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고전을 읽어갑니다.
그저 읽어보고픈 글들 읽는 것이고...
학술적인 주장하자는 글 아닙니다.
祖光 濱名寬祐가 지은 契丹古傳(거란고전)의 주석서인 契丹古傳詳解 중에서 거란고전의 원문으로 보이는 것들만 뽑아 해석한 것입니다. 제가 契丹古傳(거란고전)의 영인본 직접 본적은 없으므로 濱名寬祐이 판독한 한자에 근거하여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띄어쓰기와 쉼표와 마침표 등은 본인이 임의로 찍은 것이므로 잘못번역될 수도 있다는 점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장(章)은 契丹古傳詳解을 지은자가 붙인 것이지만 편의상 이에 따릅니다.
알수 없는 고유명사들이 많이 나오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록들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 여러분의 좋은 생각들을 기다립니다.
제1장. 鏡
曰若稽諸傳 有之曰 “神者 耀體 無以能名焉. 維鑑能象, 故稱鑑曰日神體, 讀如 戞珂旻.
왈약계제전 유지왈 “신자 요체 무이능명언, 유감능상 고칭감왈 일신체 독여 알가민.
若稽(약계)의 여러 傳(전)에 이르길 “神(신)이라는 것은 빛 자체요 능히 이름 붙일 수 없다. 다만 거울로만 넌지시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비친 것을 日神體(태양 자체)라고 하며 戞珂旻(알가민)[1]과 비슷하게 읽는다.”
[1] 하늘은 丸(환)이다. 삼국유사 桓因(환인)과 桓䧺(환웅)은 丸仁(환인)과 丸雄(환웅)이고 壇君王儉(단군왕검)은 댕군옹검 즉 동근옹검으로서 桓儉(환검)이 아니라 丸儉(환검)이다. 戞珂旻(알가민)의 “戞(알)”은 즉 “丸(환)”이요 “珂旻(가민)”은 “감”을 음차한 것으로 검(儉)과 같다. 즉, 日(일) 혹은 天(천)은 고대어로 “알” 혹은 “동글”이요 神(신)은 “(옹)검”이다.
제2장. 日祖東大海に禊して日孫を生む
恭惟日祖名, 阿乃沄翅報, 云 戞靈明澡乎, 辰云 珥素佐煩奈, 淸悠氣所凝, 日孫內生.
공유일조명 아내운시보, 운 알령명조호, 진운 이소좌번내 청유기소응 일손내생.
日祖(태양의 선조)란 이름을 삼가 생각하여보니 阿乃沄翅報(아내운시보???)인데 말하자면 戞(법도)의 靈(본령)이 밝고 맑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별「辰」은 珥素佐煩奈(이소좌번내????)이라고들 한다. 맑은 기운들이 엉기어 日孫(태양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제3장. 日孫の天降
日孫名 阿珉美辰沄繾翅報順瑳檀彌固, 日祖乳之, 命高天使鷄載而降臻. 是爲神祖, 蓋日孫 讀如 戞勃, 高天使鷄 讀如 胡馬可兮. 辰沄繾翅報 其義 猶言 東大國皇也.
일손명 아민니진운운견시보순차단미고 일조유지 명고천사계재이강진. 시위신조 개일선 독여알발 고천사계 독여 호마가혜. 진운견시보 기의 유언 동대국황야.
日孫(일손: 별들)의 이름은 阿珉美 辰沄繾翅報順瑳檀彌固(아민미 진운견시보[임금] 순차단미고[단군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인데 日祖(태양이)가 그를 젖먹여 키워준다. 높은 하늘이 닭에 실어 내려 보냈고 이를 신명의 조상이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닭은 호마가혜로 발음한다. 辰沄繾翅報(신운견시보[皇])라는 것의 의미는 말하자면 東大國皇(동대국황:소위 환웅)을 말한다.
제4장. 東大神族
族延萬方. 廟曰弗菟毘, 廷曰蓋瑪耶, 國曰辰沄繾. 稱族竝爲辰沄固朗, 稱民爲韃珂洛, 尊皇亦謂辰沄繾翅報. 神子神孫國于四方者, 初咸因之.
족연만방 묘왈불도비 정왈개마야 국왈진운견. 칭복병위진운고랑 칭민위달가락 존황역위진운견시보, 신자신곤국수사방자 초함인지.
그 족속들이 만방으로 퍼져나가 세운 사당「廟」을 弗菟毘(불도비)이라고 하고, 중앙정부「廷」를 蓋瑪耶(개마야)라고 하며, 나라「國」를 辰沄繾(진운견)이라고 하였다. 민족「族」을 다른 말로 辰沄固朗(신운고랑)이라고 칭하였고, 백성「民」을 韃珂洛(달가락)이라고 칭하였으며, 임금「皇」을 또한 높여 辰沄繾翅報(신운견시보)라고 하였다. 神(신)의 아들과 자손의 나라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으니 모두다 이것을 처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제5장. 辰沄氏の起源
或云, 神祖名 圖己曳乃訶斗, 號 辰沄須瑳珂. 初降於毉父之陰聿肇有辰沄氏, 居於鞅綏之陽載還. 有辰沄氏 是爲二宗 別嗣神統 顯于東冥者, 爲阿辰沄須氏. 其後 寧羲氏著名, 五原諸族之間.
혹운 신조명 도기예내가두 호 진운수차가. 초강어의부지음율조진운씨 거어앙수이양재환. 유진운씨 시위이종. 별사신통 현우동명자 위아진운수씨 기후 영희씨저명 오원제족지간.
혹자는 神祖(신조)의 이름이 圖己曳乃訶斗(도기예내가두)이고 호칭이 辰沄須瑳珂(진운수차가)라고 하였는데 애초엔 의사의 역할로 내려와 聿肇(율조: 스스로 시조가 되어) 辰沄氏(진운씨)[2]의 시조가 되어 鞅綏(앙수)의 남쪽(陽) 흩어져 (載還) 살았다. 辰沄氏(신운씨)에는 두 줄기가 있어서 각각 신통을 이어가며 東冥(동명: 동쪽 하늘)에 나타난 자들은 阿辰沄須氏(아신운수)요 그 후에 寧羲氏(녕희씨)가 이름을 드러냈는데 五原(오원 지역)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있다.
제6장. 東大神族の傳統稱呼
因亦念之, 雖世降族斁, 瓜瓞猶可繹綿緖, 而格其原壤, 例如. 瑪玕 靺鞨 渤海 同聲相承, 珠申 肅愼 朱眞 同音相襲, 傳統自明也矣. 乃爰討探舊史, 作次第如左.
인역념지 수세강족두 고질유가역면서 이격이원양 열여. 마간 말갈 발해 동성상승 주신 숙신 주진 동음상습 전통자명야의, 내원토심구사 작차제여와.
또한 유래를 생각하여보면, 비록 세상에 내려온 민족들이 타민족에 섞여(斁)들어도 적으나마 그 명맥을 찾을수 있으니 그들이 본디 자리잡은 지역을 나누어보면 그 예가 다음과 같다. 瑪玕(마간)과 靺鞨(말갈)과 渤海(발해)는 같은 발성이 서로 이어온 것이요, 珠申(주신)과 肅愼(숙신)과 朱眞(주진)은 같은 발음이 서로 이어온 것이니, 전해진 계통은 자명한 것이다. 이에 옛 역사를 탐구하여 차례대로 다음과 같이 글을 짓는다.
제7장. 東族振興の四大要道
塢須弗 耶摩駘記曰 “其國所以未嘗隤頹者, 職由 潭探上古, 明覯先代, 審設神理, 善繩風猷.” 一曰 “秋洲 讀做 阿其氏末, 蓋亦因于阿其比也.
오수불 야마태기왈 ”기국소이미상퇴퇴자 직유 담탐상고 명구선대 심설신리 선승풍유.“ 일왈 ”추주 독주 아기씨말 개역인우아기비야.“
塢須弗(오수불)이 지은 耶摩駘記(야마태기)에서 “그 나라가 일찍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오직 상고의 것을 깊이 찾고 선대의 것을 확실하게 갖추고 神(신)의 도리를 살피어 베풀며 좋은 풍속과 좋은 도리를 잘 이어나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秋洲(추주)에서는 阿其氏末(아기씨말)를 지어 읽었는데 아마도 阿其比(아기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고 말하였다.
제8장. 七聯族の名稱原義
氏質都札曰.., 阿藝也 央委也 陽委也 潢弭也 伯弭也 潘耶也 淮委也, 列名聯族尋其所由, 皆因於秦率旦阿祺毗矣.
씨질도찰왈 ‘아예야 앙위야 양위야 황미야 백미야 반야야 회위야 열명연족심기소유 개안어진솔단아기비의.
氏質都札(씨질도찰)은 “ 阿藝(아예)와 央委(앙위)와 陽委(양위)와 潢弭(황미)와 伯弭(백미)와 潘耶(반야)와 淮委(회위) 등의 열거한 7 이름들은 서로 관련된 민족이며 그들은 모두 秦率旦(진솔단) 阿祺毗(아기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제9장. 日孫浥婁族を降す
止浥婁異種, 原稱羊鄂羅墜, 本浥且之地也. 神祖伐懲元兇, 化育久之.
지읍루이종 원칭양악라추 본읍차지지야, 신조벌징원흉 신육구지.
다른 浥婁(읍루)가 사는 곳은 원래 호칭은 羊鄂羅墜(양악라추)이었고 그들의 땅은 본디 浥且(읍차)의 땅이었다. 神祖(신조)가 元兇(원흉)을 쳐서 혼내주고 그들을 교화한지 오래되었다.[1]
제10장. 鴨綠江の古今
命令作澡然後 容爲河洛, 賜名閼覆祿卽浥婁也. 或曰, 閼覆祿 禊誓之謂也. 故至今爲成者 指其不渝於閼覆祿大水焉.
명령작조 연후 용위하락 사명알복록즉읍루야. 혹왈 알복록 계서지위야. 고지금위성자 지기불투어알복록대수언,
목욕재계[2]하고 하락(환단의 세계관)[3]에 참여하게 하고 이름을 주어 閼覆祿(알복록)으로 불렀으니 곧 浥婁(읍루)이다. 혹은 閼覆祿(알복록)이란 (읍루의 이름이 아니라) 禊誓(계서)를 일컫는 것이라고도 하였다.[4] 그래서 지금까지 (맹세를) 한 자들은 閼覆祿(알복록)이요 大水(대수:압록강)처럼 변하지 말라 한다.
제11장. 八千國主及び平壤
汗美須銍曰 ”神祖都于鞅綏韃,“ 曰 ”畢識耶神京也.“ 敎漾緻遣翅雲兢阿解治焉.
한미수질왈 ”신조도우앙수달“ 왈 ”필식야신경야,“ 교양치견시운긍아해치언.
汗美須銍(한미수질)은 “神祖(신조)는 鞅綏韃(앙수달)[5]에 도읍하였다.”고 하였고 “畢識耶(필식야)는 신령스런 도읍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漾緻遣翅雲兢阿解(양치견시운긍아해)를 교화하여 다스렸다.
제12장. 神子シラヒキ別と新羅
又, 敎耑礫濆兮阿解, 居戞牟駕, 曰高虛耶, 是爲仲京.
우 교단력분혜아해 거알모가 왈고허야 시위중경,
또한 耑礫濆兮阿解(단력분혜아해)를 교화하여 戞牟駕(알모가)[6]에 거하도록 하였는데 高虛耶(고허야)[7]라고 하였으니 이곳이 仲京(중경)이다.
제13장. 神女アタカシ媛と薩摩
敎曷旦鸛濟扈枚, 居覺穀啄剌, 曰節覇耶, 是爲海京.
교갈단관제호매 거각곡탁랄 왈절패야 시위해경.
曷旦鸛濟扈枚(갈단관제호매)를 교화하여 覺穀啄剌(각곡탁랄)[8]에 거하게 하였는데 (이곳을) 節覇耶(절패야)라고 하였으니 이곳이 海京(해경)이 된다..
제14장. 神女ウサハミ媛と撫期範紀
敎尉颯潑美扈枚, 居撫期範紀, 曰濆洌耶齊京也.
교위삽발미호매 거무기범기 왈분열야제경야.
尉颯潑美扈枚(위삽발미호매)를 교화시켜 撫期範紀(무기범기)에 거하게 하였는데 이곳을 濆洌耶(분렬야)라고 하였으며 齊京(제경)이다.
제15장. 神子キリコヱ阿解と長白山
敎耆麟馭叡阿解, 治巫軻牟曰 芝辣漫耶. 神祖初降于此, 故稱曰 秦率母理之京. 阿解又宮於然矩丹而居曰叙圖耶, 是爲離京. 阿解生而異相頭 有刄角 好捉鬼?[9]. 乃, 頒蘇命 遮厲 立桿 禁呪 二十四船之法, 于今有驗也.
교기린어예아해 치무가모왈 지랄만야. 신조초항우차 고칭왈 진솔모리지경 아해우궁어연구단이거 왈 서도야 시위이경. 아해생이상두 유인각 호착귀거. 내반소명차려입간금주 이십사반지법 우금유험야.
耆麟馭叡阿解(기린어예아해)를 교화시켜 巫軻牟(무가모)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곳을) 芝辣漫耶(지랄만야)라고 한다. 神祖(신조)가 처음에 이곳에 내려왔으므로 秦率母理(진솔모리)의 도읍(京)이라고 불렀다. 또한 阿解(아해)는 然矩丹(연구단)에서 궁실을 짓고 살았는데 (이곳을) 叙圖耶(서도야)라고 하며 離京(이경:별궁)이 된다. 阿解(아해)는 태어나면서부터 형태가 다른 머리를 하고 있었고 날카로운 뿔을 가지고 있고 귀신과 그들이 사는 곳을 잡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에 蘇命(소명)을 주어 악행「厲」을 막고 솟대「桿」를 세우고 주술「呪」을 금지하는 등 24가지「般」의 법을 반포하였는데 지금까지 증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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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원사화의 기록과 이 기록을 비교하여보면 아주 흥미롭다.
《규원사화》부루옹검 條
신축년은 부루옹검의 원년이다. …중략… 수년이 지난 후에 盎肅(앙숙)이라는 무도한 자가 있어서 仙羅(선라)로 하여금 가서 그를 달래게 하였는데, 그 후에 앙숙이 다시 배반하기에 선라로 하여금 僂侲(루진)과 개마의 병사를 모으게 하여 그를 토벌하고는 그 무리를 북쪽의 후미진 곳으로 내어쫓았다.
여기에 나오는 盎肅(앙숙)이 바로 羊鄂羅墜(양악라추)이며 挹婁(읍루)의 조상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浥且(읍차)와 沃沮(옥저)와의 관계이다. 계속 규원사화를 보자.
《규원사화》부루옹검 條
仙羅(선라)를 盎肅(앙숙)의 땅에 봉했다가 그 몇 년 뒤에 또 道羅(도라)와 東武(동무)를 봉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니, 곧 뒤에 옥저(沃沮)와 비류(沸流)와 졸본(卒本) 등의 뭇 나라들이다.
선라를 앙숙의 땅에 봉하였는데 그 나라이름이 곳 沃沮(옥저)라고 하였다. 땅을 점유한 선후 관계가 뒤바뀌었지만 거란고전의 본문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浥且(읍차)는 곧 沃沮(옥저)임을 알 수 있다.
[2] 대중 목욕탕은 오늘날처럼 그저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씻어 내리는 성스러운 곳이었던 것 같다.
《단서대강》
庚寅二十九年. 命置嫩江浴塲, 敎習漁獵.
庚寅(경인, BC2371) 29년. 嫩江(눈강)에 浴塲(욕장)을 설치하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거란고전에서 作澡라고 하였으니 분명 단서대강에 기록된 것과 같이 나라에서 설치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浴塲(욕장)이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3] 앞서 稱民爲韃珂洛(백성을 일컬어 달가락韃珂洛라고 하였다)이라고 하였으니 여기 河洛은 분명 民을 칭하였던 珂洛을 말한 것이리라.
[4] 앞서 蓋日孫讀如戞勃(대개 일손日孫은 알발戞勃과 비슷하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즉, 日孫(일손)의 정통은 “알발”이고, 정벌하여 교화된 후에 禊誓(계서)하여 日孫(일손)에 속하게 된 자들을 “알복록”이라고 하였다는 말이다.
[5] 분명 阿斯達(아사달)의 轉音(전음)이다. 阿斯達과 鞅綏韃은 모두 “앗 달”로 읽는 글자로서 요즘말로는 “아우 땅「弟地」”이며 이는 扶蘇樑(부소량)의 아우땅「弟地」라는 말이다. 扶蘇樑이란 “부르돋아 솟은 대들보가 되는 땅”이라는 말로서 거란고전에서는 畢識耶(필식야)라고 하였다. 주로 扶蘇樑은 거룩한 땅으로 출입을 금하며 藏塘京(장당경)이 위치해 있으며 扶蘇樑의 기운을 받은 아우땅「弟地」에 阿斯達을 두는 것이다. 藏塘京의 藏은 뜻으로 읽어 “감추었다”는 말이고 塘은 음으로 “땅”이며 京은 뜻으로 “도읍”이다. 즉, 藏塘京은 감추인 땅의 도읍이라는 말이다.
[6] 이곳이 곧 삼국사기의 閼川(알천)이다. 戞(알)은 閼(알)과 발음이 같고 牟(모)는 물「水」의 옛말일 것이며 駕(가)는 곧 가「邊」이므로 戞牟駕(알모가)는 “알물가”라는 말이다.
[7] 우리는 대개 辰韓(진한)이 檀君朝鮮(단군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옮겨간 유민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 耑礫濆兮阿解(단력분혜아해)를 교화시켜 그들이 거하던 땅을 高虛耶(고허야)라고 하였으니 이곳은 분명 삼국사기에 나오는 高墟村(고허촌)이다. 즉, 고허촌 지방은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의 유민이 살던 곳이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에 교화된 민족이 살던 곳으로 이들 역시 또 다른 閼覆祿(알복록)이다.
규원사화에 기록된 弁(변)과 辰(진)의 원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규원사화》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임금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夷人)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과 변(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즉, 진인(辰人)은 홍수가 다스려진 후에 청구국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와 살던 사람들이고 변인(弁人)은 남쪽의 이인(夷人) 가운데에 단군옹검(壇君王儉)에 교화된 자들이다.
[8] 梁書(양서) 신라전에 “其邑在内曰啄評在外曰邑勒(그 마을이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한다)”고 하였다. 啄評(탁평)은 啄坪(탁평)으로 써야하는데 지나인들이 같은 음의 글자로 바꾸어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즉, 啄坪의 첫글자 啄은 음으로 읽고 坪은 뜻으로 읽어야 하는데, 대개 坪은 우리말의 “들” 혹은 “드르”이며 啄은 “드르”의 초성을 음차한 것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 거란고전에 啄剌(탁랄)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드르”를 음차한 것이다.
[9] 원문에는 (鬼居)로 되어 있으나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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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東大神族の西征 동쪽 신인족의 서쪽 정벌
西征頒疏曰, “神祖將征于西, 乃敎云辰阿餼 城于介盟奈敦, 敎察賀阿餼 城于晏泗奈敦, 敎悠麒阿餼 城于葛齊汭沫. 於是, 濟怒洌央太至于斐伊岣倭之岡而都焉.” 怒洌央太 西海之名也. 斐伊岣倭 西陸塞日之處也.
서정반소왈 “신조장정우서 내교운진아희 성우개먕내돈 교찰하아희 성우안사내돈 교유기아희 성우갈제예말. 어시 제노열아애지우비이구위지강이도언.” 노열앙태 서해지명야. 비이구왜서훅새일지처야.
西征頒疏(서정반소:서방 정벌을 위한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神祖(신조)가 장차 서쪽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므로 云辰阿餼(운진아희)를 가르쳐 介盟奈敦(개맹내돈)에 성을 쌓게 하였고, 察賀阿餼(찰하아희)를 시켜 晏泗奈敦(안사내돈)에 성을 쌓게 하였으며, 悠麒阿餼(유기아희)를 교화시켜 葛齊汭沫(갈제예말)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怒水(노수) 洌水(렬수) 央水(앙수) 太水(태수)를 를 건너 비이산 꼭대기(斐伊岣)를 둘러싼 언덕(倭岡)에 도읍하게 하였다.” 怒洌央太(노렬앙태)는 서쪽 강들(海)의 이름이고 斐伊岣倭(비이구위: 둘러싼 비이산)는 서쪽에서 보면 해가 뜨는 장소이다.[1]
제17장. 日孫の支那古五原開拓 환웅무리들이 지나에 5원을 개척하다.
秘府錄曰, 神祖拓地于幹[2]浸遏, 區爲五原. 伯屹紳濃和氣治於馬姑岣焉, 是爲西原也. 泱太辰戞和氣治於羊姑岣焉, 是爲東原也. 納兢禺俊戶栂治於尹樂淇焉, 是爲中原也. 湮噉太墜和氣治於柵房熹焉, 是爲北原也. 沄冉瀰墜和氣治於柟崤藐焉, 是爲南原也. 于是, 御旦賅安閔調波那阿沄 敎矩乃古諸 勿有畿覲怙曾矣.
비부록왈 신조척지우관침알 구위오원. 백흘신농화기치어마고구언 시위서원야. 앙태진알화기치어양고구언 시위동원야. 납긍우준호모치어윤악기언 시위중원야. 인담태추화기치어책방희언 시위북원야. 운염미루화기치어남효묘언 시위남원야. 우시 어단해안민조파나아운 교구내길고제 물유기근호증의.
秘府錄(비부록)에서는 이르길 “神祖(신조)께서 직접(幹) 차츰(浸) 알(遏)까지 개척하여 5개의 原(원)으로 구획하였다. 伯屹紳濃(백흘신농: 제일 맏이인 신농) 和氣(화기:직책)는 마고산(馬姑岣)를 다스렸는데 이곳이 西原(서원)이다. 泱太辰戞(앙태진알) 和氣(화기)는 양고산 (羊姑岣)를 다스렸는데 이곳이 東原(동원)이다. 納兢禺俊(납긍우준) 戶栂(호모)[3]는 尹樂淇(윤악기;淇水)에서 다스렸는데 이곳이 中原(중원)이다. 湮噉太墜(인담태추) 和氣(화기)는 柵房熹(책방희)에서 다스렸는데 이곳이 北原(북원)이다. 沄冉瀰墜(운염미추) 和氣(화기)는 柟崤藐(남효묘)에서 다스렸는데 이곳이 南原(남원)이다. 이때에 신조께서 친히 어느 정도(旦賅) 언정되도록 조율(安閔調波那阿沄)하고 옛 규율들을 가르쳐(敎矩乃古諸) 서로 경계를 넘보지 않게(勿有畿覲怙曾矣) 하셨다.
제18장. 五原以前の支那原住種族 5원으로 구분하기 전 지나의 종족들
初, 五原有先住之種. 沒皮龍革牧於北原, 魚目姑腹穴於西原, 熊耳黃眉棲於中原, 苗羅孟馮田於南原, 菟首狼裾舟於海原. 咸, 善服順, 但 南原 箔箘籍 兇狠不格 神祖伐放之海. 疏曰 “箔箘籍三邦之名, 鳥人楛盟舒之族也. 後歷海踏灘波, 據蔚都, 猾巨鍾, 遂入辰藩者其遺孽云.”
초 오원유선주지종. 몰피용혁목어북원 어목고복혈어서원 웅이황미서어중원 묘라맹풍전어남원 토수랑거주어해원, 함 선복순 단 남원 박균적 흉랑불격 신조벌방지해. 소왈 “박균적삼방지명 조인고맹사지족야. 후역해답란파 거울도 활거종 수입진번자기유얼운.”
처음에 五原(오원)에는 먼저 살던 종족들이 있었다. 沒皮(몰피)와 龍革(룡혁)은 北原(북원)에서 목축을 하였고, 魚目(어목)과 姑腹(고복)은 西原(서원)에서 굴속생활을 하였고, 熊耳(웅이)와 黃眉(황미)는 中原(중원)에서 편히 살았으며, 苗羅(묘라)와 孟馮(맹풍)은 南原(남원)에서 밭을 갈며 살았는데, 菟首(도수)와 狼裾(랑거)는 海原(해원)에서 배를 타고 살았다. 모두 복종을 잘하고 순했는데 단지 南原(남원)은 箔(박)과 箘(균)과 籍(적)이 흉하고 사나워서 격식이 없었다. 神祖(신조)가 정벌하여 海(해)로 추방하였다. 疏(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箔(박)과 箘(균)과 籍(적)은 세 나라의 이름인데 뭇사람(鳥人) 저열한 삶을 사는(楛盟舒) 종족이다. 후에 물가 수풀(蔚都)에 의지하여 해적질(猾巨鍾)을 자주하였다. 나중에 辰(진)과 藩(번)[4]으로 들어간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불효자(孽)들이라고 말하여진다.”
제19장. 日孫高天原に歸る 일손(神人)들이 고천원으로 돌아가다.
神祖親臨八百八十載. 登珍芳漾匾 墜球淄蓋麰之峰, 祝曰, 辰沄龢提秩宸檀珂枳膠牟頡銍岬袁高密德溶晏髭戞賁莎戞. 終詣日祖之處, 永止非文紀旦賅墜阿旻潑例矣. 後經十有六連, 有璫兢尼赫琿, 承嗣大統 祖風重興 河洛復盛焉. 疏曰, 宸檀珂枳猶言稻華神洲也, 戞日也, 餘義今不可攷.
신조친임팔백팔십재. 등진방양편 추구치개모지봉 축왈 “진운화제질신단가지교모힐질갑원고밀덕용안자알분사알. 종기일조지처. 영지비문기단해추아민발열의. 경유십유련 유당긍니력론 승사대통조풍중흥 하락복성언. 소왈 진단아지유언도화신주야. 알일야 여의금불가고.
神祖(신조)는 친히 880년간 다스렸다. 珍芳漾匾墜球淄蓋麰(진방양편추구치개모)의 봉우리에 올라 축원하여 말하였다. “辰沄龢提秩宸檀珂枳膠牟頡銍岬袁高密德溶晏髭戞賁莎戞(번역불가).”라 하고 日祖(일조)가 사는 곳으로 나아가 非文紀旦賅墜阿旻潑例(비문기단해추아민발례)에서 영원히 살았다. 후에 16 連(련)이 경과하여 璫兢尼赫琿(당긍니혁혼)이 있었는데 대통을 이어 神祖(신조)의 풍습을 중흥시켰고 神祖의 백성「河洛」들이 다시 번성하였다. 疏(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宸檀珂枳(신단가지)라는 것은 稻華神洲(도화신주)를 높이어 일컫는 말이다. 戞(알)이란 하늘의 해를 일컫는 말이다. 나머지 뜻은 지금 상고할 수 없다.”
제20장. 夷の族稱及び由來 이라는 부족명의 유래
神統志曰, 神統逖, 諸莫不恢處, 取義乎, 阿祺毗以爲族稱者, 曰阿靳, 曰泱委, 曰淮委, 曰潢耳, 曰潘耶也. 取諸暘靈, 毗者, 姚也 陶也 句黎也. 陶有皡陶唐三皐洛. 黎有八養洛矣. 取諸寧 祺毗者, 和義也 姒嬀也 猶鬼也. 取諸太祺毗者 嶽也. 則號五族渾瀰爲句婁. 初有四嶽後爲九伯, 蓋其音相同也. 姜濮高畎諸委屬焉. 以上通稱諸夷因神之伊尼[5]也. 廟㫋爲汶率.
신통지왈 신통적 제막불회처 취의호 아기비이위족칭자 왈아근 왈앙위 왈회위 왕황이 왕번야야. 취제양령 비자 요야 도야 구리야. 도유호도당삼고락. 구려유팔양락의. 취제녕 기비자 화의야 사규야 유귀야. 취제태기비자 악야. 즉호오족혼미위구루. 초유사악후위구백 개기음상동야. 강복고견제위속언. 이상통칭제이인신지이니야. 묘전위문솔.
神統志(신통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神統(신통)은 高遠(고원)하여 모두 광범위하게 처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나니 이 뜻을 취하면 阿(아)의 祺毗(기비)라고 하는데, 이를 사용하여 종족의 명칭을 삼은 것은 阿靳(아근)과 泱委(앙위)와 淮委(회위)와 潢耳(황이)와 潘耶(반야)이다. 神(신)의 밝고「暘」 영묘함「靈」의 毗(비)의 뜻을 취하여 종족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姚(요)와 陶(도)와 句黎(구려)이다. 陶(도)에는 皡陶(호도)[6]와 唐三(당삼)과 皐洛(고락)[7]이 있다. 句黎(구려)에는 8의 養洛(양락)이 있다. 神(신)의 편안함「寧」의 祺毗(기비)의 뜻을 취하여 종족의 명칭으로 삼은 것에는 和義(화의)와 姒嬀(사규)와 猶鬼(유귀)가 있다. 神(신)의 끝없음「太」의 祺毗(기비)의 뜻을 취하여 종족의 명칭으로 삼은 것에는 嶽(악)이 있다. 곧 五族(오족)의 渾瀰(혼미)함을 일컬어 句婁(구루)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四嶽(사악)이라고 하였다가 뒤에는 九伯(구백)이 되었는데, 대개 그 음이 서로 같다. 姜(강)과 濮(복)과 高(고)와 畎(견)등의 여러 委(위)들이 속하였다. 이상에서 통칭하는 모든 夷(이)들은 神(신)의 伊尼(이니)[8]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廟(묘)의 깃발「㫋」를 汶率(문솔)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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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怒洌央太를 각각 4개의 물길로 보았고 斐伊岣倭之岡을 斐伊岣(비이구)에 있는 倭岡(왜강)으로 해석하였다.
[2] 濱名寬祐는 契丹古傳詳解에서 幹(간)은 斡(알)의 오자라고 하였지만 그대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곳이 韓(한)의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韓(한)은 한반도에 국한된 고대국가가 아니라 원래 지나족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
《詩經集傳》 卷七
溥彼韓城, 燕師所完, 以先祖受命, 因時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널따란 저 韓(한)의 성은 燕(연)의 師(사)가 완성한 것이다. 선조의 명을 받아 지금 百蠻(백만)들이 따른다. 왕은 韓(한)의 侯(후)에게 그 追(추, 곧 濊를 말한다)와 그 貊(맥)을 주었고 북쪽 나라를 받아 어루만지었으니 그들의 우두머리「伯」가 되었다.
시경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인데 내용은 ‘燕國(연국)이 쌓아놓았던 큰 성을 韓(한)이 빼앗고 濊(예)와 貊(맥)을 다스려 북쪽은 모든 蠻夷(만이)들을 다스렸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韓(한)은 어디에 위치하였는가?
《潛夫論》卷九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其後韓西亦姓韓為衛滿所伐遷居海
옛날에 周國(주국) 宣王(선왕)때에 또한 韓侯(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이다. 燕國(연국)과 가까웠으므로 시경에 ‘普彼韓城燕師所完’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또한 韓(한)의 서쪽에도 성이 한씨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海(해)로 옮겨가 살았다.
여기서는 其國也는 姬(희)씨를 말하고 있지만 틀린 것이다. 자세한 것은 라동현 선생이 지은 ‘중국북방 이족과 조선상고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水經注》卷十二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世謂之寒號城
王肅(왕숙)은 “지금의 涿郡(탁군) 方城縣(방성현)에 韓侯城(한후성)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寒號城(한호성)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韓(한)은 탁군 방성현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대개 지금의 중국 북경 남쪽 固安(고안) 근방이다.
《欽定日下舊聞考》卷一百二十四
韓在燕北貊為韓之北國韓既歸于燕韓從而東徙漢初謂之三韓(燕史)
韓(한)은 燕(연)의 북쪽에 있고 貊(맥)은 韓(한)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韓(한)이 이미 燕(연)에게 귀속되었으므로 韓(한)의 무리(從를 徒로 번역하였다)들은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漢(한)의 초기에는 이들을 三韓(삼한)이라 하였다. 燕史(연사)에서 인용하였다.
즉,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三韓(삼한)이 있기 전에 이미 燕國(연국)의 북쪽 즉 탁군 방성현에 韓(한)이 있었다. 이들은 貊(맥)과 濊(예)와 蠻夷(만이)등을 다스렸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幹(간)은 斡(알)이 아니라 韓(한)의 전음이며 尙書(상서)에서는 馯(간)이라고도 하였다.
[3] 즉 앞서 나온 扈枚(호매)와 같은 것이다.
[4] 즉, 마한의 속국이었던 辰韓(진한)과 弁辰(변진)을 말한다. 그렇다면 箔(박)과 箘(균)과 籍(적)은 각각 朴(박)씨와 金(김)씨와 昔(석)씨를 말하는가?
[5] 혹 ?를 잘못쓴 것이 아닌가 한다. ?는 夷의 옛글자이다.
[6] 보통 臯陶(고도)로 쓴다.
[7] 皐洛(고락)은 赤狄(적적)에 속한다.
《春秋左傳注疏》卷十
晉侯使大子申生伐東山臯落氏注赤狄别種也臯落其氏族
晉侯(진후)가 아들 申生(신생)을 시켜 東山(동산) 臯落(고락)씨를 정벌케 하였다. 주석: 赤狄(적적)의 별종이다. 臯落(고락)은 赤狄(적적)의 氏族(씨족)이다
[8] 혹 ?(尸+二)를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한다. ?(尸+二)는 夷의 옛글자이다. 그러나 伊尼가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