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강숙의 분봉> 衛康叔名封, 周武王同母少弟也. 其次尚有冉季, 冉季最少. 위강숙명봉 주무왕동모소제야. 기차상유염계 염계최소. 위(衛) 강숙(康叔)은 이름이 봉(封)이고, 주나라 무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다. 그 밑으로 염계(冉季)가 있는데, 염계가 가장 어렸다. 武王已克殷紂, 复以殷余民封紂子武庚祿父, 比諸侯, 以奉其先祀勿絶. 為武庚未集, 恐其有賊心, 武王乃令其弟管叔、蔡叔傅相武庚祿父, 以和其民. 무왕이극은주 복이은여민봉주자무경녹보 차제후 이봉기선사물절. 위무경미집 공기유적심 무왕내영기제관숙 채숙부상무경녹보 이화기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이겨 은나라의 유민과 그 땅을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봉하여, 제후와 동등하게 해주고 주나라 선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받들도록 했다. 무경이 그래도 따르지 않자, 그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 무왕은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무경녹보를 보좌하게 하여 그 인민들과 화합시켰다. 武王既崩, 成王少. 周公旦代成王治, 當国. 管叔、蔡叔疑周公, 乃與武庚祿父作亂, 欲攻成周. 周公旦以成王命興師伐殷, 殺武庚祿父、管叔, 放蔡叔, 以武庚殷余民封康叔為衛君, 居河、淇閒故商墟. 무왕기붕 성왕소. 주공단대성왕치 당국. 관숙 채숙의주공 내여무경녹보작란 욕공성주. 주공단이성왕명흥사벌은 살무경녹보 관숙 방채숙 이무경은여민봉강숙위위군 거하 기한고상허. 무왕이 세상을 뜨고 성왕(成王)은 어렸기에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맡아 다스렸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을 의심하여 무경녹보와 함께 난을 일으켜 주(周)나라를 바로잡으려 했다. 주공 단이 성왕의 명을 받아 군대로 은나라를 정벌하여 무경녹보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추방했다. 그리고 무경녹보를 따르던 은나라 유민들에게 강숙을 위나라 주군으로 봉하여 그를 주군으로 삼고 황하(黃河)와 기수(淇水) 사이 옛 상나라=은(殷)의 터를 관할하게 했다. 周公旦懼康叔歯少, 乃申告康叔曰:「必求殷之賢人君子長者, 問其先殷所以興, 所以亡, 而務愛民.」告以紂所以亡者以淫於酒, 酒之失, 婦人是用, 故紂之亂自此始. 為梓材, 示君子可法則. 故謂之康誥、酒誥、梓材以命之. 康叔之国, 既以此命, 能和集其民, 民大説. 주공단구강숙치소 내신고강숙왈 ‘필구은지현인군자장자 문기선은소이흥 소이망 이무애민’ 고이주소이망자이음어주 주지실 부인시용 고주지란자차시. 위자재 신군자가법칙. 고위지강고 주고 자재이먕지. 강숙지국 기이차명 능화집기민 민대열. 주공 단은 강숙이 나이가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려 강숙에게 ‘은나라의 현인과 군자 그리고 장자들을 찾아 그 선조인 은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반드시 묻고 인민을 사랑하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 은나라 주왕이 망한 것은 술에 절제가 없고 여자 말만 들었기 때문이며, 주왕의 난이 생긴거라 알려 주었다. 주공은 「자재(梓材)」를 지어 군자가 따라야 할 법을 보여주었다. 주공은 이에 따라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梓材) 」라는 이름의 글을 지어 줬다. 강숙이 나라로 가서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민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인민이 크게 기뻐했다. 成王長, 用事, 挙康叔為周司冦, 賜衛宝祭器, 以章有徳. 성왕장 용사 거강숙위주사구 사위보제기 이장유덕. 성왕이 장성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자, 강숙을 주나라의 사구(司寇)로 임명하고 위=봉=강숙에게는 보물과 제기를 내려 그 덕을 널리 드러냈다. 康叔卒, 子康伯代立. 康伯卒, 子考伯立. 考伯卒, 子嗣伯立. 嗣伯卒, 子偼伯立. 偼伯卒, 子靖伯立. 靖伯卒, 子貞伯立. 貞伯卒, 子頃侯立. 강숙졸 자강백대립. 강백졸 자고백립. 고백졸 자사백립. 사백졸 자첩백립. 첩백졸 자정백립 정백졸 자정백립 정백졸 자경후립. 강숙이 죽고, 아들 강백(康伯)이 뒤를 이었다. 강백이 죽고, 아들 고백(考伯)이 섰다. 고백이 죽고, 아들 사백(嗣伯)이 즉위했다. 사백이 죽고, 아들 첩백이 즉위했다. 첩백이 죽고, 아들 정백(靖伯)이 즉위했다. 정백이 죽고, 아들 정백(貞伯)이 즉위하였다. 정백이 죽고, 아들 경후(頃侯)가 즉위했다. 頃侯厚賂周夷王, 夷王命衛為侯. 頃侯立十二年卒, 子釐侯立. 경후후뢰주이왕 이왕명위위후. 경후립십이년졸 자리후립. 경후는 주나라 이왕(夷王)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고, 이왕은 위를 제후로 삼을 것을 명했다. 경후는 재위 12년 만에 죽고, 아들 리후(釐侯)가 즉위했다. 釐侯十三年, 周厲王出奔于彘, 共和行政焉. 二十八年, 周宣王立. 리후십삼년 주여왕출분우체 공화애정언 이십팔년 주선왕립. 리후 13년(기원전 842년)에 주나라 여왕(厲王)이 체(彘)나라로 도망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고 28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四十二年, 釐侯卒, 太子共伯余立為君. 共伯弟和有寵於釐侯, 多予之賂;和以其賂賂士, 以襲攻共伯於墓上, 共伯入釐侯羨自殺. 衛人因葬之釐侯旁, 謚曰共伯, 而立和為衛侯, 是為武公. 사십이년 리후졸 태자공뱍여립위군. 공백제화유총어리후 다료지뢰 화이기뢰괴사 이습공공백후어묘상 공백입리후선자살. 위인인장지리후방 일왕공백 이립화위위후 시위무공. 42년에 리후가 죽고, 태자 공백(共伯) 여(餘)가 국군에 올랐다. 공백의 동생인 화(和)가 리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리후가 준) 많은 재물을 무사들에게 나누어주어 매수해서는 공백을 무덤 위에서 습격하니, 공백은 리후의 무덤앞에서 자살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리후 옆에 장례를 치러주고, 시호를 공백(共伯)이라 했다. 이어 화를 위의 제후로 세우니 이가 무공(武公)이다 . 武公即位, 修康叔之政, 百姓和集. 四十二年, 犬戎殺周幽王, 武公将兵往佐周平戎, 甚有功, 周平王命武公為公. 五十五年, 卒, 子荘公揚立. 무공즉위 수강숙지정 배성화집. 사십이년 견융살주유왕 무공장병왕좌주평융 심유공 주명왕명무공위공. 오십오년 졸 자장공양립 무공은 즉위하여 강숙의 정치를 다시 살려내고 백성들을 화합시켰다. 42년에 견융(犬戎)이 주나라 유왕(幽王)을 죽이자, 무공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주나라를 도와 견융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주나라 평왕(平王)이 무공을 공(公)으로 삼았다. 55년에 무공이 죽고, 아들 장공(莊公) 양(揚)이 즉위했다.
<춘추 후기 위나라의 분란>
荘公五年, 取斉女為夫人, 好而無子. 又取陳女為夫人, 生子, 蚤死. 陳女女弟亦幸於荘公, 而生子完.
장공오년 취제년위부인 호이무자. 우취진녀위부인 생자 조사. 진녀녀제역행어장공 이생자완.
장공 5년에 제(齊)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아름답긴 했지만 아들이 없었다. 다시 진(陳)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취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진나라 여자의 여동생도 장공의 총애를 받아 아들 완(完)을 낳았다.
完母死, 荘公令夫人斉女子之, 立為太子. 荘公有寵妾, 生子州吁. 十八年, 州吁長, 好兵, 荘公使将. 石碏諫荘公曰:「庶子好兵, 使将, 亂自此起.」不聴. 二十三年, 荘公卒, 太子完立, 是為桓公.
완모자 장공영부인제여자지 입위태자. 장공유총첩 생자주우. 십팔년 주우장 오병 장공사장 석작간장공왈 '서저호묭 사장 란자차기' 불청 이십삼년 장공졸 태자완립 시위환공.
완의 어머니가 죽자 장공은 부인인 제나라 여자에게 (완을) 아들로 삼게 하고는 태자로 세웠다. 장공의 애첩이 아들 주우(州吁)를 낳았다. 18년에 주우가 커서 군대 일을 좋아하자, 장공이 그에게 군대를 이끌게 했다.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서자께서 군대 일을 좋아한다 하여 장수로 세우면 그 때문에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23년에 장공이 죽고, 태자 완(完)이 즉위하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桓公二年, 弟州吁驕奢, 桓公絀之, 州吁出奔. 十三年, 鄭伯弟段攻其兄, 不勝, 亡, 而州吁求與之友.
환공이년 제주우교사 환공출지 주우출분. 십삼년 정백제단공기형 불승 망 이주우구여지우.
환공 2년에 동생 주우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환공이 내쫓으려 하자 주우가 도망쳤다.
13년에 정백(鄭伯)의 동생 단(段)이 그 형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자 주우가 그에게 벗이 되길 청했다.
十六年, 州吁収聚衛亡人以襲殺桓公, 州吁自立為衛君. 為鄭伯弟段欲伐鄭, 請宋、陳、蔡與倶, 三国皆許州吁. 州吁新立, 好兵, 弑桓公, 衛人皆不愛.
십육년 주우수취위망인이습살환공 주우자립위위군. 내정뱍제단욕벌정 청송 진 태여구 삼국개허주우. 주우신립 호병 살환공 위인개불애.
16년에 주우는 위(衛)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모아서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는 자신이 위나라의 국군이 되었다. (주우가) 정백의 동생 단을 위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려고 송(宋), 진(陳), 채(蔡) 나라에 동참을 요청하자, 세 나라가 모두 주우의 청을 받아들였다. 주우가 새로 즉위해서는 전쟁을 좋아하는데다 환공을 시해했기 때문에 위나라 인민들이 모두 주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石碏乃因桓公母家於陳, 詳為善州吁. 至鄭郊, 石碏與陳侯共謀, 使右宰醜進食, 因殺州吁于濮, 而迎桓公弟晉於邢而立之, 是為宣公.
석작내인환공모가어진 상위선주우. 지정교 석작여진후공모 사우재추진식 인살주우우복 이영환공제진어형이립지 시위선공.
석작은 환공 어머니의 친정이 진(陳)나라란 것을 가지고 주우와 거짓으로 잘 지내는 척했다. (위나라의 군대가) 정나라의 교외에 이르자, 석작은 진후(陳侯)와 공모하여 우재추(右宰醜)로 하여금 먹을 것을 바치면서 복(濮)에서 주우를 죽이도록 했다. 그리고는 환공의 동생 진(晉)을 형(邢)에서 맞아들여 세우니 이가 선공(宣公)이다.
宣公七年, 魯弑其君隠公. 九年, 宋督弑其君殤公, 及孔父. 十年, 晉曲沃荘伯弑其君哀侯.
선공칠년 노시시순은공. 구년 송독시시군상공 급공보. 십년 진곡옥장백시시순애후.
선공 7년에 노(魯)나라가 그 주군 은공(隱公)을 시해했었다. 9년에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그 주군 상공(殤公)과 대부 공보가(孔父嘉)를 죽였다. 10년에 진(晉)나라 곡옥(曲沃)의 장백(莊伯)이 그의 주군 애후(哀侯)를 시해했다.
十八年, 初, 宣公愛夫人夷姜, 夷姜生子伋, 以為太子, 而令右公子傅之. 右公子為太子取斉女, 未入室, 而宣公見所欲為太子婦者好, 説而自取之, 更為太子取他女. 宣公得斉女, 生子寿、子朔, 令左公子傅之.
십팔년 초 선공애부인이강 이강생자급 이위태자 이영우공자부지 우공자위태자취제녀. 미입실 이선공견소욕위태자부자로 열이자취지 경위태자튀타녀. 선공득제냐 생자수 자삭 영좌공자부지.
18년에 선공이 총애하던 부인 이강(夷姜)이 아들 급(伋)을 낳자 태자로 삼고, 우공자(右公子)로 하여금 가르치게 했다. 우공자가 태자를 위해 제(齊)나라 여자를 아내로 취하게 했는데, 혼례를 치르기 전에 선공이 태자비가 될 여자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이 취하고, 태자는 다른 여자를 취하게 했다. 선공이 제나라 여자에게서 아들 수(壽)와 삭(朔)이 태어나자, 좌공자(左公子)에게 가르치게 했다.
太子伋母死, 宣公正夫人與朔共讒悪太子伋. 宣公自以其奪太子妻也, 心悪太子, 欲廃之. 及聞其悪, 大怒, 乃使太子伋於斉而令盗遮界上殺之, 與太子白旄, 而告界盗見持白旄者殺之.
태자급모사 선공정부인여삭공참오태자급. 선공자이기탈태자처야 심오태자 욕폐지. 급문기오 대노 내사태자급어제이영도차계상살지 여태자백모 이고계도견지백모자살지.
태자 급의 어머니가 죽자, 선공의 정부인은 삭과 함께 태자 급을 나쁘다며 헐뜯었다. 선공이 태자의 아내가 될 여자를 빼앗은 뒤로 태자를 미워하며 폐위시키려 했다. 태자에 대한 나쁜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태자 급을 제나라로 보내면서 강도를 시켜 국경에서 죽이게 했다. 태자에게 흰 깃대 장식을 들고 가도록 했는데 강도에게 국경에서 이 흰 깃대 장식을 가지고 있는 자를 보면 죽이라고 했다.
且行, 子朔之兄寿, 太子異母弟也, 知朔之悪太子而君欲殺之, 乃謂太子曰:「界盗見太子白旄, 即殺太子, 太子可毋行.」 太子曰:「逆父命求生, 不可.」遂行.
차행 자삭지형수 태자이모제야 지삭지오태자이군욕살지 내위태자왈 '계도견태자백모 즉살태자 태자가무행' 태자왈 '역부명구생 불가' 수행.
(태자 급이) 떠나려 할 때 태자의 배다른 동생이자 삭의 형인 수가 삭이 태자를 미워하고 국군이 태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태자에게 ‘강도가 국경에서 태자의 흰 깃대를 보면 바로 태자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일렀다. 태자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라 하고는 끝내 떠났다.
寿見太子不止, 乃盗其白旄而先馳至界. 界盗見其験, 即殺之. 寿已死, 而太子伋又至, 謂盗曰:「所當殺乃我也.」盗并殺太子伋, 以報宣公. 宣公乃以子朔為太子.
수견태자불지 내도기백모이선치지계. 계도견기험 즉살지. 수기사 이태자급우지 위도왈 '소당살내아야' 도병살태자급 이보선공 선공내이자삭위태자.
태자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수는 흰 깃대를 훔쳐 먼저 국경으로 달려갔다.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도는 그 표지를 보고는 바로 죽였다. 수는 이미 죽었는데 태자 급이 도착해서는 강도에게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했다. 강도가 태자 급마저 죽이고 선공에게 보고했다. 선공은 바로 아들 삭을 태자로 삼았다.
十九年, 宣公卒, 太子朔立, 是為恵公. 左右公子不平朔之立也, 恵公四年, 左右公子怨恵公之讒殺前太子伋而代立, 乃作亂, 攻恵公, 立太子伋之弟黔牟為君, 恵公奔斉.
십구년 선공졸 태자삭립 시위혜공. 좌우공자불평삭지립야 혜공사년 좌우공자원혜공지카살전태자급이대립 내작란 공혜공 입태자급지제검모위군 혜공분제.
19년에 선공이 죽고, 태자 삭이 즉위하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좌우 두 공자는 삭이 즉위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혜공 4년에 좌우 두 공자는 혜공이 태자 급을 헐뜯고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켜 혜공을 공격하고, 태자 급의 동생인 검모(黔牟)를 국군으로 옹립하자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衛君黔牟立八年, 斉襄公率諸侯奉王命共伐衛, 納衛恵公, 誅左右公子. 衛君黔牟奔于周, 恵公复立. 恵公立三年出亡, 亡八年复入, 與前通年凡十三年矣.
위군검모입팔년 제양공솔제후봉왕명공벌위 납위혜공 주좌우공자. 위군검모분우주 혜공복립. 혜공립삼년출망 망팔년복입 야전통년범십삼년의.
위의 국군 검모가 즉위한 지 8년에 제나라 양공(襄公)이 주왕의 명을 받들어 제후들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정벌해서는 위 혜공을 돌려보내고 좌우 공자를 죽였다. 위나라의 국군 검모는 주나라로 달아났고, 혜공이 다시 자리에 올랐다. 혜공이 3년 만에 도망쳤다가 망명 8년 만에 돌아오니, 이전까지 모두 합치면 13년인 셈이다.
二十五年, 恵公怨周之容舎黔牟, 與燕伐周. 周恵王奔温, 衛、燕立恵王弟穨為王. 二十九年, 鄭复納恵王. 三十一年, 恵公卒, 子懿公赤立.
이십오년 혜겅원주지용사섬모 여연벌주 주혜왕분온 위 연립혜왕제퇴위왕. 이십구년 정복납혜왕. 삼십일년 혜공졸 자의공적립.
25년에 혜공은 주나라가 검모를 받아들인 것에 원망을 품고 연(燕)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했다. 주 혜왕(惠王)은 온(溫)나라으로 달아나고, 위나라와 연나라는 혜왕의 동생 퇴(頹)를 왕으로 세웠다. 29년에 정나라가 혜왕을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31년에 혜공이 죽고, 아들 의공(懿公) 적(赤)이 즉위했다.
懿公即位, 好鶴, 淫樂奢侈. 九年, 翟伐衛, 衛懿公欲発兵, 兵或畔. 大臣言曰:「君好鶴, 鶴可令撃翟.」 翟於是遂入, 殺懿公.
의공이 즉위하여 학을 좋아하는 등 사치를 일삼고 음탕함을 즐겼다. 9년(기원전 660년)에 적(翟)나라가 위나라를 침공하자 의공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병사 중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대신들이 ‘주군께서는 학을 좋아하시니 학더러 적=꿩을 공격하라고 명령하면 되리다.’라고 했다. 적나라가 마침내 들어와 의공을 죽였다.
懿公之立也, 百姓大臣皆不服. 自懿公父恵公朔之讒殺太子伋代立至於懿公, 常欲敗之, 卒滅恵公之後而更立黔牟之弟昭伯頑之子申為君, 是為戴公.
의공지립야 백성대신개불복. 자의공부혜공삭지참살태자급대립지어의공 상욕패지 졸멸혜공지후이경립검모지제소백완지자신위군 시위대공.
당초 의공이 즉위하자, 백성과 대신 모두 복종하지 않았다. 의공이 아버지인 혜공 삭이 태자 급을 헐뜯고 죽여 자리에 오르고 의공에 이르니 늘 복수하려하였고 마침내 혜공의 후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검모의 아우 소백 완(頑)의 아들 신(申)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대공(戴公)이다.
戴公申元年卒. 斉桓公以衛數亂, 乃率諸侯伐翟, 為衛築楚丘, 立戴公弟燬為衛君, 是為文公. 文公以亂故奔斉, 斉人入之.
대공신원년졸 제환공이위수란 내솔제후벌적 위위축초구 입개공제훼위위군 시위문공 문공이란고분제 제인입지.
대공 신은 즉위 원년에 죽었다. 제나라 환공(桓公)은 위나라가 여러 차례 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적나라를 토벌하여 위나라를 위해 초구(楚丘)에 성을 쌓았다. 대공의 동생 훼(燬)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난리 때문에 제나라로 달아났었는데 제나라 사람이 돌려보낸 것이다.
初, 翟殺懿公也, 衛人憐之, 思复立宣公前死太子伋之後, 伋子又死, 而代伋死者子寿又無子. 太子伋同母弟二人:其一曰黔牟, 黔牟嘗代恵公為君, 八年复去;其二曰昭伯. 昭伯、黔牟皆已前死, 故立昭伯子申為戴公. 戴公卒, 复立其弟燬為文公.
초 적살의공야 위인린지 사복립선공전사태자급지후 급자우사 이대급사자자수우무자. 태자급동모제이인 기일왈검모 검모상대혜공위군 팔년복거 기기왈소백. 소백 검모개이전사 고립소백자신위대동. 대공졸 복립기제훼위문공.
당초 적나라가 의공을 죽이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기는 한편, 선공이 죽인 태자 급의 후손을 다시 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급의 아들 역시 죽었고, 급을 대신하여 죽은 수의 아들도 없었다. 태자 급에게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 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검모로 혜공을 대신하여 국군이 되었다가 8년 만에 물러났다. 둘째가 소백(昭伯)이다. 소백과 검모 모두 죽었기 때문에 소백의 아들 신을 대공으로 세운 것이다. 대공이 죽자 다시 그 동생을 훼를 문공으로 세웠다.
文公初立, 軽賦平罪, 身自勞, 與百姓同苦, 以収衛民.
문공조취 걍부평죄 신자로 여백성동고 이수위민.
문공은 즉위하여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공평하게 했다. 몸소 일하고 백성과 고통을 같이 하면서 위나라의 인민들을 거두었다.
十六年, 晉公子重耳過, 無礼. 十七年, 斉桓公卒. 二十五年, 文公卒, 子成公鄭立.
십육년 진공자중이과 무례. 십칠년 제환공졸. 이십오년 문공졸 자성공정립.
16년에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가 위나라를 지나갔는데 위나라에서 무례하게 대했다.
17년(기원전 643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25년에 문공이 죽고, 아들 성공(成公) 정(鄭)이 즉위했다.
成公三年, 晉欲仮道於衛救宋, 成公不許. 晉更従南河度, 救宋. 徴師於衛, 衛大夫欲許, 成公不肯. 大夫元咺攻成公, 成公出奔. 晉文公重耳伐衛, 分其地予宋, 討前過無礼及不救宋患也.
성공삼년 진욕가도어위구송 성공불허. 진경종남하도 구송. 징사어위 위대부욕허 성공불긍. 대부원훤공성공 성공풀분. 진문공중이벌위 분기지여송 토전과무럐불구공환야.
성공 3년에 진(晉)나라가 송(宋)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에 길을 빌리려 했으나 성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나라는 길을 바꾸어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송나라를 구원하고는 위나라에 군사 징발을 요청하자 위나라의 대부들은 응하려 했으나, 성공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부 원훤(元咺)이 성공을 공격하여 성공이 달아났다. 진나라 문공 중이는 위나라를 공략하여 그 땅을 송나라에 줌으로써 과거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송나라를 구원하지 않은 원한을 갚았다.
衛成公遂出奔陳. 二歳, 如周求入, 與晉文公会. 晉使人鴆衛成公, 成公私於周主鴆, 令薄, 得不死. 已而周為請晉文公, 卒入之衛, 而誅元咺, 衛君瑕出奔.
위성공수출분진 이세 여주구입 여진문공회. 진사인지위성공 성공사어주주짐 영박 득불사. 이이주위청진문공 졸입지위 이주원훤 위군하출분.
위나라 성공은 진(陳)나라로 도망쳤다가, 2년 뒤 주나라로 가서 자신의 귀국을 호소하니 진나라 문공과 만나게 되었다. 진나라는 사람을 시켜서 위나라 성공을 독살하려 했다. 성공은 주나라에 사사로이 뇌물을 주어 독을 약하게 타게 하여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주나라가 진나라 문공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성공이) 위나라로 돌아가니, 원훤은 죽임을 당하고 위나라의 주군 하(瑕)는 국외로 달아났다.
七年, 晉文公卒. 十二年, 成公朝晉襄公. 十四年, 秦穆公卒. 二十六年, 斉邴歜弑其君懿公. 三十五年, 成公卒, 子穆公遫立.
칠년 진문공졸. 십이년 성공조진양공. 십사년 진목공졸. 이십육년 제병촉시기군의공. 삼십오년 성공졸 자목공속립.
7년(기원전 628년)에 진나라 문공이 죽었다. 12년에 성공이 진나라 양공(襄公)에게 조회했다. 14년(기원전 621년)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26년에 제나라의 대부 병촉(邴歜)이 그 주군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35년에 성공이 죽고, 아들 목공(穆公) 속(遫)이 즉위했다.
穆公二年, 楚荘王伐陳, 殺夏徴舒. 三年, 楚荘王囲鄭, 鄭降, 复釈之. 十一年, 孫良夫救魯伐斉, 复得侵地. 穆公卒, 子定公臧立. 定公十二年卒, 子献公衎立.
목공이년 초장왕벌진 살하징서. 삼년 초장왕위정 정항 복속지. 십일년 손양부구노벌제 복득침지. 목공졸 자정공장립. 정공십이년졸 자헌공간립.
목공 2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진(陳)나라를 정벌하여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3년에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여 정나라가 항복하자 포위를 풀었다. 11년에 위나라의 대부 손양부(孫良夫)가 노(魯)나라를 구하려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목공이 죽고, 아들 정공(定公) 장(藏)이 즉위했다. 정공은 12년 만에 죽고, 아들 헌공(獻公) 간(衎)이 즉위했다.
献公十三年, 公令師曹教宮妾鼓琴, 妾不善, 曹笞之. 妾以幸悪曹於公, 公亦笞曹三百.
헌공십삼년 공영사조교둥첩고금 첩불선 조태지. 첩이행오조어공 공역대조삼백.
13년에 헌공이 악사 조(曹)에게 궁녀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게 했다. 첩이 잘하지 못하자 조가 매질을 했다. 첩이 헌공에게 조의 험담을 하자 헌공도 조에게 300대 매질을 했다.
十八年, 献公戒孫文子、甯恵子食, 皆往. 日旰不召, 而去射鴻於囿. 二子従之, 公不釈射服與之言. 二子怒, 如宿.
십팔년 헌공계손문자 영혜자식 개왕. 일왕불소 이거사홍어유. 이자종지 공불석사복여지언. 이자논 여숙.
18년에 헌공이 손문자(孫文子)와 영혜자(寧惠子)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여 이들이 들어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헌공은 이들을 부르지 않고 사냥터로 가서 기러기를 잡았다. 두 사람이 헌공을 찾아갔으나 헌공은 사냥 복장을 벗지도 않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화가 나서 숙읍(宿邑)으로 가버렸다.
孫文子子數侍公飲, 使師曹歌巧言之卒章. 師曹又怒公之嘗笞三百, 乃歌之, 欲以怒孫文子, 報衛献公.
손문자자수시공음 사사조가교언지졸장. 사조우노공지상태삼백 냐가지 욕이노손문자 보위헌공.
손문자의 아들이 헌공의 술자리를 여러 차례 시중든 적이 있다. (헌공이) 악사 조에게 「교언(巧言)」의 마지막 장을 노래하게 했다. 악사 조는 헌공이 300대 매질한 것에 화가 나있던 터라 그 노래를 부르면서 손문자를 노하게 만들어 위나라 헌공에게 보복하고 싶었다.
文子語蘧伯玉, 伯玉曰:「臣不知也.」 遂攻出献公. 献公奔斉, 斉置衛献公於聚邑. 孫文子、甯恵子共立定公弟秋為衛君, 是為殤公.
문자어거백옥 백옥왈 ‘신부지야’ 수공출헌공. 헌공분제 제치위헌공어취읍. 손문자 영혜자공립정공제추위위군 시위상공.
손문자가 이 일을 거백옥(蘧伯玉)에게 말하자 백옥은 ‘신은 모르겠소이다.’라고 했다. (손문자가) 바로 헌공을 공격했고 헌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는 위나라 헌공을 취(聚)나라에 머물게 했다. 손문자와 영혜자는 함께 정공(定公)의 동생 추(秋)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상공(殤公)이다.
殤公秋立, 封孫文子林父於宿.
상공추립 봉손문자립모어숙
상공 추가 즉위하자 손문자 임보(林父)를 숙읍(宿邑)에 봉했다.
十二年, 甯喜與孫林父争寵相悪, 殤公使甯喜攻孫林父. 林父奔晉, 复求入故衛献公. 献公在斉, 斉景公聞之, 與衛献公如晉求入. 晉為伐衛, 誘與盟. 衛殤公会晉平公, 平公執殤公與甯喜而复入衛献公. 献公亡在外十二年而入.
십이년 영뤼여손림보쟁총상오 상공사영희공손림보. 림보분진 복구입고위헌공. 헌공재제 제경공문지 여위헌공여진구인. 진위벌위 유여맹. 위상공회진평공 평공집상공여영희이복입위헌공 헌공망재십이년이입.
12년에 대부 영희(寧喜)와 손임보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를 미워했다. 상공이 영희를 시켜 손임보를 치게 했다. 손임보는 진(晉)나라로 도망쳐 전 국군 위나라 헌공이 돌아갈 수 있도록 요청했다. 헌공은 제나라에 있었는데 제나라 경공(景公)이 이 소식을 듣고는 위나라 헌공과 진나라로 가서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회맹을 이끌어냈다. 위나라 상공이 진나라 평공과 회맹하려 했으나 평공은 상공과 영희를 잡고는 위나라 헌공을 다시 귀국시켰다. 헌공은 외국에서 12년을 망명했다가 귀국했다.
献公後元年, 誅甯喜.
헌공후원년 주영희
헌공은 복위 원년에 영희를 죽였다.
三年, 呉延陵季子使過衛, 見蘧伯玉、史鰌, 曰:「衛多君子, 其国無故.」過宿, 孫林父為撃磬, 曰:「不樂, 音大悲, 使衛亂乃此矣.」是年, 献公卒, 子襄公悪立.
삼년 오연릉계자사과위 견거백옥 사추 왈 ‘위가군자 기국무고’과숙 손림보위격경 왈 ‘불락 음대비 사위한내차의’ 시년 헌공졸 자양공오립.
3년에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위나라에 들러 거백옥과 사추(史鰌)를 만나서는 ‘위나라에는 군자들이 많이 있으니, 나라에 별일은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숙읍을 지나는데 손임보가 경(磬)을 연주하자 ‘즐겁지 않고 크게 슬픈 것이 위나라의 분란이 여기서 비롯되었구나!’라고 했다. 이 해에 헌공이 죽고, 아들 양공(襄公) 오(惡)가 즉위했다.
<권력쟁탈과 내란, 그리고 멸망>
襄公六年, 楚霊王会諸侯, 襄公称病不往.
양공육년 초영왕회제후 양공칭병불왕.
양공 6년에 초나라 영왕(靈王)이 제후들과 회맹하는데 양공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九年, 襄公卒. 初, 襄公有賎妾, 幸之, 有身, 夢有人謂曰:「我康叔也, 令若子必有衛, 名而子曰『元』.」 妾怪之, 問孔成子. 成子曰:「康叔者, 衛祖也.」 及生子, 男也, 以告襄公. 襄公曰:「天所置也.」 名之曰元. 襄公夫人無子, 於是乃立元為嗣, 是為霊公.
구년 양공졸. 초 양공유천첩 행지 유신 몽유인위왈 ‘아강숙야 영약자필유위 명이자왈 “원”’ 첩괴지 문공성자. 성자왈 ‘강숙자 위조야’ 급생자 남야 이고양공. 양공왈 ‘천소치야’ 명지왈원. 양공부인무자 어시내립원위사 시위영공.
9년에 양공이 죽었다. 당초 양공에게는 천한 첩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를 예뻐하여 임신이 되었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녀에게 ‘나는 강숙(康叔)이다. 네 아들이 꼭 위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할 테니, 아들 이름을 원(元)이라 하여라.’라고 했다. 첩이 괴이하게 여겨 공성자(孔成子)에게 물었다. 공성자는 ‘강숙은 위나라의 조상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였고, 첩은 그간의 모든 사정을 양공에게 알렸다. 양공은 ‘하늘의 안배로다!’라면서 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양공의 부인은 아들이 없어 원을 후계자로 세우니 이가 영공(靈公)이다.
霊公五年, 朝晉昭公.
영공오년 조진소공.
영공 5년에 진나라 소공(昭公)에게 입조했다.-당대엔 진나라가 천자국이라
六年, 楚公子棄疾弑霊王自立, 為平王. 十一年, 火.
육년 초공자기질시영왕자립 위평왕. 십일년 화
6년에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靈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11년(기원전 524년)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三十八年, 孔子來, 祿之如魯. 後有隙, 孔子去. 後复來.
삼십팔년 공자래 녹자여노 후유극 공자거. 후복래.
38년에 공자(孔子)가 위나라에 오니 그에게 노나라에 있을 때와 같은 녹봉을 주었다. (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겨 공자는 떠났다가 뒤에 다시 왔다.
三十九年, 太子蒯聵與霊公夫人南子有悪, 欲殺南子. 蒯聵與其徒戯陽遫謀, 朝, 使殺夫人. 戯陽後悔, 不果. 蒯聵數目之, 夫人覚之, 懼, 呼曰:「太子欲殺我!」 霊公怒, 太子蒯聵奔宋, 已而之晉趙氏.
삼십구년 태자괴외여영공부인남자유오 욕살남자 괴외여기도희양속모 조 사살부인. 희양후회 불과 괴외수목지 부인각지 구 호왈 ‘태자욕살아’ 영공노 태자괴외분송 이이지진조씨.
39년에 태자 괴외(蒯聵)가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미워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다. 괴외가 그 무리 희양속(戱陽遫)과 모의하여 조회 때 부인을 죽이라고 했다. 희양속이 후회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괴외가 여러 차례 눈짓을 하자 부인이 이를 알아채고는 두려워하며 ‘태자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고함을 질렀다. 영공이 노하였고, 태자 괴외는 송나라로 도망쳤다가 바로 진(晉)나라의 조씨(조간자)에게로 갔다.
四十二年春, 霊公游于郊, 令子郢僕. 郢, 霊公少子也, 字子南. 霊公怨太子出奔, 謂郢曰:「我将立若為後.」 郢対曰:「郢不足以辱社稷, 君更図之.」
사십이년 영공유우교 영자영복. 영 영공소자야 자자남. 영공원태자출분 위영왈 ‘아장림약위후’ 영대왈 ‘영부족이욕사직 군경도지’
42년 봄에 영(靈)공이 교외로 놀러 나가면서 아들 영(郢)에게 호위를 맡겼다. 영은 영공의 작은 아들로 자를 자남(子南)이라 했다. 영공은 태자가 도망친 일을 원망하면서 영에게 ‘나는 너를 후계로 삼을까 한다.’라고 했다. 영이 답하길 ‘소자는 부족하여 사직을 욕되게 할 것이니 주군께서는 다른 그림을 그리소서.’라고 답했다.
夏, 霊公卒, 夫人命子郢為太子, 曰:「此霊公命也.」 郢曰:「亡人太子蒯聵之子輒在也, 不敢當.」於是衛乃以輒為君, 是為出公.
하 영공졸 부인명자영위태자 왈 ;차영공명야‘ 영왈 ’망인태자괴외지자첩재야 불감당‘ 어시위내이첩위군 시위출공.
여름에 영공이 죽자 부인은 영을 태자로 삼으면서 ‘이는 영공의 명령이오.’라고 하자 영은 ‘망명한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있으니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했다. 위나라가 첩을 주군으로 삼으니 이가 출공(出公)이다.
六月乙酉, 趙簡子欲入蒯聵, 乃令陽虎詐命衛十余人衰絰帰, 簡子送蒯聵. 衛人聞之, 発兵撃蒯聵. 蒯聵不得入, 入宿而保, 衛人亦罷兵.
유월을유 조간자욕입괴외 내영양호사명위십여인최질귀 간자송괴외 위인문지 발명격괴외. 괴외부득입 입숙이보 위인역파병.
6월 을유일에 진(晉)나라의 대부 조간자(趙簡子)가 괴외를 귀국시키려고 양호(陽虎)를 시켜 10여 명에게 상복을 입히고는 위나라에서 태자를 맞이하여 귀국시키려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조간자 자신은 괴외를 배웅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내어 괴외를 공격했다. 괴외가 들어가지 못하고 숙읍으로 가서 스스로를 지키자 위나라 사람들도 병사를 철수시켰다.
出公輒四年, 斉田乞弑其君孺子. 八年, 斉鮑子弑其君悼公. 孔子自陳入衛.
출공첩사년 제전걸시기군유자. 팔년 제포자시기순도공. 공자자신입위
출공=첩 4년에 제나라의 전걸(田乞)이 주군 유자(孺子) 도(荼)를 시해했다. 8년에 제나라의 포자(鮑子)가 그의 주군 도공(悼公)을 시해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위나라로 왔다.
九年, 孔文子問兵於仲尼, 仲尼不対. 其後魯迎仲尼, 仲尼反魯.
구년 공문자문병어중니 중니불대 기후노영중니 중니반노
9년, 공문자(孔文子)가 공자에게 군대 일에 관해 물었으나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노가 공자를 맞이하자 공자는 노로 돌아갔다.
十二年, 初, 孔圉文子取太子蒯聵之姊, 生悝. 孔氏之豎渾良夫美好, 孔文子卒, 良夫通於悝母. 太子在宿, 悝母使良夫於太子. 太子與良夫言曰:「苟能入我国, 報子以乗軒, 免子三死, 毋所與.」與之盟, 許以悝母為妻.
십이년 호 공어문자취태가되외지자 생회. 공씨지수혼양부미호 공문자졸 양부통어회모 태자재숙 회모사양부어태자 태자여양부언 ‘구능입아국 보자이승헌 면자삼사 무소여’ 여지맹 허이회모위첩
12년에 당초 공문자는 태자 괴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공회(孔悝)를 낳았다. 공씨 집에 혼양부(渾良夫)라는 잘 생긴 노비가 있었다. 공문자가 죽자 혼양부는 공회의 어머니와 간통했다. 태자가 숙읍에 머물고 있었는데 공회의 어머니는 혼양부를 태자에게 보냈다. 태자가 혼양부에게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그대에게 대부가 타는 수레로 보답할 것이다. 또 죽을죄 세 가지를 사면하여 묻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함께 맹서하고 또 공회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閏月, 良夫與太子入, 舎孔氏之外圃. 昏, 二人蒙衣而乗, 宦者羅御, 如孔氏. 孔氏之老欒甯問之, 称姻妾以告. 遂入, 適伯姫氏. 既食, 悝母杖戈而先, 太子與五人介, 輿猳従之. 伯姫劫悝於廁, 彊盟之, 遂劫以登台. 欒甯将飲酒, 炙未熟, 聞亂, 使告仲由. 召護駕乗車, 行爵食炙, 奉出公輒奔魯.
윤월 양부여태자입 사공씨지외초. 혼 이인몽의이승 환자라어 여공씨. 공씨지노난영문지 칭인첩이고. 수입 적백희씨. 기식 회모장과이선 채자여오인개 여가종지. 백희겁회어측 강맹지 수겁이등대. 난영장음주 구미숙 문란 사고중유. 소호가승거 행작식구 봉출공첩분노.
윤달에 혼양부와 태자 괴외가 함께 위나라로 들어와 공씨 집 뒤뜰에 숨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람은 여자 옷을 입고 두건을 쓰고는 내시 나(羅)가 모는 수레를 타고 공씨 집으로 갔다. 공씨 집의 늙은이 난녕(欒寧)이 누구냐고 묻자 인척의 첩이라고 했다.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와 백희씨(伯姬氏)에게로 갔다. 식사를 하고는 공회의 어머니가 창을 들고 앞장섰다. 태자와 갑옷 입은 사람 다섯이 돼지를 둘러메고 그 뒤를 따랐다. 백희가 공회를 겁박하여 뒷간으로 데려가 억지로 맹서하게 하고 누대 위로 올라가게 했다. 난녕이 술을 마시려고 고기를 굽다가 미처 익지 않았는데 반란 소식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중유(仲由)에게 알렸다. 소호(召護)가 수레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고 구운 고기를 먹으면서 출공 첩을 모시고 노나라로 달아났다.
仲由将入, 遇子羔将出, 曰:「門已閉矣.」 子路曰:「吾姑至矣.」 子羔曰:「不及, 莫践其難.」 子路曰:「食焉不辟其難.」 子羔遂出.
중유장입 우자고장출 왈 ‘문이폐의’ 자로왈 ‘오고지의’ 자고왈 ‘불급 막천기란’ 자로왈 ‘식언불피기란’ 자고수출.
자로(子路, 중유)가 공씨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자고(子羔)와 만났다. 자고가 ‘문은 이미 닫혔습니다.’라고 하자 자로는 ‘내가 가서 살펴보겠소.’라고 했다. 자고가 ‘늦었습니다. 난리에 휘말리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자로가 ‘이 집 밥을 얻어먹고 있는 이상 난리를 피할 수는 없지!’라고 했다. 자고는 나가 버렸다.
子路入, 及門, 公孫敢闔門, 曰:「毋入為也!」 子路曰:「是公孫也? 求利而逃其難. 由不然, 利其祿, 必救其患.」 有使者出, 子路乃得入. 曰:「太子焉用孔悝? 雖殺之, 必或継之.」 且曰:「太子無勇. 若燔台, 必舎孔叔.」 太子聞之, 懼, 下石乞、盂黶敵子路, 以戈撃之, 割纓. 子路曰:「君子死, 冠不免.」 結纓而死.
자로입 급문 공손감합문 왈 ‘무입위야’ 자로왈 ‘시공손야 구리이도기란 유불련 이기록 필구기환’ 유사자출 자로내득입. 왈 ‘태자언용공회 수살지 필혹계지’ 차왈 ‘태자무용 약번대 필사공숙’ 태자문지 구 하석기 우염적자로 이과격지 할영. 자로왈 ‘군자사 관불면’ 결영이사.
자로가 들어가 문 앞에 이르자 공손감(公孫敢)이 문을 닫으면서 ‘못 들어가오!’라 했다. 자로가 ‘이 사람이 정념 공손감인가? 이익은 탐내면서 난리로부터 도망치려 하다니! 이 중유는 그렇게 못하오. 그의 녹봉을 먹는 이상 반드시 그를 재난에서 구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심부름꾼 하나가 나오는 틈에 자로가 안으로 들어가서는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하필 공회를 이용하려 하십니까? 그를 죽인다 해도 다른 사람이 그를 이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자로가 이어 ‘태자께서는 용기가 없다. 누대에다 불을 지르면 분명 공회를 놓아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태자가 이 말을 듣고는 겁이 나 석기(石乞)와 우염(盂黶)을 보내 자로에게 맞서게 하니 창으로 자로를 공격하여 갓끈을 잘랐다. 자로는 ‘군자는 죽을지언정 관은 벗지 않는다!’라며 갓끈을 다시 매고는 죽음을 맞이했다.
孔子聞衛亂, 曰:「嗟乎! 柴也其來乎? 由也其死矣.」 孔悝竟立太子蒯聵, 是為荘公.
공자문위한 왈 ‘오호 시약기래호 유야기사의’ 공회경립태자괴외 시위장공.
공자가 위나라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허! 시(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유(자로)는 죽겠구나!’라고 탄식했다. 공회가 끝내 태자 괴외를 세우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荘公蒯聵者, 出公父也, 居外, 怨大夫莫迎立. 元年即位, 欲尽誅大臣, 曰:「寡人居外久矣, 子亦嘗聞之乎?」 群臣欲作亂, 乃止.
장공괴외자 출공부야 거외 원대부막영립. 원년즉위 욕진주대신 왈 ‘과인거와구의 자역상문지호’ 군신욕작란 내지.
장공 괴외는 출공(出公)의 아버지로 국외에 머무르고 있을 때 대부들이 자신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즉위 원년(기원전 480년)에 대신들을 다 죽이려 하면서 ‘과인이 나라 밖에서 오랫동안 머문 것은 그대들도 들어서 잘 알고 있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신하들이 난을 일으키려하자 그만 두었다.
二年, 魯孔丘卒.
이년 노공구졸
2년(기원전 479년)에 노나라의 공구(공자)가 세상을 떠났다.
三年, 荘公上城, 見戎州. 曰:「戎虜何為是?」 戎州病之. 十月, 戎州告趙簡子, 簡子囲衛. 十一月, 荘公出奔, 衛人立公子斑師為衛君. 斉伐衛, 虜斑師, 更立公子起為衛君.
삼년 장공상성 견융주. 왈 ‘융노하위시’ 융주병지. 시월 융주고조간자 간자어위. 십일월 장공출분 위인립자반사위위군. 제벌위 노반사 경립공자기위위군.
3년에 장공이 성에 올라 융주(戎州)를 보면서 ‘오랑캐 융 놈들이 어찌 여기에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융주 사람들이 원한을 품었다. 10월에 융주가 조간자(趙簡子)에게 일러바치자 간자가 위나라를 포위했다. 11월에 장공이 도망치자 위나라 사람들은 공자 반사(斑師)를 위나라의 주군으로 세웠다. 제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여 반사를 포로로 잡고 공자 기(起)를 위나라의 주군으로 바꾸어 세웠다.
衛君起元年, 衛石曼尃逐其君起, 起奔斉. 衛出公輒自斉复帰立. 初, 出公立十二年亡, 亡在外四年复入.
위군기원년 위석만부축기군기 기분제. 위출공첩자제복귀립. 초 출공립십이년망 망재외사년복입.
위군 기 원년에 위나라의 석만부(石曼尃)가 기(起)를 내쫓으려하자 기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나라 출공 첩이 제나라에서 돌아와 자리에 다시 올랐다. 당초 출공은 12년간 재위하다가 망명하여 나라 밖에서 4년을 보낸 뒤 다시 돌아 온 것이다.
出公後元年, 賞従亡者. 立二十一年卒, 出公季父黔攻出公子而自立, 是為悼公.
출공후원년 상종망자. 입이십일년졸 출공계부검공출공자이자립 시위도공.
출공 복귀후 원년(기원전 476년)에 망명 당시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출공이 21년 만에 죽었다. 출공의 숙부 검(黔)이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서니 이가 도공(悼公)이다.
悼公五年卒, 子敬公弗立. 敬公十九年卒, 子昭公糾立. 是時三晉彊, 衛如小侯, 属之.
도공오년졸 자경공자불립. 경공십구년졸 자소공규립. 시시삼진강 위여소후 속지.
도공은 5년 만에 죽고, 아들 경공(敬公) 불(弗)이 즉위했다. 경공은 19년 만에 죽고, 아들 소공(昭公) 규(糾)가 즉위했다. 이때 삼진(三晉, 한·조·위)이 강해지고 위나라는 작은 제후처럼 되어 (조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昭公六年, 公子亹弑之代立, 是為懐公. 懐公十一年, 公子穨弑懐公而代立, 是為慎公. 慎公父, 公子適;適父, 敬公也.
소공육년 공자미시지대립 시위회공. 회공십일년 공자퇴시회공이대립 시위신공. 신공부 공자적 적부 경공야.
소공 6년에 공자 미(亹)가 소공을 시해하고 대신에 자리에 오르니 이가 회공(懷公)이다.
회공 11년에 공자 퇴(頹)가 회공을 시해하고 즉위하니, 이가 신공(愼公)이다. 신공의 아버지는 공자 적(適)이고, 적의 아버지가 경공(敬公)이다.
慎公四十二年卒, 子声公訓立. 声公十一年卒, 子成侯遫立.
신공사십이년졸 자성공훈립. 성공십일년졸 자성우속립
신공이 42년 만에 죽고, 아들 성공(聲公) 훈(訓)이 즉위했다. 성공이 11년 만에 죽고, 아들 성후(成侯) 속(遫)이 즉위했다.
成侯十一年, 公孫鞅入秦. 十六年, 衛更貶号曰侯.
성후십일년 공손앙입진. 십육년 위경핍호왈후.
성후 11년(기원전 351년)에 공손앙(公孫鞅)이 진(秦)나라에 들어갔다. 16년에 위나라의 주군이 (공에서) 후로 깎였다.
二十九年, 成侯卒, 子平侯立. 平侯八年卒, 子嗣君立. 嗣君五年, 更貶号曰君, 独有濮陽.
이십구년 성후졸 자평후립. 평후팔년졸 자사군립. 사군오년 경핍호왈군 독유복양.
29년에 성후가 죽고, 아들 평후(平侯)가 즉위했다. 평후는 8년 만에 죽고, 아들 사군(嗣君)이 즉위했다. 사군 5년에 군(君)으로 호칭이 깎이고 복양(濮陽) 땅만 남게 되었다.
四十二年卒, 子懐君立. 懐君三十一年, 朝魏, 魏囚殺懐君. 魏更立嗣君弟, 是為元君. 元君為魏婿, 故魏立之.
사십이년졸 자회군립. 회군삼십일년 조위 위수살회군. 위경립사군제 시위원군. 원군위위서 고위립지.
사군은 42년 만에 죽고, 아들 회군(懷君)이 즉위했다. 회군 31년에 위(魏)나라로 조회하러 가자, 위(魏)나라가 회군을 가두었다가 죽였다. 위(魏)나라가 사군의 동생을 다시 세우니 이가 원군(元君)이다. 원군이 위(魏)나라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를 세운 것이다.
元君十四年, 秦抜魏東地, 秦初置東郡, 更徙衛野王県, 而并濮陽為東郡. 二十五年, 元君卒, 子君角立.
원군십사년 진발위동지 진초치동군 경사위야왕현 이병복양위동군. 이십오년 원군졸 자군각립.
원군 14년에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동쪽 땅을 차지하고 동군(東郡)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위나라의 주군(원군)을 다시 야왕현(野王縣)으로 옮기게 하고, 복양을 동군에 합병시켰다.
25년에 원군이 죽고, 아들 각(角)이 즉위했다.
君角九年, 秦并天下, 立為始皇帝. 二十一年, 二世廃君角為庶人, 衛絶祀.
군각구년 진병천하 립위시황제. 이십일년 이세폐군각위서인 위절사.
위군 각 9년(기원전 221년)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가 즉위했다. 21년(기원전 209년)에 진(秦)나라 2세(二世)가 위군 각을 평민으로 내치니 이로써 위나라의 제사가 끊어졌다.
太史公曰:余読世家言, 至於宣公之太子以婦見誅, 弟寿争死以相譲, 此與晉太子申生不敢明驪姫之過同, 倶悪傷父之志. 然卒死亡, 何其悲也! 或父子相殺, 兄弟相滅, 亦独何哉?
태사공왈 여독세가언 지어선공지태자이부견주 제수쟁사이상양 차여진태자신생불감명여희지과동 구악상부지지. 연졸사망 사기비야 혹부자상살 형제상살 역독하재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가의 기록을 읽다가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태자가 부인 때문에 살해되고, 동생 수가 서로 죽음을 다투는 대목에 이르렀는데, 이는 진(晉)나라의 태자 신생(申生)이 여희(驪姬)의 잘못을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로 모두 아버지의 뜻이 상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아비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없애려 했으니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