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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世家-梁孝王 世家



(梁孝王 劉武)


 

<양 효왕의 평생과 경제와의 갈등>

 

梁孝王武者, 孝文皇帝子也, 而與孝景帝同母. , 竇太后也.

양효왕무자 효문황제자야 이여효경제동모. 모 두태후야.

 

()나라 효왕(孝王) 유무(劉武)는 효문제의 아들이고 효경제와 같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두() 태후이다.

 

孝文帝凡四男長子曰太子, 是為孝景帝次子武次子參次子勝.

효문제범사남 장자왈 태자 시위효경제 차자무 차자참 차자승.

 

효문제에게는 모두 네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이 태자로 이가 효경제이고, 둘째아들은 유무(劉武), 셋째아들이 유참(劉參), 넷째아들 유승(劉勝)이었다.

 

孝文帝即位二年, 以武為代王, 以參為太原王, 以勝為梁王.

효문제즉위이년 이무위대왕 이참위태원왕 이승위양왕.

효문제 즉위 2년에 유무를 대왕(代王), 유참을 태원왕(太原王), 유승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二歳, 徙代王為淮陽王. 以代尽與太原王, 号曰代王. 參立十七年, 孝文後二年卒, 謚為孝王. 子登嗣立, 是為代共王. 立二十九年, 元光二年卒. 子義立, 是為代王. 十九年, 漢広関, 以常山為限, 而徙代王王清河. 清河王徙以元鼎三年也.

이세 사대왕위회양왕. 이대진여태원왕 호왈대왕. 참립십칠년 효문후이년졸 시위효왕. 자등사립 시위대공왕. 립이십구년 원광이년졸. 자의립 시위대왕. 십구년 한광관 이상산위한 이사대왕왕청하. 청하왕사이원정삼년야.

 

2년 뒤에 대왕을 회양왕(淮陽王)으로 옮기고 대() 땅을 모두 태원왕에게 주어 대왕(代王)으로 불렀다. 유참은 즉위 17년인 효문제 후원 2년에 죽으니, 시호를 효왕(孝王)이라 했다. 아들 유등(劉登)이 뒤를 이으니 이가 대공왕(代共王)이다. 즉위 29년인 원광 2년에 죽고, 아들 유의(劉義)가 즉위하니, 이가 대왕(代王)이다.(재위) 19년 한나라가 함곡관을 확대하여 상산(常山)을 경계로 삼으면서 대왕을 청하(淸河)로 옮겨 왕으로 삼았다. 청하왕(淸河王)은 원정(元鼎) 3년에 옮겨졌다.

 

, 武為淮陽王十年, 而梁王勝卒, 謚為梁懐王. 懐王最少子, 愛幸異於他子. 其明年, 徙淮陽王武為梁王. 梁王之初王梁, 孝文帝之十二年也. 梁王自初王通歴已十一年矣.

초 무위뢰양왕십년 이양왕승졸 시위양회왕. 회왕최소자 애행이어타자. 기명년 사회양왕무위양왕. 양왕지초왕양 효문제지십이년야. 양왕자초왕통력이십일년의.

 

당초 유무가 회양왕이 된 지 10년에 양왕 유승이 죽었고 시호는 양회왕(梁懷王)이었다. 회왕은 (효문제의) 막내아들로서 다른 아들에 비해 더 사랑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 회양왕 유무는 양왕으로 옮겨졌다. 양왕이 처음 양의 왕이 되니 효문제 12년이었다. 양왕이 처음 왕이 된 지 모두 11년이 지난 뒤였다.

 

梁王十四年, 入朝. 十七年, 十八年, 比年入朝, , 其明年, 乃之国. 二十一年, 入朝. 二十二年, 孝文帝崩. 二十四年, 入朝. 二十五年, 复入朝. 是時上未置太子也. 上與梁王燕飲, 嘗従容言曰:「千秋萬歳後傳於王.王辞謝. 雖知非至言, 然心内喜. 太后亦然.

양왕십사년 입조. 십칠년 십팔년 비년입조 류 기명년 내자국. 이십일년 입조 이십이년 효문제붕. 이십사년 입조. 이십오년 복입조. 시시상미치태자야. 상여양왕연음 상종용언왈 천추만세후전어왕왕사사. 수지비지언 연심내희. 태후역연.

 

양왕 14년에 입조했다. 17, 18년에도 잇따라 입조하고 머물다가 그 다음 해에 봉국으로 돌아갔다. 21년에 입조했다. 22년에 효문제가 세상을 떠났다. 24년에 입조했다. 25년에 다시 입조했을 때까지 주상이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주상이 양왕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아무 생각 없이 천추만세 후에는(내가 죽으면) 왕에게 (보좌를) 물려주겠다.’라고 했다. 왕이 사양했다. 진정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속으로는 기뻤고, 태후 또한 그랬다.

 

其春, 呉楚斉趙七国反. 呉楚先撃梁棘壁, 殺數萬人. 梁孝王城守睢陽, 而使韓安国張羽等為大将軍, 以距呉楚. 呉楚以梁為限, 不敢過而西, 與太尉亜夫等相距三月. 呉楚破, 而梁所破殺虜略與漢中分.

기춘 오초제조칠국반. 오초선격양극벽 살수만인. 양효왕성수수양 이사한안국 장우등위대장군 이거오초. 오초이양위한 불감과이서 여태위아부등상거삼월. 오초파 이양소파살노략여한중분.

이해 봄에 오(), (), (), ()나라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먼저 양()나라의 극벽(棘壁)을 공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양 효왕은 수양(睢陽)의 성을 지키면서 한안국(韓安國)과 장우(張羽) 등을 대장군으로 삼아 오나라와 초나라를 막았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양나라에 막혀 서쪽으로 넘어 오지 못하고 태위 주아부(周亞夫)와 서로 3개월을 대치했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무너졌고, 양나라가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한나라와 비슷했다.(한나라 군과 전적이 비슷했다.)


 

 

明年, 漢立太子. 其後梁最親, 有功, 又為大国, 居天下膏腴地. 地北界泰山, 西至高陽, 四十余城, 皆多大県.

명년 한립태자. 기후양최친 유공 우위대국 거천하고유지. 지북계태산 서지고양 사십여상 개다대현.

 

이듬해 한나라는 태자를 세웠다. 이 무렵 양나라는 (한나라 조정과) 가장 친밀했고 공도 있고 나라도 컸으며 천하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땅은 북으로 태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고양(高陽)에 이르렀는데, 40개 넘는 성은 모두 큰 현이었다.

 

 

孝王, 竇太后少子也, 愛之, 賞賜不可勝道. 於是孝王築東苑, 方三百余里. 広睢陽城七十里. 大治宮室, 為複道, 自宮連属於平台三十余里. 得賜天子旌旗, 出従千乗萬騎. 東西馳猟, 擬於天子. 出言期, 入言警. 招延四方豪桀, 自山以東游説之士. 莫不畢至, 斉人羊勝公孫詭鄒陽之属.

효왕 두태후소자애 애지 상사불가승도. 어시효왕축동원 방삼백여리. 광수양성칠십히. 대치궁실 위복도 자궁연속어평대삽십여리. 득사천자정기 출종천승만기. 동서치렵 의어천자. 불언기 입언경. 초정사방호걸 자산이동유세지사. 막불필지 제인양승 공손궤 추양지속.

 

효왕은 두 태후의 작은아들로 사랑을 받았고, 하사 받은 상은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효왕은 동원(東苑)을 지었는데 둘레가 300리가 넘었다. 수양성(睢陽城)70리로 넓혔다. 궁전을 크게 지어 복도로 연결했는데 궁에서 평대(平臺)까지 30리 넘게 이어져 있었다. 천자가 하사한 깃발을 앞세우고 나서면 수많은 수레와 말이 그 뒤를 따랐다. 동서로 치달으며 사냥에 나서면 천자를 방불케 했다. 나가고 들어올 때는 길을 치우게 하는 등 그 경비가 삼엄했다. 사방의 호걸들을 불러 모으니 산동의 유세객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제나라 사람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 등이었다.

 

公孫詭多奇邪計, 初見王, 賜千金, 官至中尉, 梁号之曰公孫将軍, 梁多作兵器弩弓矛數十萬, 而府庫金銭且百巨萬, 珠玉宝器多於京師.

공손궤다기사계 초현왕 사천금 관지중위 양호지왈공손장군 양다작병기노궁모수십만 이부고금전차백거만 주옥보기다어경사.

 

공손궤는 괴이한 계책이 많아, 왕을 처음 만나 천금을 하사받았고, 관직이 중위(中尉)에 이르니 양나라에서는 그를 공손장군으로 불렀다. 양나라는 쇠뇌, , 창 등과 같은 병기 수십만 개를 만들었고, 창고에는 1억에 이르는 금전을 쌓아 놓았으며 옥기 등 보물이 도성보다 많았다.

 

 

 

 

二十九年十月, 梁孝王入朝. 景帝使使持節乗輿駟馬, 迎梁王於関下. 既朝, 上疏因留, 以太后親故. 王入則侍景帝同輦, 出則同車游猟, 射禽獣上林中. 梁之侍中謁者著籍引出入21)天子殿門, 與漢宦官無異.

이십수년시월 양호왕입조. 경제사사지절승여사마 영양왕어관하. 기조 상소인류 이태후친고. 왕입득시경제동련 출즉동거유렵 사슴수상림중, 양지시중 랑 알자저적인출입천자전문 여한환관무이.

 

2910월에 양 효왕이 입조했다. 경제는 사신에게 부절을 가지고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함곡관 아래에서 양왕을 맞이하게 했다. 조회를 마치자 글을 올리고 (도성에) 머물렀는데 태후가 친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왕이 입궁하자 경제와 같은 수레로 모셨고, 나갈 때도 같은 수레로 사냥을 나가 상림원(上林苑)의 새와 짐승을 사냥했다. 양나라의 시중(侍中), 낭관(郎官), 알자(謁者)는 이름을 등록하여 모두 천자가 다니는 문으로 출입하니 조정 관리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十一月, 上廃栗太子, 竇太后心欲以孝王為後嗣. 大臣及袁盎等有所関説於景帝, 竇太后義格, 亦遂不复言以梁王為嗣事由此. 以事秘, 世莫知. 乃辞帰国.

십일월 상폐율태자 두태후심욕이효왕위후사. 대신급원앙등유소관설어경제 두태후의격 역수불복언이양왕위사사유차. 이사비 세막지. 내사귀국.

 

11월에 주상이 율태자(栗太子)를 폐위시켰다. 두 태후는 속으로 효왕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대신들과 원앙(袁盎) 등이 경제에게 관련된 일을 말하여 두 태후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로써 양왕을 후계자로 삼자는 말도 더 이상 없어졌다. 이 일은 비밀에 붙여져 세상은 알지 못했고, (양왕은) 인사를 올리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其夏四月, 上立膠東王為太子. 梁王怨袁盎及議臣, 乃與羊勝公孫詭之属陰使人刺殺袁盎及他議臣十余人.

기하사월 상립교동왕위태자. 양왕원원앙급의신 내여양승 공손궤지속음사인자살원앙급타의신십여인.

 

이해 여름 4월에 주상이 교동왕(膠東王)을 태자로 삼았다. 양왕은 원앙과 이 일을 거론한 신하들을 원망하여 양승, 공손궤 등에게 몰래 사람을 시켜 원왕과 그 일을 거론한 신하 10여 명을 찔러 죽이게 했다.

 

逐其賊, 未得也. 於是天子意梁王, 逐賊, 果梁使之. 乃遣使冠蓋相望於道, 覆按梁, 捕公孫詭羊勝. 公孫詭羊勝匿王後宮. 使者責二千石急, 梁相軒丘豹及内史韓安国進諫王, 王乃令勝詭皆自殺, 出之. 上由此怨望於梁王. 梁王恐, 乃使韓安国因長公主謝罪太后, 然后得釈.

수기적 미득야. 어시천자의양왕 수적 과양사지. 내견사관개상망어도 복안양 포공손궤 양승. 공손궤 양승닉후궁, 사자책이천석급 양사헌구표급내사한안국진간왕 왕내영승 궤개자살 출지. 상유차원망어양왕. 양왕구 내사한안국인장공주사죄태후 연후득석.

 

자객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했다. 이에 천자는 양왕을 의심하여 자객을 추적하니 과연 양왕이 사주한 것이었다. 이에 사신을 계속 보내 양을 조사하여 공손궤, 양승을 체포하려 했다. 공손궤와 양승은 양왕의 후궁에 숨어 있었다. 사신이 (양의) 대신들을 거세게 다그치자 양나라의 재상 헌구표(軒丘豹)와 내사(內史) 한안국(韓安國)이 양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양 왕은 양승과 공손궤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그 시신을 내주었다. 주상이 이 일로 양왕을 원망하게 되었고, 양왕은 두려운 나머지 한안국을 시켜 장공주(長公主)를 통해서 두 태후에게 사죄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上怒稍解, 因上書請朝. 既至関, 茅蘭説王, 使乗布車, 従両騎入, 匿於長公主園.

상노초해 인상서청조. 기지관 모란설왕 사승포거 종양기입 닉어장공주원.

주상의 노기가 어느 정도 풀리자 글을 올려 조회를 청했다. 함곡관에 이르자 모란(茅蘭)이 양왕에게 삼베로 치장한 수레(서민용 수레)를 타고 두 명의 기병만 데리고 장공주의 후원에 숨어 있으라고 권했다.

 

漢使使迎王, 王已入関, 車騎尽居外, 不知王処.

한사사영왕 왕이입관 거기진거외 부지왕처.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양왕을 맞이했으나 왕은 이미 함곡관을 들어왔고, 마차와 말은 모두 함곡관 밖에 있는데 왕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太后泣曰:「帝殺吾子!景帝憂恐. 於是梁王伏斧質於闕下, 謝罪, 然後太后景帝大喜, 相泣, 复如故. 悉召王従官入関. 然景帝益疏王, 不同車輦矣.

태후읍왈 제살오자경제우공. 어시양왕복부질어궐하 사죄 연후태후 경제대희 상읍 복여고. 실소왕종관입관. 연경제소왕 부동거련의.

 

두 태후가 울면서 황제가 내 아들을 죽였구나!”라고 했다. 경제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이 때 양왕이 큰도끼를 지고는 대궐 아래로 와서 사죄하니 태후와 경제가 크게 기뻐하며 서로 울면서 전처럼 (관계를) 회복했다. 양왕의 시종관들을 모두 불러 함곡관을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경제는 양왕을 점점 멀리 하여 같은 수레를 타지 않았다.

 

三十五年冬, 复朝. 上疏欲留, 上弗許. 帰国, 意忽忽不樂.

삼십오년동 복조. 상소욕류 상불허. 귀국 의홀홀불락.

 

35년 겨울에 다시 입조하여 머물기를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봉국으로 돌아갔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北猟良山, 有献牛, 足出背上, 孝王悪之.

불렵양산 유헌우 족출배상 효왕오지.

북쪽 양산으로 사냥을 나갔더니 누군가 소를 바쳤는데 발이 등 위쪽에 달려 있어 효왕이 싫어했다.

 

六月中, 病熱, 六日卒, 謚曰孝王.

유월중 병열 육일졸 시왈효왕.

 

6월 사이 열병으로 엿새 만에 죽으니 시호를 효왕이라 했다.

 

孝王慈孝, 毎聞太后病, 口不能食, 居不安寝, 常欲留長安侍太后. 太后亦愛之. 及聞梁王薨, 竇太后哭極哀, 不食, :「帝果殺吾子!景帝哀懼, 不知所為. 與長公主計之, 乃分梁為五国, 尽立孝王男五人為王, 女五人皆食湯沐邑. 於是奏之太后, 太后乃説, 為帝加壱餐.

효왕자효 매문태후병 구불능식 거불안침 상욕유장안시태후. 태후역애지. 급문양왕훙 두태후곡극애 불식 왈 제과살오자경제애구 부지소위. 여장공주계지 내분양위오국 진립효왕남오인위왕 여오인개식탕목읍. 어시진지태후 태후내열 위제가일찬.

 

효왕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태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먹지도 못하고 잠도 편히 자지 못했다. 늘 장안에 머무르면서 태후를 모시고자 했다. 태후 역시 그를 사랑하여 양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먹지 않으면서 황제가 정말 내 아들을 죽였구나!’라고 했다. 경제는 슬프고 두려웠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장공주와 상의하여 양나라를 다섯 개 나라로 나누어 효왕의 아들 다섯 전부를 왕으로 삼고 딸 다섯에게도 전부 탕목읍(湯沐邑)을 주었다. 그리고는 이를 태후에게 식사를 올리자 태후는 그제야 기뻐하고 황제에게 식사를 더 요구했다.


 

 

<양 효왕 자손들의 상황>

 

梁孝王長子買為梁王, 是為共王子明為済川王子彭離為済東王子定為山陽王子不識為済陰王.

양효왕장자매위양왕 시위공왕 자명위제천왕 자팽리위제동왕 자정위산양왕 자불식위제음왕.

 

양 효왕의 큰아들 유매(劉買)가 양왕이 되니 이가 공왕(共王)이다. 아들 유명(劉明)은 제천왕(濟川王), 아들 유팽리(劉彭離)는 제동왕(濟東王), 아들 유정(劉定)은 산양왕(山陽王), 아들 유불식(劉不識)은 제음왕(濟陰王)에 봉해졌다.

 

孝王未死時, 財以巨萬計, 不可勝數. 及死, 蔵府余黄金尚四十余萬斤, 他財物称是.

효왕미사시 재이거만계 불가승수. 급사 장부여황금상사십여만근 타재물칭시.

 

양 효왕이 죽기 전에 재산이 억만을 헤아렸지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죽고 난 다음 창고에 보관된 황금이 40만이 넘었고, 다른 재물들도 이와 비슷했다.

 

梁共王三年, 景帝崩. 共王立七年卒, 子襄立, 是為平王.

양공왕삼년 경제붕. 공왕립칠년졸 자양립 시위평공.

 

양 공왕(梁共王) 3년에 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공왕은 재위 7년 만에 죽고 아들 유양(劉襄)이 즉위하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梁平王襄十四年, 母曰陳太后. 共王母曰李太后. 李太后, 親平王之大母也. 而平王之后姓任, 曰任王后. 任王后甚有寵於平王襄.

양평왕양십사년 모왈진태후. 공왕모왈이태후. 이태후 친평왕지대모야. 이평왕지후성임 왈임왕후. 임왕후심유총어평왕양.

평왕 유양 14년에 어머니를 진() 태후로 불렀다. 공왕의 어머니는 이태후(李太后)로 불렀다. 이태후는 평왕의 친할머니이다. 평왕의 왕후는 성이 임()이라 임 왕후로 불렀다. 임왕후는 평왕 유양에게 큰 총애를 받았다.

 

, 孝王在時, 有罍樽, 直千金. 孝王誡後世, 善保罍樽, 無得以與人. 任王后聞而欲得罍樽. 平王大母李太后曰:「先王有命, 無得以罍樽與人. 他物雖百巨萬, 猶自恣也.任王后絶欲得之. 平王襄直使人開府取罍樽, 賜任王后.

초 효왕재시 유뇌준 직천슴 효왕계후세 선보뇌준 무득이여인. 임왕후문이욕득뇌준. 평왕대모이태후왈 선왕유명 무득이뇌준여인. 타물수백거만 유자자야임왕후절욕득지. 평왕양직사인개부취뇌준 사임왕후.

 

당초 효왕이 있었을 때 천금이나 나가는 뇌준(罍樽)이란 그릇이 있었다. 효왕이 후손들에게 뇌준을 잘 보존하여 남에게 주지 말라고 훈계한 적이 있었다. 임 왕후가 이 일을 알고는 뇌준이 갖고 싶었다. 이에 평왕의 할머니 이 태후는 선왕께서 명하시길 뇌준을 남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물건들은 백억이 나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했다. 임 왕후는 그것이 더 갖고 싶어졌다. 평왕 유양은 바로 사람을 시켜 창고를 열고 뇌준을 갖고 오게 해서는 임 왕후에게 주었다.

 

李太后大怒, 漢使者來, 欲自言, 平王襄及任王后遮止, 閉門, 李太后與争門, 措指, 遂不得見漢使者.

이태후대노 한사자래 욕자언 평왕양급임왕후차지 폐문 이태후여쟁문 척지 수부득현한사자.

 

이 태후가 크게 노하여 조정의 사신이 오자, 직접 이 일을 말하려 했으나 평왕 유양과 임 왕후가 이를 제지하려고 문을 잠그게 했다. 이 태후가 문을 열다가 손가락이 문에 끼었고, 끝내 조정의 사신을 만나지 못했다.

 

李太后亦私與食官長及郎中尹霸等士通亂, 而王與任王后以此使人風止李太后, 李太后内有淫行, 亦已. 後病薨. 病時, 任后未嘗請病, 又不持喪.

이태후역사여식관장급낭중윤패등사통란 이왕여임왕후이차사인풍지이태후 이태후내유음행 역이 후병훙. 병시 임후미상청병 훙 우부지상.

 

이 태후가 식관장(食官長), 낭중(郎中) 윤패(尹霸) 등과 간통한 적이 있었다. 이에 왕과 임 왕후는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시켜 넌지시 이 태후를 제지했다. 이 태후는 자신의 음란 행위도 있고 해서 그만 두었다. 그 뒤 병으로 죽었는데, 병이 났을 때 임 왕후는 문병도 가지 않았고, 죽은 뒤 상례도 갖추지 않았다.


 

元朔中, 睢陽人類犴反者, 人有辱其父, 而與淮陽太守客出同車. 太守客出下車, 類犴反殺其仇於車上而去. 淮陽太守怒, 以譲梁二千石. 二千石以下求反甚急, 執反親戚.

원삭중 수양인류안반자 인유욕기부 이여회양태수객출동거. 태수객출하거 유안반살기구어거상이거. 회양탸수노 이양양이천석. 이천석이하구반심급 집반친척.

 

(무제) 원삭 연간에 수양(睢陽) 사람으로 유안반(類犴反)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아버지에게 모욕을 준 자가 회양 태수의 손님과 같은 수레를 타고 외출했는데 손님이 수레에게 내리자 유안반은 그 원수를 수레 위에서 죽이고는 도망쳤다. 회양 태수는 노하여 양나라의 2천석 급 관리를 나무랐다. 그 관리는 유안반을 서둘러 수배하는 한편 유안반의 친척을 잡아들이게 했다.

 

反知国陰事, 乃上変事, 具告知王與大母争樽状. 時丞相以下見知之, 欲以傷梁長吏, 其書聞天子. 天子下吏験問, 有之. 公卿請廃襄為庶人.

반지국음사 내상변사 구고지왕여대모쟁준상. 시승상이하견지지 욕이상양장리 기서문천자. 천자하리험문 유지. 공경청폐양위서인.

 

유안반이 양나라의 뒷얘기를 알아 주상에게 알렸는데, 왕과 그 할머니가 뇌준을 놓고 다툰 것을 보고했다. 당시 (양나라의) 승상 이하 관리들도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로써 양나라의 고위 관리들에게 해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 문서가 천자에게 알려졌고 천자는 관리들에게 넘겨 조사하게 하니 그런 일이 있었다. 공경들이 평왕 유양을 서인으로 폐출시키라고 청했다.

 

天子曰:「李太后有淫行, 而梁王襄無良師傅, 故陥不義.乃削梁八城, 梟任王后首于市. 梁余尚有十城. 襄立三十九年卒, 謚為平王. 子無傷立為梁王也.

천자왈 이태후유음행 이양왕양무양사부 고함불의내삭양팔성 효임왕후수우시. 영여상유십성. 양립삼십구년졸 시위평왕. 자무상립위양왕야.

 

천자는 이 태후는 음란한 짓을 저질렀고, 양왕 유양은 좋은 스승이 없어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진 것이다.’라 하고는 양나라의 성 여덟 개를 없애고 임 왕후의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내걸게 했다. 양나라에는 아직 열 개의 성이 남아 있었다. 유양은 즉위 39년 만에 죽었고 시호를 평왕이라 했다. 아들 유무상(劉無傷)을 양왕으로 세웠다.

 

済川王明者, 梁孝王子, 以桓邑侯孝景中六年為済川王. 七歳, 坐射殺其中尉, 漢有司請誅, 天子弗忍誅, 廃明為庶人. 遷房陵, 地入于漢為郡.

제천왕명자 양효왕자 이환읍후효경중육년위제천왕. 칠세 좌사살기중위 한유사청주 천자불인주 폐명위서인. 천방릉 지입우한위군.

 

제천왕(濟川王) 유명(劉明)은 양 효왕의 아들인데, 환읍후(桓邑侯)로서 효경제 중원 6년에 제천왕이 되었다. 7년에 중위를 사살하여 조정의 담당관이 (제천왕을) 죽이길 청했다. 천자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유명을 서인으로 폐출시켜 방릉(房陵)으로 옮겼다. 그 땅은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시켰다.

 

済東王彭離者, 梁孝王子, 以孝景中六年為済東王. 二十九年, 彭離驕悍, 無人君礼, 昏暮私與其奴亡命少年數十人行剽殺人, 取財物以為好. 所殺発覚者百余人, 国皆知之, 莫敢夜行. 所殺者子上書言. 漢有司請誅, 上不忍, 廃以為庶人, 遷上庸, 地入于漢, 為大河郡.

제동왕팽이랒 양효왕자 이효경중육년위제동왕. 이십구년 팽리교한 무인군례 혼모사여기노 망명소년수십인행표살인 취재물이위호. 소살발각자백여인 국개지지 막감야행. 소살자자상서언. 한유사청주 상불인 폐이위서인 천상용 지입우한 위대하군.

 

제동왕(濟東王) 유팽리(劉彭離)는 양 효왕의 아들로 효경제 중원 6년에 제동왕이 되었다. 29년에 교만하고 포악한 유팽리는 군주의 예를 무시하고 저녁 무렵 몰래 그 노복, 떠돌이 소년 수십 명과 함께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짓을 즐겼다. 죽임을 당한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알고는 밤에 감히 나다니질 못했다. 피살자의 아들이 글을 올려 이를 알렸다. 조정의 담당관이 죽이길 청했으나 주상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서인으로 폐출시켜 상용(上庸)으로 옮겼다. 그 땅은 조정에 편입시켜 대하군(大河郡)으로 삼았다.

 

山陽哀王定者, 梁孝王子, 以孝景中六年為山陽王. 九年卒, 無子, 国除, 地入于漢, 為山陽郡.

산양애왕정자 양효왕자 이효경중육년위산양왕. 구년졸 무자 국제 지입우한 위산양군.

 

산양(山陽)의 애왕(哀王) 유정(劉定)은 양 효왕의 아들로 효경제 중원 6년에 산양왕(山陽王)이 되었다. 재위 9년에 죽었다. 아들이 없어 봉국은 해제되고 땅은 조정에 편입시켜 산양군(山陽郡)으로 만들었다.

 

済陰哀王不識者, 梁孝王子, 以孝景中六年為済陰王. 一歳卒, 無子, 国除, 地入于漢, 為済陰郡.

제읍애왕불식자 양효왕자 이효경중육년위제음왕. 일세졸 무자 국제 지입우한 위제음군.

 

제음(濟陰)의 애왕(哀王) 유불식(劉不識)은 양 효왕의 아들로 효경제 중원 6년에 제음왕(濟陰王)이 되었다. 1년 만에 죽었다. 아들이 없어 봉국은 해제되었고 땅은 조정에 편입되어 제음군(濟陰郡)으로 만들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梁孝王雖以親愛之故, 王膏腴之地, 然会漢家隆盛, 百姓殷富, 故能植其財貨, 広宮室, 車服擬於天子. 然亦僭矣.

태사공왈 양효왕수이친애지고 왕고유지지 연회한가융성 백성은부 고능식기재화 광궁실 커복의어천자. 연역참의.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양 효왕이 총애를 받으면서 기름진 땅에서 왕 노릇을 했지만 한나라 조정이 융성하고 백성은 부유했기 때문에 재물을 모으고 궁실을 늘려 천자에 버금가는 수레를 타고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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