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史公自書
(太史公自序)
<아버지 사마담까지의 사마씨 집안 내력>
昔在顓頊, 命南正重以司天, 北正黎以司地. 唐虞之際, 紹重黎之後, 使複典之, 至於夏商, 故重黎氏世序天地. 其在周, 程伯休甫其後也. 當周宣王時, 失其守而為司馬氏. 司馬氏世典周史. 恵襄之閒, 司馬氏去周適晉. 晉中軍隨會奔秦, 而司馬氏入少梁.
석재전욱 명남정중이사천 북정여이사지. 당우지제 소중여지후 사복전지 지어하상 고중여씨세서천지. 기재주 정백휴보기후야. 당주선왕시 실기수이위사마씨. 사마씨세전주사. 혜양지간 사마씨거주적진. 진중군수회분진 이사마씨입소량.
옛날 전욱(顓頊)은 남정(南正) 중(重)에게 천문에 관한 일을, 북정(北正) 여(黎)에게는 지리에 관한 일을 맡겼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에 와서도 중과 여의 후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 일을 맡겨 하․상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중과 여 가문은 대대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일을 맡아왔다. 주대에 이르러 정백(程伯)에 봉해졌던 휴보(休甫) 또한 여의 후손이었다. 그러다가 주 선왕(宣王) 때에 와서 여의 후손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 군사 일을 담당하는 사마(司馬)씨가 되었다. 그 뒤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역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주나라의 혜왕(惠王)에서 양왕(襄王)에 이르는 기간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갔다. 진나라의 중군(中軍) 수회(隨會)가 진(秦)나라로 달아났을 때 사마씨는 소량(少梁)으로 들어가 살았다.
自司馬氏去周適晉, 分散, 或在衛, 或在趙, 或在秦. 其在衛者, 相中山. 在趙者, 以傳剣論顕, 蒯聵其後也. 在秦者名錯, 與張儀爭論, 於是恵王使錯將伐蜀, 遂抜, 因而守之. 錯孫靳, 事武安君白起. 而少梁更名曰夏陽. 靳與武安君阬趙長平軍, 還而與之倶賜死杜郵, 葬於華池.
자사마씨거주적진 분산 혹재위 혹재조 혹재진. 기재위자 상중산. 재조자 이전검론현 괴외기후야. 재진자명조 여장의쟁론 어시혜왕사조장벌촉 수발 인이수지. 조손근 사무안군백기. 이소양경명왈하양. 근여무안군갱조장평군 환이여지구사사두우 장어화지.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간 뒤로 위․조․진나라 등지로 흩어져 살았다. 위나라로 간 일족 중에는 중산(中山)의 재상을 지낸 사마희가 있었고, 조나라로 간 일족 중에는 검술 이론을 전수하여 이름을 날린 사람도 있었는데 괴외(蒯聵)가 그 후손이다. 진나라로 간 사마조(司馬錯)는 진 혜왕 앞에서 장의와 논쟁을 벌였다. 혜왕은 사마조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촉을 공격하게 하여 사마조는 촉의 땅을 빼앗았고 그곳의 군수로 임명되었다. 사마조의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섬겼다. 이 무렵 소량은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바꾸었다. 사마근과 무안군 백기는 장평(長平)의 조나라 군대를 파묻고 돌아왔지만 두 사람 모두 두우(杜郵)에서 죽임을 당해 화지(華池)에 매장되었다.
靳孫昌, 昌為秦主鉄官, 當始皇之時. 蒯聵玄孫卬為武信君將而徇朝歌. 諸侯之相王, 王卬於殷. 漢之伐楚, 卬帰漢, 以其地為河內郡. 昌生無沢, 無沢為漢巿長. 無沢生喜, 喜為五大夫, 卒, 皆葬高門. 喜生談, 談為太史公.
근손창 창위진주철관 당시황지시. 괴외현손앙위무신군장이순조가. 제후지상왕 왕앙어은. 한지벌초 앙귀한 이기지위하내군. 창생무택 무택위한시장. 무택생희 희위오대부 졸 개장고문, 희생담 담위태사공.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司馬昌)은 진나라의 주철관을 지냈는데, 당시가 진시황 때였다. 괴외의 현손 사마앙(司馬卬)은 무신군(武信君)의 부장이 되어 조가(朝歌)를 공략했다. 제후들이 서로 왕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사마앙은 은(殷)나라의 왕이 되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사마앙은 한나라에 귀순했고, 그 땅은 하내군(河內郡)이 되었다. 사마창은 무택(無澤)을 낳았고, 무택은 한나라의 시장을 지냈다. 무택이 희를 낳았고, 희는 오대부를 지냈다. 죽은 뒤 모두 고문(高門)에 안장되었다. 사마희(司馬喜)는 사마담(司馬談)을 낳았는데, 담은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아버지 사마담의 학문과 ‘논육가요지’>
太史公學天官於唐都, 受易於楊何, 習道論於黃子. 太史公仕於建元元封之閒, 湣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 乃論六家之要指曰:
태사공학천관어당도 수역어양하 습도론어황자. 태사공사어건원원봉지간 민학자지하달기의이사패 내론육가지요지왈:
내 아버지 태사공은 당도(唐都)에게서 천문학을 배웠고, 양하(楊何)로부터 『역』을 전수받았으며, 황자(黃子)로부터 도가의 이론을 익혔다. 태사공은 건원에서 원봉에 이르는 기간에 벼슬을 했다. 그는 학자들이 각파 학설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고 그릇된 것만 배우고 있는 것을 걱정하여 6가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易大傳:「天下一致而百慮, 同帰而殊塗.」夫陰陽、儒、墨、名、法、道徳, 此務為治者也, 直所従言之異路, 有省不省耳.
역대전“ ‘천하일치이백여 동귀이수도’ 부음양 유 묵 명 법 도덕 차무위치자야 직소종언지이로 유성불성이. ㅓ
『역(易)』의 「대전(大傳)」에 ‘천하는 하나인데 생각은 각양각색이고, 귀착점은 같은데 가는 길은 다 다르다.’고 했듯이 음양가(陰陽家) ·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명가(名家) · 법가(法家) · 도덕가(道德家)들은 다 같이 세상을 잘 다스리는 일에 힘을 쓰지만 그들이 따르는 논리는 길이 달라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嘗竊観陰陽之術, 大祥而衆忌諱, 使人拘而多所畏;然其序四時之大順, 不可失也.
상규관음양지술 대상이중기위 사인구이다소외 연기서사시지대순 불가실야.
일찍이 음양가의 학술을 가만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금하고 피하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儒者博而寡要, 勞而少功, 是以其事難盡従;然其序君臣父子之禮, 列夫婦長幼之別, 不可易也.
유자박이과요 노이소공 시이지사란진종 연기서순신부자지례 열부부장유지별 불가역야.
유가의 학설은 너무 넓어 요점을 파악하기 힘들다. 애는 쓰지만 얻는 것이 적기 때문에 학설을 다 추종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예를 세우고,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가지런히 한 점은 바꾸어서는 안 된다.
墨者倹而難遵, 是以其事不可遍循;然其彊本節用, 不可廃也.
묵자검이란준 시이기사불가편순 연기강본절용 불가폐야.
묵가의 지나친 근검절약은 따르기가 어렵다. 그것을 일일이 그대로 할 수는 없지만 생산의 근본을 강조하고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주장은 없애서는 안 된다.
法家厳而少恩;然其正君臣上下之分, 不可改矣.
법가엄이소은 연기정군신하상하지분 불가개의.
법가는 너무 근엄하고 각박하지만 군주와 신하의 상하 구분을 명확하게 한 것은 바꿀 수 없다.
名家使人倹而善失真;然其正名実, 不可不察也.
명가가인검이선실진 연기정명실 불가불찰야.
명가는 명분에 얽매여 진실을 잃는 점은 있지만 명분과 실질의 관계를 바로 잡은 것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道家使人精神専一, 動合無形, 贍足萬物. 其為術也, 因陰陽之大順, 采儒墨之善, 撮名法之要, 與時遷移, 應物変化, 立俗施事, 無所不宜, 指約而易操, 事少而功多.
도가사인정신전일 동합무형 섬족만물. 기위술야 인음양지대순 채유뮥지선 촬명법지요 여시천이 응물변화 입속시사 무사불선 지약이역조 사소이공다.
도가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 인간의 모든 활동의 보이지 않으나 만물을 품어 안는 형이상학에 이르게 하고 그 학술은 음양가의 사계절의 큰 운행이란 순서를 흡수하고,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취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모으니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고, 사물의 변화에 따라 변하고, 풍속을 세워 일을 시행하니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그 이치는 간명하면서 파악하기가 쉽고, 힘은 적게 들지만 효과는 크다.
儒者則不然. 以為人主天下之儀表也, 主倡而臣和, 主先而臣隨.
유자즉불연 이위인주천하지의표야 주창이신화 주선이신수.
유가는 그렇지 않다. 군주를 천하의 모범이라 여기기 때문에 군주가 외치면 신하는 답하고, 군주가 앞장서면 신하는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주는 힘들고 신하는 편하다.
如此則主勞而臣逸. 至於大道之要, 去健羨, 絀聡明, 釈此而任術.
여차즉주노이신일. 지어대도지요 거건선 출총명 석차이임술.
도가의 기본 원칙은 그저 강하기만 한 것을 버리고 탐욕을 없애며 총명(눈치가 빠름)을 물리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객관적 형세에 순응하는 것이다.
夫神大用則竭, 形大勞則敝. 形神騒動, 欲與天地長久, 非所聞也.
부신대용즉갈 형대노즉폐. 형신소동 욕여천지장수 비소문야.
인간의 정신이란 너무 많이 사용하면 말라버리고, 육체 또한 지나치게 혹사시키면 지쳐서 병이 나는 법이다. 육체와 정신을 못살게 굴면서 천지와 더불어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夫陰陽四時、八位、十二度、二十四節各有教令, 順之者昌, 逆之者不死則亡, 未必然也, 故曰「使人拘而多畏」. 夫春生夏長, 秋収冬蔵, 此天道之大経也, 弗順則無以為天下綱紀, 故曰「四時之大順, 不可失也」.
부음양사시 팔위 십이도 이십사절각유교령 순지자창 역지자불사즉망 미필연야 고왈 ‘사인구이다외’. 부춘생하장 추수동장 차천도지대경야 불순즉무이위천하강지 고왈 ‘사시지대순 불가실야’
무릇 음양가는 4계절, 8방, 12차, 24절기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에 따라 잘 행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죽거나 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다.’고 했던 것이다.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이 자연계의 큰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천하 모든 일의 앞뒤가 없어질 것이다.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점이다.’라 했던 것이다.
夫儒者以六蓺為法. 六蓺経傳以千萬數, 累世不能通其學, 當年不能究其禮, 故曰「博而寡要, 勞而少功」. 若夫列君臣父子之禮, 序夫婦長幼之別, 雖百家弗能易也.
부유자이육예위법. 육예경전이천만수 누세불능통기학 당년불능구기례 고왈 ‘박이과요 노이소공’. 약부열군신부자지례 서부부장유지별 수백가불능역야.
유가는 육예를 법도로 삼는다. 육예와 관련된 경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몇 대를 배워도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없으며, 늙을 때까지 배워도 그 번잡한 예절은 제대로 배울 수 없다. 그래서 ‘너무 넓어 요점이 파악하기 힘들다. 노고는 많고 얻는 것은 적다.’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 아비와 자식들 사이의 예절, 남편과 아내, 늙은이와 젊은이 사이의 규범을 정한 것은 어떤 학파도 바꿀 수 없다.
墨者亦尚尭舜道, 言其徳行曰:「堂高三尺, 土階三等, 茅茨不翦, 采椽不刮. 食土簋, 啜土刑, 糲粱之食, 藜霍之羹. 夏日葛衣, 冬日鹿裘.」
묵자역상요순도 언기덕행왈 ‘당고삼척 토계삼등 모자부전 채연불괄. 식토궤 철토형 여량지식 여곽지갱. 하일갈의 동일녹구’
묵가도 요 · 순의 도덕을 숭상하여 그들의 덕행에 대해 ‘집의 높이는 겨우 세 자,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세 개뿐, 풀로 이은 지붕은 제대로 정돈도 하지 않았고, 통나무 서까래는 다듬지도 않았다. 흙으로 만든 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마셨는데, 현미나 기장쌀로 만든 밥에 명아주잎과 콩잎으로 끓인 국을 먹었다. 여름에는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지냈다.’라고 말한다.
其送死, 桐棺三寸, 挙音不盡其哀. 教喪禮, 必以此為萬民之率. 使天下法若此, 則尊卑無別也. 夫世異時移, 事業不必同, 故曰「倹而難遵」. 要曰彊本節用, 則人給家足之道也. 此墨子之所長, 雖百長弗能廃也.
기송사 동관삼촌 거음부진기애. 교상례 필이차위만민지솔. 사천하법약차 즉곤비무별야. 부세이시이 사업불필동 고왈 ‘검이란준’. 요왈강본절용 즉인급가족지도야. 차묵자지소장 수백장불능폐야.
죽은 사람의 장례에서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세 치를 넘지 않으며, 곡소리도 그 슬픔을 다 드러내지 않게 했다. 천하 사람들에게 이를 표준으로 삼아 장례를 치르라고 한다면 존비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면 모든 일이 꼭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지나친 근검절약은 따르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생산의 근본을 강조하고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정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묵가의 장점으로 어떤 학파라도 없애서는 안 된다.
法家不別親疏, 不殊貴賎, 一斷於法, 則親親尊尊之恩絶矣. 可以行一時之計, 而不可長用也, 故曰「厳而少恩」. 若尊主卑臣, 明分職不得相踰越, 雖百家弗能改也.
법가불별친소 불수귀천 일단어법 즉친친존존지은절의. 가이행일시지계 이불가장용야 고왈 ‘엄이소은’. 역존주비신 명분직부득상유월 수백가불능개야.
법가는 가까움과 먼 관계를 구별하지 않고, 귀한 신분과 천한 신분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로지 법에 따라 단죄하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대하고 존귀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는 감정이 단절되고 만다. 한 때의 계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너무 근엄하고 각박하다.’고 한 것이다. 다만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여 서로가 그 권한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 점은 다른 학파라도 고칠 수 없다.
名家苛察繳繞, 使人不得反其意, 専決於名而失人情, 故曰「使人倹而善失真」. 若夫控名責実, 參伍不失, 此不可不察也.
명가가찰작요 사인부득반기의 전결어명이실인정 고왈 ‘사인검이선실진’. 약부공명책실 삼오불실 차불가불찰야.
명가는 너무 꼼꼼하게 따지다가 다 뒤엉켜버림으로써 각자의 진실된 본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오로지 명분에만 집착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인정을 잃는다. 그래서 ‘명분에 얽매여 진실을 잃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명가가 명분과 실질의 관계를 서로 비교한 것은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道家無為, 又曰無不為, 其実易行, 其辭難知. 其術以虛無為本, 以因循為用. 無成埶, 無常形, 故能究萬物之情. 不為物先, 不為物後, 故能為萬物主.
도가무위 우일무불위 기실역행 기사란지. 기술이러무위본 이인순위용. 무성숙 무상형 고능구만물지정. 불위물선 불위물후 고능위만물주.
도가는 ‘억지로 일삼지 않는’ ‘무위’를 말하면서 ‘하지 않는 것도 없는’ ‘무불위’도 말한다. 실제로 행동하기는 쉬운데 그 말이 이해하기 어렵다. 도가의 학술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행동상 ‘순응’이란 객관적 형세를 강구한다. 그 자체로 이미 만들어진 세태도 고정불변의 형상도 없기 때문에 만물에 순응하여 만물의 정상을 추구할 수 있다. 만물에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으면서 순응하기 때문에 만물을 주재할 수 있는 것이다.
有法無法, 因時為業;有度無度, 因物與合. 故曰「聖人不朽, 時変是守. 虛者道之常也, 因者君之綱」也.
유법무법 인시위업 유도무도 인물여합. 고왈 ; ‘성인불교 시변시수. 허자도지상야 인자군지강’ 야.
법이 있지만 법에 맡기지 않는 것을 법으로 여기고 때에 맞추어 일을 이루며, 법도가 있지만 고집하지 않고 만물과 서로 어울린다. 그렇기에 ‘성인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변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허무는 도의 본질이며, 순응은 군주가 파악해야 할 강령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群臣並至, 使各自明也. 其実中其聲者謂之端, 実不中其聲者謂之窾. 窾言不聴, 姦乃不生, 賢不肖自分, 白黒乃形. 在所欲用耳, 何事不成. 乃合大道, 混混冥冥. 光燿天下, 複反無名.
군신병지 사각자명야. 기실중기성자위지단 실불중기성자위대관. 관언불청 간내불생 현불초자분 백륵내형. 재소욕용이 하사불성. 내합대도 혼혼명명. 광요천하 복반무명.
군주는 여러 신하들을 모두 소집하여 각자에게 맞는 일을 주어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실제 행동과 말이 일치하는 것을 ‘바르다’는 뜻에서 ‘단’이라 하고, 실질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비어 있다’는 뜻에서 ‘관’이라 한다. 빈말을 듣지 않으면 간사한 자가 생기지 않고, 어진 이와 불초한 자가 절로 가려지며, 흑백이 절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다음 군주가 현명한 자를 기용하면 무슨 일인들 못 이루겠는가? 이렇게 하면 큰 도에 부합하게 되고 원기가 두루 충만해져 온 천하를 환하게 비추게 되지만 결국은 다시 청정무위의 경지로 되돌아간다.
凡人所生者神也, 所託者形也. 神大用則竭, 形大勞則敝, 形神離則死. 死者不可複生, 離者不可複反, 故聖人重之. 由是観之,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不先定其神[形], 而曰「我有以治天下」, 何由哉?
범인소생자신야 소탁자형야. 신대용즉갈 형대노즉폐 형신이즉사. 사자불가복생 이자불가복반 고성인중지. 유시관지 신자생지본야 형자생지구야. 불선정기신 이왈 ‘아유이치천하’ 하유재?
인간의 삶은 정신에 의탁하며, 정신은 육신에 의탁한다.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고갈되고, 육신을 너무 혹사하면 병이 난다. 정신과 육체가 일단 분리되면 사람은 죽는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사람 역시 다시 합칠 수 없다. 때문에 성인이 정신과 육체를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신은 생명의 근본이요, 육체는 생명의 기초다. 정신과 육체를 편안하게 만들어 놓지도 않고 ‘내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니 대체 무엇을 믿고 큰소리를 치는 것인가?
<사마천의 일생>
太史公既掌天官, 不治民. 有子曰遷.
태사공기장천관 불치민. 유자왈천.
태사공 담은 천문을 관장했고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다. 천(遷)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遷生竜門, 耕牧河山之陽. 年十歳則誦古文. 二十而南遊江、淮, 上會稽, 探禹穴, 闚九疑, 浮於沅、湘;北渉汶、泗, 講業斉、魯之都, 観孔子之遺風, 郷射鄒、嶧;厄困鄱、薛、彭城, 過梁、楚以帰.
천생용문 경목하산지양. 년십세즉송고문. 이십이남유강 회 상회계 탐우혈 규구의 부어원 상 북섭문 사 강업제 노지도 관공자지유풍 향사추 역; 액곤파 설 팽성 과양 초이귀.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났다. 황하의 북쪽, 용문산의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자랐다. 열 살 때 고문을 배웠다. 스물 살에는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로 여행하며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혈(禹穴)을 탐방한 다음 구의산(九疑山)을 살피고, 원강(沅江)과 상강(湘江) 두 강은 배를 타고 돌았다. 북으로 올라가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나라와 노(魯)나라의 수도에서 유가의 학술을 배우며 공자(孔子)의 유풍을 살폈다. 추(鄒)와 역(嶧) 지방에서는 향사를 참관했다. 파(鄱)․설(薛)․팽성(彭城)에서는 곤욕을 치렀고, 양(梁)․초(楚)를 거쳐 돌아왔다.
於是遷仕為郎中, 奉使西征巴、蜀以南, 南略邛、笮、昆明, 還報命.
어시천사위랑중 봉사서정파 촉이남 남략공 작 곤명 환보명.
얼마 뒤 천은 낭중(郎中)이 되어 조정의 명에 따라 서쪽으로는 파촉 이남 방면을, 남쪽으로는 공(邛) · 작(笮) · 곤명(昆明) 을 공략하고 돌아와 보고했다.
是歳天子始建漢家之封, 而太史公留滯周南, 不得與従事, 故発憤且卒. 而子遷適使反, 見父於河洛之閒. 太史公執遷手而泣曰:
시세천자시건한가지봉 이태사공유체주남 부득여종사 고발분차졸. 이자천적사반 견부어하락지간. 태사공집천수이읍왈:
이 해(기원전 110년, 사마천 36세)에 천자가 처음으로 한 황실의 봉선 의식을 거행했는데 주남(周南)에 머무르고 있던 태사공은 이 행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화병이 나서 그만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아들 천은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마침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태사공은 아들 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당부했다.
「餘先周室之太史也. 自上世嘗顕功名於虞夏, 典天官事. 後世中衰, 絶於予乎? 汝複為太史, 則続吾祖矣. 今天子接千歳之統, 封泰山, 而餘不得従行, 是命也夫, 命也夫! 餘死, 汝必為太史;為太史, 無忘吾所欲論著矣.
‘여선주실지태사야. 자상세상현공명어우하 전천관사. 후세중쇠 절어여호? 여복위태사 즉속오조의. 금천자접천세지통 봉태산 이여부득종행 시명야부 명야부! 여사 여필위태사; 위태사 무망오소역논저의.
‘우리 선조는 주나라 왕실의 태사(太史)를 지냈다. 그 위 세대는 일찍이 하나라 때 천문에 관한 일을 맡아 공업을 크게 떨쳤다. 그 뒤로 쇠퇴했는데, 내 세대에 와서 끊어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다시 태사가 되어 우리 선조의 유업을 이어가라. 지금 천자께서 천 년 동안 끊어졌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내가 수행하지 못하다니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틀림없이 태사가 되어야 한다. 태사가 되거든 내가 하고자 했던 논저를 잊지 않도록 해라.
且夫孝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揚名於後世, 以顕父母, 此孝之大者. 夫天下稱誦周公, 言其能論歌文武之徳, 宣周邵之風, 達太王王季之思慮, 爰及公劉, 以尊后稷也.
차부효시어사친 중어사군 종어입신. 양명어후세 이현숩모 차효지대자. 부천자칭송주공 언기능론가문무지덕 선주소지풍 탈태왕왕계지사려 원급공유 이존후직야.
효도란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서 시작하여 군주를 섬기는 것을 거쳐 입신양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효도니라. 세상이 주공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노래하고, 자신과 소공의 기풍을 선양하고, 태왕과 왕계의 사상을 드러냄으로써 유공에 미치고 나아가서는 후직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幽厲之後, 王道欠, 禮樂衰, 孔子脩舊起廃, 論詩書, 作春秋, 則學者至今則之. 自獲麟以來四百有餘歳, 而諸侯相兼, 史記放絶. 今漢興, 海內一統, 明主賢君忠臣死義之士, 餘為太史而弗論載, 廃天下之史文, 餘甚懼焉, 汝其念哉!」
유여지후 왕도흠 예악쇠 공자수구지폐 논시서 작춘추 즉학자지금즉지. 자회린이래사백유여세 이제후상겸 사기방절, 금한흥 해내일통 명주현군충신사의지사 여위태사이불론재 폐천하지사문 여심구언 여기념재!’
유왕과 여왕 이후 왕도가 사라지고 예악이 쇠퇴해지자 공자께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적을 정리하고 폐기되었던 예악을 다시 일으켜 『시』와 『서』를 논술하고 『춘추』를 엮으니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준칙으로 삼고 있다. 획린(기원전 481년) 이래 지금까지 400년 넘게 제후들은 서로를 집어 삼키려는 싸움에만 몰두해온 탓에 역사 기록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니 천하는 통일되었다. 그 동안 역사적으로 많은 명군 · 현군 · 충신 · 지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태사령이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해 천하의 역사를 폐기하기에 이르렀구나. 나는 이것이 너무나 두렵다. 그러니 너는 이런 내 심정을 잘 헤아리도록 해라!’
遷俯首流涕曰:「小子不敏, 請悉論先人所次舊聞, 弗敢闕.」
천부수류체왈 ‘소자불민청실논선인소차구문 불감궐’
천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면서 ‘소자가 비록 못났지만 아버지께서 정리하고 보존해온 중요한 기록들을 빠짐없이 다 편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卒三歳而遷為太史令, 紬史記石室金匱之書. 五年而當太初元年, 十一月甲子朔旦冬至, 天暦始改, 建於明堂, 諸神受紀.
졸삼세이천위태사령 유사기석실금궤지서. 오년이당태초원년 십일월갑자삭단동지 천력시개 건어명당 제신수기.
태사공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서 사관의 기록과 석실․금궤에 소장된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뒤인 태초 원년(기원전 106년)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지, 새로운 달력인 태초력(太初曆)을 반포하면서 명당에서 의례를 거행하고 제후들에게 새로운 달력을 받들게 했다.
< 『사기』의 저술 동기>
太史公曰:「先人有言:『自周公卒五百歳而有孔子. 孔子卒後至於今五百歳, 有能紹明世, 正易傳, 継春秋, 本詩書禮樂之際?』意在斯乎! 意在斯乎! 小子何敢譲焉.」
태사공왈 ‘선인유언 “자주공졸오백세이유공자. 공자졸후지어금오백세 유능소명세 정역전 계춘춘 본시서예악지제?” 의재사호! 의지사호! 소자하감양언’
태사공 사마천은 말한다. 선친께서는 ‘주공이 세상을 뜨고 500년 만에 공자가 태어나셨다. 그리고 공자가 세상을 뜨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시 500년이 지났다. 이제 누가 성인의 사업을 이어받아 『역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춘추』를 잇고, 『시』· 『서』· 『예』· 『악』의 본질을 밝힐 수 있을까?’라고 하셨다. 바로 지금이란 뜻이구나! 바로 지금이란 뜻이구나! 그러니 내 어찌 감히 이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上大夫壷遂曰:「昔孔子何為而作春秋哉?」
상대부호수왈 ‘석공자하위이작춘추재?
상대부 호수(壺遂)가 ‘이전에 공자께서는 왜 『춘추』를 지었습니까?’라고 물었다.
太史公曰:「餘聞董生曰:『周道衰廃, 孔子為魯司冦, 諸侯害之, 大夫壅之. 孔子知言之不用, 道之不行也, 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 以為天下儀表, 貶天子, 退諸侯, 討大夫, 以達王事而已矣.』子曰:『我欲載之空言, 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
태사공왈 ‘여문동생왈 “주도쇠폐 공자위노사구 제후해지 대부옹지. 공자지언지불용 도지불행야 시비이백사십이년지중 이위천하의표 핍천자 퇴제후 토대부 이달왕사이이의” 자왈 “아욕재지공언 불여견지어행사지심절저명야”
태사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듣기에 동중서(董仲舒) 선생께서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자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가 되었다. 그러자 제후들은 공자를 시기하고 대부들은 공자를 방해하고 나섰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말과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242년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역사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서 천하의 본보기로 삼았다. 천자라도 어질지 못하면 비판하고, 무도한 제후는 깎아내리고, 간악한 대부는 성토함으로써 왕도의 이상을 나타내려 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도 “내가 본래 추상적인 이론으로 기록하려 했으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훨씬 분명하고 절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夫春秋, 上明三王之道, 下辨人事之紀, 別嫌疑, 明是非, 定猶予, 善善悪悪, 賢賢賎不肖, 存亡國, 継絶世, 補敝起廃, 王道之大者也.
부춘추 상명삼왕지도 하변인사지기 별혐의 명시비 정유여 선선악악 현현천불초 존망국 계절세 보폐기폐 왕도지대자야.
『춘추』는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가리고, 의심스러운 바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결정하게 하고, 선은 장려하고 악은 미워하게 하며, 유능한 사람은 존중하고 못난 자는 물리치게 하고, 망한 나라의 이름을 보존하게 하며, 끊어진 세대의 후손을 찾아 잇게 하며, 모자란 곳은 메워주고 못쓰게 된 것은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바 이것이야말로 큰 왕도입니다.
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 故長於変;禮経紀人倫, 故長於行;書記先王之事, 故長於政;詩記山川谿谷禽獣草木牝牡雌雄, 故長於風;樂樂所以立, 故長於和;春秋辯是非, 故長於治人. 是故禮以節人, 樂以発和, 書以道事, 詩以達意, 易以道化, 春秋以道義. 撥亂世反之正, 莫近於春秋.
역저천지음양사시오행 고장어변; 예경지인륜 고장어행; 서기선생지사 고장어정; 시기산천계곡금수초목빈모자웅 고장어풍; 낙낙소이립 고장어화; 춘추변시비 고장어치인. 시고예이절인 악이발화 서이도사 시이달의 역이도화 춘추이도의. 발란세반지정 막근어춘추.
『역』은 천지․음양․사시․오행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의 이치를 논하는데 장점이 있습니다. 『예』는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행동에 좋습니다. 『서』는 선왕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므로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도움을 줍니다. 『시』는 산과 내, 골짜기, 날짐승과 들짐승, 풀과 나무, 암컷과 수컷에 관한 기록이라 풍토와 인정에 대한 서술이 뛰어납니다. 『악』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춘추』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따라서 『예』는 사람의 행동을 절제시키고, 『악』은 평화로운 마음을 이끌어내며, 『서』는 정치를 말하고, 『시』는 감정을 표현하며, 『역』은 변화를 말하고, 『춘추』는 정의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지러운 세상을 수습하고 바로 돌려놓는 데는 『춘추』만한 것이 없습니다.
春秋文成數萬, 其指數千. 萬物之散聚皆在春秋. 春秋之中, 弑君三十六, 亡國五十二, 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 察其所以, 皆失其本已. 故易曰『失之豪釐, 差以千里』. 故曰『臣弑君, 子弑父, 非一旦一夕之故也, 其漸久矣』.
춘추문성수만 기지수천. 만물지산취개재춘추. 춘추지중 시군삼십육 망국오십이 제후분주부득보기사직자불가승수. 찰기소이 개싷기본기. 고역왈 “실지호리 차이천리”. 고왈 “신시군 자시부 차일단일석지고야 기점구의”
『춘추』는 글자로 수 만 자나 되지만 거기에 나타나 있는 대의도 수 천가지나 됩니다. 만사의 성공과 실패, 흥망과 성쇠가 모두 『춘추』에 응집되어 있습니다. 『춘추』에는 시해당한 군주가 36명에 멸망한 나라가 52개나 되며,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돈 제후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스림의 근본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에서는 “터럭만큼의 실수가 천 리나 되는 엄청난 잘못을 초래한다.”고 했고, 또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는 일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결과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 前有讒而弗見, 後有賊而不知. 為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 守経事而不知其宜, 遭変事而不知其権. 為人君父而不通於春秋之義者, 必蒙首悪之名. 為人臣子而不通於春秋之義者, 必陥簒弑之誅, 死罪之名. 其実皆以為善, 為之不知其義, 被之空言而不敢辭.
고유국자불가이부지춘추 전유참이불견 후유적이부지. 위인신자불가이부지춘추 수경사이부지기의 조변사이부지기권. 위인군부이불통어춘추지의자 필몽수오지명. 위인신자이불통어춘추지의자 필함찬시지주 사죄지명. 기실개이위선 위지부지기의 피지공언이불감사.
이렇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춘추』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춘추』를 모르면 바로 코앞에 나쁜 말만 일삼는 소인배가 있어도 못보고, 등 뒤에 음흉한 간신이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신하된 자도 『춘추』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춘추』를 모르면 평범한 사무인데도 전례에 집착하여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긴급한 일을 당해도 상황에 맞추어 대처할 줄 모릅니다. 군주나 아비가 되어 『춘추』의 큰 뜻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면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신하나 자식된 자로서 『춘추』의 큰 뜻을 통찰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찬탈이나 군주 시해와 같은 죽을 죄에 빠집니다.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했겠지만 큰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여론의 질책을 받아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夫不通禮義之旨, 至於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夫君不君則犯, 臣不臣則誅, 父不父則無道, 子不子則不孝. 此四行者, 天下之大過也. 以天下之大過予之, 則受而弗敢辭. 故春秋者, 禮義之大宗也. 夫禮禁未然之前, 法施已然之後;法之所為用者易見, 而禮之所為禁者難知.」
부불통예의지지 지어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불자. 부군불군즉범 신불신즉주 부불부득무도 자불자즉불효. 차사행자 천하지대과야 이천하지대과여지 즉수이불감사. 고춘추자 예의지대종야. 부예금말연지전 법시이연지후; 법지소위용자역견 이례지호위금자란지’
예의의 요지를 잘 모르면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됩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에게 농락당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죽음을 면키 어렵습니다.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됩니다. 이 네 가지는 천하의 큰 잘못입니다. ‘천하의 큰 잘못’이라는 죄명을 갖다 붙여도 감히 변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춘추』는 예의의 커다란 근본입니다. 예의란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막는 것이고, 법이란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의 적용 효과는 쉽게 보이는 반면 예의 예방 효력은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壷遂曰:「孔子之時, 上無明君, 下不得任用, 故作春秋, 垂空文以斷禮義, 當一王之法. 今夫子上遇明天子, 下得守職, 萬事既具, 鹹各序其宜, 夫子所論, 欲以何明?」
호수왈 ‘공자지시 상무명군 하부득임용 고작춘추 수공문이단예의 당일왕지법. 금부자상우명천자 하득수직 만사기구 함각서기의 부자소론 욕이하명’
호수가 또 물었다. 공자 때는 위로 영명한 군주가 없고 아래로는 유능한 인재가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춘추』를 지어 예의의 득실을 논단하고 제왕의 법전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대는 위로 영명한 천자를 만났고 아래로 벼슬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모든 일이 알맞게 순서를 찾아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책을 써서 그대가 밝히려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太史公曰:「唯唯, 否否, 不然. 餘聞之先人曰:『伏羲至純厚, 作易八卦. 尭舜之盛, 尚書載之, 禮樂作焉. 湯武之隆, 詩人歌之. 春秋采善貶悪, 推三代之徳, 褒周室, 非獨刺譏而已也.』
태사공왈; ‘유유 부부 불연. 여문지선인왈 “복희지순후 작역팔괘. 요순지성 상서재지 예악작언. 탕무지륭 시인가지. 춘푸채선폄악 추삼대지덕 포주실 비독자기이이야”
태사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에, 에.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런 뜻이 아니지요. 저는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가장 온화하고 후덕했던 복희는 『역』의 팔괘를 만들었다. 요․순의 넘치는 덕은 『상서』에 기재되어 있고 예악이 바로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탕왕과 무왕 시대의 융성함에 대해서는 시인들의 노래가 있다.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치며, 삼대의 성덕을 칭송하고, 주나라 왕실을 칭찬하고 있는바 풍자나 비방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漢興以來, 至明天子, 獲符瑞, 封禪, 改正朔, 易服色, 受命於穆清, 沢流罔極, 海外殊俗, 重訳款塞, 請來獻見者, 不可勝道. 臣下百官力誦聖徳, 猶不能宣盡其意. 且士賢能而不用, 有國者之恥;主上明聖而徳不布聞, 有司之過也. 且餘嘗掌其官, 廃明聖盛徳不載, 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 墮先人所言, 罪莫大焉. 餘所謂述故事, 整斉其世傳, 非所謂作也, 而君比之於春秋, 謬矣.」
한흥이래 지명천자 획부서 봉선 개정삭 역복색 수명어목청 택류망극 해외수속 중역관색 청래헌견자 불가승도. 신하백관역송성덕 유불능선진기의. 차사현능이불용 유국자지치; 주상명성이덕불포문 유사지과야. 차여상장기관 폐명성성덕불재 멸공신세가현대부지업불술 타선인소언 죄막대언. 여소위술고사 정제기세전 비소위작야 이군비지어춘추 류의’
한나라가 개국한 이래 현명하신 지금의 천자에 이르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봉선 의식을 거행하고, 달력을 개정하고, 의복의 색깔을 바꾸는 등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황제의 은택이 한 없이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풍속이 우리와 다른 해외의 나라들도 몇 번 통역을 거쳐 변경에 와서는 공물을 바치고 황제께 인사드리겠다며 줄을 섰습니다. 조정의 백관들이 황제의 성스러운 덕을 열심히 칭송하고는 있지만 그 뜻을 다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유능한 인재가 기용되지 못하는 것을 군주는 치욕으로 여깁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확실히 영명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성덕이 온 나라에 널리 퍼져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는 담당 관리의 잘못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그 자리를 관장하면서 영명하고 성스러운 황제의 덕을 기록하지 않거나 공신, 세가, 어진 대부들의 공업을 서술하지 않고 없앰으로써 아버지의 유언을 실추시킨다면 그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옛 사건들을 서술하는 것은 지난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려는 것이지 창작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선생께서 『춘추』와 그렇게 비교하시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於是論次其文. 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 幽於縲紲. 乃喟然而歎曰:「是餘之罪也夫! 是餘之罪也夫! 身毀不用矣.」退而深惟曰:
어시논차기문. 칠십이태사공조이릉지화 우어누세. 내위연이환왈: ‘시여지죄야부! 시여지죄야부! 신훼불용의’ 퇴이심유왈: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나는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깊이 깊이 탄식했다. 그러나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夫詩書隠約者, 欲遂其志之思也. 昔西伯拘羑里, 演周易;孔子厄陳蔡, 作春秋;屈原放逐, 著離騒;左丘失明, 厥有國語;孫子臏腳, 而論兵法;不韋遷蜀, 世傳呂覧;韓非囚秦, 説難、孤憤;詩三百篇, 大抵賢聖発憤之所為作也. 此人皆意有所欝結, 不得通其道也, 故述往事, 思來者.」
‘부시서은약자 욕수기지지사야. 석서백구강리 연주역; 공자액진채 작춘추; 굴원방축 저이소; 좌구실명 궐유국어; 손자빈각 이론병법; 불위천촉 세전여람; 한비수진 설난 고분; 시삼백편 대저현성발분지소위작야. 차인개의유소울결 부득통기도야 고술왕사 사래자’
『시』나 『서』의 뜻이 함축적인 것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출하고 싶어서였다. 문왕은 갇힌 상태에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다. 굴원(屈原)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지었다. 손빈(孫臏)은 발이 잘리는 빈각이란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韓非子)는 진나라에 갇혀서 「세난」과 「고분」편을 저술했다.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於是卒述陶唐以來, 至於麟止, 自黃帝始.
어시졸술도당이래 지어린지 자황제시.
그리하여 드디어 요 임금에서 ‘획린’에 이르는 긴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황제부터다.)
<‘본기’ 12편의 요지>
維昔黃帝, 法天則地, 四聖遵序, 各成法度;唐尭遜位, 虞舜不台;厥美帝功, 萬世載之. 作五帝本紀第一.
유석황제 법천즉지 사성준서 각성법도; 당뇨손위 우순부대; 궐미제공 만세재지. 작오제본기제일.
그 옛날 황제는 하늘과 땅을 법칙으로 삼았고, 전욱 ․ 제곡 ․ 요․ 순에 이르는 네 성인은 황제의 질서를 준수함으로써 각각 법도를 세웠다. 요 임금이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순은 자신의 공업을 자랑하지 않고 근신했다. 이들 제왕의 공덕은 만고에 길이길이 전할 것이다. 이에 본기 첫 편인 「오제본기」를 지었다.
維禹之功, 九州攸同, 光唐虞際, 徳流苗裔;夏桀淫驕, 乃放鳴條. 作夏本紀第二.
유우지공 구주유동 광당우제 덕류묘예; 하걸음교 내방명조. 작하본기제이.
우의 공적으로 구주가 두루 혜택을 입었으며, 요 ․ 순 시대를 빛내고 그 공덕이 후손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라의 걸왕은 음란하고 교만하여 명조로 쫓겨났다. 이에 다음 「하본기」를 지었다.
維契作商, 爰及成湯;太甲居桐, 徳盛阿衡;武丁得説, 乃稱高宗;帝辛湛湎, 諸侯不享. 作殷本紀第三.
유설작상 원급성탕; 태갑거동 덕성아형; 무정득설 내칭고종; 제신담면 제후불향. 작은본기제삼.
설이 상을 일으켜 성탕에 와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태갑이 동지방에 거하며 개과천선하고, 아형 이윤의 도움으로 공덕이 빛나게 되었다. 무정은 부열을 얻음으로써 고종으로 일컬어졌다. 제신은 술과 여자에 빠져 제후들로부터 공납을 받지 못함으로써 나라가 끊겼다. 이에 세 번 째로 「은본기」를 마련했다.
維棄作稷, 徳盛西伯;武王牧野, 実撫天下;幽厲昏亂, 既喪酆鎬;陵遅至赧;洛邑不祀. 作周本紀第四.
유기작직 덕성서백; 무왕목야 실무천하; 유여혼란 기상풍호; 능지지난; 락읍불사. 작주본기제사.
기는 농업을 창시하여 후직이 되었고, 서백 문왕 때 공덕이 융성하였다. 무왕이 목야에서 승리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유왕과 여왕이 어리석고 난폭하여, 풍과 호를 잃었다. 이후 점점 쇠락하더니(陵遅) 난왕에 이르러 낙읍의 제사가 끊어졌다. 이에 4번째로 「주본기」를 지었다.
維秦之先, 伯翳佐禹;穆公思義, 悼豪之旅;以人為殉, 詩歌黃鳥;昭襄業帝. 作秦本紀第五.
유진지선 백예좌우; 목공사의 도호지여; 이인위순 시가황조; 소양업제. 작진본기제오.
진나라의 선조 백예는 우 임금을 보좌했다. 목공은 뉘우칠 줄 알아 효 계곡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애도했다. 목공이 죽자 산 사람을 함께 묻었고, 『시』의 ‘황조’가 이에 대한 노래다. 진나라 소양왕은 통일과 황제를 위한 터를 닦았다. 이에 다섯 번째로 「진본기」를 지었다.
始皇既立, 並兼六國, 銷鋒鋳鐻, 維偃幹革, 尊號稱帝, 矜武任力;二世受運, 子嬰降虜. 作始皇本紀第六.
시황기립 병겸육국 소봉주거 유언간혁 존호징제 긍무임력; 이세수운 자영항노. 작시황본기제육.
시황이 즉위하여 6국을 합병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표시로 무기를 녹여 종을 만들었으며, 스스로를 높여 황제라 불렀지만 무력에만 의존하여 폭력을 마구 휘둘렀다. 2세가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자영은 항복하여 망국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6 번 째로 「진시황본기」를 남겼다.
秦失其道, 豪桀並擾;項梁業之, 子羽接之;殺慶救趙, 諸侯立之;誅嬰背懐, 天下非之. 作項羽本紀第七.
진실기도 호걸병요; 항량업지 자우접지; 살경구조 제후입지; 주영배회 천하비지. 작항우본기제칠.
진이 도리를 잃자 영웅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항량이 맨 먼저 다음 항우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 송의(宋義)를 죽이고 조를 구하니 제후들이 그를 추대했다.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회왕을 저버리자 천하가 그를 비난했다. 이에 일곱 번 째「항우본기」를 지었다.
*宋義: 懐왕(초나라 의제)의 사자로 항량의 패배를 예언한 사람.
子羽暴虐, 漢行功徳;憤発蜀漢, 還定三秦;誅籍業帝, 天下惟寧, 改制易俗. 作高祖本紀第八.
자우포학 한행공덕; 분발촉한 환정삼진; 주적업제 천하유녕 개제역속. 작고조본기제팔.
항우는 포악하였으나, 한왕 유방은 공덕을 베풀었다. 한왕은 촉․한에서 분발하여 돌아와서 삼진을 평정하였다. 항우를 죽이고 제왕의 업을 이루어 천하를 안정시키고 제도와 풍속을 개혁했다. 이에 제8 「고조본기」를 지었다.
恵之早霣, 諸呂不台;崇彊祿、産, 諸侯謀之;殺隠幽友, 大臣洞疑, 遂及宗禍. 作呂太後本紀第九.
혜지조운 제여부대; 숭강록 산 제후모지; 살은유우 대신동의 수급종화. 작여태후본기제팔.
혜제는 일찍 세상을 떴고 여씨 일족들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 여록과 여산의 권력이 커지자 제후들이 이를 걱정했다. 여후가 조왕 여의를 죽이고 그 아들 유우를 감금하자 대신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품었고, 마침내 여씨는 멸족의 화를 당했다. 이에 아홉 번 째로 「여태후본기」를 남겼다.
漢既初興, 継嗣不明, 迎王踐祚, 天下帰心;蠲除肉刑, 開通関梁, 広恩博施, 厥稱太宗. 作孝文本紀第十.
한기초흥 계사불명 영왕천조 천하귀심; 견제육형 개통관량 광은박시 궐칭태종. 작효문본기제십.
한이 초창기에 후계자가 분명치 않았으나 대왕을 맞이하여 천자로 세우니 천하의 인심이 제대로 돌아왔다. 육형을 없애고, 관문과 다리를 활짝 열어 소통하고, 널리 은덕을 베푸니 태종이라 불렀다. 이에 10 번 째 「효문본기」를 지었다.
諸侯驕恣, 呉首為亂, 京師行誅, 七國伏辜, 天下翕然, 大安殷富. 作孝景本紀第十一.
제후교자 오수위한 경사행주 칠국복고 천하합연 대안은부. 작효경본기제십일.
제후들이 교만방자해지더니 오나라 왕이 앞장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정벌에 나서 7국을 모두 굴복시키니 천하는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고 크게 풍요로워졌다. 이에 11 번 째 「효경본기」를 남겼다.
漢興五世, 隆在建元, 外攘夷狄, 內脩法度, 封禪, 改正朔, 易服色. 作今上本紀第十二.
한흥오세 륭제건원 외양이적 내유법도 봉선 개정삭 역복색. 작금상본기제십이.
한이 건국되어 5대를 지나면서 건원 연간(140~135년 기원전)에 융성을 누렸다. 밖으로는 이(夷)와 북적(北狄)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정비했다. 하늘에 제사드리는 봉선을 행했고, 달력과 복장의 색을 바꾸었다. 이에 12 번 째「금상본기=효무본기」를 지었다.
<‘표’ 10편의 요지>
維三代尚矣, 年紀不可考, 蓋取之譜牒舊聞, 本於茲, 於是略推, 作三代世表第一.
유삼대상의 연기불가고 개취지보첩구문 본어자 어시약추 작삼대세표제일.
하,은,주 삼대는 연대가 너무 오래되어 구체적인 날짜를 고찰할 수 없다. 대개 족보나 연보와 같은 옛 기록들을 얻어 그것에 근거하여 대략 추정했다. 이렇게 해서 표의 첫 편인 「삼대세표」를 짓는다.
幽厲之後, 周室衰微, 諸侯専政, 春秋有所不紀;而譜牒経略, 五霸更盛衰, 欲睹周世相先後之意, 作十二諸侯年表第二.
유여지후 주실쇠미 제후전정 춘추유소불기; 이보첩경략 오패경성괴 욕도주세상선후지의 작십이제후연표제이.
주 유왕과 여왕 이후 왕실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천하를 호령하며 정치를 휘두르니 『춘추』에도 기록되지 못하는 것이 생겼고, 족보나 연보에도 대강만 기록되어 있는 바 5패가 번갈아 가며 번성했다가 쇠퇴했다. 이에 주대의 전후 사정을 밝히려는 뜻에서 제2 「십이제후연표」를 남긴다.
春秋之後, 陪臣秉政, 彊國相王;以至於秦, 卒並諸夏, 滅封地, 擅其號. 作六國年表第三.
춘추지후 배신병정 강국상왕; 이지어진 졸병제하 멸봉지 천기호. 작육국년표제삼.
춘추 이후 제후 아래의 배신들이 정권을 장악했고, 강한 나라들이 서로 왕을 자처하고 나섰다. 진에 이르러 마침내 중원 제후들을 합병하여 그들의 땅을 없애고 혼자 황제로 높여 불렀다. 이에 제3 「육국연표」를 지었다.
秦既暴虐, 楚人発難, 項氏遂亂, 漢乃扶義征伐;八年之閒, 天下三嬗, 事繁変衆, 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
진기포학 초인발란 항씨추한 한내부의정벌; 팔년지산 천하삼선 사번변중 고상저진초지제월표제사.
진나라의 폭정으로 초나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항우가 다시 어지럽히고, 한나라가 정의를 내걸고 이를 정벌했다. 8년 동안 천하가 세 번이나 주인을 바꾸니 사건은 복잡하고 변화는 많았다. 이에 상세한 제4 「진초지제월표」를 남겼다.
漢興已來, 至於太初百年, 諸侯廃立分削, 譜紀不明, 有司靡踵, 彊弱之原雲以世. 作漢興已來諸侯年表第五.
한흥이래 지어태초백년 제후폐립분삭 보기불명 강약지원운이세 작한흥이래제후연표제오.
한나라가 흥기하여 태초 연간에 이르는 100년 동안 제후들이 부침을 거듭했건만 과거 족보나 연보의 기록이 부실하여 담당 관리들이 계속해서 기록할 수가 없었다. 제후들이 강하고 약했던 그 원인 정도만 언급했다. 이렇게 해서 제5 「한흥이래제후연표」를 지었다.
維高祖元功, 輔臣股肱, 剖符而爵, 沢流苗裔, 忘其昭穆, 或殺身隕國. 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유고조원공 보신고굉 부부이작 택류묘예 망기소목 혹살신운국. 작고조공신후자연표제육.
고조가 개국했을 때 팔다리처럼 보필한 공신들은 신임을 얻어 땅과 작위를 받아 그 은택이 후손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선조의 유지를 망각하다 죽거나 나라를 망친 자도 있다. 이에 6 번 째 「고조공신후자연표」를 지었다.
*昭穆:사당에 드리는 차례
恵景之閒, 維申功臣宗屬爵邑, 作恵景閒侯者年表第七.
혜경지간 유신공신종속작읍 작혜경간후자연표제칠.
혜제에서 경제에 이르는 동안 공신의 후손들에게 땅과 작위를 내려 주었다. 이에 7 번으로 「혜경간후자연표」를 지었다.
北討彊胡, 南誅勁越, 征伐夷蠻, 武功爰列. 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
북토강호 남주경월 정벌이만 무공원렬. 작건원이래후자연표제팔.
북으로 강력한 흉노를 토벌하고, 남으로 굳센 월나라를 무찌르는 등 이(夷)와 오랑캐를 정벌했다. 그 무공에 따라 제후로 봉해진 자들이 많았다. 이에 8권 「건원이래후자연표」를 지었다.
諸侯既彊, 七國為従, 子弟衆多, 無爵封邑, 推恩行義, 其埶銷弱, 徳帰京師. 作王子侯者年表第九.
제후기강 칠국위종 자제중다 무작봉읍 추은행의 기예소약 덕귀경사. 작왕자후자연표제구.
제후들이 지나치게 강해져 7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제후의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땅과 작위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은혜를 베풀어 땅과 작위를 내려주니 제후국의 힘은 서서히 약해지고 조정의 은혜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9 「왕자후자연표」를 마련했다.
國有賢相良將, 民之師表也. 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賢者記其治, 不賢者彰其事. 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
국유현상양장 민지사표야. 유견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현자기기치 불현자창기사. 작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
나라의 유능한 재상과 뛰어난 장수는 백성들의 사표다. 한이 개국한 이래 장수와 재상 그리고 이름난 신하들의 행적을 살펴 잘한 사람은 그 치적을 기록하고 그렇지 못한 자라도 그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근거로 제10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를 지었다.
<‘서’ 8편의 요지>
維三代之禮, 所損益各殊務, 然要以近性情, 通王道, 故禮因人質為之節文, 略協古今之変. 作禮書第一.
유삼대지례 소손익각수무 연요이근성정 통왕도 고예인인징위지절문 략협고금지변. 작예서제일.
하,은,주 삼대의 예법은 나름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면서 그 운용이 달랐다. 그러나 그 요지는 인정에 가깝고 왕도와 부합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예법이란 사람의 실제적인 생활에 근거하여 절제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서의 첫 편인 「예서」를 지었다.
樂者, 所以移風易俗也. 自雅頌聲興, 則已好鄭衛之音, 鄭衛之音所従來久矣. 人情之所感, 遠俗則懐. 比樂書以述來古, 作樂書第二.
악자 소이치풍역속야. 자아송성흥 즉이호정위지음 정위지름소종래구의. 인정지소감 원속즉회. 비악서이술래고 작악서제이.
음악이란 풍속을 바꾸는 기능을 한다. 『시』의 ‘아’와 ‘송’이 유행하자 정과 위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과 위의 음악이 오래도록 전해졌다. 사람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같아서 풍속이 다른 멀리 있는 사람도 품을 수 있다. 『악서』를 정리하여 음악의 변천사를 서술하기 위해 제2 「악서」를 지었다.
非兵不彊, 非徳不昌, 黃帝、湯、武以興, 桀、紂、二世以崩, 可不慎歟? 司馬法所従來尚矣, 太公、孫、呉、王子能紹而明之, 切近世, 極人変. 作律書第三.
비병불강 비덕불창 황제 탕 무이흥 걸 주 이세이붕 가불신여? 사마법소종래상의 태공 손 오 왕자능소이명지 절근세 극인변. 작률서제삼.
병력이 없으면 강해질 수 없고, 덕이 없으면 번창할 수 없다. 황제,성탕,무왕은 이것 때문에 일어났고, 걸,주,진 2세는 이것 때문에 무너졌다. 신중해야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사마법』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강태공,손자,오기,왕자 성보가 뒤를 이어 그 의미를 더 밝혔는데 요즘 사회상과 맞아떨어지고 인간사 변화를 제대로 짚어냈다. 이에 3권으로 「율서」를 지었다.
律居陰而治陽, 暦居陽而治陰, 律暦更相治, 閒不容翲忽. 五家之文怫異, 維太初之元論. 作暦書第四.
율거음이치양 역서양이치음 율력경상치 간불용표홀. 오가지문비이 유태초지원론. 작역서제사.
율은 음에 깃들어 있으면서 양을 끌어당기고, 역법은 양에 깃들어 있으면서 율을 끌어당긴다. 율과 역법이 서로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터럭만큼의 오차나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황제력,전욱력,하력,은력,주력은 서로 다 달랐고,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제정한 역법이 가장 정확하다. 이에 4권으로 「역법」을 지었다.
星気之書, 多雑禨祥, 不経;推其文, 考其應, 不殊. 比集論其行事, 験於軌度以次, 作天官書第五.
성기지서 다잡기상 불경; 추기문 고기응 불수. 비집론기행사 험어궤도이차 작천궁서제오.
별과 기상으로 점을 치는 책에는 황당하고 근거없는 길흉화복의 내용이 복잡하게 섞여있다. 그 문장과 효험을 따져보아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이와 관련된 일들을 모아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의 운행과 궤도와 맞추어보고 그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5권 「천관서」다.
受命而王, 封禪之符罕用, 用則萬霊罔不禋祀. 追本諸神名山大川禮, 作封禪書第六.
수명이왕 봉선지부한용 용즉만영망불인사. 추본제신명산대천례 작봉선서제육.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되지만 봉선 대제를 거행하는 제왕은 아주 드물었다. 봉선을 거행하게 되면 모든 신령이 제사를 받게 된다. 여러 신과 명산 그리고 큰물에 대한 제사 의례의 근본을 추구하여 6권 「봉선서」를 지었다.
維禹浚川, 九州攸寧;爰及宣防, 決涜通溝. 作河渠書第七.
유우준천 구주유녕; 원급선방 결독통구. 작하거서제칠.
대우가 하천의 물길을 터서 구주의 백성들이 안녕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선방(방죽)을 지으면서도 물길을 터서 서로 통하게 했다. 이에 7권 「하거서」를 지었다.
維幣之行, 以通農商;其極則玩巧, 並兼茲殖, 爭於機利, 去本趨末. 作平準書以観事変, 第八.
유폐지행 이통농상; 기극즉완교 병겸자식 쟁어기리 거본추말. 작평준서이관사변 제팔.
화폐는 농업과 상업의 교역을 위해 발행한다. 그런 교역이 성하면 교묘한 수단으로 투기하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다. 투기와 이익 때문에 싸우다보면 농사는 팽개치고 돈 버는 쪽으로만 달려간다. 이에 제8 「평준서」를 지어 그 상황의 변화를 관찰했다.
<‘세가’ 30편의 요지>
太伯避歴, 江蠻是適;文武攸興, 古公王跡. 闔廬弑僚, 賓服荊楚;夫差克斉, 子胥鴟夷;信嚭親越, 呉國既滅. 嘉伯之譲, 作呉世家第一.
태백피력 강만시적; 문무유흥 고공왕적. 합려시오 빈보형초; 부차극제 자서치리; 신비친월 오국기멸. 가백지양 작오세가제일.
오나라 태백은 막내동생 계력의 즉위를 위해서 멀리 강남 야만족 땅으로 피해가서 살았다. 그 후 문왕과 무왕이 주 왕조를 일으킨 것은 일찍이 고공단보 때 왕이 될 만한 흔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합려는 요를 시해하고 형초를 굴복시켰다. 부차는 제나라와 싸워 이기고, 오자서가 자살하니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물에 던졌다. 부차는 간신 백비를 신임하여 월나라와 가까이 지내더니 결국 망했다. 태백의 양보를 칭송하는 뜻에서 세가 첫 편으로 「오세가」를 남긴다.
申、呂肖矣, 尚父側微, 卒帰西伯, 文武是師;功冠群公, 繆権於幽;番番黃髪, 爰饗営丘. 不背柯盟, 桓公以昌, 九合諸侯, 霸功顕彰. 田闞爭寵, 薑姓解亡. 嘉父之謀, 作斉太公世家第二.
신 려소의 상보측미 졸귀서백 문무시사 공관군공 목권어유; 번번황발 워향영구, 불배가맹 환공이창 구합제후 패공현창. 전함쟁총 강성해망. 가보지모 작제태공세가제이.
신․여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상보 강태공은 미천한 신분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서백(문왕)에게 귀의했고, 무왕은 태사로 모셨다. 은밀하고 치밀한 권모술수로 상을 멸망시키니 상보의 공은 신하들 중 으뜸이었다. 머리카락이 황백색으로 변한 노년에 영구를 봉지로 받았다. 가에서 약속한 맹약을 배신하지 않았기에 환공은 번창했고,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불러 모으니 패자로서의 공적이 두드러졌다. 전상과 감지 두 권신이 권력을 다투었고, 강씨 성의 정권은 망했다. 상보의 모략을 높이 평가하여 제2 「제태공세가」를 지었다.
依之違之, 周公綏之;憤発文徳, 天下和之;輔翼成王, 諸侯宗周. 隠桓之際, 是獨何哉? 三桓爭彊, 魯乃不昌. 嘉旦金縢, 作周公世家第三.
의지위지 주공수지; 분발문덕 천하화지; 보익성왕 제후종주. 은환지제 시독가재? 삼환쟁강 노내불창. 가단금등 작주공세가제삼.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이 섭정하자 이에 따르는 제후도 있고 반대하는 제후도 있어 정국이 어지러웠지만 주공이 이를 안정시켰다. 예악으로 힘껏 교화하자 천하가 화답했다. 이렇게 성왕을 보필하니 제후들은 주 왕실을 종주로 떠받들었다. 노나라 은공과 환공에 이르러 어쩌다 그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을까? 삼환의 무력 다툼으로 노나라는 끝내 번창하지 못했다. 주공 단의 ‘금등’을 칭송하여 3권 「주공세가」를 지었다.
武王克紂, 天下未協而崩. 成王既幼, 管蔡疑之, 淮夷叛之, 於是召公率徳, 安集王室, 以寧東土. 燕(易)[噲]之禪, 乃成禍亂. 嘉甘棠之詩, 作燕世家第四.
무왕극부 천하미협이붕. 성왕기유 관채의지 회이반지 어시소공솔덕 안집왕실 이녕동토 연회지선 내성화란. 가감당지시 작연세가제사.
무왕이 주왕을 무찔렀으나 천하의 화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상을 떴다. 어린 성왕이 즉위하고 주공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이 의심하여 회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공은 앞장서서 협력하여 왕실을 편안하게 하고 동방도 안녕을 되찾았다. 연왕 쾌의 섣부른 선양이 재앙과 난리를 불러일으켰다. ‘감당’이란 시를 칭송하며 4권 「연세가」를 지었다.
管蔡相武庚, 將寧舊商;及旦摂政, 二叔不饗;殺鮮放度, 周公為盟;大任十子, 周以宗彊. 嘉仲悔過, 作管蔡世家第五.
관채상무경 장녕구상; 급단섭정 이숙불향; 살선방도 주공위먕; 대임십자 주이종강. 가중회과 작관채세가제오.
관숙과 채숙을 보내 무경을 감시하고 옛 상의 유민을 다독거리게 했다. 그러나 주공 단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은 복종하지 않았다. 주공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고는 충성을 맹약했다. 문왕의 비 태사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어 주 종실이 강성해졌다. 잘못을 뉘우친 채숙의 아들 중을 평가하여 5권 「관채세가」를 남겼다.
王後不絶, 舜禹是説;維徳休明, 苗裔蒙烈. 百世享祀, 爰周陳杞, 楚実滅之. 斉田既起, 舜何人哉? 作陳杞世家第六.
왕후부절 순우시열; 유덕휴명 묘예몽열. 백세향사 원주진기 초실멸지. 제전기기 순하인재? 작진기세가제육.
덕 있는 제왕은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순, 우의 혼령이 기뻐할 것이다. 그들의 아름답고 밝은 덕 덕분에 후손이 혜택을 입어 백세가 지나도록 제사를 누리니 주 왕실의 진,기와 같은 제후국이 그랬다. 초나라에게 망했지만 그 후손이 다시 제나라에서 전씨로 일어났으니 순이란 분이 얼마나 대단한가! 이에 6권 「진기세가」를 지었다.
収殷餘民, 叔封始邑, 申以商亂, 酒材是告, 及朔之生, 衛頃不寧;南子悪蒯聵, 子父易名. 周徳卑微, 戦國既彊, 衛以小弱, 角獨後亡. 喜彼康誥, 作衛世家第七.
수은여민 숙봉시읍 신이상란 주재시고 급삭지생 위경불녕; 남자오괴외 자부역명. 주덕비미 전국기강 위이소약 각독후망. 희피강고 작위세가제칠.
주공이 은나라의 유민들을 거두어 강숙을 위에 봉했다. 상왕조의 혼란했던 상황을 일깨우기 위해 『상서』의 ‘주고’와 ‘자재’를 예로 들어 일러주었고 삭(혜공)이 태어날 무렵 위나라 경공(頃公)이 편안치 못했는데 남자(南子;왕비)가 태자 괴외를 미워하여 내쫓으니, 아들과 아비가 싸우고 자리가 뒤바뀌는 명분없는 일이 벌어졌다. 주 왕실의 덕이 미미해지고, 전국의 열강들이 강해졌다. 위나라는 약했지만 각(角)왕 때까지 버티다 마지막에 망했다. 저 ‘강고’를 찬미하여 7권 「위세가」를 지었다.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篇名).
嗟箕子乎! 嗟箕子乎! 正言不用, 乃反為奴. 武庚既死, 周封微子. 襄公傷於泓, 君子孰稱. 景公謙徳, 熒惑退行. 剔成暴虐, 宋乃滅亡. 喜微子問太師, 作宋世家第八.
차기자호! 차기자호! 정언불용 급반위조. 무강기가 주봉미자. 양공상어홍 군자숙칭. 경공겸덕 형혹퇴행. 척성포학 송내멸망. 희미자문태사 작송세가제팔.
안타깝도다, 기자여! 안타깝도다, 기자여! 바른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노예가 되었구나. 무경이 죽자 주 왕실은 미자를 송에 봉했다. 양공이 홍에서 초나라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패했지만 의리라는 명분을 앞세운 덕에 군자라는 칭송을 얻기도 했다. 경공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좋지 않은 징조인 화성이 자리를 바꾸어 물러났다. 천성이 포악하여 마침내 멸망했다. 미자가 태사에게 가르침을 청한 뒤 떠난 일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제8권 「송세가」를 지었다.
武王既崩, 叔虞邑唐. 君子譏名, 卒滅武公. 驪姫之愛, 亂者五世;重耳不得意, 乃能成霸. 六卿専権, 晉國以秏. 嘉文公錫珪鬯, 作晉世家第九.
무왕기붕 숙우읍당. 군자기명 졸멸무공. 여희지애 란자오새; 중이부득의 급능성패. 육경전권 진국이모. 가문공석규창 작진세가제구.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숙우는 당에 도읍을 정했다. 진 목공이 아들 이름을 잘못 지은 것에 말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난이 일어나 과연 무공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헌공이 여희에게 홀리니 진나라는 5대에 걸쳐 혼란스러웠다. 진 문공 중이가 처음에는 뜻을 얻지 못했으나 결국에는 패업을 이루었다. 육경이 권력을 좌우하니 진나라의 국력이 소모되었다. 문공이 천자로부터 패자를 위한 예물을 받은 일을 칭송하여 9권 「진세가」를 지었다.
重黎業之, 呉回接之;殷之季世, 粥子牒之. 周用熊繹, 熊渠是続. 荘王之賢, 乃複國陳;既赦鄭伯, 班師華元. 懐王客死, 蘭咎屈原;好諛信讒, 楚並於秦. 嘉荘王之義, 作楚世家第十.
중려업지 오회접지; 은지계세 미자첩지. 주용웅역 웅거시속. 장왕지현 내복국진; 기사정백 반사화원. 회왕객사 난구굴원; 호유신참 초병어진. 가장왕지의 작초세가제십.
중려가 창업하고 오회가 이어받았다. 은나라 말년에 육웅이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주 성왕이 웅역을 기용하고 웅거가 계속 그 일을 이었다. 현명한 장왕은 진나라의 사직을 다시 복구시켜 주고, 정백의 죄를 용서했으며, 송나라를 포위했다가 화원의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렸다. 회왕은 진나라에서 객사했고, 자란은 굴원을 박해했다. 초나라는 아부꾼을 좋아하고 모함하는 자를 믿는 바람에 결국 진나라에 합병되었다. 장왕의 대의를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 10권 「초세가」를 마련했다.
少康之子, 実賓南海, 文身斷髪, 黿■與処, 既守封禺, 奉禹之祀. 句踐困彼, 乃用種、蠡. 嘉句踐夷蠻能脩其徳, 滅彊呉以尊周室, 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
소강지자 실빈남해 문신단발 원 여처 기수봉우 봉우지사. 구천곤피 내용종 려. 가구천이만능유기덕 멸강오이존주실 작원왕구천세가제십일.
소강의 아들 무여는 남쪽 바닷가로 가서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짧게 잘랐으며, 물가에서 자라나 큰 거북 등과 더불어 살았다. 봉산과 우산을 지키며 우 임금의 제사를 받들었다. 구천은 부차에게 치욕을 당한 뒤 문종과 범려를 중용했다. 구천이 오랑캐였지만 적극적으로 덕과 의리를 닦아 강력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주 왕실을 존중한 것을 칭찬하여 11권 「월왕구천세가」를 지었다.
桓公之東, 太史是庸. 及侵周禾, 王人是議. 祭仲要盟, 鄭久不昌. 子産之仁, 紹世稱賢. 三晉侵伐, 鄭納於韓. 嘉厲公納恵王, 作鄭世家第十二.
환공지동 태사시용. 급침주화 왕인시의. 제중요맹 정구불창. 자산지인 소세칭현. 삼진침벌 정납어한. 가여공납혜왕 작정세가제십이.
정 환공은 주 태사의 건의를 듣고 동쪽을 경영했다. 장공이 주나라의 화라는 곳을 공격하자 주나라의 군신과 백성들이 이를 비방했다. 제중이 송나라의 강요로 강제로 맹약을 맺은 이후 줄곧 발전하지 못했다. 자산의 어진 정치는 여러 대에 걸쳐 칭찬을 받았다. 삼진이 침략하자 한나라에게 합병되었다. 여공이 주 혜왕을 돌려보낸 일을 기리며 12권 「정세가」를 지었다.
維驥騄耳, 乃章造父. 趙夙事獻, 衰続厥緒. 佐文尊王, 卒為晉輔. 襄子困辱, 乃禽智伯. 主父生縛, 餓死探爵. 王遷辟淫, 良將是斥. 嘉鞅討周亂, 作趙世家第十三.
유기록이 내장조보. 조숙사헌 최속궐사. 좌문존왕 졸위진보. 양자곤욕 내급지백. 주보생박 아사탐작. 왕천벽음 양장시척. 가앙토주란 작조세가제십삼.
조보가 길러서 바친 명마(驥騄)가 조보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조숙은 진 헌공을 섬겼고, 아들 조최가 유업을 계승했다. 조최는 진 문공이 패주가 되도록 도와 진나라의 대신이 되었다. 조양자는 지백에게 곤욕을 치른 뒤 한, 위나라와 함께 지씨를 멸망시켰다. 주보 무령왕은 사구궁에 갇혀 새 알로 배고픔을 때우다 굶어죽었다. 조왕 천은 속 좁고 음탕하여 좋은 장수를 배척했다. 조앙이 주 왕실의 난을 토벌한 공을 기리며 13권 「조세가」를 지었다.
畢萬爵魏, 蔔人知之. 及絳戮幹, 戎翟和之. 文侯慕義, 子夏師之. 恵王自矜, 斉秦攻之. 既疑信陵, 諸侯罷之. 卒亡大梁, 王仮廝之. 嘉武佐晉文申霸道, 作魏世家第十四.
필만작위 복인지지. 급강육간 융적화지, 문후모의 자하사지. 혜왕자긍 제진공지. 기의신릉 제후파지. 졸인대량 왕가시지. 가무죄진문신패도 작위세가제십사.
필만이 위에 봉해졌고, 점쟁이는 이를 예언한 바 있다. 위강이 양간의 마부를 죽이고, 융적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문후는 인의를 귀하게 여겨 자하를 스승으로 모셨다. 혜왕이 교만에 빠져 자신을 과시하다가 제, 진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안희왕이 신릉군을 의심하자 제후들이 위나라를 돕지 않았다. 그러다 끝내 수도 대량이 점령당하고 왕 가는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되었다. 진 문공의 패업 성취를 도운 무자를 칭송하며 14권 「위세가」를 지었다.
韓厥陰徳, 趙武攸興. 紹絶立廃, 晉人宗之. 昭侯顕列, 申子庸之. 疑非不信, 秦人襲之.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 作韓世家第十五.
한궐음덕 조무유흥. 소절입폐 진인종지. 소후현열 신자용지. 의비불신 진인습지. 가궐보진광주천자지부 작한세가제십오.
한궐의 음덕으로 조무가 조씨 집안을 부흥시켜 끊어진 대를 잇게 하고 폐지된 제사를 회복케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소후가 열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신불해를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안왕이 한비자를 의심하여 믿지 않으니 진나라가 공격해왔다. 한궐이 진나라를 돕고 주 천자를 수호한 일을 칭송하여 15권 「한세가」를 지었다.
完子避難, 適斉為援, 陰施五世, 斉人歌之. 成子得政, 田和為侯. 王建動心, 乃遷於共. 嘉威、宣能撥濁世而獨宗周, 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
완자피난 적제위원 음시오세 제인가지. 성자득정 전화위후. 왕건동심 내천어공. 가위선능발탁세이독종주 작전경중완세가제십육.
전완이 난리를 피해 제나라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 이후 5대에 걸쳐 은밀히 은혜를 베푸니 제나라 사람들이 칭찬했다. 전성자 때 제나라 정권을 독점했고, 전화 때는 제후에 봉해졌다. 제왕 건이 간계에 빠져 진나라에 항복하니 진나라는 그를 공으로 옮겨 살게 했다. 위왕과 선왕이 난세임에도 홀로 주나라 왕실을 받든 것을 높이 평가하여 제16 「전경중완세가」를 지었다.
周室既衰, 諸侯恣行. 仲尼悼禮廃樂崩, 追脩経術, 以達王道, 匡亂世反之於正, 見其文辭, 為天下制儀法, 垂六蓺之統紀於後世. 作孔子世家第十七.
주실기쇠 제후자행. 중니도예폐악붕 추유경술 이달왕도 광란세반지어정 현기문사 위천하제의법 수육예지통기어후세. 작공자세가제십칠.
주 왕실은 쇠퇴해졌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예악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한 공자는 고대 전적들을 연구하고 왕도를 선전하고 고취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에 자신의 사상을 글로 나타내어, 천하를 위한 규범을 만들고 육예의 강령을 후세에 남겼다. 이에 17권 「공자세가」를 지었다.
桀、紂失其道而湯、武作, 周失其道而春秋作. 秦失其政, 而陳渉発跡, 諸侯作難, 風起雲蒸, 卒亡秦族. 天下之端, 自渉発難. 作陳渉世家第十八.
걸 주실기도이탕 무작 주실기도이춘추작. 진실기정 이진섭발적 제후작란 충기운증 졸망진족. 천하지단 자섭발란. 작진섭게사제십팔.
걸왈과 주왕이 왕도를 잃자 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 왕실이 왕도를 잃자 『춘추』가 나왔다. 진나라가 바른 정치를 잃어 진섭이 들고 일어났다. 제후들도 따라서 난을 일으키니 바람과 구름이 몰아치듯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천하의 봉기는 진섭의 난으로부터 발단되었으므로 18권 「진섭세가」를 지었다.
成皐之台, 薄氏始基. 詘意適代, 厥崇諸竇. 栗姫偩貴, 王氏乃遂. 陳後太驕, 卒尊子夫. 嘉夫徳若斯, 作外戚世家十九.
성고지대 박씨시기. 졸의적대 궐숭제구. 율희부귀 왕씨내수. 진후태교 졸존자부. 가부덕약사 작외척세가십구.
하남궁 성고대에서 박씨가 황제의 총애를 처음 받았다. 두씨는 뜻을 꺾고 마지못해 대나라로 갔지만 대왕이 황제가 되는 통에 두씨 일족 모두가 귀하신 몸이 되었다. 율희는 존귀한 자리만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 그 틈을 탄 왕씨가 뜻을 얻었다. 진 황후가 너무 교만하게 군 탓에 위자부가 귀하신 몸이 되었다. 위자부의 이 같은 덕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19권 「외척세가」를 지었다.
漢既譎謀, 禽信於陳;越荊剽軽, 乃封弟交為楚王, 爰都彭城, 以彊淮泗, 為漢宗藩. 戊溺於邪, 禮複紹之. 嘉遊輔祖, 作楚元王世家二十.
한기휼모 금신어진; 월형표경 내봉제교위초왕 원도팽성 이강회사 위한종번. 무약어사 예복소지. 가유보조 작초원왕세가이십.
한 고조는 속임수로 한신을 진나라에서 사로잡았다. 월나라와 초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호전적이어서 고조의 동생 교를 초왕으로 봉하고 팽성에 도읍하여 회수와 사수 유역의 통치를 강화하니 한나라 종실의 울타리가 되었다. 유무가 사악함에 빠졌으나 유예로 하여금 유교의 제사를 다시 잇게 했다. 유교가 고조를 보필한 공을 높이 평가하여 20권 「초원왕세가」를 지었다.
維祖師旅, 劉賈是與;為布所襲, 喪其荊、呉. 営陵激呂, 乃王琅邪;怵午信斉, 往而不帰, 遂西入関, 遭立孝文, 獲複王燕. 天下未集, 賈、沢以族, 為漢藩輔. 作荊燕世家第二十一.
유조사여 유고시여; 위포소습 상기형 오. 영릉격여 내왕랑야; 출오신제 왕이불귀 수서입관 조립효문 획복왕연. 천하미집 고 택이족 위한번보. 작형연세가제이십일.
고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유고가 동참했다. 영포의 공격을 받아 형과 오나라를 잃었다. 영릉후 유택이 여태후를 감격시켜 낭야왕에 봉해졌다. 축오에게 속아 제나라로 갔다가 돌아올 수 없게 되자 꾀를 내어 서쪽 관문을 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효문제를 옹립한 공으로 다시 연왕에 봉해졌다. 천하가 미처 평정되지 못한 때 유고와 유택은 친족의 신분으로 한 고조를 보좌하여 울타리가 되었으므로 21권 「형연세가」를 지었다.
天下已平, 親屬既寡;悼恵先壯, 実鎮東土. 哀王擅興, 発怒諸呂, 駟鈞暴戻, 京師弗許. 厲之內淫, 禍成主父. 嘉肥股肱, 作斉悼恵王世家第二十二.
천하이평 친속기과; 도혜선장 실전동토. 애왕찬흥 발로제여 사균폭루 경사불허. 여지내음 화성주보. 가비고굉 작게도혜왕세가제이십이.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친족들이 적었다. 도혜왕 유비가 먼저 장성하여 동쪽 제나라 땅을 단단히 다스렸다. 애왕은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토벌했고, 난폭한 그의 외삼촌 사균 때문에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여(厲)왕은 누이와 간통하다가 주보언의 조사를 받고 자살하는 화를 당했다. 황제의 손발과 같았던 유비를 기리며 22권 「제도혜왕세가」를 남겼다.
楚人囲我滎陽, 相守三年;蕭何填撫山西, 推計踵兵, 給糧食不絶, 使百姓愛漢, 不樂為楚. 作蕭相國世家第二十三.
초인위아형양 상수삼년; 소하전무산서 추계종병 급양식부절 사백성애한 불악위초. 작소상국세가제이십삼.
초 패왕의 군대가 한왕을 형양에서 포위하여 3년 동안 서로 대치했다. 소하는 산서(관중)를 잘 지키고 호적에 따라 군사를 보충하고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를 사랑하고 초나라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만들었다. 이에 23권 「소상국세가』를 지었다.
與信定魏, 破趙抜斉, 遂弱楚人. 続何相國, 不変不革, 黎庶攸寧. 嘉參不伐功矜能, 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
여신정위 파조발게 수약초인. 속하상국 불변불혁 여서유녕 가참불벌공긍능 작조상국세가제이십사.
한신과 함께 위나라를 평정하고, 조나라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함락시킴으로써 마침내 초나라를 약하게 만들었다. 소하를 이어 상국이 되었으나 바꾸지도 개혁하지도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했다. 자기 공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조참을 가상히 여겨 24권 「조상국세가」를 기록했다.
運籌帷幄之中, 制勝於無形, 子房計謀其事, 無知名, 無勇功, 図難於易, 為大於細. 作留侯世家第二十五.
운주유악지중 제승어무형 자방계모기사 무지명 무용공 도란어역 위대어세. 작유후세가제이십오.
밀실 안에서 책략을 구사하여 귀신도 모르게 승리를 거둔 것은 장량(장자방)이 그 일을 꾸몄기 때문이다. 이름을 떨칠 만한 큰 일을 하지도 않았고 용감한 공적을 세운 적도 없지만 어려운 문제는 쉽게 해결하고 큰 일은 작은 곳부터 처리했다. 이에 25권 「유후세가」를 지었다.
六奇既用, 諸侯賓従於漢;呂氏之事, 平為本謀, 終安宗廟, 定社稷. 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
육기기용 제후빈종어한; 여씨지사 평위본모 종안종며 정사직. 작진승상세가제이십육.
여섯 가지 기발한 계책을 사용하니 제후들이 모두 한나라에 복종했다. 여씨의 일도 진평이 주모한 것으로, 끝내는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에 26권 「진승상세가」를 지었다.
諸呂為従, 謀弱京師, 而勃反経合於権;呉楚之兵, 亜夫駐於昌邑, 以厄斉趙, 而出委以梁. 作絳侯世家第二十七.
제여위종 모약경사 이발반경합어권; 오초지병 아부주어창읍 이액재조 이출위이양. 작강후세가제이십칠.
여씨 일족이 결탁하여 황실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주발이 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잘 대처하여 여씨 일족을 제거했다. 오․초의 반란 때 주아부는 창읍에 주둔하며 제나라와 조나라의 진출을 막았고, 양나라가 초나라의 힘을 빼도록 고의로 구원하지 않았다. 이에 27권 「강후세가」를 지었다.
七國叛逆, 蕃屏京師, 唯梁為扞;偩愛矜功, 幾獲於禍. 嘉其能距呉楚, 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
칠국반역 번병경사 유양위한; 부애긍공 기획어화. 가기능거오초 작양효왕세가제이십팔.
오와 초나라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울타리가 되어 황실을 지켜준 것은 양나라뿐이었다. 훗날 총애를 믿고 공로를 뽐내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오와 초나라를 막은 공을 가상하게 여겨 28권 「양효왕세가」를 지었다.
五宗既王, 親屬洽和, 諸侯大小為藩, 爰得其宜, 僭擬之事稍衰貶矣. 作五宗世家第二十九.
오종기왕 친속흡화 제후대소위번 원득기의 참의지사초쇠폄의. 작오종세가제이십구.
다섯 후비의 자식들인 오종이 왕이 되어 친족이 화목을 이루고, 크고 작은 제후들이 울타리가 되어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니 분수를 모르고 천자 행세를 하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29권 「오종세가」를 지었다.
三子之王, 文辭可観. 作三王世家第三十.
삼자지왕 문사가관. 작삼왕세가제삼십.
지금 황제의 세 아들이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에 관한 황제와 신하들의 책문이 볼만하다. 이에 세가의 마지막 편인 30권 「삼왕세가」를 남긴다.
守節切直, 義足以言廉, 行足以厲賢, 任重権不可以非理撓. 作田叔列傳第四十四.
수절절직 의족이언염 행족이여현 임중권불가이비리요. 작전숙열전제사십사.
절개는 굳고 강직했다. 의리는 청렴이라는 말에 충분히 어울렸다. 행동은 어진 이들을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권세가 있는 자리에 임용되었지만 무례한 수단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에 44편 「전숙열전」을 지었다.
扁鵲言醫, 為方者宗, 守數精明;後世(修)[循]序, 弗能易也, 而倉公可謂近之矣. 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
편작언의 위방자종 수수정명 후세유서 불능역야 이창공가위근지의. 작편작창송열전제사십오.
의술을 논한 편작은 의학계의 조종이다. 그의 의술은 대단히 정교하고 분명하여 후세에도 그것을 따르며 바꾸지 못할 정도였다. 창공 정도라야 그에 접근한다 할 수 있다. 이에 45편 「편작창공열전」을 지었다.
維仲之省, 厥濞王呉, 遭漢初定, 以填撫江淮之閒. 作呉王濞列傳第四十六.
유중지성 궐비왕오 조한초정 이진무강회지간. 작오왕비열전제사십육.
유중은 작위가 깎였으나 아들 유비가 오나라 왕이 되었다. 한나라 초기 장강과 회수 사이를 진압했다. 이에 46편 「오왕비열전」을 지었다.
呉楚為亂, 宗屬唯嬰賢而喜士, 士郷之, 率師抗山東滎陽.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
오초위란 종속유영현이희사 사향지 솔사항산동형양. 작위기무안열전제사십칠.
오․초나라가 난을 일으켰을 때 종실과 외척들 중 오직 두영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다. 선비들도 그를 따랐다. 군사를 이끌고 산동 형양에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이에 47편 「위기무안열전」을 지었다.
智足以應近世之変, 寛足用得人.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
지족이응근세지변 관족용득인. 작한장유열전제사십팔.
지혜는 최근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충분하고, 너그러움은 인재를 얻어 쓰기에 충분했다. 이에 48편 「한장유열전」을 지었다.
勇於當敵, 仁愛士卒, 號令不煩, 師徒郷之.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
용어당감 인애사졸 호령불번 사도향지. 작이장군열전제사십구.
적을 만나서는 용감했으며, 사졸들에게는 어질게 사랑으로 대했다. 군령은 번거롭지 않았으니 장수와 사병들도 그를 사랑했다. 이에 제49 「이장군열전」을 지었다.
自三代以來, 匈奴常為中國患害;欲知彊弱之時, 設備征討, 作匈奴列傳第五十.
자삼대이래 흉노상위중국환해 욕지강약지시 설비정토 작흉노열전제오십.
삼대 이래 흉노는 늘 중국의 근심과 피해를 주었다. 그들이 언제 강하고 언제 약한가를 살펴서 군비를 갖추거나 정벌에 나서고자 했다. 이에 50편 「흉노열전」을 지었다.
直曲塞, 広河南, 破祁連, 通西國, 靡北胡.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
직곡새 광하남 파기련 통서국 마북호. 작위장군표기열전제오십일.
변방 요새를 곧바로 개통하여 황하 이남의 넓은 땅을 개척했다. 기련산에서 적을 격파하고 서역의 길을 통하게 하여 적을 북으로 몰아냈다. 이에 51편 「위장군표기열전」을 지었다.
大臣宗室以侈靡相高, 唯弘用節衣食為百吏先.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
대신종실이치미상고 유홍용절의식위백리선. 작평진후열전제오십이.
대신과 종친들이 서로 서로 사치를 다툴 때 공손홍만은 먹고 입는 것을 절약하여 백관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이에 52편 「평진후열전」을 지었다.
漢既平中國, 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 納貢職. 作南越列傳第五十三.
한기평중국 이차능집양월이보남번 납공직. 작남월열전제오십삼.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조타는 양월을 모아 남방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고 한 왕조에 조공했다. 이에 53편 「남월열전」을 지었다.
呉之叛逆, 甌人斬濞, 葆守封禺為臣. 作東越列傳第五十四.
오지반역 구인참비 보수봉우위신. 작동월열전제오십사.
오나라가 난을 일으켰을 때 동구 사람들이 오왕 유비를 죽이고 붕산과 우산을 굳게 지키면서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이에 54권 「동월열전」을 지었다.
燕丹散亂遼閒, 満収其亡民, 厥聚海東, 以集真藩, 葆塞為外臣. 作朝鮮列傳第五十五.
연단산란요간 만수기망민 궐취해동 이집진번 보색위외신. 작조선열전제오십오.
연나라 태자 단이 요동 일대에서 난을 일으키며 위만은 망명자들을 거두어 바다 동쪽에 집결시켜 진번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지키면서 한나라의 변두리 신하인 외신이 되었다. 이에 55권 「조선열전」을 지었다.
唐蒙使略通夜郎, 而邛笮之君請為內臣受吏.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
당몽사략통야랑 이공작지군청위내신수리. 작서남이열전오십육.
당몽이 사신이 되어 야랑과의 교통로를 개척하니 공․작 지역의 우두머리들이 내신이 되고자 하여 관리들을 보내 통치했다. 이에 56권 「서남이열전」을 지었다.
子虛之事, 大人賦説, 靡麗多誇, 然其指風諫, 帰於無為.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
자허지사 대인부설 미려다과 연기지풍간 귀어무위. 작사마상여열전제오십칠.
「자허부」 같은 글과 「대인부」는 문장이 화려하고 과장된 부분이 많지만 그 요지는 풍자를 이용하여 ‘무위’의 정치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이에 57권 「사마상여열전」을 지었다.
黥布叛逆, 子長國之, 以填江淮之南, 安剽楚庶民.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
경포반역 자장국지 이진강회지남 안표초서민. 작회남형산열전제오십팔.
경포가 반역하자 아들 유장이 그 나라를 받아 장강과 회수 남쪽을 다스렸다. 유안은 사납고 호전적인 초나라 지역의 백성들을 눌러 다독거렸다. 이에 58권 「회남형산열전」을 지었다.
奉法循理之吏, 不伐功矜能, 百姓無稱, 亦無過行. 作循吏列傳第五十九.
봉법순리지리 불벌공긍능 백성무칭 역무과행. 작순이열전제오십구.
법을 받들고 이치에 따라 일하는 관리들은 자신들의 공로와 능력을 뽐내지 않는다.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하지도 않지만 그들 스스로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에 59권 「순리열전」을 지었다.
正衣冠立於朝廷, 而群臣莫敢言浮説, 長孺矜焉;好薦人, 稱長者, 壯有漑. 作汲鄭列傳第六十.
정의관립어조정 이군신막감언부설 장유긍언 호천인 칭장자 장유개. 작급정열전제육십.
옷매무새를 반듯하게 하고 조정에 서면 신하들이 감히 허튼 소리를 못 꺼냈는데, 급암에게 그런 장중함이 있었다. 인재를 추천하길 좋아하여 장자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정당시에게 바로 그런 기개가 있었다. 이에 60권 「급정열전」을 지었다.
自孔子卒, 京師莫崇庠序, 唯建元元狩之閒, 文辭粲如也. 作儒林列傳第六十一.
자공자졸 경사막숭상서 유건원원수지간 문사찬여야. 작유림열전제육십일.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조정에서는 학교 교육을 중시하지 않았다. 오로지 건원에서 원수에 이르는 동안 문교가 빛났다. 이에 61권 「유림열전」을 지었다.
民倍本多巧, 姦軌弄法, 善人不能化, 唯一切厳削為能斉之. 作酷吏列傳第六十二.
민배본다교 간궤롱법 선인불능화 유일체엄삭위능제지. 작혹리열전제육십이.
순박한 본성을 버리고 간교하게 속임수나 쓰는 백성들로 변하여 죄를 범하고 법을 우롱하니 착한 사람으로는 교화할 수 없어 모든 것을 오로지 엄격한 형벌로 다스려 바로잡으려 했다. 이에 62권 「혹리열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漢既通使大夏, 而西極遠蠻, 引領內郷, 欲観中國. 作大宛列傳第六十三.
한기통사대하 이서극원만 인용내향 욕관중국. 작대원열전제육십삼.
한나라가 사신을 대하로 보내 교통을 트게 하니 서쪽 끝 먼 오랑캐들이 목을 길게 뺀 채 중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에 권63 「대완열전」을 지었다.
救人於厄, 振人不贍, 仁者有乎;不既信, 不倍言, 義者有取焉. 作遊俠列傳第六十四.
구인어액 진인불섬 인자유호 불기신 불배언 의자유취언. 작유협열전제육십사.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어진 사람의 자세다.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이에 권64 「유협열전」을 지었다.
夫事人君能説主耳目, 和主顔色, 而獲親近, 非獨色愛, 能亦各有所長. 作佞幸列傳第六十五.
부사인군능설주이목 화주안색 이획친근 비독오애 능역각유소장. 작영행열전제육십오.
군주를 모시며 군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안색을 편안하게 만들어 친근한 감정을 얻어낸다. 그저 미모만 가지고 총애를 얻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권65 「영행열전」을 지었다.
不流世俗, 不爭埶利, 上下無所凝滯, 人莫之害, 以道之用. 作滑稽列傳第六十六.
불유세속 부쟁집리 상하무소의체 인막지해 이도지용. 작골계열잔제육십육.
세속에 흐르지 않고 권세와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위아래 어디와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세상의 큰 도를 따르니 사람들이 해를 가할 일도 없다. 이에 권66 「골계열전」을 지었다.
斉、楚、秦、趙為日者, 各有屬所用. 欲循観其大旨, 作日者列傳第六十七.
제 초 진 조위일자 각유속소용. 욕순관기대지 작일자열전제육십칠.
제․초․진․조나라의 점쟁이들은 풍속에 따라 점을 치는 방법이 달랐다.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권67 「일자열전」을 지었다.
三王不同亀, 四夷各異蔔, 然各以決吉凶. 略闚其要, 作亀策列傳第六十八.
삼왕부동귀 사이각이복 연각이결길흉. 략규기요 작귀책열전제육십팔.
거북 껍데기로 점을 치는 방법은 한,은, 주 삼대가 다 달랐으며, 네 개의 이(夷)무리도 다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길흉화복을 결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략적으로 그 요지를 엿보려고 권68 「귀책열전」을 지었다.
布衣匹夫之人, 不害於政, 不妨百姓, 取與以時而息財富, 智者有采焉. 作貨殖列傳第六十九.
포의필부지인 불해어정 불방백성 취여이시이식재부 지자유채언. 작화식열전제육십구.
정치를 방해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물건을 사고팔아 재산을 늘린 벼슬없는 보통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혜롭기로 이름난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한 바 있다. 이에 권69 「화식열전」을 지었다.
< 『사기』의 체제 및 ‘자서’의 요지>
維我漢継五帝末流, 接三代統業. 周道廃, 秦撥去古文, 焚滅詩書, 故明堂石室金匱玉版図籍散亂. 於是漢興, 蕭何次律令, 韓信申軍法, 張蒼為章程, 叔孫通定禮儀, 則文學彬彬稍進, 詩書往往閒出矣. 自曹參薦蓋公言黃老, 而賈生、晁錯明申、商, 公孫弘以儒顕, 百年之閒,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
유아한계오제말류 접삼대통업. 주도폐 진발거고문 분멸시서 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어시한흥 소하차율령 한신군법 장창위장정 숙손통정예의 즉문학빈빈초진 시서왕왕간출의. 자조참천개공언황로 이가생 조조명신 상 공손홍이유현 백년지간 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고 삼대의 위업을 이어 받았다. 주 왕조의 도가 바닥에 떨어지고, 진나라는 고서를 없애고 『시』․ 『서』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명당과 왕실 도서관인 석실과 금궤의 귀중한 도판과 전적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말았다. 한나라가 일어나 소하가 법령을 정비하고, 한신이 군법을 확실하게 밝히고, 장창은 문물제도를 만들고, 숙손통은 의례를 정하니 학문의 기풍이 점점 발전하고 『시』와 『서』도 다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조참이 개공을 추천하여 황로를 말하게 하고, 가의와 조조는 신불해와 상앙의 법가 학문을 알리고, 공손홍은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해서 지난 100년 동안 천하에 남아 있던 서적이나 고문서가 모두 태사공에게로 수집되었다.
太史公仍父子相続纂其職. 曰:「於戯! 餘維先人嘗掌斯事, 顕於唐虞, 至於周, 複典之, 故司馬氏世主天官. 至於餘乎, 欽念哉! 欽念哉!」
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식. 왈 ‘어희! 여유선인상장사사 현어당우 지어주 복전지 고사마씨세주천관. 지어여호 흠념재! 흡념재!’
태사공은 부자가 대를 이어 그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일찍이 아버지께서는 ‘오호라! 내 선조께서 일찍부터 이 일을 주관하여 당우 때부터 이름이 났고, 주 왕조에서도 다시 그 일을 맡았으니 사마씨는 대대로 천문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일이 우리에까지 왔으니 너는 단단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단단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罔羅天下放失舊聞, 王跡所興, 原始察終, 見盛観衰, 論考之行事, 略推三代, 錄秦漢, 上記軒轅, 下至於茲, 著十二本紀, 既科條之矣.
망라천하방실구문 왕적오흥 원시찰종 견성관쇠 논고지행사 략추삼대 록진한 상기헌원하지어자 저십이본기 기과조지의.
이에 천하에 흩어진 오랜 이야기들을 두루 모아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결론을 지었다. 삼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진․한나라는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헌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편의 본기로 저술되었는데 모두 나름대로의 뼈대를 제시했다.
並時異世, 年差不明, 作十表.
병시이세 연차불명 작십표.
사건은 많은데 발생한 시간이 다르게 적혀 연대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다. 그래서 10편의 표를 지었다.
禮樂損益, 律暦改易, 兵権山川鬼神, 天人之際, 承敝通変, 作八書.
예악손익 율력개역 병권산천귀신 천인지제 승폐통변 작팔서.
예악의 증감, 율력의 개역, 병가의 지혜와 모략, 산천지리의 형세, 귀신에 대한 제사, 하늘과 인간의 관계, 각종 사물의 발전과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서를 지었다.
二十八宿環北辰, 三十輻共一轂, 運行無窮, 輔払股肱之臣配焉, 忠信行道, 以奉主上, 作三十世家.
이십팔수환북진 삼십폭공일곡 운행무궁 보불고굉지신배언 충신행도 이봉주상 작삼십세가.
28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살 30개가 바퀴 안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제왕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의 충성스러운 행동과 주상을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세가에다 담았다.
扶義俶儻, 不令己失時, 立功名於天下, 作七十列傳.
부의숙당 불영기실시 입공명어천하 작칠십열전.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 위해 70편의 열전을 남긴다.
凡百三十篇, 五十二萬六千五百字, 為太史公書. 序略, 以拾遺補蓺, 成一家之言, 厥協六経異傳, 整斉百家雑語, 蔵之名山, 副在京師, 俟後世聖人君子. 第七十.
범백삼십편 오십이만육천오백자 위태사공서. 서략 이습유보예 성일가지언 궐협육경이전 정제뱍가잡어 장지명산 부재경사 사후세성인군자. 제칠십.
이렇게 해서 총 130편에 52만 6,500자에 『태사공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간략한 서문을 통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빠진 곳을 보충하여 나름의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6경의 다양한 해석을 취하고, 제자백가의 서로 다른 학설도 절충했다. 그리하여 정본은 명산에 감추어두고, 부본은 서울에 남겨 나중에 성인군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열전의 마지막 편인 제70 「태사공자서」다.
太史公曰:餘述歴黃帝以來至太初而訖, 百三十篇
태사공왈 여술역황제이래지태초이흘 백삼십편.
나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고 서술하였으니 모두 130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