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遊俠列傳
(遊俠列傳)
<사마천의 서문>
韓子曰:「儒以文亂法, 而俠以武犯禁.」二者皆譏, 而學士多稱於世雲. 至如以術取宰相卿大夫, 輔翼其世主, 功名倶著於春秋, 固無可言者. 及若季次、原憲, 閭巷人也, 読書懐獨行君子之徳, 義不苟合當世, 當世亦笑之. 故季次、原憲終身空室蓬戸, 褐衣疏食不厭.
한자왈 ‘유이문란법 이협이무범금’ 이자개기 이학사다칭어세운. 지여이술취재상경대부 보익기세주 공명구저어춘추 고무가언자. 급약계차 원헌 여항인야 독거회독행군자지덕 의불가합당세 당세역소지. 고계차 원헌종신공실봉호 갈의소식불염.
한비(韓非)는 ‘유학자들은 유가 경전으로 법으로 어지럽히고, 유협들은 무력으로 금지된 일을 어긴다.’고 하여 둘 모두를 비난했지만 배운 선비들은 세상의 칭찬을 많이 받는다. 법술로써 재상, 경, 대부의 지위를 얻고, 그 당시의 군주를 보좌하여 공명이 춘추에 기록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계차(季次), 원헌(原憲)은 누추한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책을 읽고 군자의 덕을 외롭게 행하여 그 뜻이 당시에는 맞지 않아 비웃음을 당했다. 그래서 계차와 원헌은 평생을 기꺼이 쑥대로 엮은 집에서 다 헤진 옷을 입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
死而已四百餘年, 而弟子志之不倦. 今遊俠, 其行雖不軌於正義, 然其言必信, 其行必果, 已諾必誠, 不愛其軀, 赴士之阨困, 既已存亡死生矣, 而不矜其能, 羞伐其徳, 蓋亦有足多者焉.
사이이사백여년 이제자지지불권. 금유협 기행수불궤어정의 연기언필신 기행필과 이락필성 불애기구 부사지야곤 기이존망사생의 이불긍기능 수벌기덕 개역유족다자언.
그들이 죽은 지 이미 4백년이 넘어 지났지만 제자들은 싫증내지 않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의 유협(游俠)들은 그 행위가 반드시 정의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 말은 반드시 믿음이 있었고, 그 행동은 과감했으며,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했으며,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의 고난에 뛰어들 때에는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삼았다. 아마 이 밖에도 찬미할 점이 많을 것이다.
且緩急, 人之所時有也.
차완급 인지소시유야.
완급조절은 인간 삶의 때에 달린 문제다.
太史公曰:昔者虞舜窘於井廩, 伊尹負於鼎俎, 傅説匿於傅険, 呂尚困於棘津, 夷吾桎梏, 百里飯牛, 仲尼畏匡, 菜色陳、蔡.
태사공왈 석자우군천어정름 이윤부어정조 전설닉어부험 여상곤어극진 이오질곡 백리반우 중니외광 채색진 채.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 순(舜)은 우물을 파다가 묻힐 뻔했고, 이윤(伊尹)은 솥과 도마를 짊어지고 다녔으며, 부열(傅說)은 부험(傅險)이라는 곳에서 숨어 산 적이 있고, 여상(呂尙)은 극진(棘津)에 살며 곤궁을 겪었다. 관중(管仲)은 족쇄와 수갑을 찬 적이 있고, 백리해(百里奚)는 소를 치기도 했으며, 공자는 광(匡)에서 협박을 당했고, 진(陳), 채(蔡)에서 굶주린 바가 있다.
此皆學士所謂有道仁人也, 猶然遭此菑, 況以中材而渉亂世之末流乎? 其遇害何可勝道哉!
차개학사소위유도인인야 유연조차치 황이중재이섭란세지말유호? 기우해하가승도재!
그들은 모두 학자들이 말하는 덕망 있고 어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이러한 재난을 면하지 못했건만 하물며 평범한 재능으로 난세의 끝자락을 건너려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들이 겪은 피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鄙人有言曰:「何知仁義, 已饗其利者為有徳.」故伯夷醜周, 餓死首陽山, 而文武不以其故貶王;蹠、蹻暴戻, 其徒誦義無窮. 由此観之, 「竊鈎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 非虛言也.
비인우언왈 ‘하지인의 이향기리자위유덕’ 고백이추주 아사수양산 이문무불이기고폄왕: 척 교폭리 기사송의무궁. 유차관지 ‘절규자주 절국자후 후지문인의존’ 비허언야.
저자거리 사람들이 ‘왜 인의를 알아야 하는가? 이익을 누리게 해주면 덕이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한다. 그래서 백이(伯夷)가 주(周)를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지만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이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도척(盜跖), 장교(莊蹻)는 포악했으나 그 일당들은 그들의 의기(義氣)를 한없이 칭송했다. 이렇게 보면 ‘허리띠 갈고리를 훔친 자는 사형 당하고, 나라의 권력을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집에도 인의가 있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다.
今拘學或抱咫尺之義, 久孤於世, 豈若卑論儕俗, 與世沈浮而取栄名哉! 而布衣之徒, 設取予然諾, 千里誦義, 為死不顧世, 此亦有所長, 非苟而已也.
금구학혹포지척지의 구고어세 기약비론제속 여세침부이취영명재! 이포의지도 설취여연락천리송위 위사불고세 차역유소장 비국이이야.
지금 배운 것에 얽매이거나 보잘 것 없는 의리를 끌어안고 사는 세상과 오래 고립되어 사는 것이 어찌 세상과 더불어 부침하며 명성을 얻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故士窮窘而得委命, 此豈非人之所謂賢豪閒者邪?
고사궁군이득위명 차기비인지소위현호간자야?
고로 곤궁함을 천운으로 알고 살면 현자와 호걸들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삶이 아니지 않은가?
誠使郷曲之俠, 予季次、原憲比権量力, 效功於當世, 不同日而論矣. 要以功見言信, 俠客之義又曷可少哉! 성리향곡지협 여계차 원헌비권양력 효공어당세 부동일이논의. 요이공견언신 협갹지의우갈가소재!
마을의 유협들을 계차나 원헌의 역량에 비교한다면 지금 세상에 미치는 공은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이 드러내는 신뢰가 어찌 사소하다고 할 것인가?
古布衣之俠, 靡得而聞已. 近世延陵、孟嘗、春申、平原、信陵之徒, 皆因王者親屬, 藉於有土卿相之富厚, 招天下賢者, 顕名諸侯, 不可謂不賢者矣. 比如順風而呼, 聲非加疾, 其埶激也.
고포의지협 미득이문이. 근세연릉 먕상 춘신 평원 시릉지도 개인왕자친속 자어유토경상지부후 초천하현자 현명제후 불가위불현자의. 차여순풍이호 성비가질 기예격야.
옛날의 평민 협객들에 대해서는 얻어 들은 바가 없다. 근세의 연릉(延陵), 맹상(孟嘗), 춘신(春申), 평원(平原), 신릉(信陵) 같은 사람들은 모두 왕의 친족들로 땅과 지위의 부유함을 가지고 천하의 유능한 자들을 불러 모아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드러낸 것이니 현명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바람 소리에 비유할 수 있는데 소리만 문제 아니라 그 기세도 중요한 것이다.(영향력은 컸다)
至如閭巷之俠, 脩行砥名, 聲施於天下, 莫不稱賢, 是為難耳. 然儒、墨皆排擯不載. 自秦以前, 匹夫之俠, 湮滅不見, 餘甚恨之.
지여여항지협 수행저명 성시어천라 막불칭현 시위난이. 연유 묵개배빈불재. 자진이전 필부지협 연멸불견 여심한지.
반면 은둔거사들을 보자면 명성이나 영향력이 크나 현자라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이는 어려운 일이라 그렇다. 그래서 유가(儒家), 묵가(墨家)에서는 이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진(秦) 이전의 민간 협객들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니 나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럽다.
以餘所聞, 漢興有朱家、田仲、王公、劇孟、郭解之徒, 雖時扞當世之文罔, 然其私義廉絜退譲, 有足稱者. 名不虛立, 士不虛附. 至如朋黨宗彊比周, 設財役貧, 豪暴侵淩孤弱, 恣欲自快, 遊俠亦醜之. 餘悲世俗不察其意, 而猥以朱家、郭解等令與暴豪之徒同類而共笑之也.
이여소문 한흥유주가 전중 왕공 극맹 곽해지도 수시한당세지문망 연기사의염결퇴양 유족칭자. 명불허립 사불허부. 지여붕당종강비주 설재역빈 호폭침릉고약 자욕자쾌 유협역추지. 여비세속불찰기의 이외이주가 곽해등령여폭호지도동류이공소지야.
내가 들은 바로는 한(漢)이 일어나고 주가(朱家), 전중(田仲), 왕공(王公), 극맹(劇孟), 곽해(郭解) 등이 있었다. 때때로 당시의 법조문에 맞서기도 했지만 그 개인적인 의리와 청렴함 그리고 겸손은 현자로 칭함받기에 충분하다. 명성은 거저 생기는게 아니고, 사람들이 선비를 그저 따르는 것이 아니다. 패거리를 짓고 힘으로 결탁하여 재산을 모으고 가난한 사람을 부리며, 폭력으로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유협들은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도 외람스럽게도 주가, 곽해 등을 탐욕이나 부리는 치들과 함께 취급하며 모두 비웃고 있다.
(朱家)
<주가>
魯朱家者, 與高祖同時. 魯人皆以儒教, 而朱家用俠聞. 所蔵活豪士以百數, 其餘庸人不可勝言. 然終不伐其能, 歆其徳, 諸所嘗施, 唯恐見之. 振人不贍, 先従貧賎始. 家無餘財, 衣不完采, 食不重味, 乗不過軥牛.
노주가자 여고조동시. 노인개이유교 이주가용협문. 소장활호사이백수 기여용인불가승언. 연종불벌기능 흠기덕 제소상시 유공견지. 진인불섬 선종빈천시. 가무여재 의불완채 식불종미 승불과구우.
노(魯)나라의 주가(朱家)는 한 고조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유가를 배울 때 주가는 협객으로 이름을 냈으니 숨겨준 호걸들이 100여 명이었고 그 나머지 보통 사람들은 말로 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 않았고 자신의 덕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베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 했다. 넉넉지 못한 사람을 구제할 때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부터 시작했다. 집에 남아도는 재물은 없었고, 옷은 무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음식은 두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고, 타는 것도 소달구지가 전부였다.
専趨人之急, 甚己之私. 既陰脫季布將軍之阨, 及布尊貴, 終身不見也. 自関以東, 莫不延頚願交焉.
전추인지급 심기지사. 기음탈계포장군지애 급포존귀 종신불견야. 자관이동 막불연경원교언.
오로지 남이 급할 때 달려가는데 자기 일보다 더 심각하게 여겼다. 일찍이 곤경에 빠진 계포(季布) 장군을 몰래 구해주었는데, 계포가 나중에 귀하신 몸이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계포를 만나지 않았다. 함곡관 동쪽 사람들로서 그와 사귀려고 목을 길게 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전중, 극맹 외)
<전중, 극맹 등>
楚田仲以俠聞, 喜剣, 父事朱家, 自以為行弗及.
초전중이협문 희검 부사주가 자이위행불급.
초(楚)나라에서는 전중(田仲)이 유협으로 이름이 났는데 검을 좋아하고 주가를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스스로 (주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田仲已死, 而雒陽有劇孟. 周人以商賈為資, 而劇孟以任俠顕諸侯. 呉楚反時, 條侯為太尉, 乗傳車將至河南, 得劇孟, 喜曰:「呉楚挙大事而不求孟, 吾知其無能為已矣.」天下騒動, 宰相得之若得一敵國雲. 劇孟行大類朱家, 而好博, 多少年之戯. 然劇孟母死, 自遠方送喪蓋千乗. 及劇孟死, 家無餘十金之財.
전중이사 이낙양유극먕. 주인이상매위자 이극먕이임협현제후. 오초반시 조후위대위 승번거장지하남 득극먕 희왈 ‘오초거대사이불구맹 오지기무능위이의’ 천하소동 대상득지약득일적국운. 극맹행대류주가 이호박 다소년지희. 연극맹모사 자원방송상개천승. 급극맹사 가무여십금지재.
전중이 죽은 뒤로 낙양(洛陽)에 극맹(劇孟)이 있었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장사하는 자질이 있었지만 극맹은 제후들 사이에서 유협을 자처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오(吳), 초(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는 태위(太尉)로서 마차를 타고가다가 하남(河南)에 이르러 극맹을 만나 크게 기뻐하며 ‘오와 초나라가 대사를 일으키면서 극맹을 찾지 않다니 그들의 무능함을 내가 알겠다’라고 했다. 천하가 소란할 때 재상이 극맹을 얻는 것은 적국 하나를 얻는 것과 같았다. 극맹의 행동은 주가와 대체로 비슷했다. 도박을 좋아 했는데 대부분 젊은이들 놀이였다. 극맹의 어머니가 죽자 먼 지방에서 문상하러 온 수레가 천 대에 이르렀다. 극맹이 죽은 뒤 집에는 10금도 안 되는 재산 밖에 없었다.
而符離人王孟亦以俠稱江淮之閒.
이부리인왕맹약이협칭강회지간.
부리(符離) 사람 왕맹(王孟) 역시 유협으로 장강과 회수 사이에 이름을 알렸다.
是時済南瞯氏、陳周庸亦以豪聞, 景帝聞之, 使使盡誅此屬. 其後代諸白、梁韓無辟、陽翟薛兄、陝韓孺紛紛複出焉.
시시제남간씨 진주용역이호문 경제문지 사사진주비속. 기후대제백 양한무벽 양적설형 섬한유분분복출언.
이 무렵 제남(濟南)의 간씨(瞯氏)와 진(陳)의 주용(周庸) 또한 호걸로 이름이 났는데, 경제(景帝)가 이를 듣고는 사람을 보내 이 무리들을 죽였다. 그 뒤 대군(代郡)의 백씨(白氏) 일족, 양(梁)의 한무벽(韓無辟), 양적(陽翟)의 설형(薛兄), 섬(陝)의 한유(韓孺) 등이 잇따라 나타났다.
(郭解)
<곽해>
郭解, 軹人也, 字翁伯, 善相人者許負外孫也. 解父以任俠, 孝文時誅死. 解為人短小精悍, 不飲酒. 少時陰賊, 慨不快意, 身所殺甚衆. 以軀借交報仇, 蔵命作姦剽攻, 不休乃鋳銭掘塚, 固不可勝數.
곽해 지인야 자옹백 선상인자허부외손야. 해주이임협 효문시주사. 해위인간소정한 불음주. 소시음적 개불쾌의 신소살심중, 이구차교복구 장명작간표공 불휴습주전굴총 고불가승수.
곽해(郭解)는 지(軹) 사람으로 자를 옹백(翁伯)이라 했다. 사람의 관상을 잘 보는 허부(許負)의 외손자였다. 곽해의 아버지는 유협으로서 효문제 때 죽임을 당했다. 곽해는 몸집은 작았지만 매우 사나왔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몰래 나쁜 짓을 많이 했고 기분이 나쁘면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많았다. 목숨을 걸고 친구를 위해서 복수했고, 도망친 사람들을 감추어 주었으며 간악한 짓과 강도 짓도서슴지 않았다. 가짜 돈을 주조하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適有天幸, 窘急常得脫, 若遇赦. 及解年長, 更折節為倹, 以徳報怨, 厚施而薄望. 然其自喜為俠益甚. 既已振人之命, 不矜其功, 其陰賊著於心, 卒発於睚眥如故云. 而少年慕其行, 亦輒為報仇, 不使知也.
적유천행 군급상득탈 약우사. 급해장년 경절절위검 이덕보원 후시이박망. 연기자희위협익심. 기이진인지명 불긍기공 기음적저어심 졸발어애자고운. 이소년모기행 역첩위복구 불사지야.
다행히 천운이 좋아 급한 궁지에서도 늘 빠져 나왔고 때로는 사면을 받기도 했다. 장년이 되면서 절제하면서 검소하게 사는 쪽으로 바꾸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고 후하게 베풀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유협적인 행동을 즐겨 한 것은 더 심해졌다. 남의 목숨을 구해주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나 그의 잔혹함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어 갑자기 폭발하면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았다. 젊은이들은 그의 행동을 사모하여 아무도 모르게 보복하였다.
解姊子負解之勢, 與人飲, 使之嚼. 非其任, 彊必潅之. 人怒, 抜刀刺殺解姊子, 亡去. 解姊怒曰:「以翁伯之義, 人殺吾子, 賊不得.」棄其屍於道, 弗葬, 欲以辱解.
해자자부행지세 여인음 사지작. 비기임 강필관지. 인노발고자살해자자 망거. 해자노왈 ;이옹백지의 인살오사 적부득‘ 기기시어도 불장 욕이진해.
곽해의 누나의 아들이 곽해의 위세를 등에 업고 누군가와 술을 마시다가 그에게 잔을 비우게 했다. 그가 더는 버티지 못했지만 억지로 술을 따라 주었다. 그 사람이 화가 나서 칼을 뽑아 곽해의 조카를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 곽해의 누이가 화를 내며 ‘누군가 내 아들을 죽였는데 옹백이 의협심을 가지고도 범인을 잡지 못하는구나’라며 아들의 시체를 길에 내버려두고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데, 곽해를 모욕주려는 것이었다.
解使人微知賊処. 賊窘自帰, 具以実告解. 解曰:「公殺之固當, 吾児不直.」遂去其賊, 罪其姊子, 乃収而葬之. 諸公聞之, 皆多解之義, 益附焉.
해사인징지적처. 적군자귀 구이실고해. 해왈 ‘공살지고당 오어불직’ 수거기적 죄기자자 내수이장지. 제공문지 개다해지의 익부언.
곽해는 사람을 시켜 범인의 거처를 알아내게 했다. 범인은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 돌아와 사실대로 모든 것을 곽해에게 알렸다. 곽해는 ‘그대가 조카를 죽인 것이 당연했군. 내 조카가 옳지 못했어’라며 그 범인을 보냈다. 조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곽해의 의협심을 칭찬하면서 더욱 그를 따르게 되었다.
解出入, 人皆避之. 有一人獨箕倨視之, 解遣人問其名姓. 客欲殺之. 解曰:「居邑屋至不見敬, 是吾徳不脩也, 彼何罪!」乃陰屬尉史曰:「是人, 吾所急也, 至踐更時脫之.」毎至踐更, 數過, 吏弗求. 怪之, 問其故, 乃解使脫之. 箕踞者乃肉袒謝罪. 少年聞之, 愈益慕解之行.
해출입 인개피지. 유일인독기거시지 해견인문기명성. 객욕살지. 해왈 ‘거읍옥지불견경 시오부덕불수애 피하죄’ 내음속위사왈 ‘시인 오소급야 지천병시탈지’ 매지천경 수과 사불구. 괴지 문기고 내해사탈지. 기거자내육단사죄, 소년문지 유익모해지행.
곽해가 오가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유독 한 사람이 거만하게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곽해는 사람을 보내 그의 이름을 물어보게 했다. 보낸 이가 그를 죽이려 하자 곽해는 ‘마을에 살면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덕이 모자라서 그렇지 그가 무슨 죄가 있겠소’라 하고는 바로 몰래 위사(尉史)에게 ‘이 사람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수자리를 교체할 때 빼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매번 수자리가 바뀔 때 몇 번 차례가 왔지만 관리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곽해가 그를 빼주었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던 자는 웃통을 벗고 사죄했다. 젊은이들이 이를 듣고는 더 많이 곽해의 행동을 사모했다.
雒陽人有相仇者, 邑中賢豪居閒者以十數, 終不聴. 客乃見郭解. 解夜見仇家, 仇家曲聴解.
낙양인유상구자 읍중현호거간자이십수 종불청. 객냐견곽해. 해야견구가 구가곡청해.
낙양 사람 중에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두 집안이 있었다. 성 안의 현자와 호걸들이 이들을 화해시키려고 열 명 이상 중재에 나섰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곽해의 빈객이 곽해를 만나 그들의 화해 중재를 권유했다. 이에 곽해는 밤중에 원수 사이인 두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곽해의 완곡한 말을 듣고는 화해를 받아들였다.
解乃謂仇家曰:「吾聞雒陽諸公在此閒, 多不聴者. 今子幸而聴解, 解柰何乃従他県奪人邑中賢大夫権乎!」乃夜去, 不使人知, 曰:「且無用, (待我)待我去, 令雒陽豪居其閒, 乃聴之.」
해내위구가왈 ‘오문막양제공재차간 다불청자. 금자행이청해 햐냐하냐종타현탈인읍중현댜부권호’ 내야가 불사인지 왈 ‘차무용 대아거 영낙양호거기간 내청지’
이때 곽해는 ‘제가 듣기로 낙양의 여러 인사들이 나서서 당신들을 화해시키고자 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제 나의 말을 듣고 화해하시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 곽해는 다른 고을에서 온 자로서 어찌 이 고을 현사들의 권위를 뺏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그날 밤 몰래 그곳을 떠났다. 또 그들에게 ‘당분간 제가 말한 대로 하지 마시고 제가 떠난 다음 낙양 인사들에게 중재에 나서게 하여 그들의 말을 따랐다고 하십시오’라고 했다.
解執恭敬, 不敢乗車入其県廷. 之旁郡國, 為人請求事, 事可出, 出之;不可者, 各厭其意, 然後乃敢嘗酒食. 諸公以故厳重之, 爭為用. 邑中少年及旁近県賢豪, 夜半過門常十餘車, 請得解客舎養之.
해집공경 불감승더입기현정. 지방군국 위인청구사 사가출 출지 불가자 각염기의 연후냐감상주식. 제겅이고엄중지 쟁위용. 읍중소년급방근현현호 여반과문상십여거 청득해객사양지.
곽해는 겸손하여 함부로 수레를 타고 현청에 가는 일이 없었다. 가까운 군국(郡國)의 일에도 들고나는 이치에 맞았고 드러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그일을 잘 풀었고, 드러내지 않을 일이면 그저 술 한 잔 받는 걸로 끝냈다. 귀족들이 철저히 따질 일이 있으면 해를 찾았다. 마을의 젊은이와 이웃 현의 현자, 호걸들이 밤이면 그를 찾아왔는데 수레가 열 대가 넘었다. 곽해를 자기들 집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及徙豪富茂陵也, 解家貧, 不中訾, 吏恐, 不敢不徙. 衛將軍為言:「郭解家貧不中徙.」上曰:「布衣権至使將軍為言, 此其家不貧.」解家遂徙.
급사호부무릉야 햐가빈 불중자 리공 불감불사. 위장군위언 ‘곽해가빈불중사’ 상왈“ ‘포의권지사장군위언 차기가불빈’ 해가수사.
[무제(武帝)가] 호족들과 부호들을 무릉(茂陵)으로 이주시킬 무렵이었다. 곽해의 집은 가난해서 등급에 해당하지 않았지만 관리는 겁을 먹고 감히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위장군 위청(衛靑) 장군이 ‘곽해의 집은 빈천하여 이주시키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은 ‘평민 주제로 장군이 관심 갖고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 집안이 빈천하지 않은 것이오’라 하니 곽해의 집은 마침내 이주하게 되었다.
諸公送者出千餘萬. 軹人楊季主子為県掾, 挙徙解. 解兄子斷楊掾頭. 由此楊氏與郭氏為仇.
제공송자출천여금. 지인양계주자위현연 거사해. 해형자단영연두. 유차양씨여곽씨위구.
사람들이 (곽해를) 환송하기 위해서 내 놓은 돈이 천만 전이 넘었다. 지(軹) 사람인 양계주(楊季主)의 아들이 현의 연(掾:아전)이란 하급 관리로서 곽해의 이주를 거론한 자였다. 곽해의 형의 아들이 이 양가의 목을 잘랐다. 이로써 양씨와 곽씨는 원수가 되었다.
解入関, 関中賢豪知與不知, 聞其聲, 爭交驩解. 解為人短小, 不飲酒, 出未嘗有騎.
해입관 관중현호지여부지 문기성 쟝교환해. 해위인단소 불음주 출미상유기.
곽해가 관중(關中)에 오자 현자, 호걸들은 그를 알든 모르든 그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곽해와 사귀려 했다. 곽해는 체구가 왜소했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외출할 때에 말을 탄 적이 없었다.
已又殺楊季主. 楊季主家上書, 人又殺之闕下. 上聞, 乃下吏捕解. 解亡, 置其母家室夏陽, 身至臨晉.
이우살영계주. 양계주가상서 인우살지궐하. 상문 내하리포해 치기모가실하양 신지임진.
얼마 뒤 양계주마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양계주 집안에서 글을 올리자 누군가 궁궐에서 (글을 올린) 그 사람을 죽였다. 주상이 이를 듣고는 관리를 시켜 곽해를 체포하게 했다. 곽해는 도망을 쳐서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을 하양(夏陽)에 두고 자신은 임진(臨晉)으로 갔다.
臨晉籍少公素不知解, 解冒, 因求出関. 籍少公已出解, 解転入太原, 所過輒告主人家. 吏逐之, 跡至籍少公. 少公自殺, 口絶.
임진적소공소불해지 해모 인구풀관. 적소공이출해 해전입태원 소과첩고주인가. 리축지 적지적소공. 소공자살 구절.
임진의 적소공(籍少公)은 본래 곽해를 알지 못했지만 곽해가 가명을 대며 임진관을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적소공은 곽해를 내보내주었고, 곽해는 방향을 돌려 태원(太原)으로 들어갔는데 지나는 곳의 집 주인을 알렸다. 관리들이 그를 추적하다 적소공에게 이르렀다. 적소공은 자살로 입을 막았다.
久之, 乃得解. 窮治所犯, 為解所殺, 皆在赦前. 軹有儒生侍使者坐, 客譽郭解, 生曰:「郭解専以姦犯公法, 何謂賢!」解客聞, 殺此生, 斷其舌. 吏以此責解, 解実不知殺者. 殺者亦竟絶, 莫知為誰. 吏奏解無罪. 禦史大夫公孫弘議曰:「解布衣為任俠行権, 以睚眥殺人, 解雖弗知, 此罪甚於解殺之. 當大逆無道.」遂族郭解翁伯.
구지 내득해. 궁치소범 위햐소살 개재사전. 지유유샹시사자와 객예곽햐 생왈 ‘곽해전이간범공법 하위현’ 해객문 살차생 단기설. 리이차책해 해실부지살자. 살자역경절 막지위수. 이진해무죄. 어사댜부공손홍의왈 ‘해포의위임협행권 이애자살인 해수부지 차죄심어해살지. 당대역무도’ 수족곽해옹백‘
오래 지나 곽해는 체포되었다. 저지른 일에 대해 끝까지 추궁했으나 곽해의 살인이 모두 사면 이전이었다. 지 땅의 한 유생이 관리와 함께 앉아 있다가 (곽해의) 객이 곽해를 칭찬하자 유생은 ‘곽해는 그저 국법을 어긴 자이거늘 어찌 현명하다는 것이오’라 했다. 곽해의 객이 이 말을 듣고는 이 유생을 죽이고 혀를 잘랐다. 관리는 이것으로 곽해를 문책했으나 곽해는 정말 살인자를 알지 못했다. 살인자 역시 종적을 감추었고 결국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관리는 곽해의 무죄를 보고했다. 공손홍(公孫弘)은 ‘곽해는 평민으로 유협을 자처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노려보기만 해도 사람을 죽입니다. 곽해가 (살인자를) 모른다고 하지만 이 죄는 곽해가 사람을 죽인 것보다 더 심하니 대역무도입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곽해 옹백의 일족을 없앴다.
<곽해 이후의 유협들>
自是之後, 為俠者極衆, 敖而無足數者.
자시지후 위협자극중 오이무족수자.
이후로도 유협을 자처하는 자들이 아주 많았으나 오만하여 유협이라 꼽기에는 부족했다.
然関中長安樊仲子, 槐里趙王孫, 長陵高公子, 西河郭公仲, 太原鹵公孺, 臨淮児長卿, 東陽田君孺, 雖為俠而逡逡有退譲君子之風.
연관중장안번중자 괴리조왕손 장릉고공자 서하곽공중 태원노공유 임회예장경 동양전군유 수위협이준준유퇴영군자지풍.
그러나 그 중에서 장안(長安)의 번중자(樊仲子), 괴리(槐里)의 조왕손(趙王孫), 장릉(長陵)의 고공자(高公子), 서하(西河)의 곽공중(郭公仲), 태원(太原)의 노공유(鹵公孺), 임회(臨淮)의 예장경(兒長卿), 동양(東陽)의 전군유(田君孺)가 유협 노릇을 했지만 신중하고 겸손한 군자의 덕을 지니고 있었다.
至若北道姚氏, 西道諸杜, 南道仇景, 東道趙他、羽公子, 南陽趙調之徒, 此盜蹠居民閒者耳, 曷足道哉! 此乃郷者朱家之羞也.
지약북도요씨 서도제두 남도구경 동도조타주지도 차도척거민간자이 갈족도재! 차내향자주가지수야.
반면에 장안 북쪽의 요씨(姚氏), 서쪽 지방의 두씨(杜氏), 남쪽 지방의 구경(仇景), 동쪽의 조타(趙他), 우공자(羽公子), 남양(南陽)의 조조(趙調)의 무리들은 도적으로써 민간에 섞여 살았을 뿐이니 어찌 거론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옛날 주가가 부끄럽게 여기던 자들이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吾視郭解, 狀貌不及中人, 言語不足採者. 然天下無賢與不肖, 知與不知, 皆慕其聲, 言俠者皆引以為名. 諺曰:「人貌栄名, 豈有既乎!」於戯, 惜哉!
태사공왈 오시곽해 장모불급중인 언어부족채자. 연천하무현여불초 지여부지 개모기성 언협자갸인이위명. 언왈 ‘인모영명 기유기호’ 어희 석재!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곽해(郭解)를 보았는데 모습은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했고, 말솜씨도 본받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천하에 어질거나 불초하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모두 그 명성을 흠모했고, 협의를 말하는 자는 모두 그의 이름을 끌어들였다. 속담에 ‘사람들이 흠모하는 빛나는 명성이 어찌 다하는 때가 있으랴’라 했거늘 오호라 애석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