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李將軍列傳
<이광>
李將軍広者, 隴西成紀人也. 其先曰李信, 秦時為將, 逐得燕太子丹者也. 故槐里, 徙成紀.
이장군광자 롱서성기인야. 기선왈이신 진시위장 축득연태자단자야. 고괴리 사성기.
이광(李廣) 장군은 농서군(隴西郡) 성기현(成紀縣)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이신(李信)인데, 진(秦)나라 때의 장군으로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을 추격하여 사로잡은 인물이었다. 그의 고향은 본디 괴리현(槐里縣)이었으나, 성기현으로 옮겼다.
広家世世受射. 孝文帝十四年, 匈奴大入蕭関, 而広以良家子3)従軍撃胡, 用善騎射, 殺首虜多, 為漢中郎.
광가세세수사. 효문제십사년 흉노대입소관 이광이양가자종군격호. 용선지사 살수노다위한중랑.
이광(李廣)의 가문은 대대로 궁술을 익혔다. 한나라 문제(文帝) 14년에 흉노족(匈奴族)이 대거 소관(蕭關)으로 침입할 때에 이광은 양가집의 자제 신분으로서, 종군하여 흉노에 맞섰다. 그는 기마술과 궁술에 정통하여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사로잡은 자가 많았기 때문에 한(漢)나라 조정에서 중랑(中郎)이 되었다.
広従弟李蔡亦為郎, 皆為武騎常侍, 秩八百石. 嘗従行, 有所衝陥折関及格猛獣, 而文帝曰:「惜乎, 子不遇時! 如令子當高帝時, 萬戸侯豈足道哉!」
광종제이채역위랑 개위무기상시 질팔백석. 상종행 유소충함석관급격맬수 이문제왈 ‘석호 자불우시 여령자당고제시 만호후이족도재’
이광의 사촌 동생인 이채(李蔡) 또한 중랑이 되었고, 그들은 모두 무기상시(武騎常侍)에 임명되어 8백석의 봉록을 받게 되었다. 이광은 일찍이 문제(文帝)가 행차할 때에 수행하였는데, 적진 깊숙이 들어가 함락시키고, 사나운 맹수와 맞섰는데 문제가 말하길 ‘애석하구나, 당신이 때를 잘못 만났구나! 만약 당신이 고조(高祖) 때에 활약했다면 족히 만호후(萬戶侯)로 봉해졌을 것이다!’
及孝景初立, 広為隴西都尉, 徙為騎郎將. 呉楚軍時, 広為驍騎都尉, 従太尉亜夫撃呉楚軍, 取旗, 顕功名昌邑下.
급효경초립 광위롱서도위 사위기랑장. 오초군시 광위효기고위 종태위아부격오초군 취기 현공명창읍하.
경제(景帝)가 즉위한 초기에 이광은 농서도위(隴西都尉)가 되었고, 뒤에 기랑장(騎郎將)으로 전임되었다. 오(吳), 초(楚)나라 등 7국의 반란을 일으킬 때에 이광은 효기도위(驍騎都尉)가 되어 태위(太尉) 주아부(周亞夫)를 수행하여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창읍성(昌邑城) 아래에서는 적군의 군기를 탈취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서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以梁王授広將軍印, 還, 賞不行. 徙為上谷太守, 匈奴日以合戦.
이양왕수광장군인 환 상불행. 사위상곡태수 흉노일이합전.
이 때에 양왕(梁王)이 그에게 불법으로 장군인(將軍印)을 하사했기 때문에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제대로 포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 후에 상곡군(上谷郡)의 태수(太守)로 전임되어 흉노와 날마다 교전을 벌였다.
典屬國公孫昆邪為上泣曰:「李広才気, 天下無雙, 自負其能, 數與虜敵戦, 恐亡之.」
전속국공손곤사위상읍왈 ‘이광재지 천하무쌍 자부기능 수여노적전 공망지’
그러자 전속국(典屬國: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이었던 공손곤사(公孫昆邪)가 황제에게 읍소하면서 이렇게 아뢰었다. ‘이광의 재능과 용맹한 기상은 천하에 겨룰 자가 없을 정도이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너무 자주 적과 육탄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두면 전사할 지도 모르니 두렵습니다.’
於是乃徙為上郡太守. 後広転為邊郡太守, 徙上郡. 嘗為隴西、北地、鴈門、代郡、雲中太守, 皆以力戦為名.
어시내사위상군태수. 후솽전위변군태수 사상군. 상위롱서 북지 안문 대군 운중태수 개이역전위명.
이에 곧바로 상군태수(上郡太守)로 보내졌다. 뒤에 이광은 변경의 여러 태수를 지내다가 다시 상군태수로 전임되었다. 그는 일찍이 농서(隴西), 북지(北地), 안문(雁門), 대군(代郡), 운중(雲中) 등지의 태수를 지냈는데, 가는 곳에서 용맹하게 적과 싸워서 유명해졌다.
匈奴大入上郡, 天子使中貴人従広勒習兵撃匈奴. 中貴人將騎數十縦, 見匈奴三人, 與戦. 三人還射, 傷中貴人, 殺其騎且盡.
흉노대입상군 천자사중중인종광혁습병격흉노. 중귀인장기수십종 견흉노삼인 여전. 삼인환사 상중귀인 살기저차진.
흉노가 대거 상군을 침입하자 황제는 총애했던 궁인을 파견하여 이광을 수행하면서 병사들을 단속하고 훈련시켜 흉노를 격퇴하도록 했다. 한번은 궁인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달리다가 중도에 흉노의 병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세 사람은 재빨리 몸을 돌려 활을 쏘아 궁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의 기병을 거의 다 몰살시켰다.
中貴人走広. 広曰:「是必射雕者也.」
중귀인주광. 광왈 ‘시필사조자야’
대경실색한 궁인(궁에서 온 사람)은 이광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왔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이광이 말했다. ‘저들은 필경 나는 독수리도 잡는 명사수들일 것이다.’
広乃遂従百騎往馳三人. 三人亡馬歩行, 行數十里. 広令其騎張左右翼, 而広身自射彼三人者, 殺其二人, 生得一人, 果匈奴射雕者也.
광내수종백기왕치삼인. 삼인망마보행 행수십리. 광영기기장좌우익 이광신자사피삼인자 살기이인 생득일인 과흉노사조자야.
이에 이광은 일백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급히 세 사람을 추격했다. 세 사람은 말 없이 걸어서 달아났는데, 몇 십 리밖에 가지 못했다. 이광은 자신의 기병들에게 좌우로 그들을 포위하도록 명령하고 더불어 친히 활을 겨누어 세 사람을 쏘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을 사살하고 한 사람을 생포했는데, 과연 그들은 흉노의 명사수들이었다.
已縛之上馬, 望匈奴有數千騎, 見広, 以為誘騎, 皆驚, 上山陳. 広之百騎皆大恐, 欲馳還走. 広曰:「吾去大軍數十里, 今如此以百騎走, 匈奴追射我立盡. 今我留, 匈奴必以我為大軍[之]誘(之), 必不敢撃我.」
이박지상마 망흉노유수천기 견광 이위유기 개경 상산진.광지뱍기개대공 욕치환주. 광왈 ‘오거대군수십리 금여차이백기주 흉노추사아립진. 금아유 흉노필이아위대군유 필불감격아’
포로를 결박시키고 말에 올라 앞을 살펴보니 흉노 수천 명의 기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광 일행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기병을 유인하려는 술책으로 여겨서 모두 경계하며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광의 일백여 기병들도 매우 당황하여 말을 되돌려서 도망가려 하니, 이광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아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수십 리나 떨어져 있다. 지금 우리 기병들이 이렇게 당황하며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인다면 흉노는 바로 추격하여 모두 사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에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들은 자신들을 유인하는 술책을 여기고 틀림없이 감히 우리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広令諸騎曰:「前!」前未到匈奴陳二里所, 止, 令曰:「皆下馬解鞍!」
광령제기왈 ‘전’ 전미도흉노진이리소 지 영왈 ‘개하마해안’
이광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기병들에게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후에 흉노의 진지에서 2 리 정도 떨어진 곳에까지 대치시켜 놓고 또다시 이런 명령을 내렸다. ‘모두 말에서 내려 인장을 풀어라!’
其騎曰:「虜多且近, 即有急, 柰何?」広曰:「彼虜以我為走, 今皆解鞍以示不走, 用堅其意.」
기기왈 ‘노다처근 즉유급 내하’ 광왈 ‘피노이아위주 금개해안이미불주 용견기의’
이에 기병들이 반문했다. ‘적들은 수가 많고 또 근접해 있는데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이광이 대답했다. ‘저들은 우리들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인데, 지금 우리가 안장을 풀고 도주하지 않음을 보여주면 저들은 우리가 자신을 유인하는 계책으로 뜻을 굳힐 것이다.’
於是胡騎遂不敢撃. 有白馬將出護其兵, 李広上馬與十餘騎奔射殺胡白馬將, 而複還至其騎中, 解鞍, 令士皆縦馬臥. 是時會暮, 胡兵終怪之, 不敢撃. 夜半時, 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 胡皆引兵而去. 平旦, 李広乃帰其大軍. 大軍不知広所之, 故弗従.
어시호기수불감격. 유백마장출획기병 이광상마여십여기분사살호백마장 이복환지기기중 해안 영사개종마와. 시시회모 호병종괴지 불감격. 야반시 호병역이위한유복군어방욕야위지 호개인병이거. 평단 이관내귀기재군. 대군부지광소지 고불종.
이리하자 흉노 기병들은 마침내 감히 바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적진 중에 백마를 탄 한 장군가 나와 수하의 병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 때에 이광이 재빨리 말에 올라 십여 명을 기병을 거느리고 순식간으로 쳐들어가 백마를 탄 장군을 사살한 후에 다시 돌아와서 자신의 안장을 풀고 병사들에게도 모두 말을 풀어놓고 편히 누워서 쉬도록 했다. 이때가 마침 해질 무렵이었는데, 흉노 병사들은 시종일관 괴이하게 여기고, 감히 출격하지 못했다.
夜半時, 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 胡皆引兵而去. 平旦, 李広乃帰其大軍. 大軍不知広所之, 故弗従.
야반시 호병역이위한유복군어방욕야취지 호개인병이거. 평단 이광내귀기대군. 댜군부지광소지 고불종.
깊은 밤이 되자 흉노 병사들은 또 한나라의 복병이 주변에 잠복하고 있다가 야음을 타서 자신들을 습격할 것을 걱정하여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철수했다. 날이 밝자 이광은 자신들의 본대가 주둔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때까지 본대에서는 이광의 소재지를 몰랐기 때문에 뒤따라가서 돕지 못했다.
居久之, 孝景崩, 武帝立, 左右以為広名將也, 於是広以上郡太守為未央衛尉, 而程不識亦為長樂衛尉. 程不識故與李広倶以邊太守將軍屯.
거구지 효경붕 무제립 좌우이광명장야 어시솽이상군태수위미앙위위 이정불식역위장장락위위.정불식도여이광구이변태수장군둔.
한참 후 한나라의 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무제(武帝)가 즉위했다. 무제 측근의 대신들은 이광을 명장으로 여겨 그를 상군태수에서 미앙궁(未央宮: 황제의 소재지)의 위위(衛尉: 궁궐방위를 담당한 무관)로 임명시키도록 하였고, 정불식(程不識) 또한 장락궁(長樂宮: 태후의 소재지)의 위위로 전임시켰다. 정불식은 예전에 이광과 마찬가지로 변경 군(郡)의 태수와 주둔지의 장군을 겸임한 인물이었다.
及出撃胡, 而広行無部伍行陳, 就善水草屯, 舎止, 人人自便, 不撃刀鬥以自衛, 莫府省約文書籍事, 然亦遠斥候, 未嘗遇害.
급출격호 이광행무부오행진 취선수초둔 사지 인인자경 불격도투이자위 막부성약문서적사 연적원척후 미상우해.
흉노로 출격할 때, 이광의 부대는 엄밀한 편성과 진형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단지 좋은 물과 풀이 있는 지대에서 주둔하여 머물면서 병사마다 편하게 행동하게 했다. 밤에 순번을 돌며 조두(刁斗: 낮에는 솥으로 쓰고, 밤에는 징으로 사용함)를 쳐서 스스로를 방비하지도 않았고, 막부(幕府)에서는 문서나 장부와 같은 것을 최대한 간소화시켰다. 그러나 척후병을 멀리 배치하여 적의 동향을 정찰했기 때문에 일찍이 큰 피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
程不識正部曲行伍営陳, 撃刀鬥, 士吏治軍簿至明, 軍不得休息, 然亦未嘗遇害. 不識曰:「李広軍極簡易, 然虜卒犯之, 無以禁也;而其士卒亦佚樂, 鹹樂為之死. 我軍雖煩擾, 然虜亦不得犯我.」
정불식정부곡행오영진 격도투 사리치군부지명 군부득휴식 연역미상우해. 불식왈 ‘이광군극간이 연노졸범지 무이금야 이기사졸역일락 함악위지사. 아군수번요 연노역부득범아’
이와 달리 정불식은 부대의 편성과 진형을 엄격하게 갖추고 밤마다 순번을 돌며 조두를 쳐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고, 군관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장부를 말끔하게 정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그의 군대는 충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일찍이 피해를 당한 적도 없었다. 정불식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광은 군대를 지극히 간단하고 쉽게 통솔하지만 적이 갑작스럽게 침범해오면 막기 힘들다. 그러나 그의 사졸들은 편하고 즐겁게 지내 모두 기꺼이 이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반면에 내가 지휘하는 군대는 비록 번거롭고 성가신 점이 있어도 그래도 적들도 감히 아군을 침범할 수 없다.’
是時漢邊郡李広、程不識皆為名將, 然匈奴畏李広之略, 士卒亦多樂従李広而苦程不識. 程不識孝景時以數直諫為太中大夫. 為人廉, 謹於文法.
시시한변군이광 정불식개위명장 연흉노외이광지략 사졸역다락종이광이고정불식. 정불식효경시이수직간위태중대부. 위인염 근어문법.
이 때 한나라 변경 지역의 군 태수였던 이광과 정불식은 모두 명장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흉노는 이광의 모략을 두려워했으며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기를 좋아했고 정불식을 따르기를 고통스럽게 여겼다. 정불식은 경제 때에 자주 직간(直諫)을 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진지하여 조정의 법령조문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後漢以馬邑城誘単於, 使大軍伏馬邑旁谷, 而広為驍騎將軍, 領屬護軍將軍. 是時単於覚之, 去, 漢軍皆無功. 후한이마읍성유선어 사대군복마읍방곡 이광위효기장군 영속호군장군. 시시선어각지 거 한군개무공.
그 후 한나라는 마읍성(馬邑城)으로서 선우(單于)를 유인하며, 대군을 마읍 주변의 산골짜기에 매복시켜 놓았다. 그 때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이 되어 호군장군(護軍將軍: 한안국)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당시에 선우가 이 책략을 알아차리고 돌아가자 한나라 군사는 모두 전공을 세울 수가 없었다.
其後四歳, 広以衛尉為將軍, 出鴈門撃匈奴. 匈奴兵多, 破敗広軍, 生得広. 単於素聞広賢, 令曰:「得李広必生致之.」胡騎得広, 広時傷病, 置広両馬閒, 絡而盛臥広.
기후사세 광이위위위장군 출안문격흉노. 흉노병다 파패광순 생득광. 선어소문광현 영왈 ‘득이광필생치지’ 호기득광 광시상병 치광양마간 결이성와광.
그 후에 4년이 지났는데, 이광은 위위(衛尉)에서 장군으로 전임되어 안문(雁門)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이 때에 흉노는 병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광의 군대를 격퇴하고 이광을 생포했다. 선우는 지난 한때에 이광이 현명한 장수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했다. ‘반드시 이광을 생포해 데려와라!’ 흉노 기병이 이광을 체포할 때에 그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두 필의 말 사이에 그물을 연결하여 그 위에 눕혀서 끌고 갔다.
行十餘里, 広詳死, 睨其旁有一胡児騎善馬, 広暫騰而上胡児馬, 因推墮児, 取其弓, 鞭馬南馳數十里, 複得其餘軍, 因引而入塞.
행십여리 광상사 예기방유일호아기선마 광잠등이상호아마 인추타아 취기숭 편마남치수십리 복득기여군 인인이입새.
이렇게 10여 리를 가며 이광이 짐짓 죽은 척하고 있다가 주변을 흘겨보았는데, 한 흉노 소년이 좋은 말을 타고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이에 이광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흉노 소년의 말에 올라타서 소년을 말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활까지 탈취했다. 그런 후에 말에 채찍질 가해 남쪽으로 수십 리를 내달리다가 잔여부대를 만나 그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요새로 들어왔다.
匈奴捕者騎數百追之, 広行取胡児弓, 射殺追騎, 以故得脫. 於是至漢, 漢下広吏. 吏當広所失亡多, 為虜所生得, 當斬, 贖為庶人.
흉노포자기수백추지 광행취호아궁 사살추기 이고득탈. 어시지한 한하광리. 리당광소실망다 위노소생득 당참 속위서인.
흉노는 수백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추격하면서 그를 다시 체포하려고 했으나, 이광은 도망가는 와중에 탈취한 흉노 소년의 활로 추격해오는 기병을 사살했기 때문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천신만고 끝에 한나라로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이광을 심판관에게 넘겨 심판을 받게 했다. 심판관은 이광이 많은 부하와 전마를 잃고 또 적에게 생포되었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참수형에 처해야한다고 판결했으나 이광은 속죄금으로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頃之, 家居數歳. 広家與故潁陰侯孫屏野居藍田南山中射猟. 嘗夜従一騎出, 従人田閒飲. 還至霸陵亭, 霸陵尉酔, 呵止広. 広騎曰:「故李將軍.」尉曰:「今將軍尚不得夜行, 何乃故也!」止広宿亭下.
경지 가거수세. 광가여고영음후손병야거남전산중사렵. 상야종일기출 종인전간음. 환지패릉정 패릉위취 아지광. 광기왈 ‘고이장군’ 위왈 ‘금장근상부득야행 하내고야’ 지광숙정하.
순식간에 세월은 흘려가서 이광이 집에 거주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이광은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의 손자(관강灌强)와 더불어 은거하면서 가끔 남전현(藍田縣)의 남산(南山)에서 사냥을 하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이광은 시종 한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가 지인들과 시골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패릉정(霸陵亭)에 이르렀다. 그 때에 이곳을 지키던 정위(亭尉)가 술에 취해 호통을 치며 이광의 통행을 저지했다. 그러자 이광의 시종이 말했다. ‘이 분은 전직 이광 장군이시다.’ 이에 정위가 대수롭지 않게 비꼬아서 말했다. ‘설령 현직 장군이라도 야간 통행은 할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전직 장군이야 더 설명한 필요도 없다!’ 그리고 곧 바로 이광의 통행을 제지시키고, 패릉정 아래에다 구류한 적이 있었다.
居無何, 匈奴入殺遼西太守, 敗韓將軍, 後韓將軍徙右北平. 於是天子乃召拝広為右北平太守. 広即請霸陵尉與倶, 至軍而斬之.
거무하 흉노입살요서태수 패한장군 후한장국사우북평. 어시천자내소뱌광위우북평태수. 광즉청패릉위여구 지군이참지.
얼마 뒤에 흉노가 침입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한안국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니, 한장군은 그 책임을 지고 우북평군(右北平郡)의 태수로 좌천된 후에 병사했다. 이에 무제는 이광을 다시 불러들여 우북평군 태수로 임명하였는데, 이 때에 이광은 황제에게 패릉의 정위도 함께 데려 갈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패릉의 정위가 군영에 이르렀는데, 이광은 곧바로 그 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広居右北平, 匈奴聞之, 號曰「漢之飛將軍」, 避之數歳, 不敢入右北平.
이광우북평 흉노문지 호왈 ‘한지비장군’ 피지수세 불감입우불평.
이광이 우북평군의 태수로 부임하자 흉노는 그 소식을 듣고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다.’라고 일컫고, 그를 회피하여 수년 동안 감히 우북평군을 침범하지 않았다.
広出猟, 見草中石, 以為虎而射之, 中石沒鏃, 視之石也. 因複更射之, 終不能複入石矣. 広所居郡聞有虎, 嘗自射之. 及居右北平射虎, 虎騰傷広, 広亦竟射殺之.
굉출렵 견화중성 이위호이사지 중석몰촐 시지석야. 인복경사지 종불능복입석의. 광소거군문유호 상자사지. 급거우북평사호 호등상광 광역경사살지.
이광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풀 숲의 돌을 호랑이인 줄 알고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원래 돌이었다. 이에 다시 쏘아보았는데, 끝내 화살촉은 돌에서 튕겨 나왔다. 이광은 일찍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지역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언제나 친히 나가 활로 잡으려고 했다. 우북평군에 있을 때에 호랑이를 활로 쏜 적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껑충 뛰어올라 그에게 달려들어서 상처를 입혔으나 결국은 이광은 그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広廉, 得賞賜輒分其麾下, 飲食與士共之. 終広之身, 為二千石四十餘年, 家無餘財, 終不言家産事. 広為人長, 猿臂, 其善射亦天性也, 雖其子孫他人學者, 莫能及広.
광렴 득상사첩분기휘하 음식여사공지. 종광지신 위이천석사십여년 가무여재 종불신가산사. 광위인장 원고 기선사역천성야 수기자손타인학자 막능급광.
이광은 매우 청렴결백하여 상을 받으면 항상 그의 부하들에게 분배해주었고, 음식은 사졸들과 함께 먹었다. 이광은 종신토록 봉록 2천석을 받는 관직에 40여 년 동안 있었지만 집안에 모아놓은 재물이 없었고, 시종일관 집 재산에 관한 일은 말하지도 않았다. 이광은 신체가 크고 장대하며 팔이 원숭이처럼 길었다. 이 때문인지 그가 활을 잘 쏘는 것도 천부적이었는데, 비록 그의 자손이나 다른 자들이 궁술을 배워도 이광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広訥口少言, 與人居則畫地為軍陳, 射闊狹以飲. 専以射為戯, 竟死.
광눌구소언 여인거즉화지위군진 사활협이음. 전이사위희 경사.
이광은 말이 어눌했기 때문에 말수도 적었고 남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땅 위에 군진(軍陣)을 그려놓고, 활쏘기 내기를 하여 지는 자에게 벌주를 마시게 했다. 그는 오로지 활쏘기를 낙으로 삼아다 일생을 마쳤다.
広之將兵, 乏絶之処, 見水, 士卒不盡飲, 広不近水, 士卒不盡食, 広不嘗食.
광지장병 핍절지처 견수 사졸불진음 광불근수 사졸부진식 광불상식.
이광이 병사를 이끌 때에 식수와 식량이 결핍된 지방에 이르면 사졸들이 물을 먼저 다 마시지 아니하면 물 근처에도 가지도 않았고, 사졸들이 먼저 밥을 다 먹기 전에는 일찍이 밥을 먹지 않았다.
寛緩不苛, 士以此愛樂為用.
관완불가 사이차애요위용.
그가 사졸을 대할 때, 언제나 관대하고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졸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기꺼이 전심전력을 다했다.
其射, 見敵急, 非在數十歩之內, 度不中不発, 発即應弦而倒. 用此, 其將兵數困辱, 其射猛獣亦為所傷雲.
기사 견적급 비재수십보지내 도불중불발 발즉응현이도. 용차 기장병수곤욕 시사먕수역위소상운.
그의 활쏘기 방법은 적이 갑자기 다가와도 수십 보 이내에서 명중시키지 못하겠다고 판단하면 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적을 쏘면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적들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때문에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출격할 때면 자주 곤욕을 치렀고, 그가 맹수를 쏠 때에도 이런 태도 때문에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居頃之, 石建卒, 於是上召広代建為郎中令. 元朔六年, 広複為後將軍, 従大將軍軍出定襄, 撃匈奴. 諸將多中首虜率, 以功為侯者, 而広軍無功.
거경지 석건졸 아시상소광대건위낭중령. 원삭육년 광복위후장군 종대장군군출정양 격흉노. 제장다중수노솔 이공위후자 이광군무공.
얼마 뒤에 석건(石建)이 죽었다. 이에 황제는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해서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았다. 원삭(元朔) 6년(서기전 123년), 이광은 다시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되어 대장군(大將軍) 위청이 이끄는 군대를 따라 정양군(定襄郡)에서 나아가 흉노를 공격했다. 이 때에 여러 장수들이 적을 참수하거나 생포한 전공을 세워기 때문에 후작(侯爵)에 봉해졌는데, 이광의 부대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後二歳, 広以郎中令將四千騎出右北平, 博望侯張騫將萬騎與広倶, 異道. 行可數百里, 匈奴左賢王將四萬騎囲広, 広軍士皆恐, 広乃使其子敢往馳之.
후이세 광이낭중령장사천기출우북평 박망후장건장만기여광구 이도. 행가수백리 흉노좌현왕장사만기위광 광군사개공 광내사기자감왕치지.
2년이 지난 뒤에 이광은 낭중령으로서 4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우북평군에서 출격했고,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도 일만 명을 거느리고 이광과 더불어 출격했는데 각기 다른 길로 행군하는데 이광의 부대가 수백 리 정도를 행군했을 때에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4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광의 부대를 포위했다. 이광의 군사들은 모두 그 광경을 목도하고 두려워서 크게 당황하자 이광은 자신의 아들인 이감(李敢)을 적진으로 보냈다.
敢獨與數十騎馳, 直貫胡騎, 出其左右而還, 告広曰:「胡虜易與耳.」
감독여수십기치 직관호기 출기좌우이환 고광왈 ‘호노이여이’
이감은 홀로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재빠르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단번에 흉노의 기병의 포위를 뚫고, 적진 좌우로 돌아 나와 이광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흉노 오랑캐 따위는 상대하기 쉬울 따름입니다!’
軍士乃安. 広為圜陳外嚮, 胡急撃之, 矢下如雨. 漢兵死者過半, 漢矢且盡.
군사내안. 광위원진외향 호급격지 시하여우. 한병사자과반 한시차진.
이 광경을 본 이광의 군사들은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광은 원형의 진을 치고 모두 밖을 향해 대항토록 했는데, 흉노가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 때 흉노가 이광의 부대로 쏜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이로 인해 한나라의 군사는 과반수가 사망했고, 대항할 화살 또한 거의 다 써버리고 말았다.
広乃令士持満毋発, 而広身自以大黃射其裨將, 殺數人, 胡虜益解. 會日暮, 吏士皆無人色, 而広意気自如, 益治軍. 軍中自是服其勇也.
광내영사지만무발 이광신자이대황사시비장 살수인 호로익해. 회일모 사사갸무인색 이광의기자여 익치군. 군중자시복기용야.
이에 이광은 곧 군사들에게 활로 적을 조준하되 쏘지는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대황(大黃)으로 불리는 석궁을 가지고 적의 비장(裨將: 부장군)을 쏘아 맞추고, 또 몇 명의 사살하니 그들의 포위망이 점차 풀어졌다. 때마침 날이 저물자 지친 군관과 병사들은 모두 핏기가 가셔 창백해졌지만 이광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더욱 힘을 내서 군대를 통솔하였다. 이로 인해 군중은 그의 용기에 감복했다.
明日, 複力戦, 而博望侯軍亦至, 匈奴軍乃解去. 漢軍罷, 弗能追. 是時広軍幾沒, 罷帰. 漢法, 博望侯留遅後期, 當死, 贖為庶人. 広軍功自如, 無賞.
명일 복역전 이박망후군역지 흉노군내해거. 안군파 불능추. 시시광군기몰 파귀. 한법 박망후유지후기 당사 속위서인. 광군공자여 무상.
이튿날 다시 힘을 내서 싸웠는데, 박망후의 군대 역시 도착하자 흉노 군은 할 수없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는 피곤에 지쳐서 추격할 수가 없었다. 이때 이광의 군대는 거의 궤멸된 상태라서 남은 병사들을 추스러서 귀환했다. 한나라의 법에 의하면 박망후는 이광과 약정된 기일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죄는 참수에 해당되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광은 군공(軍功)과 과오가 서로 비슷해 이렇다 할 포상은 없었다.
初, 広之従弟李蔡與広倶事孝文帝. 景帝時, 蔡積功勞至二千石. 孝武帝時, 至代相. 以元朔五年為軽車將軍, 従大將軍撃右賢王, 有功中率, 封為樂安侯.
초 광지종제이채여광구사효문제. 경제시 채적공노지이천석. 효무제시 지대상. 이원삭오년위경거장군 종대장군격우현왕 유공중률 봉위낙안후.
처음에 이광의 사촌 동생인 이채(李蔡)과 이광은 모두 함께 문제를 섬겼다. 경제 때에 이채는 공적을 쌓아 2천석의 봉록을 받게 지위에 올랐다. 그는 문제 때에는 대(代)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원삭 5년(서기전 124년)에는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서 우현왕(右賢王)을 공격에 참여했는데, 이 때에 세운 공로에 적합한 포상을 받아 낙안후(樂安侯)로 봉해졌다.
元狩二年中, 代公孫弘為丞相. 蔡為人在下中, 名聲出広下甚遠, 然広不得爵邑, 官不過九卿, 而蔡為列侯, 位至三公.
원수이년중 대공손홍위승상. 채위인재하중 명성출광하심원 연광부득작읍 관불과구경 이채위열후 위지삼공.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년)에 이채는 공손홍(公孫弘)을 대신해 승상이 되었다. 당시 이채의 인품에 대한 평가는 하위권의 중등 정도이었고, 그의 명성도 이광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그러나 이광은 작위나 봉읍도 얻지 못하고, 관직도 구경(九卿)을 능가하지 못했으나, 이채는 열후(列侯)에 봉해졌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르렀다.
諸広之軍吏及士卒或取封侯. 広嘗與望気王朔燕語, 曰:「自漢撃匈奴而広未嘗不在其中, 而諸部校尉以下, 才能不及中人, 然以撃胡軍功取侯者數十人, 而広不為後人, 然無尺寸之功以得封邑者, 何也? 豈吾相不當侯邪? 且固命也?」
제광지군리급가졸혹취봉후. 광상여망기왕살연어 왈 ‘자한격흉노아광미상부재기중 이재부교위이하 재능불급중인 연이격호군공취후자수십인 이광불위후인 연무척촌지공이득봉읍자 하야 이오상부당후사 차고명야’
이광의 부하였던 여러 군관과 병졸들 중에도 이미 제후로 봉해진 자도 있었다. 이광은 일찍이 운기(雲氣)와 길흉을 점쳤던 유명한 점성가 왕삭(王朔)과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에서 흉노를 정벌하기 시작한 뒤부터 저는 그 주역이 아닌 적이 없었소. 그러나 여러 부대의 교위(校尉) 이하의 인물 중에서 그 재능이 중등 수준에도 못 미치는데, 흉노와 전투 중에 세운 공으로 제후의 작위를 받은 자가 수십 명이나 됩니다. 하지만 저는 남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봉읍(封邑)을 얻을만한 작은 공마저 없는 것은 무슨 원인입니까? 설마 저의 관상이 제후로 온당하지 못합니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운명 탓이오?’
朔曰:「將軍自念, 豈嘗有所恨乎?」広曰:「吾嘗為隴西守, 羌嘗反, 吾誘而降, 降者八百餘人, 吾詐而同日殺之. 至今大恨獨此耳.」
삭왈 장군자념 이상유소한호 광왈 ‘오상위롱서수 강상반 오유이항 항자팔백여인 오사이동일살지. 지금대한독차이’
왕삭이 물었다.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에 뼈저리게 뉘우칠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이광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일찍이 농서 태수를 지낼 때에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들에게 항복을 권유해서 투항한 한 자가 8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저의 속임수였고, 기실 투항했던 자들을 같은 날에 모두 죽였습니다. 지금까지 크게 뉘우치는 것은 단지 이 일뿐입니다.’
朔曰:「禍莫大於殺已降, 此乃將軍所以不得侯者也.」
삭왈 ‘화막대어살이항 차내장군소이부득후자야’
그러자 왕삭은 말했다. ‘화근 중에 이미 투항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장군이 제후로 봉해지지 못하는 진정한 원인입니다.’
後二歳, 大將軍、驃騎將軍大出撃匈奴, 広數自請行. 天子以為老, 弗許;良久乃許之, 以為前將軍. 是歳, 元狩四年也.
후이세 대장군 표기장군대출격흉노 광수자청행. 천자이위노 불허 양구냐허자 이위전장군. 시세 원수사년야.
이로부터 2년 후,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대거로 흉노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광은 여러 차례 자신도 출정하기를 청했으나 황제는 그가 연로하다고 여겨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그의 참전을 승낙하고,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았다. 이해가 원수 4년이었다.
広既従大將軍青撃匈奴, 既出塞, 青捕虜知単於所居, 乃自以精兵走之, 而令広並於右將軍軍, 出東道. 東道少回遠, 而大軍行水草少, 其勢不屯行.
광기종대장군청격흉노 기출새 철포로지선어소거 냐자이정병주지 이영광병어우장군군 출동도. 동도소회원 이대군행수초소 기세불둔행.
그리하여 이광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로 출격했다. 멀리 변방으로 나간 뒤에 위청은 흉노의 포로를 잡아서 심문 끝에 선우의 소재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대장군은 친히 정예 병사를 이끌고 곧바로 선우의 소재지로 쳐들어갔고, 이광에게는 우장군(右將軍) 조이기(趙食其)의 부대와 더불어 동쪽 길로 출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동쪽 길은 조금 멀리 우회하는 길로 대군이 행군하는 도중에 물과 풀이 적어 병사들이 결집시키고 서둘러 뒤쫓아 갈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다.
広自請曰:「臣部為前將軍, 今大將軍乃徙令臣出東道, 且臣結髪而與匈奴戦, 今乃一得當単於, 臣願居前, 先死単於.」
광자청왈 ‘신부위전장군 금대장군내사영신출동도 차신결발이여흉노전 금내일득당선어신원거전 선사선어’
이 때문에 이광은 친히 대장군에게 이렇게 청했다. ‘신의 소임은 전장군(前將軍)인데, 지금 대장군께서 저를 동쪽 길로 돌아서 출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은 젊을 적부터 흉노와 격전을 벌였지만 오늘에서야 선우와 직접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원컨대 신이 선봉에 나서서 가장 먼저 선우와 결전을 치룰 수 있게 해주십시오.’
大將軍青亦陰受上誡, 以為李広老, 數奇, 毋令當単於, 恐不得所欲. 而是時公孫敖新失侯, 為中將軍従大將軍, 大將軍亦欲使敖與倶當単於, 故徙前將軍広.
대장군청역음수상계 이위이광노 수기 무영당선어 공부득소욕. 이시시공손오신실후 위중장군종대장군 대장군역욕서오여구당선어 고사전장군광.
그러나 대장군 위청도 이미 무제에게 이광은 연로하고 운수가 기구하여 선우와 대적해도 아마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그가 직접 출전하는 것을 만류하라고 훈계를 받았다. 이때 공손오(公孫敖)가 제후의 작위를 상실하고 중장군(中將軍)으로 강등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진하여 다시 전공을 세우길 간절하게 원했다. 대장군도 공손오로 하여금 자기와 더불어 선우를 대적하게 했기 때문에 전장군 이광의 소임을 바꾸어 선우와 직접 대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広時知之, 固自辭於大將軍. 大將軍不聴, 令長史封書與広之莫府, 曰:「急詣部, 如書.」広不謝大將軍而起行, 意甚慍怒而就部, 引兵與右將軍食其合軍出東道. 軍亡導, 或失道, 後大將軍.
광시지지 고자사어대장군. 대장군불청 영장사봉서여광지막부 왈 ‘급지부 여서’ 광불사대장군이기행 의심온노이취부 인병여우장군식이합군출동도. 군망도 혹실도 후대장군.
이광은 당시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으나, 친히 대장군에게 결전의 의사를 표시를 하고 소임을 바꾸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대장군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장사(長史)에게 명령서를 이광의 막부로 보내어 이렇게 지시했다. ‘서둘러서 소속 부대로 가서 명령서의 지시대로 따르도록 하시오.’ 이에 이광은 대장군에게 작별인사도 드리지 않고 출발했다. 그는 매우 격노하면서 자신의 부대에 돌아가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우장군 조이기의 군대와 더불어 동쪽 길로 진군했다. 그러나 군중에 향도(嚮導)가 없어서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가 대장군과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大將軍與単於接戦, 単於遁走, 弗能得而還. 南絶幕, 遇前將軍、右將軍. 広已見大將軍, 還入軍. 大將軍使長史持糒醪遺広, 因問広、食其失道狀, 青欲上書報天子軍曲折.
대장군여선어접전 선어순주 불능득이환. 남절막 우전장군 좌장군. 광이견대장군 환입군 대장군사장사지비료유광 인문광 식이실도장 청욕상서보천자군곡절.
이에 앞서 대장군은 선우와 접전을 벌였는데, 선우가 도주해 버리자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고 있었다. 대장군의 부대는 남쪽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때서야 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의 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이광이 대장군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대장군은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마른 음식과 탁주를 이광에게 보내어 노고를 치하하면서 더불어 이광과 조이기의 부대가 길을 잃은 헤매던 정황에 대해서 물었다. 대장군 위청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그간의 우여 곡절했던 상황을 보고하려 할 뿐이었는데, 뜻밖에도 이광은 회답하지 않았다.
広未対, 大將軍使長史急責広之幕府対簿. 広曰:「諸校尉無罪, 乃我自失道. 吾今自上簿.」
광미대 대장군사장사급책광지막부대부. 광왈 ‘제교위무죄 내아자실도. 오금자상부’
그러자 대장군은 또 장사를 파견하여 이광의 군영에서 장부를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교위를 소환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광이 ‘여러 교위들에게는 죄가 없고, 내 자신이 길이 잃고 헤맨 것이니, 지금 직접 가서 심문을 받겠다’고 하였다.
至莫府, 広謂其麾下曰;「広結髪與匈奴大小七十餘戦, 今幸従大將軍出接単於兵, 而大將軍又徙広部行回遠, 而又迷失道, 豈非天哉! 且広年六十餘矣, 終不能複対刀筆之吏.」
지막부 광귀기휘하왈 ‘광결발여흉노대소칠십여전 금행종대장군출접선어병 이대장군우사광부행회원 이우미실도 이비천재 차광년육십여의 종불능복대도필지리’
그리고 이광은 군영의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철나고부터 지금까지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벌였다. 이번에도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출전해 선우의 군사와 직접 교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대장군이 또 나의 소임을 바꿔서 부대를 멀리 돌아 행군하도록 했고, 또 길까지 잃고 헤매었으니, 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 또 내 나이가 이미 육십여 세가 되었는데, 종국에 다시 도필리(刀筆吏: 문서를 작성하는 하급관리) 따위에게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
遂引刀自剄. 広軍士大夫一軍皆哭. 百姓聞之, 知與不知, 無老壯皆為垂涕. 而右將軍獨下吏, 當死, 贖為庶人. 수인도자경. 광군사대부일군개곡. 백성문지 지여부지 무노장개위수체. 이우장군독하리 당사 속위서인‘
그러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광의 부하 관리와 전 군사들은 모두 대성통곡했다. 백성들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광을 알건 모르건 간에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우장군 조이기는 법관에게 넘겨져 심문 끝에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광의 가족 관계>
広子三人, 曰當戸、椒、敢, 為郎. 天子與韓嫣40)戯, 嫣少不遜, 當戸撃嫣, 嫣走. 於是天子以為勇.
광자삼인 왈당호 초 감 위랑. 천자여한언희 언소불손 당호격언 언주. 어시천자이위용.
이광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당호(李當戶), 이초(李椒), 이감(李敢)으로 모두 낭관(郎官)이 되었다. 한번은 황제가 총애했던 한언(韓嫣)과 더불어 놀았는데, 데, 한언이 황제에게 다소 불손한 태도를 보이자 이당호가 그 자리에서 바로 한언을 치자 한언이 놀래서 줄행랑을 쳤다. 이에 황제는 이당호가 용감하다고 여겼다.
當戸早死, 拝椒為代郡太守, 皆先広死. 當戸有遺腹子名陵. 広死軍時, 敢従驃騎將軍.
당호조사 배초위대군태수 개선광사. 당호유유복자명릉. 광사군시 감종표기장군.
그러나 이당호가 일찍 죽자, 황제는 이초(李椒)를 대군태수(代郡太守)로 임명했으나 모두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이당호에게는 유복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릉(陵)이었다. 이광이 군중에서 죽을 때, 이감(李敢)은 마침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출전 중이었다.
広死明年, 李蔡以丞相坐侵孝景園壖地, 當下吏治, 蔡亦自殺, 不対獄, 國除.
광사명년 이채이승상좌침효경원연지 당하리치 채역자살 불대옥 국제.
이광이 죽은 그 다음해, 이광의 사촌동생인 이채(李蔡)는 승상의 신분으로 경제(景帝) 능원(陵園)의 빈터를 무단으로 침범한 죄로 법관에게 넘겨져 처벌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이채는 심문 받기가 싫었기 때문에 자살하고 말았고, 그의 봉국(封國)은 없어졌다.
李敢以校尉従驃騎將軍撃胡左賢王, 力戦, 奪左賢王鼓旗, 斬首多, 賜爵関內侯, 食邑二百戸, 代広為郎中令.
이감이교위종표기장군격호좌현왕 역전 착좌련왕고기 참수다 사작관내후 식읍이백호 대광위낭중령.
이감은 교위(校尉)가 되어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했다. 이때 목숨을 걸고 전투하여 좌현왕의 군기와 북을 탈취하고 많은 적을 참수하는 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란 작위와 식읍 2백호를 하사받았고, 이광을 대신해서 낭중령(郎中令)이 되었다.
頃之, 怨大將軍青之恨其父, 乃撃傷大將軍, 大將軍匿諱之. 居無何, 敢従上雍, 至甘泉宮猟. 驃騎將軍去病與青有親, 射殺敢. 去病時方貴幸, 上諱雲鹿觸殺之.
경지 원대장군청지한기부 내격상대장군 대장군닉위지. 거무하 감종상옹 지감천궁렵. 표기장군거병위청유친 사살감. 거병시방귀행 상위운록촉살지.
얼마 후, 이감은 대장군 위청이 자기 부친을 배척했던 것에 원한을 품고 대장군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혔지만, 대장군은 이 사건을 감추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감은 무제를 수행하여 옹현(雍縣)에 가서 감천궁(甘泉宮)에 도착해 사냥했다. 이 때에 위청의 생질이었던 표기장군 곽거병이 이감이 위청을 공격했던 사실을 알고 괘심하게 여겨서 활로 쏘아 죽였다. 이 때에 곽거병은 바야흐로 지위가 존귀해졌고,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무제는 진상을 은폐하고, 이감은 사냥하다가 사슴에 부딪쳐서 죽었다고 했다.
居歳餘, 去病死. 而敢有女為太子中人, 愛幸, 敢男禹有寵於太子, 然好利, 李氏陵遅衰微矣.
거세여 거병사. 이감유녀위태자중인 애행 감용우유총어태자 연호리 이씨능지쇠미의.
그 후 일 년 남짓 지나자 곽거병도 병사했다. 이감에게 딸이 있었는데, 태자의 중인(中人: 시첩)이 되어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감의 아들인 이우(李禹)도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이익만을 탐했기 때문에 이씨 가문은 차츰 쇠락되고 말았다.
<이릉>
李陵既壯, 選為建章監, 監諸騎. 善射, 愛士卒. 天子以為李氏世將, 而使將八百騎. 嘗深入匈奴二千餘里, 過居延視地形, 無所見虜而還. 拝為騎都尉, 將丹陽楚人五千人, 教射酒泉、張掖以屯衛胡.
이릉기장 선위건장감 감제기. 선사 애사졸. 천자이의이씨세장 이사장팔백기. 상심입흉노이천여리 과거연시지형 무소견노이환. 배위지도위 장단양초인오천인 교사주천 장액이둔위호.
이당호의 아들인 이릉(李陵)이 장년이 되자 건장궁감(建章宮監)으로 선발되어 우림군(羽林軍)의 기병들을 감독했다. 이릉은 궁술에 능했고, 사졸들을 아꼈다. 황제는 이씨 가문이 대대로 무장이었던 것을 배려하여 이릉에게 기병 8백 명을 통솔하게 했다. 이릉은 일찍이 흉노의 경내 2천여 리나 깊숙이 들어가 거연(居延)을 지나 현지의 형세를 살폈으며, 적에게 들키지 않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하여 단양(丹陽)의 초나라 사람 5천명을 거느리고 주천(酒泉), 장액(張掖) 일대에서 주둔하면서 궁술훈련을 시켜 흉노의 침입에 방비토록 했다.
數歳, 天漢二年秋, 弐師將軍李広利將三萬騎撃匈奴右賢王於祁連天山, 而使陵將其射士歩兵五千人出居延北可千餘里, 欲以分匈奴兵, 毋令専走弐師也. 陵既至期還, 而単於以兵八萬囲撃陵軍. 陵軍五千人, 兵矢既盡, 士死者過半, 而所殺傷匈奴亦萬餘人.
수세 천한이년추 이사장군이광리장삼만기격흉노우현왕어기연천산 이사릉장기사사보병오천인출거연북가천여리 욕이분흉노병 무령전주이사야. 능기지기환 이선어이병팔만위격릉군. 릉군오천인 병시기진 사사자과반 이소살상흉노역만여인.
수 년 후인 천한(天漢) 2년(서기전 99년) 가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로 하여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기련천산(祁連天山)에 있던 흉노 우현왕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이릉에게 보병사수(步兵射手) 5천명을 거느리고 거연에서 출병해서 북쪽으로 약 1천여 리를 진격하도록 했는데, 이 작전은 흉노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이사장군에게 집중하여 대결하지 못하기 위함이었다. 이릉은 약정한 철수 기일이 되어서 퇴각하려고 할 때에 선우가 8만 명의 병력으로 이릉의 부대를 포위하여 공격했다. 이릉 부대의 5천 명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분투했는데, 이로 인해 전사자가 과반을 넘을 정도였지만 흉노 병사를 일만여 명이나 사살하였다.
且引且戦, 連鬥八日, 還未到居延百餘里, 匈奴遮狹絶道, 陵食乏而救兵不到, 虜急撃招降陵. 陵曰:「無面目報陛下.」遂降匈奴. 其兵盡沒, 餘亡散得帰漢者四百餘人.
차인차전 연투팔일 환미도거연백여리 흉노차협절도 릉식핍이구병불도 노급격초항릉. 릉왈 ‘무면목보폐하’ 수항흉노. 기병진몰 여망산득귀한자사백여인.
또 그들은 한편으로 퇴각하면서 한편으로 응전하길 8일간을 지속했다. 거연에서 일백여 리가 못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 흉노가 협곡을 막고 귀로를 차단했다. 이 때에 이릉의 부대는 식량이 부족했고, 구원병도 오지 않았다. 흉노는 맹렬하게 공격을 가하면서 이릉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이릉은 이렇게 독백했다. ‘폐하에게 보고할 면목이 없구나.’ 그리고 바로 흉노에게 항복했다. 그의 병사는 거의 전사했는데, 간신히 목숨을 건진 병사들은 각기 흩어져 도피하여 한나라로 귀환한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했다.
単於既得陵, 素聞其家聲, 及戦又壯, 乃以其女妻陵而貴之. 漢聞, 族陵母妻子. 自是之後, 李氏名敗, 而隴西之士居門下者皆用為恥焉.
선어기득릉 소문기가성 급전우장 내이기녀처릉이귀지. 한문 족릉모처자. 자시지후 이씨명패 서롱서지사거문하자개용위치언.
선우는 이릉을 얻자, 평소에 그의 가문에 대한 명성을 들었고, 전투 중에 씩씩했던 그의 기상을 감안하여 자신의 딸을 이릉에게 시집보내고, 고귀한 지위를 주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식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후부터 이씨 가문의 명성은 쇠락했고, 일찍이 이씨 문하에 있던 농서(隴西) 일대의 사대부들은 모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傳曰「其身正, 不令而行;其身不正, 雖令不従」. 其李將軍之謂也?
태사공왈 전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불종’ 기이장군지위야?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논어』에 이르길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시행되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아니하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바로 이장군(李將軍)을 두고 한 말인가?
餘睹李將軍悛悛如鄙人, 口不能道辭. 及死之日, 天下知與不知, 皆為盡哀.
여도이장군전전여비인 구불능도사. 굽사지일 천하지여부지 개위진쇠.
내가 이릉 장군을 목도한 적이 있는데, 성실하고 후덕하기가 마치 시골 사람 같았으며 언변도 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에 천하에 그를 알던지 몰랐던지 간에 모두 그를 위해서 매우 애통해 하였다.
彼其忠実心誠信於士大夫也? 諺曰「桃李不言, 下自成蹊」. 此言雖小, 可以諭大也.
피기충실심성신어사대부야 언왈 ‘도리불언 하자성혜’ 차언수소 가이유대야.
그의 충실한 마음은 참으로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속담에 이르길 ‘복숭아와 오얏은 말이 없어도, 그 아래에는 저절로 작은 길이 생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비록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속에는 큰 이치가 비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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