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계
* 勝戰計(승전계)
승전계(勝戰計)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구비되었을 때 취하는 작전을 의미한다. 적군과 아군 전력에 관계없이 주도면밀한 계획과 기발한 지략으로 필승의 전세를 굳힌다.
第 1 計 瞞天過海(만천과해) : 하늘(왕)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備周則意怠 常見則不疑 陰在陽之內 不在陽之對 太陽太陰.
비주즉의태 상견즉불의 음재양지내 부재양지대 태양태음.
두루 준비된 자는 지쳐서 쉴 것을 생각하는 법이다. 눈에 익은 것에는 방심하고 의심하지 않는 법이고.... 어두운 면은 밝은 면에 가려져 있는 것이지 밝고 어두움 으로 맞선 것 아니다. 큰 밝음은 큰 어두움이다.
'만천과해'의 원뜻은 낯 선 현장에 적응 못하는 우두머리를 속여 무사히 바다를 건넌다는 뜻으로, 현장 감각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당태종(이세민)은 장사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병력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방으로 나아가 송정관을 공략했다. 이어 요동으로 진격하는 눈앞에 큰 강이 펼쳐져 있었다. 당태종은 이를 보고 "보라 요하의 물이다 이미 도성에서 5천리나 나와 있는 판인데 ..."라고 한숨을 쉬었다.
당태종은 이 물을 건너기 위해 각 군 장수들을 모아 계략을 논의했다. 그때 경덕이라는 장수가 총사령관인 장사귀를 추천하며 "장사귀에게 물어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장사귀는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모두 해산하였다. 막사에 돌아온 장사귀는 참모인 유군묘를 불러 묘책을 논의하였다.
유근묘는 다시 설인귀를 추천하였으며 설인귀는 장사귀에게 "제가 한 계책을 써서 물살을 내일 잠시동안 보이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장사귀는 벌떡 일어나서 설인귀의 손목을 잡으며 "황제 앞에 가서 그대를 뵈옵도록 할 터 인데 어떻게 여쭈어야 되겠는가? 라고 하자 설인귀가 그의 귀에 뭔가 속삭이자 장사귀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날 각 군 장수들이 다시 황제 앞에 소집되고 당태종은 바다를 건널 계책을 물었다. 이때 가까이 있던 신하가 주상하기를 "이 근처에 사는 한 노인이 황제께서 친히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노인의 말에 의하면 30만 명분의 식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라고 하자 당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노인을 장막 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내막을 듣고 당태종은 친히 백관들을 이끌고 해변가로 가게 되었다. 앞을 보자 약 1만 호의 집들이 색깔도 선명한 막으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인은 당태종을 모시고 그 중의 한집으로 들어서자 자수로 만든 선명한 막이 둘러쳐 있고 마루에는 백관들이 서로 술을 권하며 매우 심기가 좋았다.
사면에는 바람소리와 파도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마침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이 흔들리고 몸이 기울기 시작했다. 당태종은 까닭을 몰라 장막을 열게 했다. 눈앞에는 넓고 넓은 푸른 바다가 전개되어 있었다. 당태종은 당황하여 물었다. "아니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가?" 장사귀가 일어나서 "지금 황제께서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바다를 건너는 계(計) 입니다. 한번 바다의 세(勢)를 얻으면 여기 30만 명의 병력이 배를 타고 동쪽해안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상 하였다.
즉 1만 호의 집은 1만 척의 배를 위장한 것이며 당태종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임금을 속여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여기서 천(天)은 황제를 뜻하는 것이다.
- 백제왕을 속인 바둑의 귀재 도림
만천과해(滿天過海)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감쪽같이 속여 뜻을 이루는 계략이다. 만천은 하늘의 속임이니 하늘같은 왕을 속여 백제를 망치게 한 도림의 얘기....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도림 스님을 첩자로 이용했다. 왕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도림은 그날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어느덧 바둑에 정통해진 도림은 백제 개로왕을 찾아갔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나왔다고 거짓으로 고한 다음 "저는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그 묘리를 터득했사오니 원컨데 폐하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내려 주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바둑에 미치다시피 한 백제 개로왕은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즉시 도림을 받아들이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과연 도림의 기력은 신기에 가까웠다. 백제왕은 도림을 국수로 삼고 상객으로 대접하면서 이렇게 늦게 서야 그를 만난 것을 오히려 안타깝게 생각했다. 왕과 더불어 매일 바둑을 두다보니 두 사람 사이는 매우 친밀해졌고 도림의 말이라면 무엇이나 믿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도림은 백제 개로왕에게 이렇게 고했다. "신은 이국인 이온데 폐하께서 이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니 그 보답으로 한 말씀 올리고자 하나이다"하고는 "폐하의 나라는 사방이 산악과 하해(河海)로 둘러싸여 그 누구보다도 넘나볼 수 없는 천하의 요새입니다. 그러하오나 안으로는 성곽과 궁전이 허술하게 버려져 있고 선왕의 뼈마저 길바닥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를 빨리 수습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백제왕은 도림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곧 백성을 징발하여 궁궐을 장엄하게 짓고 부왕의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린 다음 거대한 성을 쌓고 목책까지 만들어 세우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로 인해 백제의 경제는 드디어 바닥나고 백성들이 피폐하여 국력이 쇠퇴해지고 말았다. 이때 도림은 은밀히 백제를 탈출하여 고구려로 넘어가 장수왕에게 이를 소상히 보고했다.
장수왕은 때를 놓칠세라 대군을 몰아 백제를 질풍같이 침공하니 대경실색한 백제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불러 "내가 어리석어 간사한 중놈 말을 듣다가 마침내 이 꼴이 되었구나"하고 탄식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곱 주야를 사투했지만 백제는 참패했고 개로왕은 겨우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달아나다 추격해온 고구려 장수들에게 잡혀서 아단성 아래에서 목이 베어졌다.
- 결정권자의 우유부단함이 승기를 막을땐 결정권자를 속여서라도 앞세우라는 뜻...
역으로 치우친 결정권이라면 바로 그 결정권자의 결정이 허점일 수 있다는 뜻
第 2 計 圍魏救趙(위위구조): 위(魏)를 포위하여 조(趙)를 구하다.
共敵不如分敵 敵陽不如敵陰
공적불여분적 적양불여적음
적을 뭉치게 하는 것보다 나뉘게 하는게 좋고 드러내놓고 적과 대치하기 보다 은밀히 대적함이 낫다.
이 계책은 전국시대 손빈(孫臏)의 “圍魏救趙(위위구조)” 고사에서 나왔다.
BC 353년, 위(魏)나라 대장 방연(龐涓)은 대군을 이끌고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의 도성 한단(邯郸)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였다. 조나라의 구원 요청이 있자 제(齊)나라는 전기(田忌)를 총대장, 손빈을 군사로 하여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손빈은 위나라가 주력 부대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므로 국내는 틀림없이 비워 있을 것인 바,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먼저 공격하면 위군은 반드시 회군해서 수도를 구하려 할 것이며 따라서 조나라에 대한 포위도 자연히 풀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받아 들여 제나라 군을 이끌고 직접 대량으로 달려 가자 방연은 할 수 없이 한단을 포기하고 위군을 이끌고 주야로 달려 대량으로 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회군 하는 도중, 방연은 제나라 군의 매복을 만나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 “군사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治兵如治水)”고 하였다. 세력이 강대한 적이 공격해 올 때 무작정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그 보다는, 그 예봉을 피해서 적의 약점을 공격해서 그를 견제하거나, 급소를 습격함으로써 그를 위협하고, 혹은 우회해서 적의 배후를 타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되면, 적은 할 수 없이 본래의 목표를 포기하고 몸을 돌려 자신의 위난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조 나라”는 그냥 구해지는 것이다.
第 3 計 借刀殺人(차도살인):
이 계략은 손괘에서 응용되어 나온 것이다. '차도살인'을 직역하면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자기의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모순을 이용하여 교묘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격파하는 계략을 말한다. 남의 손에 코풀기 라고 할 수 있겠다.
삼국 시대 예형이 조조를 비방하자 조조가 공융에게 말했다. "예형은 소인으로 예의를 모른다. 그를 죽이는 것은 참새나 쥐를 죽이는 것보다 쉽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그를 죽이면 틀림없이 나에게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없다는 평판이 나게 될 것이다. 형주의 유경승은 생각이 좁고 성질이 급한 자이니, 그를 시키면 예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조조는 즉시 예형을 강제로 말에 태워 기병 두 사람을 호위시켜 유경승에게 보냈다. 그후 과연 유경승의 부장 황조가 거만한 예형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第 4 計 以逸待勞(이일대로):
쉬면서 힘들 때를 기다려라.
困敵之勢, 不以戰; 損刚益柔
곤적지세, 부이전; 손강익유
적의 기세에 눌리면 막바로 싸우지 말고 유화국면을 만들어라.
이 계책은 손자병법 군쟁편(軍爭篇)에서 나왔다.
손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멀리서 온 적을 상대하고, 우리는 편안히 쉰 상태에서 피곤한 적을 상대하며, 우리는 배불리 먹은 상태에서 굶주린 적을 상대한다. 이것이 바로 전투력을 장악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전쟁 터에 도착해서 적을 기다리게 되면 침착해 지고 주도적이 되지만, 늦게 전쟁 터에 도착하게 되면 화급히 전투에 임해야 되니 피로하고 피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유능한 작전가는 항상 적을 움직이게 하지 절대 자기가 적에 의해 움직이는 법이 없다.
- BC 154년, 한 경제(景帝)는 주아부에게 군사를 이끌고 吳나라 왕 유비(劉濞 역자 주 :삼국지의 유비가 아님)를 수괴로 한 반군을 평정하라고 명을 내렸다.
주아부는 자기의 병력이 부족한 것을 잘 알고는 반군과 무리하게 맞서서는 이기기가 힘들다고 판단해서, 장기전으로 나가 적의 예기가 쇠락해졌을 때 공격하기로 했다.
이 때, 반군은 양(梁)나라를 맹공해 양나라는 매우 위급했다. 양왕은 수차례 주아부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모두 주아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양왕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한 경제에게 글을 올렸다. 한 경제는 친 형제의 정리로서 주아부에게 병력을 동원 양나라의 위급을 구하도록 명을 내렸다.
한 경제의 사자가 주아부 앞에서 큰 소리로 경제의 성지를 낭독했으나 주아부는 그 성지를 접수만 했을 뿐, 군대를 동원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사자는 대노하여 주아부가 황명을 거역하고 받들지 않음을 꾸짖었다. 주아부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나에게 군을 이끌고 적을 대항하라고 명하셨고 나에게 지휘권을 주셨다. 군대의 구체적인 배치는 전쟁 터의 실제 정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장수가 전장에 있으면 왕명도 때로는 받아 드릴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양 나라가 위급하다고는 하나 아직도 5만의 군이 사수하고 있으며 양초(糧草)도 충분하니 10일을 버티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 군대는 멀리서 왔기에 피곤한 상태인데 반군은 세력이 심히 커서 결전을 벌일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우선 휴식한 후 기회를 봐서 출병해야지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라고 대답했다. 사자는 주아부가 출병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돌아 가서 그대로 복명하는 수 밖에 없었다.
주아부가 양나라 구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소식은 반군 귀에도 들어 갔다. 그들은 주아부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전쟁을 겁내는 인물이라 여기고는 주아부를 안중에 두지 않았으며 마음 놓고 양나라를 맹공했다.
반군이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주아부는 일단의 정병을 뽑아 반군의 군량을 탈취했다. 양초를 빼앗긴 반군은 오래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는 양나라를 포기하고 회군하여 진세를 갖추고는 주아부와 결전을 하려 했다.
양초가 부족한 반군은 최후발악을 할 것이 뻔하므로, 주아부는 교전을 피하고 출병하지 않고 기다렸다. 반군은 멀리서 와 심히 피곤한 상태였는데다 주아부가 늘 상 경기병을 보내 야습을 감행하니 전투력이 날이 갈수록 쇠락해 졌다. 주아부는 고의로 경계가 느슨한 듯이 꾸며 반군을 유인해 주도적으로 공격해 오도록 만들었다. 반군이 중군 營寨에 들어 오자 주아부가 미리 매복해 둔 궁수들이 순식간에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니 사방이 죽음의 소리로 가득 차고 반군은 겹겹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하루 밤의 격전을 치룬 후 반군은 거의 전멸하게 되었고 오왕 유비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보고는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목을 베었다.
第 5 計 袗火打劫 진화타겁
敵之害大, 就勢取利
적지해대, 취세취리
상대의 피해가 클 때 기세를 몰아 이득을 챙기라.
이 계명은 오승은(吳承恩)의 장회체(章回體 역자 주: 장편 소설 체재의 하나로 매회마다 표제가 붙어 소설 전체의 내용을 개괄해 볼 수 있게 한 체재) 소설 “서유기(西遊記)”에서 나왔다.
“손자병법에 보면, “적이 혼란에 빠졌을 때 기회를 잡아 공격해 승리를 거둔다(亂而取之)”라고 되어 있다. 대개 적이 혼란에 빠지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우(內憂)이고, 둘째는 외환(外患)이며, 세 번째는 내우외환이 겹친 경우이다. 이러한 혼란이 바로 적진의 “불”이며, 아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난 집을 “노략”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공하기 쉬울 뿐 아니라 그 와중에서 의외의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노략”할 때는 시기와 방법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는 불에서 밤을 줍는 것처럼 자기 손을 데어 자기 몸을 다치게 된다.
초나라의 장왕(壯王)은 진(陣)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첩자를 보내어 그 허실을 살펴보게 했다. "아직 진나라를 공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성벽은 높고 해자(垓字)는 깊으며 방비는 철통과도 같습니다. 게다가 군사들이 먹을 군량과 군마들이 먹을 마초(馬草)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진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음, 그렇다면 진나라를 칠 절호의 기회는 바로 지금이군." "그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진나라에 멸망의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네." "..." "그래도 모르겠는가. 진나라와 같은 소국이 그토록 전쟁 준비를 했다면 필경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원망이 비등하고 있을 걸세. 또 그 나라에서 그처럼 성벽을 높이 쌓고 물길을 깊이 팠다면 많은 백성들이 심한 노역에 시달렸을 것인즉, 그들은 모두 피로에 지쳐 마음속으로 깊이 원망하고 있지 않겠나." 과연 장왕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쳐 대승을 거두었다.
청나라 순치제(順治帝)는 즉위했을 때 겨우 7세였고 조정의 모든 권력은 섭정왕인 다이연(多爾兗)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이연은 진작부터 중원을 공략할 의사를 갖고 있었는데 자기 손으로 그 일을 이뤄 아버지와 형님들의 중원입성의 유업을 이루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명나라의 일거수 일투족을 호시탐탐 주시하고 있었다.
명나라 말년에는, 정치는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숭정(崇祯)황제는 대 명나라를 진흥시키고자 했으나 남을 의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현명한 신하와 훌륭한 장수들이 조정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십 수 차례에 걸쳐 재상을 바꾸었고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처형했다. 그의 주변에는 모두 간신 잡배들뿐이었으며 명나라가 붕괴하는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농민봉기를 일으켜 일거에 수도를 점령하고는 대순(大順)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농민봉기군은 수도를 점령한 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벌써 부패 타락하게 되었다. 명나라 명장 오삼계(吳三桂)의 애첩 진원원(陳圓圓)도 봉기군에 잡혀 갔다. 본래 오삼계는 재물과 세력에 빌붙는 소인으로 기회주의자였었다. 그가 보기에 명나라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이자성이 일어서 대순황제가 되는 것을 보고는 본래는 이자성에게 투항해 자기의 세력을 공고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자성은 승리한 후 교만하게 되어 오삼계 따위는 안중에 없었기에 그의 집을 몰수하고 그의 부친을 구금했으며 그의 애첩을 잡아 갔다. 본래 기회주의자였던 오삼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마침내 만주의 청나라에 투항해서 청 군대의 힘을 빌려 이자성을 멸망시키려 했다. 다이연은 이 소식을 듣고는 미친 듯이 좋아했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어 오랫동안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때 중원 내부는 전란이 빈번해 이자성의 강산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고로 다이연은 신속히 오삼계의 부대와 손을 잡고 산해관을 넘어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 수도를 공략, 이자성을 몰아 내고 만주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하는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第 6 計 聲東擊西
亂志亂萃, 不虞, 坤下兌上之象, 利其不自主而取之.
난지난췌, 불우, 곤하태상지상, 이기부자주이취지.
의지가 산난하면 엉킨 잡초같아 걱정할 필요 없다. 마치 땅 위 공중에 물이 있어 언제든 무너져 내릴 것이니 비록 내 노력 아니어도 이득은 주워 챙길 일이다.
이 계의 이름은 당 나라 시대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에 : “성언격동, 기실격서(聲言擊東, 其實擊西)”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겉으로는 동쪽을 공격한다고 떠들썩하게 한 다음 실지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것이다. 상대의 의지를 분열시키면 이긴다.
한나라 장군 주아부(周亞夫)는 성루를 고수하여 결코 밖으로 쳐 나가지 않았다. 오나라 군사가 성의 동남쪽을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곧 성의 서북쪽 수비를 단단히 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보고 수행 군사가 의아하여 물었다. "적이 동남쪽을 치려는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서북쪽의 수비를 명령하십니까?" 그러나 주아부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과연 오왕은 주력 군사로 서북쪽을 공격해 왔는데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은 지휘자가 침착 냉정하여 적에게 속지 않은 하나의 예이다.
또 후한 말기, 주준(朱寯)이 완성(宛城)에 있는 황건군(黃巾軍)이 공격했을 때의 일인데, 그는 적정을 살필 수 있도록 우선 성밖에 작은 동산을 쌓았다. 그리고는 북을 치며 군사들이 성의 서남쪽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황건군이 당황하여 우루루 서남쪽 수비로 몰렸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주준은 친히 주력군 5천을 이끌고 성의 북쪽을 불의에 공격하여 완성을 빼앗았다.
제 7 계 : 무중생유(無中生有)
誑也, 非誑也, 實其所誑也. 少陰, 太陰, 太陽.
광야, 비광야, 실기소광야. 소음, 태음, 태양.
속이든 안 속이듯 보이든 그 전체가 속임이니
誑: 속임이란 찌질한 음모(少陰)요
非誑: 속이지 않는다하는 것은 큰 음모(太陰)
所誑: 속임이 일어나는 현상은 흔한 것(太陽)이다.
이 계명은 노자(老子) 제 40장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겼고 유는 무에서 생겼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에서 나왔다. 無中生有란 본디 구별없는 것에서 (구별을 통해) 有란게 생긴거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지나친 선입견을 버리라는 의미다.
이 수는 세 가지 단계로 나뉘어 진다. 제 1단계는 허상을 적에게 보여 적으로 하여금 진짜인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제 2단계는 적으로 하여금 우리 측이 보인 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 그 이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한다. 제 3단계는 우리 측이 허상을 실재로 변화시키되 적은 아직도 허상인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적의 생각은 이미 혼란에 빠지게 돼 주도권은 우리가 장악하게 된다.
당 나라 안사의 난 때, 많은 지방 관리들이 연 이어 안록산(安䘵山)과 사사명(史思明)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나 당 나라 장수 장순은 당 조정에 충성하여 투항하지 않았다. 그는 3,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고립된 옹구성(雍丘城)을 사수하였다. 중과부적이었지만, 장순은 성을 나가 적을 습격해 몇 차례 작은 승리를 올렸다. 그러나 성 안에 화살이 갈수록 부족하여 수요를 댈 수가 없었다. 화살이 없으면 적이 성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가 무척 힘들었다. 장순은 삼국시대 제갈량이 볏짚으로 둘러 싼 배로 화살을 획득한 고사를 생각하고는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군중에 명을 내려 급하게 짚을 모아 허수아비를 만들게 한 후 허수아비에게 검은 옷을 입혀 야간에 성 아래로 줄을 달아 드리웠다. 밤이었으므로 적장은 장순이 야음을 틈타 야습을 감행하려 하는 줄 알고 급히 부대에게 명을 내려 모든 활을 동원해서 쏘도록 하니 화살이 마치 비 오듯 하였다. 장순은 손 쉽게 수 십만 개의 화살을 얻었다. 날이 밝자 적장은 계략에 빠졌음을 알고는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밤, 장순은 또 성 바깥으로 허수아비들을 드리웠다. 적들은 다시는 속지 않는다고 하하 크게 웃었다.
장순은 적은 이미 판단이 마비되었다고 보고 신속히 정병 500명을 내려 보냈으나 적은 아직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500의 정병은 어둠을 타고 재빨리 적진에 잠입해 적군을 마구 무찌르니 적진 안은 일대 혼란에 빠져 들었다.
장순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부대를 이끌고 성을 나와 적진을 공격해 수 많은 적군을 사살한 후 물러가 성을 굳게 지켰다. 장순은 “무중생유”의 계로 옹구성을 지켜 냈던 것이다.
제 8 계 암도진창(暗渡陳倉)
이 말은 “明修棧道, 暗渡陳倉(명수잔도, 암도진창)”인데 그 이름은 사기:고조본기(史記:高祖本紀)에서 나왔다.
초 나라와 한 나라가 서로 싸울 당시, 한신(韓信)이 장한(章邯)을 공격할 때 일이다. 한신은 겉으로는 한중(韓中)에서 관중(關中)까지 길을 닦는 듯하면서 몰래 진창(역자 주: 오늘 날 섬서성(陝西省) 보계산(寶鷄山)에서 샛길로 빠져나와 장한을 대패시켰다. 이는 한 마디로 눈속임으로 주의를 끌고 그 허점을 치는 걸 말한다.
示之以動, 利其靜而有主, 益動而巽.
시지이동, 이기정이유주, 익동이손.
'나를 드러내어 반응을 이끌어 내라.' 이득이란 정숙함 가운데 있으니 정숙함이 주인 격이다. 익동이손(益動而巽)은 주역 “益”괘에서 나온 말로서 상대를 들썩거리면서 물러서 있어라.
삼국시대 말, 위(魏) 나라의 사마소(司馬昭)는 대장 등애와 종회(鐘會)를 보내 촉 나라를 정벌하게 했으나 검각(劍閣)에서 촉의 장수 강유(姜維)에게 막히게 되었다.
등애가 보기에 검각은 공격해서 무너뜨리기가 무척 어려운 곳이었다. 해서 그는 사마소에게 음평의 천연 해자를 넘어 가는 계책을 제의했다. 사마소는 한 편으로는 종회에게 계속해서 정면에서 검각으로 진공해서 강유의 주의를 끌게 하고는, 다른 한 편으로는 등애에게 군사를 데리고 음평을 몰래 건너도록 했다.
이리 하여, 등애는 자기의 아들 등충(鄧忠)을 선봉으로 하여, 5,000 정병을 이끌고 산을 만나면 길을 뚫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으면서, 자신은 본진을 이끌고 뒤에서 따라 갔다.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 보다 힘들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쳤으나 끝까지 밀고 나갔다. 강유성(江油城) 북 쪽의 마천령(摩天嶺)에 도달하였을 때는 깊은 계곡과 절벽이 가로 막아 인마(人馬)가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었다.
등애는 군사들에게, “비록 칼 산과 불 바다가 가로 막는다 해도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 반 발 자국도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먼저 몸에 담요를 두르고는 깊은 계곡 밑으로 굴러 내려 갔다. 그러자 다른 군사들도 생사를 버리고 등애를 따라 굴러 내려 갔다.
그들이 갑자기 강유성에 나타나자 촉군은 그들을 신병(神兵)인 줄 알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등애는 승기를 잡고 전진해 곧 이어 면죽(綿竹)을 공략했다.
촉 황제 유선(劉禪)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보고는 중신들과 함께 성을 나와 투항하였고 이로서 촉한은 멸망하게 되었다.
제 9 계 격안관화(隔岸觀火)
陽乖序亂, 陰以待逆. 暴戾恣睢, 其勢自斃. 順以動豫, 豫順以動.
양괴서란, 음이대역. 폭려대휴, 기세자폐. 순이동예, 예순이동.
겉보기에 소란스러워지고 속으론 서로 반목함이 극에 달하면 망할 징조이니. 준비만 하고 기다렸다가 움직여라.
順以動豫, 豫順以動이란 말은 주역의 예(豫)괘에 나온 말로 시기를 기다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손자:군쟁편의 “아군은 엄격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혼란스러운 적을 상대하고, 아군은 침착하고 차분한 상태에서 떠들썩하고 무질서해진 적을 대한다. 以治待敵, 以靜待嘩"에서 비롯되었다.
隔岸觀火: 원래 뜻은 강 건너 불 난 것을 바라본다는 것으로 남에게 위난이 발생했을 때 수수방관하다가 그가 자멸하게 되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같은 뜻으로 “앉아서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坐山觀虎鬪:좌산관호투)”이다. 적의 내부가 분열되어 모순이 격화되고, 상호 배척하게 되기까지 먼저 행동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 그들이 서로 죽여 세력이 약해져서, 스스로 와해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조조(曺操), 격안관화로 원(袁)씨 형제를 제거하다
적이 극도로 잔혹하고 서로 반목하는 기세가 특히 셀 때 만약 공격하면 적은 반드시 필사적으로 반격하게 된다. 오히려 지켜 보고 피하게 되면 그 내부는 반드시 스스로 혼란에 빠져 멸망하게 된다.
동한(東漢) 말년, 원소(袁紹)가 전쟁에 패하여 죽은 후, 아들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게 되자 조조는 이 때를 틈 타 원씨 형제들을 제거했다. 원상(袁尙), 원희(袁熙) 형제가 오환(烏桓)에게 몸을 의탁해 달아 나자 조조는 오환에게 진군하여 오환을 패퇴시켰다. 그러자 원씨 형제는 이 번에는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로 투항했다. 조조의 제장들은 조조에게 다시 군세를 몰아 요동을 평정하고 원씨 형제를 붙잡자고 진언했다. 조조는 크게 웃으면서, “그대들은 움직일 필요도 없다. 공손강이 제 손으로 원씨 형제의 목을 들고 찾아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군에게 명령을 내려 허창(許昌)으로 회군하여 요동의 상황을 조용히 지켜 보았다.
공손강은 원씨 형제가 투항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 속으로 의심이 생겼다. 원씨 부자는 일찍이 요동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바, 지금 원씨 형제는 싸움에 패하여 상가 집 개 신세가 되어 어느 곳에도 몸을 둘 곳이 없게 되자 부득이 요동으로 투항해 온 것이다. 공손강이 그들을 받아 들이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다시 말하면, 그들을 받아 들이면 강력한 세력의 조조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약 조조가 요동을 공격하게 되면 원씨 형제를 받아 들여 함께 조조에 대항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조조가 이미 허창으로 회군하여 요동 공격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을 받아 들이는 것은 백해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복병을 준비해두고 그들을 불러 일거에 사로 잡아 수급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웃으며 제장들에게 , “공손강은 늘 원씨가 자기를 병탄할 것을 겁냈기 때문에 원씨 형제가 찾아 오자 틀림없이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급히 군사를 동원했다면 그들은 오히려 힘을 합해 함께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군사를 돌리면 그들은 서로 분열되어 싸울 것이다. 결과를 보니 과연 내가 예측한 대로였다.”라고 말했다.
제 10 계 소리장도(笑裏藏刀)
剛中柔外(강중유외)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巧言令色, 鮮仁矣(교언영색, 선인의).”라고 했다. 그 뜻은 화려하고 교묘한 말을 하여 표면 상으로 위선적인 얼굴을 하는 사람 중에는 인의 도덕을 말하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다. 사람의 웃음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있는 바, 진짜로 웃는 사람은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데 반해, 가짜로 웃는 사람은 말은 달콤하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남을 해칠 생각만 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웃는 호랑이를 조심하고 아첨하는 말을 쉽게 믿어서는 아니 된다.
信而安之, 陰以圖之; 備而後動, 勿使有變. 剛中柔外也.
신이안지. 음이도지; 비이후동, 물사유변. 강중유외야.
믿으면 안주하는데 속으로 도모함이 있다.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다 굳이 변화를 만들지 마라 굳건함은 속에 감추고 유함을 밖으로 보여라.
이 말은 당 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 무가도(無可度)에 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且滅嗔中火. 休磨笑裏刀 不如來飮酒, 穩臥醉陶陶(차멸진중화, 휴마소리도. 불여래음주, 온와취도도).”대강의 뜻은, 불같은 화를 멈추어라. 웃으며 칼을 갈며 술마시고 편히 취기를 즐기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같은 백거이(白居易)의 시 천가도(天可度)에 보면 “天可度 地可量 唯有人心不可防... 君不見李義府之輩笑欣欣 笑中有刀潛殺人 (천가도 지가량 유유인심불가방.... 군불견이의부지배소신신 소중유도잠살인)”
이는 백거이가 당시 간신 이의부(李義府)에 관해 쓴 시인데 여기서도 “소중유도(笑中有刀)가 나온다. 뜻은 역으로 말하면 다가와 어색한 웃음 지는 자는 날 속이고 죽이려는 자 다.
-공손앙(公孫鞅),손쉽게 효산(崤山)을 취하다
“笑裏藏刀”의 원 뜻은 표면상으로는 온화하고 선량하게 보이지만 내심은 악독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軍事에 쓰일 때는, 웃음을 위장 수단으로 적을 속이고 마비시키는 것....
-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공손앙은 군사를 이끌고 위(魏) 나라의 오성(吳城)을 공격했다.
오성은 원래 위 나라 명장 오기(吳起)가 심혈을 기울여 경영했던 곳으로. 지세가 험하고 성의 건축이 견고해 정면에서 공격해서는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공손앙은 성을 공격하기 위한 계책을 찾기에 고심했다.
그는 위 나라 수비 장수가 자기와 이전에 교류가 있었던 공자행(公子行)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바로 서산을 한 통 써서 공자행에게 허물없이 친한 듯이 굴면서, “비록 우리 둘이 현재는 각자의 주군을 위하고 있지만 우리의 과거 교분을 생각해 양국이 싸움을 그만 두고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써 보냈다. 지난 교분을 생각하는 정이 글에 구구절절이 넘쳐 났다. 그는 시간을 정해 회담을 해서 그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의했다.
서신을 보낸 후 공손앙은 진 군에게 명령해 전방 부대를 뒤로 물리도록 했다. 공자행은 서신을 읽고 난 뒤, 진 군이 또 철병하는 것을 보자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바로 회신을 보내 회담 날짜를 정했다. 공손앙은 공자행이 계략에 걸려 들어 오는 것을 보고는 몰래 회담장에 매복을 설치했다.
회담하는 당일, 공자행은 3백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는데, 와서 보니 공손앙의 수행원은 훨씬 적을 뿐 아니라 무장하지도 않은 것을 보고는 더욱 더 상대의 성의를 신뢰하게 되었다. 공손앙은 게다가 공자행을 접대하기 위해 연회도 베풀었다. 공자행은 기분이 좋아서 자리에 앉았는데 미처 제대로 앉기도 전에 갑자기 한 마디 호령 소리와 함께 복병들이 사면 팔방을 포위하자 공자행과 3백 명의 수행원들은 대적 한 번 못해 보고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공손앙은 사로 잡힌 수행원을 이용해 오성의 성문을 속임수로 열게 한 후 오성을 점령했다. 위 나라는 서하(西河) 일대를 할양해 주고는 진에게 화평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미녀 진주(珍珠)
전국 시대, 위(魏) 나라의 왕이 초(楚)의 회(懷) 왕에게 미녀 한 명을 선사했다. 이 미녀는 미목이 수려해 서시(西施)와 필적할 정도였다. 초 왕은 당연히 그녀에게 마음이 쏠려 이름을 진주라고 짓고는, 말하자면, 손에 올려놓으면 떨어질까 겁나고, 입안에 넣으면 녹을까 겁낼 정도였다. 두 사람은 한 시도 떨어 지지 않았다.
초나라 회왕에게는 본래 정수(鄭袖)라고 하는 애첩이 있었다. 진주가 오기 전까지는 초 왕은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있었는데, 진주가 온 후로 초 왕은 그녀를 점점 멀리 하였다. 정수는 초 왕의 정이 자기에게서 떠나가자 견딜 수가 없었다. 또한 진주에 대해서도 미칠 정도로 질투하였다. 그러나 정수는 겉으로는 태연하였다. 그녀는 떠들수록 자기에게 불리할 뿐 아니라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표면적으로는 정수는 진주에게 마치 친 생인 것 같이 아주 잘 대했을 뿐아니라 시간이 나면 같이 지내면서 얘기를 나누는 등, 초 왕이 보기에 그녀는 진주에게 전혀 질투를 느끼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수는 진주에게, “대왕께서는 네게 아주 만족하시고 무척 총애하신다. 그런데 네 코에 대해서는 좀 불편해하시는 것 같다. 내게 몇 번 말씀 하시더군. 그러니 이 후 대왕 면전에서는 코를 손으로 가리는 게 좋을게다.”라고 일러 주었다. 진주는 자기가 정수가 파놓은 함정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고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 진주는 초 왕 면전에서는 늘 손으로 코를 가리면서 참기 힘든 모습을 보였다. 초 왕은 이상하게 여겨 정수에게 물었다. 정수는 일부러 말하기 곤란한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말할 듯 하다가 그만두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무엇이든 얼른 말하거라!”라고 초 왕이 다그쳤다. “진주가,,, 진주가 제게 대왕께옵서 체취가 있으셔서 참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코를 가린 것 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초나라 왕은 화가 치밀어 정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주의 코를 베어 버리는 의형(劓刑)에 처하게 했다. 정수는 다시 초 왕의 품으로 돌아왔다. 진주는 미녀라는 이름만 헛되이 얻었지 자기를 보호할 줄 몰랐기에 최후가 비참했던 것이다.
제 11 계 이대도강(李代桃僵)
勢必有損, 損陰以益陽.
세필유손, 손음이익양.
기세란 사그러지기 마련 그 사그러는 기세를 없애는게 기세를 더하는 것이다.
악부시집(樂府詩集) 계명(鷄鳴)편에, “桃生露井上, 李樹生桃旁. 蟲來嚙桃根, 李樹代桃僵. 樹木身相代, 兄弟還相忘? (도생노정상, 이수생도방. 충래교도근, 이수대도강. 수목신상대, 형제환상망?)”에서 나왔다. 그 뜻은 “우물가 복숭아 나무 옆에 오얏 나무가 있는데, 벌레가 복숭아 나무 뿌리를 갉아 먹으면, 오얏 나무도 시들게 된다. 나무도 몸으로서 서로를 기대는데 형제가 어찌 서로 잊을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로... 한 쪽이 병들면 그 하나만 상하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완자(完子), 몸을 던져 나라를 보전하다
춘추시대 말, 제(齊) 나라의 대부 전성자(田成子)가 제 나라의 대권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제 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는데, 국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고 다른 제후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성자가 제후의 위에 오른 명분이 “정당하지 않았기에”, 좋은 대책이 떠 오르지 않아 고심하고 있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는 말처럼, 조(趙) 나라가 그가 왕권을 찬탈했다는 구실을 세워 군사를 일으켜 제 나라를 공격해 왔다. 전성자는 급히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일부는, “조 나라가 침범해 오는 것은 우리를 크게 무시하는 것이오. 우리의 병력이 조 나라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전 국민을 총동원해서 공동으로 대항해야 합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는, “요사이 국내 인심이 심상치 않습니다. 많은 신민들이 대왕의 은혜를 입을 시간이 아직 없었습니다. 만약에 온 국력을 기울여 출동하게 되면 민심을 얻지 못해 영을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부는, “대왕께서 다른 나라의 예를 따르셔서, 성읍 몇 개를 조 나라에게 할양하시면 군사를 일으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여러 의견들이 오고 갔지만 전성자가 보기에 적을 이길 계책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을 때, 그의 형 완자가 그에게 계책을 건의했다. “신이 어질고 훌륭한 신하들을 이끌고 출병하여 적을 맞아 싸우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적을 맞으면 반드시 온 힘을 다해 싸울 것이요, 싸우면 반드시 패해야 할 것이며, 패할 뿐 아니라 반드시 모두 전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조 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이 말을 들은 전성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성을 나가 교전하는 것은 허락할 수 있소만, 교전하면 패해야 할 것이요, 패해야 할 뿐 아니라 모두 전사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어찌하여 그러하오?”라고 물었다. 완자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왕께서 현재 제 나라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백성들은 왕의 정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사오며, 왕의 정치 실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자리에서 의론이 분분하며, 나라를 빼앗은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왕을 위해 싸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조 나라가 침범해 오니, 충신들 중 전쟁에 뛰어 난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치욕을 당했다 생각해 화급히 출병해 적과 대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되면 우리 제 나라는 대단히 걱정스럽습니다.” “형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극히 옳습니다만, 왜 형님께서 주도적으로 출병해서 전사해야 만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전성자는 사랑하는 형, 용맹스러운 형의 말을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완자가 다시, “조 나라의 출병은 제후들 앞에서 위풍을 세워 정의의 명성을 얻고자 함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현재 실력으로는 우리 나라를 완전히 병탄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일단의 어질고 훌륭한 신하들을 데리고 출병하여 적과 싸우고, 싸워서 패하고, 패할 뿐 아니라 전사하게 되면, 몸으로 순국하게 됩니다. 조 나라는 대왕의 형이 전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나라를 “훈계”하려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저를 따라 전사하는 사람들 역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며, 전사하지 않은 사람들도 감히 제 나라로 돌아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리되면 나라 안의 민심도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구국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전성자는 이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형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울면서 그를 송별하였다. 과연, 완자는 몸을 던져 순국하였고 제 나라를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12 계 순수견양 (順手牽羊)
微隙在所必乘, 微利在所必得. 少陰, 少陽.
미극재소필승, 미리재소필득. 소음, 소양.
작은 틈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들이밀고 작은 이익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취하라. 작은 것은 작은 이익이다.
이 계는 한마디로 순리를 따르라는 말....
큰 욕심에 큰 것만 바라며 작은 것을 놓치면 전부를 잃을수 있다는 말이다.
제 13 계 타초경사(打草驚蛇)
疑以叩實察而後動 復者, 陰之謀也.
의이고실찰이후동 복자, 음지모야.
의심가면 실상을 확인하고 잘 살핀 후 행동을 취한다. 復掛는 震下坤上괘로 말 그대로 福을 부르는 暗中摸索을 말한다. 잠잠히 뭔가를 도모한다는 말.....
“타초경사”의 계는 적의 병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 먼저 간보는 전략을 말한다. 멀리는 知彼知己를 위한 선행 작전을 말한다.
-건숙(蹇叔), 울음으로 부대를 전별하다
BC 628년, 진(秦) 목공(穆公)은 군사를 일으켜 정(鄭) 나라를 공격하려 했는데, 그는 정 나라에 박아 둔 세작(細作:동조자)들과 협력해 정나라의 도성을 점령할 작정이었다.
대부 건숙은 진 나라는 정 나라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들이 먼길을 고생스럽게 가야 하는지라 정 나라는 틀림없이 그 사이에 응전 준비를 철저히 해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 목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맹명시(孟明視) 등 세 사람의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건숙은 부대가 출발할 때, 통곡하면서, “그대들의 이 번 정 나라 공격은 아마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오히려 진(晉) 나라의 매복에 당할 가능성이 크오. 그러니 그저 효산(崤山)에 가서 그대들의 시체를 수습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라 했다.
정 나라는 과연 건숙이 예측한 대로, 진 나라가 정 나라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자기 나라에 있던 진 나라 세작들을 쫓아 내고 응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진 나라 군대는 정 나라 공격이 여의치 않자 회군하게 되는데, 철수하는 길이 멀어 극도로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부대가 효산을 지날 때도 여전히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秦) 나라가 진(晉) 나라에 대해, 최근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진(晉) 문공(文公)에게 은혜를 베푼 바 있으니 진(晉)은 그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진(晉) 나라는 진작부터 협곡에 대군을 매복하고 있었다.
어느 뜨겁게 더운 여름 날 정오쯤, 진秦) 군은 진(晉) 군의 소규모 부대를 발견했다. 맹명시는 화가 나 추격하라고 명을 내렸다. 추격해서 산 속 험한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진(晉) 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맹명시는 산이 높고 길은 좁으며, 풀은 깊고 숲은 울창한 것을 보고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막 퇴각하려는 순간,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들고 함성이 사방에서 일어 나며, 매복해 있던 진(晉) 군이 벌떼처럼 달려와 진(秦) 군을 대패시키고 맹명시 등 세 장수를 생포하였다.
진(秦) 군은 적정을 자세히 살펴 조사하지 않고 경거망동하여, 즉, “타초경사”하지 않아, 마침내 참패를 당했다.
제 14 계 차시환혼(借尸還魂)
有用者, 不可借; 不能用者, 求借. 借 不能用者而用之,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유용자, 불가차; 부능용자, 구차. 차 불능용자이용지,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능력이 되면 남에게 빌릴 일 없고, 능력이 안되면 빌려야 한다. 빌려쓰는 것은 능력없는 사람의 쓰임이요 내가 모자란 이에게 빌리는게 아니라 모자란 이가 나에게 요구하는게 빌린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 고대의 민간 고사에서 나왔다.
옛 날, 이현(李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태상노군(太上老君:도가(道家)에서 노자(老子)를 높여 부르는 이름)을 스승으로 모셔 장생불노(長生不老) 술을 배웠다. 어느 날 그의 혼이 태상노군을 따라 하늘의 끝으로 유람을 떠나게 되어 세상에 남아 있는 육체를 도제에게 간수하라고 부탁하고는 7일 후에 돌아 오겠다면서 떠났다. 6일 째 되는 날, 도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는 황급히 이현의 시체를 화장한 후 떠나갔다. 이현의 영혼은 돌아와 보니 들어갈 시체가 없어져 하는 수 없이 길가에 방금 죽은 거지의 몸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이현은 흐트러진 머리에 때가 낀 얼굴에 다리를 절며 머리가 벗어진 “철괴이”(鐵拐李 역자 주: 고대 신화 ‘팔선과해(八仙過海)’ 중의 한 명.)로 변하고 말았다.
“차시환혼”의 원래 뜻은, 이미 쇠락했거나 끝난 일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살려내는 것을 말한다. 거기서 변화되어, 피동적인 상황에 처하거나 실패할 국면에 임했을 때, 여러 유리한 조건들을 잘 이용해 국면을 전환시켜 주도권을 되찾아 원래 의도했던 바를 이뤄내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역자 주: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
“차시환혼”의 계는 군사상에 있어서, 용도가 없는 세력을 이용하고 지배해서 아군의 목적을 달성하는 책략이다. 진(秦) 나라 2세 황제 원년, 진승과 오광 등 900여 명은 어양(漁陽)에 가서 변경을 지키도록 징발되었다. 이들이 대택향(大澤鄕)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연일 큰 비가 내려 도로가 모두 물에 잠기는 바람에 정해진 시한에 어양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진 나라 법에 의하면, 지정된 시한에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지 않은 병졸은 모두 참수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비록 어양에 도착해도 날짜를 어긴 죄로 처형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니, 한 번 노력해서 활로를 개척해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같이 간 다른 병졸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니 이때야 말로 거병하여 난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진승은 또한 자기의 지위가 미천하니 호소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두 사람이 크게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진시황의 큰 아들 부소(扶蘇)로서 그는 성품이 온순하고 현명했는데 포악한 진나라 2세황제에게 암살당했지만 백성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초(楚) 나라 장수 항연(項燕)으로, 공적이 뛰어 나고 수하들을 사랑하여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진 장군이었는데 진 나라가 6국(역자 주: BC 230년, 진(秦)이 한(韓)을 멸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BC 221년, 제(齊)가 멸망하기 까지 10년에 걸쳐,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가 차례로 망함으로써, 춘추(春秋) 이래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제후 할거의 시대가 끝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봉건 중앙집권 국가가 탄생했다.)을 멸망시킨 이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승은 모두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들의 기치를 내어 걸었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의 미신을 이용, 교묘하게 다른 공작도 조작하였다.
어느 날, 사병들이 밥을 지을 때, 물고기 배 안에서 “진승왕(陳勝王)”이라 쓰여진 비단 조각이 발견되어 놀란 사병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 오광은 한밤중에 들의 폐묘 중에서 늑대 울음 소리를 흉내 내어, “대초흥, 진승왕(大楚興, 陳勝王)”의 소리가 사병들에게 희미하게 들리게 조작하였다. 따르는 사람들은 진승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뜻”에 따라 모두를 지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승과 오광은 시기가 왔다고 보고 그들을 이끌고 조정이 파견한 도위를 사살하였다. 진승은 봉기하여 모두들에게 외쳤다: “우리들은 어차피 살기 힘들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들과 죽기 살기로 한 판 붙는 것이 옳다. 비록 죽는다 해도 떳떳이 죽을 것이다.”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고 오광을 도위로 봉해 대택향을 공격해 점령하니 천하 사람들이 호응하여 몰려 들었고, 싸움마다 승리하고 가는 곳마다 적을 무너트렸다.
제 15 계 조호이산(調虎離山)
호랑이를 조절하여 산을 떠나게 한다?
유리한 위치를 벗어나게 한다는 말이다. 특히나 전쟁=싸움은 위치 先占이 관건이다. 아무리 용맹스럽고 뛰어난 무기라도 궁지에선 힘을 발하지 못하는 법.... 물론 칼과 활의 싸움일 경우....
미사일, 드론으로 싸우는 지금은 위치 선점의 중요성이 덜 할지 몰라도.....
待天以困之, 用人以誘之, 往蹇來返.
대천이곤지, 용인이유지, 왕건래반.
하늘의 이치가 떠날 때를 기다려 스파이를 통해 유혹하면 곤란함은 지나가고 유리한 기회가 온다.
서유기(西游記) 제 76 회에; “… 나의 ‘조호이산’의 계에 바로 걸려 들었구나.”에서 나왔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지형이 험악한 큰 산에 머물 때에는 당연히 거리낄 것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것인 바 포획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호랑이를 유인해 큰 산 바깥으로 끌어 낸다면, 쉽게 그를 포획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소위 “들에 있는 호랑이는 개도 우습게 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조호이산”의 원래 뜻이다.
-손책(孫策), 묘책으로 호랑이 굴을 점령하다
동한(東漢) 말년, 각 지방에서 제후들이 할거하고 있을 때, 손견(孫堅)의 아들 손책(孫策)은 17세의 젊은 나이에도 이미 남다른 바가 있었으며, 부친의 뜻을 이어 받아 세력이 점점 강대해 지고 있었다. 서기 199년, 손책은 북쪽으로 세력을 키우기 위해 강북(역자 주:양자강 북쪽)의 여강군(廬江郡)을 차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강군은 남으로는 장강(역자 주:양자강)이 막아 주고, 북으로는 회수(淮水)로 가로막혀,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여강의 유훈(劉勳)은 세력이 강대했을 뿐 아니라 야심도 만만치 않았다. 손책은 무리하게 공격해서는 승리를 얻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뭇 장수들과 상의한 후, “조호이산”의 묘책을 만들어 내었다.
유훈은 본래 재물을 탐하는 약점이 있었으므로, 손책은 사람을 보내 유훈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면서 함께 보낸 편지에 유훈을 한껏 부추겼다. 즉, 유훈의 위대한 이름이 멀리까지 떨쳐 사람들이 흠모하니 자신도 유훈과 교류를 하고 싶다는 것과, 더 나아가, 손책은 오히려 약자의 신분으로 유훈에게 도움을 청했다. 상료(上繚) 지방이 늘 군사를 보내 침략해 오는 바, 자기들은 힘이 약해 원정을 나설 수 없으니 장군께서 군사를 일으켜 상료를 항복시켜주면 무척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유훈은 손책이 자기를 극력 치켜세워 주자 우쭐해졌다. 상료 일대는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해 유훈도 진작에 탈취하고 싶어 했는데 오늘 손책이 유약하고 무능한 것을 보고는 군사를 일으켜 상료를 쳐서 후환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부장 유엽(劉曄)이 극력 말렸으나 유훈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손책의 후한 선물과 달콤한 말에 완전히 빠져 들었던 것이다. 손책은 시시각각 유훈의 행동을 감시하다가, 유훈이 직접 수만 병력을 이끌고 상료를 공격하러 떠나고 성내가 텅 비게 되자 크게 기뻐하여, “호랑이는 우리에게 속아 산을 빠져나갔다. 어서 빨리 호랑이 굴을 차지하러 가자!”라고 외치면서 부대를 지휘해 수륙양면으로 여강을 공격하니 저항다운 저항 한 번없이 아주 손쉽게 여강을 차지하고 말았다.
유훈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상료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 손책이 이미 여강을 점령했다는 급보가 날아 들었다. 유훈은 계략에 빠져들었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다만 의기소침하여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러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제 16 계 욕금고종(慾擒故縱)
逼則反兵, 走則減勢.
핍즉반병, 주즉감세.
몰아세우면 오히려 싸움을 부르고 피하면 세가 누그러지는 법이다.
쥐를 너무 궁지에 몰지 마라!라는 뜻... 궁지에 몰리면 되돌아 발악하는 법이다.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죽는 결과가 같은데... 아무리 갉아먹는 이빨도 무기가 되는 법....
逼則反兵, 走則減勢. 緊隨勿迫, 累其氣力, 消其鬪志, 散而後擒, 兵不血刃. 需, 有孚, 光.
핍즉반병, 주즉감세. 긴수물박, 누기기력, 소기투지, 산이후금, 병부혈인. 수, 유부, 광.
적을 너무 심하게 몰아 부치면 적이 반대로 달려 들 수 있으므로, 슬쩍 예봉을 누그려 주는 것.... 풀어주지는 않지만 몰아세우지도 마라 아군의 기력이 쌓고 상대의 투지를 꺾고 흩어 나중에 사로잡는 법이다. 兵不血刃(: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싸워 이기다)이 上手다.
-수(需), 유부(有孚), 광(光)은 주역:수(需)괘에서 나왔다. 수(需)는 기다림, 부(孚)는 성심(誠心), 광(光)은 원문에는 광형정길(光亨貞吉)로서 크게 좋은 것(大吉大利)을 의미한다.)
이 글은 <노자(老子)> 제 36 장에: “將慾歙之, 必固張之; 將慾弱之, 必固强之; 將慾廢之, 必固興之; 將慾奪之, 必固與之.(장욕흡지. 필고장지; 장욕약지, 필고강지; 장욕폐지, 필고흥지; 장욕탈지, 필고여지.)”에서 나왔다. 그 뜻은 “그것을 축소시키기 원하면 먼저 그것을 늘려 확대시킨다; 그것이 쇠약해 지기를 원하면 먼저 그것이 강성해 지도록 한다; 그것을 폐기해 제거하려 한다면 먼저 그것이 잘 되도록 도와준다 그것을 탈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에게 주어야 한다.”
꽃도 활짝 핀 후에는 시들어 쭈그러든다. 세상의 모든 법칙은 순환하는 것이니 무엇이든지 극단에 이르면 반드시 반작용이 생기게 된다. 노자는 위의 내용을 요약해서 柔勝剛 弱勝强(유승강, 약승강), 즉,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다.)
노자의 이 말은 반어적인 의미로, 귀곡자(鬼谷子)편에서는 “제거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그를 풀어놓아서, 그가 실수하도록 한 다음, 기회를 봐서 그를 제거한다(去之者縱之, 縱之者乘之)." 귀곡자는 본명이 왕후(王詡)로서 춘추시대 사람이다. 종횡가(縱橫家)의 비조로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그의 제자로서 유명하다.)
-제갈공명, 일곱 번 맹획(孟获)을 잡다.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잡았던 七縱七擒은 실제적인 “욕금고종”의 사례이다.
촉한(蜀漢)은 건국 이후 북벌의 대 계획을 세웠다. 당시, 서남의 오랑캐 추장 맹획은 10 만 대군을 거느리고 촉한을 침범했다. 제갈량은 북벌에 따른 후방의 우환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군을 이끌고 먼저 맹획을 평정하기로 했다. 촉한 군의 주력이 노수 부근에 도착했을 때, 적을 유인해서 출전하여, 우선 산골짜기에 병력을 매복한 후 맹획을 유인해 패배시키고 그를 사로 잡았다.
적군 두목을 사로 잡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 적은 전투력이 많이 약해졌으니 승기를 타고 추격하면 자연히 적을 대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맹획이 서남 오랑캐 중에서 위세와 이름을 떨치고 있어서 영향력이 매우 큰 것을 고려했을 때, 오직 그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투항해야 만이 남방이 진정으로 안정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방의 여러 오랑캐 부락들이 끊임없이 침범해 올 것이 뻔해 후방 안정이 매우 어렵게 될 것이었다. 제갈량은 맹획에게 심리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맹획을 석방해 주었다. 맹획은 다음 번에는 반드시 촉군을 격퇴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 쳤으나 제갈량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맹획은 진영으로 돌아가 모든 배들을 끌어다가 노수 남쪽 강안을 점거하고는 촉군의 도하를 저지했다. 제갈량은 적이 준비가 안 된 것을 이용해 적이 방어하지 않는 하류를 도하해 맹획의 군량미 저장소를 습격했다. 맹획은 크게 화가 나, 장병들을 엄중하게 처벌했다. 그러자 장병들이 크게 반항하여 촉군에게 투항하기로 서로 약속하고는 방심한 맹획을 사로 잡아 묶어서 촉군 진영으로 데리고 왔다. 제갈량은 맹획이 아직도 심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를 다시 풀어 주었다. 이후, 맹획은 여러 계책을 썼으나 모두 제갈량에게 패배하여 일곱 번 잡히고 일곱 번 풀려났다. 마지막에는, 제갈량이 맹획의 갑옷과 무기를 불태우고 맹획을 사로잡게 되었다. 마침내, 맹획은 감동하여 제갈량이 일곱 번이나 그를 죽이지 않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 다시는 반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리하여 촉국의 서남쪽이 안정되자, 제갈량은 그 때서야 군사를 일으켜 북벌에 나설 수 있었다.
제 17 계 포전인옥(抛磚引玉)
“포전인옥”의 “전”은 구운 벽돌을 의미하고 벽돌을 던져주고 구슬을 얻는다는 뜻으로 상대의 어리숙함을 이용하는 걸 말한다.
類以誘之, 擊蒙也.
유이유지, 격몽야.
비슷해 보이는 것으로 적을 유인하여, 적의 어리석음을 타격한다.
이는 전등록(傳燈錄)에 나온 고사에서 연유한다.
당 나라 때 시인 상건(常建)은 조가(趙嘏)의 시에 대한 재주를 대단히 흠모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상건은 조가가 소주(蘇州)의 영암사(靈岩寺)에 놀러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먼저 내려가 절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미완성의 시 두 구절을 써 붙여 놓았다. 조가는 그 시를 본 후, 과연 그 두 구절의 시 뒤를 이어서 한 수의 완성된 절구시를 만들어 놓았다. 조가가 이어 놓은 두 구절이 상건의 두 구절보다 훨씬 좋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상건의 그 방법을 “포전인옥”이라 일컬었다.
“포전인옥”은 일종의, 먼저 주고 후에 취하는(先予後取 선여후취) 책략으로써, 비교적 적은 대가를 치르고 훨씬 더 많고 좋은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비교적 작은 걸 주고 훨씬 더 큰 것을 얻는 것이다.
-굴원(屈原), 계책을 건의해 교성(绞城)을 취하다
BC 700년, 초 나라는 교(绞) 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신속히 행군하여 성 아래까지 도착하였다. 초군의 사기는 높았고 교 나라는 성을 나가 교전하게 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하였다. 교성은 지세가 험악하여 지키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초군이 수 차례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양군은 한 달 이상 대치하고 있었다.
초 나라의 대부 굴원이 피아 쌍방의 정황을 자세히 분석해 본 결과, 교성은 지혜를 써야 만이 취할 수 있지 힘으로 밀어 부쳐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초왕에게 “포전인옥”의 계를 건의하였다. 즉, “성을 공격하는 것이 어려우니 이익(利)으로 적을 유혹함만 못하옵니다.”라고 말하고는, “교성이 포위된 지 한 달이 넘어 성 안에 땔감이 부족하게 될 때, 병사들을 나무꾼으로 분장시켜 산에 올라 나무를 해서 내려 오면, 적군은 반드시 성을 나와 땔감을 탈취할 것입니다. 처음 며칠 간은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조금 보게 하고, 그들이 익숙해져서 부주의해 지면 땔감을 탈취하러 점점 더 많은 병력이 성을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매복한 군사가 그들의 퇴로를 자르고 한 곳으로 몰아 섬멸한 후, 승기를 몰아 성을 탈취함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초왕이 교 나라가 쉽게 속아 넘어 가지 않을까 걱정하자, 굴원은, “대왕께서는 마음 놓으시기 바랍니다. 교 나라는 작아서 침착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 되면 계략에 쉽게 걸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미끼를 그들이 물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초왕은 그 계획대로 시행하기로 하고 일단의 병사들을 나무꾼으로 변장시켜 산에 가서 땔감을 해 오도록 명했다.
교 나라 제후는 정탐꾼으로부터 나무꾼들이 산으로 올라 갔다는 보고를 받고는 황급히 초군이 나무꾼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정탐꾼은, “그들은 삼삼오오 산으로 갔는데 한 사람의 군인도 따라 가지 않았아옵니다.”라고 아뢰었다. 교국의 제후는 즉시 군사를 배치하고는 나무꾼들이 땔감을 등에 지고 내려오기를 기다려 습격하게 하니 과연 적지 않은 땔감을 빼앗을 수 있었다. 재미를 붙인 교국 군사들은 점점 더 많이 성을 나가 땔감을 빼앗아 왔다. 제 6일 째, 교국 군사가 지난 며칠 동안 그랬던 것처럼 땔감을 뺏으러 나타나자, “나무꾼들”은 교국 군사가 또 나타났다면서 겁을 먹은 듯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교국 병사들은 그 뒤를 바짝 쫓아 추격에 나섰는데 자기도 모르게 초국 군대가 쳐놓은 매복권 내에 들어 오게 되고 말았다. 하늘을 찌르는 함성과 함께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 나 무수히 많은 교국 병사들을 사살하였고 초왕은 이 기회를 틈타 성을 공격하니 교국 제후는 계략에 빠졌음을 알았지만 이미 저항할 힘이 없었던 지라 그저 항복을 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제 18 계 금적금왕(擒賊擒王)
摧其堅, 奪其魁, 以解其體. 龍戰於野, 其道窮也.
최기견, 탈기괴, 이해기체. 용전어야, 기도궁야.
견고함을 꺾자면 그 수괴=우두머리를 뺏으면 그 몸은 와해된다. 용이 벌판에서 싸우면 그 시도할 것이 궁해지는 법이다.
이 계의 명칭은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시 전출색(前出塞)에 挽弓當挽强, 用箭當用長. 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 만궁당만강, 용전당용장. 사인선사마, 금적선금왕 “활을 당기려면 강한 활을 당기고, 화살을 사용하려면 긴 화살을 사용해야 한다. 사람을 쏠려면 그 말을 먼저 쏘고, 도둑을 잡으려면 그 두목을 잡아야 한다.”에서 나왔다.
“금적선금왕”의 원래 뜻은 적군의 총수를 잡으면 적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의미가 발전되어, 매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방면을 확보하게 되면 다른 방면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된다는 의미로 사용 된다.
-전제(專諸), 왕료(王僚)를 찔러 죽이다
춘추시대 오(吳)나라 공자(公子) 희광(姬光)은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로서, 제번이 죽은 후 본래는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왕위를 숙부인 이매(夷昧)에게 양보하였다. 이매의 사후에는 이치상으로는 당연히 희광에게 왕위가 돌아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매의 아들 왕료는 욕심이 끝없는 자로서 뜻밖에도 그가 오왕의 위에 오르고 말았다. 희광 공자는 당연히 심중으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왕위를 탈환하기 위해서 왕료를 제거할 수 있을까 암중모색하였으나 조정 대신의 대부분이 왕료와 같은 패거리인지라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오자서(伍子胥)가 초 나라로부터 난을 피해 오나라로 오게 되었는데 희광은 그를 받아들여 심복으로 삼고는 그에게 왕위를 탈환할 계책을 묻자, 오자서는 희광에게 “금적금왕”의 계책을 제시하게 된다. 우선, 막강한 군사를 장악하고 있는 왕료의 충복인 경기(慶忌)와 엄여(俺余) 등을 그의 신변 가까이에서 떨어 지도록 한 후, 다시 기회를 잡아 왕료를 살해하도록 한다. 그가 죽게 되면 수하들은 반드시 따라서 무너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자서는 희광에게 용맹스러운 전제라는 장수를 소개하였다.
왕료는 생선 요리를 대단히 좋아하였기에, 희광은 우선 전제를 태호 부근으로 보내 생선 요리를 배우게 했다. 석 달이 지나자 전제는 생선 요리 기술을 다 배우게 되었고 그가 만든 생선 요리를 먹어 본 사람들은 모두들 그의 솜씨를 칭찬하였다. 희광은 전제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는 왕료를 살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다시 세월이 지나고 오나라의 이웃 초 나라의 왕이 세상을 떠났다. 오자서의 계책에 따라, 희광은 오왕에게 초 나라를 정벌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는 자기 자신은 마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리를 다친 척 가장하였다. 그래서 왕료는 엄여를 장수로 파병하고, 또 경기를 정(鄭)나라와 위(衛) 나라 등 소국들과 연락해 함께 초 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고, 희광만이 조정에 남아 있게 되었다. 곧 이어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희광은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왕료에게; “제 집에 새로 온 요리사가 하나 있는데 생선 요리를 아주 잘합니다. 대왕께서 제집에 왕림하사 한 번 품평을 해 주시옵소서.”하고 유혹하였다. 왕료는 생선 요리라는 말을 듣자 바로 입맛이 당겨 그대로 약속하고 말았다. 식사 중, 희광은 핑계를 대고는 밖으로 나가고 전제가 완성된 생선 요리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왕료의 앞으로 다가갔다. 왕료의 부하 무사들이 전제를 아래위로 모두 몸수색하였지만 아무런 무기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에게 요리를 왕료에게 갖다 바치도록 허락하였다. 뜻밖에도 전제는 단검을 생선 배 속에다 감추고는, 왕료에게 가까이 갔을 때 재빠르게 비수를 요리에서 꺼내어 바로 왕료의 가슴을 찔렀다. 왕료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희광은 전제가 성공하는 것을 보자 바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왕료의 수족들을 살해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도 흩어지듯이, 왕료가 죽자 그의 수하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희광이 수레를 타고 입조하여 군신들을 모으고 스스로 오나라 왕의 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闔閭)이다.
제 19 계 부저추신(釜底抽薪)
솥 아래 짚풀을 끌어내다.
不敵其力, 而消其勢, 兌下乾上之象.
부적기력, 이소기세, 태하건상지상.
힘으로 맞서지 말고 그 기세를 흩어라. 兌下乾上(태하건상)은 <주역>의 이(履) 괘를 말하며 거기에 “柔履剛也(유이강야)”가 나오는데 바로 “以柔克剛(이유극강)”의 의미이다.
부저추신의 원래 뜻은, 솥 안의 물을 식히기 위해 솥 밑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을 치워 버린다는 것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조조, 오소(烏巢)를 야습하다
적의 보급원을 차단함으로써 적이 의지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 말년, 군벌들이 서로 싸울 때, 하북(河北)의 원소(袁紹)도 기회를 잡아 들고 일어 났다. 서기 199년, 원소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허창(許昌)을 공격했다. 이때, 조조는 관도(官渡)에 웅거하여 지키고 있었는데 병력은 고작 2만 정도에 불과했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원소는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백마(白馬) 지방을 공격해 왔다. 조조는 겉으로는 백마를 포기하는 듯 가장하고는 명을 내려 주력을 연진(延津) 나루터로 이동, 도하하려는 진용을 갖추었다. 후방에서 적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한 원소는 즉각 주력을 이끌고 서진하여 조조군이 도하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조조는 이렇게 속임수를 쓰고는 정병을 다시 보내 백마를 공격, 안량(顔良)의 목을 베어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양군이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게 되자 쌍방의 군량 공급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원소는 하북에서부터 10000대 이상의 군량을 조달해 대본영 북 쪽 40리 되는 오소(烏巢) 지방에 쌓아 두고 있었다. 조조는 오소에 군량을 지키는 병력이 많지 않음을 파악하고는 오소를 몰래 공격하여 원소의 보급을 끊기로 했다. 그는 원소 군의 깃발을 든 5,000의 정병을 직접 이끌고 말에 재갈을 물려 소리가 나지 않게 달려가 오소를 야습하였다. 오소의 원소군은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조조군은 이미 군량 창고를 포위하였다. 곧 이어 큰불을 일으키니 짙은 연기가 사방을 감쌌다. 조조군은 기세를 타고 군량을 지키던 원소군을 전멸시키고 10000대 이상의 군량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원소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고, 보급이 단절되었다는 소식에 군심이 동요되기 시작하자 원소도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조조군이 전면공격을 해 오자 원소군은 이미 전투력을 상실하고 10만 대군이 사방으로 궤멸되었다. 원소군은 대패했고, 원소는 겨우 800여 명을 데리고 힘겹게 포위망을 탈출하였지만 재기하지 못하게 된다.
제 20 계 혼수모어(混水摸魚)
乘其陰亂, 利其弱而無主. 隨, 以向晦入宴息.
승기음란, 이기약이무주. 수, 이향회입연식.
은밀한 혼란에 편승하여 우두머리 없는 약점을 취하라. 그리하면 저녁에 잘 먹고 쉴 수 있다.
연원은 삼국지:촉지:선주전(三國志:蜀志:先主傳)이다.
동한(東漢) 말년, 유비는 군을 일으켜 황건(黃巾)의 난을 진압하였고, 나아가 제후들 간의 혼전에 뛰어들었다. 그 후, 제갈량의 보좌아래 세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이후, 유비는 형주(荊州)를 빼앗고, 서천(西川)을 취했으니, 이 모두 “혼수모어”의 계로 얻은 것이다.
“혼수모어”는 원래 물이 혼탁할 때 손을 뻗어 물고기를 잡는다는 말이다. 즉, 어떠한 경우에서도 방법은 있다는 뜻...
-장수규(張守圭), 거란(契丹)의 난을 평정하다
적이 내부 혼란으로 지도자가 없을 때를 기회로 잡아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회는 그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니 되고, 능동적으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즉, 능동적으로 물을 휘저어서, 모든 상황이 복잡해 지기 시작하면, 기회를 봐서 손을 써야 한다.
당 나라 개원(開元 역자 주:玄宗 현종의 연호) 연간, 거란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 당을 침범하였다. 조정은 장수규를 유주(幽州) 절도사로 임명하여 거란의 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거란의 대장 가돌한(可突汗)은 여러 차례 유주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를 못하였다. 가돌한은 당군의 허실을 파악해 보기 위해서 사자를 유주로 파견하여서는, 다시 조정에 귀의하여 영원히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거짓으로 전달하였다. 장수규는 거란이 세력이 왕성한데도 먼저 화평을 제의해 온 데는 필시 무슨 속임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장계취계(將計就計 역자 주: 적의 계책을 역이용하여 공격함)로, 친절하게 사자를 접대하였다.
다음 날, 그는 왕해(王海)를 가돌한의 진영에 보내 선무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왕해는 거란 진영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지만, 그는 주연 석상에서 거란 장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그는 거란 장수들의 조정에 대한 태도가 서로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는 또 어느 병사의 입을 통해, 병권을 장악한 이과절(李過折)이 계속해서 가돌한과 충돌하고 있으며, 둘은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앙숙관계로 서로 신뢰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해는 이과절을 일부러 방문하여, 그와 가돌한 사이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듯 가장하고는 그의 면전에서 가돌한의 능력과 재주에 대해 크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과절은 다 듣고 나서 노기가 충천하여, 가돌한이 반당(反唐)을 주장하여 거란을 전쟁으로 몰아넣어 백성들의 원한이 크다고 말해 주었다. 거기에다가, 거란이 이 번에 화평을 구한 것은 모두 거짓이며, 가돌한은 이미 돌궐(突厥)의 병력을 빌려 놓아, 조만 간 유주를 공격할 속셈도 알려 주었다. 왕해는 이 기회를 잡아, 당군의 세력이 막강하니 가돌한은 틀림없이 패할 것이라고 이과절을 회유하였다. 그가 가돌한을 떠나 공을 세우면, 조정은 그를 반드시 중용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과절은 마음이 움직여 조정에 귀순하겠다고 얘기하였다. 왕해는 즉시 거란 왕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유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밤, 이과절은 본부의 인마를 거느리고 가돌한의 中軍 본부를 공격하였다. 가돌한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과절에 의해 진영 중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러자 거란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다. 가돌한에게 충성하는 대장 진찰(珍札)이 병력을 모아 이과절과 격전을 벌여 이과절을 죽였다. 장수규는 이 소식을 정탐하고는 즉시 병력을 이끌고 이과절의 군대와 내응하였다. 당군은 번개같은 속도로 거란 진영으로 돌격하니, 거란군은 분열되어 서로 공격해 혼란이 극에 달했다. 장수규는 세를 이용 맹렬히 공격을 퍼부어 진찰을 생포하고 거란군을 대파 거란의 난은 평정되었다.
제 21 계 금선탈각(金蟬脫殼)
승산없는 싸움에서 잘 빠지는 것도 아군의 손실을 덜어 종래 승리하는 방법이다.
存其形, 完其勢, 友不疑, 敵不動. 巽而止, 蠱.
존기형, 완기세, 우불의, 적부동. 손이지, 고.
진지의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원래의 기세도 유지하여, 우군도 의심하지 않고 적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아군은 비밀리에 주력을 이동시켜 다른 곳의 적을 공격한다. 주역의 고(蠱) 괘에서 나왔다. 손(巽)은 바람처럼 사라짐을, 고(蠱)는 현재를 끝내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원(元) 나라 시대 원곡선(元曲選)의 주사담(朱砂擔) 1절에서 나왔다.
금선탈각의 본래 뜻은 매미가 허물을 벗을 때, 본체는 껍질을 벗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표면적인 현상은 남기고 실제로는 몸을 빼 떠나가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지는 떠나가면서 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책략이다. 그리고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한다. 어느 면에서는, “탈각”이 너무 빨라서는 아니 된다.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는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부득이할 때가 되어서야 “탈각”해서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 면에서는, “탈각”이 너무 늦어서도 아니 된다. 패배가 굳어 진 상황에서는 일분이라도 더 머무르면 일분만큼 위험이 더 늘어 나고 일분 만큼 생환의 희망도 줄어들게 된다.
-남송(南宋)의 장수 필재우(畢再遇)의 군이 금(金)나라의 군대와 대치할 때의 일이다. 금의 지원 부대는 계속해서 늘어 나서 송의 부대를 압도하게 되었다. 필재우는 송나라군이 중과부적이니 철병을 계획하였다.
금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필재우는 영을 내려 매일 북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한 편으로는 적에게 위세를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송군 진영 내에서 북소리가 그치지 않을 정도로 군을 이리저리 이동하여 재배치하고 있다고 믿게 하려 함이었고, 또 한 편으로는,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며칠 지난 후, 필재우는 장수들을 소집해 철수 건을 상의하였다.
필재우는, “현재 적은 많고 우군은 수가 적으니 다시 싸워 봤자 득이 없다. 아군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빠져나가는 길밖에 없다. 단,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빠져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장수 하나가 일어 서서, “그러면 어떻게 철수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필재우는, “ ‘금선탈각’의 계를 생각해 두었다. 각자는 위치로 돌아 간 뒤,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면 된다. 날이 어두워 지면 우리는 바로 철군을 시작한다.”라고 일렀다.
장수들은 돌아가서 즉각 준비에 나섰다. 사병들에게 軍旗들을 천막의 꼭대기에 내어 걸게 하고는, 사병들에게 수많은 양들과 북을 구하도록 하였다.
날이 어두워 질 무렵, 송군 병사들은 양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양의 앞 두 발이 북에 닿도록 하였다. 양은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 견딜 수가 없어 온몸으로 발악을 하였고 자연히 두 발이 끊임없이 발버둥치며 북을 울리게 되었다.
어두워지자, 송군은 모두 배불리 먹은 뒤, 전체 인마가 가벼운 차림으로 소리를 죽인 체, 하나씩 하나씩 거꾸로 매달린 양이 치는 북소리 속에서 은밀히 진영을 빠져나갔다.
금군 진영은 송 진영에서 북소리가 그치지 않고 깃발들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는 송나라군이 아직 진영에 있는 것으로 여겼지 이미 떠나고 없으리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대를 재배치하여 기회를 봐서 송나라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며칠이 더 지난 후, 금나라 병사들이 보니, 송군 진영에서는 북소리만 날 뿐 사람의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금군 장수가 그제서야 의심이 들어 정탐꾼을 보내 보니, 북을 치고 있는 것은 송군이 아니라 양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송군은 진작에 “금선탈각”하여, 군영을 빠져나가 멀리멀리 가버렸던 것이다.
제 22 계 관문착적(關門捉賊)
-문을 걸어잠궈 적을 사로잡는다.
小敵 困之剝 不利有攸往.
소적 곤지박 불리유유왕.
적은 수의 적은 困之剝괘로 ‘떨어내기 힘들다’는 뜻이요 깨끗하게 내몰기에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 박剝이란 벗겨내다라는 뜻...
이글은 草蘆征略(초로정략) 유병(游兵)편에서 나왔다.
“관문착적”의 원뜻은 집에 도적이 들어 물건을 훔치고 있을 때 문을 닫아걸어 도적을 잡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전제하에, 힘든 적을 만났을 때는 우선 그 퇴로를 차단해서 물샐 틈 없이 포위한 후 일거에 섬멸해야 한다.
- 황소(黃巢), 장안성(長安城)으로 회군하다
만약에 적을 깊이 유인할 수 있다면, 그들을 가두어서 그물 안의 물고기, 독 안의 자라 신세로 만들어, 아군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서기 880년, 황소는 봉기군을 이끌고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공격했다. 당 희종(僖宗)은 황급하게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로 피하여, 잔여 부대를 규합하는 한편, 사타(沙陀 역자 주: 사타 돌궐로도 불리는 중국 서북방의 민족)의 이극용(李克用)에게도 출병하여 황소의 봉기군을 공격하도록 요청하였다. 다음 해에는 당군이 장안을 수복하려 출병하였다. 봉상(鳳翔)에서의 일전에서, 봉기군은 매복에 넘어가 당군에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당군은 기세가 드높았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진격하여 장안을 압박했다.
황소는 형세가 위급함을 보고는 장수들과 대책을 상의했다. 모든장수들이 무리하게 부딪쳐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황소는 즉시 전군을 동쪽으로 이동해서 장안을 빠져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당의 대군이 장안에 도착했으나 이상하게도 황소군의 응전이 없었다. 선봉 정종초(程宗楚)가 공격명령을 내려 기세등등하게 장안성 안으로 돌진해 들어가서야 황소군이 이미 모두 철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장안을 점령하게 되자 모든 장수들이 미친듯이 기쁜 나머지 사병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을 방임하였다. 사병들은 봉기군이 패배해 물러간 것을 보고는 군기가 느슨해 져서, 하루종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장 성 안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군의 장수들도 승리에 도취되어 하루 종일 음주와 오락으로 승리를 만끽하였다.
황소는 사람을 보내 성중의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는, 적들이 이미 독 안에 들어 왔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날 한밤중, 부대를 신속히 장안으로 회군시켰다. 당군은 승리의 기쁨에 젖어 모두 쿨쿨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神兵이 내려오듯이, 전광석화와 같이 장안성 안으로 쳐들어가, 아무런 준비도 없던 당나라군을 주살하니 시체가 온 사방을 뒤덮었다. 정종초도 와중에 피살되었다.
제 23 계 원교근공(遠交近攻)
形禁勢格, 利從近取, 害以遠隔. 上火下澤.
형금세격, 이종근취, 해이원격. 상화하택.
위치와 세력이 멀리 떨어져 미치기 힘들면 이익을 견주어 가까운 지역부터 취하고 해가 될 일은 따로 떨어트리는 것이 좋다.
上火下澤(상화하택)은 주역의 규(睽)괘에서 나왔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며 서로 맞지 않고 위배된다. 같은 이치로 상대를 克하려 들기 보다 때론 유화책이 나은 법이다. 따라서 가운데 적을 두고 내 편을 먼저 만들고 枯死시키거나 먼저 점령하여 국경을 존중하면 장래 적을 만들지 않는 이점이 있다.
이는 전국책: 진책(戰國策: 秦策)에 “대왕께서는 멀리 있는 나라와는 교분을 맺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 하면, 한 뼘의 땅을 얻어도 바로 대왕의 땅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그 역시 바로 대왕의 땅이 되옵니다.”에서 나왔다.
-범저(范雎)의 헌책(献策)
위(魏)나라 사람 범저가 진(秦)나라에 유세하러 와서 진 소왕(昭王)을 만났다. 진 소왕이 범저에게 부국강병의 계책을 묻자, 범저는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현재의 7 국(역자 주: 진시황이 천하 통일하기 전의 시대로써, 秦(진), 趙(조), 魏(위), 韓(한), 燕(연), 楚(초), 齊(제)를 말한다.) 중에서 최강대국은 바로 진(秦)나라입니다. 진나라는 비옥한 들이 천 리요, 무장한 군대가 백만에 달하며, 국경선의 지세가 험하니, 공격하는데 유리하고, 물러나 지키기 좋은 까닭에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별 힘을 들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나, 최근 대왕께서 승상 위염(魏冉)의 말을 믿고서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제(齊)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진나라의 앞길을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저는 다시 말했다: “한(韓), 위(魏) 두 나라를 넘어 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승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왕께서는 어떻게 획득한 땅을 진(秦)나라에 연결시키시렵니까? 이전, 제나라 왕이 한, 위 양국을 넘어 초(楚)나라를 공격해 천리의 땅을 점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나라는 한 뼘의 땅도 챙기지 못하고 한, 위 두 나라가 나눠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제나라는 초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한, 위 두 나라는 초나라에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왕께서는 마땅히 ‘원교근공’의 책략을 채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진 소왕은 그의 말에 빠져 들어, 다시 물었다: “ ‘원교근공’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범저가 대답했다: “ ‘원교근공’이란 멀리 떨어 진 나라와는 맹약을 맺어 적대국을 줄이고, 가까이 있는 나라는 다잡아서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한 뼘의 땅을 얻어도 대왕의 땅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바로 대왕의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한, 위를 쳐 부신 후에 연(燕), 조(趙)를 치고, 연, 조 이후에 다시 제와 초를 치십시오. 대왕께서 이러한 계책을 따라 실행하신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반드시 6국을 합병하시고 천하를 통일하게 될 것입니다.”
범저의 말을 들은 진 소왕은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과인은 이제부터 선생의 말만 듣겠소!” 진 소왕은 즉각 범저를 객경(客卿)으로 모시고, 범저의 “원교근공” 책략에 따라 제나라를 치러 갔던 병력을 철수 시키고 이웃한 위나라를 공격했다. 이 후, 진나라는 이웃 나라들의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로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견실한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제 24 계 가도벌괵(假道伐虢)
兩大之間, 敵脅以從, 我假以勢. 困, 有言不信
양대지간, 적협이종, 아가이세. 곤, 유언불신
적과 우리 양대국의 중간에 위치한 소국을 적국이 위협해 굴복시키려 하면, 우리의 위세를 떨쳐 굴종시켜야 한다. 지키지 않을 약속으로 곤경으로 몰아가야 한다.
이 글의 출전은 <좌전(左傳)>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는 우나라와 虢나라를 병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나라와 괵나라 양국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다. 따라서 양국 연맹을 깨뜨려서 각개격파하여야 만이 진나라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명마(名馬)와 보석 등으로 우나라 우공을 회유하였다. 우공은 재물을 탐하여, 진나라 군대가 우나라를 통과해서 괵나라를 치도록 허락하였다. 진군은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 오는 길에 우나라도 멸망시키고 말았다. 후세에 이르러, 상대에게 길을 빌린다(혹은 물건을 빌리거나 기회를 타거나)는 구실로 실지로는 상대를 멸망시키는 계략을 “가도벌괵”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갈량, 주유(周瑜)를 화나게 해서 죽게만들다
삼국시대, 형주(荊州) 자사 유기(劉琦)가 병으로 약해지자 여러사람들이 유비를 목수(牧守:지방장관)로 추천해 형주 일대를 점거해 다스리게 되었다. 손(孫), 유(劉) 양가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해서, 조조는 한나라 헌제(獻帝)에게 주청하여 주유를 남군(南郡) 일대를 총괄하는 태수로 봉하였다. 형주는 지금까지 유비가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남군을 총괄하는 태수의 자리는 허울에 불과했다. 주유는 조조의 이간계에 넘어가, 노숙(魯肅)을 유비에게 보내 형주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유비는 노숙이 형주를 돌려 달라는 요구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난감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하였다: “주군께서는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제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노숙이 형주에 관한 건을 꺼내면 주군께서는 그냥 방성대곡하십시오. 그 후에는 제가 그를 상대하겠습니다.”
노숙이 도착한 후 과연 형주를 돌려 달라는 요구를 하자, 유비는 듣고 나서 크게 방성대곡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노숙은 어찌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였다. 옆에 있던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당초 저희 주군께서 형주를 빌릴 때, 서천(西川 역자 주: 오늘 날 사천성 일대)을 얻으면 형주를 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니, 익주(益州 역자 주: 서천의 다른 이름)의 유장(劉璋)은 우리 주군의 동생뻘로써 같은 핏줄이니 만약 군사를 일으켜 그의 성을 점령하게 되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 뻔하고, 만약에 그를 치지 않고 형주를 돌려주게 되면 어디에 가서 한 몸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형주를 돌려주지 않으면 오나라 오후(吳侯)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니 우리 주군께서는 실로 진퇴양난이십니다. 그래서 방성대곡하신 것입니다.” 노숙은 본래 인자한 사람이었으므로, 유비의 딱한 사정을 보고는 마음이 안쓰러워, 제갈량이 제기한 형주 반환 연기 건을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주유는 노숙의 보고를 듣고는 크게 화를 내었다. 주유는 한 가지 계책이 실패하자 또 다른 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노숙을 다시 형주로 보냈다.
노숙은 주유의 지시에 따라 유비에게 말했다: 오후께서는 장군의 형편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장수들과 상의한 끝에 장군을 대신해 군사를 일으켜 서천을 치기로 했습니다. 서천을 취한 후, 형주를 돌려 받으면 서천은 동오가 장군에게 드리는 혼수품이 될 것입니다. (역자 주: 동오 손권의 여동생이 유비의 부인이 되었음.) 군대가 지나 갈 때에 군량을 다소간 지원해 주시기 바라는 것 외에는 다른 요구사항은 없습니다.”
유비가 순간 주저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갈량이 나서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오후께서는 고마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동오의 용맹스런 군대가 도착하면 반드시 멀리부터 맞이해 노고를 위로하겠습니다.”노숙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노숙이 떠나 가기를 기다려 유비는 제갈량에게 동오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물었다. 제갈량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철부지 주유의 ‘가도벌괵’의 계입니다. 말로는 서천을 친다 하면서 실지는 형주를 취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주유는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겠지만 소신을 속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주유가 이번에 오게 되면, 그가 죽어도 묻힐 곳이 없는 신세로 만들겠습니다.”
주유는 5만의 병력을 일으켜, 위풍당당하게 형주를 바라고 떠났다. 형주에 도착하게 되자, 그는 유비가 성문을 열어 음식을 마련하여 그와 그의 군대를 환영하게 되면 기회를 봐서 불시에 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도 않게도 일성의 딱따기 소리가 나자, 성 위에 무수한 병력이 일제히 창검을 세우고는 엄격한 진용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오군의 배후에도 함성이 사방에서 일어나, 모두들 주유를 사로잡으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주유는 제갈량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노기가 치솟자 화살에 맞았던 상처가 재발해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제 25 계 투량환주(偸梁換柱)
들보를 기둥으로 바꾼다는 말은...
용도를 구분하지 않고 대충 땜빵으로 대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저 뭉뚱그리는 태도를 말한다. “투천환일(偸天換日)”, “투룡전봉(偸龍轉鳳)”과 같은 뜻으로 어가락전기(漁家樂傳奇)에는 “愿將身代人金屋, 做個偸天換日 (원장신대인금옥, 주개투천환일)”에서 나왔다.
頻更其陣, 抽其勁旅, 待其自敗, 而後乘之. 曳其輪也.
빈경기진, 추기경려, 대기자패, 이후승지. 예기륜야.
적으로 하여금 빈번하게 진용을 바꾸게 하고, 적의 주력을 제거하여 그들이 자멸하기 기다린 후, 승리를 얻어 낸다. 이것은 마치 수레의 바퀴를 손으로 굴려 움직이는 것과 같다.
“金屋藏嬌(금옥장교)”의 고사에 의하면, 한(漢) 무제(武帝) 유철(劉徹)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쾌활하고 총명했다. 늘 고모인 유표(劉嫖) 공주를 따르며 놀곤 했는데, 어느 날 유표가 그에게 장래 어떤 여자를 신부로 맞이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유철은 유표의 딸 아교(阿嬌)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나는 황금으로 된 집(金屋)을 짓고, 아교를 아내로 맞이하여 그녀를 그 집안에 숨겨 둘거야!”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유표는 자기의 딸이 황후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유표를 도와 제위에 오르게 했고, 그 딸도 역시 진짜로 황후가 되었다. 그래서 위의 어가락전기(漁家樂傳奇)의 대강의 뜻은: “몸은 살짝 바꿔치기 하여 (한 무제가 지은) 금옥에 대신 들어 가고 싶다.”)
집의 대들보를 바치는 기둥을 몰래 바꾸면 그 집은 바로 무너진다; 군대의 주력이 바뀌어 지면 그 군대도 바로 몰락하게 된다. 대들보와 그를 바치는 기둥은 사물의 핵심과 급소를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계책을 세우고 실행할 때에는 우선 사물의 대들보와 기둥, 즉 핵심과 급소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문제의 실질을 파악하게 되어 대응 조치를 취하기 쉬워진다.
이 계는 반드시 상대가 준비가 안된 상황 하에서 사용하여야 한다. 일단 상대에게 발각되면, 자기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훔치려 하던 닭은 못 훔치고 쌀 한 줌만 손해”라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제 26 계 지상매괴(指桑罵槐)
大凌小者, 警以誘之. 剛中而應, 行險而順.
대릉소자, 경이유지. 강중이응, 행험이순.
어른이 아이들을 다룰 때 경고하거나 꼬드기는 법이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따르기는 하겠지만 어른이 먼저 실천하고 본을 보이면 순종하는 법이다.
“지상매괴”와 같은 뜻으로....
-닭을 죽임으로 원숭이를 훈계한다(殺鷄儆猴 살계경후). 즉, 전체를 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사람을 처벌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게 경고하다.
-산을 두드려 호랑이를 놀라게 하다(敲山震虎 고산진호). 즉, 산의 바위를 두드려 호랑이에게 위협을 가하여, 호랑이에게 자기의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
-말을 빙빙 돌려 말하다(旁敲側擊 방고측격). 즉, 직접적으로 문제를 가리키지 않고, 빙 돌려서 우회적으로 자기의 불만을 표시하다.
-서달(徐達)을 참(斬)하려 해서 군기를 세우다
서기 135년, 주원장(朱元璋)은 홍건군(紅巾軍)을 이끌고 집경(集慶 : 오늘날 남경)을 함락한 후 진강(鎭江)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강을 공격하는 그 날 새벽, 정작 이 번 전투를 지휘할 책임을 맡은 서달(徐達) 장군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대군이 집합해 있는 연병장으로 들려 왔다: 서달 장군이 이미 체포되어 곧 참수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이었다.
장수들과 사병들 할 것 없이 모두들 크게 놀랐다. 서달 장군은 주원장을 따라 거병한 이래, 동정서토(東征西討)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한 그가 도대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참수형에 처할 지경이 되었는가?
조금 지나자, 서달 장군이 포박된 체 압송되어 왔는데, 뒤에는 살기등등한 망나니 두명이 큰 칼을 들고 따르고 있었다. 주원장도 호위 무사들에 둘러 싸여 연병장에 도착했다.
집행관이 낭낭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서달은 병사들을 총괄 지휘하는 대장군으로써, 수하 장졸들을 단속할 줄 모르고, 군중에 여러 차례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건이 발생해 우리 홍건군의 명성을 더럽혔다. 이에 엄정한 군기를 세우기 위하여 서달을 참수해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한다!”
모든 장졸들은 이 말을 듣자 겁을 먹고 얼굴이 창백해 졌다. 주원장이 정말로 행동에 옮기려 하자 모두들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몰랐다. 원수부의 도사(都事)인 이선장(李善長)이 마음을 굳게 먹고 주원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서달 장군은 작전에 있어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하여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장수들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오니 원수(元帥)께서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옵소서.” 그러자 모든 장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는 애절하게 빌었다: “군중에서 발생한 백성들을 괴롭힌 사건은 서달 대장군에게만 죄를 물을 수 없고 저희들도 마찬가지로 책임이 있습니다. 원수께서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옵소서!”
주원장은 의자에 앉은 채, 안색이 얼음장같이 굳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그가 마침내 일어서서,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우리가 거병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제장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하늘을 대신해서 도를 행하고, 폭군을 몰아내고 양민들을 평안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장들이 한 말대로 이다.” 주원장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우리가 원(元)을 반대해서 거병한 것은 바로 원의 관원들이 백성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원을 멸망시킨 뒤, 우리가 또 백성들을 괴롭힌다면, 우리 또한 원의 관병들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역시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기 위해 거병하여 우리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이선장은 주원장의 목소리가 다소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는 얼른 기회를 잡아 읍소하였다: “서달 대장군은 오랫동안 원수를 따라 모시면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무너뜨리며, 고생도 많았고 공도 크니 이번만 용서하시옵소서!” 주원장은 이 말을 듣고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서달을 향햐여 호령하였다: “여러 제장들의 얼굴을 봐서 이번만은 너를 잠시 용서한다. 이후 군중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반드시 용서없이 목을 벨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주원장은 소매를 뿌리치고 들어가 버렸다.
포박에서 풀려 난 서달은 다시 대장군의 위엄을 되찾고는 그 자리에서 선포하였다: “진강을 점령한 후, 첫째, 집에 불을 지르지 말 것, 둘째, 물건을 강제로 빼앗지 말 것, 세째, 백성을 괴롭히지 말 것, 네째, 부녀자를 희롱하지 말도록 한다. 위반하는 자는 여러 사람 앞에서 목을 벨 것이다!” 이리하여 서달 장군이 지휘하는 이 기율이 엄정한 대군은 손쉽게 진강을 점령하였다. 성에 진입한 후에, 대군은 추호의 위반이 없었기에 현지 백성들이 박수로 칭찬하여 그들을 맞았다.
주원장은 이러한 정황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서달을 불러, 서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현명한 아우, 연병장의 그 연극은 정말 아우에게 미안하네!" 서달이 웃으며 말했다: “원수님의 고명한 지혜입니다. 연병장에서의 그 연극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처럼 이렇게 엄정한 군기를 수립할 수 있었겠습니까! ”
제 27 계 가치부전(假痴不癲)
어리석은 체 하되 실지로 미치지는 말아라.
늘 모자란 듯 살되 실지로 못나지는 말아라.
寧僞作 不知不爲, 不僞作 假知妄爲 靜不露機. 雲雷屯也.
영위작 부지불위, 불위작 가지망위 정불로기. 운뢰둔야.
어리석은 짓을 하는 데 익숙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모르고 어리석어지지 않으려면 망녕된 짓을 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기밀을 노출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雲雷屯괘로 힘을 잘 비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소위 승리감에 도취 되어 작은 승리를 큰 승리와 바꾸지 말라는 의미이다.
아래 조승을 보면 방심하다 모든 걸 잃는 예를 보여준다.
-사마의(司馬懿) 대권을 잡다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 조상(曺爽)과 사마의가 같이 조정에서 일하였다. 사마의는 태부(太傅)로 관직이 올라갔으나 겉으로만 직이 높아졌을 뿐 군정의 대권이 조상 일족에게 넘어가게 되어 실지로는 강등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마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는 병이 났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는 집에 칩거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상은 오만하고 권력을 전횡하여 안하무인이었지만, 유일한 걱정거리가 사마의였다. 마침, 이승(李勝)이 청주자사(靑州刺史)로 가게 되자, 조상은 이승에게 사마의를 작별인사차 방문하도록 해 그 허실을 엿보도록 했다. 사마의는 그 사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으므로, 두건을 벗어 버리고 머리를 산발하고는 이불을 껴안은 채 침상 위에 앉아 짐짓 중병에 걸린 듯 꾸미고는 이승에게 들어 오도록 했다.
이승은 인사를 마친 후, “한참 동안 태부를 뵙지 못했습니다만, 병이 이토록 중한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오늘은 제가 청주자사로 가게 되어 태부께 작별인사를 드리고자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었다.
사마의는 일부러, “병주(幷州)는 북방에 가까우니 매우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라고 대답했다.
이승은, “제가 가는 곳은 청주이지 병주가 아닙니다.”라고 바로 잡았다.
사마의는, “그대가 병주에서 왔다고?”라고 다시 말했다.
이승은 큰 소리로, “산동의 청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마의는 웃으며,”청주에서 왔다고?”라고 거짓 대답했다.
이승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늙은이가 어떻게 이리 심하게 병이 들었는고? 귀까지 먹었구만.
“붓을 가져오너라,”라고 이승이 하인에게 말하고는 그에게 써서 보여 주었다.
사마의는 그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확실하게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귀까지 먹은 줄은 몰랐다네.”라고 말하며 손으로 입을 가리키자, 시녀가 그에게 탕약을 대령하자 입으로 마시면서 온 침상에 흘리는 것이었다. 기침을 심하게 한 후, “나는 이제 늙었고 병도 이리 중하니 아마 며칠 더 살지 못할 것 같네. 우리 집 아이들 둘이 아직 재목이 못 되었으니 자네가 그들을 잘 훈육해 주게. 조상 대장군을 뵙거든, 잘 좀 부탁드리도록 바라네.”라고 말하고는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승은 작별인사를 마치고 돌아가 조상에게 사정을 그대로 보고하자, 조상은 크게 기뻐하며, “그 늙은이가 죽으면 나도 이제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그 후로는 사마의에 대해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았다.
사마의는 이승이 떠나는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켜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이제 부터는 조상이 나에 대해 진짜로 방심할 것이다. 우리는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그에게 정말 쓴 맛을 보여 주도록 할 것이다.”
오래지 않아 조상은 御駕를 호위하여 명제를 모시고 선조를 배알하러 떠나게 되었다. 사마의는 즉시 옛 부하들을 소집하고 집안 가병들을 이끌고 무기고를 점령한 후, 태후를 위협하여 조상의 일당들을 제거한 후, 조상에게는 병권만 내어놓으면 그를 해치지 않겠다고 속였다. 그러나 국면이 안정되자 사마의는 조상과 그 일당들을 모두 처치해 마침내 위나라 군정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28 계 상옥추제(上屋抽梯)
적을 유인해 위층으로 올라가게 한 후 그 사다리를 치워 고립시킨다.
우쭐한 사람은 잘 속고 싸움에 지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속기 쉬운 사람은 네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심이 많으나 그 해로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둘은, 어리석어서 그 변화를 모르는 사람이다
셋은, 성미가 조급해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넷은, 성격이 교만하여 적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다.
假之以便, 唆之使前, 斷其援應, 陷之死地. 遇毒, 位不當也.
가지이편, 사지사전, 단기원응, 함지사지. 우독, 위부당야.
일부러 허점을 보여, 적에게 편리한 조건들을 제공해서 그가 앞만 보고 가게끔 유인한 후에, 앞에서 호응하고 뒤에서 지원하는 부대와의 연결을 끊어 버림으로써, 적을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뜨린다. 독을 만나면 위치는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噬腊肉 遇毒, 位不當也는 주역 서합(噬嗑)괘에서 나왔다. ‘말린=오래된 고기를 먹다 보면 혹 상해 독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남에게 속는 것’을 의미한다. 位不當이란 입지가 당당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 제갈량전에 나왔다. 유표(劉表)는 천성이 유약하고 부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는 어린 아들 유종(劉琮)을 편애하고 장자 유기(劉琦)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여러 번 제갈량에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책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모두 제갈량이 거절하였다. 어느 날 유기는 제갈량을 누각으로 유인하고는, 몰래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도록 한 후에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은 올라 가도 하늘에 닿을 수도 없고, 내려가도 땅에 닿을 수도 없으며,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제 귀에만 들려 올 뿐입니다. 이제 말씀하실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리 되자 제갈량은 어쩔 수 없어 유기에게 “바깥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이다”는 계책을 들려 주게 된다.
이에 따라 유기는 아버지에게 그를 강하(江夏) 태수로 보내 주도록 요청해 화를 면하게 되었다.
-조위(曺瑋), 지혜로 서하(西夏)군을 격파하다
북송(北宋) 초기, 서하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한 번은, 서하군이 또 쳐들어와 소란이 생겼을 때, 위주(渭州) 지주(知州) 조위가 출병하여 그들을 패퇴시켰다. 서하군이 멀리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조위는 사병들 에게 적이 버리고 간 소와 양들을 몰고, 또 적이 버리고 간 군수품들을 노획해서 천천히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서하군은 수 십리를 도망친 뒤에, 정찰병으로부터 송군에 관한 보고를 받게 되었다. 서하군 대장은 조위군이 재물을 탐하고, 따라서 행동이 느리며, 대오도 산만하니, 군대를 되돌려 송군을 습격하면 반드시 대승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위는 서하군이 다시 회군하여 돌아 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서도 계속해서 부대가 천천히 행군하도록 명령했다. 부하 장군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건의 하길 “소들과 양들, 또 노획한 군수품들을 버리십시오. 그런 쓸데 없는 것들을 데리고 가느라 부대의 행군이 민첩하지 못 합니다.”조위는 이러한 건의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지형이 유리한 곳에 이르자, 그때서야 부대에게 휴식을 명하고 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서하군이 가까이 왔을 때, 조위는 사람을 보내 서하군 대장에게 일렀다. “그대들은 멀리서 왔으니 분명 피로할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힘든 것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 청컨데 그대들은 우선 휴식하라. 이후에 우리 다시 싸우자.”
그러자 서하군은 이미 피로가 극에 달했으므로 조위의 제안을 듣자 모두 기뻐하며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한 참이 지난 후에야 쌍방은 북을 울려 교전을 시작했다. 결과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서하군을 크게 물리치게 되었다.
조위의 부하들은 너무 쉽게 이긴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위가 설명해 말했다: “내가 모두에게 소와 양들을 몰고 노획한 군수품을 끌고 가라고 해서 우리 군의 대오가 산만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적을 속여서 유인해 그들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소. 적은 아주 멀리 간 후에 다시 회군해 우리를 공격했으니 아마도 100 리는 족히 갔을 것이오. 이 때, 우리가 바로 개전했다면, 그들은 비록 지치기는 했지만, 사기는 아직도 높았기 때문에 전투의 승패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오. 내가 그들로 하여금 먼저 휴식하라고 한 것은, 먼 길을 온 사람이 일단 휴식하게 되면, 바로 발이 부르트고, 정신도 해이해져서 전투력이 잃게 되는 법이오. 나는 바로 “상옥추제”의 방법으로 서하군을 물리쳤을 뿐이오.”
제 29 계 수상개화(樹上開花)
골격에 이파리를 더해 허세로 속인다는 뜻...
借局布世, 力小勢大. 鴻漸於陸, 其翼可用爲儀也.
차국포세, 역소세대. 홍점어륙, 기익가용위의야.
국면을 이용해 세상을 품자면 힘은 적게들이고 세를 커보이도록 하는 법이다. 갈매기가 바다 아닌 육지를 나는 것은 날개짓(바람을 타고 오르는)에 힘입은 것이다.
“수상개화”는 “철수개화(鐵樹開花)”에서 변화된 것이다. 벽암록(碧嚴錄)에 “休去歇去, 鐵樹開花 (휴거헐거, 철수개화)”가 나오고, 또 왕경일(王鏡日):순년경(洵年鏡)에, “속담에 이르기를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을 ‘철수개화’라 한다”가 나온다.
여기서 休去歇去에서 마음이 쉬는 걸 休, 몸이 쉬는 걸 歇이라 하여 한 마디로 마음을 비우면 쇠로된 나무에서도 꽃이 핀다란 말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상대가 감히 짐작하지 못하고 겁먹게 된다는 말이다.
-장비(張飛), 지혜로 조조(曹操)군을 물리치다
장비가 뛰어난 맹장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가 지용을 겸비했다는 것은 모두들 잘 모른다. 유비는 군사를 일으킨 초기, 조조와의 교전에서 여러 차례 패하게 된다. 유표가 죽은 후, 유비는 형주에 있었는데 세력이 아주 미미했다. 이때,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남하해 완성(宛城)에 이르자, 유비는 황망히 형주 군민을 이끌고 강릉(江陵)으로 퇴각했다. 같이 철수하는 백성들이 많다 보니 속도도 무척 느렸다. 조조군이 당양(當陽)까지 추격해 와, 유비의 군과 일전을 벌였는데 유비가 패퇴하여, 심지어 자신의 처자와 아들도 혼란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 유비는 허둥지둥 도망치기 바빠, 장비에게 뒤를 막고 추격병을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장비는 불과 2~30기의 기병만 있었는데 어떻게 조조의 대군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인가? 장비는 위험에 처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머리를 굴려 마음속에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그는 거느리고 있던 기병들에게 모두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가지를 꺾어 말꼬리에 묶게 한 후 숲속을 달리게 했다. 장비는 혼자서 흑마를 타고서 장팔사모를 비껴 들고는 위풍당당하게 장판교(長板橋) 위에 서서 추격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격병들이 도착해, 장비 혼자서 말을 타고 창을 비껴든 채로 다리 위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다리 동편 숲속에는 먼지가 휘날리고 있었다. 숲속에 틀림없이 복병이 있다고 생각한 조조의 추격병은 바로 그 자리에 멈추었다. 장비는 2~30 기의 기병만으로써 추격하는 조조군을 저지해, 유비와 형주 군민이 무사히 철수하도록 하였으니 이가 바로 “수상개화”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제 30 계 반객위주(反客爲主)
이 계의 원 뜻은 주인이 손님을 접대할 수 없어 오히려 손님의 접대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뜻이 전화되어, 불리한 정황에서 피동적인 것을 주동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여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책략을 말하게 되었다. 차례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계를 실행할 때의 요체이다.
乘隙揷足, 扼其主機, 漸之進也.
승극삽족, 액기주기, 점지진야.
빈틈을 타서 발을 찔러넣고, 적의 기틀을 억누르면서 차근차근 진척시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연의(三國演義) 제 71회에 나온 것이다.
옛 사람들은 “반객위주”의 계를 중시하였다. 손자의 십일가주(十一家注)에 “내가 먼저 군사를 일으키면 내가 객(客)이 되고 상대는 주인이 된다. 객이 되면 먹는 것이 부족하게 되고, 주인이 되면 배불리 먹고도 남게 된다. 그러니 적으로부터 모아 둔 것들을 탈취하고, 전답을 빼앗아, 적의 양식으로 군량을 삼고 적의 시설을 이용하게 되면, 우리는 배부르게 되고 적은 주리게 되니, 바로 객이 주인이 되도록 하는 책략이다.”라고 하였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계를 실행할 때의 요체이다.
-원소(袁紹), 계략으로 기주(冀州)를 취하다
원소와 한복(韓馥)은 서로 동맹관계에 있는 친구 사이로써, 이전에 함께 동탁(董卓)을 토벌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원소는 세력이 점점 강성해졌고, 또 계속해서 그 세력을 키워 나가려 했다. 그가 하내(河內)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군량이 부족해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오랜 친구인 한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먼저 사람을 보내 군량을 제공해서 원소로 하여금 군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원소는 남이 보내 주는 군량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사 봉기(逢紀)의 계책을 받아들여 양식이 풍부한 기주를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기주 목사는 바로 한복이었지만 원소는 더이상 고려할 여지도 없이 즉시 손을 써 그의 묘책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우선 공손찬(公孫瓚)에게 편지를 보내 그와 함께 기주를 치자고 제의했다. 공손찬은 진작부터 기주를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에 원소의 제의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꿰뚫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즉각 기주를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원소는 한편으로는 몰래 사람을 보내 한복을 만나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공손찬과 원소가 힘을 합쳐 기주를 공격하면 기주는 지키기 어렵습니다. 원소는 과거부터 장군의 좋은 친구가 아닙니까? 최근에는 그에게 군량을 보내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장군께서는 어이해서 원소와 연합해 공손찬을 대적하지 않으십니까? 원소가 성에 들어오게 되면 기주는 바로 보전되는 것이 아닙니까?”
한복은 할 수 없이 원소를 기주로 불러 들였다. 이렇게 요청해서 온 손님은 겉으로는 한복을 존중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마치 못을 박듯이 요소요소에 배치하였다. 이렇게 되자, 한복은 자신은 이미 “주인”의 자리에서 “손님”에 의해 밀려났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복은 기주를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 31 계 미인계(美人計)
兵强者, 攻其將. 將智者, 伐其情. 將弱兵頹, 其勢自萎. 利用御寇, 順相保也.
병강자, 공기장. 장기자, 벌기정. 장약병퇴, 기세자위. 이용어구, 순상보야.
만약 적의 병력이 강력하면, 그 장수를 공략하는 법이다. 만약 적의 장수가 지모가 뛰어나면, 그 감정을 들끓게 한다. 적 장수가 나약해지면 병졸들의 사기도 스스로 떨어지는 법이다. 적을 통제와 와해를 촉진하면 아군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 시킬 수 있게 된다.
이 계는 육도(六韜) 문벌(文伐)에 “아첨하고 정치를 그르치게 하는 신하를 지원해 그 마음의 지혜를 혼미하게 하며, 미녀와 음탕한 것을 보내 그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다 (養其亂臣以迷之, 進美女淫聲以惑之. 양기난신이미지, 진미녀음성이혹지.)”에서 나왔다.
한비자(韓非子)의 내저설화(內儲說話)에는 “진(晋) 헌공(献公)은 우(虞), 괵(虢), 두 나라를 치기 위해, 굴(屈) 지방의 명마(名馬)와, 수극(垂棘) 지방의 옥기(玉器),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 그나라 왕의 마음을 사로 잡으면서 그 나라 정치는 혼란스럽게 했다. (晉献公伐虞, 虢, 乃遺之屈産之乘, 垂棘之璧, 女樂二八, 以榮其意而亂其政 진헌공벌우, 괵, 내유지굴산지승, 수극지벽, 여락이팔, 이영기의이난기정.) ”
이에서 보듯이, “미인계”는 미색을 이용해 적을 유혹하여, 적으로하여금 무사안일과 향락을 탐하게 하고, 그 의지를 약하게 만든 후, 기회를 봐서 공격해 승리를 취하는 계책이다.
-동탁의 죽음
한(漢) 헌제(獻帝)는 9 세에 제위에 올라, 조정은 동탁이 전권을 휘둘렀다. 동탁은 위인이 음험하고 사람을 함부러 죽일 뿐 아니라 제위를 찬탈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문무 백관들은 동탁에 대해 모두들 미워하면서도 또한 그를 두려워했다.
사도(司徒) 왕윤(王允)은 조정에 저런 간적(奸賊)이 나타 났으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고 생각해 근심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동탁의 세력이 강대해 그를 정면으로 공격해 봤자 그를 이겨 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탁의 신변에는 여포라고 하는 무용이 뛰어 난 양자가 그를 충심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왕윤은, 이 “부자” 두 사람이 한 패가 되어 못된 짓을 하며 안하무인이었지만, 모두 공통의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둘 다 여자를 밝힌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니 간적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미인계”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윤의 집에 초선(貂蟬)이라고 하는 가녀(歌女)가 있었다. 이 가녀는 미모와 재주를 다 갖추었을 뿐 아니라 대의를 아는 여인이었다. 왕윤은 초선에게 “미인계”로 동탁을 죽이려는 계획을 털어 놓았다. 초선은 왕윤이 자기에게 베푼 은덕에 감사해 자기를 희생시켜, 백성을 위해 간적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느 연회가 있던 날, 왕윤은 자기의 “딸” 초선을 여포의 옆에 앉도록 준비하였다. 여포는 이 절세미인을 보고는 기뻐 어찌할 줄 몰라 왕윤에게 매우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길일을 택해 결혼하기로 서로 결정했다.
다음 날, 왕윤은 동탁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초선에게 춤을 추도록 하였다. 동탁은 그녀를 보자 바로 군침이 돌았다. 왕윤은; “태사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그녀를 태사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동탁에게 말했다. 간적은 짐짓 사양하는 척 하다가 초선을 데리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 갔다.
여포가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화가 나 왕윤에게 따지고 들었다. 왕윤은 그러나 교묘한 말로 여포를 속였다. 그는, “태사께서 그 며느리를 보자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그 영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태사께서는 오늘이 길일이니 그녀를 데리고 돌아 가 장군과 결혼을 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둘러 대었다.
여포는 사실인 줄로 믿고는 동탁이 그를 위해 결혼식을 치루어 주기를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동정이 없어, 다시 알아 보니, 동탁이 이미 초선을 자기 첩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포는 일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동탁이 조정에 들어 와서 보니 늘 뒤에 따라 다니던 여포가 보이지 않자 의심이 들어 바로 집으로 돌아 가 보았다. 후원에 있는 봉의정에서, 여포는 초선과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이었다. 화가 난 동탁은 창을 들고 여포를 찔렀다. 여포가 한 손으로 창을 막아 찌르지는 못하였다. 여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동탁의 집을 떠나 갔다. 원래, 여포는 초선과 몰래 약속하였고, 초선은 왕윤의 계책에 따라 그들 부자 사이를 이간질 하기 위해 여포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간 동탁을 크게 욕하였다.
왕윤은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아, 여포를 밀실로 불러 상의하였다. 왕윤은 동탁이 자기 딸을 강제로 데려 간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면서 또한 장군의 처를 빼앗은 것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하였다. 여포는 이를 갈며 말하였다: “우리가 부자 사이가 아니라면, 정말 그를 죽이고 싶소.” 왕윤이 얼른 말을 받았다: “장군, 그렇지 않습니다. 장군은 성이 여씨이고 그는 동씨입니다. 그러니 무슨 부자 사이란 말입니까? 게다가, 그는 장군의 처를 빼았았고 창으로 장군을 찔러 죽이려 까지 했는데 무슨 부자의 정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여포는, “사도께서 잘 일깨워 주시었소. 그 간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 인간이 아니오.”라고 내어 뱉었다.
왕윤은 여포의 결심이 굳게 선 것을 보고는, 거짓 聖旨를 만들어 동탁이 조정에 들어 와 성지를 받도록 했다. 동탁은 한껒 거들먹거리며 입조하였다. 그러나 여포가 갑자기 그를 창으로 찔러 그의 목을 꿰뚫고 말았다. 동탁이 죽자 조정내외 대신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쾌재를 불렀다.
제 32 계 공성계(空城計)
虛者虛之, 疑中生疑. 剛柔之際, 奇而復奇.
허자허지, 의중생의. 강유지제, 기이복기.
비임이란 비임일 뿐이나 의심하기에 의문이 생기는 것, 강함과 유함이 만나면 기묘함은 더 기묘해진다.
-剛柔之際는 주역의 해(解)괘에서 나왔다. 그 괘 “初六(초육)”의 괘로 “剛柔之際, 義無咎也 (강유지제, 의무구야).”즉, 강(剛)과 유(柔)가 서로 어우러지면 허물없이 의로워진다.
이 이야기는 손자병법 허실편(虛實篇)에도 나오고, 삼국지 촉서(蜀書): 諸葛亮傳에도 나온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줘도 마음에 의심 많은 사람은 보지 못하던 것에 의심을 품게 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성계”
BC 666 년, 초(楚)나라의 공자 원(元)은 병거 600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정(鄭)나라를 치러 떠났다. 초나라 대군은 연이어 몇 개의 성을 무너뜨린 후 바로 정나라의 도읍을 압박하게 되었다. 정나라는 국력이 약했을 뿐 아니라 도성 안에는 병력도 얼마 없어 도저히 초나라군을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정나라의 위기가 코앞에 닥치자 중신들의 의견도 분분하여, 누구는 항복하여 화평을 청하자고 주장하고, 누구는 죽기로 일전하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누구는 성을 지키며 원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 중 어느 것도 정나라의 위기를 구해 낼 수 없었다. 상경 숙첨(叔詹)이 말했다: “화평을 청하자는 것과 결전하자는 것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오. 굳게 지키며 원군을 기다리자는 계책이 취할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되오. 정나라와 제(齊)나라는 서로 맹약을 맺은 바 있으니, 금일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돕기 위해 제나라가 출병해서 서로 도울 것이오. 그러나 굳게 지키자고 말만 떠들어서는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오. 공자 원이 정나라를 치는 것은 실제로는 공을 세워 이름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오. 그는 필경 성공하고자 조급해 있을 것이고, 실패를 크게 두려워할 것이오. 내게 초군을 물리칠 한 가지 계책이 있소.”
정나라는 숙첨의 계책을 따라 준비를 진행하였다. 병사들은 모두 매복하도록 하여 적에게는 한 명도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상점들은 평소와 같이 모두 문을 열도록 했고 백성들도 평시와 같이 오고 가도록 해 한 치의 혼란한 모습도 보이지 않도록 했다. 성문을 크게 열고 조교(弔橋)도 내려, 완전히 아무런 방비도 없는 듯 하였다.
초군의 선봉이 정나라 도성 아래 도착해 이러한 정경을 보자 마음속에 의심이 들었다. 성안에 매복하여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닌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공자 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공자 원이 도착해 보니 역시 마찬가지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장들을 데리고 높은 고지에서 바라보니 성안은 확실히 비어있었지만, 흐릿하게 정나라의 갑옷을 입은 기병의 모습이 보였다. 공자 원은 여기에는 분명히 속임수가 있다고 판단해서, 함부로 진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먼저 성안으로 사람을 보내 허실을 파악할 때까지 군을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이때, 제나라는 정나라의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게 되었고, 노(魯), 송(宋) 두 나라와 연합하여 군을 일으켜 정나라를 구하러 오게 되었다. 공자 원은 이 소식을 듣자, 삼국 연합군이 오게 되면 초군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다행히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위안으로 삼은 채, 신속히 철군하기로 하였다. 그는 철군 시 정나라 군이 성을 나와 추격할까 두려워 전군을 밤을 도와 철군하였다.
제 33 계 반간계(反間計)
疑中之疑. 比之自內, 不自失也.
의중지의. 비지자내, 부자실야.
적이 우리를 현혹시키기 위한 포진(布陣)에 반대로 다시 하나의 포진을 설치한다. 만약 적 내부의 내응을 이용해서 승리를 얻게 되면 아군은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比之自內, 不自失也는 주역의 비(比)) 괘에서 나왔다. 이 괘의 위 괘는 감(坎) 괘이니 곧 물(水)이요, 아래 괘는 곤(坤) 괘이니 곧 땅(地)이다. 원래 물과 땅은 서로 의뢰한다. 즉, 반간계를 사용하는 것은 적의 음모가 오히려 아군에게 소용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비(比)는 친하게 되어 서로 의지하다, 또는 무리를 짓다의 뜻이다.
이 계는 손자병법 용간편(用間篇)에서 “소위 역 간첩은, 적이 보낸 간첩을 매수하거나 이용하여, 그가 아군의 소용이 되도록 하는 것(反間者, 因其敵間而用之. 반간자, 인기적간이용지.)에서 나왔다.
손자는 “반간계”의 운용을 매우 중시하여, “그 중의 핵심은 역 간첩을 사용할 줄 아는 것(知之必在反間 지지필재반간)”이라 생각했다. “반간계”는 일종의, “그 사람이 하는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린다”는 계책이다. 적이 간첩을 보내 정탐행위를 하고 파괴활동을 하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전혀 모르는 척 하면서 고의로 거짓 정보를 그에게 흘려 주거나 융숭한 대우로 그를 매수하여 아군에게 유용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군은 아무런 손실도 없는 가운데 승리를 거두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주유(周瑜), 계책으로 조조(曹操)를 이기다
서기 208 년, 조조는 형주(荊州)를 점령한 후 기세를 몰아 일거에 오(吳)를 멸망시키려 하자, 동오의 도독 주유는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맞이 하여 조조와 적벽(赤壁)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위해 주유는 배를 타고 친히 조조의 진영을 관찰하였다. 조조군은 양자강을 따라 24 개의 수문이 있는 수채(水寨)를 짓고 있었다. 형주군의 큰 배들은 바깥에 배치해 마치 성벽과도 같았다. 북방군의 작은 배들은 안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강안(江岸)에는 총길이 300 리에 이르는 지상채를 지어 놓았는데 등불을 휘황하게 밝혀 놓았고 실로 일망무제(一望無際)였다. 주유는 속으로 조조의 수군 도독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이 과연 수군 전문가답다고 생각하였다. 조조군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두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주유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장간(蔣干)이 방문했습니다”라는 전갈이 왔다. 주유는 기뻐서 “이제 방법이 있겠군!”하고 쾌재를 불렀다.
장간은 주유의 동학 친구로써 현재는 조조 수하의 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번에 방문하러 온 것은 조조를 위해 주유를 설득하러 온 것이었다. 장간은 오기 전 자기를 냉대할까봐 걱정하였는데, 생각과는 달리 주유가 뜨겁게 그를 환대하였다. 주유는 통이 크게 오랜 동학 친구를 군영 내 사방으로 안내하였다. 장간은 군기가 엄하고 군량이 풍부한 것을 보고는 속으로 주유에게 탄복하였다. 환영연회에서는 주유는 짐짓 취한 척 하고는 장간에게 옛날 어렸을 때와 같이 그와 한방에서 자자고 요청하였다.
장간은 주유가 코를 골며 자고있는 동안, 살며시 일어나 주유의 기밀 문서를 몰래 훔쳐 보았다. 순간, 장간은 채모와 장윤이 주유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내용이 “저희들은 원래 형주 사람으로 조조에게 투항한 것은 형편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는 이미 조조를 속여 조조군을 수채 중간을 둘러싸도록 하였습니다. 기회가 오기만 하면 조적(曹賊)의 목을 장군에게 바치겠습니다.” 장간은 편지를 보고 난 후 편지를 품 안에 넣고는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밤새 형주로 돌아가 편지를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는 편지를 본 후 七空에서 연기가 나도록 화가 나, 즉각 채모와 장윤을 불러들인 후 우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나는 그대들이 즉시 출병하여 작전에 임하도록 준비하고 있소.” 채모가 급히 말했다: “안되옵니다! 병사들이 아직 수상전에 익숙하지 않아 가볍게 출병할 수가 없습니다.” 조조는 책상을 치며 일어나 큰 소리로 일갈했다: “네놈들이 병사들을 훈련마칠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내 목이 먼저 주유에게 바쳐질 것이다!” 조조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수종들에게 즉각 채, 장 두 장수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조조는 수상전 경험이 없는 모개(毛玠(개)와 우금(于禁) 두 사람을 채, 장을 대신해 도독으로 삼았다.
주유는 자기의 “반간계”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는 기뻐 소리쳤다: “내가 걱정한 것은 바로 그 두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겁날게 없다! 조조가 이번에 동오를 침범해 온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다!”
제 34 계 고육계(苦肉計)
人不自害 受害必眞. 假眞眞假, 間以得行. 童蒙之吉, 順以巽也.
인부자해, 수해필진; 가진진가, 간이득행. 동몽지길, 순이손야.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상하는 걸 원치 않는 법 그러니 만약 진실로 상하게 되면 진실이라 생각하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이치를 알아 실행하라.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길(吉)한 것은 그들이 유순하고 순종의 도리를 알기 때문이다.
-童蒙之吉, 順以巽也는 주역의 몽(蒙)괘에서 나왔다. 즉,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길(吉)한 것은 그들이 유순하고 순종의 도리를 알기 때문이다. 巽(손)은 겸손, 복종의 뜻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 “주유가 예를 행하여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장군께서 이 고육계를 기꺼이 행해 주신다면 강동(江東)의 큰 홍복이 될 것입니다’”에서 나왔다.
-왕좌(王佐), 스스로 팔을 자르다.
“고육계”는 자신을 상해하여 적의 신임을 얻으려는 일종의 계략으로,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치밀하여야 하며 또한 일정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 세상에서 흔히 쓰는 속어로 표현하면, “자식을 아껴서는 늑대에게 올가미를 씌울 수 없다(舍不得孩子, 套不着狼. 사부득해자, 투불착랑.)”이다.
남송(南宋) 시대, 금(金) 나라가 남침해 와, 김올술(金兀術)과 악비(岳飛)가 주선진(朱仙鎭)에서 에서 대치하며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김올술에게 양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육문룡(陸文龍), 나이 16 세로 용맹이 뛰어나 악비군이 상대하기 무척 힘든 장수였다. 육문룡은 본래 송나라 노안주(潞安州) 절도사 육등(陸登)의 아들이었는데, 김올술이 노안주를 함락할 때, 육등 부부는 둘 다 순직하였고, 김올술은 아직 어린 애기였던 육문룡과 유모를 데리고 돌아가 양아들로 삼았다. 육문룡은 자신의 가족 내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어느 날, 악비가 적을 물리칠 계책을 궁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장인 왕좌가 장막 안으로 들어 왔다. 악비는 왕좌의 안색이 납처럼 검고 오른 쪽 팔이 짤려져 나간 것(이미 약을 바르고 묶었지만)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급히 물었다. 원래 왕좌는 금나라 진영에 가서 육문룡을 반금(反金)으로 회유할 생각이었다. 김올술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팔을 자르는 계책을 취한 것이었다. 악비는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이 용솟음쳤다.
왕좌는 밤을 도와 금나 진영으로 도착해 김올술에게 말했다: “소신은 본래 양마(楊麽)의 부하로 벼슬이 차승후(車勝侯)였습니다. 양마가 실패한 후 저는 할 수 없이 악비에게 귀순하였습니다. 어제 밤, 장중에서 회의를 할 때, 소신은, 금병이 용맹하여 막아 내기 어려우니 화친을 맺는 것이 좋다고 진언하였습니다. 악비는 듣자 마자 대노하여 저의 오른 팔을 베도록 명하면서, 저에게 금 진영에 가서 악비의 군이 가까운 시일 내 낭주(狼主 역자 주: 북방 민족의 군주를 일컷는 말)를 생포하고 금 진영을 쑥대 밭으로 만들겠다고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리 오지 않으면 그는 제 남은 팔 하나도 베어 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해서 제가 이렇게 낭주에게 애원하러 온 것입니다.”
김올술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불운한 사람(苦人兒)”이라고 부르면서 진영에 머물도록 했다. 왕좌는 금 진영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해 육문룡의 유모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설득, 그녀와 함께 육문룡에게 그의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육문룡은 자기의 신세를 알게 된 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금나라 적도를 주살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왕좌는 그에게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일을 그르친다면서 때를 기다려 행동할 것을 주문하였다.
금나라 군은 이 때, 엄청난 위력을 가진 대포를 운반해 와, 심야에 악비 군 진영을 포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육문룡이 화살로 편지를 쏴 보내 악비 군이 재난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육문룡과 악비, 그리고 유모는 함께 송 진영으로 투항하였다. 왕좌는 자기 팔을 짜름으로써, 마침내 맹장 육문룡을 송 진영으로 귀순시켰으니 실로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다 할 것이다.
제 35 계 연환계(連環計)
將多兵衆, 不可以敵. 使其自累, 以殺其勢. 在師中吉, 承天寵也.
장다병중, 불가이적. 사기자루, 이살기세. 재사중길, 승천총야.
장수도 여럿이고 병사도 많으면 적으로 삼지 마라. 그리 쌓이게 두어 그 기세를 꺾어라(내분이 나도록...).
在師中吉, 承天寵也는 주역의 사(師)괘에서 나왔다. 무리에 중심이 있으면 길하다라는 말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모든 지휘체계는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連環이란 말 자체가 잘 묶는다는 뜻...
삼국연의(三國演義) 제 8회의 제목 “왕(王) 사도 교묘하게 연환계를 사용하다”와 제 47회 제목 “방통(龐統), 교묘하게 연환계를 제시하다”에서 나왔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기교(機巧)는 연결될 때 귀하다(機巧貴連 기교귀련)”고 말했다. 즉, 동일한 대상에게 여러 계략을 사용하면, 그 계략들이 서로 연결되어, 횡적으로는 서로 보완하고 종적으로는 서로 관통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각 계략의 장점들이 더욱더 잘 작동하게 된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주유(周瑜)는 화공(火攻)으로 조조군을 공격하기 위해 조조에게 세 가지 계략을 연이어 사용했다. 우선 황개(黃盖)에게 곤장 백 대를 가해 “고육계”를 써서 황개로 하여금 조조의 의심을 사지 않고 조조군에게 다가가도록 했다. 이어 황개가 곤장을 맞고 조조에게 귀순하려는 정황을 확인하러 온 장간(蔣干)을 계략으로 속여 방통을 만나게 해, 방통이 조조를 만나도록 함은 바로 “반간계”에 해당한다. 또한 방통이 위장으로 조조에게 귀순하여 전함을 모두 한데 묶도록 건의한 것은 뒤이은 주유의 화공을 도와주기 위함이었으니 “소리장도”의 계인 것이다.
-필재우(畢再遇), 콩을 뿌려 적군의 말들이 먹게 하다
전장에서의 형세는 복잡하고 변화가 많다. 적에 대한 작전을 전개할 때 계략을 쓰는 것은 우수한 지휘관이 당연히 해야 할 직무이다. 쌍방 지휘관이 모두 경험이 많은 고수들인 경우, 한 가지 계책만을 쓸 경우 왕왕 상대방에게 간파되기 쉽다. 한 가지 계책에 또 다른 계책을 연 이어 사용하여 계책들을 연결시키게 되면 그 효과가 훨씬 커질 수 있다.
송(宋)의 장군 필재우는 연환계를 사용하여 멋지게 싸움을 치른 경험이 있다. 그는 금(金)군을 분석해 본 결과, 세력이 강력할 뿐 아니라 특히 기병이 용맹하였기에, 만약 정면으로 교전하게 되면 왕왕 중대한 병력 손실을 가져 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는 작전에 있어서 적의 최대 약점을 확보해서 적을 견제하고 양호한 전기를 잡아서 대응하도록 했다.
금군과 다시 조우할 때에는 적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고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명령하였다. 적이 전진해 오면, 그는 영을 내려 부대가 후퇴하도록 하고, 적이 막 자리를 잡으려 하면, 다시 영을 내려 공격하도록 했고, 금군이 전력으로 반격해 오면, 그는 다시 부대를 인솔해 자취도 없이 도망쳐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즉, 후퇴하다가 진격하고, 싸우다가 그만 두고 물러 가기를 반복하자 금군은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 바로 모택동(毛澤東)의 유격전술의 모태이다. 즉, 적진아퇴, 적퇴아추, 적주아요, 적피아타(敵進我退, 敵退我追, 敵駐我擾, 敵疲我打)의 16 자(字) 전법이다. 적이 진격해 오면 아군은 후퇴하고, 적이 후퇴하면 추격하며, 적이 머무르면 교란하고, 적이 피로하면 공격한다는 뜻임.
금군은 싸우려 해도 끝까지 싸우지도 못하고 벗어 나려고 해도 벗어 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밤이 되자 금군은 병사도 피곤하고 말들도 지쳐 막 진영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필재우는 여러 가지 향료를 넣어 삶은 콩을 많이 준비하고는 몰래 진지 주위에 뿌려 놓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금군을 습격했다. 금군은 할 수 없이 힘을 다해 반격하였다. 필재우의 부대는 금군과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모두 물러갔다. 금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승기를 잡아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요, 금군의 말들은 하루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지경이었는데, 땅 위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입으로 맛을 보니 바로 고픈 배를 채워 줄 양식이었다. 말들은 모두 입을 들이 대고 콩을 먹기 바쁘니 아무리 채찍을 가해도 한 발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아, 금군은 말이 말을 듣지 않으니 칠흑 같은 밤중에 어찌할 줄 몰라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필재우는 이때 전 병력을 소집해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니 금군은 아수라장이 되어 시체가 온 들판을 덮었다.
제 36 계 주위상(走爲上)
全師避敵. 左次無咎, 未失常也.
전사피적. 좌차무구, 미실상야.
모든 군사는 적을 피하는데 좌차(左次) 한 발 후퇴하는건 흠이 아니요 상식을 잃는게 아니다.
남제서(南齊書) 왕경칙전(王敬則傳)에 “단공(檀公) 36책 중에서, 달아나는 것이 상책(走是上計)이라 했으니, 부자(父子)는 다만 급히 달아나야 할 뿐입니다.”에서 나왔다.
-진(晉) 문공(文公), 삼사(三舍)를 물러나다
춘추(春秋) 초기, 초(楚)나라는 날로 강성해져 초나라 장군 자옥(子玉)이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네 개 소국들을 위협해 같이 출병해서 초군의 작전에 함께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진 문공은 초나라에 기울은 조(曹)나라를 막 공격했던 터라 진초(晉楚) 두 나라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옥은 부대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진나라를 향해 떠났고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형세를 분석하였다. 그가 보았을 때 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는 매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초군은 강하고 진군은 약했으며, 또한 초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으므로 그는 잠시 후퇴하여 초군의 예봉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대외적으로는, “당시 내가 쫒겨서 도망다닐 때, 초나라의 선왕이 예를 다하여 나를 대해 주었다. 나는 그때 장래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면 양국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자고 그와 약속하였다. 그리고 만부득이 양국이 교전하게 되면 나는 먼저 3사(당시 1사는 30리 였다)를 물러 나겠다고 약조하였다. 오늘, 자옥이 나를 치러 오니, 나는 약속한 대로 먼저 삼사를 물러 나겠다.”라고 짐짓 말하였다.
진 문공은 군을 이끌고 90리를 후퇴해, 진 나라 국경 지역인 성복(城濮)에 이르렀다. 성복은 황하(黃河)에 임해 있고, 태행산(太行山)을 끼고 있어 적을 막아 내기에 적합했다. 거기에다가, 진 문공은 이미 진(秦)나라와 제(齊)나라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해 두었다.
자옥이 부대를 이끌고 성복까지 추격해 와 보니, 진 문공은 이미 진을 굳게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 문공은 초나라의 좌, 중, 우의 삼군을 분석해 보니 우군이 가장 취약하였는데, 우군의 전위 부대는 진(陳)과 채(蔡)의 병사들로써, 그들은 본래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따라 나선 것이라 투지가 없었다. 자옥은 좌우군으로 먼저 진격하게 하고 중군이 뒤를 따르게 했다. 초나라 우군이 진(晉)나라 군대를 향해 돌진하자 진(晉)군은 갑자기 또 후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진(陳), 채(蔡)의 지휘관들은 진(晉)군이 겁을 먹고 또 도망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바짝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뜻밖에, 진(晉)군 중에서 갑자기 한 부대가 달려 나오는데, 전차를 끄는 말이 모두 호랑이 가죽을 덮어 쓰고 있었다. 진(陳), 채(蔡)의 전마들은 이것들이 진짜 호랑이라고 여긴 나머지, 무서워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머리를 돌려 달아 나 기병들이 말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초나라 우군의 대패였다. 진 문공은 병사들을 진(陳), 채(蔡) 군사의 옷을 입혀서 보내 자옥에게 승전을 보고하도록 했다: “우군이 이미 승리했습니다. 원수께서 어서 진격하십시오.” 자옥이 전차에 올라 바라 보니 진(晉)군 후방에 먼지가 크게 일고 있었다. 그는 크게 웃으면서: “진(晉)군이 일격도 견디지 못하는구만.”라고 말했다. 실지로는 그것은 진(晉)군이 적을 유인하기 위한 계책이었으니, 말의 꼬리에다 나무 가지를 묶고 왔다 갔다 하게 해, 일부러 먼지가 하늘을 가리도록 꾸몄던 것이었다. 자옥은 좌군에게 힘을 합쳐 전진하도록 급명을 내렸다. 진(晉)군은 일부러 대장기를 펼쳐 들고는 뒤로 퇴각하자 초의 좌군도 다시 진(晉)군의 복병 함정에 걸려 들게 되어 대패하고 말았다. 자옥의 중군이 도착하자 진(晉)군은 삼군이 합력하여 자옥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때서야 자옥은 우군, 좌군이 모두 섬멸되었으며 자기도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그 자신은 맹장 성대심(成大心)의 호위로 목숨은 건졌지만 부대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그저 화를 삼킨체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진초(晉楚) 전쟁 중 진 문공이 취한 여러 번의 퇴각은 모두 피동적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퇴각이었으며 새로운 전투 기회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달아나는 것(走)”이 좋은 계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통(李通)의 명철보신(明哲保身)
처세 방면에 쓰일 때는 바로 노자(老子)가 말한 바: “가득 찬 부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그만 둠만 못하고; 칼을 갈아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하기 어려우며;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해도 지키기 어렵고; 부귀하다고 교만하면 그 허물이 자기에게 돌아 온다. 성공하여 이름을 날리면 몸은 오히려 물러 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常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遣其咎. 功成名遂身退, 天之道. 지이영지, 불여기이; 췌이예지, 불가상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견기구. 공성명수신퇴, 천지도. 노자 제 9장이다.).”사람이 처세를 하는데 마음이 활달하고, 적절한 때에 물러날 줄 알며, 버릴 줄 아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선택하는 길이다.
-유수(劉秀)가 제위에 올랐을 때, 재상은 이통(李通)이었다. 이통은 그의 매부이기도 하고 또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형제 같은 사이였다.
이통은 하남(河南) 완현(宛縣) 사람으로, 무예에 정통하고 병서를 숙독하였으므로 당시 왕망(王莽)의 신임을 얻어 왕위장군이라 불리었다.
-왕망은 BC 45~AD 23 년 사이의 사람. 서한 西漢 말년의 외척으로 제위를 찬탈하여 신 新 나라를 세웠다. 이통은 아주 원대한 식견을 가졌던 사람이었기에, 왕망의 제도 개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왕망의 천하가 반드시 멸망하게 될 줄 알고는 병을 칭하고는 물러 났다.
왕망은 그를 아까워하여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이통은 이미 확고히 결심했기에 의연히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이통의 위인이 충성스러웠고,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돈이 별로 없었다. 생계를 위해 그는 고향에서 곡식을 팔았다.
어느 날 유수가 곡식을 사러 갔다가 이통과 서로 알게 되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의기가 투합했다. 유수는 이통이 문무를 겸비하고 관리로서 청렴한 것을 보고 장래 반드시 대장수가 될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이통도 또한 유수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가 보기에 유수는 능수능란하여 환경에 잘 적응하고 도량이 넓으며, 품은 뜻이 웅대하여 장래 반드시 큰 일을 이루어 낼 사람으로 보았다. 이래서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였는데 때로는 밤을 새워 천하 영웅호걸을 논하고 천하 치국의 도리를 나누었다.
훗날, 유수가 왕망 타도의 기치로 일어 섰을 때, 그는 이통에게 고향을 떠나 자기를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처음에는 이통이 따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건 왕망이 그에게 섭섭지 않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유수가 여러 차례 청하자 이통은 마침내 동의하고 나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수는 이통의 도움을 받아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하게 되었다. 이통 역시 유수를 따라, 동서남북의 온갖 전쟁터를 다니면서 무수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종 동요되지 않고 그를 도왔다. 유수가 일어 선 이래 그가 천하를 통일하기 까지 이통의 가족은 모두 64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이통은 실로 개국공신이었다.
유수는 이통의 위인이 충성스럽고 용맹과 지략을 겸비했기에, 그의 여동생을 그에게 출가시켰고, 동한(東漢) 건국 이후에는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당시 유현(劉玄) 수하에 탁무(卓茂)라고 하는 책사가 있었는데 지모가 아주 뛰어 났다. 그는 유수가 하북(河北)에서 병력을 모으고 말을 사 들이고, 군량을 비축하는 것을 보고, 바로 유현에게 유수를 죽이도록 권유했었다. 유현이 말을 받아 들이지 않자, 탁무는 실망해서 유현을 떠났는데 떠나기 전, “유수가 천하를 얻을 날이 멀지 않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수는 탁무라고 하는 자가 유현에게 자기를 죽이도록 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탁무가 원대한 식견을 갖추었다고 생각해 사방으로 그를 찾아 나서 마침내 그를 찾아 내었다. 그는 탁무에 대해 아무런 원한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매우 존경하였다. 탁무 역시 크게 감동을 받아 후일 유수의 책사가 되었다.
유수는 탁무의 말을 매우 신임하였다.
어느 날 탁무가 유수에게 말했다: “왕망은 재상이 된 후, 인심을 매수하고 심복들을 모아 한 발 한 발 조정으로 깊게 들어 갔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주살하고 자기의 수하들을 조정에 포진시켰습니다. 마침내 왕망은 대권을 손에 잡게 되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를 찬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상의 자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후일, 유수가 동한을 세운 후, 탁무가 한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재상의 자리가 매우 중요한 만큼 절대 가볍게 생각하고 재상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자기의 천자 자리가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통이 재상이 된 후, 유수는 그를 매우 신임하기는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이통과 상의하지 않았다. 이통은 처음에는 유수가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었으나 훗 날 다시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천자는 재상에 의해 껍데기만 남는 신세가 되어, 이름만 있고 아무런 실권이 없게 될 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즉, 제 2 의 왕망이 나와 황권을 찬탈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통은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유수의 마음을 알게 된 후부터, 이리 저리 피하며 최대한 조정 일에 덜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요직에 있던 대신들이 황제의 불신임을 받고 목숨을 잃었던가. 나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을 때 용퇴하여 명철보신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통은 부인과 의논해서 자리에서 물러 나 고향으로 돌아 가고자 했다. 이통의 부인은 그 말을 듣자 마자, 오빠 유수가 이통을 괴롭게 한 것으로 여기고는, 크게 화를 내었다. 그녀는 여러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조용히 집을 나섰다.
이통의 부인은 오빠를 만나 따지러 간 것이었다. 그녀는 오빠를 보자 화를 내며 따졌다: “황상 오빠, 오빠는 너무 인정이 없습니다. 이통 일가는 오빠를 위해 생사를 함께하였는데도, 공로는 없고 고생만 시키는군요. 오빠는 왜 그 사람을 관직에서 물러나라고 압력을 넣습니까?”
유수는 영문을 모른 채,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여동생을 무척 귀여워하였기에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 “얘야,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재상에게 물러나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통의 부인은 오빠와 다시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바로 집으로 돌아 갔다.
유수는 이통이 사직하려는 것을 알고는 바로 그를 불러 애기했다: “경은 짐을 따라 생사의 위험을 같이 했던 사이로 고생을 많이 하고 공로가 큰 사람으로써, 짐이 어찌 경을 떠나보낼 수 있단 말이오?”
이통이 대답했다: “폐하, 신도 폐하를 계속해서 보좌하고 싶습니다만, 여러 해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니 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 마음은 있사오나 그 체력이 뛰 따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수는 이에 대해, “오늘 병이 있으면, 병이 낫은 후 계속해서 짐을 도와주기 바라오.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마음을 편히 하고 휴양하기 바라오.”라고 일렀다.
이통은 이 때부터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 가지 않았다. 재상의 자리는 아직 이통의 것이었지만, 권력은 없었다. 이통은 즐겁고 한가롭게 지냈다. 매일 부인과 기분 전환으로 놀고 즐길 수 있었고, 시간이 남으면 친구와 바둑을 두고 담소를 즐겼다. 유수도 매우 기뻐했다. 재상이 가급적 정사에 적게 참여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이통은 재상의 인수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유수는 이통 일생의 공적이 뚸어 났다고 여겨 그의 아들을 후작으로 봉했다. 이통이 세상을 떠나자, 유수는 친히 조문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