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군>
萬石君名奮, 其父趙人也, 姓石氏. 趙亡, 徙居溫. 高祖東撃項籍, 過河內, 時奮年十五, 為小吏, 侍高祖.
만석군명분 기부조인야 성석씨. 조망 사거온. 고조동격항적 과내하 시분년십오 위소리 시고조.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이요 그의 부친은 조(趙)나라 사람으로 성은 석씨(石氏)였다. 조나라가 멸망하자 온현(溫縣)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고조(漢高祖)가 동쪽으로 항적(項籍: 항우)을 공격하기 위해서 하내군(河內郡)를 경유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석분의 나이는 겨우 15세로 하급 관리가 되어 고조를 정성껏 섬겼다.
高祖與語, 愛其恭敬, 問曰:「若何有?」対曰:「奮獨有母, 不幸失明. 家貧. 有姊, 能鼓琴.」
고조여어 애기공경 문왈 : ‘약하유?’ 대왈 ‘분독유모 불행실명. 가빈. 유자 능고금’
한번은 고조가 그와 담화 중에 그의 공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좋아하여 이렇게 물었다. ‘너희 집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석분이 대답했다. ‘신의 집안에는 단지 모친이 계시는데, 불행하게도 실명하셨습니다. 집안이 아주 가난하고 또 누이가 한 분 계신데 거문고에 능합니다.’
高祖曰:「若能従我乎?」曰:「願盡力.」
고조왈 ‘약능종아호?’ 왈 ‘원진력’
고조가 말했다. ‘너는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성실히 있는 힘을 다하여 모시겠습니다.’
於是高祖召其姊為美人, 以奮為中涓, 受書謁, 徙其家長安中戚里, 以姊為美人故也.
어시고조소기자위미인 이분위중연 수서알 사기가장안중척리 이자위미인고야.
이에 고조는 그의 누이를 궁전으로 불러 미인(美人)으로 삼았고, 석분(石奮)을 중연(中涓: 시종관)에 임명하여 대신들의 문서를 전달하고 알현을 주선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집을 장안성(長安城) 안의 척리(戚里)로 옮기도록 했는데, 이것은 그의 누이가 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其官至孝文時, 積功勞至大中大夫. 無文學, 恭謹無與比.
기관지효문시 적공노지대중대부. 무문학 공근무여차.
그의 관직은 효문제(孝文帝)에 이르러 공로가 쌓여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하였다. 그에게 학문을 익히지 못했지만 공손하고 신중한 태도는 남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文帝時, 東陽侯張相如為太子太傅, 免. 選可為傅者, 皆推奮, 奮為太子太傅..
문제시 동사후장상여위태자태부 면. 선가위태부 개추분 분위태자태부.
문제(文帝) 때에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는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는데, 뒤에 면직당했다. 문제가 태부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려 하자 모두가 석분(石奮)을 천거했으며, 이에 석분이 태자태부가 되었다.
及孝景即位, 以為九卿;迫近, 憚之, 徙奮為諸侯相.
급효경즉위 이위구경: 박근 탄지 사분위제후상.
경제(景帝)는 즉위한 후 석분의 관직은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는데, 그가 너무 공손하고 신중하게 경제를 섬겼기 때문에 도리어 그를 꺼리어 제후의 승상으로 전근 보냈다.
奮長子建, 次子甲, 次子乙, 次子慶, 皆以馴行孝謹, 官皆至二千石. 於是景帝曰:「石君及四子皆二千石, 人臣尊寵乃集其門.」號奮為萬石君
분장자건 차자갑 차자을 차자경 개이순행효근 관개지이천석. 어시경제왈 : ‘석군급사자개이천석 인신종총내집기문’ 호분위만석군.
석분의 장남은 석건(石建)이고, 그 밑으로 석갑(石甲), 석을(石乙), 석경(石慶)이 있었는데, 모두 행실이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삼가 신중하여 모두 관직이 2천석(二千石)의 지위에 올랐다. 이에 경제는 말했다. ‘석군(石君: 석분)과 네 아들들은 모두 2천석의 지위에 올랐으니, 신하로서 존귀와 총애가 그 가문에 다 모였구나.’ 그리고 바로 석분을 ‘만석군(萬石君)’으로 호칭했다.
孝景帝季年, 萬石君以上大夫祿 帰老於家, 以歳時為朝臣.
효경제계년 만석군이상대부록 귀노어가 이세시위조신.
경제 말년에 만석군은 상대부(上大夫)의 봉록을 받았지만 늙음을 구실로 관직에서 물러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세시(歲時) 때에는 대신(大臣)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過宮門闕, 萬石君必下車趨, 見路馬必式焉.
과궁문궐 만석군필하거추 견로마필식언.
궁궐 문을 지날 때에 만석군은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서둘러 걸어 들어갔는데, 대로에서 황제의 어가를 보게 되면 반드시 예를 갖추어 경의를 표했다.
子孫為小吏, 來帰謁, 萬石君必朝服見之, 不名. 子孫有過失, 不譙譲, 為便坐, 対案不食.
자손위소리 래귀알 만석군필조복견지 불명, 자손유과실 불초양 위편좌 대안불식.
만석군의 자손들 중에 하급 관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만석군에게 인사를 드릴 때면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접견했으며, 함부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자손들 중에 과실이 있으면 직접 꾸짖지 않고 쉴 때도 마주 앉질 않았다.
然後諸子相責, 因長老肉袒固謝罪, 改之, 乃許.
연후제자상책 인장노육단고사죄 개지 내허.
이렇게 한 후에 여러 아들들이 과실을 저지른 자를 서로 꾸짖고, 다시 가족 중에 연장자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어 굳이 사죄하고 잘못을 고치면 비로소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子孫勝冠者在側, 雖燕居必冠, 申申如也. 僮僕訢訢如也, 唯謹.
자손긍관자재측 수연거필관 신신여야. 동복흔흔야 수근.
이미 성년이 된 자손이 만석군의 주변에 있을 때에는 비록 편히 쉬고 있을지라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면서도 화순한 태도를 보였다. 하인들에게는 온화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대하면서도 특별히 신중히 행동했다.
上時賜食於家, 必稽首俯伏而食之, 如在上前. 其執喪, 哀戚甚悼. 子孫遵教, 亦如之. 萬石君家以孝謹聞乎郡國, 雖斉魯諸儒質行, 皆自以為不及也.
상시사식어가 필계수부복이식지 여재상전. 기집상 애척심도, 자손준교 역여지. 만석군가이효근문호군국 수제노제유질행 개자이위불급야.
황제가 때때로 음식을 그의 집에 하사하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굽혀서 먹었는데, 그 공손한 태도가 마치 황제 면전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가 장례식에서 상제노릇을 할 때에는 매우 슬프게 애도했다. 자손들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했다. 만석군 일가는 효도하고 근신함으로 각 군현(郡縣)과 제후국에 명성을 떨쳤다. 제(齊), 노(魯)나라의 여러 유학자들이 그 행실을 따라도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建元二年, 郎中令王臧以文學獲罪. 皇太後以為儒者文多質少, 今萬石君家不言而躬行, 乃以長子建為郎中令, 少子慶為內史.
건원이년 낭중렬왕장이문학호죄. 황태후이위유자문다질소 금만석군가불언이궁행 내이장자건위낭중령 소자경위내사.
건원(建元) 2년(서기전 141년), 낭중령(郎中令) 왕장(王臧)은 문학(文學: 유가의 학문을 숭배하고, 도가의 학문을 배척)으로 죄를 얻었다. 황태후(皇太后)는 유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낸 가식이 많고, 속으로 본바탕의 질박함이 적다고 여겼고, 지금 만석군의 일가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두둔하면서 마침내 석분의 장남인 석건을 낭중령으로 삼았으며, 막내아들인 석경을 내사(內史)로 임명했다.
建老白首, 萬石君尚無恙. 建為郎中令, 毎五日洗沐帰謁親, 入子舎, 竊問侍者, 取親中帬廁牏, 身自浣滌, 複與侍者, 不敢令萬石君知, 以為常.
건노백수 만석군상무양. 건위낭중령 매오일세목귀알친 입자사 절문시자 취친중군측투 신자완척 복여시자 불강영만석군지 이위상.
석건이 늙어서 백발이 되었지만 만석군은 여전히 탈없이 잘 지냈다. 석건은 낭중령이 되었지만 닷새마다 하루의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목욕하고 부친의 안부를 살폈다. 친히 부친이 쉬고 있는 침실 곁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몰래 시종에게 물어 부친의 속옷과 요강을 꺼내어 몸소 깨끗하게 씻고 닦은 뒤에 다시 시종에 건네주면서 감히 만석군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으며, 항상 이와 같이 했다.
建為郎中令, 事有可言, 屏人恣言, 極切;至廷見, 如不能言者. 是以上乃親尊禮之.
건위낭중령 사유가언 병인자언 극절; 지정견 여불능언자. 시이상내친존예지.
석건은 낭중령이 되어서 황제에게 간언을 올릴 일이 있으면 남들을 물리치고(屏人) 바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는데 매우 간절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면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 때문에 황제가 더욱 존경하여 예우해 주었다.
萬石君徙居陵里. 內史慶酔帰, 入外門不下車. 萬石君聞之, 不食.
만석군사거능리. 내사경취귀 입외문불하거. 만석군문지 불식.
만석군은 능리(陵里)로 거처를 옮겼다. 하루는 내사(內史)로 재직했던 석경이 술에 취한 후 돌아왔는데, 마을 외문(外門)을 들어와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만석군은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식사를 하지 않았다.
慶恐, 肉袒請罪, 不許. 挙宗及兄建肉袒, 萬石君譲曰
경공 육단청죄 불허. 거종급형건육잔 만석군양왈
석경은 두려워서 웃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낸 채 죄를 청했으나(고대 중국에서 죄인이 사죄할 때에는 한쪽 어깨를 벗고 사죄함), 만석군은 여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온 식구와 맏형인 석건이 대신 옷을 벗고 어깨를 드러내어 죄를 청하니, 그제야 비로소 만석군이 꾸짖어 이렇게 말했다.
:「內史貴人, 入閭里, 里中長老皆走匿, 而內史坐車中自如, 固當!」乃謝罷慶. 慶及諸子弟入里門, 趨至家.
‘내사귀인 입여리 리중장노개주닉 이내사좌거중자여 고당’ 내사파경. 경내자제입리문 추지가.
내사는 존귀한 사람이니 마을로 들어오면 마을 안의 어른과 노인들도 모두 황급하게 달아나거나 회피한다. 그런데 내사가 수레 안에 앉아서 태연자약한 것이 참으로 마땅한 것인가!” 그리고 석경에게 사죄를 마치고 돌려보냈다. 이후에 석경과 석씨 형제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올 때면 모두 수레에서 내려 총총 걸음으로 귀가했다.
<석건과 석경>
萬石君以元朔五年中卒. 長子郎中令建哭泣哀思, 扶杖乃能行. 歳餘, 建亦死. 諸子孫鹹孝, 然建最甚, 甚於萬石君.
만석군이원삭오년중졸. 장자낭중령건곡읍애사 부장내능행. 세여 건역사. 제자손함효 연건최심 기어만석군.
만석군은 원삭(元朔) 5년(서기전 124년)에 서거했다. 이에 장남인 낭중령 석건은 통곡하면서 매우 애달프게 울었고, 손에 지팡이를 의지해서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일 년 남짓 뒤에 석건 또한 세상을 떠났다. 자손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했지만 그 중에 석건이 가장 효성이 깊었으며, 심지어 만석군보다 더했다.
建為郎中令, 書奏事, 事下, 建読之, 曰:「誤書! 『馬』者與尾當五, 今乃四, 不足一. 上譴死矣!」甚惶恐. 其為謹慎, 雖他皆如是.
건위낭중령 서주사 사하 건독지 왈 ‘오서! “마”자여미당오 금내사 부족일 상청사의’ 심황공 기위근신 수타개여시.
석건은 낭중령으로 있을 때에 한번은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에 대한 황제의 회답이 내려왔다. 석건은 그것을 다시 읽다가 말하길 “잘못 썼구나! ‘마(馬)’ 자(字)는 꼬리에 반드시 5획으로 썼어야 했는데, 지금은 단지 네 획만 있고 한 획이 부족하다. 폐하께서 이를 문제 삼아 견책하면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매우 황공하게 여겼다. 그가 근신하는 것은 비록 다른 일도 모두 이와 같았다.
萬石君少子慶為太僕, 禦出, 上問車中幾馬, 慶以策數馬畢, 挙手曰:「六馬.」.
만석군소자경위태복 어출 상문거중기마 경이책수마필 거수왈 ‘육마’
만석군의 막내아들인 석경은 태복(太僕: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리)으로 있었는데, 황제의 수레를 몰고 외출할 때 황제가 수레를 모는 말이 몇 마리냐고 물었다. 석경은 말채찍으로 하나하나 그 수를 헤아린 후 손을 들고 말했다. ‘여섯 필입니다.’
慶於諸子中最為簡易矣, 然猶如此. 為斉相, 挙斉國皆慕其家行, 不言而斉國大治, 為立石相祠
경어제자중최위간이의 연유여차. 위제상 거제국개모기가행 불언이제국대치 위립석상사.
석경은 만석군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단순하고 상대하기 쉬운 상대였으나 역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고 신중했다. 석경은 제(齊)나라의 승상이 되었는데, 모든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안의 행실을 흠모했다. 그래서 정령을 반포하지 않았는데도 제나라는 매우 안정되었으며,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석상사(石相祠)’를 세울 정도였다.
元狩元年, 上立太子, 選群臣可為傅者, 慶自沛守為太子太傅, 七歳遷為禦史大夫.
원수원년 상립태자 선군신가위부자 경자패수위태자태부 칠세펀위어사대부.
무제 원수(元狩) 원년(元年: 서기전 122년), 황제는 황태자를 책립했다. 군신들 중에서 태자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했는데, 석경이 패군(沛郡) 태수(太守)에서 태자태부가 되었으며, 7년 후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되었다.
元鼎五年秋, 丞相有罪, 罷. 制詔禦史:「萬石君先帝尊之, 子孫孝, 其以禦史大夫慶為丞相, 封為牧丘侯.」
원정오년추 승상유죄 파. 제조어사: ‘만석군선제존지 자손효 기이어사대부경위승상 봉위목구후’
무제 원정(元鼎) 5년(서기전 112년) 가을, 승상 조주(趙周)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황제는 어사대부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선제께서는 만석군을 존경하였고, 그의 자손들도 모두 효성스럽다. 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한다.’
是時漢方南誅両越, 東撃朝鮮, 北逐匈奴, 西伐大宛, 中國多事.
시시한방남주양월 동격조선 북축흉노 서벌대원 중국다사.
이때 한나라는 마침 남쪽으로 남월(南越)과 동월(東越)을 토벌했고, 동쪽으로 조선(朝鮮)을 공격했으며, 북쪽으로 흉노(匈奴)를 내쫓고, 서쪽으로 대원(大宛)을 정벌하는 등 국가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다.
天子巡狩海內, 修上古神祠, 封禪, 興禮樂. 公家用少, 桑弘羊等致利, 王溫舒之屬峻法, 児寛等推文學至九卿, 更進用事, 事不関決於丞相, 丞相醇謹而已.
천자순수해내 수상고신사 봉선 흥예약. 공가용소 상홍양등치리 왕온서지속준법 아관등 추문학지구경 경진용사 사불관결어승상 승상순근이이.
더욱이 황제는 전국 각지를 순찰하면서 상고(上古) 시대의 신사(神祠)를 수리해 복원했고, 태산에 가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크게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국가의 재정이 적어지자 황제는 상홍양(桑弘羊) 등으로 하여금 이윤을 도모하게 하고, 왕온서(王溫舒) 등의 무리로 하여금 준엄하게 법을 집행하게 하였으며 예관(兒寬) 등으로 하여금 유학을 진작시켜 그들의 관직이 모두 구경(九卿)에 이르게 했다. 그들은 교대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조정의 일은 굳이 승상의 결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승상은 한결 같이 온후하고 신중하게(醇謹)처신할 뿐이었다.
在位九歳, 無能有所匡言. 嘗欲請治上近臣所忠、九卿鹹宣罪, 不能服, 反受其過, 贖罪.
재위구세 무능유소광언. 상욕청취상근신소환 구경함선죄 불능복 반수기과 속죄.
석경은 9년 동안 승상으로 재직하는 중에 잘못된 시국을 바로 잡을 만한 언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황상의 가까운 신하였던 소충(所忠)과 구경의 지위에 있었던 함선(咸宣)의 죄행을 올려 처벌할 것을 청했지만 그들의 죄를 입증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징계를 받아 속죄했다.
元封四年中, 関東流民二百萬口, 無名數者四十萬, 公卿議欲請徙流民於邊以適之.
원봉사년중 관동유민이백만구 무명수자사십만 공경의욕청사유민어변이적지.
무제 원봉(元封) 4년(서기전 107년), 관동(關東)에 유민이 2백만 명이 살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그중에 호적이 없는 유민이 40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경의 적당한 곳으로 이주시킬 것을 주청하기로 했다.
上以為丞相老謹, 不能與其議, 乃賜丞相告帰, 而案禦史大夫以下議為請者.
상이위승상노근 불능여기의 내사승상고귀 이안어사대부이하의위청자.
황제가 승상이 연로하여 이 논의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바로 승상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이 안건을 어사대부 이하의 신하들을 의론에 참여시켜 주청한 것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
丞相慚不任職, 乃上書曰:「慶幸得待罪丞相, 罷駑無以輔治, 城郭倉庫空虛, 民多流亡, 罪當伏斧質, 上不忍致法. 願帰丞相侯印, 乞骸骨帰, 避賢者路.」
승상참불임직 내상서왈 ‘경행득대죄승상 파노무이보치 성곽ㅊ팡고공허 민다유망 죄당복부질 상불인치법. 원귀긍상후인 걸해골귀 피현자로’
승상은 스스로 직무를 다할 수 없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곧바로 황제에서 상서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 석경은 다행히 총애를 얻어 승상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으나, 쓸모없는 둔한 말처럼 재능이 부족해 폐하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습니다. 성곽 창고는 비었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많아졌으니, 그 죄는 마땅히 엎드려 도끼와 그 받침대를 가지고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차마 저를 법대로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승상(丞相)과 후작의 인(印)을 돌려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승상의 직위를 양보하고 싶습니다.’
天子曰:「倉廩既空, 民貧流亡, 而君欲請徙之, 揺蕩不安, 動危之, 而辭位, 君欲安帰難乎?」천자왈 ‘창름기공 민빈유망 이군용청사지 요탕불안 동위지 이사위 군욕안귀란호?’
이에 황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양식 창고는 이미 텅 비었고, 백성은 곤궁해져서 정처 없이 유랑하고 있어서 승상은 그들을 변경의 적당한 곳으로 이주시키기를 청했소. 사회는 뒤숭숭하고 인심은 불안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러한 시기에 승상이 직위에서 물러나 사임한다면 승상은 그 책임과 난국을 누구에게 맡겨 수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以書譲慶, 慶甚慚, 遂複視事.
이서양경 경심참 수복시사.
이처럼 조서로 석경을 책망하자 그는 심히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곧 조정으로 돌아가 정사를 처리했다.
慶文深審謹, 然無他大略, 為百姓言.
경문심심근 연무타대략 위백성언.
석경은 법조문에 조예가 깊고 신중하게 일처리를 했지만 어떤 원대한 책략을 세워 백성들을 위해서 발언하지는 못했다.
後三歳餘, 太初二年中, 丞相慶卒, 謚為恬侯.
후삼세여 태초이년중 승상경졸 시위염후.
이로부터 3년 남짓이 지난 뒤인 태초(太初) 2년에 승상 석경은 세상을 떠나자 ‘염후(恬侯)’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慶中子徳, 慶愛用之, 上以徳為嗣, 代侯. 後為太常, 坐法當死, 贖免為庶人.
경중자덕 경애용지 상이덕위사 대후 우위태상 좌법당사 속면위서인.
석경의 차남은 석덕(石德)이었는데, 석경은 그를 매우 좋아하고 신임했다. 이에 황제는 석덕을 석경의 후사로 삼아 후작(侯爵)을 대신 계승하도록 했다. 그 후 석덕은 태상(太常)이 되었으나, 법을 어겨서 사형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속죄금을 바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慶方為丞相, 諸子孫為吏更至二千石者十三人. 及慶死後, 稍以罪去, 孝謹益衰矣.
경방위승상 제자손위이경지이천석자십삼인. 급경사후 초이죄거 효근익애의.
석경이 승상이 되었을 때에 그의 여러 자손들은 관리가 되어 2천석의 직위에 오른 자가 13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석경이 죽은 후에 자손들은 점차 각종 죄를 범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효성스럽고 신중하던 석경의 가풍은 더욱 쇠퇴해졌다
<위관>
建陵侯衛綰者, 代大陵人也. 綰以戯車為郎, 事文帝, 功次遷為中郎將, 醇謹無他.
건릉후위관자 대대릉인야. 관이휘거위랑 사문제 공차천위중랑장 순근무타.
건릉후(建陵侯) 위관(衛綰)은 대군(代郡)의 대릉(大陵) 사람이다. 위관은 수레 위에서 곡예를 연출하여 낭관(郎官)이 되어 문제를 섬겼다. 부단히 공을 세워 중랑장(中郎將)으로 승진했는데, 성품이 온후하고 신중했지만 특별난 다른 장점은 없었다.
孝景為太子時, 召上左右飲, 而綰稱病不行. 文帝且崩時, 屬孝景曰:「綰長者, 善遇之.」及文帝崩, 景帝立, 歳餘不噍呵綰, 綰日以謹力.
효경위태자시 소강좌우음 이관칭병불행. 문제차붕시 속효경왈 ‘종장자 선우지’ 급문제붕 경제립 세여불초아관 관일이근력.
효경제(孝景帝)가 태자가 되었을 때 황제의 신변의 가까운 신하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는데, 위관은 병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문제가 임종할 때에 경제에게 당부하면서 말했다. ‘위관은 고령이고 명망 있는 사람이니, 잘 대우해 주어라.’ 문제가 붕어하자 경제가 즉위했다. 경제는 한 해 남짓 위관에 대해 어떤 일로 책망하여 꾸짖지 않았고, 위관은 단지 날마다 신중하게 책무를 다했다.
景帝幸上林, 詔中郎將參乗, 還而問曰:「君知所以得參乗乎?」
경제행상림 조중랑장참승 환이문왈 ; ‘군지소이득참승호?’
경제는 상림원을 좋아하여 중랑장 위관에게 함께하길 명했다. 돌아올 때에 경제가 위관에게 물었다. ‘당신은 짐이 함께하자는 이유를 아는가?’
綰曰:「臣従車士幸得以功次遷為中郎將, 不自知也.」
관왈 ‘신종거사행득이공차천위중랑장 부자지야’
이에 위관이 아뢰었다. ‘신은 수레 위에서 곡예를 부려 총애를 얻고, 공을 쌓아서 순차적으로 중랑장으로 승진되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신을 무슨 연고로 동승시켰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上問曰:「吾為太子時召君, 君不肯來, 何也?」
상문왈 ‘오위태자시소군 군불긍래 하야?’
황상은 다시 물었다. ‘짐이 태자였을 때 주연에 초대했는데 당신은 오지 않았는데 왜 그랬는가?’
対曰:「死罪, 実病!」上賜之剣.
대왈 ‘사죄 실병’ 상사지검.
위관이 송구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에 공교롭게 병이 났었습니다.’ 황상이 그에게 한 자루의 보검을 하사했다.
綰曰:「先帝賜臣剣凡六, 剣不敢奉詔.」
관왈 ‘선제사신거범육 검불하감봉조’
위관은 아뢰었다. ‘선제께서 하사하신 보검이 모두 여섯 자루가 있는데, 또다시 폐하에게 감히 검을 하사받을 수는 없습니다.’
上曰:「剣, 人之所施易, 獨至今乎?」
상왈 ‘검 인지소시역 독지금호?’
황제가 말했다. ‘보검은 사람들이 다른 물건과 교환도 할 수 있는데 설마 지금까지 남아있는 보검이 있소?’
綰曰:「具在.」上使取六剣, 剣尚盛, 未嘗服也. 郎官有譴, 常蒙其罪, 不與他將爭;有功, 常譲他將.
관왈 ‘구재’ 상사취육검 검상성 미상복야. 낭관유견 상몽기죄 불여타장쟁; 유공 상양타장.
위관이 아뢰었다. ‘모두 있습니다.’ 황상은 그 여섯 자루의 보검을 가져오도록 하니, 보검은 완전한 상태로 칼집에 있었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위관은 부하 낭관들이 견책받을 일이 생기면 항상 그들의 죄책을 자기에 잘못으로 돌렸고, 다른 중랑장과 다툼을 벌이지 않았다. 또 공로가 있으면 항상 남들에게 양보했다.
上以為廉, 忠実無他腸, 乃拝綰為河閒王太傅. 呉楚反, 詔綰為將, 將河閒兵撃呉楚有功, 拝為中尉.
상이위렴 충실무타장 내배관위하간왕태부. 오초반 조관위장 장하간병격오초유공 배위중위.
황제는 그가 청렴결백하고 충실하며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드디어 위관을 하간왕(河間王)의 태부(太傅)를 삼았다. 오, 초나라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제는 위관을 장군으로 삼아 하간왕(河間王)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와 초를 공격하게 했는데, 위관이 공로를 세우자 중위(中尉)로 승진시켰다.
三歳, 以軍功, 孝景前六年中封綰為建陵侯.
삼세 이군공 효경전육년중위관위건릉후,
3년이 지난 경제(景帝) 전원(前元) 6년(서기전 151년)에 위관은 그간의 군공으로 건릉후(建陵侯)로 봉해졌다.
其明年, 上廃太子, 誅栗卿之屬. 上以為綰長者, 不忍, 乃賜綰告帰, 而使郅都治捕栗氏. 既已, 上立膠東王為太子, 召綰, 拝為太子太傅. 久之, 遷為禦史大夫.
기명년 상폐태자 주율경지속. 상이위관장자 불인 내사관고귀 이사질도치포율씨. 기이 상립교동왕위태자 소관 배위태자태부. 구지 천위어사대부.
그 다음해 황제는 태자(太子) 유영(劉榮: 경제의 둘째 아들. 무제의 형)를 폐위시키고, 태자의 장인이었던 율경(栗卿)의 무리를 주살했다. 황제는 위관이 장자로 덕이 있는 사람이고 이 사건을 차마 매정하게 처결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바로 그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질도(郅都)의 율씨(栗氏)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엄정하게 처벌하게 했다. 이 사건의 처리한 후에 황제는 교동왕(膠東王) 유철(劉徹: 후일의 한무제)을 태자로 세웠으며, 위관을 불러들여 태자태부로 삼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위관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五歳, 代桃侯舎為丞相, 朝奏事如職所奏. 然自初官以至丞相, 終無可言. 天子以為敦厚, 可相少主, 尊寵之, 賞賜甚多.
오세 대도후사위승상 조주사여직소주. 연자초관이지승상 종무가언. 천자이위돈후 가상소주 존총지 상사심다.
5년 지난 뒤, 위관은 도후(桃侯) 유사(劉舍)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단지 자기 직분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만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관리가 되어 승상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이렇다 할 만한 제안을 올리거나 책임질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그가 돈후하여 어린 군주를 잘 보좌할 수 있다고 여겨 그를 특별하게 존중하고 총애했으며, 상으로 하사한 물건이 많았다.
為丞相三歳, 景帝崩, 武帝立. 建元年中, 丞相以景帝疾時諸官囚多坐不辜者, 而君不任職, 免之. 其後綰卒, 子信代. 坐酎金失侯.
위승상삼세 경제붕 무제립. 건원년중 승상이경제질시제관수다좌불고자 이군재임직 면지. 기후관졸 자신대. 좌주금실후.
위관은 승상이 된 지 3년 후, 경제가 세상을 떠났고, 무제(武帝)가 즉위했다. 건원(建元) 연간에 경제가 병이 났을 때 여러 관서의 죄인들이 무고하게 연좌된 자가 많았다는 때문에 위관은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서 면직되었다. 그 후 위관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인 위신(衛信)이 대신 건릉후의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뒤에 위신은 주금(酎金: 한나라 때에 제후들이 돈을 모아 술을 빚어 종묘에 바침)의 규정을 어겨서 작위를 잃었다.
<직불의>
塞侯直不疑者, 南陽人也. 為郎, 事文帝. 其同舎有告帰, 誤持同舎郎金去, 已而金主覚, 妄意不疑, 不疑謝有之, 買金償.
색후직불의자 남양인야 위랑 사문제. 기동사유고귀 오지동사랑금거 이이금주각 망의불의 불의사유지 매금상.
색후(塞侯) 직불의(直不疑)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그는 낭관(郎官)이 되어 문제를 섬겼다. 일찍이 한 방을 쓰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같은 방을 쓰던 다른 낭관이 자기 것을 착각하고 남의 황금을 가지고 갔다. 뒤이어 금 주인이 금을 분실된 것을 알아채고 엉뚱하게 직불의가 훔쳐간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자 직불의는 분실한 금에 책임이 있다고 사과하고 황금을 사서 보상해 주었다.
而告帰者來而帰金, 而前郎亡金者大慚, 以此稱為長者. 文帝稱挙, 稍遷至太中大夫.4)
그 후에 휴가를 얻어 집에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금을 가지고 뒤돌려주자 금 주인이었던 낭관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이 일을 기화로 직불위는 덕이 있는 ‘장자(長者)’로 일컬어졌다. 문제도 그의 인품을 칭찬하고 발탁했는데, 점차 승진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朝廷見, 人或毀曰:「不疑狀貌甚美, 然獨無柰其善盜嫂何也!」不疑聞, 曰:「我乃無兄.」然終不自明也.
조정견 인혹훼왈 ‘불의상모심미 연독무내가선도수하야!’ 불의문 왈 ‘아급무형’ 연종불자명야.
한번은 조정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어떤 사람이 그를 헐뜯어 이렇게 비방했다. ‘직불의는 용모가 매우 그럴싸하게 훌륭하지만 그러나 유독 형수와 사통을 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들은 후에 직불의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형이 없다.’ 그러나 끝까지 직접 나서서 변명하지 않았다.
呉楚反時, 不疑以二千石將兵撃之.
오초반시 불의이이천석장병격지.
오, 초나라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직불의는 2천석에 지위를 지닌 관리의 신분으로 병사를 이끌고 반군을 공격했다.
景帝後元年, 拝為禦史大夫. 天子修呉楚時功, 乃封不疑為塞侯. 武帝建元年中, 與丞相綰倶以過免.
경제후원년 배위어사대부. 천자수오초시공 내봉불의위색후. 무제건원년중 여승상관구이과면.
경제 후원(後元) 원년(元年: 서기전 143년), 직불의는 어사대부로 임명되었다. 황제는 오, 초나라의 반란을 평정한 사람들의 공로를 표창할 때에 직불의를 색후(塞侯)에 봉해졌다. 무제(武帝) 건원(建元) 연간에는 승상 위관과 더불어 과실로 인해 면직당했다.
不疑學老子言. 其所臨, 為官如故, 唯恐人知其為吏跡也. 不好立名稱, 稱為長者.
불의학노자언. 기소임 위관여고 유공인지기위사적야. 불호립명칭 칭위장자.
직불의는 노자(老子)의 학설을 익혔다. 그는 매번 지방을 감독할 때에 담당 관리들로 하여금 모두 앞서서 임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단지 그는 남들이 자신이 관리로써 남긴 치적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명성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큰 사람(長者)이라고 칭송했다.
不疑卒, 子相如代. 孫望, 坐酎金失侯.
불의졸 자상여대. 손망 좌주금실후.
직불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직상여(直相如)가 작위를 계승했다. 손자 직망(直望) 때에 와서 주금(酎金)의 규정을 어겨서 작위를 잃어버렸다.
<주문>
郎中令周文者, 名仁, 其先故任城人也. 以醫見.
낭중령주문자 명인 기선고임성인야 이의견.
낭중령(郎中令) 주문(周文)의 이름은 인(仁)이고, 그의 선조는 본디 임성(任城) 사람이었다. 의술로 뛰어나 이를 계기로 황제를 알현했다.
景帝為太子時, 拝為舎人, 積功稍遷, 孝文帝時至太中大夫. 景帝初即位, 拝仁為郎中令.
경제위태자시 배위사인 적공초천 효문제시지태중대부. 경제초즉위 배인위낭중령.
경제가 태자였을 때 그는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차츰 공로를 쌓아 승진하여 문제(文帝) 때에는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경제 즉위 초기에 주인(周仁)을 낭중령으로 임명했다.
仁為人陰重不泄, 常衣敝補衣溺袴, 期為不絜清, 以是得幸. 景帝入臥內, 於後宮袐戯, 仁常在旁. 至景帝崩, 仁尚為郎中令, 終無所言.
인위인음중불설 상의폐보의뇨고 기위불결청 이시득행. 경제입와내 어후궁비희 인상재방 지경제붕 인상위낭중령 종무소언.
주인(周仁)은 인품이 주의 깊고 세심하며 중후하여 남들의 말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낡아서 기운 옷이나 오줌으로 찌든 속옷을 입었는데, 고의로 불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궁들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제가 침실에 들어가 후궁에서 은밀하게 희롱을 걸 때 주인은 항상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경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인은 낭중령을 지냈으나 시종일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비밀을 유지했다.
上時問人, 仁曰:「上自察之.」然亦無所毀. 以此景帝再自幸其家. 家徙陽陵.
상시문인 인왈 ‘상자찰지’ 연역무소훼 이차경제재자행기가. 가사양릉.
황제가 때때로 남들에 대해 물으면 주인은 언제나 말하길 ‘폐하께서 친히 그를 관찰하시길 바랍니다.’고 하며, 함부로 남들을 헐뜯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는 일찍이 두 번이나 친히 그의 집으로 행차했다. 뒤에 주인은 양릉(陽陵)으로 집을 옮겼다.
上所賜甚多, 然常譲, 不敢受也. 諸侯群臣賂遺, 終無所受.
상소사심다 연상양 불감수애. 제후군신뇌유 종무소수.
황제가 하사한 선물이 매우 많았으나 늘 사양하며 감히 덥석 받지 않았다. 여러 제후와 백관들이 뇌물을 주면 끝까지 받지 않았다.
武帝立, 以為先帝臣, 重之. 仁乃病免, 以二千石祿帰老, 子孫鹹至大官矣.
무제립 이위선제신 중지. 인내병면 이이천석록귀노 자손함지대관의.
무제는 즉위한 후에 주인이 선제의 대신임을 감안하여 그를 각별하게 존중했다. 주인은 병으로 인해 조정에서 물러나왔을 때에 2천석의 봉록으로 고향에 돌아가 노후를 지내게 하였다. 그의 자손들은 모두 대관(大官)이 되었다.
<장숙>
禦史大夫張叔者, 名歐, 安丘侯説之庶子也. 孝文時以治刑名言事太子. 然歐雖治刑名家, 其人長者. 景帝時尊重, 常為九卿.
어사대부장숙자 명구 안구후열지서자야. 효문시이치형명언사태자. 연구수치형명가 기인장자. 경제시존중 상위구경.
어사대부(御史大夫) 장숙(張叔)의 이름은 구(歐)이고, 안구후(安丘侯) 장열(張說)의 서자(庶子)였다. 효문제 때에 법가의 학설인 형명학(刑名學)을 연구했고 태자를 섬겼다. 그가 비록 형명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그의 인품은 도리어 덕이 있는 장자(長者)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경제 때에 그를 각별하게 존중하여 항상 구경(九卿)의 지위에 있었다.
至武帝元朔四年, 韓安國免, 詔拝歐為禦史大夫. 自歐為吏, 未嘗言案人, 専以誠長者処官. 官屬以為長者, 亦不敢大欺.
지무제원삭사면 한안국면 조배구위어사대부. 자구위리 미상언안인 전이성장자처관. 관속이위장자 역불감대기.
무제 원삭(元朔) 4년(서기전 125년)에 이르러 한안국(韓安國)을 면직시키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장구를 어사대부로 임명했다. 장구는 어사대부가 된 뒤로부터 함부로 남들을 징벌하자는 언행을 삼갔고, 오로지 성실하고 덕망이 있는 장자(長者)다운 태도로서 벼슬살이를 했다.
上具獄事, 有可卻, 卻之;不可者, 不得已, 為涕泣面対而封之. 其愛人如此.
상구옥사 유사각 각지; 불가자 부득이 위체읍면대이봉지. 기애인여차.
그의 부하 관리들도 모두 그를 덕망이 깊은 장자로 섬겼고 또한 감히 그를 크게 속이지 않았다. 황제가 중대한 범죄 사건을 그에게 처결하라고 지시하면 다시 심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되돌려 보내고, 되돌려 보낼 수 없으면 부득이 처리했는데, 이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건의 문서를 바라보면서 친히 밀봉했다. 그가 남들을 아끼는 것이 이와 같았다.
老病篤, 請免. 於是天子亦策罷, 以上大夫祿帰老於家. 家於陽陵. 子孫鹹至大官矣.
노병독 청면. 어시천자역책파 이상대부록귀노어가. 가어양릉. 자송ㄴ함지대관의.
뒤에 그가 늙고 병이 위독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그래서 천자 또한 조서를 내려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상대부(上大夫)의 봉록으로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게 하였다. 그의 집은 양릉(陽陵)에 있었고, 자손들은 모두 대관(大官)이 되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仲尼有言曰「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其萬石、建陵、張叔之謂邪? 是以其教不粛而成, 不厳而治.
태사공왈 : 중이유언왈 ‘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 기만석 건릉 장숙지위야? 시이기교불숙이성 불엄이치.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孔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군자(君子)는 말을 유창하게 못해도 실천하는 것은 민첩하고자 한다.’ 이것은 만석군(萬石君), 건릉후(建陵侯), 장숙(張叔)과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이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졌고, 엄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塞侯微巧, 而周文処讇, 君子譏之, 為其近於佞也. 然斯可謂篤行君子矣!
색후미교 이주문처첨 군자기지 위기근어녕야. 연사가위독행군자의!
색후(塞侯) 직불의는 공은 적고 교묘하게 행동했으며, 주문(周文)은 자신을 낮추어 공손하게 아부하는데 급급했다. 그래서 군자는 그들을 비난하는데, 그들의 언행이 간교하고 아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실하게 행동했던 군자라고 말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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