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列傳-廉頗藺相如傳

白頭翁 2019. 3. 10. 16:37


廉頗

 

廉頗者, 趙之良將也. 趙恵文王十六年, 廉頗為趙將伐斉, 大破之, 取陽晉, 拝為上卿, 以勇気聞於諸侯.

염파자 조지양장야. 조혜문왕십육년 염파위조장벌제 대파지 취양진 배위상경이용기문어제후.

 

염파(廉頗)는 조()나라의 훌륭한 장수이다. () 혜문왕(惠文王) 16, 염파는 조나라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양진(陽晉)을 취함으로써 상경(上卿)이 되니 그 용기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藺相如者, 趙人也, 為趙宦者令繆賢舎人.

인상여자 조인애 위조환자영무현사인.

 

인상여(藺相如)도 조나라 사람으로 조나라의 환자령(宦者令) 무현(繆賢)의 사인(舍人)이었다.

 

趙恵文王時, 得楚和氏璧. 秦昭王聞之, 使人遺趙王書, 願以十五城請易璧. 趙王與大將軍廉頗諸大臣謀欲予秦, 秦城恐不可得, 徒見欺欲勿予, 即患秦兵之來. 計未定, 求人可使報秦者, 未得. 宦者令繆賢曰:「臣舎人藺相如可使.王問:「何以知之?」対曰

조혜문왕시 득초화씨벽. 진소왕문지 사인유조왕서 원이십오성청역벽. 조왕여대장군염파제대신모 : 욕여진 진성공불가득 도견사 ; 욕물여 즉환진구지래. 계미정 구인가사보진자 미득 환자영무현왈 : ‘신사인인상여가사왕문 하이지지?’ 대왈:

 

조 혜문왕 때 초나라의 화씨벽을 얻었다. 진 소왕이 그 소식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조왕에게 편지를 보내 15개의 성으로 벽과 바꾸길 원한다고 했다. 조왕은 대장군 염파와 여러 대신들과 상의했다. 진나라에 주자니 진나라의 성은 얻지 못하고 그냥 속을 것 같고, 주지 않자니 진나라의 군대가 쳐들어 올 것이 걱정이 되어 대책을 결정하지 못했다. 사람을 찾아 진나라로 보내려고 했으나 사람을 찾지 못했다. 환자령 무현이 신의 사인인 인상여라면 보낼 만합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것을 어찌 아는가?’라고 물었다. 무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臣嘗有罪, 竊計欲亡走燕, 臣舎人相如止臣, :『君何以知燕王?』臣語曰:『臣嘗従大王與燕王會境上, 燕王私握臣手, 願結友. 以此知之, 故欲往.相如謂臣曰:『夫趙彊而燕弱, 而君幸於趙王, 故燕王欲結於君. 今君乃亡趙走燕, 燕畏趙, 其勢必不敢留君, 而束君帰趙矣. 君不如肉袒伏斧質請罪, 則幸得脫矣.臣従其計, 大王亦幸赦臣. 臣竊以為其人勇士, 有智謀, 宜可使.

신상유죄 절계망주연 신사인상여지신 왈 군하이지연왕?” 신어왈 신상종대왕여연왕회경상 연왕사악신수 왈 원결우- 이차지지 고욕왕상여위신왈 부조강이연약 이군행어조왕 고연왕욕결어군. 금군내망조주연 연외조 기세필불감유군 이속군귀조의. 군불여육단복부질청죄 즉행득탈의신종기계 대왕역행사진. 신절이위기인용사 유지모 의가사

 

신이 일찍이 (왕께) 죄를 지어 몰래 연()나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신의 사인 인상여가 신을 말리며 군께서 어떻게 연왕을 알게 되었습니까?”라고 묻기에 신은 전에 대왕을 수행하여 연왕과의 변경 회의에 갔는데 연왕이 조용히 내 손을 쥐면서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 알게 되어서 가려고 한다.”라고 했습니다. 인상여는 신에게 대저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그리고 군께서는 조왕의 총애를 받고 계시기에 연왕이 군과 사귀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 조나라에서 도망쳐 연나라로 간다면 형세상 군을 감히 머물러 있게 하지 못하고 군을 묶어 조나라로 돌려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군께서는 웃통을 벗고 형틀을 짊어진 채 (왕께) 죄를 청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요행히 죄를 면할지도 모르지요.”라고 했습니다. 신이 그 생각을 따랐고 대왕께도 신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 사람이 용기가 있고 지혜도 있어 보낼 만합니다.’

 

於是王召見, 問藺相如曰:「秦王以十五城請易寡人之璧, 可予不?」相如曰:「秦彊而趙弱, 不可不許.王曰:「取吾璧, 不予我城, 柰何?」相如曰:「秦以城求璧而趙不許, 曲在趙. 趙予璧而秦不予趙城, 曲在秦. 均之二策, 寧許以負秦曲.

어시왕소견 문인상여왈 진왕이오십성청역과인지벽 가여불?’ 상여왈 진강이조약 불가불허왕왈 취오벽 불모아성 내하?’ 상여왈 진이성구벽이조불허 곡재조. 조여벽이진불여조성 곡재진. 균지이책 영허이부진곡

 

이에 왕이 불러 인상여에게 진왕이 15개의 성으로 과인의 벽옥과 바꾸길 원하니 주어야 하오 아니오?’라고 물었다. 인상여는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내 벽옥만 갖고 성은 주지 않으면 어찌 하오?’라고 했다. 상여는 진나라가 성을 가지고 벽옥을 얻으려는데 조나라가 주지 않으면 잘못은 조나라에 있습니다. 조나라가 벽옥을 주었는데 진나라가 조나라에게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게 있습니다. 두 대책을 비교해보면 받아들여서 잘못의 책임을 진이 지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라고 했다.

 

王曰:「誰可使者?」相如曰:「王必無人, 臣願奉璧往使. 城入趙而璧留秦城不入, 臣請完璧帰趙.趙王於是遂遣相如奉璧西入秦.

왕왈 수가사자상여왈 왕필무인 신원봉옥왕사. 성입조이벽유진 ; 성불입 신청완벽귀조조왈어시수견상여봉뱍서입진.

 

왕이 누구를 사신으로 보낼 수 있겠소?’라고 하자 상여는 왕께 사람이 없다면 신이 벽옥을 가지고 사신으로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로 들어오면 벽옥을 진나라에 두고, 성이 들어오지 않으면 신이 벽옥을 온전하게 조나라로 되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조왕이 이에 상여에게 벽옥을 들고 서쪽 진나라로 들어가게 했다.

 

秦王坐章台見相如, 相如奉璧奏秦王. 秦王大喜, 傳以示美人及左右, 左右皆呼萬歳. 相如視秦王無意償趙城, 乃前曰:「璧有瑕, 請指示王.

진왕좌장대견상여 상여봉벽진진왕. 진왕대희 전이시미인급좌우 좌우개호만세. 상여시진왕무의상조성 내전왈 벽유하 청지시왕

 

진왕은 장대(章臺)에 앉아 상여를 만났다. 상여가 벽옥을 받들어 진왕에게 올렸다. 진왕은 몹시 기뻐하며 미인과 좌우 신하들에게 돌려 보게 했고, 모두가 만세를 외쳤다. 상여가 보니 진왕은 성을 조나라에 줄 생각이 없었다. 이에 앞으로 나아가 벽옥에 하자(瑕疵)가 있어 왕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王授璧, 相如因持璧卻立, 倚柱, 怒髪上衝冠, 謂秦王曰

왕수벽 상여인지벽각립 의주 노발상충관 위진왕왈:

 

진왕이 벽옥을 주자 상여는 벽옥을 쥔 채 물러나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관을 들썩거리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진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大王欲得璧, 使人発書至趙王, 趙王悉召群臣議, 皆曰秦貪, 負其彊, 以空言求璧, 償城恐不可得. 議不欲予秦璧. 臣以為布衣之交尚不相欺, 況大國乎! 且以一璧之故逆彊秦之驩, 不可. 於是趙王乃斎戒五日, 使臣奉璧, 拝送書於庭. 何者厳大國之威以修敬也. 今臣至, 大王見臣列観, 禮節甚倨得璧, 傳之美人, 以戯弄臣. 臣観大王無意償趙王城邑, 故臣複取璧. 大王必欲急臣, 臣頭今與璧倶砕於柱矣!

대왕욕득벽 사인발서지조왕 조왕실소군신의 개왈 진탐 부기강 이공언구벽 상성공불가득의불욕여진벽. 신이취포의지교상불상기 황대국야! 차이벽지고역강진지환 불가. 어시조왕내제계오일 사신봉벽 배송거어정. 하자? 엄대국지위이수경야. 금신지 대왕견신열관 예절심가 득벽 전지미인 이희롱신. 신관대왕무의상조왕성읍 고신복취벽. 대왕필욕급신 신두금여벽구쇄어주의!’

 

대왕께서 벽옥을 얻고자 하시어 사신을 통해 조왕께 서신을 보내셨고, 조왕께서는 신하들을 모두 모아 상의하니 모두들 진나라는 욕심이 많고 그 힘만 믿고 빈말로 벽옥을 구한다는 것이니 보상으로 주겠다는 성은 얻을 수 없다.”라며 진나라에게 벽옥을 주지 말자고 했습니다. 신은 보통 사람들의 사귐에서도 서로를 속이지 않거늘 하물며 큰 나라가?라며 벽옥 하나 때문에 강한 진나라의 기쁨을 거스를 수 없다며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조왕께서는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시고 신에게 벽옥을 받들게 하고 삼가 국서를 진나라의 조정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큰 나라의 위엄을 생각하여 경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지금 신이 이르자 대왕께서는 신을 궁전 한편에서 접견하시면서 예절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벽옥을 받자 미인들에게 돌려보게 하며 신을 희롱하셨습니다. 신이 보니 대왕께서는 조왕께 성읍으로 보상할 뜻이 없기에 신이 다시 벽옥을 돌려받은 것입니다. 대왕께서 기어코 신을 핍박하시겠다면 신은 벽옥과 함께 머리를 기둥에 박아 박살을 낼 것입니다!”

 

相如持其璧睨柱, 欲以撃柱. 秦王恐其破璧, 乃辭謝固請, 召有司案図, 指従此以往十五都予趙. 相如度秦王特以詐詳為予趙城, 実不可得, 乃謂秦王曰:「和氏璧, 天下所共傳寶也, 趙王恐, 不敢不獻. 趙王送璧時, 斎戒五日, 今大王亦宜斎戒五日, 設九賓於廷, 臣乃敢上璧.

상여지기벽예주 욕이격주. 진왕공기파벽 급사사고청 소유사안도 지종차이왕오십도여조. 상여도진왕특이사상위여조성 실불가득 급위진왕왈 화씨벽 천하소공전보야 조왕공 불감불희. 조왕송벽시 재계오일 금대왕역의제계오일 설수빈어정 신급감상벽

 

상여가 벽옥을 쥐고 기둥을 노려보더니 기둥에 부딪치려 했다. 진왕은 벽옥이 깨어질까 겁이 나서 거듭 사과하는 한편 담당 관리를 불러 지도를 가지고 오게 해서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15개 성을 조나라에게 주겠다고 했다. 상여는 진왕이 그저 거짓으로 조나라에게 성을 주려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는 진왕에게 화씨벽옥은 천하가 공인하는 보물입니다만 조왕께서 겁이 나서 감히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왕께서 벽옥을 보내시면서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셨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당연히 닷새 동안 목욕재계한 뒤 조정에 구빈(九賓)의 예를 세워 놓으셔야만 신이 벽옥을 바칠 것입니다.‘


* 九賓: 임금 예의 갖추어 맞이해야 점잖은 아홉 손님. (), (), (), (), (), (), (), 대부(), () 이르는 말이다.



秦王度之, 終不可彊奪, 遂許斎五日, 舎相如広成傳. 相如度秦王雖斎, 決負約不償城, 乃使其従者衣褐, 懐其璧, 従徑道亡, 帰璧於趙.

진왕도지 종불가강탈 수허재오일 사상여광성전. 상여도진왕수재 결부약불상성 내사기종자의갈 회기벽 종경도망 귀벽어조.

 

진왕이 생각해보니 강제로는 빼앗을 수 없어서 마침내 닷새 동안의 목욕재계를 받아들이고 인상여를 광성전(廣成傳)에 묵게 했다. 상여는 진왕이 재계를 하더라도 성을 주겠다는 약속은 저버릴 것이라고 판단하여 바로 수행원에게 거친 옷을 입혀 벽옥을 품고 샛길로 도망쳐 벽옥을 조나라로 도로 가져가게 했다.

 

秦王斎五日後, 乃設九賓禮於廷, 引趙使者藺相如. 相如至, 謂秦王曰

진왕재오일후 내설구빈예어정 인조사자인상여. 상여지 위진왕왈:

 

진왕은 닷새 동안 재계한 다음 구빈의 조정에 구빈의 예를 갖추어 조나라의 사신 인상여를 안내했다. 상여가 와서는 진나라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秦自繆公以來二十餘君, 未嘗有堅明約束者也. 臣誠恐見欺於王而負趙, 故令人持璧帰, 閒至趙矣. 且秦彊而趙弱, 大王遣一介之使至趙, 趙立奉璧來. 今以秦之彊而先割十五都予趙, 趙豈敢留璧而得罪於大王乎臣知欺大王之罪當誅, 臣請就湯鑊, 唯大王與群臣孰計議之.

진자목공이래이십여군 미상유견명약속자야. 신성공견기어왕이부조 고영인지벽귀 간지조의. 차진강이조약 대왕견일개지사지조 조립진벽래. 금이진기장이선할오십도여조 조기감유벽이득죄어대왕호? 신지기대앙지죄당주 신청취탕확 유대왕여군신숙계의지

 

진나라는 목공(繆公) 이래 20여 군주들 모두 약속을 분명하게 지킨 적이 없습니다. 신이 왕에게 속아 조나라를 저버릴 것이 정말 두려워 사람을 시켜 벽옥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지금쯤 조나라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리고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니 대왕께서 보잘 것 없는 사신 한 사람만 조나라로 보내도 조나라는 즉각 벽옥을 받들고 나올 것입니다. 지금 강한 진나라가 먼저 성 15개를 떼어 조나라에 준다면 조나라가 어찌 감히 벽옥을 내놓지 않으면서 대왕께 죄를 짓겠습니까? 신이 대왕을 속인 죄 죽어 마땅한 줄 알고 있으니 끓는 솥에라도 들어갈 것입니다. 다만 대왕께서 신하들과 심사숙고 상의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秦王與群臣相視而嘻. 左右或欲引相如去, 秦王因曰:「今殺相如, 終不能得璧也, 而絶秦趙之驩, 不如因而厚遇之, 使帰趙, 趙王豈以一璧之故欺秦邪!

진왕여군신상시이희. 좌우록욕인상여거 진왕인왈 금살상여 종불능득벽야 이절진조지환 불여인이후우지 사귀조 조왕기이일벽지고기진야!’

 

진왕과 신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랐다. 좌우들 중 누구는 상여를 끌어내고자 했지만 진왕은 지금 상여를 죽여도 벽옥은 끝내 얻지 못할 것이고 조나라와 진나라의 좋은 관계만 끊어질 뿐이오. 이참에 잘 대접해서 조나라로 돌려보내느니만 못할 것이오. 조왕이 벽옥 하나 때문에 진나라를 속이기야 하겠소.’라고 했다.

 

卒廷見相如, 畢禮而帰之.

졸정견상여 필예이귀지.

 

이에 인상여를 조정에서 접견하여 예를 잘 차려서 돌려보냈다.

 

相如既帰, 趙王以為賢大夫使不辱於諸侯, 拝相如為上大夫. 秦亦不以城予趙, 趙亦終不予秦璧.

상여기귀 조왕이위현대부사불욕어제후 배상여위상대부. 진역불이성여조 조역종불여진벽.

 

상여가 돌아오자 조왕은 (상여가) 현명하게 제후들 사이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게 했다고 여겨서 상여를 상대부에 임명했다. 진나라는 성을 조나라에 주지 않았고, 조나라 역시 끝내 벽옥을 진나라에 주지 않았다.

 

其後秦伐趙, 抜石城.

기후진벌조 발석겅.

 

그 뒤 진나라는 조나라를 정벌하여 석성(石城)을 빼앗았다.

 

明年, 複攻趙, 殺二萬人.

명년 복공조 살이만인.

 

이듬해,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2만 명을 죽였다.

 

秦王使使者告趙王, 欲與王為好會於西河外澠池. 趙王畏秦, 欲毋行. 廉頗藺相如計曰

진왕사사자고조왕 욕여왕위호회어서하외민지. 조왕외진 욕무행. 염파 인상여계왈:

 

진왕은 사신을 조왕에게 보내 조왕과 서하(西河) 바깥 민지(澠池)에서 평화 회담을 하고 싶다고 알렸다. 조왕은 진나라가 겁이 나서 가지 않으려 했다. 염파와 인상여가 상의하여

 

王不行, 示趙弱且怯也.趙王遂行, 相如従. 廉頗送至境, 與王訣曰:「王行, 度道里會遇之禮畢, , 不過三十日. 三十日不還, 則請立太子為王. 以絶秦望.

왕불행 시조약차겁야조왕수행 상여종. 염파송지경 여왕결왕 왕행 도도리회우지례필 호나 불과삼십일. 삼십일불환 즉청립태자위왕. 이절진망

 

왕께서 가지 않으시면 조나라가 약하고 겁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왕은 결국 떠났고 상여가 수행했다. 염파는 국경까지 전송하여 왕과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의 이번 행차는 거리와 회담을 끝내시고 돌아오기까지를 따져보면 30일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30일이 지나도록 안 돌아오시면 태자를 왕으로 옹립하여 진나라의 기대를 끊도록 해주십시오.’

 

王許之, 遂與秦王會澠池. 秦王飲酒酣, :「寡人竊聞趙王好音, 請奏瑟.趙王鼓瑟.

왕허지 수여진왕회민지. 진왕음주감 왈 과인절문조왕호음 청진금조왕고금.

 

왕은 이를 허락하고 드디어 민지에서 진왕과 만났다. 진왕은 술자리가 무르익자 과인이 가만히 듣자 하니 조왕께서 음악을 좋아한다 하니 거문고를 연주를 청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秦禦史前書曰某年月日, 秦王與趙王會飲, 令趙王鼓瑟.

진어사전서왈 모년월일 진왕여조왕회음 영조왕고금

조왕이 거문고를 연주했다. 진나라의 어사(御史)가 앞으로 나오더니 모년 모월 모일, 진왕께서 조왕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조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명했다.’라고 적었다.

 

 

藺相如前曰:「趙王竊聞秦王善為秦聲, 請奏盆缻秦王, 以相娯樂.

인상여전왈 조왕절문진왕선위진성 청진분부진왕 이상오락

 

인상여가 앞으로 나서더니 조왕께서는 진왕께서 진나라의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진왕에게 분부(盆缶, 그릇을 엎은 악기)를 드려 함께 즐기십사 청하셨습니다.’라고 했다.

 

秦王怒, 不許. 於是相如前進缻, 因跪請秦王. 秦王不肯撃缻. 相如曰:「五歩之內, 相如請得以頚血濺大王矣!左右欲刃相如, 相如張目叱之, 左右皆靡.

진왕노 불허. 어시상여전진부 인궤청진왕. 진왕불긍격부. 상여왈 오보지내 상여청득이경혈천대왕의!’ 좌우욕인상여 상여장목질지 좌우개미.

 

진왕이 성을 내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인상여는 앞으로 나가 분부를 바치며 무릎을 꿇고 진왕에게 요청했다. 진왕은 분부를 두드리려 하지 않았다. 상여는 다섯 걸음 안이라면 이 상여가 대왕의 목을 베어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좌우에서 나서 상여를 죽이려 했으나 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자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於是秦王不懌, 為一撃缻. 相如顧召趙禦史書曰某年月日, 秦王為趙王撃缻.

어시진왕불석 위일격부. 상여고소조어사서왈 모년월일 진왕위조왕격부

 

이에 진왕은 마지못해 분부를 한 번 두드렸다. 상여는 고개를 돌려 조나라의 어사를 불러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을 위하여 분부를 두드렸다.’라 쓰게 했다.

 

秦之群臣曰:「請以趙十五城為秦王壽. 藺相如亦曰:「請以秦之鹹陽為趙王壽.

진지군신왈 청이조십오성위진왕수’. 인상여역왈 청이진지함양위조왕수

 

진나라의 신하들이 조나라의 성 열다섯 개로 진왕의 장수를 빌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자 인상여 역시 진나라의 함양으로 조왕의 장수를 빌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秦王竟酒, 終不能加勝於趙. 趙亦盛設兵以待秦, 秦不敢動.

진왕경주 종불능가승어조. 조약성설병이대진 진불감동.

 

진왕이 술자리를 마치도록 끝내 조나라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조나라 역시 병사를 제대로 배치하여 진나라에 대비함으로써 진나라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既罷帰國, 以相如功大, 拝為上卿, 位在廉頗之右. 廉頗曰:「我為趙將, 有攻城野戦之大功, 而藺相如徒以口舌為勞, 而位居我上, 且相如素賎人, 吾羞, 不忍為之下.宣言曰:「我見相如, 必辱之.

기파귀국 이상여공재 배위상경 위재염파지우. 염파왈 아위조장 유공성야전지대공 이인상여도이구설위노 이위거아상 차상여소천인 오차 불인위지하선언왈: ‘아견상여 필욕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상여의 공이 컸으므로 상경에 임명하니 자리가 염파보다 위였다. 염파는 내가 조나라의 장수로서 성을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그저 혀를 놀리는 일로 자리가 나보다 높다. 그리고 상여는 본디 천한 사람이니 내가 부끄러워 차마 그 아래에 있을 수 없다.’라 하고는 내가 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욕을 보이리라.’라고 선언했다.



相如聞, 不肯與會. 相如毎朝時, 常稱病, 不欲與廉頗爭列. 已而相如出, 望見廉頗, 相如引車避匿. 於是舎人相與諫曰

상여문 불긍여회. 상여매조시 상칭병 불욕여염파쟁열. 이이상여출 망견염파 상여인거피닉. 어시사인상여간왈:

 

상여가 이 말을 듣고는 (염파와) 부딪치지 않으려 했다. 상여는 입조할 때마다 늘 병을 핑계 댔고, 염파와 자리를 다투려 하지 않았다. 그 뒤 상여가 외출을 하다가 멀리서 염파가 보이자 상여는 마차를 끌고 피하여 숨었다. 그러자 사인들이 모여 이렇게 간했다.

 

臣所以去親戚而事君者, 徒慕君之高義也. 今君與廉頗同列, 廉君宣悪言而君畏匿之, 恐懼殊甚, 且庸人尚羞之, 況於將相乎! 臣等不肖, 請辭去.

신소이거친척이사군자 도모군지고의야. 금군여염파동열 염군선오언이군외닉지 공구수심 차용인상수지 황어장상호! 신등불초 청사거

 

신들이 친척을 떠나 군을 모신 것은 오로지 군의 고상한 의리를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염파와 같은 반열인데 염파는 대놓고 나쁜 말을 하고 군께서는 그를 두려워하며 피하시니 두려워하시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이는 보통 사람도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장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못난 신들은 떠나길 원합니다.’

 

藺相如固止之, :「公之視廉將軍孰與秦王?」

인상여고지지 왈 공지시염장군숙여진왕?’

 

인상여는 한사코 그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공들은 염장군과 진왕 중 누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시오?’

 

:「不若也.

불약야

 

다르지요

 

相如曰:「夫以秦王之威, 而相如廷叱之, 辱其群臣, 相如雖駑, 獨畏廉將軍哉顧吾念之,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 徒以吾両人在也. 今両虎共鬥, 其勢不倶生. 吾所以為此者, 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

상여왈 부이진왕지위 이상여정질지 욕기순신 상여수노 독외염장군재? 고오념지 강진지소이불감가병어조자 도이오양인재야. 금양호공투 기세불구생. 오소이위차자 이선국자지급이후사수야

 

그 진왕의 위세 앞에서 이 상여는 그 조정에서 호통을 쳤고 그 신하들을 욕보였습니다. 상여가 아무리 못났어도 염 장군을 겁내겠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대해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려 싸우면 그 기세상 모두 살아남지 못합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나라의 급한 일이 먼저이고 사사로운 원한은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廉頗聞之, 肉袒負荊, 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 :「鄙賎之人, 不知將軍寛之至此也.卒相與驩, 為刎頚之交.

염파문지 육단부형 인빈객지인상여문사죄. 비천지인 부지장군관지지차야졸상여환 위문경지교.

 

염파가 이를 듣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진 채 빈객을 통해 인상여의 집 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이 비천한 자가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소이다.’라고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우정을 나누었다.

 

是歳, 廉頗東攻斉, 破其一軍.

시세 염파동공제 파기일군.

 

이 해, 염파는 동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대 하나를 격파했다.

 

居二年, 廉頗複伐斉幾, 抜之.

거이년 염파복벌제기 발지.

 

2년 뒤, 염파는 다시 제나라의 기읍(幾邑)을 정벌해 함락시켰다.

 

後三年, 廉頗攻魏之防陵安陽, 抜之.

후삼년 염파공위지방릉 안양 발지.

 

3년 뒤, ()나라의 방릉(防陵),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後四年, 藺相如將而攻斉, 至平邑而罷.

후사년 인상여장이공제 지평읍이파.

 

그 뒤 4, 인상여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읍(平邑)에 이르렀다가 철수했다.

 

其明年, 趙奢破秦軍閼與下.

기명년 조사파순연여하.

 

그 이듬해, 조사(趙奢)가 진나라의 군대를 연여(閼與) 부근에서 격파했다.

 


<趙奢, 趙括>

 

趙奢者, 趙之田部吏也. 収租稅而平原君家不肯出租, 奢以法治之, 殺平原君用事者九人. 平原君怒, 將殺奢.

조사자 조지전부리야. 수조세이평원군가불긍출조 사이법치지 살평원군용사자구인. 평원군노 장살사.

 

조사(趙奢)는 조()나라의 밭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 전부리(田部吏)였다. 세금을 거두는데 평원군의 집안에서 세금을 내려 하지 않아 조사는 법대로 평원군 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열에 아홉을 죽였다. 평원군이 노하여 조사를 죽이려 했다.

 

奢因説曰:「君於趙為貴公子, 今縦君家而不奉公則法削, 法削則國弱, 國弱則諸侯加兵, 諸侯加兵是無趙也, 君安得有此富乎以君之貴, 奉公如法則上下平, 上下平則國彊, 國彊則趙固, 而君為貴戚, 豈軽於天下邪?」

사인세왈 순어조위귀공자 금종군가이불봉공즉법삭 법삭즉국약 국약즉제후가병 제후가병시무조애 군안득유차부호? 이군지귀 봉공여법즉상하평 상하평즉국강 국강즉조고 이군위귀척 기경어천하야?’

 

이에 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는 조나라의 귀한 공자이십니다. 지금 군의 집안이 공적인 일을 받들지 않으면 법이 깎이고, 법이 깎이면 나라가 약해지며, 나라가 약해지면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키면 조나라는 없어질 터인데 군께서는 이 부를 어떻게 누리시렵니까? 귀하신 군께서 공적인 일을 법처럼 받들면 상하가 평안해지고, 상하가 평안해지면 나라가 강해지며, 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는 튼튼해질 터이니 군 같은 귀한 공실의 인척을 천하가 어찌 깔보겠습니까?’

 

平原君以為賢, 言之於王. 王用之治國賦, 國賦大平, 民富而府庫実.

평원군이위현 언지어왕. 왕용지치국부 국부대평 민부이부고실.

 

평원군은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왕에게 그에 대해 말했다. 왕은 그를 기용하여 나라의 세금을 다스리게 하니 나라의 세금이 공평해져 백성은 부유해지고 국고는 충실해졌다.

 

秦伐韓, 軍於閼與. 王召廉頗而問曰:「可救不?」対曰:「道遠険狹, 難救.又召樂乗而問焉, 樂乗対如廉頗言. 又召問趙奢, 奢対曰:「其道遠険狹, 譬之猶両鼠鬥於穴中, 將勇者勝.王乃令趙奢將, 救之.

진벌한 군어연여. 왕소염파이문왈 가구불?’ 대왈 도원험협 난구우소악승이문언 악승대여염파언. 우소문조사 조사왈 기도원헙협 비지유양서투어혈중 장용자승왕내영조사장 구지.

 

()나라가 한()나라를 토벌하려고 연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왕이 염파를 불러 구할 수 있겠소? 없겠소?’라고 물었다. (염파가) ‘길이 멀고 험하고 좁아서 구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악승(樂乘)을 불러 물었으나 악승의 대답 역시 염파의 말과 같았다. 다시 조사를 불러 물었더니 조사는 그곳은 길이 멀고 험하고 좁은 곳이라 비유하자면 두 마리의 쥐가 좁은 구멍 안에서 싸우는 것과 같으므로 용감한 자가 이깁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에 조사를 장수로 삼아 연여를 구하게 했다.

 

兵去邯鄲三十里, 而令軍中曰:「有以軍事諫者死.秦軍軍武安西, 秦軍鼓譟勒兵, 武安屋瓦盡振. 軍中候有一人言急救武安, 趙奢立斬之.

병거한단삼십리 이영군중왈 유이군사간자사진군군무안서 진군고조륵병 무안옥와진진. 군중후유일인언급구무안 조사입참지.

 

군대가 한단(邯鄲)에서 30리쯤 갔을 때 군중에 군의 일에 대해 간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는 명을 내렸다. 진나라의 군대는 무안(武安)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군대는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병사들을 다그치는데 무안성 집들의 기와가 모두 흔들렸다. 군중의 척후병 하나가 무안을 서둘러 구하자고 말하자 조사는 바로 그의 목을 잘랐다.

 

堅壁, 留二十八日不行, 複益増壘. 秦閒來入, 趙奢善食而遣之. 閒以報秦將, 秦將大喜曰:「夫去國三十里而軍不行, 乃増壘, 閼與非趙地也.趙奢既已遣秦閒, 巻甲而趨之, 二日一夜至, 今善射者去閼與五十里而軍. 軍壘成, 秦人聞之, 悉甲而至. 軍士許歴請以軍事諫, 趙奢曰:「內之.

견벽 유이십팔일불행 복익증루. 진간래입 조사선식이견지. 간이보진장 진장대희왈 부거국삼십리이군불행 내증루 연여비조지야조사기이견진간 권갑이추지 이일일야지 금선사자거연여오십리이군. 군루성 ㅈㄴ인문지 실갑이지. 군사러역청이군사단 조사왈 내지

 

보루를 단단하게 쌓고 28일 동안 나가지 않다가 다시 보루를 더 쌓았다. 진나라의 첩자가 오자 조사는 잘 먹여서 돌려보냈다. 첩자가 진나라의 장수에게 보고하자 진나라의 장수를 크게 기뻐하며 나라를 떠난 지 30 리에 불과한데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고 보루만 증강하고 있다니 인여는 이제 조나라의 땅이 아니다.’라고 했다. 조사는 진나라의 첩자를 돌려보내고는 바로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서둘러 진군하게 하니 12일 만에 도착했다. 이어 활을 잘 쏘는 병사들을 연여에서 50 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켰다. 군의 보루가 완성되었고, 진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중무장을 하고 진군해왔다. 군사 허력(許歷)이라는 자가 군의 일에 대해 간하길 청했다. 조사는 들이라.’라고 했다.

 

許歴曰:秦人不意趙師至此, 其來気盛, 將軍必厚集其陣以待之. 不然, 必敗.

허역왈 진인불의조사지차 기래기성 장군필후집기진이대지. 불연 필패

 

허력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설마 조나라의 군사가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기세가 사나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힘을 집중하여 진지를 단단히 지키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패입니다.’

 

趙奢曰:「請受令.許歴曰:「請就鈇質之誅.趙奢曰:「胥後令邯鄲.許歴複請諫, :「先拠北山上者勝, 後至者敗.趙奢許諾, 即発萬人趨之. 秦兵後至, 爭山不得上, 趙奢縦兵撃之, 大破秦軍. 秦軍解而走, 遂解閼與之囲而帰.

조사왈 청수령; 허역왈 청취부질지주조사왈 조후영한단하역복청간 왈

선거북산상자승 후지자패조사허락 즉발만인주지. 진병후지 쟁산부득상 조사종병격지 대파진군 수해연여지위이귀.

 

조사가 의견을 받아들이마.’라 하자 허력은 부질형(鈇質刑:도끼로 허리를 베는)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했고 조사는 이 일은 나중에 한단에 가서 다시 논의하자.’라고 했다. 이에 허력은 다시 아뢰길 청하며 먼저 북산(北山)의 정상을 차지하면 이기고 늦게 도착하면 패합니다.’라고 했다. 조사가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만 명을 내어서 달려가게 했다. 진나라의 병사가 늦게 와서 산을 차지하려 했으나 오르지 못했다. 조사는 군대를 풀어 그들을 공격하여 진나라의 군대를 대파했다. 진군은 포위를 풀고 도주하니 마침내 연여의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趙恵文王賜奢號為馬服君, 以許歴為國尉. 趙奢於是與廉頗藺相如同位.

조혜문왕사사호위마복군 이허역위국위. 조사어사여염파 인상여동위.

 

조 혜문왕(趙惠文王)은 조사에게 마복군(馬服君)이란 호칭을 내리고, 허역을 국위(國尉)에 임명했다. 조사는 이렇게 해서 염파, 인상여와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後四年, 趙恵文王卒, 子孝成王立.

후사년 조혜문왕졸 자효성왕립.

 

4년 뒤, 조 혜문왕이 죽고,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했다.

 

七年, 秦與趙兵相距長平, 時趙奢已死, 而藺相如病篤, 趙使廉頗將攻秦, 秦數敗趙軍, 趙軍固壁不戦. 秦數挑戦, 廉頗不肯. 趙王信秦之閒. 秦之閒言曰:「秦之所悪, 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趙王因以括為將, 代廉頗.

칠년 진여조병상거장평 시조사이사 이인상여병독 조사염파장공진 진수패조군 조군고벽부전. 진수도전 염파불긍. 조왕신진지간. 진지간언왈 진지소악 독외마복군조사지자조괄위장이조왕인이괄위장 대염파.

 

효성왕 7, 진과 조나라의 군대가 장평(長平)을 두고 대치했다. 이때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중했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를 치게 했다. 진나라가 몇 차례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조나라 군은 보루를 단단히 쌓고 싸우지 않았다. 진나라가 계속 도전했지만 염파는 응하지 않았다. 조왕이 진나라의 첩자 말을 듣게 되었다. 진나라의 첩자는 진나라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이에 조왕은 조괄을 장수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하려고 했다.

 

藺相如曰:「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読其父書傳, 不知合変也.趙王不聴, 遂將之.

인상여왈 왕이명사괄 약교주이고금이. 괄도능독기부서전 부지합변야조왕불청 수장지.

 

인상여가 말했다. ‘왕께서 명성만으로 조괄을 쓰려고 하시는데 이는 아교로 거문고 발을 붙이고 거문고를 연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그 아버지가 전한 책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을 모릅니다.’ 조왕은 듣지 않고 기어이 그를 장수로 삼았다.

 

<조괄>

 

趙括自少時學兵法, 言兵事, 以天下莫能當. 嘗與其父奢言兵事, 奢不能難, 然不謂善.

조괄자소시학병법 언병사 이천하막능당. 상여기부사언병사 사불능란 연불위선.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군대의 일을 말하자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 조사와 병법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조사도 당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括母問奢其故, 奢曰:「, 死地也, 而括易言之. 使趙不將括即已, 若必將之, 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 其母上書言於王曰:「括不可使將.王曰:「何以?」対曰

괄모문사기고 사왈 병 사지야 이괄이언지. 사조부장괄즉이 약필장지 파조군자필괄야급괄장행 기모상서언어왕왈 고라불가사장왕왈 하이대왈:

 

조괄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전쟁은 사람이 죽는 곳이오. 그러나 괄은 너무 쉽게 말을 하오. 조가 괄을 장수로 삼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기어이 그를 장수로 삼겠다면 조나라의 군대를 무너지게 할 자는 틀림없이 조괄일 것이오.’라고 했다. 조괄이 장수가 되어 출정하려 하자 그 어머니는 왕에게 글을 올려 괄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왕이 어째서 그렇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始妾事其父, 時為將, 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 所友者以百數, 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 受命之日, 不問家事. 今括一旦為將, 東向而朝, 軍吏無敢仰視之者, 王所賜金帛, 帰蔵於家, 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 王以為何如其父父子異心, 願王勿遣.

시첩사기부 시위장 신소봉반음이식자이십수 소우자이백수 대왕급종실소상사자진이여군리사대부 수명지일 불문가사. 금괄일단위장 동향이조 군리무감앙시지자 왕소사금백 귀장어가 이일시편이전택가매자매지. 왕이위하여기부? 부자이심 원왕물견

 

당초 첩이 그 아비를 모실 때 그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이고 마시게 하며 대접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친구는 수백 명이었습니다. 대왕과 종실에서 내리는 상은 모두 군리와 사대부에게 나눠주었고, 명령을 받은 날에는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괄은 하루 아침에 장군이 되자 동쪽을 향해 조회를 받는데 군리들이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돈이며 옷감은 집에다 쌓아 놓고, 날마다 살 만한 싸고 좋은 땅과 집이 없는지 보고는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그 아비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비와 아들의 마음이 이렇게 다르니 왕께서는 제발 보내지 마십시오!’

 

王曰:「母置之, 吾已決矣.括母因曰:「王終遣之, 即有如不稱, 妾得無隨坐乎?」王許諾.

왕왈 모치지 오이결의괄모인왈 왕종견지 즉유여불칭 첩득무수좌호?’ 왕허락.

 

왕은 모친은 그만두시오. 내가 이미 결정했소이다.’라고 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이에 왕께서 기어이 그 애를 보내시겠다면, 그 애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더라도 첩을 연루시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왕이 허락했다.

 

趙括既代廉頗, 悉更約束, 易置軍吏. 秦將白起聞之, 縦奇兵, 詳敗走, 而絶其糧道, 分斷其軍為二, 士卒離心. 四十餘日, 軍餓, 趙括出鋭卒自博戦, 秦軍射殺趙括. 括軍敗, 數十萬之衆遂降秦, 秦悉阬之.

조괄기대염파 실경약속 역치군리. 진장백기문지 종기병 상패주 이절기양도 분단기군위이 사졸이심. 사십여일 준아 조괄출예졸자박전 진군사살조괄. 괄군패 수십만지중수항진 진실갱지.

 

조괄이 염파를 대신하자 규정을 모두 바꾸고 군리들까지 교체했다. 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이를 듣고는 기병(奇兵)을 풀어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게 했다. 그러면서 조나라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여 조나라 군대를 둘로 나눔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조괄로부터 떠나게 했다. 40일 넘어 지나자 조나라의 군대는 굶주리기 시작했다. 조괄은 정예 부대를 내세워 직접 전투에 나섰으나 진나라의 군사가 조괄을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하여 수십 만이 드디어 진나라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趙前後所亡凡四十五萬. 明年, 秦兵遂囲邯鄲, 歳餘, 幾不得脫. 頼楚魏諸侯來救, 廼得解邯鄲之囲. 趙王亦以括母先言, 竟不誅也.

조전후소망범사십오만. 명년 진병수위한단 세여 기부득탈. 회초 위제후래구 내득해한단지위. 조왕역이고라모선언 경불주야.

 

조나라는 전후 전투에서 45만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이듬해 진나라의 군대가 마침내 한단을 포위했다. 1년 남짓 거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초나라와 위나라가 구원하여 겨우 한단의 포위가 풀렸다. 조왕은 조괄의 어머니가 전에 한 말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自邯鄲囲解五年, 而燕用栗腹之謀, 趙壯者盡於長平, 其孤未壯, 挙兵撃趙. 趙使廉頗將, , 大破燕軍於鄗, 殺栗腹, 遂囲燕. 燕割五城請和, 乃聴之. 趙以尉文封廉頗為信平君, 為仮相國.

자한단위해오년 이연용율복지모 왈 조장자진어장평 기고미장거병격조. 조사염파장 격 대파연군어호 살율복 수위연. 연할오성청화 내처잊. 조이이믄봉염파위신평군 위가상ㄲ.

 

한단의 포위가 풀린 지 5, 이번에는 연나라가 조나라의 장정들은 장평에서 다 죽었고, 그들의 어린 자식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다.’는 율복(栗腹)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해왔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삼아 맞아 싸우게 했다. 염파는 연나라의 군대를 호()에서 대파하고 율복을 죽인 다음 마침내 연나라를 포위했다. 연나라는 성 5개를 떼어주며 화친을 청했고 조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조왕은 위문(尉文)이라는 곳에 염파를 봉해 신평군(信平君)이라고 하고, 상국(相國)의 대리로 삼았다.



廉頗末年

 

廉頗之免長平帰也, 失勢之時, 故客盡去. 及複用為將, 客又複至. 廉頗曰:「客退矣!客曰:「! 君何見之晩也夫天下以市道交, 君有勢, 我則従君, 君無勢則去, 此固其理也, 有何怨乎?」居六年, 趙使廉頗伐魏之繁陽, 抜之.

염파지만장평귀야 실세지시 고객진거. 금복용위장 객우복지. 염파왈 객퇴의!’ 객왈 유 군하견지만야? 부천하이시도교 군유세 아즉종군 군무세즉거 차고기리야 유하원호?’ 거육년 조사염파벌위지번양 발지.

 

예전에 염파가 장평에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권세를 잃자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객들이 모조리 떠났다. 그가 다시 등용되어 장군이 되자 객들이 또다시 찾아왔다. 이에 염파가 객들은 모두 돌아가라.’라고 하자 한 객이 이렇게 말했다. ‘어허! 장군께서는 어찌 그렇게 생각이 어리석으십니까? 지금 세상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듯 교제합니다. 장군께 권세가 있으면 우리는 장군을 따르고, 권세가 없으면 떠나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인데 이를 어찌 섭섭하게 여겨 원망하십니까?’ 그로부터 6, 조나라는 염파에게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하게 했고, 염파는 그곳을 함락시켰다.

 

趙孝成王卒, 子悼襄王立, 使樂乗代廉頗. 廉頗怒, 攻樂乗, 樂乗走. 廉頗遂奔魏之大梁. 其明年, 趙乃以李牧為將而攻燕, 抜武遂方城.

조효성왕졸 자도양왕립 사악승대염파. 염파노 공악승 악승주. 염파수분위지대량. 기명년 조급이이목위장이공연 발무수 방성.

 

조 효성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도양왕(悼襄王)이 즉위하여 악승(樂乘)을 염파 대신 장군에 임명했다. 염파가 노하여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도 결국은 위나라의 대량(大梁)으로 달아나 몸을 맡겼다. 그 다음 해, 조나라는 이목(李牧)을 장군으로 삼아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함락시켰다.

 

廉頗居梁久之, 魏不能信用. 趙以數困於秦兵, 趙王思複得廉頗, 廉頗亦思複用於趙. 趙王使使者視廉頗尚可用否.

염파거량구지 위불능신용. 조이수곤어진병 조왕사복득염파 염파역사복용어조. 조왕사사자시염파상가용부.

 

염파가 오래 양()나라에 머물렀으나 위나라는 그를 믿고 기용하지 않았다. 조나라는 오랫동안 진나라의 군대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조왕이 다시 염파를 쓸 생각을 했고, 염파 역시 조나라에 기용되고 싶어 했다. 이에 조왕은 사신을 보내 염파가 아직 쓸모가 있는지를 살피게 했다.

 

廉頗之仇郭開多與使者金, 令毀之. 趙使者既見廉頗, 廉頗為之一飯鬥米, 肉十斤, 被甲上馬, 以示尚可用. 趙使還報王曰:「廉將軍雖老, 尚善飯, 然與臣坐, 頃之三遺矢矣.趙王以為老, 遂不召.

염파지구곽개다여사자금 영훼지. 조사자기견염파 염파위지일반두미 육십근 피갑상마 이시상가용. 조사환보왕왈 염장군수노 상전반 연여신좌 경지삼유실의조왕이위노 수불소.

 

염파와 원수 사이인 곽개(郭開)는 사신에게 많은 돈을 주어 염파를 모함하게 했다. 조나라의 사신이 염파를 만났다. 염파는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는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올라 아직도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조나라의 사신은 돌아와 왕에게 염 장군이 늙었지만 밥은 잘 먹습니다. 그러나 신과 같이 앉아 있는 동안 자주 변(오줌)을 지리더군요.’라고 했다. 조왕은 염파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결국 부르지 않았다.

 

楚聞廉頗在魏, 陰使人迎之. 廉頗一為楚將, 無功, :「我思用趙人.廉頗卒死於壽春.

초문염파재위 음사인영지. 염파일위초장 무공 왈 아사용조인염파졸사어수춘.

 

초나라가 위나라에 염파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몰래 사신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염파는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지만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한 채 나는 조나라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싶다.”라고 했다. 염파는 결국 (초나라의) 수춘(壽春)에서 죽었다.

 


李牧

 

李牧者, 趙之北邊良將也. 常居代鴈門, 備匈奴. 以便宜置吏, 市租皆輸入莫府, 為士卒費. 日撃數牛饗士, 習射騎, 謹烽火, 多閒諜, 厚遇戦士.

이목자 조지북변양장야. 상거대안문 비흉노. 이편의치사 시조개수입막부 위사졸비. 일격수우향사 습사기 근봉황 다간첩 후우전사.

 

이목(李牧)은 조나라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훌륭한 장수였다. 그는 일찍이 대()나라와 안문(雁門)에 주둔하며 흉노(匈奴)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형편에 맞추어 적절히 관리를 배치하고, 시내의 세금은 모두 막부(莫府)로 옮기어 병사들의 비용에 충당했다. 그는 날마다 몇 마리의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며 활쏘기와 말타기 연습을 시켰다. 또한 봉화를 신중하게 준비해두고 많은 첩자들을 풀었고, 전사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為約曰:「匈奴即入盜, 急入収保, 有敢捕虜者斬.匈奴毎入, 烽火謹, 輒入収保, 不敢戦. 如是數歳, 亦不亡失. 然匈奴以李牧為怯, 雖趙邊兵亦以為吾將怯. 趙王譲李牧, 李牧如故. 趙王怒, 召之, 使他人代將.

위약왈 흉노즉입도 급입수보 유감포로자참흉노매입 봉화근 첩입수보 불감전. 여시수세 역불망실. 연흉노이이목위겁 수조변병역이위오장겁. 조왕양이목 이목여고. 조왕노 소지 사타인대장.

 

그리고 그는 흉노가 쳐들어와서 도둑질을 할 경우는 재빨리 들어와 수비를 해라. 만일 적을 사로잡는 자가 있다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흉노가 침입할 때마다 봉화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그 신호에 따라 재빨리 성 안으로 들어와 수비를 하며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다. 흉노는 이목을 겁쟁이라고 생각했고, 조나라 변경의 군사들 역시 자신들의 장수를 겁쟁이로 여겼다. 조왕이 이목을 나무랐지만 이목은 여전했다. 조왕이 화가 나서 그를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장군으로 삼았다.

 

歳餘, 匈奴毎來, 出戦. 出戦, 數不利, 失亡多, 邊不得田畜. 複請李牧. 牧杜門不出, 固稱疾.

세여 흉노매래 출전. 출전 수불리 실망다 변부득전축. 복청이목. 목두문불출 고칭질.

그로부터 1년 뒤, 흉노가 쳐들어올 때마다 조나라는 나가서 싸웠다. 출전했지만 불리해서 자주 많은 손해를 입었고 결국 변경에서 농사와 목축은 불가능해졌다. 조나라가 다시 이목을 불렀지만 이목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면서 병을 구실로 한사코 사양했다.

 

趙王乃複彊起使將兵. 牧曰:「王必用臣, 臣如前, 乃敢奉令.王許之.

조왕내복강기사장병. 목왈 왕필용신 신여전 내감봉영왕허지.

 

이에 조왕은 억지로 그에게 병사들을 이끌게 했다. 이에 이목은 왕께서 굳이 신을 기용하시겠다면 신이 예전에 했던 그대로 하게 해주시면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했고 왕은 이를 허락했다.

 

李牧至, 如故約. 匈奴數歳無所得. 終以為怯. 邊士日得賞賜而不用, 皆願一戦. 於是乃具選車得千三百乗, 選騎得萬三千匹, 百金之士五萬人, 彀者十萬人, 悉勒習戦. 大縦畜牧, 人民満野.

이목지 여고약. 흉놋세무소득. 종이위겁. 변사일득상사이불용 개원일전. 어시내구선거득천삼백승 선기득만삼천필 백금지사오만인 구자십만인 실늑습전. 대종묵목 인민만야.

 

이목은 변방에 이르자 전과 같은 군령을 내렸다. 그가 부임하자 흉노는 예전처럼 몇 년 동안 아무런 이익을 얻을 수 없었고, 전과 같이 그를 겁쟁이라고 여겼다. 변방의 장병들은 상을 받고 후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실제 전쟁에 쓰이지 못하고 있자 모두들 한번 싸워보길 바랐다. 이에 이목은 튼튼한 수레 1,300, 13,000마리를 선발했다. 그리고는 전공을 세워 100금을 상으로 탄 용사 5만과 강한 활을 잘 쏘는 병사 10만을 선발하여 하나의 부대로 조직하여 많은 연습을 시켰다. 한편으로는 가축들을 많이 놓아먹이게 하고 들을 백성들로 가득 채웠다.

 

匈奴小入, 詳北不勝, 以數千人委之. 単於聞之, 大率衆來入. 李牧多為奇陳, 張左右翼撃之, 大破殺匈奴十餘萬騎. 滅襜襤, 破東胡, 降林胡, 単於奔走. 其後十餘歳, 匈奴不敢近趙邊城.

흉노소입 상북불승 이수천인위지. 선우문지 대졸중래입. 이목다위기진 장좌우익격지 대파살흉노십여만기. 멸담람 파동호 항임호 선우분주, 기후십여세 흉노불감근조변성.

 

흉노가 적은 수의 군대로 먼저 침입하자 이목은 일부러 이기지 못해 달아나는 척하며 병사 몇천 명을 그들에게 버려두었다.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單于)가 이 소식을 듣자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목은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진용을 대대적으로 편성하고, 부대를 좌우 양쪽으로 펼쳐 흉노를 공격함으로써 흉노족 기병 10만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이목은 담람(襜襤)이라는 부족을 없애버린 후, 동호(東胡)를 쳐부수고 임호(林胡)를 항복시켰다. 선우는 달아났고, 그 뒤로 10년 넘게 흉노는 조의 국경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못했다.

 

趙悼襄王元年, 廉頗既亡入魏, 趙使李牧攻燕, 抜武遂方城. 居二年, 龐煖破燕軍, 殺劇辛.

조도양왕원면 염파기망입위 조사이목공연 발무수 방성. 거이년 방원파연군 살극신.

 

조 도양왕 원년, 염파는 이미 위나라로 망명해 있었다. 조나라는 이목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수와 방성을 함락시켰다. 그로부터 2년 후, 조나라의 장수 방원(龐煖)이 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극신(劇辛)을 죽였다.

 

後七年, 秦破殺趙將扈輒於武遂, 斬首十萬. 趙乃以李牧為大將軍, 撃秦軍於宜安, 大破秦軍, 走秦將桓齮. 封李牧為武安君.

후칠년 진파살조장호첩어무수 참수십만. 조내이이목위대장군 격진준어의안 대파진군 주진장환의. 봉이목위무안군.

 

그로부터 7년 뒤, 진나라는 무수를 격파하여 조나라의 장수 호첩(扈輒)을 죽이고 병사 10만 명을 살해했다. 그러자 조나라는 이목을 대장군으로 삼아 의안(宜安)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해 대파하니 진나라의 장군 환의(桓齮)는 패해 달아났다. 이목은 이 공로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居三年, 秦攻番吾, 李牧撃破秦軍, 南距韓.

거삼년 진공번오 이목격파진군 남거한 위.

 

그로부터 3년 후, 진나라가 번오(番吾)를 공격해왔으나 이목이 출격해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남쪽의 한과 위나라와는 거리를 뒀다.

 

趙王遷七年, 秦使王翦攻趙, 趙使李牧司馬尚禦之. 秦多與趙王寵臣郭開金, 為反閒, 言李牧司馬尚欲反. 趙王乃使趙蔥及斉將顔聚代李牧. 李牧不受命, 趙使人微捕得李牧, 斬之. 廃司馬尚. 後三月, 王翦因急撃趙, 大破殺趙蔥, 虜趙王遷及其將顔聚, 遂滅趙.

조왕천칠년 진사왕전공조 조사이목 사마상어지. 진다여조왕총신곽개금 위반간 언이목 사마상욕반. 조왕내사조총급제장안취대이목. 이목불수명 조사인미포득이목 참지. 폐사마상 후삼월 왕전인급격조 대파살조총 노조왕천급기장안취 수멸조.

 

조왕 천() 7, 진나라가 왕전(王翦)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을 시켜 그들을 막게 했다. 진나라는 조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곽개에게 많은 돈을 주어 이간책을 써서 이목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에 조왕은 조총(趙蔥)과 제나라의 장군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을 대신하게 했다. 그러나 이목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자 조나라는 사람을 보내어 몰래 이목을 정탐하게 하고는 그를 체포해 죽이고, 사마상은 해임했다. 석 달 뒤, 왕전은 신속하게 조나라를 공격해 크게 이기고 조총을 죽였으며, 조왕 천과 그의 장군 안취를 사로잡으니 조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知死必勇, 非死者難也, 処死者難. 方藺相如引璧睨柱, 及叱秦王左右, 勢不過誅, 然士或怯懦而不敢発. 相如一奮其気, 威信敵國, 退而譲頗, 名重太山, 其処智勇, 可謂兼之矣!

태사공왈 지사필용 비사자난야 처사자란. 방인상여인벽예주 급질진왕좌우 세불과주 연사혹겁유이불감발. 상여일분기기 위신적국 퇴이양파 명중태산 기처지용 가위겸지의!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을 받쳐 들고 기둥을 노려보며 진나라 왕의 좌우를 꾸짖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 중에는 두려워 감히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상여는 그 용기로 적국에 그 위신을 떨치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廉頗)에게 양보하니, 그의 이름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그는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