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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世家-齊悼惠王世家



齊悼惠王 劉肥

 

斉悼恵王劉肥者, 高祖長庶男也. 其母外婦也, 曰曹氏. 高祖六年, 立肥為斉王, 食七十城, 諸民能斉言者皆予斉王.

제도혜왕유비자 고조장서남야. 기모외부야 왈조씨. 고조육년 립비위제왕 식칠십성 제민재언자개여제왕.

 

()나라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맏서자이다. 그 어머니는 다른 집안 출신의 첩실로 조씨(曹氏)라 했다. 고조 6(기원전 201), 유비를 제왕(齊王)으로 세우고 70개 성을 식읍으로 주면서 제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인민들도 모두 제왕에게 주었다.

 

斉王, 孝恵帝兄也. 孝恵帝二年, 斉王入朝. 恵帝與斉王燕飲, 亢礼如家人. 呂太后怒, 且誅斉王. 斉王懼不得脱, 乃用其内史勳計, 献城陽郡, 以為魯元公主湯沐邑. 呂太后喜, 乃得辞就国.

제왕 효혜제형야. 효혜제이년 제왕입조. 혜제여제왕연음 항례여가인. 여태후노 차주제왕. 제왕구부득열 내용기내사훈계 헌성영군 이위노원공주탕목읍. 여태후희 내득사취국.

 

제나라 왕은 효혜제의 (배다른) 형이다. 효혜제 2, 제나라 왕이 입조했다. 혜제는 제나라 왕에게 편안하게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평민의 집처럼 형으로 대했다. 여태후가 노하여 제나라 왕을 죽이고자 했다. 제나라 왕은 겁이 났으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에 그의 내사(內史) ()이 낸 계책을 채용하여 성양군(城陽郡)을 노원공주(魯元公主)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바쳤다. 여태후가 좋아하자 바로 인사를 드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悼恵王即位十三年, 以恵帝六年卒. 子襄立, 是為哀王.

도혜왕즉위십삼년 이혜제육년졸. 자양립 시위애왕.

 

도혜왕이 즉위한 지 13년에 혜제가 6년 만에 죽었다. 아들 유양(劉襄)이 즉위하니 이가 애왕(哀王)이다.


(斉 悼恵王後孫)

 

 

哀王元年, 孝恵帝崩, 呂太后称制, 天下事皆決於高后. 二年, 高后立其兄子酈侯 呂台為呂王, 割斉之済南郡為呂王奉邑.

애왕원년 효혜제붕 여태후칭제 천하사새결어고후. 이년 고후립기형자역후 여대위여왕 할제지제남군위여왕봉읍.

 

애왕 원년(기원전 188), 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여태후가 황제의 명령을 대행하니 천하의 일은 모두 고후(高后, 여태후)가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2, 고후는 자기 오빠의 아들인 역후(酈侯) 여태(呂台)를 여왕(呂王)에 봉하고 제나라의 제남군(濟南郡)을 떼어 여왕의 봉읍으로 삼게 했다.

 

哀王三年, 其弟章入宿衛於漢, 呂太后封為朱虚侯, 以呂祿女妻之. 後四年, 封章弟興居為東牟侯, 皆宿衛長安中.

애오아삼년 기제장입숙위어한 여태후봉위주허후 이여록여첩지. 후사년 봉장제흥거위동모후 개숙위장안중.

 

애왕 3, 동생 유장(劉章)이 도성으로 와서 황제를 지켰다. 여후는 그를 주허후(朱虛侯)에 봉하고 여록(呂祿)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4년 후, 유장의 동생 흥거(興居)를 동모후(東牟侯)에 봉하고 모두 장안에서 황제를 지키게 했다.

 

哀王八年, 高后割斉琅邪郡立営陵侯劉沢為琅邪王.

애왕팔년 고후할제랑야군립양릉푸유택위랑야왕.

 

애왕 8, 여후가 제의 낭야군(琅邪郡)을 떼내어 영릉후(營陵侯) 유택(劉澤)을 낭야왕으로 삼았다.

 

其明年, 趙王友入朝, 幽死于邸. 三趙王皆廃. 高后立諸呂諸呂為三王, 擅権用事.

기명년 조왕우입조 유사우저. 삼조왕개폐. 고후립제여제여위삼왕 천권용사.

 

그 이듬해 조왕(趙王) 유우(劉友)가 입조했다가 관저에 갇혀서 죽었다. 세 명의 조왕이 모두 폐위당했다. 고후는 여씨들을 세 왕으로 삼으니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주허후와 공신들의 여씨 세력 제거>

 

朱虚侯年二十, 有気力, 忿劉氏不得職. 嘗入待高后燕飲, 高后令朱虚侯劉章為酒吏. 章自請曰:「, 将種也, 請得以軍法行酒.高后曰:「.酒酣, 章進飲歌舞. 已而曰:「請為太后言耕田歌.高后児子畜之, 笑曰:「顧而父知田耳. 若生而為王子, 安知田乎?」

주허후년이십 유기력 분유씨불득직. 상입대고후연음 고후영주허후유장위주리. 장자청왈 신 장종야 청득이군법행주고후왈 주감 장진음가무. 이이왈 청위태후언경전가고후아자축지 소왈 고이부지전이 약생이위왕 안지전호

 

주허후은 나이 스물로 기력이 넘쳤는데 유씨가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을 분해했다. 일찍이 술자리에서 고후를 모신 적이 있는데 고후가 주허후 유장에게 술자리를 감독하게 했다. 유장이 자청하여 신은 장수 집안의 씨라 군법으로 술자리를 감독하길 청합니다.’라고 했다. 고후가 좋다.’라고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유장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더니 잠시 뒤 태후를 위하여 밭갈이 노래를 부르고자 합니다.’라고 청했다. 고후는 그를 아이 취급하여 웃으면서 아버지 세대나 밭갈이를 알지. 너는 태어나길 왕자로 태어났는데 어찌 밭갈이를 안단 말인가?’라고 했다.

 

章曰:「臣知之.太后曰:「試為我言田.章曰:「深耕穊種, 立苗欲疏, 非其種者, 鉏而去之.呂后黙然. 頃之, 諸呂有一人酔, 亡酒, 章追, 抜剣斬之, 而還報曰:「有亡酒一人, 臣謹行法斬之.太后左右皆大驚. 業已許其軍法, 無以罪也. 因罷. 自是之後, 諸呂憚朱虚侯, 雖大臣皆依朱虚侯, 劉氏為益彊.

장왈 신지지태후왈 시위아언전장왈 심경지종 입묘욕소 비기종장 서이거지여후묵연. 경지 제여유일일인취 망주 장추 발검참지 이환보왈 유망주일인 신근행법참지태후좌우개대경. 업이허기군법 무이죄야. 인파. 자시지후 제여찬주허후 수대신개의주허후 유씨위익강.

 

유장은 신도 밭갈이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태후는 나를 위해 밭갈이 노래를 한번 불러 보거라.’라고 했다. 유장은 땅을 깊이 파고 씨를 뿌리고, 싹이 나면 고루고루 옮겨 심고, 종자가 아니면 호미로 뽑아 버린다네.’라고 노래했다. 여후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여씨 중 하나가 술에 취해 술자리를 빠져나가자 유장이 쫓아가 검을 뽑아 목을 베고는 돌아와 술자리에서 한 놈이 도망가길래 신이 삼가 법대로 목을 베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태후의 좌우가 모두 놀랐으나 군법에 따르기로 한 이상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술자리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이후로 여씨들은 주허후를 두려워했고, 대신들이 모두 주허후에게 의지하자 유씨는 더욱 강해졌다.



其明年, 高后崩. 趙王呂祿為上将軍, 呂王産為相国, 皆居長安中, 聚兵以威大臣, 欲為亂. 朱虚侯章以呂祿女為婦, 知其謀, 乃使人陰出告其兄斉王, 欲令発兵西, 朱虚侯東牟侯為内應, 以誅諸呂, 因立斉王為帝.

기명년 고후봉. 조왕여록위상군 여왕산위상국 개거장안중 취병이위대신 욕위란. 주허후장이여록여위부 지기모 내사인음출고기형제왕 욕룡발서병 주허후 동모후위내응 이주제여 인립제왕위제.

 

이듬해 여후가 세상을 떠났다. 조왕 여록이 상장군으로, 여왕(呂王) 여산(呂産)이 상국(相國)으로 모두 장안(長安)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병사들을 모아 대신들을 위협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주허후 유장은 여록의 딸을 아내로 삼은지라 그 음모를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을 시켜 몰래 그 형 제나라 왕에게 이를 알리고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주허후와 동모후는 안에서 호응하여 여씨들을 죽이고 제나라 왕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했다.

 

斉王既聞此計, 乃與其舅父駟鈞郎中令祝午中尉魏勃陰謀発兵. 斉相召平聞之, 乃発卒衛王宮. 魏勃紿召平曰:「王欲発兵, 非有漢虎符験也. 而相君囲王, 固善. 勃請為君将兵衛衛王.

제왕기문차계 내여기구부사균 낭중영축오 중위위발음모발병. 제상소평문지 내발졸위왕궁. 위발태소평왈 왕욕발병 비유한호부험야. 이상군위정 고선, 발청위군장병위위왕

 

제왕은 이 계획을 듣고는 바로 그의 외삼촌 사균(駟鈞), 낭중령(郎中令) 축오(祝午), 중위(中尉) 위발(魏勃)과 함께 몰래 병사를 발동할 것을 꾀했다. 제왕의 상국인 소평(召平)은 이를 듣고는 바로 병사를 일으켜 왕궁을 포위했다. 위발이 소평에게 왕이 병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나라 조정의 호부(虎符)가 없어 소용이 없소. 그런데 상국이 왕을 포위했으니 정말 잘한 일이오. 이제 이 위발이 당신을 위해 병사를 거느리고 왕을 지키겠소이다.’라고 했다.

 

召平信之, 乃使魏勃将兵囲王宮. 勃既将兵, 使囲相府. 召平曰:「嗟乎! 道家之言當断不断, 反受其亂, 乃是也.遂自殺.

소평신지 내사위발장병위왕궁. 발기장병 사위상부. 소평왈 차호 도가지언 당단부단 반수기란내시야수자살.

 

소평이 이를 믿고는 곧 위발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게 했다. 병사들을 거느린 위발은 상국의 집을 포위하게 했다. 소평은 오호라! 도가에서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면 그 환란을 도로 당한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 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於是斉王以駟鈞為相, 魏勃為将軍, 祝午為内史, 悉発国中兵. 使祝午東詐琅邪王曰:「呂氏作亂, 斉王発兵欲西誅之. 斉王自以児子, 年少, 不習兵革之事, 願挙国委大王. 大王自高帝将也, 習戦事. 斉王不敢離兵, 使臣請大王幸之臨菑見斉王計事, 并将斉兵以西平関中之亂.

어시제왕이사균위상 위발위장군 축오위내사 실발국중병. 사축오동사랑야왕왈 여씨작란 제왕발병욕서주지. 제왕자이아자 연소 불습병혓지사 원거국위대왕. 대왕자고제장야 씁전사. 제왕불감이병 사신청대왕행지임치견제왕계사 병장제병이서평관중지란

 

이에 제왕은 사균을 국상으로, 위발을 장군으로, 축오를 내사로 삼는 한편 나라 안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축오에게 동쪽의 랑야왕에게 가서 거짓으로 여씨들이 난을 일으켜서 제나라 왕이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가서 이들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나라 왕께서는 스스로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 군대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나라를 대왕께 맡기고자 합니다. 대왕께서는 고제 때부터 장수로서 전투에 익숙하십니다. 그래서 제왕께서는 감히 군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을 시켜 대왕께서 임치에서 제왕을 만나 일을 논의한 다음 제나라의 군대를 서쪽으로 보내 관중의 난을 평정하시길 원하십니다.’라고 말하게 했다.

 

琅邪王信之, 以為然, (西)[]馳見斉王. 斉王與魏勃等因留琅邪王, 而使祝午尽発琅邪国而并将其兵.

랑야왕신지 이위연 서치견제왕. 제왕여위발등인류랑야왕 이사축오진발랑야국이병장지병.

 

랑야왕은 이 말을 옳다고 믿고는 서쪽으로 달려가 제나라 왕을 만났다. 제나라 왕과 위발 등은 그 참에 랑야왕을 억류시키고 축오에게 랑야국의 병력을 전부 징발하여 이끌게 했다.

 

琅邪王劉沢既見欺, 不得反国, 乃説斉王曰:「斉悼恵王高皇帝長子, 推本言之, 而大王高皇帝適長孫也, 當立. 今諸大臣狐疑未有所定, 而沢於劉氏最為長年, 大臣固待沢決計. 今大王留臣無為也, 不如使我入関計事.斉王以為然, 乃益具車送琅邪王.

랑야왕유택기견사 부득반국 내설제왕왈 제도혜왕고황제장자 추본언지 이대왕고황제적장손야 당립. 금제대신호의미유소정 이택어유씨최위장년 대신고대택결계. 금대왕유신무위야 불려사아입관계사제왕이위연 내익구거송랑야왕.

 

랑야왕 유택은 속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제왕에게 제나라 도혜왕은 고조의 맏아들이다. 근본을 따져보면 대왕은 고황제의 적장손이니 당연히 자리에 올라야 한다. 지금 대신들은 의심하고 머뭇거리며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나 유택은 유씨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대신들은 틀림없이 나 유택의 결정을 기다릴 것이다. 지금 대왕이 신을 억류시켜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나를 관중으로 들어가게 하여 일을 꾸미게 하느니만 못하다.’라고 유세했다. 제나라 왕은 그렇다고 생각하여 바로 마차 따위를 더 보태 랑야왕을 보냈다.

 

琅邪王既行, 斉遂挙兵西攻呂国之済南.

랑야왕기행 제송거병서공여국지제남.

 

랑야왕이 떠나자 제나라는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여씨 나라인 제남(濟南)을 쳤다.


於是斉哀王遺諸侯王書曰:「高帝平定天下, 王諸子弟, 悼恵王於斉. 悼恵王薨, 恵帝使留侯張良立臣為斉王. 恵帝崩, 高后用事, 春秋高, 聴諸呂擅廃高帝所立, 又殺三趙王, 滅梁趙以王諸呂, 分斉国為四. 忠臣進諫, 上惑亂不聴. 今高后崩, 皇帝春秋富, 未能治天下, 固恃大臣諸()[]. 今諸呂又擅自尊官, 聚兵厳威, 劫列侯忠臣, 矯制以令天下, 宗廟所以危. 今寡人率兵入誅不當為王者.

어시제왕우제후왕서왈 고제평정천하 황제자제 도혜왕어제. 도혜왕훙 혜제사류후장양립신의제왕. 혜제붕 고후용사 춘추고 청자제찬폐고제소립 우살삼조왕 멸양 연 조이왕제여 분제국위사. 충신진간 상혹란불청. 금고후붕 황제춘추부 미능치천하 고시대신제장(). 근제여우찬자존궁 취병엄위 각열후충신 교재이영천하 종묘소이위. 금과인솔병입주부당위왕자

 

이에 제나라 애왕(哀王)은 제후왕들에게 편지를 보내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자제들을 왕에 봉하셨습니다. 도혜는 제나라 왕이 되었고, 도혜왕이 돌아가시자 혜제께서는 유후 장량을 시켜 신을 제나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혜제께서 돌아가시고 고후(여후)가 일을 챙기셨지만 나이가 많으셔서 여씨들이 고제께서 세운 왕들을 마음대로 폐하는 것을 그냥 놔두었고, 또 세 명의 조왕을 죽였으며, , , 조를 없애고 여씨들을 왕으로 삼았으며, 제나라를 넷으로 쪼갰습니다. 충신들이 바른 말로 아뢰었으나 고후는 어리석게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 고후가 세상을 떠났고 황제는 어려 천하를 다스릴 수 없어 대신과 제후들에게 의지할 수박에 없습니다. 지금 여씨들이 다시 멋대로 자신들의 자리를 높이고 병력을 모아 위세를 부리며, 제후들과 충신들을 겁박하고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천하를 호령하니 종묘가 이 때문에 위태로워졌습니다. 지금 과인은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부당하게 왕이 된 자들을 죽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漢聞斉発兵而西, 相国呂産乃遣大将軍潅嬰東撃之. 潅嬰至滎陽, 乃謀曰:「諸呂将兵居関中, 欲危劉氏而自立. 我今破斉還報, 是益呂氏資也.乃留兵屯滎陽, 使使喩斉王及諸侯, 與連和, 以待呂氏之変而共誅之. 斉王聞之, 乃西取其故済南郡, 亦屯兵於斉西界以待約.

한문제발병이서 상국여산내견태장군관영동격지. 관영지형양 내모왈 제여장병거관중 욕위유씨이자립. 아금파제환보 시익여씨자야내유병둔형양 사사유제왕급제후 여연화 이대여씨지변이공주지. 제왕문지 내서취기고제남군 역둔병어제석계이대약.

 

제나라가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한나라 조정에 전해지자 상국 여산은 바로 대장군 관영(灌嬰)에게 동쪽으로 나가 이를 물리치게 했다. 관영이 형양(滎陽)에 이르러서는 여씨들이 군대를 거느린 채 관중을 차지하고는 유씨를 위협하여 자립하려고 한다. 내가 지금 제나라를 격파하고 돌아가 보고하는 것은 여씨를 돕는 꼴이다.’라 하고는 병사들을 형양에 주둔시킨 채 사신을 제왕와 제후들에게 보내 연합하여 여씨가 난을 일으키길 기다렸다가 함께 토벌하자고 모의했다. 제나라 왕이 이를 듣고는 바로 서쪽으로 옛 제남군을 차지한 다음 역시 군대를 제나라 서쪽 경계에 주둔시킨 채 약속을 기다렸다.

 

呂祿呂産欲作亂関中, 朱虚侯與太尉勃丞相平等誅之. 朱虚侯首先斬呂産, 於是太尉勃等乃得尽誅諸呂. 而琅邪王亦従斉至長安.

여록 여산욕작난관중 주허후여태위발 승상평등주지, 주허후수선첨여산 어시태위발등냐득진주제여. 이랑야왕역종제지장안.

 

여록, 여산이 관중에서 난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허후와 태위(太尉) 주발(周勃), 승상 진평(陳平) 등은 이를 토벌했다. 주허후가 먼저 여산의 목을 베었고, 이에 태위 주발 등은 바로 여씨들을 모조리 토벌했다. 그러자 랑야왕도 제나라에서 장안으로 왔다.

 

大臣議欲立斉王, 而琅邪王及大臣曰:「斉王母家駟鈞, 悪戻, 虎而冠者也. 方以呂氏故幾亂天下, 今又立斉王, 是欲复為呂氏也. 代王母家薄氏, 君子長者且代王又親高帝子, 於今見在, 且最為長. 以子則順, 以善人則大臣安.

대신의욕립제왕 이랑야왕급대신왈 제왕모가사균 악태 호이관자야. 방이여씨고기란천하 금우립제왕 시욕복위여씨야. 대왕모가박씨 군자장자 차대왕우친고제자 어금견재 차최위장. 이자즉순 이선인즉대신안.

 

대신들이 논의하여 제왕을 세우고자 했으나 랑야왕과 대신들은 제나라 왕의 외가 사균은 사납고 흉악하기가 호랑이 중에서도 으뜸이라 합니다. 얼마 전까지 여씨들 때문에 천하가 거의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 또 제나라 왕을 세우는 것은 다시 여씨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대나라 왕(代王)의 외가 박씨(薄氏)는 군자이자 장자입니다. 그리고 대나라 왕 또한 고제의 친아들로 지금 건재할 뿐만 아니라 가장 나이가 많고 아들이니 순리이고, 선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니 대신들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於是大臣乃謀迎立代王, 而遣朱虚侯以誅呂氏事告斉王, 令罷兵.

어시대신내모영립대왕 이견주허후이주여씨사고제왕 영파병.

 

이에 대신들은 대왕을 맞아들여 옹립하기로 모의하고, 주허후를 보내 여씨들을 토벌한 일을 제나라 왕에게 알리고 군대를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潅嬰在滎陽, 聞魏勃本教斉王反, 既誅呂氏, 罷斉兵, 使使召責問魏勃. 勃曰:「失火之家, 豈暇先言大人而後救火乎!因退立, 股戦而栗, 恐不能言者, 終無他語.

관영제형양 문위발본교제왕반 지구여씨 파제병 사사소책문위발. 발왈 실화지가 이하건언재인이후구화호인퇴립 고전이률 공불능언자 종무타어.

 

관영은 형양에 있을 때 위발이 본래 제왕에게 모반을 교사한 일을 들었다. 여씨들이 토벌되고 제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사신을 시켜 위발을 불러 나무랐다. 위발은 집에 불이 났는데 어찌 먼저 가장에게 허락받고 불을 끈단 말입니까?’라 하고는 물러나 섰는데 다리를 후들거리며 겁을 내는 것이 말을 못할 정도였지만 끝내 다른 말은 없었다.

 

潅将軍熟視笑曰:「人謂魏勃勇, 妄庸人耳, 何能為乎!乃罷魏勃.

관장군열시소왈 인위취발용 망용인이 하능위호내차위발.

관장군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사람들이 위발은 용감하다고 하던데 잘못된 말이요 가당치도 않구나라 하고는 위발을 파면했다.


 

 

魏勃父以善鼓琴見秦皇帝. 及魏勃少時, 欲求見斉相曹參, 家貧無以自通, 乃常独早夜埽斉相舎人門外. 相舎人怪之, 以為物, 而伺之, 得勃.

위발부이선고금견진황제. 급위발소시 욕구견제상조참 가진무이자통 내상독조야소제상사인문외. 상사인괴지 이위물 이사지 득발.

 

위발의 부친은 거문고를 잘 연주하여 진시황(秦始皇)을 만났다. 위발은 젊었을 때 제나라 국상이었던 조참(曹參)을 만나려고 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스스로 통할 수가 없었다. 이에 늘 혼자 아침 일찍 국상의 사인(舍人) 집 앞을 청소했다. 국상의 사인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어떤 일인가 싶어 몰래 엿본 끝에 주발을 발견했다.

 

勃曰:「願見相君, 無因, 故為子埽, 欲以求見.於是舎人見勃曹參, 因以為舎人. 一為參御, 言事, 參以為賢, 言之斉悼恵王. 悼恵王召見, 則拝為内史. , 悼恵王得自置二千石. 及悼恵王卒而哀王立, 勃用事, 重於斉相.

발왈 원견상군 무인 고위자소 욕이구견어이사인견발조참 인이위사인. 일위참어 언사 참이위현 언지제도혜왕. 도혜왕소견 즉배위내사. 시 도혜왕득자치이천석. 급도혜왕졸이애왕립 발용사 중어제상.

 

주발이 상국을 뵙고자 하는데 인연이 없어 당신을 위해 청소를 해서 뵙고자 한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사인이 주발을 조참에게 보이니, 이로써 사인이 되었다. 한 번은 조참의 수레를 몰다가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조참이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제나라 도혜왕에게 주발 이야기를 했다. 도혜왕이 불러 만나보고는 내사(內史)로 삼았다. 당초 도혜왕은 알아서 2천 석 관리를 둘 수 있었다. 도혜왕이 죽고 애왕이 즉위하자 위발이 권력을 장악하니 제나라 국상보다 더 권력이 무거웠다.

 

王既罷兵帰, 而代王來立, 是為孝文帝.

왕기파병귀 이대왕래립 시위효문제.

 

제나라 왕이 군대를 해산하여 돌아가고, 대나라 왕이 와서 즉위하니 이가 효문제(孝文帝)이다.

 

孝文帝元年, 尽以高后時所割斉之城陽琅邪済南郡复與斉, 而徙琅邪王王燕, 益封朱虚侯東牟侯各二千戸.

효문제원년 진이고후시소할제지성양 랑야 제남군복여제 이사랑야왕왕연 익봉주허후 동모후각이천호.

 

효문제 원년, 고후 때 나누어졌던 제의 성양(城陽), 낭야(琅邪), 제남군(濟南郡) 등을 다시 제나라에 주어졌고, 랑야왕은 연왕(燕王)으로 옮겨졌다. 주허후와 동모후에게는 2천 호가 더해졌다.

 

是歳, 斉哀王卒, 太子側立, 是為文王.

시세 제애왕졸 태자칙립 시위문왕.

 

이 해에 제나라 애왕이 죽고 나서 태자 유칙(劉則)이 즉위하니 이가 문왕(文王)이다.


 

斉初囲急, 陰與三国通謀, 約未定, 会聞路中大夫従漢來, , 及其大臣乃复勧王毋下三国.

제초위급 음여삼국통모 약미정 회문로중대부종한래 희 급기대신내복권왕무하삼국.

 

제나라는 처음에 포위당해 급해지자 몰래 네 나라와 통하여 모의하려고 했다. 약속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중대부 노앙이 한나라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뻤다. 이에 대신들이 다시 왕에게 네 나라에 굽실대지 말 것을 권했다.

 

居無何, 漢将欒布平陽侯等兵至斉, 撃破三国兵, 解斉囲. 已而复聞斉初與三国有謀, 将欲移兵伐斉. 斉孝王懼, 乃飲薬自殺. 景帝聞之, 以為斉首善, 以迫劫有謀, 非其罪也, 乃立孝王太子寿為斉王, 是為懿王, 続斉後. 而膠西膠東済南菑川王咸誅滅, 地入于漢. 徙済北王王菑川. 斉懿王立二十二年卒, 子次景立, 是為厲王.

거무하 한 장란포 평양후등병지제 격차삼국병 해제위. 이이복문제초여삼국유모 장욕이병벌제. 제효왕구 내음약자살. 경제문지 이위제수선 이박겁유모 비기죄야 내립효왕태자수위제왕 시위의왕 결제후. 이교서 교동 제남 치천왕함주멸 지입우한. 사제북왕왕치천. 제의왕립이십이년졸 자차경립 시위여왕.

 

오래지 않아 한의 장군 난포(欒布), 평양후(平陽侯) 조기(曹奇) 등이 군사를 이끌고 제에 도착해 네 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의 포위를 풀었다. 이윽고 다시 제왕이 당초 네 나라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듣고는 병사를 이동시켜 제나라를 토벌하려고 했다. 제 효왕은 두려워 약을 마시고 죽었다. 경제(景帝)는 이 소식을 듣고는 제왕이 당초 잘했지만 겁박 때문에 음모에 가담한 것이니 그의 죄가 아니라 여겨서 효왕의 태자 수()를 제나라 왕으로 세우니 이가 의왕(懿王)이고, 이로써 제나라의 제사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서, 교동, 제남, 치천의 왕들은 모두 주살되었고 보지는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제북왕은 치천왕으로 옮겼다. 제 의왕은 즉위 22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차경(次景)이 서니 이가 여왕(厲王)이다.

 

斉厲王, 其母曰紀太后. 太后取其弟紀氏女為厲王后. 王不愛紀氏女. 太后欲其家重寵, 令其長女紀翁主入王宮, 正其後宮, 毋令得近王, 欲令愛紀氏女. 王因與其姊翁主姦.

제여왕 기모왈기태후. 태후취기제기씨녀위여왕후. 왕불애기씨녀. 태후욕기가중총 영기장녀기옹주입왕궁 정기후궁 무령득근왕 욕영애기씨녀. 왕인여기자옹주간.

 

제 여왕은 그 어머니가 기태후(紀太后)였다. 태후는 자신의 동생인 기씨(紀氏)의 딸을 여왕의 왕후로 삼았지만 왕이 기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태후는 기씨 집안이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장녀 기옹주(紀翁主)를 왕궁에 들여보내 후궁들을 단속하여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기씨 만 좋아하게 만들려 했다. 왕은 이 때문에 그 누이인 옹주와 간통을 저질렀다.

 

斉有宦者徐甲, 入事漢皇太后. 皇太后有愛女曰脩成君, 脩成君非劉氏, 太后憐之. 脩成君有女名娥, 太后欲嫁之於諸侯, 宦者甲乃請使斉, 必令王上書請娥. 皇太后喜, 使甲之斉.

제유환자서갑 입사한황태후. 황태후유애여왈수성군 수성군비유씨 태후린지. 수성군유녀명아 태후욕가지어제후 환자갑내청사제 필영왕상서청아. 황태후희 사갑지제.

 

 

제나라에 서갑(徐甲)이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황실에 들어와서 황태후(皇太后)를 모시게 되었다. 황태후에게는 사랑하는 딸 수성군(修成君)이 있었다. 수성군은 유씨가 아니어서 태후가 그녀를 가련하게 여겼다. 수성군에게는 아()라는 딸이 있었다. 태후는 아를 제후에게 시집보내고 싶었다. 환관 서갑이 제나라에 가서 반드시 제왕이 아를 청하는 글을 쓰게 하겠다고 했다. 황태후가 기뻐하며 서갑을 제나라로 보냈다.

 

是時斉人主父偃知甲之使斉以取后事, 亦因謂甲:「即事成, 幸言偃女願得充王後宮.甲既至斉, 風以此事. 紀太后大怒, :「王有后, 後宮具備. 且甲, 斉貧人, 急乃為宦者, 入事漢, 無補益, 乃欲亂吾王家! 且主父偃何為者乃欲以女充後宮!

시시제인주보언지갑지사이취후사 역인위갑 즉사성 향언언녀원득충왕후궁갑기지제풍이차사. 기태후대노 왈 왕유후 후궁구비. 차갑 제빈인 급내위환자 입사한 무보익 내욕란오왕가 차주보언하위자 내욕이여충후궁

 

이때 제나라 사람 주보언(主父偃)이 서갑이 제나라로 가서 왕후를 얻으려한다는 일을 알고는 기회를 틈타 서갑에게 일이 성사되면 이 언의 딸이 후궁이 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서갑이 제나라에 이르러 이 일을 풍문으로 흘리니 기태후는 왕에게는 왕후가 있고, 후궁도 다 갖추어져 있거늘 저 서갑이라는 제나라의 가난한 자가 급한 김에 환관이 되어서는 한 왕실을 섬기면서 아무런 보탬이 못되자 우리 왕가를 어지럽히려 하는구나! 또 주보언이란 자는 무엇 하는 자인가? 딸을 후궁으로 넣고 싶다고?’라며 크게 화를 냈다.

 

徐甲大窮, 還報皇太后曰:「王已願尚娥, 然有一害, 恐如燕王.燕王者, 與其子昆弟姦, 新坐以死, 亡国, 故以燕感太后. 太后曰:「無复言嫁女斉事.事浸潯(不得)聞於天子. 主父偃由此亦與斉有卻.

서갑대궁 환보황태후왈 왕이원상아 연유일해 공여연왕연왕자 여기자곤제간 신좌이사 망국 고이연감태후. 태후왈 무복언가여제사사침심(부득)문어천자. 주보언유차역여제유각.

 

서갑은 궁지에 크게 몰려서는 돌아와 황태후에게 왕은 아를 맞아들이려 하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는데 아마 연왕과 관계된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연왕은 자신의 누이, 딸들과 간통하여 최근 죽임을 당하고 나라도 망했다. 이런 연나라 일을 가지고 태후에게 무엇인가 느끼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태후는 제나라로 시집보내는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도록 하라.’고했다. 그러나 이 일은 서서히 퍼져나가 천자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주보언은 이 일로 제나라와 사이가 벌어졌다.

 

主父偃方幸於天子, 用事, 因言:「斉臨菑十萬戸, 市租千金, 人衆殷富, 巨於長安, 此非天子親弟愛子不得王此. 今斉王於親属益疏.乃従容言:「呂太后時斉欲反, 呉楚時孝王幾為亂. 今聞斉王與其姊亂.

주보언방행어천자 용사 인언 제임치십만호 시조천금 인중은부 거어장안 차비천자친제애자부득왕차. 금제왕어친속익소내종용언 여테후시제욕반 오초시효왕기위란. 금문제왕여기자란

 

주보언은 그 무렵 천자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간여하고 있었는데, 틈을 봐서 제나라 임치의 10만 호는 세금만 천금에 이릅니다. 사람은 많고 부가 넘치니 장안보다 더 큽니다. 천자의 친동생이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곳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제나라 왕은 친척들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습니다.’라 말하고는 다시 조용히 여태후 때 제나라는 난을 꾀했고, , 초의 반란 때 효왕은 거의 난에 가담할 뻔했습니다. 지금 듣자 하니 제왕은 그 누이와 난잡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於是天子乃拝主父偃為斉相, 且正其事. 主父偃既至斉, 乃急治王後宮宦者為王通於姊翁主所者, 令其辞証皆引王. 王年少, 懼大罪為吏所執誅, 乃飲薬自殺. 絶無後.

어시천자내배주보언위재상 차정기사. 주보언기지제 내급치왕후궁환자위왕통어자옹주소자 영기사증개인왕. 왕연소 구대죄위리소집주 내음약자살. 절무후.

 

이에 천자는 주보언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삼아 그 일을 바로 잡게 했다. 제나라에 도착한 주보언은 바로 왕의 후궁과 환관으로 왕을 위해 누이 옹주와 간통하게 만든 자를 다스려 그 말을 증거로 삼아 왕을 끌어들이려 했다. 왕이 아직 어려 큰 죄를 받고 관리에게 붙잡혀 죽을까 겁을 내고는 바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렸다. 후사가 없어 제사가 끊겼다.


是時趙王懼主父偃一出廃斉, 恐其漸疏骨肉, 乃上書言偃受金及軽重之短. 天子亦既囚偃. 公孫弘言:「斉王以憂死毋後, 国入漢, 非誅偃無以塞天下之望.遂誅偃.

시시조왕수주보언일출폐제 공기참소골육 내상서언언수금급경중지단. 천자역기수언. 공손홍언 제왕이우사무후 국입한 비주언무이새천하지망수주언.

 

이때 조나라 왕 유수(劉遂)는 주보언이 나서 제나라를 없앨까 두려웠고, 그가 또 골육간의 사이를 점점 멀게 만들지 않을까 겁이 났다. 이에 글을 올려 주보언이 돈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단점을 일렀다. 천자는 주보언을 옥에 가두었다. 공손홍(公孫弘)제나라 왕이 근심 때문에 죽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고 나라를 한나라에 편입되었습니다. 주보언을 죽이지 않으면 천하의 원망을 막을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마침내 주보언을 죽였다.

 

斉厲王立五年死, 毋後, 国入于漢.

제여왕립오년사 무후 국입우한.

 

제 여왕은 재위 5년 만에 죽었고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나라는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城陽王 劉章과 菑川王 劉志)



 

斉悼恵王後尚有二国, 城陽及菑川. 菑川地比斉. 天子憐斉, 為悼恵王冢園在郡, 割臨菑東環悼恵王冢園邑尽以予菑川, 以奉悼恵王祭祀.

제도혜왕후상유이국 성양급치천. 치천지차제. 천자린제 위도혜왕총원재군 할임치동환도혜왕총원읍진이여치천.

 

제 도혜왕의 후손으로 아직 두 나라가 남아 있으니 성양(城陽)과 치천(菑川)이다. 치천의 봉지는 제나라에 비길 만했다. 천자가 제나라를 가련하게 여겨 도혜왕을 위해 무덤이 있는 군에서 임치 동쪽 도혜왕의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읍을 전부 떼어서 치천에게 주어 도혜왕의 제사를 받들게 했기 때문이다.

 

城陽景王章, 斉悼恵王子, 以朱虚侯與大臣共誅諸呂, 而章身首先斬相国呂王産於未央宮. 孝文帝既立, 益封章二千戸, 賜金千斤. 孝文二年, 以斉之城陽郡立章為城陽王. 立二年卒, 子喜立, 是為共王.

성양경왕장 제도혜왕자 이주허후여대신공주제여 이장신수선참상국여왕산어미앙궁. 효문제기립 익봉장이천호 사금천근. 효문이년 이제지성양군립장위성양왕. 립이년졸 자희립 시위공왕.

 

성양의 경왕(景王) 유장(劉章)은 도혜왕의 아들이다. 그는 주허후로서 대신들과 함께 여씨들을 죽였는데, 유장 자신이 먼저 미앙궁에서 상국 여왕 여산의 목을 베었다. 효문제가 즉위한 뒤 유장에게 2천 호를 더해 주고 금 천 근을 하사했다. 효문제 2, 제나라 성양군을 유장에게 주어 성양왕으로 세웠다. 재위 2년 만에 죽고 아들 희()가 즉위하니 이가 공왕(共王)이다.

 

共王八年, 徙王淮南. 四年, 复還王城陽. 凡三十三年卒, 子延立, 是為頃王.

공왕팔년 사왕회남. 사년 복환왕성양. 범삼십삼년졸 자연립 시위경왕.

 

공왕 8, 회남왕(淮南王)으로 옮겨졌다. 4년 후 다시 성양왕으로 돌아왔다. 공왕은 재위 33년 만에 죽고 아들 연()이 즉위하니 이가 경왕(頃王)이다.

 

頃王二十六年卒, 子義立, 是為敬王.

경왕이십육년졸 자의립 시위경왕.

 

경왕은 재위 26년 만에 죽고 아들 의()가 즉위하니 이가 경왕(敬王)이다.

 

敬王九年卒, 子武立, 是為恵王.

경왕구년졸 자무립 시위혜왕.

 

경왕은 재위 9년 만에 죽고 아들 무()가 즉위하니 이가 혜왕(惠王)이다.

 

恵王十一年卒, 子順立, 是為荒王.

혜왕십일년 자순립 시위황왕.

 

혜왕이 재위 11년 만에 죽고 아들 순()이 뒤를 이으니 이가 황왕(荒王)이다.

 

荒王四十六年卒, 子恢立, 是為戴王.

황왕사십육년졸 자회립 시위대왕.


황왕이 재위 46년 만에 죽고 아들인 회()가 이으니 이가 대왕(戴王)이다.

 

戴王八年卒, 子景立, 至建始三年, 十五歳, .

대왕팔년졸 자경립 지건시삼년 십오세 졸.

 

대왕은 재위 8년 만에 죽고 아들 경()이 즉위했으나 건시(建始) 315세의 나이로 죽었다.

 

済北王興居, 斉悼恵王子, 以東牟侯助大臣誅諸呂, 功少.

제북왕흥거 제도혜왕자 이동모후조대신주제여 공소.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는 도혜왕의 아들이다. 동모후(東牟侯)로써 대신들을 도와 여씨들을 죽였으나 공은 적었다.

 

及文帝従代來, 興居曰:「請與太僕嬰入清宮.廃少帝, 共與大臣尊立孝文帝.

급문제종대래 흥거왈 청여태복영입청궁폐소제 공여대신존립효문제.

 

문제가 대()에서 장안으로 들어오자 유흥거는 태복(太僕) 하후영(夏侯嬰)과 함께 궁을 깨끗하게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하여 소제(少帝)를 폐하고, 대신들과 함께 효문제를 받들어 옹립했다.

 

孝文帝二年, 以斉之済北郡立興居為済北王, 與城陽王倶立. 立二年, .

효문제이년 이제지제북군립흥거위제북왕 여성양왕구립. 립이년 반.

 

문제 2, 제나라의 제북군(濟北郡)을 봉지로 유흥거를 제북왕에 봉하니 성양왕과 함께 모두 왕이 되었다. 재위 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始大臣誅呂氏時, 朱虚侯功尤大, 許尽以趙地王朱虚侯, 尽以梁地王東牟侯. 及孝文帝立, 聞朱虚東牟之初欲立斉王, 故絀其功. 及二年, 王諸子, 乃割斉二郡以王章興居.

시대신주여씨시 주허후공우대 허진이조지왕주허후 진이양지왕동모후. 급효문제립 문주허 동모지초욕립제왕 고출기공. 급이년 왕제자 내할제이군이왕장 흥거.

 

처음 대신들이 여씨들을 죽였을 때 주허후의 공이 아주 커서 조나라 땅 전부를 주허후에게 주어 왕으로 삼고, 양나라 땅은 전부 동모후에게 주어 왕으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효문제가 즉위한 뒤 주허후와 동모후가 당초 제왕을 옹립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의 공을 깎았다. 문제 2년에 이르러 아들들을 왕으로 삼으면서 제나라 두 개의 군을 떼어 유장, 유흥거를 왕으로 삼았다.

 

興居自以失職奪功. 章死, 而興居聞匈奴大入漢, 漢多発兵, 使丞相潅嬰撃之, 文帝親幸太原, 以為天子自撃胡, 遂発兵反於済北. 天子聞之, 罷丞相及行兵, 皆帰長安. 使棘蒲侯柴将軍撃破虜済北王, 王自殺, 地入于漢, 為郡.

장 흥거자이실직탈공. 장사 이흥거문흉노대입한 한다발병 사승상관영격지 문제친행태훤 이위천자자격호 수발병반어제북. 천자믄지 파승상급행병 개귀장안 사극포시장군격파노제북왕 왕자살 지입우한 위군.

 

이에 유장과 유흥거는 이로써 자리를 잃고 공을 빼앗겼다. 유장이 죽자 유흥거는 흉노가 대거 한나라를 침입하여 한이 대거 군대를 징발하고 승상 관영에게 이들을 물리치게 하는 한편 문제가 몸소 태원으로 행차하여 천자가 직접 오랑캐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천자가 이를 듣고는 바로 승상과 군의 행군을 멈추고 장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한편 극포후(棘蒲侯) 시장군(柴將軍)에게 이를 쳐서 제북왕을 포로로 잡아 오게 하니 제북왕은 자살하고 봉지는 한에 편입되어 군이 되었다.

 

後十三年, 文帝十六年, 复以斉悼恵王子安都侯志為済北王. 十一年, 呉楚反時, 志堅守, 不與諸侯合謀. 呉楚已平, 徙志王菑川.

후십삼년 문제십육년 복이제도혜왕자안도후지위제북왕. 십일년 오초반시 지견수 불여제후합모. 오초이평 사지왕치천.

 

13년이 지난 문제 16, 다시 제 도혜왕의 아들 안도후(安都侯) 유지(劉志)를 제북왕에 봉했다. 11년 뒤, 오와 초나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지는 이곳을 굳건히 지키면서 제후들과 함께 모반하지 않았다. , 초나라의 난이 평정되자 유지를 치천왕으로 옮겼다.

 

済南王辟光, 斉悼恵王子, 以勒侯孝文十六年為済南王. 十一年, 與呉楚反. 漢撃破, 殺辟光, 以済南為郡, 地入于漢.

제님왕벽광 제도혜왕자 이늑후효문십육년위제남왕. 십일년 여오초반. 한격파 살벽광 이제남위군 지입우한.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은 제나라 도혜왕의 아들이다. 늑후(勒侯)로써 한 문제 16년에 제남왕이 되었다. 11년 뒤, , 초나라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한은 이를 격파하고 벽광을 죽였다. 제남은 군으로 만들고 땅은 한에 편입시켰다.

 

菑川王賢, 斉悼恵王子, 以武城侯文帝十六年為菑川王. 十一年, 與呉楚反, 漢撃破, 殺賢.

치천왕현 제도혜왕자 이무성후문제십육년위치천왕. 십일년 오여초반 한격파 살현.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은 제 도혜왕의 아들이다. 무성후(武城侯)로써 한 문제 16년에 치천왕이 되었다. 11년 뒤, , 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한은 이를 격파하고 유현을 죽였다.

 

天子因徙済北王志王菑川. 志亦斉悼恵王子, 以安都侯王済北. 菑川王反, 毋後, 乃徙済北王王菑川. 凡立三十五年卒, 謚為懿王. 子建代立, 是為靖王. 二十年卒, 子遺代立, 是為頃王. 三十六年卒, 子終古立, 是為思王. 二十八年卒, 子尚立, 是為孝王. 五年卒, 子横立, 至建始三年, 十一歳, .

천자인사재북왕지왕치천. 지역제도혜왕자 이안고군후왕제북. 치천왕반 무후 내사제북왕왕치천. 범립삼십오년졸 시위의왕. 가건대립 시위정왕. 이십년졸 자유대립 시위경왕. 삼십육년졸 자종고립 시위사왕. 이십팔년졸 자상립 시위효왕. 오년졸 자횡립 지건시삼년 십일세 졸.

 

천자는 이에 따라 제북왕 유지를 치천왕으로 옮겼다. 유지도 제 도혜왕의 아들이자 안도후로서 제북왕이 된 것이다. 치천왕이 반란을 일으켜 후사가 없어지자 제북왕을 치천왕으로 옮겼다. 모두 35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는데, 시호는 의왕(懿王)이다. 아들인 유건(劉建)이 즉위했는데 이가 정왕(靖王)이다. 25년 만에 죽고 아들 유유(劉遺)가 뒤를 이으니 이가 경왕(頃王)이다. 경왕은 36년 만에 죽고 아들 유종고(劉終古)가 즉위하니 이가 사왕(思王)이다. 사왕은 28년 만에 죽고 아들 유상(劉尙)이 뒤를 이으니 이가 효왕(孝王)이다. 효왕은 5년 만에 죽고 아들 유횡(劉橫)이 즉위하였으나 건시(建始) 311세의 나이로 죽었다.

 

膠西王卬, 斉悼恵王子, 以昌平侯文帝十六年為膠西王. 十一年, 與呉楚反. 漢撃破, 殺卬, 地入于漢, 為膠西郡.

교서왕앙 제도혜왕자 이창평후문제십육년위교서왕. 십일년 여오초반. 한격파 살앙 지입우한 위교서군.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도 제 도혜왕의 아들이다. 창평후(昌平侯)로써 한 문제 16년에 교서왕이 되었다. 11년 후,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한은 이를 격파하고 유앙을 죽였다. 봉지는 한에 편입되어 교서군이 되었다.

 

膠東王雄渠, 斉悼恵王子, 以白石侯文帝十六年為膠東王. 十一年, 與呉楚反, 漢撃破, 殺雄渠, 地入于漢, 為膠東郡.

교동왕웅거 제도혜왕자 이백석후문제십육년위교동왕. 십일년 여오초반 한격파 살 웅거 지입우한 위교동군.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는 제 도혜왕의 아들이다. 백석후(白石侯)로 시작해 한 문제 16년에 교동왕이 되었다. 11년 후,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한은 그를 격파하고 유웅거를 죽였다. 봉지는 한에 편입되어 교동군이 되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諸侯大国無過斉悼恵王. 以海内初定, 子弟少, 激秦之無尺土封, 故大封同姓, 以填萬民之心. 及後分裂, 固其理也.

태사공왈 제후대국무과제도혜왕. 이해내초정 자제소 격진지무척토봉 고대봉동성 이전만민지심. 급후분열 고기리야.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제후국들 중 크기로는 제 도혜왕을 넘어설 자는 없었다. 천하가 평정된 초기 황실의 자제들의 수가 적고 진()나라가 한 치의 땅도 인척들에게 봉하지 않은 것에 느끼는 바가 있어 동성 인척을 대대적으로 봉하여 만민의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 뒤 분열되는 거야 당연한 세상 이치 아니겠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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