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 司馬穰苴列傳
(司馬穰苴列傳)
司馬穣苴者, 田完之苗裔也. 斉景公時, 晉伐阿、甄, 而燕侵河上, 斉師敗績. 景公患之.
사마양저자 전완지묘예. 제경공시 진벌아 견 이연침하상 제사패적. 경공환지.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전완(田完)의 후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 때 진(晉)나라는 아(阿)나라, 견(甄)나라를 공격하고, 연(燕)나라가 하상(河上)을 침범하여 제나라 군대가 잇따라 패하자 경공이 이를 걱정했다.
晏嬰乃薦田穣苴曰:「穣苴雖田氏庶孽, 然其人文能附衆, 武能威敵, 願君試之.」景公召穣苴, 與語兵事, 大説之, 以為將軍, 將兵扞燕晉之師.
안영내천전양저왈 ‘양저수전씨서얼 연기인문능부중 무능위적 원군시지’ 경공소양저 여어병사 대열지 이위장군 장병한연지지사.
이에 안영(晏嬰)이 ‘양저는 비록 전씨(田氏)의 서자지만 그 사람의 문무가 사람을 따르게 하고 적을 위협할 수 있으니, 국군께서 한 번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라며 전양저를 추천했다. 경공이 양저를 불러 군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연나라와 진나라의 군대를 막게 했다.
穣苴曰:「臣素卑賎, 君擢之閭伍之中, 加之大夫之上, 士卒未附, 百姓不信, 人微権軽, 願得君之寵臣, 國之所尊, 以監軍, 乃可.」於是景公許之, 使荘賈往.
양저왈 ‘신소비천 군탁지여오지중 가지대부지상 사졸미부 백성불신 인미권경 원득군지총신 국지소존 이감군 내가’ 어시경공허지 사장고왕.
양저는 ‘신은 본래 미천하지만 국군께서 평민의 무리에서 저를 발탁하시어 대부 윗자리에 올리셨으니 사졸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미천하고 권력은 가벼우니 원하옵건대 국군께서 총애하시고 나라가 존중하는 사람으로 군을 감독하게 해주시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공은 이를 허락하고 장고(莊賈)에게 가도록 했다.
穣苴既辭, 與荘賈約曰:「旦日日中會於軍門.」穣苴先馳至軍, 立表下漏待賈.
양저기사 여장고약왈 ‘단일일중회어군문’ 양저선치지군 입표하루대고.
양저가 인사를 드리고는 장고와 ‘내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군문에서 만납시다.’라고 약속했다. 양저가 먼저 진중으로 달려가 해시계와 물시계를 세워놓고는 장고를 기다렸다.
賈素驕貴, 以為將己之軍而己為監, 不甚急;親戚左右送之, 留飲.
고소교귀 이위장기지군이기위감 불심급 친척좌우송지 류음.
장고는 평소 교만하고 귀하신 몸인지라 장수가 이미 군으로 갔고 자신은 감군이므로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친척과 가까운 자들이 송별 자리를 만들자 그곳에 눌러 앉아 술을 마셨다.
日中而賈不至. 穣苴則仆表決漏, 入, 行軍勒兵, 申明約束. 約束既定, 夕時, 荘賈乃至. 穣苴曰:「何後期為?」賈謝曰:「不佞大夫親戚送之, 故留.」
일중이고부지. 양저즉부표결루 입 행군륵병 신명약속. 약속기정 석시 장고내지. 양저왈 ;하후기위‘ 고사왈 ’불녕대부친척송지 고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장고는 도착하지 않았다. 양저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엎어버리고는 들어가 병사들을 점검하고 군기를 다 잡고 군령을 내렸다. 군기를 잡고 군령을 내리고 저녁 무렵에 되어서야 장고가 도착했다. 양저가 ‘어째서 약속 시간에 늦었소?’라고 하자 장고는 ‘이 몸의 대부와 친척들이 송별 자리에 빠질수 없어 늦었소.’라고 사과했다.
穣苴曰:「將受命之日則忘其家, 臨軍約束則忘其親, 援枹鼓之急則忘其身. 今敵國深侵, 邦內騒動, 士卒暴露於境, 君寢不安席, 食不甘味, 百姓之命皆懸於君, 何謂相送乎!」召軍正問曰:「軍法期而後至者雲何?」対曰:「當斬.」荘賈懼, 使人馳報景公, 請救. 既往, 未及反, 於是遂斬荘賈以徇三軍. 三軍之士皆振慄.
양저왈‘장수명지일즉망기가 임군약속즉망지친 환포고지급즉망기신. 금적국심침 방내요동 사졸폭로어경 군침불안석 식불감미 백성지명개현어군 하위상송호’ 소군정문왈 ‘군법기이후지자운하’ 대왈 ‘당참’ 장고구 사인치보경공 청구. 기왕 미급반 어시수참장고이순삼군. 삼군지사개진률.
양저는 ‘장수는 명을 받은 날부터 가족을 잊어야 하고, 군령을 내리고 군기를 잡고나면 그 부모를 잊어야 하며, 진격의 북이 울리면 자기 몸을 잊어야 합니다. 지금 적국이 깊이 쳐들어와 나라 안이 소란스럽고 사졸들은 뙤약볕에서 변경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잠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고 먹어도 맛을 모르십니다. 백성의 생명이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는데 무슨 송별회란 말이오!’라 하고는 군정(軍正: 군기반장)을 불러 ‘군법에는 약속시간에 늦은 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는가?’라고 물었다. ‘목을 벱니다!’라고 대답했다. 장고는 겁이 나서 사람을 경공에게 보내 구원을 청했다. 간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장고의 목을 베어 삼군에 효수하니 삼군의 병사들이 모두 떨었다.
久之, 景公遣使者持節赦賈, 馳入軍中. 穣苴曰:「將在軍, 君令有所不受.」問軍正曰:「馳三軍法何?」正曰:「當斬.」使者大懼. 穣苴曰:「君之使不可殺之.」乃斬其僕, 車之左駙, 馬之左驂, 以徇三軍.
구지 경공견사자지절사고 치입군중. 양저왈 ‘장재군 군영유소불수’ 문군정왈 ‘치삼군법하’ 정왈 ‘당참’ 사자대구. 양저왈 ‘군지사불가살지’ 냐참기복 거지좌부 마지좌참 이순삼군.
이윽고 장고를 용서하라는 부절을 가진 경공의 사신이 군중으로 달려 들어왔다. 양저가 말했다. ‘군진의 장수는 주군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는다!’라며 군정에게 ‘말을 타고 군문에 들어서면 삼군 군법은 어떻게 하는가?’라고 물었다. 군정이 ‘목을 벱니다.’라고 했다. 사자가 몹시 두려워했다. 양저는 ‘주군의 사자를 죽일 수는 없다.’며 그 마부의 목을 베고, 수레 왼쪽의 부목을 자르고, 왼쪽 말을 베어 삼군에 효수했다.
遣使者還報, 然後行. 士卒次舎井灶飲食問疾醫薬, 身自拊循之. 悉取將軍之資糧享士卒, 身與士卒平分糧食. 最比13)其羸弱者, 三日而後勒兵. 病者皆求行, 爭奮出為之赴戦.
견사환보 연후행. 사졸차사정조음식문질의약 신자부순지. 실취장군지자양형사졸 신여사졸평분양식. 최차기영약자 삼일이후륵병. 병자개구행 쟁분출위지부전.
사자를 보내 보고한 다음 출정했다. (양저는) 사졸들의 숙소, 우물, 취사, 물, 문병, 의약을 몸소 보살폈다. 장군의 물품과 식량을 사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사졸들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되 가장 적은 양을 기준으로 삼았다. 사흘 뒤 병사들을 출정시키는데 아픈 자들도 모두 함께 가길 요구하는 등 양저를 위해 앞을 다투어 출전하려 했다.
晉師聞之, 為罷去. 燕師聞之, 度水而解. 於是追撃之, 遂取所亡封內故境而引兵帰.
진사문지 위파거. 연사문지 도수이해. 어시추격지 수취소망봉내고경이인병귀.
진(晉)나라의 군대가 이를 듣고는 철수해버렸고, 연나라 군대도 이를 듣고는 황하를 건너 철수했다. 이에 그들을 추격하여 마침내 잃었던 경내의 옛 땅을 취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未至國, 釈兵旅, 解約束, 誓盟而後入邑. 景公與諸大夫郊迎, 勞師成禮, 然後反帰寢. 既見穣苴, 尊為大司馬. 田氏日以益尊於斉.
미지국 석병여 해약속 서맹이후입읍. 경공여제대부교영 노사성례 연후반귀침. 기견양저 존위대사마. 전씨일이익존어제.
도성에 도착하기 앞에 무장을 해제하고 군령을 거두고는 맹서한 다음 도성으로 들어갔다. 경공이 제후들과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의식을 마친 다음 돌아가 쉬었다. 양저를 접견하고는 대사마로 승진시켰다. 전씨의 명성이 제나라에서 갈수록 높아졌다.
已而大夫鮑氏、高、國之屬害之, 譖於景公. 景公退穣苴, 苴発疾而死. 田乞、田豹之徒由此怨高、國等.
이이대부포씨 고 국지속해지 참어경공. 경공퇴양저 저발병이사. 전걸 전표지도유차원고 국등.
얼마 지나자 대부 포씨(鮑氏), 고씨(高氏), 국씨(國氏) 족속들이 양저를 해치려고 경공에게 모함했다. 경공이 양저를 물러나게 했고, 양저는 병이 나서 죽었다. 전걸(田乞), 전표(田豹)의 무리가 이 때문에 고씨, 국씨 등에게 원한을 품었다.
其後及田常殺簡公, 盡滅高子、國子之族. 至常曾孫和, 因自立為斉威王, 用兵行威, 大放穣苴之法, 而諸侯朝斉.
기후급전상살간공 진멸고자 국자지족. 지상증손화 인자립위제위왕 용병행위 대방양저지법 이제후조제.
그 후 전상(田常)이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고씨, 국씨의 족속을 모두 없앴다. 증손 전화(田和)에 이르러 제나라 위왕(威王)으로 자립했다. 군대의 위엄을 갖추려 양저의 병법을 크게 따르니 제후들이 제나라에 조회를 왔다.
斉威王使大夫追論古者司馬兵法而附穣苴於其中, 因號曰司馬穣苴兵法.
제위왕사대부추론고자사마병법이부양저어기중 인호왈사마양저병법.
제나라 위왕은 대부들에게 옛날 『사마병법(司馬兵法)』을 토론케 하고 양저도 그 안에 덧붙이게 하니 『사마양저병법(司馬穰苴兵法)』으로 불렸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餘読司馬兵法, 閎廓深遠, 雖三代征伐, 未能竟其義, 如其文也, 亦少褒矣. 若夫穣苴, 區區為小國行師, 何暇及司馬兵法之揖譲乎? 世既多司馬兵法, 以故不論, 著穣苴之列傳焉.
태사공왈 여독사마병법 굉곽심원 수삼대정벌 이믕경이의 여기문야 역소포의. 약부양저 구구위소국행사 하하급사마병법지읍양호? 세시다사마병법 이고불론 저양저지열전언.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사마병법』을 읽으니 방대하고 깊이가 대단하여 삼대의 전쟁에서도 그 의미를 다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문장에 대해서는 칭찬이 다소 지나친 바가 있다. 양저는 작은 나라의 군사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사마병법』의 겸양의 예절을 돌아 볼 수 있었겠는가? 세간에 『사마병법』이 많이 퍼져 있기 때문에 논하지 않고 그저 양저의 열전만 기록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