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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東越列傳



列傳-東越列傳


東越列傳

 

閩越王無諸及越東海王揺者, 其先皆越王句踐之後也, 姓騶氏. 秦已並天下, 皆廃為君長, 以其地為閩中郡.

민월왕무제급월동해왕요자 기선개월왕구천지후야 성추씨. 진이뱡천하 개폐위군장 이기지위민중군.


민월왕(閩越王) 무제(無諸)와 월()나라의 동해왕(東海王) ()는 모두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손으로 성은 추씨(騶氏)이다. ()나라가 천하를 합병한 뒤에 모두 왕에서 폐위되어 군장(郡長)으로 삼았으며 그들이 다스린 지역은 민중군(閩中郡)이 되었다.

 

及諸侯畔秦, 無諸揺率越帰鄱陽令呉芮, 所謂鄱君者也, 従諸侯滅秦. 當是之時, 項籍主命, 弗王, 以故不附楚.

급제후반진 무제 요솔월귀파양영오예 소위파군자야 종제후멸진. 당시지시 항적주명 불왈 이고불부초.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무제와 요는 월나라 백성들이 거느리고 파양현령(鄱陽縣令) 오예(吳芮: ?~서기전 202. 장사왕)에게 귀순했다. 오예는 파군(鄱君)으로 불렸던 자로 제후들을 따라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참여했다. 당시 항적(項籍: 항우)이 서초패왕이 되어 제후들을 호령했는데, 무제와 요를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초()나라에 귀순하지 않았다.

 

漢撃項籍, 無諸揺率越人佐漢. 漢五年, 複立無諸為閩越王, 王閩中故地, 都東冶.

한격항적 무제 요솔월인좌한, 한오년 복립무제위민월왕 왕민중고지 도동야.

 

한왕(漢王: 유방, 한고조)가 항적을 공격할 때 무제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한왕을 도왔다. 한나라 5(서기전 202), 무제를 다시 민월왕으로 삼고, 민중(閩中)의 옛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왕도를 동야(東冶: 지금의 복주시福州市)에 두게 했다.

 

孝恵三年, 挙高帝時越功, 曰閩君揺功多, 其民便附, 乃立揺為東海王, 都東甌, 世俗號為東甌王.

효혜삼년 거고제시월공 왈민군요공다 기민경부 내립요위동해왕 도동구 세속호위동구왕.

 

효혜제(孝惠帝) 3(서기전 193), 고조 때에 월나라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던 공을 거론하여 민군(閩君) 요가 공로가 많고, 월나라 백성들이 요를 잘 따른다고 하여 요를 동해왕으로 삼고, 동구(東甌)에 왕도로 정하게 했다. 세속에서는 그를 '동구왕(東甌王)'이라고 일컬었다.

 

後數世, 至孝景三年, 呉王濞反, 欲従閩越, 閩越未肯行, 獨東甌従呉. 及呉破, 東甌受漢購, 殺呉王丹徒, 以故皆得不誅, 帰國.

후수세 지효경삼년 오왕비반 욕종민월 민월미긍행 독동구종오. 급오파 동수수한구 살오왕단도 이소개득불주 귀국.

 

그 뒤 몇 세대가 지난 효경제(孝景帝) 3년 때에 오왕(吳王) 유비(劉濞: 고조의 조카이며 문제의 종형)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반란에 동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민월은 동조하지 않았고, 단지 동구만이 오왕 유비의 반란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나라의 반란이 평정될 무렵에 동구는 한나라에게 금전을 받고 매수되어 단도(丹徒)에서 오왕 유비를 살해했다. 이 때문에 동구는 반란에 참여한 죄에서 벗어나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呉王子子駒亡走閩越, 怨東甌殺其父, 常勧閩越撃東甌.

오왕자자구망주민월 원동구살기부 상권민월격동구.

 

그런데 오왕의 아들 자구(子駒)가 민월로 도망가서 동구가 자기 부친을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자주 민월에게 동구를 치라고 종용했다.

 

至建元三年, 閩越発兵囲東甌. 東甌食盡, , 且降, 乃使人告急天子.

지건원삼년 민월발병위동구. 동구식빈 곤 차항 내사인고급천자.

 

무제 건원(建元) 3(서기전 138), 마침내 민월은 군대를 출동시켜 동구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동구는 양식이 바닥나는 곤경에 처하고 장차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할 상태에서 바로 한나라 무제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天子問太尉田蚡, 蚡対曰:「越人相攻撃, 固其常, 又數反覆, 不足以煩中國往救也. 自秦時棄弗屬.

천자문태위전분 분대왈 초인상공격 고기상 우수반복 부족이번중국왕구야. 자진시기불속

 

무제는 당시 태위(太尉)였던 전분(田蚡)에게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전분이 대답했다. ‘월나라 사람끼리 서로 공격하는 것은 다반사요 또 자주 반복됩니다. 그러니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구원할 가치가 없습니다. ()나라 때부터 그들을 내버려두고 예속시키지 않았습니다.’

 

於是中大夫荘助詰蚡曰:「特患力弗能救, 徳弗能覆誠能, 何故棄之 且秦挙鹹陽而棄之, 何乃越也! 今小國以窮困來告急天子, 天子弗振, 彼當安所告愬 又何以子萬國乎?」

어시중대부장조힐분왈 특훈력불능구 덕불능복 성능 하고기지? 차진거함양이기지 하냐월야! 금소국이궁곤래고급천자 천자불진 피당안소고소? 우하이자만국호?’

 

이에 중대부(中大夫) 장조(莊助: 엄조嚴助)가 전분을 이렇게 힐책했다. ‘단지 힘이 부족하여 그들을 구제할 수 없고, 은덕이 깊지 않아서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참으로 능력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내버려둡니까? 또한 진나라는 다급해지자 자신들의 수도였던 함양(咸陽)까지도 포기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월나라만을 내버려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소국이 곤경에 처해 황제에게 다급한 사정을 호소하는데도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장차 어디에서 구원을 요청할 것이며, 또 황제께서는 어떻게 만국의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살필 수 있습니까?’

 

上曰:「太尉未足與計. 吾初即位, 不欲出虎符発兵郡國.乃遣荘助以節発兵會稽.

상왈 태위미족여계. 오초즉위 불욕출호부발병군국 내견장조이절발병회계.

 

황제가 말했다. ‘태위의 주장은 더불어 토론하기에 부족하오. 짐은 금방 즉위했기 때문에 호부(虎符: 병부)를 내어 군국(郡國)에서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그리하여 바로 장조를 파견하여 부절을 가지고 회계(會稽)에서 군대를 출정토록 했다.

 

會稽太守欲距不為発兵, 助乃斬一司馬, 諭意指, 遂発兵浮海救東甌. 未至, 閩越引兵而去. 東甌請挙國徙中國, 乃悉挙衆來, 処江淮之閒.

회계태수욕거불위발병 조내참일사마 유의지 수발병부해구동구. 미지 민월인병이거. 동구청거국사중국 내실거중래 처강회지간.

 

그러나 회계 태수는 항명하고 장조에게 군대를 주어 출정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장조는 결국 사마(司馬) 한 사람을 베고 황제의 결연한 뜻을 밝히자 회계태수는 비로소 군대를 출정시켜 바다를 건너가 동구를 구원하러 떠났다. 한나라 군대가 미처 동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민월은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동구는 나라 안의 백성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하기를 청구했고, 이에 모든 백성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였는데, 강회(江淮) 일대에서 거주했다.

 

至建元六年, 閩越撃南越. 南越守天子約, 不敢擅発兵撃而以聞. 上遣大行王恢出予章, 大農韓安國出會稽, 皆為將軍. 兵未踰嶺, 閩越王郢発兵距険.

지건원육년 민월격남월. 남월수천자약 불감찬발병격이이간. 상견대행왕푀물여장 대농한안국출회계 개위장군. 병미유령 민월왕영발병거험.

 

무제 건원(建元) 6(서기전 135), 민월이 남월(南越)을 공격했다. 남월은 황제와의 약속을 준수하여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이 사건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대행(大行) 왕회(王恢)를 파견하여 예장(豫章)으로 진격하게 하고, 대농(大農) 한안국(韓安國)으로 하여금 회계에서 출격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모두 장군으로 삼았다. 그들의 군대가 양산령(陽山嶺)을 넘기도 전에 민월왕 영()은 군대를 보내 요지를 지키며 한나라 군대에 대항하려 했다.

 

其弟餘善乃與相宗族謀曰:「王以擅発兵撃南越, 不請, 故天子兵來誅. 今漢兵衆彊, 今即幸勝之, 後來益多, 終滅國而止. 今殺王以謝天子. 天子聴, 罷兵, 固一國完不聴, 乃力戦不勝, 即亡入海.

기제여선내여상 종족모왈 왕이찬발병격남월 불청 고천자병래주. 금한병중강 금즉행승지 후애익다 종멸국이지. 금살왕이사천자. 천자청 파병 고일국완 불청 내역전 불승 즉망입해

 

이에 영의 아우 여선(餘善)이 동월의 재상, 종족(宗族)들과 의논하면서 이렇게 제의했다. ‘왕이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남월을 공격하면서 황제에게 주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제의 군대가 와서 주벌하려고 한다. 지금 한나라의 군대는 많고도 막강하다. 만약에 우리가 현재 잠시 한나라 군대에게 승리하더라도 후일에 반드시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것이니, 이러다가 마침내 우리나라는 소멸하여 없어지고 말 것이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들이 왕을 죽여서 황제에게 사죄하고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전쟁을 멈추면 다행히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황제가 우리들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그때 가서는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바다로 들어가자!’

 

皆曰. 即鏦殺王, 使使奉其頭致大行. 大行曰:「所為來者誅王. 今王頭至, 謝罪, 不戦而耘, 利莫大焉.乃以便宜案兵告大農軍, 而使使奉王頭馳報天子.

개왈  즉총살왕 사사봉기두치대행. 대행왈 소위래자주왕. 금왕두지 사죄 부전이운 이막대언 내이편의안병고대농군 이사사봉왕두치보천자.

 

모두가 좋다!’라고 찬성했다. 이에 바로 철창으로 왕을 찔려죽이고 사자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대행 왕회에게 보냈다. 그러자 왕회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대가 이곳까지 온 것은 동월왕을 주살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왕의 머리를 보내고 사죄하니, 전쟁하지 않아도 화근은 제거되었다. 이보다 더 큰 성과는 없다.’ 그리고 곧 신속하게 군사행동을 멈추게 하고, 더불어 이 사정을 대농군(大農軍)에게 통보했다. 또한 사자에게 민월왕의 머리를 가지고 장안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詔罷両將兵, :「郢等首悪, 獨無諸孫繇君醜不與謀焉.乃使郎中將立醜為越繇王, 奉閩越先祭祀.

조파양장군 왈 영등수악 독무제손요군추불여모언 내사랑중장립추위월요왕 봉민월선제사.

 

황제는 조서를 내려 두 장군에게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동월왕 영 등이 으뜸가는 죄인이다. 단지 무제(無諸)의 손자 요군(繇君) ()만은 이 사건의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낭중장(郎中將)으로 하여금 추를 월나라의 요왕(繇王)으로 책립하여 민월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餘善已殺郢, 威行於國, 國民多屬, 竊自立為王. 繇王不能矯其衆持正. 天子聞之, 為餘善不足複興師, :「餘善數與郢謀亂, 而後首誅郢, 師得不勞.因立餘善為東越王, 與繇王並処.

여선이살영 위행어국 국민다속 절자립위왕. 요왕불능교기중지정. 천자문지 위여선부족복흥사 왈 여선수여영모안 이후수주영 사득불노; 인립여선위동월왕 여요왕병처.

 

여선이 영을 죽인 후, 그의 위엄은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서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귀속되었다. 여선은 암중으로 자립하여 왕이 되려고 했다. 요왕은 여선의 무리들을 바로 잡아 이끌고 나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이 사실을 들은 후에 여선 때문에 다시 군사를 동원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이렇게 말했다. ‘여선은 누차 영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나 뒤에 가장 먼저 영을 죽였기 때문에 한나라 군대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여선을 동월왕(東越王)으로 책립하여 요왕과 더불어 군림하게 했다.

 

至元鼎五年, 南越反, 東越王餘善上書, 請以卒八千人従樓船將軍撃呂嘉等. 兵至掲揚, 以海風波為解, 不行, 持両端, 陰使南越. 及漢破番禺, 不至.

지원정오년 남월반 동월왕여선상서 청이졸팔천인종루선장군격여가등. 병지게양 이해풍파위해 불행 지양단 음사남월. 급한파번우.

 

무제 원정(元鼎) 5(서기전 112), 남월의 승상인 여가(呂嘉)가 반란을 일으켜 남월왕 조흥(趙興)과 왕 태후(王太后)와 한()나라 사신을 죽였다. 이에 동월왕 여선은 황제에게 상서를 올리고 병졸 8천명을 이끌고 누선장군(樓船將軍)을 따라 여가를 공격하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막상 누선장군의 군대가 게양(揭揚)에 도착하자 , 여선은 바다에 풍랑이 심하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여선은 양측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서 또 암중으로 남월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한나라 군대가 반우성(番禺城)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까지 기다리고 가지 않았다.

 

是時樓船將軍楊僕使使上書, 願便引兵撃東越. 上曰士卒勞倦, 不許, 罷兵, 令諸校屯予章梅領待命.

시시루선장군양복사사상서 원편인뱡격동월. 상왈사졸노권 불허 파병 영제교둔예장매령대명.

 

이때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동월을 공격할 수 있도록 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군졸들이 지쳐 있다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일체의 군사행동을 그만두고 여러 교위(校尉)들에게 예장(豫章)의 매령(梅嶺)에 주둔하면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元鼎六年秋, 餘善聞樓船請誅之, 漢兵臨境, 且往, 乃遂反, 発兵距漢道. 號將軍騶力等為呑漢將軍, 入白沙武林梅嶺, 殺漢三校尉.

원정육년추 여선문루선정주지 한병임경 차왕 내수반 발병거한도. 호장군추력등위 탄한장군 입백사 무림 매령 살한삼교위.

무제 원정 6(서기전 111) 가을, 여선은 누선장군이 자신을 토벌할 것을 청하고, 또 한나라의 군대가 이미 동월의 변경까지 진입하여 장차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여선은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군대를 보내 한나라 군대가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을 차단하도록 했다. 그는 장군 추력(騶力) 등을 탄한장군(呑漢將軍)’이란 봉호를 내리고, 대군을 이끌고 백사(白沙), 무림(武林)과 매령으로 진격하도록 하여 한나라의 교위 세 사람을 죽였다.

 

是時漢使大農張成故山州侯歯將屯, 弗敢撃, 卻就便処, 皆坐畏懦誅.

시시한사대농장성 고산주후치장둔 불감격 각취편처 개좌외유주.

 

이때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농령(大農令) 장성(張成)과 원래 산주후(山州侯)였던 유치(劉齒)를 주둔하는 곳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동월의 군대를 공격하지 못하고 도리어 안전한 곳으로 퇴각했다. 뒤에 이들은 모두 적이 두려워 피했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餘善刻武帝璽自立, 詐其民, 為妄言. 天子遣橫海將軍韓説出句章, 浮海従東方往樓船將軍楊僕出武林中尉王溫舒出梅嶺越侯為戈船下瀬將軍, 出若邪白沙.

여선각 무제 새자립 사기민 위망언. 천자견횡해장군한열출구장 부해종동방왕 루선장군양복출무림 중위왕온서출매령 월후위벌선 하뢰장군 출약야 백사.

여선이 무제(武帝)’라고 새긴 옥새를 만들어서 자립하고, 자신의 백성들을 속이고 망언을 했다. 이에 황제는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을 파견하여 구장(句章)으로 출발하여 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출격하도록 하고, 누선장군 양복에게 무림에서 출격하게 했다. 또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을 매령에서 출격하도록 하고, 한나라 조정에 투항한 월후(越侯) 두 사람을 각기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뢰장군(下瀨將軍)으로 임명하여 약야(若邪)와 백사(白沙)에서 출격하게 하였다.

 

元封元年冬, 鹹入東越. 東越素発兵距険, 使徇北將軍守武林, 敗樓船軍數校尉, 殺長吏. 樓船將軍率銭唐轅終古斬徇北將軍, 為禦児侯. 自兵未往.

원봉원년동 함입동월. 동월소발병거험 사순북장군수무림 패루선군수교위 살장리. 루선장군솔전당원종고참순북장군 위어아후. 자병미왕.

 

원봉(元封) 원년(서기전 110) 겨울, 이들을 일제히 동월로 진격하도록 했다. 동월은 줄곧 군대를 요새로 보내 방어시키고, 순북장군(徇北將軍)을 파견하여 무림(武林)을 지키게 했다. 동월의 군대는 누선장군의 교위 몇 명을 물리치고 장리(長吏)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누선장군의 부하 중에 전당(錢塘) 출신의 원종고(轅終古)이 마침내 순북장군을 죽이고, 그 공으로 어아후(禦兒侯)로 봉해졌다. 이 때는 한나라의 군대가 무림에 진격하기 전이었다.

 

故越衍侯呉陽前在漢, 漢使帰諭餘善, 餘善弗聴. 及橫海將軍先至, 越衍侯呉陽以其邑七百人反, 攻越軍於漢陽. 従建成侯敖, 與其率, 従繇王居股謀曰

고월연후오양전재한 한사귀유여선 여선불청. 급횡해장군선지 월연후오양이기읍칠백인반 공월군어한양, 종건성후오 여기솔 종요왕거고모왈

 

옛날 월나라의 연후(衍侯)였던 오양(吳陽)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한나라에 있었다. 이 때문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그에게 동월로 돌아가서 여선에게 항복하도록 권유토록 했다. 그러나 여선은 그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오양은 횡해장군 한열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친히 자신의 고을 중에서 7백 명을 거느리고 동월에게 내란을 일으키고, 한양(漢陽)에서 동월을 공격했다. 그는 건성후(建成侯) ()와 그 부하들과 더불어 요왕 거고(居股)을 찾아가서 이렇게 모의했다.

 

餘善首悪, 劫守吾屬. 今漢兵至, 衆彊, 計殺餘善, 自帰諸將, 儻幸得脫.乃遂倶殺餘善, 以其衆降橫海將軍,

여선수악 겁수오속. 금한병지 중강 계살여선 자귀제장 당행득탈 내수구살여선 이기중항횡해장군.

 

여선은 반역의 우두머리로 여태까지 우리들을 핍박했다. 지금 한나라 군대가 이미 도착했는데, 병사의 수가 많고 막강합니다. 우리들은 여선을 살해하고 각기 한나라의 장군들에게 투항한다면 혹여 요행히 죄에서 면할 것입니다.’ 이에 모두 합심하여 여선을 죽이고는 자신들의 군사를 이끌고 횡해장군에게 투항했다.

 

 

故封繇王居股為東成侯, 萬戸封建成侯敖為開陵侯封越衍侯呉陽為北石侯封橫海將軍説為案道侯封橫海校尉福為繚嫈侯. 福者, 成陽共王子, 故為海常侯, 坐法失侯. 舊従軍無功, 以宗室故侯.

고봉요왕거고위동성루 만호 건양성후오위개릉후 봉월연후오양위북석후 봉횡해장군설위안도후 봉횡래교위복위요앵후. 복자 성양공왕자 고위해상후 좌법실후. 구종군무공 이종실고후.

 

이 때문에 요왕 거고는 동성후(東成侯)에 봉해져 식읍 만호(萬戶)를 받았고, 건성후 오는 개릉후(開陵侯), 월나라의 연후 오양은 북석후(北石侯), 횡해장군 한열은 안도후(按道侯), 횡해 교위 유복(劉福)은 요앵후(繚嫈侯)로 봉해졌다. 유복은 성양(成陽) 공왕(共王) 유희(劉喜)의 아들로, 원래 해상후(海常侯)에 봉해졌는데, 뒤에 범법행위를 저질러서 작위를 잃어버렸다. 그는 과거에 종군하여 전공이 세우지 못했으나, 종실(宗室)의 자제였기 때문에 다시 작위를 얻었다.

 

諸將皆無成功, 莫封. 東越將多軍, 漢兵至, 棄其軍降, 封為無錫侯.

제장개무성공 막봉. 동성장다군 한병지 기기군항 봉위무석후.

 

그 나머지 장군들은 세운 전공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작위를 받지 못했다. 동월의 장군이었던 다군(多軍)은 한나라의 군대가 진격해오자 자기의 군대를 버리고 투항했다. 이 때문에 다군은 무석후(無錫侯)로 봉해졌다.

 

 

於是天子曰東越狹多阻, 閩越悍, 數反覆, 詔軍吏皆將其民徙処江淮閒. 東越地遂虛.

어시천자왈동월협다조 민월한 수반복 조군리개장기민사처강회간. 동월지수허.

 

이 뒤에 황제는 말하길 동월은 좁고 험지가 많고, 민월은 흉포하여 자주 반복하여 반역을 일으킨다.’고 하며, 군리(軍吏)에게 조서를 내려 현지 백성들을 모두 강회(江淮) 일대로 이주시켰다. 고로 동월의 지역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越雖蠻夷, 其先豈嘗有大功徳於民哉, 何其久也! 歴數代常為君王, 句踐一稱伯. 然餘善至大逆, 滅國遷衆.

태사공왈 월수만이 기선이상유대공덕어민재 하기구야! 역수대상위군왕 구천일칭백. 연여선지대역 멸국천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비록 만이(蠻夷)였지만 그의 선조는 일찍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공덕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리도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수대에 걸쳐 항상 군왕(君王)으로 군림했고, 그 중에 구천(句踐)은 한 차례 패자(覇者)로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선(余善) 대에 이르러 대역무도한 일을 저질러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이주 당하고 말았다.

 

其先苗裔繇王居股等猶尚封為萬戸侯, 由此知越世世為公侯矣. 蓋禹之餘烈也.

기선묘예요왕거고등유상봉위반호후 유차지월세세위공후의. 개우지여열야.

 

하지만 그들 선조의 후손인 요왕(繇王) 거고(居股) 등은 아직도 만호후로 봉해졌다. 이를 살펴보면 월나라가 대대로 공후(公侯)가 될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우()임금이 남긴 공적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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