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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平津侯主父列傳




列傳-平津侯主父列傳


<공손홍>

 

丞相公孫弘者, 斉菑川國薛県人也, 字季. 少時為薛獄吏, 有罪, 免家貧, 牧豕海上. 年四十餘, 乃學春秋雑説. 養後母孝謹.

승상공손홍자 제치천국설현인야 자계. 소시위설옥리 유죄 면가빈 목해해상. 년사십여 내학춘추잡설. 양후모자효근.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은 제() 지방의 치천국(菑川國) 설현(薛縣) 출신으로 자()는 계()이다. 젊은 시절, 설현의 옥리(獄吏)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 집안이 가난해 해변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았다. 나이 사십이 넘어 춘추(春秋)와 여러 학설을 공부했다. 집안에선 계모를 효성스럽게 봉양했다.

 

建元元年, 天子初即位, 招賢良文學之士. 是時弘年六十, 徴以賢良為博士. 使匈奴, 還報, 不合上意, 上怒, 以為不能, 弘廼病免帰.

건원원년 천자초즉위 초현량문학지사. 시시홍년육십 징이현양위박사. 사흉노 환보 불합상의 상노 이위불능 홍내병면귀.

 

건원(建元) 원년(서기전 140), 천자가 새로 즉위하여 천하에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으로 이름난 선비들을 초빙했다. 이때 공손홍은 나이 60세로 현량으로 초치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런데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복명한 것이 천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자가 노하자 공손홍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元光五年, 有詔徴文學, 菑川國複推上公孫弘. 弘譲謝國人曰:「臣已嘗西應命, 以不能罷帰, 願更推選.

원광오년 유초징문학 치천국복추상공손홍. 홍양사국인왈 신이상서응명 이불능파귀 원경추선

 

원광(元光) 5(서기전 130),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천하에 문학에 뛰어난 선비를 초빙하려 하자, 치천국에서는 다시 공손홍을 천거했다. 공손홍은 치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양했다. ‘저는 이미 경사(京師)에 가서 천자의 명에 응했다가 무능하다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원컨대 다른 사람을 천거해주시길 바랍니다.’

 

國人固推弘, 弘至太常. 太常令所徴儒士各対策, 百餘人, 弘第居下. 策奏, 天子擢弘対為第一. 召入見, 狀貌甚麗, 拝為博士. 是時通西南夷道, 置郡, 巴蜀民苦之, 詔使弘視之. 還奏事, 盛毀西南夷無所用, 上不聴.

국인고추홍 홍지태상. 태상영소징유사각대책 백여인 홍제거하. 책진 천자택홍대위제일. 소입견 상모심려 배위박사. 시시통서남이도 치군 파촉민고지 조사홍시지. 환진사 성훼서남이무소용 상불청.

 

그러나 치천국의 사람들은 굳이 공손홍을 천거했기에 공손홍은 마침내 태상을 만나게 되었다. 태상은 초치한 유생들에게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바치게 했다. 공손홍의 성적은 1백여 명 중에 하위를 차지했다. 대책문이 황제에게 상주되자, 황제는 공손홍의 대책을 1등으로 뽑았다. 황제는 공손홍을 불러들여 만나보니 그의 용모가 무척 뛰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손홍은 박사에 임용되었다. 당시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내고 군()을 설치했는데, 파촉(巴蜀)의 백성들이 부역으로 고통스럽게 여겼다. 이에 천자는 조서를 내려 공손홍에게 현지의 사정을 순찰하고 오게 했다. 공손홍은 돌아와서 황제에게 현지의 사정을 그대로 아뢰면서, 서남이가 이미 저무는 해와 같아 쓸모없다고 매우 폄하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弘為人恢奇多聞, 常稱以為人主病不広大, 人臣病不倹節. 弘為布被, 食不重肉. 後母死, 服喪三年. 毎朝會議, 開陳其端, 令人主自択, 不肯面折庭爭. 於是天子察其行敦厚, 辯論有餘, 習文法吏事, 而又縁飾以儒術, 上大説之. 二歳中, 至左內史.

홍위인회기다문 상칭이위인주병불광대 인신병불검절. 홍위포피 식불중육. 후모사 복상삼년 매조회의 개진기단 영인주자택 불긍면택정쟁. 어시천자찰기행돈후 변론유여 습문법리사 이우연식이유술 상대열야. 이세중 지좌내사.

 

공손홍은 사람됨이 비범하고도 견문이 넓었다. 그는 남의 주인이 된 자는 광대하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고, 남의 신하된 자는 검소하지 못한 것을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공손홍은 평소에 베로 이불잇을 만들고, 식사에 두 가지 육류를 곁들여 먹지 않았다. 계모가 죽자 3년 상을 치렀다. 매반 조회 때에 그는 어떤 사건의 실마리만을 진술하고 황제가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다른 신하들과 얼굴을 맞대고 논쟁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그가 품행이 돈후하고, 언변이 조리가 있으며 문서와 법령 그리고 관리들의 공무에 익숙할 뿐 아니라 유학으로 잘 수양된 것을 보고, 매우 좋아했다. 2년 째 되는 해에 공손홍은 좌내사(左內史)에 올랐다.

 

弘奏事, 有不可, 不庭辯之. 嘗與主爵都尉汲黯請閒, 汲黯先発之, 弘推其後, 天子常説, 所言皆聴, 以此日益親貴.

홍진사 유불가 불정변지. 상여주작도위급암청문 급암선발지 홍추기후 천자상설 소언개청 이차일익친귀.

 

공손홍은 자기가 상주한 일이 윤허되지 않더라도 조정에서 그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늘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汲黯)과 함께 천자의 한가한 때에 알현하기를 청했다. 그 때에 급암이 먼저 거론하면 그가 그 뒤를 덧붙여서 조리 있게 설명했는데, 황제는 늘 기뻐하면서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이 때문에 공손홍은 갈수록 황제를 더욱 친해졌고 귀한 신분이 되었다.

 

嘗與公卿約議, 至上前, 皆倍其約以順上旨. 汲黯庭詰弘曰:「斉人多詐而無情実, 始與臣等建此議, 今皆倍之, 不忠.

상여공경약의 지상전 개배기역이순상지. 급암정힐홍왈 제인다사이무청실 시여신등건차의 금개배지불충

 

그는 공경대신들과 어떤 사항을 건의하기로 약속해놓고는 황제 앞에서 그 약속을 완전히 저버리고 황제의 뜻에 따랐다. 그러자 급암이 조정에서 그를 이렇게 비난했다. ‘() 지방 사람은 거짓이 많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당초 그는 신 등과 어떤 사항을 더불어 건의를 하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저버리니, 그는 불충한 자입니다.’

 

上問弘. 弘謝曰:「夫知臣者以臣為忠, 不知臣者以臣為不忠.上然弘言. 左右幸臣毎毀弘, 上益厚遇之.

상문지. 홍사왈 부지신자이신위충 부지신자이신위불충 상연홍언. 좌우행신먀훼홍 상익후우지.

 

황제가 급암의 말을 듣고 공손홍에게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사죄했다. ‘신을 아는 자는 저를 충성스럽다 하고, 신을 모르는 자는 저를 불충하다고 봅니다.’ 황제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황제 주변에 총애 받는 신하들이 공손홍을 헐뜯을 때 마다 황제는 더욱 그를 후하게 대했다.

 

元朔三年, 張歐免, 以弘為禦史大夫. 是時通西南夷, 東置滄海, 北築朔方之郡.

원삭삼년 장구면 이홍위어사대부. 시시통서남이 동치창해 북축삭방지군.

 

원삭(元朔) 3(서기전 126), 어사대부(御史大夫) 장구(張歐)가 면직되고 공손홍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때 서남이와 서로 교통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으며, 북쪽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했다.

 

弘數諫, 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 願罷之. 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

홍수간 이위파폐중국이봉무용지지 원파지. 어시천자내사주매신등난홍치삭방지편.

 

공손홍이 황제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려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까지 쓸모없는 땅을 경영하는 일은 중지하길 청했다. 이에 황제는 주매신(朱買臣) 등에게 삭방군을 설치하는 것이 어떠한 이점이 있는가를 가지고서 공손홍에게 말하게 했다.

 

発十策, 弘不得一. 弘廼謝曰:「山東鄙人, 不知其便若是, 願罷西南夷滄海而専奉朔方. 上乃許之.

발십책 홍부득일 홍내사왈 산동비인 부지기편약시 원파서남이 창해이전봉삭방 상내허지.

 

이에 주매신 등은 열 가지 이점을 제시했는데, 공손홍은 한 가지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공손홍은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변방 산동(山東) 촌사람이라 그런 이점에 대해 몰랐습니다. 서남이와 창해 쪽의 일을 중지하고 삭방에만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에 황제가 허락했다.

 

汲黯曰:「弘位在三公, 奉祿甚多. 然為布被, 此詐也.

급암왈 홍위재삼공 봉록심다. 연위포피 차사야

 

급암이 공손홍을 비난하며 말했다. ‘공손홍은 고귀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봉록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포의를 입고 다니는 것은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上問弘. 弘謝曰:「有之. 夫九卿與臣善者無過黯, 然今日庭詰弘, 誠中弘之病. 夫以三公為布被, 誠飾詐欲以釣名. 且臣聞管仲相斉, 有三帰, 侈擬於君, 桓公以霸, 亦上僭於君. 晏嬰相景公, 食不重肉, 妾不衣糸, 斉國亦治, 此下比於民. 今臣弘位為禦史大夫, 而為布被, 自九卿以下至於小吏, 無差, 誠如汲黯言. 且無汲黯忠, 陛下安得聞此言.

상문홍. 홍사왈 유지. 부구경여신선자무과암 연금일정힐홍 성중홍지병. 부이삼공위포피 성식가욕이조명. 차신문관중상제 유삼귀 치의어슨 환공이패 역상참어군. 안영상경공 식불중육 첩불의사 제국역치 차불비어민. 금신홍위위어사대부 이위포피 자구경이하지어소리 무차 성여급암언. 차무급암충 폐하안득문차언

 

황제가 공손홍에게 그 사실여부를 물으니, 그는 사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기실 구경(九卿) 가운데 급암은 신과 사이가 좋은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조정에서 신을 비난했는데, 그는 신의 큰 결점을 정확히 짚어낸 것입니다. 무릇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포의를 입고 다니는 행위는 확실히 거짓으로 꾸며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신이 듣기로 관중(管仲)은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서 세 명의 정실을 거느리고, 사치함이 군주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의 보필로 환공(桓公)은 패자(覇者)를 칭했는데, 이는 천자의 권위를 엿보는 참람한 짓이었습니다. 안영(晏嬰)은 재상이 되어 경공(景公)을 보필하면서 두 가지 고기반찬을 겹쳐 먹지 않았고, 시첩들은 비단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나라는 역시 잘 다스려졌습니다. 지금 신은 어사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포의를 입고 다녀 구경으로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귀천 고하의 차등을 없앴으니, 확실히 급암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급암의 충성된 말이 없었더라면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사실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天子以為謙譲, 愈益厚之. 卒以弘為丞相, 封平津侯.

천지이위겸양 유익후지. 졸이홍위승상 봉평진후.

 

황제는 공손홍이 겸양의 미덕을 갖추었다고 여기고 더욱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마침내 공손홍을 승상으로 삼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했다.

 

弘為人意忌, 外寛內深. 諸嘗與弘有卻者, 雖詳與善, 陰報其禍. 殺主父偃, 徙董仲舒於膠西, 皆弘之力也.

홍위인의기 외관내심. 제상여홍유각자 수상여선 음보기화. 살주보언 종동중서어교사 개홍지력야.

 

공손홍은 사람됨이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면서 그 속마음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는 자신과 틈이 있는 자들과 비록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것처럼 꾸며댔지만, 남몰래 보복을 가하고는 했다. 주보언(主父偃)이 살해되고 동중서(董仲舒)를 교서(膠西)로 좌천된 것은 모두 그가 막후에서 꾸민 것이다.

 

食一肉脫粟之飯. 故人所善賓客, 仰衣食, 弘奉祿皆以給之, 家無所餘. 士亦以此賢之.

식일육탈속지반. 고인소선빈객 앙의식 홍진록개이급지 가무소여. 사역이차현지.

 

그는 고기반찬 한 가지에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절친한 친구들이나 빈객이 와서 의식(衣食)을 청하면 자신의 봉록을 몽땅 다 주어버리고 자기 집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들마저도 공손홍을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淮南衡山謀反, 治黨與方急.

회남 형산모반 치당여방급.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모반사건으로 이들과 결탁된 자들을 색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弘病甚, 自以為無功而封, 位至丞相, 宜佐明主填撫國家, 使人由臣子之道. 今諸侯有畔逆之計, 此皆宰相奉職不稱, 恐竊病死, 無以塞責.

홍병심 자이위무공이봉 위지승상 의좌명주진무국가 사인유신자지도. 금제후유반역지계 차개재상봉직불칭 공절병사 무이새책.

 

공손홍은 심각하게 병을 앓으며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공도 없이 후작(侯爵)으로 봉해지고 숭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구나. 마땅히 현명한 군주를 잘 보필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사람들이 신하된 도리를 지키게 해야 한다. 지금 제후가 반역의 음모를 꾀하는 것은 모두가 재상이 자기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이대로 병들어 죽는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것이다.’

 

乃上書曰:「臣聞天下之通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 父子, 兄弟, 夫婦, 長幼之序, 此五者天下之通道也. , , , 此三者天下之通徳, 所以行之者也. 故曰 力行近乎仁, 好問近乎智, 知恥近乎勇. 知此三者, 則知所以自治知所以自治, 然後知所以治人.

내상서왈 신문천하지통도오 소이행지삼. 왈 부자 형제 부부 장유유서 차오자천하지통도야. 지 인 용 차삼자천하지통덕 소이행지자야. 고왈 역행근호인 호문근호지 지치근호용 지차삼자 즉지소이자치 지소이자치 연후지소이치인.

 

이에 글을 올려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자니 천하에는 다섯 가지의 도가 있고, 이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군신, 부자, 형제 ,부부, 장유(長幼)의 질서가 천하에 통용되는 도이며, (), (), (), 이 세 가지는 천하에 통용되는 덕으로 도를 실행하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 때문에 힘써서 실천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까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안다면 스스로를 수양할 방법을 알게 됩니다. 스스로를 수양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남을 다스리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天下未有不能自治而能治人者也, 此百世不易之道也. 今陛下躬行大孝, 鑒三王, 建周道, 兼文武, 厲賢予祿, 量能授官. 今臣弘罷駑之質, 無汗馬之勞, 陛下過意擢臣弘卒伍之中, 封為列侯, 致位三公. 臣弘行能不足以稱, 素有負薪之病, 恐先狗馬填溝壑, 終無以報徳塞責. 願帰侯印, 乞骸骨, 避賢者路. 천하미유불능자치이능치인자야 차백세불역지도야. 금폐하궁행대효감삼왕 건주도 겸문무 여현여록 양능수관. 금신홍파노지질 무한마지로 폐하과의탁신홍졸오지중 봉위열후 치위삼공. 신홍행능부족이칭 소유부신지병 공선구마진구학 종무기보덕새책. 원귀후인 걸해골 피현자로

 

천하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이는 불변의 도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큰 효를 행하시고, 삼왕(三王)을 본보기로 삼아 주()나라의 도를 일으켜 세우시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같은 덕과 재능을 겸비하셨습니다. 현능한 선비를 격려하고 봉록을 하사하고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립니다. 지금 신 공손홍은 보잘것없는 자질로 전쟁터에서 세운 공조차 없는데도 폐하께서는 파격적으로 신을 졸개들 가운데서 발탁하시어 열후(列侯)에 봉하시고 삼공의 지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참으로 신의 행실과 능력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평소 가난할 때에 얻은 병이 있어서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기도 전에 쓰러져 폐하로부터 입은 은덕에 보답하고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에 제후의 인장의 반납하고 사임할 것이니, 현능한 자에게 길을 터주시길 바랍니다.’

 

天子報曰:「古者賞有功, 褎有徳, 守成尚文, 遭遇右武, 未有易此者也. 朕宿昔庶幾獲承尊位, 懼不能寧, 惟所與共為治者, 君宜知之. 蓋君子善善悪悪, (君宜知之)君若謹行, 常在朕躬. 君不幸罹霜露之病, 何恙不已, 廼上書帰侯, 乞骸骨, 是章朕之不徳也. 今事少閒, 君其省思慮, 一精神, 輔以醫薬.

천자보왈 고자상유공 포유덕 수성상문 조우우무 미유역차자야. 짐숙석서기획승존위 구불능녕 유소여공위치자 군의지지. 개군자선선악악 군의지지군약근행 상제짐궁. 군불행리상로지병 하양불이 내상거귀후 걸해골 시장짐지부덕야. 금사소문 군기성사려 일정신 보이의약

 

황제에 이렇게 답했다. ‘옛날에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고, 덕이 있는 자에게 표창한다고 했소. 또 태평할 때에는 문()을 숭상하고, 변란을 만났을 때에는 무()를 존중했으니, 이를 불변하는 도리이다. 짐은 지난날 요행히 보위에 오른 이래로, 나라를 안녕하게 만들지 못할 것 걱정하여 오로지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릴 것만을 생각했음을 공도 잘 알 것이오. 군자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오. 공은 언행을 삼갈 뿐, 상벌과 진퇴는 모두 짐에게 달려 있소. 그대가 불행히도 상로지병(霜露之病)에 걸렸으나 어찌 낫지 않는다고 하겠소? 그런데 상소를 올려 서 작위를 반납하고 사직하겠다고 하니, 이는 짐의 부덕함의 소치이다. 이제 조정의 일이 조금 한가해졌으니 공은 근심을 덜고 정성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잘 보전하도록 하시오.’

 

因賜告牛酒雑帛. 居數月, 病有瘳, 視事.

인사고우주잡백. 거수월 병유진 친사.

 

그리고 황제는 그에게 휴가를 주고, 쇠고기와 술 그리고 비단을 하사했다. 몇 달 지나 공손홍의 병이 좀 낫자 다시 업무를 보았다.

 

元狩二年, 弘病, 竟以丞相終. 子度嗣為平津侯. 度為山陽太守十餘歳, 坐法失侯.

원수이년 홍병 경이승상종. 자도사위평진후. 도위산양태수십여세 좌법실후

 

원수(元狩) 2(서기전 121), 공손홍은 병이 들어 결국 승상의 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공손도(公孫度)가 자리를 이어받아 평진후가 되었다. 공손도는 산양(山陽)의 태수(太守) 10여 년 간 재직하다 법에 저촉하여 제후의 작위를 잃었다.


(主父偃)

 

主父偃者, 斉臨菑人也. 學長短縦橫之術, 晩乃學易春秋百家言. 遊斉諸生閒, 莫能厚遇也. 斉諸儒生相與排擯, 不容於斉. 家貧, 仮貸無所得.

주보언자 제임치인야. 학장단종횡지술 만내학역 춘추 백가언. 유제제생간 막능후우야. 제제유생상여배빈 불용러제. 가빈 가대무소득.

 

주보언(主父偃)은 제()나라 땅 임치(臨菑) 사람이다. 합종과 연횡에 관한 유세술을 배웠으며, 만년에는 역경(易經), 춘추 그리고 제자백가의 학설을 공부했다. 그런 뒤에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했으나, 아무도 그를 후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은 합심하여 그를 따돌렸기 때문에 그는 제나라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남에게 돈을 차용할 곳조차 없었다.

 

廼北遊燕中山, 皆莫能厚遇, 為客甚困. 孝武元光元年中, 以為諸侯莫足遊者, 乃西入関見衛將軍.

내북유연 조 중산 개막능후우 위객심곤. 효문제원광원년중 이위제후막족유자 내서입관견위장군.

 

그래서 북쪽으로 연(), (), 중산(中山) 지방을 떠돌았으나 역시 그를 후하게 대해 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처량한 나그네의 신세가 되었다. 효무제(孝武帝) 원광(元光) 원년(서기전 134), 주보언은 제후들 중에는 유세할만한 자가 없다고 여기고, 이에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들어가 위장군(衛將軍)을 찾아갔다.

 

衛將軍數言上, 上不召. 資用乏, 留久, 諸公賓客多厭之, 乃上書闕下. 朝奏, 暮召入見. 所言九事, 其八事為律令, 一事諫伐匈奴.

위장군수언상 상불소. 자용핍 유구 재공빈객가염지 내상서궐하. 조진 모소입현. 소언구사 기팔사위율령 일사간벌흉노.

 

위청이 여러 차례 그를 황제에게 천거했지만, 황제는 좀처럼 그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주보언은 가진 돈도 떨어지고 머무른 지 오래되자 여러 공들과 빈객들은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이에 다급한 그는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는데, 아침에 상소를 올리자 저녁에 들어가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상소문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일 가운데 여덟 가지가 율령에 관한 것이었고, 그 밖의 한 가지는 흉노 정벌에 대한 내용이었다.

 

其辭曰臣聞明主不悪切諫以博観, 忠臣不敢避重誅以直諫, 是故事無遺策而功流萬世. 今臣不敢隠忠避死以效愚計, 願陛下幸赦而少察之.

기사왈 신문명주불오절간이박관 충신불감피중주이직간 시고사무유책이공유만세. 금신불감은충피사이효우계 원폐하행사이소찰지.

 

그는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들으니 현명한 황제는 간절한 간언을 꺼리지 않고 널리 살피며, 충신은 무거운 형벌을 피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간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책을 남겨 그 공적과 명성은 만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신은 충심을 품고서 감히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을 올립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조금이라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司馬法曰:「國雖大, 好戦必亡天下雖平, 忘戦必危.天下既平, 天子大凱, 春蒐秋獮, 諸侯春振旅, 秋治兵, 所以不忘戦也.

사마법왈 국수대 호전필망 천하수평 망전필위 천하기평 천자대개 춘수추선 제후춘진여 추치병 소이불망전야.

 

사마법(司馬法) 나라가 비록 강대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된 후에 천자는 대개(大凱)’를 연주하고, 봄에는 수()라는 사냥을 하고 가을에는 선()이라는 사냥을 합니다. 제후 또한 봄에는 군대를 정비하고 가을에는 군대를 연마합니다. 이는 모두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한 행사입니다.

 

且夫怒者逆徳也, 兵者凶器也, 爭者末節也. 古之人君一怒必伏屍流血, 故聖王重行之.

차부노자역덕야 병자흉기야 쟁자말절야. 고지인군 일노필복시유혈 고성왕중행지.

 

그러나 무릇 성내는 것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요,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며, 싸움은 말단의 일입니다. 옛날 천자는 한 번 성내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 피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성왕(聖王)은 그런 일을 신중하게 행했습니다.

 

夫務戦勝窮武事者, 未有不悔者也. 昔秦皇帝任戦勝之威, 蠶食天下, 並呑戦國, 海內為一, 功斉三代. 務勝不休, 欲攻匈奴.

부무전승궁무사자 미유불회자야. 석진황제임전승지위 잠식천하 병탄전국 해내위일 공제삼대. 무승불휴 욕공흉노.

 

대개 싸워서 이기는 것에 힘을 쏟고 무력을 다하는 자로서 후회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옛날 진시황(秦始皇)은 전투해서 승리한 위세를 몰아 천하를 잠식하기 시작하여 전국(戰國)을 병탄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니, 그 무공(武功)이 삼대(三代)밖에 안 갔습니다. 또 진시황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흉노를 치려고 했습니다.

 

李斯諫曰:「不可. 夫匈奴無城郭之居, 委積之守, 遷徙鳥挙, 難得而制也. 軽兵深入, 糧食必絶踵糧以行, 重不及事. 得其地不足以為利也, 遇其民不可役而守也. 勝必殺之, 非民父母也. 靡獘中國, 快心匈奴, 非長策也.

이사간왈 불가 부흉노무성곽지거 위적지수 천사조거 난득이제야. 경병심입 양식필절 종양이행 중불급사. 득기지부족이위리야 우기민불가역이수야. 승필살지 비민부모야. 마폐중국 결심흉노 비장책야

 

그때에 이사(李斯)가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불가합니다. 흉노는 성곽을 쌓고 일정한 곳이 살지 않으며, 창고에 쌓아놓고 지킬 것이 없습니다. 마치 새떼가 모였다가 흩어지듯 이리저리 날라 다니는 것 같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경무장한 병사로 깊이 쳐들어가면 필시 군량이 끊어질 것입니다. 군량을 보급하면서 행군하려면 너무 부담이 커서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설사 그들의 땅을 얻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고, 그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그들을 부리고 지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승리하자면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하는데, 그것은 만백성의 부모 된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흉노를 치는 것을 통쾌하게 여긴다면,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秦皇帝不聴, 遂使蒙恬將兵攻胡, 辟地千里, 以河為境. 地固沢(), 不生五穀. 然後発天下丁男以守北河. 暴兵露師十有餘年, 死者不可勝數, 終不能踰河而北.

진시황제불청 수사몽염장병공호 벽지천리 이하위경. 지고택함로 불생오곡. 연후발천하정남이수하북. 폭병로사십유여년 사자불가승수 종불능유하이북.

 

진시황이 이사의 간언을 무시하고 결국 몽염(蒙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를 공격하여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하수(河水)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본래 염분이 많은 늪지대로 오곡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천하의 장정들을 보내 북하(北河)를 지키게 했습니다. 이곳에 10여 년 동안 군사를 주둔시켜놓으니 폭염과 풍찬노숙으로 죽은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결국 하수의 북쪽으로 진출하지는 못했습니다.

 

是豈人衆不足, 兵革不備哉 其勢不可也. 又使天下蜚芻輓粟, 起於黃琅邪負海之郡, 転輸北河, 率三十鍾而致一石.

시이인중부족 병혁불비재? 기세불가야. 우사천하비추만속 기어황 수 랑야부해지군 전수북하 솔삼십종이치일석.

 

이것이 어찌 군사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제대로 충분하게 잦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그 당시의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진나라 조정에서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말먹이와 군량을 운송하게 하면서 황현(黃縣), 수현(腄縣), 낭야(琅邪) 등과 같은 바다에 인접한 군에서부터 북하까지 수운으로 운송시켰습니다. 그러나 현지 당도한 것은 처음의 30()이었던 것이 겨우 1()만이 남아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男子疾耕不足於糧饟, 女子紡績不足於帷幕. 百姓靡敝, 孤寡老弱不能相養, 道路死者相望, 蓋天下始畔秦也.

남자질경부족어양양 여자방적부족어휘막. 백성마폐 과부노약불능상양 도로사자상망 개천하시반진야.

 

남자들은 죽도록 농사를 지어도 군량의 수요에는 부족했고, 아녀자들이 아무리 길쌈을 해도 군막(軍幕)을 만들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되어 쓰러졌고, 과부와 노약자는 서로 부양할 수 없어 길바닥에는 죽은 시체가 잇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及至高皇帝定天下, 略地於邊, 聞匈奴聚於代谷之外而欲撃之. 禦史成進諫曰:「不可. 夫匈奴之性, 獣聚而鳥散, 従之如搏影. 今以陛下盛徳攻匈奴, 臣竊危之.

급지고뢍제정천하 약지어변 문흉노취어대곡지외이욕격지. 어사성진간왈 불가 부흉노지성 숫쥐이조산 종지여박영, 금이폐하성덕공흉노 신절위지

 

그 후에 고조(高祖) 황제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변방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흉노가 대곡(代谷) 밖에 모여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어사(御史) ()이 나아가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불가합니다. 저 흉노의 속성은 짐승처럼 모였다가 새떼처럼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뒤쫓는 것은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의 성덕으로 흉노를 공격한다고 해도 신은 그것을 위험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高帝不聴, 遂北至於代谷, 果有平城之囲. 高皇帝蓋悔之甚, 乃使劉敬往結和親之約, 然後天下忘幹戈之事. 故兵法曰興師十萬, 日費千金. 夫秦常積衆暴兵數十萬人, 雖有覆軍殺將係虜単於之功, 亦適足以結怨深讎, 不足以償天下之費.

고제불청 수북지어대곡 과유평성지위. 고황제개회지심 냐사유경왕결화친지약 연후천하망간벌지사. 고병볍왈 흥사십만 일비천금’. 부긴상적중폭병수십만인 수유이군살장계노선우지공 역적족이결원심수 부족이상천하지비.

 

고조 황제가 그의 간언을 듣지 않고 마침내 북쪽으로 진격하여 대곡에 이르렀다가, 결국 평성(平城)에서 포위당하셨습니다. 고조 황제께서는 이를 심히 후회하고, 결국 유경(劉敬)을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게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천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고로 손자병법(孫子兵法) 군대 10만을 동원하면, 날마다 천금을 쓰게 된다.’고 기술해 둔 것입니다. 진나라는 당시 수십만의 군대를 늘 변방에 주둔시켜놓고서 적군을 무찌르고 장수를 베어 죽이며 선우(單于)를 사로잡은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흉노로 하여금 적개심을 높이고 복수심을 불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 천하의 비용을 다 써도 역부족이었습니다.

 

夫上虛府庫, 下敝百姓, 甘心於外國, 非完事也. 夫匈奴難得而制, 非一世也. 行盜侵駆, 所以為業也, 天性固然. 上及虞夏殷周, 固弗程督, 禽獣畜之, 不屬為人.

부상허부고 하폐백성 감심어외국 비완사야. 부흉노난득이제 비일세야. 행도침구 소이위업야 천성고연, 상급우하은주 고불정독 금수축지 불속위인.

 

위로는 나라의 창고를 텅 비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고달프게 하면서 나라 밖에 위엄을 떨치는 것으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은 불미스런 일입니다. 흉노를 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둑질을 감행하고 침입하여 재물과 백성들을 잡아가는 것은 밥 먹듯 행하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위로 멀리 우(), (), (), ()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그들을 규정에 따라 세를 거두지 않고 그 잘못을 징벌하지 않고, 마치 금수처럼 여기고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夫上不観虞夏殷周之統, 而下()[]近世之失, 此臣之所大憂, 百姓之所疾苦也. 且夫兵久則変生, 事苦則慮易. 乃使邊境之民獘靡愁苦而有離心, 將吏相疑而外市, 故尉佗章邯得以成其私也.

부상불관우하은주지통 이하수순근세지실 차신지소대우 백성지소질고야. 차부병구즉변생 사고즉여이. 냐사변경지민폐마수고이유리심 장리상의이외시 고위타 장한득이성기사야.

 

멀리 옛 왕조였던 우, , , 주나라의 전통을 살피지 않고, 가까운 시대의 과실을 따라 백성들이 괴롭게 만드는 것은 신이 매우 우려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오래되면 변란이 생기고, 그들이 하는 일이 고통스러우면 딴 마음을 먹게 마련입니다. 이는 또한 변경의 백성들을 고달프고 시름에 잠기게 해 역심(逆心)을 품게 만들고 장수와 관리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외세와 결탁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예전에 위타(尉佗), 장한(章邯)처럼 그들의 야심을 이룰 수 만들게 합니다. 진나라의 정령(政令)이 시행되지 않았던 까닭은 권력이 위타와 장한에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득실의 관한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夫秦政之所以不行者, 権分乎二子, 此得失之效也. 故周書曰安危在出令, 存亡在所用. 願陛下詳察之, 少加意而熟慮焉.

부진정지소이불행자 권분호이자 차득실지효야. 고주서왈 안위재출령 존망제소용’. 원폐하상찰지 소가의이숙여언.

 

고로 주서(周書)에는 국가의 안위는 황제의 정령에 달려 있고, 국가의 존망은 인사에 달려 있다.’라고 했습니다. 청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상세히 살피시고 깊이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是時趙人徐樂斉人厳安倶上書言世務, 各一事. 徐樂曰

시시조인서악 제인엄안구상거언세무 각일사. 서악왈


이때, ()나라 사람 서악(徐樂)과 제나라 사람 엄안(嚴安)이 각각 상소해 시정에 대해 말했다. 서악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臣聞天下之患在於土崩, 不在於瓦解, 古今一也. 何謂土崩 秦之末世是也. 陳渉無千乗之尊, 尺土之地, 身非王公大人名族之後, 無郷曲之譽.

신문천하지환재어토붕 부개어와해 고금일야. 하위토붕 진지말세시야. 진섭무천승지존 척토지지 신비왕공대인명족기후 무향곡지예.

 

신이 듣건대 천하의 근심은 흙이 무너지는 형세인 토붕(土崩)’에 있는 것이지 기와가 깨지는 형세인 와해(瓦解)’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토붕의 형세라고 하면, ()나라의 말세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사람인 진승(陳勝)은 천승(千乘)의 높은 신분도 아니며, 한 치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출신성분이 왕공(王公), 대인(大人)이나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와 같은 신분도 아니었으며, 동네에서도 명성이 없었습니다.

 

非有孔曾子之賢, 陶朱猗頓之富也, 然起窮巷, 奮棘矜, 偏袒大呼而天下従風, 此其故何也 由民困而主不恤, 下怨而上不知(), 俗已亂而政不脩, 此三者陳渉之所以為資也. 是之謂土崩. 故曰天下之患在於土崩.

비유공 묵 증자지현 도주 의돈지부야 연기궁항 분극긍 편단대호이천하종풍 차유고하야? 유민곤이주불휼 하원이상부지야 속이난이정불수 차삼자진섭지소이위자야. 시지위토붕. 고왈천하지환재어토붕.

 

또한 공자(孔子), 묵적(墨翟), 증삼(曾參)과 같은 현능함을 갖추지도 못했고, 도주공(陶朱公)나 의돈(猗頓)과 같이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빈민가에서 창 자루를 들고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소리치니 천하 사람들이 마치 바람처럼 몰려와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무슨 연고에서 비롯된 것인가? 백성이 고달픈데도 황제가 이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고, 아랫사람이 원망하는데도 윗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며, 시속이 어지러워지고 정치를 바르게 펼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진승이 밑천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근심거리는 토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何謂瓦解 趙之兵是也. 七國謀為大逆, 號皆稱萬乗之君, 帯甲數十萬, 威足以厳其境內, 財足以勧其士民, 然不能西攘尺寸之地而身為禽於中原者, 此其故何也 非権軽於匹夫而兵弱於陳渉也, 當是之時, 先帝之徳沢未衰而安土樂俗之民衆, 故諸侯無境外之助. 此之謂瓦解,

하위와해? 오 초 제 조지병시야. 칠국모위대역 호개칭만승지군 대갑수십만 위족이엄기경내 재족이권기사민 연불능서영척촌지지이신위금어중원자 차기고하야? 비권경어필부이병약어진섭야 당시지시 선제지덕책미쇠이안토악속지민중 고제후무경외지조. 차지위와해.

 

그러면 무엇을 와해의 형세라고 하는가? (), (), (), ()나라 등 칠국의 반란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칠국이 모의해 대역을 범하고 모두가 만승(萬乘)의 천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병력이 수 십 만이었고, 그 위세는 나라 안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재물은 그 백성과 군사들을 유혹하기에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으로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자신의 몸은 중원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그들의 권위가 필부보다 가볍고 병력이 진승보다 약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당시의 형세가 선제의 은택이 아직 쇠퇴하지 않아서, 편안히 정착해 풍속을 즐기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후를 국경 밖에서 도와주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와해의 형세라고 합니다.

 

故曰天下之患不在瓦解. 由是観之, 天下誠有土崩之勢, 雖布衣窮処之士或首悪而危海內, 陳渉是也. 況三晉之君或存乎!

고왈천하지환부재와해. 유시관지 천하성유토붕지세 수포의궁처지사혹수악이위해내 진섭시애. 황삼진지군혹존호!

 

따라서 천하의 근심은 결코 와해의 형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를 통해서 볼 때 천하가 진실로 토붕의 형세에 놓이면 설령 포의의 궁핍한 선비라고 하더라도 더러 앞장서서 악행을 제창하여 온 세상을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섭(陳涉)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물며 삼진(三晉)의 군주와 같은 강자가 혹 존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天下雖未有大治也, 誠能無土崩之勢, 雖有彊國勁兵不得旋踵而身為禽矣, 趙是也. 況群臣百姓能為亂乎哉! 此二體者, 安危之明要也, 賢主所留意而深察也.

천하수미유대치야 성능무토붕지세 수유강국경병부득선종이신위금의 오 초 제 조시야. 황군신백성능위란호재! 차이체자 안위지명요야 현주소유의이심찰야.

 

천하가 비록 잘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없다면, 비록 강대국의 날카로운 군대가 모반하더라도 발 돌릴 틈도 없이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 , , 조 등 칠국의 반란이 그 실례입니다. 하물며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실례는 국가 안위에 명백한 요건이 되는 것으로 현명한 군주는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閒者関東五谷不登, 年歳未複, 民多窮困, 重之以邊境之事, 推數循理而観之, 則民且有不安其処者矣. 不安故易動. 易動者, 土崩之勢也.

한자관동오곡부등 연세미복 민다궁곤 중지이변경지사 추수순이이관지즉민차유불안기처자의. 불안고이동. 이동자 토붕지세야.

 

요즈음 관동(關東)에는 오곡이 잘 여물지 않아 수확이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무척 곤궁하게 되었고 변경의 전쟁까지 겹쳤습니다. 이것을 사리에 따라 따져본다면, 앞으로 이런 형국을 불안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생길 것입니다. 불안하면 쉽게 동요합니다. 쉽게 동요하는 것은 토붕의 형세입니다.

 

故賢主獨観萬化之原, 明於安危之機, 脩之廟堂之上, 而銷未形之患. 其要, 期使天下無土崩之勢而已矣. 故雖有彊國勁兵, 陛下逐走獣, 射蜚鳥, 弘遊燕之囿, 淫縦恣之観, 極馳騁之樂, 自若也.

고현주독관만화지원 명어안위지기 수지묘당지상 이소미형지환. 기요 기사천하무토붕지세이의의. 고수유강국경병 폐하축주수 사비조 홍유연지유 음종자지관 극치빙지악 자약야.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만물 변화의 근원을 살펴서 안위의 기틀을 분명히 하고, 조정에 앉아서 정무에 열중하며 화란의 형체가 드러나기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요점은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없도록 미리 조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정예군대가 모반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짐승을 쫓고 나는 새들을 잡으며, 잔치를 벌이는 장소를 더욱 넓혀서 마음껏 즐기며, 사냥을 즐기시더라도,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할 것입니다.

 

金石糸竹之聲不絶於耳, 帷帳之私俳優侏儒之笑不乏於前, 而天下無宿憂. 名何必湯武, 俗何必成康!

금석사죽지성부절어이 휘장지사배우주유지소불핍어전 이천하무숙우. 명하필탕무 속하필성강.

 

금석사죽(金石絲竹: 모든 악기)의 음악 소리가 폐하의 귀에 끊이지 않고, 장막 안에서 미녀들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배우, 광대의 웃음소리가 폐하의 면전에 끊이지 않더라도, 천하에는 근심해야 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굳이 명성이 탕왕(湯王), 무왕(武王)과 같고, 풍속이 성왕(成王), 강왕(康王) 때와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雖然, 臣竊以為陛下天然之聖, 寛仁之資, 而誠以天下為務, 則湯武之名不難侔, 而成康之俗可複興也. 此二體者立, 然後処尊安之実, 揚名広譽於當世, 親天下而服四夷, 餘恩遺徳為數世隆,

수연 신절이위폐하천연지성 관인지자 이성이천하위무 즉탕무지명불난모 이성강지속가복흥야. 차이체자립 연후처존안지실 양명광예어당세 친천하이복사이 여은유덕위수세륭.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데, 폐하께서는 타고난 성군(聖君)으로서 관대하고 인자한 자질을 지니고 계십니다. 진실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힘쓰신다면, 탕왕이나 무왕과 같은 명성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성왕과 탕왕 때의 풍속을 부흥시킬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토붕과 와해의 형세를 피하는 이 두 가지 근본을 확립한 다음, 존귀하고 편안한 현실 속에서 당세에 명예를 드날리어, 천하 사람들을 아끼고 사방 오랑캐를 심복시키며, 남은 은덕이 여러 대에 걸쳐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南面負扆摂袂而揖王公, 此陛下之所服也. 臣聞図王不成, 其敝足以安. 安則陛下何求而不得, 何為而不成, 何征而不服乎哉!

남면부의섭몌이읍왕공 차폐하지소복야. 신문도왕불성 기폐족이안. 안즉폐하구이부득 하위이불성 하정이불복호재!

 

그러면 폐하가 하실 일은 천자의 자리에서 앉아서 병풍 앞에 앉아 소매를 걷고 왕공과 대인들로 하여금 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왕자(王者)가 되기를 기도하면 비록 그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천하를 안정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합니다. 천하가 편안해지면, 폐하께서 무엇을 찾든 못 얻을 것이 없고, 무엇을 행한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디를 정벌한들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厳安上書曰臣聞周有天下, 其治三百餘歳, 成康其隆也, 刑錯四十餘年而不用. 及其衰也, 亦三百餘歳, 故五伯更起.

엄안상서왈 신문주유천하 기치삼백여세 성강기융야 형착사십여년이불용. 급기쇠야 역삼백여세 고오백경기.

 

엄안은 이런 상서문을 올렸다. ‘신이 들으니 주나라가 천하를 소유했던 3백여 년 동안에 성왕과 강왕 시절이 가장 융성했는데, 이때에는 40여 년 동안이나 형구를 버려둔 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3백년 뒤에 주나라가 쇠퇴해가는 과정에서 오패(五覇)가 번갈아 나왔던 것입니다.

 

五伯者, 常佐天子興利除害, 誅暴禁邪, 匡正海內, 以尊天子.

오백자 상좌천자흥리제해 주폭금사 광정해내 이존천자.

 

오패는 늘 천자를 보위해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했으며, 사나운 자를 주벌하고 간사한 것을 금해 천하를 바로잡아 천자를 높였습니다.

 

五伯既沒, 賢聖莫続, 天子孤弱, 號令不行. 諸侯恣行, 彊陵弱, 衆暴寡.

오백기몰 현성막속 천자고약 호령불행. 제후자행 강릉약 중폭과

 

오패가 사라지자 현인과 성군이 뒤를 이어 나오지 않으니, 천자는 고립되고 쇠약해졌습니다. 그 때 천자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행동하여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다수는 소수에게 포악하게 굴었습니다.

 

田常簒斉, 六卿分晉, 並為戦國, 此民之始苦也.

전상찬제 육경분진 병위전국 차민지시고야.

 

전상(田常)이 제나라를 찬탈하고 육경(六卿)이 진()나라를 나누어가지자 이때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전개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의 시작 되었습니다.

 

於是彊國務攻, 弱國備守, 合従連橫, 馳車撃轂, 介冑生蟣蝨, 民無所告愬.

어시강국무공 약국비수 합종연횡 치거격곡 개주기슬 민무소고소.

 

강대국은 이웃 약소국의 침공에 힘쓰고, 약소국은 방비에 여념이 없게 되어서 나라 간에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이 반복되어 사자들이 분주히 말을 달려 오가게 되었습니다. 군사들의 갑옷과 투구에는 서캐와 이가 가득하건만, 백성들은 그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及至秦王, 蠶食天下, 並呑戦國, 稱號曰皇帝, 主海內之政, 壊諸侯之城, 銷其兵, 鋳以為鍾虡, 示不複用. 元元黎民得免於戦國, 逢明天子, 人人自以為更生.

급지진왕 잠식천하 병탄전국 칭호왈황제 주해니정 괴자후지성 삭기병 주이위종거 시불복용. 원원여민득면어전국 봉명천자 인인자이위갱생.

 

마침내 진나라 왕은 천하를 점차 잠식하여 전국(戰國)을 병탄하고 황제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는 천하의 정치를 장악하고 제후들의 성을 파괴하였고, 그들의 무기를 녹여서 종과 종루를 주조해 다시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백성들은 그제야 비로소 현명한 천자를 얻어서 전란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고 모두들 다시 새로운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嚮使秦緩其刑罰, 薄賦斂, 省繇役, 貴仁義, 賎権利, 上篤厚, 下智巧, 変風易俗, 化於海內, 則世世必安矣.

향사진완기형벌 박부검 성요역 귀인의 천권리 상독후 하지교 변풍이속 화어해내 즉세세필안의.

 

그때 진나라가 만일 형벌과 세금을 줄이고 요역을 덜어주며, 인의를 숭상하고 권세와 이익을 천시하고, 후박한 것을 숭상하고 약삭빠른 기교를 나쁘게 여겨, 풍속을 바꿔서 천하를 교화했다면, 아마도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秦不行是風而()[]其故俗, 為智巧権利者進, 篤厚忠信者退法厳政峻, 諂諛者衆, 日聞其美, 意広心軼. 欲肆威海外, 乃使蒙恬將兵以北攻胡.

진불행시풍이수순기고속 위지교권리자진 독후충신자퇴 법엄정준 첨유자중 일문기기 의광필일. 욕사위해외 내사몽염장병이북공호.

 

그런데 진나라는 이러한 풍속을 교화하지 않고 옛 관습에 따라 약삭빠른 기교와 권세,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등용하고 미덥고 충성스러운 자는 물리쳤습니다. 법을 엄중하게 하고 정치는 더욱 준엄하게 시행했습니다. 아첨하는 자가 많아서 황제는 날마다 칭송하는 말만 들으니, 야심은 커지고 마음은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위세를 나라 밖까지 떨치고 싶어졌습니다. 마침내 몽염(蒙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오랑캐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辟地進境, 戍於北河, 蜚芻輓粟以隨其後. 又使尉()屠睢將樓船之士南攻百越, 使監祿鑿渠運糧, 深入越, 越人遁逃. 曠日持久, 糧食絶乏, 越人撃之, 秦兵大敗. 秦乃使尉佗將卒以戍越.

벽지진경 수어북하 비추만속이수기후. 우사위타도수장루선지사남공백월 사감록착거운량 심입월 월인순도. 광일지구 양식절핍 월인격지 진병대패. 진내사위타장졸이수월.

 

국토를 개척하여 북하의 땅을 지키며, 백성들에게 군량을 지고 그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또다시 위관(尉官)인 도수(屠睢)에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치게 하고, 감어사(監御史) (監祿)에게 운하를 파고 군량을 옮겨 월()나라에 깊숙이 들어가게 하니, 월나라 군사들은 달아나버렸습니다. 부질없이 날을 보내며 버티다가 진나라 병사는 군량이 부족해졌습니다. 이에 월나라 군사가 공격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진나라는 이에 조타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월나라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當是時, 秦禍北構於胡, 南掛於越, 宿兵無用之地, 進而不得退. 行十餘年, 丁男被甲, 丁女転輸, 苦不聊生, 自経於道樹, 死者相望.

당시시 진화북횡어호 남괘어월 숙병무용지지 진이부득퇴. 행십여년 정남피갑 정여전수 고불료생 자경어도수 사자상망.

 

당시 진나라의 전선은 북쪽의 흉노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월나라까지 걸쳐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쓸모없는 땅에 주둔시켜놓은 채, 진퇴양난에 빠져들었습니다. 장정들은 10여 년을 계속해 갑옷을 입고 젊은 부녀자들은 군수물자를 실었다. 그 고달픔에 삶을 마다하고 길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습니다.

 

及秦皇帝崩, 天下大叛. 陳勝呉広挙陳, 武臣張耳挙趙, 項梁挙呉, 田儋挙斉, 景駒挙郢, 周市挙魏, 韓広挙燕, 窮山通谷豪士並起, 不可勝載也.

급진황제붕 천하대반. 진승 오광거진 무신 장이거조 항량거오 전담거제 경구거영 주불거위 한광거연 궁산통곡호사병기 불가긍재야.

 

진나라의 황제가 죽자 천하에는 대란 일어났습니다. 진승과 오광(吳廣)은 진() 땅에서 봉기하고, 무신(武臣)과 장이(張耳)는 조() 땅에서 일어났으며, 항량(項梁)은 오() 땅에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계속하여 전담(田儋)은 제() 땅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경구(景駒)는 영() 땅에서 일어났으며, 주불(周市)은 위() 땅에서 봉기했고, 한광(韓廣)은 연() 땅에서 거병했습니다. 심산유곡에서까지도 호걸스러운 인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니, 그 숫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然皆非公侯之後, 非長官之吏也. 無尺寸之勢, 起閭巷, 杖棘矜, 應時而皆動, 不謀而倶起, 不約而同會, 壌長地進, 至於霸王, 時教使然也.

연개비공후지후 비장관지리야. 무척촌지세 기여항 장극긍 응시이개동 불모이구기 불약이동회 양장지진 지어패왕 시교사연야.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후(公侯)의 자손이나 장관의 벼슬아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권세도 없이 보잘것없는 시골 거리에서 봉기해 창 자루를 들고 시세에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서로 의론하지는 않았어도 함께 봉기했으며, 약속하지는 않았어도 한데 모여들었습니다. 점거한 지역이 넓어져서 마침내는 패왕이 되기에 이르니, 그것은 모두 시절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秦貴為天子, 富有天下, 滅世絶祀者, 窮兵之禍也. 故周失之弱, 秦失之彊, 不変之患也.

진귀위천자 부유천하 멸세절사자 궁병지화야. 고주실지약 진실지강 불변지환야.

 

진나라가 천자의 귀한 신분으로 천하를 소유했으면서도, 결국 대를 잇지 못하고 제사가 끊기게 된 것은 지나치게 전쟁을 벌인 화 때문입니다. 결국 주나라는 약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고, 진나라는 강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는 시세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데서 기인한 환난(患難)입니다.

 

今欲招南夷, 朝夜郎, 降羌僰, 略濊州, 建城邑, 深入匈奴, 燔其篭城, 議者美之. 此人臣之利也, 非天下之長策也. 今中國無狗吠之驚, 而外累於遠方之備, 靡敝國家, 非所以子民也.

금욕초남이 조야랑 항강북 약예주 건성읍 심입흉노 번기롱성 의자미지. 차인신지리야 비천하지장책야. 금중국무구폐지경 이외루어원방지비 마폐국가 비소이자민야.

지금 폐하께서는 남이(南夷)를 초청하고, 야랑(夜郎)을 입조시키며, ()과 북()을 투항시키고, 예주(濊州)를 공략해 성읍(城邑)을 건설하며 흉노의 땅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롱성(蘢城)을 불태우고 합니다. 이런 일를 논하는 자는 그런 전략이 모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신하된 자의 이익이 될 수 있으나 천하를 위한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지금 중국에는 개 짖는 소리에 놀랄 일도 없을 정도로 아주 태평한데, 나라 밖으로 먼 곳의 수비에 얽매어 국가를 피폐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行無窮之欲, 甘心快意, 結怨於匈奴, 非所以安邊也. 禍結而不解, 兵休而複起, 近者愁苦, 遠者驚駭, 非所以持久也. 今天下鍛甲砥剣, 橋箭累弦, 転輸運糧, 未見休時, 此天下之所共憂也.

행무궁지욕 감심쾌의 결원어흉노 비소이안변야. 화결이불해 병휴이복기 근자수고 원자경해 비소이지구야. 금천하단갑지검 교전루현 전수운양 미견휴시 차천하지소공우야.

 

끝없는 욕망을 좇아 만족을 추구함으로써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일단 화가 맺히면 풀어지지 않으므로 싸움은 그쳤다가 다시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가까이 있는 자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요, 멀리 있는 자는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천하를 오래도록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천하는 갑옷을 수리하고 칼을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시위를 점검하며 군량을 수송하느라고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 사람들이 함께 근심하는 바입니다.

 

夫兵久而変起, 事煩而慮生. 今外郡之地或幾千里, 列城數十, 形束壌制, 旁脅諸侯, 非公室之利也. 上観斉晉之所以亡者, 公室卑削, 六卿大盛也

부병구이변기 사번이여생. 금외군지혹기천리 열성수십 형속양제 방협제후 비공실지리야. 상관제진지소이망자 공실비삭 육경대성야.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오래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복잡해지면 회의가 생기는 법입니다. 지금 나라 밖으로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고 이곳에 줄지은 성들이 수십 개입니다. 산천의 형세와 토지에 근거해 그곳의 백성들을 통제하고 인근 제후들을 위협하니, 이 또한 공실(公室)의 이익이 아닙니다. 예전에 제나라와 진()나라가 무너진 까닭을 살펴보면, 공실의 지위가 쇠약해지고 육경의 세력이 성대해졌기 때문입니다.

 

下観秦之所以滅者, 厳法刻深, 欲大無窮也. 今郡守之権, 非特六卿之重也地幾千里, 非特閭巷之資也甲兵器械, 非特棘矜之用也以遭萬世之変, 則不可稱諱也.

하관진지소이멸자 엄법각심 욕대무궁야. 금군수지권 비특육경지중야 지기천리 비특여항지자야 갑병기계 비특극긍지용야 이조만세지변 즉불가칭위야.

 

또 근자에 진()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형벌이 지나치게 혹독하고 욕심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수(郡守)의 권력의 중함은 육경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군수들은 관할하는 땅은 천리 가까이 되어 진승 등이 근거지로 삼았던 몇 몇 작은 골목에 비할 수 없이 광활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갑옷, 병기 그리고 각종 장비는 진승 등이 사용했던 창 자루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형세 하에 천하의 변란을 만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자명합니다.”

 

書奏天子, 天子召見三人, 謂曰:「公等皆安在 何相見之晩也!於是上乃拝主父偃徐樂厳安為郎中. []數見, 上疏言事, 詔拝偃為謁者, ()為中大夫. 一歳中四遷偃.

서진천자 천자소현삼인 위왈 공등개안재 하상견지만야 어시상내배주보언 서악 엄안위랑중. 언수현 상소언사 조배언위알자 천악위중대부 일세중사천언.

 

이 상서들이 천자에게 올라가자, 천자는 세 사람들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들 어디에 있었는가? 어째서 이제야 만났단 말인가!’ 그리고는, 주보언, 서악, 엄안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이 거듭 천자를 배알하고 국사에 대해 진언을 올리자 그를 알자(謁者)로 임용했다가 다시 중대부(中大夫)로 옮기도록 했다. 그는 일 년에 네 차례나 전임되었다.

 

偃説上曰:「古者諸侯不過百里, 彊弱之形易制. 今諸侯或連城數十, 地方千里, 緩則驕奢易為淫亂, 急則阻其彊而合従以逆京師.

언설상왈 고자제후불과백리 강약지형이제. 금제후혹연성수십 지방천리 완즉교사이위음란 금즉조기강이합종이역경사.

 

주보언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렸다. ‘옛날의 제후들은 그 영지가 사방 1백리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국력이 강하건 약하건 통제하기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후들은 수십 개의 성을 잇 따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영지가 사방 천리나 됩니다. 평소에는 교만, 사치해 음란하게 생활하다가 위급해지면 자신들의 강대함을 근거로 서로 연합해 조정에 반기를 들려고 합니다.

 

今以法割削之, 則逆節萌起, 前日晁錯是也.

금이법할삭지 즉역절붕기 전일조착시야.

 

이제 법으로 그들의 영지를 삭탈한다면 반역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조조(晁錯)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今諸侯子弟或十數, 而適嗣代立, 餘雖骨肉, 無尺寸地封, 則仁孝之道不宣.

금제후자제혹십수 이적사대립 여수골육 무척혼지봉 즉인효지도불선.

 

지금 제후의 자제들은 더러 수십 명이나 되지만 적장자(適長子)만이 오직 자신의 계승하고 나머지 자제들에게는 골육임에도 불구하고 손바닥 만한 땅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부모로써의 인과 자식으로써의 효의 도가 널리 선양되지 않습니다.

 

願陛下令諸侯得推恩分子弟, 以地侯之. 彼人人喜得所願, 上以徳施, 実分其國, 不削而稍弱矣.

원폐하영제후득은분자제 이지후지. 피인인희득소원 상이덕시 실분기국 불삭초약의

 

원컨대 폐하께서는 제후들에게 명령해 자제들에게 고루 봉지를 나누어주어, 그 자제들이 영지를 근거로 제후에 봉하십시오. 그러면 제후로 봉해진 자들은 모두 원하던 것을 얻게 되어 좋아할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은덕을 베푸시는 것이나 기실 그들의 나라를 나누게 되는 것이니, 그들의 영지를 삭탈하지 않아도 저들은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於是上従其計. 又説上曰:「茂陵初立, 天下豪桀並兼之家, 亂衆之民, 皆可徙茂陵, 內実京師, 外銷姦猾, 此所謂不誅而害除.上又従其計.

어시상종기계. 우설상왈 무릉초립 천하호걸병겸지가 난중지민 개하사무릉 내실경사 외촉가활 차소위불주이해재 상우종기계.

 

그러자 황제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주보언은 다시 상서를 올려 황제를 설득했다. ‘무릉(茂陵)에 새로운 현을 설치되었습니다. 그곳에 천하의 호걸, 부호 그리고 난동을 부린 백성들을 모두 무릉으로 이주시키십시오. 그러면 안으로 경사(京師)를 충실하게 만들고, 밖으로 간교한 무리를 없앨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이지 않고도 해를 제거한다고 하는 일입니다.’ 황제는 또 그의 계책을 따랐다.

 

尊立衛皇後, 及発燕王定國陰事, 蓋偃有功焉. 大臣皆畏其口, 賂遺累千金. 人或説偃曰:「太橫矣.主父曰:「臣結髪遊學四十餘年, 身不得遂, 親不以為子, 昆弟不収, 賓客棄我, 我阨日久矣. 且丈夫生不五鼎食, 死即五鼎烹耳. 吾日暮途遠, 故倒行暴施之.

존립위황후 급발연왕정국음사 개언유공언. 대신개외기구 뇌유루천금. 인혹설언왕 태횡의 주보왈 신결발유학사십여년 신불득수 친불이위자 곤제불수 빈객기아 아애일구의. 차장부생불오정식 사즉오정팽이. 오일모고원 고도행폭시지

 

주보언은 위자부를 높여 황후(皇后)로 내세우고, 연왕(燕王) 유정국(劉定國)의 음탕한 행위를 적발하는 데에 공이 있었다. 대신들 중에 주보언의 입을 두려워해 바친 뇌물이 수천 금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주보언에게 말했다. ‘전횡이 너무 지나칩니다.’ 이에 주보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이나 유세하며 천하를 떠돌아다녔지만 뜻한 바를 얻지 못했습니다. 친부모는 저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는 거두어주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살아생전 오정식(五鼎食)을 먹을 수 없다면 오정에 삶아져 죽을 뿐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날은 저물어 가고 갈 길은 멉니다. 그 때문에 순서를 뒤바꾸어 서두른 겁니다.’

 

偃盛言朔方地肥饒, 外阻河, 蒙恬城之以逐匈奴, 內省転輸戍漕, 広中國, 滅胡之本也. 上覧其説, 下公卿議, 皆言不便.

언성언삭방지비요 외조하 몽염성지이축흉노 내성전수수조 광중국 멸호지본야. 상람기설 하공경의 개언불편.

 

주보언은 또 황제에게 삭방과 흉노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주청했다. “삭방(朔方)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밖으로 하수(河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몽염은 거기에 성을 쌓아 흉노를 쫓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적으로는 운송과 국경수비, 조운(漕運) 등의 수고로움을 덜고, 또한 중국이 넓어졌습니다. 이것이 흉노를 망시키는 근본될 수 있습니다.” 천자는 그 상소문을 보고 조정에서 공경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다. 모두들 그 일 타당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公孫弘曰:「秦時常発三十萬衆築北河, 終不可就, 已而棄之.主父偃盛言其便, 上竟用主父計, 立朔方郡.

공손홍왈 진시상발삼십만중축북하 종불가취 이이기지 주보언성언기편 상경용주보계 립삭방군.

 

공손홍이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진()나라 때에 3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하(北河)에 성을 쌓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지금은 이미 버려진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보언이 다시 완강하게 삭방에 성을 쌓을 경우의 이점을 역설하니, 황제가 주보언의 계책을 받아들여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했다.

 

元朔二年, 主父言斉王內淫佚行僻, 上拝主父為斉相. 至斉, 遍召昆弟賓客, 散五百金予之, 數之曰:「始吾貧時, 昆弟不我衣食, 賓客不我內門今吾相斉, 諸君迎我或千里. 吾與諸君絶矣, 毋複入偃之門!

원삭이년 주보언제왕내음일행벽 상배주부위제상. 지제 편소곤제빈객 산오백여여지 수지왈 시오빈시 곤제불아의식 빈객불아내문 금오상제 제군영아혹천리. 오여제군절의 무복입언지문

 

원삭 2(서기전 127), 주보언이 제려왕(齊厲王) 유차경(劉次景)이 궁안에서 음란한 짓을 벌이고 행동이 편벽되다고 아뢰자, 황제는 주보언을 제나라 승상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제와 빈객들을 불러놓고 5백금을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꾸짖었다. ‘옛날 내가 곤궁할 때에 형제는 나에게 의식도 주지 않았고, 빈객들은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았소, 이제 내가 제나라의 상국이 되니, 여러분들 중에 나를 맞이하러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자도 있었소, 내 당신들과는 영원히 절교할 것이오. 다시는 우리 집에 출입하지 마시오!’

 

乃使人以王與姊姦事動王, 王以為終不得脫罪, 恐效燕王論死, 乃自殺. 有司以聞.

내사인이왕여자간사동왕 왕이위종부득탈죄 공효연왕논사 내 자살. 유사이문.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서 제려왕이 그 맏누이와 간통한 일을 가지고 그를 핍박했다. 제려왕은 죄를 사면 받지 못하고 예전의 연왕(燕王)처럼 사형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담당 관리가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했다.

 

主父始為布衣時, 嘗遊燕, 及其貴, 発燕事. 趙王恐其為國患, 欲上書言其陰事, 為偃居中, 不敢発.

주보시위포의시 상유연 조 급기귀 발연사. 조왕공기위국환 욕상서언기음사 위언거중 불감발.

 

주보언이 지난날 평민으로 불운하게 지낼 때, 연나라와 조나라 사이를 다니며 유세한 적이 있었다. 뒤에 그가 귀한 신분이 된 뒤에 연나라의 비리를 들추어내자 조나라 왕 유팽조(劉彭祖)는 주보언이 자신의 나라에도 화근이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려 주보언의 불미스런 일을 폭로하고자 했으나, 주보언이 항상 황제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及為斉相, 出関, 即使人上書, 告言主父偃受諸侯金, 以故諸侯子弟多以得封者. 及斉王自殺, 上聞大怒, 以為主父劫其王令自殺, 乃徴下吏治.

급위제상 출관 즉사인상서 고언주보언수제후금 이고제후자제다이득봉자. 급제왕자살 상문대노 이위주보겁기왕령자살 내징하리치.

 

그런데 주보언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함곡관 밖으로 나가게 되자, 즉시 사람을 시켜 황제에게 이렇게 고발했다. ‘주보언은 제후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제후의 자제로 봉후(封侯)된 자들이 많습니다.’ 이 때 황제는 제려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고 진노했고 주언보가 제려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형리에게 주보언의 죄를 심문하게 했다.

 

主父服受諸侯金, 実不劫王令自殺. 上欲勿誅, 是時公孫弘為禦史大夫, 乃言曰:「斉王自殺無後, 國除為郡, 入漢, 主父偃本首悪, 陛下不誅主父偃, 無以謝天下.乃遂族主父偃.

즈보복수제후금 실불겁왕영자살. 상욕물주 시시공손홍위어사대부 내언왈 제왕자살무후 국제위군 입한 주보언본수오 폐하불주주보언 무이사천하 내수족주보언.

 

주보언은 제후들의 뇌물을 받은 것은 인정했으나, 제려왕을 위협해 자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자백했다. 천자는 주보언을 죽이지 싶지 않았으나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이 이렇게 말했다. ‘제려왕은 자살하고 후손이 없는지라 제나라는 군()으로 편입되어 한나라에 귀속되었습니다. 주보언은 본래 악의 우두머리입니다. 폐하께서 주보언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에게 사과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주보언과 그 일족은 처형되었다.

 

 

主父方貴幸時, 賓客以千數, 及其族死, 無一人収者, 唯獨洨孔車収葬之. 天子後聞之, 以為孔車長者也.

주보방귀행시 빈객이수천 급기족사 무일인수자 유독교공거수장지. 천자후문지 이위공거장자야.

 

주보언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에 그를 찾아오는 빈객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가 멸족 당하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효현(洨縣)의 공거(孔車)만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었다. 천자는 뒤에 그 말을 전해 듣고 공거를 장자(長者)로 여겼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公孫弘行義雖脩, 然亦遇時. 漢興八十餘年矣, 上方郷文學, 招俊乂, 以広儒墨, 弘為挙首. 主父偃當路, 諸公皆譽之, 及名敗身誅, 士爭言其悪. 悲夫!

태사공왈 공손홍애의수수 연역우시. 한흥팔십여년의 상방향문학 초후예 이광유묵 홍위거수. 주보언당로 제공개예지 급명패신주 사쟁언기악. 비부!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손홍(公孫弘)은 옳은 일을 많이 했지만 시기도 잘 만났다. 한나라가 흥기한 지 80여 년이 지나 황제께서 바야흐로 문학을 숭상해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유학(儒學)과 묵학(墨學)을 선양할 무렵에 공손홍은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보언(主父偃)이 요직에 있을 때, 사람들은 모두들 사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실추되어 사형을 당하자 모두 다투어 그의 악행을 비난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후대의 보충>

 

太皇太後詔大司徒大司空

태황태후조대사주대사공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대사도(大司徒), 대사공(大司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蓋聞治國之道, 富民為始富民之要, 在於節倹.

개문치국지도 부민위시 부민지요 재어절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요체는 절약하고 검소하는 데에 달려있다고 했다.

 

孝経曰安上治民, 莫善於禮. , 與奢也寧倹.

효경왈 안상치민 막선어예”. “예여사야녕검

 

효경(孝經)에는 윗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도로 예()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하였고,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편이 낫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昔者管仲相斉桓, 霸諸侯, 有九合一匡之功, 而仲尼謂之不知禮, 以其奢泰侈擬於君故也. 夏禹卑宮室, 悪衣服, 後聖不循. 由此言之, 治之盛也, 徳優矣, 莫高於倹.

석자관중상제환 패제후 유구합일광지공 이중니위지부지례 이기사태치의어군고야. 하우비궁실 악의복 후성불순. 유차언지 치지성야 덕우의 막고어검.

 

옛날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제 환공을 보필해 제후의 패자가 되게 했으며,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규합해 천하를 바로잡은 공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孔子)께서는 관중은 예를 모른다고 하셨다. 그것은 관중의 호사스러움이 천자에게 비길 정도로 과도했기 때문이다. ()나라 우()임금은 누추한 궁실에 살면서 남루한 의복을 입고도 후세의 성인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이것을 통해 살펴본다면, 훌륭하게 다스렸다는 것은 덕망 있는 정사를 펼쳤다는 것이다. 덕은 검소한 것이 으뜸으로 삼는다.

 

 

 

 

倹化俗民, 則尊卑之序得, 而骨肉之恩親, 爭訟之原息. 斯乃家給人足, 刑錯之本也歟 可不務哉! 夫三公者, 百寮之率, 萬民之表也. 未有樹直表而得曲影者也. 孔子不雲乎, 子率而正, 孰敢不正. 挙善而教不能則勧.

검화속민 즉존비지서득 이골육지은친 쟁송지원식. 사내가합인족 형착지본야여 가불무재. 부상공자 백료지솔 만민지표야. 미유수직표이득곡영자야. 공자불운호 자솔이정 숙감부정’. ‘거선이교불능즉권

 

검소한 것으로 풍속과 백성을 교화시킨다면, 신분의 질서가 제자리를 찾게 되고 골육 간에는 서로 아끼게 되어 서로 다투는 것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형벌을 쓰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삼공(三公)은 모든 관료들의 통솔자요, 만민의 본보기이다. 이제껏 곧은 표지를 세워놓고 굽은 그림자를 얻은 자는 없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대가 바르게 되다면, 누구라서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한 이를 들어서 쓰고 선으로 교화한다면 권력을 쓸 일이 없다.’

 

維漢興以來, 股肱宰臣身行倹約, 軽財重義, 較然著明, 未有若故丞相平津侯公孫弘者也. 位在丞相而為布被, 脫粟之飯, 不過一肉. 故人所善賓客皆分奉祿以給之, 無有所餘. 誠內自克約而外従制.

유한흥이래 고굉재신신행검약 경재중의 교연저명 미유약고승상평진후공손홍자야. 위재승상이위포피 탈속지반 불과일육. 고인소선빈객개분봉록이급지 무유소여. 성내자극약이외종제.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수족과 같은 신하들과 재상들은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재물을 경시하고 의를 중시했지만, 그중에서도 죽은 승상 평진후 공손홍처럼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승상의 지위이면서도 베옷에 거친 밥에 고기반찬은 한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다. 평진후는 친구를 비롯해 사이좋은 빈객들에게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위해 집에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검약할 줄 알았고, 밖으로는 제도를 따랐다.

 

汲黯詰之, 乃聞於朝, 此可謂減於制度而可施行者也.

급암힐지 내문어조 차가위감어제도이가시행자야.

급암이 그의 위선적인 행위를 힐책함으로써 그의 사정이 마침내 조정에 알려졌다. 이는 그의 행위가 정해진 제도의 본뜻을 손상시킨 면도 있지만 시행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徳優則行, 否則止, 與內奢泰而外為詭服以釣虛譽者殊科. 以病乞骸骨, 孝武皇帝即制曰賞有功, 褒有徳, 善善悪悪, 君宜知之. 其省思慮, 存精神, 輔以醫薬.

덕우즉행 부즉지 여내사태이외위위복이조허예자수과. 이병걸해골 효무황제즉제왈 상유공 포유덕 선선악악 군의지지. 기성사려 존정신 보이의약

덕이란 넉넉하면 밖으로 드러나 행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그치는 것이다. 그것은 속으로는 사치하면서도 겉으로는 허위의 옷을 걸치고 헛된 명예를 낚시질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효무제(孝武帝)께서는 공이 있는 자를 상 주고 덕이 있는 자를 표창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그대가 잘 알 것이오. 근심을 덜고 정신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돌보라.’고 하셨다.

 

賜告治病, 牛酒雑帛. 居數月, 有瘳, 視事.

사고치병 우주잡백, 거수월 유추 시사,

 

그러고는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쇠고기와 술, 그리고 비단을 하사하셨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병이 치유되어 다시 승상의 업무를 볼 수 있었다.

 

至元狩二年, 竟以善終於相位.

지원수이년 경이선종어상위.

 

원수(元狩) 2(서기전 121), 그는 마침내 승상으로 재직 중에 생을 마감했다.

 

夫知臣莫若君, 此其效也. 弘子度嗣爵, 後為山陽太守, 坐法失侯. 夫表徳章義, 所以率俗厲化, 聖王之制, 不易之道也. 其賜弘後子孫之次當為後者爵関內侯, 食邑三百戸, 徴詣公車, 上名尚書, 朕親臨拝焉.

부지신막약군 차기효야. 홍자도사작 후위산양태수 좌법실후, 부표덕장의 소이솔속여화 성왕지제 불역지도야. 기사홍후자손지차당위후자작관내후 삭웁삼천호 징지공거 상명상서 짐친임배언

 

무릇 황제만큼 자신의 신하를 잘 아는 자는 없다고 했는데, 무제와 공손홍의 사이가 바로 그 증거이다. 공손홍의 작위는 아들 공손도가 물려받았고, 후에 산양의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법을 위반하여 제후의 작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덕을 표창하고 의를 드러내는 것은 풍속을 인도해 교화에 힘쓰는 것은 성왕(聖王)의 법도이다. 공손홍의 후손으로 서열상으로 그의 뒤를 이어야 할 자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식읍 3백호를 하사하노라. 불러서 공거(公車)에 나가게 해 상서(尙書)에 이름을 올리도록 하라. 내가 친히 나아가 임명하리라!

 

<반고의 논평>

 

 

班固稱曰公孫弘蔔式児寛 皆以鴻漸之翼困於燕雀, 遠跡羊豕之閒, 非遇其時, 焉能致此位乎 是時漢興六十餘載, 海內乂安, 府庫充実.

반고칭왈 공손홍 복식 예관 개이홍점지익곤어연작 원적양시지간 비우기시 언능치차위호 시시한흥육십여재 해내예안 부고충실.

반고(班固)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공손홍(公孫弘)과 복식(卜式), 예관(兒寬)은 모두 큰 기러기의 날개를 지니고서도 제비나 참새와 같은 무리에게 곤욕을 당하고, 멀리 양과 돼지를 취급 받았다.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그러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당시는 한나라가 흥기한 지 60여 년, 온 천하는 안정되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而四夷未賓, 制度多闕, 上方欲用文武, 求之如弗及.

이사이미빈 제도다궐 상방욕용문무 구지여불급.

 

사이(四夷)가 손으로 찾아오진 않았고 제도에는 미비한 점이 많았다. 황제께서는 문(), ()를 지닌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애타게 찾았고 인재를 놓칠까 매우 염려하셨다.

 

始以蒲輪迎枚生, 見主父而歎息. 群臣慕嚮, 異人並出.

시이포수영매생 현주보이탄식. 군신모향 이인병출.

그리하여 부들로 바퀴를 두른 수레를 보내 매승(枚乘)을 맞아들이고, 주보언을 보고는 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 이에 많은 인재들이 흠모하여 다투어 몰려왔는데, 특출한 자들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蔔式試於芻牧, 弘羊擢於賈豎, 衛青奮於奴僕, 日磾出於降虜, 斯亦曩時版築飯牛之朋矣. 漢之得人, 於茲為盛.

복식시어추목 홍양탁어매수 위청분어노복 일제어항노 사역양시판축반우지붕우. 한지득인 어자위성.

 

복식은 양을 치다가 등용되었고, 상홍양(桑弘羊)은 장사치로서 발탁되었다. 위청(衛靑)은 노복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고, 김일제(金日磾)는 투항한 흉노 속에서 나왔다. 이것은 옛날에 판축(版築)일을 하던 부열(傅說)이나, 소에게 꼴을 먹이던 영척(寧戚)과 같은 인재를 등용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한나라가 인재를 얻음이 이때에 이르러 가장 성대했다.

 

儒雅則公孫弘董仲舒児寛, 篤行則石建石慶, 質直則汲黯蔔式. 推賢則韓安國鄭當時, 定令則趙禹張湯, 文章則司馬遷相如, 滑稽則東方朔枚皐, 應対則厳助朱買臣, 暦數則唐都落下閎, 協律則李延年, 運籌則桑弘羊, 奉使則張騫蘇武, 將帥則衛青霍去病, 受遺則霍光金日磾. 其餘不可勝紀.

유아즉공손홍 동중서 예고나 독행즉석건 석경 질직즉급암 복식 추현즉한안국 정당시 정영즉조우 장탕 문장즉사마천 상여 골계즉동방삭 매고 응대즉엄조 주매신 역수즉당도 낙하굉 협률즉이언년 운주즉상홍양 봉사즉장건 소식 장수즉위청 곽거병 수유즉곽광 김일제. 기여불가승기.

 

유학에 뛰어난 인사로는 공손홍, 동중서, 예관이 있었고, 행실이 돈실하고 후덕한 인물로는 석건(石建), 석경(石慶)이 있었으며, 질박하고 정직한 인사로는 급암, 복식이 있었다. 현인을 잘 천거한 인사로 한안국(韓安國), 정당시(鄭當時)가 있었으며, 법령을 제정하는 데에는 조우(趙禹), 장탕(張湯)이 있었다. 문장에 특출한 인물로는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었으며, 골계(滑稽)에 뛰어난 사람으로는 동방삭(東方朔), 매고(枚皐)가 있었다. 응대(應對)에는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이 있었고, 역법과 천문에는 당도(唐都), 낙하굉(落下閎)이 있었으며, 음악과 음률에는 이연년(李延年)이 있었고, 산수와 회계에는 상홍양(桑弘羊)이 있었다. 외국에 간 사신으로는 장건(張騫), 소무(蘇武)가 있었고, 장수로는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이 있었으며,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천자를 보필하는 데에는 곽광(霍光), 김일제(金日磾)가 있었다.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是以興造功業, 制度遺文, 後世莫及. 孝宣承統, 纂脩洪業, 亦講論六蓺, 招選茂異, 而蕭望之梁丘賀夏侯勝韋玄成厳彭祖尹更始以儒術進, 劉向王褒以文章顕. 將相則張安世趙充國魏相邴吉於定國杜延年, 治民則黃霸王成龔遂鄭弘邵信臣韓延壽尹翁帰趙広漢之屬, 皆有功跡見述於後. 累其名臣, 亦其次也.

 

시이흥조공업 제도유문 후세막급. 효선승통 찬수홍업 역강론육예 초선무이 이소망지 양구하 하우승 위현성 엄팽조 윤경시이유술진 유향 왕포이문장현. 장상즉당안세 조충국 위상 병길 어정국 두언년 치민즉황패 왕성 공수 정홍 소신신 한연수 윤옹귀 조광한지속 개유공적견술어후, 누기명신 역기차야.

 

이들로 공업(功業)을 세우고 여러 가지 제도와 문물을 남기니, 후세에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선제(宣帝)께서는 적통을 계승하여 대업을 새로이 하고 육예(六藝)를 강론하고, 뛰어난 인재를 불러 모았다. 그리하여 소망지(蕭望之), 양구하(梁丘賀), 하후승(夏侯勝), 위현성(韋玄成), 엄팽조(嚴彭祖), 윤경시(尹更始) 등은 유학으로 등용되었고, 유향(劉向), 왕포(王褒)는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장상(將相)에는 장안세(張安世),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邴吉), 우정국(于定國), 두연년(杜延年)이 있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황패(黃霸), 왕성(王成), 공수(龔遂), 정홍(鄭弘), 소신신(邵信臣), 한연수(韓延壽), 윤옹귀(尹翁歸), 조광한(趙廣漢) 등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공적이 모두 후세에 칭송되었다. 명신(名臣)이 많기로는 이 시대가 무제(武帝) 때의 다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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