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符都 誌

澄心錄追記-金時習

澄心錄追記-金時習

 

第一章

 

澄心錄者 雲窩朴公家世傳之書 其鼻祖觀雪堂堤上公之所述也 後代宗嗣諸人 復寫相傳千有餘年 其珍重如何哉

징심록자 운와박공가세전지서 기비조관걸당제상공지소술야 후대종사제인 복사상전천유여년 기진중여하재?

 

징심록은 운와 박공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온 책으로, 그 비조이신 관설당 박제상공이 지은 것이다. 후대를 이은 종사의 여러 인물들이 필사하여 서로 전해 내려온게 천년이 넘었으니, 그 귀하고 중함이 과연 얼마이겠는가?

 

噫 吾家先世卜好公 曾受大恩於公而千載之下 又作隣於公裔之家 來往如一家 接遇如同族. 余又受業于高門而當此世路之末由與公之裔更結歲寒之盟 浪跡於千里之外. 此天耶命耶 想緬古今 展懷惻惻 今讀此書 忽然在於千載之上如謁於公 而尤不勝感慕於吾家先世之羅代也.

의 오가선게복호공 증수대은어공이천재지하 우작인어공예자거 내왕여일가 접우여동족. 여우수업우고문이당차세로지말유여공지예경결세한지맹 낭적어천리지외. 차천야명야 상면고금 전회측측 염독자서 홀연재어천재지상여알어공 이우부승감모어오가선세지라대야.

 

! 우리 집안 선세 복호공께서 일찍이 제상공에게 큰 은혜를 입은 지 천년이 지난 후에, 또 공의 후예인 집안과 이웃으로 왕래하기를 한 집안처럼 하고 가족처럼 서로 만나 지내었다. 나는 훌륭한 스승에게 배웠지만 인생길 끄트머리에서 공의 후예와 다시금 세한지맹을 맺고 1000리 밖에서도 족적을 함께 남기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운명이라 할 것인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연을 깊이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자니 홀연히 1000 년 전으로 돌아가 공을 배알한 것과 같고, 또 선세 신라시대 우리 집안에 대한 연모의 감흥을 이길수 없다.

 

第二章

 

錄中記事 遠涉于太古 廣于於宇宙 其浩汗固不可言. 而我東方創都之史 夏土變異之記 誠使人肅然也. 通篇奧義 似仙道佛法而非.

록중기사 원섭우태고 광우어우주 기혹한고불가언. 이아동방창도지사 하토변이지기 성사인숙연야. 통편오의 사선도불법이비.

 

징심록 안의 기록들은 멀리는 태고적 일들을 섭렵하고 넓게는 우주의 일에 통하고 있어, 그 넓고 깊음은 진실로 말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우리 동방에서 도읍을 세운 역사와 하나라 땅에서 일어난 변고(-53)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로 숙연하게 한다. 전체를 통하는 그 오묘한 뜻은 선도나 불법과도 유사하지만 다르다.

 

當時新羅 姑()無仙儒佛之浸來則 此根據於古史者明也. 其神市來往之說 有戶氏傳敎之事 眞則古今天下之諸法 皆出於斯 而轉訛變異者矣. 然則是書之不同 不能容於儒佛之世 又受斥於帝王之境者 固當然也.

당시신라 고무선유불지침래즉 차근거어고사자명야. 기신시래왕지설 유호씨전교지사 진즉소금천하지제법 개출어사 이전와변이자의. 연즉시서지부동 불능용어유불지세 우수척어제왕지경자 고당연야.

 

당시 신라에 선유불의 사상이 전해지지 않았음이 확실한 것이니, 이는 옛 역사가 사실임이 명확하다. 저 신시(부도)와 왕래한 이야기와 유호씨가 가르침을 펴신 일들이 진실이라 하면, 곧 고금과 천하의 모든 이법들이 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다시금 바뀌고 와전되어 달라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같지 않다는 점, 곧 유불 세상과 다르다는 점은 제왕론을 펴는 세상에서 배척받는 것은 당연하다.

 

錄中有曰 此書自有廣明之時.”云 其時何時耶?

록중유왈 차서자유광명지시.”운 기시하시야?

 

징심록에서 말하기를, 이 책은 광명의 시대 때부터 있어 왔다 하였으니, 그 시대는 과연 어떤 시절이란 말인가.

 

第三章

 

謹案諸史 會通詳考則當時之堤上公 世稱之爲硏理之家 其於申自天公之言尤明也. 赫居世王曾孫 始有兄弟 時人曰 第一不及於第二之神聖.”云 則其第二者卽婆娑王而公之五代祖也.

근안제사 회통상고즉당시지제상공 세칭지위연리지가 기어신자천송지언우명야. 혁거세왕증손 시유형제 시인왈 제일불급어제지지신성.”운 즉기제이자즉파사왕이공지오대조야.

 

삼가 여러 역사를 자세히 살피고 이리저리 상고한 즉, 당시 제상공은 세칭 연구하는 가문으로 이는 신자천공의 말에 따르더라도 명확한 사실이다. 혁거세왕의 증손에는 형제가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첫째는 둘째의 신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둘째가 파사왕인데, 공의 5대조이다.

 

其所謂神聖者 非但氣品之謂而亦指其理道之如何矣. 公之祖阿道公 享年百二十四歲 考勿品公 享年百十七歲 後代亦多百歲之人 則公家傳統. 必若有特理 此或非昔世天雄道之傳守者也.

기소위신성자 비단기품지위이역지기리도지여하의. 공지조아도공 향년백이십사세 고물품공 향백십칠세 후대역다백세지인 즉공가전통. 필약유특리. 차혹비석세천웅도지전수자야.

 

여기서 소위 신성하다고 한 것은 단지 그 기품을 일컬은 것만은 아니고, 또한 그 천리와 법도가 어떠한가에 따른 것이다. 공의 할아버지인 아도공은 124세를 누리셨고, 아버지인 물품공은 117세를 사셨다. 후대에도 역시 100세를 넘기신 분이 많으니, 이것은 공의 집안 전통이 되었다. 여기에는 필시 특별한 이치가 있음이 틀림없으니, 혹 그 옛날 천웅도의 전수자인 까닭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公之澄心軒詩曰 煙景超超望欲流 客心搖落却如秋 世間堅白悠悠事 坐對澄江莫說愁.” . 於斯 確然知公之抱道之一端也.

공지징심헌시왈 연경초초망욕류 객심요낙각여추 세간견백유유사 좌대징강막설수.” 운 어사확연지공지포도지일단야.

 

공이 지은 징심헌시에 이르기를 봄기운은 모여 흐름을 이루길 바라나 객의 흔들리는 마음을 떨어져 없어지니 아지랑이 초초하게 흘러감을 바라보자니, 나그네의 마음 또한 가을처럼 가라앉는 구나, 세간에서 말하는 堅白同異의 말싸움은 오래고 오랜 일이다 징강을 보고 앉아 근심을 말로 뱉을 일 아니다.” 하였으니 이를 봐도 공이 품은 깊은 도의 한 자락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第四章

 

窃念煙景者 塵世之風景 客心者 自我之雜念. 煙塵雜念 彼此流落 無一點殘滓則唯存者 淸秋澄江之本原而已. 然後 堅白石之古今證理 難通者 坐對澄江而莫說憂愁. 其所謂坐對澄江者 徹底通觀之意也 又所謂莫說憂愁者 古今世人 執着於當面之局限 未得於全體之通察 自紊致亂之意憂愁. 而愁之而深故 莫說也.

절념연경자 진세지풍경 객심자 자아지잡념. 연진잡념 피차유락 무일점잔제즉유존자 청후징강지본원이이. 연후 견백석지고금증리 난통자 죄대징강이막설우수. 기소위좌대징강자 철저통관지의야. 우소위막설우수자 고금세인 집착어당면지국한 미득어전체지통찰 자색치난지의우수. 이수지이심고 막설야.

 

잠간 연경(아지랑이)을 생각해보면 속세의 풍경이요, 객심(나그네의 마음)이란 자아의 잡념이다. 연진과 잡념이 떨어져 나가고 한 점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면, 오직 남게 되는 것은 맑은 가을 징강의 본원일 뿐이다. 그런 뒤, 고금의 이치를 증명하려는 견백동이의 일은 원래 모순된 문제인데, 징강을 대하고 앉아 우수를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 여기서 징강을 대하고 앉았다고 하는 것은 문재의 핵심을 꿰뚫어 본다는 말이다. 또 소위 우수를 말하지 않는다 함이란,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당장의 문제에 국한해서 집착하고 전체적인 통찰을 얻지 못하여 스스로 어지러워지고 혼란에 이른다는 뜻의 근심과 시름이다. , 이러한 근심이 오히려 깊은 까닭에 다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短見에 혹하는 것도 미혹

 

此一首詩 可以見公立於證覺之境地 憂愁人世之深切者也. 此事又見於公之稱號三變之間 初曰桃源者 必始祖王誕生處仙桃山之意也. 次曰石堂者 卽此黙識而通觀堅白之意也. 三曰觀雪堂者 卽消融無餘證覺之盡處也. 況其滅生立節 炎死化雪之奇遇躬行者乎.

차일수시 가이견공립어증각지경지 우수인세지심절자야 차사우견어공지칭호삼변지간 초왈도원자 필시조왕탄생처선도산지의야. 차왈석당자 즉차묵식이통관견백지의야. 삼왈관설당자 즉소격무여증각지진처야. 황기멸생입절 염사화설지기우궁행자호?

 

이 한 수의 시를 보아도, 가히 공께서 이룬 깨달음과 깨우침의 경지 및 근심과 시름이 깊은 인간 세상과의 단절과 그 초연함을 알 수가 있다. 이 같은 일은 공의 칭호가 세 번 변한 것에서도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 호를 도원이라 한 것은 시조왕 탄생처인 선도산의 뜻이요, 다음에 석당이라 함은 곧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견백동이의 모순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뜻이다. 세 번 째로 관설당이라 한 것은, 즉 모순이 남김없이 녹아 사라지고 그 깨달음 곧 증각의 극진함을 이룬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물며 그 생명을 바쳐 절개를 세우고, 불꽃이 죽어이 눈[]으로 변하는 기이함을 몸소 실천하신 분 아닌가?

 

然則澄心錄記述之本 根於古史 出於證覺者明也 其古史者 非但家傳而公在寶文殿伊湌十年之間 必得其詳矣.

연즉징심록기술지본 근어고사 출어증각자명야 기고사자 비단다전이동재보문전이찬십년지간 필득기상의.

 

그런즉 징심록을 기술한 근본이 비록 고사에 근거하고 있으나, 이는 깨달은 자의 밝은 지혜 에서 연유한 바라 아니할 수 없다. 또 그 고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만이 아니라, 공이 보문전(귀한 책을 보관하는 書庫)에서 이찬으로 재직하던 10년 사이에 그 상세한 사실을 얻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第五章

 

大抵世人 但知日之從東而向西 不知日之從西而向東 此澄心錄所謂眼明故也. 故 天乃廢光設夜 使人眼暗而證其日從西之理也.

대저세인단지일지종동이서향 부지일지종서이향동 처징심록소위안명고야. 고 천내폐광설야 사인안암이증 기일종서지리야.

 

대개 세상 사람들이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을 향하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서쪽을 따라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징심록>에서 말하는 바, 소위 눈만 너무 밝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곧 빛을 감추고 밤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어둡게 하여, 저 해가 서쪽을 따르는 이치를 증명한 것이다.

 

今有一人 在於夜半 廢目而循日之踵則 必見此日從西而向東. 於是 乃廢偏見 又見大地山川 浮在於斡旋之中而同軌 然則東卽是西 西則是東 終無東西之別 此時 乃得圓覺也?

금유일인 재어야반 폐목이순일지종즉 필견차일종서이향동. 어시내폐편견 우견대지산천 부재어알선지중이동궤 연즉동즉시서 서즉시동 종무동서지별. 차시 내득원각야?

 

지금 한 사람이 있어, 그로 하여금 야반에 눈을 가리고 해가 가는 종적을 따르게 한다면, 그는 반드시 해가 서쪽을 따라 동쪽을 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에 곧 편견을 버리고 대지와 산천을 본다면, 이들이 공중에 떠서 같은 궤도로 함께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즉 동쪽이 곧 서쪽이요·서쪽이 곧 동쪽이 될 것이니, 마침내 동서의 구별마저 없어질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가히 원만한 깨달음을 얻지 않겠는가?

 

故廢見而撫石則 但知其堅 廢撫而見石則但知其白. 此重於表感而不知表裏雙感之交推故也. 故見撫具感然後 乃得其全. 雖表感知其交推之理則亦得其全. 然則堅則是白 白則是堅 終無堅白之差 是謂之通觀也.

고폐견이무석즉 단지기견 폐뮤이견석즉단지기백. 차중어표감이부지표리쌍감지교추고야. 고견무구감연루 내득기전. 수쵸감지기교추지리즉역득기전. 연즉 견즉시백 백즉시견 종무견백지차 시위지통관야.

 

그러므로 눈을 감고 돌을 만지면 다만 그 딱딱함만을 알 것이요, 만지지 않고 돌을 보기만 한다면 다만 그것이 희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이것은 다만 표면적인 감각만을 중시한 것이요, 안과 밖의 두 감각이 서로 상호작용으로 추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 만지는 감각을 두루 갖춘 뒤에라야 비로소 그 전체를 얻을 것이다. 또 비록 표면적인 감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종합적으로 추리되는 이치를 안다면 역시 그 전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단단한 것이 곧 흰 것이요, 흰 것이 곧 단단한 것이 되어 마침내 단단한 것과 흰 것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말하기를, 통관이라 한다.

 

-通觀: 通察

 

第六章

 

凡事物 皆有表裏. 裏密則充實 而疏則空通. 表密則色聚 而疏則衰虛. 此虛實空色之交推也. 且實密則堅固 而疏則氣冲. 色密則質造 而疏則還白 此氣質堅白之交推也. 故色質堅實者 有相而足徵 虛白氣空者 無名而可朕. 情生於有相 金石水土飛潛動植之形 徵焉.

범사물 개유표리 이밀즉충실 이소즉공통 표밀즉색취 이소즉쇠허. 차허실공색지교추야. 차실밀즉견고 이소즉기충. 색밀즉질조 이소즉환백. 차기질견백지교추야. 고색질견실자 유상이족징 허백기공자 무명이가짐. 정생어유상 금석수토비잠동식지형 징언.

 

무릇 사물에는 모두 표리가 있다. 그 안이 조밀하면 충실하고, 성기면 비고 소통된다. 표면이 조밀하면 색이 모이고, 성기면 시들고 사라진다. 이는 허실과 공색이 상호작용 한다는 것이요. 또 조밀하면 견고해지고, 성기면 기가 충만하게 된다. 색이 조밀하면 그 (굳은)성질을 만들어내고, 성기면 흰색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기질인 견백이 서로 상호보완함이다. 그러므로 색과 질이 견실한 것은 그 형상이 있어서 경험하기에 족하고, 허하고 희며 기운이 뭉치지 않은 것은 이름마저 없으나 그 잠재력()이 있다. 정이란 보이는 형상이 있음에서 생기니 만물(금석수토와 비잠동식, 즉 날고 헤엄치며 움직이고 심어 자라는 동식물)의 형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道生於無名 隱現生滅消長盛衰之勢朕焉 宇宙萬象乃成也. 道者 一軌大同 形者 千態相殊. 於是 聖人作調通空之管音 察其大同之情 準虛實之尺度 審其相殊之勢. 此誠證理省事之眞法 而新羅之用金尺玉笛 其緖 由於上古之世者 明也.

도생어무명 은현생멸소장성쇠지세짐언. 우주만상내성야. 도자 일궤대동 형자 천태상수. 어시 성인작조통공지관음 찰기대동지정 준허실지척도 심기상수지세. 차성증리성사지진법 이신라지용금척옥관 기서 유어상고지세자 명야.

 

이치는 무명에서 살며, 숨고 드러나며 생하고 멸함과 줄어들고 늘어나고 번성하고 쇠퇴하는 잠재력이 되니, 우주만상이 이 잠재력에서 생겨난다. 도란 같은 궤도를 달린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지만, 드러나는 형태는 천태만상으로 서로 다르다. 성인할 일은 에 통하는 조화(管音)을 조율하고 그 공통점을 살펴 차고 기우는 기준을 세워 서로의 특수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정성으로 이치를 증명하고 일을 살피는 참 도리로 신라시대에 사용한했다는 금척옥적이 바로 그 단서이니, 이는 상고시대로 부터 유래하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大抵疏密一體也 氣質一體也 空色一體也. 堅白一體 而各有兩般者 將欲交推相資 而成物成事故也. 故 天下之物 必成各於虛竅而位堅. 天下之事 必示相於實叉而痕白 此太古不易之眞詮也.

대저소밀일체야 기질일체야 공색일체야. 견백일체 이각유양반자 장욕교추상자 이성물성사고야. 고천하지물 필성각어어규이위견. 천하지사 필시상어실차이흔백 차태고불역지진전야.

 

대저 꽉차고 성김도 실체요, 기질 역시 실체며, 공과색 또한 실체이다. 견백도 (모순이 아닌)실체로 그저 성질일 뿐으로 그 성질의 상호작용으로 만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고로 천하의 모든 사물들은 가가자의 허점들을 채워 단단해지는 것이요. 모든 일은 그 비인 곳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고부터 바뀌지 않는 참된 법칙이다.

 

故 古今論及於虛實堅白者 皆源於上世而未得其正 此堤上公之所以愁嘆之深切者也.

고 고금논급어허실견백자 개원어상게이미득기정 차제상공지소이 수탄지심절자야.

 

그러므로 허실, 견백이란 논의도 상고시대에도 정의되니 못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상공이 말한 바, 깊고 통절하게 근심과 한탄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第七章

 

第一節

 

澄心錄添綴之別冊金尺誌 亦堤上公之所述歟 或後人之記錄歟? 文義則相連於澄心錄而別冊添綴者何耶? 若非堤上公之所述 必是百結先生之追補者矣. 公家傳說多有關於金尺 而余夙聞五臺之老釋者 與史乘野傳 大同小異. 故 今記其槪要於下.

징심록첨철지별책금척지 역제상공지소술여 혹후인지지록여 문의즉상연어징심록이별책첨철자하야. 약비제상공지소술 필시백결선생지추보자의. 공가전설다유관어금척. 이여숙문오대지노석자 여사승야전 대동소이. 고 금기기개요어하.

 

징심록에 첨철한 별책 금척지 역시 제상공이 기술한 것인가, 아니면 후인의 기록인가? 글의 뜻은 징심록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별책으로 따로 철해 놓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것이 제상공이 지은 것이 아니라면, 이는 필시 백결선생이 추보한 것 일게다. 공의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의 대다수가 금척과 관계가 있는데 내가 일찍이 오대산에서 도사들과 스님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밖에서 전해져 내려온 역사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이제 아래에 그 개요를 적는다.

 

第二節

 

新羅奈勿王時朴堤上公 以祗摩王之高孫 經寶文殿大夫 爲鄕里歃良州(梁山). 築澄心軒 辨證細理 述始原傳來之史曰澄心錄.

신라내물왕시박제상 이지마왕이고손 경보문전대부 위향리삽량주간 축징심헌 변증세리 술시원전애지사왈징심록.

 

신라 내물왕 때의 박제상공은 지마왕의 고손으로, 보문전 대부를 지내고 고향인 삽량주의 수장이 되었다. 징심헌을 짓고 자세한 이치를 변증하여 애초부터 전해져 온(始原傳來) 역사를 기술하니, 이를 징심록이라 하였다.

 

時 奈勿王薨 三王子年少. 次家弟實聖王 脅威自立. 奈勿王長子訥祗 豫察來變 佯爲訥言作痴 放浪市肆. 實聖王 置之度外 其二弟卜好 質放高句麗 末()斯欣 質於倭國而除之以杜後慮.

시 내물왕훙 삼왕자연소. 차가제실성왕 협위자립. 내물왕장자눌지 예찰내변 양위눌언작치 방랑시진 실성왕 치지도외 기이제복호 질방고구려 미사흔 질어왜국이제지이두후려.

 

때에 내물왕이 죽으니, 세 왕자는 나이가 어렸다. 이에 작은 집의 동생 실성왕이, 이들을 협박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내물왕의 장자 눌지는 장래에 변란이 올 것을 미리 살피고, 거짓으로 말을 더듬으며 미친 체하고 저자 거리를 방랑하였다. 이에 실성왕이 눌지는 도외로 치고, 그 둘째 동생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추방하며, 말사흔(미사흔)은 왜국에 인질로 보내, 이들을 제거하여 뒷날의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至是 堤上公以先世傳統 乃立言而擧實聖之不當 於是 世論潝然 申自天裵仲良等六臣辭去. 實聖王 遂讓位於訥祗王. 此前後十餘年之策謀而乃順成反正.

지시제상공이선세전통 내입언이거실성지부당 어시 세론흡연 신자천배중량등육신사거. 실성왕 수양위어눌지왕. 차전후십여년지축모이내순성반정.

 

이에 이르러 제상공이 선세의 전통으로 입언하여 실성왕의 부당함을 거론하니, 이에 세론이 들끓고 신자천, 배중량 등 여섯 신하가 사퇴하면서 항의하였다. 마침내 실성왕이 눌지왕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후 10여 년간의 책모의 결과였으며, 순조롭게 반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申自天公曰 堤上勇而精略 能辯細理云者 亦由於斯矣.

신자천공왈 제상용이정략 능변세리운자 역유어사의.

 

이에 신자천공이 말하기를, 제상은 요점이 간략히 말하는 용기도 있고 세세한 이치를 능히 변별한다 하였으니, 이는 역시 이러한 자질에서 연유한 것이다.

 

第三節

 

訥祗王 登位 常以二弟之事傷心不能勵政.

눌지왕 등위 상이이제지사상심불능여정.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항상 두 동생의 일로 상심하여 정사에 힘쓰기가 어려웠다.

 

於是 堤上公慨然請行 出於高句麗 言王以符都之事曰 一根之裔 何有是事?” 一言而還卜好及歸. 不入其門而直出於倭國 夫人金氏聞而追至 公 已乘船搖手作別 夫人亦勵之.

어시제상공개연청행 출어고구려 언왕이부도지사왈 일근지예 하유시사 일언이환복호급귀 불입기문이직출어왜국 부인김씨문이추지 이승선요수작별 부인역려지.

 

이에 제상공이 비분강개하여 길을 청하고 고구려에 출행하여 부도의 일을 들어, 왕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이르기를, “한 뿌리의 후예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이 한 마디 말로 복호공이 환국하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자신의 집 문 안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왜국으로 향하였다. 부인 김씨가 이를 듣고 쫓아갔으나, 공은 이미 배 위에 올라 손을 들어 작별을 고하니, 이에 부인 역시 다만 공의 앞 일을 격려할 뿐이었다.

 

公 已入倭國 知其言之不容 假稱反者歸化. 留連歲餘好行船遊. 一日 囑末斯欣潛歸. 斯欣言與公同歸 公曰 公子歸則事成 何期雙全而危其成事乎?” 遂泣別 優遊船中 使倭人勿疑 俟斯欣遠去 乃獨歸舘舍.

공이입왜국 지기언지불용 가칭반자귀화. 유연세여호행선유. 일일 촉말사흔잠귀. 사흔언여공동귀 공왈 공자귀즉사성 하기쌍전이위기성사호?” 수읍별 우유선중 사왜인물의 사사흔원거 내독귀관사.

 

공이 왜국에 들어간 후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임금을 배반하고 귀화한다하였다. 그리고는 해를 이어 2년 남짓 머무르면서 뱃놀이로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말사흔을 만나 몰래 귀국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흔이 공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귀국하게 되면 일은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찌 두 사람이 다 온전하기를 바라다가 일을 위태롭게 만들겠습니까?”하였다. 마침내 울면서 작별하고, 뱃놀이를 계속하면서 왜인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못하게 하며, 사흔이 멀리 나아가는 것을 기다려 홀로 관사로 돌아갔다.

 

倭主始知見欺而怒. 公 乃言符都之事 勸修舊誼 倭主頑强 自言東海之主 迫公稱臣. 公 笑曰 吾非歸化者 卽鷄林之臣.” 倭主尤怒 乃設淫刑而脅迫. 公 終不屈 言必曰 鷄林之臣.” 倭主遂燒殺於木島.

왜주시지견기이노 공 내언부도지사 권수구의 왜주완강 자언동해지주 박공칭신 공 소왈 오비귀화자 즉계림지신.” 왜주우노 내설음형이협박 공 종불굴 언필왈 계림지신왜주수소살어목도.

 

왜주가 이에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대노하였다. 마침내 공이 부도의 일을 말하고 옛 정과 그 의리를 회복할 것을 권하였으나, 왜주는 완강히 거부하면서 도리어 스스로를 동해의 주인이라 칭하고 오히려 공을 압박하여 신하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면서, “나는 귀화자가 아니요, 오직 계림의 신하일 뿐이다라고 하니, 왜주가 더욱 노하여 부당한 형벌(淫刑)으로 더욱 협박하였다. 공이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계림의 신하라고 답하니, 드디어 왜주가 공을 나무더미(木島)에서 태워 죽였다.

 

公 視死如融雪 灰身化正氣 立節義於千秋.

공 시사여융설 회신화정기 입절의어천추.

 

공께서는 죽음을 보기를 마치 눈이 녹는 것과 같이 하였으며, 마침내 재가 되어버린 육신이 오히려 정기가 되어, 천추에 그 절의를 세운 것이다.

 

第四節

 

訥祗王兄弟 聞公之死 悲痛至極 封公寧海君. 公之夫人金氏聞公死 率三娘 登鵄述嶺. 自製鵄述歌 望哭東海自盡而死. 長女阿奇三女阿慶 亦殉父母而死 母女之身化爲三體神母石像. 次女阿榮 爲家事强生 養育五歲男弟 是爲百結先生文良公也.

눌지왕형제 문공지사 비통지극 봉공영해군. 공지부인김씨문공사 솔삼랑 등치술령 자제치술가 망곡동해자진이사 장년아기삼녀아경 역순부보이사 모냐지신롸위삼체신모석상 차녀아영 위가사강생 양육오세남제 시위백결선생문랑공야.

 

눌지왕의 형제가 공의 죽음을 전해 듣고, 지극히 비통해 하면서 공을 영해군에 봉하였다. 공의 부인 김씨는 공의 죽음을 전해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랐다. 스스로 치술가를 짓고 동해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그 진기가 다하여 죽고 말았다.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 역시 부모를 따라 죽으니, 모녀의 몸이 화하여 삼체신모(三體身母)석상이 되었다. 차녀 아영은 집 안 일을 위하여 굳세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양육하였으니, 이가 바로 백결선생 문량공이시다.

 

訥祗王聞而甚悲 使末斯欣 娶阿榮而慰之. 百結先生 長而大成 暫立於慈悲王朝 仍卽辭歸. 不事世業 彈琴修證 自行先世之道 遂晦跡不現云.

눌지왕문이심비 사말가흔 귀아영이위지. 백결선생 장이대성 서립어자비왕조 잉즉사귀. 불사세업 탄금수증 자행선세지도 수회적불현운.

 

눌지왕이 이를 전해 듣고 심히 비통해 하고, 말사흔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며, 위로하였다. 후에 백결선생이 장성하여, 잠시 자비왕조에서 벼슬하다가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선생은 이후 세상의 일을 버리고, 거문고를 타면서 수증(修證: 수련과 공부)하며, 스스로 선세의 도를 실천하다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第五節

 

堤上公幼時 一道人見公曰 此人牽牛星之化身 必有濟渡之功.” 因名之曰堤上. 及長 道人又告曰 東村金公家 有十七娘 卽織女星之化身 與公好綠().” 因之以成婚已矣. 道人嘆曰 此兩人星精之天緣故 光不滅於久遠 雖隔江相望何恨之有.”云 此眞奇異之事也.

제상공유시 일도인견공왈 차인견우성지화신 필유제도지공.” 인명지왈제상. 급장 도인우고왈 동천김공가 유십칠랑 즉직녀성지화신 여공호연.” 인지이성혼이의. 도인탄왈 차양인성정지천연고 광불멸어구원 수격강상망하근지유.”운 차진기이지사야.

 

제상공이 어렸을 때 한 도인이 공을 보고, “이 사람은 견우성의 화신이니 반드시 세상을 제도하는 공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로부터 그 이름을 제상이라 하였다. 공이 장성하자 도인이 또 고하기를, “동촌 김공의 집에 십칠 세 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의 화신이라, 공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하니, 이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별의 정기에 따라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진실로 그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만 있으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第六節

 

百結先生 曾爲慈悲王 陳息災, 治源, 與人, 知人, 養人說等苦(). 平生所懷 必宣於琴而嗚()之於太虛. 世人莫知其意 其中樂天樂 碓樂傳於世而已. 家貧衣弊 補綴無數. 世人 通稱曰 百結先生. 故 先生因之而自號曰百潔又改名曰婁琅. 先生已退去鄕里 累徵不就 王除一切法禁於其鄕 卽忠孝谷而世稱勿禁里也.

백결선생 증위자비왕 진식재치원여인지인양인설등약간. 평생소회 필선어금이명지어태허. 세인막지기의 기중악천악 대악전어세이이. 가빈의폐 보철무수. 세인 통칭왈 백결선생. 고 선생인지이자호왈백결우개명왈누랑. 선생이퇴거향리 누징불취 왕제일체법금어기행 즉충효곡이세칭물금리야.

 

백결선생이 일찍이 자비왕을 위하여, ‘재앙을 멈추는 법’, ‘근원을 다스림’, ‘사람과 더불어 살고, 알며, 기르는 법등의 제설을 진상하였다. 이와 더불어 평생의 소회를 반드시 거문고에 실어 태허에 울리고자 한다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낙천악과 대악이 세상에 전하여졌다고 한다. 또한 집이 가난하여 의복이 헤어지니 무수히 고치고 꿰매 입게 되었다. 이에 세인들이 통칭하여 백결선생이라 한 것이다. 선생 역시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백결(百潔)이라 하고, 또 개명하여 누랑(婁琅)이라 하였다. 선생이 이미 향리에 물러 앉아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왕이 그 향리에는 일체의 법금(法禁)을 없애주었다. , 충효곡이요, 세상에서 말하는 물금리가 그 곳이다.

 

麗末文貞公申雲月齋先生 文憲公崔冲先生等 收其稿而顯揚於世曰 大哉 百結先生之道 當爲人君萬世之師法 其出處 正明無碍 可謂至人.”.

여말문정공신운월제선생 문헌공최충선생등 수기고이현창어세 왈 대재 백결선생지도 당위인군만세지사법 기출처 정명무애 가위지인.”,

 

여말의 문정공 신운 월재선생과 문헌공 최충선생 등이 그 원고를 수집하여 세상에 드러내면서 말하기를, “크도다! 백결선생의 도는 마땅히 백성과 임금이 행해야 할 만세의 사법(師法)이다. 그 출처가 바르고 명확하며, 또한 거리낄 것이 없으니 가히 지인(至人)이시다라고 하였다.

 

 

第七節

 

新羅武烈王微時 與金庾信等 就業於仙桃山下 百結先生之曾孫麻靈干先生 先生常以百結先生之道 授之 恒說符都統一之論 極斥外來之法 後 武烈王 登位 與庾信及先生之子龍文等 謀而成三國統一之業云. 後世崔致遠郭輿諸賢出於是家云.

신라오아무열왕미시 여김유신등 취업어선도산하 백결선생지증손마령간선생 선생상이백결선생지도 수지 환설부도통일지론 극척외래지법 후 무열왕 등위 여유신급선생지자용문등 모이성삼국통일지업운. 후세최치춴곽여제현출어시가운,

 

신라 무열왕이 아직 어렸을 때, 김유신 등과 더불어 선도산 아래 백결선생의 증손이신 마령간 선생에게 배웠다(就業). 선생이 항상 백결선생의 이치로 그들을 가르치고, 또 항상 부도 통일의 이론을 설하시며, 외래의 법을 극력 내치셨다. 후에 무열왕이 왕위에 오른 뒤, 김유신과 선생의 6세손인 용문 등이 더불어 도모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한다. 후세의 최치원과 곽여 등 여러 현인들이 또한 이 가문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第八節

 

新羅末傾 國事多難 堤上公家宗嗣文鉉先生 繼承先生立言之傳統 累徵不就. 在野剛直 痛論時事 國人畏之. 時有孝恭王繼位之爭. 先生以百歲高齡 發言於國中 喚起.

신라말경 국사다난 제상송가종사문현선생 계승선생입언지전통 누징불취. 재야강직 통론시사국인외지. 시유효공왕계위지쟁. 선생이백세고령 발언어국중 환기.

 

신라 말 나라안이 복잡다난하였다. 제상공 가문의 종사인 문현선생이 부도시대를 말하는 선생의 말버릇을 이어받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강직하게 야인으로 살면서 시사문제에 쓴 말을 하니 모두들 두려워하였다. 그 때에 효공왕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었다. 선생이 백세의 고령 임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에 발언하여 세론을 환기시켰다.

 

世論曰 新羅立國之本 在於符都之復建 故 爲上者必勵於斯 不敢私謀榮華 此 立國當時之約而雖隔千年 如在昨日. 何忍忘其本義乎?

세론왈 신라입국지본 재어부도지복건 고 위상자필여어사 불감사모영화 차 입국당시지약이수격천년 여재작일. 하인망기본의호?

 

말하기를, “신라가 나라를 세운 근본은 오직 부도의 재건에 있을 뿐이다. 웃 사람은 반드시 이에 힘쓸 따름이요, 감히 사사로운 영화를 도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나라를 세울 당시의 맹약이니, 비록 천 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이다. 어찌 홀연히 그 본의와 참 뜻을 잊어버린다 말인가?

 

昔世朝鮮卽四海之公都 非一域之封國 檀氏之遺裔卽諸族之公僕 非一君之私民.

석세조선즉사해지공도 비일역지봉국 단씨지유예즉제족지공복 비일군지사민.

 

옛 조선은 곧 사해의 공도(公都), 단지 한 지역의 봉함 받은 나라가 아니며, 단씨의 후손들은 모든 족속의 공복이요, 단지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不幸避居東海 設防稱國者 出於不得已 決非本意. 故 國本與他國 懸殊 吾等 當覺醒於斯 一切紛爭 付於火消 回心反省可也.

불행피거동해 설방칭국자 출어부득이 결비본의. 고 국본여타국 현수 오등 당각성어사 일체분쟁 부어화소 외심반성가야.

 

불행히 동해로 피난와서 방책을 짓고 나라를 칭하게 된 것은 부득이한 까닭이 있어서요 결코 본디 의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이 다른 나라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니 우리는 이에 마땅히 이에 대해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살라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오직 반성하는 것만이 옳을 것이다.”라 하였다.

 

於是 國論大正 朝廷肅然 王位返還於新羅始祖赫居世王 第一曾孫之後裔 是爲神德王. 三世景哀王 遂忘本肆逸 身亡國敗 復傳於金氏而新羅遂亡 是爲敬順王.

어시 국논대정 도정숙연 왕위반환어신라시조혁거세왕 제일증손지후예 시위신덕왕. 삼세경애왕 수망본사일 신망국패 복전어김시이신라수망 시위경순왕.

 

이에 국론이 크게 바로 잡히고, 조정은 숙연하여 왕위를 신라 시조 혁거세왕 제일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하니, 이가 신덕왕이다. 3세 경애왕이 마침내 근본을 잃고 방자하게 놀다가 몸을 망치고 나라는 패하여 다시금 김씨에게 왕위를 전하였지만 결국 신라는 망하고 말았으니 이때의 왕이 경순왕이다.

 

第九節

 

時王子弓裔 始聞立國之本 慷慨懷復疆之志 率軍直向朔北 至於鐵圓而屯 使副將王建 說高句麗遺民 彼等 願再建故國 故 弓裔許之 乃稱後高句麗 十年之間 弓裔遂驕 改稱泰封國 忘失本志

시왕자궁예 시문입국지본 강개회복강지지 솔군직향삭북 지어철원이둔 사부장왕건 설고구려유민 피등 원재건고국 고 궁예허지 내칭후고구려 십년지간 궁예수교 개칭태봉국 망실본지

 

이러한 시대에 왕자 궁예가 처음으로 입국의 근본을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뜻을 품어,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삭북으로 향하였다. 철원에 이르러 주둔하면서, 부장인 왕건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유민들을 설득케 하였는데, 저들이 고국 즉 예전의 나라를 재건하기를 원하므로, 이에 궁예가 허락하여 곧 후고구려라 칭하였다. 십년이 흐르는 동안 궁예가 마침내 교만해져서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개칭하고, 그 본뜻을 잃어버렸다.

 

人心歸於王建故 王建遂爲王 稱高麗移都於松嶽 宣布復疆之業 於是 新羅已衰 又不能拒復疆之大義 敬順王遂讓國

인심귀어왕건 고 왕건수위왕 칭고려이도어송악 선포복강지업 어시신라기쇠 우불능거복강지대의 경순왕수양국.

 

이에 인심이 왕건에게 귀의하게 되고, 마침내 왕건이 왕이 되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칭하며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강역 회복의 사업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이때에 신라는 이미 쇠락하였으며, 또 강역 회복의 대의에 대하여 더 이상 항거할 수가 없었으니, 마침내 경순왕이 나라를 선양하게 되었다.

 

王建太祖遣使於堤上公宗嗣之家 詳審符都之事. 徵其次家之裔睡軒先生父子 皆辭而不就云.

왕건태조유사어제상공동사지가 상심부도지사. 징기차가지예수헌선생부자개사이불취운.

 

왕건태조는 제상공의 종가집에 사신을 보내어 부도의 일을 상세하게 묻고 들었으며, 그 작은집 후예인 수헌선생 부자를 초빙코자 하였으나, 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第十節

 

麗朝顯宗時契丹之禍繼作. 王使姜邯瓚 累訪寧海求言甚勤. 周恤一門 徵次家裔淸虛先生 恩顧甚重. 又修赫居世王陵 建塔供養.

여말현종시거란지화계작 왕사강감찬 누방영해구언심근 주휼일문 징차가예청허선생 은고심중. 우수혁거세왕릉 건탑공양.

 

고려 현종의 시절에 거란의 화가 계속되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강감찬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영해를 방문하게 하여 조언을 구하였다. 또한 그 가문을 두루 구제하고 차가의 후예인 청허선생을 초빙하여, 그 은혜를 돌아보는 데 심중하게 하였다. 더하여 혁거세의 왕릉을 보수하고 탑을 세워 공양하였다.

 

其搭文曰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云 姜邯瓚公 以其女欲奉宗嗣之巾櫛 妻之於次家之裔云.

기탑문왈 봉위벙거영태 하이상안 경조차탑 영윤공양.” 운 강감찬공이기여욕봉종사지건즐 처지어차가지예운.

 

그 탑문에 이르기를, “나라와 집안의 영원한 태평과 멀고 가까운 만백성이 언제나 안녕하기를 기원하면서, 공경을 다하여 이 탑을 건조하고 영원토록 공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강감찬공이 그 딸로 하여금, 종사의 집을 받들고 아내의 도리를 다하기를 원하여, 차가의 후예에게 시집보내었다고 전한다.

 

第十一節

 

麗朝靖宗時 王爲公家復興 以此家裔 命天公再封寧海君 徵其裔孫 數代之間連次封君以勵之 忠烈王時 有蒙古之亂 王 遣使寧海 詳審理勢 周恤公家一門而且免役其鄕 謂之居無役里 徵次家裔孫世通公祖孫三代 繼任侍中而謀邦家之安泰云

여말정종시 왕위공가부흥 이차가예명천공재봉영해군. 징기예손 수대지간연차봉군이려지. 충열왕시 유몽고지란 왕 견사영해 상심이세 주휼공가일문이차면역기향 위지거무역리 징차가예손세통공조손삼대 계임시중이모방가지안태운.

 

고려 정종 때, 왕이 공의 집안을 부흥시키고자 이 집안의 후예인 명천공을 다시금 영해군에 봉하였다. 또 그 후예와 후손들을 차례로 불러 수대 동안 군()으로 봉하여 격려하였다. 충렬왕 때 몽고의 변란이 있었다. 왕이 영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세(理勢)를 자세히 묻고 공의 집안과 문중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그 고을의 부역을 면제시키니, 이르기를 거무역(居無役)리라 하였다. 또 차가의 후손인 세통공의 조손 3대에게 시중(侍中)의 일을 계속 맡게 하면서 나라와 집안의 안태를 도모하였다고 전한다

 

第十二節

 

麗末 儒佛武三派爭權 國勢將危 殆忘立國之本 世人目寧海爲卜筮仙述()之家.

여말 유불무삼파쟁권 국세장위 태망입국지본 세인목영해위복무선술지가.

 

고려 말, 유교와 불교 그리고 무()의 세 파가 권력을 다툼으로 인하여 국세가 장차 위태로워지고, 나라를 세운 근본 또한 잊혀져갔다. 세상 사람들이 영해를 바라보니, 이는 어느새 점을 치는 복서와 선도를 닦는 선술의 집이 되어 있었다.

 

時 李太祖奉命 犯潦已發大軍 儒者金生甚憂乃求言於寧海 金生得言直走太祖陣中 密禀回軍之事 太祖前夜夢得金尺云.

시이태조봉명범요기발대군 유자김생심우내구언어영해 김생득언직주태조진중 밀품회군지사. 태조전야몽득금척운.

 

이 때, 이태조가 명을 받들어 장마를 무시한 채 대군을 이미 일으키고 있었다. 유학자인 김생이 심히 우려하며 영해에 조언을 구하였는데, 김생은 조언을 얻은 후 곧바로 태조의 진중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회군의 일을 은밀히 품의하니, 태조는 지난 밤 꿈에 금척을 얻은 일을 말하였다고 한다.

 

一說則有僧自東海走來 稟回軍事 云. 此僧或非無學之徒耶. 自東海走來則如有關於寧海. 而無學者本非佛徒卽仙流. 而常伴一人云 金生之事則見於史錄之上 太祖回軍事 有二人之稟達歟?

일설즉유승자동해주래 품회군사운. 차승혹비무학지도야. 자동해주래즉여유관어영해 이무학자본비불도즉선류. 이상반인운 김생지사즉견어사록지상 태조회군사 유이인지품달여?

 

일설에는 한 스님이 있어 동해로부터 달려와 회군의 일을 품의하였다고도 한다. 이 스님이 혹 무학대사의 도배는 아닐까 한다. 동해로부터 달려왔다고 한 즉, 혹 영해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본래 불도가 아니요 선가의 부류이며, 항상 한 사람을 동반하여 다녔다고 전한다. 김생의 일은 곧 역사에 보이는 것이니, 태조 회군의 일이 두 사람에 의해 품의되고 이루어진 것이란 말인가?

 

第十三節

 

本朝世宗大王登位 甚慇懃於寧海 周恤公家一門. 又建赫居世王陵廟 乃命公之宗次二家 移居於京師泮宮之隣. 命長老入侍便殿恩顧甚重 徵次家裔昌齡公父子而登用. 時余在隣受業于宗嗣之門

본조세종대왕즉위 심은근어영해 주휼공가일문 우건혁거세왕능묘 내명공지종차이가 이거어경사반궁지린 명장노인시편전은고심중 징차가예창령공부자이등용. 시여재린수업우종사지문.

 

본 조, 세종대왕께서 왕위에 오른 뒤로, 왕은 영해를 매우 은근히 생각하여, 공의 집안과 그 문중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혁거세왕의 능묘를 세우고 공의 집 종가와 차가 두 집에 명하여, 서울로 이주하여 반궁(국학대학인 오늘의 성균관) 옆으로 와 살게 하였다. 그리고 장로로서 편전에 입시하도록 명하여 그 은고를 심중하게 하였으며, 작은집의 후예인 창령공 부자를 불러 등용하였다. 때에 나는 그 이웃에 있어서 종사의 가문에서 배우게 되었다.

 

第十四節

 

當魯山朝乙亥遜位之日 朴氏大小家遂離京四散 次家諸人入於金化. 是時 雲窩孝孫公 受澄心錄於宗家 倉皇之中奉持入隱於金化. 時余同蹤故始得奉讀 後再傳於次家逋臣公家. 公之子薰氏奉持入隱於文川雲林山中.

당노산조을해손위지일 박씨대소가수리경사산 차가제인입어금화. 시시운와효손공 수징심록어종가 창황지중봉지입은어금화. 시여동종고시득봉독 후재전어차가포신공가. 공지자훈씨봉지입은어문천운림산중,

 

노산조(단종) 을해년 보위에서 내려서게 되자, 박씨의 큰 집 작은 집 등, 대소가가 마침내 서울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작은 집의 여러 사람들은 금화로 들어갔다. 이 때 운와 효손공은 종가에서 징심록을 받아, 창황한 가운데 이를 받들어 휴대하고 금화로 숨어들었다. 이 때에 나도 같이 따라가게 되어 처음으로 이를 읽어보게 되었다. 후에 이는 다시금 작은 집 포신공의 집으로 전해지니, 공의 아들 박훈씨가 이를 가지고 문천 운림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第八章

 

上記諸事 可以推知澄心錄之由來也 其所謂立言求言者必在於金尺之數理 而今則公家宗嗣已逝 諸家離散不講久矣. 故今無知者惜哉 余嘗讀金尺誌其數辭甚難不可了解.

상기제사 가이추지징심록지유래야 기소위입언구언자필재어금척지수리 이금즉공가종사이처 제가이산불강구의. 고금무지자석재 여상독금척지기수사심난불가요해.

 

위에 적은 여러 일들은 징심록의 유래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소위 입언이나 구언이라 하는 것들은 반드시 금척의 수리에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곧 공의 집안 종사가 이미 서거하였고, 공의 여러 집안은 이산되어 이를 풀어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애석하고 애석할 따름이다. 나 또한 일찍이 금척지를 읽어보았으나, 그 수리와 말이 심히 어려워 알 수가 없었다.

 

大抵其本卽天符之法 而製之以金者爲其不變也. 作之以尺者爲其無誤也. 不變而無誤則天地之理盡矣 誌中所謂日月星辰金土氣水之本 一存於不變之道. 飛潛動植生滅盛衰之理 全系於無誤之法者 是也.

대저기본즉천부지법 이제지이금자위기불변야.작지이척자위기무오야, 불변이무로즉천지지리진의. 지중소위일월성진금토기수지본 일존어불변지도. 비잠동식생멸성쇠지리 전계어무오지법자 시야.

 

기본은 천부지법이요 금으로 만든이유는 변하지 않기 바래서요 또 자로써 제작한 것은 그 잘못과 오류를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변하지 않고 오류가 없다면, 천지의 이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책 가운데서 말하는 바, 일월성신 금토기운은 수가 근본이요 오직 변하지 않는 이치()에 있다 하였다. 날고 헤엄치는 것 그리고 동물과 식물, 낳고 죽으며 성하고 쇠하는 이치가 모두 무오한 법()에 온전히 매여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第九章

 

是故 金尺之由來 其源甚遠其理深邃 而其形象則如三台之例 頭含火珠 四節而五寸. 其虛實之數九而成十. 此則天符之數也 以故 能度天地造化之根 能知理勢消長之本. 至於人間萬事無不測察 而規矩於氣門 心窺 命根 則能起死回生云 眞可謂神秘之物也

시고 금척지유래 기원심원기리심원 이기형상즉여삼태지예 두함화주 사절이오촌 기허실지수구이성십 차즉천부지수야. 이고 능도천지조화지근 능지이세소장지본. 지어인간만사무불지측찰이규거어기문 심규 명근 즉능기사뢰생운 진가위신비지물야.

 

이와 같은 까닭에 금척의 유래를 보면, 그 근원이 매우 멀고 이치가 깊고 심원하다. 그 형상은 곧 삼태성이 늘어선 것과 같으니(일직선), 꼭대기는 火珠(상투모양)에 다섯치로 된 4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虛實(차고 비임= 측정)9(5행의 완성)에서 10(새로운 시작)이 이뤄지니 이는 곧 천부의 수(완전)이다. 이로부터 능히 천지조화의 근원을 재고 또 능히 이치와 세력이 쇠하고 성하는 근본을 알 수 있다. 인간 만사중 재거나 살피지 못할 것이 없으니 기문 심규 명근에 대한 기준이 되어 제 자리로 기사회생 되돌이킬 수 있다 하였다. 이는 진실로 신비한 물건이라 할 것이다.

 

第十章

 

據史錄則 神人授金尺於赫居世王微時曰 持此金尺以正金甌云. 一說則金尺玉笛 出於七寶山 傳於赫居世王云 七寶山寧海之名山 白頭山下明天府 又有七寶山 未知何山 若後者則此必昔世之事.

거사록즉 신인수금척어혁거세왕미시왈 지차금척이정금구운 일설즉금척옥적 출어칠보산 전어혁거세왕운 칠보산영해지명산 백두산하명천부 우유칠보산 미지하산 약후자즉차필석세지사.

 

사록에 의거한 즉, 신인께서 혁거세왕이 미천하던 시절에 금척을 주면서 이르기를, “이 금척을 가지고 金甌(단단한 기준)을 삼으라고 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금척과 옥적이 칠보산에서 나와 혁거세왕에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칠보산은 영해의 명산이요, 백두산 아래 밝은 천부이고 또 칠보산이라는게 있으니 어느 산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후자가 맞다면, 이는 반드시 저 옛날의 일일 것이다(지금의 칠보산은 아닐게다).

 

新羅創始之本 已在於符都 則金尺之法亦在於檀世者 可知也. 赫居世王出於仙桃山壇廟之聖母婆娑蘇以十三之年少 能爲衆人之所推則其血系必有由緖 而金尺之爲傳來之古物 亦可以推知也.

신라창시지본 이재어부도 즉금척지법역재어단세자 가지야. 혁거세왕출어선도산단묘지성모파사소이십삼지연소능위중인지소추즉기혈계필유유서 이금척지위전래지고물 역가이추지야.

 

신라는 본디 부도부터이니, 금척의 법 역시 단군시대에 이미 있었음을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혁거세왕이 선도산 단묘의 성모가 떠돌다 낳아 13살의 어린 나이로 능히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은 것은 곧 그 혈통과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척이 전래되어온 오래된 물건임을 이로부터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然而此法 不傳於世而 獨傳於堤上公家者 此必婆娑王家傳故也. 又公家之後裔 嚴秘而諱之故也 況其本文澄心錄 不可開示於今世者乎.

연이차법 부전어세이 독전어제상공가자. 차필파사왕가전고야. 우공가지후예 엄비이휘지고야. 황기본문징심록 불가개시어금세자호!

 

그러나 이 법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오직 제상공의 집에만 독전한 것은, 이것이 반드시 파사왕(신라 5대왕) 집안에서만 보전된 까닭일 것이다. 또 공의 집안의 후예들마저 이를 엄중하게 비밀에 부치고 이를 숨겼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본문인 징심록마저도 세상에 열어 보이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음에야!

 

-여기서 금척을 단순히 자라는 물건으로 볼것이 아니라 엄격한 規準을 말한다고 봄이 옳다. 금이란 불변하는 금속으로 귀금속이 아니라 확고함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第十一章

 

金尺之所在誌中無據 據於史錄則 赫居世王埋於地中 作三十餘八丘而秘之云. 新羅武烈王時 唐將蘇定方 以平濟之功 憑唐帝之命索求是物 倔起金尺院地域. 時有崔氏者密持渡海埋於地中. 數年後持歸返於其師 其師仍以深藏於金剛岩掘中云. 一說則崔氏者 鬼團之頭目而逐賊魔於高山海島 密持入於金剛而深藏云. 此亦奇說也. 玉笛則已出於地中 金尺亦有再現之時耶.

금척지소재지중무거 거어사록즉 혁거세왕매어지중 작삼십여팔구이비지운, 신라무열왕시 당장소정방 이평제지공 빙당제지명색구시물 굴기금척원지역. 시유최씨자밀지도해매어지중. 수년후지귀반어기사 기사잉이심장어금강암굴중언. 일설즉최씨자 귀단지두목이축적마어고산해도 밀지입어금강이심장운. 차역기설야. 옥적즉이출어지중 금척역유재현지시야.

 

금척의 소재는 금척지에도 밝히지 않았다. 역사 기록에 의거하면, 곧 혁거세왕이 땅속에 이를 묻고 서른여덟 개의 언덕을 만들어,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신라 무열왕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내세우고, 당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이 물건을 찾고자 하여, 금척원의 지역을 마구 파내었다. 이 때 최씨라는 사람이 있어, 이를 몰래 감추어 바다를 건너가 땅속에 묻어버렸다. 수년 후 그가 이를 가지고 다시 돌아와 그 스승에게 반환하였는데, 스승은 이를 금강산의 암굴 가운데 깊이 감추어 버렸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곧 최씨라는 사람은 귀단의 두목인데, 적마를 고산과 해도로 쫓아내고, 금척을 은밀히 소지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깊이 감춰 버렸다고도 한다. 이 또한 기이한 이야기이다. 옥적이 이미 땅 속에서 나왔으니, 금척 역시 세상에 다시 나올 때가 과연 있을 것인지!

 

第十二章

 

新羅平濟之後 唐帝欲犯新羅. 出兵每到境海則不戰而自敗. 此天候乖常 軍卒病而勢自弱故也. 唐帝怪之遣使審異物之在於新羅 使來驗之. 有異氣常浮於羅都山川故 遂返師云. 此非金尺所關之說耶. 其他羅代之許多異說 有關於天符金尺者多 而僧輩附會於自家 供於說敎之具而淆之 可惜未遑辯之.

신라평제지후 당제욕범신라. 출병매도경해즉부전이자패. 자천후괴상 군졸병이세자약고야. 당제괴기견사이물지재어신라 사래험지. 유이기상부어나도산천고 수반사운. 사비금척소관지설야. 기타라대지허다이설 유관어천부금척자다. 이승배부회어자가 공어설교지구이효지. 가석미황변지.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이후, 당의 황제는 다시 신라를 침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출병하여 국경의 해역에 이를 때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번번이 스스로 패하고 말았다. 이는 하늘의 기후가 괴상하여, 군졸들이 병들어 스스로 그 세력이 약해진 때문이었다. 당제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신을 보내면서, 신라에 기이한 물건이 있는지를 찾아 확인하게 하였다. 사신이 와서 이를 시험해보니, 기이한 기운이 항상 신라의 수도와 산천의 하늘에 떠있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돌렸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는 실로 금척과 관계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이 외에 신라 때의 허다한 다른 이야기들도 있으니, 천부 금척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승려의 무리들이 끌어다 설교의 도구로 제공하고 또 뒤섞어 흐리게 하였으니, 이것을 가려내고 변별할 겨를이 없음이 다만 애석할 뿐이다.

 

第十三章

 

金尺之所在 尺度之測法 今雖未知 誌在者幸也. 如有後人 究而通之者則尺豈無復製之道 如不得復製 知其法理則足矣. 故 是法之於歷代邦家 可謂有功 而殊於本朝太祖回軍之事則其功 著矣. 太祖之夢得金尺 豈其偶然者哉! 然則英廟之慇懃於公家之裔 有所當然 而況訓民正音二十八字 取本於澄心錄者乎

금척지소재 척도디측법 금수미지 지재자행야 여유후인 구이통지자즉척이무복제지도 여부득복제 지기법리즉족의. 고 시법지어역대방가 가위유공 이수어본조태조회군지사즉기공 저의. 태조지몽득금척 이기우연자재 연즉영묘지은근어공가지예 유소당연 이황훈민정음이십팔자 취본어징심록자호!

 

금척의 소재와 척도의 측법을 지금 비록 알 수는 없으나, 금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만약 뒤에 사람이 있어 이를 연구하고 통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면, 금척을 다시금 제작할 길이 어찌 없겠는가! 혹 이를 복제하지 못한다하여도 그 법도와 이치를 아는 것으로도 족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 법에 역대로 우리나라의 공이 있었음을 가히 말할 수 있으며, 특히 본조 이태조의 회군의 일에 있어 그 공은 현저하였던 것이다. 이태조가 꿈에 금척을 얻었던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그런 즉 영묘(세종대왕)께서 공의 집안의 후예들에게 은근하였던 것은 그 마땅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여기 징심록에서 취했음에야!

 

第十四章

 

噫 眞理不易之詮靄靄 然胚存於人世風波之中 而潛然有徵. 生民始原之史縷縷 然密傳於世代連綿之間. 而寂然無聞 處於大塊之載. 堤上公裔之一家 眞是千古世外之族. 而世世多出晦跡之人 固非偶然也. 於斯可以見百結先生之道風家法 而亦足以窺上古有道之世之一端樣子. 則浥婁氏入山不出 絶命於濁世者 亦將有所以然也.

의 진리불역지전애애 연배재어인세풍파지중 이잠연유징. 생민시원지사루루 연밀전어세대연면지간. 이적연무문 처어대괴지재. 제상공예지일가 진시천고세외지족, 이세세다출회적지인고비우연야, 어사가이견백결선생지도풍가법 이역족이규상고유도지세지일단양자. 즉읍루싸입산불출 절명어탁세자 역장유소이연야.

 

슬프다! 바꿀 수 없는 법도와 진리가 안개 속에 흐릿하다. 그러나 비록 인간세상 풍파의 가운데에서도 이는 배태되어 있으니, 숨어있는 가운데 그 징조가 있다. 생민이 처음 시작한 역사는 길고도 오래다. 하지만 세대를 통하여 은밀히 전하여 끊어지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요하고 쓸쓸하여 들을 수가 없다. 제상공의 후예 및 그 일가는 참으로 천고의 오래된 세상 밖의 일족이라 할 것이다. 세세로 대를 이어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인재를 배출해 왔으니, 이는 진실로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이로부터라도 가히 백결선생의 도풍과 가법을 볼 수 있으며, 또 족히 상고대 시절, 도가 있던 세상의 일단과 그 양태를 엿볼 수 있다. , 읍루씨가 입산 불출하여 혼탁한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 역시 바야흐로 그 까닭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符都 誌' 카테고리의 다른 글

符都 誌  (0) 2020.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