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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 魏其武安侯列傳



列傳- 魏其武安侯列傳



<魏其侯 竇嬰>

 

魏其侯竇嬰者, 孝文後従兄子也. 父世観津人. 喜賓客. 孝文時, 嬰為呉相, 病免. 孝景初即位, 為詹事.

위기후두영자 효문제종형자야. 부세관진인. 희빈객. 효문시 영위오상 병면. 효경초즉위 위첨사.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은 효문제(孝文帝) 황후(皇后)의 종형(從兄)의 아들이다. 선대로부터 관진(觀津) 사람이다. 그는 빈객을 좋아했다. 효문제 때 두영은 오()나라 승상(丞相)으로 임명되었었는데 병으로 사임했다. 효경제(孝景帝) 즉위 초에 첨사(詹事)로 임명되었다.

 

梁孝王者, 孝景弟也, 其母竇太後愛之. 梁孝王朝, 因昆弟燕飲. 是時上未立太子, 酒酣, 従容言曰:「千秋之後傳梁王.太後驩. 竇嬰引卮酒進上, :「天下者, 高祖天下, 父子相傳, 此漢之約也, 上何以得擅傳梁王!

양효왕 효경제야 기모두태후애지. 양효왕조 인곤제연음. 시시상미립태자 주감 종용언왈 천추지후전양왕태후환. 두영인치주진상 왈 천하자 고조천하 부자상전 차한지약야 상하이득천전양왕

 

양 효왕(梁孝王)은 효경제의 아우인데, 어머니인 두태후(竇太后)가 그를 매우 총애했다. 한번은 양 효왕이 입조했는데 황제와 형제의 사이였기 때문에 사사로운 주연이 베풀어졌다. 이때 황제가 아직 태자를 책립하지 않았었는데 주흥이 무르익자 황제가 편하게 양 효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이 죽은 뒤에 제위(帝位)를 양왕(梁王)에게 주겠노라.’ 두태후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이때 두영이 일어나 술잔을 들어 황제에게 술을 올리며 이렇게 아뢰었다. ‘천하는 고조 황제의 천하로 마땅히 부자간에 서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의 제도규정입니다. 황제께서 무슨 근거로 마음대로 양왕에게 전하실 수 있습니까?’

 

太後由此憎竇嬰. 竇嬰亦薄其官, 因病免. 太後除竇嬰門籍, 不得入朝請.

태후유차증두영. 두영역박기궁 인병면. 태후제두영문적 부득입조청.

 

두태후는 이 때문에 두영을 증오하게 되었다. 두영 역시 첨사의 관직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그런데 태후는 두영의 문적(門籍 :궁중을 출입할 수 있는 표 )를 삭제시켜 매해 조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孝景三年, 呉楚反, 上察宗室諸竇毋如竇嬰賢, 乃召嬰.

효경삼년 오초반 상찰종실제두무여두영현 내소영.

 

효경제 3(서기전 154), ()와 초()나라 등 7국의 반란이 일어났다. 황제가 종실(宗室)과 두씨(竇氏) 일족을 두루 고찰하였는데, 두영만큼 현명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곧 두영을 불렀다.

 

 

嬰入見, 固辭謝病不足任. 太後亦慚. 於是上曰:「天下方有急, 王孫寧可以譲邪?」乃拝嬰為大將軍, 賜金千斤. 嬰乃言袁盎欒布諸名將賢士在家者進之. 所賜金, 陳之廊廡下, 軍吏過, 輒令財取為用, 金無入家者. 竇嬰守滎陽, 監斉趙兵. 七國兵已盡破, 封嬰為魏其侯. 諸遊士賓客爭帰魏其侯.

두입현 고사사병부족임. 태후역참. 어시상왈 천하방유급 왕송영가이양사내배영위대장군 사금천근. 영내언원앙 난포제명장현사재가자진지. 사사금 진지랑하하 군리과 첩영재위위용 굼무입가자. 두영수형양 감제조병. 칠국병이진파 봉영위위기후. 제유사빈객쟁귀위기후.

 

두영이 입조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병으로 인해 임무를 맡기가 부족하다고 굳이 사양했다. 두태후 역시 참회했다. 이에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위급한 상황인데, 왕손(王孫)은 어찌하여 사양만 하시오?’ 이에 두영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고, 황금 1천근을 하사했다. 두영은 원앙(袁盎), 난포(欒布) 등 여러 명장과 현사들 집에 머물고 이는 자들을 추천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하사받은 금은 모두 궁전의 행랑에 진열해두고 군리(軍吏)가 지나갈 때마다 재량껏 가져다 쓰게 했고, 자신의 집으로 금을 가져가지 않았다. 두영은 형양(滎陽)을 지키며 제(), () 지역의 한나라 군사를 감독했다. 칠국의 군대가 이미 다 격파되자 황제는 두영을 위기후(魏其侯)에 봉했다. 그러자 여러 유사(游士)들과 빈객들이 다투어 위기후에게 모여들었다.

 

孝景時毎朝議大事, 條侯魏其侯, 諸列侯莫敢與亢禮.

효경시먀조의대사 조후 위기후 제열후막감여항례.

 

효경제 때 매번 조정에서 대사를 논의할 때면 여러 열후(列侯)들은 조후(條侯) 주아부, 위기후 두영을 감히 자신들과 대등한 예로 대하려 들지 않았다.

 

孝景四年, 立栗太子, 使魏其侯為太子傅. 孝景七年, 栗太子廃, 魏其數爭不能得.

효경사년 입율태자 사위기후위태자부. 효경칠년 율태자폐 위기수쟁불능득.

 

효경제 4(서기전 153)에 율태자(栗太子)를 황태자로 책립하고, 위기후를 태자부(太子傅: 스승)로 삼았다. 그 후 효경제 7(서기전 150)에 율태자가 폐출되자 위기후는 여러 차례 간하여 막으려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魏其謝病, 屏居藍田南山之下數月, 諸賓客辯士説之, 莫能來.

위시사병 병거람전남산지하수월 제빈객변사설지 막능래.

 

이에 위기후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남전(藍田)의 남산(南山) 기슭에서 몇 달 간을 머물렀다. 여러 빈객들과 변사(辯士)들이 찾아가 그를 설득했으나 아무도 그를 돌아오게 하지 못했다.

  

梁人高遂乃説魏其曰:「能富貴將軍者, 上也能親將軍者, 太後也. 今將軍傅太子, 太子廃而不能爭爭不能得, 又弗能死. 自引謝病, 擁趙女, 屏閒処而不朝. 相提而論, 是自明揚主上之過. 有如両宮螫將軍, 則妻子毋類矣.魏其侯然之, 乃遂起, 朝請如故.

양인고수내설위기왈 능부귀장군자 상야 능친장군자 태후야. 금장군부태자 태자폐이부능쟁 쟁불능득 우블능사. 자인사병 옹조녀 병간처이부조. 상제이론 시자명양주상지과. 유여양궁석장군 즉처자무유의위기흐연지 내수기 조청여고.

 

()나라 사람 고수(高遂)가 위기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을 능히 부귀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황제이고, 장군을 능히 친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태후이십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태자의 스승으로, 태자가 폐위될 때에 능히 쟁론을 벌이지 못하고, 쟁론을 벌였는데도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또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병을 핑계로 조나라 미인을 끼고 한가로운 곳으로 물러나와 조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서로 비교해 의론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황제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황제와 태후의 두 궁궐에서 장군에게 분노하여 죄를 물으시면 장군의 처자식은 살아남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위기후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이에 마침내 몸을 일으켜 옛날과 같이 조회에 참석했다.

 

桃侯免相, 竇太後數言魏其侯. 孝景帝曰:「太後豈以為臣有愛, 不相魏其魏其者, 沾沾自喜耳, 多易. 難以為相, 持重.遂不用, 用建陵侯衛綰為丞相.

도후면상 두태후수언위기후. 효경제왈 태후이이위신유야 불상위기 위기자 첨첨자희이 다이. 란이위상 지중수불용 용건릉후위관위승상.

 

도후(桃侯) 유사(劉舍)가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두태후가 여러 차례 위기후를 천거하자 효경제가 두태후에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어찌 제가 자리에 아까워하여 위기(魏其)를 승상에 쓰지 않는다고 여기십니까? 그는 교만하고 스스로 자만하며 경솔한 면이 많으므로 승상으로 써서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기후를 등용하지 않고 건릉후(建陵侯) 위관(衛綰)을 승상으로 삼았다.


(武安侯 田蚡)

 

<전분>

 

武安侯田蚡者, 孝景後同母弟也, 生長陵. 魏其已為大將軍後, 方盛, 蚡為諸郎, 未貴, 往來侍酒魏其, 跪起如子姓.

무안후전분자 효경후동모제야 생장릉. 위기이위대장군후 방성 분위제강 미귀 왕래시주위기 궤기여자성.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은 효경제 황후의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동생으로 장릉(長陵)에서 태어났다. 위기후가 이미 대장군이 되고 난 후에 바야흐로 위세가 드높을 때 전분은 낭관에 불과했고, 존귀한 신분이 아니었다. 그가 위기후의 집에 왕래하며 위기를 모시고 술자리를 할 때에는 꿇어앉고 일어서는 예절이 마치 자식이나 손자과 같았다

 

及孝景晩節, 蚡益貴幸, 為太中大夫.

급효경만절 분익귀행 위태중대부.

 

효경제 만년에 이르러 전분은 점차 존귀하게 되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蚡辯有口, 學槃盂諸書, 王太後賢之. 孝景崩, 即日太子立, 稱制, 所鎮撫多有田蚡賓客計筴, 蚡弟田勝, 皆以太後弟, 孝景後三年封蚡為武安侯, 勝為周陽侯.

분변유구 학반우제서 왕태후현지. 효경붕 즉일태자립 칭제 소진무다유전분빈객계책 분제전승 개이태후제 효경후삼년봉분위무안후 승위주양후.

 

전분은 구변이 좋았고 반우(槃盂)등의 여러 도가 서적을 공부해 왕태후(王太后)는 그가 현명한 자라고 여겼다. 효경제가 붕어하자 당일로 태자(太子)를 세우고 왕태후가 섭정했는데, 이때 전국을 진압하고 민심을 달래는 데 전분의 빈객들이 낸 계책을 많이 채용되었다. 전분과 전분의 아우 전승(田勝)은 모두 왕태후의 동생인 연고로 효경제 후원(後元) 3(서기전 141)에 전분은 무안후(武安侯), 전승은 주양후(周陽侯)에 각각 봉해졌다.

 

武安侯新欲用事為相, 卑下賓客, 進名士家居者貴之, 欲以傾魏其諸將相.

무안후신욕용사위상 비하빈객 진명사가거자귀지 욕이경위기제장상.

 

무안후는 새로 정권을 잡아 승상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어 빈객들을 대하고 한가하게 집에 머물러 있는 명사(名士)를 추천해 그들을 존귀하게 함으로써 위기 등의 여러 장상(將相)들을 약화하려고 했다.

 

建元元年, 丞相綰病免, 上議置丞相太尉.

건원원년 증상관병면 상의치승상 태위.

 

건원(建元) 원년(서기전 140)에 승상 위관이 병으로 사임했다. 황제는 승상, 태위(太尉)의 임명을 조정에서 논의하게 했다.

 

籍福説武安侯曰:「魏其貴久矣, 天下士素帰之. 今將軍初興, 未如魏其, 即上以將軍為丞相, 必譲魏其. 魏其為丞相, 將軍必為太尉. 太尉丞相尊等耳, 又有譲賢名.

작복설무안후왈 위기귀구의 천하사소귀지. 금장군초흥 미여위기 즉상이장군위승상 필양위기. 위기위승상 장군필위태위. 태위 승상존등이 우유양현명

 

적복(籍福)이 무안후에게 말했다. ‘위기후는 존귀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천하의 재능 있는 선비들이 평소부터 그에게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군은 막 일어났기 때문에 위기후만 못합니다. 황제께서 장군을 승상으로 삼으려 하시면 반드시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위기후가 승상이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되실 것입니다. 태위와 승상은 존귀하기가 대등합니다. 또 현자에게 승상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명성을 얻는 것입니다.’

 

武安侯乃微言太後風上, 於是乃以魏其侯為丞相, 武安侯為太尉.

무안후내미언태위풍상 어시내이위기후위승상 무안후위태위.

 

이에 무안후는 태후에게 완곡하게 황제에게 그 뜻을 전하도록 했다. 그 덕분에 위기후가 승상이 되고 무안후가 태위가 되었다.

 

籍福賀魏其侯, 因弔曰:「君侯資性喜善疾悪, 方今善人譽君侯, 故至丞相然君侯且疾悪, 悪人衆, 亦且毀君侯. 君侯能兼容, 則幸久不能, 今以毀去矣.

적복이 위기후를 축하하고 가서 위문하면서 말했다. “군후(君侯)의 천성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지금 착한 사람들이 군후를 칭송하기 때문에 승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군후께서는 또 악한 것을 미워하고 계신데, 악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 역시 또 군후를 비방할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능히 악인도 겸해 포용하셔야 다행히 지위를 오래 보전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곧 비방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될 것입니다.”

 

魏其不聴.

위기불청.

 

위기후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魏其武安倶好儒術, 推轂趙綰為禦史大夫, 王臧為郎中令. 迎魯申公, 欲設明堂, 令列侯就國, 除関, 以禮為服制, 以興太平. 挙適諸竇宗室毋節行者, 除其屬籍.

위기 무안구호유술 추곡조관위어사대부 왕장위랑중령. 영노신공 욕설명당 영열후취국 제관 이례위복제 이흥태평. 거적제두종실무절행자 제기속적.

 

위기후와 무안후는 모두 유학을 좋아했다. 조관(趙綰)을 천거해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고, 왕장(王臧)을 천거해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았으며, () 땅의 신공(申公: 신배)을 장안으로 맞아들여 명당(明堂: 학교)을 설립을 준비했다. 열후들을 자기들의 봉지로 돌아가게 했고, ()을 폐지했으며 예법에 규정에 따라 길흉의 복식(服飾)과 제도를 정하게 하였다. 이로써 태평정치를 진작시키려 했다. 동시에 외척과 종실(宗室) 가운데서 행실이 좋지 못한 자를 들추어내어 견책하고 그들을 족적(族籍: 족보)에서 삭제했다.

 

時諸外家為列侯, 列侯多尚公主, 皆不欲就國, 以故毀日至竇太後.

시제외가위열후 열후다상공주 개불욕취국 이고훼일지두태후.

 

이때 많은 외척들이 열후가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열후들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기에 모두 자신의 봉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 때문에 위기후 등을 비방하는 소리가 날마다 두태후의 귀에게 들어갔다.

 

太後好黃老之言, 而魏其武安趙綰王臧等務隆推儒術, 貶道家言, 是以竇太後滋不説魏其等.

태후호황로지언 이위기 무안 조관 왕장등무융추유술 폄도가언 시이두태후후자불열위기등.

 

두태후는 황로(黃老)학설의 좋아했는데 위기후, 무안후, 조관, 왕장 등은 유가(儒家)의 학설을 융성케 하는데 노력하고, 도가(道家)의 학설을 폄하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두태후는 더욱 위기후 등의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

 

及建元二年, 禦史大夫趙綰請無奏事東宮. 竇太後大怒, 乃罷逐趙綰王臧等, 而免丞相太尉, 以柏至侯許昌為丞相, 武彊侯荘青翟為禦史大夫. 魏其武安由此以侯家居.

급건원이년 어사대부조관청무진사동궁. 두태후대노 내파축조관 왕장등 이면승상 태위 이백지후허창위승상 무강후장청적위어사대부. 위기 무안유차이후가거.

 

건원(建元) 2(서기전 139)에 어사대부 조관이 두황후가 머물었던 동궁에 대한 정무 보고하는 것을 폐지하자고 황제에게 청했다. 두태후는 대노하여 곧바로 조관, 왕장 등을 파면시키고 내쫓았다. 그리고 승상과 태위를 해임시키고, 백지후(柏至侯) 허창(許昌)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무강후(武强侯) 장청적(莊靑翟)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위기후와 무안후는 이로써 열후의 신분만 유지한 채 집에서 한가롭게 머물게 되었다.

 

武安侯雖不任職, 以王太後故, 親幸, 數言事多效, 天下吏士趨勢利者, 皆去魏其帰武安, 武安日益橫.

무안후수불임직 이왕태후고 친행 수언사다효 천하리사추세리자 개거위기귀무안 무안일익횡.

 

무안후가 비록 직책을 못 가지고 있었지만 왕태후와의 연고로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 정사에 대해 의론하고 그의 주장이 많이 채택되어 성과를 보았다. 이 때문에 천하의 권세와 이익을 좇는 관리와 선비들이 위기후를 떠나 무안후에게 의탁했다. 이로 인해 무안후는 날로 더욱 전횡을 일삼았다.

 

 

 

建元六年, 竇太後崩, 丞相昌禦史大夫青翟坐喪事不辦, . 以武安侯蚡為丞相, 以大司農韓安國為禦史大夫. 天下士郡諸侯愈益附武安.

건원육년 두태후붕 승상창 어사대부청적좌상사불면 면. 이무안후분위승상 이대사농한안국위어사대부. 천하사군제후유익부무안.

 

건원 6(서기전 135)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승상 허창과 어사대부 장청책은 두태후의 상사(喪事)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해임되었다. 이에 무안후 전분을 승상으로 삼고, 대사농(大司農) 한안국(韓安國)을 어사대부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천하의 선비와 군수와 제후들은 더욱 무안후를 따르게 되었다.

 

武安者, 貌侵, 生貴甚. 又以為諸侯王多長, 上初即位, 富於春秋, 蚡以肺腑為京師相, 非痛折節以禮詘之, 天下不粛.

무안자 모침 생귀심. 우이위제후왕다장 상초즉위 부어춘추 분이폐부위경사상 비통절절이예굴지 천하불숙.

무안후는 키가 작고 못생겼으나 태어날 때부터 존귀해서 매우 거만했다. 또 당시 제후들과 왕들 중에 연장자가 많고, 황제는 막 즉위해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자기가 외척이자 경사의 승상으로 그들을 가차 없이 깎아내려 예로써 굴복시키지 않으면 천하가 복종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當是時, 丞相入奏事, 坐語移日, 所言皆聴. 薦人或起家至二千石, 権移主上.

당시시 승상입진사 좌어치일 소언개청. 천인혹기가지이천석 권이주상.

 

이때에 이르러 승상 전분이 조정에 입조해 정무를 아뢸 때에는 왕왕 앉아서 반나절씩 이야기해도 황제가 모두 다 들어주었다. 그가 추천하는 사람은 때로는 집에 한가하게 머물러 있는 자를 단숨에 2천석(二千石)의 신분으로 세우기도 해 황제의 권력이 그에게로 옮겨간 듯했다.

 

上乃曰:「君除吏已盡未吾亦欲除吏.

상내왈 군제리기진미 오역욕제리

 

이에 황제가 말했다. ‘승상의 관리 축출이 끝나지 않았는가? 짐도 관리를 정리하고 싶다!’

 

嘗請考工地益宅, 上怒曰:「君何不遂取武庫!

상청고공지익댁 상노왈 군하불수위무고

 

승상은 일찍이 자신의 집을 늘리려고 고공관서(考工官署)의 땅을 요구하자 황제가 노하여 승상은 왜 무기고를 가지려는 거라고 하지 않는가?’ 했다.

 

是後乃退. 嘗召客飲, 坐其兄蓋侯南郷, 自坐東郷, 以為漢相尊, 不可以兄故私橈.

시후내퇴. 상소욕음 좌기형개후남향 자좌동향 이위한상존 불가이형고사요.

이후부터 조금 행동거지를 삼가 하게 되었다. 한번은 일찍이 손님을 초대해 주연을 베풀고 있었는데, 그의 형 개후(蓋侯)는 남향으로 앉게 하고 자신은 동향으로 앉았다. 그 이유는 한나라 승상은 존귀한 지위라 형이라고 해도 사사로이 자신을 굽힐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武安由此滋驕, 治宅甲諸第. 田園極膏腴, 而市買郡県器物相屬於道. 前堂羅鍾鼓, 立曲旃後房婦女以百數. 諸侯奉金玉狗馬玩好, 不可勝數.

무안유차자교 치댁갑제등. 전원극고유 이시가군현기물상속어도. 전당라종고 입곡전 후방부녀이백수. 제후봉금옥구마완호 불가승수,

 

무안후는 이로부터 더욱 교만해져 자신의 저택을 최고로 꾸몄다. 그 정원은 호화롭기가 그지없었고, 그가 전국 군현(郡縣)에 파견하여 각종 물건을 사오는 행렬이 길에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저택의 앞채에는 종과 북을 걸어 두고 곡전(曲旃: 깃발)을 세워두었고, 뒤채에는 부녀가 1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제후들이 그에게 진상한 금은보옥과 개와 말, 완호물(玩好物) 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而嬰失竇太后益疏不用無勢諸公稍自引而怠驁唯灌夫獨否. 故嬰墨墨不得意而厚遇夫也.

이영실두태후 익소불용 무세 제공초자인이태오 유관부독부. 고영묵묵부득의 이후우부야.

 

위기후는 두태후를 잃고 나자 더욱 황제와 소원해져서 중용되지 않았다. 세력이 없어지자 여러 빈객들도 점차 멀어졌고, 심지어 그를 대하는 것이 태만하고 방자해졌다. 오직 관장군(灌將軍)만이 홀로 옛 정분을 잃지 않았다. 위기후가 매일 묵묵하게 뜻을 펴지 못하고 지내면서도 단지 관장군 만은 후하게 대우했다.




(灌夫)

 

潅將軍夫者, 潁陰人也. 夫父張孟, 嘗為潁陰侯嬰舎人, 得幸, 因進之至二千石, 故蒙潅氏姓為潅孟. 呉楚反時, 潁陰侯潅何為將軍, 屬太尉, 請潅孟為校尉.

관장군부자 영음인야. 부부장먕 상위영음후영사인 득행 인진지지이천석 고몽관씨성위관맹. 오초반시 영음후관하위장군 속태위 청관맹위교위.

 

관장군(灌將軍) 관부(灌夫)는 영음(穎陰) 사람이다. 관부의 부친인 장맹(張孟)은 일찍이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의 가신(家臣)이었다. 장맹은 관영의 총애를 받았고 관영의 추천으로 2천석의 봉록을 받는 신분이 되었고 그래서 관씨(灌氏) 성을 따서 관맹(灌孟)이 되었다.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음후 관하(灌何)가 장군이 되어 태위 주아부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는 태위에게 관맹을 교위(校尉)로 천거하였다.

 

夫以千人與父倶. 潅孟年老, 潁陰侯彊請之, 欝欝不得意, 故戦常陥堅, 遂死呉軍中.

부이천인여부구. 관맹년로 영음후강청지 울울부득의 고전상함견 수사오군중.

 

관부는 1천 명을 이끌고 부친과 함께 종군했다. 관맹은 이미 연로하였는데. 영음후가 강하게 그를 태부에게 추천했던 대해 그는 늘 답답하게 여겼다. 그래서 전투에서 항상 적의 견고한 진지를 공격하다가 그로 인해 오나라 군중에서 전사했다.

 

軍法, 父子倶従軍, 有死事, 得與喪帰.

군법 부자구종군 유사자 득여상귀.

 

당시의 군법의 규정에는 부자가 함께 종군해 전투를 나섰다가 한 사람이 전사하면 남은 생존자는 유해와 함께 돌아갈 수 있었다.

 

潅夫不肯隨喪帰, 奮曰:「願取呉王若將軍頭, 以報父之仇.於是潅夫被甲持戟, 募軍中壯士所善願従者數十人. 及出壁門, 莫敢前.

관부불긍수상귀 분왈 원취오왕약장군두 이보부지구어시관부피갑지극 모군중장사소선원종자수십인. 급출벽문 막감전.

 

그러나 관부는 부친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고 격분하여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오왕 혹은 오나라 장군의 목을 베어 부친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때 관부는 갑옷을 입고 창을 쥐고는 군영 중에서 평소 자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따라나서기를 원하는 용사 수십 명을 모집했다. 그러나 군문을 나설 때까지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獨二人及従奴十數騎馳入呉軍, 至呉將麾下, 所殺傷數十人. 不得前, 複馳還, 走入漢壁, 皆亡其奴, 獨與一騎帰.

독이인급종노십수기치입오군 지오장휘하 소살상수십인.부득전 복치환 주입한벽 개망기노 독여일기귀.

 

단지 두 사람과 관부가 데리고 온 노비 십 수 명이 함께 말을 달려 오나라 군영 속으로 돌격했다. 오나라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적군 수십 명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서 다시 말을 달려 돌아왔는데 한나라 진영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관부의 노비들은 모두 죽고 단지 한 기()뿐이었다.

 

夫身中大創十餘, 適有萬金良薬, 故得無死.

부신중대창십여 적유만금양역 고득무사.

 

관부 자신도 몸에 10여 군데의 큰 상처를 입었는데 마침 만금의 가치가 있는 양약이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夫創少瘳, 又複請將軍曰:「吾益知呉壁中曲折, 請複往.

부창소추 우복청장군왈 오익지오벽중곡정 청복왕

 

관부는 상처가 조금 낫자 또다시 장군에게 청원했다. ‘저는 이제 오나라 군영의 사정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청컨대 다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將軍壯義之, 恐亡夫, 乃言太尉, 太尉乃固止之. 呉已破, 潅夫以此名聞天下.

장군장의지 공망부 내언태위 태위냐고지지. 오기파 관부이차명문천하.

 

장군은 그가 용감하고 의협심이 있으나 관부를 잃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곧 태위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태위도 한결 같이 그의 출격을 중지시켰다. 오나라를 격파하고 나자 관부는 이로 인해 천하에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潁陰侯言之上, 上以夫為中郎將. 數月, 坐法去. 後家居長安, 長安中諸公莫弗稱之.

영음후언지상 상이부위중랑정. 수월 좌법거. 후가거장안 장안중제공모불칭지.

 

영음후가 관부의 정황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관부를 중랑장(中郎將)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범법행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로 장안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장안의 여러 공()들 중에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孝景時, 至代相. 孝景崩, 今上初即位, 以為淮陽天下交, 勁兵処, 故徙夫為淮陽太守.

효경시 지대상. 효경붕 금상초즉위 이위회양천하교 경병처 고사부위회양태수.

 

효경제 때에는 관부는 대()나라의 승상 자리에 올랐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지금의 황제가 막 즉위했을 때, 황제는 회양(淮陽)이 천하 교통의 요충지로서 반드시 강대한 군대가 주둔하여 지켜야하는 지역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관부를 옮겨 회양의 태수(太守)로 삼았다.

 

建元元年, 入為太僕. 二年, 夫與長樂衛尉竇甫飲, 軽重不得, 夫酔, 搏甫. , 竇太後昆弟也. 上恐太後誅夫, 徙為燕相. 數歳, 坐法去官, 家居長安.

건원원년 입위태복. 이년 부여장악위위두보음 경중부득 부취 박보. 보두태후곤제야. 상공태후주부 사위연상. 수세 좌법거관 거장안가.

 

건원(建元) 원년(서기전 140)에 관부는 조정에 들어가 태복(太僕)이 되었다. 건원 2년에 그는 장락위위(長樂衛尉) 두보(竇甫)와 술을 마셨는데, 음주예절에서 벗어나 관부가 술에 취하여 두보를 때렸다. 두보는 두태후와 형제간이었다. 황제는 태후가 관부를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서 그를 연()나라 승상으로 옮기게 했다. 몇 년 뒤에 그는 또다시 범법행위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안의 집에 한가롭게 머물렀다.

 

潅夫為人剛直使酒, 不好面諛. 貴戚諸有勢在己之右, 不欲加禮, 必陵之諸士在己之左, 愈貧賎, 尤益敬, 與鈞. 稠人広衆, 薦寵下輩. 士亦以此多之.

관부위인강직사주 불호면유. 귀척제유세재기지우 불욕가례 필릉지 제사재기지좌 유빈천 우익경 여균. 조인광중 천총하배. 사역이차다지.

 

관부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주벽(酒癖)이 있었으나, 면전에서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귀족을 비롯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세력가에게는 좀처럼 예를 표하려 하지 않았고 반드시 그들을 업신여기고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선비들에 대해서 그들이 빈천할수록 특히 더욱 공경하며 평등하게 대우했다. 넓은 뜰에 군중이 모여 있으면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으켜 천거하고 총애했다. 그래서 선비들도 또한 그를 중시하고 칭찬했다.

 

夫不喜文學, 好任俠, 已然諾. 諸所與交通, 無非豪桀大猾. 家累數千萬, 食客日數十百人. 陂池田園, 宗族賓客為権利, 橫於潁川. 潁川児乃歌之曰:「潁水清, 潅氏寧潁水濁, 潅氏族.

부불희문학 오임협 이연락. 제소여교통 무비호걸대활. 가루수천만 식객일수수백인. 파지전원 종족빈객위권리 황어영천. 영천아내가지왈 영수청 관씨녕 영수탁 관씨족

 

관부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협객을 좋아했으며 남들과의 약속은 꼭 실천했다. 무릇 그와 더불어 교유하는 자는 호걸이나 교활한 자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집안에는 수천만 금을 축적해 두었으며 식객이 매일 수십에서 1백여 명에 달했다. 정원에 저수지를 만들어 논밭에 관개가 가능하게 했다. 그의 종족과 빈객들이 권세로 이문을 독점하며 영천(穎川)에서 횡행했기 때문에 영천의 아이들은 그를 이렇게 노래했다. ‘영수(穎水)가 맑으면 관씨(灌氏)는 평안하네. 영수가 탁하면 관씨는 멸족당하리.’

 

潅夫家居雖富, 然失勢, 卿相侍中賓客益衰. 及魏其侯失勢, 亦欲倚潅夫引縄批根生平慕之後棄之者. 潅夫亦倚魏其而通列侯宗室為名高.

관부가거수부 연실세 경상시중빈객익쇠. 급위기후실세 역욕위관부인승비근생평모지후기지자. 관부역의위기이통열후종실위명고.

관부는 비록 재산은 많았지만 권세를 잃었기 때문에 경상(卿相), 시중(侍中), 빈객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위기후도 세력을 잃은 뒤에는 관부를 의지로 삼았고, 평소 자기를 앙모하다가 권세를 잃자 자신을 저버리는 자들을 배척하고자 했다. 관부 역시 위기후에 의지해 열후나 종실과 교류하여 명성을 높이고자 했다.

 

両人相為引重, 其遊如父子然. 相得驩甚, 無厭, 恨相知晩也.

양인상위인중 기유여부자연. 상득환심 무염 한상지만야.

 

두 사람은 서로 이끌고 존중하는 것이 마치 부자지간과도 같았다. 서로 의기가 투합해 매우 기뻐하며 싫증내지 않았고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潅夫有服, 過丞相. 丞相従容曰:「吾欲與仲孺過魏其侯, 會仲孺有服.

관부유복 과승상. 승상종용왈 오욕여중유과위기후 회중유유복

 

관부가 상중(喪中)에 승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승상은 마음대로 편하게 말했다. ‘나는 중유(仲孺: 관부)와 더불어 위기후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마침 중유가 상복을 입고 있어서 가지 못했네.’

 

潅夫曰:「將軍乃肯幸臨況魏其侯, 夫安敢以服為解! 請語魏其侯帳具, 將軍旦日蚤臨.

관부왈 장군내긍행림황위기후 부안감이복위해 청어위기후장구 장군단일조임

 

관부가 말했다. ‘장군께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의 집에 행차하려는데, 제가 어찌 감히 거상을 핑계 삼아 마다하겠습니까? 원컨대 제가 위기후에게 연회준비를 하게 알리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내일 아침에 왕림해 주십시오.’

 

武安許諾. 潅夫具語魏其侯如所謂武安侯. 魏其與其夫人益市牛酒, 夜灑埽, 早帳具至旦. 平明, 令門下候伺. 至日中, 丞相不來.

무안허락. 관부구어위기후여소위무안후. 위기여가부인익시우주 야쇄소 조장구지단. 평명 영문하후사. 지일중 승상불래.

 

무안후가 승낙했다. 관부는 위기후에게 무안후의 방문약속을 그대로 전했다. 위기후와 그 부인은 술과 고기를 많이 사고 밤인데도 집안청소를 해고 장막과 기구를 마련하여 새벽 무렵까지 주연 준비를 마쳤다. 날이 밝아오자 사람을 시켜 영접하게 했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승상은 오지 않았다.

 

魏其謂潅夫曰:「丞相豈忘之哉?」潅夫不懌, :「夫以服請, 宜往.

위기위관부왈 승상이망지재관부불역 왈 부이복청 의왕

 

위기후가 관부에게 말했다. ‘승상이 설마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관부도 기분이 나쁜 듯이 말했다. ‘관부가 상복을 입고도 청했는데, 승상은 마땅히 왔어야 합니다.’

 

乃駕, 自往迎丞相. 丞相特前戯許潅夫, 殊無意往. 及夫至門, 丞相尚臥.

내가 자왕영승상. 승상특전희허관부 수무의왕. 급부지문 승상상와.

 

이에 수레를 타고 자신이 친히 승상을 맞으러 갔다. 승상은 전날에 단지 농담 삼아 관부에게 승낙했던 것으로 실제 주연에 갈 생각은 없었다. 관부가 승상의 집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도 승상은 아직 침상에서 누워 있었다.

 

於是夫入見, :「將軍昨日幸許過魏其, 魏其夫妻治具, 自旦至今, 未敢嘗食.

어시부입현 왈 장군작일행허과위기 위기부처치구 자단지금 미감상식

 

이에 관부가 들어가서 승상을 알현하고 말했다. ‘장군께서 어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를 방문하시겠다고 허락하셔서 위기후 부부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놓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감히 식사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武安鄂謝曰:「吾昨日酔, 忽忘與仲孺言.乃駕往, 又徐行, 潅夫愈益怒. 及飲酒酣, 夫起舞屬丞相, 丞相不起, 夫従坐上語侵之. 魏其乃扶潅夫去, 謝丞相. 丞相卒飲至夜, 極驩而去.

무안악사왈 오작일취 홀망여중유언내가왕 우서행 관부유익노. 급음주감 부기무속승상 승상불기 부종좌상어침지. 위기냐부관부거 사승상. 승상졸음지야 극환이거.

 

무안후는 깜짝 놀라척하면서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취해서 어제 약속을 잊었네.’ 그리고 바로 수레를 타고 갔는데, 또 가는 것도 아주 느려 관부는 더더욱 부화가 치밀었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관부가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는 승상에게 권했으나 그러나 승상이 화답하지 않자, 관부가 앉으면서 도발적인 말을 뱉었다. 위기후는 바로 관부를 부축해 데리고 나가고, 승상에게 대신 사과했다. 승상은 마침내 날이 어두울 때까지 술을 마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丞相嘗使籍福請魏其城南田. 魏其大望曰:「老僕雖棄, 將軍雖貴, 寧可以勢奪乎!不許.

승상상사적복청위기성남전. 위기대망왈 노복수기 장군수귀 녕하이세탈호불허.

 

승상이 언젠가 한번은 적복(籍福)을 시켜 위기후에게 성 남쪽 전답을 요구했다. 위기후는 크게 원망하며 말했다. ‘이 늙은 노비가 비록 버림받았고 장군이 비록 귀한 신분 되었지만 어떻게 권세로써 나의 전답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승상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潅夫聞, , 罵籍福. 籍福悪両人有郄, 乃謾自好謝丞相曰:「魏其老且死, 易忍, 且待之.

관부문 노 매적복. 적복오야양인유극 내만자호사승상왈 위기노차사 역인 차대지

관부가 이 말을 들은 후에 노하여 적복을 욕했다. 적복은 무안후와 위기후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사실을 속이고 스스로 승상에게 좋은 말로 올렸다. ‘위기후는 나이가 많아서 곧 죽을 것입니다. 마음을 돌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已而武安聞魏其潅夫実怒不予田, 亦怒曰:「魏其子嘗殺人, 蚡活之. 蚡事魏其無所不可, 何愛數頃田且潅夫何與也吾不敢複求田.

이이무안문위기 관부실노불여전 역노왈 위기자상살인 분황지. 분사위기무소불가 하애수경전 차관부하여야 오불감복구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안후는 위기후와 관부가 실제 화나서 전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말했다. ‘위기후의 아들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을 때, 나 전분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내가 위기후를 섬겨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어찌 밭뙈기 몇 마지기를 아낀다는 말인가? 또 관부는 무슨 참견하는 것인가? 내 다시는 전답을 요구하지 않겠다.’

 

武安由此大怨潅夫魏其.

무안유차대원관부 위기.

 

무안후는 이로부터 관부와 위기후를 크게 미워했다.

 

元光四年春, 丞相言潅夫家在潁川, 橫甚, 民苦之. 請案. 上曰:「此丞相事, 何請.潅夫亦持丞相陰事, 為姦利, 受淮南王金與語言.

원광사년춘 승상언관부가재영천 횡심 민고지. 청안. 상왈 차승상사 하청관부역지승상음사 위간리 수회남왕금여어언.

 

원광(元光) 4(서기전 131) , 승상은 황제에게 관부가 영천에서 제멋대로 세도를 부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는다고 아뢰고 수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이런 사건은 승상의 책무인데, 왜 왕에게 청원하는가?’했다. 하지만 관부 역시 승상의 비밀스러운 부정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승상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이익을 구한 것이나 회남왕(淮南王)의 황금을 받고 밀담을 나눈 것 등이다.

 

賓客居閒, 遂止, 倶解.

빈객거간 수지 구해.

 

이 때 빈객들이 중간에서 나서서 조정해 마침내 쌍방이 공방을 멈추고 피차간 화해했다.


潅夫有服, 過丞相. 丞相従容曰:「吾欲與仲孺過魏其侯, 會仲孺有服.

관부유복 과승상. 승상종용왈 오욕여중유과위기후 회중유유복

 

관부가 상중(喪中)에 승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승상은 마음대로 편하게 말했다. ‘나는 중유(仲孺: 관부)와 더불어 위기후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마침 중유가 상복을 입고 있어서 가지 못했네.’

 

潅夫曰:「將軍乃肯幸臨況魏其侯, 夫安敢以服為解! 請語魏其侯帳具, 將軍旦日蚤臨.

관부왈 장군내긍행림황위기후 부안감이복위해 청어위기후장구 장군단일조임

 

관부가 말했다. ‘장군께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의 집에 행차하려는데, 제가 어찌 감히 거상을 핑계 삼아 마다하겠습니까? 원컨대 제가 위기후에게 연회준비를 하게 알리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내일 아침에 왕림해 주십시오.’

 

武安許諾. 潅夫具語魏其侯如所謂武安侯. 魏其與其夫人益市牛酒, 夜灑埽, 早帳具至旦. 平明, 令門下候伺. 至日中, 丞相不來.

무안허락. 관부구어위기후여소위무안후. 위기여가부인익시우주 야쇄소 조장구지단. 평명 영문하후사. 지일중 승상불래.

 

무안후가 승낙했다. 관부는 위기후에게 무안후의 방문약속을 그대로 전했다. 위기후와 그 부인은 술과 고기를 많이 사고 밤인데도 집안청소를 해고 장막과 기구를 마련하여 새벽 무렵까지 주연 준비를 마쳤다. 날이 밝아오자 사람을 시켜 영접하게 했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승상은 오지 않았다.

 

魏其謂潅夫曰:「丞相豈忘之哉?」潅夫不懌, :「夫以服請, 宜往.

위기위관부왈 승상이망지재관부불역 왈 부이복청 의왕

 

위기후가 관부에게 말했다. ‘승상이 설마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관부도 기분이 나쁜 듯이 말했다. ‘관부가 상복을 입고도 청했는데, 승상은 마땅히 왔어야 합니다.’

 

乃駕, 自往迎丞相. 丞相特前戯許潅夫, 殊無意往. 及夫至門, 丞相尚臥.

내가 자왕영승상. 승상특전희허관부 수무의왕. 급부지문 승상상와.

 

이에 수레를 타고 자신이 친히 승상을 맞으러 갔다. 승상은 전날에 단지 농담 삼아 관부에게 승낙했던 것으로 실제 주연에 갈 생각은 없었다. 관부가 승상의 집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도 승상은 아직 침상에서 누워 있었다.

 

於是夫入見, :「將軍昨日幸許過魏其, 魏其夫妻治具, 自旦至今, 未敢嘗食.

어시부입현 왈 장군작일행허과위기 위기부처치구 자단지금 미감상식

 

이에 관부가 들어가서 승상을 알현하고 말했다. ‘장군께서 어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를 방문하시겠다고 허락하셔서 위기후 부부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놓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감히 식사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武安鄂謝曰:「吾昨日酔, 忽忘與仲孺言.乃駕往, 又徐行, 潅夫愈益怒. 及飲酒酣, 夫起舞屬丞相, 丞相不起, 夫従坐上語侵之. 魏其乃扶潅夫去, 謝丞相. 丞相卒飲至夜, 極驩而去.

무안악사왈 오작일취 홀망여중유언내가왕 우서행 관부유익노. 급음주감 부기무속승상 승상불기 부종좌상어침지. 위기냐부관부거 사승상. 승상졸음지야 극환이거.

 

무안후는 깜짝 놀라척하면서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취해서 어제 약속을 잊었네.’ 그리고 바로 수레를 타고 갔는데, 또 가는 것도 아주 느려 관부는 더더욱 부화가 치밀었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관부가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는 승상에게 권했으나 그러나 승상이 화답하지 않자, 관부가 앉으면서 도발적인 말을 뱉었다. 위기후는 바로 관부를 부축해 데리고 나가고, 승상에게 대신 사과했다. 승상은 마침내 날이 어두울 때까지 술을 마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丞相嘗使籍福請魏其城南田. 魏其大望曰:「老僕雖棄, 將軍雖貴, 寧可以勢奪乎!不許.

승상상사적복청위기성남전. 위기대망왈 노복수기 장군수귀 녕하이세탈호불허.

 

승상이 언젠가 한번은 적복(籍福)을 시켜 위기후에게 성 남쪽 전답을 요구했다. 위기후는 크게 원망하며 말했다. ‘이 늙은 노비가 비록 버림받았고 장군이 비록 귀한 신분 되었지만 어떻게 권세로써 나의 전답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승상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潅夫聞, , 罵籍福. 籍福悪両人有郄, 乃謾自好謝丞相曰:「魏其老且死, 易忍, 且待之.

관부문 노 매적복. 적복오야양인유극 내만자호사승상왈 위기노차사 역인 차대지

관부가 이 말을 들은 후에 노하여 적복을 욕했다. 적복은 무안후와 위기후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사실을 속이고 스스로 승상에게 좋은 말로 올렸다. ‘위기후는 나이가 많아서 곧 죽을 것입니다. 마음을 돌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已而武安聞魏其潅夫実怒不予田, 亦怒曰:「魏其子嘗殺人, 蚡活之. 蚡事魏其無所不可, 何愛數頃田且潅夫何與也吾不敢複求田.

이이무안문위기 관부실노불여전 역노왈 위기자상살인 분황지. 분사위기무소불가 하애수경전 차관부하여야 오불감복구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안후는 위기후와 관부가 실제 화나서 전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말했다. ‘위기후의 아들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을 때, 나 전분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내가 위기후를 섬겨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어찌 밭뙈기 몇 마지기를 아낀다는 말인가? 또 관부는 무슨 참견하는 것인가? 내 다시는 전답을 요구하지 않겠다.’

 

武安由此大怨潅夫魏其.

무안유차대원관부 위기.

 

무안후는 이로부터 관부와 위기후를 크게 미워했다.

 

元光四年春, 丞相言潅夫家在潁川, 橫甚, 民苦之. 請案. 上曰:「此丞相事, 何請.潅夫亦持丞相陰事, 為姦利, 受淮南王金與語言.

원광사년춘 승상언관부가재영천 횡심 민고지. 청안. 상왈 차승상사 하청관부역지승상음사 위간리 수회남왕금여어언.

 

원광(元光) 4(서기전 131) , 승상은 황제에게 관부가 영천에서 제멋대로 세도를 부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는다고 아뢰고 수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이런 사건은 승상의 책무인데, 왜 왕에게 청원하는가?’했다. 하지만 관부 역시 승상의 비밀스러운 부정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승상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이익을 구한 것이나 회남왕(淮南王)의 황금을 받고 밀담을 나눈 것 등이다.

 

賓客居閒, 遂止, 倶解.

빈객거간 수지 구해.

 

이 때 빈객들이 중간에서 나서서 조정해 마침내 쌍방이 공방을 멈추고 피차간 화해했다.




魏其之東朝, 盛推潅夫之善, 言其酔飽得過, 乃丞相以他事誣罪之. 武安又盛毀潅夫所為橫恣, 罪逆不道.

위기지동조 성추관부지선 언기취포득과 내승상이타사무죄지. 무안우성훼관부소위횡자 죄역부도.

 

위기후는 동궁에 가서 관부의 장점을 크게 칭찬하여 알리고, 그가 취해서 단순한 불경죄를 지은 것뿐인데 승상이 다른 일로써 그에게 무고하게 죄를 씌운 것이라고 말했다. 무안후 또한 그동안 관부가 저지른 횡포와 방자했던 소행을 크게 비방한 다음 그는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魏其度不可柰何, 因言丞相短.

위기도불가내하 인언승상단.

 

위기후은 아무리 생각해보니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아 승상의 단점과 허물을 거론하였다.

 

武安曰:「天下幸而安樂無事, 蚡得為肺腑, 所好音樂狗馬田宅. 蚡所愛倡優巧匠之屬, 不如魏其潅夫日夜招聚天下豪桀壯士與論議, 腹誹而心謗, 不仰視天而俯畫地, 辟倪両宮閒, 幸天下有変, 而欲有大功. 臣乃不知魏其等所為.

무안왈 천하행이안락무사 분득위폐부 소호음악구마전택. 분소애창우교장지속 불려위기 관부일야초취펀하호걸장사여론의 복비이심방 불앙시천이부화지 벽예양궁간 행천하유변 이욕유대공. 신내부지위기등소위

 

무안후가 말했다. ‘천하가 다행히 태평무사합니다. 신은 황제의 심복되는 자리를 얻었는데, 좋아하는 것은 음악과 개와 말, 밭과 집뿐입니다. 신이 아끼는 것은 광대와 솜씨 좋은 공장(工匠)과 같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위기후나 관부 등처럼 천하의 호걸과 장사를 초청해 더불어 밤낮으로 의론하며 내심으로 조정에 불만을 품고 비방하거나 고개를 들고 하늘을 살피지 않으면 땅을 굽어보면서 동 서 두 궁궐 사이를 흘겨보며 요행히 천하에 변고가 나서 자신들이 큰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은 위기후 등이 하는 일을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於是上問朝臣:「両人孰是?」禦史大夫韓安國曰:「魏其言潅夫父死事, 身荷戟馳入不測之呉軍, 身被數十創, 名冠三軍, 此天下壯士, 非有大悪, 爭杯酒, 不足引他過以誅也. 魏其言是也.

어시상문조신 양인숙시어사대부한안국왈 위기언관부부사사 신가극치입불측오군 신피수십창 명관삼군 차천하장사 비유대악 쟁배주 부족인타과이주야. 위기언시야.

 

이에 황제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 중에 누구 주장이 옳은가?’ 어사대부 한안국이 아뢰었다. ‘위기후가 관부는 자신의 부친이 나라를 위해서 죽게 되자 몸에 창을 지니고 강대한 오나라 군영 속으로 달려 들어갔고, 몸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어 그 명성이 삼군(三軍)에 알려졌으니 이는 천하 장사가 분명합니다. 만약에 특별하게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단지 술자리에서 취하여 다툰 것으로서 다른 허물까지 끌어 사형에 처할 것은 못 된다.라고 했는데, 이는 위기후의 말은 옳습니다.

 

丞相亦言潅夫通姦猾, 侵細民, 家累巨萬, 橫恣潁川, 淩轢宗室, 侵犯骨肉, 此所謂枝大於本, 脛大於股, 不折必披, 丞相言亦是. 唯明主裁之.

승상역언관부통간활 침세민 가루거만 횡자영천 릉력종실 침범골육 차소위 지대어본 경대어부 불절필피승상언역시 유명주재지

 

승상은 또한 관부는 교활한 무리들과 왕래하며 백성들을 압박하고 집에는 거만(巨萬)의 재산을 쌓아두고 영천에서 세도를 부리며, 종실을 능욕하고 황실의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욕보였습니다. 이는 이른바 나무 가지가 나무보다 크며 종아리가 넓적다리보다 크면 부러지지 않으면 반드시 갈라진다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승상의 말 또한 옳습니다. 오직 영명하신 황제께서만 이 사건을 판결하실 수 있습니다.”했다.

 

主爵都尉汲黯是魏其. 內史鄭當時是魏其, 後不敢堅対. 餘皆莫敢対.

주작도위급암시위기. 냐사정당시시위기 후불감견대. 여개막감대.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汲黯)이 위기후가 옳다고 했다.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도 위기후가 옳다고 했다가 뒤에는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上怒內史曰:「公平生數言魏其武安長短, 今日廷論, 局趣效轅下駒,33) 吾並斬若屬矣.即罷起入, 上食太後.

상로내사왈 공평생수언위기 무안장단 금일정론 국취효원하구 오병참약속의즉파기입 상식태후

 

황제가 내사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는 평소에 여러 차례 위기후와 무안후의 장단점을 말하더니 오늘 조정의 변론에서는 어찌하여 마치 수레 멍에를 맨 망아지처럼 움츠러들어 있는가? 짐은 그대들과 같은 무리까지 처벌할 것이다!’하고 조회를 마치고 일어나 궁내로 들어가서 태후에게 음식을 올렸다.

 

太後亦已使人候伺, 具以告太後.

태후역이사인후사 구이고태후.

 

태후 역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조정에서 일을 알아보게 했는데, 그 사람이 조정에서 변론한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太後怒, 不食, :「今我在也, 而人皆藉吾弟, 令我百歳後, 皆魚肉之矣. 且帝寧能為石人邪! 此特帝在, 即錄錄, 設百歳後, 是屬寧有可信者乎?」

태후노 불식 왈 금아재야 이인개적오제 영아백세후 개어육지의. 차제영능위석인사 차특제재 즉록록 설백세후 시속녕유가신자호

 

그 소식을 듣고 태후는 화가 나서 식사는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도 남들이 감히 나의 동생을 깔아뭉개니, 가령 내가 죽고 나면 모두 어육(魚肉)같은 신세가 될 것이오. 또 황제께서는 어찌 돌부처처럼 자기 주장이 없단 말인가! 이들은 요행히 황제가 살아 계셔도 자기 의견이 없이 흔들리거늘 가령 황제가 돌아가신 뒤에는 이런 무리 중에 어찌 믿겠는가?’

 

上謝曰:「倶宗室外家, 故廷辯之. 不然, 此一獄吏所決耳.

상사왈 구종실외가 고정변지. 불연 차일옥리소결이

 

황제가 사과하며 말했다. ‘모두 종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것을 논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옥리가 해결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是時郎中令石建為上別言両人事.

시시낭중령석건위상별언양인사.

 

이때 낭중령 석건(石建)이 황제를 위해서 위기후와 무안후 두 사람의 사정을 진술하였다.

 

武安已罷朝, 出止車門, 召韓禦史大夫載, 怒曰:「與長孺共一老禿翁, 何為首鼠両端?」

무안이파조 출지거문 소한어사대부재 노왈 여장유공일로독옹 하위수서양단

 

무안후는 조회가 마친 뒤에 지거문(止車門)을 나서며 어사대부 한안국을 불러 수레에 같이 타고 가면서 성내며 말했다. ‘나는 장유(長孺: 한안국의 자)와 함께 늙은 퇴물 관료를 대적하려 했는데, 어찌해하는 주저하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단 말이오?’ 했다.

 

韓禦史良久謂丞相曰:「君何不自喜夫魏其毀君, 君當免冠解印綬帰, 臣以肺腑幸得待罪, 固非其任, 魏其言皆是. 如此, 上必多君有譲, 不廃君.

한어사대부양구위승상왈 군하부자희 부위기훼군 둔당면관해인수귀 왈 신이폐부행득대죄 고비기임 위기언개시여차 상필다군유양 불폐군.

한안국은 조금 있다가 뒤에 승상에게 말했다. ‘승상은 어찌 자중자애하지 않습니까? 저 위기후가 승상을 비방하면, 승상께서는 관을 벗고 승상의 인끈을 풀어 황상께 돌려드리며 신은 외척인 덕으로 요행히 승상 직을 얻었습니다만 진실로 그 적임이 못 됩니다. 위기후의 말이 다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면 황제께서는 반드시 승상이 겸양의 미덕을 칭찬하면 승상을 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魏其必內愧, 杜門齰舌自殺. 今人毀君, 君亦毀人, 譬如賈豎女子爭言, 何其無大體也!

위기필내괴 두문색설자살. 금인훼군 군역훼인 비여매수여자쟁언 하기무대체야

 

그리고 위기후는 틀림없이 속으로 부끄러워 문을 닫아걸고 혀를 깨물어 자살했을 것입니다. 지금 남이 승상을 비방한다고 승상 또한 남을 비방하니 이런 것은 마치 장사치나 계집애들 말다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리도 대체의 이치를 모르십니까?‘했다.

 

武安謝罪曰:「爭時急, 不知出此.

무안사죄왈 쟁시급 부지출차

 

무안후는 사죄하며 말했다. ‘쟁론할 때에 마음이 급해 마땅히 이러한 큰 대책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於是上使禦史簿責魏其所言潅夫, 頗不讎, 欺謾. 劾繋都司空. 孝景時, 魏其常受遺詔, 事有不便, 以便宜論上.

시상사어사부책위기소언관부 파불수 기만. 각계도사공. 효경시 위기상수유조 왈 사유불편 이편의논상

 

이때 황제가 어사(御史)를 시켜 문서로 위기가 관부에게 한 말들 조사하여 기록하게 했는데 그 중 상당 부분이 상이하여 기만죄였기에 위기후를 탄핵해 도사공(都司空: 도시의 지도자)의 특별 감옥에 가두었다. 위기후는 일찍이 효경제의 유조(遺詔)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만약에 너에게 불편한 사정이 생기면 편하게 황제와 의논할 수 있다.’

 

及繋, 潅夫罪至族, 事日急, 諸公莫敢複明言於上.

급계 관부죄지족 사일급 제공막감복명언어상.

 

위기후가 구금되고 관부는 멸족에 이를 죄에 이르며 사태가 날로 다급해지는데, 여러 공()들 중에서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이 사건을 감히 다시 밝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魏其乃使昆弟子上書言之, 幸得複召見. 書奏上, 而案尚書大行無遺詔. 詔書獨蔵魏其家, 家丞封.

위기내사곤제자상서언지 행득복소현. 서진상 이안상서대행무유조. 조서독장위기가 가승봉.

 

위기후는 이에 조카를 시켜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가지기를 원했다. 상서가 황제에게 올라왔는데 상서(尙書)의 문서를 조사해보니, 경제가 임종 전에 남긴 유조가 없었다. 이 조서는 단지 위기후의 집에만 보관해 위기후의 가신이 그것을 잘 갈무리해두고 있었다.

 

乃劾魏其矯先帝詔, 罪當棄市.

내핵위기교선제조 죄당기시.

 

이에 위기후는 경제의 유조를 손 본 걸로 추궁되었는데, 그 죄는 마땅히 기시(棄市)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五年十月, 悉論潅夫及家屬. 魏其良久乃聞, 聞即恚, 病痱, 不食欲死. 或聞上無意殺魏其, 魏其複食, 治病, 議定不死矣.

오년시월 실론관부급가속. 위기양구내문 문즉에 병비 불식욕사. 혹문상무의살위기 위기복식 치병 의정불사의.

 

원광 5(서기전 130) 10월에 관부 및 그 일족은 모두 처형당했다. 위기후는 한참 뒤에야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소식을 듣자 분개하여 중풍까지 앓게 되었고 음식을 끊고 죽으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황제가 위기후를 죽일 뜻은 없다는 말을 듣고 위기후는 다시 음식을 들고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그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乃有蜚語為悪言聞上, 故以十二月晦論棄市渭城.

내유비어위악언문상 고이십이월회론기시위성.

 

그러자 이번에는 그를 헐뜯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이로 인해서 12월 그믐에 위기후과 그 일족은 위성(渭城)에서 참수되었다.

 

其春, 武安侯病, 専呼服謝罪. 使巫視鬼者視之, 見魏其潅夫共守, 欲殺之. 竟死. 子恬嗣. 元朔三年, 武安侯坐衣襜褕入宮, 不敬.

기춘 무안후병 전호복사죄. 사무시귀자시지 견위기 관부공수 욕살지. 경사. 자염사. 원살삼년 무안후좌의첨유입궁 불경.

 

그해 봄에 무안후는 병이 났는데, 큰 소리로 사죄한다는 말을 외쳤다. 귀신을 볼 수 있는 무당을 시켜 그를 몸 상태를 보게 하니 위기후와 관부가 함께 그를 지키고 서서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무안후는 죽고, 그의 아들 염()이 작위를 계승했다. 원삭(元朔) 3(서기전 126), 무안후 전염은 짧은 옷을 입고 입궁했다는 불경죄에 걸려 작위도 잃었다.

 

淮南王安謀反覚, . 王前朝, 武安侯為太尉, 時迎王至霸上, 謂王曰:「上未有太子, 大王最賢, 高祖孫, 即宮車晏駕, 非大王立當誰哉!

회남왕안모반각 치. 왕전조 무안후위태위 시영왕지패상 위왕왈 상미유태자 개왕최현 고조손 즉궁거안가 비대왕립당수재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죄로 다스려졌다. 이전에 회남왕이 입조했을 때, 무안후는 태위로서 회남왕을 영접하러 패상(霸上)까지 가서 왕에게 말했다. ‘황제께는 아직 태자가 없으신데 대왕께서 가장 현명하시고 또한 고제(高帝)의 손자이십니다. 그런즉 황제께서 붕어하시면 대왕이 즉위하지 않으면 누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淮南王大喜, 厚遺金財物. 上自魏其時不直武安, 特為太後故耳.56) 及聞淮南王金事, 上曰:「使武安侯在者, 族矣.

회남왕대희 후유금재물. 상자위기시불직무안 특위태후고이. 급문회남왕금사 상왈 사무안후재자 족의

 

회남왕은 크게 기뻐하며 황금과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황제는 위기후의 일이 발생한 때부터 무안후가 정직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다만 왕태후와의 연고 때문에 그냥 덮어두고 있었다. 회남왕이 무안후에게 황금을 준 일을 듣자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가령 무안후가 살아 있었다면 마땅히 멸족 당했을 것이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魏其武安皆以外戚重, 潅夫用一時決筴而名顕. 魏其之挙以呉楚, 武安之貴在日月之際.

태사공왈 위기 무안개이외척중 관부용일시결책이명현. 위기지거이오초 무안지귀재일월지제.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위기후(魏其侯)와 무안후(武安侯)는 모두 외척으로서 존귀하게 되었고, 관부(灌夫)는 잠간의 운으로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위기후가 중용된 것은 오와 초의 반란 때문이었고, 무안후가 존귀하게 된 것은 한 무제(漢武帝)가 막 즉위해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할 때였다.

 

然魏其誠不知時変, 潅夫無術而不遜, 両人相翼, 乃成禍亂. 武安負貴而好権, 杯酒責望, 陥彼両賢. 嗚呼哀哉! 遷怒及人, 命亦不延. 衆庶不載, 竟被悪言. 嗚呼哀哉! 禍所従來矣!

연위기성부지시변 관부무술이불손 양인상익 내성화란. 무안부책이호권 배주책망 함피양현. 명호애재 천노급인 명역부정. 중서부재 경치악언. 오호애재 화소종래의.

 

그러나 위기후는 시세 변화에 무지했고 관부는 학식이 없고 겸손하지도 못했으니, 두 사람이 합쳐 이런 재앙(禍亂)을 빚었다. 무안후는 존귀한 신분을 등에 업고 권세를 좋아했으니 한 잔 술의 분노로 인해 저 두 어진 사람을 모함했다. 오호, 슬프도다! 관부는 분노를 옮기어 남에게 이르게 하며 자신의 수명 또한 연장하지 못했다. 뭇 사람들이 옹호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쁜 말을 듣게 되었다. 오호, 슬프도다! 재앙은 반드시 그 유래가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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