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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世家- 孔子世家

 


孔子生魯昌平郷陬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祷於尼丘得孔子.

공자생노창형향추읍. 기선송인야 왈공방숙 방숙생백하 백하생숙량흘. 흘여간씨녀야합이생공자 도어니구득공자.


공자(孔子)는 노()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라 했다. 방숙이 백하(伯夏),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은 안씨(顔氏)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니구(尼丘)에서 기도를 드리고 공자를 얻었다.

 

魯襄公二十二年而孔子生. 生而首上圩頂, 故因名曰丘云. 字仲尼, 姓孔氏.

노양공이십이년이공자생. 생이수상우정 고인명왈구운. 자중니 성공씨.

 

노 양공(襄公) 22(기원전 551)에 공자가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머리 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꺼져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라 했다고 한다. 자는 중니(仲尼), 성은 공씨(孔氏)이다.

 

丘生而叔梁紇死, 葬於防山. 防山在魯東, 由是孔子疑其父墓処, 母諱之也.

구생이숙량흘사 장어방산. 방산재노동 유시공자의시부묘처 모위지야.

구가 태어나고 얼마 뒤 숙양흘이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었다. 방산은 노나라의 동쪽에 있었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딘지 몰랐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孔子為児嬉戯, 常陳俎豆, 設礼容. 孔子母死, 乃殯五父之衢, 蓋其慎也. 郰人輓父之母誨孔子父墓, 然後往合葬於防焉.

공자위아희희 상진조두 설예용, 공자모사 내빈오보지구 개기신야. 추인만보지모해공자부묘 연후왕합장어방언.

 

공자가 아이 때 놀이를 할 때면 늘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했다. 공자의 어머니가 죽자 오보구(五父衢)에 가매장 부터 하고 신중을 기했다.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 준 다음에야 방산에다 합장했다.

 

 

孔子要絰, 季氏饗士, 孔子與往. 陽虎絀曰:「季氏饗士, 非敢饗子也.孔子由是退.

공자요질 계씨향사 공자여왕. 양호출왈 계씨향사 비감향자야공자유시퇴.

 

공자가 (상중이라) 허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있는데, 계씨(季氏)가 선비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공자도 함께 갔지만 양호(陽虎)가 막아서며 계씨께서는 선비들을 초대한 것이지 너를 초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물러나왔다.

 

孔子年十七, 魯大夫孟釐子病且死, 誡其嗣懿子曰:「孔丘, 聖人之後, 滅於宋. 其祖弗父何始有宋而嗣譲厲公. 及正考父佐戴宣公, 三命茲益恭, 故鼎銘云:『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牆而走, 亦莫敢余侮. 饘於是, 粥於是, 以餬余口.其恭如是. 吾聞聖人之後, 雖不當世, 必有達者. 今孔丘年少好礼, 其達者歟吾即没, 若必師之.

공자년십칠 노대부맹리자병차사 계기사의자왈 공구 성인지후 멸어송. 기조불부하시유송이사양여공. 급정고보좌재 무 선공 삼명자익공 고정명문 일명이루 재명이구 삼명이부 둔장이주 역막감여모. 전어시 죽어시 이호여구기공여시. 오문성인지후 수부당세 필유달자. 금공구연소호례 기달자여 오즉몰 약피사지

 

공자 나이 17, 대부 맹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죽음을 앞두고 그 후계자 의자(懿子)에게 공구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송나라에서 해를 당했다. 당초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가 송나라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여공(厲公)에게 양보했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기면서 세 번이나 임명을 받았는지만 더욱 공경스러웠다. 그래서 세발솥의 명문에 첫 임명에 머리를 숙이고, 두 번째 임명에 허리를 굽히고, 세 번째 임명에 몸을 숙인 채 담장을 따라 걸어도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았고 매일 한 그릇의 죽을 먹으며 지냈다라고 했을 정도로 공경스러웠다. 내가 듣기에 성인의 후손은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는 못되더라도 틀림없이 무엇인가 통달한 사람이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지만 예를 잘 아니 그가 통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으면 꼭 그를 스승으로 모시도록 해라.’라고 했다.

 

及釐子卒, 懿子與魯人南宮敬叔往学礼焉. 是歳, 季武子卒, 平子代立.

급리자졸 의가여노인남궁경숙왕학례언. 시세 계무자졸 평자대립.

 

리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공자에게) 가서 예를 배웠다. 이 해(기원전 535), 계무자(季武子: 노나라 정경(正卿))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뒤를 이었다.

 

孔子貧且賎. 及長, 嘗為季氏史, 料量平嘗為司職吏而畜蕃息. 由是為司空. 已而去魯, 斥乎斉, 逐乎宋, 困於陳蔡之閒, 於是反魯.

공자빈차천. 급장 상위계씨가 룡양평 상위사직리이축번식. 유시위사공. 이이거노 척호제 축오송 위 인어진채지간 어시반노.

 

공자는 가난하고 미천했다. 장성한 뒤 계씨의 창고를 관리하는 작은 관리를 지낸 적이 있는데 들고나는 것이 정확했다. 가축을 관장하는 관리였을 때는 가축들이 번성했다. 이로써 사공(司空)이 되었다. 그 뒤 노나라를 떠났으나 제나라에서 배척당했고, ()과 위()나라에서 쫓겨났으며, ()과 채()나라에서 곤욕을 치렀다. 이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孔子長九尺有六寸, 人皆謂之長人而異之.

공자장구척유육촌 인개위지 장인이이지.

 

공자는 키가 아홉 자 여섯 치여서 사람들이 꺽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魯复善待, 由是反魯.

노복선대 유시반노.

 

노나라가 다시 잘 대우하였기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魯南宮敬叔言魯君曰:「請與孔子適周.魯君與之一乗車, 両馬, 一豎子倶, 適周問礼, 蓋見老子云. 辞去, 而老子送之曰:「吾聞富貴者送人以財, 仁人者送人以言. 吾不能富貴, 窃仁人之号, 送子以言, :『聡明深察而近於死者, 好議人者也. 博辯広大危其身者, 発人之悪者也. 為人子者毋以有己, 為人臣者毋以有己.』」

노남궁경숙언노군왈 청여공자적주노군여지일승거 양마 일수자구 적주문예 개현노자운. 사거 이노자송지왈 오문부귀자송인이재 인인자송인이언. 오불능부귀 규인인지호 송자이언 왈 총명심착이근어사자 오의인자야. 박변광대기신자 발인지오자야. 위인자자무이유기 위인신자무이유기

 

남궁경숙이 노나라의 주군에게 공자와 함께 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노나라의 주군은 말 두필이 끄는 마차 한 대와 시종 하나를 동행케 하니,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었는데 대개 노자(老子)를 만났다고들 한다. 인사를 하고 떠나려하자 노자가 내가 들으니 부유하고 귀한 자는 재물을 주어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 자는 좋은 말로 떠나보낸다고 합디다. 내가 부유하지도 귀하지도 못하니 어진 사람이란 이름을 훔쳐서 이런 말로 그대를 떠나보낼까 하오. “총명하고 깊이 살피는 사람 목숨이 위험한 까닭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많고 말을 잘 하는 사람에게 위험이 닥치기 쉬운 까닭은 남의 나쁜 점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자식된 자는 (부모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신하된 자는 (군주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야 된다”’는 말로 떠나보냈다.

 

孔子自周反于魯, 弟子稍益進焉.

공자자주반우노 제자초익진언.

 

공자가 주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갈수록 늘었다.

 

是時也, 晉平公淫, 六卿擅権, 東伐諸侯楚霊王兵彊, 陵轢中国斉大而近於魯. 魯小弱, 附於楚則晉怒附於晉則楚來伐不備於斉, 斉師侵魯.

시시야 진평공음 육경찬권 동벌제후 초영왕병강 능력중국 제대이근어노. 노소약 부어초즉진노 부어진즉초래벌 불비어제 제사침노.

 

이 무렵 진() 평공(平公)이 정치를 어지럽혀 6(六卿)이 권력을 잡고 동으로 제후들을 공격했다. ()나라 영왕(靈王)이 강한 병사로 중국을 업수히 여기고, 강대한 제나라가 노나라와 가까웠다. 노나라는 작고 약해 초나라에 붙으면 진()나라가 노하고, 진나라에 붙으면 초나라가 공격해왔으며, 제나라를 소홀히 하면 제나라의 군대가 노나라를 침략했다.

 

魯昭公之二十年, 而孔子蓋年三十矣. 斉景公與晏嬰來適魯, 景公問孔子曰:「昔秦穆公国小処辟, 其霸何也?」対曰:「, 国雖小, 其志大処雖辟, 行中正. 身挙五羖, 爵之大夫, 起纍紲之中, 與語三日, 授之以政. 以此取之, 雖王可也, 其霸小矣.景公説.

노소공지이십년 이공자개년삼십의. 제경공여안영래적노 경공문공자왈 석진목공국소처벽 기패하야대왈 진 국수소 기지대 처수벽 행중정. 신거오고 작지대부 기누설지중 여어삼일 수지이정. 이차취지 수왕가야 기패소의경공열.

 

노 소공(昭公) 20(기원전 522), 공자의 나이 서른이 되었다. 제니라 경공(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에 왔다. 경공이 공자에게 옛날 진()나라 목공(穆公)은 나라도 작고 외진 곳에 있었지만 어찌하여 패주가 되었소?’라고 물었다. 이에 진은 나라는 작지만 뜻이 컸고, 외진 곳에 있었지만 그 행하는 것이 공평했습니다. 오고(五羖, 백리혜(百里傒)를 가리킴)를 직접 발탁하여 대부로 삼아 사흘을 이야기한 끝에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런 것을 본받는다면 왕 노릇도 할 수 있으니 패주는 사소한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경공이 기뻐했다.

 

孔子年三十五, 而季平子與郈昭伯以鬥雞故得罪魯昭公, 昭公率師撃平子, 平子與孟氏叔孫氏三家共攻昭公, 昭公師敗, 奔於斉, 斉処昭公乾侯.

공자년삼십오 이계평자여후소백이투계고득죄노소공 소공솔사격평자 평자여맹씨 숙손씨 삼가공공소공 소공사패 분어제 제처소공간후.

 

공자 나이 서른다섯(기원전 517), 계평자가 후소백(郈昭伯)과의 닭싸움 때문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했다. 평자가 맹씨(孟氏), 숙손씨(叔孫氏)와 함께 세 집안을 합쳐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이 패하여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머물게 했다.

 

其後頃之, 魯亂. 孔子適斉, 為高昭子家臣, 欲以通乎景公. 與斉太師語樂, 聞韶音, 学之, 三月不知肉味, 斉人称之.

기후경지 노란. 공자적제 위고소자가신 욕이통호경공. 여제태사어악 문소음 학지 삼월부지육미 제인칭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노나라에 난이 일어났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그를 통해 경공(景公)을 만나려 했다.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이야기하고, () 음악을 듣고는 그것을 배웠는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모를 정도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칭찬했다.

 

景公問政孔子, 孔子曰:「君君, 臣臣, 父父, 子子.景公曰:「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豈得而食諸!他日又复問政於孔子, 孔子曰:「政在節財.景公説, 将欲以尼谿田封孔子.

경공문정공자 공자왈 군군 신신 부부 자자’. 경공왈 선재 신여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불자 수유속 오이득이식제타일우복문정어공자 공자왈 정재절재경공열 장욕이니계전봉공자.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공은 좋은 말씀이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양식이 있다 해도 내 어찌 먹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 다른 날 또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치는 재물을 절약하는데 있습니다.’라고 했다. 경공이 기뻐하며 니계(尼谿)의 땅에 공자를 봉하고자 했다.

 

晏嬰進曰:「夫儒者滑稽而不可軌法倨傲自順, 不可以為下崇喪遂哀, 破産厚葬, 不可以為俗游説乞貸, 不可以為国. 自大賢之息, 周室既衰, 礼樂欠有閒. 今孔子盛容飾, 繁登降之礼, 趨詳之節, 累世不能殫其学, 當年不能究其礼. 君欲用之以移斉俗, 非所以先細民也.

안영진왈 부유자활계이불가궤법 거오자순 불가이위하 숭상수애 파산후장 불가이위속 유세걸대 불가이위국, 자대현지식 주실기쇠 예악흠유간. 금공자성용식 번등강지례 추상지절 누세불능탄기학 당년불능구기례. 군욕용지이이제속 비소이선세민야

 

안영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대개 유자(책벌레)들은 생각이 매끄러워 법의 틀에 넣을 수 없으며, 오만하고 자기 멋 대로라 아랫사람으로 부릴 수 없습니다. 장례를 숭상하여 슬픔을 절제할 줄 모르고, 가산을 탕진해가며 후한 장례를 치르니 풍속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유세를 다니며 돈과 관직을 구걸하니 나라도 맡길 수 없습니다. 큰 현자들이 떠난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예악이 흩어진 지 오래입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거창하게 꾸미고, 예에 대해 날고 기는 정도인데 이런 것들은 몇 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고 평생을 다 바쳐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군께서 그를 기용하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시는 것은 백성들을 이끄는 방법이 아닙니다.’

 

後景公敬見孔子, 不問其礼. 異日, 景公止孔子曰:「奉子以季氏, 吾不能.以季孟之閒待之.

후경공경현공자 불문기례. 이일 경공지공자왈 봉자이계씨 오불능이계맹지간대지

 

그 뒤로 경공은 공자를 공경스럽게 대했으나 예를 묻지는 않았다. 어느 날 경공이 공자를 만류하면서 그대를 계씨(季氏)처럼 대부로 대우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소.’라 하고는 계씨와 맹씨(孟氏) 중간으로 대우했다.

 

斉大夫欲害孔子, 孔子聞之. 景公曰:「吾老矣, 弗能用也.孔子遂行, 反乎魯.

제대부욕해공자 공자문지. 경공왈 ;오노의 불능용야공자수행 반호노.

 

제의 대부들이 공자를 해코지를 하려 했고, 공자가 이를 들었다. 경공은 내가 늙어서 그대를 기용할 수 없소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마침내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桓子嬖臣曰仲梁懐, 與陽虎有隙. 陽虎欲逐懐, 公山不狃止之. 其秋, 懐益驕, 陽虎執懐. 桓子怒, 陽虎因囚桓子, 與盟而醳之. 陽虎由此益軽季氏. 季氏亦僭於公室, 陪臣執国政, 是以魯自大夫以下皆僭離於正道. 故孔子不仕, 退而脩詩書礼樂, 弟子弥衆, 至自遠方, 莫不受業焉.

환자폐신중양회 여양호상극. 양호욕추회 송산불유지지. 기추 회익교 양오집회. 환자노 양오인수환자 여맹이역지. 양호유차익경계씨 . 계씨역참어공실 배신집국정 시이노자대부이하개참이어정도. 고공자불사 퇴이수시서예약 제자미중 지자원방 막불수업언.

 

환자(桓子)가 총애하는 신하인 중양회(仲梁懷)가 양호(陽虎)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호가 중양회를 내쫓으려고 했으나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는 그를 잡았다. 환자가 노하자 양호는 바로 환자를 가두고 맹약을 하고서야 놓아 주었다. 양호가 이로써 계씨를 더욱 깔보았다. 계씨 역시 분에 넘치게 공실처럼 행세하면서 신하의 도리를 넘어 국정을 움켜쥐니 노나라는 대부 이하 모두가 정도를 벗어났다. 그래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 (), (), ()을 정리했다. 제자들은 더 많아졌는데 먼 곳에서도 찾아와 교육을 받았다.

 

定公八年, 公山不狃不得意於季氏, 因陽虎為亂, 欲廃三桓之適, 更立其庶孽陽虎素所善者, 遂執季桓子. 桓子詐之, 得脱.

정공팔년 공산불뉴부둑의어계씨 인양호위란 욕폐삼환지적 경립기서얼양호소소선자 수집계환자. 환자사지 득탈.

 

노나라 정공 8(기원전 502), 공산불뉴가 계씨에게 뜻을 얻지 못하자 양호의 힘을 빌려 난을 일으켜 삼환의 적자들을 폐하고, 평소 양호와 사이가 좋은 그 서자를 세우려고 계환자를 체포했다. 환자는 그를 속이고 탈출했다.

 

* 三桓: 춘추시대(春秋時代) ()의 환공(桓公)에서 난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의 세 대부(大夫)

 

定公九年, 陽虎不勝, 奔于斉. 是時孔子年五十.

정공구년 양호불승 분우제. 시시공자년오십.

 

정공 9, 양호가 패하여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공자 나이 50이었다.

 

公山不狃以費畔季氏, 使人召孔子. 孔子循道弥久, 温温無所試, 莫能己用, :「蓋周文武起豊鎬而王, 今費雖小, 儻庶幾乎!欲往. 子路不説, 止孔子. 孔子曰:「夫召我者豈徒哉如用我, 其為東周乎!然亦卒不行.

공산불뉴이비반계씨 사인소공자. 공자순도미구 온온무소시 막능기용 왈 개주문문기풍호이왕 금비수소 당서기호욕왕. 자로불열 지공자. 공자왈 부소아자이도재 여용아 기위동주호연역졸불행.

 

공산불뉴는 비()를 근거로 계씨에 반발하며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선왕의 도를 지켜온 지 오래였으나 줄곧 이를 펼치지 못했고, 또 자신을 기용하지 사람도 없던 차라 당초 주의 문왕과 무왕도 풍()과 호()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지금 비읍이 작긴 하지만 그와 비슷하지 않겠는가?’라며 가려고 했다. 자로가 언짢아하면서 공자를 말렸다. 공자는 어찌 나를 괜히 불렀겠느냐? 나를 기용한다면 그곳이 동방의 주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했으나 끝내는 가지 않았다.

 

其後定公以孔子為中都宰, 一年, 四方皆則之. 由中都宰為司空, 由司空為大司冦.

기후정공이동자위중도재 일년 사방개즉지. 유중도재위사공 유사공위대사구.

 

그 후 정공(定公)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관리로 삼자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공자를 본받았다. 중도의 관리에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 司空: 삼공(三公)의 하나로, 토지(土地)와 민사(民事)를 맡아보았음

* 大司寇: 형조판서

 

 

定公十年春, 及斉平. , 斉大夫黎鉏言於景公曰:「魯用孔丘, 其勢危斉.乃使使告魯為好会, 会於夾谷. 魯定公且以乗車好往. 孔子摂相事, :「臣聞有文事者必有武備, 有武事者必有文備. 古者諸侯出疆, 必具官以従. 請具左右司馬.定公曰:「.

정공십년춘 급제평. 하 제대부여서언어경공왈 노용공구 기세위제내사사고노위호회 회어협곡. 노정공차이승거호왕. 공자섭상사 왈 신문유문사자핑유무비 유무사자필유문비. 고제후출강 필구관이종. 청구좌우사마정공왈

 

정공 10(기원전 500) , 제와 화친했다. 여름, 제의 대부 여서(黎鉏)가 경공(景公)에게 노나라가 공구(공자)를 기용했으니 그 기세가 제나라를 위협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바로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 회담을 갖자고 하여 협곡(夾谷)에서 만나기로 했다. 노 정공이 수레를 타고 그냥 가려고 했다. 공자는 재상 대행으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신이 듣기에 문()과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 제후가 국경을 나서면 반드시 문무 관원들을 갖추어 따르게 했습니다. 좌우 사마(司馬)를 데리고 가십시오.’라고 했다. 정공이 그렇게 하시오.’라 하고는 좌우 사마를 데려갔다.

 

具左右司馬. 会斉侯夾谷, 為壇位, 土階三等, 以会遇之礼相見, 揖譲而登. 献酬之礼畢, 斉有司趨而進曰:「請奏四方之樂.景公曰:「.於是旍旄羽袚 矛戟剣撥 鼓噪而至.

구좌우사마. 회제후협곡 위단위 토개삼등 이회우지례상현 읍양이등. 헌수지례필 제유사추이진왈 청주사방지악경공왈 어시정모우발 모극검발 고조이지.

협곡에서 제나라의 후(경공)를 만나게 되었는데 단과 세 층의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만남의 예로 서로 마주하여 서로 사양하면서 단 위로 올랐다. 서로 술을 권하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담당관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사방의 음악을 연주하길 청합니다.’라고 하자 경공이 좋다.’고 했다. 그러자 깃발, , , , 방패 따위를 든 무리가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 四方之樂: 사방=세계 즉, 천자국의 음악에 대비되는 오랑캐 음악이라 볼 수 있다.

 

孔子趨而進, 歴階而登, 不尽一等, 挙袂而言曰:「吾両君為好会, 夷狄之樂何為於此! 請命有司!有司卻之, 不去, 則左右視晏子與景公. 景公心怍, 麾而去之.

공자추이진 역계이들 부진일등 거몌이언왈 오양군위호회 이적지악하위어차 청명유사유사각지 불거 즉좌우시안자여경공. 경공심작 휘이거지

 

공자가 잰 걸음으로 다가가 한 계단씩 올라 마지막 계단은 오르지 않은 채 소매를 걷고 우리 두 주군께서 만나는 좋은 자리에 어찌 오랑캐 음악이란 말입니까 담당관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라고 했다. 담당관이 물러가게 했으나 가지 않자 (공자는) 좌우로 안자와 경공을 훑어보았다. 경공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손을 저어 물러가게 했다.

 

 

 

有頃, 斉有司趨而進曰:「請奏宮中之樂.景公曰:「.優倡侏儒為戯而前. 孔子趨而進, 歴階而登, 不尽一等, :「匹夫而営惑諸侯者罪當誅! 請命有司!有司加法焉, 手足異処.

유경 제유사추이진왈 청주궁중지악경공왈 우창주유위희이전. 공자추이진 역계이등 부진일등 왈 필부이영혹제후자죄당주 청명유사유사가법언 수족이처.

 

이윽고 제나라의 담당관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길 청하옵니다.’라고 했다. 경공이 좋다.’고 하자 광대와 난쟁이들이 재주를 부리며 앞으로 나왔다. 공자가 잰걸음으로 다가가 한 계단씩 올라 마지막 계단은 오르지 않은 채 소인들로서 제후를 현혹하는 자는 그 죄가 죽음뿐입니다! 담당관에게 명하십시오!’라고 했다. 담당관을 법에 따라 허리를 잘랐다.

 

景公懼而動, 知義不若, 帰而大恐, 告其群臣曰:「魯以君子之道輔其君, 而子独以夷狄之道教寡人, 使得罪於魯君, 為之柰何?」有司進対曰:「君子有過則謝以質, 小人有過則謝以文. 君若悼之, 則謝以質.於是斉侯乃帰所侵魯之鄆汶陽亀陰之田以謝過.

경공구이동 지의불약 귀이대공 고지군신왈 노이군자지도보기군 이자독이이적지도과인 사득죄어노군 위지내하유사진대왈 군자유과즉사이질 소인유과즉사이문 군약도지 즉사이질어시제후내귀소침노지군 문양 귀음지전이사과

 

경공은 두려우면서도 감탄했다. 도의라는 면에서도 따르지 못하여 돌아와서는 크게 두려워 신하들에게 노나라는 군자의 도리로 그 군주를 보좌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오랑캐의 도리로 과인을 가르치려 들다가 과인으로 하여금 노나라의 군주에게 죄를 짓게 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라고 했다. 담당관이 나와 군자는 잘못을 하면 실질적으로 사죄하고, 소인은 잘못을 하면 말로만 사죄합니다. 국군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면 실질적으로 사죄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경공은 침범했던 노나라의 운(), 민양(汶陽), 구음(龜陰)의 땅을 돌려주는 것으로 잘못을 사죄했다.


定公十三年夏, 孔子言於定公曰:「臣無蔵甲, 大夫毋百雉之城.使仲由為季氏宰, 将堕三都. 於是叔孫氏先堕郈. 季氏将堕費, 公山不狃叔孫輒率費人襲魯. 公與三子入于季氏之宮, 登武子之台. 費人攻之, 弗克, 入及公側.

정공십삼년하 공자언어정공왈 신무장갑 대부무백치지성사중유위계씨재 장타삼도. 어시숙손씨선타후. 계씨장타비 공산불뉴 숙손첨솔비인습노. 공여삼자입우계씨지궁 등무나지대. 비인공지 불극 입극공측.

 

정공 13년 여름, 공자가 정공에게 가신은 사사로이 무기를 가져서는 안 되고, 대부의 담장은 100장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중유(仲由)를 계씨의 가신으로 삼아 삼도(三都)를 허물려고 했다. 이에 숙손씨(叔孫氏)가 먼저 후()를 허물고, 계씨가 비()를 허물려고 하자 공산불뉴와 숙손첩(叔孫輒)이 비() 사람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기습했다. 정공이 계손, 맹손, 숙손 세 사람과 계씨의 궁으로 들어가 계무자(季武子)의 누대로 올라갔다. 비 사람들이 그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는 못했으나 정공 옆까지 쳐들어왔다.

 

孔子命申句須樂頎下伐之, 費人北. 国人追之, 敗諸姑蔑. 二子奔斉, 遂堕費. 将堕成, 公斂処父謂孟孫曰:「堕成, 斉人必至于北門. 且成, 孟氏之保鄣, 無成是無孟氏也. 我将弗堕.十二月, 公囲成, 弗克.

공자명신구수 악기하벌지 비인배. 국인추지 패제고멸. 이자분제 수타비. 장타성 공렴거보위맹손왈 타성 제인필지우북문. 차성 맹씨지보장 무성시무맹씨야. 아장불타십이월 공위성 불극.

 

공자는 신구수(申句須), 악기(樂頎)에게 이들을 치게 하니 비 사람들이 패배했다. 백성들이 뒤쫓아 고멸(姑蔑)에서 격파했다. 공산불뉴와 숙손첩은 제나라로 달아났고 마침내 비를 허물었다. ()의 담장을 허물려는데 공렴거보(公斂處父)가 맹손(孟孫)에게 성을 허물면 제나라 사람들이 분명히 북문까지 쳐들어올 것이고, 성은 또 맹씨의 울타리라 성이 없으면 맹씨도 없습니다. 우리는 허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12, 정공이 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定公十四年, 孔子年五十六, 由大司冦行摂相事, 有喜色. 門人曰:「聞君子禍至不懼, 福至不喜.孔子曰:「有是言也. 不曰樂其以貴下人?」於是誅魯大夫亂政者少正卯. 與聞国政三月, 粥羔豚者弗飾賈男女行者別於塗塗不拾遺四方之客至乎邑者不求有司, 皆予之以帰.

정공십사년 동자년오십육 유대사구행섭상자 유색희. 문인왈 문군자화지불구 복지불희공자왈 유시언야 불왈 악기이귀하인어시주노개부란정자소정묘. 여문국정삼월 죽갱돈자불식가 남녀행자별어도 도불습유 사방지객지호읍자불구유사 개여지이귀.

 

정공 14년 공자 나이 56,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대행하게 되자 기쁜 얼굴이 되었다. 문인이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 않고, 복이 와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말이 있지. 그런데 귀한 신분으로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는 것을 즐긴다는 말도 있지 않더냐?’ 그리고 노나라의 대부로 정치를 어지럽힌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국정을 참여한 지 석 달 만에 돼지고기 죽과 탕을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으며, 남녀가 길을 구별하여 걸었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으며, 읍을 찾는 사방의 손님은 담당관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어 돌아갔다.

 

斉人聞而懼, :「孔子為政必霸, 霸則吾地近焉, 我之為先并矣. 盍致地焉?」黎鉏曰:「請先嘗沮之沮之而不可則致地, 庸遅乎!

제인문이구 왈 공자위정필패 패즉오지근언 아지위선병의. 합치치언여서왈 청선상저지 저지이불가즉치지 용루호

 

제 사람(경공)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맡으면 틀림없이 패주가 될 것이고, 패주가 되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가 먼저 합병당할 것이다. 먼저 땅을 떼어줘야 하는가?’라고 했다. 여서(黎鉏)먼저 (노나라의 군신 관계를) 갈라놓아 보도록 하십시오. 갈라놓아서 안 되면 그 때 땅을 떼어주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於是選斉国中女子好者八十人, 皆衣文衣而舞康樂, 文馬三十駟, 遺魯君. 陳女樂文馬於魯城南高門外, 季桓子微服往観再三, 将受, 乃語魯君為周道游, 往観終日, 怠於政事.

어시선제국중여자호자팔십인 개의문의이무강락 문마삼십사 유노군. 진녀악문마어노성남고문외 계환자미복왕관재삼 장수 내어노군위주도유 왕관종일 태어정사.

 

이에 제나라의 미녀 80인을 선발하여 모두 화려한 옷을 입히고 강락(康樂)’이란 춤을 가르친 다음 장식을 한 말 120필과 함께 노의 국군에게 보냈다. 여악(女樂)과 치장한 말들이 노의 성 남쪽 고문(高門) 밖에 진열되자 계환자(季桓子)는 평복 차림으로 가서 몇 차례 참관하고는 그것을 받아들으려 노나라의 주군이 여러 곳을 순시한다고 말하고 가서는 하루 종일 참관하면서 정사를 게을리 했다.

 

子路曰:「夫子可以行矣.孔子曰:「魯今且郊, 如致膰乎大夫, 則吾猶可以止.

자로왈 부자가이행의공자왈 노금저교 여치번호대부 즉어유가이지

 

자로가 선생님께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노나라에 곧 교 제사가 있을 텐데 대부들에게 제사 고기를 나누어줄 때까지 나는 그냥 안가겠다.’라고 했다.

 

桓子卒受斉女樂, 三日不聴政, 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遂行, 宿乎屯. 而師己送, :「夫子則非罪.孔子曰:「吾歌可夫?」

환자졸수제여악 삼일불청정 교 우불치번조어대부. 공자수행 숙호둔. 이사기송 왈 부자즉비죄공자왈 오가가부

 

환자가 끝내 제의 여악을 받아들이고는 사흘 동안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또 교 제사를 지낸 다음에는 대부들에게 제사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았다. 공자가 마침내 떠나 둔()에서 묵었다. 악사 기()가 전송하며 선생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내가 노래로 해도 되겠소?’라 하고는 노래를 불렀다.

 

歌曰:「彼婦之口, 可以出走彼婦之謁, 可以死敗. 蓋優哉游哉, 維以卒歳!

가왈 피부지구 가이출주 피부지알 가이사패 개우제유재 유이졸세

 

저 여인네의 입 때문에 떠나가는구나! 저 여인네의 출현으로 모든게 망가지는 구나. 모든 인재들이 떠나가니 한 시대가 끝나는구나.‘라 탄식했다.

 

師己反, 桓子曰:「孔子亦何言?」師己以実告. 桓子喟然歎曰:「夫子罪我以群婢故也夫!

사기반 환자왈 공자역하언사기이실고. 환자위연탄왈 부자죄아이군비고야부

악사 기가 돌아오자 환자가 공자는 뭐라고 하던가?’라고 물었고 악사 기는 사실대로 말했다. 환자가 탄식하며 선생이 여자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나를 나무라는구나라고 했다.



孔子遂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 衛霊公問孔子:「居魯得祿幾何?」対曰:「奉粟六萬.衛人亦致粟六萬. 居頃之, 或譖孔子於衛霊公. 霊公使公孫余仮一出一入. 孔子恐獲罪焉, 居十月, 去衛.

공자수적위 주어자로처형안탁추가. 위영공문공자 거노득록기하대왈 봉속육만위인역치속육만. 거경지 혹참공자어위영공. 영공사손여가일출일입. 공자공획죄언 거시월 거위.

 

공자가 마침내 위()에 이르러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靈公)이 공자에게 노나라에 있을 때는 녹봉이 얼마였습니까?’라고 물으니 곡식 6만 되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 역시 곡식 6만 되를 주었다. 머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공자를 위 영공에게 헐뜯었다. 영공이 공손여가(公孫余假)에게 (공자가 있는 곳을) 드나들게 했다. 공자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 머문 지 열 달 만에 위나라를 떠났다.

 

将適陳, 過匡, 顔刻為僕, 以其策指之曰:「昔吾入此, 由彼欠也.匡人聞之, 以為魯之陽虎. 陽虎嘗暴匡人, 匡人於是遂止孔子. 孔子状類陽虎, 拘焉五日, 顔淵後, 子曰:「吾以汝為死矣.顔淵曰:「子在, 回何敢死!

장적진 과광 안각위복 이기책지지왈 석오입차 유피흠야광인문지 이위노지양호. 양호상폭광인 광인어시수지공자. 공자상류양호 구언오일 안연후 자왈 오이여위사의안연왈 자재 회하감사

 

공자가 진()으로 가려고 광()을 지나게 되었다. 안각(顔刻)이 시종을 자처했는데 말채찍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전에 제가 이곳에 왔을 때는 저 구멍으로 들어왔습니다.’라고 했다. ()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노나라의 양호(陽虎)라고 여겼다. 양호가 일찍이 광 사람들에게 난폭하게 군 적이 있어 광 사람들이 이에 공자를 막은 것이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닷새 동안 구류당했다. 안연(顔淵)이 나중에 오자 공자가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라고 했다. 안연이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 회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匡人拘孔子益急, 弟子懼. 孔子曰:「文王既没, 文不在茲乎天之将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于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孔子使従者為甯武子臣於衛, 然後得去.

광인구공자익급 제자구. 공자왈 문왕기몰 문부재자호 천지장상사문야 후사자부득여우사문야. 천지미상사문야 광인기여여하공자사종자위녕무자신어위 연후득거.

 

광 사람들이 공자에 대해 더욱 심하게 압박하자 제자들이 두려워했다. 공자는 문왕께서 돌아가셨지만 그 정신은 여기 있지 않느냐? 하늘이 이 정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 정신을 내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이 정신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느냐?’라고 했다. 공자가 따르던 사람 하나를 위나라 영무자(寧武子)에게 가신으로 보내고서야 떠날 수 있었다.

 

去即過蒲. 月余, 反乎衛, 主蘧伯玉家.

거즉과포,월여 반호위 주거백옥가.

 

(광을) 떠나서 바로 포()를 지나게 되었다. 한 달 남짓 다시 위에 돌아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霊公夫人有南子者, 使人謂孔子曰:「四方之君子不辱欲與寡君為兄弟者, 必見寡小君. 寡小君願見.孔子辞謝, 不得已而見之. 夫人在絺帷中. 孔子入門, 北面稽首. 夫人自帷中再拝, 環珮玉声璆然. 孔子曰:「吾郷為弗見, 見之礼答焉.子路不説. 孔子矢之曰:「予所不者, 天厭之! 天厭之!

영공부인유남자자 사인위공자왈 사방지군자붕욕굑여관군위형제자 픽현과소군. 과소군원견공자사사 부득이견지. 부인재치유중. 공자입문 북면계수. 부인자유중재배 환패옥성구연. 공자왈 오향위불견 견지예답언자로불열 공자시지왈 여소부자 천염지 천염지

 

위 영공에게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사방의 군자들이 우리 군주와 형제처럼 지내고 싶어 꼭 우리 소군(小君, 남자)을 만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만났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다. 공자가 문을 들어서며 북쪽을 향해 절을 했다. 부인은 휘장 안에서 답례를 했는데 허리에 찬 패물과 옥구슬 등이 소리를 냈다. 공자가 내 접대 법으론 만나지 말아야 하지만 초청에 응하는 답례로 만났을 뿐이다.’라고 했다. 자로가 언짢아했다. 공자는 내 말이 진심이 아니라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맹서했다.

 

居衛月余, 霊公與夫人同車, 宦者雍渠參乗, , 使孔子為次乗, 招揺巿過之. 孔子曰:「吾未見好徳如好色者也.108)於是醜之, 去衛, 過曹. 是歳, 魯定公卒.

거위월여 영공여부인동거 환자옹거참승 출 사공자위차승 초요시과지. 공자왈 오미견호덕여오색자어시추지 거위 과조. 시세 노정공졸.

 

위에서 한 달 남짓 머무르고 있을 때 영공 내외가 환관 옹거(雍渠)를 옆에 시위로 태우고 외출했는데, 공자를 뒤 마차에 태우고 손을 흔들고 뽐을 내며 저잣거리를 지나갔다. 공자가 내가 덕 좋아하기를 색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에 실망을 느끼고 위를 떠나 조()로 갔다. 이 해에 노 정공이 죽었다.

 

* 공자가 스스로 후궁이나 첩실 대접을 받은 걸로 생각하여....



孔子去曹適宋, 與弟子習礼大樹下. 宋司馬桓魋欲殺孔子, 抜其樹. 孔子去. 弟子曰:「可以速矣.孔子曰:「天生徳於予, 桓魋其如予何!

공자거조적송 여제자습예대수하. 송사마환퇴욕살공자 발기수. 공자거. 제자왈 가이속의공자왈 천생덕어여 환최기여여하

 

공자가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서 제자들과 큰 나무 아래에서 예에 대해 공부하는데 송나라의 사마환퇴(司馬桓魋)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뽑아버렸다. 공자가 떠났다. 제자들이 빨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하늘이 이미 내게 덕을 부여하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라고 했다.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独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東門有人, 其顙似尭, 其項類皐陶, 其肩類子産, 然自要以下不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공자적정 여제자상실 공자독립곽동문. 정인혹위자공왈 동문유인 기상사요 기정류도요 기견류자산 연자요이하불급우삼촌 누누약상가지구

 

공자가 정()나라에 갔다가 제자들과 서로 흩어져 공자 혼자 외성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에게 동문에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와 비슷하고, 목은 요()와 닮았고,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하더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는 우()보다 세 치 정도 짧은데,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은 모습이 마치 상가 집 개 같더이다!’라고 했다.

 

子貢以実告孔子. 孔子欣然笑曰:「形状, 末也. 而謂似喪家之狗, 然哉! 然哉!

자공이실고공자. 공자흔연소왈 형상 말야. 이위사상가지구 연재 연재

 

자공은 공자에게 사실대로 일러주었다.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모습은 다르다만, 상가집 개라는 말은 정말 그렇다, 그렇다!’라고 했다.

 

* 상가집 개란 누구 하나 신경써주지 않아 풀 죽은 형국....

 

孔子遂至陳, 主於司城貞子家. 歳余, 呉王夫差伐陳, 取三邑而去. 趙鞅伐朝歌. 楚囲蔡, 蔡遷于呉. 呉敗越王句践会稽.

공자수지진 주어사성정자가. 세여 오왕부차벌진 취삼읍이거. 조앙벌보가. 초위채 채천우오. 오패월왕구천회계.

 

공자는 마침내 진()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다. 1년 여 지났을 때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진()나라를 토벌하여 세 읍을 취하고 돌아갔다. 조앙(趙鞅)이 조가(朝歌)를 토벌했다. 초나라가 채()를 포위하자 채는 오나라로 옮겨갔다. 오나라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회계(會稽)에서 패배시켰다.

 


有隼集于陳廷而死, 楛矢貫之, 石砮, 矢長尺有咫. 陳湣公使使問仲尼. 仲尼曰:「隼來遠矣, 此粛慎之矢也. 昔武王克商, 通道九夷百蛮,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 於是粛慎貢楛矢石砮, 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徳, 以粛慎矢分大姫, 配虞胡公而封諸陳. 分同姓以珍玉, 展親分異姓以遠職, 使無忘服. 故分陳以粛慎矢.


유준집우진정이사 호시관지 석노 시장척유지. 진민공사사문중니. 중니왈 준래원의 차숙신지시야. 석무왕극상 통도구이백만 사각이기방회래공 사무망직업. 어시숙신공호시석노 장철유지. 선왕욕소기영덕 이숙신시분대희 배우호공이봉제진. 분동성이진옥 전친 분이성이적직 사무망복. 고분진이숙신시

 

매 한 마리가 진()나라의 궁정에 떨어져 죽은 일이 있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몸을 꿰뚫었는데, 화살촉은 돌이었고 화살의 길이는 18촌이었다. 진나라 민공(湣公)이 사람을 보내 중니에게 물었다. 중니는 매는 멀리서 왔고,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武王)이 상나라 이기고 사방의 민족들과 통하는 길을 터서 그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도록 하여 각자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숙신은 싸리나무 화살과 돌 화살촉을 바쳤는데 길이가 18촌이었습니다. 선왕께서는 자신의 덕을 밝히고자 숙신의 화살을 큰 딸 대희(大姬)에게 주어 우()의 호공(胡公)에게 시집보내고 (호공을) ()의 제후로 봉했습니다. 같은 피붙이 제후들에게는 진귀한 옥을 나누어주어 가까움을 나타냈고, 성이 다른 제후들에게는 먼 곳의 공물을 나누어 주어 복종을 잊지 않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진나라에 숙신의 화살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라고 했다.

 

試求之故府, 果得之.

시구지고부 과득지.

 

옛날 창고를 찾아보게 했더니 과연 그 화살을 찾았다.

 

孔子居陳三歳, 会晉楚争彊, 更伐陳, 及呉侵陳, 陳常被冦.

공자거진삼세 회진초쟁강 경벌진 급오침진 신상피구.

 

공자가 진()나라에 3년을 머물렀는데, ()과 초()나라가 서로 힘을 겨루는 통에 돌아가며 진나라를 공격했고, 오나라가 진나라를 침범하기까지 진나라는 늘 외적에 시달렸다.

 

孔子曰:「帰與帰與! 吾党之小子狂簡, 進取不忘其初.於是孔子去陳.

공자왈 귀여귀여 오당지소자광간 진취불망기초어시공자거진.

 

공자는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나라 젊은이들이 뜻이 크고 단순하지만 진취적이고 한결 같아 처음 뜻을 잊지 않는다.'라고 했다. 공자가 마침내 진나라를 떠났다.


 

過蒲, 会公叔氏以蒲畔, 蒲人止孔子. 弟子有公良孺者, 以私車五乗従孔子. 其為人長賢, 有勇力, 謂曰:「吾昔従夫子遇難於匡, 今又遇難於此, 命也已. 吾與夫子再罹難, 寧鬥而死.鬥甚疾. 蒲人懼, 謂孔子曰:「苟毋適衛, 吾出子.

과포 회공숙씨이포반 포인지공자. 제자유공양유자 이사거오승종공자. 기인인장현 유용력 위왈 오석종부자우난어광 금우난어차 명야이. 오여부자재리난 영투이사; 투심질. 포인구 위공자왈 순무적위 오출자

 

()를 지날 때 마침 위나라 공숙씨(公叔氏)가 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공자를 막았다. 공양유(公良孺)라는 제자가 자기 수레 다섯 대로 공자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건장하고 용기와 힘이 있었는데 제가 전에 선생님을 따르다가 광에서 곤란한 일을 당했는데 지금 또 여기서 어려움을 당하고 보니 운명인가 봅니다. 제가 선생님과 다시 난을 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라 하고는 아주 사납게 싸웠다. 포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공자에게 ()나라로만 가지 않겠다면 당신을 보내주겠소.’라고 했다.

 

與之盟, 出孔子東門. 孔子遂適衛. 子貢曰:「盟可負邪?」孔子曰:「要盟也, 神不聴.

여지맹 출공자동문. 공자수적위. 자공왈 맹하부사; 공자왈 요맹야 신불청

 

공자가 맹서하자 공자를 동문으로 내보냈다. 공자가 기어이 위로 갔다. 자공이 맹서를 저버려도 됩니까?’라 하자 공자는 강요된 맹서는 신도 들어주지 않는다.’라고 했다.

 

衛霊公聞孔子來, , 郊迎. 問曰:「蒲可伐乎?」対曰:「.霊公曰:「吾大夫以為不可. 今蒲, 衛之所以待晉楚也, 以衛伐之, 無乃不可乎?」

위영공문공자래 희 교영. 문왈 포가벌호대왈 영공왈 오대부이위불가 금포 위지소이대진초야 이위벌지 무내불가호

 

위나라 영공은 공자가 온다는 말을 돋고는 기뻐서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면서 포를 토벌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공자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영공이 우리 대부들은 안 된다고 여깁니다. 지금 포는 위나라가 진과 초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될 터인데 위나라가 그런 곳을 치는 것은 안 되지 않겠소이까?’라고 했다.

 

孔子曰:「其男子有死之志, 婦人有保西河之志. 吾所伐者不過四五人.霊公曰:「.然不伐蒲.

공자왈 가남자유사지지 부인유보서하지지. 오소벌자불과사오인영공왈 연불벌포.

 

공자는 그곳 남자들은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고, 부인들은 서하(西河)를 지킬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토벌하려는 자는 4,5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영공이 그렇군요했지만 포를 토벌하지는 않았다.

 

霊公老, 怠於政, 不用孔子. 孔子喟然歎曰:「苟有用我者, 期月而已, 三年有成.孔子行.

영공노 태이정 불용공자. 공자위연탄왈 순유용아자 기월이이 삼년유성공자행.

 

영공은 늙고 정무에 게을러서 공자를 기용하지 않았다. 공자는 한숨을 쉬며 정말이지 나를 기용하는 사람은 1년이면 자리를 잡고, 3년이면 성과를 볼 수 있을 터인데!’라고 했다. 공자가 떠났다.

 

仏肸為中牟宰. 趙簡子攻范中行, 伐中牟. 仏肸畔, 使人召孔子. 孔子欲往. 子路曰:「由聞諸夫子, 其身親為不善者, 君子不入也. 今仏親以中牟畔, 子欲往, 如之何?」孔子曰:「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不曰白乎, 涅而不淄. 我豈匏瓜也哉, 焉能繋而不食?」

필힐위중모재. 조간자공범 중행 벌중모. 필힐반 사인소공자 공자욕왕. 자로왈 유문제부자 기신친위불선자 군자불입야금필친이중모반 자욕왕 여지하공자왈 유시언야 불왈견호 마이불인 불왈백호 열이불치. 아이포과야재 언능번이계식

 

필힐(佛肹)은 중모(中牟)의 지방관이었다. 조간자(趙簡子)가 범씨(范氏), 중행씨(中行氏)를 공격하고 중모를 공격했다. 필힐이 그에 반발하여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가 가려고 했다. 자로는 이 중유가 선생님께 듣기에 자신이 직접 좋지 않은 일을 하는 자에게 군자는 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필힐이 직접 중모에서 반발하는데 선생님께서는 가시려 하니 어찐 된 일입니까?’라고 했다. 공자가 그런 말을 했지. 정말 단단한 것은 갈아도 갈리지 않고, 진짜 하얀 것은 물들여도 물들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않았더냐? 내가 어찌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도 못하는 표주박이겠느냐!’라고 했다.



孔子撃磬. 有荷蕢而過門者, :「有心哉, 撃磬乎! 硜硜乎, 莫己知也夫而已矣!

공자격경. 유하궤이과문자 왈 유심재 격경호 갱갱호 막기지야부이이의

 

공자가 경()을 치고 있었다. 광주리를 지고 문을 지나던 자가 생각이 많구나, 경을 치는 소리가! 자기를 몰라주면 그걸로 그만인 것을!’라고 했다.

 

孔子学鼓琴師襄子, 十日不進. 師襄子曰:「可以益矣.孔子曰:「丘已習其曲矣, 未得其數也.有閒, :「已習其數, 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志也.有閒, :「已習其志, 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為人也.

공자학고금사양자 십일부진 사양자왈 가이익의공자왈 구이습이곡의 미득기수애유한 왈 이습기수 가이익의공자왈 구미득기지야유한 왈 이습기지 가이익의공자왈 구미득기위인야

 

공자가 사양자(師襄子)로부터 거문고 연주를 배웠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다음 단계로 나가지 않았다. 사양자가 진도 나가도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이 구가 그 곡은 익혔으나 장단은 모릅니다.’라고 했다. 얼마 뒤 그 장단을 익혔으니 진도 나가도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이 구가 음악의 요지를 모릅니다.’라고 했다. 얼마 뒤 음악이 추구하는 바를 익혔으니 진도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이 구가 그 음악을 지은 사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有閒, ()有所穆然深思焉, 有所怡然高望而遠志焉. :「丘得其為人, 黯然而黒, 幾然而長, 眼如望羊, 如王四国, 非文王其誰能為此也!師襄子辟席再拝, :「師蓋云文王操也.

유한 왈유소목연심사언 유소이연고망이원지언. 구득기위인 암연이흑 시연이장 안여망양 여왕사국 비문왕기수능위차야; 사양자피석재배 왈 사개운문왕조야

 

그로부터 얼마 뒤, (공자는) 경건하게 깊은 생각에 빠져 편안하게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이 구가 그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은 얼굴에 큰 키, 먼 곳을 바라보는 빛나는 눈이 천하의 왕과 같으니, 문왕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사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며 스승께서 문왕조(文王操)’라고 하셨습니다.‘라 했다.

 

*: 거문고 음악에 붙이는 이름....

 

孔子既不得用於衛, 将西見趙簡子. 至於河而聞竇鳴犢舜華之死也, 臨河而歎曰:「美哉水, 洋洋乎! 丘之不済此, 命也夫!子貢趨而進曰:「敢問何謂也?」孔子曰:「竇鳴犢, 舜華, 晉国之賢大夫也. 趙簡子未得志之時, 須此両人而后従政及其已得志, 殺之乃従政.

공자기부득용어위 장서견조간자. 지어하이문두명독 순화지사야 임하이탄왈 미재수 영영호 구지불제차 명야부; 자공추이진왈 감문하위야공자왈 두명독 순화 진국현대부야. 조간자미득지지시 순차양인이후종정 급기이득지 살지내종정.

 

공자는 위()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자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려 했다. 황하에 이르러서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죽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름다운 황하여, 넓고 넓구나! 이 구가 여기를 건너지 못하다니 운명이로다!’라고 탄식했다. 자공이 다가서며 무슨 말씀인지 감히 묻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두명독과 순화는 진()나라의 훌륭한 대부였다. 조간자가 뜻을 얻지 못하다가 이 두 사람을 얻은 뒤 정권을 잡았다.

 

丘聞之也, 刳胎殺夭則麒麟不至郊, 竭沢涸漁則蛟竜不合陰陽, 覆巣毀卵則鳳皇不翔. 何則君子諱傷其類也. 夫鳥獣之於不義也尚知辟之, 而況乎丘哉!乃還息乎陬郷, 作為陬操以哀之. 而反乎衛, 入主蘧伯玉家.

구문지야 고태살요즉기린부지교 갈택고어즉교룡부합음양 이소훼란즉봉황불상 하즉 군자위상기류야. 부조수지어불의야상지피지 이황호구재내호나식호추향 작위추조이애지. 이반호위 입주거백옥가.

 

자신의 뜻을 이루고나자 그들을 죽였다. 이 구가 듣기에 배를 갈라 뱃속의 새끼까지 죽이면 기린이 교외에 이르지 않고, 연못을 말려 물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의 조화를 부리지 않으며, 둥지를 엎어 알을 깨면 봉황이 날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렇겠느냐? 군자는 같은 부류를 상하게 하는 일을 꺼린다. 대저 새나 짐승조차도 의롭지 못한 일을 피할 줄 아는데 하물며 나야 오죽하겠느냐?’라 했다. 이에 추향(陬鄕)에 물러나 추조(陬操)’를 지어 (두명독과 순화를) 애도했다. 얼마 뒤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他日, 霊公問兵陳. 孔子曰:「俎豆之事則嘗聞之, 軍旅之事未之学也.明日, 與孔子語, 見蜚鴈, 仰視之, 色不在孔子. 孔子遂行, 复如陳.

타일 영공문병진. 공자왈 조두지사즉상문지 군여지사미지학야명일 여공자어 견비안 앙시지 색부재공자. 공자수행 복여진.

 

어느 날 위나라 영공이 군대의 진법(陣法)을 물었다. 공자는 제사 일은 일찌기 들어 보았습니다만 군대 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이튿날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는 머치 공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것을 올려다보니 공자가 마침내 그곳을 떠나 다시 진()나라로 갔다.

 

, 衛霊公卒, 立孫輒, 是為衛出公. 六月, 趙鞅内太子蒯聵于戚. 陽虎使太子絻, 八人衰絰, 偽自衛迎者, 哭而入, 遂居焉. , 蔡遷于州來. 是歳魯哀公三年, 而孔子年六十矣.

하 위영공졸 입손첩 시위위출공. 유월 조앙내탸자괴외우척. 양호사태자문 팔인쇠질 위자위영자 곡이입 수거언. 동 채천우주래. 시세노애공삼년 이공자년육

 

여름 위나라 영공이 죽고 손자 첩()이 즉위하니 이가 위 출공(出公)이다. 6, 조앙이 태자 괴외(蒯聵)를 척()에 맞아들였다. 양호(陽虎)가 태자에게 문(:상복)을 입히고, 여덟 명에게 베 띠를 둘러 위()나라에서 (태자를) 맞이하러 온 사람들로 위장하여 곡을 하면서 들어와서는 마침내 머물게 되었다. 겨울, ()가 주래(州來)로 옮겼다. 이 해(기원전 492)가 노 애공 3년이었고, 공자 나이 60이었다.

 

斉助衛囲戚, 以衛太子蒯聵在故也.

제조위위척 이위태자괴외재고야.

 

제나라가 위나라를 도와 척을 포위했는데, 위 태자 괴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魯桓釐廟燔, 南宮敬叔救火. 孔子在陳, 聞之, :「災必於桓釐廟乎?」已而果然.

하 노환리묘번 남궁경숙구화. 공자재진 문지 왈 재필어환리묘호이이과연.

 

여름, 노나라의 환공(桓公)과 리공(釐公)의 사당에 불이 났다.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불을 껐다. 공자가 진()나라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환공과 리공의 사당이 화재 난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과연 그랬다.

 

, 季桓子病, 輦而見魯城, 喟然歎曰:「昔此国幾興矣, 以吾獲罪於孔子, 故不興也.顧謂其嗣康子曰:「我即死, 若必相魯相魯, 必召仲尼.

추 계환자병 련이견노성 위연탄왈 석차국기흥의 이오획죄어공자 고불흥야고위기사강자왈 아즉사 약필상노 상노 필소중니

 

가을, 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났다. 가마를 타고 노나라의 도성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옛날 이 나라가 크게 일어날 뻔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지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며 그 후계자 강자(康子)를 돌아보며 내가 죽으면 네가 노의 재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재상이 되면 꼭 중니를 불러라.’라고 했다.

 

後數日, 桓子卒, 康子代立. 已葬, 欲召仲尼. 公之魚曰:「昔吾先君用之不終, 終為諸侯笑. 今又用之, 不能終, 是再為諸侯笑.康子曰:「則誰召而可?」:「必召冉求.於是使使召冉求.

후수일 환자졸 강자대립. 이장 욕소중니. 공지어왈 석오건군용지불종 종위제후소. 금우용지 불능종 시재위제후소강자왈 즉수소이가필소염구어시사사고염구.

 

며칠 뒤, 계환자가 죽고 강자가 대를 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공자를 부르려고 하자 공지어(公之魚)과거 우리 선군께서 그를 기용하려다 못하는 바람에 끝내 제후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지금 다시 그를 기용하려 하시는데 그러다 안 되면 또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강자가 그럼 누구를 부르면 되겠소?’라고 하자 염구(冉求)를 부르시면 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염구를 불렀다.

 

冉求将行, 孔子曰:「魯人召求, 非小用之, 将大用之也.是日, 孔子曰:「帰乎帰乎! 吾党之小子狂簡, 斐然成章, 吾不知所以裁之.147)子贛知孔子思帰, 送冉求, 因誡曰即用, 以孔子為招.

염구장행 공자왈 노인소구 비소용지 장대용지야시일 공자왈 귀호귀호 오당지소자광간 비연성장 오부지소이재지자공지공자사귀 송염구 인계왈 즉용 이공자위초

 

염구가 가려고 하자 공자가 노 사람들이 구를 부르는 것을 보니 작게 쓰려는 것이 아니라 크게 쓸 모양이다.’라고 했다. 이 날 공자는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문하 젊은이들이 단순하고 학문을 이뤘는데 내가 그들을 어떻게 이끌어 왔나는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 자공(子贛)이 공자가 돌아갈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는 염구를 보내면서 기용되면 공자를 모시도록 하오.’ 당부했다고 한다.



 

冉求既去, 明年, 孔子自陳遷于蔡. 蔡昭公将如呉, 呉召之也. 前昭公欺其臣遷州來, 後将往, 大夫懼复遷, 公孫翩射殺昭公. 楚侵蔡. , 斉景公卒.

염구기거 명년 공자자진천우채. 채소공강여오 오소지야. 전소공사기신천래주 장장왕 대부구복천 공손편사살소공. 초침채. 추 제경공졸.

 

염구가 떠나고 이듬해 공자는 진()나라에서 채()로 옮겼다. 채 소공(昭公)이 오로 가려고 했는데 오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전에 소공이 그 신하들을 속여 주래(州來)(도읍을) 옮긴 일이 있었다. 그 뒤 다시 가려고 하자 대부들이 다시 (도읍을) 옮길까 겁을 냈다. 이에 공손편(公孫翩)이 소공을 쏘아 죽였다. 초나라가 채를 침공했다. 가을, 제나라 경공(景公)이 죽었다.(기원전 490)

 

明年, 孔子自蔡如葉. 葉公問政, 孔子曰:「政在來遠附迩.他日,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対. 孔子聞之, :「, 爾何不対曰其為人也, 学道不倦, 誨人不厭, 発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将至云爾.

명년 공자자채여엽. 엽공문정 공자왈 정재래원부이타일 엽공문공자어자로 자로불대. 공자문지 왈 유 이하부대왈 기위인야 학도불권 모인불염 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운이

 

이듬해 공자는 채에서 엽()으로 갔다. 엽공(葉公)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오게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대게 하는데 있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날 엽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으나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를 이를 듣고는 유야 너는 어째서 그 사람이 배움에 피곤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침에 싫증을 내지 않고,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고, 늙어가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다.

 

 

去葉, 反于蔡. 長沮桀溺耦而耕, 孔子以為隠者, 使子路問津焉. 長沮曰:「彼執輿者為誰?」子路曰:「為孔丘.:「是魯孔丘與?」:「.:「是知津矣.

거엽 반우채. 장거 걸익우이경 공자위은자 사자오문진언. 장저왈 피집여자위수자로왈 위공구시노공구여시지진의

 

()을 떠나 채나라로 돌아오다가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밭을 가는 것을 보고는 공자는 은자라고 여겨서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했다. 장저가 고삐를 잡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했다. 자로는 공구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노나라의 공구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나루터를 알 터인데.’ 하더라 

 

桀溺謂子路曰:「子為誰?」:「為仲由.:「, 孔丘之徒與?」:「.桀溺曰:「悠悠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且與其従辟人之士, 豈若従辟世之士哉!耰而不輟. 子路以告孔子, 孔子憮然曰:「鳥獣不可與同群.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걸익위자로왈 자위수위중유자 공구지도여걸익왈 유유자천하개시야 수이역지 차여기종피인지사 이약종피세지사재우이불철. 자로이고공자 공자무연왈 조수불가여동군 천하유도 구불여역야

걸익이 자로에게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그대는 공구의 무리인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걸익은 천하가 이렇게 온통 혼란스러운데 누가 이를 바꿀 것인가? 그대는 사람을 피해 숨어 다니는 자를 따르느니 세상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 하고는 씨 뿌리는 일을 계속했다. 자로가 이를 공자에게 알리니 공자는 상심해서는 새와 짐승이 같은 무리로 어울릴 수 없구나. 천하에 도가 있다면 이 구도 를 바꾸려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他日, 子路行, 遇荷蓧丈人, :「子見夫子乎?」丈人曰:「四体不勤, 五谷不分, 孰為夫子!植其杖而藝. 子路以告, 孔子曰:「隠者也.复往, 則亡.

타일 자로행 우하조장인 왈 자견부자호장인왈 사체불근 오곡불분 숙위부자식기장이예. 자로이고 공자왈 은자야복왕 즉망.

 

다른 날 자로가 길을 가다 망태기를 진 노인을 만나서는 제 선생님을 보지 못했습니까?’라고 하자 노인은 사지를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도 분간 못하는 자가 무슨 선생이란 말인가?’라고 말하더니 지팡이를 내려 세워놓고는 풀을 뽑았다. 자로가 이를 알리자 공자는 은자로구나.’라 하고는 다시 가보았으나 없었다.

 

孔子遷于蔡三歳, 呉伐陳. 楚救陳, 軍于城父. 聞孔子在陳蔡之閒, 楚使人聘孔子. 孔子将往拝礼, 陳蔡大夫謀曰:「孔子賢者, 所刺譏皆中諸侯之疾. 今者久留陳蔡之閒, 諸大夫所設行皆非仲尼之意. 今楚, 大国也, 來聘孔子. 孔子用於楚, 則陳蔡用事大夫危矣.於是乃相與発徒役囲孔子於野. 不得行, 絶糧. 従者病, 莫能興. 孔子講誦弦歌不衰. 子路慍見曰:「君子亦有窮乎?」孔子曰:「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공자천우채삼세 오벌진. 초구진 군우성보. 문공자재진채지한 초사인빙공자. 공자장왕배례 진채대부모왈 공자현자 소자기개중제후지질. 금자구유진채지한 제대부소설행개비중니지의. 금초 대국야 래빙공자. 공자용어초 즉진채용사대부위의어시내상여발도역위공자어야. 부득행 절량. 종자병 막능흥. 공자강송현가불쇠. 자로온견왈 군자역유궁호공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공자가 채나라로 옮긴 지 3, 오나라가 진()나라를 쳤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구하러 나서 성보(城父)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공자가 진과 채나라 사이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초나라가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가 가서 보려고 하자 진, 채의 대부들이 공자는 현자로서 그의 비평은 모두 제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진, 채 사이에 오래 머물렀지만 여러 대부들의 언행은 중니의 뜻에 하나도 맞지 않았다. 지금 큰 나라인 초가 공자를 초빙하려 한다. 공자가 초나라에 기용되면 진, 채의 힘 있는 대부들이 위험해질 것이다.’라고 의논했다. 이에 서로 한통속이 되어 무리를 일으켜 공자를 야외에서 포위하니 가지도 못하고 양식까지 떨어졌다. 따르는 사람들은 병이 나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러나 공자는 강의를 하고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군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군자는 궁해도 지조를 지키지만 소인은 궁해지면 펄쩍펄쩍 뛰느니라.’라고 했다.

 

子貢色作. 孔子曰:「, 爾以予為多学而識之者與?」:「. 非與?」孔子曰:「非也. 予一以貫之.

자공색작. 공자왈 사 이이여위다학이식지자여연 비여공자왈 비야 여일이관지

 

자공의 표정이 바뀌자 공자는 (), 너는 내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자공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자 공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모든 걸 꿰뚫어 볼 핵심을 아는 것 뿐이다.’라고 했다.

 

孔子知弟子有慍心, 乃召子路而問曰:「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吾何為於此?」子路曰:「意者吾未仁邪人之不我信也. 意者吾未知邪人之不我行也.

공자지제자유온심 내소자로이문왈 시운 비시비호 솔피광야오도비사 오하위어차자로왈 의자오미인사 인지불아신야 의자오미지사 인지불아행야

 

공자는 제자들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자로를 불러 ()들소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는구나라고 했다. 나의 도가 잘못되었더란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자로가 우리가 아직 인()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했다.

 

孔子曰:「有是乎! , 譬使仁者而必信, 安有伯夷叔斉使知者而必行, 安有王子比干?」

공자왈 유시호 유 별사인자이필신 안유백이숙제 사지자이필행 안유왕자비간

 

공자는 그럴 리가! 유야, ()을 실천하는 사람이 반드시 믿음을 얻는다고 한다면 어째서 백이(伯夷), 숙제(叔齊) 같은 사람이 나왔겠느냐?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통한다면 어째서 왕자 비간(比干) 같은 사람이 생겼겠느냐?’

 

子路出, 子貢入見. 孔子曰:「, 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吾何為於此?」子貢曰:「夫子之道至大也, 故天下莫能容夫子. 夫子蓋少貶焉?」

자로출 자공입견. 공자왈 사 시운 비시비호 솔피광야오도비사 오하위어차지공왈 부자지도지대야 고천하막능용부자 부자개소핍언

 

자로가 나가자 자공이 들어왔다. 공자가 (), 들소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는구나라고 했다. 나의 도가 잘못되었더란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자공은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조금 낮추시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孔子曰:「, 良農能稼而不能為穡, 良工能巧而不能為順. 君子能脩其道, 綱而紀之, 統而理之, 而不能為容. 今爾不脩爾道而求為容. , 而志不遠矣!

공자왈 사 양농능가이부능위색 양공능교이불능위순. 군자능수기도 망이기지 통이리지 이불능위용. 금이불수이도이구위용. 사 이지불원의

 

공자는 사야, 농사를 잘 짓는 농부라 해도 좋은 수확을 거두는 것은 아니고, 솜씨 좋은 장인이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꼭 들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군자가 자신의 도를 잘 닦아서 일목요연하고 조리있게 잘 갖추어 놓았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너는 너의 도를 닦지 않고 받아들여지기 만을 원하는구나. 사야, 네 뜻하는 바가 그렇게 멀지 못해서야!’라고 했다.

 

 

子貢出, 顔回入見. 孔子曰:「, 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吾何為於此?」顔回曰:「夫子之道至大, 故天下莫能容. 雖然, 夫子推而行之,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夫道之不脩也, 是吾醜也. 夫道既已大脩而不用, 是有国者之醜也.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孔子欣然而笑曰:「有是哉顔氏之子! 使爾多財, 吾為爾宰.

자공출 안회입견. 공자왈 회 시운 비시비호 솔피광야오도비사 오하위어차안회왈 부자지도지대 고천하막능용 수연 부자추이행지 불용하병 불용연후견군자 부도지불수야 시오추야. 부도기이대수이불용 시유국자지추야. 불용하병 불용연견군자공자흔연이소왈 유시재안씨지자 사이다재 오위이재

 

자공이 나가고 안회가 들어왔다. 공자가 회야, 들소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는구나라고 했다. 나의 도가 잘못되었더란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안회는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그것을 계속 밀고나가 실행하신다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무슨 걱정입니까? 받아들여지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은 것은 나의 부끄러움이지만, 도를 크게 닦아 놓았는데도 쓰이지 못하는 것은 나라의 부끄러움입니다.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무슨 걱정입니까? 받아들여지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공자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웃으면서 정말이지 네가 있었구나, 안씨 집의 아들이여! 네게 재산이 많다면 내가 그를 다스려 줄 텐데라고 했다

 

於是使子貢至楚. 楚昭王興師迎孔子, 然後得免.

어시사자공지초. 초소왕흥사영공자 연후득면.

 

그리고는 자공을 초나라에 보내 초나라 소왕이 병사들을 동원하여 공자를 맞이하고서야 그 곤란한 지경을 면할수 있었다.



 

昭王将以書社地七百里封孔子. 楚令尹子西曰:「王之使使諸侯有如子貢者乎?」:「無有.」「王之輔相有如顔回者乎?」:「無有.」「王之将率有如子路者乎?」:「無有.」「王之官尹有如宰予者乎?」:「無有.

소왕이 서사(書社)의 땅 7백 리로 공자를 봉하려 했다. 초의 영윤 자서(子西)왕의 사신으로 제후에게 보낼 사람으로 자공만한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왕은 없지.”라고 했다. “왕을 보필할 사람으로 안회만한 자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없지.”라고 했다. “왕의 군대를 이끌만한 사람으로 자로만한 자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없지.”라고 했다. “왕의 관리로 재여만한 자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없지.”라고 했다.

 

且楚之祖封於周, 号為子男五十里. 今孔丘述三五之法, 明周召之業, 王若用之, 則楚安得世世堂堂方數千里乎夫文王在豊, 武王在鎬, 百里之君卒王天下. 今孔丘得拠土壌, 賢弟子為佐, 非楚之福也.昭王乃止.

자서는 그리고 초의 선조께서 주에게 봉해질 때도 자작과 남작에 50리 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공구가 삼왕의 법을 말하고 주공, 소공의 업적을 밝힌다 하여 왕께서 그를 기용한다면 초가 어찌 대대손손 수 천 리 땅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문왕은 풍()에서, 무왕은 호()에서 일어났는데, 불과 백 리의 군주로 끝내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 공구가 땅을 차지하고 유능한 제자들이 돕게 되면 이는 초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소왕이 바로 그만 두었다.

 

其秋, 楚昭王卒于城父.

그해 가을, 초 소왕이 성보(城父)에서 죽었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178) :「鳳兮鳳兮, 何徳之衰!179) 往者不可諫兮,180) 來者猶可追也!181) 已而已而, 今之従政者殆而!182)

초의 광인 접여(接與)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를 지나가다가 이렇게 노래했다. 봉새여 봉새여 왜 이리 덕이 쇠했는가 지난 일이야 다시 연습할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이야 잡을 수 있지 않겠니? 됐다, 됐어! 지금의 정치하는 자들, 방법이 없구나!

 

孔子下, 欲與之言.183) 趨而去, 弗得與之言.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말해보려 했으나 빠르게 자리를 떠서 그와 말을 할 수 없었다.

 

於是孔子自楚反乎衛. 是歳也, 孔子年六十三, 而魯哀公六年也.

이에 공자는 초에서 위()로 돌아왔다. 이 해(기원전 489) 공자의 나이는 63세였고, 노 애공 6년이었다.

 

 

其明年, 呉與魯会繒, 徴百牢.184) 太宰嚭召季康子. 康子使子貢往, 然後得已.

 

그 이듬해 오가 노와 증()에서 회맹하여 백뢰(百牢)를 요구했다. (오의) 태재 백비가 계강자(季康子)를 불렀다. 강자가 자공을 보내고서야 일이 마무리되었다.

 

 

孔子曰:「魯衛之政, 兄弟也.是時, 衛君輒父不得立, 在外, 諸侯數以為譲. 而孔子弟子多仕於衛, 衛君欲得孔子為政. 子路曰:「衛君待子而為政, 子将奚先?」孔子曰:「必也正名乎!子路曰:「有是哉, 子之迂也! 何其正也?」

공자왈 노위지정 형제야시시 위군첩부부득립 재외 제후수이위양. 이공자제자디시어위 위군욕득공자위정. 자로왈 위군대자이위정 자장해선공자왈 필야정명호자로왈 유시재 자지우야 하기정야

 

공자가 노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와 같다.’고 했다. 이때 위나라의 주군 첩()의 아버지가 외국에 있어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제후들이 여러 차례 (위를) 견책했다. 그런데 공자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위에서 벼슬을 하고 있어 위나라의 주군은 공자를 정치에 참여시키고 싶었다. 자로가 위나라의 주군이 선생님을 모셔 정치를 맡긴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우는 일부터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자로가 정말이군요, 선생님더러 우직하다더니! 무엇을 바로 세운단 말씀입니까?’라고 했다.

 

孔子曰:「野哉由也! 夫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礼樂不興, 礼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錯手足矣. 夫君子為之必可名, 言之必可行.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공자왈 야재유야 부명부정즉언불순 언불순즉사불성 사불성즉예악불흥 예악불흥즉형벌불중 형벌불중즉민무소착수족의. 부군자위지필가명 언지필가행. 군자어기언 무소순이이의

 

공자가 유야! 말이 거칠구나 무릇 명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예악을 일으킬 수 없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하게 된다. 형벌이 적절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된다. 무릇 군자는 무엇인가를 하면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무엇인가를 말하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따라서 군자는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허튼 곳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其明年, 冉有為季氏将師, 與斉戦於郎, 克之. 季康子曰:「子之於軍旅, 学之乎性之乎?」冉有曰:「学之於孔子.季康子曰:「孔子何如人哉?」対曰:「用之有名播之百姓, 質諸鬼神而無憾. 求之至於此道, 雖累千社, 夫子不利也.

기명년 염유위계씨장사 여제전어랑 극지. 계강자왈 자지어군여 학지호 성지호염유왈 학지어공자계강자왈 공자하여인재대왈 용지유명 파지백성 질제귀신이무감. 구지지어차도 수루천사 부자불리야

 

그 이듬해 염유(冉有)가 계씨(季氏)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낭()에서 싸워 물리쳤다. 계강자가 그대는 군대 일을 배웠소, 아니면 타고난 것이오?’라고 물었다. 염유가 공자에게 배웠습니다.’라고 하니 계강자가 공자가 어떤 사람이오?’라고 묻자 염유는 그 분을 기용하면 명분이 서고, 백성에게 알리고 귀신들에게 물어도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분께 이렇게 하길 바라고 25천 가구의 땅으로 모셔온다 해도 선생님께서는 좋은 일이라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康子曰:「我欲召之, 可乎?」対曰:「欲召之, 則毋以小人固之, 則可矣.而衛孔文子将攻太叔, 問策於仲尼. 仲尼辞不知, 退而命載而行, :「鳥能択木, 木豈能択鳥乎!文子固止. 会季康子逐公華公賓公林, 以幣迎孔子, 孔子帰魯.

강자왈 아욕소지 가호대왈 욕소지 즉무이소인고지 즉가의이위공문자장공태숙 문책어중니. 중니사부지 퇴이명재이행 왈 조능택목 목이능택조호문자고지. 회계강자축공화 공빈 공림 이폐영공자 공자귀노.

 

강자가 내가 그 분을 모시고 싶은데 가능하겠소?’라고 하자 부르고자 하신다면 소인배들이 그 분을 막지 않게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한편 위()나라의 공문자(孔文子)가 태숙(太叔)을 공격하려고 계책을 중니에게 물었다. 중니는 모른다며 사양하고는 물러나 수레를 준비시켜 떠나면서 새가 나무를 고를 수는 있지만 나무가 어찌 새를 고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문자가 한사코 붙잡았으나 마침 계강자가 공화(公華), 공빈(公賓), 공림(公林)을 시켜 예물을 갖추어 공자를 맞이하여 공자는 노로 돌아왔다.

 

 

 

 


<공자의 귀향과 경전 정리>


孔子之去魯凡十四歳而反乎魯.

공자지거노범십사세이반호노.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魯哀公問政, 対曰:「政在選臣.季康子問政, :「挙直錯諸枉, 則枉者直.康子患盗, 孔子曰:「苟子之不欲, 雖賞之不窃.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노애공문정 대왈 정재선신계강자문정 왈 거직착제왕 즉왕자직강자환도 공자왈 순자지불욕 수상지불절; 연노종불능용공자 공자역불구사.


노나라 애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정치는 신하를 선발하는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곧은 사람을 천거하여 굽은 사람들과 섞이게 하면 굽은 사람들도 곧아집니다.’라고 했다. 계강자가 도둑을 걱정하자 공자는 그대가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상을 주고 훔치라고 해도 훔치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하지만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기용하지 못했고, 공자 역시 벼슬을 구걸하지 않았다.


孔子之時, 周室微而礼樂廃, 詩書欠. 追跡三代之礼, 序書傳, 上紀唐虞之際, 下至秦繆, 編次其事. :「夏礼吾能言之, 杞不足徴也. 殷礼吾能言之, 宋不足徴也. , 則吾能徴之矣.

공자지시 주실미이예악폐 시서흠. 추적삼대지례 서서전 상기당우지제 하지진목 편타기사 왈 하례오능언지 기부족징야. 하례오능언지 송부족징야. 족 즉오는징지의


공자 때 주나라 왕실이 쇠약해져 예악은 무너지고 가 온전치 못했다.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하여 서전(書傳)(상서)의 남은 문장을 정리하여 위로 요, 순부터 아래로 진()나라 목공(繆公)까지의 일들을 순서대로 배열하고는 하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기()나라는 증명하기에 (자료가) 부족하다. 은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는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자료가) 충분하다면 내가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観殷夏所損益, :「後雖百世可知也, 以一文一質. 周監二代, 郁郁乎文哉. 吾従周.故書傳礼記自孔氏.

관은하소손익 왈 후수백세가지야 이일문일질. 주감이대 욱욱호문재. 오종주 고서전 예기자공씨

 

또 은과 하의 변화를 살피고는 ‘100세대가 지난다 해도 (그 예제를) 알 수 있는 바, 늘 꾸밈과 질박함이 교체되었다.’라 했고, 주는 위 2대를 거울삼으니 그 문화가 풍부하고 다채로웠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라고도 했다. 이렇게 해서 서전예기(禮記)가 공자로부터 나왔다.


孔子語魯大師:「樂其可知也. 始作翕如, 縦之純如, 皦如, 繹如也, 以成.」「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공자어노대사 악기가지야 시작흡여 종지순여 교여 역여야 이성오자위반노 연수악정 아송각득기소


공자가 노의 태사에게 음악을 알 수는 있다. 여러 음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부드럽고 맑은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져 마무리되는 것이다.’라 했고 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후 음악을 바로잡아 ()()이 각기 자기 자리를 찾았다.’라고도 했다.


古者詩三千余篇, 及至孔子, 去其重, 取可施於礼義, 上采契后稷, 中述殷周之盛, 至幽厲之欠, 始於衽席, 故曰関雎之亂以為風始, 鹿鳴為小雅始, 文王為大雅始, 清廟為頌始.

고자시삼천여편 급지공자 거기중 취가시어예의 상채설후직 중술은주지성 지유여지흠 시어임석 고왈 관저지란이위풍시 녹명위소아시 문왕위대아시 청묘위송시


옛날에는 ()3천여 편이었으나 공자에 이르러 그 중복된 것을 없애고 예의에 맞는 것만을 취하니 위로는 설()과 후직(后稷)에 관한 것을 채록하고, 중간은 은, 주의 번성을 서술하여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쇠퇴에까지 이르렀다. 부부 생활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관저(關雎)(:풍속)의 첫 편이 되고, 녹명(鹿鳴)소아(小雅)의 시작이 되고, 문왕(文王: 주나라의 시조)대아(大雅)의 시작이며, 청묘(淸廟)()의 시작이다.’라고 한 것이다.


* 関雎: 后妃之徳也, 風之始也, 所以風天下而正夫婦也

鹿鳴: 宴群臣嘉賓也. 既飲食之, 又実幣帛筐篚以将其厚意, 然後忠臣嘉賓得尽其心矣


三百五篇孔子皆弦歌之, 以求合韶武雅頌之音. 礼樂自此可得而述, 以備王道, 成六藝.

삼백오편공자개현가지 이구합소무아송지음. 예악자차가득이술 이비왕도 성육예.


305편에 공자가 모두 악보를 붙임으로써 (), (), (), ()의 음악이 일치되었다. 예악이 이렇게 기술됨으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 六藝: 고대(古代) 중국(中國) 교육(敎育)의 여섯 가지 과목(科目), , (), (), (), (), (), ()를 가리키는 말 동의어로 육학(六學)


孔子晩而喜易, 序彖説卦文言. 読易, 韋編三絶. :「仮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공자만이희역 서 당 계 상 설괘 문언. 독역 위절삼편 왈 가아수년 약시 아어역즉빈빈의.

공자가 만년에 ()을 좋아하여 (), (), (), 설괘(說卦), 문언(文言)편에 문장을 보탰다. 을 읽는데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만약 내게 몇 년이 더 있다면 내가 ()에 대해서도 경지를 이룰수 텐데.’라고 했다.


 

<공자의 학문과 교육관>

 

孔子以詩書礼樂教,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 如顔濁鄒之徒, 頗受業者甚衆.

공자이시서예액교 제자개삼천언 신통육예자칠십유이인. 여안탁추지도 파수업자심중.

공자는 (), (), (), ()을 가르쳤는데, 제자가 약 3천명에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나 되었다. 또 안탁추(顔濁鄒) 같이 수업 만 받는 사람은 더 많았다.

 

孔子以四教, , , . 絶四毋意, 毋必, 毋固, 毋我. 所慎, , . 子罕言利與命與仁. 不憤不啓, 挙一隅不以三隅反, 則弗复也.

공자이사교 문 행 충 신. 절사 무의 무필 무고 무아. 소신 제 전 질. 자한언리여명여인. 불분불계 거일우불이삼우반 즉불복야.

 

공자는 문(), (), (), () 네 가지를 가르쳤고, ‘함부로 억측하지 말 것’ ‘맹목적으로 긍정하지 말 것’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말 것’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지 말 것의 네 가지를 끊으라고 했다. 또 재계(齋戒), 전쟁, 질병에 대해서는 신중하라고 했다. 공자는 이익, 천명, 인에 대해서는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분발하지 않으면 계발해주지 않았고, 한 귀퉁이를 들었는데 세 귀퉁이를 짐작하지 못하면 반복하지 않았다.

 

其於郷党, 恂恂似不能言者. 其於宗廟朝廷, 辯辯言, 唯謹爾. , 與上大夫言, 誾誾如也與下大夫言, 侃侃如也.

기어향당 순순사불능언자. 기어종묘조정 변변언 유근이. 조 여상대부언 은은여야 여하대부언 간간여야.

향당(鄕黨)에서는 온화하고 공손한 것이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 종묘나 조정에서는 말이 정확히 분별하여 했고 조정에서 상대부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강직했으며, 하대부들과 이야기할 때는 친근하고 유쾌했다.

 

入公門, 鞠躬如也趨進, 翼如也. 君召使儐, 色勃如也. 君命召, 不俟駕行矣.

입고문 국궁여야 추진 익여야. 군소사빈 색발여야. 군소명 불사가행의.

 

조정 문을 들어갈 때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었고, 잰걸음으로 갈 때는 날개를 펼친 듯했다. 주군이 불러 손님을 대접하게 하면 돌연 안색을 바꿀 줄 알았고, 주군의 부름이 있으면 마차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출발했다.

 

魚餒, 肉敗, 割不正, 不食. 席不正, 不坐. 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어뇌 육패 할부정 불식. 석부정 불좌. 식어유상자지측 미상포야

 

생선이나 고기가 상하거나, 반듯하게 잘라 놓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자리가 반듯하지 못하면 앉지 않았다. 상을 당한 사람 옆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다.

 

是日哭, 則不歌. 見斉衰瞽者, 雖童子必変.

시일곡 즉불가. 견제쇠 고자 수동자필변.

 

곡을 한 날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을 입었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보면 어린 아이라도 안색을 고쳤다.

 

三人行, 必得我師.」「徳之不脩, 学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使人歌, , 則使复之, 然后和之.

삼인행 필득아사’ ‘덕지부수 학지불강 문의불능사 불선불능개 시오우야사인가 선 즉사복지 연후화지.

 

세 사람 중에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 ‘덕을 닦지 않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의로움을 듣고도 따르지 않고, 좋지 않은 것을 고치지 않는 것을 내가 걱정한다.’ 노래를 시켜 잘 하면 다시 부르게 한 다음 함께 불렀다.

 

子不語, , , .

공자어 괴 력 란 신.

 

공자는 괴이함, 폭력, 반란, 귀신은 말하지 않았다.

 

子貢曰:「夫子之文章, 可得聞也. 夫子言天道與性命, 弗可得聞也已.

자공왈 부자지문장 가득문야. 부자언천도여성명 불가득문야이

 

자공이 선생님께서 문장을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있지만, 선생님께서 천도(天道)나 성명(性命)을 말씀하신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顔淵喟然歎曰:「仰之弥高, 鑽之弥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礼, 欲罷不能. 既竭我才, 如有所立, 卓爾. 雖欲従之, 蔑由也已.

안연위연탄왈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부자순순연선유인 박아이문 약아이례 욕태불능 기갈아재 여유소립 탁이. 수욕종지 멸유야이

 

안연(顔淵)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구나. 앞에 계신가 하면 언제 뒤에 계신다. 선생님께서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끄신다. 문장으로 나를 박학하게 하시고, 예로 나를 단속하게 하시니 게으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내 재주를 한껏 발휘하지만 여전히 혼자 서 있는 것 같고, 따라 잡으려 해도 이를 방법이 없다.’라며 한탄했다.

 

達巷党人(童子):「大哉孔子, 博学而無所成名.子聞之曰:「我何執執御乎執射乎我執御矣.

달항당인동자왈 대재공자 박학이무소성명. 자문지왈 아하집 집어호 집사호 아집어의

 

달항(達巷)이란 마을의 어떤 사람이 위대하구나 공자여, 박학하지만 어느 분야에 명성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라고 했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내가 무엇으로 명성을 세울까? 마부가 될까? 사수가 될까? 내가 마부(가이드)가 되련다.’라고 했다.

 

牢曰:「子云不試, 故藝.

뢰왈 자운 불시 고예”’

 

자뢰는 선생님께서 내가 기용되지 못했기에 이런저런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하셨다.’고 했다.


 

 

<춘추와 공자의 죽음>

 

魯哀公十四年春, 狩大野. 叔孫氏車子鉏商獲獣, 以為不祥. 仲尼視之, :「麟也.取之.

노애공십사년춘 수대야. 숙손씨거자서상획수 이위불상. 중니시지 왈 린야취지.

노 애공 14(기원전 481) , 대야(大野)에서 사냥을 했다. 숙손씨(叔孫氏)의 마부 서상(鉏商)이 짐승을 잡았는데 상서롭지 못한 짐승이라고 여겼다. 중니가 그것을 듣고는 기린이다.’라고 하자 가지고 왔다.

 

:「河不出図, 雒不出書, 吾已矣夫!

하불출도 낙불출서 오이의부

 

공자가 황하에서 괘도(卦圖)가 나오지 않고, 낙수에서 서판(書版)이 나오지 않고 (기린이 잡히는) 걸 보니 나도 다했나보다!’라고 했다.

 

顔淵死, 孔子曰:「天喪予!及西狩見麟, :「吾道窮矣!喟然歎曰:「莫知我夫!子貢曰:「何為莫知子?」子曰:「不怨天, 不尤人, 下学而上達, 知我者其天乎!

안연사 공자왈 천상여급서수견린 왈 오도궁의위연탄왈 막지아부자공왈 하위막지자자왈 불원천 불우인 하학이상달 지아자기천호

 

안연이 죽자 공자는 하늘이 정말 나를 죽어라 하는구나!’라고 했다. 서쪽에서 잡아온 기린을 보고는 나의 도리도 이제 다 했구나!’라고 말하고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라며 탄식했다. 자공이 어째서 선생님을 몰라준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통달했으니 하늘만이 나를 알아주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斉乎!

불강기지 불욕기신 백이 숙제호

 

자신의 뜻을 낮추지 않고, 자신의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백이와 숙제나 같지 않나

 

柳下恵少連降志辱身矣.

유하혜 소연강지욕신의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했다.’

 

虞仲夷逸隠居放言, 行中清, 廃中権.

우중 이일은거방언 행중정 폐중권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숨어 지내면서도 거리낌 없이 말했는데 행동은 깨끗하고 권세에 머물지 않았다.’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아즉이어시 무가무불가

나는 그들과 달라 이도 저도 아니다.’

 

子曰:「弗乎弗乎, 君子病没世而名不称焉. 吾道不行矣, 吾何以自見於後世哉?」乃因史記作春秋, 上至隠公, 下訖哀公十四年, 十二公. 拠魯, 親周, 故殷, 運之三代. 約其文辞而指博.

자왈 불호불호 군자병무세이명불칭언. 오도불행의 오하이자견어후세재내인사기작춘추 상지은공 하흘애공십사년 십이공. 거노 친주 고은 운지삼대. 약기문사이지박.

 

공자가 아니다, 아니다! 군자는 세상에서 사라진 뒤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리를 행해지지 못했으니 내가 무엇으로 후세에 나를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으니 위로는 은공(隱公)에서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까지 열두 명의 국군을 포함하고 있다. 노나라에 살지만 주나라의 예에 가깝고, 은나라를 귀감으로 삼고, 삼대(,,)를 다뤘다. 기록에 준하지만 가리키는 건 방대하다.

 

故呉楚之君自称王, 而春秋貶之曰」;践土之会実召周天子, 而春秋諱之曰天王狩於河陽」:推此類以縄當世. 貶損之義, 後有王者挙而開之. 春秋之義行, 則天下亂臣賊子懼焉.

고오초지군자칭왕 이춘추핍지왈 천토지회실소주천자 이춘추위지왈 천왕수어하양추차류이승당세. 핍손지의 추유왕자거이개지. 춘추지의행 즉천하난신적자구언.

 

그래서 오와 초나라의 주군이 자칭 왕이라 하길래 춘추에서는 ()’로 깎아 내렸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에서는 실제로 주나라 천자를 불렀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피해 천자가 하양(河陽)에 사냥을 나갔다.’라고 하는 등 이런 기준으로 해당 시대의 시비를 판단했다. 이리 추천과 깍아내림은 후세에 뜻을 이으려는 것이요 후세 왕들에게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춘추의 대의가 드러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겁을 낼 것이다.

 

孔子在位聴訟, 文辞有可與人共者, 弗独有也. 至於為春秋, 筆則筆, 削則削, 子夏之徒不能賛一辞.

공자재위청송 문사유가여인공자 불독유야. 지어위춘추 필즉필 삭즉삭 자하이도불능찬일사.

 

공자가 벼슬에 있으면서 소송을 처리할 때는 글귀 하나도 다른 사람과 함께 상의했지 혼자 판단하지 않았는데 춘추를 쓸 때도 기록할 것을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조차 따로 찬(:가감하거나 하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弟子受春秋, 孔子曰:「後世知丘者以春秋, 而罪丘者亦以春秋.

제자수춘추 공자왈 후세지구자이춘추 이죄구자역이춘추

 

제자들이 춘추를 받아들 때, 공자는 훗날 이 구를 알아준다면 그것은 춘추때문일 것이고, 이 구를 비난한다면 그것도 춘추때문일 것이다.’라고 했다.

 

明歳, 子路死於衛. 孔子病, 子貢請見. 孔子方負杖逍遥於門, :「, 汝來何其晩也?」孔子因歎, 歌曰:「太山壊乎! 梁柱摧乎! 哲人萎乎!

명세 자로사어위. 공자병 자공청견. 공자방부장소요어문 왈 사 여래하기만야공자인탄 가왈 태산괴호 양주최호 철인위호

 

이듬 해(기원전 480), 자로(子路)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공자가 병이 났고 자공이 뵙기를 청했다. 공자가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고 있다가 (), 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라며 탄식하며 노래하길 태산이 무너졌고 기둥이 부러졌다 철인(哲人: 현명한 자로)이 사그러 졌다!’ 했다.

 

因以涕下. 謂子貢曰:「天下無道久矣, 莫能宗予. 夏人殯於東階, 周人於西階, 殷人両柱閒. 昨暮予夢坐奠両柱之閒, 予始殷人也.後七日卒.

인이체하. 위자공왈 천하무도구의 막능종여. 하인빈어동계 주인어서계 은인양주간. 작모여몽좌전양주지간 여시은인야후칠일졸.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공에게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는구나!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다 관을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다 모셨으며, 은나라 두 기둥 사이에다 모셨다. 어제 저녁 꿈에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 받는 꿈을 꾸었다. 내 선조가 은나라 사람이니라.’라고 했다. 7일 뒤 세상을 떠났다.

 

孔子年七十三, 以魯哀公十六年四月己丑卒.

공자칠십삼 이노애공십육년사월기축졸.

 

공자 나이는 73세였고 노나라 애공 164월 기축일이었다.(기원전 479)

 

哀公誄之曰:「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屏余一人以在位, 煢煢余在疚. 嗚呼哀哉! 尼父, 毋自律!

애공뢰지왈 민천부조 불은유일노 비병여일일인이재위 경경여재구. 오호애재 니부 무자율

 

애공이 공자를 애도하며 하늘이 나를 가련하게 여기지 않으시어 이 노인마저 남기지 않고 데려가시니 나를 이 고뇌스런 자리에 놓아두시는구나! ,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부(尼父), 나로 홀로 설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子貢曰:「君其不没於魯乎! 夫子之言曰:『礼失則昏, 名失則愆. 失志為昏, 失所為愆.生不能用, 死而誄之, 非礼也. 余一人, 非名也.

자공왈 군기불무어노호 부자지언왈 예실즉혼 명실즉건 실지위혼 실소위건생불능용 사이뢰지 비례애. 여일인비명야.

 

자공이 우리 주군 애공은 노나라에서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말씀에 예를 잃으면 어리석어지고, 명분을 잃으면 허물이요 어리석으면 뜻을 잃게 되고, 잘못을 범하면 갈 곳을 잃는다고 하셨다. 살아 계실 때 기용하지 않았으면서 죽은 다음 애도하다니 예가 아니다. “나 혼자만이라고 한 것은 명분이 없다.’고 했다.

 

孔子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三年. 三年心喪畢, 相訣而去, 則哭, 各复尽哀或复留. 唯子贛廬於冢上, 凡六年, 然後去. 弟子及魯人往従冢而家者百有余室, 因命曰孔里.

공자장노성북사상 제자개복삼년. 삼년심상필 상결이거 즉곡 각복진애 혹복유. 유자공랴어총상 범육냔 연후거. 제자급노인왕종총이가자백유여실 인명왈공리.

 

공자는 노의 북쪽 사수(泗水)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간 복상했다. 3년 동안 애도와 상을 마치고 서로 헤어지는데 통곡을 하고 각자 다시 애도를 다했다. 그냥 남은 제자도 있었다. 오직 자공만이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6년을 지킨 다음 떠났다. 제자들과 노니리 사람들로 무덤 근처로 와서 집을 짓고 산 사람이 100집이 넘었다. 그래서 공자 마을이라 불렀다.

 

魯世世相傳以歳時奉祠孔子冢, 而諸儒亦講礼郷飲大射於孔子冢. 孔子冢大一頃. 故所居堂弟子内, 後世因廟蔵孔子衣冠琴車書, 至于漢二百余年不絶. 高皇帝過魯, 以太牢祠焉. 諸侯卿相至, 常先謁然後従政.

노세세상전이세시봉사공자총 이제유역강예향음대사어공자총. 공자총대일경. 고소거당제자내 후세인묘장공자의관금거서 지우한이백여년부절. 고황제과노 이태뢰사언. 제후경상지 상선알연후종정.

 

노는 대대손손 사시사철 공자 무덤에 제사를 드렸고, 유자들도 와서 공자의 집에서 예를 토론하고 향음(鄕飮)과 향사(鄕射)를 행했다. 공자의 무덤()은 크기가 1()이나 되었다. 살던 집과 제자들이 거처하던 곳은 후세에 사당이 되어 공자의 의관, 악기, 수레, 책을 소장했는데 한나라 때 이르기까지 200년 넘게 끊이질 않았다. 고황제(高皇帝, 유방)가 노나라를 지나면서 태뢰(太牢)로 제사를 지냈다.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참배한 다음 정무에 임했다.

 

<공자의 후손>

 

孔子生鯉, 字伯魚. 伯魚年五十, 先孔子死.

공자생이 자백어. 백어년오십 선공자사.

 

공자는 이()를 낳았는데, 자를 백어(伯魚)라 했다. 백어는 나이 50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伯魚生伋, 字子思, 年六十二. 嘗困於宋. 子思作中庸.

백어생급 자자사 년육십이. 상곤어송. 자사작중용.

 

백어는 급()을 낳았는데, 자를 자사(子思)라 했다. 62세까지 살았다. 일찍이 송에서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자사는 중용(中庸)’을 지었다.

 

子思生白, 字子上, 年四十七. 子上生求, 字子家, 年四十五. 子家生箕, 字子京, 年四十六. 子京生穿, 字子高, 年五十一. 子高生子慎, 年五十七, 嘗為魏相.

자사생백 자자상 년사십칠. 자상생구 자자가 년 사십오. 자가생기 자자경 년사십육. 자경생천 자자고 년오십일. 자고생자신 년오십칠 상위위상.

 

자사는 백()을 낳았는데, 자를 자상(子上)이라 했고 47년을 살았다. 자상은 구()를 낳았는데, 자를 자가(子家)라 했고 45세까지 살았다. 자가는 기()를 낳았다. 자를 자경(子京)이라 했고, 46세까지 살았다. 자경은 천(穿)을 낳았다. 자를 자고(子高)라 했고, 51세까지 살았다. 자고는 자신(子愼)을 낳았다.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子慎生鮒, 年五十七, 為陳王渉博士, 死於陳下.

자신생부 년오십칠 위진왕섭박사 사어진하.

 

자신은 부()를 낳았다. 57세까지 살았고, 진왕(陳王) ()의 박사(博士)를 지냈고, ()나라에서 죽었다.

 

鮒弟子襄, 年五十七. 嘗為孝恵皇帝博士, 遷為長沙太守. 長九尺六寸.

부제자양 년오십칠. 상위효혜황제박사 천위장사태수. 장구척육촌.

 

부의 동생 자양(子襄)57세까지 살았다. 일찍이 효혜황제(孝惠皇帝)의 박사가 되었다가 장사(長沙)의 태수로 옮겨갔다. 키가 96촌이었다.

 

子襄生忠, 年五十七. 忠生武, 武生延年及安国. 安国為今皇帝博士, 至臨淮太守, 蚤卒. 安国生卬, 卬生驩.

자양생충 년오십칠. 중생무 무생연년급안국. 안국위급황제박사 지임회태수 조졸. 안국생앙 앙생권.

 

자양은 충()을 낳았는데, 57세까지 살았다. 충은 무()를 낳았고, 무는 연년(延年)과 안국(安國)을 낳았다. 안국은 지금의 황제의 박사가 되었다가, 임회(臨淮) 태수에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죽었다. 안국은 앙()을 낳았고, 앙은 환()을 낳았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詩有之:「高山仰止, 景行行止.雖不能至, 然心郷往之. 余読孔氏書, 想見其為人. 適魯, 観仲尼廟堂車服礼器, 諸生以時習礼其家, 余祗迴留之不能去云. 天下君王至于賢人衆矣, 當時則栄, 没則已焉. 孔子布衣, 傳十余世, 学者宗之. 自天子王侯, 中国言六藝者折中於夫子, 可謂至聖矣!

태사공왈 시우지 고산앙지 경행행지수불능지 연심향왕지. 여독공씨서 상견기위인. 적노 관중니묘당처복예기 제생이시습예기가 여지회유지불능거운. 천하군왕지우현인중의 당시즉송 무즉이언. 공자포의 전십여세 학자종지. 자천자왕후 중국언육예자절중어부자 가위지성의.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 시경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고 했다. 비록 거기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그곳을 향해 있다. 내가 공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사람을 생각했다. 노에 가서 중니의 사당에서 수레, 의복, 예기를 보았고, 유생들이 때마다 그 집에서 예를 익히는 것도 보았는데, 내가 공경심에서 그곳을 배회하며 떠날 수가 없었다. 많은 천하 군왕들과 현인들이 그 당시에는 영화를 누렸으나 죽고 나면 그만이었다. 공자는 평민이었지만 10여 대가 지나도록 학자들이 떠받고 있다. 천자왕후는 물론 중국에서 6예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공자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다. 지극한 성인이라 할 수밖에 없구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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