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五宗世家

白頭翁 2018. 8. 28. 13:58


五宗世家

 

<경제의 아들들과 율희의 세 아들>

 

孝景皇帝子凡十三人為王, 而母五人, 同母者為宗親. 栗姫子曰栄閼于. 程姫子曰余. 賈夫人子曰彭祖. 唐姫子曰発. 王夫人児姁2)子曰越.

효경황제자범십삼인위왕 이모오인 동모자위종친. 율희자왕영 덕 알우. 정희자왈여 비 단. 가부인자왈팽조 승. 당희자왈발. 왕부인아후자왈월 기 승 순.

 

효경황제의 아들은 모두 열 셋이 왕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다섯 사람이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났으면 종친이 된다. 율희(栗姬)의 아들은 유영(劉榮), 유덕(劉德), 유알우(劉閼于)이다. 정희(程姬)의 아들은 유여(劉餘), 유비(劉非), 유단(劉端)이다. 가부인(賈夫人)의 아들은 유팽조(劉彭祖), 유승(劉勝)이다. 당희(唐姬)의 아들은 유발(劉發)이다. 왕부인(王夫人) 아후(兒姁)의 아들은 유월(劉越), 유기(劉寄), 유승(劉乘), 유순(劉舜)이다.

 

河閒献王徳, 以孝景帝前二年用皇子為河閒王. 好儒学, 被服造次必於儒者. 山東諸儒多従之游.

하간헌왕덕 이효경제전이년용황자위하간왕. 호유학 피복조차필어유자. 산동제유다종지유.

 

하간(河間)의 헌왕(獻王) 유덕은 효경제 전원 2(기원전 155)에 황제의 아들로서 하간왕에 봉해졌다. 유학을 좋아하여 복장이나 행동을 꼭 유생을 본받으니 산동의 유생들이 많이 그를 따르면서 교류했다.

 

二十六年卒, 子共王不害立. 四年卒, 子剛王基代立. 十二年卒, 子頃王授代立.

이십육년졸 자공왕불해립. 사년졸 자강왕기대립. 십이년졸 자경왕수대립.

 

즉위 26년 만에 죽고, 아들 공왕(共王) 유불해(劉不害)가 섰다. (유불해는) 4년 만에 죽고, 아들 강왕(剛王) 유기(劉基)가 뒤를 이었다. (유기는) 12년 만에 죽고, 아들 경왕(頃王) 유수(劉授)가 뒤를 이었다.

 

臨江哀王閼于, 以孝景帝前二年用皇子為臨江王. 三年卒, 無後, 国除為郡.

임강애왕알우 이효경재전이년용황자위임강왕. 삼년졸 무후 국제위군.

 

임강(臨江)의 애왕(哀王) 유알우는 효경제 전원 2년 황자의 신분으로 임강왕이 되었다. 3년 만에 죽고, 후계자가 없어 나라를 해제되어 군이 되었다.

 

臨江閔王栄, 以孝景前四年為皇太子, 四歳廃, 用故太子為臨江王.

임강민왕영 이효경전사년위황태자 사세폐 용고태자위임강왕.

 

임강의 민왕(閔王) 유영은 경제 전원 4(기원전 153)에 황태자가 되었으나 4년 뒤 폐출되어 원래 태자의 신분으로 임강왕이 되었다.

 

四年, 坐侵廟壖垣為宮, 上徴栄. 栄行, 祖於江陵北門. 既已上車, 軸折車廃. 江陵父老流涕窃言曰:「吾王不反矣!栄至, 詣中尉府簿. 中尉郅都責訊王, 王恐, 自殺. 葬藍田. 燕數萬銜土置冢上, 百姓憐之.

사년 좌침묘연원위궁 상징영. 영행 조어강릉북문. 기이상거 축절거폐. 강릉부노유체절언왈 오왕불반의영지 지중위부부. 중위질도책심왕 왕공 자살. 장람전. 연수만함토치총상 뱍성린지.

 

민왕 4년에 종묘의 담장 밖 빈터를 침범하여 궁실을 지은 죄에 연루되어 주상이 유영을 불러들였다. 유영이 길을 나서 강릉(江陵城) 북문 신도에서 제를 올리고 수레에 올랐는데 수레 축이 부러지면서 수레가 망가졌다. 강릉의 부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우리 왕이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며 속삭였다. 유영이 도착하자, 중위부(中尉府)로 가서 심문을 받았는데 중위 질도(郅都)가 왕을 심문하니 왕이 겁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남전(藍田)에 묻었는데 수만 마리의 제비들이 흙을 물어다가 봉분 위에 갖다놓으니 백성들이 가엾게 여겼다.

 

栄最長, 死無後, 国除, 地入于漢, 為南郡.

영최장 사무후 국제 지입우한 위남군.

 

유영은 맏아들로 죽은 뒤, 후계자가 없어 나라는 해제되고 땅은 한나라로 편입되어 남군(南郡)이 되었다.

 

右三国本王皆栗姫之子也.

우삼국본왕개율희지자야.

 

위 세 나라의 첫 왕들은 모두 율희의 아들들이다.

 

<정희 소생의 아들들>

 

魯共王余, 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淮陽王. 二年, 呉楚反破後, 以孝景前三年徙為魯王. 好治宮室苑囿狗馬. 季年好音, 不喜辞辯. 為人吃.

노공왕여 이효경전이년용황자위회양왕. 이년 오초반파후 이효경전삼년사위노왕. 호치궁실원유구마. 계년호음 불의사변. 위인흘.

 

()나라 공왕(共王) 유여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회양왕(淮陽王)이 되었다. 2년 오()나라와 초()나라의 반란이 격파된 다음 효경제 전원 3년에 노왕(魯王)으로 옮겨졌다. 노왕은 궁실과 사냥터를 짓고 개와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늘그막에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말은 잘 못하고 더듬었다.

 

二十六年卒, 子光代為王. 初好音輿馬晩節嗇, 惟恐不足於財.

이십육년졸 자광대위왕. 초호음여마 만절색 유공부족어재.

 

26년 만에 죽고, 아들 유광(劉光)이 뒤를 이었다. (유광이) 처음에는 음악, 수레, 말 따위를 좋아했으나 만년에는 인색해져 그저 재물이 모자라면 어쩌나 걱정했다.

 

江都易王非, 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汝南王. 呉楚反時, 非年十五, 有材力, 上書願撃呉. 景帝賜非将軍印, 撃呉. 呉已破, 二歳, 徙為江都王, 治呉故国, 以軍功賜天子旌旗.

강도역왕비 이효경전이년용황자위여남왕. 오초반시 비년십오 유재력 상서원격오. 걍제사비장군인 격오. 오이파 이세 사위강도왕 치오고국 이군공사천사정기.

 

강도(江都)의 역왕(易王) 유비(劉非)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여남왕(汝南王)이 되었다. 오초(吳楚)의 반란 때 유비는 15세였는데 힘이 넘쳐 오나라를 치겠다는 글을 올렸다. 경제가 유비에게 장군 도장을 주어 오나라를 치게 했다. 오나라가 격파당하고 2년 뒤 강도왕(江都王)으로 옮겨 오나라의 옛 땅을 다스리게 되었고,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황제로부터 깃발을 받았다.

 

元光五年, 匈奴大入漢為賊, 非上書願撃匈奴, 上不許. 非好気力, 治宮観, 招四方豪桀, 驕奢甚.

원광오년 흉노개입한위적 비상서원격흉노 살불허. 비호기력 치궁관 초사방호걸 교사심.

 

(무제) 원광(元光) 5(기원전 130)에 흉노가 한나라를 대거 침입하자 유비는 흉노를 치고 싶다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는 기력이 좋았고, 궁전 짓기를 즐겼으며 사방의 호걸들을 불러들이는 등 교만과 사치가 심했다.

 

立二十六年卒, 子建立為王. 七年自殺. 淮南衡山謀反時, 建頗聞其謀. 自以為国近淮南, 恐一日発, 為所并, 即陰作兵器, 而時佩其父所賜将軍印, 載天子旗以出.

립이십육년졸 자건립위왕. 칠년자살. 회남 형산모반시 건파문기모. 자이위국근회남 공일일발 위소병 즉음작병기 이시패기부소사장군인 재천자기이출.

 

즉위 26년에 죽고, 아들 유건(劉建)이 왕이 되었으나, 7년에 자살했다.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반란을 꾀했을 때 유건은 그 음모를 꽤 알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회남과 가까워 어느 날 일이 터지면 회남에 합병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몰래 병기를 만들고 늘 그 아버지가 하사받은 장군 도장을 찬 채, 천자의 깃발을 달고 나갔다.

 

易王死未葬, 建有所説易王寵美人淖姫, 夜使人迎與姦服舎中. 及淮南事発, 治党與頗及江都王建. 建恐, 因使人多持金銭, 事絶其獄. 而又信巫祝, 使人祷祠妄言. 建又尽與其姊弟姦. 事既聞, 漢公卿請捕治建. 天子不忍, 使大臣即訊王. 王服所犯, 遂自殺. 国除, 地入于漢, 為広陵郡.

역왕미사장 건유소열역왕총미인요희 야사인영여간복사중. 금회남사발 치당여파급강도왕건. 건공 인사인다지금전 사절기옥. 이우신무축 사인도사망언. 건우진여기자제간. 사기문 안공경청포치건. 천자불인 사대신즉심왕.왕복소범 수자살. 국제 지입우한 위광릉군.

 

역왕이 죽고, 장례를 마치기도 전에 유건은 역왕이 총애하던 미인 요희(淖姬)에 눈독을 들여 밤에 사람을 시켜 빈소로 맞아들여 간통했다. 회남의 사건이 발각되어 그 일당을 치죄하는데 강도왕 유건이 꽤나 걸려 있었다. 유건이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많은 금전으로 그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또 무당을 신봉하여 사람을 시켜 기도와 제사를 올리며 (조정을) 저주했다. 유건은 또 여자 형제들과도 간통을 저질렀는데, 일이 알려지자 조정의 공경들이 유건을 잡아다 죄를 다스리자고 했다. 천자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을 시켜, 왕을 심문 하니 왕의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자살했다. 나라를 해체하여 땅은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어 광릉군(廣陵郡)이 되었다.

 

膠西于王端, 以孝景前三年呉楚七国反破後, 端用皇子為膠西王. 端為人賊戻, 又陰痿, 一近婦人, 病之數月. 而有愛幸少年為郎. 為郎者頃之與後宮亂, 端禽滅之, 及殺其子母.

교서우왕단 이효경전삼년오초칠국반파후 단용황자위교서왕. 간위인적여 우음위 일근부인 병지수월. 이유애행소년위랑. 위랑자경지여후궁란 잔금멸지 급살기자모.

 

교서(膠西)의 우왕(于王) 유단은 경제 전원 3년 오초(吳楚) 7국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황제의 아들로서 교서왕이 되었다. 유단은 사람이 잔인하고 포악했고, 또 음위(陰痿, 발기부전) 증상이 있어 부인을 가까이 하면 몇 달을 아팠다. 그리고 총애하는 소년을 시랑으로 삼았는데, 시랑이 된 지 얼마 뒤, 후궁과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 유단은 그를 죽여 없애고 후궁과 그 사이에서 난 아들까지 죽였다.

 

數犯上法, 漢公卿數請誅端, 天子為兄弟之故不忍, 而端所為滋甚. 有司再請削其国, 去太半. 端心慍, 遂為無訾省. 府庫壊漏尽, 腐財物以巨萬計, 終不得収徙. 令吏毋得収租賦. 端皆去衛, 封其宮門, 従一門出游. 數変名姓, 為布衣, 之他郡国.

수범상법 한공경수청주단 천자위형재지고불인 이단소위자심. 유사재청삭기국 거태반. 단심온 수위무자성. 부고괴루진 부재물이거만계 종부득수사. 영리무득수조부. 단개거위 봉기궁문 종일문출유. 수변명성 위포의 지타군국.

 

(유단이) 여러 차례 법을 어기자, 조정의 공경들이 유단을 죽이라고 여러 번 청했으나, 천자는 형제라서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자 유단의 못된 짓은 더 심해졌다. 담당 관리가 다시 그 나라를 삭감하자고 청하여 태반을 삭감했다. 유단은 화가 나서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다. 창고가 허물어져 파손된 재물이 억을 헤아려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관리들에게 세금을 걷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유단은 경호를 모두 물리치고 궁문을 봉쇄한 채, 한 쪽 문으로만 나다녔는데 이름을 바꾸고 평민 복장을 한 채, 다른 군과 나라를 오갔다.

 

二千石往者, 奉漢法以治, 端輒求其罪告之, 無罪者詐薬殺之. 所以設詐究変, 彊足以距諫, 智足以飾非. 二千石従王治, 則漢縄以法. 故膠西小国, 而所殺傷二千石甚衆.

상 이천석왕자 봉한법이치 단첩구기죄고지 무죄자사약살지. 소이설사구변 강족이거간 지족이식비. 상 이천석종왕치 즉한승이법. 고교서소국 이소살상이천석심중.

 

(조정에서 교서로 파견한) ()2천석 관리가 조정의 법에 따라 다스리려 하면 유단은 바로 그 죄를 찾아내어 고발하고, 죄가 없는 사람은 약이라 속여 독살을 했다. 온갖 속임수를 다 짜내어 대응했는데 남의 충고를 물리칠 정도로 강단이 있었고, 자신의 잘못을 꾸밀 수 있을 만큼 꾀도 많았다. 상이나 2천석 관리들이 왕(유단)을 따라 다스리면 한나라 조정은 법으로 그들을 다스렸다. 이 때문에 교서는 작은 나라였지만 죽거나 다친 2천석 관리들이 아주 많았다.

 

立四十七年, , 竟無男代後, 国除, 地入于漢, 為膠西郡.

립사십칠년 졸 경무남대후 국제 지입우한 위교서군.

 

(유단은) 47년 만에 죽었으나, 끝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나라는 해제되고 땅은 조정에 편입되어 교서군이 되었다.

 

右三国本王皆程姫之子也.

우삼국본왕개정희지자야.

 

위 세 나라의 첫 왕들은 모두 정희의 아들이었다.


<가 부인 소생의 아들들>

 

趙王彭祖, 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広川王. 趙王遂反破後, 彭祖王広川. 四年, 徙為趙王. 十五年, 孝景帝崩. 彭祖為人巧佞卑諂, 足恭而心刻深. 好法律, 持詭辯以中人.

조왕팽조 이효경전이년용황자위광천왕. 조왕수반하푸 팽조왕광천. 사년 사위조왕. 십오년 효경제붕. 팽조위인교녕비첨 족공이심각심. 호법률 지궤변이중인.

 

조왕(趙王) 유팽조는 효경제 전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광천왕(廣川王)이 되었다. 조왕 유수(劉遂)의 반란이 평정된 뒤, 유팽조는 광천에서 4년 동안 왕으로 있다가 조나라 왕으로 옮겼다. 15년에 효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유팽조는 사람이 교활하고 아부를 잘했다. 몸을 낮추고 비위를 잘 맞추며 비굴하고 아첨하는 성품이다. 법률에 밝았고, 궤변으로 늘 중도적인 입장이었다.

 

彭祖多内寵姫及子孫. 二千石欲奉漢法以治, 則害於王家. 是以毎相二千石至, 彭祖衣皁布衣, 自行迎, 除二千石舎, 多設疑事以作動之, 得二千石失言, 中忌諱, 輒書之. 二千石欲治者, 則以此迫劫不聴, 乃上書告, 及汚以姦利事.

팽조다내총희급자손. 상 이천석욕봉한법이치 즉해어왕가. 시이매상 이천석지 팽조의조포의 자행영 제이천석사 다설의사이작동지 득이천석실언 중기휘 첩서지. 이천석욕치자 즉이차박겁 불청 내상서도 급오이간리사.

 

유팽조는 총애하는 첩과 자식들이 많았다. 재상과 2천석 관리들이 한나라 법으로 (조나라를) 다스릴 경우, 조왕에게 해가 갈 것이 뻔했다. 이 때문에 재상과 2천석 관리들이 올 때마다 유팽조는 검은 평민 복장을 하고 몸소 나가 맞이했고, 2천석 급 관리의 숙소를 청소하기까지 했다. 일부러 어려운 일들을 만들어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2천석 급 관리가 말실수로 (조정에서) 금기하는 말을 했다가는 바로 기록해두었다가 이 관리들이 법대로 다스리려 하면 이것으로 협박했고, 듣지 않으면 글을 올려 고발했는데 간사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식으로 무고했다.

 

彭祖立五十余年, 二千石無能満二歳, 輒以罪去, 大者死, 小者刑, 以故二千石莫敢治. 而趙王擅権, 使使即県為賈人榷会, 入多於国経租税. 以是趙王家多金銭, 然所賜姫諸子, 亦尽之矣. 彭祖取故江都易王寵姫王建所盗與姦淖姫者為姫, 甚愛之.

팽조립오십여년 상 이천석무능만이세 첩이죄거 대자사 소자형 이고이천석막감치. 이조왕찬권 사사즉현위매인각회 입다어국경조세. 이시조왕가다금전 연소사희제자 역진지의. 팽조취고강도역왕총희왕건소도여간도희자위희 심애지.

 

유팽조가 재위한 50여 년 동안 상이나 2천석 관리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죄를 얻어 떠났는데, 심하면 죽고 가벼우면 형벌을 받았다. 이 때문에 2천석 관리는 감히 법대로 하지 못했다. 조왕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사람을 각 현으로 보내 전매권을 독점하니 조정에 들어오는 세금보다 더 많았다. 이 때문에 조왕의 집에는 금전이 많았다. 하지만 첩과 자식들에 모조리 다 나누어 주었다. 유팽조는 지난 날 강도 역왕이 아끼던 첩이자 유건이 몰래 간통했던 요희를 첩으로 삼아 아주 아꼈다.

 

彭祖不好治宮室禨祥, 好為吏事. 上書願督国中盗賊. 常夜従走卒行徼邯鄲中. 諸使過客以彭祖険陂, 莫敢留邯鄲.

팽조불호치궁실 기상 호위리사. 상서원독국중도적. 상야종주졸행요한단중. 제사과객이팽졸험파 막감류한다.

 

유팽조는 궁실을 짓거나 미신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관리들의 일을 직접 하길 좋아했다. 글을 올려 나라 안의 도적을 감독하겠다고 하여 밤마다 병사들을 데리고 한단을 순찰하고 다녔다. 오가는 사신과 객들은 험악한 유팽조 때문에 한단에 감히 머물질 못했다.

 

其太子丹與其女及同産姊姦, 與其客江充有卻. 充告丹, 丹以故廃. 趙更立太子.

기태자단여기여급동산자간 여기객강충유각. 충고단 단이고폐. 조경립태자.

 

그의 태자 유단(劉丹)은 딸, 같은 배에서 난 누이들과 간통하는 바람에 그의 문객 강충(江充)과 틈이 벌어졌다. 강충이 유단을 고발하여 유단은 그 때문에 폐출되었다. 조나라는 다시 태자를 세웠다.

 

中山靖王勝, 以孝景前三年用皇子為中山王. 十四年, 孝景帝崩. 勝為人樂酒好内, 有子枝属百二十余人. 常與兄趙王相非, :「兄為王, 専代吏治事. 王者當日聴音樂声色.趙王亦非之, :「中山王徒日淫, 不佐天子拊循百姓, 何以称為藩臣!

중산정왕승 이표경전삼년용황자위중산왕. 십사년 효경재붕. 승위인악주호내 유자지속백이십여인. 상여형조왕상비 왈 형위왕 전대리치사 왕자당일청음악성색조왕역비지 왈 중산왕도일음 불좌천자부순백성 하이칭위번신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은 효경제 전원 3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중산왕(中山王)이 되었다. 14년에 효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유승은 사람이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자식이 모두 120명이 넘었다. 늘 형 조왕과 서로를 비난했는데 형이 왕이 되어 관리들이나 하는 일을 한다. 왕이라면 날마다 음악을 듣고 여자를 즐겨야 한다.’라고 했다. 조왕 역시 유승을 비난하길 중산왕은 매일 음탕함에만 빠져 천자를 도와 백성을 돌보지 않으니 어찌 (천자의) 울타리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立四十二年卒, 子哀王昌立. 一年卒, 子昆侈代為中山王.

립사십이년졸 자애왕창립. 일년졸 자곤치대위중산왕.

 

재위 42년에 죽고, 아들 애왕(哀王) 유창(劉昌)이 이었으나, 일 년 만에 죽고 아들 유곤치(劉昆侈)가 중산왕을 이었다.

 

右二国本王皆賈夫人之子也.

우이국본왕개가부인지자야.

 

이상 두 나라의 첫 왕들은 가 부인의 아들이다.



<당희의 아들>


 

長沙定王発, 発之母唐姫, 故程姫侍者. 景帝召程姫, 程姫有所辟, 不願進, 而飾侍者唐児使夜進. 上酔不知, 以為程姫而幸之, 遂有身. 已乃覚非程姫也. 及生子, 因命曰発. 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長沙王. 以其母微, 無寵, 故王卑溼貧国.

당사정왕발 발지모당희 고정희시자. 경제소정희 정희유소피 불원진 이식시자당아사야진. 상취부지 이위정희이행지 수유신. 이내각비정희야. 급생자 인명왈발. 이효경전이년용황자위장사왕. 이기모미 무총 고왕비습빈국.

 

장사(長沙)의 정왕(定王)은 유발의 어머니는 당희(唐姬)인데 원래 정희(程姬)의 시녀였다. 경제가 정희를 불렀는데 정희가 월경 중이라 들어가고 싶지 않아, 시녀 당아(唐兒)를 꾸며서 대신 밤에 들여보냈다. 주상이 취하여 알아보지 못하고 정희로 여겨 동침하여 임신이 되었다. 나중에 정희가 아니었음이 발각되었다. 아들을 낳으니 이 때문에 이름을 발이라 했다. 효경제 전원 2년 황제의 아들로서 장사왕(長沙王)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비천하여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세가 낮고 습한 가난한 나라의 왕이 된 것이다.

 

立二十七年卒, 子康王庸立. 二十八年, , 子鮒鮈立為長沙王.

립이십칠년졸 자당왕용립. 이십팔년 졸 자부구립위장사왕.

 

즉위 27년에 죽고 아들 강왕(康王) 유용(劉庸)이 섰다. 28년에 죽고, 아들 유부구(劉鮒鮈)가 장사왕으로 즉위했다.

 

右一国本王唐姫之子也.

우일굴본왕당희지자야.

 

위 나라의 첫 왕은 당희의 아들이다.

 

<왕아후의 아들들>

 

広川恵王越, 以孝景中二年用皇子為広川王.

광천효왕월 이효경중이년용황자위광천왕.

 

광천(廣川)의 혜왕(惠王) 유월은 효경제 중원 2(기원전 148)에 황자의 신분으로 광천왕이 되었다.

 

十二年卒, 子斉立為王. 斉有幸臣桑距. 已而有罪, 欲誅距, 距亡, 王因禽其宗族. 距怨王, 乃上書告王斉與同産姦. 自是之後, 王斉數上書告言漢公卿及幸臣所忠等.

십이년졸 자제립위왕. 제유향신상거. 이이유죄 욕주거 거망 왕인슴시종족. 거원왕 내상서고왕제여동산간. 자시지후 왕 왕제수상서고언한공경급행신소충등.

 

12년 만에 죽자, 아들 유제(劉齊)가 왕으로 즉위했다. 유제에게는 총애하는 신하 상거(桑距)가 있었다. 그 뒤 상거가 죄를 지어 상거를 죽이려고 하자, 상거가 도망쳤다. 왕은 상거의 가족을 잡아들였다. 상거가 왕을 원망하여 바로 글을 올려 왕 유제가 친누이들과 간통했다고 고발했다. 이 이후 왕 유제는 여러 차례 글을 올려 한나라 조정의 공경과 총애를 받는 신하 소충(所忠) 등을 고발했다.

 

膠東康王寄, 以孝景中二年用皇子為膠東王. 二十八年卒. 淮南王謀反時, 寄微聞其事, 私作樓車鏃矢戦守備, 候淮南之起. 及吏治淮南之事, 辞出之. 寄於上最親, 意傷之, 発病而死, 不敢置後, 於是上聞. 교동강왕기 이효경중이년용황자위교동왕. 이십팔년졸. 회남왕모반시 기미문기사 사작루거촉시수비 후회남지기. 급리치회남지사 사출지. 기어상최친 의상지 발병이사 불감치후 어시상문.

 

교동(膠東)의 강왕(康王) 유기(劉寄)는 효경제 중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교동왕이 되었다가 28년 만에 죽었다. 회남왕이 반란을 꾀했을 때 유기는 이 일을 어느 정도 알고 몰래 전차며 화살촉 등을 만들어 전투 준비를 해 놓고는 회남왕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관리가 회남 사건을 조사하던 중 유기가 언급되어 나왔다. 유기는 주상과 가장 친했기 때문에 이에 마음이 상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 이 때문에 후계자도 감히 정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주상에게 알려졌다.

 

寄有長子者名賢, 母無寵少子名慶, 母愛幸, 寄常欲立之, 為不次, 因有過, 遂無言. 上憐之, 乃以賢為膠東王奉康王嗣, 而封慶於故衡山地, 為六安王.

기유장자자명현 모무총 소자명경 모애행 기상욕립지 위불차 인유과 수무언. 상린지 내이현위교동왕봉강왕사 이봉경어고형산지 위육안왕.

 

유기에게는 맏아들 유현(劉賢)이 있었지만 어머니가 총애를 받지 못했다. 작은아들 유경(劉慶)은 어머니가 사랑을 받았고, 유기도 늘 유경을 세우고 싶었지만 차례가 아니고 잘못도 있던 터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주상이 이를 가엾게 여겨 유현을 교동왕으로 삼아 강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유경은 옛날 형산 땅에 봉하고 육안왕(六安王)이라 했다.

 

膠東王賢立十四年卒, 謚為哀王. 子慶為王.

교동왕현립십사년종 시위애왕. 자경위왕.

 

교동왕 유현이 즉위 14년에 죽자, 시호를 애왕(哀王)이라고 했다. 아들 유경(劉慶)이 왕이 되었다.

 

六安王慶, 以元狩二年用膠東康王子為六安王.

육안왕경 이원수이년용교동강왕자위육안왕.

 

육안왕 유경은 무제 원수(元狩) 2(기원전 121)에 교동 강왕의 아들로서 육안왕이 되었다.

 

清河哀王乗, 以孝景中三年用皇子為清河王. 十二年卒, 無後, 国除, 地入于漢, 為清河郡.

청하애왕승 이효경중삼년용황자위청하왕. 십이년졸 무후 국제 지입우한 위청하군.

 

청하(淸河)의 애왕(哀王) 유승은 효경제 중원 3(기원전 147)에 황자의 신분으로 청하왕(淸河王)이 되었다. 12년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나라를 해제되고 땅은 조정에 편입되어 청하군(淸河郡)이 되었다.

 

常山憲王舜, 以孝景中五年用皇子為常山王. 舜最親, 景帝少子, 驕怠多淫, 數犯禁, 上常寛釈之. 立三十二年卒, 太子勃代立為王.

상산헌왕순 이효경중오년용황자위상산왕. 순취친 경제소자 교태다음 수범금 상상관석지. 립삼십이년졸 태자발대립위왕.

 

상산(常山)의 헌왕(憲王) 유순은 효경제 중원 5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상산왕(常山王)이 되었다. 유순은 황제(무제)와 가장 가까웠고 경제의 막내아들인지라 교만하고 음탕하여 여러 번 죄를 범했지만 주상은 늘 너그럽게 봐주었다. 즉위 32년에 죽었고, 태자 유발(劉勃)이 왕으로 즉위했다.

 

, 憲王舜有所不愛姫生長男梲. 梲以母無寵故, 亦不得幸於王. 王后脩生太子勃. 王内多, 所幸姫生子平子商, 王后希得幸.

초 헌왕순유소불애희생장남탈. 탈이모무총고 역부득행어왕. 왕후수생태자발. 왕내다 소행희생자평 자상 왕후희득행.

 

당초 헌왕 유순에게는 그가 총애하지 않는 첩이 낳은 맏아들 유탈(劉梲)이 있었다. 유탈은 어머니가 총애를 받지 못한 까닭에 그 또한 왕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왕후 수()가 태자 유발을 낳았다. 헌왕에게는 첩이 많았는데 그가 총애하는 첩이 아들 유평(劉平), 아들 유상(劉商)을 낳는 바람에 왕후는 총애를 받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及憲王病甚, 諸幸姫常侍病, 故王后亦以妒媢不常侍病, 輒帰舎. 医進薬, 太子勃不自嘗薬, 又不宿留侍病. 及王薨, 王后太子乃至.

급헌왕병심 제행희상시병 고왕후역이투모불상시병 첩귀사. 의진약 태자발불자상약 우불숙류시병. 급왕훙 왕후 태자내지.

 

헌왕의 병이 심각해지자 총애하는 첩들이 늘 간병했는데, 왕후는 또 이를 질투하여 간병하지 않았고 가더라도 숙소로 바로 돌아왔다. 의사가 약을 올려도 태자 발은 직접 맛을 보지도 않았고 밤을 새워 간병하지도 않았다. 왕이 죽자 왕후와 태자는 그때서야 왔다.

 

憲王雅不以長子梲為人數, 及薨, 又不分與財物. 郎或説太子王后, 令諸子與長子梲共分財物, 太子王后不聴.

헌왕아불이장자탈위인수 급훙 우불분여재물. 랑혹설태자 왕후 영제자여장자탈공분재물 태자 왕후불청.

 

헌왕은 평소 큰아들 유탈을 아들처럼 여기지 않아, 죽을 때도 재물을 나눠주지 않았다. 낭관이 태자와 왕후에게 여러 아들, 맏아들 탈과 재물을 함께 나누라고 했지만 태자와 왕후는 듣지 않았다.

 

太子代立, 又不収恤梲. 梲怨王后太子. 漢使者視憲王喪, 梲自言憲王病時, 王后太子不侍, 及薨, 六日出舎, 太子勃私姦, 飲酒, 博戯, 撃筑, 與女子載馳, 環城過市, 入牢視囚.

태자대립 우불수휼탈. 탈원왕후 태자. 한사자시헌왕상 탈자언헌왕병시 왕후 태자불시 급훙 육일출사 태자발사간 음주 박희 격축 여여자재치 환성과시 입뢰시수.

태자가 즉위해서도 탈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다. 탈이 왕후와 태자에게 원한을 가졌다. 조정의 사신이 헌왕의 장례를 보러 오자, 유탈은 자신이 나서 헌왕의 병중에 왕후와 태자는 간병하지 않았고, 6일 만에 빈소를 나왔으며, 태자 발은 간통, 음주, 노름, 격축 등을 일삼으며 여자들과 수레를 타고 성과 저자를 돌아다니며 감옥에 가서 죄수를 구경했다고 고발했다.

 

天子遣大行騫験王后及問王勃, 請逮勃所與姦諸証左, 王又匿之. 吏求捕勃大急, 使人致撃笞掠, 擅出漢所疑囚者. 有司請誅憲王后脩及王勃. 上以脩素無行, 使梲陥之罪, 勃無良師傅, 不忍誅. 有司請廃王后脩, 徙王勃以家属処房陵, 上許之.

천자견대행건험왕후급문왕발 청체발소여간제증좌 왕우닉지. 리구포발대급 사인치격태략 찬출한소의수자. 유사청주헌왕후수급왕발. 상이수소무행 사탈함지죄 발무양사부 불인주. 유사청폐왕후수 사왕발이가속처방릉 상허지.

 

천자는 대행(大行:대리자) 장건(張騫)을 보내 왕후와 왕 유발을 조사하게 했다. (장건은) 유발과 간통한 자들과 여러 증인들을 체포할 것을 요청했으나 왕(유발)이 그들을 숨겼다. 관리가 체포하길 요구하자 다급해진 유발은 사람을 시켜 그 관리를 때리고 멋대로 조정에서 의심하고 있던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담당 관리가 헌왕의 왕후 수와 왕 유발을 죽이고 청했다. 주상은 왕후 수가 행실이 좋지 않아 유탈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유발에게는 좋은 스승이 없었다고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했다. 담당 관리가 왕후 수와 왕 유발을 폐위시키고 그 가족들을 방릉(房陵)으로 옮길 것을 청하자 주상이 이를 허락했다.

 

勃王數月, 遷于房陵, 国絶. 月余, 天子為最親, 乃詔有司曰:「常山憲王蚤夭, 后妾不和, 適孽誣争, 陥于不義以滅国, 朕甚閔焉. 其封憲王子平三萬戸, 為真定王封子商三萬戸, 為泗水王.

발왕수월 천우방릉 국절. 월여 천자위최친 내조유사왈 상산헌왕조요 후첩불화 적얼무쟁 함우불의이멸국 짐심민언. 기봉헌왕자평삼만호 위진정왕 봉자상삼만호 위사수왕

 

유발은 몇 달 만에 방릉으로 옮겨졌고, 나라는 끊어졌다. 한 달 남짓 천자는 (유발과) 가장 가까웠던 점을 생각하여 담당 관리에게 상산 헌왕이 요절하여 첩들이 불화하고 적자와 서자들이 서로 무고를 일삼는 등 불의에 빠져 나라가 없어졌으니, 짐은 이를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한다. 헌왕의 아들 평에게 3만 호를 봉하여 진정왕(眞定王)으로 삼고 아들 유상에게 3만 호에 봉하여 사수왕(泗水王)으로 삼으라.’라고 명령했다.

 

真定王平, 元鼎四年用常山憲王子為真定王.

잔정왕평 원정사년용상산헌왕자위진정왕.

 

진정왕 유평은 무제 원정(元鼎) 4(기원전 113)에 상산 헌왕의 왕자로서 진정왕이 되었다.

 

泗水思王商, 以元鼎四年用常山憲王子為泗水王. 十一年卒, 子哀王安世立. 十一年卒, 無子. 於是上憐泗水王絶, 乃立安世弟賀為泗水王.

사수사왕상 이원정사년용상산헌왕자위사수왕. 십일년졸 자애왕안세립. 십일년졸 무자. 어시사린사수왕절 내립안세제가위사수왕.

 

사수(泗水)의 사왕(思王) 유상은 무제 원정 4년에 상산 헌왕의 왕자로서 사수왕이 되었다. 11년에 죽고, 아들 애왕(哀王) 유안세(劉安世)가 즉위했다. 11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이에 주상은 사수왕의 후손이 끊어진 것을 가엾게 여겨 안세의 동생 유하(劉賀)를 사수왕으로 삼았다.

 

右四国本王皆王夫人児姁子也. 其後漢益封其支子為六安王泗水王二国. 凡児姁子孫, 於今為六王.

우사국본왕개왕부인아후자야. 기후한익봉기지자위육안왕 사수왕이국. 범아후자손 어금위육왕

 

이상 네 나라의 첫 왕들은 모두 왕 부인 아후의 아들들이다. 그 후 조정에서 그 방계 자손들까지 육안왕, 사수왕으로 삼았다. 아후의 자손으로 지금까지 모두 여섯 왕이 있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高祖時諸侯皆賦, 得自除内史以下, 漢独為置丞相, 黄金印. 諸侯自除御史廷尉正博士, 擬於天子. 自呉楚反後, 五宗王世, 漢為置二千石, 丞相, 銀印. 諸侯独得食租税, 奪之権. 其後諸侯貧者或乗牛車也.

태사공왈 고조시제후개부 득자제내사이하 한독위치승상 황금인. 제후자제어사 정위정 박사 의어천자. 자오초반후 오종왕세 한위치이천석 거 승상은인. 제후독득식조세 탈지권. 기후제후빈자혹승우거야.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고조 재위 때 제후들이 세금을 거뒀고 내사(內史) 이하를 모두 자신들이 임명했다. 조정에서는 승상 만을 두어 황금으로 된 도장을 사용했다. 제후들은 또 어사, 정위정, 박사를 스스로 임명하니 천자를 방불케 했다. 오초(吳楚)의 반란 이후 오종이 왕이 되었을 때는 2천 석 급의 관리들은 모두 조정에서 파견하고, 승상은 상으로 바꾸어 부르는 한편 은 도장을 사용하게 했다. 제후들은 세금 수입만 가졌고 권력은 빼앗겼다. 그 뒤 제후들 중 가난한 자들은 소가 끄는 우차를 타는 정도였다.’