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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李將軍列傳

列傳-李將軍列傳


<이광>

 

李將軍広者隴西成紀人也其先曰李信秦時為將逐得燕太子丹者也故槐里徙成紀.

이장군광자 롱서성기인야기선왈이신 진시위장 축득연태자단자야고괴리 사성기.

 

이광(李廣장군은 농서군(隴西郡성기현(成紀縣사람이다그의 선조는 이신(李信)인데()나라 때의 장군으로 연()나라의 태자 단()을 추격하여 사로잡은 인물이었다그의 고향은 본디 괴리현(槐里縣)이었으나성기현으로 옮겼다.

 

広家世世受射孝文帝十四年匈奴大入蕭関而広以良家子3)従軍撃胡用善騎射殺首虜多為漢中郎.

광가세세수사효문제십사년 흉노대입소관 이광이양가자종군격호용선지사 살수노다위한중랑.

 

이광(李廣)의 가문은 대대로 궁술을 익혔다한나라 문제(文帝) 14년에 흉노족(匈奴族)이 대거 소관(蕭關)으로 침입할 때에 이광은 양가집의 자제 신분으로서종군하여 흉노에 맞섰다그는 기마술과 궁술에 정통하여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사로잡은 자가 많았기 때문에 한()나라 조정에서 중랑(中郎)이 되었다.

 

広従弟李蔡亦為郎皆為武騎常侍秩八百石嘗従行有所衝陥折関及格猛獣而文帝曰:「惜乎子不遇時如令子當高帝時萬戸侯豈足道哉!

광종제이채역위랑 개위무기상시 질팔백석상종행 유소충함석관급격맬수 이문제왈 석호 자불우시 여령자당고제시 만호후이족도재

 

이광의 사촌 동생인 이채(李蔡또한 중랑이 되었고그들은 모두 무기상시(武騎常侍)에 임명되어 8백석의 봉록을 받게 되었다이광은 일찍이 문제(文帝)가 행차할 때에 수행하였는데적진 깊숙이 들어가 함락시키고사나운 맹수와 맞섰는데 문제가 말하길 애석하구나당신이 때를 잘못 만났구나만약 당신이 고조(高祖때에 활약했다면 족히 만호후(萬戶侯)로 봉해졌을 것이다!’

 

及孝景初立広為隴西都尉徙為騎郎將呉楚軍時広為驍騎都尉従太尉亜夫撃呉楚軍取旗顕功名昌邑下.

급효경초립 광위롱서도위 사위기랑장오초군시 광위효기고위 종태위아부격오초군 취기 현공명창읍하.

 

경제(景帝)가 즉위한 초기에 이광은 농서도위(隴西都尉)가 되었고뒤에 기랑장(騎郎將)으로 전임되었다(), ()나라 등 7국의 반란을 일으킬 때에 이광은 효기도위(驍騎都尉)가 되어 태위(太尉주아부(周亞夫)를 수행하여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에 앞장섰다그는 창읍성(昌邑城아래에서는 적군의 군기를 탈취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서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以梁王授広將軍印賞不行徙為上谷太守匈奴日以合戦.

이양왕수광장군인 환 상불행사위상곡태수 흉노일이합전.

 

이 때에 양왕(梁王)이 그에게 불법으로 장군인(將軍印)을 하사했기 때문에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제대로 포상을 받을 수 없었다그 후에 상곡군(上谷郡)의 태수(太守)로 전임되어 흉노와 날마다 교전을 벌였다.

 

典屬國公孫昆邪為上泣曰:「李広才気天下無雙自負其能數與虜敵戦恐亡之.

전속국공손곤사위상읍왈 이광재지 천하무쌍 자부기능 수여노적전 공망지

 

그러자 전속국(典屬國외교를 담당하는 관리)이었던 공손곤사(公孫昆邪)가 황제에게 읍소하면서 이렇게 아뢰었다. ‘이광의 재능과 용맹한 기상은 천하에 겨룰 자가 없을 정도이나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너무 자주 적과 육탄전을 벌이고 있습니다이런 식으로 나두면 전사할 지도 모르니 두렵습니다.’

 

於是乃徙為上郡太守後広転為邊郡太守徙上郡嘗為隴西北地鴈門代郡雲中太守皆以力戦為名.

어시내사위상군태수후솽전위변군태수 사상군상위롱서 북지 안문 대군 운중태수 개이역전위명.

 

이에 곧바로 상군태수(上郡太守)로 보내졌다뒤에 이광은 변경의 여러 태수를 지내다가 다시 상군태수로 전임되었다그는 일찍이 농서(隴西), 북지(北地), 안문(雁門), 대군(代郡), 운중(雲中등지의 태수를 지냈는데가는 곳에서 용맹하게 적과 싸워서 유명해졌다.

 

匈奴大入上郡天子使中貴人従広勒習兵撃匈奴中貴人將騎數十縦見匈奴三人與戦三人還射傷中貴人殺其騎且盡.

흉노대입상군 천자사중중인종광혁습병격흉노중귀인장기수십종 견흉노삼인 여전삼인환사 상중귀인 살기저차진.

 

흉노가 대거 상군을 침입하자 황제는 총애했던 궁인을 파견하여 이광을 수행하면서 병사들을 단속하고 훈련시켜 흉노를 격퇴하도록 했다한번은 궁인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달리다가 중도에 흉노의 병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그 세 사람은 재빨리 몸을 돌려 활을 쏘아 궁인에게 상처를 입히고그의 기병을 거의 다 몰살시켰다.

 

中貴人走広広曰:「是必射雕者也.

중귀인주광광왈 시필사조자야

 

대경실색한 궁인(궁에서 온 사람)은 이광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왔다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이광이 말했다. ‘저들은 필경 나는 독수리도 잡는 명사수들일 것이다.’

 

広乃遂従百騎往馳三人三人亡馬歩行行數十里広令其騎張左右翼而広身自射彼三人者殺其二人生得一人果匈奴射雕者也.

광내수종백기왕치삼인삼인망마보행 행수십리광영기기장좌우익 이광신자사피삼인자 살기이인 생득일인 과흉노사조자야.

 

이에 이광은 일백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급히 세 사람을 추격했다세 사람은 말 없이 걸어서 달아났는데몇 십 리밖에 가지 못했다이광은 자신의 기병들에게 좌우로 그들을 포위하도록 명령하고 더불어 친히 활을 겨누어 세 사람을 쏘았다그 결과 두 사람을 사살하고 한 사람을 생포했는데과연 그들은 흉노의 명사수들이었다.

 

已縛之上馬望匈奴有數千騎見広以為誘騎皆驚上山陳広之百騎皆大恐欲馳還走広曰:「吾去大軍數十里今如此以百騎走匈奴追射我立盡今我留匈奴必以我為大軍[](), 必不敢撃我.

이박지상마 망흉노유수천기 견광 이위유기 개경 상산진.광지뱍기개대공 욕치환주광왈 오거대군수십리 금여차이백기주 흉노추사아립진금아유 흉노필이아위대군유 필불감격아

 

포로를 결박시키고 말에 올라 앞을 살펴보니 흉노 수천 명의 기병들이 있었다그들은 이광 일행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기병을 유인하려는 술책으로 여겨서 모두 경계하며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이광의 일백여 기병들도 매우 당황하여 말을 되돌려서 도망가려 하니이광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아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수십 리나 떨어져 있다지금 우리 기병들이 이렇게 당황하며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인다면 흉노는 바로 추격하여 모두 사살할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이 만약에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들은 자신들을 유인하는 술책을 여기고 틀림없이 감히 우리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広令諸騎曰:「!前未到匈奴陳二里所令曰:「皆下馬解鞍!

광령제기왈 ’ 전미도흉노진이리소 지 영왈 개하마해안

 

이광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기병들에게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런 후에 흉노의 진지에서 리 정도 떨어진 곳에까지 대치시켜 놓고 또다시 이런 명령을 내렸다. ‘모두 말에서 내려 인장을 풀어라!’

 

其騎曰:「虜多且近即有急柰何?」広曰:「彼虜以我為走今皆解鞍以示不走用堅其意.

기기왈 노다처근 즉유급 내하’ 광왈 피노이아위주 금개해안이미불주 용견기의

 

이에 기병들이 반문했다. ‘적들은 수가 많고 또 근접해 있는데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이광이 대답했다. ‘저들은 우리들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인데지금 우리가 안장을 풀고 도주하지 않음을 보여주면 저들은 우리가 자신을 유인하는 계책으로 뜻을 굳힐 것이다.’

 

於是胡騎遂不敢撃有白馬將出護其兵李広上馬與十餘騎奔射殺胡白馬將而複還至其騎中解鞍令士皆縦馬臥是時會暮胡兵終怪之不敢撃夜半時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胡皆引兵而去平旦李広乃帰其大軍大軍不知広所之故弗従.

어시호기수불감격유백마장출획기병 이광상마여십여기분사살호백마장 이복환지기기중 해안 영사개종마와시시회모 호병종괴지 불감격야반시 호병역이위한유복군어방욕야위지 호개인병이거평단 이관내귀기재군대군부지광소지 고불종.

 

이리하자 흉노 기병들은 마침내 감히 바로 공격하지 못했다그런데 적진 중에 백마를 탄 한 장군가 나와 수하의 병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이 때에 이광이 재빨리 말에 올라 십여 명을 기병을 거느리고 순식간으로 쳐들어가 백마를 탄 장군을 사살한 후에 다시 돌아와서 자신의 안장을 풀고 병사들에게도 모두 말을 풀어놓고 편히 누워서 쉬도록 했다이때가 마침 해질 무렵이었는데흉노 병사들은 시종일관 괴이하게 여기고감히 출격하지 못했다.

 

夜半時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胡皆引兵而去平旦李広乃帰其大軍大軍不知広所之故弗従.

야반시 호병역이위한유복군어방욕야취지 호개인병이거평단 이광내귀기대군댜군부지광소지 고불종.

 

깊은 밤이 되자 흉노 병사들은 또 한나라의 복병이 주변에 잠복하고 있다가 야음을 타서 자신들을 습격할 것을 걱정하여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철수했다날이 밝자 이광은 자신들의 본대가 주둔하는 곳으로 돌아왔다이때까지 본대에서는 이광의 소재지를 몰랐기 때문에 뒤따라가서 돕지 못했다.


 

居久之孝景崩武帝立左右以為広名將也於是広以上郡太守為未央衛尉而程不識亦為長樂衛尉程不識故與李広倶以邊太守將軍屯.

거구지 효경붕 무제립 좌우이광명장야 어시솽이상군태수위미앙위위 이정불식역위장장락위위.정불식도여이광구이변태수장군둔.

 

한참 후 한나라의 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무제(武帝)가 즉위했다무제 측근의 대신들은 이광을 명장으로 여겨 그를 상군태수에서 미앙궁(未央宮황제의 소재지)의 위위(衛尉궁궐방위를 담당한 무관)로 임명시키도록 하였고정불식(程不識또한 장락궁(長樂宮태후의 소재지)의 위위로 전임시켰다정불식은 예전에 이광과 마찬가지로 변경 군()의 태수와 주둔지의 장군을 겸임한 인물이었다.

 

及出撃胡而広行無部伍行陳就善水草屯舎止人人自便不撃刀鬥以自衛莫府省約文書籍事然亦遠斥候未嘗遇害.

급출격호 이광행무부오행진 취선수초둔 사지 인인자경 불격도투이자위 막부성약문서적사 연적원척후 미상우해.

 

흉노로 출격할 때이광의 부대는 엄밀한 편성과 진형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단지 좋은 물과 풀이 있는 지대에서 주둔하여 머물면서 병사마다 편하게 행동하게 했다밤에 순번을 돌며 조두(刁斗낮에는 솥으로 쓰고밤에는 징으로 사용함)를 쳐서 스스로를 방비하지도 않았고막부(幕府)에서는 문서나 장부와 같은 것을 최대한 간소화시켰다그러나 척후병을 멀리 배치하여 적의 동향을 정찰했기 때문에 일찍이 큰 피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

 

程不識正部曲行伍営陳撃刀鬥士吏治軍簿至明軍不得休息然亦未嘗遇害不識曰:「李広軍極簡易然虜卒犯之無以禁也而其士卒亦佚樂鹹樂為之死我軍雖煩擾然虜亦不得犯我.

정불식정부곡행오영진 격도투 사리치군부지명 군부득휴식 연역미상우해불식왈 이광군극간이 연노졸범지 무이금야 이기사졸역일락 함악위지사아군수번요 연노역부득범아

 

이와 달리 정불식은 부대의 편성과 진형을 엄격하게 갖추고 밤마다 순번을 돌며 조두를 쳐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고군관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장부를 말끔하게 정리하도록 했다이 때문에 그의 군대는 충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일찍이 피해를 당한 적도 없었다정불식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광은 군대를 지극히 간단하고 쉽게 통솔하지만 적이 갑작스럽게 침범해오면 막기 힘들다그러나 그의 사졸들은 편하고 즐겁게 지내 모두 기꺼이 이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반면에 내가 지휘하는 군대는 비록 번거롭고 성가신 점이 있어도 그래도 적들도 감히 아군을 침범할 수 없다.’

 

是時漢邊郡李広程不識皆為名將然匈奴畏李広之略士卒亦多樂従李広而苦程不識程不識孝景時以數直諫為太中大夫為人廉謹於文法.

시시한변군이광 정불식개위명장 연흉노외이광지략 사졸역다락종이광이고정불식정불식효경시이수직간위태중대부위인염 근어문법.

 

이 때 한나라 변경 지역의 군 태수였던 이광과 정불식은 모두 명장으로 알려졌다그러나 흉노는 이광의 모략을 두려워했으며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기를 좋아했고 정불식을 따르기를 고통스럽게 여겼다정불식은 경제 때에 자주 직간(直諫)을 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그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진지하여 조정의 법령조문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後漢以馬邑城誘単於使大軍伏馬邑旁谷而広為驍騎將軍領屬護軍將軍是時単於覚之漢軍皆無功후한이마읍성유선어 사대군복마읍방곡 이광위효기장군 영속호군장군시시선어각지 거 한군개무공.

 

그 후 한나라는 마읍성(馬邑城)으로서 선우(單于)를 유인하며대군을 마읍 주변의 산골짜기에 매복시켜 놓았다그 때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이 되어 호군장군(護軍將軍한안국)에게 예속되어 있었다당시에 선우가 이 책략을 알아차리고 돌아가자 한나라 군사는 모두 전공을 세울 수가 없었다.

 

其後四歳広以衛尉為將軍出鴈門撃匈奴匈奴兵多破敗広軍生得広単於素聞広賢令曰:「得李広必生致之.胡騎得広広時傷病置広両馬閒絡而盛臥広.

기후사세 광이위위위장군 출안문격흉노흉노병다 파패광순 생득광선어소문광현 영왈 득이광필생치지’ 호기득광 광시상병 치광양마간 결이성와광.

 

그 후에 4년이 지났는데이광은 위위(衛尉)에서 장군으로 전임되어 안문(雁門)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했다이 때에 흉노는 병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광의 군대를 격퇴하고 이광을 생포했다선우는 지난 한때에 이광이 현명한 장수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했다. ‘반드시 이광을 생포해 데려와라!’ 흉노 기병이 이광을 체포할 때에 그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두 필의 말 사이에 그물을 연결하여 그 위에 눕혀서 끌고 갔다.

 

行十餘里広詳死睨其旁有一胡児騎善馬広暫騰而上胡児馬因推墮児取其弓鞭馬南馳數十里複得其餘軍因引而入塞.

행십여리 광상사 예기방유일호아기선마 광잠등이상호아마 인추타아 취기숭 편마남치수십리 복득기여군 인인이입새.

 

이렇게 10여 리를 가며 이광이 짐짓 죽은 척하고 있다가 주변을 흘겨보았는데한 흉노 소년이 좋은 말을 타고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이에 이광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흉노 소년의 말에 올라타서 소년을 말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활까지 탈취했다그런 후에 말에 채찍질 가해 남쪽으로 수십 리를 내달리다가 잔여부대를 만나 그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요새로 들어왔다.

 

匈奴捕者騎數百追之広行取胡児弓射殺追騎以故得脫於是至漢漢下広吏吏當広所失亡多為虜所生得當斬贖為庶人.

흉노포자기수백추지 광행취호아궁 사살추기 이고득탈어시지한 한하광리리당광소실망다 위노소생득 당참 속위서인.

 

흉노는 수백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추격하면서 그를 다시 체포하려고 했으나이광은 도망가는 와중에 탈취한 흉노 소년의 활로 추격해오는 기병을 사살했기 때문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이런 천신만고 끝에 한나라로 돌아오니조정에서는 이광을 심판관에게 넘겨 심판을 받게 했다심판관은 이광이 많은 부하와 전마를 잃고 또 적에게 생포되었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참수형에 처해야한다고 판결했으나 이광은 속죄금으로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頃之家居數歳広家與故潁陰侯孫屏野居藍田南山中射猟嘗夜従一騎出従人田閒飲還至霸陵亭霸陵尉酔呵止広広騎曰:「故李將軍.尉曰:「今將軍尚不得夜行何乃故也!止広宿亭下.

경지 가거수세광가여고영음후손병야거남전산중사렵상야종일기출 종인전간음환지패릉정 패릉위취 아지광광기왈 고이장군’ 위왈 금장근상부득야행 하내고야’ 지광숙정하.

 

순식간에 세월은 흘려가서 이광이 집에 거주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이광은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의 손자(관강灌强)와 더불어 은거하면서 가끔 남전현(藍田縣)의 남산(南山)에서 사냥을 하고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밤에 이광은 시종 한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가 지인들과 시골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패릉정(霸陵亭)에 이르렀다그 때에 이곳을 지키던 정위(亭尉)가 술에 취해 호통을 치며 이광의 통행을 저지했다그러자 이광의 시종이 말했다. ‘이 분은 전직 이광 장군이시다.’ 이에 정위가 대수롭지 않게 비꼬아서 말했다. ‘설령 현직 장군이라도 야간 통행은 할 수 없는 법인데하물며 전직 장군이야 더 설명한 필요도 없다!’ 그리고 곧 바로 이광의 통행을 제지시키고패릉정 아래에다 구류한 적이 있었다.

 

居無何匈奴入殺遼西太守敗韓將軍後韓將軍徙右北平於是天子乃召拝広為右北平太守広即請霸陵尉與倶至軍而斬之.

거무하 흉노입살요서태수 패한장군 후한장국사우북평어시천자내소뱌광위우북평태수광즉청패릉위여구 지군이참지.

 

얼마 뒤에 흉노가 침입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한안국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니한장군은 그 책임을 지고 우북평군(右北平郡)의 태수로 좌천된 후에 병사했다이에 무제는 이광을 다시 불러들여 우북평군 태수로 임명하였는데이 때에 이광은 황제에게 패릉의 정위도 함께 데려 갈 것을 청했다그리하여 패릉의 정위가 군영에 이르렀는데이광은 곧바로 그 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広居右北平匈奴聞之號曰漢之飛將軍避之數歳不敢入右北平.

이광우북평 흉노문지 호왈 한지비장군’ 피지수세 불감입우불평.

 

이광이 우북평군의 태수로 부임하자 흉노는 그 소식을 듣고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다.’라고 일컫고그를 회피하여 수년 동안 감히 우북평군을 침범하지 않았다.

 

 

広出猟見草中石以為虎而射之中石沒鏃視之石也因複更射之終不能複入石矣広所居郡聞有虎嘗自射之及居右北平射虎虎騰傷広広亦竟射殺之.

굉출렵 견화중성 이위호이사지 중석몰촐 시지석야인복경사지 종불능복입석의광소거군문유호 상자사지급거우북평사호 호등상광 광역경사살지.

 

이광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풀 숲의 돌을 호랑이인 줄 알고 화살을 쏘았는데화살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그러나 자세히 보니 원래 돌이었다이에 다시 쏘아보았는데끝내 화살촉은 돌에서 튕겨 나왔다이광은 일찍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지역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언제나 친히 나가 활로 잡으려고 했다우북평군에 있을 때에 호랑이를 활로 쏜 적이 있었는데호랑이가 껑충 뛰어올라 그에게 달려들어서 상처를 입혔으나 결국은 이광은 그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広廉得賞賜輒分其麾下飲食與士共之終広之身為二千石四十餘年家無餘財終不言家産事広為人長猿臂其善射亦天性也雖其子孫他人學者莫能及広

광렴 득상사첩분기휘하 음식여사공지종광지신 위이천석사십여년 가무여재 종불신가산사광위인장 원고 기선사역천성야 수기자손타인학자 막능급광.

 

이광은 매우 청렴결백하여 상을 받으면 항상 그의 부하들에게 분배해주었고음식은 사졸들과 함께 먹었다이광은 종신토록 봉록 2천석을 받는 관직에 40여 년 동안 있었지만 집안에 모아놓은 재물이 없었고시종일관 집 재산에 관한 일은 말하지도 않았다이광은 신체가 크고 장대하며 팔이 원숭이처럼 길었다이 때문인지 그가 활을 잘 쏘는 것도 천부적이었는데비록 그의 자손이나 다른 자들이 궁술을 배워도 이광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広訥口少言與人居則畫地為軍陳射闊狹以飲専以射為戯竟死.

광눌구소언 여인거즉화지위군진 사활협이음전이사위희 경사.


이광은 말이 어눌했기 때문에 말수도 적었고 남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땅 위에 군진(軍陣)을 그려놓고활쏘기 내기를 하여 지는 자에게 벌주를 마시게 했다그는 오로지 활쏘기를 낙으로 삼아다 일생을 마쳤다.



広之將兵乏絶之処見水士卒不盡飲広不近水士卒不盡食広不嘗食.

광지장병 핍절지처 견수 사졸불진음 광불근수 사졸부진식 광불상식.

 

이광이 병사를 이끌 때에 식수와 식량이 결핍된 지방에 이르면 사졸들이 물을 먼저 다 마시지 아니하면 물 근처에도 가지도 않았고사졸들이 먼저 밥을 다 먹기 전에는 일찍이 밥을 먹지 않았다.

 

寛緩不苛士以此愛樂為用.

관완불가 사이차애요위용.

 

그가 사졸을 대할 때언제나 관대하고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졸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기꺼이 전심전력을 다했다.

 

其射見敵急非在數十歩之內度不中不発発即應弦而倒用此其將兵數困辱其射猛獣亦為所傷雲.

기사 견적급 비재수십보지내 도불중불발 발즉응현이도용차 기장병수곤욕 시사먕수역위소상운.

 

그의 활쏘기 방법은 적이 갑자기 다가와도 수십 보 이내에서 명중시키지 못하겠다고 판단하면 쏘지 않았다그러나 일단 적을 쏘면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적들은 땅바닥에 쓰러졌다이 때문에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출격할 때면 자주 곤욕을 치렀고그가 맹수를 쏠 때에도 이런 태도 때문에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居頃之石建卒於是上召広代建為郎中令元朔六年広複為後將軍従大將軍軍出定襄撃匈奴諸將多中首虜率以功為侯者而広軍無功.

거경지 석건졸 아시상소광대건위낭중령원삭육년 광복위후장군 종대장군군출정양 격흉노제장다중수노솔 이공위후자 이광군무공.

 

얼마 뒤에 석건(石建)이 죽었다이에 황제는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해서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았다원삭(元朔) 6(서기전 123), 이광은 다시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되어 대장군(大將軍위청이 이끄는 군대를 따라 정양군(定襄郡)에서 나아가 흉노를 공격했다이 때에 여러 장수들이 적을 참수하거나 생포한 전공을 세워기 때문에 후작(侯爵)에 봉해졌는데이광의 부대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後二歳広以郎中令將四千騎出右北平博望侯張騫將萬騎與広倶異道行可數百里匈奴左賢王將四萬騎囲広広軍士皆恐広乃使其子敢往馳之.

후이세 광이낭중령장사천기출우북평 박망후장건장만기여광구 이도행가수백리 흉노좌현왕장사만기위광 광군사개공 광내사기자감왕치지.

 

2년이 지난 뒤에 이광은 낭중령으로서 4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우북평군에서 출격했고박망후(博望侯장건(張騫)도 일만 명을 거느리고 이광과 더불어 출격했는데 각기 다른 길로 행군하는데 이광의 부대가 수백 리 정도를 행군했을 때에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4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광의 부대를 포위했다이광의 군사들은 모두 그 광경을 목도하고 두려워서 크게 당황하자 이광은 자신의 아들인 이감(李敢)을 적진으로 보냈다.

 

敢獨與數十騎馳直貫胡騎出其左右而還告広曰:「胡虜易與耳.

감독여수십기치 직관호기 출기좌우이환 고광왈 호노이여이

 

이감은 홀로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재빠르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단번에 흉노의 기병의 포위를 뚫고적진 좌우로 돌아 나와 이광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흉노 오랑캐 따위는 상대하기 쉬울 따름입니다!’

 

軍士乃安広為圜陳外嚮胡急撃之矢下如雨漢兵死者過半漢矢且盡.

군사내안광위원진외향 호급격지 시하여우한병사자과반 한시차진.

 

이 광경을 본 이광의 군사들은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다이광은 원형의 진을 치고 모두 밖을 향해 대항토록 했는데흉노가 맹렬하게 공격했다이 때 흉노가 이광의 부대로 쏜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이로 인해 한나라의 군사는 과반수가 사망했고대항할 화살 또한 거의 다 써버리고 말았다.

 

広乃令士持満毋発而広身自以大黃射其裨將殺數人胡虜益解會日暮吏士皆無人色而広意気自如益治軍軍中自是服其勇也.

광내영사지만무발 이광신자이대황사시비장 살수인 호로익해회일모 사사갸무인색 이광의기자여 익치군군중자시복기용야.

이에 이광은 곧 군사들에게 활로 적을 조준하되 쏘지는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자신은 대황(大黃)으로 불리는 석궁을 가지고 적의 비장(裨將부장군)을 쏘아 맞추고또 몇 명의 사살하니 그들의 포위망이 점차 풀어졌다때마침 날이 저물자 지친 군관과 병사들은 모두 핏기가 가셔 창백해졌지만 이광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의기양양했다그리고 더욱 힘을 내서 군대를 통솔하였다이로 인해 군중은 그의 용기에 감복했다.

 

明日複力戦而博望侯軍亦至匈奴軍乃解去漢軍罷弗能追是時広軍幾沒罷帰漢法博望侯留遅後期當死贖為庶人広軍功自如無賞.

명일 복역전 이박망후군역지 흉노군내해거안군파 불능추시시광군기몰 파귀한법 박망후유지후기 당사 속위서인광군공자여 무상.

 

이튿날 다시 힘을 내서 싸웠는데박망후의 군대 역시 도착하자 흉노 군은 할 수없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그러나 한나라 군대는 피곤에 지쳐서 추격할 수가 없었다이때 이광의 군대는 거의 궤멸된 상태라서 남은 병사들을 추스러서 귀환했다한나라의 법에 의하면 박망후는 이광과 약정된 기일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죄는 참수에 해당되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이광은 군공(軍功)과 과오가 서로 비슷해 이렇다 할 포상은 없었다.

 

広之従弟李蔡與広倶事孝文帝景帝時蔡積功勞至二千石孝武帝時至代相以元朔五年為軽車將軍従大將軍撃右賢王有功中率封為樂安侯.

초 광지종제이채여광구사효문제경제시 채적공노지이천석효무제시 지대상이원삭오년위경거장군 종대장군격우현왕 유공중률 봉위낙안후.

 

처음에 이광의 사촌 동생인 이채(李蔡)과 이광은 모두 함께 문제를 섬겼다경제 때에 이채는 공적을 쌓아 2천석의 봉록을 받게 지위에 올랐다그는 문제 때에는 대()나라의 승상이 되었다원삭 5(서기전 124)에는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서 우현왕(右賢王)을 공격에 참여했는데이 때에 세운 공로에 적합한 포상을 받아 낙안후(樂安侯)로 봉해졌다.

 

元狩二年中代公孫弘為丞相蔡為人在下中名聲出広下甚遠然広不得爵邑官不過九卿而蔡為列侯位至三公.

원수이년중 대공손홍위승상채위인재하중 명성출광하심원 연광부득작읍 관불과구경 이채위열후 위지삼공.

 

원수(元狩) 2(서기전 121)에 이채는 공손홍(公孫弘)을 대신해 승상이 되었다당시 이채의 인품에 대한 평가는 하위권의 중등 정도이었고그의 명성도 이광보다 훨씬 뒤떨어졌다그러나 이광은 작위나 봉읍도 얻지 못하고관직도 구경(九卿)을 능가하지 못했으나이채는 열후(列侯)에 봉해졌고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르렀다.

 

諸広之軍吏及士卒或取封侯広嘗與望気王朔燕語:「自漢撃匈奴而広未嘗不在其中而諸部校尉以下才能不及中人然以撃胡軍功取侯者數十人而広不為後人然無尺寸之功以得封邑者何也? 豈吾相不當侯邪? 且固命也?」

제광지군리급가졸혹취봉후광상여망기왕살연어 왈 자한격흉노아광미상부재기중 이재부교위이하 재능불급중인 연이격호군공취후자수십인 이광불위후인 연무척촌지공이득봉읍자 하야 이오상부당후사 차고명야

 

이광의 부하였던 여러 군관과 병졸들 중에도 이미 제후로 봉해진 자도 있었다이광은 일찍이 운기(雲氣)와 길흉을 점쳤던 유명한 점성가 왕삭(王朔)과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에서 흉노를 정벌하기 시작한 뒤부터 저는 그 주역이 아닌 적이 없었소그러나 여러 부대의 교위(校尉이하의 인물 중에서 그 재능이 중등 수준에도 못 미치는데흉노와 전투 중에 세운 공으로 제후의 작위를 받은 자가 수십 명이나 됩니다하지만 저는 남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봉읍(封邑)을 얻을만한 작은 공마저 없는 것은 무슨 원인입니까설마 저의 관상이 제후로 온당하지 못합니까아니면 이미 정해진 운명 탓이오?’

 

朔曰:「將軍自念豈嘗有所恨乎?」広曰:「吾嘗為隴西守羌嘗反吾誘而降降者八百餘人吾詐而同日殺之至今大恨獨此耳.

삭왈 장군자념 이상유소한호 광왈 오상위롱서수 강상반 오유이항 항자팔백여인 오사이동일살지지금대한독차이

 

왕삭이 물었다.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에 뼈저리게 뉘우칠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이광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일찍이 농서 태수를 지낼 때에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그때 제가 그들에게 항복을 권유해서 투항한 한 자가 8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하지만 이는 저의 속임수였고기실 투항했던 자들을 같은 날에 모두 죽였습니다지금까지 크게 뉘우치는 것은 단지 이 일뿐입니다.’

 

朔曰:「禍莫大於殺已降此乃將軍所以不得侯者也.

삭왈 화막대어살이항 차내장군소이부득후자야

 

그러자 왕삭은 말했다. ‘화근 중에 이미 투항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이것이야말로 장군이 제후로 봉해지지 못하는 진정한 원인입니다.’

 

後二歳大將軍驃騎將軍大出撃匈奴広數自請行天子以為老弗許良久乃許之以為前將軍是歳元狩四年也.

후이세 대장군 표기장군대출격흉노 광수자청행천자이위노 불허 양구냐허자 이위전장군시세 원수사년야.

 

이로부터 2년 후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대거로 흉노를 공격하고자 했다이광은 여러 차례 자신도 출정하기를 청했으나 황제는 그가 연로하다고 여겨서 허락하지 않았다그러다가 한참 뒤에 그의 참전을 승낙하고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았다이해가 원수 4년이었다.




広既従大將軍青撃匈奴既出塞青捕虜知単於所居乃自以精兵走之而令広並於右將軍軍出東道東道少回遠而大軍行水草少其勢不屯行.

광기종대장군청격흉노 기출새 철포로지선어소거 냐자이정병주지 이영광병어우장군군 출동도동도소회원 이대군행수초소 기세불둔행.

 

그리하여 이광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로 출격했다멀리 변방으로 나간 뒤에 위청은 흉노의 포로를 잡아서 심문 끝에 선우의 소재지를 파악하게 되었다이에 대장군은 친히 정예 병사를 이끌고 곧바로 선우의 소재지로 쳐들어갔고이광에게는 우장군(右將軍조이기(趙食其)의 부대와 더불어 동쪽 길로 출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그런데 동쪽 길은 조금 멀리 우회하는 길로 대군이 행군하는 도중에 물과 풀이 적어 병사들이 결집시키고 서둘러 뒤쫓아 갈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다.

 

広自請曰:「臣部為前將軍今大將軍乃徙令臣出東道且臣結髪而與匈奴戦今乃一得當単於臣願居前先死単於.

광자청왈 신부위전장군 금대장군내사영신출동도 차신결발이여흉노전 금내일득당선어신원거전 선사선어

 

이 때문에 이광은 친히 대장군에게 이렇게 청했다. ‘신의 소임은 전장군(前將軍)인데지금 대장군께서 저를 동쪽 길로 돌아서 출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은 젊을 적부터 흉노와 격전을 벌였지만 오늘에서야 선우와 직접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원컨대 신이 선봉에 나서서 가장 먼저 선우와 결전을 치룰 수 있게 해주십시오.’

 

大將軍青亦陰受上誡以為李広老數奇毋令當単於恐不得所欲而是時公孫敖新失侯為中將軍従大將軍大將軍亦欲使敖與倶當単於故徙前將軍広.

대장군청역음수상계 이위이광노 수기 무영당선어 공부득소욕이시시공손오신실후 위중장군종대장군 대장군역욕서오여구당선어 고사전장군광.

 

그러나 대장군 위청도 이미 무제에게 이광은 연로하고 운수가 기구하여 선우와 대적해도 아마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그가 직접 출전하는 것을 만류하라고 훈계를 받았다이때 공손오(公孫敖)가 제후의 작위를 상실하고 중장군(中將軍)으로 강등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진하여 다시 전공을 세우길 간절하게 원했다대장군도 공손오로 하여금 자기와 더불어 선우를 대적하게 했기 때문에 전장군 이광의 소임을 바꾸어 선우와 직접 대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広時知之固自辭於大將軍大將軍不聴令長史封書與広之莫府:「急詣部如書.広不謝大將軍而起行意甚慍怒而就部引兵與右將軍食其合軍出東道軍亡導或失道後大將軍.

광시지지 고자사어대장군대장군불청 영장사봉서여광지막부 왈 급지부 여서’ 광불사대장군이기행 의심온노이취부 인병여우장군식이합군출동도군망도 혹실도 후대장군.

이광은 당시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으나친히 대장군에게 결전의 의사를 표시를 하고 소임을 바꾸는 것을 거절했다그러나 대장군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장사(長史)에게 명령서를 이광의 막부로 보내어 이렇게 지시했다. ‘서둘러서 소속 부대로 가서 명령서의 지시대로 따르도록 하시오.’ 이에 이광은 대장군에게 작별인사도 드리지 않고 출발했다그는 매우 격노하면서 자신의 부대에 돌아가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우장군 조이기의 군대와 더불어 동쪽 길로 진군했다그러나 군중에 향도(嚮導)가 없어서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가 대장군과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大將軍與単於接戦単於遁走弗能得而還南絶幕遇前將軍右將軍広已見大將軍還入軍大將軍使長史持糒醪遺広因問広食其失道狀青欲上書報天子軍曲折.

대장군여선어접전 선어순주 불능득이환남절막 우전장군 좌장군광이견대장군 환입군 대장군사장사지비료유광 인문광 식이실도장 청욕상서보천자군곡절.

이에 앞서 대장군은 선우와 접전을 벌였는데선우가 도주해 버리자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고 있었다대장군의 부대는 남쪽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돌아오고 있었는데그때서야 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의 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이광이 대장군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왔다곧이어 대장군은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마른 음식과 탁주를 이광에게 보내어 노고를 치하하면서 더불어 이광과 조이기의 부대가 길을 잃은 헤매던 정황에 대해서 물었다대장군 위청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그간의 우여 곡절했던 상황을 보고하려 할 뿐이었는데뜻밖에도 이광은 회답하지 않았다.

 

広未対大將軍使長史急責広之幕府対簿広曰:「諸校尉無罪乃我自失道吾今自上簿.

광미대 대장군사장사급책광지막부대부광왈 제교위무죄 내아자실도오금자상부

 

그러자 대장군은 또 장사를 파견하여 이광의 군영에서 장부를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교위를 소환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이에 이광이 여러 교위들에게는 죄가 없고내 자신이 길이 잃고 헤맨 것이니지금 직접 가서 심문을 받겠다고 하였다.

 

至莫府広謂其麾下曰;「広結髪與匈奴大小七十餘戦今幸従大將軍出接単於兵而大將軍又徙広部行回遠而又迷失道豈非天哉且広年六十餘矣終不能複対刀筆之吏.

지막부 광귀기휘하왈 광결발여흉노대소칠십여전 금행종대장군출접선어병 이대장군우사광부행회원 이우미실도 이비천재 차광년육십여의 종불능복대도필지리

 

그리고 이광은 군영의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철나고부터 지금까지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벌였다이번에도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출전해 선우의 군사와 직접 교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대장군이 또 나의 소임을 바꿔서 부대를 멀리 돌아 행군하도록 했고또 길까지 잃고 헤매었으니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또 내 나이가 이미 육십여 세가 되었는데종국에 다시 도필리(刀筆吏문서를 작성하는 하급관리따위에게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

 

遂引刀自剄広軍士大夫一軍皆哭百姓聞之知與不知無老壯皆為垂涕而右將軍獨下吏當死贖為庶人수인도자경광군사대부일군개곡백성문지 지여부지 무노장개위수체이우장군독하리 당사 속위서인

 

그러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고 말았다이 광경을 지켜본 이광의 부하 관리와 전 군사들은 모두 대성통곡했다백성들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광을 알건 모르건 간에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우장군 조이기는 법관에게 넘겨져 심문 끝에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광의 가족 관계>

 

広子三人曰當戸為郎天子與韓嫣40)嫣少不遜當戸撃嫣嫣走於是天子以為勇.

광자삼인 왈당호 초 감 위랑천자여한언희 언소불손 당호격언 언주어시천자이위용.

 

이광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바로 이당호(李當戶), 이초(李椒), 이감(李敢)으로 모두 낭관(郎官)이 되었다한번은 황제가 총애했던 한언(韓嫣)과 더불어 놀았는데한언이 황제에게 다소 불손한 태도를 보이자 이당호가 그 자리에서 바로 한언을 치자 한언이 놀래서 줄행랑을 쳤다이에 황제는 이당호가 용감하다고 여겼다.

 

當戸早死拝椒為代郡太守皆先広死當戸有遺腹子名陵広死軍時敢従驃騎將軍.

당호조사 배초위대군태수 개선광사당호유유복자명릉광사군시 감종표기장군.

 

그러나 이당호가 일찍 죽자황제는 이초(李椒)를 대군태수(代郡太守)로 임명했으나 모두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이당호에게는 유복자가 있었는데그의 이름은 릉()이었다이광이 군중에서 죽을 때이감(李敢)은 마침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출전 중이었다.

 

広死明年李蔡以丞相坐侵孝景園壖地當下吏治蔡亦自殺不対獄國除.

광사명년 이채이승상좌침효경원연지 당하리치 채역자살 불대옥 국제.

 

이광이 죽은 그 다음해이광의 사촌동생인 이채(李蔡)는 승상의 신분으로 경제(景帝능원(陵園)의 빈터를 무단으로 침범한 죄로 법관에게 넘겨져 처벌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그러자 이채는 심문 받기가 싫었기 때문에 자살하고 말았고그의 봉국(封國)은 없어졌다.

 

李敢以校尉従驃騎將軍撃胡左賢王力戦奪左賢王鼓旗斬首多賜爵関內侯食邑二百戸代広為郎中令.

이감이교위종표기장군격호좌현왕 역전 착좌련왕고기 참수다 사작관내후 식읍이백호 대광위낭중령.

 

이감은 교위(校尉)가 되어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했다이때 목숨을 걸고 전투하여 좌현왕의 군기와 북을 탈취하고 많은 적을 참수하는 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란 작위와 식읍 2백호를 하사받았고이광을 대신해서 낭중령(郎中令)이 되었다.

 

頃之怨大將軍青之恨其父乃撃傷大將軍大將軍匿諱之居無何敢従上雍至甘泉宮猟驃騎將軍去病與青有親射殺敢去病時方貴幸上諱雲鹿觸殺之.

경지 원대장군청지한기부 내격상대장군 대장군닉위지거무하 감종상옹 지감천궁렵표기장군거병위청유친 사살감거병시방귀행 상위운록촉살지.

 

얼마 후이감은 대장군 위청이 자기 부친을 배척했던 것에 원한을 품고 대장군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혔지만대장군은 이 사건을 감추었다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감은 무제를 수행하여 옹현(雍縣)에 가서 감천궁(甘泉宮)에 도착해 사냥했다이 때에 위청의 생질이었던 표기장군 곽거병이 이감이 위청을 공격했던 사실을 알고 괘심하게 여겨서 활로 쏘아 죽였다이 때에 곽거병은 바야흐로 지위가 존귀해졌고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무제는 진상을 은폐하고이감은 사냥하다가 사슴에 부딪쳐서 죽었다고 했다.

 

居歳餘去病死而敢有女為太子中人愛幸敢男禹有寵於太子然好利李氏陵遅衰微矣.

거세여 거병사이감유녀위태자중인 애행 감용우유총어태자 연호리 이씨능지쇠미의.

 

그 후 일 년 남짓 지나자 곽거병도 병사했다이감에게 딸이 있었는데태자의 중인(中人시첩)이 되어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그 덕분에 이감의 아들인 이우(李禹)도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이익만을 탐했기 때문에 이씨 가문은 차츰 쇠락되고 말았다.

 

<이릉>

 

李陵既壯選為建章監監諸騎善射愛士卒天子以為李氏世將而使將八百騎嘗深入匈奴二千餘里過居延視地形無所見虜而還拝為騎都尉將丹陽楚人五千人教射酒泉張掖以屯衛胡.

이릉기장 선위건장감 감제기선사 애사졸천자이의이씨세장 이사장팔백기상심입흉노이천여리 과거연시지형 무소견노이환배위지도위 장단양초인오천인 교사주천 장액이둔위호.

 

이당호의 아들인 이릉(李陵)이 장년이 되자 건장궁감(建章宮監)으로 선발되어 우림군(羽林軍)의 기병들을 감독했다이릉은 궁술에 능했고사졸들을 아꼈다황제는 이씨 가문이 대대로 무장이었던 것을 배려하여 이릉에게 기병 8백 명을 통솔하게 했다이릉은 일찍이 흉노의 경내 2천여 리나 깊숙이 들어가 거연(居延)을 지나 현지의 형세를 살폈으며적에게 들키지 않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조정에서는 그를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하여 단양(丹陽)의 초나라 사람 5천명을 거느리고 주천(酒泉), 장액(張掖일대에서 주둔하면서 궁술훈련을 시켜 흉노의 침입에 방비토록 했다.

 

數歳天漢二年秋弐師將軍李広利將三萬騎撃匈奴右賢王於祁連天山而使陵將其射士歩兵五千人出居延北可千餘里欲以分匈奴兵毋令専走弐師也陵既至期還而単於以兵八萬囲撃陵軍陵軍五千人兵矢既盡士死者過半而所殺傷匈奴亦萬餘人.

수세 천한이년추 이사장군이광리장삼만기격흉노우현왕어기연천산 이사릉장기사사보병오천인출거연북가천여리 욕이분흉노병 무령전주이사야능기지기환 이선어이병팔만위격릉군릉군오천인 병시기진 사사자과반 이소살상흉노역만여인.

 

수 년 후인 천한(天漢) 2(서기전 99가을이사장군(貳師將軍이광리(李廣利)로 하여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기련천산(祁連天山)에 있던 흉노 우현왕을 공격하게 했다그리고 이릉에게 보병사수(步兵射手) 5천명을 거느리고 거연에서 출병해서 북쪽으로 약 1천여 리를 진격하도록 했는데이 작전은 흉노의 병력을 분산시키고이사장군에게 집중하여 대결하지 못하기 위함이었다이릉은 약정한 철수 기일이 되어서 퇴각하려고 할 때에 선우가 8만 명의 병력으로 이릉의 부대를 포위하여 공격했다이릉 부대의 5천 명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분투했는데이로 인해 전사자가 과반을 넘을 정도였지만 흉노 병사를 일만여 명이나 사살하였다.

 

且引且戦連鬥八日還未到居延百餘里匈奴遮狹絶道陵食乏而救兵不到虜急撃招降陵陵曰:「無面目報陛下.遂降匈奴其兵盡沒餘亡散得帰漢者四百餘人.

차인차전 연투팔일 환미도거연백여리 흉노차협절도 릉식핍이구병불도 노급격초항릉릉왈 무면목보폐하’ 수항흉노기병진몰 여망산득귀한자사백여인.

 

또 그들은 한편으로 퇴각하면서 한편으로 응전하길 8일간을 지속했다거연에서 일백여 리가 못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흉노가 협곡을 막고 귀로를 차단했다이 때에 이릉의 부대는 식량이 부족했고구원병도 오지 않았다흉노는 맹렬하게 공격을 가하면서 이릉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이에 이릉은 이렇게 독백했다. ‘폐하에게 보고할 면목이 없구나.’ 그리고 바로 흉노에게 항복했다그의 병사는 거의 전사했는데간신히 목숨을 건진 병사들은 각기 흩어져 도피하여 한나라로 귀환한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했다.

 

単於既得陵素聞其家聲及戦又壯乃以其女妻陵而貴之漢聞族陵母妻子自是之後李氏名敗而隴西之士居門下者皆用為恥焉.

선어기득릉 소문기가성 급전우장 내이기녀처릉이귀지한문 족릉모처자자시지후 이씨명패 서롱서지사거문하자개용위치언.

 

선우는 이릉을 얻자평소에 그의 가문에 대한 명성을 들었고전투 중에 씩씩했던 그의 기상을 감안하여 자신의 딸을 이릉에게 시집보내고고귀한 지위를 주었다한나라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식을 모두 죽여 버렸다이후부터 이씨 가문의 명성은 쇠락했고일찍이 이씨 문하에 있던 농서(隴西일대의 사대부들은 모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傳曰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雖令不従其李將軍之謂也

태사공왈 전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불종’ 기이장군지위야?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논어에 이르길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시행되고그 자신이 바르지 아니하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이 구절은 바로 이장군(李將軍)을 두고 한 말인가?

 

餘睹李將軍悛悛如鄙人口不能道辭及死之日天下知與不知皆為盡哀.

여도이장군전전여비인 구불능도사굽사지일 천하지여부지 개위진쇠.

 

내가 이릉 장군을 목도한 적이 있는데성실하고 후덕하기가 마치 시골 사람 같았으며 언변도 능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에 천하에 그를 알던지 몰랐던지 간에 모두 그를 위해서 매우 애통해 하였다.

 

彼其忠実心誠信於士大夫也? 諺曰桃李不言下自成蹊此言雖小可以諭大也.

피기충실심성신어사대부야 언왈 도리불언 하자성혜’ 차언수소 가이유대야.

 

그의 충실한 마음은 참으로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속담에 이르길 복숭아와 오얏은 말이 없어도그 아래에는 저절로 작은 길이 생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다이 말은 비록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속에는 큰 이치가 비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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