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 一
新羅疆界 古傳記不同. 杜佑通典云 “其先本辰韓種 其國在百濟高麗二國東南 東濱大海.” 劉昫唐書云 “東南俱限大海.” 宋祁新書云 “東南日本 西百濟 北高麗 南濱海.” 賈耽四夷述曰 “辰韓在馬韓東 東抵海 北與濊接.” 新羅崔致遠曰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신라강계 고전기부동. 두우통전운 “기선본진한종 기국재백제고려이국동남 동빈대해.” 유구당서운 “동남구한대해.” 송기신서운 “동남일본 서백제 북고려 남빈해.” 가탐사이술왈 “진한재마한동 동저해 북여예접.” 신라최치원왈 “마한즉고려 변한즉백제 진한즉신라야.”
신라가 다스렸던 땅에 대하여 옛날부터 전해온 기록들이 한결같지 않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그 선조는 원래 진한(辰韓)의 종족인데, 그 나라가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아 있다.”고 하였다. 유구(劉昫)의 당서(唐書)에 “신라의 동남쪽이 모두 큰 바다에 닿아 있다.”고 하였다. 송기(宋祁)의 『신서(新書)』에서는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고 하였으며, 가탐(賈耽)의 『사이술(四夷述)』에서는 “진한은 마한(馬韓) 동쪽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북쪽은 예(濊)와 인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卞韓)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다.
* 여기서 바다란 발해????? 일본은 국호가 아니고 일출하는 곳이란 정도....
당시 일본이란 국호는 없었으니....
此諸說 可謂近似焉 若新舊唐書皆云 “卞韓苗裔在樂浪之地.” 新書又云 “東距長人 長人者 人長三丈 鋸牙鉤爪 搏人以食 新羅常屯弩士數千 守之.” 此皆傳聞懸說 非實錄也. 按兩漢志 “樂浪郡距洛陽東北五千里.” 注曰 “屬幽州 故朝鮮國也.” 則似與雞林地分隔絶 又相傳 東海絶島上有大人國 而人無見者 豈有弩士守之者.
차제설 가위근사언 약신구당서개운 변한묘예재낙랑지지 신서우운 동거장인 장인자 인장삼척 거아구과 박인이식 신라상둔노사수천 수지. 차개잔문현설 비실록야. 안양한지 낙랑군거낙양동북오천리 주왈 속유주 고조선국야 즉사여계림지분격절 우상전 동해절도상유인국 이인무견자 이유노하수지자.
이와 같이 여러 설이 모두 비슷하다. 신ㆍ구당서(新舊唐書)에 모두 “변한의 후예들이 낙랑(樂浪) 지방에 있었다.”고 하였으며, 신당서에도 “동쪽으로 장인(長人)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인이라는 것은 키가 세 길이며, 톱날 이빨과 갈구리 손톱으로 사람을 잡아 먹으므로 신라에서는 항상 활 쏘는 군사 수천 명을 주둔시켜 수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전해지는 소문이지 실제적인 기록은 아니다.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에는 “낙랑군은 낙양(洛陽) 동북쪽으로 5천 리에 있다.”고 하였고, 이 부분의 주(注)에 “유주(幽州)에 속하였으니, 옛 조선국(朝鮮國)이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낙랑군은 계림(雞林)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전래되는 말로는 동해의 외딴 섬에 대인국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본 사람이 없으니, 어찌 활 쏘는 군사를 두어 수비하게 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 여기서 幽州는 현 북경지역이고... 낙랑은 낙양에서 5000리라는 기록과도 맞아 떨어진다.
今按新羅始祖赫居世 前漢五鳳元年甲子開國 王都長三千七十五步 廣三千一十八步 三十五里 六部.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雞怪 更名雞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 復號新羅.
금안신라시조혁거세 전한오봉원년감자개국 왕종장삼천칠십오보 광삼천이십팔보 삼십오리 육부. 국호왈서야벌 혹운사라 혹운사로 혹운 신라 탈해왕구년 시림유계괴 경명계림. 인이위국호 기림왕십년 복호신라.
이제 살펴보면,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전한(前漢)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나라를 세웠는데, 왕도는 길이가 3천75보, 넓이는 3천18보이며, 35리 6부로 되어 있었다. 국호(國號)는 서야벌(徐耶伐)이라 하였는데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탈해왕(脫解王) 9년(서기 65)에 시림(始林)에서 닭소리가 들리는 괴이한 일이 있어 계림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로 인하여 이것으로 국호를 삼았다가 기림왕(基臨王) 10년(서기 307)에 다시 신라로 불렀다.
初赫居世二十一年 築宮城 號金城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 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十八步. 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又新月城南有南山城 周二千八百四步. 始祖已來處金城 至後世多處兩月城. 始與高句麗百濟 地錯犬牙 或相和親 或相寇鈔 後與大唐侵滅二邦 平其土地 遂置九州.
초혁거새이십일년 축궁성 호금성 파사왕이십이년 어금성동남 축성 호월성 혹호재성 주일천이십삼보. 신월성북유만월성 주일천팔백삼십팔보. 우신월성동유명활성 주일천구백육보. 우신월성남유남산성 주이천팔백사보. 시조이래처금성 지후세다처양월성. 시여고구려백제 지착견아혹상화친 혹상상구초 후여대당침멸이방 평기토지 수치구주.
처음 혁거세 21년(기원전 39)에 궁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며, 파사왕(婆娑王) 22년(서기 10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그 둘레가 1천23보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8백38보였다.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9백6보였다.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8백4보였다. 시조 이래로 사람들은 금성에 살았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두 월성에서 많이 살았다. 처음에는 고구려 백제와는 국경이 들쑥날쑥 엇갈려 때로는 서로 화친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로 침략을 하다가, 후일 당나라와 함께 두 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평정한 다음 마침내 9주를 설치하였다.
* 여기서 소위 성의 둘레에 대한 步수가 나오는데.... 현대인의 보폭을 약 1미터로 보면 크기가 대략 나오는데....
本國界內 置三州 王城東北 當唐恩浦路曰尙州 王城南曰良州 西曰康州 於故百濟國界 置三州 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 次西南曰全州 次南曰武州 於故高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九州所管郡縣 無慮四百五十[方言所謂鄕部曲等 雜所不復具錄] 新羅地理之廣袤 斯爲極矣 及其衰也 政荒民散 疆土日蹙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
본국계내 치삼주 왕성동북 당당은포로왈상주 왕성남왈양주 서왈강주 어고백제국계 치삼주 백제고성북웅진구왈웅주 차서남왈전주 차남왈무주 어고구려남계 치삼주 종서제일왈한주 차동왈삭주 우차동왈명주 구주소관군현 무려사백오십[방언소위향부곡증 잡소불복구록] 신라지리지광무 사이극의 급기쇠야 정황민산 강토일축 말왕김부 이국쉬아태조 이기국위경주.
본래의 신라 땅에 3주를 설치하였다. 왕성 동북쪽의 당은포(唐恩浦)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옛 백제의 땅에 3주를 설치하였다. 백제의 옛 성 북쪽 웅진 어구를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 옛 고구려 남쪽 지역에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으로부터 첫째를 한주(漢州),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9주에서 관할하던 군, 현은 무려 4백50개 소였다.[방언으로 말하던 향(鄕)ㆍ부(部)ㆍ곡(曲) 등 잡다한 것은 여기에 모두 적지 않는다.] 신라 지역의 넓이와 길이가 이때 가장 컸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정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백성들이 흩어지니 영토가 날로 줄었다. 마지막 왕 김부(金傅)가 나라를 바쳐 우리 태조에게 의지해오므로 그 나라를 경주(慶州)로 삼았다.
* 여기서 소위 9주를 경주로 삼았다? 한강 이하 9주를 일개 경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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