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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五-武王



武王

 

武王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 翌年薨 子嗣位.

무왕 휘장 법왕지자 풍의영위 지기호걸 법왕즉위 익년훙 자사위.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에 돌아가시자,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

 

三年 秋八月 王出兵 圍新羅阿莫山城[一名母山城] 羅王眞平遣精騎數千 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陁畏石泉山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 令佐平解讎 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武殷 帥衆拒戰. 解讎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 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삼년 추팔월 왕출병 위신라아막산성(일명모산성) 신라왕진평견정기수천 거전지 아병실리이환. 신라축소타외석천산옹잠사성 침핍아강경. 왕노 영좌평해수 수보기사만 진공기사성. 신라장군건품무은 수중거전 해수불리 인군퇴어천산서대택중 복병이대지. 무은승승 영갑졸일천 추지대택 복병발급격지. 무은추마 사졸경해 부지소위.

 

3(서기 602) 가을 8, 임금이 병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모산성(母山城)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眞平)이 정예 기병 수천을 보내 항전하여, 우리 병사가 불리해서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小陁),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등 네 성을 쌓고, 우리 변경을 침범해 압박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좌평 해수(解讎)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 네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乾品), 무은(武殷)이 병사를 거느리고 대항해 싸웠다. 해수가 불리하자 병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대택(大澤, 큰 연못) 속으로 물러나 병사를 숨겨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고 갑옷 입은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대택까지 추격해 왔을 때, 복병이 일어나 갑자기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졸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 士當軍 無退豈敢奔退 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箒項 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讎僅免 單馬以歸.

무은자귀산대언왈 오상수교어사 왈 사당군 무퇴이감분퇴 이추사교호?” 이마수부 즉여소장추항 휘과역투이사. 여병견차익분 아군패적 해수근면 단마이귀.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병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달아나서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병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 해수는 겨우 위기를 벗어나 단신으로 돌아왔다.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육년 춘이월 축각산성. 추팔월 신라침동비.

 

6(서기 605) 2, 각산성(角山城)을 쌓았다.

가을 8,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都雨土 晝暗. 夏四月 大旱 年饑.

칠년 춘삼월 왕도우토 주암. 하사월 대한 년기.

 

7(서기 606) 3, 서울에 흙비가 내리고 낮인데도 어두웠다.

여름 4,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八年 春三月 遣扞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覘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팔년 춘삼월 견한솔연문진 입수조공 우견좌평왕효린입공 겸청토고구려 양제허지 영점고구려동정. 하오월 고구려래공송산성 불하 이습석두성 노남여삼천이귀.

 

8(서기 607) 3, 한솔 연문진(燕文進)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또 좌평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아울러 고구려 토벌을 요청하였다. 수 양제(煬帝)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라고 하였다.

여름 5, 고구려가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병사를 옮겨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였다.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구년 춘삼월 견사입수조공. 수문림랑배청봉사왜국 경아국남로.

 

9(서기 608) 3,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문림랑(文林郞) 배청(裴淸)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우리나라 남쪽 길을 경유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隋朝貢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來 與王相謀. 秋八月 築赤嵒城. 冬十月 圍新羅椵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십이년 춘이월 견사입수조공 수양제장정고구려 왕사국지모입청군기 제열 후가상사 견상서기부랑석율래 여왕상모. 추팔월 축적암성. 동시월 위신라가잠성 살성주찬덕 멸기성.

 

12(서기 611) 2,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므로 임금이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보내 군사 일정을 물었다. 양제가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 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보내와 임금과 상의하게 하였다.

가을 8, 적암성(赤嵒城)을 쌓았다.

겨울 10,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讚德)을 죽이고 성을 멸하였다.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십삼년 수육군도요 왕엄병어경 성언조수 실지양단. 하사월 진궁남문. 오월 대수 표몰인가.

 

13(서기 612), 수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자, 임금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하게 하였다.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은 두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여름 4, 궁궐 남쪽 문에 지진이 났다.

5, 홍수가 나서 사람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苩奇 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十一月 王都地震.

십칠년 동시월 명달솔백가 영병팔천 공신라모산성. 십일월 왕도지진.

 

17(서기 616) 겨울 10, 달솔 백기(苩奇)에게 명령하여 병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11, 서울에 지진이 났다.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 復之 奚論戰死.

십구년 신라장군변품등 래공가잠성 복지 해론전사.

 

19(서기 618), 신라의 장군 변품(邊品)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다시 빼앗아갔다. 이때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二十二年 冬十月 遣使入唐 獻果下馬.

이십이년 동시월 견사입당 헌과하마.

 

22(서기 621) 겨울 10,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二十四年 秋 遣兵侵新羅勒弩縣.

이십사년 추 견병침신라늑노현.

 

24(서기 623) 가을, 병사를 보내 신라의 늑노현(勒弩縣)을 침범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百濟王 秋七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攻新羅速含櫻岑烽岑烽岑旗懸冗柵等六城 取之.

이십오년 춘정월 견대신입당조공 고조가기성관 견사취책위대방군왕백제왕. 추칠월 견사입당조공. 동시월 공신라속함앵잠봉잠기현용책등육성 취지.

 

25(서기 624) 봄 정월, 당나라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高祖)가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사신을 보내 임금을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 신라의 속함(速含), 앵잠(櫻岑), 기잠(歧岑), 봉잠(烽岑), 기현(旗懸), 용책(冗柵) 6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二十六年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이십육년 동십일월 견사입당조공.

 

26(서기 625) 겨울 11,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來 詔諭我及高句麗 平其怨. 秋八月 遣兵 攻新羅王在城 執城主東所 殺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이십칠년 견사입당 헌명광개 인송고구려경도로 불허래조상국 고조견산기상시주자사래 조유아급고구려 평기원. 추팔월 견병 공신라왕재성 집성주동소 살지. 동십이월 견사입당조공.

 

27(서기 626)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을 바치고,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상국에 조회하지 못하게 한다고 호소하였다. 당 고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주자사(朱子奢)를 보내와 우리와 고구려에게 서로의 원한을 풀라는 조서를 내렸다.

가을 8, 병사를 보내 신라의 왕재성(王在城)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東所)를 붙잡아서 죽였다.

겨울 1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秋七月 王命將軍沙乞 拔新羅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王欲復新羅侵奪地分 大擧兵 出屯於熊津. 羅王眞平聞之 遣使告急於唐 王聞之 乃止. 秋八月 遣王姪福信 入唐朝貢. 太宗謂與新羅世讎 數相侵伐 賜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朕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正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蕃臣 王之鄰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福信及高句麗新羅使人 具勑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鄰情 卽停兵革.”

이십팔년 추칠월 왕명장군사걸 발신라서비이성 노남여삼백여구. 왕욕복신라침분지분 대거병출둔어웅진. 라왕진평문지 견사고급어당. 왕문지 내지. 추팔월 견왕질복신 입당조경 태종위여신라세수 수상침벌 사왕새거왈 왕세위군장 무유동번. 해우하광 풍도간조 충관지지 직공상심 상상가유 심이흔위. 짐지승총명 군입구우 사홍정도 애육여원 주거소통 풍우소급 기지수성 함사예안. 신라왕김진평 짐지번신 왕지린국 매문견가 정토불식 조병안인 수괴소망 짐이대왕 질복신급고구려신라사인 구칙통화 함허집목. 왕필수망피전원 식짐본회 공독린정 즉정병혁.”

 

28(서기 627) 가을 7, 임금이 장군 사걸(沙乞)에게 명령하여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임금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병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웅진(熊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眞平)이 이를 듣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보고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중지하였다. 가을 8, 임금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太宗)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한다고 하면서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말하였다. “왕은 대대로 군주가 되어 동쪽 번방을 달래고 있다. 먼 바다 한 끝에서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게 가로막아도 충성과 정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계속되니, 그 아름다운 생각을 매우 기쁘게 여긴다. 짐이 삼가 영광스러운 대명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바른 도리를 넓히고 백성들을 사랑하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천명에 따르며 모두가 편안하기를 바라고 있다.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은 짐의 번신(蕃臣)이요, 왕의 이웃이지만 매번 그대가 병사를 보내 토벌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대의 힘을 믿고 잔인한 행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와 매우 어긋난다. 짐이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을 마주해 서로 화친하도록 타일러 모두 화목할 것을 약속하였다.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뜻을 이해하여 모두 이웃의 정을 돈독히 하고 즉시 전쟁을 중지하라.”

 

王因遣使 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如故.

왕인견사 봉표진사 수외칭순명 내실상구여고.

 

임금이 이로 인하여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쳐 사죄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였으나 속으로는 서로 원수로 여기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椵岑城 不克而還.

이십구년 춘이월 견병공신라가잠성 불극이환.

 

29(서기 628) 2, 병사를 보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三十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삼십년 추구월 견사입당조공.

 

30(서기 629) 가을 9,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一年 春二月 重修泗沘之宮. 王幸熊津城 夏旱 停泗沘之役. 秋七月 王至自熊津.

삼십일년 춘이월 중수사비지궁. 왕행웅진성 하한 정사비지역. 추칠월 왕지자웅진.

 

31(서기 630) 2, 사비의 궁궐을 수리하였다. 임금이 웅진성으로 순행하러 갔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의 궁전을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 임금이 웅진에서 돌아왔다.

 

三十二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삼십이년 추구월 견사입당조공.

 

32(서기 631) 가을 9,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不利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삼십삼년 춘정월 봉원자의자위태자 이월 개축마천성. 추칠월 발병벌신라 불리 왕전우생초지원. 동십이월 견사입당조공.

 

33(서기 632) 봄 정월, 맏아들 의자(義慈)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2, 마천성(馬川城)을 고쳐 쌓았다.

가을 7, 병사를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였으나 이득을 얻지 못하였다. 임금이 생초(生草)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四年 秋八月 遣將攻新羅西谷城 十三日拔之 .

삼십사년 추팔월 견장공신라서곡성 십삼일발지.

 

34(서기 633) 가을 8,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西谷城)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삼십오년 춘이월 왕흥사성 기사임수 채식장려 왕매승주 입사행향. 삼월 천지어궁남 인수이십여리 사안식이양류 수중축도여 의방장선산.

 

35(서기 634) 2, 왕흥사(王興寺)가 완성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는데, 채색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임금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에서 끌어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

 

三十七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沘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 如畫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爲大王浦. 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 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 日暮 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 掩至鏖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 爲所擒. 六月 旱 秋八月 燕群臣於望海樓.

삼십칠년 춘이월 견사입당조공. 삼월 왕솔좌우신료 여연어사비하북포 양안기암괴석찪립 간이기화이초 여화도. 왕음지극환 고금자가 종자루무 시인위기지위대왕포. 하오월 왕명장군우소수감사오백 왕습신라독산성 우소지옥문곡 일모 해안휴사 신라장군알천장병 엄지오격지 우소등대석상 만궁거전 시진 위소금. 유월 한. 추팔월 연군신어망해루.

 

37(서기 636) 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을 인솔하고 사비하(泗沘河)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서 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임금이 술을 마시고 매우 즐거워서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 번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불렀다.

여름 5, 임금이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병사 5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玉門谷)에 이르자 해가 저물어 안장을 풀고 병사를 쉬게 하였다. 그때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병사를 거느리고 몰래 들이닥쳐 습격하였다. 우소가 큰 바위 위에 올라가 활을 쏘면서 대항하여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져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6, 가뭄이 들었다.

가을 8, 임금이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都地震 三月 又震 冬十二月 遣使入唐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錦袍幷彩帛三千段.

삼십팔년 춘이월 왕도지진. 삼월 우진. 동십이월 견사입당 헌철갑조부 태종우로지 사면포병채백삼천단.

 

38(서기 637) 2, 서울에 지진이 났다.

3, 또 지진이 났다.

겨울 1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제 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태종이 사신을 특별히 위로하고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 단()을 주었다.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삼십구년 춘삼월 왕여빈어범주대지.

 

39(서기 638) 3, 임금이 궁녀들과 함께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四十年 冬十月 又遣使於唐 獻金甲雕斧.

사십년 동시월 우견사어당 헌금갑조부.

 

40(서기 639) 겨울 10,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체 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四十一年 春正月 星孛于西北.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사십일년 춘정월 성패우서북. 이월 견자제어당 청입국학.

 

41(서기 640) 봄 정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禀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慜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사십이년 춘삼월 왕훙 시왈무 사자입당 소복봉표왈 군외신부여장졸.” 제거애현무문 조왈 회원지조 막선어총명 식종지의 우격어하방 고주국대방군왕백재왕부여장 잔산항애 원품정삭 헌침봉독 극고시종 엄치훙운 추심민도 의가상수 식표애영 증광록대부.” 부사심후.

 

42(서기 641) 3,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표문을 올리어 말하였다. “임금의 외신(外臣) 부여장(扶餘璋)이 죽었습니다.”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 말하였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방도는 총애로운 책명보다 앞선 것이 없고, 죽은 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 하여도 막힘이 없다. () 주국대방군왕백제왕부여장(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정삭(正朔, 책력)을 받고, 조공과 글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추도하는 슬픔이 깊다. 마땅히 보통 예법 이상으로 애도를 표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노라.” 그리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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