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檀君紀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鴻荒之世, 開刱之業, 賴以成焉,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신시씨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어른으로서 태고적 세상이 처음으로 개벽하던 일들이 모두 신시씨에 힘입어 이루어졌으니, 무릇 단군 이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인들이다.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 中多仙家語. 예전에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고라고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진역유기(震域遺紀)》 세 권을 저술하였다. 이는《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며 우리나라 옛 역사를 갖추어 실은 것으로서 일연(一然)의 책과 비교하면 서로 사뭇 큰 차이를 보이며 그 가운데는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余以爲, 我國以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내가 생각건대 우리 무리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점차 스며들어 베어 있는 지가 이미 오래인데, 故, 說史者, 不可只擬班. 馬之筆而踞蹐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하여 단지 반고나 사마천의 글만을 흉내내며 옴짝달싹을 못하는가! 한(漢)나라 사람은 한(漢)나라 출신이고 우리는 우리 무리인데 어찌하여 당당한 진역(震域)을 꼭히 한나라 제도에 견주어야 만족하는가! 况,國史蕩失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 保於岩穴者也. 하물며 우리의 이야기가 몇 번에 걸친 병화(兵禍) 끝에 씻은 듯이 소실되고 지금에 근근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도가와 불가에서 기록하여 전하는 것뿐이었으나 요행히 바위굴에 간직되어 오던 것을 얻게 되었다. 道家旣承, 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則其論東史者, 大有愈於緇流所記, 多出於牽强傅會, 臆爲之說者也. 余寧取淸平之說, 而欲無疑云. 도가는 이미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제한 근본 흐름을 이어받았으며 게다가 이렇게 문헌의 잔맥을 얻게 되었으니, 지도자를 논함에 있어 견강부회하고 억측이 많은 불가의 기록에 비해 훨씬 낫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이제 규원사화 마지막 단군기를 보게되는데... 계속 드러내는 사고는 불가에서 지켜온 가르침 그리고 도가의 가르침을 한데 묶을수 있음을 말한다.( 전통사상이 극히 일부만 전해져 왔으나 이제 온전한 모습을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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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그리하여 모든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 발원지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였다. 今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지금의 만주 길림 땅으로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 남쪽 땅이다.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신라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조영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모든 말갈족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의 무리의 후예이다. 後屬凌夷, 盡擲先祖舊疆於他人之手, 而區區靺鞨一支, 猶能拪捿息於枌楡之地; 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 天門大捷, 國基賴定, 夫豈偶然也哉! 뒤에 지도자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고 구구하게 말갈의 일족에 섞여 느릅나무 숲으로 옮겨가 살았다: 대씨(大氏)가한 차례 호령하니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대첩으로 나라의 기초를 바로잡게 되었으니, 무릇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盖蘇密 涑沫 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소머리'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들 덕택이요 신의 조화에 힘입어 수많은 책 속에서도 그 소리가 끊어지지=없어지지 않았음이라. 今, 春川.淸平山南十餘里, 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濶而江流抱回, 是爲貊國故都,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 지금의 춘천 청평산 남쪽 십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강이 합쳐지는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맥국 역시 단군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 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었을것이다. - 이 구절에서 소위 민족 사학에서 논란이 되는 지명 논쟁이... 본문에도 분명 현 만주땅이라 밝히고 있고... 일단 태백산 서남쪽에 두물머리가 있다? 한국엔 도읍될만한 두물머리 없다 마지막 문단으로 혹자는 양수리를 떠올릴지 모르나 양수리는 태백산의 한참 북쪽차라리 설악산 서남쪽이 양수리라 한다면 그럴싸 해도... 여기보듯 속말 소밀=소머리=우수라 했는데 왜 이리 많은 표현이 생겼을까? 한자를 빌어 우리음을 적던 이두에서 한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수로 바뀐다 치자. 즉, 우리 말의 표기는 이두에서 한글과 유학자들의 한자 둘로 갈라져 버린 건 아닐까???? 이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 이두가 말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우리 연구를 힘들게한 원흉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後屬凌夷, 盡擲先祖舊疆於他人之手... 여기서 凌夷: 가르침에 회의를 느낀 지도자로 봄이 옳지 않겠나? 이 단어 중국어에 쇠약해지다라는 듯으로 쓰이지만 본디 릉은 업신여기다와 지도자 이를 결부한 글자니 지도자를 업수히 여기다로 봄이 뒤 문구와 연결이 매끄럽다. 능이라는 이름도 없음이 이를 반증한다. 또한 그 다음 분유지지라는 말도 분유=느릅나무... 느릅나무의 땅=느릅나무 숲... 문명을 버리고 숲속 무리로 전락한=가르침을 버린 무지랭이를 말한다 본다. |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天命在爾, 統我震域 故, 國號曰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今, 內外載籍, 幷無是語.
盖忽汗之敗, 遼虜凶殘, 室宮庫藏, 焚燒略盡, 復豈有載籍之得存者耶.
雖然, 渤海王子大光顯以下, 來投於高麗者甚衆, 中多公侯卿相及慷慨泣血之士; 淸平所記, 盖有據於渤海人之所秘藏者也.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말하기를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천통(天統)'이라 건원하며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에 이르러 교만하고 안락함에 빠져 점차 이를 폐지하고 또한 유학과 불교를 아울러 섬기니 마침내 쇠퇴하여……]라고 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의 서적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아마도 홀한의 패배 때 요나라 오랑캐의 흉악한 잔당들이 궁실이며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거의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다시 어찌 서적 가운데 남아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고려에 투항해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공경대부나 제후와 재상 및 비분강개하는 의기로운 선비도 많았으니, 청평이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발해인들이 비밀리에 소장한 것에 근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저자가 비분강개하는 것은
제 것을 버린 사람들이 망가지는 모습...
제 것이 뭔지 모르니 공자에 홀딱 정신팔려 숭상한다는 개탄이다.
그럼 저자가 생각하는 본디 하늘 가르침이란 뭘까?
아직까지 설명된 바 없지만...
아마도 호기로운 기상 아닐까 한다.
장자로서의 의연함,
어른으로서의 당당함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可怪, 金富軾爲仁宗修《三國史記》,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 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等[自](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 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 誌公記, 三聖密記》等書, 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삼국사기》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동천왕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 이름이《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지공기(誌公記)》.《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 -저자가 질책하는 부분은 김부식이 유교적 관점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며 세조때도 있는 조대기란 책이 김부식 당대에 없었다는 모순을 짚어낸다. [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 즉, 김부식이 활동하던 고려시대에 조선 세조때에도 있는 책을 참조하지 않음은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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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遼史地理志》, 有[顯州奉先軍, 上,節度. 本渤海.顯德府地. 天顯三年, 遷東丹民居之, 升爲南京城. 天顯十三年, 改南京爲東京府曰遼陽……]等句. 今遼陽在蘇密以南六百餘里, 與淸平之說, 甚相逕庭.《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 의하면 [현주(顯州)의 봉선군(奉先軍)은 상절도(上節度)로서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 땅이다. 천현(天顯) 3년에 동란(東丹)의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승격시켜 남경성(南京城)으로 삼았다. 천현 13년에 남경을동경으로 고쳐부르고 관청을 두어 요양(遼陽)이라 하였다]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지금의 요양은 소밀(蘇密)의 남쪽 600여 리에 있으니 청평의 말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且遼陽旣爲中京, 則西京當擬於遼西.臨潢等地, 以渤海舊疆考之, 決無是理. 또한 요양이 이미 중경이 되었으니 곧 서경은 당연히 요서(遼西)나 임황(臨潢) 등의 땅에 비견되어야 하므로 발해의 옛 강토로써 이를 고찰하여 보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况淸平諸說, 已有所據, 而《遼史》則乃元.至正中, 丞相脫脫等所撰也; 經金.宋交爭以後數三百年, 文獻自多不備, 傳說亦多失正鵠, 而渤海亡後, 其世族舊臣, 隨處擧兵, 殆將百年不息, 遼人多遷其民, 與漢民雜處, 遼西之地, 以至城邑, 冒稱渤海, 本名者, 不下數十. 더욱이 청평의 모든 말들의 근거가 되는《요사(遼史)》는 곧 원나라 중정(中正) 연간에 승상 탈탈(脫脫) 등이 찬술한 것으로서 금나라와는 의리를 지키고 송나라와 전쟁하며 거의 3백년이 지난 뒤이기에 문헌이 사라졌고 내려오는 얘기 또한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데 이는 발해가 망하고 발해 게통이나 신하들이 수차에 걸쳐 병사를 일으켜 100여년간 수많은 지도층들이 죽어넘어갔다. 요나라 사람들이 많이 옮겨 한나라 백성과 섞어 거처하게 하였기에 요서의 땅 성읍을 발해의 지명을 모방하여 부르게 되어서 본래의 지명이 남은 곳은 수십 곳을 넘지 못하였다, 元人修史者, 只憑古傳名字, 輒自斷之, 不亦踈乎. 원나라 사람이 엮은 역사는 단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의 글자에만 의지해서 함부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므로 이 또한 소흘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壬儉城者, 卽古語京城之意也. '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으뜸되는 성'이라는 의미이다. 平壤之意, 雖未詳, 亦必都城之義, 如新羅之徐羅伐 百濟之慰禮也. '평양'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 《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王險城.《史記》.《漢書》[通及](及《通)典》, 皆有王險城字, 此又儉字之誤也. 此可續述焉.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서술하겠다. -이 문단에서 청평의 잘못을 꼬집어 내는데... 발해의 수도 현덕부를 남경으로 다시 동경으로 그리고 요양으로 이름이 바뀌고 종래는 중경으로 바뀌는데 현재(당시) 요양은 김부식이 전슬한 소밀의 600여리 남쪽... 발해가 5경을 두었으므로 발해전도와 비교하면 서경이 요서나 임황이 되어야 하는데... 그 요서땅과 거리는 상당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단은 북애의 주장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단군기를 마친후 다음 숙제로 남겨둔다. |
檀君旣建都於壬儉城, 乃築城郭, 建宮室, 置主命 主穀 主兵 主刑 主病 主善惡及主忽諸官,
以其子夫婁爲虎加,總諸加者也.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짓고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관리를 다스리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우리는 조판기에 나온 이름들 신지씨, 고시씨, 치우씨, 주인씨의 이름들이 나온다. 물론 그 후손들이라고...
이런 형태로 본다면 초기 통치체계는 역할분담 체제요, 대를 이어 자리를 물려 받았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즉, 왕과 총리가 공존하는 입헌군주제에 준하는...
섣부른 결론은 나중 문제로 접어두고 읽어가도록 하자.
舊禮, 凡祭天, 必先定吉日, 擇白牛而護養之, 及期, 宰殺以頭薦之於嶽瀆, 白頭, 牛首之名, 頗亦有因於此也. 盖祭天報本之禮, 始於檀君, 後世歷代諸國, 莫不祭天. 扶餘濊貊 馬韓 新羅 高句麗諸國以十月, 百濟以四仲月, 各有禱天 舞天 祭天 郊天 迎鼓 東盟之稱. 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踶占吉凶之俗, 盖其源流久遠而沈漸成俗, 亦可知矣. 夫尊卑之禮, 必自敬鬼神而興, 上下尊卑之序定而先王經世之道行焉. 而敬神之禮, 莫大於祭天, 通萬古,如四方, 未有人而不知畏天者. 是以,《易》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又曰: [首出庶物, 萬邦咸寧.] 盖言其聖人, 天而率民也.
옛 예법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먼저 길일을 택하고, 미리 흰소를 선택하여 잘 길러 날이 되면 잡아서 그 머리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올리는데, '백두(白頭)'는 소의 머리를 이름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가 있다. 대저 하늘의 본에 제사로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다.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 부여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 드린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니, 오래된 풍습으로 민간에 젖어들어 풍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그런 예의 귀하고 천함은 신명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나뉘니, 위아래와 귀천의 순서가 정해짐은 선왕=단군의 치리를 행하느냐에 따라서이다. 극러므로 신명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을 경외하지않는 자 없다. 그러한 까닭에《역(易)》에 이르기를 [위대하도다 하늘의 도리, 만물의 시작이 하늘의 덕분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싹이 터 나오니 모든 나라가 다평안하니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체득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통솔하는 것의 기원임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 이 부분에서 엿 볼수 있는 것은, 잡신을 섬기는 무리와 하늘 이치를 섬기는 무리를 분별함이다. 즉, 힘을 두려워하고 제사지냄은 비천한 禮이고, 하늘 이치에 감복하고 감사의 제를 드림은 존귀한 禮로 보는 것... 즉, 가장 제사다은 제사는 단군의 예를 보듯... 하늘 이치를 잘 알고 이해하며 그런 이치가 우리와 같이함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제사임을 강조한 것... 洪範八政, 三曰祀, 祀者, 所以通神明而報其本也. 홍범팔정(洪範八政)의 세번째는 '사(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란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따르는 것이다. 是以, 陸有祭獸之豺, 水有祭魚之獺. 夫豺獺者, 禽獸也, 猶知報本之意,况人而不知其報本之禮乎! 이런게 육지에는 제사를 지내는 짐승으로 승냥이가 있고 물에는 제사를 지내는 고기인 수달이 있으니,하물며 승냥이나 수달은 짐승이면서도 오히려 근본에 응답하는 의미를 아는데 항차 사람이면서 근본에 응답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 又况神市, 肇宅人界, 其降自天; 桓儉繼志述事, 未嘗少弛, 此桓儉所以,纔定厥鼎而便祭上天也, 또한 신시씨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환검은 그 뜻을 이어 이를 처리함에 조금도 소흘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까닭에 환검이 비로소 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且太白山者, 神市陟降之靈地也; 檀君踐阼, 亦肇于厥地, 此又始行之, 于太白也.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是爲東方萬世之國典, 故古代國君, 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 因以爲道.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사람들의 법도이니, 고대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즉 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 여기서 제사=예란 한마디로 격식이 아닌 그 마음의 감동... 하늘이 우리와 교통함의 의미를 알고 행햐야 한다는 말... 격식에 매여 형식만 따지고 그 마음엔 감동이 없는...'제사엔 관심없고 젯밥에만 마음 뺏긴 사람들을 꾸짖는' 것... 이리 격식 갖췄으니 남들이 양반으로 생각해주겠지... 우린 이거 한 접시라도 더 올리고 비싼 놈으로 올렸으니 조상들이 기뻐하겠지하는 팔푼이 같은 마음을 께우치는 내용이다. 그저 빼꼼 얼굴 디밀었으니 효도했다는 위선... 진짜 효자는 최고로 겉치레하는게 아니고 온 맘과 정성으로 섬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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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 이치에 교감하여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깨우침을 행한 지 수 년에 사람과 땅을 거느리니 그 교화가 이루어졌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인위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가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요 곧 사람을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후에 계속하여 말하고자 한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 曰平壤卽第二王儉城也. 盖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綠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 桓都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오히려 남쪽으로의 교통이 어렵다.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치세 때 모두 네차례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 여기서 저자는 패수가 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주장하며 국내성 환도성 성터가 있는 지역이라 못박는다. 즉 백산과 패수 중간 지역... 역으로 백산은 국내성이나 환도성 북쪽에 있고 그 북쪽으로 흐르는 혼동강이 있다는 진술에 힘입어 평양성의 위치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이야 지리학자 몫이고... 분명한 것은 패수가 현 대동강 유역은 아니라는 사실 기록... |
按《新唐書·渤海傳》曰: [高麗古地爲西京, 曰鴨綠府, 領神 豊 桓 正四州.] 《遼史·地理志》曰: [綠州, 鴨綠軍, 節度, 本高麗古國, 渤海號西京.鴨綠府, 都督神 桓 豊 正四州事. 故縣三, 神鹿 神化 劒門, 皆廢.] 又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 神鄕 淇水, 皆廢.] 《신당서.발해전》에 따르면 [고려의 옛 땅을 서경으로 삼아 압록부(鴨綠府)로 이름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라 하였으며,《요사.지리지》에는 [녹주(綠州)의 압록군(鴨綠軍)은 절도(節度)이다. 본래 고려의옛 국토로서 발해가 서경압록부라 불렀다. 모두 신(神)·환(桓)·풍(豊)·정(正) 등 4주의 일을 감독한다. 옛 현인 신록(神鹿)·신화(神化)·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환주(桓州)는 고려의 중도성(中都城)이며 옛 현인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夫渤海承高句麗(之)後統, 高句麗復出於夫餘, 則渤海之世, 猶有古史之傳者, 想不少矣. 무릇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훗날 그 지역을 다스렸고, 고구려는 다시 부여로부터 나왔으니, 곧 발해의 세대에는 아직까지 옛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或曰: [平壤之敗李勣, 盡燒宮室庫藏, 復虜其公侯世族, 則史籍亦不免灰燼矣, 渤海, 安得傳其史乎?] 余以爲不然. 혹은 말하기를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패하여 궁궐이며 곳간이 남김없이 불타 버리고, 게다가 공경대부며 명문세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기에 역사 서적 역시 재가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 발해가 어떻게 그 역사를 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渤海.高王, 乃高句麗舊將也. 高句麗之亡, 徙居營州, 及看藎榮之亂, 與乞四比羽, 領衆東還, 麗.鞨之衆, 響應而起, 盖其舊國宿將, 如百濟之黑齒常之, 明矣; 其麾下, 想多舊國遺臣, 能博通古今者. 발해의 고왕은 바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영주(營州)로 옮겨 거처하다가 신영(藎榮)의 난을 보고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무리를 영도하여동쪽으로 돌아오니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대저 이들은 옛 나라의 노련한 장수들로 마치 백제의 흑치상지와 같음이 분명하니, 생각건대 그 휘하에는 옛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능히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는 자가많이 있었을 것이다. 且自高句麗亡後, 距高王之興, 僅二十七八年事也, 古史能無得傳乎? 且以文勢言之, 則神州當爲渤海.西京所在鴨綠府地, 而神州 桓州之名, 又有近於神市 桓儉等字.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로부터 고왕이 일어서기까지의 사이는 겨우 27,8년의 일이니 옛 역사가 능히 전해진 것이 없었겠는가. 또한 문장의 흐름을 보아 말하더라도 곧 신주(神州)가 마땅히 발해의 서경이 있는 압록부 땅이며, 신주(神州)나 환주(桓州) 등의 이름 또한 신시(神市)나 환검(桓儉) 등의 글자에 가까운 바가 있다. 神市 桓儉, 人每認爲一人, 至今擧世殆然而. 항차 신시씨와 환검신인을 사람들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여기더니 지금은 모든 세상이 거의 다 그렇게 여긴다. 神州屬縣, 有神化 神鹿等地; 桓州屬縣, 又有桓都 神鄕 淇水之名. 桓都者, 盖高句麗之丸都也. 신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신화(神化)와 신록(神鹿) 등의 땅이 있고, 환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또 환도(桓都)와 신향(神鄕) 및 기수(淇水) 등의 이름이 있다. 丸都之名, 旣出於《魏志》.《北史》等書, 則桓.丸之誤, 固不可知, 而渤海旣以桓州 桓都定名, 則其或原於慕遠之意. 환도(桓都)는 아마도 고구려의 환도(丸都)일 것이다. '환도(丸都)'라는 이름은《위지(魏志)》나《북사(北史)》등의 책에도 이미 나오는데, 곧 '桓'이 '丸'의 잘못 된 표기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발해에서는 이미 환주(桓州)와 환도(桓都)로 이름을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는 아마도 오랜 옛날을 그리는 뜻에 그 근원을 두었으리라. 神鄕則, 有寓神市之鄕之義也. '신향'이라 함은 곧 신시씨의 삶을 사는 정의로운 고장이라는 뜻이 있다, 神化則, 言神人之化也. '신화'라 함은 곧 신인의 교화를 말하는 것이다. 神鹿之稱, 尤益可奇. '신록'의 명칭은 더욱 기이하다. 古來, 稱桓儉曰神人, 則神 桓等名, 決非偶然, 且淇水,《元.一統志》作浿水, 又與前述浿水之北之說, 暗合. 항차 예로부터 환검(桓儉)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하였으니, 곧 '神'·'桓'등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기수(淇水)는《원일통지(元一統志)》에 패수(浿水)로 되어 있으며, 또 앞에서 서술한 '패수의 북쪽'이라는 이기와 암암리에 부합한다. 按漢籍, 說浿水及平壤者, 頗多, 今不可便述, 而神州 桓州 神化 神鹿 桓都 神鄕 浿水之名, 旣與檀君古事, 多合, 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한나라 서적에 의거하면 패수와 평양을 말한 것이 자못 많으나 지금 다 말할 수는없다. 신주·환주·신화·신록·환도·신향·패수 등의 이름은 이미 단군의 옛 일들과 많이 부합되니, 곧 단군의 두번째 도읍인 평양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저자의 고증작업을 본다. 수많은 서적을 들어 패수란 글자가 기수라는 글자와 통함을 들고 신주 환주니의 단어가 서로 혼용되어 쓰임을 증명하고 패수 지역이 기수 지역이란 주장을 편다. 다시 한 번 드는 생각... 지명이란 변화하는 것... 정권이 바뀌어도... 반대로 기리기 위해 그 이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방언이나 사투리로 서로 다른 발음 그를 한자로 옮기는 이두 향찰등의 표기의 문제도... 쉽게 묻자 일산이??? 전에는 능곡... 세종시의 본디 지명은? 정읍의 본디 지명은???? 바로 요근래 그런 변화 속에도 개명의 원칙? 맥이란게 있을 터... 백두산의 원 지역이 어디든 그 산을 기억하고픈 이들이 지금의 산을 백두로 부른게 흠은 아니다. 다만은... 그리 고집스러울 만치 우리 심성 심연에 자리한 것이 뭔가???? 우리의 질문은 그걸 향해야 한다고 본다. 그건 바로 신시씨 고시씨 주인씨 그리고 환웅를 통한 하늘 나라의 이 땅에서의 실현... 절연되고 고립된 게 아니라 아직도 우리 마음 깊은 곳은 하늘과 닿아있다는 그 정신 그게 중요하다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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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綠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 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乃得婆 江合流處, 又行二百里, 至江界.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山河固密. 盖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渤海.神州 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또한《당서.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 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옛 영토가 어디 있었다의 문제 아니라 실재했던 조상들의 정신문화를 찾아가는 것... 글로만 보더라도 신의주에서 동북으로 1400여리 거기서 또 600리 그럼 2000리 거리... 요즘 리수로 곱하기 4면 800키로... 옛날 단위로 300보 내지 360보... 한 걸음 키에서 100뺀 걸로 보자면 2키로 남짓 그래도 400키로... 발해 그 전신 고려의 도읍이 있던 자리... 그렇다면 백두산 근방이 맞다... 적어도 지금의 평양이 고려나 발해 전대 단군시기의 평양은 아니라는 논지... |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洫,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榼, 有一童子, 衣緋衣, 從榼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직책명의 변화내지 담당의 변화를 본다 .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동방에서 온 3인??? 동방은 어딜 말함인가?
위에 말하는 갑비고차는 갑곶을 말하고 강화도 참성단을 말한다는데...
백두산 근방에서 며칠 길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이 남는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貐,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미치고 서쪽은 알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해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널리 퍼질 정도로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으로 제후로 삼았다.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鈵崷莊, 風氣勁雄, 曰嫘黰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嫘黰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封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濊君. 夫蘇 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 夫餘諸國, 是也.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 卒本 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 나누어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여기서 아마 아시아를 아우르는 단군의 나라를 상정할수 있는데... 문제는 저자도 밝히듯 상세하지 않다는 문제가 남는다. 여기서 확실하다 할 것이 대황이란 단어... 그렇다면 서쪽의 알유란 짐승 이름이며 동시에 지명이란 말인데 실체가 분명치 않고... 남으로 해대라는 단어가 오늘날 하동지방이라면 이도 이치에 안닿는다. 동으로 바다에 닿았다 했고 북동에 신시씨들의 땅이 있다 하는데... 도무지 현대 지도로 그 경계를 그려내기 힘들다. 아무리 고려해도 이 내용들은 저자가 살던 시대 현존하는 지명들의 연원을 밝히는 설화체의 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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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 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되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橇, 山行則梮,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 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덧신을 신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을 박은 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 《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偎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鄰,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가에 살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水居偎愛也) 사람들이다.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況其地, 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靚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圯,,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隈,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 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여기보면 단군에 반기를 든 남쪽 夷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거기에 세워진 오늘날 강화도 참성단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또한 두악이란 단어로 비추어 보면 한마디로 돌 봉우리여야하는데... 인수봉이나 북악이 오히려 갑비고차의 조건인 돌 봉우리에 부합하지 않는가? 이에 의하면 강화도 이남에 사는 우리는 오히려 단군의 적통이기보다 반란군의 후손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또한 북해에 사는 살던 무리가 조선 무리라 하는데 북해와 강화의 거리 차이만치나 무리가 다르다. 북동쪽은 신지씨 무리의 봉토요 청구지역 봉토는 고시씨 무리에 주어졌다고 앞 문장에 기록되어있다.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동이족이라 믿지만... 夷란 그저 가르침을 전하는 지도자라는 의미로 본다면... 치우씨 무리들은 야만인들과 지내느라 가르침을 잊었고, 지역성에 따라 본디 가르침을 잃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게 저자의 의도라 보아진다. 또한 본문 중의 天毒育也其人이나 水居偎愛也라는 말은 하늘이 보살피고 기르는 사람이나 물가에서 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해석보다 '천독육야기'나 '수거외야의'라는 한자음을 빌린 이두로 된 종족명이 아닐지 싶다. |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의 홍수로 높은 파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요만(遼滿)의 들녘을 덮으니 패수의 물이 넘쳐 평양이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강이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마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貊 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들 하는데,《한서.식화지(食貨志)》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盖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 吳相(同)[通], 而彭 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여기서 부루와 팽오가 같은 음이다 이는 당시 한나라 발음이 그랬다 적고 있다.당연히 고시대 발음과 그를 표기하는 이두 향찰의 연구가 필요함을 본다.
이 부분이 보완되지 않고 현상태로 고조선이니 환국이니 언급함이 가당할까?
또한 부루단지의 유래를 들어 고유한 민족 정신이 신시씨때부터 이어온 것임을 밝힌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만들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癘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감염병이 창궐하여 병에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又値猛獸毒虫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虫遠遁而其害漸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 石 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 夫蘇石 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오늘날 사람들이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關嶺,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今遺俗尙存而, 野叟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 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몇몇의 기원을 보게된다. 부싯돌... 부소의 의술을 기리는 이름,,, 그리고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리는... 쑥과 우리민족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끈 부소... 쑥불 쑥뜸등 우리 일상에 많이 쓰이는 그 연원을 보게 된다. 마치 마야인들이 코카잎으로 고산병을 이기듯... 서낭당은 우리도 알다시피 마을 어귀에 오가며 주먹만한 돌을 모아둔 곳을 말하고 으슥한 곳에서의 짐승 퇴치 또는 마을간 전투=투석전 에 쓰이는 탄환 구실을 하던 것... 이것이 부루를 기리는 풍속임을 알려주고있다. 이런 투석전은 행주대첩에서도 보듯 우리의 전통적인 전투법 중 하나... 여기서 본다면 부루는 촌락 형성과 보존을 부소는 방역법을 남겨준 은인... 이들은 단군의 아들들...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且南鄙海島之民, 皆以璸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而錯居. 《尙書》所稱, 嵎夷 萊夷 淮夷 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무리가 탁록으로부터 돌아와 동방 사람(=지혜로운자=지도자) 으로 회대(淮岱) 지역에서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쌈하고 가축을 기르는 업에 종사했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 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족 무리들과 섞여 살게 되니, 《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嵎夷)·래이(萊夷)·회이(淮夷)·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여기서 또다른 夷의 이름을 보는데 우이:기도하는 사람=종교가, 래이: 선진 기술자 그룹, 회이:치수 기술자, 도이: 말 그대로 해양 기술자로 봄이 옳다고 본다. 즉, 동이족에서 나뉘어 간 수많은 이족이 아니라 각 전문가를 부르는 말... 전문가=maestro=夷로 봄이 옳고 앞 글에 언급된 동방에서 온 3인=현명한 3인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신시씨 말기??? 신시씨 치우씨 고시씨가 나름 영역을 가지고 갈려 나갔다더니?? 여기서 海岱라는 해변지역이라 하는데 도대체 거기가 어디? 만주벌판을 얘기하다 갑자기 산동지역??? 북으로 대황지역에 맞닿는 산악 지역에서 남서쪽으로 나간 치우씨가 돌아온 지역이 회대?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 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단군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남이란 남쪽으로간 夷인들... 이 책에 의하면 서남방 치우씨 무리 동남방 고시씨 무리... 둘은 엄밀히 말하면 기술자 무리 치우씨는 조직 통솔의 고시씨는 경제의 대가... 이들이 단군의 교화를 입었다는 말은 소위 정신 내지 인문학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보아야 옳다. 단군의 통치론은 祭天이란 종교성... 남쪽 사람인데 夷인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吏=지도자들 간의 차별성을 말하는 것 아니라 제천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표현... 여기서 열수는 어딘가? 청구가 한반도라면 한반도 남쪽은 제주도나 왜... 그런데 진,변이 그들이라 했다. 진과 변의 지경은 어디인가? 열수란 요동의 요하라 한다. 세개의 강이 줄지어 합하니 列水라는 단어와도 합한다. 그러면 문제는 청구=우리 나라는 열수 위쪽에 위치한다. 즉, 한반도가 청구는 아니라는 말... 진한 변한은 요하 아래 있게되고... 규원사화의 한계는 여기저기 참고하여 쓴 책으로 인해 일관성이란게 없다는 점... 제일 큰 게 갑비고차=강화=참성단... 이리 서술되면 단군의 나라는 백두산 근방 평양이 근거지요 이 문장처럼 열수=요하를 근거로 하면 지금의 만리장성까지... 한반도에 관심하기보단 요동땅에 주로 관심한다. 진한 변한의 위치는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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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是檀君西至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 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런 다음 단군은 서쪽 임검성에서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어 북쪽을 돌아보며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천하의 산과 물의 신을 봉하니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기를, 신지씨의 정신을 기리라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발길을 되돌려 서쪽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길 치우씨의 정신을 기리도록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또 남쪽을 돌면서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정신을 기리라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짜임새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단군의 지경을 추론하자면 태백산 남쪽이 임검성이요 북동으론 숙신홀까지 남서쪽 지경은 엄려홀이 되고 그 남쪽에 갑비고차가 있다. 즉, 동으론 청구 서쪽으론 엄려홀 치우씨 무리까지 남으론 낙랑홀이자 고시씨 무리까지라 볼 것이다. 여기 언급된 단군은 부루 단군? 신지씨, 치우씨, 고시씨, 단군의 연합이 그 무리의 실체? 이게 단일민족의 근거라 할수 있는가? 혈연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가치관을 지닌 무리=단군 무리라는 뜻... |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陰陽 四時之神, 及山岳 河川 里社之主.
단군은 모든 벼슬아치와 사람들을 모아 한 마음으로 일월성신 음양 사시 또 산과 하천 마을 신에게 예배하도록 하였다.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그 예배가 끝난후 모인 사람들에게 권고하였는데 말하자면 : 한 분 신은 최상이며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이 많은 사물들을 만들었으니, 크게 보면 거기에 속하지 않는 만물이 없고, 발고 신령하여 작은 티끌마저도 새지아니한다.
-하늘을 공경한다면 하늘이 내신 것도 하늘처럼 공경해야 한다.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단단히 생각해라 한 분 신은 최고의 신이니 온 세상을 통제하고 모든 선을 계도하고 모든 덕의 으뜸이니 모든 정신이 이를 아껴 지켜야 하니 큰 상서로움 밝음은 오직 신의 영역이다.
-덕과 선이 하늘의 본보기이니 그걸 이루면 하늘의 상서로움과 밝은 지혜를 주실것이다.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단단히 생각해라 하늘님이 하늘나라에서 3000명과 함께 내려와 우리의 큰 어른이 되셨으니 그 공을 이루시고 되돌아 가셨으니 신의 영역이다.
- 이 말은 하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시고 승천하였으니 그 승천이 바로 우리가 하늘과 맞닿는 통로라는 말이다.
*朝天: 아침에 피어오르는 구름속에 승천함을 표현하는 단어...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복돋우고 모든 악함은 소멸시켜, 본성에 따라 공덕을 완성하라 이게 하늘로 승천함=하늘과 연결의 의미라.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다른 길이 없으니, 너희는 순수한 정성으로 이 마음으로 하나되어라 그게 하늘에 오르는 길이다.
-잔꾀 인간적인 생각은 잊고 하늘 본보기를 따르라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으니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아 다른 이들의 마음에 미치면 그 마음이 교화되고 하늘 본보기에 합하는 것이니 이것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이니라.
-하늘과 나누어 받은 그 마음으로 사람들과 통하도록 해라.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의 조화로서 십자가의 의미와 같은 말...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또한 이르노니: 부모가 있어 태어난 것이요 부모는 하늘이 내신 것이라 너희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바로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오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것이 충과 효의 의미다 이런 예를 갖추는 것 그게 깨우침이다.
- 부모, 나라를 섬기는 도리는 딱 하나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이다.
天有崩, 必克脫免.
(이런 깨우침이라면) 비록 하늘이 무너져도 능히 피할수 있을 것이다.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 毋妬, 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날 짐승도 쌍이 있고 낡은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아라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열손가락 안아픈 손가락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헐뜯지 말고, 서로 도와야지 서로 해치려 마라 그럼 가정과 나라가 흥하는 법이다.
-서로 하늘처럼 공경하면 나라도 상대방도 모두 화합하게 된다.
爾觀于牛馬, 猶分厥蒭;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너희가 보듯, 소나 말도 그 꼴을 먹음에도 분수를 아니, 너희는 서로 양보하고 빼앗지 말며, 서로 함께 생산하고 훔치지 말라. 가정과 나라가 알차게 번성하리라.
-가족과 나라의 흥성은 협력하고 시기질투하지 않음에 있다.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孽; 爾毋桀鷔以戕物, 毋傷人, 恒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너희가 호랑이를 보면 사납고 못되어 제 새끼를 잡아먹는다. 그러니 너희는 그런 사나움이나 급함으로 사물을 상하게도 사람을 다치지 말고 항상 하늘 본보기를 따라 만물을 아끼라 다만 너무 집착하게 되면 신명의 보우하심을 못얻게 되니 스스로나 가정에 망조가 드는 법이다.
-공경하는 것도 도를 지나치면 배금, 물신주의에 빠지게 된다.
爾如衝火于華田, 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너희가 잘 가꿔진 농작물을 불태워 그 풍요함이 사라지면 신명과 사람들이 노하게 되니 즉: 모자람은 채우고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고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깐보거나 업신여기지 마라.
- 남의 번성을 시기하여 부수려 들지 마라 모자람은 채우고 도우려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爾雖, 厚包厥杳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비록 은행 열매를 두껍게 싸매도 그 냄새는 새어 나오는 법이다; 너희는 그런 본성을 알고 존중하여 꼼수를 부리지 말고 악심 품지 말고 해치려는 마음을 품지마라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 이로 받는 복록이 한없이 크다. 사람들아 그 이치를 마음에 새겨라.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한 겨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에 특별히 지켜지는 전례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이란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옛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 桓雄 桓儉者也.
'삼신(三神)'은 달리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로 보면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이제는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말한다.
三神者, 卽創天地 造治民物之三神也.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제석' 등의 단어는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으로서,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잘못이라 섣불리 할 수는 없다.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통용되었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함은 후대에 본을 따라 끌어다 붙인 제석이란 단어가 왜 불교에만 한정되겠는가?
좋고 아름다운 것은 누구나 따르는 것 아니냐.
본디 3신이란 기독교 버전으로 환인=하나님, 환웅=예수, 환검=예언자로 봐도 무리 없다는 말이다.
소위 3위1체론=trinity가 기독교 고유의 개념이기 보다는 천,인,영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부득불의 도구....
여기서 3위1체가 기독교 고유 사상이다 아니다 토닥이지 말고, 하늘과 사람의 그 밀접성을 알아야 한다. 즉, 이 즈음의 人乃天도 같은 맥락...
누가 먼저가 뭐 중요한가?
누가 그걸 잘 지키고 계승하냐가 중요하지...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단검이 무리들에게 강력히 권고하니 신명스러운 덕이 크게 번성하였고 이러길 수십년이 되니 천하가 다시 즐거움에 가득차 어련 때를 잊게 되었다.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말이 맞을 것이다.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嵒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嵒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자연의 이치로 다스리면 자연의 이치가 사람들의 풍속이 될건데 그 이치는 예로부터 있어왔는데 임금은 왜 몸을 낮춰 배우질 않는가] 하니,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드리나 받지않고 가버렸다. 이 이치가 바로 앞선 성인들의 비결이다.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무리는 현묘한 가르침이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의 가르침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사물과 사람을 교화해온 것이다. 사람이 받아들이면 부모에 효도함이요 남에 표현하면 임금에게 충성함으로 노나라 공자의 가르침의 요지이고, 무위의 이치로 말을 넘어선 가르침으로 보면 주나라때 노자의 근본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한 업을 짓지 말고 가능하면 선을 애써 행하는 면으로 보면 천축국 태자=석가의 교화이다]라 하였다.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殫記矣. 최고운은 문학의 정수를 알고 현명한 재주가 남들 보다 뛰어나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의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 흩어진 많은 서적 즉, 도가의 서적들《사문록(四聞錄)》과《삼한십유기(三韓拾遺記)》에 있는 것들은 이루다 적지 못하겠다. -여기서 저자=북애노인은 단군의 가르침=신시씨의 가르침을 정의하는 것으로 단군 8조를 언급한다. 그 가르침의 핵심중 핵심을 뽑으란다면 天人合一이란 단어로 말하면 좋을 것...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고 사람들을 대속하고 잊혀진 하나님과의 유대를 회복하는 임마누엘의 의미와도 통하는 것... 즉, 기독교식 표현으론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라는 가르침과도 맞닿고, 군사부 일체라는 유교의 가르침, 선업을 쌓아야한다는 불가의 주장 그 저변에 깔린 것은 바로 하늘과의 잇닿음..... 혹자는 이런 가르침이 기독교 유교 불교에 전해진 것이라는 맹랑한 소리 할테지만... 역으로 그 3교가 이런 현묘한 이치에 닿아있어 오늘날 큰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요 우리는 유교나 불교를 빌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알고 있는 가르침이라는 말... 제 손에 이미 쥐고 남의 떡 탐내는 꼴이라는 꾸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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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嘗歷觀載籍, 白頭山之異名, 頗多. 내가 일찍이 여러 서적들을 두루 살펴 보니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자못 많았다. 《山海經》曰: [大荒之中, 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 《산해경》에 이르기를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 무리가 있다] 하였으며, 《後漢書》曰: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太山之東, 東濱大海, 北與挹婁接.] 註云: [在平壤城西.] 此, 漢士眩學之妄語也. 《후한서》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태산(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동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북으로 읍루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자랑질 좋아하는 한나라 선비가 덧붙인망령된 말이다. 挹婁, 乃肅愼後身, 東沃沮, 又在今咸鏡之地, 則蓋馬之謂爲太白, 可知. 읍루는 곧 숙신의 후신이며 동옥저 또한 지금의 함경의 땅에 있었으니 '개마'가 '태백'이 됨을 알 수 있다. 且《麗史·列傳》曰: [女眞, 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 蓋馬之爲白頭, 明矣. 또한《고려사.열전》에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는데 개마산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라 하였으니, 당시의 여진이 분명히 백두산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개마'가 '백두'가 됨은 분명하다. 《魏書·勿吉傳》曰: [國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熊狼不害人, 人不得上山溲溺…]云云. 《위서.물길전》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 하였고, 《北史·勿吉傳》[曰亦](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북사.물길전》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태백'이라 하며, 풍속에 그것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고 하였다. 《唐書》曰: [粟末部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 《당서》에는 [속말부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백산과 맞닥뜨린 곳에서 고려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였다. 《括地志》曰: [靺鞨, 古肅愼也, 其南有白山, 鳥獸艸木皆白.] 《괄지지》에는 [말갈은 옛 숙신이다. 그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이며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라 하였고, 《金史·高麗傳》述高句麗以來靺鞨之事曰: [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금사.고려전》에는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기술하며 [흑수말갈이 옛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葉隆禮《遼志》曰: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 盖白衣觀音所居, 其山內禽獸皆白, 人不敢入, 恐穢其間…]云云, 又曰: [黑水發源于此.] 엽융례(葉隆禮)의《요지(遼志)》에는 [장백산은 냉산(冷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짐승은 모두 희다. 사람들은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고, 또 [흑수(黑水)가 그 곳에서 발원하였다]라고 하였다. 《明一統志》曰: [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 故會寧府南六十里, 橫 千里, 高二百里, 其 有潭, 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也苦河.]云.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의 1천여 리에 있으니 옛 회녕부(會寧府)의 남쪽 60리에 있다. 좌우로 1천리에 뻗어 있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그 곳의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는 80리이며 못은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하였다. 然則, 不咸 蓋馬 太白 徒太 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불함·개마·태백·도태·장백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산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방언의 차이점일 뿐이다. 又《高麗史》[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 또《고려사》에 [광종(光宗) 10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살게 하였다] 하였으니, 곧 '백두'의 이름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보인다. 而蓋字之音, 近[白於](於白)字之意; 東語, 馬 頭亦同訓, 蓋馬, 白頭之異字同意亦可明辨, 而白頭之名, 其來亦尙矣. '개(蓋)'의 음은 '백(白)' 자의 뜻과 가까우며, 동방의 말에 '말(馬)'과 '두(頭)'는 같은 새김이기에 글자의 뜻으로 새기면 '개마(蓋馬)'와 '백두(白頭)'가 글자는 다르지만 같은 뜻임이 분명한 것이 되므로 '백두'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오래된 것이라 할 것이다. -여기보면 저자는 백두와 개마고원의 개마가 같은 단어라는 주장을 위해 많은 자료를 끌어다 대는데... 강조해놓은 것 처럼 수많은 모순이 존재한다. 제일 오래된 책이라는 산해경엔 대황지중이란 말이 나오고 거기가 숙신씨의 땅이라했다. 도대체 여기서 대황은 어디를 말하는가? 냉산 동쪽 1000여리에 삼만위 동북쪽 1000여리는 어디???? 냉산을 검색하면 경북 구미가 나온다. 삼만위는 요동땅이고... 요지는 냉산을 중국땅에서 찾지 못하며 백두의 위치를 비정하는 건 어불성설이요삼만위가 요동이라면 현재 백두가 백두산이 맞게된다. 또 하나, 然則, 不咸 蓋馬 太白 徒太 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이 문장에서 보듯 수많은 방언이 존재했다는 말.... 한자는 그 음가들을 표현하는 도구 였다. 이두 향찰 구결등의 보충적 연구가 필요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태백이란 말이 도태산의 중원=위의 말이라 하니 위나라는 중원사람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즉, 저자의 주장은 고려사에서 여진의 위치등으로 묘향산이 아닌 현 백두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요 백두=개마라 한다. 그럼 의문은 왜 백두고원이라 안하고 개마고원이라 부르는가? 개인적으로 볼땐 백두산도 개마라는 이름도 그를 기리기 위해 떠온=빌어온 이름 아닐까? 백번 산해경을 신뢰하고 대황지중의 위치를 인정한다면 현 백두도 진짜 백두가 아니다. 아니면 대황이 전인미답의 황무지를 의미한다면 현 백두 일대는 소위 선진 문물의 신시씨나 환웅 무리의 터전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만다. 수많은 방언과 이름인 백두산 중 진짜는 어디란 말인가? 거기에서 소위 환국의 토대를 인정받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천지호수를 바이칼로 보고 논지를 풀어가는 흐름... 대황=몽고초원이라 보고 논지를 풀어가는 흐름... 근간에 아메리카 대륙에 백두산이 있다는 부류... 더 황당한 잡소리로 조선 문명이 최고 오래된 문명이요 모든 선진문화의 보고라는 주장들은 그 발원지 즉, 부모 얼굴도 모르는 호로잡소리에 불과해진다. 증거를 갖추기 전엔 설은 수많은 썰에 불과하다. 나 있는 이곳에도 유명한 한국 학자가 있다. 색동옷 입는 라후족이 고려 후손이라는 소설(=스스로 밝힌바) 썼던... 실지로 그 색동옷 입은 족속 본 적있다 까만 옷에 팔 부위에 색동으로 장식한... 백의민족이 까만 옷 입고 다닌다는 자체 모순은 어쩔 것인가? 반가움에 무작정 우리 공동 선조의 후손이요 동포란 어거지 부리면 안된다. |
東方諸山, 有馬耳 摩尼等山, 俗人幷以摩利呼之, 曾不相別.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찌기 별 구분없이 쓴다. 盖馬耳 摩尼, 幷出於頭字之意也. 대저 '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今廣州有修理山, 此必鷲山之意也; 積城有紺岳山, 則乃玄山之意也; 忠州有達川, 則是月川之意也; 而馬耳 摩利之爲頭嶽或頭山之訛, 尤可辨矣. 지금의 광주에 '修理山'이 있는데 이는 필시 '수리산(鷲山)'이라는 뜻이며, 적성에있는 '紺岳山'은 곧 '검은산(玄山)'이라는 뜻이며, 충주에 있는 '達川'은 바로 '달천(月川)'이라는 뜻이니, '마이'나 '마리'가 '頭嶽' 혹은 '頭山'이 잘못 전해져 그리되었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太白之一名曰白頭, 甲比古次之祭天處曰頭岳, 此非檀君祭天, 必隨頭名之山也, 乃檀君祭天處, 必成頭名之山也.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盖頭者, 最上或元首之稱也.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白頭爲東方諸山之宗, 而又是東人始降之地, 兼復, 元首檀君, 恒行祭天禮于其山, 當時之人, 名之曰頭山也, 必矣.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而甲比古次之頭嶽, 亦不出於此外也.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獨不知, 牛首河之名, 亦只出於沈牛首之俗耶? 此不可斷矣.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 지을 수 없다. 然則, 神市氏降, 旣在白頭於山, 乃漸徙西南, 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니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사방으로 옮겨갔다. (耳)[且]太白旣爲東方靈地, 祭天大儀必始於其山, 則自古, 東民之崇敬是山也, 不尋常. 또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且古者昔, 禽獸悉沾神化, 安捿於其山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溲溺而瀆神, 恒爲萬代敬護之表矣.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해치지 않았으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감히 하지 않았으니,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만대의 지표다. 夫我先民, 皆出於神市所率三千團部之裔.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後世,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檀祖同仁之神孫.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명의 후손의 범위 안에 있다. 因 雄 儉.三神之, 開創肇定之功德, 常傳誦而不忘, 則古民指其靈山曰三神山者, 亦必矣. 환인(桓因)·환웅(桓雄)·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니, 곧 옛 백성들이 그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마니산을 으뜸되는 산이라 증명하는데... 마니=머리요 단군이 제사한 산에만 붙는다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최초 도읍 평양이 세워진 우수하라는 단어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한다. 소머리강 소머리처럼 3각형의땅인지 뿔을 형상한 건지... 그러나 전장에서 두물이 합쳐지는 삼각형모양의 분지라 했다... 그러나 그런 두물머리가 한 두 군데겠는가? 여기서 또 규원사화식 해석법이랄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해석법은 언어 변천에 대한 이해 방언 연구등으로 보충되어야 할 문제...두악이란 단어도 그저 돌 봉우리인 산 어디나 붙는 이름이고...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강화 유역이 참성단도 있는 평양이라 고집하는 무리가 생긴다면 또 어쩔 것인가? 즉, 규원사화의 내용으로는 그 어디라도 평양이 될수 있다는 말이다. 민족사학자 계열들이 철석같이 믿고싶은 단군의 실체를 보증해 줄 유적이 없다는 말이다. 무작정 있다고만 외치는 건 불성실하고 게으른 태도일 뿐이다. 북애 노인의 기여는 신시씨의 가르침을 되새기려는 르네상스와 견줄 만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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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白頭山, 自古有白鹿.白雉或白鷹之屬;《括地志》所云: 「其南有白山, 鳥獸草木皆白」者, 是也; 方士之說, 亦頗有所據也.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사슴이나 흰꿩 혹은 흰매의 무리가 있으니, 이는《괄지지》에서 말한 바 대로 「그 남쪽에 '백산'이 있는데 날짐승과 들짐승 및 초목이 모두 희다」라고 한 바 있으니, 신선의 술법사 이야기도 또한 그 근거일 것이다. 又白頭山一帶, 時産山蔘, 世人擬之以不老草. 또한 백두산 일대에는 때때로 산삼이 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불로초로 생각하였다. 山氓欲採取, 則必沐浴致齋祭山以後, 敢發, 其還魂.不老之名, 想, 亦原於此也. 산에 사는 백성들이 이를 캐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산에 제사를 드린 후에야 감히 시작하는데, '환혼(還魂)'이나 '불사(不老)'라는 이름은, 생각건대 역시 산삼이야기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古, 烏斯帝北巡而得靈草, 則此尤驗矣. 옛날 오사제(烏斯帝)께서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하였으니, 곧 하나의 경험치로 증거가 된다. 且白頭山産紫檀樹, 從古所稱檀木者, 是也. 또한 백두산에는 자단수(紫檀樹)가 나는데 예로부터 단목(檀木)이라 일컫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而古記所傳, 九変震檀之說, 想, 必有因於此, 而「不老震檀…」云云者, 盖亦聽者之錯誤也. 옛 기록에 전하는 '구변진단(九変震檀)'이란 얘기는 필시 이것에 연유함이 있을 것이나 '불로진단(不老震檀)'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전해들은 사람의 착오일 것이다. 然則, 燕.齊方士, 扼腕而言「海中三山」者, 亦並遊於夢中, 欺其主而又自欺也. 그러한 즉, 연과 제나라의 방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 속의 삼신산'을 말하는 것 역시 단체로 착각속에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스스로 한탄하는 이상이 아니다. 今我國有 「願得三山不老草, 拜獻高堂白髮親」之句, 殆爲養老者, 春祝之定文, 究其原則, 亦可噴飯. 지금 우리나라에 「원하건대 삼신산의 불로초를 얻어, 윗채에 계신 백발의 어버이에게 바치고자 한다」는 글귀가 있으니, 자기 목숨을 바꿔 노인들을 봉양하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역시 웃다 밥알 뱉어낼 일이다. 何不, 卽往白頭山, 拜檀帝之靈, 而祈其萬壽耶. 어찌하여 백두산에 가서 단제(檀帝)의 영정에 절을 하고 만수를 기원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 문제는 중국학자들 눈속임에 의해 신비화된 단군의 가르침... 그 허울들을 벗겨내야한다는 꾸지람이다. |
漢.淮陽之地, 古陳國地, 本太昊之墟, 婦人崇好祭祀用史巫, 故其俗崇巫鬼. 한나라 회양(淮陽=지금의 濟南) 땅은 옛적 진(陳)나라의 땅으로 본디 태호씨(太昊氏)의 옛터인데, 그 땅의 부인들이 제사지내 받들기를 좋아하여 화려하게 꾸민 무당을 이용하였기에 그 곳의 풍속은 무당과 도깨비를 숭상하게 되었다. *陳國: 춘추전국 시대 진나라 《陳詩》曰: 「坎其擊鼓, 宛丘之下. 亡冬亡夏, 値其鷺羽.」 《시경》의 <진시(陳詩)>에서 이르기를, 북을 치며 완구(宛丘=河南省 淮陽縣) 아래에서 놀고 있네. 겨울인지 여름인지도 잊고 저 백로깃을 가지고 춤추네. 又曰: 「東門之枌, 宛丘之栩. 子仲之子, 婆娑其下.」 또 이르기를, 동문(東門) 흰느릅나무 완구땅의 상수리 나무 아래 자중(子仲)씨 딸이 어지러히 춤을 추네. 吳札, 聞其歌則曰: 「國亡主, 其能久乎.」云. 此 又伏犧所傳, 倚數觀變之餘弊也. 오찰(吳札)이 그 노래를 듣고는 말하기를 「무리의 주인을 잃었는데 그 신명이 오래 가겠는가.」 하였다. 이는 또한 복희씨가 전한 '의수관변(倚數觀變)'의 남겨진 폐단이다. * 倚數觀變: 주역을 말하는 듯... <孟子> 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尙書》曰: 「舜肆類于上帝, 禋于六宗, 望秩于山川, 徧于羣神.」 《맹자》에 이르기를 「순(舜)은 제풍(諸馮) 출신으로 동이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상서》에 이르기를 「순(舜)에 이르러 드디어 상제(上帝)에게 성대히 제를 올리고, 육종(六宗)에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며, 섶을 태워 산천에 제를 지내고, 여러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虞舜以前, 曾無是事, 此或原於上古東邦祭天報本之禮, 及山嶽.河川.洋海.沼澤, 皆有奉命主治之神者也. 우순(虞舜=순 임금) 이전에는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옛적에 동방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근본에 보답한다'는 예식과, '산악·하천·해양·소택에 있어서도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맡은 곳을 주관하여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생각에서 근원 하였을 것이다. 漢土, 自古, 以雍州積高爲神明之隩, 故立畤郊上帝, 諸神祠皆聚云, 則此又與檀祖祭太白, 同其類也. 한나라 땅에는 예로부터 옹주(雍州)의 높은 산을 신명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고 제사 터를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뭇 신들의 사당 또한 모두 그 곳에 모여 있다 하니, 이는 또한 단군이 태백에서 제사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齊俗有八神之祭, 八神者曰天主.地主.兵主.陰主.陽主.月主.日主及四時主也.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라는 것이 있는데, 여덟 신이라 함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 및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天好陰, 故祠之必於高山之下.小山之上, 此祭天太白之麓之類也. 地貴陽, 祭之必於澤中圜丘, 此祭天頭嶽之類也.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기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높은 산 아래의 작은 산 위에서 지냈으니 이는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며,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둥근 언덕에서 지냈으니 이는 두악(頭嶽=강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兵主, 祠蚩尤, 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代道術之宗. 군신인 치우씨는 만고 용맹함의 표본으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몰고다녔으니 만고 술법의 으뜸이다. 是以, 太初之世, 恒爲東方戎事之主, 海岱一帶, 曾爲其族虎據之地. 藍侯之民, 再進而建奄.徐諸國於淮岱之地, 則八神之說, 萌於是時也. 이런 까닭에 태초에는 항상 동방 병법의 으뜸으로 해대=산동 일대를 일찌기 호랑이같은 무리들의 땅으로 불렀고 남후=치우씨 무리라 했으며 다시 더욱 나아가서 엄국(奄國)과 서국(徐國) 등의 뭇 나라들을 회대(淮岱)의 땅에 세웠으니, '팔신(八神)' 등의 얘기는 이 때 싹튼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순 임금이 동이 출신으로 제천보본의 정신을 중국에 도입하였고 술법의 전설은 치우씨가 워낙 신출귀몰하였던 탓에 생긴 거라 고증한다. 이렇듯 사람이란 잘 모르는 일에는 이것저것 덧붙여 신비로 포장하기 즐기지만 엄밀히 본다면 그런 황당무계한 일들도 빌미가 있으니 술법은 치우씨의 재주를 그리고 산악 제사는 동이=현명한 이들의 풍습이 퍼져나간 것이라 설명한다. 또한 제나라 8신은 복희씨의 주역의 변형으로 본다는 말이다. 저자의 요지는 동이=현명한 지도자들이 남긴 풍습들이 그 기원은 잃고 마치 어느 나라의 풍속으로 변형 계승 됨을 꼬집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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盖, 燕.齊之士, 沈惑於神異之說, 亦尙矣.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숭상하였다. 自齊.威宣.燕.昭之時, 遣使求三神山.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삼신산에 사신을 보내더니 秦.漢之際, 宋無忌.正伯.僑克.尙羨.門子高之徒, 則皆燕人也; 文成.五利.公孫卿.申公之屬, 皆齊人也.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昔, 太公治齊, 修道術, 後世其地, 多好經術者.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공부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則此又太公爲之助俗也, 燕.齊之士, 安得以不好怪異之說哉!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은 글... 환웅 3씨를 너무 신성시하고 신비화 하지 말라는 경고... |
余幼而嫌梳頭, 老婢諭曰: 「不梳頭者, 蚤슬鑽穴, 將至耳腦相通, 寧不懼乎.」 余曰: 「寧有是事乎.」 曰: 「東部山邨之兒, 正如是矣.」 及後, 到山村, 無有是事. 내가 어렸을 때 머리에 빗질하기를 싫어하였더니 늙은 종이 빗대어 말하기를 "머리를 빗지 않으면 이가 구멍을 뚫어 장차 귀와 뇌가 서로 통하게 되기에 이르는데 어찌 두렵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더니, "동쪽 산골 마을의 아이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여, 나중에 산고을에 가 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 한다. 嘗與客坐談, 客曰: 「木之最大者, 有徑數間者.」 曰: 「寧有是事乎.」 曰: 「嶺東之地, 多斯木, 斫而橫之, 則行旅可連枕而宿其上, 一面至十數人.」 其後, 余隨舍叔父, 至嶺東, 曾無是木. 한번은 손님과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손님이 말하기를 "나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직경이 몇 칸이나 되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영동 땅에 그런 나무가 많습니다. 베어서 가로질러 놓으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위에서 배게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잘 수 있는데, 한 쪽 면에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작은 아버님을 따라 영동에 가 보았더니 일찌기 그러한 나무는 없었다. 及讀《莊子》曰: 「北溟有魚, 其名爲鯤, 化而爲鳥, 其名爲鵬,其長數千里, 其翼若垂天之雲.」 余問於師曰: 「可信有此事否.」 曰: 「窮髮之北, 安知, 其必無耶.」 雖然, 其後歷觀載籍, 且無是語. 《장자》를 읽으니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다. 변화하여 새가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그 길이는 수천리가 되며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라 하였다. 내가 스승에게 여쭙기를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입니까." 하니 "초목이 나지 않는 북극 지방인데 어찌 알겠냐 마는 그것이 반드시 없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그 후에 모든 서적들을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또한 그러한 말은 없었다. 今, 大荒數萬里, 未聞有數千里巨湖, 且寒威酷烈, 絶冠天下, 安容如許大物, 能逍遙於寒熱兩極之間耶. 其云「摶扶搖而上者有九萬里」者, 欲杜世人之辨也. 지금에 대황의 수만 리 넓은 땅에 수천 리에 걸친 큰 호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추위의 위세가 혹심하기로 으뜸인 하늘 아래 어찌 그와 같은 큰 사물을 받아들여서 능히 춥고 더운 양극 사이를 유유자적히 노닐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 바람을 북돋우며 9만리 상공으로 오른다」라고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분별을 가로막는 짓이다. 又看《神異經》曰: 「崑崙之西, 有大蛇繞山, 長三萬里…」云云. 長三萬里大蛇, 盤據於崑崙之西, 則西域諸國, 應遊牧於鱗角之下, 世間寧有是事耶.盖喜作迂怪之說者, 必藉於聽者之所不知. 또한《신이경(神異經)》을 보았더니 「곤륜산의 서쪽에 큰 뱀이 있어 산을 휘어 감고 있는데 그 길이가 3만리이다」 하였다. 길이가 3만리나 되는 큰 뱀이 곤륜의 서쪽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으면 서역의 뭇 나라들이 응당 그 비늘조각 아래에서 짐승을 길렀을 터인데,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이상한 말을 짓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모르는 것을 빌미로 허풍하기 마련이다. 此, 漢土迂怪之士, 只憑東方三神之說, 而囂囂然, 胥出浮言, 以惑其聽者也. 이처럼 한나라 땅의 기괴한 선비들도 단지 동방의 삼신 얘기를 빙자하여 공연히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트려 인심을선동하고 이로서 듣는 자들을 미혹케 한다. - 여기서 저자는 중국인들의 허풍과 현학적인 태도 때문에 황당한 얘기로 변한 환웅및 신시씨, 고시씨, 치우씨 이야기를 지적 한다. 무슨 술법은 한다는 둥 술법의 고수로 치우씨를 포장함은 한나라 사람들의 특성이라 짚어내며 그 허풍에 놀아나 우리 무리의 고유 정신을 폄하하는 중국=유교 논리에 따르지 말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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噫! 神市立極, 檀帝垂訓, 聖化神澤, 皇皇亮亮, 足爲萬代之天範. 아아! 신시씨 가르침이 잘 이뤄지고 단제가 교훈을 내리니, 성스러운 교화와 신인의 은택은 환히 빛나서 족히 만대에 걸쳐 하늘이 내린 모범이 되었다. 而後孫不肖, 乃致聖謨鴻猷, 潛消默失於冥冥之中, 使堂堂皇謨, 盡付於空山臥睡之人, 所傳者, 只遺怪亂之說, 不亦悲乎. 그러나 사람들이 불초하여 성스럽고도 원대한 대계(大計)는 암담하게 소리 없이 잃어버리고, 당당하던 임금의 천하 경영의 뜻은 빈 산에 누워 잠든 이들에게로 모두 미뤄 버리니, 전해지는 것이라곤 단지 괴상하고 어지러운 말 뿐이라, 이 역시 슬프지 않겠는가. 今, 崇三神帝釋之風頗盛, 每人家正寢壁上, 以檀木爲釘, 紙囊盛純白米而掛之, 名曰三神囊或帝釋囊. 이제 삼신제석(三神帝釋)을 숭배하는 풍조가 자못 성하여,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윗 벽에 박달나무 막대에, 종이 주머니에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아 걸어 두며 이름하여 '삼신낭(三神囊)' 혹은 '제석낭(帝釋囊)'이라 한다. 每十月, 新穀肇成, 則主婦必정手, 換新甑, 蒸爲餠, 以賽其神而祝景福. 매년 10월 새로운 곡식이 날 때면 주부는 반드시 손을 정결히 하고 새로 마련한 시루에 떡을 쪄서 그 신에게 정성을 올리며 큰 복을 바란다. 此, 旣出於檀朝之遺制, 而俗民競以巫覡相尙, 或至禍福壽夭, 專托巫祝而云爲之, 此乃古俗末流之弊也. 能向燕.齊之士, 而嗤其迂怪也哉! 悲夫! 이것은 단조(檀朝)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겨진 풍속인데, 속된 백성들은 다투어 무당과 박수를 받들면서 혹은 길흉화복과 장수하고 단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무당과 박수에게 의탁하며 말과 행동을 그것에 따르니, 이는 곧 옛 풍속의 막장으로 흐르는 폐단이다. 그러니 어찌 연나라와 제나라 선비를 향하여 그들이 괴상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불교에 습합된 신인들의 이야기 본디 정신을 잊고 습관적으로 따르는 풍습을 탄식하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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