 조최에게 시집을 보내 조돈(趙盾)을 낳았다. 중이가 적나라에서 5년 머무르는 사이 진나라 헌공이 죽자, 이극이 해제와 도자를 죽이고는 사람을 보내 중이를 맞아들여 옹립하려 했다. 중이는 죽을까 두려워 한사코 사양하며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진나라는 다시 중이의 동생 이오를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혜공이었다.

 

恵公七年, 畏重耳, 乃使宦者履鞮與壮士欲殺重耳. 重耳聞之, 乃謀趙衰等曰:「始吾奔狄, 非以為可用與, 以近易通, 故且休足. 休足久矣, 固願徙之大国. 夫斉桓公好善, 志在霸王, 収恤諸侯. 今聞管仲隰朋死, 此亦欲得賢佐, 盍往乎?」於是遂行.

혜공칠년 외중이 내사환자이제여장사욕살중이. 중이문지 냐모조쵯등왈 시오분적 비이위가용여 이근역통 고차휴족. 휴족구의 고원사지대국. 부제환공호선 지재패왕 수휼제후. 영문관중 습붕사 차역욕득현우 합왕호어시수행.

 

혜공 7년에 중이의 존재가 두려워 환관 이제를 시켜 장사들과 함께 중이를 죽이려 했다. 중이가 이를 듣고는 조최 등과 상의하길 처음 내가 적나라로 도망쳐왔을 때부터 적나라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소. 거리가 가까워 쉽게 갈 수 있어 잠시 쉬어 가려 했을 뿐. 그런데 너무 오래 쉬어서 큰 나라로 옮기고 싶소. 무릇 제 환공이 선행을 좋아하고 패왕에 뜻을 두고 제후들을 거두어 돕고 있다 하오. 지금 관중과 습붕도 죽었다 하니 지금이야말로 유능한 인재의 도움을 바랄 것이 어찌 가지 않으리오!”라 하고는 마침내 떠났다.

 

重耳謂其妻曰:「待我二十五年不來, 乃嫁.其妻笑曰:「犂二十五年, 吾冢上柏大矣. 雖然, 妾待子.重耳居狄凡十二年而去.

중이위기처왈 대아이십오년불래 내가기처소왈 여이십오년 오총상백장대의 수연 첩대자중이거적범십이년이거.

 

중이가 그의 아내에게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으면 재가하시오.’라고 하자, 그 아내는 웃으며 ‘25년이면 제 무덤 위 측백나무도 많이 자랐겠습니다. 하지만 첩은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했다. 중이는 적나라에서 12년을 머무르다 떠났다.

 

過衛, 衛文公不礼. , 過五鹿, 飢而従野人乞食, 野人盛土器中進之. 重耳怒. 趙衰曰:「土者, 有土也, 君其拝受之.

과위 위문공 불예. 거 과오록 기이종야인걸식 야인성토기중진지. 중이노 조최왈 토자 유토야 군기배수지

 

()나라를 지나는데 위나라 문공(文公)이 무례하게 대했다. 그곳을 떠나 오록(五鹿)을 지나가는데 배가 고파 촌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자 촌사람은 그릇에 흙을 담아 내놓았다. 중이가 노하자 조최는 흙은 땅을 갖는다는 의미이니 주군께서는 절하고 받으시지요.’라고 했다.

 

至斉, 斉桓公厚礼, 而以宗女妻之, 有馬二十乗, 重耳安之. 重耳至斉二歳而桓公卒, 会豎刀等為内亂.

지제 제환공후례 이이종여첩지 유마이십승 중이안지. 중이지제이세이환공졸 회수조등위내란

 

제나라에 이르자 제나라 환공은 후한 예로 접대하고, 종실의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는 한편 20승의 말까지 주니 중이가 이에 편안해 했다. 중이가 제에 온 지 2, 환공이 죽고, 수조(竪刁) 등의 내란을 맞이했다.

 

斉孝公之立, 諸侯兵數至. 留斉凡五歳. 重耳愛斉女, 毋去心. 趙衰咎犯乃於桑下謀行. 斉女侍者在桑上聞之, 以告其主. 其主乃殺侍者, 勧重耳趣行. 重耳曰:「人生安樂, 孰知其他! 必死於此, 不能去.斉女曰:「子一国公子, 窮而來此, 數士者以子為命. 子不疾反国, 報勞臣, 而懐女徳, 窃為子羞之. 且不求, 何時得功?」乃與趙衰等謀, 酔重耳, 載以行. 行遠而覚, 重耳大怒, 引戈欲殺咎犯. 咎犯曰:「殺臣成子, 偃之願也.重耳曰:「事不成, 我食舅氏之肉.咎犯曰:「事不成, 犯肉腥臊, 何足食!乃止, 遂行.

제효공지립 제후병수지. 유제범오세. 중이야제녀 무거심. 조최 구범내어상하모행. 제녀시자재상상문지 이고지주. 기주내살시자 권중이취행. 중이왈 인생안락 집지기타 필사어차 불능거제녀왈 자일국공자 궁이래차 수사자이자위명. 자부질반국 보노신 이회녀덕 절위자수지. 차불구 하시득공내여조최등모 취중이 사불성 아식구씨지육구범왈 사불성 범육성조 하족식내지 수행.

 

제나라 효공(孝公)이 즉위하자, 제후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제나라에 머문 지 5년째였다. 중이는 제나라의 여자를 사랑해서 떠날 마음이 없었다.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에서 상의했다. 제나라 여자의 시종이 뽕나무 위에서 이 말을 듣고는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은 시종을 죽이고, 중이에게 서둘러 떠날 것을 권했다. 중이는 삶이 이리 편한데 다른 일을 알아서 무엇 하겠소? 난 여기서 종생할 것 이니 떠나지 않겠소!’라고 했다. 제나라 여자가 당신은 한 나라의 공자로서 일이 어려워져 이곳에 오셨고, 저 사람들은 당신께 목숨을 맡겼습니다. 당신이 빨리 돌아가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여색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니 당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언제 공을 이루려고 하십니까?’라고 했다. 그리고는 조최 등과 상의하여 중이를 취하게 한 다음 수레에 실어 떠났다. 일행이 한참을 가자 중이가 깨어나서는 크게 성을 내며 창을 들어 구범을 죽이려 했다. 구범은 신을 죽여 주군이 뜻을 이룬다면 그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중이가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내가 외삼촌을 씹어 먹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구범은 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이 구범의 고기를 비려서 어찌 드시렵니까?’라고 했다. 이에 그 정도로 그치고 계속 길을 떠났다.

 

過曹, 曹共公不礼, 欲観重耳駢脅. 曹大夫釐負羈曰:「晉公子賢, 又同姓, 窮來過我, 柰何不礼!共公不従其謀. 負羈乃私遺重耳食, 置璧其下. 重耳受其食, 還其璧.

과조 조공공불예 욕관중이병협. 조대부리부기왈 진공자현 우동성 궁래과아 내하불예공공불종기모. 부기내사견중이식 치벽기하. 중이수기식 환기벽

 

()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조나라의 공공(共公)이 무례하게 중이의 갈비뼈만 구경하려(벗은 몸을 보려) 했다. 조나라의 대부 리부기(釐負羈)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우리와 같은 성씨입니다. 곤궁에 처해 우리나라를 지나는데 어찌 무례하게 대하십니까?’라고 했다. 공공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리부기는 개인적으로 중이에게 먹을 것을 보내면서 음식 아래에 벽옥(璧玉)을 넣어 두었다. 중이는 먹을 것만 받고 벽옥은 돌려주었다.

 

, 過宋. 宋襄公新困兵於楚, 傷於泓, 聞重耳賢, 乃以国礼礼於重耳.

거 과송. 송양공신곤병어초 상어홍 문중이현 내이국예예어중이.

 

(조나라를) 떠나서 송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송나라 양공(襄公)은 최근 초나라에서 군대가 곤욕을 치르고 홍수(泓水)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중이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는 국빈의 예로 중이를 대접했다.

 

宋司馬公孫固善於咎犯, :「宋小国新困, 不足以求入, 更之大国.乃去.

송사마공손고선어구범 왈 송소국신곤 부족이구입 경지대국내거.

 

송나라의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는 친한 구범에게 송나라는 작고 최근 곤경에 처해 당신들의 환국을 도울 수 없으니 더 큰 나라로 가시오.’라고 해서 바로 떠났다.

 

過鄭, 鄭文公弗礼. 鄭叔瞻諫其君曰:「晉公子賢, 而其従者皆国相, 且又同姓. 鄭之出自厲王, 而晉之出自武王.

과정 정문공불예. 정숙참간기군왈 진공자현 이기종자개국상 차우동성. 정지출자여왕 이진지출자무왕

 

()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정나라 문공(文公)은 무례했다. 정나라 숙첨(叔瞻)이 그 국군에게 진나라 공자=중이는 어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라의 재상감들입니다. 게다가 같은 성씨입니다. 정나라는 여왕(厲王)에게서 나왔고, 진나라는 무왕(武王)에서 나왔사옵니다.’라고 간했다.

  

鄭君曰:「諸侯亡公子過此者衆, 安可尽礼!叔瞻曰:「君不礼, 不如殺之, 且後為国患.鄭君不聴.

정군왈 제후망공자과차자중 안가진예숙첨왈 군불예 불여살지 차후위국환정군불청.

 

정나라의 국군은 제후국의 망명을 떠난 공자들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일일이 다 예를 갖춘단 말이오?’라고 했다. 숙첨은 국군께서 예를 갖추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습니다. 장차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라고 했으나 정나라의 주군은 듣지 않았다.


重耳去之楚, 楚成王以適諸侯礼待之, 重耳謝不敢當. 趙衰曰:「子亡在外十余年, 小国軽子, 況大国乎今楚大国而固遇子, 子其毋譲, 此天開子也.


중이거지초 초성왕이적제후예대지 중이사불감당. 조최왈 자망재외십여년 소국경자 황대국호 금촉대국이고우자 자기무양 차천개자야

 

중이는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제후의 예로 그를 우대했다. 중이는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조최가 당신께서 밖으로 떠돈 지 10여 년, 작은 나라들도 당신을 깔보는데 큰 나라야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초나라라는 큰 나라가 한사코 당신을 대우하겠다하니 사양하지 마세요. 이는 하늘이 당신을 도우시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遂以客礼見之. 成王厚遇重耳, 重耳甚卑. 成王曰:「子即反国, 何以報寡人?」重耳曰:「羽毛歯角玉帛, 君王所余, 未知所以報.王曰:「雖然, 何以報不谷?」重耳曰:「即不得已, 與君王以兵車会平原広沢, 請辟王三舎.楚将子玉怒曰:「王遇晉公子至厚, 今重耳言不孫, 請殺之.成王曰:「晉公子賢而困於外久, 従者皆国器, 此天所置, 庸可殺乎且言何以易之!

수이객예견지. 성왕후우중이 중이심비. 성왕왈 자즉반국 하이보과인중이왈 우모치각옥백 군왕소여 미지소이보왕왈 수연 하이보불곡중이왈 즉부득이 여군왕이병거회평원광택 청청피왕삼사초장자옥노왈 왕우진공자지후 금중이언불손 청살지성왕왈 진공자현이곤어외구 종자개국기 차천소치 용가살호 차언하이역지

 

이에 중이는 객의 예로 성왕을 만났다. 성왕은 중이를 후하게 접대했고, 중이는 자신을 한껏 낮추었다. 성왕이 그대가 환국하면 과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라고 물었다. 중이는 진기한 금수나 옥구슬 그리고 비단 따위는 군왕께 남아도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성왕은 그렇긴 하지만 무엇으로든 내게 보답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했다. 중이는 만약 어쩔 수 없이 평원이나 너른 연못에서 군대가 서로 부딪치게 되면 왕을 위해 사흘거리를 뒤로 물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초나라의 장수 자옥(子玉)이 화를 내며 왕께서 진나라 공자=중이를 아주 후하게 대하셨거늘 지금 중이가 이렇게 불손한 말을 하니 죽이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성왕은 진나라 공자는 어질고 오랫동안 외지에서 힘들게 지냈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나라의 그릇들이오. 이는 하늘이 안배한 것이니 어찌 죽일 수 있겠소? 그리고 이미 뱉은 말을 어찌 바꾸겠소?’라고 했다.

 

居楚數月, 而晉太子圉亡秦, 秦怨之聞重耳在楚, 乃召之. 成王曰:「楚遠, 更數国乃至晉. 秦晉接境, 秦君賢, 子其勉行!厚送重耳.

거초수월 이진태자어망진 진노지 문중이재초 내소지. 성왕왈 초원 경수국내지진 진진접경 진군현 자기면행후송중이.

 

초나라에 머무는 몇 달 사이 진()나라 태자 어가 진()나라에서 도망쳤다. ()나라가 그를 원망하며 중이가 초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렀다. 성왕은 초나라는 멀어서 다시 몇 개 나라를 거쳐야 진()나라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나라와 진()나라는 국경이 붙어 있고, ()나라의 주군은 현명하니 그대는 부디 잘 가도록 하시오.’라 하고는 후한 예물을 중이에게 딸려 보냈다.

 

重耳至秦, 繆公以宗女五人妻重耳, 故子圉妻與往. 重耳不欲受, 司空季子曰:「其国且伐, 況其故妻乎! 且受以結秦親而求入, 子乃拘小礼, 忘大醜乎!遂受.

중이지진 목공이종여오인처중이 고자어처여왕. 중이불욕수 사공계자왈 기국차벌 황기고처호 차수이결진친이구입 자내포소예 망대추호수수

 

중이가 진()나라에 이르자 진나라 목공(穆公)은 종실 여자 다섯을 중이의 아내로 삼게 했는데 저번 자어의 아내도 함께 있었다. 중이는 받아 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사공(司空) 계자(季子)그 나라도 토벌할 참인데 하물며 그 전처 정도야! 받아들여 진나라와 친분을 맺어 귀국해야 할 터인데 당신께서는 자잘한 예에 얽매여 큰 추함을 잊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받아들였다.

 

繆公大歓, 與重耳飲. 趙衰歌黍苗詩. 繆公曰:「知子欲急反国矣.趙衰與重耳下, 再拝曰:「孤臣之仰君, 如百穀之望時雨.是時晉恵公十四年秋.

목공대환 여중이음. 조최가서묘시. 목공왈 지자욕급반국의조최여중이하 재배왈 고신지앙군 여백곡지망시우시시진혜공십사년추.

 

목공이 크게 기뻐하며 중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조최가 서묘(黍苗)’라는 시를 노래했다. 목공이 그대가 서둘러 나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알겠소.’라고 했다. 조최가 중이와 함께 자리를 뜨면서 두 번 절하고 떠도는 외로운 신하가 군주를 우러러 보는 것이 백곡이 때맞추어 내리는 비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때가 진()나라 혜공(惠公) 14년 가을이었다.


恵公以九月卒, 子圉立. 十一月, 葬恵公. 十二月, 晉国大夫欒郤等聞重耳在秦, 皆陰來勧重耳趙衰等反国, 為内應甚衆. 於是秦繆公乃発兵與重耳帰晉. 晉聞秦兵來, 亦発兵拒之. 然皆陰知公子重耳入也. 唯恵公之故貴臣呂郤之属不欲立重耳. 重耳出亡凡十九歳而得入, 時年六十二矣, 晉人多附焉.

혜공이구월졸 자어립. 십일월 장혜공. 십이월 진국대부란 극등문중이재진 개음래권중이 조최등반국 위내응심중. 어시진목공내발병여중이귀진. 진문진병래 역발병거지. 연개음지공자중이입야. 유혜공지소귀신여 극지속불욕립중이. 중이출망범구십세이득입 시년육십이년의 진인다부언.

 

혜공이 9월에 죽고, 자어가 들어섰다. 11월에 혜공을 장례 지냈다. 12월에 진()나라의 대부 난지와 극곡 등이 중이가 진()나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 같이 몰래 들어와서는 중이와 조최 등에게 환국을 권하니 내응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진나라 목공은 군사를 내어 중이가 진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 ()나라는 진()나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역시 군대를 내어 맞섰다. 그러나 모두가 공자 중이가 들어온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다만 혜공의 옛 신하 여성과 극예 등은 중이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중이는 망명을 떠난 지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 때 나이가 62세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따랐다.

 

文公元年春, 秦送重耳至河. 咎犯曰:「臣従君周旋天下, 過亦多矣. 臣猶知之, 況於君乎請従此去矣.重耳曰:「若反国, 所不與子犯共者, 河伯視之!乃投璧河中, 以與子犯盟.

문공원년춘 진송중이지하. 구범왈 신종군주시천하 과역다의 신유지지 황어군호 청종타거의중이왈 약반국 소불여자범공자 하백시지내투벽하중 이여자범맹.

 

문공 원년(기원전 636) 봄에 진()나라가 중이를 황하까지 호송했다. 구범이 '신이 주군을 따라 천하를 떠돌면서 잘못한 일이 참 많았습니다. 신이 이를 알고 있는데 하물며 주군께서야? 이제 저는 여기서 떠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중이는 '나라로 돌아간다면 구범과 같이 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나 하백(河伯)께서 잘 살피실 것이오.'라 하고는 구슬을 황하에 던지면서 구범과 맹서했다.

 

是時介子推従, 在船中, 乃笑曰:「天実開公子, 而子犯以為己功而要市於君, 固足羞也. 吾不忍與同位.乃自隠渡河.

시시개자추종 재선중 내소왈 천실개공자 이자범이위기공이요시어군 고족수야. 오불인여동위내자은도하.

 

이때 개자추(介子推)도 함께 배를 타고 있었는데 그를 보고 웃으면서 하늘이 실로 공자를 보우하셨는데 구범이 자신의 공이라 여기고는 주군과 거래를 하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내가 차마 그와 같은 급으로 놀기 싫구나며 스스로를 숨긴 채 황하를 건넜다.

 

 秦兵囲令狐, 晉軍于廬柳. 二月辛丑, 咎犯與秦晉大夫盟于郇. 壬寅, 重耳入于晉師. 丙午, 入于曲沃. 丁未, 朝于武宮, 即位為晉君, 是為文公. 群臣皆往. 懐公圉奔高梁. 戊申, 使人殺懐公.

진병위영호 진군우여류. 이월신축 구범여진진대부먕우순. 임인 중이입우진사. 병오 입우곡옥. 정미 조우무궁 즉위위진군 시위문공. 군신개왕. 회공어분고량. 무신 사인살회공.

 

()나라의 병사들이 영호(令狐)를 포위하자 진()나라는 여류(廬柳)에 군을 주둔시켰다. 2월 신축일, 구범과 진()나라, ()나라의 대부들이 순()나라에서 회맹했다. 임인일에 중이가 진()나라의 군영으로 들어갔다. 병오일, 곡옥으로 들어갔다. 정미일, 무궁(武宮)에 입조(入朝)하고 진()나라의 주군으로 즉위하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함께하였다. 회공 어는 고량(高梁)으로 달아났다. 무신일, 사람을 보내 회공을 죽였다.

 

懐公故大臣呂省郤芮本不附文公, 文公立, 恐誅, 乃欲與其徒謀焼公宮, 殺文公. 文公不知. 始嘗欲殺文公宦者履鞮知其謀, 欲以告文公, 解前罪, 求見文公. 文公不見, 使人譲曰:「蒲城之事, 女斬予袪. 其後我従狄君猟, 女為恵公來求殺我. 恵公與女期三日至, 而女一日至, 何速也女其念之.宦者曰:「臣刀鋸之余, 不敢以二心事君倍主, 故得罪於君. 君已反国, 其毋蒲翟乎且管仲射鈎, 桓公以霸. 今刑余之人以事告而君不見, 禍又且及矣.於是見之, 遂以呂郤等告文公. 文公欲召呂, 郤等党多, 文公恐初入国, 国人売己, 乃為微行, 会秦繆公於王城, 国人莫知.

회공고대신여성 극예본불부문공 문공립 공주 내욕여기도모소공궁 살문공. 문공부지. 시상욕살문공환자리제지기모 욕이고문공 해전되 구견문공. 문공불견 사인양왈 포성지사 여참여거. 기후아종적군렵 여위혜공래구살아. 혜송여여기삼일지 이여일일지 하속야 여기념지환자왈 신도거지여 불감이심사군배주 고득괴어군 군이반국 기무호 적호 차관중사구 환공이패 금형여지인이사고이군불현 화우차급의어시견지 수이여 극등고문공 문공욕소여 극 여 극등당다 문공공초입국 국입매기 내이미행 회진목공어왕성 국인막지.

 

회공의 옛 대신들인 여성과 극예는 본래부터 문공을 따르지 않았다. 문공이 즉위하자 주벌당할까 두려워 그 무리들과 문공의 궁에 불을 질러 죽일 계획을 짰다. 문공은 몰랐다. 전에 문공을 죽이려고 했던 환관 이제(履鞮)가 이 음모를 알고는 문공에게 알려서 지난 죄를 갚고자 문공을 만나려 했다. 문공은 만나지 않고 사람을 보내 포성에서는 네가 내 옷소매를 벤 일이 있었다. 그 뒤 내가 적의 군주와 사냥을 나갔는데 너는 혜공을 위해 나를 죽이러 왔다. 혜공이 너에게 사흘을 주었는데 너는 하루 만에 왔으니 어찌 그리 빠를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이런 일들을 잘 생각해 보아라!’라고 꾸짖었다. 이제는 저는 궁형을 당한 몸으로 감히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거나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군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주군께서 이미 환국하셨지만 포성이나 적나라에서와 같은 일들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관중은 환공을 허리띠를 쏘았지만 환공은 관중 덕에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궁형을 당한 이 사람이 일이 있어 보고하려 하는데 국군께서는 보지 않으려 하시니 화가 곧 이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그를 만나니 여성과 극예 등의 음모를 문공에게 일렀다. 문공이 여성과 극예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그들의 무리가 많았다. 문공은 당초 입국할 때 국인이 자신을 팔까 두려워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왕성에서 진나라 목공을 만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몰라보았던 것이다.

 

三月己丑, 郤等果反, 焚公宮, 不得文公. 文公之衛徒與戦, 郤等引兵欲奔, 秦繆公誘呂郤等, 殺之河上, 晉国复而文公得帰.

삼월기축 여 극등과반 분공궁 부득문공. 문공지위도여전 여 극등인병욕분 진목공유여 극등 살지하상 진국복이문공득귀.

 

3월 기축일, 여성과 극예 등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궁에 불을 질렀으나 문공을 찾지 못했다. 문공의 호위병들과 싸움이 붙었고, 여성과 극예 등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치려 했다. 진 목공이 여성과 극예 등을 유인하여 황하에서 죽이니 진은 평정을 되찾고 문공은 되돌아왔다.

 

, 迎夫人於秦, 秦所與文公妻者卒為夫人. 秦送三千人為衛, 以備晉亂.

하 영부인어진 진소여문공처자졸위부인. 진송삼천인위위 이비진란.

 

여름에 문공은 진()나라로부터 부인을 맞아들였고, 진나라가 문공의 아내로 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되었다. ()나라가 3천 명을 보내 지키면서 진나라의 분란에 대비했다.

 

文公修政, 施恵百姓. 賞従亡者及功臣, 大者封邑, 小者尊爵. 未尽行賞, 周襄王以弟帯難出居鄭地, 來告急晉. 晉初定, 欲発兵, 恐他亂起, 是以賞従亡未至隠者介子推. 推亦不言祿, 祿亦不及.

문공수정 시혜백성. 상종망자급공신 대자봉읍 소자존작. 미진행상 주양왕이제대난출거정지 래고급진 진초정 욕발병 공타란기 시이상종망미지은자개자추. 추역불언록 록역불급.

 

문공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망명에 따라 온 자와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공이 큰 자는 봉읍을 주고 작은 자는 작위를 올렸다. 상을 다 주기도 전에 주나라 양왕(襄王)의 동생 대()가 난을 일으켜 (양왕은) 정나라로 도망쳐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진나라가 막 안정을 찾았는데 군사를 출동시켰다가 다른 난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이 때문에 망명에 따라 온 사람들에 대한 상이 은자 개자추에게 미치지 못했다. 개자추 또한 녹봉을 말하지 않았기에 녹봉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推曰:「献公子九人, 唯君在矣. 懐無親, 外内棄之天未絶晉, 必将有主, 主晉祀者, 非君而誰天実開之, 二三子以為己力, 不亦誣乎窃人之財, 猶曰是盗, 況貪天之功以為己力乎下冒其罪, 上賞其姦, 上下相蒙, 難與処矣!

추왈 헌공자구인 유군재의 혜 회무친 외내기지 천미절진 필장유주 주진사자 비군이수 천실개지 이삼자이위기력 불역무호 절인지쟈 유왈시도 황탐천지공이위기력호 하모기죄 상상기간 상하상몽 난여구의

 

개자추는 이렇게 말했다. ‘헌공의 아들이 아홉이었는데 주군만 살아 계실 뿐이다. 혜공과 회공은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안팎으로 버림을 받았다. 하늘이 진나라를 없애지 않았으니 장차 주인이 나타나 진나라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니 주군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하늘이 그리 열어주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이라 하니 어찌 무고(誣告)가 아니겠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절도라 하거늘 하물며 하늘의 공을 탐내 자신의 힘으로 여기는 자들이야! 아랫사람들은 그 죄를 무릅쓰고, 윗사람은 그 간사함에 상을 내리면서 위아래가 서로를 속이니 함께 하기 어렵습니다!’하니

 

其母曰:「盍亦求之, 以死誰懟?」推曰:「尤而效之, 罪有甚焉. 且出怨言, 不食其祿.母曰:「亦使知之, 若何?」対曰:「, 身之文也身欲隠, 安用文之文之, 是求顕也.

기모왈 거역구지 이사수대추왈 우이효지 죄유심언 차출원언 불식기록모왈 역사지지 약하대왈 언 신지문야 신욕은 안용문지 문지 시구현야

 

개자추의 어머니가 어째서 가서 청하거라 이리 죽으면 누굴 원망하겠니했다. 개자추는 허물을 더하고 죄가 심해질 뿐입니다. 게다가 원망의 말까지 내뱉었으니 그 녹을 먹을 수 없지요.’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 하자 개자추는 말이란 사람 몸을 꾸미는 것입니다. 몸을 숨기려 하는데 꾸며서 뭐 하겠습니까? 꾸민다는 것은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其母曰:「能如此乎與女偕隠.至死不复見.

기모왈 능여차호 여여개은지사불복현

 

어머니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너와 함께 숨겠다.’라고 했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介子推従者憐之, 乃懸書宮門曰:「竜欲上天, 五蛇為輔. 竜已升雲, 四蛇各入其宇, 一蛇独怨, 終不見処所.

개자추종자린지 내현서궁문왈 용욕상천 오사위보 용이승운 사사각입기우 일사독원 종불현처소

 

개자추의 시종이 이를 가련하게 여겨 궁문에다가 용이 하늘에 오르고자 하여 다섯 마리의 뱀이 보좌했다. 용이 구름을 타고 뱀 네 마리는 각자 자리에 들어갔거늘 한 마리만 원망하여 끝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구나!’라는 글을 내걸었다.

 

文公出, 見其書, :「此介子推也. 吾方憂王室, 未図其功.使人召之, 則亡. 遂求所在, 聞其入綿上山中, 於是文公環綿上山中而封之, 以為介推田, 号曰介山, 以記吾過, 且旌善人.

문공출 견기서 왈 차개자추야 오방우왕실 미도기공사인소지 즉망. 수구소재 문기입금상산중 오시문공환백상산중이봉지 이위갸추전 호왈개산 이기오과 차정선인’.

 

문공이 나오면서 이 글을 보고는 이는 개자추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왕실 걱정 때문에 그의 공을 챙기지 못했구나.’며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으나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 행방을 찾게 하니 그가 면산(綿山)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문공은 면산을 봉지로 주어 개자추의 농지로 삼게 하는 한편 산 이름을 개산(介山)’으로 부르게 하면서 이로써 나의 잘못을 기억하게 하고 좋은 이를 표창하노라!’라고 했다.

 

従亡賎臣壷叔曰;「君三行賞, 賞不及臣, 敢請罪.文公報曰:「夫導我以仁義, 防我以徳恵, 此受上賞. 輔我以行, 卒以成立, 此受次賞. 矢石之難, 汗馬之勞, 此复受次賞. 若以力事我而無補吾欠者, []受次賞. 三賞之後, 故且及子.晉人聞之, 皆説.

종망천신호숙왈 군삼행상 상불급신 감청죄문공보왈 부도아이인의 방아이덕혜 차수상상 보아이행 졸이성립 차수차상 시석지란 한마지로 차복수차상 약이역사아이무보오결자 차복수차상 삼상지후 고차급자진인문지 개열

 

망명에 따라왔던 시종 호숙(壺叔)주군께서 세 번이나 상을 내리셨는데 신에게는 상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감히 아뢰옵건대 제게 무슨 죄가 있는지요?’라고 했다. 문공은 대저 나를 인의로 이끌고 덕과 은혜로 나를 지킨 사람은 제일 높은 상을 받았다. 화살과 돌이 난무하는 위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람이 그 다음 상을 받았다. 힘으로 나를 섬기되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지 못한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이 상들을 모두 내린 다음 그대에게도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진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기뻐했다.

 

二年春, 秦軍河上, 将入王. 趙衰曰;「求霸莫如入王尊周. 周晉同姓, 晉不先入王, 後秦入之, 毋以令于天下. 方今尊王, 晉之資也.三月甲辰, 晉乃発兵至陽樊, 囲温, 入襄王于周. 四月, 殺王弟帯. 周襄王賜晉河内陽樊之地.

이년춘 진군하상 장입왕. 조최왈 구패막여입왕존주. 주진동성 진불선입왕 후진입지 무리영우천하. 방금존왕 진지자야삼월갑진 진내발병지양번 위온 입양왕우주. 사월 살왕제대. 주양왕사진하내양번지지.

 

2년 봄에 진()나라의 군대가 황하가에 있다가 주나라 양왕을 입국시키려 했다. 조최가 패주가 되시려면 양왕을 입국시켜 주나라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주나라와 진()나라는 같은 성인데, ()나라가 먼저 왕을 귀국시키지 않고 진()나라가 입국시킨 뒤에 세운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당장 왕을 받드는 일이 진()나라에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3월 갑진일에 진()나라가 병사를 출동시켜 양번(陽樊)에 이르러 온()나라를 포위한 다음 양왕을 주()나라로 입국시켰다. 4월에 양왕의 아우 동생 대()를 죽였다. ()나라 양왕은 하내의 양번 땅을 진()나라에 하사했다.

 

 

四年, 楚成王及諸侯囲宋, 宋公孫固如晉告急. 先軫曰:「報施定霸, 於今在矣.狐偃曰:「楚新得曹而初婚於衛, 若伐曹, 楚必救之, 則宋免矣.於是晉作三軍. 趙衰挙郤縠将中軍, 郤臻佐之使狐偃将上軍, 狐毛佐之, 命趙衰為卿欒枝将下軍, 先軫佐之荀林父御戎, 魏犨為右往伐.

사년 초성왕급제후위송 송공손고여진고급. 선진왈 보시정패 어금재의호언왈 초신득조이초혼어위 약벌조 위 초필구지 즉송면의어시진작삼군 조최거극곡장중군 극진좌지 사호언장상군 호모좌지 명조최위경. 난지장하군 선진좌지 순림부어융 위주위우 왕벌.

 

4년에 초나라 성왕과 제후들이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의 공손고(公孫固)가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선진(先軫)은혜를 갚고 패주로 인정 받으려면 지금입니다.’라고 했다. 호언(狐偃)초나라가 최근 조()나라를 얻고 위()나라와 처음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으니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가 반드시 구원하러 나설 것이고 송나라는 위기를 면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조최는 극곡이 중군을 이끌도록 천거했고, 극진(郤臻)이 보좌했다. 호언으로 하여금 상군을 이끌게 하고 호모(狐毛)가 보좌하도록 했다. 조최는 경으로 삼았다. 난지가 하군을 이끌고 선진이 보좌했다. 순임보(荀林父)는 전쟁물자 보급을 맡았고, 위주로 보죄히게 하여 맡아 정벌에 나섰다.

 

冬十二月, 晉兵先下山東, 而以原封趙衰.

동십이월 진병선하산동 이이원봉조최

 

겨울 12월에 진나라의 군대가 먼저 산동을 점령하여 조최에게 처음으로 봉해 주었다.

 

五年春, 晉文公欲伐曹, 仮道於衛, 衛人弗許. 還自河南度, 侵曹, 伐衛.

오년춘 진문공욕벌조 가도어위 위인불허. 환자하남도 침조 벌위.

 

5년 봄에 진나라 문공이 조()나라를 정벌하려고 위()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위나라가 허락지 않았다. 길을 바꾸어 황하 남쪽에서 강을 건너 조나라를 치고 위나라까지 공격했다.

 

正月, 取五鹿. 二月, 晉侯斉侯盟于斂盂. 衛侯請盟晉, 晉人不許. 衛侯欲與楚, 国人不欲, 故出其君以説晉. 衛侯居襄牛, 公子買守衛. 楚救衛, 不卒.

정월 취오록. 이월 진후 제후맹우염우. 위후청맹진 진인불허. 위후욕여초 국인불욕 고출기군이열진. 위후거양우 공자매수위. 초구위 부졸.

 

정월에 오록을 취했고, 2월에 진()문공은 제나라의 주군(소공)과 염우(斂盂)에서 회맹했다. 위나라의 주군이 진나라와 동맹하길 청했으나 진나라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위나라의 주군이 초나라와 회맹하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원치 않으면서 그 주군을 축출하여 진나라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위나라의 주군은 양우(襄牛)에 머무르고, 공자 매()가 위나라를 지켰다. 초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했으니 성공하지 못했다.

 

晉侯囲曹. 三月丙午, 晉師入曹, 數之以其不用釐負羈言, 而用美女乗軒者三百人也. 令軍毋入僖負羈宗家以報徳.

진후위조. 삼월병오 진사입조 수지이기불용리부패언 이용미녀승헌자삼백인야. 영군무입희부기종가이보덕.

 

()나라 문공이 조나라를 포위했다. 3월 병오일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에 들어가 당초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미녀 300명을 화려한 수레에 태워 보낸 일을 나무랐다. 군대에다가는 희부기 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명령함으로써 그의 덕에 보답했다.

 

楚囲宋, 宋复告急晉. 文公欲救則攻楚, 為楚嘗有徳, 不欲伐也欲釈宋, 宋又嘗有徳於晉患之. 先軫曰:「執曹伯, 分曹衛地以與宋, 楚急曹, 其勢宜釈宋.於是文公従之, 而楚成王乃引兵帰.

초위송 송복고급진. 문공욕구즉공초 위초상유덕 불욕벌야 욕석송 송우상유덕어진 환지 선진왈 집조백 분조 위지이여송 초급조 위 기세의석송어시문공종지 이초성왕내인병귀.

 

초나라가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는 다시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문공은 구원에 나서 초나라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일찍이 초나라에 은혜를 입었으므로 정벌할 수는 없었다. 송나라를 포기하자니 송나라 또한 과거 진나라에 은혜를 베푼 적이 있어 난감했다. 선진이 조나라의 국군을 잡고 조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송나라에 주겠다고 하면 초나라는 급히 조나라와 위나라를 구할 것이고, 이런 형세라면 송나라의 포위를 풀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에 따랐고, 초나라 성왕은 곧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楚将子玉曰:「王遇晉至厚, 今知楚急曹衛而故伐之, 是軽王.王曰:「晉侯亡在外十九年, 困日久矣, 果得反国, 険阨尽知之, 能用其民, 天之所開, 不可當.

초장자옥왈 왕우진지후 금지초급조 위이고벌지 시경왕왕왈 진후망재외십구년 인일구의 과득반국 험액진지지 능용기민 천지소개 불가당

 

초나라의 장군 성자옥(成子玉)왕께서 진나라를 지극히 후대했는데 지금 조나라와 위나라를 급히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공격하니 이는 왕을 깔보는 것입니다.’라 했다. 성왕은 ()나라의 주군은 외지에서 19년을 망명하며 오랫동안 곤경에 처했다가 끝내 환국했으니 험난함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백성들도 제대로 활용할 줄 안다. 이는 하늘이 보우하신 바이니 당해 낼 수 없다.’고 했다.

 

子玉請曰:「非敢必有功, 願以閒執讒慝之口也.楚王怒, 少與之兵. 於是子玉使宛春告晉:「請复衛侯而封曹, 臣亦釈宋.咎犯曰:「子玉無礼矣, 君取一, 臣取二, 勿許.

자옥청왈 비감필유공 원이한집참특지구야초왕노 소여지병. 어시자옥사완춘고진 청복위후이봉조 신역석송구범왈 자옥무례의 군취일 신취이 물허

 

자옥은 반드시 공을 세운다고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사오나 이 참에 저 간사한 입을 막아버리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성왕이 화가 나서 적은 병력을 내주었다. 이에 자옥은 대부 완춘(宛春)을 진에 보내 위나라의 주군에게 조나라의 땅을 봉한다면 신도 송나라를 풀어 줄 것이오.’라고 전했다. 구범은 자옥이 무례하구나. 주군은 하나를 얻는데 신하가 둘을 취하려 들다니!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先軫曰:「定人之謂礼. 楚一言定三国, 子一言而亡之, 我則毋礼. 不許楚, 是棄宋也. 不如私許曹衛以誘之, 執宛春以怒楚, 既戦而後図之.

선진왈 정인지위예 초일언정삼국 자일언이망지 아즉무례. 불허초 시기송야. 불여사허조 위이유지 보완춘이노초 기전이후도지

 

선진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안정케 하는게 예입니다. 초나라는 한 마디로 세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고, 그대의 한 마디는 그들을 망하게 만드는 것이니 우리가 무례한 것이오. 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송나라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은밀히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켜 준다고 약속하여 그들을 유인하고 완춘을 포로로 잡아 초나라를 화나게 만들어 결전한 다음 다시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晉侯乃囚宛春於衛, 且私許复曹. 衛告絶於楚. 楚得臣怒, 撃晉師, 晉師退. 軍吏曰:「為何退?」文公曰:「昔在楚, 約退三舎, 可倍乎!楚師欲去, 得臣不肯.

진후내수완춘어위 차사허복조 위 조 위고절어초. 초득신노 격진사 진사퇴. 군리왈 위하퇴문공왈 석재초 약퇴삼사 사배호초사욕거 득신불긍.

 

진나라 문공이 바로 완춘을 위에 감금하고 은밀히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키겠노라 약속했다. 조나라와 위나라는 초나라에 단교를 통보했다. 초나라의 득신(得臣, 자옥)이 화가 나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후퇴했다. 군사들이 왜 후퇴하십니까?’라고 묻자 문공은 지난 날 초에 있을 때 사흘거리를 뒤로 물리겠다고 약속했으니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초나라의 군대도 물러나려 했으나 득신이 반대했다.

 

四月戊辰, 宋公斉将秦将與晉侯次城濮.

사월무진 송공 제장 진장여진후차성복.

 

4월 무진일에 송나라 국군, 제나라 장군, ()나라의 장군 등이 진나라 문공과 함께 성복(城濮)에 진을 쳤다.

 

己巳, 與楚兵合戦, 楚兵敗, 得臣収余兵去. 甲午, 晉師還至衡雍, 作王宮于践土.

기사 여초병합전 초병패 득신수여병거. 갑오 진사환지형옹 작왕궁우천토.

 

기사일,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맞붙어 싸우니 초나라의 군대가 패했고, 득신은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갔다. 갑오일에 진나라의 군대는 형옹(衡雍)으로 돌아갔고, 천토(踐土)에 왕궁을 지었다.

 

, 鄭助楚, 楚敗, , 使人請盟晉侯. 晉侯與鄭伯盟.

초 정조초 초패 구 사인청맹진후. 진후여정백맹.

 

당초 정나라는 초나라를 도왔는데 초나라가 패하자 겁이 나서 사람을 보내 진나라 문공에게 맹약을 청했다. 문공이 정()나라 백=지도자와 동맹했다.

 

五月丁未, 献楚俘於周, 駟介百乗, 徒兵千. 天子使王子虎命晉侯為伯, 賜大輅, 彤弓矢百, 玈弓矢千, 秬鬯一卣, 珪瓚, 虎賁三百人. 晉侯三辞, 然后稽首受之.

오월정미 헌초부어주 사개백승 도병천. 천자사왕자호명진후위백 사대로 동궁시백 로궁시천 거창일유 규찬 호분삼백인. 진후삼사 연후계수수지.

 

5월 정미일에 초나라의 포로들을 주나라에 바치니,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100, 보병이 1천 명이었다. 천자는 왕자 호()를 보내 문공을 패주로 선포하고 왕의 수레, 붉은 활과 화살 100, 검은 활과 화살 1,000, 좋은 술 한 항아리, 옥으로 만든 잔, 용맹한 병사 300명을 내려주었다. 문공은 세 번 사양한 다음 절을 하고 받았다.

 

周作晉文侯命:「王若曰父義和, 丕顕文, 能慎明徳, 昭登於上, 布聞在下, 維時上帝集厥命于文. 恤朕身継予一人永其在位.

주작진문후명 왕약왈 부의화 비현문 무 능신명덕 소등어상 포문재하 유시상제집궐명우문 무 휼짐신 계여일인영기재위

 

주나라의 왕은 진문후명(晉文侯命)을 지었다. ‘왕께서는 위대하고 빛나는 문왕과 무왕의 아비와 같은 온화함으로 밝은 덕을 높이 비추사 모든 이들에게 널리 펴시니 이에 상제께서 문왕과 무왕에 내리신 복을 내리셨다네! 나를 어여삐여겨 그대 한 분 만이 왕위에 있도록 해주시오

 

於是晉文公称伯. 癸亥, 王子虎盟諸侯於王庭.

어시진문공칭백. 계해 왕자호맹제후어왕정.

 

그리하여 진나라 문공을 백()으로 승급하고 계해일에 왕자 호가 제후들과 왕궁에서 회맹했다.

 

晉焚楚軍, 火數日不息, 文公歎. 左右曰:「勝楚而君猶憂, ?」文公曰:「吾聞能戦勝安者唯聖人, 是以懼. 且子玉猶在, 庸可喜乎!

진분초군 화수일불식 문공단. 좌우왈 승초이군유우 하문공왈 오문능전승안자유성인 시이구. 차자옥유재 용가희호

 

진나라가 초나라의 군대에 불을 지르니, 불은 며칠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문공이 탄식하자 좌우에서 초나라에게 이겼는데 주군께서는 울적해 하시니 어전 일입니까?’ 하니 문공은 내가 듣기에 전쟁에서 이기고도 편한 사람은 성인뿐이라니 그것이 두렵소. 게다가 자옥이 아직 있는데 어찌 기뻐하겠소?’라고 했다.

 

子玉之敗而帰, 楚成王怒其不用其言, 貪與晉戦, 譲責子玉, 子玉自殺. 晉文公曰:「我撃其外, 楚誅其内, 内外相應.於是乃喜.

자옥지패이귀 초성왕노기불용기언 탐여진전 양책자옥 자옥자살. 진문공왈 아격기외 초주기내 내외상응어시내희.

 

자옥이 패하여 돌아가니 초나라 성왕은 화를 내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욕심에서 진나라와 싸웠다고 자옥을 꾸짖으니 자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나라 문공은 우리는 그 밖을 공격했는데 초나라는 그 안에서 죽이니 안팎이 잘 맞는구나!’라며 기뻐했다.

 

六月, 晉人复入衛侯. 壬午, 晉侯度河北帰国. 行賞, 狐偃為首. 或曰:「城濮之事, 先軫之謀.文公曰:「城濮之事, 偃説我毋失信. 先軫曰軍事勝為右, 吾用之以勝. 然此一時之説, 偃言萬世之功, 柰何以一時之利而加萬世功乎是以先之.

유월 진인복입위후. 임오 진후도하북귀국. 행상 호언위수. 혹왈 성복지사 선진지모문공왈 성복지사 언설아무실신 선진왈 군사승위우오용지이승. 연차일시지설 언언만세지공 냐하이일시지리이가만세지공호 시이선지

 

6월에 진()나라가 위()나라의 국군을 다시 귀국시켰다. 임오일에 진나라 문공이 황하를 건너 북쪽 길로 귀국했다. 논공행상을 하는데 호언이 으뜸이었다. 누군가 성복의 일은 선진의 계책이었습니다.’라고 하자, 문공은 성복의 일에서 호언은 내게 믿음을 잃지 말라고 했소. 선진은 군사는 승리가 으뜸입니다라고 했고, 내가 그것으로 승리를 거두었소. 그러나 이 말은 한 때 필요한 것이고, 호언은 만세의 공적을 말한 것이오. 한 순간의 이익이 어찌 만세의 공적보다 더 하겠소? 그래서 호언을 앞세운 것이오.’라 했다.

 

, 晉侯会諸侯於温, 欲率之朝周. 力未能, 恐其有畔者, 乃使人言周襄王狩于河陽. 壬申, 遂率諸侯朝王於践土. 孔子読史記至文公, 諸侯無召王」、「王狩河陽, 春秋諱之也.

동 진후회제후어온 욕솔지조주. 역미능 공기유반자 내사인언주양왕수우하영. 임신 수솔제후조왕어천토. 공자독사기지문공 왈 제후무소왕’ ‘왕수하양자 춘추위지야.

 

겨울에 진나라 문공은 온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이들을 이끌고 주나라에 조회하려 했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그 중 이반자가 있을까 두려워 사람을 주 양왕에게 보내 하양(河陽)으로 사냥을 나오게 했다. 임신일에 제후들을 이끌고 천토에 와서 주()나라 양왕에게 조회했다. 공자(孔子)가 역사 기록을 읽다가 문공에 이르러 제후가 왕을 부를 수 없다.’ ‘왕이 하양에서 사냥을 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공자의춘추(春秋)가 말을 바꾼것이다.


丁丑, 諸侯囲許. 曹伯臣或説晉侯曰:「斉桓公合諸侯而国異姓, 今君為会而滅同姓. , 叔振鐸之後, 唐叔之後. 合諸侯而滅兄弟, 非礼.晉侯説, 复曹伯.

정축 제후위허. 조백신혹설진후왈 제환공합제후이국이성 금군위회이멸동성. 조 숙진탁지후 진 당숙지후. 합제후이멸형제 비례진후열 복조백.

 

정축일에 제후들이 허()나라를 포위했다. ()나라의 신하 중 누군가 문공에게 제나라 환공은 제후들을 모아 타성받이 나라도 보존했는데, 지금 주군께서는 제후들을 모아 같은 성()을 멸망시키고 계십니다. 조나라는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의 후손이고, ()나라는 성왕의 동생이자 무왕의 아들 당숙우(唐叔虞)의 후손입니다. 제후들을 모아 형제를 없애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진나라 문공이 기쁜 마음으로 조나라의 주군을 복위했다.

 

於是晉始作三行. 荀林父将中行, 先縠将右行, 先蔑将左行.

어시진시작삼행 순임보장중행 선곡장우행 선멸장좌행

 

이때 무렵 진나라는 군대에 3(三行)체계를 신설하여 순임보가 중행을, 선곡(先縠)이 우행을, 선멸(先蔑)이 좌행을 맡았다.

 

七年, 晉文公秦繆公共囲鄭, 以其無礼於文公亡過時, 及城濮時鄭助楚也. 囲鄭, 欲得叔瞻. 叔瞻聞之, 自殺. 鄭持叔瞻告晉. 晉曰:「必得鄭君而甘心焉.鄭恐, 乃閒令使謂秦繆公曰:「亡鄭厚晉, 於晉得矣, 而秦未為利. 君何不解鄭, 得為東道交?」秦伯説, 罷兵. 晉亦罷兵.

칠년 진문공 진목곡공공위정 이기무례어문공망과시 급성복시정조초야. 위정 욕득숙첨. 숙첨문지 자살. 정대숙첨고진. 진왈 필득정군이감심언정공 내한영사위진목공왈 망정후진 어진득의 이진미위위리. 군하불해정 득위동도교진백열 파병. 진역파병.

 

7년에 진()나라 문공과 진()나라 목공이 함께 정나라를 포위했다. 문공이 망명하고 있을 때 무례하게 대했고, 성복 때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정나라를 포위하여 숙첨(叔瞻)을 잡으려 했다. 숙첨이 이를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나라가 숙첨의 시신을 진나라에 보냈으나 진나라는 정나라의 주군을 잡아야 마음이 풀릴 것이다!’라고 했다. 정나라가 두려워 바로 틈을 봐서 진()나라 목공에게 사람을 보내 정나라가 망해 진()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는 얻고 진()나라는 이득이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어째서 정나라의 포위를 풀어 동쪽에 우방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나라 목공은 기뻐하며 병사를 철수시켰다. ()나라 역시 병사를 철수시켰다.

 

九年冬, 晉文公卒, 子襄公歓立. 是歳鄭伯亦卒.

구년동 진문공졸 자양공환립. 시세정백역졸

 

9(기원전 628) 겨울에 진나라 문공이 죽고, 아들 양공(襄公) ()이 뒤를 이었다. 이해에 정나라의 주군도 죽었다.

 

鄭人或売其国於秦, 秦繆公発兵往襲鄭. 十二月, 秦兵過我郊.

정인혹매기국어진 진목공발병왕습정. 십이월 진병과아교.

 

정나라의 누군가가 진()나라에 나라를 팔려고 하자, 진나라 목공은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를 습격했다. 12월에 진()나라의 병사가 진()나라의 교외를 지나갔다.



 

<문공 이후 진의 상황>

 

襄公元年春, 秦師過周, 無礼, 王孫満譏之. 兵至滑, 鄭賈人弦高将市于周, 遇之, 以十二牛勞秦師. 秦師驚而還, 滅滑而去.

양공원년춘 진사과주 무례 왕손만기지. 병지활 정가인현고장시우주 우지 이십이우노진사. 진사셩이환 멸활이거.

 

양공 원년 봄에 진()나라의 군대가 주나라를 지나면서 무례하게 굴자 왕손만(王孫滿)이 그를 비난했다. 군대가 활()나라에 이르렀을 때 주나라로 장사를 하러가던 정나라의 상인 현고(弦高)가 진나라의 군대와 마주치자 소 열두 마리로 진나라의 병사들을 위로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놀라 돌아가는 길에 활나라를 멸망시키고 갔다.

 

晉先軫曰:「秦伯不用蹇叔, 反其衆心, 此可撃.欒枝曰:「未報先君施於秦, 撃之, 不可.先軫曰:「秦侮吾孤, 伐吾同姓, 何徳之報?」遂撃之. 襄公墨衰絰.

진선진왈 진백불용건숙 반기중심 차가격난지왈 미보선군시어진 격지 불가선진왈 진회오고 벌오동성 하덕지보수격지. 양공묵최질.

 

()나라의 선진이 ()나라의 주군은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는데다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섰으니 공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난지가 선군께서 진()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직 갚지 않았는데 공격한다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선진은 ()나라가 우리 주군을 모욕하고 우리와 같은 성을 정벌하는데 무슨 은덕을 갚는단 말이오!’라고 했다. 마침내 진()나라를 쳤다. 양공은 검은 상복을 입었다.

 

四月, 敗秦師于殽, 虜秦三将孟明視西乞秫白乙丙以帰. 遂墨以葬文公. 文公夫人秦女, 謂襄公曰:「秦欲得其三将戮之.公許, 遣之. 先軫聞之, 謂襄公曰:「患生矣.軫乃追秦将. 秦将渡河, 已在船中, 頓首謝, 卒不反.

사월 패진사우효 노진삼장맹명시 서기술 백을병이귀. 수묵이장문공. 문공부인진녀 위양공왈 진욕득기삼장참지공허 견지. 선진문지 위양공왈 환생의진내추진장. 진장도하 이재선중 돈수사 졸불반.

 

4, 효산(殽山)에서 진()의 군대를 물리치고 진의 세 장수 맹명시(孟明視), 서기술(西乞秫), 백을병(白乙丙)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검은 상복을 입고 문공을 안장했다. 문공의 부인은 진() 여자였는데 양공에게 ()이 그 세 장수를 죽이려 한답니다.’라고 하니 양공이 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허락했다. 선진이 이를 듣고는 양공에게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선진이 진의 세 장수를 뒤쫓았으나 진의 장수들은 황하를 건너 이미 배 안에 있으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할 뿐 끝내 배를 돌리지 않았다.

 

後三年, 秦果使孟明伐晉, 報殽之敗, 取晉汪以帰. 四年, 秦繆公大興兵伐我, 度河, 取王官, 封殽尸而去. 晉恐, 不敢出, 遂城守.

후삼년 진과사맹명벌진 보효지패 취진왕이귀. 사년 진목공대흥병벌아 도하 취왕관 봉료시이거. 진공 불감출 수성수.

 

3년 뒤(기원전 625), ()이 과연 맹명시를 보내어 진()을 정벌하여 효산에서의 패배를 갚는 한편 진()나라의 왕() 땅을 취하고 돌아갔다. 4년에 진나라 목공은 진()나라를 대대적으로 정벌하여 황하를 건너 왕관(王官)땅을 취한 다음 효산에서 병사들의 시신을 묻고 돌아갔다. ()나라가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한 채 성을 지켰다.

 

五年, 晉伐秦, 取新城, 報王官役也.

오년 진벌진 취신성 보왕관역야.

 

5년에 진()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하여 신성(新城)을 취함으로써 왕관을 뺏긴 분풀이를 했다.

 

六年, 趙衰成子欒貞子咎季子犯霍伯皆卒. 趙盾代趙衰執政.

육년 조최성자 난정자 구계자범 괵백개졸. 조돈대조최집정.

 

6년에 조최성자(趙衰成子, 조최), 난정자(欒貞子, 난지), 구계자범(咎季子犯, 구범), 곽백(霍白) 등이 모두 죽었다. 조돈(趙盾)이 조최를 이어 집정했다.

 

七年八月, 襄公卒. 太子夷皐少. 晉人以難故, 欲立長君. 趙盾曰:「立襄公弟雍. 好善而長, 先君愛之且近於秦, 秦故好也. 立善則固, 事長則順, 奉愛則孝, 結旧好則安.

칠년팔월 양공졸. 태자이고소. 진인이난고 욕립장군 조돈왈 입양공제옹 호선이장 선군애지 차근어진 진고호야. 입선즉고 사장즉순 봉애즉효 결구호즉안

 

78월에 양공이 죽었다. 태자 이고(夷皐)는 어렸다. 진나라 사람들이 난리 때문에 나이가 든 국군을 세우고 싶어 했다. 조돈은 양공의 동생인 옹()을 세웁시다. 선행을 좋아하고 나이도 있으며 선군께서 예뻐하셨습니다. 또 진()나라와도 가까워 진나라도 좋아할 것이며 그런 사람을 세우면 안정되고, 나이든 사람이니 순조로워지며, 사랑으로 받드니 효성스러울 것이며 오랜 우의로 안정을 이룰수 있습니다.’했다.

 

賈季曰:「不如其弟樂. 辰嬴嬖於二君, 立其子, 民必安之.

가계왈 불여기제악 신영폐어이군 입기자 민심안지

 

가계(賈季)그 동생 낙()만 못합니다. (그 어머니) 신영(辰嬴)은 두 주군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 아들을 세우면 인민들이 틀림없이 안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趙盾曰:「辰嬴賎, 班在九人下, 其子何震之有! 且為二君嬖, 淫也. 為先君子, 不能求大而出在小国, 僻也. 母淫子僻, 無威陳小而遠, 無援将何可乎!

조돈왈 신영천 반재구인하 기자하진지유 차위이군폐 음야. 위선군자 불능구대이출재소국 벽야. 모음자벽 무위 진소이원 무원 장하가호

 

조돈은 신영은 천하고 그 자리도 아홉 번째이니 그 아들에게 무슨 위엄이 있겠소? 그리고 두 선군의 총애를 받은 것은 음란함이오. 선군의 아들로서 큰 나라의 도움도 구하지 못한 채 작은 나라에 나가 있으니 비루하기 짝이 없지요. 어미는 음란하고 아들은 무지하니 위엄이 없소이다! 또 진()나라는 작고 멀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뭐가 되겠소이까?’라고 했다.

 

使士会如秦迎公子雍. 賈季亦使人召公子樂於陳. 趙盾廃賈季, 以其殺陽処父.

사사회여진영공자옹. 먀가역가인공자악어진. 조돈폐가계 이기살양처보.

 

이에 사회(士會)를 진()나라에 보내 공자 옹을 맞아들였다. 가계 역시 진()나라로 사람을 보내 공자 낙을 불러들였다. 조돈은 양처보(陽處父)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가계의 생각을 폐기시켰다.

 

十月, 葬襄公.

시월 장양공

 

10월에 양공을 안장했다.

 

十一月, 賈季奔翟. 是歳, 秦繆公亦卒.

십일월 가계분적. 시세 진목공역졸.

 

11월에 가계가 적()나라로 달아났다. 이해에 진나라 목공도 죽었다.



 

霊公元年四月, 秦康公曰:「昔文公之入也無衛, 故有呂郤之患.乃多與公子雍衛. 太子母繆嬴日夜抱太子以号泣於朝, :「先君何罪其嗣亦何罪舎適而外求君, 将安置此?」出朝, 則抱以適趙盾所, 頓首曰:「先君奉此子而属之子, 此子材, 吾受其賜不材, 吾怨子. 今君卒, 言猶在耳, 而棄之, 若何?」

영공원년사월 진강공왈 석문공지입야무위 고유여 극지환내다여공자옹위. 태자모진영일야포태자이호읍어조 왈 선군하죄 기사역하죄 사적이외구군 장안치차출조 즉포이적조돈소 돈수왈 ;선군봉차자이속지자 왈 자자재 오수시사 불재 오원자금군졸 언유재이 이기지 약하

 

영공(靈公) 원년 4월에 진()나라 강공(康公)전에 문공이 환국할 때 호위가 없었기 때문에 여성과 극곡의 반란이 있었다.’라 하며 공자 옹에게 호위병을 많이 주었다. 태자의 어머니 목영(穆嬴)은 밤낮으로 태자를 껴안고 조정에서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으며, 그 후계자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적자를 버리고 밖에서 주군을 구하니 장차 이 아이를 어찌 할꼬!’라며 울었다. 궁궐을 나와 태자를 안고 조돈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선군께서 이 아이를 그대에게 맡기시면서 이 아이가 재목이 되면 내가 그대에게 감사하겠지만 재목으로 크지 못하면 그대를 원망할 것이오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지금 주군께서 돌아가셨지만 그 말씀이 아직 귓가에 맴도는데 그 당부를 저버리려 하시다니 어찌 이럴 수 있소?”라고 했다.

 

趙盾與諸大夫皆患繆嬴, 且畏誅, 乃背所迎而立太子夷皐, 是為霊公. 発兵以距秦送公子雍者. 趙盾為将, 往撃秦, 敗之令狐. 先蔑随会亡奔秦.

조돈여제대부개환진영 차외주 내배소영이입태자이고 시위영공. 발병이거진송공자옹자. 조돈위장 왕격진 패지영호. 선멸 수회망분진.

조돈과 대부들은 모두 목영을 꺼렸고, 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바로 맞이하려던 옹을 배반하고 태자 이고를 옹립하니 이가 영공(靈公)이다. 그리고 군대를 내어 공자 옹을 호송하던 진()나라를 막고는 조돈이 장수가 되어 진나라를 공격하여 영호(令狐)에서 물리쳤다. 선멸(先蔑)과 수회(随會)는 진()나라로 달아났다.

 

, 許君皆会趙盾, 盟於扈, 以霊公初立故也.

추 제 송 위 정 조 허군 개회조돈 먕어호 이영공초립고야.

 

가을에 제나라, 송나라, ()나라, 정나라, (나라), 허나라의 국군들이 모두 조돈과 합류하여 호읍(扈邑)에서 회맹하니 영공이 막 즉위했기 때문이다.

 

四年, 伐秦, 取少梁. 秦亦取晉之郩.

사년 벌진 취소량. 진역취진지효.

 

4년에 진()나라를 정벌하여 소량(少梁)을 탈취했다. ()나라 역시 진()나라의 효읍(郩邑)을 취했다.

 

六年, 秦康公伐晉, 取羈馬. 晉侯怒, 使趙盾趙穿郤欠撃秦, 大戦河曲, 趙穿最有功.

육년 진강공벌진 취기마. 진후노 사조돈 조천 극결격진 대전하곡 조천최유공.

 

6년에 진나라 강공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기마(羈馬)를 취했다. 영공이 노하여 조돈, 조천(趙穿), 극결(郤欠)로 하여금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하곡(河曲)에서 크게 싸웠다. 조천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

 

七年, 晉六卿患随会之在秦, 常為晉亂, 乃詳令魏寿余反晉降秦. 秦使随会之魏, 因執会以帰晉.

칠년 진육경환수회지재진 상위진란 내상영위수여반진항진. 진사수회지위 인집회이귀진.

 

7년에 진()나라의 육경(六卿)들이 진()나라에 있는 수회가 진()나라를 어지럽힐까 걱정되어 위수여(魏壽餘)에게 거짓으로 진()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에 항복하게 했다. ()나라가 수회를 위읍(魏邑)에 보내자 (위수여가) 잡아서 진()나라로 돌아왔다.

 

八年, 周頃王崩, 公卿争権, 故不赴. 晉使趙盾以車八百乗平周亂而立匡王. 是年, 楚荘王初即位.

팔년 주경왕붕 공경정권 고불부. 진사조돈이거팔백승평주란이립광왕. 시년 초장왕초즉위.

 

8년에 주나라 경왕(頃王)이 죽자 공경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상을 알리지도 못했다. 진나라는 조순에게 전차 800승을 몰고 가서 주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광왕(匡王)을 세웠다. 이 해에 초나라 장왕이 즉위했다.

 

十二年, 斉人弑其君懿公.

십이년 제인시시군의공.

 

12년에 제나라 사람들이 그 국군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十四年, 霊公壮, , 厚斂以彫牆. 従台上弾人, 観其避丸也. 宰夫胹熊蹯不熟, 霊公怒, 殺宰夫, 使婦人持其屍出棄之, 過朝. 趙盾随会前數諫, 不聴已又見死人手, 二人前諫. 随会先諫, 不聴. 霊公患之, 使鉏麑刺趙盾. 盾閨門開, 居処節, 鉏麑退, 歎曰:「殺忠臣, 棄君命, 罪一也.遂触樹而死.

십사년 영공장 치 후렴이조장. 종대상탄인 관기피환야. 재부이웅번불숙 영공노 살재부 사부인대기시출기지 과조. 조돈 수회전수간 불청 이우견사인수 이인전간. 수회선간 불청. 영공환지 사서마자조돈. 돈규문개 거처절 서마퇴 탄왈 살충신 기군명 죄일야수촉수이사.

 

14년에 영공이 장성하자 사치스러워져 세금을 무겁게 물리고 담장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누대 위에서 사람들을 향해 탄환을 쏘고 탄환을 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궁중 요리사가 곰발바닥을 덜 익혀서 내오자 영공은 화가 나서 요리사를 죽이고 그 부인에게 시체를 들고 나가서 버리게 했다. 조돈과 사회가 전부터 몇 차례 간언하였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다 또 죽은 사람의 손을 보게 되자 두 사람은 나아가 일렀다. 수회가 먼저 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영공은 이들이 두려워 서마(鉏麑)를 시켜 조돈을 죽이게 했다. 조돈의 내실 문이 열려 있었는데 행동거지가 절제가 있었다. 서마가 물러나와 충신을 죽이는 것과 국군의 명령을 어기는 것, 모두 같은 죄로구나!’라고 탄식하며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 盾常田首山, 見桑下有餓人. 餓人, 亓眯明也. 盾與之食, 食其半. 問其故, :「宦三年, 未知母之存不, 願遺母.盾義之, 益與之飯肉. 已而為晉宰夫, 趙盾弗复知也.

초 돈상전수산 견상하유아인. 아인 기미명야. 돈여지식 식기반. 문기고 왈 환삼년 미지모지존불 원유모돈의지 익여지반육. 이이위진재부 조돈불복지야.

 

전부터 조돈은 수산(首山)으로 자주 사냥을 나갔는데,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린 사람을 보았다. 굶주린 사람은 기미명(亓眯明)이란 자였다. 조돈이 먹을 것을 주자 그 절반만 먹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남의 집살이 3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조차 모르지만 어머니를 위해 남겨 놓고 싶습니다.’라 했다. 조돈은 그를 의롭게 여겨 먹을 것과 고기를 더 주었다. 얼마 뒤 진나라의 주방장이 되었지만 조돈은 알지 못했다.

 

九月, 晉霊公飲趙盾酒, 伏甲将攻盾. 公宰亓眯明知之, 恐盾酔不能起, 而進曰:「君賜臣, 觴三行可以罷.欲以去趙盾, 令先, 毋及難. 盾既去, 霊公伏士未会, 先縦齧狗名敖. 明為盾搏殺狗. 盾曰:「棄人用狗, 雖猛何為.然不知明之為陰徳也. 已而霊公縦伏士出逐趙盾, 亓眯明反撃霊公之伏士, 伏士不能進, 而竟脱盾. 盾問其故, :「我桑下餓人.問其名, 弗告. 明亦因亡去.

구월 진영공음조돈주 복갑장공돈. 공재기미명지지 공돈취불능기 이진왈 군사신 상삼행가이파욕이거조돈 영선 무급란. 돈기거 영공복사미회 선종설구명오. 명위돈박살구. 돈왈 기인용구 수먕하위연부지명지위음덕야. 이이영공종복사풀축조돈 기미명반격영공지복사 복사불능지 이경찰돈. 돈문기고 왈 아상하아인문기명 불고. 명역인망거.

 

9월에 진()나라 영공이 조돈에게 술을 먹이고 매복시킨 병사로 조돈을 공격하려 했다. 영공의 주방장 기미명이 이를 알고는 조돈이 취하여 일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앞으로 나아가 주군께서 신하에게 베푸는 술자리는 술이 석 잔씩 돌면 일어나도 용서됩니다.’라고 하여 조돈이 먼저 자리를 떠서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조돈은 자리를 떴고, 영공이 매복시킨 병사들은 다 모이지 않아 먼저 오()라는 사나운 개를 풀었다. 기미명이 조돈을 위해 개를 때려 죽였다. 조돈이 사람대신 사나운 개를 쓰다니 무슨 소용인가?’라 했다. 그러나 (조돈은) 기미명이 베푼 은덕을 몰랐다. 이윽고 영공은 자신이 매복시킨 병사들을 풀어 조돈을 쫓게 했으나 기미명이 반격을 가하여 더 이상 쫓지 못했고, 조돈은 결국 벗어날 수 있었다. 조돈이 (자신을 구해준) 까닭을 묻자 (기미명은) ‘내가 뽕나무 아래의 그 굶주린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이름을 물으니 말하지 않았다. 기미명도 틈을 타서 달아났다.

 

盾遂奔, 未出晉境. 乙丑, 盾昆弟将軍趙穿襲殺霊公於桃園而迎趙盾. 趙盾素貴, 得民和霊公少, , 民不附, 故為弑易. 盾复位.

돈수분 미출진경. 을축 돈곤제장군조천습살영공어도원이영조돈. 조돈소귀 득민화 영공소치 민불부 고위시이. 돈복위.

 

조돈은 달아나긴 했으나 진나라의 국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을축일에 조돈의 동생 조천이 桃園에서 영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조돈을 맞아들였다. 조돈이 평소 존경을 받고 민심을 얻은 반면 영공은 젊은 나이에 사치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해하기 수월했다. 조돈은 자리에 복귀했다.

 

晉太史董狐書曰趙盾弑其君, 以視於朝. 盾曰:「弑者趙穿, 我無罪.太史曰:「子為正卿, 而亡不出境, 反不誅国亂, 非子而誰?」孔子聞之, :「董狐, 古之良史也, 書法不隠. 宣子, 良大夫也, 為法受悪. 惜也, 出疆乃免.

진태사동호서왈 조돈시기군이시어조. 돈왈 시자조천 아무죄태사왈 자위정경이망불출경 반불주국란 비자이수공자문지 왈 동호 고지양사야 서법불은. 선자 양대부야 위법수악. 석야 출강내면

 

진나라의 태사(太史) 동호(董狐)조돈이 그 주군을 시해했다.’라고 기록하고는 조정에 보고했다. 조돈은 시해한 사람은 조천이고 나는 죄가 없다.’라고 했다. 태사는 그대는 정경의 신분으로 도망쳤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나라를 어지럽힌 자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라고 했다. 공자가 이 일을 듣고는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으로 죄를 숨기지 않는 기록의 원칙을 지켰고, 조 선자(宣子)는 훌륭한 대부로서 원칙을 지키다가 오명을 썼다. 안타깝구나, 국경을 벗어났더라면 오명을 면했을 터인데!’라 했다.


趙盾使趙穿迎襄公弟黒臀于周而立之, 是為成公.

조돈사조천영양공제흑둔우주이립지 시위성공

 

조돈은 조천을 시켜 양공의 동생 흑둔(黑臀)을 주나라에서 맞아들여 세우니 이가 성공(成公)이다.

 

成公者, 文公少子, 其母周女也. 壬申, 朝于武宮.

성공자 문공소자 기모주녀야. 임신 조우무궁

 

성공은 문공의 작은아들로, 그 어머니는 주나라 여자였다. 임신일에 무궁(武宮)에서 조회했다.

 

成公元年, 賜趙氏為公族. 伐鄭, 鄭倍晉故也.

성공원년 사조씨위공족. 벌정 정배진고야.

 

성공 원년(기원전 606)에 조씨를 공족(公族=王家)으로 삼았다. 진나라를 배신한 정나라를 정벌했다.

 

三年, 鄭伯初立, 附晉而棄楚. 楚怒, 伐鄭, 晉往救之.

삼년 정백초립 부진이기초. 초노 벌정 진왕구지.

 

3년에 정나라의 주군이 막 즉위하여 晉나라에 편 먹고 초나라를 버렸다. 초나라가 노하여 정나라를 정벌하자 晉나라가 가서 구원했다.

 

六年, 伐秦, 虜秦将赤.

육년 벌진 노진장적

 

6년에 진()나라를 정벌하여 장수 적()을 포로로 잡았다.

 

七年, 成公與楚荘王争彊, 会諸侯于扈. 陳畏楚, 不会. 晉使中行桓子伐陳, 因救鄭, 與楚戦, 敗楚師. 是年, 成公卒, 子景公拠立.

칠년 성공여초장왕쟁강 회제후우호. 진외초 불회. 진사중항환자벌진 인구정 여초전 패초사. 시년 성공졸 자경공거립.

 

7년에 성공과 초나라 장왕이 힘을 다투며 호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나라는 초나라가 두려워 회맹에 오지 않았다. ()나라가 중항환자(中行桓子, 순임보)를 보내 진()나라를 토벌했다.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초나라와 싸워 초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해에 성공이 죽고, 아들 경공(景公) ()가 즉위했다.

 

景公元年春, 陳大夫夏徴舒弑其君霊公.

경공원년춘 진대부하징서시기군영공

 

경공 원년 봄에 진()나라의 대부 하징서(夏徵舒)가 그 주군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二年, 楚荘王伐陳, 誅徴舒.

이년 초장왕벌진 주징서.

 

2년에 초나라 장왕이 진()나라를 토벌하여 하징서를 죽였다.

 

三年, 楚荘王囲鄭, 鄭告急晉. 晉使荀林父将中軍, 随会将上軍, 趙朔将下軍, 郤克欒書先縠韓厥鞏朔佐之. 六月, 至河. 聞楚已服鄭, 鄭伯肉袒與盟而去, 荀林父欲還. 先縠曰:「凡來救鄭, 不至不可, 将率離心.卒度河. 楚已服鄭, 欲飲馬于河為名而去. 楚與晉軍大戦. 鄭新附楚, 畏之, 反助楚攻晉. 晉軍敗, 走河, 争度, 船中人指甚衆. 楚虜我将智罃. 帰而林父曰:「臣為督将, 軍敗當誅, 請死.景公欲許之. 随会曰:「昔文公之與楚戦城濮, 成王帰殺子玉, 而文公乃喜. 今楚已敗我師, 又誅其将, 是助楚殺仇也.乃止.

삼년 초장왕위정 정고급진. 진순임보장중군 수회장상군 조삭장하군 극극 난서 선곡 한궐 공삭좌지. 유월 지하. 문초기복정 정백육단여맹이거 순임보욕환. 선곡왈 범래구정 부지불가 장솔이심졸도하 초이복정 욕음마우하명이거. 초여진군대전. 정신부초 외지 반조초공진. 진군패 주하 쟁도 선중인지심중. 초노아장지앵. 귀이임보왈 신위독장 군패당주 청사경공욕허지. 수회왈 석문공지여초전성복 성왕귀살자옥 이문공내희 금초이패아사 우주기장 시조초살구야내지

 

3년에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는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순임보에게 중군을, 수회에게 상군을 조삭에게 하군을 이끌게 하는 한편 극극(郤克), 난서(欒書), 선곡(先縠), 한궐(韓厥), 공삭(鞏朔)이 보좌했다. 6월에 황하에 이르렀으나, 초나라가 이미 정나라를 굴복시켰고, 정나라의 주군이 어깨를 드러내고 동맹을 맺으러 갔다는 소식에 순임보는 군대를 돌리려 했다. 선곡은 '어쨌거나 정나라를 구하러 왔는데 가지 않으면 안 되오. 병사들의 마음이 흩어 질 것이오.'라고 했다.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초나라는 이미 정나라를 굴복시키고 황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위세를 뽐내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초나라와 진나라의 군대가 크게 싸웠다. 정나라가 바로 초나라에 붙었기 때문에 초나라를 겁내서 도리어 초나라를 도와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패하여 황하로 달아나 서로 건너려고 다투니 배 안에는 잘린 손가락이 아주 많았다. 초나라는 晉나라의 장수 지앵(智罃)을 사로잡았다. 귀국하자 순임보는 '신은 통솔자로서 군을 패배하게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죽음을 내리십시오!'라고 했다. 경공이 허락하려고 하자 사회가 '지난 날 문공께서 초나라와 성복에서 싸웠을 때 초나라 성왕은 돌아가 자옥을 죽였고, 문공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군이 이미 초나라에 패했는데, 또 다시 장수를 죽인다면 초나라가 원수 죽이는 일을 돕는 꼴입니다.'라 하니 바로 그만 두었다.

 

四年, 先縠以首計而敗晉軍河上, 恐誅, 乃奔翟, 與翟謀伐晉. 晉覚, 乃族縠. , 先軫子也.

사년 선곡이수계이패진군하상 공주 내분적 여적모벌진. 진각 내족곡. 곡 선진자야.

 

4년에 선곡은 맨 먼저 계책을 냈다가, 황하에서 진나라의 군대가 패하자 죽음이 두려워 바로 적()나라로 달아나서는 적과 진나라에 대한 정벌을 꾀했다. 진나라가 이를 알고는 바로 곡의 가족을 다 죽였다. 선곡은 선진의 아들이다.

 

五年, 伐鄭, 為助楚故也. 是時楚荘王彊, 以挫晉兵河上也.

오년 벌정 위조초고야. 시시초장왕강 이좌진병하상야.

 

5년에 정나라를 토벌했다. 초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이 무렵 초나라 장왕은 강했는데, 황하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꺾었기 때문이다.

 

六年, 楚伐宋, 宋來告急晉, 晉欲救之, 伯宗謀曰:「, 天方開之, 不可當.乃使解揚紿為救宋. 鄭人執與楚, 楚厚賜, 使反其言, 令宋急下. 解揚紿許之, 卒致晉君言. 楚欲殺之, 或諫, 乃帰解揚.

육년 초벌정 송래고급진 진욕구지 백종모왈 초 천방개지 불가당내사해양태위구송. 정인집여초 초후사 사만기언 영송급하. 해양태허지 졸치진군언. 초욕살지 혹간 내귀해양.

 

6년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는 진()나라에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가 구원하려 했으나 백종(伯宗)이 '초나라는 하늘이 돕고 있어 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해양(解揚)에게 송나라를 구원한다고 속이게 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그를 잡아 초나라에 보내니 초나라는 재물을 후하게 주며 그 말을 반대로 하게 하여 송나라를 빨리 굴복시키려 했다. 해양이 거짓으로 허락하고는 끝내는 진나라의 주군이 한 말을 전했다. 초나라가 그를 죽이려 했으나 누군가 말려서 해양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七年, 晉使随会滅赤狄.

칠년 진사수회멸적적.

 

7년에 진나라가 수회를 시켜 적적(赤狄=동쪽 오랑캐)을 멸망시켰다.


八年, 使郤克於斉. 斉頃公母従樓上観而笑之. 所以然者, 郤克僂, 而魯使蹇, 衛使眇, 故斉亦令人如之以導客. 郤克怒, 帰至河上, :「不報斉者, 河伯視之!至国, 請君, 欲伐斉. 景公問知其故, :「子之怨, 安足以煩国!弗聴. 魏文子請老休, 辟郤克, 克執政.

팔년 사극극어제. 제경공모종루상관이소지. 소이연자 극극루 이노사건 위사묘 고제역영인여지이도객. 극극노 귀지하상 왈 불보제자 하백시지지국 청군 욕벌제. 경공문지기고 왈 자지원 안족이번국불청. 위문자청노휴 벽극극 극집정.

 

8년 극극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나라 경공(頃公)의 어머니가 누각 위에서 보고는 웃었다. 그렇게 한 까닭은 극극은 꼽추, 노나라의 사신은 절름발이, ()나라의 사신은 애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나라도 이들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님을 이끌도록 했다. 극극은 화가 났고, 돌아가는 길에 황하에서 제나라에 보복하지 않으면 하백께서 증명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나라에 도착하여 국군에게 제나라를 정벌하십사 청했다. 경공이 그 까닭을 묻고는 그대의 원한 때문에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하겠는가?”라 하고는 들어주지 않았다. 위문자(魏文子)가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청하며 극극을 부르니 극극이 집정하게 되었다.

 

九年, 楚荘王卒. 晉伐斉, 斉使太子彊為質於晉, 晉兵罷.

구년 초장왕졸. 진벌제 제사태자강위질어진 진병파.

 

9(기원전 581)에 초나라 장왕이 죽었다. ()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자 제나라는 태자 강()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진나라는 군대를 물렸다.

 

十一年春, 斉伐魯, 取隆. 魯告急衛, 衛與魯皆因郤克告急於晉. 晉乃使郤克欒書韓厥以兵車八百乗與魯衛共伐斉.

십일년춘 제벌노 취융. 노고급위 위여노개인극극고급어진. 진내사극극 난서 한궐이병거팔백승여노 위공벌제.

 

11년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융읍(隆邑)을 탈취했다. 노나라가 위()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위나라와 노나라는 모두 극극을 통해 진나라에 급함을 알렸다. 진나라가 극극, 난서, 한궐에게 전차 800승을 주어 노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치게 했다.

 

, 與頃公戦於鞍, 傷困頃公. 頃公乃與其右易位, 下取飲, 以得脱去. 斉師敗走, 晉追北至斉. 頃公献宝器以求平, 不聴. 郤克曰:「必得蕭桐姪子為質.斉使曰:「蕭桐姪子, 頃公母頃公母猶晉君母, 柰何必得之不義, 請复戦.晉乃許與平而去.

하 여경공전어한 상인경공. 경공급여기우역위 하취음 이득탈거. 제사패주 진추북지제. 경공헌보기이구평 불청. 극극왈 필득소동질자위질제사왈 소동질자 경공모 경공모유진군모 내하필득지 불의 청복전진내허여평이거.

 

여름에 안() 지역에서 경공과 싸워 경공에게 상처를 입히고 곤경으로 몰았다. 경공은 그 시위병과 자리를 바꾸고 내려서는 물을 마시는 척하다가 탈출했다. 제나라에 패하여 달아나자 진나라는 북으로 제나라 땅까지 뒤쫓았다. 경공은 보물 따위를 바치며 강화를 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극극이 소동(蕭桐)의 조카를 인질로 잡아야만 합니다.’라고 했다. 제나라의 사신은 소동의 조카라면 경공의 어머니입니다. 경공의 어머니는 진()나라 주군의 어머니와 같거늘 어찌 기어이 인질로 요구한단 말입니까? 의리가 아니니 다시 싸웁시다.’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강화를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楚申公巫臣盗夏姫以奔晉, 晉以巫臣為邢大夫.

초신공무신도하희이분진 진이무신위형대부.

 

초나라의 신공무신(申公巫臣)이 하희(夏姬)를 훔쳐 진()나라로 도망쳐 오자 진나라는 무신을 형()의 대부(大夫)로 삼았다.

 

十二年冬, 斉頃公如晉, 欲上尊晉景公為王, 景公譲不敢. 晉始作六()[], 韓厥鞏朔趙穿荀騅趙括趙旃皆為卿. 智罃自楚帰.

십이년동 제경공여진 욕상존진경공위왕 경공양불감. 진시작육경군 한궐 공삭 조천 순추 조괄 조전위경. 지앵자초귀.

 

12년 겨울에 제나라 경공이 진나라에 와서 진나라 경공을 왕으로 받들려 했으나 경공은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진나라가 처음으로 6(六軍)을 창설하고, 한궐, 공삭, 조천, 순추(荀騅), 조괄(趙括), 조전(趙旃)을 경()으로 삼았다. 지앵이 초나라에서 돌아왔다.

 

十三年, 魯成公朝晉, 晉弗敬, 魯怒去, 倍晉. 晉伐鄭, 取氾.

십삼년 노성공조진 진불경 노노거 배진. 진벌정 취범.

 

13년에 노나라 성공이 진나라에 인사를 드리러 왔으나 진나라가 그를 존중하지 않자 화가 나서 가버리고는 진나라를 등졌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여 범() 땅을 취했다.

 

十四年, 梁山崩. 問伯宗, 伯宗以為不足怪也.

십사년 양산붕. 문백종 백종이위부족괴야.

 

14년에 양산(梁山)이 무너졌다. 진나라의 국군이 백종에게 물으니 백종은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고 했다.

 

十六年, 楚将子反怨巫臣, 滅其族. 巫臣怒, 遺子反書曰:「必令子罷於奔命!乃請使呉, 令其子為呉行人, 教呉乗車用兵. 呉晉始通, 約伐楚.

십육년 초장자반원무신 멸기족. 무신노 유자반서왈 필영자파어분명내청사오 영기자위오행인 교오승더용병. 오진시통 약벌초.

 

16년에 초나라의 장수 자반(子反)이 무신에 대한 한풀이로 그 가족을 모두 죽였다. 무신이 노하여 자반에게 편지를 보내 반드시 네 놈을 도망 다니다 죽는 신세로 만들겠다!”라 하고는 바로 오()나라의 사신이 되길 청하고, 그 아들은 오나라의 행인(行人)이 되어 오나라에게 전차와 용병을 가르치게 했다. 오나라와 진나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열어 초나라를 정벌하기로 약속했다.

 

十七年, 誅趙同趙括, 族滅之. 韓厥曰:「趙衰趙盾之功豈可忘乎柰何絶祀!乃复令趙庶子武為趙後, 复與之邑.

십칠년 주조동 조괄 족멸지. 한궐왈 조최 조돈지공이가망호 내하절사내복령조서자위조무 복여지읍.

 

17년에 진나라가 조동(趙同)과 조괄을 죽이고 집안을 멸했다. 한궐이 조최와 조돈의 공을 어찌 잊을 수 있는가? 제사를 어찌 끊을 수 있는가?”라고 하자 다시 조씨의 서자 조무(趙武)를 조씨의 후계로 삼고 봉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十九年夏, 景公病, 立其太子寿曼為君, 是為厲公. 後月余, 景公卒.

십구년 경경병 입기태자수만위군 시위여공. 후월여 경공졸.

 

19년 여름에 경공의 병이 깊어져 태자 수만(壽曼)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여공(厲公)이다. 한 달 남짓 뒤에 경공이 죽었다.


厲公元年, 初立, 欲和諸侯, 與秦桓公夾河而盟. 帰而秦倍盟, 與翟謀伐晉.

여공원년 초립 욕화제후 여진환공협하이맹. 귀이진배맹 여적모벌진.

 

여공 즉위 원년 제후들과 화친을 위해 진()나라 환공(桓公)과 탕산(碭山) 근처 夾河에서 회맹했다. 귀국하여 진()나라가 동맹을 깨고 적나라와 진()나라 정벌을 꾀했다.

 

三年, 使呂相譲秦, 因與諸侯伐秦. 至涇, 敗秦於麻隧, 虜其将成差.

삼년 사여상양진 인여제후벌진. 지경 패진어마수 노기장성차.

 

즉위 3년 여상(呂相)에게 진()나라를 꾸짖게 하고 이어 제후들과 진나라 정벌에 나섰다. 경하(涇河)에 이르러 마수(麻隨)에서 진()나라 군을 물리치고 그 장수 성차(成差)를 포로로 잡았다.

 

五年, 三郤讒伯宗, 殺之. 伯宗以好直諫得此禍, 国人以是不附厲公.

오년 삼극참백종 살지. 백종이호직간득차과 국인이시불부여공.

 

5년에 극씨 셋이 백종을 헐뜯어 그를 죽였다. 백종이 바른 소리를 자주 하는 바람에 이런 화를 당했다. 백성들이 이로 인해 여공을 따르지 않았다.

 

六年春, 鄭倍晉與楚盟, 晉怒. 欒書曰:「不可以當吾世而失諸侯.乃発兵. 厲公自将, 五月度河.

육년춘 정배진여초맹 진노. 난서왈 불가이당오세이실제후내발병. 여공자장 오월도하

 

6년 봄에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와 동맹하자 진()나라는 분노하여 난서는 우리 세대에서 제후들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라 하니 바로 군대를 일으켰다. 여공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5월에 황하를 건넜다.

 

聞楚兵來救, 范文子請公欲還. 郤至曰:「発兵誅逆, 見彊辟之, 無以令諸侯.遂與戦. 癸巳, 射中楚共王目, 楚兵敗於鄢陵. 子反収余兵, 拊循欲复戦, 晉患之. 共王召子反, 其侍者豎陽穀進酒, 子反酔, 不能見. 王怒, 譲子反, 子反死. 王遂引兵帰. 晉由此威諸侯, 欲以令天下求霸.

문초병래구 범문자청송욕환 극지왈 발병주역 견강피지 무이영제후수여전. 계사 사중초공왕목 초병패어언릉. 자반수여병 부순욕복전 진환지. 공왕소자반 기시자수양곡진주 자반취 불능견. 오아노 양자반 자반사. 왕수인병귀. 진유차위제후 욕이영천하구패.

 

초나라의 군대가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범문자(范文子)가 여공에게 군대를 돌리자고 청했다. 극지(郤至)군사를 일으켜 반역자를 죽이려 하는데 강자를 만났다고 피한다면 제후들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라 하여 마침내 초나라와 싸웠다. 계사일, 초나라 공왕(共王)의 눈을 활로 쏘아 맞추니, 초나라가 언릉(鄢陵)에서 전투에 패했다. 자반(子反)이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격려한 뒤 다시 싸우고자 하니 진()나라 군사들이 겁을 먹었다. 공왕이 자반을 소환했는데, 시종 수양곡(豎陽穀)이 술을 갖다 주어 자반이 술에 취하는 바람에 공왕을 알현하지 못했다. 공왕이 화가 나서 자반을 꾸짖으니 자반이 자결했다. 공왕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진나라는 이로써 제후들에게 위엄을 떨치고 천하의 패주로 호령하려고 했다.

 

厲公多外嬖姫, , 欲尽去群大夫而立諸姫兄弟. 寵姫兄曰胥童, 嘗與郤至有怨, 及欒書又怨郤至不用其計而遂敗楚, 乃使人閒謝楚. 楚來詐厲公曰:「鄢陵之戦, 実至召楚, 欲作亂, 内子周立之. 会與国不具, 是以事不成.

여공다외폐희 귀 욕진거군대부이립제희형제. 총희영왈서동 상여극지유원 급난서우원극지불용기게이수패초 내사인한사초. 초래사여공왈 언릉지전 실지소포 욕작란 내자주입지. 회여국불구 시이사불성

 

여공에게는 많은 첩들이 있어 귀국한 뒤로 대부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여러 희첩들의 형제를 기용하려 했다. 총애하는 희첩의 오라비로 서동(胥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극지와 원한이 있었다. 난서 또한 극지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고 초나라를 패배시킨 것에 원한을 품고는 몰래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가 사람을 보내 여공에게 언릉의 전투는 사실 극지가 초나라를 불러 난을 일으켜서 공자 주()를 옹립하려 한 것입니다. 함께 할 나라가 없어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厲公告欒書. 欒書曰:「其殆有矣! 願公試使人之周微考之.果使郤至於周. 欒書又使公子周見郤至, 郤至不知見売也. 厲公験之, 信然, 遂怨郤至, 欲殺之.

여공고난서. 난서왈 기태유의 원공시사인지주미고지과사극지어주. 난서우사공자주견극지 극지부지현매야. 여공험지 신연 수원극지 욕살지.

 

여공이 난서에게 이를 알리자 난서는 그런 위험이 있을까요 공께서 사람을 주로 보내 가만히 조사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과연 여공은 극지를 주 공자에게 보냈다. 난서는 또 공자 주에게 극지를 만나게 했으나 극지는 속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여공이 검증해보니 사실이어서 극지를 원망하여 죽이려 했다.

 

八年, 厲公猟, 與姫飲, 郤至殺豕奉進, 宦者奪之. 郤至射殺宦者. 公怒, :「季子欺予!将誅三郤, 未発也.

팔년 여공렵 여희음 극지살시봉진 환자탈지. 극지사살환자. 공노 왈 계자기여장주삼극 미발야.

 

8년에 여공이 사냥을 나가서 희첩과 술을 마시는데 극지가 산돼지를 잡아 바쳤으나 환관(맹장)이 빼앗아가자 극지가 맹장을 쏘아 죽였다. 여공이 노하여 계자(극지)가 나를 속였다!’하고는 극씨 셋을 죽이려 했으나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郤錡欲攻公, :「我雖死, 公亦病矣.郤至曰:「信不反君, 智不害民, 勇不作亂. 失此三者, 誰與我我死耳!

극의욕공공 왈 아수사 공역병의극지왈 신불만군 지불해민 용불작란 실차삼자 수여아 아사이

 

극의(郤錡)가 여공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내 죽더라도 여공도 다치리라했다. 극지는 신의란 주군을 배반하지 않음이오 지혜란 사라들을 해치지 않음이고 용기란 뒷 장난을 하지 않음이다. 이 세가지를 잃더라도 누가 나와 함께 하겠소? 나는 죽으면 그만이오!’라고 했다.

 

十二月壬午, 公令胥童以兵八百人襲攻殺三郤. 胥童因以劫欒書中行偃于朝, :「不殺二子, 患必及公.公曰:「一旦殺三卿, 寡人不忍益也.対曰:「人将忍君.公弗聴, 謝欒書等以誅郤氏罪:「大夫复位.二子頓首曰:「幸甚幸甚!

십이월임오 공영서동이병팔백인습공살삼극. 서동인이겁난서 중행언우조 왈 불살이자 환필급공공왈 일단살삼경 과인불인익야대왈 인장인군공불청 사난서등이주극씨죄 대부복위이자돈수왈 행심행심

 

12월 임오일에 여공은 서동에게 병사 800을 주고 세 극씨를 습격하게 했다. 서동은 이 참에 조정에서 난서와 중항언(中行偃)까지 겁박하며 이 두 자를 죽이지 않으면 우환이 공께 미칠 것입니다.’라 했다. 여공은 하루에 세 명의 경을 죽였는데 과인은 차마 더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서동은 이들은 주군을 기꺼이 해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으나 여공은 듣지 않고 난서 등에게 감사하는 한편 그저 극씨의 죄를 다스린 것으로만 설명하고는 대부들은 업무에 복귀하시오!’라 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했다.

 

公使胥童為卿. 閏月乙卯, 厲公游匠驪氏, 欒書中行偃以其党襲捕厲公, 囚之, 殺胥童, 而使人迎公子周于周而立之, 是為悼公.

공사서동위경. 윤월을며 여공여장려씨 난서 중행언이기당습포여공 수지 살서동 이사인영공자주이립지 시위도공

 

여공이 서동을 경()에 임명했다. 윤달 을묘일, 여공은 장려씨(匠驪氏)의 집으로 놀러가자 난서와 중항언이 그 무리로 하여금 여공을 습격하여 체포 옥에 가두고 서동은 죽이고 주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도공(悼公)이다.


 

 

悼公元年正月庚申, 欒書中行偃弑厲公, 葬之以一乗車. 厲公囚六日死, 死十日庚午, 智罃迎公子周來, 至絳, 刑雞與大夫盟而立之, 是為悼公. 辛巳, 朝武宮. 二月乙酉, 即位.

도공원년정월경신 난서 중행언시여공 장지이이승거. 여공수6일사 사십일경오 지양영공자주래 지강 형계여대부먕이립지 시위도공. 신사 조무공. 이월을유 즉위.

 

도공 원년 정월 경신일에 난서와 중행언이 여공을 시해하고 수레 하나에 실어 장례를 치렀다. 여공은 갇힌 지 엿새 만에 죽었다. 죽은 뒤 열흘이 지난 경오일에 지앵이 공자 주를 맞아들여 강성(絳城)으로 오니 닭을 잡아 대부들과 맹서하고 옹립하니 이가 도공이다. 신사일에 무궁(武宮)에 입조하여, 2월 을유일에 즉위했다.

 

悼公周者, 其大父捷, 晉襄公少子也, 不得立, 号為桓叔, 桓叔最愛. 桓叔生恵伯談, 談生悼公周. 周之立, 年十四矣. 悼公曰:「大父父皆不得立而辟難於周, 客死焉. 寡人自以疏遠, 毋幾為君. 今大夫不忘文襄之意而恵立桓叔之後, 頼宗廟大夫之霊, 得奉晉祀, 豈敢不戦戦乎大夫其亦佐寡人!

도공주자 기대부첩 진양공소자야 불득립 호위환숙 환숙최애. 환숙생혜백담 담생도공주. 주지립 연십사의. 도공왈 대부 부개부득립이피란어주 객사언. 과인자이소원 무기위군. 금대부불망문 양지의이혜립환숙지후 뢰종묘대부지령 득봉진사 이감부전전호 대부기역좌과인

 

도공 주()의 할아버지는 희첩(姬捷)으로 진()나라 양공(襄公)의 작은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환숙(桓叔)이라 불렸다. 환숙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 환숙이 혜백(惠伯) 희담(姬談)을 낳았고, 담이 도공 주를 낳았다. 주가 자리에 올랐을 때 나이가 열 넷이었다. 도공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난을 피해 주나라로 가셨다가 객사했습니다. 과인도 너무 멀었기 때문에 주군이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부들께서 문공과 양공의 뜻을 잊지않고 은혜롭게 환숙의 후손을 세움으로써 조종과 대부들의 위령에 기대어 진()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삼가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대부들께서도 과인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於是逐不臣者七人, 修旧功, 施徳恵, 収文公入時功臣後.

어시수불신자칠인 수구공 시덕혜 수문공입시공신후.

 

이에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한 신하 일곱을 내치고, 과거의 공업을 닦고 은혜를 베푸는 한편 문공이 귀국할 당시의 공신들 후손을 거두었다.

 

, 伐鄭. 鄭師敗, 遂至陳.

추 벌정. 정사패 수지진

 

가을에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나라에까지 이르렀다.

 

 

三年, 晉会諸侯. 悼公問群臣可用者, 祁傒挙解狐. 解狐, 傒之仇. 复問, 挙其子祁午. 君子曰:「祁傒可謂不党矣! 外挙不隠仇, 内挙不隠子.

삼년 진회제후. 도공문군신가용자 기해거해호. 해호 해지구. 복문 거기자기오. 군자왈 기해가위부당의 외거불은구 내거불은자

 

3년에 진나라가 계택(鷄澤)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도공은 여러 신하에게 기용할 만한 사람을 물었더니 기해(祁傒)가 해호(解狐)를 천거했다. 해호는 기해와 원수 사이였다. 다시 물으니 기해는 그 아들 기오(祁午)를 천거했다. 군자는 기해는 당파를 짓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밖에서 사람을 천거하되 원수라 해서 숨기지 않고, 안에서 사람을 천거하되 자식이라 해서 숨기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方会諸侯, 悼公弟楊干亂行, 魏絳戮其僕. 悼公怒, 或諫公, 公卒賢絳, 任之政, 使和戎, 戎大親附.

방후제후 도공제양우란행 위강륙기복. 도공노 혹간공 공졸현강 임지정 사화융 융대친부.

 

바야흐로 제후들이 회맹하려는데 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이 소란을 피우니 위강(魏絳)이 그 마부를 죽였다. 도공이 노하자 누군가 도공에게 바른 말을 했고, 도공은 마침내 위강이 현명하다 하고 정치를 맡기는 한편 융()에 사신으로 보내니 융은 한결 친숙함을 보였다.

 

十一年, 悼公曰:「自吾用魏絳, 九合諸侯, 和戎, 魏子之力也.賜之樂, 三譲乃受之.

십일년 도공왈 자오용위강 구합제후 화융 적 위자지공야사지악 삼양내수지.

 

11년에 도공이 내가 위강을 기용하고부터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회합시키고 융, 적과 가까워졌으니 위강의 힘이다.’라 하고는 악사(樂士)를 내리니 위강이 세 번 사양후에야 받았다.

 

, 秦取我櫟.

동 진취아역.

 

겨울에 진()나라가 진()나라의 역() 땅을 빼앗았다.

 

十四年, 晉使六卿率諸侯伐秦, 度涇, 大敗秦軍, 至棫林而去.

십사년 진사육경솔제후벌진 도경 대패진군 지역립이거.

 

14년에 진()나라가 육경에게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 토벌에 나서게 했다. 경하(涇河)를 건너서 진()나라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역림(棫林)에서 돌아왔다.

 

十五年, 悼公問治国於師曠. 師曠曰:「惟仁義為本., 悼公卒, 子平公彪立.

십오년 도공문치국어사솽 사광왈 유인의위본동 도공졸 자평공표립.

 

15년에 도공이 사광(師廣)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다. 사광은 오직 인의를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겨울에 도공이 죽고 그 아들 평공(平公) ()가 자리에 올랐다.



平公元年, 伐斉, 斉霊公與戦靡下, 斉師敗走. 晏嬰曰:「君亦毋勇, 何不止戦?」遂去. 晉追, 遂囲臨菑, 尽焼屠其郭中. 東至膠, 南至沂, 斉皆城守, 晉乃引兵帰.

평공원년 벌제 제영공여전미하 제사패주. 안영왈 군역무용 하부지전수거. 진추 수위임치 진소시기곽중. 동지교 남지기 제개성수 진내인병귀.

 

평공 원년(기원전 557)에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 영공(靈公)과 미하(靡下)에서 싸웠다. 제나라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다. 안영(晏嬰)국군께서는 역시 용기가 없으시군요. 어째서 싸움을 멈추지 않으시는 겁니까?’라고 하니 떠났다. 진나라가 추격하여 임치를 포위해서는 그 성 안을 모조리 태우고 도살했다. 제나라가 동쪽으로 교수(膠水), 남쪽으로 기수(沂水)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을 닫고 수비에 들어가자, 진나라가 결국 병사를 물렸다.

 

六年, 魯襄公朝晉. 晉欒逞有罪, 奔斉.

육년 노양공조진. 진난영유죄 분제.

 

6년에 노나라 양공(襄公)이 진나라에 조회하러 왔다. ()나라의 난영(欒逞)이 죄를 짓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八年, 斉荘公微遣欒逞於曲沃, 以兵随之. 斉兵上太行, 欒逞従曲沃中反, 襲入絳. 絳不戒, 平公欲自殺, 范献子止公, 以其徒撃逞, 逞敗走曲沃. 曲沃攻逞, 逞死, 遂滅欒氏宗.

팔년 제장공미견난영어곡옥 이병수지. 제병상태행 난영종곡옥중만 습입강. 강불계 평공욕자살 범헌자지공 이기주격영 영패주곡옥. 곡옥공영 영사 수멸난씨종.

 

8년에 제나라 장공(莊公)이 몰래 난영을 곡옥으로 보내 군대를 와해하려 했다. 제나라의 군사들이 태행산(太行山)에 오르는데 난영은 곡옥으로 가다말고 길을 돌려 강성을 기습했다. 강성은 경계하지 않았고, 평공이 자살하려 했으나 범헌자(范獻子)가 평공을 말리고 자신의 무리로 난영을 공격하니 난영은 패하여 곡옥으로 달아났다. 곡옥에서 난영을 공격하니 난영은 죽고 난영의 일족은 전멸했다.

 

逞者, 欒書孫也. 其入絳, 與魏氏謀. 斉荘公聞逞敗, 乃還, 取晉之朝歌去, 以報臨菑之役也.

영자 난서손애. 기입강 여위씨모. 제장공문영패 반환 취진지조가거 이보임치지역야.

 

난영은 난서의 손자로서 강성으로 들어와서는 위씨(魏氏)일가와 결탁했었다. 제나라 장공은 난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돌아와 진나라의 조가(朝歌)성을 빼앗고 돌아감으로써 임치의 패배를 갚았다.

 

 

十年, 斉崔杼弑其君荘公. 晉因斉亂, 伐敗斉於高唐去, 報太行之役也.

십년 제최서시시순장공. 인인제란 벌패제어고당거 보태행지역야.

 

10년에 제나라의 최서(崔杼)가 그 주군 장공을 시해했다. 진나라는 제나라의 난리를 틈타 제나라 정벌에 나서 고당(高唐)에서 패배시키고 태항에서의 싸움을 보복했다.

 

十四年, 呉延陵季子來使, 與趙文子韓宣子魏献子語, :「晉国之政, 卒帰此三家矣.

십사년 오연릉계다래사 여조문자 한선자 위헌자어 왈 진국지정 졸귀차삼가의

 

14년에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와서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나라의 정권이 끝내는 이 세 집안에게 돌아가겠구나!”라고 했다.

 

十九年, 斉使晏嬰如晉, 與叔嚮語. 叔嚮曰:「, 季世也. 公厚賦為台池而不恤政, 政在私門, 其可久乎!晏子然之.

십구년 제사안영여진 여숙향어. 숙향왈 진 계세야 공후부위대야이이불휼정 정재사문 기가구오안영연지.

 

19년에 제나라의 안영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와서는 숙향(叔向)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 숙향이 말하길 진나라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국군은 세금을 잔뜩 거두어 누대와 연못을 만들고 정사는 돌보지 않습니다. 정치가 개개인의 집안에서 나오니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안영도 그렇게 보았다.

 

二十二年, 伐燕. 二十六年, 平公卒, 子昭公夷立.

이십이년 벌연. 이십육년 평공졸 자소공이립.

 

22년에 연나라를 정벌했다. 26년에 평공이 죽고, 아들 소공(昭公) ()가 올랐다.



 

昭公六年卒. 六卿彊, 公室卑. 子頃公去疾立.

소공육년졸. 욱경강 공실비 자경공거질립.

 

소공은 재위 6년 만에 죽었다. 6경이 강해지니 공실이 보잘 것 없어졌다. 아들 경공(頃公) 거질(去疾)이 즉위했다.

 

頃公六年, 周景王崩, 王子争立. 晉六卿平王室亂, 立敬王.

경공육년 주경왕붕 왕자쟁립. 진육경평왕실한 입경왕.

 

경공 6년에 주나라 경왕(景王)이 세상을 떠나고, 왕자들이 자리를 다투었다. ()나라는 6=재상들이 왕실의 난리를 평정하고 경왕(敬王)을 세웠다.

 

九年, 魯季氏逐其君昭公, 昭公居乾侯.

구년 노계씨축기군소공 소공거간후.

 

9년에 노나라의 계씨가 그 국군 소공(昭公)을 내쫓았다. 소공은 진나라 국경 간후(乾侯)지역에 머물렀다.

 

十一年, 宋使使請晉納魯君. 季平子私賂范献子, 献子受之, 乃謂晉君曰:「季氏無罪.不果入魯君.

십일년 위 송사사청진납노군. 계평자사뢰범헌자 헌자수지 내위진군왈 계씨무죄불과입노군.

 

11년에 위()나라와 송나라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와 진에게 노나라의 주군=소공이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계평자가 사사로이 범헌자에게 뇌물을 주니 헌자가 이를 받고는 진 경공에게 계씨는 죄가 없습니다.’라 했으나 노나라의 주군을 귀국시키지 않았다.

 

十二年, 晉之宗家祁傒孫, 叔嚮子, 相悪於君. 六卿欲弱公室, 乃遂以法尽滅其族. 而分其邑為十県, 各令其子為大夫. 晉益弱, 六卿皆大.

십이년 진지종가기해손 숙향자 상오어군. 육경욕약공실 내수이법진멸기족. 이분기읍위십현 각영기자위대부. 진익약 육경개대.

 

12년에 진()나라의 종실인 기해의 손자와 숙향의 아들이 국군 앞에서 서로를 욕했다. 6경은 종실을 약화시키려고 법으로 그 일족을 전부 없애고 그 봉읍을 열 개의 현으로 나누어 각자 자기 아들들을 대부로 삼았다. 진의 종실은 더욱 약해졌고, 6경은 모두가 더 커졌다.

 

十四年, 頃公卒, 子定公午立.

십사년 경공졸 자정공오립.

 

14년에 경공이 죽고, 아들 정공(定公) 오가 즉위했다.

 

定公十一年, 魯陽虎奔晉, 趙鞅簡子舎之.

정공십일년 노양호분진 조앙간자사지.

 

정공 11년에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진나라로 도망쳐오자 조앙간자(趙鞅簡子)가 거처를 내주었다.

 

十二年, 孔子相魯.

십이년 공자상노

 

12(기원전 500)에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十五年, 趙鞅使邯鄲大夫午, 不信, 欲殺午, 午與中行寅范吉射親攻趙鞅, 鞅走保晉陽. 定公囲晉陽.

십오년 조앙사한단대부오 불신 욕살오 오여중행인 범길사친공조앙 앙주보진양. 정공위진양.

 

15년에 조앙이 오를 한단(邯鄲)의 대부로 보냈으나 믿지 못해 오를 죽이려 했다. 오는 중항인(中行寅), 범길석(范吉射)과 함께 몸소 조앙을 공격했고, 조앙은 달아나 진양(晉陽)을 지켰다. 정공이 진양을 포위했다.

 

荀櫟韓不信魏侈與范中行為仇, 乃移兵伐范中行. 中行反, 晉君撃之, 敗范中行. 中行走朝歌, 保之. 魏為趙鞅謝晉君, 乃赦趙鞅, 复位.

순력 한불신 위치여범 중행위구 내이병벌범 중행. 범 중행반 진근격지 패범 주행. 범 중행주조가 보지. 한 위위조앙사진군 내사조앙 복위.

 

순력(荀櫟), 한불신(韓不信), 위치(魏侈)는 범길석, 중항인과 원수지간이라 군대를 이동시켜 범길석, 중행인을 공격했다. 범길석과 중행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공은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범길석과 중행인은 조가로 도망가서 그곳에 숨었다. 한불신과 위치가 조앙을 위하여 정공에게 사죄하니 정공은 조앙을 사면하고 복직시켰다.

 

二十二年, 晉敗范中行氏, 二子奔斉.

이십이년 진패범 중행씨 이자분제.

 

22년에 진나라가 범길석과 중항인을 공격해 패배시키자 두 사람은 제나라로 도주했다.

 

三十年, 定公與呉王夫差会黄池, 争長, 趙鞅時従, 卒長呉.

삼십년 정공여오왕부차외황지 쟁장 조앙시종 졸장오.

 

30년에 정공이 오왕 부차(夫差)와 황지(黃池)에서 회맹해 맹주를 다투었다. 이 때 조앙이 수행했는데, 결국은 오나라가 맹주가 되었다.

 

三十一年, 斉田常弑其君簡公, 而立簡公弟驁為平公.

삼십일년 제전상시기군간공 이립간공제오위평공.

 

31년에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 국군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간공의 동생 오()를 세우니 이가 평공(平公)이다.

 

三十三年, 孔子卒.

삼십삼년 공자졸.

 

33(기원전 479)에 공자가 죽었다.

 

三十七年, 定公卒, 子出公鑿立.

삼십칠년 정공졸 자출공착립.

 

37년에 정공이 죽고,아들들 출공(出公) ()이 즉위했다.


 

 

<삼가분진과 진의 멸망>

 

出公十七年, 知伯與趙魏共分范中行地以為邑. 出公怒, 告斉, 欲以伐四卿. 四卿恐, 遂反攻出公. 出公奔斉, 道死. 故知伯乃立昭公曾孫驕為晉君, 是為哀公.

출공십칠년 지백여조 한 위공분범 중행지이위읍. 출공노 고제 노 욕이벌사경. 사경공 수반공출공. 출공분제 도사. 고지백내립소공증손교위진군 시위애공.

 

출공 17년에 지백(知伯)이 조씨, 한씨, 위씨와 함께 범씨와 중행씨의 땅을 나누어 봉읍으로 삼았다. 출공이 화가 나서 제나라, 노나라에 통보하여 이들 4(=4 벼슬아치)을 토벌코자 했다. 4경이 겁이 나서 출공에게 반격을 가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이에 지백이 바로 소공의 증손자 교()를 진나라의 국군의 옹립하니 이가 애공(哀公)이다.

 

哀公大父雍, 晉昭公少子也, 号為戴子. 戴子生忌. 忌善知伯, 蚤死, 故知伯欲尽并晉, 未敢, 乃立忌子驕為君. 當是時, 晉国政皆決知伯, 晉哀公不得有所制. 知伯遂有范中行地, 最彊.

애공대부옹 진소공소자야 호위대자. 대자생기 기선지백 조사. 고지백욕진병진 미감 내립기자교위군. 당시시 진국정개결지백 진애공부득유제. 지백수유범 중행야 최강.

 

애공의 할아버지 옹()은 진나라 소공의 작은아들로 대자(戴子)로 불렸다. 대자는 기()를 낳았다. ()는 지백과 잘 지냈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지백이 진나라를 완전히 차지하려다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기의 아들 교를 국군으로 세운 것이다. 당시 진나라의 국정은 모두 지백이 결정했고, 진나라 애공은 지백을 통제할 수 없었다. 지백이 마침내 범씨와 중항씨의 땅까지 차지하여 최강이 되었다.

 

哀公四年, 趙襄子韓康子魏桓子共殺知伯, 尽并其地.

애공사년 조양자 한강자 위환자공살지백 진병기야.

 

애공 4년에 조양자(趙襄子),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가 함께 지백을 죽이고 그 땅을 다 차지했다.

 

十八年, 哀公卒, 子幽公柳立.

십팔년 애공졸 자유공유립.

 

18년에 애공이 죽고, 아들 유공(幽公) ()가 왕위에 올랐다.

 

幽公之時, 晉畏, 反朝韓魏之君. 独有絳曲沃, 余皆入三晉.

유공지시 진외 반조한 조 위지군. 독유강 곡옥 여개입삼진.

 

유공 때는 진()나라의 주군이 두려움에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의 군주에게 예를 차리지 않으니 강과 곡옥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삼진(三晉 : , , )에게 돌아갔다.

 

 

十五年, 魏文侯初立.

십오년 위문후초립.

 

15년에 위()나라 문후(文侯)가 새로 즉위했다.

 

十八年, 幽公淫婦人, 夜窃出邑中, 盗殺幽公. 魏文侯以兵誅晉亂, 立幽公子止, 是為烈公.

십팔년 유공음부인 야절출읍중 고살유공. 위문후이병주진란 립유공자지 시위열공.

 

18년에 유공(幽公)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몰래 읍으로 나다니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위나라 문후가 군대로 진나라의 난을 토벌하고 유공의 아들 지()를 세우니 이가 열공(烈公)이다.

 

烈公十九年, 周威烈王賜趙魏皆命為諸侯.

열공십구년 주위열왈사조 한 위개명위제후

 

열공 19(기원전 403)에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이 한()나라, ()나라, () 나라모두를 제후로 임명했다.

 

 

二十七年, 烈公卒, 子孝公頎立.

이십칠년 열공졸 자효공기립.

 

27년에 열공이 죽고, 아들 효공(孝公) ()가 즉위했다.

 

孝公九年, 魏武侯初立, 襲邯鄲, 不勝而去.

효공구면 위무후초립 습한단 부승이거.

 

효공 9년에 위나라 무후(武侯)가 새로 즉위하여 조나라의 한단을 기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七年, 孝公卒, 子静公倶酒立. 是歳, 斉威王元年也.

십칠년 효공졸 자정공구주립. 시세 제위왕원년야.

 

17년에 효공이 죽고, 아들 정공(靜公) 구주(俱酒)가 자리에 올랐다. 이해가 제나라 위왕(威王) 원년이다.

 

静公二年, 魏武侯韓哀侯趙敬侯滅晉後而三分其地. 静公遷為家人, 晉絶不祀.

정공이년 위무후 한애후 조경후멸진후이삼분기지. 정공천위가인 진절불사.

 

정공 2년에 위나라 무후, 한나라 애후(哀侯), 조나라 경후(敬侯)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정공은 평민으로 떨어졌고, 진나라의 제사는 끊어졌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晉文公, 古所謂明君也, 亡居外十九年, 至困約, 及即位而行賞, 尚忘介子推, 況驕主乎霊公既弑, 其後成景致厳, 至厲大刻, 大夫懼誅, 禍作. 悼公以後日衰, 六卿専権. 故君道之御其臣下. 固不易哉!

태사공왈 진문송 고소위명군야 망거외십구년 지인약 급즉위행상 상망개자추황교주호 양공기시 기흐성 경치엄 지여대각 대부구주 화작. 도공이후일쇠 육경전권. 고군도지어기신하. 고불역재.

 

태사공은 말한다. ‘진나라 문공은 옛날 말하는 명군이었다. 나라 밖에 망명하길 19년 동안 매우 힘들었다. 즉위하여 상을 주는데 개자추를 잊긴 했지만 어찌 거만한 군주라 하겠는가? 영공이 시해당한 후 성공과 경공은 아주 엄격해졌고, 여공 때는 더 심해져 대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끝내 반란이 일어났다. 왕권이 도공 이후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6경이 전권을 쥐니 주군이 그 신하를 부리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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